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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28강. 아브람과 하갈 그리고 이스마엘 (창 16:1-16)

by coroa 2021. 3. 11.

 

마가 13 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28강. 아브람과 하갈 그리고 이스마엘 (창 16:1-16).-

-.정낙원 목사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을 하십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는 먼저 자기 백성들에게 언약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런데 이 언약이 우리 눈에는 기이해 보여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도무지 믿기지도 않고 육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상식 밖으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을 준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게 하기 위함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힘으로 이루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바로 그 이야기를 해줍니다.

 

창세기 12장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가나안에 들어오자 자식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13장에서도 롯과 분가를 하고 난 후에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창세기 15장에서는 땅과 후손을 주겠다는 것을 제물을 쪼개 놓고 구체적으로 언약을 맺습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이 지나가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목숨을 걸고 이루겠다는 표현입니다.

당시에 약속을 체결 할 때 이러한 방법으로 했습니다.

그러니 아브람도 하나님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의미를 압니다.

아~ 이 약속은 하나님이 하나님 이름을 걸고 지켜내겠구나,,, 라고

그런데 16장에서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식을 낳는 일을 벌입니다.

 

사래가 자기 몸 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 때가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와서 산지 10년 후입니다.

아브람 나이 85세 사래 나이 75세 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래가 왜? 자기 몸종 하갈을 통해서 아브람에게 아들을 낳아 주고자 했느냐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그 당시 사회적 배경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당시에는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하나님께 저주 받은 여자로 취급당하여서 이혼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풍습이 있었습니다.

옛날 조선시대에는 여자가 자식을 낳지 못하면 칠거지악이라 해서 이혼을 당하곤 했습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들이 범죄하자 하나님이 하와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주셨습니다.

여자는 아이를 낳음으로서 죄 값을 치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여자들에게는 자식을 생산하는 것이 가장 큰 자랑이고 영광이었습니다.

반면에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래에게는 엄청난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행간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사래가 자기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아브람의 아들을 낳고자 한 것이 사래의 충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5절을 보세요.

 

5절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따지면서 이 일은 모두가 당신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여호와도 알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네 후손을 줄 것이다’ 라고 약속했습니다.

십 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람 입장에서는 맨 날 자기 아내만 쳐다보겠지요.

아내에게 무슨 잘못이 있지는 않은가 무언의 압력을 넣기도 했겠지요.

그러니까 사래가 자기 몸 종을 줘서 가문을 이으려고 이런 일을 벌인 것입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괜찮다고 다독였으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원인이 아브람에게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러한 정황이 드러나 있습니다.

사래가 자기 몸종인 하갈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줬더니 하갈이 잉태를 합니다.

그러자 아이를 잉태한 하갈이 자기 주인인 사래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사래가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그래서 사래가 아브람에게 덤비는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당신 때문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래가 아브람에게 따지는 겁니다.

 

평상시에 아브람이 자식 못 낳는다고 사래를 구박했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그런 압력을 느끼니까 씨받이를 둬서라도 아들을 낳으려 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몸종을 통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내 아이가 됩니다.

사래가 하는 행동은 그 당시 풍습으로 보면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래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된 배후에는 아브람이 단초를 제공한 것입니다.

 

쉬운 말로 아브람이 지금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니까 인간의 방법으로 자식을 낳은 겁니다.

자기 쪽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입니다.

 

여러분, 약속이 뭔가요?

장차 해 주겠다는 거잖아요.

지금 당장 줄 것 같으면 약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장차 주는 것이기 때문에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 약속을 받은 사람은 믿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의 근본이에요.

 

신앙이라는 것은 기다림입니다.

신앙을 믿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기다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준 것은 약속을 기다리라고 준 겁니다.

 

이걸 우리 구원 문제로 이해해 봅시다.

우리의 구원은 장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언약적인 면에서는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창세전에 이미 끝났어요.

그러나 역사 속에서는 이루어가고 있어요.

현재 진행형이에요.

예수님이 재림하면 이루어집니다.

이 땅에서는 구원이 진행형이고 미래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3 시제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미 창세전에 얻은 것이기 때문에 ‘과거 시제로 구원을 얻었다’ 고 하고,

그러나 우리 몸으로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야 하기 때문에 ‘현재 시제로 구원을 이루라’ 고 하고,

또한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여야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미래 시제로 구원을 이룰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룰 것이다’ 라고 하니까 우리의 구원이 미흡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리고 불확실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뿐입니다.

믿음을 받으면 우리의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완료 된 것임을 알아요.

 

이걸 믿으라고 믿음을 주셨어요.

믿음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앞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것이 믿어집니다.

믿어지면 조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구원을 우리 쪽에서 이루라고 하면 조급해지지만,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신다는 약속이 믿어지면 절대 조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약을 사는 우리에게 참 고맙고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하셨던 것이 신약을 통해서 만개하여 펼쳐진 모습을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작과 끝을 보고 있잖아요.

창세기 1장을 통해서 역사의 문을 열어 놓고,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끝에 가서는 역사의 문을 닫아 버리잖아요.

우린 그걸 알아요.

 

우리의 구원은 마치 2002년도 월드컵 4강 경기를 지금 케이블 TV 같은 곳에서 다시 볼 때 느긋하게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조급해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TV에서는 지금 이탈리아하고 경기를 하고 있지만 이미 오래전에 끝난 경기입니다.

우리가 이긴 경기입니다.

 

우리는 이미 2002년도에 이긴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땅콩 까먹으면서 느긋하게 보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래요.

창세전에 이미 끝난 것입니다.

그걸 다만 지금 이 땅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받으면 이게 믿어져요.

그래서 믿음을 받은 사람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염려하지 않아요.

‘혹시 짤리면 어떨까’ 두려워하지 않아요.

 

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이미 끝난 구원을 보라는 것입니다.

‘애들아! 너희는 구원 받았다!’

그러니 ‘세상에서 쫄지 말고 담대히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러니 ‘너희는 담대하라’ 그러셨잖아요.

이게 믿어지면 편해요.

하지만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조급해지는 것입니다.

 

제발 구원을 위해서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가 신경을 쓴다고 해서 없던 구원이 주어지고,

신경을 안 쓴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을 빼앗아 가고 그러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할 몫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몫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조급해지지 않아요.

 

오늘 아브람 사건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입니다.

아브람은 아직까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자기 방법으로 하나님 언약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람에게 초점이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가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걸 ‘아브람을 ~ 아브라함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지금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나중에 가면 ‘아브라함’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자리에 까지 나아갑니다.

어떻게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느냐 하면 믿음으로 했어요.

이걸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다’고 했습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첨부터 하나님을 믿었느냐?

아니에요.

우리도 아브람처럼 안 믿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 간섭을 받으면서 살아가다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끝에 가면 그냥 포기해요.

‘다 주의 뜻이지’ 라고 말입니다.

 

옛날 같으면 어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방방 뛰었는데,,

이젠 무덤덤해요.

그 만큼 내성이 생긴 겁니다.

죽이든 살리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만큼이라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다 산전수전 겪으면서 우리의 힘 빼는 일들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를 알려주고 있어요.

이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니까 계속해서 하나님과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약과 같이 성령을 보내줘서 믿어지게 하고 그런 게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약속만 준 것입니다.

그 약속을 주니까 인간들 입장에선 그 약속을 자꾸만 자기 쪽에서 이루어가는 것으로 이해를 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얘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은 언약을 하신 분이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세기 15장에서 언약을 맺을 때 그 언약을 지킨다는 의미로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이 홀로 지나가신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숨을 걸고 아브람에게 한 언약을 지켜내겠다는 것입니다.

또 이 언약은 하나님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브람은 그냥 구경만 하면 됩니다.

기다리면 되어요.

가장 좋은 신앙은 그냥 구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을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뤄 가시고,

하나님께서 성취해 가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바라보고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레미야 33장 2절을 봅시다.

 

렘 33: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여호와가 일을 행하고,

그리고 그것을 만들고 성취한다고 하지요.

무슨 일입니까?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신 일이 뭡니까?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였다가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 구원과 같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바벨론 같은 이 세상에 보냈어요.

이 세상이 바벨론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포로로 잡혀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일을 창세전에 언약 하셨어요.

창세전에 하신 언약을 이 세상에서 구현해 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언약에 의하여 다스려가고 있어요.

지금 하나님이 창세전에 죄 아래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다고 하신 그 언약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가고 계세요.

이게 믿어집니까?

 

우리의 구원이 창세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게 믿음이 없으면 안 믿어져요.

그래서 자기 백성들에게 믿으라고 믿음을 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관념으로 믿어요.

말은 믿는다고 하는데 실제 보면 믿는 게 아니에요.

언행심사를 보면 나타나요.

 

아브람이 만약에 하나님이 자식을 준다는 것을 믿었을 것 같으면 이런 짓을 했을까요?

안했겠지요.

사래가 몸종을 주어서 아들을 낳으라고 해도 기다리자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사래가 하갈을 첩으로 주자 얼씨구 하면서 취합니다.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들을 준다는 약속을 안 믿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모습이 곧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도 아브람처럼 믿고 있어요.

말로는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 실상은 자기 힘으로 살고 있어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어려움이 닥치면 기도하기 보다는 내 힘으로 해결하고자 하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내가 진짜 악당이구나,,

이런 악당이 살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용서이구나,

그래서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 긍휼을 구하기보다는,

앞으로는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그러면서 자기의 행동을 뜯어 고치는 것으로 나아가잖아요.

 

물론 잘못하면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말아야지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쁜 짓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기 행동을 고쳐서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 지고자 하는 심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우리가 살면서 잘못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 꼬라지를 먼저 살피잖아요.

 

우리가 토해낼 수 있는 게 뭡니까?

열심 아닙니까?

‘내가 이래선 안 되지…’

그래서 우리는 안하던 기도도 하고 그럽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것 밖에 안돼요! 왜요?

우리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못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행동에서 발생된 것을 가지고서 ‘믿음이 있다’ ‘믿음이 없다’ 로 판단합니다.

내 행동에서 좋은 게 발생된 것이 있을 때는 그것을 근거 삼아서 ‘내가 지금 신앙이 괜찮구나’, 하고 만일에 그런 행동이 없을 경우에는 스스로 믿음이 없다고 여기잖아요.

속된 말로 착하게 살면 당당하고 나쁘게 살면 기죽잖아요.

 

착하면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하고,

나쁘게 살면 하나님 앞에서 숨어 버리잖아요.

좋다고 생각하는 행위를 하면 떳떳하고,

나쁜 짓을 했다고 하면 교회도 안 나오잖아요.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결국 자기 행위입니다.

 

예전에 우리가 그랬어요.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고 할 때 아내가 교회 가자고 하면 야~ 내가 술 먹고 담배 피우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느냐?

나중에 술 담배 끊으면 나갈게, 그랬어요.

 

술 담배 피우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술 담배 끊으면 괜찮은 것이라고 여겼어요.

이게 얼마나 웃깁니까?

하나님 앞에선 우리가 술 담배 안 해도 죄인이에요.

술 먹어도 죄인이고 안 먹어도 죄인이에요.

그런데 우린 술 먹으면 죄인이고, 술 안 먹으면 죄인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술 끊으면 교회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행위에서 죄다 아니다 를 판단해요.

그러다 보니까 수치스러운 일을 하면 교회를 안 와요.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수치인데,,

우린 우리 행동으로 수치다 아니다 를 판단해요.

그러니 맨 날 자기 행동에 따라서 울다가 웃다가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맨 날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롤로코스트를 타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방법으로 아들을 낳습니까?

조급해서 그래요.

아브람은 착각을 한 것입니다.

자기가 낳으면 하나님 준다고 한 그 아들이 되는 줄 알았어요.

아니에요.

 

하나님이 준다고 한 아들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낳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 방법으로 아들을 낳아봐야 아브람이 낳은 아들이지 하나님이 준 아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후손을 준다고 했을 때,

아브람은 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방식대로 아들을 주시겠구나, 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기다리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아들을 낳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아브람은 조급한 겁니다.

사래는 늙어가지요.

아들 생길 기미는 보이지 않지요.

그러니 자기들 방법을 동원해서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람 방식으로 낳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 아니에요.

 

이것을 우리의 구원 이야기로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구원주시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이건 우리의 원함이나 조건과 상관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구원해 줄게’ 라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아브람을 하나님이 찾아 와서 ‘내가 네 아들 줄게’ 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구원 속에는 우리 것은 하나도 없어요.

내 노력도, 내 열심과 충성도, 내 간절함도 없습니다.

구원은 그냥 하나님이 원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이 믿어진다면 구원을 위해서 염려나 근심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염려를 합니다.

언제 염려 합니까?내 꼬라지를 보았을 때입니다.

그것도 착하게 살았을 땐 안 그래요.

나쁘게 살았을 때 그래요.

 

‘야! 이거 구원이나 받겠나’,

‘이러다 짤리는게 아닌가’,

이건 우리의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요.

 

살다가 보면 어려울 수도 있어요.

실패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살다가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 보세요.

‘야~ 이거 내가 하나님에게 버림당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왜?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지’

그러면서 우리는 내 쪽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것들을 끄집어냅니다.

그게 우리의 열심입니다.

안 하던 철야기도도 하고 금식도 합니다.

 

기도와 금식이 좋아서가 아니라 기도와 금식을 수단으로 하여서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하잖아요.

이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런 것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에요.

우린 그럴 수밖에 없어요.

우린 이런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우린 매사 믿음으로 살지 않고 자기 행위로 살아요.

구원도 그렇게 지켜내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한 그 구원의 약속들을 믿음으로 살면 간단한데,

안 믿어지니까 자꾸 내 쪽에서 믿음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행함이에요.

열심과 충성으로 하나님과 거래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얘기는 우리 쪽에서 예수를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우리더러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가 믿어지게 해줘서 구원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이해하세요.

 

인간들에게는 본능적으로 구원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요.

이게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구원을 받고 싶은데 독자적으로 구원을 못 받으니까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자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그럼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예수 믿습니다,’

‘예수 믿어 줄 테니 날 구원해 주세요’ 라고 해요.

실제로 바깥에 나가서 전도 할 때 그러잖아요.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

그러면 ‘난 바빠 나중에 믿을 게’ 그러잖아요.

‘생각해 보고 믿을게’ 그러잖아요.

 

예수를 믿고 안 믿고를 누가 결정합니까?

우리가 해요.

천국 가고 싶으면 예수 믿고 가기 싫으면 안 믿어요.

이게 인간들의 종교성입니다.

 

내가 구원받고 싶으니까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인간 쪽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어지게 해 주어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더러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방식이 예수를 믿어지게 해줘서 구원을 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을 봅시다.

 

롬 1: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요.

복음이 뭡니까?

예수 믿는 거잖아요.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의에요.

 

하나님이 예수 믿는 것을 옳다고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아무나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믿음으로’ ~ ‘믿음에 이르게 한다’ 고 합니다.

 

두 믿음이 있습니다.

처음 ‘믿음으로’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알아보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습니다.

이걸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예수님이 비록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있지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이 믿어지게 해 주신 믿음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입니다.

이걸 영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만이 영접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하는 ‘믿음으로’가 바로 하나님이 자기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이에요.

그 믿음이 예수를 믿는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우리 안에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서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고 합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고,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입으로 ‘예수님 당신은 나의 주님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믿는다는 그 믿음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입니다.

신자는 이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에요.

이걸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믿음에 조상입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이 아니에요.

아브람이 안 믿었는데 하나님이 ‘믿음으로 그를 구원해 주었다’ 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었다’ 라고 하면 그건 아브람의 행위가 되어 버려요.

“나 믿었잖아요!” 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러면 믿음이 은혜가 아니고 행위가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아브람 속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자꾸만 드러나게 하세요.

불순종하는 것으로 드러나요.

 

그게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낳는 사건입니다.

이스마엘은 불순종의 산물이에요.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증거물이에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람을 내치지 않고 끝까지 구원하십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이 아브람을 믿음으로 간섭을 하여서 구원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걸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쳤다’ 라는 식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게 아니에요.

믿음이 바치게 하셨어요.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니고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구원을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하는데 그 믿음으로 구원하는 것이 성립이 되려면 아브라함은 계속 안 믿는 쪽으로 나와야 한다니까요.

이 역설을 아셔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는 아브라함이 믿었으니 우리도 믿자! 고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고 행위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아브람의 불신 사건은 반드시 일어나 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불신을 고발하기 위하여 아브람과 사래가 작당하여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는데 말리지 않고 가만히 지켜만 보고 계신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에게 떨어지면 이 언약 자체는 은혜이기 때문에 그 은혜가 드러나기 위해서 계속해서 법이 충돌을 일으켜 줘야 합니다.

그 법이 충돌을 일으켜 줘야 은혜가 은혜로 드러납니다.

지금 이 말이 이해되세요?

 

여러분들이 행여 예수를 믿었다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만일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생각하면 그 믿었다는 것을 의로 내 세우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난 예수를 믿는데, 당신은 왜 예수 안 믿느냐고 해요.

그래서 나처럼 예수 믿고 천국 가자고 합니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왜 예수를 안 믿을까요?

그건 예수가 안 믿어지기 때문에 안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믿게 하셨어요.

못 믿게 하셨어요.

 

예수 믿기 싫어서 안 믿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믿지 못하게 하니까 안 믿는 것입니다.

안 믿는 게 아니고 못 믿어요.

 

그들도 믿고 싶어요.

그런데 안 믿어진다니까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게 안 믿어져요.

예수 믿어서 천국 간다는 것이 안 믿어져요.

그래서 안 믿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창세전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믿게 되어 있어서 그래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만 예수를 믿게 하세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왜 예수 안 믿느냐’ ‘넌 왜 믿음이 없느냐’ 라고 타박하지 마세요.

그 사람이 믿음 없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이런 착각들을 자꾸 깨트려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본능적으로 우리에게서 발생된 것을 믿고자 하는 믿음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쪽에서 발생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근거로 삼아 안심을 하게 됩니다.

 

지금 하갈을 보세요.

하갈이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지 마세요.

내가 하갈입니다.

하갈이 지금 잉태를 하니까 자기 주인을 멸시하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물어 봅시다.

여러분들이 언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성을 훼손하는 일들이 나타납니까?

열심이 특심할 때 입니다.

열심은 나쁜게 아닙니다.

좋은 거에요.

그러나 내가 만든 열심이 나쁜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열심은 하나님을 자랑하는데, 내가 만든 열심은 나를 자랑해요.

자기 잘난 걸 주장해요.

내가 만든 열심이 특심하면 특심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지게 됩니다.

내 자랑만 남아요.

 

우리는 우리가 만든 열심을 의로 삼아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덤비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당하면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라고 덤벼요.

 

마치 욥처럼 말입니다.

욥은 잘못이 없어요.

그런데 재앙을 당합니다.

그러자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재앙을 주느냐’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라고 따지는 것 자체가 자기 행위를 의지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뭘 잘못해서 벌 받으면,,

그럼 잘하면 상 받아야 하겠네요.

우리가 그러잖아요.

잘한 것이 있으면 복 받는다고 여기잖아요.

잘했는데 재앙을 당하면 욥처럼 따져요.

이게 죄에요.

 

인간들은 상선벌악 하는 하나님을 알아요.

인과응보 하는 하나님을 알아요.

그러나 아니에요.

 

하나님은 상 줄 자에게 상 주고 벌 줄 자에게 벌을 주십니다.

이건 우리 행위로 상 받을 짓이 있고, 벌 받을 짓이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 맘대로 상을 주고 벌을 준다는 것입니다.

마치 야곱과 에서처럼 말입니다.

 

야곱은 그냥 상을 받았고, 에서는 그냥 벌을 받았어요.

그들의 행위가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어요.

하나님이 야곱에게 ‘너 사랑받는 거 다 내 은혜다’ 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야곱보다 훨씬 잘난 에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사랑 받는 것을 자기 행위에서 찾으면 안 되어요.

 

솔직한 얘기로 교회 안에서 누가 제일 문제를 일으킵니까?

자기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은혜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안 일으켜요.

 

목사한테 누가 덤빕니까?

목사한테 잘해 준 사람이 합니다.

‘목사님 섭섭합니다’ 라고,,,

 

왜 섭섭하다고 합니까?

해 준게 있으니까 그래요.

안 했으면 섭섭하단 말을 하지 않아요.

모두가 잘해 준 것이 있으니까 하갈처럼 의가 되어서 덤비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하지만 이왕이면 잘해 주고 덤비세요.

이왕이면 열심히 하세요.

그리고 목소리 높이세요.

그러면서 죄가 드러나야지요.

아무 것도 안하고 너는 피리 불어라, 우린 내 맘대로 할란다 하지 마세요.

 

‘하갈이 되지 말자!’ 하지 마세요.

우리가 하갈입니다.

우리는 하갈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갈 이야기를 사도 바울은 신약에서 어떻게 해석합니까?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바울은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가지고 약속으로 난 자와 율법으로 난 자로 해석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구약의 이스마엘과 이삭의 사건을 가지고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석을 해보니까 하갈이 낳은 아들은 율법 아래 있는 종이고, 사라가 낳은 아들은 은혜로 낳아진 아들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은혜로 낳은 이삭은 우리로부터 나아지는 게 아니라 위로부터 나아져야 낳아지는 자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는 땅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난 자가 아니고, 하늘 예루살렘으로 난 자인데, 그 하늘 예루살렘에 있는 어미가 사라 라는 것입니다.

 

사라가 스스로 아이를 낳았어요, 못 낳았어요?

못 낳았지요.

사라는 분명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인데, 하나님이 낳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낳아 주셨어요

그래서 사라가 하늘 예루살렘으로서 우리의 어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삭이 사라가 낳은 자식입니까?

하나님이 낳은 자식입니까?

하나님이 낳은 자식이지요.

이것이 언약의 후손입니다.

 

언약의 후손이 되려면 인간의 열심과 의가 절대 개입이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라가 이삭을 낳을 때 경수가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 낳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인간의 의와 열심이 개입되지 못하게 자꾸 밀어내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내 가능성을 가지고 이루어 가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가능성을 빼내는 작업을 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넌 해봐야 아무 것도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신앙은 ‘난 아무 것도 아니구나’…

‘구원을 위해선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구나’…

결국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그냥 은혜로 받는 것뿐이구나’ 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한테 얻어먹는 거지 노릇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철칙이 뭡니까?

자존심이 없어야 합니다.

자존심이 있으면 거지 노릇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은혜로 받고 사는 것은 내 자존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가능성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라는 놈은 항상 우리 몸을 볼모로 해서 내 가능성을 자꾸만 부추깁니다.

그래서 기껏 해내는 것이 이스마엘을 낳는 것입니다.

그 이스마엘이 뭡니까?

종이에요.

집에서 쫓겨나는 자입니다.

유업을 이을 자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마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고 싶은 것은 ‘너희들이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것은 안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갈의 잉태함을 통해서 인간들의 열심과 의는 반드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보세요.

아브람이나 사래나 하갈이나 평화롭게 잘 살았어요.

그런데 이스마엘 하나가 개입이 되니까 집 안이 풍비박산이 납니다.

인간이 낳았던 열심과 의는 결국 하나님 집의 평화를 깨트리는 촉매가 되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듭니다.

교회 안에서 아무도 일을 안 한다면 싸울 일이 없을 것입니다.

너도 안하고 나도 안 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열심에 특심을 가지고 일을 했을 때는 그 특심이 계속해서 어떤 파동을 일으킵니다.

‘일을 한 자’와 ‘일을 안 한 자’로 구분이 됩니다.

그럼 일을 한 사람이 그것을 근거로 일을 안 하는 사람들을 타박하면 평화가 깨어집니다.

 

복음은 내 쪽에서 뭘 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그런 인본주의 사고들을 깨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였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어렸을 땐 부모님이 뭔가를 하면 꼭 자기 돕겠다고 하지요.

그게 돕는 겁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일을 망치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는 자기가 돕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가 이것을 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이러면 꼭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럼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요!’

성경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예수를 보라는 것입니다.

일을 하든 안하든 거기에 신경 쓰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건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열심이 담겨져 있어요.

이걸 행함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믿음과 행함이에요.

산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동반하게 되어 있어요.

 

믿음은 추상명사에요.

보이지 않아요.

실체가 없어요.

그런데 이게 사역동사로 어떤 일을 일으키세요.

 

믿음은 하늘에 것인데 이게 이 세상으로 오면 사역 동사로 바뀌어요.

우리 몸으로 오면 어떤 일들을 행하게 하세요.

믿음이 살아서 어떤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에요.

그러므로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도는 반드시 복음이 담고 있는 행위들을 토하여 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는 것도 참 믿음은 그 믿음이 품고 있는 것을 삶으로 토하여 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열심을 내면 ‘주께서 간섭을 해서 저렇게 하는구나’ 하고 고맙고 감사해야 합니다.

멀쩡히 잘하는 사람보고 행위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산 믿음은 반드시 살아서 움직여요.

움직이지 않으면 죽었듯이 행함이 없는 것은 죽은 거에요.

 

두 가지 행함이 있습니다.

 

인간이 행한 것과,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 있습니다.

믿음이 일으킨 행함은 자기 자랑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서 행한 것이 아니고 자기 쪽에서 격발이 된 것을 가지고 한 것이라면 반드시 하갈과 같이 자기가 한 일을 근거로 해서 목을 세우는 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격발이 돼서 그 은혜가 여러분들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끄집어내는 일들이 많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 열심과 내 충성을 가지고 이것으로 하나님께 뭔가 유익이 되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일이 반드시 나로 하여금 목을 세워서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 속에 믿음이 없는 사람은 내가 한 일이 없을 때는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도 내가 한 일이 있으면 뱀처럼 고개를 치켜듭니다.

죄인이 속성이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 가실 때 우리 방식이 얼마나 하나님의 언약을 훼손하는지를 자꾸 고발하십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우리의 열심과 충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운다는 것을 알려주는 식으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내가 너를 복의 조상으로 만들고’,

‘네 후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해준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벌이시는 일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데 그것은 창조의 방식으로 일을 합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을 하십니다.

‘없음에서 있음이’ 되려면 내 쪽에서는 어떤 근거가 나오면 안 됩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의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모습으로 서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자꾸만 밀어내는 식으로 일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시간 논리에 빠지면 조급해져요.

조급함을 가지게 되면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으로 가지고 너희의 그 조급함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우게 된다는 것을 고발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은혜를 줍니다.

오늘 이만큼 은혜 받았으면 ‘오늘 내 분량이 이것 밖에 안 되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밥을 퍼줄 때 그 아이의 양에 맞게 밥을 퍼 주잖아요.

그러듯이 하나님께서도 자기 백성을 다뤄가는데 각각 믿음의 분량이 있고 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생명의 자람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 때는 어린 아이같이 행동하세요.

그게 하나님 앞에 옳음입니다.

 

어린아이 때는 어린아이같이 행동하는 것이 옳음이지 어린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면 안 됩니다.

유치원 다니는 어린아이가 밥상에 앉아 ‘우리나라 경제가 어떻고’ 고민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돈 버는 건 아빠가 벌고 아이는 차려준 밥상을 보고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하면 됩니다.

그게 최고의 효도입니다.

그런데 유치원 갈 생각은 안하고 아빠를 돕겠다고 껌팔이 통 만들어서 지하철에서 껌 팔아 돈 번다고 하면 안 되지요.

 

지금 아브람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 창조의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면 아브람은 창조의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 앞에서는 자기가 내어 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그게 원칙인데 아브람은 아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까 자기 쪽에서 자꾸 내어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 앞에 인간의 열심과 인간의 의가 근거가 됐을 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나 안 하나 본능적으로 가치를 챙기려 하고, 내 의를 챙기려하는 인간의 습성이 있습니다.

 

모든 죄는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합니다.

‘나 있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나 있음’을 자꾸 증명하는 쪽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창조의 방식으로 하십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하십니다.

솔직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언제 가까이 나아갑니까?

나의 어떤 의미가 사라졌을 때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수요일 날 예배를 마치고 잠깐 차를 마시면서 어떤 집사님이 얘기를 하시는데 참 좋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배에서 탈출하라고 하면 안합니다.

배가 침몰해야 탈출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율법적인 신앙들을 깨트리십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율법이 편합니다.

그런데 이 율법 신앙은 마치 배가 침몰하듯이 나에게 어떤 사건이 하나 닥쳐서 파선 되어야 거기서 튀어 나오게 됩니다.

 

그 사건이 어떤 사건일까요?

나라는 존재의 의미가 완전히 부정하는 쪽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탈출을 하게 됩니다.

내가 부정당하는 이 경험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가 한 것은 결국 쓰레기 같은 것뿐이구나’,

자기 안에 갈등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내가 지금까지 믿었던 것은 내 열심을 믿은 것이지 하나님의 언약을 믿은 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그런 사건들을 자꾸 일으켜 주십니다.

그런 사건들이 일어날 때 마다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모퉁이돌에 좋은 글이 하나 올라 와서 저희 블로그에 올려놨습니다.

여러분들 한 번 꼭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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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그 때는 쉬웠습니다.

내 열심과 충성을 가지고 소리만 지르면 됐습니다.

이게 기다 아니다 하면 됩니다.

그 때는 자기 기준을 가지고 누구 비판하고 정죄하고 목소리만 높이면 됐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 목소리를 잡아 가두게 하고 손 든 것을 내리게 하고 비판하던 입을 비판하지 못하게 하고 자꾸 그런 일들을 발생을 시키십니다.

그런 일이 발생될 때 내가 지금까지 목소리 높인 것은 나에게서 나온 그 의를 근거로 해서 그랬구나를 깨닫게 만드십니다.

그러고 나서 결국 너는 너의 근거로 해서 목소리를 높였는데 너의 의를 하나님께서 차압을 시키면 결국 우리는 없음이 됩니다.

그럴 때 주님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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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다루어가시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아는 것은 쉽습니다.

복음대로 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법 아래 있는지 은혜 아래 있는지 간단한 방법이 있어요.

그가 어떤 것을 토해 내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법 아래 있는 사람은 살리는 복음을 가지고도 죽이는 일을 하고,

반대로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죽이는 율법을 가지고서도 살리는 일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보세요.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했습니다.

복음적인 말을 한다고 해서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 적인 내용을 많이 아느냐 모르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무엇을 토해내느냐가 중요해요.

 

‘율법이 나쁘냐’ ‘복음이 좋으냐’ 이런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다 좋은 겁니다.

율법도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못 사용하니까 남을 헤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음도 얼마든지 율법처럼 칼이 될 수가 있어요.

반대로 율법도 얼마든지 살리는 약이 될 수가 있어요.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죽이는 흉기가 되기도 하고 살리는 도구가 되기도 해요.

 

많은 분들이 복음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복음 아는 것이 무슨 전가의 보도가 되어서 이걸 가지고 전부 사람을 찌르는 일들만 합니다.

믿음에 합당치가 않으니까 복음 안다는 것이 자기 의가 되어서 주변의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해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게 하갈의 모습입니다.

 

보세요.

하갈이 누굽니까?

종이지요?

 

종인데 아브람의 씨를 받았습니다.

종이 아브람의 씨를 받으니까 법이 나오는 겁니다.

자기 주인을 멸시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아브람의 씨가 복음이라고 생각합시다.

하갈은 지금 우리입니다

법에 속한 죄인이 복음을 받으면 그 복음을 가지고 하갈같이 주인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가 뱉어내는 삶의 모습이 그 사람의 신앙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힘을 삼아서 휘두르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먼저 나를 무장 해제시키잖아요.

내 힘을 뺀다니까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됐을 때, 비로소 ‘주여, 이런 자가 용서받고 사는 것이 은혜였군요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전 이야기인데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이 있어요.

이 분은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한 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맨 날 그 윤리 도덕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자기의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한 것으로 매 번 사람을 치는 겁니다.

누가 조금이라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성도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하면서 신앙의 본질을 자꾸만 놓치는 겁니다.

 

이 분은 하나님 앞에 서 본적이 없어요.

말씀 앞에 서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타인 보다 조금 나은 자신의 윤리 도적으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간음이라 그랬어요?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것 자체가 이미 간음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간음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는데, ‘간음하지 마세요!’ 하면 그건 소 귀에 경 읽기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간음하지 않는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간음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간음이라 그랬지요?

그러면 우리는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하신단 말이지요.

하나님의 뜻은 너희는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게요!’ 합니다.

세상을 사랑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게요’ 라고 하는 그것이 불경이고 참람이고 악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도덕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경향성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경향성이 있어야 우리가 죄로 드러나니까요.

 

우리는 간음 할 수밖에 없고,

살인 할 수밖에 없고,

도덕질 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살고 있어요.

그런 몸으로 살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일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사흘 굶은 사람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을 두고서 먹지 말고 잘 지키고 있어!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고양이 앞에 생선을 맡긴 것과 같아요.

 

이건 우리가 못 지켜내요.

이건 우리를 고발하고자 함이에요.

예수님께서 왜? 말씀대로 산 바리새인들은 지옥으로 가라고 하고, 말씀대로 살지 못한 세리와 창기들은 천국으로 가라고 했나요.

이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말씀대로 살아서 자기가 죄인인줄 몰랐고, 세리와 창기들은 자기가 죄인인줄 알았어요.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바리새인들을 하갈처럼 모가지 바짝 세우고 주인에게 덤볐고,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세리와 창기들은 주인 앞에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성경의 어떤 명령문들을 가지고 문자적으로 우리더러 지키라는 뜻으로 “하라” 또는 “하지 말라” 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가리는 불경이 되고 말아요.

말씀대로 산 자들은 예수를 안 믿는단 말입니다.

이것은 말씀대로 살 필요가 없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 내가 말씀대로 산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에요.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요.

 

지금 이 시대 교회에서는 뭐라고 가르칩니까?

 

살인하지 마세요.

도적질 하지 마세요.

간음하지 마세요.

거짓 증거하지 마세요.

이런 저런 것 하지 마세요! 라고 하잖아요.

 

설교의 포카스가 “하세요” “하지 마세요” 로 가면 안 되어요.

 

이 말이 어려운데,

‘하지 마세요’ 라는 지향성은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나를 자꾸 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령 도적질 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았다고 합시다.

말씀대로 살았다고 합시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내 의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참람 죄가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참고해 보세요.

바리새인은 자기가 한 것을 의지하고 나왔어요.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았습니까?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거부당하였어요.

왜? 그런가요?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를 근거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의는 죄인의 의에요.

 

하갈이 그런 겁니다.

하갈이 지금 자기 본분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하갈은 종이잖아요.

종 주제에 아이를 가졌다고 주인을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주인 보기에는 참람 죄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처럼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하갈은 자기가 아이를 가졌다는 근거를 가지고서 종이 주인의 자리를 탐한 자기 위치를 벗어난 악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죄가 뭡니까?

자기 위치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유다서에 보면 자기 처소를 떠나서 유리방황하는 것이 죄인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하갈이 자기 위치를 벗어났는데 무엇 때문에 벗어났습니까?

아브람의 씨를 잉태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갈이 아이를 잉태치 않았으면 종용히 있었어요.

아이를 가진 것 때문에 그걸 힘으로 삼고 주인에게 덤비는 것입니다.

 

이에 사래가 쫓아내지요.

주인이 뭐라고 하자 도망가 버립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뭐라고 합니까?

하갈아! 네가 어디로 가느냐?

주인의 낯을 피해서 도망가는데요!

다시 주인 아래로 돌아가서 복속하라고 합니다.

 

아이를 가졌든 안 가졌던 넌 종이라는 것입니다.

넌 종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종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주인이 면천을 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하갈은 자기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주인을 멸시했어요.

그러자 주인이 쫓아내고 하갈은 주인의 낯을 피해서 도망을 가자, 하나님께서 원래 그 자리로 돌아가서 네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저와 여러분들이 산을 옮길만한 어떤 일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하고, 성경 지식이 넘쳐 나고, 복음을 알고 있다 하더라고 결국 우리는 하갈과 같이 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무리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해도 죄인입니다.

그러면 내가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주인의 은혜의 긍휼을 구해야지요.

불쌍히 여기심을 입게 해달라고 해야지요.

그러니까 죄인의 신앙생활이란?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이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밥풀로 먹고 살아가는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를 고백해야지요.

 

그렇게 되려면 내가 비록 주인의 아이를 뱄다고 해도 이 아이에게 의미를 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잖아요.

주인의 아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극을 보면 무수리가 어느 날 임금님으로부터 성은을 입고 나면 그 때부터 안하무인이 됩니다.

결국 아이를 가진 것이 화근이 되어서 죽임당하기도 합니다.

아이를 가졌더라도 겸손하게 있어야 하는데, 그것으로 권세를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아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을 알았으면 감사와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데,

우린 그와 반대로 상좌에 앉아서 옳으니 그르니 판관 노릇을 하고 있어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염려스러운 것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알아요.

그 복음을 아는 것을 가지고 행여 하갈처럼 의가 되어 남을 비판하고 정죄할까봐 제가 굉장히 염려스러운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과정이 다 필요합니다.

하지만 빨리 지나가세요.

우리는 처음에 복음을 받으면 법 아래 있다가 복음을 받은 것이 너무 기쁘고 좋고 확실한 정답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 정답을 가진 것으로 남 앞에 휘두를 때가 있습니다.

반드시 그 과정이 있어요.

 

하지만 오래 머물지 말고 사춘기처럼 빨리 지나가야 합니다.

오래 머물지 마세요.

오래 머물수록 여러분은 복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뭘 대단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구나, 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아니면 우리도 결국 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갈이 어떤 자를 생산합니까?

 

12절에 보세요.

 

12절 “그가 사람 중에 들 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찌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친다고 합니다.

결국 이스마엘은 사람 치는 싸움꾼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싸움꾼으로 태어나는 자들이 바로 종의 아들들입니다.

 

우리가 율법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이스마엘이 되는데,

이 이스마엘은 사람을 치는 자가 됩니다.

율법에 의를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나로 하여금 그 율법을 법으로 사용해서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그런 일들을 행하게 됩니다.

 

제발 여러분이 복음 아는 것조차도 여러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가리고, 귀를 가리고, 마음을 닫아 버리면 복음이 안 들려집니다.

제가 늘 두려워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거두지 말아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거 거둬가시면 전 아무것도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야할 부분이 그런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증거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늘 사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늘 울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 눈을 열어 보이게 해 주세요’,

‘하나님 귀를 열어 들려지게 해주세요’,

이렇게 해서 알아지는 것은 내 힘으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이 들려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복음을 증거 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갈과 같은 모습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갈을 통해서 우리에게 고발하는 것이 뭡니까?

너희들도 너희들이 알고 있다고 하는 그것이 힘이 되고 의가 될 때는 반드시 주인에게 대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고발하고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아는 이것도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내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 사실을 깨닫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내가 말씀이 들려지고 예수가 믿어지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의 발걸음을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그것조차도 감사하셔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여도 하나님의 은혜가 나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게 했다는 것이 깨달아져서 그 일을 하면서도 감사하는 그런 신앙생활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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