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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36강. 누구의 영광을 구하고 사는가 (요 5:41-47)

by coroa 2021. 3. 2.

 

마가 13 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36강. 누구의 영광을 구하고 사는가 (요 5:41-47).-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사람의 영광을 취하지 않는다 라고 하십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들에게 인정받고 싶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이건 아주 인간을 무시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난 너희를 가치 있게 안 본다는 뜻입니다.

가치 없는 인간들에게 인정받아 본들 그게 뭣이 그리 대단 한 것이냐 라는 말씀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벌레 같은 죄인에게 인정을 받은들 그게 무슨 큰 영광이 되느냐 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엄청 가치 있는 인간인 줄 알았습니다.

자기들이 인정해 주면 그것이 영광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선 바리새인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이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무시당한다는 것은 무가치 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다 제 잘난 맛에 사는데 누가 나를 무시한다고 하면 화가 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돌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범해서는 자기를 알릴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남의 이목을 집중 시킬 만한 사건을 일으켜서 사람들이 시선을 끌어 모으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어떤 연예인은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것을 스스로 이기지 못해서 납치 자작극을 벌렸다고 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연예인은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냥 연예인이라고 하지 않고 앞에 꼭 인기라는 말을 붙여서 인기 연예인이라고 합니다.

인기가 많다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듣는단 말입니다.



잘 생겼다거나,

노래를 잘 한다거나,

연기를 잘 한다거나,

스포츠를 잘 한다거나 하면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칭찬을 많이 듣게 됩니다.

 

얼마 전 박찬호 선수가 기자회견을 하면서 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운 사연을 밝히는데 한마디로 서글프더라는 것입니다.

과거 전성기 때와 비교해서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나 싶더라는 겁니다.

성적이 좋을 때는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는데 이젠 잊혀져 간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관심사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간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이는 박찬호 선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그러합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칭찬듣기 좋아하고 사랑받기 좋아합니다.

칭찬 듣고 사랑 받을 때 존재의 의미를 느끼고 삶에 희열을 느낍니다.

반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싫은 소리를 들으면 슬퍼지고 우울해 집니다.

 

제 아내는 음식 솜씨가 참 좋습니다.

그래서 제가 곧잘 당신 음식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맛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칭찬을 합니다.

음식점에서 사 먹어 보아도 당신 음식처럼 맛있는 음식은 없다고 하면 좋아라 합니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항상 음식을 하고 나선 꼭 맛있어! 어때! 라고 묻습니다.

김치를 해도 꼭 맛을 보여주면서 묻습니다.

 

그런데 늘 잘 할 수는 없잖아요.

때론 제 입맛에 안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아무 말을 안 합니다.

그러면 눈치를 채고 안 물어야 하는데도 꼭 또 물어요.


마지못해 그저 그래! 라고 하든지 아니면 짜다든가 싱겁다든가 솔직하게 말해줍니다.

그러면 삐져 가지고 말도 안하고 그럼 다시는 안 해 준다는 둥!

당신이 다 해 먹어라 라는 둥! 합니다.

제가 그렇게도 칭찬 듣고 싶으냐고 역성을 냅니다.

 

열 번 잘하다가도 한번 안 해주면 그게 그리 서운한 모양입니다.

여자들은 늘 확인하고 싶은가 봐요.

나 사랑해!

나 괜찮아!

맛있어!

그럼 전 어깃장을 놓는다고 그래 지긋지긋하게 사랑하고 예쁘고 맛있다 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입니다.

칭찬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해줍니다.

지나가는 어린 아이를 보고 야! 그 놈 이쁘다! 잘 생겼다! 라고 하면 엄마가 흐뭇해합니다.

엄마들에게 자식 예쁘다고 칭찬해 줘 보세요!

얼마나 상냥한지 몰라요.

 

사람은 칭찬 앞에 관대해지고 흐물흐물해집니다.

인색한 사람도 칭찬을 하면 주머니를 엽니다.

오죽했으면 고래도 칭찬하면 춤을 춘다는 말을 하겠어요.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자기를 예뻐해 주고 칭찬해주면 좋아라 합니다.

 

지난번에 최진실이라는 여 배우가 자살했습니다.

그 이유가 악플 때문이라고 합니다.

칭찬을 했으면 자살을 안 할 터인데 욕을 하니 자살한 것입니다.



전 아직까지 칭찬 받아서 자살했다는 사람은 못 보았어요.

모두가 사람들이 욕을 하고 미워해서 자살을 합니다. 

그래서 이젠 정부차원에서 악플은 그만 하고 선플을 합시다! 라는 캠페인을 벌리고 있습니다.

서로 서로 칭찬을 해서 사회를 밝게 하자고 합니다.



칭찬을 하면 사람이 기분이 좋아지고,

기분이 좋아지면 남에게 관대해지고,

관대해지면 다툼과 경쟁이 사라지고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겠느냐 라는 겁니다.

인간의 본성을 잘 파악한 것이라 사료됩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칭찬 받기를 바랍니다.

목사도 설교를 하고 나면 본능적으로 성도님들의 반응을 살핍니다.

성도님들이 목사님 오늘 설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섭섭한 맘이 듭니다.

 

블로그에 글을 올려놓아도 누가 은혜 받았다고 댓글이라도 달아 주면 기분이 좋습니다.

이처럼 칭찬을 받고자 하는 모든 것은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복음을 아는 것하고 본능은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말이죠.

칭찬은 마약과 같아서 중독성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번 남이 나를 알아주면 계속하여 그 알아줌의 영광을 추구하게 됩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곳엔 얼굴을 내 밀고 싶어지고 안 알아주면 코빼기도 안 보입니다.

 

알아주는 곳엔 자진해서 참석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오라고 해도 안 갑니다.

교인들도 알아주면 주일날 교회 일찍 와서 청소도 하고 안내도 하고 화사하게 인사도 합니다.

그러나 알아주지 않으면 안 옵니다.

종국엔 자기를 알아주는 곳으로 옮깁니다.

 

영광이란? 인기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입니다.

사람은 소외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성공하라는 것은 사람들 숲에서 돋보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선 남보다 돋보이는 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고, 칭찬 듣고 싶어 하고, 성공하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한마디로 세상이 주는 물이라고 했습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은 세상이 주는 물고 다르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물은 먹으면 먹을수록 갈증을 유발시킵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물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목마른 것이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이걸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들이 연예인이고 정치하는 사람들입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은 항상 메스컴의 중심에 서 있기를 바랍니다.

흔히 언론으로부터 관심을 받고자 합니다.

 

언론으로부터 관심을 받자면 평범함으로는 안 되고 뭔가 튀어야 합니다.

튀어야 언론에서 보도를 합니다.

언론도 맹숭맹숭한 것은 보도하지 않아요.

옷도 그냥 평범한 옷을 입으면 안 되어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옷을 입어야 카메라 플레쉬가 터져요.

그래서 자꾸만 튀는 파격적이고 돌발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여옥이라는 국회의원이 그랬지요.

국회의원들은 카메라만 들이 되면 돌변한다고!

카메라가 없을 땐 여당 야당 구분 없이 형님 동생 하다가도 카메라만 들이대면 안면을 싹 바꾸고 악다구니를 쓰면서 상대방에게 고함을 치고 돌출 행동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다 카메라가 사라지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서로 히죽거리며 웃는데요.

한마디로 쑈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당부하기를 제발 속지 말라고 합니다.

튀는 행동을 해 보세요.

영웅이라도 되는 냥 언론이 대서특필합니다.

뉴스 시간에 집중 보도가 되요.

 

강00이라는 사람 보세요.

참 불쌍한 사람이에요.

과수원에서 농사일을 하던 사람이 농민 운동이다 뭐다 하면서 언론 노출증이 생기더니 국회의원이 되고 난 후엔 단식을 한다거나 튀는 행동을 서슴지 않아요.

옷도 한복을 입고 수염도 기르고 지난번 국회에서 하는 짓거리 보았지요.

완전히 돌아이 입니다.

참으로 측은해요.

 

정치인이고 종교인이고 예외일수 없어요.

데모대 앞에서 신부들은 삼보일배를 하고,

중들은 목탁을 두들기고,

목사들은 십자가 메고 지랄을 떠는게 다 그래요.



나 좀 알아 달라는 겁니다.

흔히 데모꾼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영웅이 되고파서 여기서도 번쩍 저기서도 번쩍해요.

공장 굴뚝에라도 올라가서 시위를 해야 해요.

이 사람들은 데모 하는게 직업처럼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약방의 감초같이 안끼는데가 없어요.

 

세상에 얼마나 관심을 끌고 싶으면 한강 다리 위에 올라가서 자살하겠다고 하겠습니까?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자살하겠다고 소동을 벌리는 자는 죽을 생각이 없는 자랍니다.

진짜 죽을 사람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살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무관심하면 멋쩍어서도 그런 짓 안한답니다.



드러내고 자살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관심이 최고의 약이래요.

아니 죽고 싶은 놈이 무슨 남에게 관심을 끌게 있습니까?

남에게 관심을 끄는 것은 죽기 싫다는 겁니다.

제발 날 좀 알아 달라는 겁니다.

 

언론도 마찬가지에요.

평범한 것은 관심이 없어요.

언론도 돈 벌기 위해선 사람의 시선을 자기 방송에 붙잡아 두어야 해요.

시청자를 만들고 독자를 만들려면 그런 이슈들을 찾아서 보도를 해야 해요.

그래야 시청률이 올라가고 시청률이 올라가야 광고가 들어오고 광고가 많이 들어 와야 돈벌이가 됩니다.

 

돈 없으면 방송국도 문 닫아야 해요.

지본주의 사회에선 모든게 돈입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야 합니다.

윤리고 도덕이고 다 살고 난 다음에 문제이지 죽고 나면 아무 소용없어요.

 

드라마들 보세요.

시청률 잡기에 비상입니다.

드라마도 평범한 소재를 다루면 사람들이 안 봐요.

파격적인 소재를 다루어야 사람들이 좋아 해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가 불륜과 권선징악하는 폭력입니다.

이는 인간들의 잠재의식 속에 이런 성향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겁니다.

흥행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공감 한다는 뜻입니다.

 

요즈음 최고로 시청률이 높은 아내의 유혹이라는 드라마를 보세요.

방송 스스로도 막장 드라마라고 해요.

갈 데까지 갔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고 있어요.

저도 가끔 보는데 욕을 하면서 봐요.

얼통당토 않은 내용인데도 시청률 1위라고 합니다.

참 이해가 안가요.

 

처음 시작 할 때 광고 세 개가 나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삼십 개 정도가 나와요.

광고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기가 있고 인기가 있으면 광고료도 비싸다는 말입니다.

드라마 하나가 방송국에 엄청 돈 벌어 주는 겁니다.

그러니 사장님이 스태프들을 격려를 해 주지요.

인기드라마를 만들어 주면 연말에 시상도 해주고 하잖아요.

좌우지간 인기가 있다는 것은 성공한 것입니다.

 

인기나 칭찬이나 영광이란? 마약과 같아요.

한번 맛들이면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칭찬과 성공과 인기라는 마약으로 사람들을 옭아맵니다.

 

목사들도 이 영광 때문에 교회를 크게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울산 최고니, 경남 최고니, 한국 최고니, 세계 최고니 하는 수식어들을 듣고 싶어 해요.

저희 교회 옆에 있는 00교회 목사는 자기 교회 엘리베이터 있는 것을 자랑하고 다녀요.



예전에 아는 장로님 임직식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이 사람이 노회장이라서 장로 임직식 설교를 하는데 자기교회 엘리베이터를 자랑하는 겁니다.

그때 막 교회 건축을 끝내던 시점이었어요.

하는 말이 자기교회는 울산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있는 교회라고 자랑을 해요.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으면 임직식 설교에 그런 말을 하겠어요.

 

이건 마치 어린아이들이 우리 아빠 팔뚝 굵다 라고 자랑하는 것과 같아요.

이게 부끄럽고 창피한 일인 줄도 몰라요.

아니 목사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복음이어야지 교회 엘리베이터 있는 걸 자랑하면 우짭니까?

하나님이 교회 엘리베이터 있다고 영광 받지 않아요.

이게 모두가 관심사가 예수에게 두고 있지 않다는 반증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교회는 국회의원 나온다고 자랑하고!

우리교회 목사님은 총회장이다 자랑하고!

우리교회 목사님은 박사라고 자랑하고!

 

교회들은 이에 질세라 우리교회는 일 년 365일 철야기도 한다고 자랑하고!

우리교회는 금요일마다 산 기도 다닌다고 자랑하고!

우리교회는 성경 통독하고 필사 한다고 자랑하고!

교회자랑하고 목사 자랑하는 교인들은 지천에 깔렸는데,

예수님 십자가 피를 자랑하는 사람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려워요.

그만큼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은데 예수 믿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게 모두가 세상 영광에 목말라서 하는 행동들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것을 주겠다고 하여야 사람들이 장단에 맞추고 춤을 추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고 하면 그럼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더 잘해야 하는데 도리어 그럼 우리는 할 일이 없네! 라고 하면서 안 해요.

 

그래서 목사들이 열심히 해서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하는 겁니다.

잘난 사람이 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해요.

그러면 좋아라 합니다.

결국 하나님 영광을 핑계로 자기가 성공하여 영광 받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갈 1:6-10=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배경을 알아야 해요.

바울은 일찍이 갈라디아 지역에 전도하면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서만 된다고 증거하였어요.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이 이런 바탕위에서 세워졌어요.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이 출몰하면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예수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말씀도 지켜야 한다는 성화론자들이 교인들을 미혹한 겁니다.

교묘하게 믿음에다 행함에도 의(義)가 있다고 섞어 놓은 겁니다.

 

그런데 이들의 말에 사람들이 혹 하고 쏠리고 만 것입니다.

쏠리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인간을 빼 버리는데 반해서 성화는 인간의 기쁘게 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엔 내 자랑거리가 없지만 성화엔 자기 자랑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뭔가 자기가 했다는 것이 있으면 자긍심을 갖게 되어요.

 

예수님이 전도합니다 라고 하면 시큰둥해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도우십시오! 라고 하면 좋아해요.

하나님 일을 자기가 도운다고 해 보세요.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아! 내가 하나님의 일을 돕고 있다!

이 얼마나 부뜻하고 자긍심이 생기고 행복합니까?

꼭 자원봉사하고 보람을 느끼는 것과 같아요.

자원봉사 하시는 분들이 말을 들어 보면 봉사하는게 힘들어도 보람을 느껴서 좋다고 합니다.

 

지금 갈라디아 지역에 이런 사상이 난무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한국교회에 개혁주의니 성화주의니 하는 것처럼 인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어떻게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것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쫓느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이란?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내가 만약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전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단호한 말은 복음 속에는 사람을 기쁘게 해 주는 요소가 없다는 말입니다.

복음 속에 사람을 기쁘게 해 주는 요소가 없는 것은 복음 자체가 인간의 죄를 공격하면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란?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은 부정합니다.

복음 앞에 인간은 죄인 일 수밖에 없으니 기쁜 요소가 들어 갈 리가 만무하지요.

너희는 썩은 송장이라고 하는데 거기서 무슨 의가 나올 수 있느냔 말입니다.

너희들이 율법을 지키고 성화를 하고 개혁을 하여도 다 썩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 들고 나오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 십자가 피만 앞세우고 오란 말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안 좋아하는 것은 인간을 묵사발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성화니 개혁이니 를 좋아하는 것은 인간을 칭찬해 주기 때문입니다.

칭찬 듣고 싶어 환장하여서 칭찬해주는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인간인데 교회에서 하나님을 도와서 일을 하라고 하면 얼마나 신이 나겠어요.



우리 힘으로 멋진 교회를 만듭시다 라고 하는데 얼마나 신이 납니까?

자기가 한 일이 자랑스럽고 자기가 변화된 모습이 자랑스러워지면 복음이 기쁘지가 않아요.

예수님 피가 고맙지가 않아요.

 

다윗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상함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것은 자신이 못 낫다는 것을 알 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자신이 못 낫고 형편없는 죄인임을 알게 해 주는 것이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지 않은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칭찬과 웃음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볼 때 웃을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 들을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칭송받고자 하는 것은 다른 복음이고 사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거룩하게 성화하여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말인 줄 알 수가 있어집니다.

자기 행함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고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하나님의 의(義)를 모르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을 인간 쪽에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속에만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인간의 그 어떤 행함 속에도 영광은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개혁주의 성화론 자들은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제쳐놓고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돌리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영광을 만들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미 영광 안에 들어와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뭔가 끊임없이 영광 돌릴 일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영광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빛이라 합니다.

그럼 예수 밖은 전부 어둠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빛을 만들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 빛으로 삽니다.

빛에 거한 사람은 자체적으로 빛을 만들고자 하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형편과 상관없이 빛입니다.

예수 안에선 강도도 빛이고, 도적놈도 빛이고, 창기도 빛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빛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조건으로 빛이 되는 것이 아니고 빛이신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빛의 아들인 겁니다.

그러니 교인들에게 빛이 되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빛 된 삶을 사십시오! 라고 하는 것도 사기입니다.

빛 된 삶이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빛 된 삶이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빛이 되는 것도, 빛 된 삶도, 인간이 독자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참 빛이신 예수 안에 있으면 빛이고 그 안에서 살면 빛 된 삶입니다.



예수 밖은 무조건 어둠이고 어둠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빛을 만들고 있으니 어찌 참 빛으로 들어 올 수가 있겠느냐고 하시는 겁니다.

 

44절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너희의 영광을 구한다는 말씀은 자기 잘남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인 그 아들을 믿을 수 있겠느냐 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의 잘남을 자랑하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난 못 났으니 예수님을 믿습니다 가 정답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찌 예수를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 내 안으로 들어 와라 해도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예수 너를 믿느냐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안 믿는 것을 죄라고 규정해 놓은 것입니다.



잘난 놈들을 가라!

죄인들만 오라! 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고전 13장에 보면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라고 합니다.

“자기” 라는 자리에 “진리” 를 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이니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단순합니다.

예수님이 자랑스러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고마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랑하고 사랑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합니까? 라고 물어요.

사랑하는데 방법이 없어요.

어디서 어디까지도 없고,

얼마큼도 없고,

어떻게도 없어요.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말은 살아가는 의미를 예수님에게 두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 우상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우상이란? 자기를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우상 아닌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면 옳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성화주의도 옳은 신앙이 될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십자가! 십자가 하여도 그 십자가를 자기를 들어내기 위함이면 우상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면 십자가도 우상으로 전락해요.

 

어떤 이들은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안하려고 해요.

교회도 안가고 헌금도 안하고 봉사도 안하고,,, 안하고 안 해요.

뭐하느냐 하면 집에서 놀아요.



섬김이 있나!

낮아짐이 있나!

없어요.

자기 몸뚱이 편한 대로 살아요.

죄에 대한 아픔이나 애통함도 없어요.

그래 난 죄인인데 뭘 그래요.

그게 믿음인줄 알아요.



이건 경건을 지기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는 악입니다.

자기 육신을 위해서 십자가를 이용하는 것이므로 십자가를 가리는 죄가 됩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정신으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성화주의자들의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고 하지만 실상은 그 성화 속에 자기 영광이 자리 잡고 있어요.

자기 자랑하지 않고 성화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게 안 되니 문제인 겁니다.

성화 된 것을 자랑하고 싶은데 어쩌란 말입니까?

그래서 성화론은 이단인 겁니다.

물론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빈둥거리고 노는 것도 이단입니다.

 

성화론을 공격하면 발끈하면서 반발 한다는 것은 자가 자랑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발끈하는 것은 왜? 우리의 노력을 무시하느냐 입니다.

왜? 날 인정해 주지 않느냐 압니다.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은 오직 단 하나 인간의 행함엔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의가 없기 때문에 신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아니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데 왜? 성질을 냅니까?

 

신앙은 의에 싸움이지 인간들 정성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가 어디에 있느냐를 상고하는 것이 신앙의 관점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가 있어야 심판을 이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성경은 율법 외에 한 의라고 말하면서 오직 십자가만 의가 된다고 하셨어요.

“십자가 만” 이라고 하는 것과,

“십자가 도” 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만” 이라는 말과, “도” 라는 말은 근본이 달라지는 말입니다.

 

“십자가 만”이라는 말은 “오직 십자가 뿐” 이라는 뜻이지만,

“십자가 도” 라는 말은 “십자가 말고 다른 것이 있다” 는 뜻입니다.

다른 것이란 성도의 행함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도 라는 말은 예수님의 공로에다 인간의 성화를 섞는다는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피에다 인간의 피를 섞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성화론자들이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신앙 속엔 성도의 행함도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信仰)이라는 말이 뭡니까?

신앙(信仰) 이라는 말의 신(信) 은 믿을 신(信) 이고, 앙(仰) 은 우러러 볼 앙(仰) 입니다.

한마디로 믿는 것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그럼 성도가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아닙니까?

예수그리스도 피를 믿으면 천국에 가지만,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안 믿으면 지옥에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시종일관(始終一貫) 내어 놓는 것은 예수님의 피 뿐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주(主)이시고 그리스도이시지 선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믿을 분이지만 선생은 본받을 분입니다.

예수를 본 받자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로 보지 않고 선생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는 인류의 사대 성인 중에 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겁니다.

 

실제로 천주교 교리가 그래요.

예수를 본받자고 합니다.

물론 이 시대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주교에선 인간 속엔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데 죄로 인하여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랑인데 사람들 속에 있는 하나님 형상을 성령으로 회복하면 착한 사람이 되므로 사랑이 넘치는 평화로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모든 종교의 근본은 좋은 사람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니 종교를 따지지 말고 하나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세계 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정신이야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합니까?

그런데 이상과 현실을 달라요.

아무리 이상이 좋다고 하여도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망상이고 허상입니다.

 

여러분 공산주의 사상이 성경에서 나온 이론입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모습이 공상주의 사상입니다.

빈부가 없는 세상 귀천이 없는 세상 모두가 동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겁니다.

이런 세상은 한마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지상 낙원을 만들자고 하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뽕~ 갑니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한 가지 간과 한 것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놓친 것입니다.

의인이라면 가능해요.

그런데 죄인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안에 탐욕이 부글 부글 끓어요.

그래서 공산주의에도 자본주의 사회와 같이 빈부와 귀천이 생기는 겁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유토피아를 만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모두가 죄인이고 도적놈이라서 그런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교인들이 천국 같은 교회를 만들자고 합니다.

흔히 개혁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도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 속에도 탐심이 있고 교인들 속에도 탐심이 있어요.

이건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 속의 교회엔 곡식과 가리지를 함께 섞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교회를 허락하지 않았어요.

 

성경에 나와 있는 교회들이 다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은 모두가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현실 교회는 불완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하려고 하지 마세요.

교회에 의미도 두지 말고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살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증거는 죄인 속엔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그 후손은 아담의 형상을 입고 태어났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 나라를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분입니다.

인간이란? 하나님 형상을 입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지 않고 아담의 형상으로 난 자이므로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은 하나님 형상대로 지었습니다.

 

창 5:1-3=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엔 자기 형상의 자식을 낳았습니다.

자기 형상이란 말은 원래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엔 아담의 후손들은 전부가 죄인인 아담의 형상을 가진 자들이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짐승이라고 하는 겁니다.

 

죄가 없는 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가 됩니다.

그럼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므로 죄인인 것입니다.

죄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아요.

 

이게 구약에선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대입시켜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입장에서 죄 없는 인간으로 대하여 주었고,

이방인은 하나님 밖의 죄인이므로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짐승으로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하지요.

어린아이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짐승까지 다 진멸하라고 했어요.

이는 곧 아말렉은 짐승과 동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짐승까지 도륙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아말렉을 사람으로 보고 일부를 살려두었어요.

하나님은 짐승으로 보는데 사울은 사람으로 본 겁니다.

이게 사울이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란 증거입니다.

결국 사울이 사람이라고 살려둔 아말렉 소년에게 죽임 당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윗이 사울을 죽인 자가 아말렉 소년이라는 것을 듣고 죽여 버립니다.

어찌 보면 아말렉 소년은 다윗의 원수를 갚아 준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아말렉 소년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것은 짐승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눈으로 아말렉을 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참 인간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왜요? 예수님만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자라고 합니다.



인자(人子)란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아담 이후에 최초의 인간인 것입니다.

예수님만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일컬어 마지막 아담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는 말은 첫 아담과 대비하기 위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첫 아담이 죄인의 조상이라고 한다면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은 죄 없는 자의 조상이란 뜻입니다.

예수님 족보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인간이고, 예수님 족보에 없는 사람은 짐승입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자는 전부 성(城) 밖에 둔다고 한 것입니다.

 

계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성(城) 밖이란? 짐승들의 우리가 있는 곳입니다.

곧 지옥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도 하나님이 보시기엔 예수 밖은 전부가 아말렉과 같은 짐승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는 인간들은 전부 바퀴벌레라고 하는 겁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는 자는 짐승입니까?

예수님의 피 안에만 하나님의 의가 잇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의는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하지요.

이는 예수님의 피만이 죄를 사할 수 있는 능력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희생이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피만 고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여러분이 만약 마귀라고 합시다.

한 사람이라도 더 지옥으로 데리고 가야 합니다.

지옥에 가는 것은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간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의 피를 훼손하는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마귀는 예수님의 피 안에만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아요.

그래서 마귀는 예수님의 피를 가리는 일을 하는데, 인간의 피를 섞는 것입니다.



인간의 피란? 인간의 의를 말합니다. 

그럼 인간의 의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율법을 지키는데서 나오잖아요.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킨 이유는 무엇입니까?

율법 지킴 속에 의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잘 지키면 의롭다고 인정해 줄줄 알았어요.

 

그건 유대인들의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준 것은 의를 만들라고 주지 않고 인간은 의를 만들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오해를 하여서 거꾸러 생각하고 율법을 지켜서 의를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시온의 거치는 반석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시온의 거치는 반석이란? 유대인들을 넘어뜨리려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롬 9:31-10:3=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 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가만히 보니 유대인들이 달음질을 하는데 그냥 두면 천국까지 쳐들어 올 기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서 잘 달리고 있는 놈들의 발을 걸어서 넘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의 행사머리를 지금 개혁주의 성화주의자들이 하고 있어요.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돌리자고 하면서 말입니다.

영광을 자기들이 말씀을 지켜서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겁니다.

성화해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유대인들을 미혹 하였듯이 지금도 교회 안에 열심히 특심하다고 하는 놈들을 미혹하고 있어요.

여러분 열심 없는 사람은 개혁이나 성화론을 좋아하지 않아요.

관심도 없어요.

 

성화론을 좋아하는 사람은 열심들이 다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과거에 개혁을 오치고 성화를 주장 할 때 그랬어요.

자기들의 열심으로 열심 없는 사람과 차별하고 구분하고자 해요.

난 이런 사람이다 라고 자랑하고 있은 겁니다.

 

전 과거에 율법 아래 있을 때 개혁을 외치고 성화론을 주창하던 사람이었어요.

좋은 교회 만들자고 외친 사람입니다.

진짜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았어요.

심지어 집에 TV도 없앴어요.

세속화 된다고,,,

오로지 성경만 봤어요.

말씀대로 산다고 살았어요.

 

내가 거룩해지면 질수록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해요.

차별을 두어요.

난 너희들과 다르다고 해요.

그리곤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목에 힘을 주곤 했어요.

전 솔직히 그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그리 고맙지가 않았어요.

큰 의미도 없었어요.

 

상투적으로 예수님 피로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지식으로만 알았어요.

그래야 믿음 좋다고 하니까 그런 것뿐입니다.

내가 말씀대로 사는게 더 중요하고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성경에 나오는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보면 욕을 하였어요.

저주 잘 받았다고!

 

그러니 예수님의 피가 주는 영광은 없고 오로지 내가 말씀대로 살았다는 영광만 가지고 자랑했었어요.

그러니 신앙이 바리새인처럼 위선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고마워야 하는데 그렇게 고맙지가 않아요.

내가 말씀대로 살아온 행위가 더 소중하고 가치 있게 여겨졌으니까요.

 

그러니 누가 내 열심과 정성에 태클을 걸면 화가 나고 미워지는 겁니다.

속으로 저 인간은 예배도 제대로 안 나오고, 주일성수도 못하고, 전도도 못하고, 기도도 안하고, 헌금도 못하고, 방언도 못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즐길 것 다 즐기고 개판으로 살면서 남 시기한다고 욕을 하였어요.



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왜? 미워하고 죽어야만 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공감을 해요.

율법 지킴은 자기들은 자랑하고 싶은 훈장들인데 그걸 폄훼하니 가만있을 수 있겠어요?

저 같아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보니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알았어요.

야! 내가 바로 예수를 죽은 바리새인 이었구나! 를 알게 되었어요.

난 지금까지 예수라는 이름을 핑계 삼아 내 훈장을 하나 둘씩 만들고 있었던 것을 알았어요.

마치 마일리지 쌓듯이 차곡차곡 앨범 속에 담아 놓았던 겁니다.

그러니 옛날에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일을 했는지를 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다 내 자랑거리였고 하나님 앞에 바퀴벌레의 배설물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성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율법주의 유대인들과 싸우듯이 말입니다.

싸워 봐야 힘없이 이런 글을 통하여서만 말할 수밖에 없어요.

계란으로 바위치기이지만 증거가 되는 일이기에 이런 싸움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저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더 풍성한 것이 있다고 해요.

그들이 말하는 더 풍성한 것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처럼 사는 거에요.

낮엔 해처럼 밤에 달처럼 그렇게 살고 싶어 하는 겁니다.

바울처럼 무소유로 살고 모두 사랑하고 살고 싶어 해요.

참 아름답지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살겠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합니까?

이들의 잘못은 오직 예수만 바라보아야 할 외눈박이가 되어야 하는데, 두 분으로 예수도 보고 자신도 보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한 외눈박이었어요.

오직 십자가 이외는 전하지 않기로 작정하였어요.

얼마나 외눈박이었으면 누구든지 자기가 전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하늘로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일갈했겠어요.

자기 자신도 십자가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어요.

성령 받은 사람은 징그러울 정도로 예수 십자가만 바라보는 외눈박이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의가 없다고 외쳐요.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착하게 사는게 뭐가 잘못이냐 라고 해요.

아니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게 뭐가 그렇게 잘못된 일이냐 라고 따져요.

제가 시비를 거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걸 신앙이고 믿음이라고 하기 때문에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착한 삶을 나무라지 않았어요.

도리어 제자들에게 그들의 의로운 삶은 본받으라고 했어요.

누구든지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없으면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했어요.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있어야 천국에 가요.

이는 바리새인의 의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지킴의 삶 속에는 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과 같은 삶을 신앙이라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는 예수님에게만 있어요.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만 있어요.

믿음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 속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 열심히 지켜야 하는게 없어요.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새 언약을 맺을 때 12제자들이 행함과 맺지 않았어요.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맺었어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죄 값으로 대신 십자가에 죽어 주신 희생으로 맺었어요.

새 언약 속엔 인간의 열심이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은 배지시키고 예수님 하고만 약속을 하셨어요.

예수님의 피로서만 죄사함을 얻는 것이지 거기에 인간의 노력이나 행함이 들어가 있지 않아요.

 

성화론을 나쁘다 하고 개혁주의를 나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삶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말대로 살면 좋지요.

저도 그렇게 살고자 하고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엔 의가 없으니 그게 신앙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앙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자꾸만 신앙으로 인정해 달라고 하면 어찌합니까?

 

신앙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기 피로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이 이외는 없어요.

처음도 십자가 피이고 나중도 십자가 피예요.

끝까지 십자가 피만 내어 놓아야 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안 살고는 자유에요.

말씀대로 산다고 의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안 산다고 안 의로워지는 것도 아니에요.

그 이유는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지키고 안 지키고 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로서만 의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진리이고, 생명이고, 길이예요.

이것 말고 하나님께서 의로워지는 것을 허락한 것이 없어요.

천하 만민에게 구원 얻을 이름은 오직 예수님뿐이에요.

 

아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됩니다! 라고 하는데

왜? 그게 그리 못마땅합니까?

한 성령을 마신 자라고 한다면 그래 맞아! 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처럼 나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는 전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노라! 라고 하면 목사님 그렇지요.



예수님 피만 증거합시다!

그래야 하잖아요.

그런데 왜? 너희들은 십자가 피만 전하느냐 라고 이단이라고 핍박하면 어찌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전하는 자들을 외눈박이라고 이단이라고 하면 우째자는 겁니까?

예수님 피만 증거하는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는 그 사람이 이단인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은 다른 노림수가 있는 겁니다.

그건 예수님에게만 영광이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산 자기에게도 영광을 달라는 겁니다.

나도 좀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날 칭찬 좀 해 달라는 거에요.

 

전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 사람을 말리고 싶진 않아요.

그게 본인이 좋아서 하는 일을 왜? 제가 말립니까?

열심히 말씀대로 사세요.

저도 과거에 다 맛본 것이라서 잘 아는데 말씀 하나 하나 지켜가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거든요.

 

오늘은 이것 내일은 저것 남들은 회식자리 가서 소주 먹고 맥주 마시는데 나 혼자 사이다를 마시는 재미는 보통 재미가 아니에요.

남들은 쿨쿨 자는데 새벽기도 나오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거든요.

남들은 대충 대충하는데 철저하게 하는 재미가 보통 재미가 아니에요.



그런데 말이죠.

지키면 지킬수록 한계를 느껴요.

말씀대로 살고자 하면 할수록 말씀대로 살지 못하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요.

거기서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 안에 들어오고 보니 향방 없는 싸움을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요.

그래서 이젠 버린 겁니다.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려는 것을 버렸어요.

그래서 이젠 개혁주의니 성화주의니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건 취향입니다.

이건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어떤 사람은 집안을 정리정돈 잘하고 어떤 사람은 고물상처럼 해 놓고 사는 사람과 같아요.

성격이 정리정돈 안하면 잠을 못자는 사람하고, 성격이 돼지우리 같아도 머리만 대면 잠자는 사람하고 같을 순 없습니다.

 

이걸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라고 정의 할 수 없어요.

정답은 깔끔하게 살든지 돼지우리처럼 해 놓고 살든지 자기 할 일을 하면 되요.

할 일도 하지 않고 집안만 깔끔하게 해 놓으면 뭣합니까?

더러워도 열심히 가족들 부양한다고 직장생활하고 돈을 벌어주면 감사한 일이지만,

맨 날 얼굴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깔끔 떨면서 일하지 않고 백수가 되어 가족들 등골 빼 먹으면 그 놈은 나쁜 놈입니다.

 

먹고사는 것을 구원이라고 봅시다.

성도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받아요.

그러니 말씀대로 살아도 예수님 십자가 피를 믿어야 하고,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예수님 십자가 피를 믿어야 해요.

 

성화해도 예수님 십자가 피를 믿어야 하고, 성화 안 해도 예수님 십자가 피를 믿어야 해요.

예수님의 피 속에서만 구원의 능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화 했느냐 안 했느냐는 전혀 신앙의 본질이 아니지요.

신앙의 본질을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피 말고 다른 거 자랑하면 안돼요.

 

그러면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말씀대로 살아도 그걸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 피만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무슨 일을 해도 예수님 십자가 피만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고린도전서 13장 내용입니다.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예수님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말에 예수라는 말을 집어넣고 읽어보세요.

그러면 쉽게 이해가 되요.

예수가 없으면 말짱 꽝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가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이에요.

 

말씀대로 살든지 개혁을 하든지 성화를 하든지 예수님 십자가가 자랑되어지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란 말입니다.

반대로 이런 것 없다 할지라도 예수님 십자가 피만 있으면 만사 오케입니다.

하나님은 바퀴벌레들의 행실을 보지 않고 예수님의 피만 봅니다.

예수님의 피만 앞세우는 것이 아버지께로 오는 영광을 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오는 유일한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유일하다는 것은 이것뿐이란 말입니다.

예수님 것만 아버지가 받아요.

아버지가 받는 영광은 예수님의 영광 말고 다른 영광이 없어요.

아버지께로 오는 영광을 구한다는 말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자 곧 예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영광(榮光)이란? 그 빛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말은 곧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란? 곧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져내시는 자” 란 뜻입니다.

그럼 자기백성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날 건져 주셨습니다! 를 증거하여야 할 것 아닙니까?

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그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그건 정답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갈 것은 예수님의 피이지 우리 열심과 충성과 봉사가 아니란 말입니다.

제 말뜻을 알겠어요.

 

그렇다면 진정으로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자라고 한다면 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죄사함 받았습니다! 를 자랑하여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자랑하라고 우리를 구원한 것이지 우리를 자랑하라고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어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를 믿었다는 말은 모세가 준 율법을 알았다면 예수님을 영접 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자 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준 것은 예수를 영접하라고 준 것이잖아요.

 

율법에 대해선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으니 긴 말을 생략합시다.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모세의 말을 믿었다면 예수님을 영접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 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세의 글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 됩니다.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머리 나쁜 것을 가지고 남 탓하면 안 되지요.

일 못하는 놈이 연장 나무란다고 자기 믿음 없는 것을 가지고 남 탓하면 안 되지요.

 

지금도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모든 말씀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 어떤 말씀을 본다고 하여도 끝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와야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개혁이니 성화니 십자가 복음이니 하여도 모두가 예수님 십자가 피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제대로 본 것이고 지킨 것이 됩니다.

그 어떤 말씀을 지킨다 하여도 구원의 능력이 나오지 않으면 헛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구원의 능력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서 나오는 것이니,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붙잡는 사람이 가장 개혁을 잘 한 사람이고 성화를 잘 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개혁이니 성화니 하는 말을 하되 예수님 피로서만 의로워집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 피로서만 의로워집니다! 라고 한다면 구태여 개혁을 해야 한다거나 성화를 하여야 한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외칠 것이 아니라 개혁을 하고 성화를 해도 결국 예수님 피 밖에 없습니다! 라고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그 사람이 복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개혁을 붙잡고 성화를 외친다면 그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자라고 할 수 밖에 없어요.

성령을 안 받아서 복음을 모르니 예수님 십자가 피를 붙잡지 않고 성화나 개혁을 붙잡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지요.

성령이 오시면 무엇을 한다고 했습니까?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했지요.

증인이란? 사실을 증거하는 자을 말합니다.

증거란?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했지,

예수를 본받게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사도행전을 보세요.



사도들이 성령 받고 무슨 일을 했는가?

가는 곳마다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증거했어요.

만약 착하게 살라고 했다면 유대인들이 반발하지 않아요.

그런 것은 유대인들이 한수 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율법으로 의가 나오지 않고 예수를 믿어야 된다고 하니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핍박을 한 것입니다.

 

지금도 성화주의자들이 십자가 피를 말하면 화를 내는 것은 유대인들과 같은 사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한다는 말입니다.

죄인이 구원 받는 길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밖에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백성들이 이루어야 할 것을 다 이루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성도를 죄에서 건져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을 일컬어 그에 영광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죄사함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을 전도라고 하며 또는 예수그리스도의 증인 노릇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종이라 함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증거 하는 자로 선택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자기의 잘남을 드러내기 위해 신앙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를 이용하여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는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가 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을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자기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없기 때문에 자기 영광을 만들고자 하지 않습니다.

 

자꾸만 자기를 알아 달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 밖에 잇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잖아요.

자기는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보세요.

난 죽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살았대요.

어디서 산다고 합니까?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하잖아요.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게 뭡니까?

예수님 때문에 산다는 말입니다.

독자적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에 것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자기 삶을 살 이유가 없어요.

바울이 예수님과 방불한 모습으로 산 것은 이 구원의 은혜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가만있지 못하여서 그렇게 산 것입니다.

바울의 서신서는 전부가 자기 간증적인 것들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명령법으로 말하여도 그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데 너희는 지금 어떠하냐?

그럼에도 너희들이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아니냐! 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바울의 중심은 예수님의 은혜를 자랑하고자 함이지 우리의 열심을 끄집어내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 겁니다.

나로 하여금 이런 삶을 살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내가 고생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고생도 구원받음에 비하면 호사스러운 것이란 말입니다.

아니 예수를 죽인 놈이 버젓이 살아서 삼층 천도 보고 예수의 사도가 되어서 예수를 증거한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운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미래를 보고 현재를 살고 있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이건 마치 이미 게임이 끝난 경기를 비디오 로 다시 보는 것과 같아요.



바울은 이미 자기가 가 있을 곳을 보고 왔어요.

자신이 장차 어떻게 될지 이미 자신의 결과를 보았습니다.

그러니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두려움이 없어요.

매 맞으면 어떻고 굶으면 어떻냐 는 말입니다.

 

그러니 나 어때 라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사느냐 못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요구는 이러한데 우린 그 근처에 가지 못하여도 탈락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피로서 맺은 새 언약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과 바울의 관점이 얼마나 다릅니까?

바울은 말씀 지켜서 영광 돌리자 하지 않았어요.

사나 죽으니 감사하자 라고 했어요.



바울은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으로 내어 놓고자 함이 아니고 이 모든 것보다도 더 값진 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로서 죄사함 받은 은혜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안다면 뭘 그리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고 사는냐 입니다.

우상의 재물을 먹어도 됩니까? 안됩니까?

먹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까? 안 먹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까?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된다고 했어요.

어떤 사람이 이혼을 해도 됩니까?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했어요.

이혼해도 성도고 이혼 안 해도 성도인데 편한 대로 하라는 겁니다.

 

결혼 하는게 하나님께 영광입니까? 안 하는게 영광입니까?

결혼하고 싶으냐! 그럼 해라!

결혼하기 싫으냐! 그럼 하지 마라!

결혼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사느냐 안 사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이걸 교회개혁이나 성화로 물어보세요.

믿음으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요.

했다고 잘한 것도 아니고 안했다고 못한 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건 예수 십자가의 피를 믿느냐 안 믿느냐 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선 인간의 행함으로 영광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하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믿음으로 이혼 할 수도 있고, 믿음으로 이혼 안 할 수도 있어요.

믿음으로 제사 지낼 수도 있고, 안 지낼 수도 있어요.

믿음으로 술을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어요.

아내 있는 사람은 아내 없는 자처럼 살고, 아내 없는 자는 주님 보고 살면 되요.

 

어느 사람이 돈 떼어 먹었는데 사기죄로 쳐 넣을까요? 말까요?

니 마음대로 해라!

쳐 넣어도 잘하는 것이 아니고, 안 쳐 넣어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난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에 의가 없고 오직 예수 안에만 의가 있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느 정신으로 사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성도가 어떻게 살아도 천국 가는 데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요.

말씀대로 살든 말씀대로 못 살든 전혀 영향이 없어요.

다만 성령이 그때그때 간섭하니 그 간섭으로 살면 됩니다.



어떤 땐 말씀을 열심히 지키라고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땐 그렇지 못할 때가 있어요.

성령이 말씀을 못 지키게 한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 육신이 말을 안 듣고 똥고집을 피울 때가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구원받은 것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게 안 믿어지면 자기 쪽에서 믿을 것을 만들어 내고자 합니다.

믿을 것이란? 다름 아닌 자기 행함입니다.

난 이렇게 살았고, 저렇게 살았습니다! 라는 것을 들고 나오게 되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구원 받는다는 것이 안 믿어지고 미흡하게 생각되니 자꾸 자기 행위로 모자란 것을 보충하고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밥 먹고 돌아서면 배가 꺼지듯이 며칠 가지 못하고 또 불안이 밀려옵니다.

그러면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기도원에 가든지 철야를 하든지 해서 채워야 합니다.

채울 땐 부뜻하다가도 또 금새 허무해지고 불안이 밀려옵니다.

맨 날 밀물과 썰물처럼 들어 왔다 나갔다 합니다.

지나고 나면 믿은게 아무도 없어요.

내가 뭘 믿었지?

 

급기야는 난 버린 자 인가보다 라고 낙심하고 교회도 안 나옵니다.

여러분 사람 열심 길면 삼년 갑니다.

처음엔 죽을둥 살둥 하다가도 세월이 지나면서 핫바지 방구 새듯이 다 사라집니다.

 

인간의 행동은 늘 시소 타듯 합니다.

자기 몸 컨디션에 따라서 올라 갔다 내려갔다 해요.

컨디션 좋을 땐 다 할 것 같다가도 컨디션 나쁘면 만사가 귀찮아져요.

육신을 가지고 사는 인간은 그림자가 늘 변하듯이 행동도 늘 변해요.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약속입니다.

다른 것은 다 변해요.

그러니 변하는 당신의 행함을 붙잡지 말고 세월이 기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자기를 위한 삶이 없고 오직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살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겁니다.

성령으로 난자는 자기 자랑을 챙기는 자가 아니고 자기 자랑을 포기하는 자들입니다.

만약 성도라고 하는 자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신앙을 이용한다고 한다면 그는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고 예수를 이용하는 자일뿐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는 신앙을 자기 잘남을 증명하려고 믿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기억할 것은 신앙생활은 자기 잘남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증거 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증거하며 사느냐 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구제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여서는 안 됩니다.

애초부터 얻고자 함이 없이 한 봉사이고, 전도이고, 구제라 할 것이면 그것을 누가 알아주지 않고 부정당하더라도 섭섭해하고 화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러한 일들을 자랑하는 자들에게 그러한 것을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 하라고 하면 왜? 내 충성을 무시하느냐고 하면서 화를 냅니다.

사람이 화를 내는 이유는 자신의 것이 부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성도를 구원한 목적을 잊어선 안 됩니다.

즉 피조물의 위치를 넘어 서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요한이 천국을 보니 천국에선 세세토록 어린 양만 찬양 하더라고 합니다.

 

계 5:13절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천국에선 상천하지 모든 것들이 어린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걸 지금 살면서 하는 겁니다.

어린양만 찬양하며 사는게 구원받은 자의 천국생활입니다.



어린양만 찬양 한다는게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어린양의 영광을 증거하는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요 5:23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여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

 

하나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할 때 가장 기뻐하시고 아들을 외면할 때 가장 화를 내십니다.

 

아들 자랑하라고 성령을 보내 주셨는데 그 성령으로 자기 자랑하면 어찌하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랑되지 않고 나 이만큼 성화 했습니다! 라고 자랑하면 우째자는 겁니까?

물론 가짜 성령이지요.



바울은 이런 성령은 다른 영이라고 했어요.

물론 이런 것을 신아이라고 가르치는 것도 다른 복음이고 다른 예수라고 했어요..

 

결론 적으로 말합니다.

예수를 자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가 가짜입니다.

예수를 자랑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패역한 자들입니다.

 

왁스에 '화장을 고치고' 라는 노랫말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어요.

 

“우연히 날 찾아와”

“사랑만 남기고 간 너”

“아무것도 난 해준 게 없어”

“받기만 했을 뿐”

“그래서 미안해”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왔어요.

우린 하나님께 아무것도 해 준 게 없고 받기만 했어요.

그래서 늘 빚진 자가 되어 세세토록 어린양만 찬양하는 겁니다.

해 준 게 있다고 생각 되면 어린 양을 찬양 할 수가 없어요.

아무 것도 해 준게 없이 미안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세토록 예수님만 찬양하고 사세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 받기만 하는 겁니다.

열심히 받아먹고 감사합니다! 라고 하세요.

그래서 예수님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고맙고 감사하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제일 신앙이 좋은 겁니다.

 

부디 예수님께 감사하며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에 영광은 예수님에게 고정되어 있는데 우리는 틈만 나면 우리 영광을 모으고자 합니다. 이 악함을 용서하시고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영광인 예수그리스도 십자가만 바라보고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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