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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27강. 언약 속에 담긴 성도의 운명 (창 15:1-21)

by coroa 2021. 2. 28.

 

마가 13 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27강. 언약 속에 담긴 성도의 운명 (창 15:1-21).-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후사를 주겠다고 하십니다.

후사를 준다는 말은 아브람을 조상으로 삼게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조상이라는 말에는 혈통적인 것과 영적인 것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구약은 혈통적으로 육적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신약적 의미로는 믿음으로 난 영적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조상인 것입니다.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람의 후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후사란? 장차 태어날 자손을 말합니다.

장차 태어날 자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앞으로 이렇게 될 것이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태어나는 자들은 이 약속에 의하여 간섭당하게 됩니다.

독자적으로 사는게 아니고 아브람과 하신 언약이 그들에게 멍에가 되어서 끌고 다닙니다.

이걸 세상 말로 운명 또는 숙명이라고 합니다.

팔자라고도 합니다.

 

근데 약속이 참 희한합니다.

좋은 약속이 아니고 불길합니다.

물론 결론은 좋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혹독합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11절을 봅시다.

 

1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네 후사들이 이방에서 객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백년 동안 종살이 한다고 합니다.

괴롭힘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건 저주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정 반대의 약속입니다.

우린 하나님이 찾아오면 좋은 것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승승장구(乘勝長驅)하고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영웅호걸(英雄豪傑)로 만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반대입니다.

 

아브람은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했으니 예수님의 후손들도 이방의 객으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아브람의 후손들처럼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아브람과 그 후손들처럼 다루어가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의 후손들에 대한 약속은 신약의 성도들에 대한 약속입니다.

아브람 후손들은 신약의 성도들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사백년 동안 종 노릇하는 모습이 곧 우리 모습입니다.

 

우린 이러한 말씀 앞에서 우리의 실존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관을 한번 점검받아야 해요.

난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난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난 예수를 왜? 무엇을 위하여 믿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해요.

내가 지금 성경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럼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 가시는지 살펴봅시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번성합니다.

그러다가 노아 때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찾아와서 이 세상을 심판하겠다는 소식을 알립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고 세상 일락을 쫓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는 것으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홍수로 쓸어버립니다.

 

그리곤 노아의 식구를 통해서 다시 이 땅에 사람들을 번성케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또 다시 하나님께 반역을 합니다.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 나라를 침범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흩어버리십니다.

 

한참이 지난 후에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이후 최초로 찾아 온 사람이 아브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찾아오시기 전 까지는 하나님이 숨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노아 시대가 지나고 숨어 계시던 하나님이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을 찾아 오셨습니다.

찾아오셔서 “내가 바로 참 하나님이다” 라고 계시하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보면 아브람도 노아의 후손이에요.

 

노아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그동안 숨어 계시다가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인간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가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계시하시기 전에 알고 있던 하나님은 전부 가짜 하나님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가짜 하나님을 섬기던 아브람을 찾아 와서 내가 진짜 하나님이다 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노아 이후 진짜 하나님을 아브람이 처음 만난 것입니다.

이러면 다른 사람들이 아는 하나님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당장 아버지가 아는 하나님과 충돌하게 됩니다.

결국 아브람의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의 하나님으로 대립하게 된 것입니다.

 

누가 진짜 하나님이냐의 싸움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진짜 하나님을 만났어요.

그럼 아브람은 이제부터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가짜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증거해 주어야 합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아브람의 말을 세상 사람들이 믿느냐 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안 믿습니다.

아브람 부모도 못 믿어요.

안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브람이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남들과 다른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아브람이 정신 이상자에요.

 

예전에 도올 김용옥씨가 강의 할 때 그럽디다.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우리나라에도 얼마든지 종교도 있고 우리나라 신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유대교 신인 예수교를 가져와서 믿느냐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신을 배우고 섬길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신은 다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은 각 민족에게 다르게 계시하였다는 것입니다.

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거에요.

다만 민족마다 방식만 다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만 구원이 있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칭 신학교를 나온 사람이에요.

그런데 예수 이외도 구원이 있다고 해요.

이런 사고를 누가 가지고 있는가 하면 자칭 깨어 있다고 하는 진보주의자들이 가지고 있어요.

깨긴 뭘 깨요.

소경인데,,,

 

이들의 논리는 비유적으로 종교란 산 정상에 있는 신을 찾아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산 꼭대기에 있어요.

마치 시내산 꼭대기처럼,,,

 

그런데 그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다양하다는 겁니다.

동서남북 어디서도 올라 갈 수 있다는 거에요.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지향점은 다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올라가는 길을 가지고 싸우지 말고 다 포용하자는 것입니다.

 

왜 기독교가 그렇게 옹졸하냐?

좀 통 크게 다 포용하면 얼마나 좋으냐?

그럼 교회가 부흥 될 것이 아니냐? 라고 합니다.

이런 논리를 예전에 감리교 신학 대학총장이었던 변선환 씨가 주장했습니다.

 

이게 다 종교 다원주의에서 나온 이론이에요.

이러한 이론을 펼치는 단체가 WCC입니다.

세계교회 협의회에요.

여기에 주도적 역할을 로마 카토릭이 하고 있습니다.

 

로마 카토릭은 종교 통합 운동을 벌리고 있어요.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근본이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타 종교를 배타할 것이 아니라 문호를 열어놓고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종교를 하나로 묶어서 통합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게 바벨탑 사고에요.

 

노아 이후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이 때 눈여겨보아야 할 말씀이 바로 구음(언어)이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하나란 말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하나의 사상으로 종교를 통합하는 것을 말해요.

바벨탑으로 하늘에 올라가자고 했지요.

종교 통합도 신께 나아가지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자고 하는 것이나, 모든 종교를 포용하여 신께 나아가자는 것이나 다 똑 같은 말이에요.

 

하나의 언어로 무엇을 했나요?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했어요.

하늘에 오르자고 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언어를 다르게 흩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언어가 다르게 흩어버리자 언어가 같은 자들끼리 집단을 이루고 살게 됩니다.

흩어진 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가 노아의 후손들이에요.

 

도올이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각자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왜? 우리가 유대인들이 섬기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우리 방식의 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각자의 방식으로 산 정상에 올라가자는 것입니다.

 

이걸 아브람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말해 봅시다.

 

갈대아 우르 사람들은 다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오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바벨탑 이후 처음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성경상으로 보면 그래요.

 

이렇게 되면 아브람 이외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없어요.

아브람만이 하나님을 알아요.

요즘 말로 아브람이 하나님을 독점하게 된 것입니다.

계시의 독점화 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장차 하나님에 대하여 독점적으로 아는 한 분이 나타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내신 것과 같습니다.

구약에서는 아브람 이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 후손들 이외는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른 민족에게는 계시해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아브람 후손들을 통해서만 알아야 합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과 교회로 나타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 이외는 하나님을 아는 분이 없어요.

예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성도 이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유대인들이 믿던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유대인에게만 계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그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외는 하나님을 아는 분이 없어요.

그 누구에게도 알려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에요.

 

이걸 구약에서 아브람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통해서 만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대통령을 만나려면 비서실장을 거쳐서 만나듯이 아브람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이 마치 하나님 비서실장처럼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 후손들에게 자기가 만난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게 아브람 언약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 아브람의 언약으로 생겨난 후손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배우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통해서 계시를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이외의 하나님은 모두 가짜 하나님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자기를 도와주는 하나님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자기에게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하나님 앞에 나가서 도와주세요. 그럽니다.

이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인간들이 왜? 이렇게 왜곡된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지 이걸 근원적으로 올라가서 살펴봅시다.

 

인간들이 에덴동산에서 살 때는 자기 인생이 없었어요.

그 땐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자기 중심이 되었습니다.

죄가 들어오고 난 후로 자기 생각을 갖기 시작하였고 자기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은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 쫓겨난 인간들은 나를 위하여 삽니다.

나 이외 신이 없어요.

내가 곧 신이에요.

 

인간들은 ‘나’ 라는 존재를 확장시키고자 합니다.

이걸 자기 이름을 낸다고 합니다.

‘나’ 라는 존재는 항상 새로운 ‘나’를 만듭니다.

눈만 뜨면 새로운 ‘나’ 를 만드는 것입니다

새로운 ‘나’는 세상에서 자기 이름을 날리는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에선 비젼이라고 하고 꿈을 가지라고 합니다.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지금 현재의 ‘너’로 만족하지 말고 더 크게 확대된 ‘너’를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꿈은 자기 몸집 부풀리기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은 채 몸집을 크게 부풀리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몸집이 작아도 죄인이고 몸집이 커도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몸집이 크나 작으나 죄인이에요.

지금의 ‘나’도 죄인이고, 성공한 ‘나’도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이걸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십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찾아가서 알려주는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브람 밖에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너는 너를 위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을 위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주인이라고 다가오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지금까지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 와서 넌 내꺼야! 라고 한단 말입니다.

아브람이 얼마나 황당하고 놀랐겠어요.

 

아브람이 순순히 하나님 맞습니다.

제 인생은 하나님 것입니다! 라고 한 줄 아세요.

아니에요.

이게 아브람의 불순종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브람은 곧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와서 너(우리)는 더 이상 너(우리)가 아니고,

내(하나님)가 바라는 너(우리)로 만들어 가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내가(하나님) 바라는 너(우리)로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이건 아브람(우리) 인생을 차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간섭하시면 우리 인생이 차압당합니다.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예수 믿으면 인생이 달라져요.

 

우린 우리 뜻을 이루고자 하나님을 찾는데 하나님은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 인생을 차압하고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돌이 생깁니다.

이런 충돌이 생길 때 마다 우리에게는 고난으로 다가 옵니다.

아픔으로 다가와요.

 

예수를 믿는 것이 왜 고난입니까?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기 때문에 고난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고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꿈이 좌절 될 때를 말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할 때 고난이라고 여겨요.

 

잘 살고 싶은데 가난하면 고난이라고 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데 병들고 아프면 고난이라고 합니다.

우린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이들을 보세요.

부모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면 속상해 합니다.

아이들도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해요.

엄마 아빠도 자기에게 어떻게 대하느냐로 좋고 나쁨을 결정해요.

어린 아이들에게 물어 보면 그렇잖아요.

아빠랑 같이 있을 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면 당연히 아빠라고 하지요.

그런데 엄마랑 같이 있을 때는 또 엄마라고 답합니다.

 

아이들도 영악합니다.

왜 그럽니까?

아이라 할지라도 자기 살 궁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본능이고 본성이에요.

 

에이~ 나쁜 놈 그러면 안 돼요.

사람이라면 다 그래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그래요.

인간은 누구든지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엄마 좋아’ ‘아빠 좋아’ 하다가도 아빠가 매를 들면 단번에 ‘아빠 미워!’ 라고 합니다.

왜 그럽니까?

나를 아프게 하기 때문에 미운 것입니다.

 

인간들 세계(죄인의 세계)에서는 ‘하나님 좋아요! 사랑해요’ 하는 것도 다 자기한테 잘해 줄 때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너 죄인이야!’ 하고 매를 대면 돌변하면서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금방 좋다하다가도 미워해요.

 

왜 그럽니까?

모든 일을 나 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나 중심으로 판단하는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죄가 나 중심으로 살게 역사합니다.

 

인간들에겐 나 밖에 없어요.

내가 곧 신이에요.

철저히 내 중심으로 좋고 나쁨을 결정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창조의 목적인데,,,

죄가 내가 보기에 좋았더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피조물을 만들어 놓았는데 죄가 자기 좋은 것으로 바꾸어 놓았어요.

죄가 뭐냐?

자기 맘대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 생각하지 않고 사는게 죄입니다.

 

우리가 강아지를 한 마리 키워도 그 강아지가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 줘야지 강아지를 키울 맛이 나는 겁니다.

만약에 강아지가 주인 뜻대로 살지 않으면 갖다 버려요.

주인 말 안 듣는 그런 강아지를 누가 키우겠습니까?

 

우리 인간들이 그렇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창조할 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 자기가 하나님이 되었어요.

자기 영광을 구합니다.

이건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너는 가짜야!’ 라고 고발하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왜 가짜라고 하십니까? 나는 나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습니까?

죄라는 놈입니다.

하나님은 이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라고 고발 하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죄를 못 이겨요.

우린 죄의 종입니다.

종이란? 자기 주권이 없어요.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몸뚱이를 이길 장사는 없어요.

인간들은 다 자기 몸뚱이의 종으로 살아요.

이게 인간의 실존이에요.

 

지난 금요일에 집사님이 전화를 했어요.

목사님, 주일날 직장에 나오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제가 직장 다닐래요? 그만둘래요? 라고 물으니까?

직장을 그만 두면 가족들이 굶는데 그건 안 되지요 하면서 직장을 다니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럼 교회에 오지 말고 회사에 출근해야지요.

방법이 없잖아요.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우짭니까?

 

오해 할까봐서 말합니다.

여기서 잘 이해해야 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신앙의 절대적인 것이라고 여긴다면 회사를 그만 두고서라도 주일을 지켜야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14장의 말씀에 의하면 날을 지키는 것이나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폄론치 말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마다 신앙의 깊이가 다르니까 어떤 행위로 인하여 신앙이 있다 없다를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날을 지키거나 먹고 마시는 것이 신앙의 척도는 될 수가 있어도 신앙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걸로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마다 다를 수가 있으므로 곧 주일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를 가지고 신앙의 전부를 판가름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주일날 회사에 출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 사람의 신앙의 경중의 차이로 결정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사를 그만 둘 수가 없다고 하니까 집사님 맘대로 출근하라고 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직장에서 나오라고 하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는 믿음만 가지고 살 거야, 직장도 때려 치울 거야! 하면 그건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우린 떡이냐 말씀이냐 라고 하면 우린 떡을 택할 수밖에 없어요.

이 몸을 가지고 있는 한은 떡을 거부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옛날 법 아래 있을 때 같으면 믿음으로 벗어나야지! 벗어나야지! 하였겠지요.

하지만 그건 그냥 객기입니다.

거기서 벗어난다고 하나님이 잘한다고 칭찬하실 분도 아니고, 못 벗어난다고 해서 네 이놈! 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여러분이 알고 있는 관점에서 이해하지 마세요.

 

우린 하나님이 우리가 떡을 쫓아가면 화를 내고 말씀을 쫓아가면 칭찬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리적으로는 맞습니다.

그런데 이건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 몸이 죄의 몸이 아닐 때입니다.

 

죄인보고 죄 짓지 말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에요.

죄인보고 죄 짓지 말라는 것은 죄를 짓지 말라는 것에 초점이 있지 않고 너는 죄를 이길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왜? 죄인임을 알립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그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든 안하든 사랑하세요.

 

이 말을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세요.

순종하지 않고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법으로 대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건 우리 조건과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든 안하든 하나님 자녀들입니다.

순종해도 하나님 자녀이고, 불순종해도 하나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유지가 됩니다.

부모 자식의 관계는 행함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천국으로 보내고, 말 안 들으면 지옥으로 보내고 그러지 않아요.

이는 하나님과 우리는 법적 관계로 있지 않고 사랑의 관계 즉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에서 잘려 나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주일날 교회를 못나갔으니 하나님이 날 미워할 거야.

괜히 혼자 그렇게 생각해서 하나님이 좋고 나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혼자 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이길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아들을 보내서 우리를 대신하여서 십자가에 죽이시고 우리의 죄를 속량시켜 주신 것입니다.

대속이란? 대신 속죄 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하셨습니다.

개그콘서트에서 하는 “대신 맨”이에요.

이런 ‘대신 맨’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데,

내가 못하는 그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순종해 주셨습니다.

이걸 믿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대신해 주셨지…라는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건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느냐 안 사느냐 라는 명제로부터 벗어난 문제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이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고 지켜지는 것이란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일방적으로 찾아 가셔서 구원을 하셨습니다.

찾아 가서 구원을 했다면 아브람에게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없지요.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거기에 자꾸 조건을 붙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조건 없이 아브람을 찾아가서 구원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개개인을 불렀습니다.

불러서 모아놓았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조건으로 따질 순 없습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뚱뚱한 상태로 불렀고 어떤 사람은 날씬한 상태로 불렀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뚱뚱하느냐 날씬하느냐 차별이 없습니다.

근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불러 주신 분이 필요해서 불러 주신 것인데 우리는 항상 자기 관점으로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모든 것을 자기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보세요.

오늘 본문 말씀이 지금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언약을 맺는데 얼마나 재밌는지 잘 보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다스려가는 것하고, 하나님께서 성도를 다스려가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한 번 살펴봅시다.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약속을 하십니다.

 

8절을 봅시다.

 

8절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와서 이 땅을 유업으로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뜬금없이 네 후손들을 줄게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후손들의 운명을 이야기 해 주는 것입니다.

 

4-5절을 봅시다.

 

4-5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께서 문득 찾아오셔서 하는 말입니다.

아브람아, 내가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아브람은 지금 아이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니 아브람에게는 하나님의 이 말씀이 얼마나 허황되게 들리겠습니까?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 가능성이 있을 때 수용을 합니다.

그런데 사래는 석녀에요.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그동안 수없이 시도했지만 실패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찾아 와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해주겠다’고 하니까 아브람은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십니다.

아브람을 세워놓고 그에게 내가 어떻게 하는지 잘 보라고 하십니다.

 

재물을 잡아 그 고기의 반을 쪼개고 그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이 혼자 지나가십니다.

이건 하나님의 목숨을 걸고 약속을 이루어 내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혼자서 다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거기에 아무런 동의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을 할 때 내가 동의하면 하나님께서 해주시고 내가 동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안 해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 오셔서 ‘아들 줄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워 놓고 ‘내가 널 구원 해 줄게, 천국 보내 줄게,’ 그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 아브람 언약도 그렇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통고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해 놓고 ‘이런 식으로 일을 할 것이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13절에 우리 생각에 반하는 아주 역설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13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편의상 제가 하나님이라고 합시다.

제가 지금 집사님을 찾아 가서 ‘내가 네게 아들을 주겠다’ 합니다.

그러면 집사님은 생각하시기를 ‘아~! 이 아들은 하나님이 주셨으니까 고난 없이 잘 자라게 해주시겠지’ 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기를 ‘내가 아들을 줄께, 하고서는 그런데 이 아들을 저 멀리 객지에 보내서 고생 잔뜩하게 하다가 나중에 다시 불러들일게’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본문이 그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러잖아요.

네 자손이 정녕히 이방에서 객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객이라는 것은 굶어 죽는 처치를 말합니다.

그런데 객이 될 뿐 아니라 그들을 섬기는 종노릇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아브람에게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누구입니까?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러면 그 아브람을 우리로 대입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 하십니다.

 

예를 들어 제가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서 저에게 복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럼 저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복 주신다 했으니 이제부터 교회가 부흥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해요.

우린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복 주신다 해놓고 너 좀 고생 좀 해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걸 우리가 원하겠어요?

안 원하지요.

근데 하나님은 그렇게 약속하셨어요.

우리는 이 약속이 싫어요.

누가 이런 약속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지금까지 안 되던 것도 예수를 믿기 때문에 잘 될 것이라고 믿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정반대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너 예수 믿지?

그럼 이제부터 고생 좀 해라!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예수를 누가 믿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람을 찾아 가셔서 너 내꺼! 하시고는 고생 좀 하자는 것입니다.

아브람 생각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편이라니까 이제 모든 것이 잘 풀리겠구나’ 생각 하는데 그게 아닌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왜 고생하는데요? 하고 묻습니다.

 

14-16=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예를 들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애굽을 심판을 하고자 합니다.

심판을 하려면 그 근거가 있어야 하잖아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심판 하면 그건 하나님의 폭력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애굽이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알리바이를 하나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굽이 핍박하는 것으로 해 놓은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가만두지 않고 종으로 부려먹으면서 온갖 고난을 다 당하게 한 것입니다.

애굽이 하나님 아들들을 종으로 부려먹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왜? 내 자식들을 혼냈느냐’ 라고 하면서 애굽에다가 그 죗값을 묻는 것입니다.

애굽을 멸망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언약의 내용입니다.

이걸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아브람에게 통보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죽자 하나님은 이 땅을 심판할 근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마귀와 그 종들이 왜 지옥에 가는지 아세요.

하나님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귀와 그 종들에게 핍박을 당해야 해요.

이건 우리가 원치 않아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마귀에게 유린당하도록 되어 있어요.

 

데살로니가후서 1장을 봅시다.

 

살후 1:5-8=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하나님은 공의에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공의를 행하십니까?

이는 환난 받은 자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게 한 자들은 형벌로 갚으신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하나님이 애굽에 바로를 혼 낼 때 이것을 근거로 했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이 핍박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왜? 내 자식들을 핍박했느냐고 애굽을 저주한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의 실체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에서 이 세상으로 보내질 때부터 얻어맞고 죽을 운명으로 보내졌어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지요.

 

아버지 뜻이 무엇이였습니까?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근데 예수님의 인간적인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안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서 십자가를 지도록 돕게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안 죽고 싶고 잘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뜻은?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 우리를 던져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어도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잘 믿어서 고난을 피하고자 합니다.

이건 아니에요.

 

예수를 믿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실족하지 않아요.

우리는 지금까지 얼마나 다른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자식을 준다고 하시고서는 그 자식들은 이방에서 객이 되고 고난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난 받게 하는 그 놈들은 심판하고 고난 받았던 자기 백성들은 천국으로 데려 가 거기서 편안히 쉬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내가 너를 찾아내겠다,

너희가 애굽에서 고생한다 해도 실망하지 마라,

반드시 내가 너희를 찾아서 이곳으로 데리고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신자에겐 이런 말씀이 힘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돈이 많은 것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든든한 것입니다.

엄마가 자기 자식의 손을 잡고 가는 한 그 자식은 엄마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두 손을 마주 잡고 있는 그림이 있지요?

마치 악수하는 것처럼 그려진 그런 그림 말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 손을 그렇게 꽉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 그림의 뜻이 내가 너를 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겨지면 두렵지 않겠지요.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내가 나를 책임지려고 할 때 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니까 제자들이 전부 두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내가 너희를 고아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리라고 하십니다.

 

고아는 뭡니까?

고아가 왜 불쌍한가 하면 지켜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는 보호자가 없기 때문에 불쌍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들을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들을 지켜 줄께 하시고 보헤사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와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반드시 지켜 냅니다.

 

우리는 지켜 낸다 하면 나를 행복하게 잘해줄 것이라고 또 생각합니다.

그런 지킴이 아니라 ‘네가 죽는다 할지라도 다시 살려 낼게!’

세상이 망한다 하더라도 ‘내가 너를 천국 데려가면 되지 않느냐!’

이게 믿어진다면 우리가 현실에서 조금 넘어진다는 것이 안타까워질까요?

안하지요.

 

하나님이 붙잡고 가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안심되는 말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걸 못 믿습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책임지려고 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곤고해지고 불안해지고 염려가 됩니다.

사람이 언제 불행을 느끼는가 하면 내가 소유하고 싶은데 소유하지 못했을 때 불행을 느낍니다.

좋은 차를 가지고 싶은데 못 가지면 불행하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나는 왜 못 가졌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나의 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세상에 나가 돈을 버는 것입니다.

돈 벌어서 자기가 결핍을 느끼는 것을 채웁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주는 이 행복은 신기루라고 했습니다.

잡았다 싶으면 또 새로운 것이 나옵니다.

컴퓨터를 사고 싶다고 합시다.

지금 새로운 것이라고 샀는데 얼마 지나면 또 새로운 것이 나옵니다.

홈쇼핑 같은데도 컴퓨터 같은 것이 나옵니다.

팔기 위해 제품 소개를 할 때 보면 최신 사양에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몇 달 지나면 그 사양보다 더 좋은 사양이 나옵니다.

 

세상은 점점 새로운 것을 개발합니다.

지금 좋은 차를 타는 사람도 일 이년이 지나면 차를 바꿉니다.

차가 나빠서가 아니라 더 새로운 것을 타기 위해서입니다.

그랜져 나올 땐 그렇게 좋은 차가 없다고 선전을 했는데 지금은 뭐가 나왔어요?

제네시스가 나왔잖아요.

그러면 그 자동차 회사는 제네시스만 팔고 끝나는 가요?

아니에요.

계속해서 새로운 차를 개발하지요.

뭔가를 끊임없이 바꾸고 개발해 내게 되어 있어요.

 

그건 사람들이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끝이 없습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이 모두가 십자가 밖에서 보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보면 세상이 부럽지가 않은데,,

십자가 밖에서 보면 세상이 부러워요.

그래서 하나님은 날마다 자기 백성들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합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죽이십니다.

십자가 안에서 바라보게 하십니다.

 

‘하나님 백화점에 갔더니 멋진 옷이 나왔던데 제가 그걸 못 사 입고 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넌 죽은 놈이다!

너 없는 셈 쳐라’ 그래요.

제가 그 말을 인정합니까?

안하지요. 왜요?

멀쩡히 살아 있는데, 그게 인정이 됩니까?

 

하나님, 제가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 있는데요?

그건 십자가 밖에서의 너이고,

십자가 안에서는 너는 없어!

 

그럼 제가 그럽니다.

그건 아무래도 너무 쪽팔리는데요.

쪽팔리면 어떠냐!

그런데 우리는 그 쪽팔리는 걸 못 견디는 것입니다.

 

우린 쪽 팔리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남이 가진 걸 나도 가져야 하고, 남이 타는 거 나도 타야하고, 남이 소유한 것은 나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를 자꾸만 세상에서 죽이는 쪽으로 일을 하십니다.

우리를 십자가 안으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평안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지옥과 천국의 차이가 뭡니까?

결핍을 느끼는 곳이 지옥입니다.

천국은 만족하는 곳입니다.

만족은 죽으면 됩니다.

 

신창원이가 탈옥을 해서 도망을 다닙니다.

왜? 탈옥합니까?

자유를 위해서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탈옥해서 자유로웠습니까?

아니에요.

지옥으로 살았어요.

 

육적으로는 감옥에 있는 것이 갇힌 것이 맞습니다.

감옥 밖으로 나온 것은 자유지요.

그런데 탈옥을 하고 보니 다른 겁니다.

분명히 육적으로는 감옥을 나온 게 맞습니다.

 

그런데 감옥을 나온 순간부터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진짜 신창원은 자유를 감옥에서 누린 것입니다.

밖에서는 계속해서 쫓기는 겁니다.

 

나중에 잡히고 나서 하는 말이 뭡니까?

아이고 시원하다!

비로소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신자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상 것 가져야 하는데, 가져야 하는데 하면, 이건 쫓기는 겁니다.

불안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빼앗아 가십니다.

그럴 때 비로소 자유를 느끼고 평안을 느낍니다.

 

여러분들 보세요.

살고자 하면 보든 게 불평입니다.

세상의 모든 만사가 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기 때문에 불평거리가 됩니다.

마누라도 내 뜻대로 안되고 자식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는 것 마다 내 뜻대로 안되니 짜증이 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라는 존재가 자꾸 살려고 하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 죽었어! 넌 없어! 라고 합니다.

‘네 인생은 없고 예수의 인생으로 살아’ 라고 합니다.

이게 깨달아 졌을 때 비로소 평안을 누립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평안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말씀 앞에서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이 무장 해제를 당하여야 해요.

 

말씀을 안 보고 TV 홈쇼핑을 보니까 만낼 결핍을 느끼고 신세타령하는 것입니다.

애꿎은 남편 욕이나 하고 말이에요.

말씀에 붙잡히면 천국으로 사는데 말씀을 놓으면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천국과 지옥을 달리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자꾸만 물질 개념이나 소유 개념으로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천국과 지옥은 영적 개념이에요.

무슨 가치로 사느냐로 판단해요.

세상에 대하여 살았으면 지옥에 있는 것이고 세상에 대하여 죽었으면 천국에 있는 것입니다.

 

너 살았느냐?

너 죽었느냐?

그걸 물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난 살았는데요!

난 살고 싶은데요.

그러면 하나님은 묻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데?

너는 너 아니잖아.

너는 너가 아니고 너는 예수 안에서 너야!

 

야고보서에 보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장사를 해서 주의 뜻이면 많은 이익을 챙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하고 장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러자 ‘이 미련한 인생아 네 인생은 안개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시는 것입니다.

안개가 뭡니까?

사라지는 것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복잡해집니다.

만사가 짜증스러워지는 것입니다.

나는 소중하니까,

나는 행복해야 하니까,

왜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느냐?

 

부부간에 다투고, 일하는 것도 재미가 없고 그런 겁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언약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우린 애초부터 그렇게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결정이 났습니다.

창세전에,,

야곱과 에서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실패한다고 하여도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판단을 받는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 자들입니다.

예수 안에서 판단을 받습니다.

오늘밤 죽는다 해도 하늘나라로 가기 때문에 안심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한 이 약속은 아브람과 그 혈통적 후손에게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애굽을 심판하기 위해서 아브람 후손을 고난 속에 던져 놓았습니다.

고난 당한 자는 구원하고, 고난을 가한 자는 징벌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뭡니까?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 우리를 세상에 던져 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내가 왜 세상에서 채여야 하느냐고 항변을 합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잘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이 악해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우리를 던져 놨는데,

우리는 오히려 세상 속에서 같이 동화되어 살고 있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고난당하게 하신 목적을 놓치고 있으니까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후손들이 애굽에 나가서 생고생을 할 때 그 애굽에서의 힘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뭐였겠어요?

오직 하나 뿐이에요.

약속 하나 바라 보고 사는 것입니다.

 

아하, 하나님께서 우리 할아버지 아브람하고 약속을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이렇게 고생을 하는구나…

지금 내가 이 고생하는 것이 하나님과 아브람과의 약속 때문이구나.

이것을 알고 감사해야지요.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뜻대로 인생이 안 살아질 때,

아,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님하고 약속한 것이 그것이구나.

고난당하는 것도 안식을 주기 위함이구나,

우리는 세상에서 버려진 돌로 서 있는 존재구나.

그래서 이 땅에서 고생하는구나.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니꺼 내 뜻대로 안되는구나.

내 뜻대로 안 되는 이것이 하나님과의 약속 때문이고, 그 약속대로 실현이 되니까 고생이 되더라도 천국의 소망 갖고 살자! 하면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 잠깐입니다.

신자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약속 밖에 없습니다.

천국에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놓치면 불행해지고 약속에 붙잡힐 때는 어떤 상황이든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부디 환경 탓하지 마시고 어떤 환경 속에서도 약속을 부여잡고 그 믿음으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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