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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35강.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 (요 5:39-40)

by coroa 2021. 2. 19.

 

마가 13: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35강.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 (요 5:39-40).-

-.정낙원 목사

 

 

 

성경은 죄인을 일컬어 고아라고 합니다.

고아란? 보호자가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야 할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 고아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고아는 보호자가 없으므로 스스로가 자기의 생명을 지켜야 합니다.

약육강식의 험한 세상에서 생명을 지켜줄 보호자가 없다는 것은 죽음에 늘 쫓긴다는 말입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불안하고 두려운 일입니다.

언제 꺼질지 모를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신세입니다.

 

그래서 고아들은 자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선 힘을 모으고자 합니다.

힘이 된다고 여기는 것들은 모두 모아 힘을 삼습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권세이든 명예이든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주변을 한번 돌아보세요.

전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것들을 모아 놓고 있지 않습니까?

친구도 유익이 되는 친구를 사귀고 있고,

일가친척도 유익이 되는 친척을 가까이하고 있고,

형제조차도 유익되면 가까이 하고 해가 되면 멀리 합니다.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도 도움이 되면 가까이하고 도움이 안 되면 멀리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본성이 신(神) 조차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 신을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죄인들에게 생겨난 신앙이 우상숭배(偶像崇拜)입니다.

우상이란? 자기를 위해서 신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에 섬기는 겁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남을 배려할만한 마음이 없어요.

죄가 항상 자기중심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조건 없이 신을 섬길만한 그런 여유로움이 없어요.

무엇인가 내게 도움이 될까 생각하여서 신을 찾는 것뿐입니다.

결국 내가 신을 섬겨 줄 테니 내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달라고 신과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죄 때문입니다.

죄가 피조물인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주를 이용하라고 미혹을 하고 있기 때문이예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창조가 된 인간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자기 유익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악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십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이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이라는 뜻이 “신(우상)과 싸우는 자” 란 뜻입니다.

여기서 신이란? 우상을 말합니다.

바울은 탐심을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적인 신앙을 버리는 싸움을 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징벌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인의 본성상 우상 성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 안에 있는 우상(탐심)과 싸워야 하면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징벌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우상(탐심)성을 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너희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지금 너희들이 지금 우상 숭배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자기를 위하여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날 이용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희를 위하여서” 라는 말입니다.

우상이 뭐냐?

“자기를 위해서” 하는 모든 것입니다.

 

그럼 “너희를 위해서” 라는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이지요.

그럼 하나님을 위해서 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점치고 무당에게 굿하고 절간에 가서 부처님 섬기는 것만이 우상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우상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것은 우상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다고 했어요.

신앙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우상을 숭배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잘못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있을까요?

이는 애굽에서 고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목숨을 스스로가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 목숨을 지켜 달라고 섬긴 겁니다..

하나님을 이익의 재료로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우상을 숭배 할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은 본능적으로 신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우리 역시도 우상 숭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소원을 위해서 예수를 믿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늘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우상숭배 한다고 지적하시면서 성막을 주셨습니다.

성막에선 늘 죄인을 위한 제사들이 드려집니다.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죄인이 용서받고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주신 것은 죄 용서를 위함입니다.

 

성막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동행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지켜 주시니 이스라엘은 고아가 아닙니다.

스스로 목숨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이젠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뜻은 이런 것이라고 알려 준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대한 바램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느냐 못 사느냐는 이스라엘에게 남겨진 몫입니다.

과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낼 것인가는 두고 볼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증거는 못 살아내더라고 합니다.

인간은 우상(자기 사랑과 탐욕)성을 버리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은 인간은 이런 존재라는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을 받은 인간도 죄를 이기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들은 광야 사십년 동안 구름 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아 오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삶에 유익을 도모하는데 이용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왜? 선택하였는지는 생각지 않고, 왜? 우리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느냐고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만나를 먹으면서 원망하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면서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생각했지 자신들이 하나님의 원수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결국 인간에겐 하나님은 없고 자기만 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니 눈만 뜨면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편한 삶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자기를 위하여 섬기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에 감동으로 구약 이스라엘의 신앙을 한마디로 우상숭배라고 고발을 했습니다.

 

행 7:42-43=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구약 이스라엘은 광야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고 우상을 섬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구약 이스라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우상이라고 여기면서 섬긴 적이 없어요.

이게 미치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본인들은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아니란 것입니다.

아니 난 평생 하나님만 섬기고 살았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언제 네가 날 섬겼느냐? 라고 하십니다.

 

이건 마치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바치려고 돈을 주었는데 배달사고가 난 사건과 같습니다.

돈을 준 사람은 있는데 받은 사람이 없어요.

중간에 어떤 놈이 가로챈 겁니다.

 

난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는데 마귀가 가로챈 겁니다.

복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께 헌금 했는데 알고 보니 목사들에게 사기당한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충성하면 복 받는다고 해서 했는데 알고 보니 속은 것입니다.

결국 목사들의 거짓말에 속아서 우상숭배만 한 것입니다.

 

성경은 지옥에서 사람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하지요.

이를 간다는 것은 최고의 적개심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적개심이 언제 듭니까?

사기 당하였을 때입니다.

속았을 때입니다.

배신당하였을 때입니다.

지옥에 가서야 마귀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이를 뿌드득 뿌드득 가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생활도 무조건 열심만 낼 일이 아닙니다.

그 열심이 과연 하나님이 받으시는 열심인가를 먼저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약 이스라엘 꼴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난 너희들을 모른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무슨 근거로 구약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하였다고 합니까?

이는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이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자신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생각하여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보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야가 좋아서 기다린 것이 아니고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기다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메시야는 이용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는 수호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약속을 보이고자 선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것이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나님인줄 착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죄 때문입니다.

죄가 주객을 전도시킨 것입니다.

죄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이용대상으로 섬기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구약 이스라엘 전체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 함락을 앞두고 있을 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당신은 우리 편입니까?

아니면 상대편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수 5:13-14=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수아의 이런 질문은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수아도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의 이런 사고는 인간들의 우상(偶像) 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편에 두고자 하는 우상성입니다.

 

그러자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는 인간들 편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고 오직 여호와의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여호수아 네가 니편 내편 가르는 것이 곧 죄라고 지적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노라” 라는 말은 곧 여호수아 너라도 여호와 편에 서 있지 않으면 징벌대상이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를 선택한 것은 여호와를 위함이지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네 편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도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가 예수를 믿는 성도라고 한다면 이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자기편에 두고자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모든 것을 곁에 두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은 상대적으로 제거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은 전부 원수입니다.

제거 대상입니다.

부모도 자식도 친구도 이웃도 교회도 목사도 모두 자기를 위한 사람을 곁에 두고자 합니다.

 

우리도 일평생 여호수아처럼 묻습니다.

내편이냐? 아니냐?

이게 본성입니다.

자식에게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항상 내 편과 다른 편으로 나눕니다.

내 편이 많으면 든든해하고 적으면 불안해합니다.

 

성도는 일평생 이 자기라는 놈과 싸우는 자입니다.

원수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임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징벌대상이라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예요.

내가 바로 하나님을 우상화 하는 자라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하나님을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죄를 아는 자는 신자이고 죄를 모르는 자는 불신자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아야 할 자임을 아는 자는 신자이고, 모르는 자는 불신자입니다.

지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극명하게 다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는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지만, 모르는 자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나오고, 모르는 자는 뻔뻔스럽게 이것저것 해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들에겐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도록 하십니다.

날마다 자기 안에서 죄가 터져 나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내가 바로 쉴 새 없이 죄를 생산하는 공장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내가 바로 떡을 안준다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유대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신앙생활이 기쁨이냐? 짐이냐? 는 죄를 아느냐? 모르느냐? 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면 범사가 감사가 되지만, 모르면 범사가 불평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도와 달라고 할 수가 없어집니다.

용서를 구하지! 뭘 달라고 요구 할 수가 없어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들어주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루어 가실 뿐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근본에 깔려 있지 않으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다 어그러지고 맙니다.

 

나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사용되는 소모품이라고 생각하세요.

언약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난 없어도 된다는 자세로 살으란 말입니다.

 

만물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셋트와 같아요.

풍랑도, 무화과나무도, 나귀새끼도, 귀신도, 거지도, 부자도, 병도, 아픔도, 고난도,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것도 우주가운데 있는 그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창세전에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할 메시야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동원하셨습니다.

 

이방인이라고 해서 하나님 밖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이방인이 필요하다면 이방인도 들어 사용하십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사용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이 구약 대대로 내려오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지속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남아있던 이러한 우상 숭배적 신앙을 고발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상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들 성경을 왜 보느냐? 고 묻습니다.

너희들이 성경을 열심히 상고를 하긴 하는데 그것은 모두가 자신들의 영생을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엔 관심이 없고 자기들 영생 받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는 성경을 대하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겁니다.

 

아까 죄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는데 자신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이라 했지요.

그러니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한다는 것은 관심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자기에게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지 않고, 자신들의 영생에 관심을 갖고 있으니 죄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영생(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상고하였습니다.

영생을 따내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했던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만약 그들이 영생을 얻었다면 성경을 상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성경을 상고하는 것과,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영생을 얻어서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에 관심을 두게 되고 감사가 되지만, 영생을 얻고자 상고하게 되면 자신이 해야 할 내용이 남아 있기 때문에 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보면서 감사가 나오는 것과 성경을 보면서 탄식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미 천국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하고,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 하고는 천지 차이입니다.

구원 받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가 나오지만,

구원 받으려고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직도 더 해야 합니까? 수고와 슬픔이 납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 안에서 완료(完了)된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이지 미완료(未完了)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완료는 안식이지만 미완료는 수고하고 슬픔입니다.

구원이 완료 된 사람은 안식을 하지만, 미완료로 남은 사람은 두려움으로 지샙니다.

 

유대인들의 착각은 영생을 인간 쪽에서 따 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잘못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성경 속에 그 방법이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성경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영생을 받을 수 있을까를 연구했습니다.

 

급기야는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율법사와 서기관들을 두었습니다.

율법사들과 서기관들은 백성들이 더 완벽하게 하나님 말씀을 지키게 하려고 율법을 확대해석하여 가르쳤습니다.

마치 이 시대 목사들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종파를 초월하여 모두가 하나같이 누가 율법을 더 잘 지키느냐로 경쟁하였습니다.

율법지킴으로 신앙 있음과 신앙 없음, 더 나아가서 정통과 비 정통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그래서 쿰란공동체 같은 종파는 아예 세속과 담을 쌓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금욕주의로 자기들의 종파에 우월성을 알리려고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수도원 생활을 한 것입니다.

반면에 사두개파나 바리새파 같은 자들은 율법을 잘게 쪼개고 또 쪼개서 사람들에게 가르쳐 왔던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잘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너도 나도 율법지킴을 신앙의 핵심으로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 앞에 부자 청년 하나가 찾아 왔습니다.

 

마 19:16-22=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묻습니다.

묻는 내용을 보면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행하여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데 한 가지 해결하지 못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열심히 지켰는데도 영생의 문제는 미해결로 남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대로 살면서도 늘 고민한 겁니다.

부자청년의 고민으로 보아서 율법 속엔 영생이 없음이 드러난 겁니다.

 

그러던 차에 모든 사람이 선지자라고 칭송하는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영생에 대한 고민을 들고 나온 겁니다.

예수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답 좀 알려 주세요?

 

부자 청년의 고민은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의 고민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처럼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성화론 자들의 고민입니다.

이 시대 한국교회는 유대교가 되었어요.

유대교 사상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란? 영생을 댓가성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영생이 어떤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열심히 무엇을 하여야 된다는 식의 신앙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런 신앙은 허구라는 것이 금새 들통이 납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아직 영생을 받지 못하였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이미 영생을 가진 사람은 영생을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영생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습니다.

영생을 얻고자 일체의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들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자녀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영생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지금 부자 청년은 영생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한다는 말씀을 비추어 봐서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아직 영생 밖에 있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부자 청년이 영생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영생을 받지 못하였다는 반증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앞에 찾아 나온 부자 청년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 자녀가 아닙니다.

논리 적으로 그렇잖아요.

 

자녀는 조건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는 부모가 낳아 주는 것입니다.

자녀가 되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라 부르고,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 집에서 사는 겁니다.

그럼에도 자녀가 되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자녀가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도 구원을 위해서 천국을 위해서 뭔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녀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진정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생각하였다면 이미 영생을 얻은 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미 영생 얻은 자로 사는 것은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조건 없이 율법을 지켰어야 했습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여야 했습니다.

 

영생 얻은 자는 내가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고자 함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율법을 지켜 줄 테니 영생을 주십시오! 라고 거래하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겼다면 결국 우상 숭배한 것입니다.

우상숭배란? 뭘 얻기 위하여 신을 섬기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부자청년은 지금까지 율법을 지켜 온 것은 우상숭배 한 것이 맞지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과 흥정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겁니다.

 

자식이란? 행위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어떤 행위로 부모 자식 관계를 설정한다는 것은 자식이 아닙니다.

만약에 자식이 부모에게 내가 공부 잘하면 자식으로 인정해 주겠습니까? 라는 말하면 여러분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라고 두들겨 팰 것입니다.

이런 질문은 남의 자식이나 할 법한 물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고자 하는 유대인을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너희가 마귀 새끼니까 하나님과 흥정하고자 한다는 겁니다.

지금도 말씀을 열심히 지켜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가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시대 누가 마귀의 자녀인가 드러납니다.

신앙생활을 무엇인가를 얻기 위하여 하는 자들입니다.

열심과 충성으로 거래하는 자들입니다.

 

목사들이 열심히 충성해서 복을 받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거래하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정성과 복을 맞바꾸라고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인간의 열심과 복을 맞바꾸겠습니까?

죄인에 것이 뭐가 탐난다고 열심을 내라고 하고 정성을 쏟으라고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바퀴벌레의 열심과 정성을 탐냅니까?

그래서 바퀴벌레에게 야! 바퀴벌레야 내가 기쁘게 조금 더 열심히 정성을 쏟으라고 합니까?

바퀴벌레에게 탐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는 바퀴벌레이지 사람일 수 없어요.

인간이라면 바퀴벌레에게 바랄 것이 없어야 해요.

인간이라면 바퀴벌레와 흥정하지도 않습니다.

 

사실이 이러 할진데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나 열심히 할 테니 복을 달라고 합니다.

열심히 충성해서 복을 받으라고 합니다.

참으로 우습지요.

 

그런데 이런 일을 과거엔 유대인이 하였고, 지금은 이 시대 교인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도 유대인 중에 마귀의 자녀가 있었듯이, 지금도 교회 안에 마귀의 자녀가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자녀에 특징이 뭐라고요?

열심과 충성으로 뭔가를 얻어내고자 하는 자입니다.

구원해 주심에 감사함으로 열심과 충성을 내는 것이 아니고, 자녀가 잘되기 위해서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 사업이 잘되기 위해서 복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들은 모두가 마귀의 짓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인간들 귀에는 열심히 충성해서 복을 받으라는 말이 옳게 들립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일하고 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일하지 않고 받는 것은 불편해 합니다.

 

일하고 받으면 떳떳한데 일하지 않고 받으면 자존심이 상해요.

인간은 자존심이 상한 것은 못 참아요.

공짜로 얻어먹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짜로 얻어먹고서도 하는 말이 나중에 내가 살게! 라고 합니다.

공짜가 아니라 빚으로 남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존심이 상하지 않아요.

 

할머니가 옆집 노인네 환갑잔치에 초대를 해도 단 돈 만원이라도 봉투에 넣고 가야지 떳떳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어요.

부조할 돈이 없으면 숫제 안갑니다.

공짜로 얻어먹으면 체면이 서지 않고 뻔뻔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인간은 일평생 거래를 하고 삽니다.

어린아이가 공부를 해도 엄마와 거래 합니다.

아니 엄마가 거래를 가르칩니다.

이번에 시험 100점 받으면 뭘 사주겠다고 거래를 제시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자기가 필요한 것을 받아 내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100점 받으면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100점 받지 못하면 요구하지 못합니다.

 

TV에서 서울우유를 선전하는 것 보면 어린아이가 웁니다.

그러면 엄마가 서울우유 들고 뚝~ 하라고 합니다.

뚝~ 하면 서울우유 주겠다고 합니다.

결국 울음을 그치는 것과 서울 우유를 거래한 것입니다.

 

산타크로스 할아버지 한데 선물 받는 것도 그래요.

산타크로스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주지 않아요.

울지 않아야 주어요.

결국 울지 않는 것과 선물과 거래하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의 의식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도 거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만큼 해 줄 테니 복을 주세요 라고 말합니다.

전도하라고 하면 전도를 하고, 새벽 기도를 하라고 하면 새벽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라고 하면 봉사를 하겠다고 합니다.

그 대신 복을 달라는 겁니다.

내 요구 조건을 들어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영생도 떳떳하게 자기가 따 내려고 하는 겁니다.

공짜로 받으면 천국에 가도 영 찜찜합니다.

늘 빚진 것 같아서 싫습니다.

그래서 천국도 떳떳하게 가겠다고 열심히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합니까?

천국은 전부 아들에게 빚진 자들만 가는 곳인데!

그래서 영원토록 어린 양에게 찬송만 돌려 드려야 하는 곳입니다.

천국엔 자기 할 말이 없는 자들만 있는 곳입니다.

 

자존심이 생명인 사람이 자존심 상해서 어찌 천국에 가겠습니까?

쪽팔려서!

쪽팔리기 싫고 자존심 상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지옥에 가야해요.

지옥에 가면 쪽팔릴 일이 없습니다.

자존심 상할 일도 없습니다.

 

지옥엔 모두가 탕자 비유에서의 맏아들 같이 떳떳한 사람들만 있습니다.

에서와 같이 잘난 사람들만 있습니다.

그러니 떳떳하게 영생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떳떳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곳은 지옥입니다.

부자 청년과 같이 열심히 해서 영생을 따내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이 지옥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면!

복을 받겠다고 하면서 인간의 열심과 정성을 들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복과 정성은 상충하는 말이에요.

서로 대적한단 말입니다.

복은 공짜이고 은혜이지만 정성은 조건이고 댓가에요.

 

복음을 안다고 한다면 목사가 여러분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십시오! 라고 하면 이의를 제기하여야 합니다.

아니 목사님 복이란? 거저 주시는 것인데 어찌 열심과 충성으로 복을 따 내라고 합니까? 라고 따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따지지 못하고 도리어 목사가 시키는 대로 춤을 춘다는 것은 그 사람도 그 목사와 똑 같이 하나님과 거래를 하는 우상숭배자입니다.

또한 열심히 안하면 복을 안주면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으로 염려하는 자도 우상숭배 하기는 매 일반입니다.

우상숭배의 근간엔 항상 자기의 탐심이 깔려 있습니다.

탐심을 채우기 위해서 신과 거래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육신적으로 세상에서 행복하게 해 주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 순간 예수는 이용대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신앙생활이 흥정이 되고 맙니다.

 

성도는 세상 밖에 사람입니다.

세상 밖에 사람이란? 세상 가치로 살지 않는 자란 말입니다.

세상 가치로 살지 않으니 세상 것으로 인하여 희비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고 살 뿐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난해서 하나님의 뜻이 증거되는 것이라면 나를 가난케 하실 것이고, 내가 부요케 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증거되는 것이라면 나를 부요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겐 가난이나 부요나 모두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에 가난과 부요를 가지고 희비애락(喜悲哀樂)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요와 가난을 가지고 복이다 저주다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빈부(貧富)와 귀천(貴賤), 생(生)과 사(死)를 가지고서 다루어 가십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삼상 2:6-7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필요하면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자로 만드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면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부하고 가난하고는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흔히 세상 적으로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옥에 가는 것도 하나님 뜻이고, 안 가는 것도 하나님 뜻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이래로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을 이루어 보신 적이 없습니다.

홍수로 인간을 쓸어버린 것도 하나님 뜻이고, 유황불로 소돔과 고모라를 태워버린 것도 하나님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망하여 포로가 된 것도 하나님 뜻이고, 70년 종살이 하다가 해방되어 고토로 돌아 온 것도 하나님 뜻입니다.

 

성도란? 세상 살아가는 범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형편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혀서 찬송과 기도를 했지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힌 것은 나쁜 짓을 하다가 갇힌 게 아닙니다.

복음 전하다 갇혔어요.

그냥 곱게 갇힌 게 아니고 사십에 하나 감한 태장을 맞고 갇혔어요.

한마디로 엉덩이 뼈가 보이도록 얻어터지고 갇혔습니다.

어이구! 죽겠다고 신음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아니 이럴 수가 있느냐 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따지고 원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피 철철 흘려 가면서 찬송과 기도를 하였어요.

누가 보아도 돌았다고 생각하지 제정신이라고 생각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 찬송이 나오고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찬송은 기분이 좋아야 나오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다는 것이 찬송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무슨 기분 좋은 상황이라고 찬송을 합니까?

 

이건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걸 어찌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신앙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이 바울과 실라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기 때문에 찬송하며 기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난을 갈라디아서에서 고백하기를 하나님께서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새기기 위한 것이라고 감사하였어요.

고린도 교회에다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몸에 넘친 것이라고 자랑하였어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 시편 23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어떻게 다루어가시는가를 잘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아마 교인들 집에 가면 부적처럼 고급 액자에 잘 담아서 집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놓았을 겁니다.

 

시 23:1-6=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23편은 하나님과 성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부족함이 없다고 시작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 어떤 환경도 다 감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세요.

때로는 푸른 초장으로도 인도하시고,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극과 극으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그랬어요.

숱한 죽을 고비도 넘기고, 분에 넘치는 부귀영화도 누렸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지팡이로 안위할 때도 있지만 막대기로 두들겨 팰 때도 있어요.

지팡이는 복이고, 막대기는 저주입니다.

그런데 그 둘로 안위하신다고 합니다.

이는 곧 실패도 영광이고, 성공도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하고 죽어도 주를 위한 것이라고 했어요.

이미 영생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천국 안에 와 있기 때문에 찬송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천국백성이라는 존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변하지 않습니다.

부(富)해도 하나님 자녀고, 빈(貧)해도 하나님 자녀입니다.

거지라고 해서 하나님 자녀라는 신분이 취소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나사로 보고 야! 나 쪽 팔려서 너 내 자녀라고 하지 못하겠다고 하지 않아요.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단독자로 보지 않고 예수 안에서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우린 예수님과 한 몸입니다.

꼬라지가 거지라도 예수님과 한 몸입니다.

문둥병자도 예수님과 한 몸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조건으로 인해 기죽을 필요가 없어요.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천사가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준다고 하면서 하늘 예루살렘 성을 보여 주었어요.

예루살렘 성이 예수님의 신부라고 했어요.

 

계 21:9-21=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째는 청옥이요 열 둘째는 자정이라 21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그런데 그 신부의 모습이 전부 보석이라고 합니다.

보석이라 함은 가장 영광스럽고 값진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거지도 예수 안에선 보석이고, 문둥병자도 예수 안에선 보석입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보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한 몸인 성도는 모두가 보석인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겐 세상의 형편과 신분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예수와 한 몸으로 살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겐 그 어떤 환경이라도 다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질 뿐입니다.

 

이런 상태를 바울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성도에겐 좋고 나쁜 환경이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세상 가치관으로 좋은 환경과 나쁜 환경을 설정해 놓은 것뿐입니다.

자기가 정해놓은 세상 가치관으로 좋고 나쁨을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그 가치에 따라 미친 여자가 널뛰듯이 춤추는 겁니다.

 

그러니 잘 살면 복 받았다고 생각하고, 못 살면 저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으로 살아야 된다는 사상이 성도들에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신앙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 성공한 자로서 잘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신앙을 이용하여 세상에서 육신이 행복하고자 하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사는 것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것이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모두가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세상 것을 사랑치 말라고 했어요.

 

요일 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인간들이 바라는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인데 이런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세상 것으로 유혹을 해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고 저주를 하셨습니다.

흙이란? 육신을 말합니다.

그러니 죄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마귀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넘겨준 것입니다.

 

눅 4:3-7=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그래서 마귀가 광야에 주리시던 예수님에게 찾아 와서 자기에게 절을 하면 세상 부귀영화 권세를 다 준다고 했어요.

이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넘겨준 것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원하는 자들에게 준대요.

 

예수라 할지라도 마귀에게 절만하면 세상 영광 다 준다고 합니다.

그만한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았다는 겁니다.

이는 마치 동물원의 조련사들이 당근을 가지고 짐승들을 훈련시키는 것과 같아요.

맞아요.

마귀는 짐승들을 세상 것으로 조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말은 전부 마귀의 말인 것입니다.

마귀가 세상 성공을 가지고 흙에 속한 자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마귀에게 속한 목사들이 육적 신자들에게 세상 부귀영화와 권세를 가지고 미혹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 가치관으로 살면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이겨 낼 수가 없어요.

죄인이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은 탐심입니다.

죄인이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감사를 놓치는 것은 난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난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난 죽어야 할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감사가 됩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가 지금 살아 있으니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잘 안돼요.

아는 것처럼 살아지지가 않아요.

육신이 아는 것처럼 살라고 가만있지 않아요.

 

잘 안 되는 것하고 이런 정신으로 사는 것은 다릅니다.

이런 정신으로 살면 잘 안 되는 것을 통하여서 자신이 얼마나 죄를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인가를 압니다.

늘 자신은 죄인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늘 예수 안에서 주어진 용서와 은혜를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실존이 이러함에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예수의 피로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성도는 죄를 지으면서도 감사하는 자입니다.

자신이 죄를 짓는 것조차도 이미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 받음을 알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사하는 겁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면 어쩌지 라고 고민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은 우리의 행위로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한 것입니다.

그 피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는 것이지 우리 행위로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랑을 온전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런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어요.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주신 사랑이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조건에 따라서 변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보내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보내 주셨어요.

예수 안에서 용서해 주고 사랑해 준다고 약속하셨어요.

이걸 믿으라고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믿어지니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온전한 사랑을 받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두려움은 우리가 쫓아낸다고 사라지지 않아요.

오직 온전한 사랑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자기 행위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늠하지 않아요.

자기에겐 의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행위로 희비(喜悲)하지 않습니다.

자기 행위로 희비한다는 것은 자기 행위에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장 나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세상 적으로 나쁜 짓을 하였다고 낙심하는 사람과, 세상 적으로 착한 일을 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얼마나 웃기는 짬뽕인가 하면 착하게 살면 죄가 없는 줄 안다는 겁니다.

아니 바퀴벌레에게 착함이 어디 있습니까?

반대로 악함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도발적으로 묻습니다.

부녀자 7명을 연쇄 살인한 강호순이라는 사람이 악합니까? 선합니까?

일평생 김밥 장사를 하면서 모은 돈 30억을 장학금으로 기부한 할머니가 착합니까? 악합니까?

인간들의 선악 개념으로 보면 강호순은 악한 자이고 할머니는 선한 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하나님은 둘 다 죄인이라고 합니다.

둘 다 바퀴벌레라고 하고 있어요.

여러분 같으면 바퀴벌레가 바퀴벌레를 일곱 명 죽였어요.

에이~ 이 나쁜 바퀴벌레 그럽니까? 안 그러지요.

반대로 바퀴벌레가 자기가 먹을 밥을 다른 바퀴벌레에게 양보 했어요.

그럼 착하다고 합니까? 아니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바퀴벌레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욥기에 보면 이런 일로 욥과 그 친구들 간에 논쟁한 일이 있어요.

 

욥 35:5-8=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6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알다시피 욥은 의인입니다.

그런데 재앙을 당하여 죽을 지경에 놓였어요.

그런데 이런 욥의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고 합니다.

하는 소리가 가관입니다.

 

욥아!

네가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은 네가 알지 못하는 어떤 잘못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욥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것이 없어요.

그래서 서로 잘못했다 안했다 논쟁을 하는 겁니다.

 

이 때 엘리후 라는 청년이 나타나서 양 쪽 다 싸잡아서 욕을 합니다.

엘리후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언제 인간들의 행위로 영향을 받은 적이 있느냐 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인간들 세상에서나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하나님께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의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 아니다 라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은 인간을 바퀴벌레로 보고 계십니다.

바퀴벌레에게서 일어나는 일들은 바퀴벌레 세계에서나 가타부타 할 일이지 인간 세계에 가타부타 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 가지고 잘했니 못했니 따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맞아요.

하나님도 인간을 바퀴벌레로 보아요.

그러니 착하게 살았다고 자랑하지도 말고 악하게 살았다고 기죽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는 겁니다.

세상 적으로는 김밥 할머니는 칭송 받고 강호순은 사형당해야 해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세상의 평가이지 하나님의 평가가 아닙니다.

 

이걸 교인들에게 적용하면 전도 했다고 자랑하지 말고 전도 못 했다고 기죽어 있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목사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충성하면 기뻐하고 농땡이 치면 화내고 그런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행함으로 희비하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행함을 따로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행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바퀴벌레가 수만 마리 죽었다고 하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이 다치면 난리를 칩니다.

아들이 가치가 바퀴벌레 수만 마리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이와 같아요.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이 충성보다 아들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치 있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시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상관하지 않고 귀하게 여기시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별로 여기시면 그 사람이 부처님이라도 바퀴벌레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오직 화목제물이신 예수님 안에서만 평가해요.

예수 안에 있으면 강호순도 천국 가고, 예수 밖에 있으면 김밥할머니도 지옥에 가요.

천국과 지옥은 오직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 로만 판단해요.

성도는 완벽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완벽해 자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너 누구 때문에 사는지를 아느냐!” 라고 묻고 게십니다.

“너 내 아들의 죽음을 아느냐!” 라고 묻고 계십니다.

“너 때문에 예수가 죽은 것을 아느냐!” 라고 묻습니다.

“너 내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아느냐!” 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에 의미를 아는 자가 성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 때문에 자신이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의로움과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

 

의로운 것은 독자적으로 의를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실제로는 의롭지가 않은데 예수님의 의를 전가시켜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즉 죄인을 예수님의 의를 폭 뒤집어 씌워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사람은 독자적인 의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예수를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가름합시다.

 

성도는 이미 영생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영생의 문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이니 천국이니 영생이니 하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공짜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따내려고도 하지 말고, 빼앗기면 어쩔까 라는 고민도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설령 당신이 예수가 싫다고 하여도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난 천국 안 갈래 하여도 끊어지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반드시 천국에 가도록 접수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넌 내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마치 고래 등에 작살처럼 꽂혀 있어요.

어디를 가든 그 작살은 빠지지 않아요.

태평양을 가도 빠지지 않고 대서양을 가도 빠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도 빠지지 않아요.

하나님이 주었다가 뺏었다가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 번 주시면 영원한 것입니다.

 

그럼 성도는 이런 것을 가진 자 답게 세상을 담대하게 살면 됩니다.

세상 것으로 인하여 희비하지 말고 이미 영생 받았음에 감사하며 사시면 됩니다.

자기 꼬라지를 보지 말고 예수님의 새 언약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피 안에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고 안식이 있고 평강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당신이 받은 영생을 확인해 보십시오.

그리고 자랑하십시오.

난 예수의 약속을 받은 자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었음을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만유보다 크시매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가 받은 이 영생을 빼앗길 수 없음을 알고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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