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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32강. 죽은 자들이 듣는 음성 (요 5:24-29)

by coroa 2021. 2. 3.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32강. 죽은 자들이 듣는 음성 (요 5:24-29).-

-.정낙원 목사

 

 

 

성도라고 하면 이방인과 다른 하나님 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흑과 백처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방인의 사고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방인은 죄 아래서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죄 아래서 이해되는 하나님은 자기를 위한 하나님입니다.

죄란?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겐 하나님은 자기 유익을 위한 이용대상입니다.

이를 성경에선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예수 밖에 있었을 때에는 이방인과 같이 하나님을 이해하였습니다.

그때 안 하나님은 죄로 알게 된 하나님입니다.

그땐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판단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내 중심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내게 잘해주는 신(神)은 하나님이고,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신(神)은 마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인간이 이런 신관을 갖게 된 것은 범죄하고 나서부터입니다.

죄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 아래 있을 땐 알고 있던 천국과 예수 안에서 알게 된 천국은 상이하게 다릅니다.

이런 다름은 사도요한이 본 천국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는 모습과,

지금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비교해 보면 잘 나타납니다.

 

천국엔 자기 영광이 없습니다.

오로지 어린양이신 예수님에게만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입니다.

피조물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엑스트라 일뿐입니다.

천국을 아들에 나라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곳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인간들은 모두가 자기 영광을 위해 자기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무얼 해도 자기중심입니다.

내게 잘 해주면 좋은 사람이고 내게 잘못하면 나쁜 사람입니다.

내가 편하면 천국이고 불편하면 지옥입니다.

 

그러니 죄인이 알고 있는 천국과 지옥은 정반대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주인공인데, 지옥은 자기가 주인공입니다.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지금 예수님 사랑하고 예수님 영광을 위해 살면 그 사람은 천국에 있는 것이고,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영광을 위해 살면 지옥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 입니다.

이건 죄인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죄인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인은 태생적으로 자기중심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죄인이 자기 영광을 위하고 자기중심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은 죄의 성향 때문입니다.

죄가 내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겐 타인을 배려할 마음에 여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죄인의 마음속엔 온통 자기 사랑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죄성이 하나님도 자기편으로 이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순전히 자기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마치 온화하고 자상하신 돈 많은 외할아버지와 같이 내가 언제든지 찾아가서 도움을 구하면 반갑게 두 팔을 벌리고 안아주고 오냐! 하며 내 소원을 들어주는 그런 하나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열면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하나님과 는 전혀 다른 낯선 하나님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지 않고 죄에 대하여 정상참작이라든가 하는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아주 고지식하고 무서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자신이 창조한 세상마저도 몽땅 홍수로 쓸어버리고, 불사르는 그런 하나님입니다.

죄라고 하면 치를 떨고 죄 값으로 죽어가는 아들까지도 외면하는 그런 비정한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아주 냉정한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정작 무섭다고 생각한 마귀는 오히려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인간이 마귀는 무서울 것이라고 생각하던 것과는 정 반대입니다.

아주 다정한 모습으로 맞이합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 하실 때 나타난 마귀를 보십시오.

인간의 입장을 잘 헤아리고 인간들이 바라는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주겠다고 다가오잖아요.

자기에게 절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합니다.

인간의 소원을 다 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인간들이 바라는 좋은 신(神)이지 않습니까?

 

반면에 예수님과 마귀와의 대화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을 전혀 고려치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고집하는 그런 분으로 나타납니다.

사십일을 굶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을 들어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십일을 굶으신 분이 마귀가 떡을 준다고 하니 고맙다고 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 뜻을 위해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 배고픈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뜻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음도 불사하여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사십일을 굶은 사람에게 복음은 떡이지 말씀 일 수가 없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도 먼저 배부르고 살고 난 다음에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떡이 우선이라고 하고 예수님은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 뜻이 우선이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사람이 먼저 살고 나서 복음이고 뭐고 있는 것이지, 죽고 나면 복음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살아도 복음을 모르면 죽은 목숨이기 때문에 먹고 사는 것보다 복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가 떡을 준다고 해도 떡 보단 난 하나님 뜻을 먼저 이루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마귀의 대화를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입장을 전혀 고려치 않는 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마귀는 인간의 입장을 고려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귀는 인간 편을 들어 주는데, 하나님은 인간 편을 안 들어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굶으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을 예수님께서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백성들을 대속하실 수가 있어지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겨야 마귀의 손에서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실 수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마귀가 시험한 세 가지는 구약 이스라엘이 시험당한 총체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살아가면서 마귀로부터 시험 당하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자 곧장 광야로 몰아내셔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도록 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인간 속에 뛰어든 것입니다.

그리곤 구약 이스라엘이 시험 받았던 모든 것을 사십일 동안 다 담당하신 것입니다.

 

마귀가 인간을 시험하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당한 세 가지 시험도 함축적으로 보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자기백성들을 대신하여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합법적으로 예수님을 시험치고 있는 것입니다.

 

눅 4:1-13=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10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리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마귀에게 시험당하라고 이끌고 나가서 붙여주셨어요.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시켜서 예수님이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로 시험해 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마귀가 그러잖아요.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육에 속한 자들을 세상에 꽉 붙잡아 매라고 세상 모든 권세와 영광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간들을 시험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에게 절을 하면 세상 권세와 부귀영화를 다 주겠다고 합니다.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넘겨주셨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인간들을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육에 속한 자들을 다스리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지옥에 갈 자들을 추수하기 위해서 마귀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이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틈만 나면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처럼 마귀에게 절을 하여서 세상 부귀영화를 얻고자 한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실패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실패 한 것을 이기라고 일부러 공생애 시작하자마자 마귀에게 붙인 것입니다.

마귀를 이겨서 이긴 자가 되셔서 자기 백성들을 마귀로부터 끄집어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십일을 주리시고도 먹고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셨기 때문에 마귀가 주겠다고 하는 것들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실패 한 것을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마귀에게 승리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수가 있어졌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가 준다고 하는 것을 받았다면 우리의 대속주가 되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예수님에게 주겠다고 하는 것들이 모두가 인간이 죽자 살자 얻고자 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마귀가 주겠다는 것을 덥석 받았다면 예수님이나 우리나 다를게 없어요.

그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육신이 이길 수 없는 것을 이겨 내셨어요.

인간의 생존문제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순종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자기가 이긴 것을 근거로 자기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자기 백성들을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품듯이 자기 안에 품어서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자기가 이긴 것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변호하십니다.

 

이렇게 인간이 담당할 아픔과 시험들을 다 당하신 것을 성경은 체휼하셨다고 합니다.

몸소 직접 다 겪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가 있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사십일을 굶었는데 떡을 들고 온 사람과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고 하는 사람이 온다면 누구를 좋아하겠습니까?

당연히 떡을 들고 온 사람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마귀를 좋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마귀를 좋아하게 되어 있어요.

마귀는 인간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너무도 잘 압니다.

 

마귀는 인간이 흙에서 났다는 것을 압니다.

흙에서 난 인간은 흙에서 난 것을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이 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흙을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흙이란? 육신을 말하고 세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항상 육신의 것으로 미혹을 합니다.

세상 것으로 미혹을 해요.

이름하여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이런 것은 모두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일 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아니 본질이 흙인데 흙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흙에서 나는 것으로 사는 자인데 흙에 것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주문입니다.

인간에게 아무리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안돼요.

세상 것을 이길 장사가 없어요.

 

육신을 가진 인간이 밥을 싫다고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마귀도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떡을 가지고 인간을 붙잡아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떡을 주는 마귀를 하나님이라고 믿고 따르는 겁니다.

인간들 앞에서 하나님과 마귀는 정 반대로 서 계십니다.

신앙생활의 첫 걸음은 이 잘못된 신관을 바꾸어져야 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맨 날 하나님과 마귀하고 뒤 바꿔서 섬기게 됩니다.

 

사람들은 한 번도 하나님을 나를 죽이는 저승사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설사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상대적으로 비교합니다.

비교하는 상대도 자기보다 나쁜 악당들과 비교하지 착한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과 비교가 되어 자신이 악당임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런 사고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무슨 일이든지 자기 잘못으로 생각하지 않고, 모두 남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도소에 가 있는 죄수들에게 물어 보면 하나 같이 재수 없어서 잡혔다고 합니다.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해요.

자기보다 나쁜 놈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는 억울하다고 해요.

자기가 이렇게 죄 지은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도 자기가 죄를 순순히 고백하는 사람이 없어요.

살인자에게 물어 보세요.

깡패에게 물어 보세요.

자신은 사람을 죽이고자 하지 않았는데 괜히 옆에 있는 놈이 자기를 기분 나쁘게 해서 죽였다는 겁니다.

 

왜? 째려보느냐 이겁니다.

기분 나쁘게,,,

그래서 두들겨 팼대요.

그래서 죽였대요.

 

교통경찰에게 물어보면 단 한 사람도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이 없고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댄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아!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주저함 없이 딱지 끊으세요! 라고 면허증 내미는 사람이 없어요.

 

저도 운전을 하면서 겪는 일이지만 과속을 하거나 신호 위반을 하든가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교통경찰에게 잡히면 아! 재수 없어! 라며 반사적으로 먼저 핑계거리부터 찾게 되어요.

그리곤 잘못을 인정하기보단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먼저 설명을 합니다.

 

아마 길거리 다니다 보면 교통경찰에게 잡혀서 차에서 내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모습들을 종종 목격 할 수가 있을 겁니다.

모두가 자기변명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한마디로 억울하다는 겁니다.

 

이게 본능이예요.

난 안 그래 하지 마세요.

모든 인간은 다 똑 같아요.

자기는 손해를 안 보려고 합니다.

 

지금 북한과 미국이 핵무기를 놓고 기(氣) 싸움을 하지요.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패를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미국은 깡패 같은 나라에서 핵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언제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 버리라는 겁니다.

하지만 북한 입장에선 핵을 버리면 죽는 줄 알기 때문에 못 버려요.

 

북한 사람들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미국의 입맛대로 순순히 응할 수가 없어요.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에요.

이건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에 양보가 안돼요.

쉽게 버릴 수 있는 카드가 아니에요.

북한을 욕하면 안 돼요.

 

전쟁이 왜 일어납니까?

서로 양보가 안 되니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전쟁을 하고 있어요.

서로 영토 전쟁을 하는 겁니다.

 

이 두 민족 간에 벌리는 전쟁은 어제 오늘 있어온 것이 아니고 4천년이나 되었어요.

팔레스타인이 과거 블레셋이라는 나라입니다.

블레셋은 아브라함 시대 때부터 이스라엘을 괴롭혔어요.

아브라함 당시 블레셋 왕이 아비멜렉인데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처 사라를 빼앗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이가 좋을 리가 없지요.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싸우고 있는 겁니다.

인류역사가 전쟁의 역사로 얼룩져 내려온 것은 모두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만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아벨 때문에 손해 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 인간만 없으면 하나님이 내 제사를 받았을 텐데! 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죽인 겁니다.

아주 단순하지요.

저 인간만 없으면 내가 행복 할 텐데! 라고 생각해요.

 

순순할 것만 같은 어린아이를 보세요.

혼자서 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가 둘째 동생이 생겨보세요.

큰 놈이 애기를 미워해요.

엄마의 사랑을 동생이 빼앗아 간 것을 알고 질투가 나서 미워하고 해코지를 하는 겁니다.

너 때문에 엄마 아빠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너 왜? 동생 미워하는데!

그냥! 미워!

그냥 미운 거예요.

미움은 본능적인 겁니다.

 

누군가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있지요.

맞아요.

그냥 미워요.

괜히 그 인간 보면 밥맛없고 재수 없어요.

왜? 미운데!

몰라!

그냥 미워!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인간은 존재론 적으로 더불어 살아가지를 못하는 종자들입니다.

죄가 자아 중심적으로 움직이도록 주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호라도 평화를 외쳐대는 겁니다.

평화가 그만큼 안 되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외침으로서 난 그래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은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와 뜻을 달리 하는 사람을 보면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해요.

입술에 거품 묻혀가면서 평화를 말하면서 자기 뜻과 달리하는 사람을 보면 미워해요.

이게 인간입니다.

 

정치인들을 보세요.

정권을 빼앗겼다고 하잖아요.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권력을 고정적으로 자기가 점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권력이 자기 것인 줄 알아요.

항상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며 다스리고 싶은 겁니다.

 

10년 동안 좌파에게 맡겨 보았더니 국민들이 성이 차지 않아서 우파에게 넘겼어요.

그러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5년 동안 맡겨야 하는데 그걸 못 참아요.

온갖 땡깡을 다 부리고 자기들이 권력을 행사 하겠다고 지랄을 떠는 겁니다.

이건 우파고 좌파고 똑 같아요.

그것도 국민을 위한답시고,,

 

국민들은 그 놈들은 몽땅 쓰레기장에서 화장시키고 싶어요.

그 놈들이 언제 국민을 위한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다 자기 욕심 채웠지,,,

그러면서 꼭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해요.

하여간 죽어도 자기는 괜찮은 인간이라고 감추고 싶은 겁니다.

 

정치가 곧 인간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안돼요.

아니 같이 잘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게 안돼요.

 

죄인들에겐 우리 모두 함께 해요! 라는 것은 영원한 이상이에요.

이룰 수가 없어요.

모두가 욕심 때문입니다.

자기가 해야 직성이 풀려요.

남이 하면 못 미더워요.

그러니 야당하면서도 여당 노릇하고 싶은 겁니다.

오죽하면 부모 자식 간에도 권력은 나누어 갖지를 못한다고 하잖아요.

 

인간은 남보다 많이 갖고 싶어 하고, 남보다 더 높아지고 싶고, 남보다 더 잘나고 싶어 해요.

이런 욕망을 채우려면 남을 밟고 일어서야 해요.

내 능력으로 안 되면 빼앗아야 해요.

내가 키가 작으면 남을 밟고 올라서서라도 높이 달린 곶감을 빼 먹어야 합니다.

 

내 목구멍에 밥을 넣기 위해선 남의 입으로 들어가는 밥을 빼앗아야 해요.

자기 밥그릇을 남에게 양보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어요.

바보라면 몰라도!

그래서 성경은 세상 나라를 짐승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믿지 말라고 했어요.

품 안에 있는 마누라도 믿지 말라고 했어요.

목사도 믿지 마세요.

믿을 인간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먼저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도 못 믿는데 누굴 믿겠어요.

 

믿을 것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어요.

 

이건 교회라고 예외일 수가 없어요.

자기교회 교인이 다른 교회로 가 보세요.

교인이 다른 교회로 가면 목사는 진리고 복음이고 눈에 안 들어와요.

본능적으로 피해의식이 생기고 자기 것을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어요.

바로 원수가 돼요.

십년지기 친구도 소용없어요.

 

이건 제 경험입니다.

제가 처음 복음을 알고 나서 너무 복음이 귀하다고 생각하여서 성도님들에게 평상시에 여러분이 혹여라도 교회를 옮길 이유가 생기면 복음 전하는 교회로 가야한다고 늘 말해 왔어요.

만약 울산에서 간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교회로 가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울산에도 복음 전하는 목사님이 어느 교회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어요.

제 나름대로 제가 복음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서 성도들에게 다른 목사님들의 글도 읽고 설교도 들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오래전 일입니다.

저희 교회에 다니던 집사님들이 저와 같이 교제하던 목사님 교회에 갔어요.

목사님이 전화를 했어요.

집사님들이 자기 교회에 왔다고,,,

자기도 어째야 좋을지 미안해하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교회로 가지 않고 목사님 교회로 간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하면서 미안해하지 말고 잘 보듬어 주라고 했어요.

제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목사님을 통해서 깨닫게 되면 좋은 일이라고 했어요.

그 땐 복음에 대한 순수한 마음으로 그랬어요.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 목사님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교제를 하였어요.

 

그런데 제 친구 중에 다른 목사님 한 분이 함께 교제하던 분이 있는데 그 친구 목사님이 이 사실을 알고 저를 위로한답시고 목회 윤리가 어떻고 하면서 같은 복음을 전하고 같은 목회를 하는 목사 입장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자기가 집사님들이 간 그 교회 목사님에게 말을 하겠대요.

서로 다 아는 사이였으니까요.

 

같은 지역에서 복음 전하면서 그러면 안 된다고 교인들을 돌려보내게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교인들이 무슨 물건도 아니고 그리고 내 소유도 아닌데 그곳에서 신앙생활 잘 하면 되니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실제로 그 분들이 간 교회의 제 동무 목사님이 저보다 복음을 잘 증거해요.

저 보단 나이는 어리지만 복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제가 진심으로 귀하게 여기는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제 친구 목사님은 나를 위한답시고 만날 때마다 그런 말을 하니 처음엔 아무렇지 않다가 자꾸만 그런 말을 들으니 나도 마음이 상하더라고요.

사람의 마음이 간사스러워서인지 자꾸 그런 말을 듣다가 보니 동조가 되더라고요.

섭섭한 생각이 들어요.

일이 이지경이 되니까 한 7-8개월 교제가 단절 된 채 지내게 되었어요.

속된 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긁어 부스럼 만든 겁니다.

 

오이비락이라 할까 그 때 마침 제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서 바쁘기도 했어요.

잠깐 동안 섭섭한 생각도 들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제가 끊어지니 미치겠더라고요.

이게 무슨 짓인가 복음 복음 하면서 이건 아니야! 라는 생각도 들고 해서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제가 전화를 했어요.

 

이유야 어떻든 복음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만나서 점심을 먹고 다 잊고 다시 예전처럼 회복하게 되었어요.

생각하면 유치하지요.

그래요.

 

죄라는 놈은 아주 유치하게 하면서 자기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도록 해요.

내가 손해 본다는 생각을 갖게 하여 마음속에 미움이 자리 잡게 만들어요.

마귀라는 놈은 언제나 복음보다 자기 유익을 더 중하게 여기도록 달콤하게 다가와요.

누구라도 까닥하면 이런 시험에 들 수가 있어요.

마귀는 항상 내 편을 들어주면서 복음과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 잊지 마세요.

내 편 들어 주는 척 하면서 십자가 정신과 멀어지게 하는 것 이게 마귀의 술수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요.

다 지나고 나서 하는 말이지만 누구를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으로 하지 않고 인간적인 정으로 하면 도리어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칫하면 욥에 친구들과 같이 될 수가 있어요.

지 딴엔 위로한다고 하는게 더 속상하게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 누구에게 위로나 조언도 복음적으로 해야지 인간의 정으로 하면 도리어 시험에 들어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복음을 안다고 하여도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이는 죄성은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인간이란 묘해서 목사가 복음 복음 하면서도 교인을 때로는 자기 소유화 하려고 해요.

자기 교회를 잠시 거처 간 교인들을 보면 아직도 내 교인인 것처럼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러면 마음속으로 화들짝 놀랩니다.

야! 이 죄라는 놈이 질기고도 질긴 무서운 놈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요.

무엇이든지 자기 것으로 남겨 두고자 하는 이 무서운 죄성을 알아야 해요.

이게 얼마나 큰 미혹인줄 몰라요.

하나님 뜻보다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게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이 모두가 죄 때문입니다.

죄가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쓸어버리는 일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은 저주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니 교회들이 전도 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하는 말은 전부 사기이고 거짓말입니다.

호객 행위를 하는 구호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직 아들뿐입니다.

너! 내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데?

너!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아느냐? 라고 물어요.

내 아들이 왜? 죽었는지 아느냐? 라고 물어요.

 

아들을 알아주면 기뻐하고 아들을 모르면 가차 없이 저주해 버리십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지독한 편집증 환자 같이 자기 밖에 모르는 분이세요.

성도라고 한다면 하나님 자신 밖에 모르는 이 지독한 이기주의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해요.

 

죄인도 이기주의고 하나님도 이기주의입니다.

두 이기주의가 박 터지게 싸우는 것입니다.

결국 죽어나가는 것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뜻을 양보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런 하나님의 고집과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인간을 보아야 합니다.

성도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아! 이래서 세상을 멸망당하여야만 되는 것이구나! 를 알게 됩니다.

아! 이래서 죄인은 저주 받아야 되는구나! 를 알게 되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보는지가 잘 나와 있어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마치 무덤 속에 죽은 자들에게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죽은 자들이 묻혀 있는 무덤이라고 합니다.

 

무덤이란? 죽은 자들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들을 죽은 송장으로 보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우린 서로 서로 인간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썩은 냄새 풀풀 나는 송장들입니다.

여자들이 아무리 화장을 하고 예쁘게 단장을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엔 썩은 송장입니다.

 

하나님을 일컬어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은 산 자들과 만 상대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은 죄가 없고 죽음이 없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죽음과 하나 될 수도 없고 가까이 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서로 성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죽음은 서로 성질이 달라요.

생명은 살게 하고 죽음은 썩게 해요.

그래서 죽음은 생명과 격리 시켜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죽고 못 산다고 하던 사람도 막상 죽어 보세요.

살았을 땐 애지중지 하던 자식이나 애인이나 부모 형제라도 막상 죽으면 정 떨어져요.

시체는 가까이 하기 싫어요.

그래서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이 죽으면 멀리 묻어 버리는 겁니다.

 

에덴동산은 생명의 세계이고 이 세상은 죽음의 세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도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놈을 그대로 에덴동산에 두면 죽음 천지로 만들어서 망가뜨려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자 말자 얼른 에덴동산에서 쫓아 낸 것입니다.

 

과일 상자 속에 썩은 것 하나만 두어도 곁에 있는 것들이 같이 썩지요.

그래서 썩은 것을 골라내는 겁니다.

성경은 죄를 누룩으로 표현하는 것은 옮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로 인하여 죽은 자가 되어버린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 밖으로 내어 쫓아내서 격리 시켜 버린 겁니다.

에덴동산 밖은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무덤입니다.

지금 밖에 걸어 다니고 있는 사람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살았다고 하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자들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이 산 자이신 예수님을 보내셨어요.

송장들이 있는 무덤가에 오신 겁니다.

왜? 오셨겠어요.

살려주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 되어 살려 주는 영으로 오신 겁니다.

 

고전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여기서 마지막 아담이라는 말이 중요해요.

이는 첫 아담과 비교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인 첫 아담 안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다 죽은 자로 태어나잖아요.

우리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죽은 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젠 예수님을 아담처럼 새로운 조상을 만든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서 너 내꺼!

이러면 산 자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이젠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산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구원 얻는 것을 은혜라고 하는 겁니다.

 

살려 주는 영이란? 죽은 자를 살려 내는 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찾아가서 생명의 기운을 넣어주면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죽은 자에게 자기 생명을 공급하여서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옛날에 이런 사형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악독한 죄인을 죽은 송장과 묶어서 사형을 시켰다고 합니다.

산 사람을 죽은 송장에게 묶어 놓으면 죽은 송장이 썩으면서 송장의 진액이 산 사람 몸속으로 스며들어서 결국엔 산 사람이 썩은 물에 오염되어 죽는다는 겁니다.

 

아까 말했듯이 썩은 과일을 멀쩡한 과일 속에 넣어두면 하루 밤만 자고 나면 멀쩡한 과일이 섞는 것과 같아요.

아주 잔인한 사형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와 반대 되는 방법으로 죽은 송장을 산 사람으로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산 예수님을 죽은 송장과 같은 자기백성들에게 묶어서 예수의 생명에 진액을 받아서 살려내는 일을 하시려고 산 자이신 예수님을 죽은 자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이런 사건이 구약에 이미 예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살릴 때 이런 방법으로 살려 내었습니다.

 

왕하 4:32-35=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33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34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한번은 엘리사가 수넴이라는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어떤 여인이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인 줄 알고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앞으로 오고가는 길에 자기 집에서 머물라고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엘리사가 너무 고마워서 보답을 하고 싶어서 물으니 자식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엘리사의 말대로 그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죽고 맙니다.

이에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가서 죽은 아들을 살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품어서 자기에게 있던 생명의 기운을 집어넣어서 살려냅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품어서 살려낸 것이지요.

산 자의 기운을 죽은 송장에게 줌으로서 살려 낸 것입니다.

 

또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죽은 자를 살려낸 사건이 있습니다.

이번엔 엘리사가 죽고 나서 그 뼈에 죽은 자가 닿아서 살아난 사건입니다.

 

왕하 13:20-21=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21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 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엘리사가 죽어서 시체를 굴에 안치했어요.

살점은 다 썩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강도가 죽자 그 강도를 엘리사의 시체가 있는 무덤(굴)에 던져 넣었더니 죽은 강도가 엘리사의 뼈에 닿고 살아났습니다.

이건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엘리사의 이런 불가사의한 사건들은 모두가 장차 메시야가 오시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죽은 자를 살려 내실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계시입니다.

 

이러한 상징은 모두가 예수님을 겨냥하고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오시면 죽은 자를 살려 낼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에스겔서 37장에서도 장차 죽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 날 것을 해골들이 가득한 골짜기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서 죽었던 해골들이 살아나는 이야기로 비유적으로 말씀해 주셨어요.

 

이러한 일들을 오늘 본문에선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죽은 자들에게 소리를 질러 살려 낸다고 하십니다.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8절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다고 합니다.

마치 해골골짜기에 생기가 분 것 같이 죽은 자들에게 생명의 음성이 들려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음성을 듣는 자는 다 살아납니다.

무슨 만화나 공상영화 같은 내용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지요.

맞아요.

 

성경 이야기는 이성적으로는 공상과학 만화 같아요.

아니 죽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에 음성을 듣습니까?

사람이 죽으면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죽은 자가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은 자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 일이 있었어요.

바로 나사로 사건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풀 풀 나는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려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가 묻혀 있던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라고 하자 죽었던 나사로가 꽁 꽁 묵인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 난 겁니다.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합니까?

이성으로 이해하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죽은 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엘리사를 통하여서 보여 주셨던 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에서 해골을 살려내는 사건으로 미리 계시 하셨던 그 장본인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죽은 나사로를 살림으로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에 가시지 않고 죽고 나서 장사 지낸 후 나흘 만에 무덤에 가서 죽은 자를 살려 내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살려 내실 것입니다.

말로서는 황당한 일 같은 일들을 예수님께서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려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믿었고, 어떤 사람은 의심하여서 예수를 오히려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세상엔 예수님이 믿어지는 사람과, 믿어지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나누이는 것을 심판이라고 합니다.

심판이란?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온 인류가 모두 한 민족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오시고 나니 두 민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믿어지는 사람과, 믿어지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믿어지는 사람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고,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은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이 되셔서 다 살려 내십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대신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은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다 살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고 하십니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님이 원하는 자를 살린다는 말은 예수님께 속한 자들만 살려 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이 세상엔 예수님 것과, 예수님 것이 아닌 자들로 구분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이 니꺼! 내꺼! 를 구분해 내고 계신 겁니다.

 

마치 창세기 1장에서 빛과 어둠이 갈라지고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섞여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로 갈라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편의상 궁창 윗물은 천국이라고 하고, 궁창 아랫물은 지옥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낸다는 말이 됩니다.

말씀에 의해서 천국과 지옥이 갈라진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선 그 말씀을 곧 하나님라고 합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보세요.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하지요.

그럼 하나님은 누구이고 말씀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말씀은 아들입니다.

이러면 창세기에서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을 갈라내신 말씀은 곧 예수님이라는 것이 되지요.

 

그러니 창세기 창조 이야기가 그냥 하늘과 땅을 창조 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천국백성과 지옥 백성을 갈라내는 이야기라는 것으로 이해 할 수가 있어집니다.

신약 시대에 신자와 불신자가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섞여 있듯이 둘이 섞여 있는데, 예수님이 오시고 나니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럼 이제 죽은 자가 하나님의 아들에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의문이 풀려집니다.

천국백성은 후천적으로 이 땅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창조 시에 천국백성으로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미 천국백성이 되어서 이 세상에 보내어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죄 아래 있다가 보니 자기가 누구인줄 모르고 산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에 음성이 들립니다.

이 음성은 어디서 들었던 음성입니다.

맞습니다.

이미 창조 시부터 들었던 하나님 아들의 음성이었습니다.

창세전에 듣던 목소리입니다.

그래서 그 음성에 반응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하여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 10:3-5=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목자가 문을 열고 우리 속에 소리를 치면 자기 양들은 그 음성을 알고 따라온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낸다는 것입니다.

 

마치 운동장에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자기 자식을 찾기 위하여 자식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음성을 아는 고로 자식만 듣고 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덤 속에 있던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난 것은 나사로는 이미 창세전에 예수님의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에겐 예수님의 음성은 그냥 음성이 아니라 살려 주는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음성은 성도들에겐 생명을 주는 창조의 능력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냥 말씀으로 듣지 않고 생명의 말씀으로 듣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해 보면 어떤 사람은 생명으로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농담으로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전하면 어떤 사람은 생명처럼 귀하게 받고, 어떤 사람은 농담처럼 우습게 여깁니다.

십자가의 피가 어떤 사람에겐 생명의 능력으로 작용하지만, 어떤 사람에겐 작용하지 않아요.

복음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십자가 속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귀가 없는 사람은 십자가를 신화나 지어낸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양들은 목자가 양을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목자가 자신을 위해서 대신 죽었다는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에 의미를 안다는 것입니다.

 

요 10:14-16=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이 자기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양들은 십자가의 피에 복음을 생명처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생명입니다.

십자가는 신화나 교훈이 아닙니다.

전설의 고향에서 나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은 생명입니다.

 

복음 속에는 인간들이 듣기엔 상당히 도발적인 내용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 심판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나, 예수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을 옮겼다고 하는 말과 같은 것들입니다.

 

인간들 입장에선 아니 예수 자기가 뭔데!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하느냐!

사람이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는 것이지!

자기를 안 믿는다고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은 횡포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언사는 유대인들이 듣기엔 상당히 불쾌하고 기분 나쁘게 하는 말들입니다.

죽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멸망이니 죽음이니 심판이니 하는 말들은 재수 없는 말입니다.

복음은 양보나 타협이나 인간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믿으면 구원이고 안 믿으면 저주입니다.

이건 우리더러 선택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양이 아닌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어요.

믿고 싶어도 안 믿어져요.

그러니 못 믿는 겁니다.

 

복음은 어쩌면 짜고 치는 고스톱과 같습니다.

자기들끼리만 알아먹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원 받기로 작정 된 자들만 알아듣도록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고,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다는 것은 복을 받은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만 예수의 말을 알아듣도록 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백성들에게 이미 그렇게 가르쳐 놓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믿도록 조치 해 놓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실력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자랑할 수가 없는 겁니다.

감사만 할 뿐입니다.

구원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자기백성들에겐 예수의 음성을 알아먹도록 가르쳐 놓았기 때문에 처음 듣는 말인데도 알아먹는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요.

 

요 6:44-45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보세요.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께 배운 사람들만이 이해 할 수가 있다고 하지요.

아버지께 배웠다는 것은 알아먹도록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들었던 음성이므로 전혀 낯설지가 않아요.

 

그래서 주저 없이 반응하는 겁니다.

택한 백성에겐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은 망설임 없이 단번에 믿어집니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할 필요가 없이 믿어져요.

복음을 믿는 것이 전혀 어렵지가 않아요.

 

이는 하나님께서 다 믿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앞으로 이끌어 주셔야지만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아버지께 배운 사람들이냐 라는 의문이 남게 되겠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버지께 배운 사람입니다.

복음은 큰 소리를 치고 이해를 시키려고 악악댈 필요가 없어요.

종용히 말해도 알아들을 사람은 다 알아들어요.

 

복음을 이해하는 데에는 많이 배웠느냐 적게 배웠느냐 라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복음은 인간의 지혜를 거부합니다.

복음은 논리적으로 전하지 않아도 알아먹는 사람은 다 알아 먹어요.

그냥 지나가는 말로 예수님 피로 구원 받습니다! 라고 하면 예수님의 양은 척 알아먹어요.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은 알아듣게 되어 있어요.

 

행 13:48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들은 찾아내기 위해서 복음만 전하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가 복음만 전하여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께로 난자들만 남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나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자들만 구원합니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아버지로부터 선택을 입은 자들인가를 천국복음으로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전에 아버지께로부터 배운 사람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영접하는 겁니다.

이제 이 세상은 인간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예수님에 의해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심판이란 갈라낸다는 말인데 이는 주인만이 행사 할 수 있는 말입니다.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아버지께서 심판권을 아들에게 다 위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판 하러 오셨어요.

예수라는 이름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악한 자와, 선한 자를 갈라내십니다.

 

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선한 자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이고,

악한 자란? 하나님의 선택을 입지 못한 자를 말합니다.

선택을 입은 자는 아들에 음성을 들으면 믿는 쪽으로 반응을 하고,

선택을 입지 않은 자는 아들에 음성을 들으면 반발하는 쪽으로 반응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는 자기의 소속을 몰랐는데 예수께서 오심으로 자기의 소속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와서 말하기 전에는 자신들이 마귀의 자식인지 몰랐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심으로 그들이 마귀의 자식임을 알게 된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대적함으로서 마귀의 자녀라는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은 사라졌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와 영접치 않는 자로 차별이 되어질 뿐입니다.

 

마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갈라진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달린 강도는 모든 인간들의 대표이며 곧 상징적인 사람들입니다.

한쪽은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믿은 자이고, 한쪽은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모르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알고 영접한 한 쪽 강도는 천국으로 갔고,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모르고 조롱한 한 쪽 강도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결국 이들의 운명은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였느냐 로 결정지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도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의 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로 결정되어집니다.

아들을 믿고 영접하는 자는 영생의 사람이고, 영접치 않고 거부하는 자는 멸망의 사람입니다.

 

아들에 음성이 들려지는 곳마다 선한 자와 악한 자가 갈라집니다.

선한 자란? 영생에 속한 자라는 말이고, 악한 자란? 영벌에 속한 자란 말입니다.

아들의 음성을 들으면 각자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아들의 음성(복음)을 듣고 선에 속한 자와 악에 속한 자가 부활하여 각자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말씀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장차 온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를 상징하기도 하고,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과 악한 일이란? 인간의 윤리 도덕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대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하는 부활이란? 복음이 증거되면 자기정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악한 자는 예수님을 대적하게 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고,

선한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선에 속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게 된 것이고,

악에 속한 사람은 심판에 부활로 나아오게 된 셈입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동일하게 예수님의 음성으로 부활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부활하고,

불신자는 예수를 거부하는 쪽으로 부활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과 배척하는 자들로서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나중에 받는 것이 아니고 현재 이미 받았습니다.

영생의 사람으로 나중에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살아났습니다.

성도는 영적으로 이미 영생의 사람으로 부활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도 다시 사는 겁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을 하늘에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살려놓았습니다.

사망에서 영생으로 이미 옮겨놓았습니다.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진 증거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의 증거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현찰이지 외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믿어진다는 것은 곧 부활이 되었고 영생을 얻었고 천국 안에 들어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에 능력도 알고 비밀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은 현재 예수의 생명으로 하늘에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의 삶을 나중에 살려고 하지 말고 현재 속에서 살아가십시오.

예수의 생명으로 현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영생의 삶입니다.

 

생명의 부활로 나아온 자답게 세상 것으로 인하여 주눅 들지 말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은 자였던 저희를 예수그리스도께서 살려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 하늘에 사람으로 살아났으니 위엣 것을 바라보며 살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에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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