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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26강. 아브람의 상급 (창 15:1-21)

by coroa 2021. 2. 27.

 

마가 13 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26강. 아브람의 상급 (창 15:1-21).-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아브라함의 전리품과 십일조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십일조는 물질적 십분의 일 개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물질의 십일조를 드렸는데 신약에 와서는 우리 자체가 십일조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자체를 십일조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져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마귀와 전쟁을 하시고 죄와 사망 가운데 포로로 잡혀 있던 우리들을 끄집어 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예수님 때문에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사고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십일조 정신입니다.

 

물질적 십일조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다가 의와 인과 신을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의와 인과 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죄 아래 포로 잡혀 있던 우리들을 친히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미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감사가 연보로 나타나는데 인색함이 없이 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봤습니다.

 

아브람은 자기 힘으로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출한 전쟁은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치르실 전쟁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약은 전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들을 보여주는 그림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 일어난 사건 하나 하나 마다 모두가 하나의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만드신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창세전에 ‘나는 이렇게 일을 할 것이다’ 라는 언약에 의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역사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하신 내용들을 풀어가는 필드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은 자들을 양자로 삼아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 땅에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애굽과 같은 곳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교회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이것은 출애굽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입은 자들’ 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에클레시아’ 라고 하는 것은 ‘빼내심을 입은 자들’이 모인 곳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살다가 교회로 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에요.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야 해요.

 

교회는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창세전에 선택을 입은 자들만이 교회로 올 수가 있어요.

이것을 그냥 동호히 모임 하듯이 모이는 것으로 보지 마세요.

우리가 교회로 와서 예배를 드릴 때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느냐에 따라서 그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퍼포먼스로 끝날 수도 있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교회가 동호회 모임이나 비즈니스하는 장소가 되고 말았어요.

그냥 사람들이 모이는 집단이 되고 말았어요.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진정한 의미가 전부 날아가 버렸습니다.

 

마귀가 교회의 본질을 흐려 놓았어요.

모이는 것을 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여 교인들의 편의를 제공해 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쁘면 예배에 빠지고 한가하면 드려지는 선택사항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신앙의 좋은 습관들은 지켜야하는데 지금은 다 무너져 내렸어요.

습관적으로 교회 올 궁리를 해야 하는데 핑계가 생기면 교회 안 올 궁리를 하고 있어요.

이런 것들이 신앙은 관념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임을 취미생활 하듯이 하는 사람들이 믿는 예수는 책 속에 가두어진 예수에요.

죽은 예수에요.

그러니까 교회 생활을 동호회 모임 하듯이 들쭉 날쭉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예수의 생명을 살아가는 것이에요.

생명이란? 살아 있는 것입니다.

꿈틀 거리는 거에요.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아 보세요.

고기들이 파닥 파닥 뛰잖아요?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습도 고기처럼 파닥 파닥 뛰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게 살아 있는 생명인 것입니다.

 

우리 요셉이가 여기 있다가 미국에 갔잖아요.

미국에 가서 동영상을 보내옵니다.

그 걸 보면 하루 하루 자라가는 모습이 너무 흐뭇한 겁니다.

여기서는 걷지도 못하던 애가 지금 거기에서는 걷고 뛰어다닙니다.

하루 하루 쑥쑥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게 생명이에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더 많이 알아 가고, 더 깊이 알아 가고, 더 넓게 알아가면서 우리는 자꾸만 그 은혜에 압도당해 가야 하는 거거든요.

그러면서 삶 자체가 감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발 신앙을 이원화시키지 마십시오.

교회와 가정, 교회와 직장 이것을 이원화시키지 마시란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예수 믿는 척 하고 교회 바깥에 가서는 세상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서는 안 되어요.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동일해야 해요.

 

신자는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해요.

바울이 “산 자나 죽은 자를 심판 하실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한다”고 하지요.

“하나님 앞에서” 에요.

 

“코람데오”

 

교회에서도 ‘코람데오’이고,

가정에서도 ‘코람데오’이고,

직장에서도 ‘코람데오’ 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언약을 주셨어요.

 

신자들은 언약을 품고서 이 세상에 보내어진 자들입니다.

그러면 신자는 세상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언약 정신을 품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도구로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언약이 뭡니까?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로 구원을 받고 하늘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세상에서 빼내심을 입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다가 하늘나라로 가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라고 하셨어요.

우리도 그 정신으로 살아야 해요.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영원한 것처럼 이 세상을 쫓아가며 삽니다.

하지만 성도를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건 우리들의 어떤 행실을 뜯어 고치고 어떤 행위를 잘하라는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치관들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에 지향성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 해보세요.

우리는 죄와 사망 가운데 포로로 잡혀 있던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출해 주셨어요.

죄의 나라에서 의에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땅이 기운으로 살던 자를 하늘에 기운으로 살도록 옮겨 주었어요.

 

그럼 구원받은 자로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까?

당연히 하늘에 기운으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나야지요.

이건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아니에요.

자연히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그 안에서 그렇게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신자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성경과 완전히 괴리가 있어요.

입술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몸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해요.

물론 그게 죄의 본성이라서 그렇게 하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그 본성대로 살 수는 없어요.

싸워야지요.

죄의 본성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헤요.

 

우리는 죄의 포로로 잡혀 있다가 건져진 자들이잖아요.

아들에 나라로 옮겨졌어요.

그 증거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셨어요.

 

성령이 왜? 하늘에서 온 줄 아세요.

우리를 하늘로 끌고 가기 위함입니다.

땅에 기운으로 살지 말고 하늘에 기운으로 살게 하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하늘에 기운을 몰고 오셨어요.

하늘에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 주셨어요.

하늘에 생명의 특징이 하늘을 지향해요.

우리의 생명이 하늘을 지향 할 때 하늘에 생명을 받았다고 할 수가 있어요.

 

뱀에 후손들은 땅에 기운으로 살지만, 언약의 후손들은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요.

살아가는 자세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지향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왜? 찾아 간줄 아세요.

갈대아 우르에서 빼내기 위함입니다.

갈대아 우르 라는 말이 약탈자들이 사는 곳이란 뜻이에요.

 

하나님이 강도들이 우굴거리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빼내기 위하여 찾아 간 것입니다.

어디로 빼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으로 빼냈어요.

 

말씀이 아브람을 가나안으로 소 고삐 끌듯이 끌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람이 말씀을 좇아 가나안 땅에 이르렀더라고 합니다.

이는 말씀이 아브람을 끌고 왔다는 뜻이에요.

아브람이 말씀에 순종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브람을 가나안에 끌어다 놓고서는 네가 거할 땅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이 미지의 세계였듯이 가나안에서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준 것입니다.

 

아브람은 말씀에 이끌려 가면 좋은 땅을 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나안에 끌고 오고서는 네가 살 곳은 여기가 아니고 저 하늘에 있다고 말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보면 믿음이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바라보게 하고서는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게 하였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외국인으로 살아야 할 아브람이 조카 롯으로 인하여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어요.

이제 가나안 땅에서 편히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과 전쟁을 했는데 어찌 편하게 살겠어요.

그래서 불안 해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셔서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라고 합니다.

 

“이 후에” 라는 말은 앞에 장에서 일어난 사건 후에 라는 말입니다.

“전쟁 후에” 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앞 장인 14장에서 뭘 했습니까?



전쟁을 했습니다.

아브람이 포로 잡혀 있던 조카 롯을 자기 집에 있던 사병을 데리고 가서 구출을 해 냈잖아요.

구출해서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이 나타나 이 전쟁은 네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한 전쟁이라고 하니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렸습니다.

 

이 때까지는 좋았어요.

그런데 그것으로 사태가 종결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더 큰 일이 생긴 겁니다.

아브람이 비록 조카 롯은 찾아 왔지만 전쟁이 끝난 게 아니에요.

 

여러분 보세요.

아브라함에게 패한 적국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아니에요.

벌집을 쑤셔 놓은 것과 같아요.

 

그들은 항상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걸 알기에 아브람은 두려운 것입니다.

 

당시에는 전쟁을 사람의 숫자로 했어요.

숫자가 많은 쪽이 유리 했어요.

그런데 아브람은 고작해야 집에서 기른 사병 318명 뿐이에요.

 

아브람 눈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식구들이 많기나 합니까?

그러니 하루 하루가 불안한 겁니다.

 

차라리 적국과 전쟁하지 않고 같이 살았으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했으니까 그 때부터는 서로 전쟁 모드가 된 것입니다.

비록 아브람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쟁을 이겼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세요.

두려워하는 아브람의 모습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람이 두려운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셔서 말씀을 주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 두려워하는 마음 다 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1절을 다시 보세요.

 

1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보세요.

하나님이 두려워하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너의 방패” 라고 합니다.

방패가 뭐하는 것입니까?

전쟁에서 적군의 무기로부터 막아 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역설적으로 이해하면 아브람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무수한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어 있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공격을 받을 때 내가 너를 친히 원수의 칼과 창을 막아주는 방패가 되어 지켜주겠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는 실제로 육적인 전쟁에서 막아 주셨습니다.

실제로 그러셨어요.

 

하지만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영적 전쟁으로 바뀝니다.

신약의 전쟁의 의에 전쟁이에요.

마귀는 쉴새 없이 우리를 참소해요.

이 때 예수님이 자기 의로 방패가 되어서 막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린 여기까지 늘 넘어지면서도 견디어 왔어요.

이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사단의 참소로부터 막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세요.

여기까지 오면서 순탄하게 왔나요?

아니에요.

다 사연이 있어요.

 

우리는 수없이 넘어지고 타락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마귀의 참소를 수없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이건 우리 실력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여기까지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서 우리를 지켜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지켜 주셨고, 지금도 지키시고 있고, 내일도 예수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어서 우리를 막아 주시고 있는 겁니다.

 

마귀는 날마다 우리를 참소합니다.

마귀는 검사입니다.

검사는 사람를 죄로 옭아매어서 감옥에 집어넣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감옥에 넣으려고 참소를 하는데 그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참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정에 재판장으로 계십니다.

우리 옆에는 예수님께서 변호사로 서 계시고, 저 쪽에는 마귀가 검사로 서 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와서 우리를 참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가랴서에 보면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사단이 참소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여호수아의 모습이 불에 탄 거슬린 나무 같다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불에 탄 거슬린 나무같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데 우리도 지금 그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몰골이 그래요.

우리가 아무리 은혜를 입었다 할지라도 우리 삶은 이 말씀을 온전히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이 몸뚱이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씀에 참소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하나님 말씀으로 늘 우리를 참소해요.

 

‘너 말씀대로 살았느냐?’

‘너 그럴 수가 있느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참소해요.

 

제일 저를 많이 참소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제 아내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마귀 역할을 해주는 것입니다.

 

저도 또 제 아내에게 마귀 역할을 합니다.

서로가 참소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힘든 때가 아내가 ‘목사가 왜 그래?’ 할 때 입니다.

그러면 제가 일부러 그러지요.

목사도 사람이고, 목사도 죄인이다! 왜? 그래요.

 

제 아내가 저에게 그렇게 묻는 이유가 뭘까요?

목사라는 직분을 통해서 자기의 유익을 챙기고자 하는 것이지요.

목사는 화 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인 나는 항상 자기를 이해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근데 그게 그렇게 되나요?

안 되어요.

그럼 목사가 왜 그래 합니다.

 

그러면 제가 속으로 그럽니다.

아, 마귀가 또 참소를 하는구나…

우리는 참소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 마귀가 지금 누구를 통해서 일을 합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에요.

우리는 참소하고 참소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 변호사가 되어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3절을 봅시다.

 

요일 2:1-3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사도 요한이 편지를 쓰면서 하는 얘기입니다.

수신자가 누구입니까?

자녀들아! 라고 하지요.

 

자녀들에게 대언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왜? 대언자를 알려 줍니까?

자녀들이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녀 때문에 대언자를 두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았을 때 이 아들이라는 신분 자체는 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부모 자식 간을 천륜이라고 합니다.

 

이 천륜은 깨어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부모가 부모 짓을 못하고 자식이 자식 노릇을 못한다 할지라도 그 부모 자식 관계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이게 은혜의 법입니다.

 

율법도 법이고, 은혜도 법이에요.

율법 아래서는 무조건 정죄 당하지만, 은혜 아래서는 무조건 덮어주어요.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반드시 죽게 되고, 은혜 아래 있는 자는 반드시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사도 요한이 내 자녀들아! 라고 할 때는 너희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질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구원에서 떨어질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야기 하면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내 바램은 너희들이 죄 짓지 않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를 짓더라도 숨지 말고 대언자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앞세우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저도 지금 여러분에게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제 소망이에요.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만 이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 뜻대로 살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사도요한처럼 그러는 겁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까 나오라는 것입니다.

예수 앞세우고 나오라는 겁니다.

 

누구 앞에서? 대언합니까?

아버지 앞에서요.

아버지는 아까 제가 재판장이라고 그랬지요?

마귀는 검사가 되어서 어떻게든 우리를 기소시켜 감옥에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이럴 때 예수님께서 변호사가 되어 당신의 피를 보여 주시면서 ‘저 아이들 죄를 대신해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받을 정죄의 화살을 대신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아브람 언약에서는 여호와가 아브람의 방패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요.

 

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줄게! 라고 하십니까?

이는 아브람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살 때는 동네 유지로 잘 살았습니다.

거기선 힘이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서 빼내서 아무 연고도 없고 힘도 없는 낯선 땅에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람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방패이고 상급이에요.

 

아브람이 살아갈 당시는 부족 국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런 연고가 없는 땅에 자식도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은 언제 어떻게 죽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인 것입니다.

 

실제 자기 아내가 애굽에 가서 겁탈당하는 상황까지 겪었잖아요.

그러니 아브람은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전쟁 통에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조카 롯이 전쟁 포로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무슨 영웅심이 발동됐는지 적국에 가서 싸워 그를 구출해내기까지 한 것입니다.

근데 그게 덜컹 죽음에 냄새를 풍기고 만 것이 되었어요.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에서 하물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난 후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죽이지요.

그러자 야곱이 야~! 이 놈들아 왜 죽음에 냄세를 풍겼느냐고 하는 것과 같아요.

 

이제는 아브람이 가나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지켜주셔야지만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얘기해 주시는 겁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앞으로 너를 공격하는 어떤 세력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내가 방패가 되어서 너를 지켜 줄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아브람처럼 두려워하잖아요.

사단의 세력들이 쉬지 않고 공격하잖아요.

그럴 때 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막아 주신다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브람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울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오해를 받을 때마다 ‘아버지…아시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위로를 해 주십니다.

 

여러분 보세요.

우리가 언약을 품게 되면 그 순간 마귀의 표적이 되어 버립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고 나서 사가랴를 찾아갑니다.

그 때 사가랴가 하는 말이 “이 아이는 많은 사람들의 흥함과 패함을 위한 하나의 표적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리아야 네 마음이 칼이 너를 찌르듯이 아플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마리아가 예수를 품었기 때문에 많은 아픔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품었기 때문에 수많은 비방이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 아픔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겨냅니까?

우리는 못 이겨냅니다.

 

우리는 그런 비방이나 오해나 음해를 당할 때는 그냥 도망가고 싶습니다.

아무 것도 하기 싫어요.

저도 하루에도 수없이 이 목회를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그냥 안했으면 좋겠어요.

 

가장 좋은 게 신자로서 조용히 사는 겁니다.

내가 무슨 말씀을 많이 깨닫는 것도 없는데 이걸 전한다고 욕 먹고 그러는 게 저도 힘들어요.

글을 쓰는 게 두렵습니다.

힘이 들어요.

좋네! 나쁘네! 말이 많잖아요.

 

물론 이런 것조차도 다 초월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안 됩니다.

마음은 초월해야지! 하지요.

그런데 안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픈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짐으로 다가온단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 자체가 때로는 우리에게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

그냥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그게 안 된단 말이지요.

왜요?

 

하나님께서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불 가운데 지날찌라도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고 물 가운데 지날지라도 물결이 너를 엄몰치 못할 것이다 라고 했거든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 가운데 집어넣고 물 가운데 집어넣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은 천국 가는데 필수 코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기를 통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아 홍수 시대를 말할 것 같으면 이 세상 자체가 물바다가 되었잖아요.

결국 이 세상은 물에 엄몰당해 있는 것입니다.

 

그 물이 뭡니까?

비 진리고 뱀의 사상인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이 구정물에 엄몰된 상태인 것입니다.

각종 비진리가 난무하잖아요.

이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라는 방주에 태워서 지켜내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 하나님께서 저주의 비를 뿌릴 때 그 저주의 비를 누가 맞았습니까?

방주가 맞았지요?

방주 안에 있는 노아는 평안히 살았습니다.

그 방주가 신약으로 오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저주의 비를 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죄를 멸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향하여 분노의 화살을 쏘아대고 저주를 퍼부으십니다.

그런데 그 저주를 지금 예수님이 담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고 계시는 겁니다.

 

시편을 읽어 보세요.

다윗이 도망 다니면서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오,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오, 라고 하지요?

여러분,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오, 산성이시오, 라는 이 말은 전쟁 상황에서 실제 쫓겨봐야 실감을 해요.

집 안에서 땅콩 까먹으면서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오, 산성이시오, 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실제 그런 상황에 맞닥뜨려 졌을 때 비로소 진짜 그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을 당해 봐야, 그 고난 속에서 ‘아버지! ‘ 하고 찾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진짜 많이 울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하나님…아픕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아니에요!

사랑은 아름답지 않아요.

아파요.

 

얼마나 아픈지 아세요?

사랑이 좋다고 하는 사람은 진짜 사랑을 안 해봐서 그래요.

진짜 사랑을 하면 아픕니다.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갈 정도로 아파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덮쳐 오니까

마귀란 놈은 그 사랑을 빼앗기 위해서 계속해서 우리를 참소합니다.

그럴 때 마다 예수님께서는 ‘낙원아…네가 받을 그 참소 내가 받았느니라,

네가 당할 그 아픔을 내가 십자가에서 다 졌느니라, 넌 나만 믿어라,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아 무수한 적들이 너를 공격하고 앞으로 네가 살아가는 삶이 고달프겠지만 그럴 때마다 이겨내라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주고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고 하십니다.

 

이게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의 방패가 되고 내가 너의 상급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봅니다.

 

1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상급’은 ‘싸카르’라고 하는데,

이 뜻은 전쟁에서 이기고 얻어진 전리품이라는 것입니다.

전부 전쟁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네가 앞으로 전쟁을 많이 당하게 될 터인데,

그럼 적으로부터 오는 모든 화살은 내가 막아 줄게,

그 전쟁은 반드시 이기게 해 줄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기게 해 준 그 영광은 네가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무슨말인가 하면 하나님이 이긴 전쟁의 혜택을 우리가 입는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이 하고 열매는 우리가 먹는 갓입니다.

그것을 ‘상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육에 속한 자들은 상급론으로 말하고 면류관으로 이야기 합니다.

교인들에게 상급 많이 받으려면 교회에 충성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리고는 성경에 나와 있는 면류관 얘기를 하면서 생명의 면류관이니 영광의 면류관이니 하면서 면류관을 열 개를 쓴다느니 다섯 개를 쓴다느니 그러고 있습니다.

이 말이 뭔지도 모르고 문자적으로 쓰고 있어요.

 

그래서 흔히들 하는 얘기가 교회 충성 봉사 많이 하면 천국에서 많은 상을 받는다고 합니다.

여기에 미혹당한 교인들은 천국에서 상을 많이 받으려고 죽을 듯이 해요.

거짓 목사들이 교인들의 충성을 끄집어내고자 상급론 이론을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상급받기 위해서 충성 봉사하는 거면 그건 뇌물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뇌물 안 받으세요!

충성 봉사를 해서 상급 받는다고 하면 지금 사기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충성 봉사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너무도 고맙고 감사해서 내 안에서 헌신이 격발되어 나오는 것이지 그걸 내가 함으로 해서 댓가를 받아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셔서 전쟁 용어를 쓰면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얘기합니다.

내가 너를 지켜줄게,

내가 너의 방패가 되고 너의 상급이 되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가 아브람의 상급이 된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하시는 전쟁의 승리로 얻어지는 영광에 아브람 너를 동참 시켜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 보면 주인이 자기 소유를 종들에게 각각 맡기고 멀리 떠납니다.

집을 비워요.

그러면 그 종들이 주인이 준 것을 가지고 이문을 남깁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하는 애기가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합니다.

 

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시키는가요?

주인의 것으로 장사했기 때문이에요.

종들은 자기 것으로 장사한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장사해서 이문을 남겨도 그건 주인 것이지 자기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주인이 종에게 수고 했다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인과 종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너를 대신하여서 전쟁을 해 줄게,

너는 전리품을 챙겨,

그러는 겁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의 신앙으로 적용 시켜 봅시다.

우리가 교회에 봉사하고 연보하고 충성하고 하는 것들은 은사에요.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엡 4:7-12=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각 사람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선물이 어떤 건가요?

사도이고 선지자이고 복음 전하는 자이고 교사이고 목사이지요.

이건 교회 일꾼들을 말해요.

교회의 일꾼이 선물이에요.

예수님이 교회 일꾼을 세운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자 함이에요.

 

목사가 어디에 필요한가요?

교회에요.

교회에서 성도를 섬기는 것이에요.

이게 그리스도가 주신 선물이에요.

은사에요.

 

이 은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하나님의 집에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은사 받은 종들이 일을 하면 집안이 잔치 집이 되는 겁니다.

왜? 은사를 주느냐? 일을 즐겁게 하라고 주셨어요.

은사로 일하면 즐거워요.

그럼 주인도 즐겁고 일하는 종들도 즐거워요.

이게 천국이에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사로 봉사하고 충성한 것을 가지고 “나 상급 주세요” 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교회를 섬기고 성도를 섬긴 것 자체가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즐거움에 동참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주인의 잔치에 초대 받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에요.

 

교회에 오는 것이 이런 마음으로 와야 해요.

주인의 진치 집에 초대 받은 심정으로 말이에요.

그래서 제가 교회에 올 때 손님으로 오지 말라고 그러는 겁니다.

손님이 되니까 교회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손님이니까 사랑이 있네! 없네,,

오늘 설교 잘하나 못하나 한 번 보자! 그러는 거에요.

철새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 남의 집처럼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란? 한 성령을 마신 지체들이 모인 곳이잖아요.

울 때 같이 울어주고 웃을 때 같이 웃어 주어야 해요.

희.노.애.락을 함께 해야 하는데 손님이다 보니까 구경만 하는 것입니다.

한 몸으로 참예함이 없어요.

이게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합니까?

 

우리의 신앙 경력이 얼마입니까?

속된 말로 짠 밥이 얼마나구요.

그런데 아직도 주일날 교회 찾아오는 것을 못하고 있어요.

교회 오는 날보다 안 오는 날이 훨씬 많잖아요.

 

결국 관심사가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화려함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롯이 요단 들판의 그 풍요로운 땅을 좇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곳은 유황불이 쏟아질 곳인데 그걸 모르고 가는 겁니다.

불나방처럼 불이 좋아서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쫓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한 번 반추해보세요.

내가 살기 좋고 환경 좋고 할 때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안합니다.

나중에 힘들고 나면 그제서야 천부여 의지 없어서 하고 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세요.

 

왜?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절대 너는 포기 못한다고 했어요.

우리를 만신창이로 만들어서라도 그 자리에 끌고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신자의 운명이에요.

왜? 그런가요?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니까요.

 

아브람이 지금 그런 운명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 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아브람의 일생을 보세요.

순종하지 않았어요.

 

이스마엘과 이삭은 불순종의 산물이에요.

이스마엘은 아들을 준다고 했는데도 못 믿고 자기들 힘으로 낳은 자식이고,

이삭은 아들을 준다고 하였음에도 비웃음으로 낳은 자식이에요.

둘 다 불순종의 자식이에요.

마누라도 두 번씩이나 팔아 먹고 했어요.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어요.

이것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할 말이 없어요.

왜냐?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뭐냐?

하나님만 바라 보고 사는 거에요.

약속 믿고 사는 거에요.

우리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아가기를 원해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게 안 되어요.

 

우리 몸은 우리가 마음 먹은 대로 안 움직여요.

그럼 자살해야 하느냐?

아니에요.

그럴 때 마다 우리는 또 주님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시고 우리의 상급이 되신다고 하셨으니까

여호와께서 우리와 전쟁을 하여서 우리를 기어코 구원을 해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전쟁의 전리품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이루세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전쟁을 하여서 이루어 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쟁에서 얻어진 전리품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전리품은 자기 기쁨이 없습니다.

전리품은 나를 포로에서 구출해주신 그 분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여호와께서 여호와 자신이 아브람에게 ‘방패이고 상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 자체가 상급입니다.

천국에 가서 큰 집 작은 집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상급은 없습니다.

만약에 천국에 큰 상급과 작은 상급이 있다면 거기에도 또 차등이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차등의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은 마치 포도원과 같아요.

포도원 품꾼 비유를 보세요.

아침 일찍 들어간 종아니 저녁 늦게 들어간 종이나 차등이 없잖아요.

차등을 바란 자들은 악한 자들이에요.

놀던 자들에게 포도원에 불러준 것 자체가 상이에요.

 

우리의 구원이 상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우리의 상으로 주어졌다니까요.

예수님 자체가 우리에게 상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 예수로 인해서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 같은 인간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해 주셨구나’, ‘살려주셨구나’ 라는 것이 깨달아지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두려워 떠는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셔서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그 당시에 부족 국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물질도 많아야 하고 자식도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자식이 하나도 없어요.

 

15장 1절에 보니까 두려워말라고 하지요.

 

아브람이 왜 두려워할까요?

아브람이 두려워하는 이유가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지금 아브람이 뭔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무자하오니’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뭘 두려워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 몸에서 난 자식은 한 사람도 없는데 자기 생명은 풍전등화처럼 계속해서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괜히 롯을 구하는 전쟁을 하여서 죽음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이런 상태에서 아브람이 두렵지 않으면 그게 뭔가 잘못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오니까 아브람이 대뜸 하는 소리가 자식 낳게 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자식이 하나도 없으니까,

나를 지켜줄 자가 없으니까,

그래서 두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나가서 하늘에 있는 별을 보고 가르치는 겁니다.

네가 지금 자식이 없다고 하는데 그 자식 내가 많이 만들어 줄게 라고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아! 너 저 하늘에 있는 뭇 별들을 네가 셀 수가 있겠느냐? 묻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못 세겠는데요!…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내가 네 자식을 하늘에 별처럼 많이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아브람은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식으로 생각했을까요?

아브람은 아직 하나님을 몰라요.

지금 배워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아직은 하나님을 자기 상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나이가 많은데 앞으로 자식을 몇 명이나 놓을 수 있겠느냐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생산될 것을 어떤 식으로 애기하는가 하면 창조의 방식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주겠다고 하신 것은 별을 만드는 방식으로 낳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별을 창조하실 때 한 개 만들고 두 개 만들고 했나요?

아니지요.

일순간에 다 만드셨지요.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도 이러한 식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만들고 두 사람 만들고 이러지 않는다니까요.

말씀으로 하늘에 별이 있으라! 하면 수많은 별이 생겨났듯이 아브람 후손도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에게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 밀알은 한 알이지만 그것이 죽으면 그 밀알 속에서 무수한 밀알이 생산되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 한 분 죽으셨지만 예수님 속에는 수많은 자기 백성들이 나왔어요.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어 있는 그 백성들이 예수님 속에 들어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예수님 속에 있는 것들이 빠져 나온 것입니다.

마치 생선 배를 가르면 알이 튀어나오듯이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예수 안에 있는 예수의 새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자기 백성 낳으려고 오신 거에요.

 

이게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나타났어요.

성령이 임하자 일순간에 한 나라가 만들어졌어요.

이것을 창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나가서 하늘의 별을 창조했듯이 내가 너의 후손을 한 명 두 명 낳는 것이 아니라 일순간에 다 낳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아직까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하나님께서 별을 창조하실 때 한꺼번에 만드셨다고 햇잖아요.

별이 있으라고 하자 수많은 별들이 만들어졌어요.

지금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저 삼라만상이 한 순간에 만들어 졌다니까요.

수많은 별들이 하나님께서 있으라 하심에 있어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내가 네 백성을 그렇게 만들어 줄게!

인간의 방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 방법으로 생산을 해낸다는 것입니다.

 

근데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람이 그것을 믿음에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아브람은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이 사실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믿었다’ 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런 말을 하잖아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탄핵하면서 “네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면 아브라함 자손의 행세를 해야 할 것 아니냐” 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도 내 때를 보고 즐거워했고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다” 라고 하지요?

 

그럴 때 사람들이 뭐라 그래요?

나이 오십도 안 된 사람이 무슨 말이냐?

아브라함이 언제 적 사람인데 라고 하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빌려 보면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예수님이 계셨고, 아브라함도 내 때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성령으로 아브람의 눈을 열어서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생산해내는 데 창조의 방식을 동원해서 구원 할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네 후손을 하늘에 별과 같이 많게 해 준다는 것을 성령에 의해서 믿을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언제 예수님을 만났나요?

오늘 만난 거에요.

 

아브람을 찾아오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구약의 여호와가 신약의 예수님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금 아브람에게 장차 예수님이 하실 일을 설명을 해 주신 겁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아~! 하고 믿은 거에요.

 

우리가 믿음을 받으면 미래에 되어 질 것을 현재화해서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묵시 안에서 완성 된 것을 믿어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믿음으로 장차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현재로 본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이런 얘기를 해줄 때,

아브람이 믿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 시켜보세요.

믿음은 묵시에 속한 것을 믿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묵시는 과거이면서 미래에요.

 

이렇게 그림을 그려 보세요.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나라에요.

영원한 나라에서 언약을 세워서 만들어진 것이 이 세상이에요.

역사에요.

 

그러니까 역사는 영원과 영원 사이에 조그만 점처럼 삽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걸 시편에서는 한 경점이라고 합니다.

역사의 시작 전에도 영원이고 역사의 끝 이후에도 영원이에요.

역사적 관점에서는 앞에 있는 영원은 과거가 되고, 뒤에 있는 영원은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오면 과거의 것을 현재화시키기도 하지만, 미래의 것을 현재화시키기도 해요.

이걸 예수님처럼 말하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표현을 하는 겁니다.

우리도 그래요.

 

믿음은 역사를 뛰어 넘어서 바라보게 해요.

성령이 오면 역사 속에서 영원으로 살게 하세요.

믿음이 영원 속에 있었던 일을 역사로 살게 하세요.

이게 예수 안에서 주어진 구원이에요.

 

우리는 지금 2014년을 살고 있지만 믿음이 오면 아담 시대를 볼 수가 있고 또한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을 멸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오는 그 천국의 모습들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받으면 아브라함 시대나, 지금 시대나 다 이해가 되고 하나님 나라인 그 천국의 모습도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그 언약을 현실 속에서 현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천국을 앞당겨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잖아요.

흑암의 나라에서 빛의 나라로 옮겼다고,,,

과거 시제로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천국이라고 하면 육신적 천국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바라는데,,,

육신적 천국 개념은 등 따습고 배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을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그런 나라가 아니고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곳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비록 살아가는 삶이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복음으로 인해서 마음의 평강을 받고 위로를 받고 산다면 현재 천국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고후 1:3-7=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환란이 나오고 위로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이라고 합니까?

자비의 하나님이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하지요.

 

이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한다고 합니까?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 한다고 하지요.

하나님은 위로를 알게 하시려고 환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위로를 설명할 길이 없어요.

위로는 환란을 통해서만이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환란에 던져 놓고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환란에 던져지고 나니까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란에 던진 것은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역설을 아셔야 합니다.

 

위로가 될려면 그 반대의 상황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위로가 된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위로를 알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위로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 속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그게 환란이에요.

 

이런 환경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겁니다.

이것이 아브람 식으로 말하면 적국들이 계속해서 공격해 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우리에게 말하면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많은 아픔을 당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들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현실을 보지 말아라!

보이는 것은 허상이고, 실상은 하늘에 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다!

이 세상은 안개 같은 곳이니 집착하지 말아라!

네가 가야 할 곳은 영원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게 깨달아지고 믿어지면 어려운 현실 속에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복음을 모른 채 율법으로 목회를 할 때는 동료 목사들을 만나는 게 창피했습니다.

그 분들 교회는 부흥이 되어서 교회를 짓는다고 하는데 저는 맨 날 봐야 작은 숫자인 겁니다.

그러니까 자존심이 상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 때는 노회에도 안 갔습니다.

왜냐하면, 거기 가면 첫 인사가 요새 교회 부흥 많이 됐지요? 입니다.

화두가 교회 부흥이에요.

부흥이 되는 사람들을 좋겠지만 저 같이 안 되는 사람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요.

상대적인 열등감이 어느 샌가 적개심으로 나타나요.

왜요?

내가 가지지 못했으니까요.

한마디로 쪽팔리는 겁니다.

 

근데 복음을 알고 난 후 달라졌어요.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죽기 전에 복음을 전하는데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더라는 말이 나오지요?

이게 위로가 되는 거에요.

 

바울이 사람들을 엄청 많이 모아서 전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그 당시에는 그런 걸로 위로를 받았다니까요.

만약에 그런 위로가 없었다면 전 목회를 계속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전에 말씀 드렸지요?

너무 힘드니까 목회를 그만 두려고 사십일 금식을 들어갔습니다.

한 달 만에 끝났지만요.

아내에게 명분이라도 줘야 하잖아요.

 

좋은 직장 그만두고 목회 한다고 했을 때 아내가 얼마나 반대했는데요.

그런데 몇 년 안돼서 못하겠다고 하니까 아내가 절 어떻게 보겠어요?

궁리 끝에 합리적인 방법이 뭔가 생각하다가 금식을 택한 것입니다.

제가 믿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 달 만에 개미를 통해서 구원의 비밀을 깨닫고 내려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제게 눈을 열어 주셔서 복음이 믿어지게 하고 창세전 언약이 깨달아지는 환경을 조성해 주시더란 말이지요.

교회 부흥과 전혀 상관없는 말씀을 주시더라고요.

창세전 언약을 깨닫고 나서 엄청 많이 울었어요.

진짜 많이 울었습니다.

기쁘고 감사해서 울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교회의 외형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로지 말씀이 보이는 겁니다.

말씀이 달음질을 하니까 그 땐 밥을 안 먹어도 배가 고픈줄 모르고 살았어요.

그래서 밥만 먹으면 말씀과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달음질을 하니까 교인들의 수가 많고 적고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것은 허구이구나!

그러니 교인 숫자 작다고 해서 기죽을 일도 아니고 낙심할 일도 아니라 것으로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 위로가 없었다면 전 지금 여기에 못 있습니다.

지금도 그 위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자식 키울 때 보면 그렇잖아요.

부모들이 자식을 키울 때 너무 잘나지도 못하게 하고 너무 못나지도 못하게 하잖아요?

잘났을 때는 너무 나대지 말라고 하고, 못났을 때는 위로해 주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다루어가십니다.

너무 교만치도 못하게 하고 너무 낙심치도 못하게 합니다.

 

그런 위로와 기쁨들을 사도 바울 식으로 말하면 성령 안에서 주는 의와 평강과 기쁨인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에게 와 있는 하나님 나라는 물질적 가치 개념의 나라가 아니고 영적 가치의 하나님 나라가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없음 속에서도 언약 하나 믿어지니까 이 언약 때문에 감사가 나오고 고마움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와서 “두려워말라 내가 너의 방패가 되고 상급이 되리라” 하고 위로를 해주고 자식이 없다고 그러니까 자식도 많이 주신다고 하잖아요.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럽니다.

아브라함이 낳을 자식은 이삭이 아니고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이삭은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자식을 하늘에 별과 같이 낳았어요.

그래서 이사야서에서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기뻐하라 그래요.

이건 자녀를 생산치 못한 자가 많이 낳는다는 것입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는 인간적 방법으로 자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으로 자녀를 생산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해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하신 언약이 예수님이 오시고 성령이 오고 나니까 구체화되어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난 후 베드로가 한 번 외칠 때 마다 삼천 명 오천 명이 돌아오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건 숫자적인 개념으로 보지 마세요.

성령 안에서 수많은 무리들이 일순간에 일어나서 교회라는 한 나라를 만들더라는 것을 실제이지만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 오천 명 일어나는 그것은 날마다 주께서 구원 얻는 숫자를 더하게 하시더라고 하지요?

이 말의 원 뜻은 삼천 명 오천 명이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해 내시는 것입니다.

하늘의 별을 만드는 창조의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서더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양들을 불러낸다고 하셨어요.

나는 목자라 내 양들은 내 음성들을 아는 고로 따른다고 하셨어요.

예수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온 천하에서 자기 양들을 불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그 성령이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전부 예수님의 품으로 불러들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 불러들임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가본 적도 없고 예수님을 만나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믿어지고 그 예수가 지금 우리 안에서 구주로 와 계신단 말입니다.

천국이 믿어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어지니까 오늘도 이렇게 그 믿음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이 땅에 살면서 삶이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그 삶으로 인해 낙심하지 마세요.

그것들은 전부 안개 같은 것입니다.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 자체를 큰 맷돌로 비유를 하십니다.

맷돌을 바다에 던지니까 일순간에 보이지 않은 것같이 이 세상 자체도 맷돌과 같이 하나님께서 바다에 던져 버리면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걸 성경을 통해서 각양의 모습으로 보여주십니다.

 

구약에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철옹성 같은 여리고성이 그냥 하나님 나팔 소리에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도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이 세상은 전부 사라져 버리고 새 예루살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안에 내려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새 예루살렘이 와 있다니까요.

이게 믿어지는 사람은 그것으로 사는 것이고,

안 믿어지는 사람은 보이는 예루살렘, 즉 세상을 좇아갈 것입니다.

 

암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나라를 제시해 줍니다.

하나님이 창조의 방법으로 만들어 낸 자들이 사는 나라를 이야기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안에 내 나라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언약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 아브람을 찾아가서 불러낼 때는 복의 조상이 되게 해 주겠다고 했지요.

그 때는 말로 했는데 이제는 체결을 하는 것입니다.

실제 언약 체결 식을 하는 겁니다.

 

그 체결을 어떤 식으로 하는가 하면 이 언약은 하나님 스스로 지켜낸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목숨을 담보로 해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죽음으로 이 일을 이루어내시겠다는 의지이고 맹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자기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한 것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지켜내시는 겁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구체화 돼서 나타났을 때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쪼개서 아브라함에게 줬던 그 언약들을 이뤄내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식을 이 죄악 된 세상에 던져 놓고 팔장 끼고 놀고 계시지 않는단 말입니다

끝까지 찾아 가서 보살피시고 그들을 보듬어 안으십니다.

지금 그 보듬어 안으심이 우리를 이 자리까지 오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신들의 삶의 궤적을 한 번 뒤돌아보세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보세요.

 

저는 너무 너무 힘들게 왔습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기까지 간섭하신 것을 저는 돼지몰이로 비유를 합니다.

시골에 가면 돼지몰이 할 때 작대기 하나 들고 이리 저리 몰이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그렇게 간섭을 하시는 겁니다.

결국 이 자리에 세우신 것입니다.

언약의 자리,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가 되는 그 자리에 우리를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가서 내가 너를 복의 조상 만들어 준다는 이 말은 아브라함의 외형적인 조건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건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아내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은 아브람을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아브라함 되게 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간섭하여 복의 조상의 자리로 끌고 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갈대아 우르 같은 죄악 된 이 세상에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불러 내 주셔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희미하게 알았던 그 하나님을 점점 더 확연히 드려내 주셔서 알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더 많이 알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많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섭을 해 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깨닫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셔서 들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에바다!’ 하시니까 들려지는 거에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복음이 들려지고 보여지게 해주시니까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인 것입니다.

감사 이외는 할 말이 없어요.

 

하나님이 감사의 자리로 끌고 가세요.

감사 할 수밖에 없는 자리로 끌고 가십니다.

감사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이런 자리로 데려 가십니다.

이게 우리가 받은 상급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라는 것이 상급입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여호와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키십니다.

이 보다 더 큰 상이 어디에 있나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루 하루 믿음으로 감사하는 자리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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