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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25강. 아브라함 전쟁의 전리품과 십일조 (창 14:1-24)

by coroa 2021. 2. 23.

 

마가 13: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25강. 아브라함 전쟁의 전리품과 십일조 (창 14:1-24).-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 장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들을 예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통해서 일하시는 모습이 바로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실 일들이라는 것을 예표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도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이 전쟁 포로로 잡혀간 조카 롯을 구출해 오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이 전쟁 포로로 잡혀간 조카 롯을 구출해 오다가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그리곤 십일조를 바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통해서 자기가 전쟁에 이기고 포로로 잡혀 있던 조카 롯을 구출한 것이 자기 힘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게 됩니다.

 

오늘 이 본문은 민감하게 생각하실 수 있는 내용입니다.

십일조 이야기를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십일조 이야기를 하면 또 돈 내라는 소리를 하느냐 라고 하면서 모두들 인상을 찌푸리잖아요.

 

십일조 이야기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두 가지 병폐 때문입니다.

하나는, 십일조를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거짓 목사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교인들의 돈을 울궈 내는 수단으로 악용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빚 받고 수금 하듯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의 마음이 완악하여서 그래요.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신으로 섬기니까 돈 이야기를 하면 본능적으로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만큼 신앙을 자기 유익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십일조의 의미는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잘못 가르쳤어요.

우리가 잘못 배워 왔고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니까 잘못 가르치게 되고, 잘못 배우게 된 것입니다.

설령 목사님들이 잘못 가르쳤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의미를 바로 알면 속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알고자 하지 않았어요.

그냥 목사님들이 가르치면 그게 하나님 뜻이라 여겼어요.

 

목사들은 무조건 목사의 말에 순종하여야 좋은 신앙이라고 가르쳤고,

교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배워 왔기 때문에 속이고 속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오늘 말씀을 곡해하지 마시고 잘 들으셨으면 합니다.

헌금 설교는 자칫하면 시험에 들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십일조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시험에 들지 마시고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십일조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가야 하잖아요.

우리가 비록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정답을 알아야지요.

정답을 알아야 그 말씀에 비추어서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들이 일어납니다.

 

우린 말씀 앞에 서면 작아 져야 해요.

유구무언이 되어야 합니다.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인만 바라보는 개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시간 땅을 차지할 때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양보를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롯의 눈에는 요단 들판이 에덴동산 같이 보였어요.

물이 넉넉해서 애굽 땅 같이 살기 좋은 곳으로 보여서 그 땅을 차지합니다.

 

중요한 것은 롯은 에덴동산을 애굽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애굽이 어떤 곳입니까?

성경은 애굽을 하늘나라와 반대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가르쳤습니다.

떡으로 살던 곳은 애굽입니다.

그럼 애굽이란? 떡에 가치로 사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롯이 물이 넉넉한 요단 들판을 에덴동산과 같고 애굽과 같다고 한 것은 롯은 천국을 등 따습고 배부른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육에 속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관이에요.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천국은 떡에 가치로 사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과 화목 된 가치로 사는 곳이란 말입니다.

 

잠언서에 보면 집안에 육선이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광야에서 초막 짓고 채소를 먹더라도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고 하지요.

이는 사람의 행복은 떡에 있지 않고 화목한 관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서로 차별이 없고 동등한 관계가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천국이고 예수 안이에요.

롯이 바라본 요단 들판을 영적으로 말하면 지금 이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 눈에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보입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화려하게 보인단 말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의 매력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는 롯처럼 세상에 포로로 잡히고 말아요.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라함과 롯을 같이 붙여 놓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예표로 하고 있고, 롯은 우리를 예표하고 있어요.

롯이 좋다고 기껏 쫓아가는 곳이 강도들이 우굴거리는 곳입니다.

지금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받기 전인데 그 곳은 너무도 화려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 눈에는 이 세상이 그렇게 화려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그러잖아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런 것들이 전부 세상으로부터 쫓아 온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쫓아온 그런 것들을 우리는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그런 것들을 추구합니다.

 

우리 앞에는 요단 들판처럼 에덴동산같이 물이 넉넉한 보기 좋은 땅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쪽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불나방이 불을 보면 자기가 죽을 줄도 모르고 본능적으로 뛰어들듯이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흙에서 난 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만 뜨면 세상 것을 쫓아갑니다.

그런데 그곳이 강도들이 우굴거리는 곳입니다.

 

지금 롯이 쫓아 간 그 곳에 연합군들이 전쟁을 벌입니다.

서로 뺐고 빼앗김을 당하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세상 축소판과 같은 모습입니다.

 

전쟁이 왜 일어납니까?

내 배를 채우기 위해 남의 입에 들어가는 떡을 빼앗으려 하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은 밥그릇 싸움이에요.

전쟁의 근원에는 탐욕이 있어요.

이 탐욕은 죄로 인해서 왔습니다.

 

십계명에 보면 하나님께서 죄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들을 쭈욱 열거 하는데 전부 남을 헤치는 것들이에요.

도적질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사기 치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결국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늘 전쟁은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 자체가 하나의 전쟁터에요..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삶으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잘 보세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잘 살펴보면 전부 전쟁 용어에요.

스포츠 경기를 해도 전부 전쟁 용어를 씁니다.

정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 공부도 마찬가지에요.

 

선거할 때 보세요.

상대방은 타도의 대상이에요.

전쟁입니다.

 

아이들이 학교 공부도 마찬가지에요.

학교에서는 살아남는 비법을 가르치고 있어요.

결국 남을 죽어야 내가 산다는 전쟁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들의 의식 구조 속에 죄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내가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죽여야 한다고 여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죽여야 살 수 있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이러한 세상이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보입니다.

 

롯이 대표적인 샘플로 여기에 투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롯을 통해서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롯을 다른 사람이라고 여기지 마세요.

‘내가 롯이다’ 라고 보셔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롯과 같은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예수님이 똑같이 아브라함과 롯처럼 세워놓고 우리에게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고 물으시면 우리도 롯처럼 내 눈에 보기 좋은 곳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롯이 선택한 곳이 결국엔 서로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강도들이 우굴거리는 세상이더란 말입니다.

그러한 세상에 롯이 포로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포로로 잡혀 있는 롯을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 있는 병사들을 데리고 가서 구출해 옵니다.

 

구약에 나타난 모든 전쟁은 신약으로 얘기하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마귀로부터 빼앗아 내는 전쟁의 모형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원해 낸 것은 신약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낸 것과 같습니다.

 

본문을 잘 봅시다.

지금 롯이 사는 곳의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2차 대전이 일어나듯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롯이 사는 나라가 전쟁에서 패하는 바람에 롯이 포로로 잡혀 가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아브라함이 들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 롯을 찾아오기 위해서 자기 집에 있는 사병들을 데리고 전쟁을 하려고 간 것입니다.

 

말은 사병이라 그러지만 실제로는 노비들입니다.

전쟁하는 군사들이 아니고 양치고 농사짓는 목동이고 농부들이에요.

그런데 그들을 데리고 가서 연합군을 이기고 롯을 찾아옵니다.

 

이건 기적이에요.

저쪽은 잘 훈련 된 군사들이 있었어요.

역전의 용사들이 진치고 있어요.

연합군들과 전쟁을 해서 승리한 군사들이에요.

사기가 충천되어 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사병들은 오합지졸이에요.

도무지 이길 수가 없는 전쟁이에요.

그런데 이겼어요.

아브라함도 의아했을 겁니다.

 

암튼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포로로 잡혀 있던 조카 롯을 찾아오는데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가로 막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면서 축복을 하고 이야기를 해 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네가 전쟁에서 이긴 것은 하나님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전쟁은 네가 한 것이 아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너에게 적군을 붙여주어서 이기게 한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얼른 전쟁에서 이기고 빼앗은 전리품 중에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몽땅 하나님 것이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생각하기를 어쩐지 전쟁이 쉽더라…하면서 이 전쟁은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한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이게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십일조입니다.

여러분이 십일조를 이해할 때 여기서 풀지 않으면 십일조가 해석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포로로 잡혀 갔던 롯을 끄집어 내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예표의 인물이에요.

누구를 예표합니까?

예수님이에요.

 

그럼 아브라함 전쟁을 신약식으로 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전쟁의 예표가 됩니다.

이러면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롯을 구출해 왔다면,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 전쟁을 통해서 누군가를 구출해 내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렇지요.

 

신약에서 예수님이 누구와 싸우셨습니까?

마귀와 싸웠지요.

신약에서의 전쟁은 예수님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고 조카 롯을 끄집어 내오면서도 아브라함은 이 전쟁이 어떤 성격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이라는 분이 나타나 이 전쟁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이 멜기세덱은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이 나타나서 하는 소리가 ‘이 전쟁은 네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붙여서 한 전쟁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빼앗아 온 전리품을 아~! 이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고백으로 십분의 일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십분의 일을 드렸다는 것은 전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십분의 일이라는 것은 맏물 개념이에요.

맏물의 개념은 ‘나머지 아홉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란? 열 개 중에서 한 개만 드리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몽땅 하나님 것입니다’ 라는 개념이 담겨져 있어요.

이게 나중에 율법 속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는 아직까지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은 율법과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그 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아브라함이 죽고 난 430년 후에 주어졌어요.

아브라함 후손들에게 율법이 주어졌어요.

그런데 율법 속에 아브라함이 드렸던 십일조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누구에게 주었습니까?

아브라함 후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 아브라함 후손들이 어떻게 출애굽을 하였나요?

하나님이 바로와 싸워서 이기고 찾아 온 자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출애굽 한 이스라엘은 모두가 하나님의 전리품인 것입니다.

 

전리품은 누구의 것입니까?

전쟁에서 이긴 사람의 것이지요.

누가 전쟁을 하였나요?

하나님이 하셨어요.

그럼 이스라엘은 전부 하나님의 것이 되지요.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려 주려고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긴 전리품을 하나님이 십일조로 받았듯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도 율법으로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이건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열 개 중에서 한 개를 바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내 전부가 하나님 것입니다 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이 의미를 알고 드려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됩니다.

잘 보세요.

 

아브라함이 창세기 14장에서 한 십일조가 430년 후 출애굽기에 가서 출애굽을 한 그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율법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면 그 율법 속에 들어가 있는 십일조의 의미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하면 지금 이 아브라함의 십일조에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최초로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했는데,

이 십일조가 아브라함이 죽고 난 후 430년 뒤에 율법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의 십일조 신앙을 가르치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 속에 십일조가 들어 간 이유를 분명하게 얘기해 주십니다.

 

민수기 3장 11-13절까지 입니다.

 

민 3:11-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 한 지파를 하나님의 첫 것으로 선택을 해 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 한 지파를 선택했는데 그 지파가 레위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를 선택하시면서 이 레위 지파는 너희 열 둘 중의 첫 것을 대신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의미를 알려 주십니다.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장자들이 다 죽을 때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로서 내가 너희들을 살려냈다’ 라고 하십니다.

너희들도 애굽의 장자들같이 다 죽어야 될 자들인데...

흠 없는 어린양의 죽음으로 너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첫 것은 내게 바치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첫 것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내 장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장자’라는 것입니다.

 

‘장자’라는 것을 순서상 첫째 것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구원한 자들을 대표하는 의미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출애굽한 모두가 장자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이 장자 개념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기 위해서 첫 것을 내게 돌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것을 드릴 때 마다 ‘나도 하나님의 것인데…’ 라는 사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첫 것, 둘째 것 이런 개념이 없어요.

다 하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 것이라는 것은 너희들 전체가 내 것인데,,

너희들이 내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너희들이 가장 아끼는 장자를 내게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것을 드릴 때 마다 나도 하나님의 것인데 라는 자세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 것을 바치라 해서 나 바쳤습니다, 하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첫 것을 드리라고 할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 것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것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 줄 아느냐 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를 하나님의 첫 것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상징적으로 레위 지파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분배해 주지 않고 하나님의 집을 주는데 그 하나님의 집이 성막입니다.

 

민수기 18장 21-24을 다시 봅니다.

 

민 18:21-24=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22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23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2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를 첫 것이라고 선택을 하시고 하나님의 성전을 맡겼습니다.

회막에서 봉사하는 일들을 맡겼습니다.

그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의 십일조를 레위 지파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해 오면서 멜기세덱을 만나서 전쟁에서 얻어진 전리품의 십일조를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드렸지요?

그 그림을 지금 그대로 아브라함 후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제사장 지파인 레위 지파에게 드리라고 합니다.

 

이 레위지파는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 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십일조를 레위 지파에게 드리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덕으로 살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으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의 율법 아래서의 십일조 개념입니다.

십일조는 돈이 아니에요.

신앙고백이에요.

돈을 내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돈 속에 신앙을 담아서 드리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 정신이 곧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해올 때 드린 십일조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물질만 드린 것이 아니에요.

그 속에 신앙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드리면서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께서 전쟁을 이기게 해 주셔서 얻은 것이므로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라고 신앙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 한 백성들도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드리면서 ‘우리가 사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마음으로 드리라고 율법 속의 십일조를 담아 놓은 것입니다.

내가 비록 십분의 일을 가지고 왔지만 ‘이것은 내 힘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일조란 말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십일조가 율법 속에 들어 와서는 법과 은혜를 갈라내는 일을 합니다.

법에 속한 자와 은혜 아래 속한 자를 갈라내는 식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드리는 것은 법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십일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마음에도 없는데 율법에 정하여졌기 때문에 비치게 되면 그게 바로 법으로 바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의무적으로 ‘열에 하나는 하나님께 바치라 했으니까 바치는 거야’ 라는 의미로 바치는 것은 백날 바쳐 봐야 소용이 없어요.

그게 긍휼이 빠진 제사에요.

 

예수님이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하지요.

이는 마음에도 없는 의무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로 나오라는 말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 때 나타나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법이 되어요.

하나님이 하라고 하니까 하는 것이 되어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이런 마음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재물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 재물을 다시는 가져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재물 달라 그랬느냐?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뭡니까?

돈입니까?

마음입니까?

마음이에요.

 

너희들이 내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이걸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일조 얘기를 합니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너희가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에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하십니다.

율법에 더 중한 것이 있습니다.

율법에 담겨 있는 더 중한 것이 의와 인과 신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서 드리고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칠 때 ‘이 전쟁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한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의미인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보니까 바리새인들은 율법적으로 십분의 일을 하나 떼어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십일조라는 행위는 있는데 그 십일조 속에 담겨 있어야 하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왜 드려야 하는지를 모르고 그냥 법이니까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만 드리지 말고 그 속에 담겨진 의미를 알고 감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왜 내게 이것을 드려야 하는지 알겠느냐 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 의미는 없고 십일조라는 행위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라는 형식 속에 은혜와 감사 라는 내용을 담으라는 것입니다.

은혜와 감사가 빠진 십일조는 긍휼이 없는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의와 인과 신을 원하는 것이지 겉으로 나타난 십일조가 아니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성경에 십일조를 바치라고 했으니 내가 십일조를 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하나님은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원해요.

돈 속에 담긴 마음 말이에요.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을 통해서 얻어진 전리품을 하나님 앞에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쟁을 해서 얻어진 전리품들이 있겠지요.

예수님이 무슨 전쟁을 했습니까?

마귀와 전쟁을 했습니다.

 

우리가 마귀에게 포로로 잡혀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전쟁을 해서 이기고 우리를 빼내주셨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뱀의 머리를 깨트리시고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럼 우리가 전리품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에게 바쳤어요.

그럼 구원 받은 우리가 곧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십일조란 말입니다.

이 개념을 잊지 마세요.

 

중요한 이야기 하나 합시다.

하나님 앞에서 맏물은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합니다.

 

맏아들이란? 하나님께 바쳐지는 십일조에요.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셨는데 그 첫째 구원 받은 분이 예수님이에요.

히브리서 5장을 보세요.

 

히 5:7-9=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이 육체로 계실 때에 구원 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고 소원을 올렸다고 하지요.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성도들을 대표로 서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서 구원 받을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근원이란? 뿌리에요.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처럼 구원을 해 내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원의 첫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맏물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 자체가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

아버지 앞에서는 예수님이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들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건져내는 전쟁을 했습니다.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 가운데 있던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비유를 하시지요.

어떤 사람이 남의 집에 들어갔을 때 그 집 주인을 결박해서 그 집의 세간들을 다 빼앗아 온다고 했지요?

이게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뱀의 머리를 깨트리시고 뱀에게 사로잡힌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냈습니다.

우리는 세간살이로서 예수님의 것으로 끄집어냄을 당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뱀과 전쟁을 하시고 그 전쟁을 통해서 얻어진 전리품인 우리들을 아버지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곧 예수님이 아브라함처럼 전쟁에서 이기고 찾아온 롯과 같은 전리품이 되어서 아버지에게 바쳐지는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이 질문은 명제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접근하면 결국 행위가 나옵니다.

율법적 행위 밖에 안 나옵니다.

 

십일조가 뭡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십일조는 근본적으로 따지면 예수님 자체가 십일조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이 맏물입니다.

 

로마서 8장에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것은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맏아들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맏아들이 되면 우리는 그의 형제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하기 위해서 우리를 형제라는 의미로 갖다 붙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첫 것이라는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전쟁을 벌이셔서 아버지 앞에 드릴 때는 우리 자체가 또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24절을 봅시다.

 

고전 15:22-24=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낸 것입니다.

이 살려낸 자를 24절에 보니까 나중에 아버지께 바친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우리를 ‘너희는 거룩한 나라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그렇게 이야기 하지요?

예수님께서 나라를 바친다는 것은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했는데 이 자기 백성이 구약식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나라란 말입니다.

이해되지요?

 

예수님께서 구원한 자기 백성은 신약의 교회인데 이것을 구약식으로 하면 이스라엘이고 이 이스라엘을 더 확대하면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한 이 나라를 아버지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전쟁을 통해서 만들어 낸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결국엔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장차 하나님 앞에 갈 때는 전부 하나님의 장자로 가는 것입니다.

장자란? 맏물이고 십일조에요.

 

히브리서 12장 22-24절까지 봅시다.

 

히 12:22-24=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은 하늘의 시온산입니다.

그 시온산에 가는 사람들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라고 합니다.

장자가 누구입니까?

장자란? 첫 것입니다.

 

이 첫 것은 십일조이고 그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장차 하나님에게 갈 때 전부 하나님의 장자로 가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출을 해 낸 자기 전리품입니다.

이 전리품이 곧 하나님 앞에 바쳐질 맏물인 것입니다.

이해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장자들의 총회에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 예루살렘의 장자들의 총회, 이 장자들이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것으로 존재하는데 이 하나님의 것을 다른 말로 십일조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돈 십분의 일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시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적인 얘기를 하고 계시는 게 아닙니다.

구약에서의 진정한 십일조는 물질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물질을 드리면서 그 속에 자기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 될 때 온전한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말라기에 보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지요.

이걸 오해해서 세금 떼기 전의 금액에서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주 웃겨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성경의 진의를 모르니까 세금 떼기 전 금액의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아니면 실 수령 액의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럼 목사들은 한 푼이라도 더 걷어 들이려고 세금 떼기 전에 총 액수의 십일조를 해야 온전한 십일조라고 코메디 같은 소리로 가르칩니다.

 

십일조 정신을 알고 드리면 온전한 십일조가 되어요.

그걸 모르면 껍데기 십일조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내 것을 도적질 했다고 하면서 너희들이 절기의 똥을 얼굴에 처바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똥이 뭔가요?

양분이 빠진 껍데기를 말해요.

절기의 똥이란? 절기의 의미를 모르고 지키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의미를 모르고 드리는 모든 것들은 똥이란 말입니다.

 

이 말라기의 경고가 그대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에게 나타났어요.

예수님은 이걸 외식이라고 했어요.

외식이나 절기의 똥이나 같은 의미에요.

 

신약에서는 율법적인 십일조 개념이 사라져 버립니다.

율법적 십일조 개념이 사라져 버리고 은혜로 드려지는 연보 개념으로 나타납니다.

연보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만이 할 수가 있어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첫 것이고 십일조에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서 제일 먼저 나타난 현상이 무엇입니까?

날마다 교회에 모여서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재물을 팔아서 교회에다가 바치지요?

성령을 받고 보니까 내 자체가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인 것을 안 것입니다.

돈 몇 푼이 아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안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소유했던 그 재물을 내어 놓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식으로 하면 십분의 일만 드렸는데 성령이 임하고 보니까 내 자체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십일조라는 것을 알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이건 여러분들 보고 집 팔아서 내어 놓으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고 보니까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를 통해서 구출된 내가 십일조구나…

내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구나,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기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이건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고백으로 몽땅 교회에 드린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세워진 교회는 구약식으로 보면 하나님의 집이 되지요.

그럼 하나님의 집에서 수종 드는 자들이 레위 지파가 되겠지요.

신약에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수종 드는 자들이 누구인가요?

성도들이에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교회에 수종 드는 종들이에요.

그럼 모든 성도가 레위지파가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아니고,,,

어떤 자들은 목사를 레위 지파 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그건 사기에요.

 

잘 보세요.

성령이 강림하고 교회가 세워집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자기가 구원 받은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기뻐서 구원 얻은 무리들이 모인 교회에다가 물질을 내어 놓습니다.

 

이들이 누구를 위하여 물질을 내어 놓았나요?

목사들을 위해서 내어 놓았나요?

아니지요.

성도들을 위하여 내어 놓았어요.

이는 구원 받은 성도가 레위 지파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인 율법을 도말했어요.

율법을 도말 했다는 말은 곧 율법적인 것이 폐기 되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 안에서는 율법적 레위지파가 사라졌어요.

새로운 레위지파가 생긴 겁니다.

그게 성도들이에요.

이해가 되나요.

 

잘 보세요.

멜기세덱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 율법 속에 들어 왔을 때는 누구로 나타납니까?

레위 지파로 나타났습니다.

 

신약으로 와서 진짜 우리의 제사장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시죠.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셨어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 인해서 내가 곧 제사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 내가 레위지파가 된 것이지요.

 

레위지파는 누구 것이라 했나요?

하나님 것이라고 했어요.

이렇게 되면 내 자체가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십일조를 내가 돈을 얼마 냈느냐? 안 냈느냐? 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그 연보를 통해서 ‘내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믿음을 원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헌금을 해라, 하지 말라, 그런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명제 자체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보면 그 은혜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감사가 저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보를 할 때 인색함이나 아까운 마음으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서 인색함이 드러날 때는 하고 나서도 시험이 듭니다.

그럴 땐 하지 마세요.

 

히브리서 7장 4-10절을 봅시다.

 

히 7:4-10=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히브리서는 구약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떻게 성취가 되었느냐?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는가 하는 것을 변증하는 책입니다.

구약에 나타났던 십일조를 히브리서에세는 재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눈 여겨 봐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4절을 보세요.

 

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드렸다고 하지요.

이게 창세기 식으로 보면 맞지 않아요.

이름을 잘 보세요.

 

창세기 14장에서는 ‘아브라함’ 이 아니고, ‘아브람’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람’이 십일조를 바쳤는데, 신약에서는 ‘아브라함’을 얘기합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아브람’을 얘기할 때는 옛 사람을 얘기하고,

‘아브라함’을 얘기할 때는 새 사람을 얘기합니다.

‘아브람’을 말할 때는 옛 언약식이 되어 버리고,

‘아브라함’을 말할 때는 새 언약식이 됩니다.

 

지금 히브리서는 구약의 아브람이 바쳤던 것을 신약식으로 재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재 해석을 하는데 그 아브라함이 신약식으로 하면 예수님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롯처럼 전리품이 되어서 드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물질적 가치의 십분의 일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든 일들이 결국에는 십일조 속에 다 포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5-6절에 보세요.

 

5-6=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율법에서 보면 레위 지파에 속한 자들이 제사장이었고 이 제사장들이 십분의 일을 받았어요.

그런데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가 생기기도 전의 사람입니다.

레위 지파에 들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십분의 일을 받았는가요?

이는 역으로 말하면 레위지파는 멜기세덱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온 제사장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레위지파로 나타났고,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온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누구입니까?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런 분이 오셨는데 그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란 말입니다.

그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온 진짜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그 제사장이 구약의 아브라함이 바쳤던 멜기세덱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가 얘기하는 것은 구약의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전쟁에서 끄집어 와서 그 전쟁의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바쳤는데 그것이 신약으로 오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셔서 너희를 죄와 사망 가운데 건져서 너희를 아버지께 바친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적 개념의 십일조를 드리지 말고 나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구원 받아 하나님께 드려지는 십일조 이구나 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삶 자체가 십일조 개념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돈 얼마 낸 그런 개념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만큼 그 사람이 하게 되어 있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1-5절을 봅시다.

 

고후 8:1-5=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마게도냐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연보를 했습니다.

그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는 기근이 들어서 사람들이 모두 어렵고 힘든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마게도냐 교회가 들은 것입니다.

 

알다시피 마게도냐 교회는 이방인 교회에요.

이방인 교회가 유대인 교회를 돕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구약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에요.

 

성령으로 거듭나니까 형제 개념이 혈통에서 예수 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한 번도 만나 본 적도 없는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을 위해서 자기들도 살기 어려운데 그들을 위해서 자기 것을 내어 놓았던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남으로 보지 않고 내 지체요 형제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받은 것이 이런 것인데 내 것을 하나님 앞에 돌려드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 하는 의미에서 힘에 지나칠 정도로 연보를 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것을 자기를 주께 드렸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연보입니다.

 

7-9절을 보세요.

 

7-9=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 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하는 것은 명령이 아닌 권면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들을 그렇게 권면하고 싶습니다.

 

그 권면이 어떤 내용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가 너무도 많지 않느냐,

이 받은 은혜가 많은 것을 남에게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

그래서 연보를 예수님께서 원래 부요하신 분인데 그 예수님의 부요를 우리에게 나눠준 것으로 끌고 가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형제를 위하여 그 부요를 나눠 줬잖아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이 자기들의 부요를 나눠주셔서 형제들끼리 평균케 했듯이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그것을 연약한 형제를 위해서 내어 놓음으로 그 형제와 네가 평균화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좋은 뜻이 아니냐, 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 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지금 바울이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령과 권면은 다릅니다.

왜? 권면할까요?

이는 연보는 명령해서 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야 할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9절에 그러잖아요.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마게도냐 교회도 어려워요.

그런데 옆에 보니 자기보다 더 살기 어려운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살기 어려운 사람에게 자기 것을 나눠줌으로 해서 서로 서로가 평균이 되더란 말입니다.

이게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몸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평균케 만드신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연보입니다.

 

연보는 억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내가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함이 솟아날 때 하는 것입니다.

그 감사함으로 행할 때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한 장 더 넘어가서 고린도후서 9장 4-5절을 봅시다.

 

고후 9:4-5=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연보를 했던 것을 이야기하면서 ‘너희들도 이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는 자가 되면 좋지 않겠느냐?’ 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너희들도 미리 미리 준비했다가 마게도냐에서 어떤 형제들이 와서 이 돈을 함께 모아 예루살렘 교회로 도우러 갈 때 너희들도 동참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 때 그 사람들이 왔을 때 준비도 되지 않아 우왕좌왕하면 너희들의 믿음 없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겠느냐?,

그러니 미리 준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6절 7절을 보세요.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하지요.

하나님이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하지요.

돈 많이 내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뭐에요?

받은 은혜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깨닫는 것과 비례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목사라도 인색하고 장로라도 인색해요.

연보를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자기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서 십일조도 없고 주일도 없고 교회도 없고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은 뭘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구약의 헌금 개념이 신약에 어떻게 들어 왔는지 그리고 구약의 십일조가 신약에 어떤 의미로 들어 왔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것인데 이런 것을 설명하지 않고 율법이 폐하여 졌으니까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는 십일조 하면 저주받는다고 하면서 연보를 해야 한다고 해요.

이건 십일조와 연보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소치에요.

십일조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율법식의 십일조를 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권면하고 싶은 것은 우리 자체가 모두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우리가 완악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니까 다만 하나 율법에 정한대로 열에 하나라도 드려서 내 믿음을 보이라는 뜻으로 십일조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보를 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하잖아요.

교회를 위해서 한다는 것은 그 교회 자체가 내 지체로서 인정되기 때문이잖아요.

마게도냐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연보를 한 것은 자기 형제라고 여기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보니까 너와 내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것이 깨달아 지니까 그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아파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그 안에서 발동을 하니까 자기의 것을 내어 놓는 식으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토하여 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헌금하는 것을 헌금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이고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연보를 해야 합니까? 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렇게 묻는 것은 하느냐? 안하느냐? 라는 율법적 행위에 가둬지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라고 질문하지 마시고,

십일조가 뭡니까? 라고 물으셔야지요.

그 십일조의 실체가 예수님이었고,

구원을 받은 자기 백성들이 또한 십일조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십일조였구나! 내가 포로 잡힌 자였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으로 인하여서 내가 이제는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 사는 것이구나…를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쟁을 하게 되면 전쟁에서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됩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전쟁을 해서 롯을 구출해 왔지요?

그러면 롯은 아브라함의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게 전리품입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 중에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어요.

롯도 전리품이에요.

그러면 롯 자체는 자기 인생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롯 자체가 곧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십자가에서 구원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체가 롯과 같이 하나님의 것이 되어 버리겠지요?

그렇게 될 때는 우리에게는 내 것 니 것 하는 개념 자체가 사라져 버립니다.

 

내 자체가 그냥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오셔서 지금도 우리 안에서 나를 산 재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 살아가면서 교회를 통해서 행하게 됩니다.

내가 받은 은혜에 감동되는 대로,

감사함으로 연보라는 형식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보가 구약의 율법보다 훨씬 무섭습니다.

구약에서는 법적으로 십분의 일만 내면 됐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선 십분의 일이라는 개념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나 자체가 십일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심으로 인해 나 자체가 십일조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서는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연보란? 우리 몸을 제물삼아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드리지 못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악당입니까?

그래서 이런 말씀 앞에서 우리의 죄가 폭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영악스러운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폐했으니 우린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

그렇게 말하고 아무 것도 안 해요.

 

과거에 우리가 율법 신앙에 있을 때는 그래도 십분의 일을 꼬박 꼬박했는데 은혜 아래 거하고 나서는 그것조차도 안합니다.

그러면서 믿음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악한 자들입니까?

 

진짜 법 아래 있다가 은혜 아래 부르심을 입었다면 더 잘해야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더 못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더 자기 사욕을 채우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음을 지식으로 알고 있다는 반증이에요.

그러니까 머리로만 복음 복음하고는 손과 발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앉은뱅이고 중풍병자들인 것입니다.

 

한 번 생각을 해 보세요.

마땅히 죽어야 할 자를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렇다면 그 살아난 사람의 마음속엔 어떤 마음이 있을까요?

아까운 마음이 있을 수가 없겠지요.

 

세상에 나 같은 것을 용서해 주셨고,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셨구나…

내가 무엇이 더 아까울 수 있겠나…하는 마음으로 나와야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구원은 구원대로 챙겨 놓고 그 때부터 자기 것을 챙기는 것입니다.

은혜를 빌미로 해서 자기 사욕을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인색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은혜가 오히려 색욕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십일조를 하라 하지 말라 이런 말은 안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감동되는 대로 하세요.

마음에 인색함으로 하지 마시고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귀한 은혜를 입고 사는 지가 깨달아지는 대로 하세요.

많이 깨달아지면 마리아처럼 옥합을 깰 것이고 깨달아지지 않으면 못하겠지요.

 

각 사람의 신앙은 목사가 간섭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건 성령이 각자 알아서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 오늘 본문과 같이 십일조 문제가 나왔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십일조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굳이 사도 바울 같이 권면을 한다고 하면 원칙적으로 하면 우리의 열의 열을 다 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데모할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열에 하나만 드리세요 라고 하겠습니다.

그것도 안 되면 어쩔 수 없습니다.

 

물질은 자기 신앙의 바로 미터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질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세워주지요?

그 얘기는 결국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물질의 가치를 못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물질의 가치를 이기고 사느냐 안 사느냐를 보이는 것이 연보입니다.

내가 행여 하나님 앞에 받은 것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알면 마음에 인색함이 없이 자발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마음에도 없는데 교회 안에서 자기체면 때문에 억지로는 하지 마세요.

그건 하고 나서도 시험에 들어요.

 

연보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 만이 할 수가 있어요.

은혜 받은 자들만이 할 수가 있어요.

 

돈이 많다고 연보 하는 것 아니에요.

연보는 마음에 감동이 되어야 할 수가 있어요.

연보는 마음이에요.

 

두 렙돈을 바친 과부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즐겨 내시는 자를 사랑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옥합을 깨트린 마라아처럼 주께 받은 사랑을 연보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해 보세요.

그럼 지갑이 열려요.

지갑이 열리면 사랑하는 것이고 지갑이 닫히면 사랑하지 않는 거에요.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주어도 주어도 또 주고 싶어져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서는 돈을 쓰는게 아깝지가 않아요.

그게 사랑이에요.

 

그래서 연보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감동되는 대로 하세요.

그래도 내가 이 정도는 교회를 위해서 감당을 해야겠구나 라는 마음이 들면 그 마음대로 인색함 없이 하시면 됩니다.

 

제가 원하는 건 구약의 율법적 십일조는 하지 마세요.

은혜로 하시길 권면을 드립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그릇입니다.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은 복음입니다.

율법 속에 복음을 담으세요.

 

십일조라는 것은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담으세요.

하나님께 받은 그 은혜와 사랑을 감사로 담으세요.

 

자칭 복음 안다는 어떤 자들은 한국교회가 너무 십일조, 주일 성수 이런 것을 고수 하니까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십일조를 말하면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란? 의와 인과 신이고,

저것이란? 십일조라는 행위입니다.

 

십일조 라는 그릇에다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담으라는 것입니다.

이러면 또 십일조를 꼭 해야 하느냐 라고 묻는 분이 있으시겠지요?

아니에요.

 

십일조 라는 이름에 의미를 두지 마세요.

십일조 라는 말이 싫으면 감사 헌금으로 하세요.

십일조라는 명제에 매이지 말고 연보로 하세요.

어차피 신약에서는 십일조라는 의미가 없고 내 자체가 십일조니까요.

 

내 자체가 십일조이니까 어떻게 연보를 하든 여러분들 마음에 감동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안하는 게 신앙이 아니고 하는 게 신앙이에요.

손을 움켜 잡는게 신앙이 아니고 손을 펴는 게 신앙이에요.

 

하나님도 즐겨내는 자를 사랑한다고 하시잖아요.

그러니 즐겨내세요.

단 그 마음의 감동 대는 대로 하세요.

 

깨닫는 만큼 나오게 되어 있어요.

복음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더 헌신케 하고, 더 내어 놓게 하고, 더 모이게 하고, 더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았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까 더 귀하게 여겨야지요.

어떻게 복음을 알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안하는 것으로 나타납니까?

그건 아닙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곡해해서 듣지 마시고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십일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잘 정리해 두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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