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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31강. 아들이 하는 일 (요 5:19-23)

by coroa 2021. 2. 2.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31강. 아들이 하는 일 (요 5:19-23).-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안식일에 대하여서 살펴보았습니다.

안식일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안식일이란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독자적으로 안식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할 수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쉬셔야 인간도 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기분이 좋아야 피조물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기분에 따라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마치 어떤 큰 대감 집이 있는데 그 대감이 기분이 좋으면 그 집안 전체가 기분이 좋아지고 대감이 기분이 나쁘면 온 집안 전체가 기분이 나쁜 것과 같습니다.

대감이 지금 기분이 나빠서 화가나 있는데 종들이 웃고 있으면 주인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기분에 따라 자기 기분도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종은 주인에게 복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은 주인과 희노애락을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은 주인이신 하나님이 기분 좋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기분 좋게 하는 것이지 내가 기분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생각하여야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라고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을 일컬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해 준다고 하였습니다.

 

고전 2:10-11=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의 깊으신 마음을 헤아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시는지를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아들에게 있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아들을 공경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 곧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공경을 받겠다는 말입니다.

아들을 전면에 내 세우고 아버지는 아들 뒤에 숨어 계시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아버지의 지혜를 가진 자들을 찾아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공경하는 것이 곧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라고 하여 아들과 아버지를 동격화 시켜 놓으신 것입니다.

 

아버지를 대접하려고 하지 말고 아들을 대접하라고 합니다.

아들을 제쳐 놓고 아버지와 단독으로 만나고자 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들을 공경치 않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치 않는 자로 간주가 되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신약시대에서는 예수님이 아버지를 대신하고 있으므로 예수님이 곧 안식일이 되는 셈입니다.

구약의 여호와의 안식일은 곧 예수님의 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약에선 예수님 안에 안식이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이는 예수님이 곧 안식을 주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안식은 예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따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안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면 안식을 얻고 안 주시면 못 얻습니다.

이젠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는 안식을 누리게 되고 예수 밖에선 저주뿐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 안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예수를 믿게 됩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주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신 자유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안식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죄인의 안식은 예수님의 피 안에서입니다.

마치 유월절 어린 양의 피 안에서 죽음에 재앙이 넘어 간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져내어 하나님의 안식으로 집어넣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선 예수님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하러 오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3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하신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지금도 일하시기 때문에 자기도 일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곧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시는 일입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가 보니 죽은 자를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가 일곱째 날에 안식하는 줄 알았는데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죄인들을 살려내느라고 쉬지도 못하고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일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 이제 그만 쉬세요! 라고 대신 일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제가 대신 아버지가 하시던 일을 하겠습니다! 라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쉴 수 있는 것은 자기 백성들의 죄에서 다 건져 내어 안식의 나라로 옮겨 놓고 나서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은 쉬면서 웃을 날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말이 없어요.

모두가 통분히 여기시고 우셨다고 하십니다..

 

그만큼 이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웃을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니 자기 백성들이 다 죽어 있는데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공유한 성도라면 자연히 세상을 보고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울라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금 분노가 가득한데 인간들이 희희낙락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울고 계시는데 교회들은 웃고 있어요.

 

요한계시록 17장 18장을 보면 교회들이 음녀가 되어 세상과 짝해서 분탕질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계 18:2-7=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 ~7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만국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한낮 쾌락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의 피에 취하여 여황처럼 호의호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살린다고 일하고 있는데 교회라고 하는 것들이 세상에 푹 빠져서 앞뒤 분간도 못한채 세상이 주는 달콤함 포도주에 취해서 헤롱헤롱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회사가 부도나서 기분이 최악인데 그 자식들은 마약 쳐먹고 헤롱대고 있는 모습입니다.

 

직장을 다니던 아버지가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기분이 우울하면 온 집안 식구들이 기분이 우울해 져야 한 가족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가족이란? 희노애락을 공유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성도를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가정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이란? 아버지가 기분이 좋으면 나도 기분이 좋고 아버지가 기분이 나쁘면 나도 기분이 나빠집니다.

아버지의 원수면 나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인간이 범죄하여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쉴 기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완벽하게 세상을 창조 하셨습니다.

그리곤 보시기에 좋았다 라고 하시면서 일곱째 날에 쉬려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웅성거립니다.

무슨 일인가 알아보았더니 뱀이라는 놈이 아담과 하와에게 독약을 먹여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려고 하다가 독약 먹은 자식을 살리려고 동분서주 하십니다.

 

이 자식이 정상으로 돌아 올 때까지 하나님은 또 다시 여섯째 날처럼 온전한 인간을 만드는 일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할테니 가만히 계시라고 합니다.

 

내가 여섯째 날에 가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겠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묵시세계에 계셔야 할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역사세계로 뛰어든 것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시고 자신이 팔 걷어 부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그 일을 하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란 뜻입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하십니다.

분명히 날로는 일곱째 날 안식일인데 쉬지 못하고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날짜로는 안식일이지만 실제로는 안식일이 아니고 일하는 여섯째 날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육신을 입고 여섯째 날에 오셔서 하나님이 안식 하실 수 있도록 죄인들을 고치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이 땅엔 안식일이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안식일임에도 안식하지 못하고 병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날 쉬어야 할 날임에도 병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에 찾아 가셔서 병에서 놓임 받게 하여 몸에 안식을 주시고 계십니다.

38년 된 병자는 병에서 고침 받음으로서 비로서 안식 할 수가 있어 졌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동안 안식하지 못한 병자에게 안식을 줌으로서 예수님이 바로 죄인들에게 안식을 몰고 오신 분임을 세상에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안식은 안식일이라는 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안식일이 언제냐 에서 안식일이 누구냐 로 달라집니다.

이젠 예수 안은 안식이고 예수 밖은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 속에 담긴 날과 달과 절기나 안식일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던 겁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완벽한 사람입니다.

열심히 하나님 말씀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에게 하나의 고민이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늙어간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죽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밥맛도 없습니다.

잠도 안 옵니다.

술을 마시고, 약을 먹어도 마음속에서부터 밀려오는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걷어낼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라는 청년이 자기 동네를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고,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친다는 소문으로 듣던 그 청년이었습니다.

체면 불구하고 예수 앞에 나옵니다.

여보시오.

보아하니 당신이 죽은 자도 살리고, 병도 고치고,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내 고민 하나만 해결해 주시오.

그러면 내가 후사 하리다 라고 합니다.

 

그래 무슨 일입니까?

말해 보세요.

다름이 아니고 난 세상 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인데 요즈음은 죽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지옥이라오.

이것을 어찌 해결 좀 할 수 없겠소.

당신 같으면 해결책이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있지요.

당신 재산 다 버리고 날 쫓으면 되오.

예! 에~.

아니 재산 다 버리면 난 뭘 먹고 산단 말이요.

그럼 관두시오.

 

이 사람은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람의 생각을 보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영생의 문제가 걸리고,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면 먹고 사는 문제가 남는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둘 다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영생도 챙겨야 하겠고, 부자로 사는 것도 챙겨야 합니다.

영생을 챙겨 놓고 재물이 없으면 그건 사나마나한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예수를 쫓으라는 말에 동의 할 수가 없어서 떠나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영생도 챙기고 돈도 챙길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겁니다.

영생이라는 꿩도 먹고 부자라는 알도 먹고 싶은 겁니다.

어느 하나 포기 할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 땅에서 천국생활 하다가 죽어서도 천국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다운 발상이지요.

 

어쩌면 이 시대 모든 교인들이 생각과 똑 같습니다.

십자가를 믿어도 고난 없는 십자가를 원합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십자가와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 속에는 자기를 죽이고 부인하며 포기하는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십자가를 말하면서 고난 없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특히 목사 가정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모들과 그 자식들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남편이 십자가 복음을 전하니 하나님께서 잘 살게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교인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목사의 가정을 잘 대접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정 반대 현상이 일어나니 속이 상하고 화가 납니다.

아니 하나님 복음 전하는데 왜? 힘들게 하느냐! 입니다.

무슨 하나님이 이러냐? 입니다.

특히 사모들이 이런 딜레마에 빠지면 급기야 우울증이 걸리고 십자가 전해봐야 소용없다는 말을 하기에 이릅니다.

 

종내는 남편을 쥐 잡듯 하고 내가 이러려고 당신한데 시집 온 줄 아느냐? 라고 악악댑니다.

왜? 당신 하나 때문에 온 식구가 고생하여야 하느냐? 라고 압력을 넣습니다.

자식들이 무슨 죄가 있냐고 난리를 칩니다.

애비 역할 제대로 하라고 악악댑니다.

 

그러다가 이젠 교인들에게 적개심이 생깁니다.

불똥이 교인들에게 튀어 무슨 교인들이 그러느냐? 라고 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알면 헌금도 풍성 풍성 해야 될 것 아니냐?

죽도록 충성해야 할 것 아니냐?

 

목사가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대접 잘 해 줘야지 않느냐? 라고 합니다.

월급도 많이 주고 돈 걱정 안하게 해 주어야 할 것 아니냐? 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전하니 편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왜? 지네들은 산해진미 먹어 가면서 목사는 챙기지 않느냐? 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본인이 십자가에 대해서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본인이 십자가를 안다면 이런 사고방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본인은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복음으로 편안한 삶을 챙기고자 합니다.

 

어디서 가지고온 십자가인지 모르겠어요?

무슨 십자가 이길래 십자가 전하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내가 행복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교인들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교인들도 교활하여서 십자가는 좋은데 십자가 정신으로 살기를 싫어합니다.

십자가를 알면 손이 펴 질 텐데 도리어 손이 오그라들어서 움켜잡고 있습니다.

움켜잡고 있다는 것은 십자가가 목걸이나 귀걸이에 있는 악세샤리이지 결코 심장 속에 십자가가 박혀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 도(道)는 머리로 깨우치고 정신을 수양하는 도(道)가 아닙니다.

십자가 도(道)는 삶이고 실제이고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입니다.

십자가 도(道)가 지식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생명의 나타남들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십자가 삶이 없다는 것은 지식이란 말입니다.

지식은 삶이 없어요.

지식으로 아는 십자가는 한마디로 호랑이 털은 탐나는데 호랑이를 잡으려니 엄두가 안 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도 자기를 부인하진 않고 자기를 더 챙기게 되는 겁니다.

세상 것을 버리지 못하고 움켜잡게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구원은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겠다.

그러면 내가 뭘 그리 뼈 빠지게 믿을 필요가 있느냐? 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하면 대충 머리 끄덕여 주고 아는 척 장단이나 맞추어 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충 대충 시간 날 때 신앙생활을 합니다.

고난도 싫고, 봉사도 싫고, 수고도 싫고, 남 섬기는 것도 싫고, 오로지 자기 편한 쪽으로 생각합니다.

 

야! 십자가가 이렇게 좋은 줄을 몰랐어!

날 이렇게 편하게 해 줄 줄이야!

놀고 싶으면 놀고,

술 먹고 싶으면 술 먹고 참으로 이현령 비현령입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너무도 좋은 복음입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안 해도 일말의 부담도 없이 농땡이 치는 겁니다.

 

예배를 빠져도 천국 가는데 지장 없겠다!

봉사를 안 해도 천국 가는데 지장 없겠다!

헌금을 안 해도 천국 가는데 지정 없겠다!

이거 만고 땡입니다.

 

아~ 진작 이런 복음을 알았으면 그 동안 헌금도 안하고 봉사도 안하고 편하게 살았을 것을 왜? 이제서야 알아가지고 그동안 손해만 보았네? 라고 불평합니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얼마나 좋은가?

이렇게 좋은 십자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 챙길 것은 다 챙기고 천국 가겠다는 아주 고약한 십자가입니다.

분명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고 죽이는 것임에도 이 시대 십자가를 말하는 교인들은 자기를 살리고 행복해 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십자가는 부모와 자식과 전토와 모든 것을 버리는 십자가인데 이 시대 십자가는 아무 것도 버림이 없이 다 움켜잡고 따라가겠다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다고 그럽니다.

자기는 십자가를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안하는 것은 좋은데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여전히 고민이 생깁니다.

율법 아래서 신앙 생활하듯이 하는 것으로는 자유한데 이젠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세상 것으로 먹고 사는 것이 부담으로 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하면 잘 살까 라는 고민에 빠집니다.

천국 가는 것은 십자가로 따 놓았으니 걱정은 없는데 이젠 뽀대나게 먹고 사는 일이 걱정입니다.

진정으로 십자가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고 한다면 먹고 사는 것으로부터도 자유하여야 합니다.

죽고 사는 것으로도 자유하여야 진정으로 십자가 안에서 자유하게 되는 겁니다.

 

본인의 생각대로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자유를 주는 십자가라고 한다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까 로부터 자유하여야 진정한 자유가 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안하는 것은 자유한데 먹고 사는 일엔 안으론 다툼이고 겉으론 우겨쌈입니다.

마음이 세상 것으로 인한 결핍으로 가득차 있어요.

 

어떻게 하면 잘 살지?

마누라가 돈 많이 벌어 오라고 앙앙 댑니다.

자식 좋은 대학 보내려면 학원 보내야 한다고 닦달합니다.

 

교회에서 농땡이 치는 자유는 누리는데 세상으로 부터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라는 것에 갇혀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마누라로부터 자식으로부터 돈으로부터 자유가 없습니다.

결국 이 사람이 알고 있는 십자가는 가짜 십자가인 것입니다.

 

신앙생활하기 싫은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자기가 만든 가짜 십자가입니다.

예수 믿기 싫은데 교회다니기 싫은데 신앙생활하기 싫은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만든 사이비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신 십자가는 분명히 자기를 해체시키는 것인데 이 시대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십자가는 자기를 해체시키기는커녕 더 철옹성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사람들이 믿는 십자가는 요한계시록 후서에 있는 십자가 인 모양입니다.

 

그러니 성경에도 없는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일평생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도 어떻게 살까?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시키고,

노후는 어떻게 대비하지! 라는 고민으로 안식하지 못하고 불안하고 두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두가 십자가를 가지고 살고자 하지 죽고자 하지를 않는 이상한 십자가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사도들이 증거하고 바울이 증거한 십자가는 정과 욕심을 죽이는 십자가입니다.

나를 살려두는 십자가가 아니고 나를 죽이는 십자가입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감사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감사하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사나 죽으나 감사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십자가는 이미 천국 안에 와 있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인하여 희비하지 않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주시고 간 십자가는 그 속에 들어가면 분명하게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뭔가 다릅니다.

결국 가짜라고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그 예수는 가짜 예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난 행복해야 한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세상 것으로 인하여 희비하는 것은 그 십자가는 자기가 만들어낸 가짜입니다.

 

십자가는 악세셔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능력이고 실제입니다.

믿음은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이지 세상 것 때문에 울고 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말하면서 십자가를 말하면서 예수를 말하면서 왜? 날 행복하게 해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는 예수 앞에 나온 부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이용해서 자기 손해는 전혀 보지 않고 잘 살다가 천국에 가겠다는 심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부자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예수를 쫓기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이야기는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시대 수많은 교인들 이야기입니다.

 

부자 청년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켰어도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고민하며 살아왔듯이,

이 시대 수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도 세상 살아가는 것으로 인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으니 행복하게 해 주세요?

십자가를 아니 대접받게 해 주세요?

믿음으로 사니 복 주세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눈만 뜨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열심히 찾아다닙니다.

신자는 신자대로 행복을 찾아 나서고, 불신자는 불신자대로 행복을 찾아 나섭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안식)이 돈에 있는 줄 알고 죽기 살기로 돈을 법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안식)이 건강에 있는 줄 알고 열심히 운동하고 건강을 챙깁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잡으면 되는 줄 알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잡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를 많이 얻으면 되는 줄 알고 열심히 공부합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고 열심히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 열심히 믿으면 되는 줄 알고 십자가 십자가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면 되는 줄 알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부흥시키면 되는 줄 알고 열심히 전도하여 교회를 부흥시킵니다.

 

모두가 행복(안식)을 따내기 위해서 분주합니다.

여기서도 ~개골~개골~

저기서도 ~개골~개골~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행복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한 가지 동일한 것은 이런 것들을 잡고 나면 너나없이 동일하게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죽으면 어쩌지” 라는 두려움입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없을 땐 까짓거 죽으면 죽지 라고 했는데,

돈이 있고, 명예가 있고, 먹고 살만 하면 이젠 죽을 까봐 겁이 납니다.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기 위해 보약도 먹고 운동도 하고 합니다.

죽음이라는 것으로부터는 벗어나지 못하고 두려움으로 삽니다.

여전히 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난 진정한 안식의 문제는 미해결 상태입니다.

 

죄인이 안식 할 수 있는 길은 죄인에게 있지 않습니다.

안식은 죄인에게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 쪽에서 안식을 얻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헛수고입니다.

 

인간 쪽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작정 된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안식의 세계로 불러들이십니다.

 

안식의 세계는 역사 밖에 일곱째 날에 있습니다.

인간들 세계는 죽음의 세계이고, 하나님 세계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죽음이 지배하는 역사 세계에서 죽음과 상관없는 하나님 세계로 옮기는 일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히 2:14-18=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 하는 자들을 죽음이라는 족쇄에서 풀어나게 하십니다.

역사 밖으로 뽑아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참으로 독특합니다.

 

죽음에 종노릇 하는 자들을 살려줌으로서 죽음으로부터 해방 시키는 것이 아니고 죽음에 넘겨줌으로서 해방을 시키십니다.

 

고후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살고자 하는 자를 죽여서 살게 하신다고 합니다.

죽임으로서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말입니다.

살고자 하는 인간을 살게 해 주지 않고 죽인단 말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살고자 하는 자를 죽이고 하늘에 대한 사람으로 살려 낸다고 합니다.

난 살아야 돼! 난 살아야 해! 라고 하는 죽음에 쫓기는 인간은 십자가에서 죽이고 죽음에 쫓기지 않는 인간으로 살려 낸다는 말입니다.

 

마치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하자 죽을 때까지 기다린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과 정면으로 거스리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 눈에는 죽음이 끝으로만 보입니다.

그래서 죽는다고 하면 도망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지 않는 세상으로서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이 직접 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대표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도들을 대신하여 대표로 십자가에 죽고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도라는 집안에 제일 큰 가장으로서 대신 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 집안 식구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모두가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을 때는 온 가족이 슬픔에 잠겨서 울었는데, 예수님께서 무덤을 깨트리고 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슬픔에 잠겨 있던 집안 식구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기쁨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걸 예수님은 여자의 해산으로 표현 하셨습니다.

 

요 16:20-2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여자가 아기를 낳기 전까지는 온갖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만 아기를 낳고 난 후에는 아기를 낳을 때의 고통은 다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들의 안식도 이런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십자가는 겉으로 보기엔 죽음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들어가면 생명이 있습니다.

다른 세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풀무불 속에 들어간 다니엘의 세 친구들과 같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의 명령을 거역한 탓으로 불 속에서 타 죽임 받는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상시 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 속으로 그들을 집어넣었습니다.

얼마나 뜨거웠으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풀무불 속으로 집어넣게 하는 군사가 불 입구에서 타 죽었겠어요.

 

이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입니다.

 

그런데 풀무불 속에 들어가니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쪽에서 보면 분명히 타 죽어야 하는 불 속인데 저 쪽에선 예수님과 안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풀무불 이편을 이 세상이라고 하고,

풀무불 저 편을 천국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쪽에서 보면 풀무불은 지옥으로 보이고,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 지옥으로 보이겠지요.

 

자 보세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집어넣은 쪽 입장에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면 불구덩이라는 지옥에 간 것처럼 보이겠지요.

고통스러운 곳이니까요.

그들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런데 불 속에 있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입장에선 자기들은 지금 주님과 함께 천국에 있으니 자기들을 불에 집어넣은 사람들이 도리어 불구덩이 속 지옥에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요.

이쪽에서 보면 저 쪽이 불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저 쪽에선 이쪽이 불구덩이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옥으로 보는 겁니다.

 

이해가 되세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지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 입장에선 돌에 맞아 죽어가는 스데반의 모습이 불쌍하겠지요.

저주 받은 것처럼 여겨지고 지옥 같이 여겨지지 않겠어요.

아이구! 스데반아! 참 안됐다!

불쌍하다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주님이 기다리는 모습을 본 스데반은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겠습니까?

그러니 죽어가면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보고 저들이 알지 못하고 저러니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과 같은 눈이 없는 사람은 스데반의 모습을 보고 뭐라고 하겠어요.

돌았다!

미쳤다!

그러지 않겠어요.

아! 돌에 맞다 보니 정신 줄 놓았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지금도 똑 같아요.

십자가의 비밀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들은 극과 극으로 판단을 해요.

십자가를 넘어 선 사람들은 살려고 아둥바둥하는 사람들을 보면 불쌍해 보여요.

십자가를 넘어선 사람들은 교회에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십자가를 넘어서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 부흥의 최고의 관심사로 남아 있어요.

그러니 교회 키우려고 발발이처럼 쫓아 다녀야 해요.

십자가를 모르고 교회 크다고 자랑하는 목사들을 보면 불쌍하게 보이잖아요.

 

그런데 그 인간들은 우리보고 불쌍하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서로 판단하고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풀무 불을 십자가라고 생각해 보세요.

인간들이 보기엔 분명히 십자가는 죄인이 죽는 저주스러운 형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뒤편엔 죽음과 상관이 없는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이쪽은 역사 세계이고 죽음이 두렵고 수고와 슬픔과 두려움이 난무하는 세계인데,

십자가 저 쪽은 묵시세계로서 눈물 없고 고통 없고 죽음도 두려움이 없는 안식의 세계인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로마병정들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보고 불쌍하다고 했지요.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했어요.

이걸 어찌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를 하겠어요.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감사하다고 하면 만용이라고 생각해요.

꼴값 떤다고 생각해요.

괜히 없으니 그걸 감추려고 일부러 안 그런 척 한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아요.

눈에 비늘이 가려져 있으니 그렇게 밖에 안 보여요.

 

그러니 이런 걸 가지고 맞다 아니다 싸울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십자가 안과 십자가 밖은 접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속에 담겨져 있는 이런 비밀은 사람의 지혜와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보게 해 주셔야지만 볼 수가 있는 신비의 세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만 성령을 보내 주어서 이런 세계를 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십자가 뒤편에 있는 안식의 세계를 보고 감사하며 살게 됩니다.

십자가는 죽음이 아니라 영생이라는 것을 아니 더욱 더 십자가만 증거하게 되지요.

 

그래서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감사하며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자랑스럽지 않으면 그 사람은 눈에 세상비늘이 가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3장을 보면 눈에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고 하는 겁니다.

 

계 3:14-22=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맨 마지막 교회입니다.

역사적인 의미에서 종말 때 교회의 모습니다.

나중에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특강할게요.

 

암튼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다 편지를 보냈습니다.

예수님 눈에 비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 한마디로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고 합니다.

이는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이놈들이 왜? 신앙생활을 이따위로 하는지 그 내면을 들여다보니 육적으로 부족함이 없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한마디로 잘 먹고 잘 산다는 겁니다.

물질적으로 너무도 풍요로우니 육신적으로는 아쉬운 게 없다는 겁니다.

지금 교회에다 말하고 있으니 이 시대 교회로 말하면 돈이 풍요로운 대형교회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물량적으로 크다 작다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작아도 십자가 정신이 없으면 큰 교회이고, 큰 교회라 할지라도 십자가 정신이 있으면 작은 교회입니다.

작아도 십자가 정신으로 살면 행복한데, 커도 십자가 정신이 없으면 불안해요.

 

이 시대 가치관으로 비추어 볼 때 돈이 많으면 아쉽지가 않잖아요.

그래서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대형교회라고 합니다.

실제로 큰 교회들은 돈이 많으니 아쉬운게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발가벗고 있다고 합니다.

 

17절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곤고하다는 것은 안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가련하다는 것은 마치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처럼 자기가 지금 어떤 주제인지도 모르고 희희덕거리니 불쌍하다는 말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눈 먼 것은 십자가 속에 담긴 비밀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발가벗었다는 것은 죄의 수치를 다 드러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를 안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들과 비교하면 똑 같아요.

 

한마디로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도 교회 다니고 있는 것과 같아요.

교회가 어떤 곳인 줄도 모르면서 교회를 다니고 있어요.

예수가 누구인 줄도 모르면서 예수 믿는다고 해요.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십자가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전혀 불편함을 못 느껴요?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애통해 하지 않아요.

교회가 어떻게 되든지 관심도 없고, 예배도 관심 없고,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뭐라고 하면 주둥이만 살아서 나불거리고 아는 척하고 한마디로 자기 꼴리는 대로 살아요.

 

마치 십자가가 무슨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는 면죄부라도 되는 냥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욕심 부릴 것 다 부리고,

자기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자기 다니고 싶은 곳 다 다니고,

좌우지간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나는 십자가 다 안다.

그러니 부족한 것이 없다 라고 하며 주절거리고 있습니다.

 

제일 안타까운 것이 십자가를 알면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인 줄 알아요.

이것도 안하고 저것도 안하고 전부가 관중들이 되어 버려요.

예수의 군사가 되어서 직접 경기장에서 피 흘리며 싸워야 하는데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관중석에서 땅콩 까먹으면서 구경하고 있어요.

예수님만 싸우세요!

우리는 그져 구경만 하겠습니다 라고 방관자가 되어 버렸어요.

 

이들의 머리 속엔 어떤 십자가가 들어 있는지 보고 싶어요.

복음을 지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에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논리대로라면 바울은 미친 짓하다가 개 죽음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알아서 다 하는데 뭣 하려고 그런 짓을 했느냐 라고 합니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바울과 같은 정신 자세로 살지 않는 것은 바울과 다른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알고 난 후 너무도 감사하고 감격했기 때문에 자신이 죽는 것조차도 그 사랑을 막아내지를 못한 것입니다.

바울은 나 십자가 다 안다 그러곤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았어요.

 

왜? 그런가 하면 자기 안에 성령이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해주시니 자기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마땅한 인간이 죄 용서 받고 천국에 간다는 것을 생각하니 가만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기쁜 소식을 얻어맞아 가면서도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속에서 성령이 가만히 있게 내 버려두지 않아요.

매를 맞아도 굶어도 욕을 얻어먹어도 가만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걸 주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도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로 아는 사람들 속에는 이런 사랑이 있어요.

이 사랑 때문에 세상에서 당하는 아픔을 참아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돈 없으면 세상에서 누릴 것 못 누려요.

불편해요.

배고파요.

하지만 돈 보다, 밥 보다 십자가가 더 귀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참아 내는 겁니다.

 

십자가를 안다고 천사들처럼 근심걱정 없이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몸뚱아리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아파요.

불쑥 불쑥 찾아드는 본성 때문에 때로는 도망가고 싶기도 해요.

십자가를 버리고도 싶어요.

다시는 십자가 안 전하고 사람들 비위를 맞추어야지 하면 성령이 속에서 가만 두지를 않아요.

성령이 속에서 강권하면 이길 수가 없어요.

성령이 나 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매 맞으면서 훈수 둔다는 말이 있지요.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사람들 곁에 서서 보면 말이 가는 길이 훤히 보여요.

그러나 당사자들은 잘 못 보아요.

그래서 잘못 놓는다 싶으면 훈수로 그러면 안 되고 이쪽으로 두세요 라고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귀싸대기 후려 팹니다.

지금 내기 장기를 두고 있는데 훈수를 두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죽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리고 가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훈수를 두게 되는 겁니다.

 

복음도 그래요.

제가 잘 아는 집사님이 있어요.

다른 교회 다니는 집사님이에요.

그런데 이 분이 복음을 모르고 열심만 특심해요.

 

입만 열면 이것 했다 저것 했다 자랑해요.

그러면 그때마다 교회 다니지 말고 예수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 열심 들고 나가는게 아니고 예수님 피 앞 세우고 가는 것이라고 하면 삐져요.

아무리 말해도 안들이니 이젠 가면 눈을 감고 자는 척 합니다.

 

그러면 혼자 떠들어요.

한참 듣다가 보면 속에서 울컥해서 한마디 합니다.

무당 푸닥거리 하듯이 하지 말라고 하면서 싸워요.

그러면 기분 상해서 돌아옵니다.

아! 이제 다신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가면 또 가만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 늘 가면 싸워요.

 

왜? 이런 일들이 반복으로 일어나는가 하면 한 쪽은 십자가 이 쪽에 있고 한 쪽은 십자가 저 쪽에 있어서 그래요.

그러니 서로 잘났다고 하는 겁니다.

 

세상 적인 고민도 십자가 너머에서 바라보면 괜한 것을 고민하였다는 것이 보여져요.

그래서 성령은 날마다 성도로 하여금 십자가 너머로 넘기는 작업을 단행하십니다.

이걸 예수 죽음에 넘겨준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곤 십자가 너머에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합니다.

그러면 세상 것이 시시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는 날마다 주의 은혜가 사로잡아서 십자가의 길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달리 고난이 아니라 내 뜻대로 살아가지를 못하게 하기 때문에 고난 인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셨던 그 고난의 현장 속으로 밀어 넣기 때문입니다.

 

풀무불 속 저 편에 있는 세계로 집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루라도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예수님에 의해서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자세로 삽니다.

왜냐하면! 그 곳이 안식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예수 안에서 안식을 맛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아버지가 안식 하실 수 있도록 자기 백성들을 십자가 안으로 불러들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옛 사람은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려 내십니다.

눈이 비늘을 떨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새 사람은 십자가 너머에 있는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골 3:1-5=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세상 것으로부터 오는 결핍 때문입니다.

항상 남과 비교하니 불행 한 것입니다.

 

왜? 나는 돈 많은 남편과 결혼하지 못했을까?

왜? 우리 집 아이는 공부를 못할까?

왜? 우리 집은 이렇게 가난 할까?

 

목사도 다른 교회와 비교하면 금새 불행해집니다.

 

왜? 우리교회는 부흥이 안 될까?

왜? 우리 교회는 돈 많은 사람들이 안 올까?

왜? 우리 교인들은 헌금을 많이 안할까?

왜? 우리 교인들은 목사를 대접안해 줄까?

 

온통 왜? 왜? 왜? 뿐입니다.

전부가 남의 탓입니다.

 

과거 저도 복음을 몰랐을 땐 그랬어요.

왜? 내 갸륵한 정성을 몰라주느냐고 하나님께 많이 따졌어요.

교회를 부흥시키면 다 하나님께 영광이지 내가 영광 받고자 하느냐? 라고 했어요.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입니까?

 

전부 내 욕심 채우려고 하면서 우상 숭배 한 것입니다.

인간이란 참으로 묘해서 하나님까지 속이려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도 전혀 낯빛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말했어요.

 

그 때는 십자가 이쪽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평들은 모두가 십자가 이쪽에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십자가 저 편에는 이런 것들이 없어요.

 

거기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들이 없어요.

거기는 교회부흥이라는게 없어요.

거기는 경쟁도 시기도 질투도 없어요.

거기엔 목사도 장로도 교인도 없어요.

거기엔 내 자식 내 마누라도 없어요.

 

십자가 너머 간 사람들은 십자가 이쪽에서서 붙잡고 있는 것들을 관심두지 않아요.

자식이 잘 되든 못 되든 큰 신경을 안 쓰게 되요.

물론 부모로서 바라는 것은 있지만 그 자식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인생까지 간섭하고픈 마음이 없어집니다.

 

거기는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만 있어요.

바울은 십자가 이전에 가졌던 것들이 보물인줄 알았어요.

좋은 가문이 보물이었고,

좋은 학벌이 보물이었고,

좋은 열심히 보물이었고,

좋은 교단에 소속 되었다는 것이 보물이었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십자가를 건너고 난 뒤에서 보니 자신이 지금까지 보물로 여기던 것들이 똥 떵어리 라는 것을 알았어요.

가문도 똥 떵어리이고,

학벌도 똥 떵어리이고,

돈도 똥 떵어리이고,

모든게 똥 떵어리 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부자도 부럽지 않고,

교회 큰 것도 부럽지가 않고,

잘사는 사람도 부럽지가 않고,

남 성공한 것도 부럽지가 않았어요.

 

오히려 그런 것들을 붙잡고 복이라고 자랑하는 그들이 불쌍했어요.

눈에 비늘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바울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눈으로 판단하였어요.

그러나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

 

이젠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 로만 행복과 불행으로 판단하게 되었어요.

예수 안이면 어떤 모습으로 살든 모두가 행복이고,

예수 밖이면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할지라도 불행한 것이라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십자가를 거쳐서만 주어집니다.

죄인을 살려서 안식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죽여서 안식을 주십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씀이 이해가 가시겠지요?

십자가는 죽음이라는 지긋지긋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너머 안식의 세계에 이미 들어간 성도는 세상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밀을 아는 성도는 십자가로 세상에 영광을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십자가로 끌고 가서 세상에 대하여 죽이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내는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그 일하심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세상의 갖가지 불편함 속에서도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모든 것이 감사가 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환경이 힘들다고 여겨지십니까?

십자가 너머에서 보십시오.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어떤 분이 바다에 배를 타고 항해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저기에 바위가 돌출되어 배가 돌에 부딪쳐서 깨어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너무도 급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묻습니다.

돌을 없애줄까?

물을 많게 해 줄까?

 

돌을 없애주면 물이 줄면 또 다시 지금은 보이지 않던 돌들이 또 돌출하게 되어 배를 위협하게 됩니다.

하지만 물을 많게 해 주면 보이던 돌들이 다 물속으로 잠기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마음껏 항해를 할 수가 있어집니다.

 

여기서 배를 여러분의 인생이라고 보고, 돌은 갖가지 아픔과 시험거리들이라고 보고, 물은 십자가의 은혜라고 봅시다.

십자가를 너머 가지 않고 보면 모든 것이 문제가 됩니다.

 

먹고 사는 것도 문젯거리이고,

자식 공부 못하는 것도 문젯거리이고,

직장에서 승진 못하는 것도 문젯거리이고,

교회 부흥도 문젯거리이고,

문젯거리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너머에서 보면 그 어떤 문젯거리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살고자 하면 모든 것이 문젯거리가 되지만 죽고자 하면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그러니 문젯거리를 해결해 달라고 하지 말고 십자가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넘겨주신 그 십자가 너머에서 세상을 세피하게 보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인생 잠깐입니다.

 

주님께서 곧 오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세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무관지옥으로 살아야 할 저희들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 너머의 세계로 넘겨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십자가 너머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며 이긴 자로서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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