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34강. 예수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요 5:39-40)

by coroa 2021. 2. 13.

 

막 13: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34강.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 (요 5:39-40).-

-.정낙원 목사

 

 

 

일본에는 신(神)이 800만개라고 합니다.

이는 숫자적인 의미보다 각자가 섬기는 신이 다르다는 의미로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신이란?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신입니다.

사람마다 소원이 다르니 신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교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각자가 다르듯이 예수를 믿는 것도 각자가 다릅니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아주 쉬운 예로 든다면 축구 시합을 하기 전에 선수나 감독이나 각자 신에게 기도합니다.

 

수원삼성 팀을 맞고 있는 차범근 감독과, 울산현대 팀을 맞고 있는 김정남 감독이 기도합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가 교인들입니다.

서로가 이기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이는 각 팀에 선수들도 동일합니다.

골키퍼는 골 안 먹게 해 달라고 자기 신에게 기도하고, 공격수는 골을 넣게 해 달라고 자기 신에게 기도 합니다.

 

차범근 감독이 다니는 교회 목사는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팀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이고, 김정남 감독이 다니는 교회 목사는 김정남 감독이 이끄는 팀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결국 신과 신의 대결로 신들의 전쟁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처럼 자기들이 삶 속에 신을 불러 들여서 자기 유익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선수들마다 다니는 교회가 다 다릅니다.

그러면 그들이 다니는 교회 목사나 교인들도 자기교회에 나오는 선수가 있는 팀이 이기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일본에 신이 800만개라고 하는 것처럼 한국교회의 예수도 1200만개가 됩니다.

한국교회 신자 수가 1200만이라고 자랑하니 1200만개가 되는 셈입니다.

 

만약 이들이 진짜 예수를 안다면 이렇게 기도를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들이 알고 있는 예수가 성경이 말하는 진짜 예수가 아니고 자기들이 만든 예수라는 반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마다 예수가 다르고 교인들마다 예수가 다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시대 교인들이 부르는 예수는 가짜라는 것이 드러났고 이방인들처럼 각자의 신을 섬기는 것이므로 예수는 대형마트에 진열된 상품들처럼 다양하게 됩니다.

교인들 숫자만큼이나 예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교인들이 난 예수를 믿는다 라고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어떤 예수를 믿느냐가 중요해 집니다.

그 예수가 진짜냐? 가짜냐? 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도 정품이 있고 가품이 있습니다.

성도라면 진짜 예수와 가짜 예수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 교계에는 병아리 감별사들처럼 이단 감별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습니다.

자칭 정품 예수와 가품 예수를 구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칭 이단 감별사라고 하는 그들이 이단인 것을 어찌합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비로 성경이 말하는 진짜 예수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이단 감별사라고 하는 자들도 이단이지만,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정품과 가품을 구별하는 룰이 있습니다.

이단 감별사라는 직함으로 한국교회에 빌붙어서 먹고 살자면 한국교회가 정통이라고 하는 교단들의 교리를 가지고 판별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표방하는 정통적인 기독교 교리에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각 교단들마다 정해놓은 각종 신조라든가 신앙고백서라든가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단마다 신조나 교리가 조금씩 다르니 이것으로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파나 바리새파나 엣세나파나 열심당이나 쿰란공동체나 각각의 교단들마다 교리가 다르듯이 다릅니다.

장로교 교리가 다르고, 침례교 교리가 다르고, 성결교 교리가 다르고, 순복음교 교리가 다르고, 감리교 교리가 다르고 교단마다 성경을 해석하는 교리가 다 다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해석의 기본은 성령께서 해 주셔야만 합니다.

성령이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은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피를 증거합니다.

이름하여 새 언약입니다.

 

그러면 진정 한국교회가 한 성령을 마셨다고 한다면 교단과 상관없이 하나의 해석이 나와야 합니다.

한 성령을 마셨으면 교리가 다를 수가 없어야 해요.

한 성령을 마셨으면 한 예수가 나와야 합니다.

그럼에도 교단마다 증거되는 예수가 다릅니다.

 

교단마다 교리가 다르다는 것은 한 성령을 마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국교회가 말하는 정통교리를 가지고서는 이단을 감별해 낼 수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예수를 가지고서는 이단을 잡아 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교리가 다르다는 것은 예수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교단마다 다른 예수를 가지고 어떻게 이단을 판단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타협안을 내 놓은 것이 성령의 은사가 다르듯이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은 교단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동일한 것은 교회론 이예요.

교회론 에서는 이상하게도 일치해요.

그래서 만든 이단의 기준이 바로 교회 관입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성전을 건들면 이단이라고 하였듯이 말입니다.

교회를 부정하면 이단이라고 정죄합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교회를 건들면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합니다.

벌떼들같이 달려들어서 공격을 합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가 정통신앙이라고 내어 놓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하나님의 언약)이 아니고 교회 중심의 신앙입니다.

한국교회가 교회를 사수하는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칼빈 때문에 그래요.

칼빈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어요.

 

한국교회에서 가장 큰 교단이 장로교입니다.

장로교를 일컬어 칼빈주의라고 합니다.

한국교회에선 칼빈은 교주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칼빈주의라는 것이 아주 건전한 신앙인냥 행세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칼빈주의가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되어버렸어요.

 

칼빈이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하면서 교회를 예수님과 동일시 해 놓은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칼빈이 교회밖엔 구원이 없다고 해 놓았으니 이젠 누구든지 교회를 건들면 칼빈을 건드는 것이 되니 한국교회가 최고의 정통으로 인정하는 교리를 건들면 이단이라고 몰아 부칠 수 있는 핑계를 마련해 놓은 겁니다.

 

교회밖엔 구원이 없다고 하면 교회 절대 주의가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들처럼 누구든지 성전을 건들면 하나님을 건드는 것과 같이, 교회를 건들면 예수님을 건드는 것 같은 등식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하나님은 교회로 구원하지 않고 예수님 십자가 피로 구원을 해요.

예수님께서 교회를 허물어 버렸어요.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예루살렘 성전처럼 건물 중심의 교회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교회를 허물었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촛대를 옮겨 버린다고 합니다.

촛대를 옮긴다는 말은 예수님 뜻에 맞지 않으면 교회를 허물겠다는 뜻입니다.

실제적으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요.

 

요한계시록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에베소 교회에게 편지하기를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처음 사랑이란? 다름 아닌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신앙고백이 없으면 언제든지 허물어지는 겁니다.

이는 교회란 고정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회는 지금 교회들이 말하는 그런 조직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회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성도입니다.

이런 성도가 두 세 사람이 모이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되요.

그러다 헤어지면 성도 독자적으로 교회가 되고, 다시 모이면 한 몸으로서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교회를 사수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때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이단으로 몰려서 가산을 적몰당하고 죽임을 당하였어요.

공개적으로 나 예수 믿습니다 라고 말할 수 없었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어디 건물을 얻어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울산목양교회 라는 간판을 붙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도들은 모두가 지하로 숨어 버렸어요.

아마 TV로 지하 카타콤이라는 동굴들을 보셨을 겁니다.

그게 전부 초대교인들이 숨어 지낸 집들입니다.

수백 년 동안 거기서 지냈어요.

거기서 자식 낳고 살았어요.

 

성경이 말하는 교회들이 모두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 빌립보 지역에 있는 교회, 고린도 지역에 있는 교회라는 식으로 성도들이 모임을 교회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로마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기독교를 국교화 시키면서 지하교회가 양지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때는 의무적으로 교회를 다녀야 했어요.

카타콤에 숨을 때와 달리 이젠 교회를 안다닌다고 하면 죽였어요.

그러니 너도 나도 다 교회로 몰려들어서 조직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로마국교가 되면서 타락하기 시작하였어요.

로마황제가 기독교를 정치에 이용한 것입니다.

교회를 정치에 이용하려면 군중들을 통제하여야 해요.

교회에 충성맹세하게 하여야 해요.

자연히 교인들을 통제해야할 성직제도가 생기고 교회는 신전화 되어진 것입니다.

로마교회가 지금 천주교회예요.

 

그러다 루터가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개혁을 합니다.

교회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개신교회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개신교 목사들이 교회를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겁니다.

목사가 성직자라는 직업이 되면서 교회를 버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교회를 사수하고자 하는 것은 뭔가 꼼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꼼수란 교회를 목사들의 직장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한국교회 같이 편안하고 안정된 직장이 없어요.

목사들의 영원한 직장입니다.



돈 많이 주지요.

대접 잘 받지요.

어디 가서 명함도 내밀수가 있지요.

얼마나 좋습니까?

 

이 시대 신학교에 신학생들이 많다는 것은 목사라는 직업이 매력적이기 때문에 문전성시를 이루는 겁니다.

만약 목사라는 것이 바울처럼 12사도들처럼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매 맞고 욕먹으면서 부모형제들로부터도 이단이라고 쫓겨나는 것이라고 하면 신학교 갈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겠다고 지망하는 학생들이 성경에서 사도들이 걸어간 길을 보지 않고 이 시대 교회 대형 목사들을 보니까 팔자가 늘어졌거든요.

너무 부러운 겁니다.

 

그래서 공부할 자신은 없고 일반 대학 나와서 취직하기도 힘든 판에 좋은 대학 갈 점수는 안 되니까 대충 신학교에 가서 건달들이 되어서 나오는 겁니다.

몽땅 그렇다고 하면 모순이니 다 그렇다곤 할 수 없지만 대다수가 그래요.

신학교에 가르치는 교수들이 거의가 다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니 예수님 십자가는 가르치지 않고 교회 부흥만 가르치는 겁니다.

 

제가 아는 어느 집사님은 자식을 신학교에 보냈는데 그 아들 목사 만들겠다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죽치고 살아요.

이 사람이 만약 목사가 바울처럼 죽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다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정서로서는 목사만 되면 팔자가 피는 직업입니다.

땅 짚고 헤엄치기인데 누가 이런 직장을 포기하겠습니까?

하는 일이라야 적당히 교인들 비위나 맞추어주면 되요.

설교 그까잇거 대충 하면 되요.

 

지금은 인터넷이라는 아주 좋은 비서가 있어서 빈둥거리고 놀다가 여기저기서 설교 잘한다고 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카피해서 짜깁기해서 한 30분 때우면 되요.

그것도 하기 싫으면 이런 핑계 저런 핑계되고 부목사나 전도사 시킵니다.

자기는 돌아다니면서 정치나 하고 끼리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서로 서로 헌신예배 불러주고 불려가고 그럽니다.

 

어차피 교인들은 소경이라서 설교를 듣고자 하지 않아요.

빨리 끝나고 형님 동생 하면서 거룩한 놀이하면서 놀고 싶은 겁니다.

교인들도 예수를 믿는게 아니고 교회라는 놀이터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려고 해요?

교회가 사교 모임이 된지가 오래입니다.

 

그러니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정통 기독교 교리 자체가 성경적으로 보면 이단입니다.

성경적으로 이단인 교리를 가지고 이단을 감별하고 있습니다.

거짓이 거짓의 잣대로 감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단 감별사들이 정통이라고 한 정통이 이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이 이지경이 되다가 보니 이단 감별사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보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합니다.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무리들이 교회라고 하여도 신전(神殿)과 같은 교회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피만 전하는 목사들은 성경은 단편적으로만 보는 외눈박이들이라고 하면서 교회를 부정하고 허무는 자들이라고 해서 이단이라고 합니다.

교회 사수론자들은 유형교회 무형교회라는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교회를 남기려고 합니다.

성전을 건축한다고 아주 합법적으로 교인들로부터 헌금을 갈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선 최소한도 교회가 크면 모두가 정통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정통신앙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크게 부흥시켜 주었다고 해요.

교회가 큰 것이 곧 정통이고 정품이라는 증거로 내어 놓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현실 앞에서 예레미야처럼 성전 앞에서 서서 이건 성전이 아니라고 외치는 자들은 도리어 교계에서 이단이 되어서 축출당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라고 하니 성전 고수자들인 유대인들이 예수를 이단이라고 몰아서 죽인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한 것입니다.

 

전 1:8-11=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세상 역사만 돌고 도는게 아니라 신앙의 역사도 돌고 돕니다.

왜? 인간의 역사는 돌고 돕니까?

이는 인간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담 시대 인간도 죄인이었고,

아브라함 시대 인간도 죄인이었고,

예수님 당시 인간도 죄인이었고,

지금 인간도 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동일한 죄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역사는 거울인 것입니다.

전 개인적으로 사극을 참 좋아합니다.

사극을 보면 구중궁궐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속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모술수들이 다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수천년 전에 하던 행사 머리들을 지금 정치하는 인간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그 조상에 그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종교 쪽으로 눈을 돌리면 정치나 다를 바가 아무 것도 없어요.

인간이 신을 찾는 모습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두가 한 아담 안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성전을 신주단지처럼 받들고 모시던 유대인들이 있었는가 하면,

지금도 교회를 성전이라고 신전화(神殿化) 하여서 섬기고 있는 목사나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성전을 공격하다가 이단으로 몰려서 죽임 당하였듯이,

지금도 예수님처럼 교회를 공격하다가 이단으로 몰려서 교단에서 제명당하는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은 언제나 신(神)들의 춘추전국시대였습니다.

인간 수만큼이나 다양한 신들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 나타나실 땐 반드시 기존이 신들을 깨트리면서 다가오십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은 거짓 신이라고 고발하면서 다가오십니다.

 

물론 인간들은 순순히 응하지 않고 반발을 합니다.

지금까지 섬겨온 신을 하루아침에 바꾸고 버린다는 것은 두려움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낯선 동네에 가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편할 걸 좋아하지 낯선 것은 불편하기 때문에 싫어합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새 술은 새 부대 담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도발적으로 옛 것을 버리라고 하니 이를 어찌하여야 합니까?

지금 너희들의 신앙이 참 신앙이 아니라고 하니 심기가 여간 불편하지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오늘 본문은 참으로 도발적인 말씀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요 5:39-4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들 성경 왜 보는데? 라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 성경입니다.

즉 율법입니다.

 

그러면서 성경 백날 보면 뭣 하느냐? 날 몰라보는데,,,라고 조소합니다.

날 모르면 성경 일천독(一千讀)을 해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아니 성경이라면 손금 보듯 훤히 꿰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무슨 망발이란 말입니까?

성경 박사들에게 너희는 성경을 모른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마치 자기 딴엔 설교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목사에게 평신도가 그것도 설교라고 하고 있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신학교도 다니지 않았어요.

성경을 가르칠 자격증이 없어요.

성경을 가르칠 자격증은 바리새인들만 가지고 있어요.

바리새인들은 모두가 정통 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나온 자들입니다.

그런데 신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촌놈이 지금 시비를 걸고 있는 겁니다.

성경도 모르는 것들이 잘난 척하면서 성경을 가르친다고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수치스럽다기보다는 어이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만인이 성경을 잘 가르친다고 인정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모두가 정통 신학교 출신으로서 박사 학위들을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너희들이 성경을 알면 얼마나 알어!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더러 너희들 성경을 알어? 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를 지극히 잘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신자들에게 너희들 예수를 알어? 라고 묻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큐티(QT)도 하고 베델성서다 프리셉트다 하면서 소위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까지 다 뗀 사람들에게 너 예수에 대해서 알어? 라고 묻고 있는 거예요.

 

요즈음 교회마다 성경 통독이 붐입니다.

이름하여 성경 읽기 운동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경쓰기 운동을 벌리고 있습니다.

읽는 것보다 쓰는게 더 정성이라는 취지에서입니다.



(성결 필사 하는걸 나쁘고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치 신앙의 척도로 삼고자 하는 것을 경계심으로 말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필사를 했는데 가보(家寶)로 남기겠대요.

얼마나 자랑스럽겠어요.

그 필사본을 볼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대견스럽겠습니까?

하나님도 참 이런 나에게 복을 안주면 누구에게 준단 말인가? 라고 하면서 자랑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오늘본문 내용을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성경을 열심히 통독하고 쓰는 사람들에게 너희들 성경 통독하고 쓰면 뭐 하는데,,,,

나를 모르면서 백날 통독하고 쓰면 뭣 하느냐? 라는 말입니다.

 

참 사람 염장 지르는 말입니다.

아이구! 예수님도 참!

잘한다고 칭찬을 못 해줄 망정 염장을 지르고 있으니 성격이 참으로 고약합니다.

어떻게 심사가 그리도 뒤틀려 있단 말입니까?

 

과연! 예수님이 심사가 뒤틀려 있어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인정해 주기를 바랍니다.

최소한도 자기 정성은 알아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인간의 정성 따윈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옳으냐? 그르냐? 에만 있습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이 1200만 명이라는 것은 예수님 앞에선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회를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한다면 썩은 고기 한 트럭 가지고 와서 잡수시라고 하면 좋아하겠습니까?

한 트럭이 아니라 만 트럭이라고 해도 썩은 고기라고 한다면 다 같다 버릴 것입니다.

횟집에선 고기가 살았느냐? 죽었느냐? 로 가치를 따집니다.

썩을 고기 한 트럭 가지고 와서 좀 봐 주세요! 라고 해도 주인은 거들떠보지 를 않습니다.

왜? 안 사주느냐 라면서 참 인정머리가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산 자가 아니면 하나님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죽은 자는 무가치해요.

죽은 자의 숫자는 의미가 없어요.



교회가 크다! 작다!

목사냐! 집사냐!

교회 20년 다녔다! 50년 다녔다! 라는 것하곤 복음을 아는 것하곤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복음을 알 때 귀한 것일 수가 있지만 복음을 모르면 모두가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무가치합니다.

 

하나님 앞에 산 자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 밖은 모두가 죽은 자입니다.

예수 밖은 수백만 수천만 아니 수억 명도 죽은 송장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예수를 모르는 송장 같은 인간들이 바라바리 싸들고 와서 하나님 받으세요! 라고 해도 하나님은 하나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들고 나오면 어이쿠 내 새끼 왔구나! 라고 버선발로 마중을 나오십니다.

어린 소자 하나라도 예수를 알면 하나님은 춤을 추십니다.

어린 소자 하나가 구원 받으면 천국에서 잔치가 벌어진다고 하잖아요.

 

이정도 되면 하나님 안중엔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교회 부흥이라는 것은 다 쓰잘데기 없는 쓰레기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죽은 고기들이란 말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한국교회는 성경을 달달 외우면서 예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 예수 하면서도 예수를 안 믿기 때문입니다.

 

아니! 목사님 너무 주관적으로 생각해서 과격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항변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과연 제가 과격한 것인지 아니면 한국교회가 썩은 고기인지 살펴보면 압니다.

한국교회가 진짜 성경이 말하는 교회인지 아니면 절간인지 따져보면 알게 될 것이 아닙니까?

 

지금은 과거 교통사고 나면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시대와 갖지 않습니다.

이젠 목소리 작아도 “하이카 보험” 에서 다 알아서 잘잘못을 가려 줍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

예수 오래 믿었다,

교회가 크다 라는 것으로 정통이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으로 정통인지 이단인지를 가려 보십시다.

 

사람이 어떤 책을 읽었다고 할 때에는 그 책 속에 내용을 올바로 숙지하고 이해하여야 올바로 읽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책의 전체 핵심내용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책을 읽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책을 본 것이지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려하던 이러한 일들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에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런 문자적 해석이 율법이 말하고자하는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제사는 껍데기이고 긍휼은 알맹이입니다.

여러분 제사는 왜? 지냅니까?

죄를 지으면 지내는 거지요.

 

그러면 제사 속엔 뭐가 담겨져 있어야 합니까?

잘못한 마음이 담겨져 있어야 하지요.

잘못을 애통해 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자비를 구하는 마음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사와 긍휼 이야기를 하시면서 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지금 유대인들의 제사 속에는 이런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형식만 있는 것입니다.

죄를 안다는 것은 애통함이 묻어 나와야 합니다.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나야 죄를 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겐 그런 마음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다는 것을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뭘 갖다 바치면 하나님이 좋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마음도 모르면서 갖다 바치면 무엇하겠느냐? 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너희들에게 제사를 못 받아서 환장한 줄을 아느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한 내용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와 똑 같다는 말입니다.

 

호 4:7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선지가 활동하는 시대는 이스라엘이 가장 번성할 때입니다.

한마디로 잘 먹고 잘 살 때입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는 가장 타락한 시대였습니다.

그 상징을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라는 창기를 통하여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타락이 아니고 위선적으로 제사를 지냈기 때문입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교회가 가장 부흥할 때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많이 생기고 부흥할수록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고 합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교회에 모이고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더욱더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차라리 교회 안 오고 안 모이는 것이 더 좋다는 말입니다.

모여 보아야 하나님 머리만 아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는 번제보다 날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좀 알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알았다면 이런 짓거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열심히 제사를 지내면서도 제사 속에 담아 놓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고 계신 겁니다.

너희들이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나를 모른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는 것을 배우라는 말은 하나님 은혜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바치는 것을 원하지 않고 하나님 덕에 산다는 것을 알기를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산다는 것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 바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산다는 것을 알면 감사가 나오지만,

자신들이 바친다고 생각하게 되면 생색을 내게 되고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앎이 없이 행하는 잘못된 열심은 많을수록 그 결과는 참담해 집니다.

지금도 이런 현상이 교회 안에서 버젓이 자행되어지고 있습니다.



“옳은 신앙은 옳은 앎” 에서 비롯됩니다.

“믿습니다” 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믿을 것인가” 가 우선입니다.



난 교회 30년 다녔다 50년 다녔다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아느냐가 중요합니다.

난 목사다 장로다 집사다 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잘못된 앎은 잘못된 열심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이단에 빠진 사람이 열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예수님을 더욱 더 대적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이를 잘 입증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잘못된 열심으로 예수를 죽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를 죽이고 있어요.

그런데 본인들은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신상보훈을 통해서 잘못된 신앙의 위험성을 경고해 주셨습니다.

 

마 7:21-23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주를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좇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예수 안 믿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믿었어요.

 

그러니 주의 이름으로 이런 저런 일들을 했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자기 식으로 믿었지만 분명한 것은 교회 다니고 예수! 예수했다는 겁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예수! 예수하면서 목사 노릇하고, 장로 노릇하고, 집사 노릇하고, 예수 이름으로 갖가지 이적도 행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모른다고 합니다.

난 너희들을 만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낭패가 어디 있습니까?

 

자신들은 분명히 주님! 주님하면서 따라다녔는데 정작 예수님이 모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다른 예수를 믿었다는 말이 됩니다.

엉뚱한 예수를 믿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다른 예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하늘로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갈리디아서 1장을 봅시다.

 

갈 1:9-10=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은 다른 복음의 특징을 사람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소원은 탐심입니다.

 

마귀는 교회에다 인간의 탐심을 들어주는 유사 예수를 수 없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곤 교인들에게 각자가 좋은 예수를 고르라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했으니 그 무엇이라는 속에 자기 소원을 다 적어 놓았습니다.

그리곤 들어달라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예수라는 이름은 같으나 그 내용은 각자 다릅니다.

 

시험 성적 올려 주는 예수!

병 고쳐주는 예수!

사업 잘되게 해 주는 예수!

주식 값 올라가게 해주는 예수!

가정을 화목하게 해 주는 예수!

직장에서 승진시켜 주는 예수!

무엇이든지 말만 하면 다 들어주는 예수!

교회들마다 경쟁하듯이 다양한 예수를 진열해 놓고 마음대로 원하는 것을 골라잡으라고 합니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 램프 속에 거인과 같이 부르기만 하면 주인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라고 하듯이 이 시대 교인들이 필요로 하는 예수가 바로 이런 예수입니다.

 

박상철 이라는 가수가 부른 무조건 이라는 노랫말을 보면 재미있는 가사가 있어요.

 

당신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갈 거야!

밤에도 좋아! 낮에도 좋아! 언제든지 달려갈게!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 거야!

무조건 무조건이야!

짠짜라! 짜라! 짜라! 짠! 짠! 짠!

 

참 좋은 노랫말입니다.

완전히 이 시대 교인들이 알고 있는 복음입니다! 복음!

당신에 소원을 무조건 다 들어주는 예수 아닌가요?

 

어째 이런 예수 하나 안 키워보실래요?

필요하면 가까운 교회로 가십시오.

이런 예수는 지천에 깔려 있고 교회에 가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필요하면 가서 골라잡으세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저렴하게 임대 해 줍니다.

쓰다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반품하고 다른 제품으로 사용하면 됩니다.

참 좋은 예수이지요.

 

웃어야 합니까?

울어야 합니까?

우리도 예수를 모르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성경을 상고한다고 하신 성경이 어떤 것인가를 먼저 알아야겠지요.

알다시피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한 마디로 율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역하면 “너희가 율법을 알았으면 나를 만났어야 했다” 는 뜻입니다.

너희가 율법으로 영생을 얻고자 했는데 영생은 율법 속에 있지 않고 예수님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즉 율법은 영생이 예수님 속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란 뜻이 됩니다.

 

그럼 율법은 예수를 만나게 하는 길잡이란 말입니다.

 

갈 3:24-25=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맞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합니다.

몽학선생이란? 부잣집 아이들을 학교에 데리고 갔다가 데리고 오는 길잡이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이라는 길잡이를 앞세우고 따라가면 예수님을 만나야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리스도라는 예수에게 인도하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가장 잘 지킨 사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나서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율법을 못 지킨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을 가지고서도 날 몰라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율법이 어떻게 하여서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 주셨을 것입니다.

 

그럼 먼저 율법은 왜 주어졌는지부터 알아봅시다.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롬 3:20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사도 바울은 율법은 범법함으로 더한 것이라고 합니다.

더한 것이란? 원래는 필요가 없는 것인데 갑자기 필요가 생겨서 더해 준 것이란 뜻입니다.

어째서 더해졌는가?

이는 범법함으로 더해졌다고 합니다.

 

범법함이란?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죄 때문에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죄와 율법은 한 셋트가 되는 셈입니다.

죄가 있는 곳엔 반드시 율법이 있고 죄가 없는 곳엔 율법이 필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죄를 지적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죄를 지적하라고 율법을 준 것입니다.

 

알다시피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죄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희가 어떤 처지에 놓였으며, 너희가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알려 주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애당초 지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셈입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본인이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자들은 나는 지옥으로 가는 놈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정도 되면 이 시대 한국교회는 저주 아래 있고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잘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최고의 신앙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 갈 것이라고 찰떡같이 믿었는데 지옥으로 가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여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는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주둥이를 딱 닫으라고 율법을 주었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따박 따박 말대꾸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여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합니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저주를 피할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너희들은 이제 다 죽었어!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 율법을 통하여서 자기 실존을 아는 자는 하나님 살려 주세요! 라고 해야 됩니다.

난 죽일 놈입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살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율법은 마치 의사가 MRI로 병을 찾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의사가 병을 찾아서 이제 치료하는 길을 알려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율법으로 인간의 실상을 알려주고 살 길을 알려 주시는데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살려주는 분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 가 바로 “그리스도” 라고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에 대하여서는 성령님이 가장 잘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하는 모습들이 나옵니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가는 곳마다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럼 주와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는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을 때 예수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모른다면 그 신앙은 틀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을 보면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는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 속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의 성막 시대에는 이 삼직이 각각 구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왕 제도가 세워지면서 삼직이 왕에게로 귀속이 됩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왕이면서 제사장이면서 선지자 직을 다 감수하였습니다.

그리곤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언약을 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운명은 왕 속으로 들어갑니다.

왕의 운명에 따라서 국가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왕이란? 이스라엘 백성을 책임지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왕하고만 상대를 하십니다.

왕이 잘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복을 받고 왕이 잘못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화를 당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왕 안으로 귀속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하는 것은 왕이란 말이고 자기백성들을 책임져 주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긴 뜻과 같이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건져주기 위해서 책임지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의 죄를 예수님이 책임지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책임지신다는 말은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즉 성도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죄의 삯은 하나님께 심판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이라고 해서 죄 값을 탕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불의한 심판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의 죄도 용서해주면서 하나님의 공의도 훼손당하지 않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 택한 방법이 자기백성들의 죄값을 누가 대신 담당해 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받아야 할 저주를 누군가 대신 받아 주는 것입니다.

대신 책임져 주어야 합니다.

 

대신 책임져 주는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하십니다.

그러니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성도의 죄값을 대신 짊어져 주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이라 함은 옛 언약과 대조하는 의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옛 언약은 자기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도 자기가 지켜야 합니다.

못 지키면 자기가 저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예수님이 대신 해 주십니다.

하나님 말씀도 예수님이 대신 지켜주십니다.

새 언약에선 성도가 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언약을 예수님의 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자기백성들을 찾아가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도록 하십니다.

그러니 성령이 임한 자기백성들은 이 사실을 믿습니다.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이외에 그 모두는 다른 예수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대신 다 이루셨는데 어느 놈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즉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더냐 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나를 대신 하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 대신 죽어 주셨다는 예수를 알아야 바른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내 대신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알아야 바른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받아준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율법이 몽학선생이라고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갈 3:24-25=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담당해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지 우리가 지켜서 의롭게 된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다시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아래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율법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말라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주여 우리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했습니다! 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영광 돌리겠다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세리처럼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갈 데가 없습니다! 라고 하란 말입니다.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라고 나오란 말입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놈입니다! 라고 나오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믿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대신 죽어 주신 분 앞에서 자기가 책임지고자 하는 것은 모욕하는 것입니다.

죄 값도 자기가 책임지고자 하고, 하나님 말씀도 자기가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악함입니다.

 

이를 예로 든다면 가룟유다와 베드로의 행동으로 비교하여 들 수가 있습니다.

가룟유다와 베드로는 동일하게 죄를 지었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이나,

베드로가 예수님은 세 번 부인하고 저주한 것이나 죄를 범한 것을 동일합니다.

다 저주 받아야할 죄입니다.

 

그런데 죄 값을 처리하는 방법에선 다릅니다.

가룟유다는 자기가 책임을 져서 자살을 하였지만 베드로는 뻔뻔스럽게 살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룟유다가 멋있고 베드로는 야비합니다.

 

그러나 가룟유다의 잘못은 자기가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으면 예수를 판 죄가 용서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가룟유다는 자살로서 자기 죄를 사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선 예수를 팔았건 안 팔았건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에겐 의로운 행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모든 행위는 죄일 뿐입니다.

 

그러니 가룟유다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자살하였다고 하여도 의로운 행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가룟유다에겐 대신 담당해줄 그리스도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죄값을 다 책임을 지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귀의 자녀들은 가룟유다와 같이 자기 죄를 자기가 책임지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자녀들은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이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는 식으로 말하면 너희는 성경의 모든 내용을 너희가 책임지려고 하니 틀렸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성경을 바로 알았다면 예수님 대신 담당해 주세요! 라고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열심히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유대인들의 신앙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열심을 냈습니까?

얼마나 대단한 열심이었는가 하면 예수 믿는 자들을 씨를 말리려고 온 세계로 쥐 잡듯이 잡으러 다녔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곤 지신들의 신앙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고 완전히 돌아 버렸습니다.

 

빌 3:4-6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바울은 다메섹 이전의 신앙을 스스로의 평가하기를 유대교 신앙으로는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완벽한 것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유대인들이 이단이라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율법으로 예수를 죽였는데 그 율법을 적용한 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제 딴엔 잘한다고 율법을 지킨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아야 할 죄라고 합니다.

율법으로 판단해서 이단이라고 죽인 그 예수가 하나님일 줄이야!

한마디로 기절초풍하고 경악할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으로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평가한 유대교는 완전히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하나님 원수 노릇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입만 열만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했어요.

자신이 마귀였으면서,,,,,

 

바울 입장에선 아니 어떻게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이단이라고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주셨느냐 이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가 있느냔 이 말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성경을 잘못 보았다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율법신앙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예수로 모든 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신앙을 신봉하는 유대교가 틀렸다는 것을 알고 나니 이젠 자기 동족들이 걱정인 겁니다.

모두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율법 신앙이 최고의 신앙이라고 믿고 있는 자기 동족들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 깨달아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젠 차라리 자기 혼자 지옥에 가더라도 자기 동족들은 제발 자기와 같은 우를 범치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엔 성경을 몰라서 그랬다고 합니다.

아니 성경 박사가 성경을 몰랐다고 합니다.

난 엉터리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항상 반복되어 진행되어 가듯이 지금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과 같은 열심들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예수를 믿을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난리들입니다.

 

이는 곧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 줄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대신 책임져 준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행함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고, 자신들이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내야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말은 같지만 실상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인 것입니다.

행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헛것으로 만들고 잇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고 하는 자들은 자기 행함으로 죄다! 아니다! 라고 가늠하는 것이 죄인 줄 모릅니다.

결국 유대인들 흉내를 그대로 내고 있는 셈입니다.

저주 받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를 가장 잘 믿고 예수를 가장 사랑한다고 하는 자들이 자신들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교회들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왜? 이 세상에 보내셔야만 했으며,

하나님은 예수를 왜? 십자가에 죽이셔야만 했으며,

하나님은 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도 예수를 믿겠다고 합니다.

 

믿는다는 말을 한다고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할 때는 자신을 믿지 않고 믿는다고 하는 그 대상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말 속에는 나 행함을 보지 않겠습니다! 라는 고백이 들어가 있습니다.

성경이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자기 자신은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니 꼬라지는 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믿음에 반대는 자기의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 행위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교회들이 인간의 행함이 신앙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자기들 생각의 믿음 관으로 보기 때문에 열심과 충성을 강조하는 겁니다.

옛 언약의 눈과 귀로 하나님 말씀을 대하기 때문에 자신이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보훈의 결론을 집 짓는 비유로 마감한 것입니다.

 

마 7:24-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집 짓는 비유로 옳고 그른 신앙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집을 지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디에 집을 지었느냐를 묻고 계십니다.

집 짓는 것은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겁니다.

교회 다니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너 왜? 교회 다니는데?

너 왜? 예수를 믿는데? 이 말입니다.

 

집을 짓는데 두 가지 터가 있다고 합니다.

반석과, 모래입니다.

반석은 그리스도이고, 모래는 인간입니다.

반석은 예수를 믿는 믿음이고, 모래는 인간의 행함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믿음에 싸움이니 결국 누구를 믿을 것이냐? 로 결론이 납니다.

반석은 그리스도라고 했고, 모래는 인간이라고 했으니,

예수를 믿을 것인가, 자기를 믿을 것인가 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대신 담당해 주신 것을 믿는 것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자기가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냐!

아니면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는 행함이냐! 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반석과 모래처럼 속성이 다릅니다.

믿음은 다른 분이 한 것이고, 행함은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도 신앙으로 자리 잡아 있고, 인간의 행함도 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는 셈입니다.

 

교회 안에 예수 믿는 사람도 있고, 자기 열심을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성경을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지? 라고 상고하게 됩니다.

반면에 자기 행함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무슨 명령을 하고 있지? 라고 보게 됩니다.

결국 모든 말씀을 지켜야 할 것으로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는 사라지게 되고,

어떻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라는 것만 남게 됩니다.

 

바울은 이런 상태를 저주 아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보세요.

항상 율법을 지켜야지 하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다고 하잖아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지 라고 하는 사람은 저주 아래 있는 겁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눈만 뜨면 뭘 할까? 고민합니다.

이러면 일평생 말씀을 지켜야 하는 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지 라고 하면서 자신을 수양합니다.

일명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아니 죄인이 거룩하게 산다는게 말이 됩니까?

거룩은 거룩하신 예수 안에 들어가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란 뜻입니다.

예수 안은 거룩이고, 예수 밖은 죄입니다.

예수 안은 영생이고, 예수 밖은 저주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예수 밖에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맨 날 어떻게 살지? 라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것이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지 자기가 죄 값을 치루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아들이지 종이 아닙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쉼을 누리지만, 종은 뼈 빠지게 일해야만 합니다.

저녁때가 되면 주인이 아들과 종을 심판합니다.

종은 얼마나 일했느냐? 로 따지고, 아들에겐 무슨 일하고 놀았느냐? 묻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누구를 붙잡고 있느냐로 결정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심판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밖은 무조건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출애굽 할 때 온 애굽에 장자를 죽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단행 될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만 살아남은 것과 같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곧 예수 안이 됩니다.

영적으로 보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의 피 때문에 심판을 면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가 누구신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 예수 믿습니까? 라고 묻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이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집을 짓지 않는 것은 다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에도 무엇을 하기 이전에 먼저 옳은 앎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정확한 정보가 없으면 다른 예수를 믿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설 명절에 친척들과 만났습니다.

27살 먹은 조카와 대화를 하다가 신앙이야기로 화제가 모아져서 물었습니다.

이 아인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입니다.

지금도 서울에서 큰 교회에 출석을 합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도발적인 질문을 하였습니다.

너 예수를 믿느냐?

예수를 만났느냐?

2000년 전에 죽은 유대청년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데?

예수가 누구인줄 아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당황하더니 솔직히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런 것 생각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 따라 교회를 다니다 보니 주일이면 교회 가는 것이 일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단 한 번도 이런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자신은 교회 다니면 당연히 예수를 믿는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고모부가 막상 그렇게 물으니 자기도 당황스럽다고 합니다.

고모부 말을 들으니 내가 지금까지 왜? 교회를 다녔지? 라는 의문이 쌓이고 고민이 된다는 것입니다.

알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긴 이야기는 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잠시 말하다가 울산목양교회 블로그에 들어가서 설교를 보고 신앙을 진지하게 한번 점검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비단 이 아이에게만 국한 된 이야기이겠습니까?

전 개인적으로 한국교회 교인들의 대다수가 이런 상태라고 봅니다.

 

물론 믿는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도 깨어 보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대 다수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자기 열심을 믿고 있습니다.

새 언약이 무엇인줄 모르는 사람이 거의 태반입니다.

새 언약을 모른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안동지역에 사돈이 장(場)에 가니, 거름지고 장(場)에 간다는 우수겟 말이 있습니다.

이는 목적 없이 남 따라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밭에 거름 뿌리러 가다가 사돈을 만났다고 밭에 가는 것은 잊고 볼일도 없이 장(場)에 따라가면 어쩌자는 겁니까?

 

이 시대 대다수의 교인들에 신앙이 이지경입니다.

부모가 교회 가니 따라가고, 친구가 가니 따라가고, 애인이 가니 따라 가고, 그러다 보니 습관이 되어서 안하면 찜찜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가 누구인줄도 모르면서 예수 믿는다고 해요.

 

지금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고 계신 겁니다.

너희들 하나님 약속을 아느냐?

너희들 성경을 어떻게 보는데?

예수를 왜? 믿는데?

 

여러분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이 질문에 답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만난 예수를 내어 놓고 성경이 말하는 예수와 맞는지를 확인해 보세요.

괜히 엉뚱한 예수를 붙들고 있으면서 참이라고 믿고 있지는 않는지,,,,

가짜는 빨리 버릴수록 신상에 도움이 됩니다.

가짜 교회에서는 빨리 나오는게 손해를 덜 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님이 나의 주시오 그리스도라는 것이 믿어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나의 주시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