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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29강. 할례 언약과 새 이름 (창 17:1-16)

by coroa 2021. 3. 15.

죄인은 무슨 일이든지 자기 입장에서 해석을 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항상 나는 선한 쪽에 세워두고서 나와 뜻을 달리하면 악으로 규정하는 습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지도 없어요.

 

세상에는 선과 악이 정해진 게 없어요.

나에게 잘해주면 선이고 나에게 해를 끼치면 악이에요.

내 유익에 따라서 수시로 바뀌어요.

오늘 좋다가도 내일 원수가 되어요.

친구이든, 부부이든, 형제이든, 부모이든, 나에게 잘해주면 선이고 나에게 못해주면 악이에요.

이것은 우리의 사고가 자기 유익에 따라서 선과 악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가 신을 섬기는 데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나에게 잘해주면 신으로 대접을 하고,

나에게 잘 해주지 않으면 신으로 대접하지 않아요.

그래서 인간들은 다 자기를 지켜주는 수호신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이러한 사고가 바꿔치기 당하는 것으로 주어집니다.

내 중심으로 판단하던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바꿔치기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는 당황합니다.

 

구원이란? 주체가 바꿔치기 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예수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옛 언약 아래서는 말씀을 지키는 주체가 나였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안에서는 예수님이 주체가 됩니다.

 

옛 언약 아래서 성경을 보면 내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루어 갈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새 언약 안에서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어떻게 이루셨지 라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내 행함을 요구하지만,

새 언약은 예수님의 행함을 요구해요.

 

구약은 실패의 역사에요.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 하다가 망하였어요.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인간은 안 되더라는 것을 고발함과 동시에 왜, 메시야가 와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메시야의 필요성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길을 예비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을 일컬어 선지자와 율법의 마침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율법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뭔가요?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지요.

율법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오셔야지만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언약의 내용이 후사와 땅에 관한 것입니다.

이 때 아브람은 땅도 없었고 자식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후손을 하늘에 별처럼 많게 해 준다고 합니다.

 

이건 아브람더러 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홀로 횃불 사이로 지나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와서 언약을 하셨으니까 아브람이 그 언약을 지켜 가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니에요.

그 반대에요.

 

모든 언약은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 가는지를 아브람을 증인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언약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이런 식으로 일을 하겠다는 통고였지 아브람더러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자기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15장에 언약을 받았음에도 16장에 와서는 자기들의 방식으로 자식을 낳는 일을 벌인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마엘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아들을 낳는 것을 원치 않아요.

하나님이 낳아 주셔야 해요.

그런데 아브람은 자기가 아들을 낳아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을 찾아오십니다.

16장과 17장은 10년이 지난 후가 됩니다.

성경 상으로 보면 하나님이 10년 동안 침묵하고 계시다가 나타나신 겁니다.

 

17장 1절을 봅시다.

 

창 17:1절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스마엘을 낳은 지 10년 후에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아브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는 전능한 자라 너는 내 앞에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전능한 하나님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주로 창조의 일을 하실 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창조란? 언약하신 것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의 창조를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이 창세전에 언약하신 것을 이루는 장소에요.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를 흑암에서 빛을 불러내는 구속사적인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럼 아브람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가지고 언약하신 일을 창조의 방식으로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낳고 10년 후에 찾아 온 것입니다.

 

이 때 아브람의 나이가 99세이고 사래의 나이가 89세입니다.

사래의 몸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경수가 끊어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여자가 월경이 없다는 것은 자녀를 생산하는 능력이 상실하였다는 뜻입니다.

 

월경이 있던 젊었을 때도 아이를 낳지 못하였는데 월경이 끊어진 상태라면 더 더욱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합니다.

이걸 또 아브람 식으로 해석을 하면 자기 쪽에서 완전한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건 그런 말이 아니에요.

 

‘완전하라’ 는 말은 ‘네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제 ‘내 말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완전해집니까?

그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죄인입니다

죄인은 아무리 갈고 닦아도 완전해지지 않습니다.

완전해질 수도 없습니다.

 

죄인이 완전해지는 방법은 딱 한가지 입니다.

죽으면 됩니다.

죄인이 죽고 죄 없는 사람이 살아나면 됩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완전한 자로 만들어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엘 샤다이’라고 합니다.

‘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샤다이’라는 말은 ‘능력을 행하는 자, 일을 이루는 자, 성취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내가 너를 복에 조상으로 만든다 하였으니까 그 일을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서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해 주는가 하면 우리더러 이 성경의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다는 것을 좀 알라는 것입니다.

 

쉬운 얘기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어머니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맛있는 밥상 차려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식들은 일어나서 맛있게 먹으면 됩니다.

자기가 다시 요리를 하겠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밥상의 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엄마, 참 맛있네요! 이런 요리는 우리 엄마 밖에 할 수 없어’ 하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음식을 차려준 엄마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우리더러 뭘 달라 하시겠습니까?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 앞에 뭘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로부터 얻어먹고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주세요.

구원도 주고, 믿음도 주고, 은혜도 주세요.

우린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읍해서 고마움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강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받은 사람은 반드시 토해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비같이 부어 주어도 그걸 깨닫는 것은 사람마다 달라요.

깨닫는 것만큼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 몸은 정직해요.

받은 것만큼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마치 먹은 것만큼 배설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으면 토해낼 것도 없습니다.

받은 것이 없는 자가 토해낼 땐 자기 것을 토해내겠지요.

자기 것을 토해내는 것을 종교성이라고 합니다.

자기 것을 토해낼 때는 뭐가 같이 나올까요?

자기 자랑이 나오겠지요.

내가 이렇게 했다는 자기 의입니다.

 

종교생활의 끝에는 자기 자랑이 있지만,

신앙생활의 끝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가 있어요.

교회 안에서 일한 것을 자랑하면 그 사람은 종교생활하고 있는 것이고,

감사로 행하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함을 원치 않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일한 행함을 원하십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격발한 행함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거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모두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형으로 주어진 것은 그 명령을 우리더러 지켜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우리로 하여금 죄인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예수님이 대신 지켜 주셨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1장을 봅시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잘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하지요.

무엇에 순종치 않은데 가두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말씀입니다.

 

왜, 가두었나요?

긍휼을 베풀려고 가두었어요.

순종하면 긍휼을 베풀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긍휼을 주시고자 해요.

긍휼은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자에게만 필요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불 순종가운데 가두어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을 베푸시는 겁니다.

 

죄인이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죄인은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겁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않으면 어찌 됩니까?

저주 받아야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다 저주 받아야 하는데 그 중에 얼마를 긍휼이 여겨주시기로 했어요.

그게 성도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은혜 받을 자와 은혜 받지 못하는 자로 나누어져 있어요.

은혜로 대하심을 받는 자들과 법으로 대함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은혜로 대하심을 받는 자들은 불순종하지만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법으로 대함을 받는 자들은 법대로 집행을 해서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그 어떤 말씀 앞에서도 우리가 뭘 할까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금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보셔야 합니다.

내가 뭘 할까를 고민하면 그것은 종교 생활이 되어 버립니다.

종교생활의 끝에는 반드시 자기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찾아 오셔서 내가 이런 식으로 일을 할게!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통해 일을 하려면 아브람이 어떤 존재로 있어야 할까요?

자기 가능성으로 있어야 합니까?

아니면 자기 불가능성으로 있어야 합니까?

자기 불가능성으로 있어야 겠지요.

 

아브람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75세 때 찾아 오셔서는 왜 즉시로 아들을 주지 않고 99세까지 기다리게 하셨습니까?

 

왜, 사래의 경수가 끊어지고 나서야 이삭이라는 아들을 주시는 것입니까?

이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언약은 하나님 방법으로 이루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의 후손을 주시겠다고 했을 때는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생산해내겠다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방식은 창조의 방식입니다.

 

창조의 방식이라는 것은 ‘없음에서 ~ 있음으로’ 불러내고 죽은 자를 살리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셨다면 반드시 언약을 받은 아브람의 상태는 불가능의 상태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가능성이 제로인 상태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할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할례가 뭡니까?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내면 뭐가 됩니까?

영적인 의미에서는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고자가 되는 것입니다.

 

고자는 자식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아브람을 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건 아브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너는 이제 자식을 생산할 수 없는 자야’

‘너는 이제 남자가 아니고 여자야’

‘너는 죽은 자야’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하는 아브람을 죽이신 것입니다.

아브람 살아서 낳은 자식이 누구입니까?

이스마엘 입니다.

근데 이스마엘은 유업을 얻을 자가 아니라고 쫓아냈어요.

 

이스마엘은 종이 낳은 자식이에요.

종은 유업이 없어요.

족보에 못 올라가요.

아들이면서도 족보에 올리지 못하는 자식을 사생아라고 합니다.

 

사생아란? 살았는데 죽은 자들이에요.

이게 언약 밖에 있는 이방인들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족보는 본 부인으로부터 낳은 자식만 올라갑니다.

첩에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족보에는 안 올려요.

부모님의 허락 하에 합법적으로 얻은 아내가 본 부인입니다.

 

이게 뭘 상징하는지 아세요.

예수님을 상징해요.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낳아진 자들만 구원을 해 주세요.

예수님이 하나님이 합법적으로 보내신 구원자에요.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다 절도요 강도라고 하지요.

왜 그런가요?

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그 속에는 구원이 없어요.

 

세상 종교는 첩과 같아요.

첩이 낳은 아들은 종이에요.

종은 유업이 없어요.

그래서 세상 종교로 아무리 갈고 닦아도 구원 받을 수가 없고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첩에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구원자를 예수님만 보냈어요.

그래서 예수가 낳은 자들만 하나님 족보에 올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족보에 올라가는 자들에게 천국을 유업으로 주십니다.

그래서 천하만국에 구원 얻을 이름은 예수 이외 주신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낳아져야 합니다.

인간의 방식으로 낳은 자는 인간의 아들이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원하는데 그 아들은 하나님이 낳는 것입니다.

 

왜, 내 자식이 귀하게 여겨집니까?

분명히 내 자식이 다른 자식과 객관적으로 비교해보면 못나고 떨어지는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럼에도 부모 입장에서는 내 자식이 다 천재 같잖아요?

그건 그 자식 속에 내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요셉이가 한 살이 지났습니다.

요즘 동영상 보내오는 것을 보면 그 엄마에게는 요셉이가 천재라니까요.

요새는 뭘 들고서 전화하는 흉내를 내곤 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놀랩니다.

자기네 고모도 요셉이가 천재라는 겁니다.

 

자식 키우다 보면 자기 자식이 천재로 안 보인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다 천재로 보이지요.

그걸 객관적으로 보면 천재 아니에요.

그런데도 꼭 내 눈에는 천재로 보인다니까요.

내 새끼는 다 예뻐 보이고 다 잘나 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왜 그래요?

내 새끼니까요.

남의 새끼는 안 그래요.

 

하나님이 그렇다니까요.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낳은 자식이어야만 하나님의 자식이고 그래야 어화둥둥 내 사랑이 되지 남의 자식은 아무리 잘해도 싫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찾아 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낳게 하는데 아브람의 방식으로 낳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낳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낳으려면 아브람에겐 가능성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남자로 있으면 안 됩니다.

여자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생산해 낼 수 없는 자가 된 그 때 낳아져야 아브람이 낳은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낳은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아브람의 몸을 통하고 사래의 몸을 통해 낳았다 할지라도 그 자식은 아브람이나 사래의 자식이 아닌 하나님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찾아 오셔서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아브람에게 통보 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 할 테니 넌 그저 가만히 구경만 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나쁜 것이 나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믿음이라는 것은 기다림이라고 했습니다.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얻고 하는 것들은 누가 계획하고 이루어 갑니까?

하나님이 하시잖아요.

 

성경에 보면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었다고 합니다.

창세전이 언제입니까?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만들어 지기 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하신 것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로 낳아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로 낳아지는 것을 누가 계획했습니까?

하나님이 했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계획표대로 이루어지고 진행이 되겠지요?

그럼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도 우리의 원함이나 우리의 시나리오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하나님의 원함으로 하나님의 시나리오대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은 과거 수천 년 전에 자기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 할 때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 하는 그 사건을 예수를 통해 재현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는 그 시간까지 하나님께서는 간섭을 하시는 겁니다.

구약에서 수천 년 전에 어린양을 잡는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아무 때나 예수님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다 그 시간이 있다니까요.

 

여러분들이 드라마를 보시면 알잖아요.

배우들이 자기 맘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감독의 지시 하에 시나리오대로 움직이잖아요.

그러면 이 만물을 운행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무턱대고 주먹구구식으로 하겠어요?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세 지말에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복음을 깨닫는 것도 다 하나님이 정한 때에 따라 된 것입니다.

때가 되어서 우리의 귀를 열고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때에 창세전 언약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만남도 우연이 아니에요.

창세전에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계획 하에 만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남을 귀히 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어려우면 드라마를 보세요.

그러면 쉬워집니다.

만나게 했다가 또 헤어질 때도 있겠지요.

드라마의 특성이 있는 겁니다.

 

제가 늘 그러잖아요.

길동무라고 생각을 하라고…

누가 교회에 오시면 ‘아, 길동무 하라고 보내주셨구나’ 라고 여기세요.

길동무 하라고 보내주신 기간 동안 감사히 길동무 하면 됩니다.

그러다 떠난다면 또 하나님께서 떨어지게 하시는구나 하고 그동안 잘 지냈습니다, 하고 안녕히 가세요, 하면 됩니다.

간다고 뒤에 대고 욕하지도 말고 섭섭해 하지도 마세요.

또 다시 만나게 될 지 어떻게 압니까?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지금 보세요.

창세기 12장에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17장까지 오면서 계속해서 아브림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일을 하시잖아요.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갔는데 거기서 기근이 드니까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애굽에 가서 아브람이 아내를 팔아먹는 짓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또 앞서서 일을 무마시켜서 바로를 혼내고 재물을 끌고 나오게 하십니다.

그것으로 잘 살면 되는데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언약을 세우니까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방법대로 이스마엘을 낳아 버립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았다고 버리지 않았어요.

우리 생각 같으면 아브람을 버리고 다른 자를 택하면 될 터인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십 년 동안 침묵했다가 또 찾아오십니다.

왜 찾아오십니까?

이는 포기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은 스토커입니다.

지독한 스토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우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지식들이 말 안 듣는다고 해서 갖다 버립니까?

아니지요.

말 안 들어도 안 버려요.

부모는 자식을 버릴 수가 없어요.

매를 들지언정 갖다 버리지는 않아요.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가 그래요.

하나님이 아브람을 낳았어요.

그래서 포기 하지 않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사사건건 간섭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했으니까 하나님이 바라는 아브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달달 볶는 것입니다.

아브람 입장에선 싫은 겁니다.

 

오늘 본문에도 우리가 다 읽진 않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네 후손을 줄께 하니까 아브람이 비웃으면서 하는 말이 ‘내가 백 세나 되고 마누라는 경수도 끊어져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 무슨 아이를 낳는단 말입니까’ 하면서 ‘그냥 집에 있는 이스마엘이나 잘 키울 랍니다’ 라고 하면서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대적하고 불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가 자꾸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죄가 드러날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점점 더 크게 부어지지요.

이게 나중에는 유구무언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어서 유구무언의 자리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독히도 말 안 듣는 아브람을 어디까지 끌고 가십니까?

이삭을 바치는 데까지 가지요.

 

아브라함의 최고의 신앙의 꽃이 어디인가요?

이삭을 바치는 사건입니다.

이삭을 아브람이 바칩니까?아브라함이 바칩니까?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럼 이삭을 아브라함이 바친 겁니까?

하나님이 바치게 만든 것입니까?

하나님이 바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이 재물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 사건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도 그 자리까지 가게 하십니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다 그 자리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해 가십니다.

 

우리기 지금 요만큼이라도 교회에서 봉사하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다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린 누굴 섬기고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에요.

자기 밖에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남을 이해하는 자리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린 원래 이해하고 용서하고 참아주는 인간이 아닙니다.

오로지 나 밖에 알지 못하는 이기적인 자들입니다.

우리는 본래 나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자기 안에 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 법은 항상 자기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내가 하는 일은 항상 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내가 옳습니다.

부부간에도 보세요

항상 내 주장이 옳잖아요.

우리 본성은 본능적으로 그렇게 움직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간섭하다 보면 어느 순간 ‘미안합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내가 변하고 잘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난 17장을 보세요.


17장의 주어가 ‘내가’ 입니다.

17장 속에서 ‘내가’ 라는 말이 13 번 정도 나옵니다.

 

2절의 초두에 보면,

 

17:2절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누가 언약을 세운다고 합니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운다”고 합니다.

여기서 ‘내가’ 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이 너로 심히 번성케 한다고 하지요.

번성케 하는 분이 누구신가요?

하나님입니다.

 

그 다음 4절에 보면,

 

4절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는데 그 내용이 뭔가요?

열국의 아비가 되는 언약입니다.

이 얘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그래서 전능하신 ‘엘 샤다이’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엘 샤다이’가 뭐라고요?

하나님께서 반드시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능입니다.

 

우리는 전능이라 하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발휘해서 모든 일을 다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전능하심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가시는 분이라는 의미로 ‘전능’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원함도 아니고 하나님의 원함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엘 샤다이’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는 말입니다.

나는 너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43장에 보면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라고 합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네가 불 속에 들어가도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고 물속에 잠겨도 물결이 너를 엄몰치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를 들어서 이번 세월호 사건으로 비교를 해봅시다.

지금 세월호 사건을 보면 배가 침몰되어서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예수 믿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도 언약을 심어 놓으셨겠지요.

 

야곱에게 한 말을 비교해 보면 네가 물속에 들어가도 물결이 너를 엄몰치 못한다고 했는데 그 말은 물의 세력이 너를 죽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육의 몸을 죽이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고 그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의 세력을 죽이기 위해서 죽음을 주는 것입니다.

이게 역설인데 잘 이해하세요.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다 죽음이라는 유전 인자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얘기해 보세요.

믿는가? 안 믿는가?

안 믿습니다.

 

그들은 죄인이라 하면 수긍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왜 죄인이냐고 하지요.

그런데 죄인의 특징이 뭔가 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물어 보세요.

당신은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그럼 다 죽는다고 해요.

여기에 반발할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그럼 그렇게 말하세요.

사람이 왜 죽는 줄 아느냐?

죄 때문이야?

죄가 죽음을 몰고 왔기 때문에 죽는 거야?

그러니 네가 죄인인 거야?

그럼 그 사람이 아멘 그럴 줄 아세요.

아니에요.

그래도 말 안 들어요.

 

사람이 죄인을 인정하든 안하든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쁘냐? 안 나쁘냐? 가 아니고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으로 태어난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반드시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내는 방식이라니까요.

이게 또 어려운데,,

 

암에 걸리면 죽지요.

이제는 의학이 발달해서 고친다는 그런 의미로 접근하지 말고 암을 불치병이라고 생각하세요.

암을 못 고친다고 합시다.

그 암을 어떻게 하면 죽입니까?

암을 죽여야 암을 고치지요.

 

암을 어떻게 죽입니까?

암이 걸린 사람을 죽이면 암도 죽어요.

사람이 죽으면 암도 같이 죽어요.

 

죄가 그래요.

죄는 사람을 죽이는 불치병이에요.

이건 그 어떤 의술로도 못 고쳐요.

그럼 죄를 어떻게 없앱니까?

죄인을 죽이면 죄도 죽는 것입니다.

죄인이 죽는 것은 죄도 함께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죄인을 죽게 하였는가 하면 죄를 없애기 위함입니다.

죄인을 죽임으로서 죄도 죽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 가세요.

죄 아래서 태어난 사람을 죽이고 죄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죄 아래서 난 자를 먼저 죽이는 과정을 밟고 그 다음에 죄 없는 자로 살려내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물 세례와 성령 세례로 나타난 것입니다.

물 세례는 죽이는 것이고 성령 세례는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항상 죽음이 먼저 주어지고 나중에 살려내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옛 언약과 새 언약이에요.

옛 언약은 율법으로서 율법은 죽이는 거에요.

아담 안에서 난 사람을 죽이고 예수 안에서 다시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로 오신 예수는 우리를 십자가에 끌고 가서 죽이는 일을 하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 식으로 이해해 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 오셨습니다.

아브람이 지금 어떤 인간입니까?

자기 가능성으로 살고 있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자기 가능성으로 이루고자 하는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을 살려 놓으면 계속해서 자기 가능성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접근할 것입니다.

이런 놈을 살려 놓으면 하나님의 일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죽이는 것으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할례란? 죽이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행한 할례 속에 담긴 의미는 하나님이 아브람 속에 있는 새 사람을 끄집어내기 위한 것입니다.

마치 씨앗 속에 생명을 끄집어내기 위하여 씨앗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할례를 육적 몸을 벗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을 봅시다.

 

골 2:11절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보세요.

우리가 그 안에서 할례를 받았다고 하지요.

그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할례는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할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우리도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할레를 뭐라고 하나요?

육적 몸을 벗는 것이라고 하지요.

이는 아담 안에서 난 몸을 벗어 버리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는 것을 말해요.

신약에 할례가 있습니까?

없지요.

할례는 구약적 이야기인데

그 구약의 할례를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해석을 하는가 하면 신약의 세례로 이해를 합니다.

 

신약의 세례가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것을 세례라고 하지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것을 사도 바울은 할례로 얘기하고 세례라고 합니다.

그것을 육적 몸을 벗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씨 속에 있는 내용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씨를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사과 씨 속에 사과나무가 있는데 그 사과나무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씨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약을 줬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이 우리 속에는 내용으로 담겨져 있는데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내용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우리 육의 몸을 죽이는 일을 합니다.

 

우리 몸이 죽어야 우리 몸 안에 있는 언약의 아들이 튀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아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에요.

우리 안에는 지금 예수님의 씨가 있습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께서 우리 몸에다가 전부 자기 씨를 심어 놓은 것입니다.

우린 모두 여자가 되어 예수의 씨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씨를 배태(胚胎)하고 사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우리를 죽음에 넘겨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은 그 자리에 예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삶 속에 적용을 해 봅시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남을 배려하고 사는 인간이 아닙니다.

나는 나 밖에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덮쳐 오면 나를 죽이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나를 죽이게 되면 내 안에서 예수가 나옵니다.

예수의 성품이 나오고 예수의 마음이 나온다니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안하던 짓을 하게 된다니까요.

 

우리가 교회에 봉사하고 헌금하고 하는 모든 일들이 우리 스스로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린 원래 못하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 오니까 우리가 안하던 짓을 하더란 말이지요.

그 안하던 짓은 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의 것을 뽑아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꼬라지가 이래도 우리는 우리 안에 다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 안에 있는 이 예수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죽음의 구조 속으로 집어넣는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찾아 와서 언약의 후손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 언약의 후손은 창조의 방식으로 만들어 집니다.

창조의 방식은 “없음에서 ~ 있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가능성으로 있는 이 아브람은 죽여야 되는 겁니다.

이 아브람이 살아 있는 한 늘 자기 가능성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일을 한다고 했습니까?

 

“없음에서 ~ 있음으로” 일을 하세요.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지금 아브람은 자기 가능성으로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아브람을 죽여야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가능성으로 나오는 자들을 죽임으로 불가능한 자로 만들어 버리고 그 불가능한 속에서 가능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생산하는 방식은 창조의 방식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창조의 방식으로 만든다는 것은 곧 인간의 가능성으로 구원받는 길을 차단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하나님께서 없음에서 있음으로 창조했듯이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그냥 공짜로 구원을 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우리는 자꾸 아브람처럼 자기 가능성으로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의 가능성을 죽여서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산 자를 죽게 만들고,

높은 자를 낮게 만들고,

있는 자를 없음으로 만든다니까요.

이게 아브람의 할례입니다.

 

아브람에게 할례를 행하고 새 이름을 주는 것은 자기 가능으로 사는 ‘아브람’을 죽여서 불가능한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을 개명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꿔줍니다.

이름을 바꿔 준다는 것은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아브람’은 자기 힘으로 사는 자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힘으로 자입니다.

비록 새 사람 아브라함이라 할지라도 육신의 몸을 가지고 있는 한은 계속해서 아브람이 가지고 있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자기 가능성으로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되게 불가능한 인간으로 자꾸 쳐버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을 해봅시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찾습니까?

내게 힘이 있고 가능성이 있을 때 입니까?

아니면, 내가 어렵고 힘들 때 입니까?

어렵고 힘들 때입니다.

 

김 집사님의 어머님이 몸이 편찮으신데도 오늘 교회에 제일 먼저 오셨습니다.

제일 먼저 오셔서 목소리 높여서 기도를 하시는 겁니다.

건강하셨으면 하셨을까요?

아니지요.

내 몸이 불편하면 하나님을 찾는다니까요.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한사람도 그렇게 나와서 울며 기도하는 사람 없습니다.

결국 여러분들이 아직 살만하다는 얘기입니다.

언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가장 가까이 갑니까?

내게 아무 것도 없을 때 입니다.

 

내가 진짜 가능성이 없고 사면초가(四面楚歌) 됐을 때 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내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우린 그걸 의지하려 하겠지요.

그리고 하나님을 안 찾지요.

그게 인간의 생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힘을 빼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한 절대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찾았던가?

우리는 잘 살수록 교회를 멀리하고 어려울수록 교회를 가까이 했어요.

 

지금도 그래요.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 인간이라니까요.

언제 가장 신앙이 좋게 나타나는가 하면 망하고 어렵고 아플 때입니다

신랑이 자꾸만 핍박을 하고 그래야 신앙이 자라나지 그저 좋아라하면 신랑 따라 놀러 다니기 바쁩니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인간은 짐승이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다니까요.

그게 인간이에요.

아니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은 우리들의 꿈이 다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와 가지고 내 꿈을 이뤄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꿈 이뤄 줘 보세요.

우리가 여기 있겠습니까?

멀리 멀리 갔더니~ 찬송처럼 멀리 멀리 간다니까요.

그래서 또 망해야 돌아오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꾸 힘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 힘을 가지면 우리는 독자적으로 살려고 한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부족한 사람의 입을 통해서 그게 아니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독자적으로 사는 인간이 아니고 내 힘으로 살아야 하는 인간이야’

‘너는 나로 인하여 사는 자로 내가 언약을 위하여 너를 선택했는데 왜 너는 자꾸만 너의 인생을 살려고 하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원대로 우리 뜻대로 우리 인생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제가 늘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제 기도를 안 들어 주신 것을 감사한다고 말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들어 주셨으면 전 이런 목회 안 합니다

큰 교회에서 교주 노릇하겠지요.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보고 목사님 손 한 번만 잡아도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하게 만들어 버렸겠지요.

여러분들은 지금 내가 손 잡아 줘도 아무 감동을 안 하잖아요

서울의 조00 목사는 한 번 만나려면 1년 전에 예약을 하고 비서를 통해야 한다는데 제가 그런 목사 안 된게 다행이지요.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영광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이걸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 자꾸 자기 가능성을 꺾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건 우리가 스스로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꾸 길을 막으시고 차단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왜 이렇게 내 인생이 안 풀리느냐고 생각하시면 하나님이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감사히 여기세요.

 

저는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많이 좀 간섭해 주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간섭안하시면 여러분들 다 떠나간다니까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없으면 안한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간섭의 손길이 늘 떠나지 않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 여러분들이 부자 되고 성공하기를 바라지 않아요.

인간적으로 보면 바라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 신앙은 다 떠난다니까요.

좋은 직장 들어가 보세요.

그 직장 짤릴까봐 교회 오는 것보다 직장이 더 우선순위가 됩니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가 하나님 뜻을 쫓아갈 수 없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간섭을 하는 겁니다.

아브람을 할례 받게 하는 겁니다.

아브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제는 너 힘으로 살지 말고 내가 공급해주는 것으로 사는 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할례를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옛 사람 아브람을 할례로 죽이고 새 사람 아브라함으로 살려 놓은 것은 아브라함의 인생을 이제부터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진다면 아브라함은 땡 잡은 건데 아브라함은 안 믿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여호수아에게 나타납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자기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싸움을 행하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때 하나님이 군대 장관으로 나타나서 신발을 벗으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를 업고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네가 들어가서 싸우는 게 아니고 여호와가 군대 장관이 되어서 내가 너를 업고 싸울 테니까 너는 그냥 전리품만 챙기면 된다는 것입니다.

싸움은 여호와가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여호수아가 가만 논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어떤 적군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적을 이기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만 나가면 백전백승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가지 않고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 하면 백전백패입니다.

결국 여호수아에게는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싸움입니다.

믿음의 싸움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너를 업고 이 세상 살게 해 줄게! 라는 것이 믿어지면 세상에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산다고 해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나에게 언약을 주셨으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나와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 같으면 내가 죽는 길에 들어가든지, 사는 길에 들어가든지 다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좋은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현실이 내가 바라는 대로 안 나오면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불안하고 두렵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안 믿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늘 함께 하고 동행한다는 이 사실들을 알려주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일들은 우리 인생에 자꾸 실패케 하셔서 그 실패 속에서 하나님을 찾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믿음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발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끄집어 내놓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을 달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가 광야라니까요.

스스로 살 수 없는 환경에 집어넣으면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시겠지, 먹여 주시겠지…

 

그렇게 산다면 그 사람은 편안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 없는 사람은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매일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지는 것을 보고도 못 믿어요.

못 믿으니 이틀 치씩 모으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셨으니 내일도 주시겠지 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편하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겁니다.

하루치만 걷어 오면 되는데 내일 혹시 하나님이 늦잠자서 안줄까봐 이틀 치를 걷어 오면 여지없이 썩어 버리잖아요.

 

우리는 그렇게 늘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고 합니다.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인생을 책임질 수가 없어요.

아브람을 통해서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인생을 네가 책임지려 하지 마라’

‘너는 네 인생을 책임질 수 없느니라’

‘네 인생은 내가 책임을 져주는 것이다’ 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사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까 나를 승승장구 영웅호걸 만들어 주겠지…’하는 사고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내 편 들어 줘서 나를 세상의 영웅을 만들어주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자꾸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간섭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스스로를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내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해주신다고 했으니 이제부터는 자식을 많이 생산해 주실거야’ 라고 했겠지만 하나님은 역으로 일을 하십니다.

자식을 하나도 주지 않는 것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자식을 생산할 수 없는 그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십 년이라는 그 침묵의 시간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힘을 빼는 작업의 시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뭡니까?

‘하나님과 싸우는 자’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라니까요.

늘 하나님과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싸워서 우리는 맨 날 환도뼈가 부러지는 일들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환도뼈가 부러졌을 때 지팡이 하나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가능성이 있고 힘이 있어 보세요.

하나님을 안 믿어요.

내 힘을 믿어요.

하나님은 내 힘이 없을 때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고난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감춰진 축복인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은 고난이지만 실제 그 내용 속에는 복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찾아 오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심어 줍니다.

언약을 심어 준다는 것은 이 땅에서는 뽑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을 찾아 오셔서 언약을 할 때 어떤 언약을 하십니까?

그 때는 아브람의 자식이 하나도 없을 땐데 네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4대 만에 돌아오는 것으로 약속을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후손을 그 구조 속으로 집어넣어야겠지요.

구원(언약)이라는 것은 이방에서 빼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이 애굽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애굽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낼 때 우리 속에 언약을 담아 놓고 보냈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이었나요?

이 세상에서 빠져 나오는 것입니다.

출애굽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을 빠져 나가려 하지 않고 도리어 여기서 정착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정착하지 못하도록 이 세상이 싫은 일들을 발생을 시키는 것입니다.

아~ 빨리 세상 떠나고 싶다는 일들을 당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면서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는 모든 일들이 역설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라니까요!

우리가 자식을 키울 때 자식에게 물어 보세요.

부모의 간섭을 사랑으로 여기는 자식이 있을까요?

없어요.

 

자식들 입장에서는 부모가 간섭 안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가 그 자식을 간섭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계속해서 간섭을 하게 되지요.

간섭을 하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러면 애들은 ‘사랑 좀 하지 마세요’

그냥 ‘날 좀 내버려 두라’고 하지요.

그러면 어느 부모가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둡니까?

매를 들지요.

 

사랑은 집착이고,

죄는 무관심입니다.

자식에 대한 무관심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해 보면 알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그곳에 내 마음이 가 있잖아요.

사랑을 안 해보셨어요?

사랑을 해 보세요.

그러면 내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 그 속에 가 있다니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잊겠느냐?

어미가 자기 자식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못 잊는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고 간섭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복 주고 복 주리라 하셨으면 반드시 우리를 복 받는 자리로 인도해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언약입니다.

그 언약이 우리에게 다가와 이 땅에서 구현이 될 때는 역설적으로 우리 힘을 빼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할례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할례는 옛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죽여 놨으면 살려야지요.

 

이제부터는 죽은 자를 살리는 창조의 방식으로 일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것 같은데 또 살아나는 것입니다.

세상에 망해서 죽은 것 같은데 또 살아서 일을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부활의 방식으로 우리를 간섭해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죽고 싶은 순간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잖아요.

이 세상 살아서 뭐하나 이런 생각 들잖아요.

그렇다고 염세주의가 되라는 건 아닙니다.

 

현실을 보면 암담하잖아요.

자식이 말을 듣습니까?

마누라가 말을 듣습니까?

남편이 말을 듣습니까?

그렇다고 하는 일이 잘되기를 합니까?

 

엊그저께 ‘안녕하세요’ 라는 프로그램을 보니까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고민을 들고 나온 사람의 여자 친구가 만나기만 하면 화를 낸다고 합니다.

남자 친구는 여친을 만날 때마다 언제 핵폭탄이 터질지 몰라서 불안해서 못살겠다는 겁니다.

잘해줘도 신경질을 내고, 못하면 못한다고 신경질을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 친구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원인이 나왔습니다.

 

여자 친구는 콜센터 직원이라고 합니다.

콜센터에 걸려 오는 전화가 술 먹고 주정부리며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가 보니까 스트레스가 쌓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만만한 남친 한데 그걸 다 푸는 것입니다.

남한테는 못 풀잖아요.

사랑하는 사람한테만 푸는 겁니다.

왜냐, 사랑하기 때문에…

전 그걸 보면서 은혜를 받았어요.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온갖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구조로 우리를 몰아가요.

그래 놓고서는 우리가 받은 스트레스를 남친인 예수님께 풀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세요?

 

세상에서 스트레스 받은 것을 여러분의 신랑 되신 예수님께 가서 풀으라는 겁니다.

‘하나님 못살겠습니다!’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정말 이럴 겁니까?’

스트레스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가 도망갈 품은 예수님의 품 뿐입니다.

인간은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게 복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과 저주는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고,

하나님과 떨어지는 것을 저주라고 합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가까이 합니까?

내가 어렵고 힘들고 내가 가능성이 없을 때, 믿을 것이 없을 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자식도 소용없고, 남편도 소용없고, 아내도 소용없고, 친구도 소용 없고, 아무도 소용없을 때 그 때 우리는 주님을 찾습니다.

 

그 때가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을 때 입니다.

그럴 때를 표상학적으로 ‘정오’라고 합니다.

낮 열두시 사건입니다.

 

그 때가 우리의 그림자가 가장 작을 때 입니다

내 모습이 가장 작을 그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정오 사건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찾아 갈 때도 낮 열두 시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없을 때가 주님과 가까울 때 입니다.

내 흔적이 없을 때 입니다.

달리 말해서 내가 믿을 구석이 있을 때는 가장 하나님과 멀어질 때이고,

내가 믿을 구석이 없을 때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울 때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종말에 주님의 심판이 임할 때 너희가 겨울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육적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겨울이 뭐에요?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입니다.

그렇게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질 때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물질이 풍요롭고 하나님 없이도 내가 살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겨울이 되지 않도록 간섭을 하시는 겁니다.

내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을 자꾸 힘을 빼는 식으로 간섭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날마다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할례요?

죽임당하는 할례입니다.

내 가능성으로 살려고 하는 나를 날마다 죽이는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간섭해 가신다니까요.

너는 네 힘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힘으로 살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우리의 계획과 뜻한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세요.

하나님이 이토록 날 사랑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절대로 버리시지 않습니다.

내 것이라 찜한 그 순간부터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중간에 가다가 탈락시키는 그런 구원이 아닙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비록 세상에서 우리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마음으로 사세요.

왜요?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 속에 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집요하게 자기 백성을 간섭하십니다.

그 간섭하심이 지금 우리를 이 자리에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적으로 조금 살기 어렵고 힘들더라도 그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구나! 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 땅에서 다뤄가실 때는 역창조의 방법으로 다뤄가십니다.

있음에서 없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리고 세상 것의 없음 속에서 하늘에 것을 있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내 것을 빼내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이런 역설을 아시고 비록 내 삶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극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싸인으로 아시고 그 속에서 감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정낙원 목사-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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