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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33강. 예수님의 증거 (요 5:30-38)

by coroa 2021. 2. 8.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33강. 예수님의 증거 (요 5:30-38).-

-.정낙원 목사

 

 

 

엊그제 밤에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을 보았습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이 되어 있는 터라 어떤 말을 하는가? 듣고 싶어서입니다.

한마디로 미국을 위하여 하나가 되자는 말을 합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비빔밥처럼 다 민족과 다 인종들이 모여서 세워진 나라입니다.

온 세상의 집합소와 같은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의 가치는 곧 온 세상의 가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미국을 다스리는 대통령이 추구하는 것이 곧 세상 나라가 추구하는 가치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인종과 사상과 당파를 떠나 니편 내편 따지지 말고 미국이라는 깃발 아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미국에 도전하는 세력은 단호히 응징하겠다고 합니다.

이걸 개인적으로 말하면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는 자는 가만 두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은 항상 강자로 남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릭워렌 이라는 목사의 기도 또한 미국을 강한 국가가 되게 축복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이나 그를 위해 축복기도 하는 목사나 하나같이 말하는 내용 중에 평화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평화는 곧 자기 집단을 위한 평화일 뿐입니다.

국가가 없으면 평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나라는 영원히 살아남아야 합니다.

신께서 미국은 지켜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평화를 사랑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평화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나라나 사람이나 집단은 용납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자기만의 평화 일뿐입니다.

내가 평화하기 위해선 남을 억압하여야 합니다.

 

마치 거대한 조직폭력배가 자기들 조직을 건들면 응징하겠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좋게 말해서 국가이고 나쁘게 말하면 조직 폭력배입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마피아 조직의 수장이 바로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리입니다.

 

마치 다니엘서에 나오는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거대한 신상을 만들어 놓고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절을 하게 한 것과 같습니다.

느브갓네살 왕 시절로 적용해서 말한다면 누구든지 미국이라는 거대한 신상 앞에 절하지 않으면 모두 풀무 불 속으로 집어 던짐 받게 된다는 것을 온 세계에다가 협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시대 미국이라는 나라는 다니엘 시대의 느브갓네살 왕이 만든 금 신상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미국이라는 나라에 협조하지 않으면 응징의 대상입니다.

살아도 미국이라는 우산 속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그 힘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다른 국가 지도자라고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자기가 속한 나라(이익집단, 조직)에 이익을 위하여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이명박 대통령도 한국이라는 나라의 조직에 이익을 위하여서 있습니다.

 

오바마와 이명박이 붙으면 힘이 쎈 놈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국을 욕하고 나쁜 놈들이라고 성토해도 공허한 메아리뿐입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조직폭력배 앞에서 난 깡패가 싫어!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아이의 입을 급히 틀어막으면서 죄송합니다.

아이구! 죄송합니다.

이 아이가 철이 없어서 그러니 너그러이 용서 해 주십시오! 라고 빕니다.

 

지금 국회에서 한미 FTA 비준을 놓고 왈가왈부하지만

결국은 강자인 미국의 요구대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시대이고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에게 양보 한 적이 없습니다.

힘 없는 자가 살아남으려면 힘 있는 자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세상의 냉엄한 현실입니다.

이상과 현실은 다릅니다.

 

지난번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고 할 말을 하겠다고 큰 소리 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국내용 발언이지 미국을 위한 발언이 아닙니다.

국민들이 하도 미국을 싫어하는 정서로 팽배해 있으니

그렇게라도 말을 해서 백성들 마음을 도닥거리기 위함입니다.

국민들이 철없는 아이와 같이 미국 놈 때려잡자고 하니 그럴 수박에 없는 것입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백성들의 마음이라도 달래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말은 시원하지요.

뽀대나고 멋있지요.

그러나 뽀대 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정글의 법칙으로 다스려지는 세상 나라에서 살아남으려면 기분 나쁘고 속상해도 힘을 길러야지 세상에서 살아남지 목소리만 크다고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아니꼬우면 출세하라는 말이 회자 되겠습니까?

맞아요.

아니꼬우면 미국보다 힘을 기르면 되요.

그러면 강자로 군림하면서 이래라 저래라 무소불위의 힘으로 다스릴 수가 있어요.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지금 우리나라가 우리보다 약한 나라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어요.

우리 역시 미국 못지않게 하고 있어요.

약소국가 사람들을 얼마나 깔봅니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대하는 것 보세요.

미국 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진 않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이처럼 육에 나라의 질서는 힘의 원리로 정해진 질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짐승의 나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약육강식이라는 짐승의 법칙으로 다스려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강자는 약자 위에 군림하여 자기 유익을 위해 챙기고 약자는 또 다른 약자 위에 군림하여 자기 유익을 챙깁니다.

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가 세상의 구조입니다.

 

인간 세상의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것은 허울일 뿐입니다.

모두가 배부른 놈들의 언어유희이지 진리가 아닙니다.

힘없는 자에게는 자유도 평등도 없습니다.

오로지 수탈과 굴종만 있을 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이 곧 힘이고 힘은 곧 진리이고 법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교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타락하였다고 외치고 개혁되어야 한다고 외쳐도 큰 교회 앞에선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여도 커지면 개혁이니 타락이니 하는 목소리도 힘 속에 묻히고 맙니다.

힘은 곧 모든 잡소리들을 흡입하여 잠재우는 블랙홀과 같습니다.

 

세상에선 힘이 곧 진리입니다.

힘이 곧 정의입니다.

힘이 곧 평화입니다.



힘이 곧 자기 옳음의 증거(證據)가 됩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세상에선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입니다.

부(富)는 선(善)이고, 가난(貧)은 악(惡)입니다.

 

이 시대 가치관으로 보면 교회가 크다는 것은 곧 자랑거리이고 선(善)이고,

작다는 것은 수치이고 곧 악(惡)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크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교인들도 큰 교회의 우산 속에 들어가 있으면 자연히 구원이 되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안엔 예수가 없으면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착시현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기생각에도 하나님이 함께 했기 때문에 이렇게 교회가 부흥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적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음의 증거이고,

교회가 크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한 증거라고 합니다.

세상의 논리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인데 어떻게 교회를 부흥시키지 않겠느냐 입니다.

봐라! 하나님이 함께 한 증거가 바로 이렇게 교회가 크게 부흥 되었지 않느냐 라고 외칩니다.

교회 부흥 세미나는 있어도, 교회 허물자는 세미나는 없습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교회를 키워서 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목사이고 교회이다 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난리들입니다.

큰 교회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함께하는 교회라는 증거로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이야기 하면 먼저 무슨 교회이냐를 묻습니다.

그리곤 몇 명 모이느냐를 묻습니다.

숫자로 복음이 맞느냐 틀리느냐로 판단하겠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 시킬 것이라는 뜻에서입니다.

숫자가 적으면 복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곤 복음 전한다고 하면서 그것 밖에 안 모이느냐 라고 조롱합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면 곧 힘 있음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음은 곧 힘없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힘 있음으로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증거를 삼고자 하는 겁니다.

이런 사고 때문에 힘이 있으면 기세가 등등하고, 힘이 없으면 기가 죽어 버립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 세상 가치가 자리 잡히면 힘이 곧 진리(眞理)로 통용이 됩니다.

교회 부흥이 곧 진리 됨의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복음 증거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부흥을 시키느냐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입에서도 복음이 자랑되어지지 않고 우리 교회 크다 라는 것이 자랑되어집니다.

우리 교회는 이렇게 크니 하나님이 인정하는 옳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세상이치도 많은 사람이 옳다고 하면 그것이 옳은 것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자기가 하는 일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주면 그 일이 옳고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일에 대한 정당성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들 세계에서의 옳고 그름은 그 시대 가치관에 따라서 변하게 됩니다.

세상이 변했다는 말은 사람들의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가치관이 바뀌면 의(義)와, 불의(不義)의 개념도 바뀌게 됩니다.

 

인간들 세계의 가치는 육신 중심으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는 것도 육신의 안락함을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육신의 안락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인간 세계는 육신 따라 항상 변하기 때문에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절대 선(善)도, 절대 악(惡)도 없습니다.

시대의 가치에 따라서 어제의 선(善)이 오늘에는 악(善)이 될 수가 있고,

어제의 악(善)이 오늘에 선(善)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 세계에서는 변하지 않는 절대 진리란 없는 것입니다.

 

진리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영원토록 변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들의 가치관의 변화와 상관없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즉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진리가 되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은 진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약속을 주셨습니다.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겠다는 통보이지 우리더러 참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가치 있게 보지 않습니다.

그져 구원 받아야 할 죄인으로만 보십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존재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의 창조 목적이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서 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고 만물은 예수 안에서 존재 한다고 합니다.

이는 만물은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란 말입니다.

예수에 의해서 구원을 받고, 예수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 도구일 뿐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만물은 변하여도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의 창조 목적이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느 시대이든지 예수님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증거(證據)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증거란? 확실한 것은 증명해 준다는 뜻입니다.

변할 수없는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 날 고치심으로 유대인들과 충돌을 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왜? 안식일에 일을 하느냐? 라고 예수님을 몰아붙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선 아버지가 안식일에 일을 하시기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자기 마음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일한다고 하십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예수더러 넌 누구냐?

누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고 하자.

내가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라고 합니다.

 

무슨 선문답하는 것 같지요.

 

36-37= 내게는 요한의 증거(證據)보다 더 큰 증거(證據)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證據)하는 것이요 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證據)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와 같이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증거로 이런 일들을 일어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이런 일들을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내가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참으로 독선적인 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증거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영원한 진리로 남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항상 그 뜻이 변하지 않고 지속되기 때문에 절대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지금까지 효력으로 남고 앞으로도 남게 됩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피로 새 언약” 을 세우신 것입니다.

 

마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새 언약을 예수님의 피로 세우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담보로 세워진 언약이란 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자기백성들이 죄 값을 대신 담당해서 죽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어 준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새 언약은 나 대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입니다.

나는 예수님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선 나는 없고 예수님만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지 않고 예수님을 보십니다.

 

이렇게 예수 안에 폭 싸여져 있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교회라고 합니다.

새 언약 하에선 나라는 존재는 없는 자입니다.

옛 언약 하에선 내가 있지만,

새 언약 하에선 내가 없어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지요.

 

새 언약이란? 옛 언약을 전제하고 주어지는 언약입니다.

 

그럼 옛 언약은 무엇입니까?

옛 언약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지켜야 합니다.

율법이 내게 떨어지면 내가 지켜야 합니다.

대신 지켜 주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곁에서 도와줄 뿐입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은 이스라엘 곁에서 도우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도록 갖가지 혜택을 주면서 보호해 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남편같이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날이 이르면 곁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이젠 마음속에 자리를 잡아버리겠다고 합니다.

 

이런 상태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렘 31: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겔 36:26-31=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새 언약은 겉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마음속에서 도와준다고 합니다.

마음속에서 돕는다는 것은 한 몸으로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말입니다.

 

남진이라는 가수가 부른 둥지라는 노래가 있지요.

그 가사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넌 그져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줄께!

내 품에 둥지를 틀어!

 

마치 새 언약 같지요.

새 언약은 인간이 할 일이 없습니다.

다 예수님이 알아서 다 해 주십니다.

 

아까 새 언약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세운 언약이라고 했지요.

예수님과 언약 했다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지켜주신 것을 말합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은 이 사실을 성신(聖神)을 보내서 믿어지게 한다고 했습니다.

새 언약은 성신이 아니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곧 인간의 이성으로는 믿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므로 진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증거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 입장에선 예수님의 증거들을 받아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은 무슨 일이든지 자기 이성으로 믿어지는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리고 죄는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작동을 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중심엔 자기가 있어야 해요.

어느 집단이든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관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목사가 복음 복음 하여도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과 교제를 하기 원하지 알아주지 않으면 교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본능이 그렇게 움직입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것이라면 그 어디든 참여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죄인은 자기가 배제되는 것을 용납 하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가 하여야 안심하고 믿어집니다.

남이 한 것은 불안해서 믿을 수가 없어요.

자기가 책임을 져야 담당했다고 여깁니다.

이게 옛 언약 안에 있는 자의 특징입니다.

 

내 죄를 왜? 남이 대신 담당해 주느냐 입니다.

내가 잘못했으면 내가 맞아야지 왜? 다른 사람이 대신 맞느냐? 입니다.

설령 누가 대신 자기 빚을 갚아 주었다고 하여도 탕감으로 여기지 않고 언젠가는 갚아야 할 부채(負債)로 여깁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대신 맞아 주었다 하여도 자신은 여전히 찜찜함이 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찜찜하면 못 삽니다.

남에게 빚지곤 못살아요.

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빚을 갚고 당당해 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예수는 예수고 나는 나라는 것입니다.

예수와 나는 하나 될 수가 없어요.

예수와 나는 타인입니다.

아무리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이게 옛 언약의 한계이고 육(肉)에 한계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은 성신이 와서 믿어지게 해 준다고 한 것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과 나는 하나입니다.

둘이 아니고 하나예요.

분명히 둘인데 하나입니다.

이게 믿어져요.

성신이 믿어지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옛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하나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담당해 주셨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옛 언약 입장에선 새 언약은 얼토당토 않는 소리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 같지 않은 소리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부하게 되는 겁니다.

죄는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배척을 하게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을 수용할 수가 없는 것은 믿어지지 않기도 하겠지만,

자신들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율법을 지켜 왔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어보면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잘 지켰으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도 조금도 주저함이 없고 당당합니다.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맏아들처럼 내가 아버지 명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들이 농땡이를 치거나 아니면 이방인들처럼 산다고 하면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하는 말에 동의를 하겠는데 그렇지가 않거든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 입장에선 예수님께서 너희는 죄인이라고 하여도 자기들 신앙의 관점에서 잘못된 것을 찾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말도 아니 이미 구원 받았는데 새삼스럽게 어디서 무얼 구원받는다는 말입니까?

이미 하나님 백성인데 뭘 다시 하나님 백성이 되라는 말입니까?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이 시대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는 교인들에게 회개하라고 하면 우리가 뭐가 잘못되었는가? 라고 항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죽도록 충성하고 봉사하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데 뭐가 잘못이냐?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새 언약에서 회개 하라는 것은 예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옛 언약을 보지 말고 새 언약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책임지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새 언약 하에선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믿지 말고 주 예수께로 돌아오라고 회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 언약에서 회개하라고 하면 자기 행동을 고치려고 합니다.

뭐가 잘못이고 무엇이 부족한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기도가 부족하면 기도를 보충하고,

봉사와 충성이 부족하면 열심 내어 하고,

헌금을 떼먹었으면 이자 쳐서 바치고,

술 먹었으면 술을 끊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합니다.



그러니 맨 날 반성한다고 분주한 겁니다. 

회개와 후회는 다릅니다.

회개는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듯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회는 돌아가진 않고 잘못했다고 반성하는 것입니다.

몸은 여전히 율법 아래 있으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공부하는 학생이 시험을 잘못 쳤습니다.

회개는 공부 열심히 하는 겁니다.

후회는 엄마 시험 잘 못 봐서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라고만 합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을 믿지 않는 것은 전부가 후회하는 것이지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무시하는 것은 전부가 저주 받아야 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철저하리 만치 율법에 완벽한 자들입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의 율법적 의는 본받으라고 했겠습니까?

바울의 말을 빌려도 자신이 예수를 몰랐을 때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완벽한 사람들에게 예수님 믿어서 구원 받으라는 말은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쓰는 것과 같습니다.

옛 언약 하에 있는 유대인들은 누굴 믿을 것이 없어요.

신앙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성 할 것도 없어요.

너무도 율법을 잘 지키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너희는 죄인이라는 말과 또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비웃은 것입니다.

율법으로 비추어 보면 내가 왜? 죄인이며 내가 왜? 구원받아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인줄 모르는 사람에게 죄에 대하여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리 예수님이 하는 일이 옳은 일이고,

옳은 소리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너의 생각이지 자신들의 생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지난 시간엔 부활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지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어떤 사람은 배척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와,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자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일컬어 생명의 부활이고,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고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을 심판의 부활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다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내가 세상을 심판하는 자라고 하니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네가 무슨 근거로 심판자라고 말하는지 그 증거를 대 보라고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하는 일이 그 첫째 증거요, 둘째는 하나님이 증거해 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근거로 하여 누가 누구를 증거 하려면 최소한도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을 내 세워야 한다는 법이 있습니다.

 

신 19: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이는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하여 애매하게 사람을 해(害)하는 일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법정에선 반드시 증인의 증거를 채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증인은 본 사실을 그대로 증거 하여야 합니다.

만약 위증(僞證)을 하였다는 것이 탄로가 나면 그 사람도 동일한 범죄자로 취급당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 증인의 증거는 진실이 되는 겁니다.

 

그 증인도 누구나가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합당한 증인이어야 합니다.

자기들끼리 짜고 하는 증인은 증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 할 수 있고 보편적이고 이해되지 않는 증인을 내 세우면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원칙으로 보면 지금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내어 놓는 증거(증인)는 얼토당토 않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예수님이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하나님이 자기를 증거해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아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예수님이 유대인 앞에서 내가 심판자다 그럽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웃기고 있네!

네가 어떻게 심판자인데?

그 증거를 대 봐라?

증인을 내 세워 봐라!

 

이에 예수님이 그래!

그럼 증인을 대지!

그러곤 내가 하는 일이 증거이고 하나님이 증인이다! 라고 합니다.

이걸 여러분 같으면 수용하겠습니까?

 

아니 예수님의 말이라고 하니 무조건 옳소 하지 말고,,

여러분이 2000천 년 전 유대인들과 예수님이 쟁론하는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고 본문을 보라는 겁니다.

누구 말에 동의하겠습니까?

유대인의 말에 동의하지 예수님의 말에 동의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신(神)이요! 라고 하였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당신이 신(神)이라는 증거가 무엇이요!

그 증거를 대 보세요! 라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러자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신(神)이라는 증거이고, 하나님이 내가 신(神)이라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소! 라고 말한다면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별 미친 사람 다 보겠네! 라고 하여 그 사람의 말을 더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정당성을 증거 하려면 상대방이 알아먹고 이해하도록 설명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의 정당성을 위해 내 세운 증거와 증인은 유대인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수갯 소리가 있습니다.

어느 정신병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방에 정신병자가 여러 명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난 예수다 그럽니다.

곁에 있던 다른 정신병자가 하는 말이 난 너를 보낸 적이 없는데!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이 정신병자와 전혀 다를 바가 없어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도 없는 말을 할까요?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를 보면 무슨 숨겨진 의도가 있음을 감지 할 수가 있습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나눈 대화를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설득해서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님도 알 수가 있습니다.

동의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희들이 믿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나는 하나님이 보내서 온 아들이며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 주!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인간이 동의하건 하지 않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건 사실이니까요.

 

하나님은 홀로 하나님이세요.

피조물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서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피조물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다만 하나님으로서 일하고 계시는 것이 하나님을 증거 할 뿐입니다.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난 이후로 죽은 자를 살리고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라고 하는 말들은 모두가 내가 바로 아버지께서 보낸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는 사람은 생명에 속한 사람이고, 받지 않는 사람은 사망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애초부터 유대인들을 설득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설득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누가 내 백성인가를 찾아내기 위함이지 예수님 백성 만들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미 창세전에 영생 받기로 작정 된 자와 아닌 자를 갈라내기 위함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순회하시다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습니다.

 

마 16:13-17절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신하여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너희들이 내가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안 것은 너희들이 지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들이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너희 실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 하는 그 첫째가 자신이 하는 일이고,

둘째가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는 것을 유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34절에서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할 생각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만 내가 구원자라는 것을 알리고 싶을 뿐이라고 합니다.

 

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證據)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인정받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인정받기 위해 증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로 너희를 구원할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바로 아버지가 보낸 그리스도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하는 일을 죄인을 구원하는 일로서 증거를 삼는 것입니다. 

봐라! 구약에 선지자들이 이런 일이 일어 날 것을 미리 예언하지 않았느냐?

 

눅 4:16-21=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사야 선지자가 뭐라고 했느냐?

성신이 임하면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38년 동안 병에 포로가 되어 평생 종노릇 하던 사람이 병에서 자유케 된 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내용이 아니냐 이 말입니다.



내가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증거해 주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걸 보고도 모르는 것은 너희는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란 말입니다.

 

죽은 자들인 너희에게 내가 뭐가 답답해서 날 좀 알아달라고 하겠느냐 이 말입니다.

난 너희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의 아들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이러한 일들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해 준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느냐 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되고 인정 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해도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라 해도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하나님이라는 사실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인정해 준다고 해서 기뻐하지도 않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속상해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인들을 조금의 가치도 인정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생은 수에 칠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사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죄인은 하나님 앞에선 벌레 같은 존재란 말입니다.

마치 우리가 바퀴벌레를 수에 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퀴 벌레가 당신은 인간입니다 라고 해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이 바퀴 벌레에게 야! 너 날 인간이라고 좀 인정해 달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증거를 취하지 않겠다는 것은 인간은 바퀴벌레란 말입니다.

내가 바퀴벌레 같은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을 받는다고 해서 그게 무슨 영광이고 자랑거리겠느냐? 이겁니다.

창조주는 피조물로부터 인정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아도 자신이 하는 일로 만족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곧 아버지께서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고 있는 증거이므로 만족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알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인간들에게 증거를 받으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증거를 받고 있으면, 사람들의 증거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이라면 누가 나를 이단이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아들로 인정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아버지의 증거로 가는 곳이지, 인간의 증거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엔 전혀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평가에 민감하다는 것은 세상에 속한 증거가 됩니다.

 

성도는 자기 신앙을 남에게 인정해 달라고 할 이유도 없고 또 인정받고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자신 둘만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자신의 믿음을 가장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제가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땐 많은 사람들로부터 믿음이 좋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이나 집사님들이나 최고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내 열심과 충성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도 많이 하지요.

헌금 많이 하지요.

봉사와 충성은 일당백으로 하지요.

성경 많이 알지요.

 

거기다가 온유하고 겸손하기까지 하지요.

목사님 대접 잘 하지요.

어디 예배를 한번 빠져 본 적이 있습니까?

새벽예배서부터 철야예배, 구역예배까지 빠져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믿음이 최고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내 마음은 아닙니다.

항상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믿음 없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감춘 것뿐입니다.

자기 마음은 스스로 속일수가 없어요.

그러니 늘 곤고한 것입니다.

마음이 허해요.

 

주일날 새벽부터 나가서 주일하고 교사다, 성가대다, 남전도회 회장이다, 기관장 모임이다, 심방이다 하면서 밤늦게까지 교회일하고 오면 마음이 휑해요.

이게 도대체 뭔가!

교회에선 믿음 있는 척은 다 해 놓고!

내 안에 믿어지는 게 없으니 환장할 지경입니다.

그 당시엔 내 마음 속엔 믿음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는 남에게 믿음이 좋다고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남들이 나를 믿음이 없다고 하는데 제 속엔 믿음이 있어요.

과거엔 남들이 믿음 좋다고 해도 불안 하였지만, 이젠 믿음이 없다고 해도 평안해요.

왜? 그렇습니까?

그건 과거엔 믿어지지 않았지만 이젠 믿어지기 때문이지요.

 

성령이 새 언약을 믿어지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마음 속에 새로운 법을 새겨 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시니 믿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남이 나에게 믿음이 좋다고 해서 좋아할 일도 아니고, 믿음이 없다고 해서 화낼 일도 아닙니다.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는 믿음만 확고하다면 누가 나를 믿음이 없다고 해서 그 믿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만족하여야 합니다.

 

과거 율법으로 목회를 할 땐 교인들에게 믿음 좋다 나쁘다 를 평가하였어요.

열심을 내면 믿음이 좋다고 칭찬하고 열심히 없으면 믿음이 없다고 책망 했어요.

심판자가 되어서 교인들의 믿음을 간검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교인들에 믿음을 평가하지도 간섭하지도 않아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본인 믿음은 본인만 알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 그렇냐 고 합니다.

 

누가 목사님 전 믿음이 없는가 봐요? 라고 하면!

그래요.

그러면 없는 것이겠지요?

본인이 믿음이 없다고 하는데 목사가 아닙니다!

집사님은 믿음이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순 없잖아요.

본인이 새 언약이 안 믿어지는데 목사가 어찌 믿게 할 수가 있습니까?

믿음을 심어줄 방법이 없어요.

 

제 자식에게도 할 수 없어요.

속 터지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아빠가 목사이니 교회는 오겠지만 그 속에 믿음은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셔야지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제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 저 놈들에게 믿음을 줘서 확 망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한답니다.

그래야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릴 것이 아닙니까?

 

목사가 여러분에게 믿음 좋다고 하여도 안심하지 마세요.

그건 모두가 여러분의 열심을 끄집어내기 위한 입발림 소리입니다.

믿음을 인정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 그것으로 안심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은 아버지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온 유대인들이 자기를 이단이라고 하여도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은 목사가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고, 교회가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이 인정해 주십니다.

지금은 성령이 알게 해 줍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이 왜? 목사나 성도들로부터 자기 신앙을 인정받고자 합니까?

이는 자기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성령이 믿어지게 하는 새 언약의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단번에 피 흘려주심으로서 다 끝났다는 증거입니다.

성도가 의(義)로워지는 것은 하늘로부터 덮쳐 오는 것이지 인간 쪽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의(義)를 만들어 낼 필요도 없는 완벽한 의(義)가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이 의(義)에 증거는 성령이 믿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믿게 해 주시는 증거를 가진 성도는 누구로부터 믿음을 증명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누가 믿어주든 믿어주지 않든 개의치 않습니다.

자기 안에서 성령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는 그 증거로 인하여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 증거는 외부에서 보면 독선적으로 보일 수가 있습니다.



맞아요.

신앙은 독선적일 수 밖에 없어요.

받은 자만이 증거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사도요한은 온전한 사랑이라고 했어요.

 

요일 4:17-19=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은 심판 날에 담대함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심판 날이란? 궁극적으로는 장차 도래할 날이지만 지금은 마귀의 참소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당신 그걸 믿음이라고 하고 있어! 라고 하면 주눅 들지 않고 예! 나 예수 믿습니다! 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당신 예수 믿습니까?

그따위로 신앙생활하면서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라고 물으면 글쎄요? 라고 하면 안돼요.

 

그래요.

나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게 주신 언약을 믿습니다! 라고 해야 해요.

이런 믿음이 있어야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걸 온전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 안엔 두려움이 없다고 하지요.

그리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하지요.

믿음 믿음 하면서 뭔가 두려워 한다는 것은 온전한 사랑을 못 받았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만든 사랑을 가지고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면 안돼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이어야 해요.

자기가 사랑하는 것은 언제든지 변해요.

자기 몸에 컨디션 따라서 변합니다.

 

치매 걸려 보세요.

그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말하고 행동하게 되요.

저도 만약 늙어서 치매 걸리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지옥 갑니까?

아니지요.

나를 구원하는 능력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신앙고백 하는 것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게 해 주시는 것으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내가 예수 믿으면 지옥가고,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어야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치매 걸려서 날 모른다고 하기 전에는 탈락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치매 걸릴 일이 없으니 우리의 구원은 확정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넌 내 것이다! 라고 하면 내가 치매 걸려도 예수님 것입니다.

넌 치매 걸리면 버릴 거야! 라는 것이 새 언약 속에 없어요.

새 언약 속엔 너 치매와 상관없이 구원할 것이다! 라는 것이 들어가 있어요.

 

새 언약 속엔 인간의 행위가 없어요.

새 언약 속엔 너 살인하면 탈락이야!

너 사기 치면 탈락이야!

너 술 먹으면 탈락이야!

너 바람피우면 탈락이야! 라는 것이 없어요.

 

이걸 옳거니 라고 오해하고 악용하지 마세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좀 의심해 봐야 해요.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인간의 행위 때문에 탈락하는 일은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이런 것들로부터 넉넉히 지켜 주십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 사라와 이식을 강의할 때 살펴보았지요.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사라의 믿음과 상관없이 이삭을 주었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은 나 예수 안 믿을래? 해도 천국 갈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국 보내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할 수 없겠지만,,)

 

하나님의 선택 앞에선 인간의 의지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속된 말로 하나님은 한번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하는 분입니다.

하나님 사전엔 “후회” 라는 것이 없고 “포기” 라는 것이 없어요.

한 번 결정 된 것은 천지가 쪼개져도 반드시 이루고야 마시는 분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해도 천국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베드로를 선택 했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 했다고 해서 탈락시킨다면 예수님의 선택에 문제가 있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택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 안심하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나 바울이나 모두가 이 증거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구원 문제를 가지고 흔들린다는 것은 뭔가 수상해요.

성령이 주시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흔들린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믿음에 증거는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만들려고 하지 마세요.

성령이 그냥 불쑥 찾아와 믿어지게 해 줘요.

이렇게 믿어지는 증거는 그 어떤 것으로도 빼앗기지 않아요.

 

그러나 성령이 믿게 해주시는 이 증거가 없으면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고작하여 만든 증거가 난 착하다,

난 열심을 냈다,

난 기도했다,

난 봉사했다,

난 전도 했다! 라는 것들의 자기가 뱉어낸 행위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죄인이 뱉어낸 부산물에 불과한 쓰레기들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서 나온 것을 받지 않습니다.

죄인에게서 나온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부정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행함은 시절을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영원하지도 않아요.

자기 기분에 따라 인간의 행함은 춤추게 되어 있어요.

마치 미친 여자 널 뛰듯해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러지요.

사단이 너를 밀 까부리듯 한다고!

그래도 안심하라고 하지요.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예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에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도가 완벽하다고 하면 예수님이 대신 기도할 이유가 없어요.

안되기 때문에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빌고 계신 것입니다.

 

천국엔 예수님 행위로 가는 것이지 내 행위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이번 미국 대통령 취임식장에 참석하려면 백악관에서 발송한 초청장을 가지고 가야지 자기가 만든 초청장을 가지고 갈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준 의(義)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있는 증거가 됩니다.

이 의(義)는 성령이 증거를 해 줍니다.

성령은 그 의(義)가 예수님의 피 속에 있다고 증거해 주십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뿌려준 피 때문이지 자기가 흘린 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지,

내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이 사실을 늘 성도 안에서 증거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증거를 가진 사람은 밖에서 의(義)를 만들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의(義)만 자랑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의(義)를 가진 성도는 사람들의 증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증거가 없으면 마음은 항상 불안 합니다.

이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서 종교적인 것으로 의(義)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하게 되는 겁니다.

하늘로부터 덮쳐온 증거가 없으니, 자기가 증거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의(義)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함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그 조직에서 발언권을 강화하고자 함입니다.

교회라는 조직에 주류로 남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장로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어서 사람들이 인정하는 신앙이 없으면 발언권이 약해집니다.

그러면 조직에서 밀립니다.

 

목사들은 종교 전문가로서 인간의 심리를 훤히 꿰고 있어요.

그래서 최소한도 품위 유지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를 하여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을 정해 주는 겁니다.

으뜸 되고자 하는 재미로 사는 인간이 남에게 밀린다면 자존심 구기는 일이므로 용납 될 수가 없어요.

교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열심과 충성으로 교회에서 점수를 따고자 하는 겁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믿음 있음의 증거는 교회를 위한 충성도입니다.

육에 속한 목사들이 교회 충성은 곧 하나님께 충성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공식 안에 들라고 가르칩니다.

그 공식 안에 들면 그 교회 안에서는 신앙 좋음으로 판단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히 교회 안에서 발언권이 강해집니다.

 

성도는 교회가 보이면 안 돼요.

성도에겐 오직 예수님만 보여야 해요.

왜냐하면! 교회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증거가 중요하지, 교회의 증거는 전혀 필요치 않아요.

 

신앙생활은 사람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증거로 기뻐할 일도 아니며 슬퍼할 일도 아닌 것입니다.

오직 자기 안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해 주시는 증거를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이런 것을 저는 화투놀이로 비유를 잘합니다.

화투를 칠 때 능력은 끗발입니다.

남보다 높은 수를 가지고 있으면 되요.

끗발 중에선 삼 팔 광 땡이가 최고에요.

 

내가 삼 팔 광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공갈을 치고 겁을 준다하여도 전혀 미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삼 팔 광은 자기만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투판에선 삼 팔 광은 자신의 믿음이고 능력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도 성령이 증거해 주는 확실한 믿음만 있으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믿어진다면 굳이 사람들로부터 확인 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최고의 증거가 지금 내가 예수그리스도가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믿어지고 예수님의 의(義)로 구원 받는 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내가 믿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게 해 주시니 믿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믿어서 믿어지는 것은 내 쪽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가 있어지지만,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는 믿음은 내 쪽 상황과는 상관없이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처럼 놀라운 기적이 없습니다.

 

자기가 만든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자기 행함에 따라 믿음이 춤을 춥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믿음을 가지지 않고 자신이 만들어 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주변의 환경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이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시면서 주무실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두려워 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성도가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바다에서는 언제든지 풍랑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풍랑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누가 뭐라고 한들, 어떤 환경이 된다고 한들 전혀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세상을 이기는데 그 이기게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요일 5:4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 있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이겨 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증거가 세상의 증거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란? 좁게는 사람들의 판단이고 넓게는 마귀의 참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으니 안심하라고 한 것입니다.

 

로마서 8:35-39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위에 열거된 환경들을 살펴보세요.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당하는 갖가지 아픔들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성도는 자신이 잘못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행위로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로 맺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이란? 애초부터 인간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하건 하지 않건 예수님의 십자가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동의와 상관없이 복음 자체로서 능력으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기백성들의 죄를 도말하셨다는 것을 증거 할 뿐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상관치 않습니다.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고 거부하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부디 하나님이 주신 증거로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믿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줄 알았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의 증거를 믿고 세상을 담대하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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