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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21강.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창 12:1-5)

by coroa 2021. 1. 8.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1강.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창 12:1-5).-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 가시는 것을 구약에선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 주셨고 신약에선 교회를 통해서 말씀 해주십니다.

오늘은 이스라엘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 가시며 인도해 가시는지를 살펴볼까 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것을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에 가는 여정과 같은 것이라고 살펴봤습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 땅이 갈대아 우르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지역적인 개념으로 두지 마세요.

갈대아 우르가 ‘약탈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라고 했지요?

‘강도들이 사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을 일컬어 강도들이 사는 곳이라고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강도 만난 자가 거반 죽어 가는데,

사마리아인 되신 예수님이 자기 비용을 들여서 그를 살려주잖아요.

 

저와 여러분이 강도를 만난 자들인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셔서 우리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나는 마땅히 저주받아 죽어야 할 자인데,

이런 나에게 예수님이 자신의 피를 흘려서 살려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볼 때 문자적인 의미나 문법적인 의미에 메이지 마세요.

성경은 전체가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들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특히 사복음서 같은 경우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역사적인 사실들을 근거로 기록을 해놓은 것입니다.

 

우린 성경 속에 일들을 통해서 그냥 예수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구나, 소 닭보듯 남의 이야기 하듯이 하지 말고, 이런 일들이 도대체 우리와는 무슨 상관이 있지 라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성경이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해요.

우리 구원 이야기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우리 이야기로 들려지게 해 주세요.

 

구원이란? 우리가 열심을 내고 많은 것을 깨닫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닙니다.

구원에 관해서 여러분들이 애를 쓰고 신경을 쓰지 마세요.

그건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는 걸어서 하늘까지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야곱을 보세요.

야곱이 아비 집에서 쫓겨나서 벧엘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시잖아요.

천사들이 사다리를 하늘로부터 내려 주잖아요.

 

우린 그거 타고 올라가면 됩니다.

우리가 사다리를 만들어서 타고 올라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말해주고 있어요.

 

오늘 본문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

언제 아브라함이 전보를 쳤습니까?

전화를 했나요?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왜요?

자기 백성이니까요.

부모가 자식을 챙기는 것이 잘못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가는 게 뭐가 잘못됐습니까?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 아브라함이 바로 우리입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의 조상이라고 그러지요?

저와 여러분은 예수를 믿습니다.

그럼 우리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갔다면 우리도 당연히 찾아오십니다.

 

찾아 와 주신 것에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려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고 보니까 그 은혜가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찬송을 부를 때도 좀 감동으로 부르세요.

찬송을 부르는데 시무룩해서 앉아 있지 말고…

 

왜? 그렇게 안 기쁜가요?

주일날 여러분이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는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전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애인을 만난다면 가슴이 두근두근 하지요?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러 간다면 치장을 하고 가슴이 뛰고 그러잖아요.

만나서 그냥 무덤덤하게 있나요?

아니지요?

 

그냥 일상적인 얘기를 해도 보면 좋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모습이 그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임하고 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이 모일 때 어떻게 모였나요?

그들이 억지로 모인 것이 아닙니다.

기뻐서 모였어요.

 

일부러 찬송 시켜서 찬송 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너무 너무 고맙고 감사한 것입니다.

그 기쁨을 가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기쁨이 안에서 요동치기 때문에 가둘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억지로 감사하세요, 예배하세요,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을 할 때도 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셔야 하는데,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가만히 보면 찬송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제발 신앙생활을 건성 건성으로 하지 마세요.

구원이 장난이 아니에요.

신앙생활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하는 게 아니에요.

죽기 살기로 해야 해요.

제발 설교를 농담으로 듣지 마세요.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와서 어디로 떠나라고 합니다.

아브람에게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얘기는 단순히 고향 떠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건 근본을 뽑아 버리는 일이에요.

 

물어봅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하고 나니까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아버리지요.

쫓아내면서 근본 된 토지를 갈라고 하지요?

아담이 어디서 살아야 하는 자인가요?

 

에덴동산에서 살아야 하는 자이잖아요.

그런데 범죄하고 난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어요.

쫓겨나서 이 땅에서 살고 있어요.

 

이러면 아담이 살아가는 이 땅은 허상이 되겠지요.

실상은 에덴동산이에요.

쉬운 말로 본가가 에덴동산이고 이 세상이 남의 집이 되는 겁니다.

 

그럼 아담의 구원이 어띤 식으로 일어나야 합니까?

남의 집인 이 땅에서 떠나 본가가 있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이걸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요.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해서 봤을 때는 흙이라는 그 세계는 허상입니다.

 

(그림 설명)

 

위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이걸 묵시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히브리서 3장에 보면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래의 역사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위의 하나님 나라는 실상이고,

아래 이 세상 역사는 허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허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짜인 것입니다.

그 가짜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찾아가셨습니까?

아브라함은 성도의 대표이지요.

성도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하늘나라이지요.

 

성도에게 이 세상은 남의 땅이에요.

본가는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강도들이 우굴 거리는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떠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짜로부터 떠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니까 하나님이 또 다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집어넣고는 하늘을 바라보게 하면서 니 땅은 저기에 있다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갔음에도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바라보고서는 자식들과 그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장막생활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루에서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 맞아요.

근데 가나안 땅에 막상 들어오고 보니까 약속의 땅이 하늘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지 않고 객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하나의 샘플이었던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보여주는 시청각 교재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줄 땅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인 줄 알았는데 들어가고 보니까 가나안 땅을 안 주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거부였습니다.

그렇게 큰 거부였지만 자기 돈 주고 산 땅은 딱 하나 뿐이었어요.

그게 뭡니까?

막벨라 굴이었습니다.

무덤이었어요.

 

아브라함이 무덤 하나 사 놓고 죽은 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산 것이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피밭(나그네들의 무덤)을 산 것이나 똑 같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피 값으로 딱 하나 사놓고 가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피 밭입니다.

그 피 밭을 일컬어 나그네들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나그네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백성들이에요.

우리들이에요.

 

나그네들의 무덤이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피 값으로 산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피 밭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였습니다.

교회로 모인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서 가나안으로 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아브라함처럼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바라보아야 하는 겁니다.

교회는 뭐냐?

이 땅은 허상이고 실상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곳입니다.

이 땅에 복이, 복이 아니라 진짜 복은 하늘에 있다고 알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 보니까 너희가 살 땅은 여기가 아니고 저 위에 있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목양교회 성도들아!

모퉁이돌 성도들아!

여기엔 너희들 것이 없어.

너희들의 것은 하늘에 있다!

그걸 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그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못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자기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을 대표적으로 간섭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하면 기존의 영역에서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걸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4절을 잘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말씀을 쫓아갔고’ 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말씀이 아브라함을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끌고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끌려간 것이지 아브라함이 자진해서 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본토 친척 아비집이라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터전입니다.

그 터전을 버리라고 하는데 누가 예~! 하고 버릴 수 있겠습니까?

없어요.

이건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이라는 것은 내가 이 땅을 살아가는 힘의 근거지입니다.

그것으로부터 떠나라?

힘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 자발적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가셔서 끌어내는 것입니다.

어디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그 땅으로....

 

우리는 흔히 생각할 때 좋으신 아버지라고 하는데...

아브라함에게 한 번 물어 보세요.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일까요?

그가 볼 땐 망하게 하는 하나님이지요.

 

내가 일궈놓은 기업이 있는데 그것을 떠나라 하면 떠날 수 있을까요?

못 간다니까요.

여기에 자기 터전이 있는데 못가지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디를 가든지 자기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자기 세계를 확장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인데..

근데 부모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안됩니다.

 

신앙생활을 너무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신앙생활은 아파요.

자꾸 떠나는 경험을 해보셔야 합니다.

 

때로는 내가 자리 잡고 있던 조직으로부터 쫓겨남도 당해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이 떠나는 것이 추상이 아니고 실제 이런 맛이었겠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머리로 알아지던 성경 속의 하나님이 성경에서 나와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동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을 이 성경이라는 문자 속에 가둬놨잖아요.

그런데 성령이 감동이 되면 문자 속에 가둬놓은 하나님을 끄집어내신다니까요.

이해되세요?

 

그러면 성경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성경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했다고 하겠어요?

 

제가 지난번에 ‘전우치’ 영화로 비유를 했잖아요.

그 영화에 보면 전우치가 그림 속에 가둬져 있습니다.

도사들이 주문을 외우면 그림 속에 가둬진 전우치가 역사 속으로 튀어 나옵니다.

 

지금 성령께서 예수님을 이 성경 속에 가둬놓으신 겁니다.

성령께서 가둬놓으셨으면 성령께서 끄집어 내 주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을 입으면 누구든지 이 말씀이 생명으로 덮친바 됩니다.

 

여러분들이 지식이 얕아서 성경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대학교 안 나와도 괜찮고 글자 몰라도 괜찮습니다.

성령에 의해 그냥 감동이 되면 알게 됩니다.

 

왜요? 성령께서 말씀 속에 예수님을 가둬놨으니까

그 성령께서 가둬진 예수님을 끄집어내면,

그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생명이신 그 분이 우리에게 덮친바 되면 우리 삶 속에 생명의 역사들이 툭툭 튀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이라니까요.

 

신앙생활은 수학 공식을 외우거나 영어 단어를 외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근데 사람들은 성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머리로는 아는데 삶이 없어요.

 

이건 마치 과거에 우리나라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사람들과 같아요.

문법으론 달달 외는데 외국인 만나면 대화 하나 못하잖아요.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경 속에 있는 그 예수님을 실제 나의 구주요 나와 내 삶에 동행하는 것으로 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아야 해요.

성경 보면서 예수님의 맛도 못 본다면,,, 그런 성경을 왜 봅니까?

교회에 와서도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구경만 하고 가면 어떡합니까?

 

‘목양교회에 가니까 예수가 있더라…’ 그런 말 하지 마시고..

목양교회에서 증거 되는 그 예수를 여러분이 만나서 그 만난 예수를 가서 증거를 하십시오.

내가 만난 예수는 이런 분이다, 라고 증거를 하시란 말입니다.

 

누가 그러던데…하지 마세요.

예수를 남의 말 하듯이 하지 마세요.

그런 말을 하는 분은 지금 예수를 못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그러는데 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건 목사의 예수이지 그 사람의 예수가 아니에요.

남의 예수에요.

그러니까 목사가 그러는데 라는 예수를 말하지 말고,,,

내가 예수를 만났는데...

그 예수는 이렇더라고 말을 하셔야 해요.

 

남의 예수는 사상누각입니다.

그냥 푹 찌르면 넘어집니다.

여러분이 성경적 지식이 많아 현란하게 말을 해도 실제 딱 보면 압니다.

 

머릿 속의 지식적 예수인지 정말 내가 만난 예수가 있는지 말입니다.

지식으로 알고 있는 예수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에도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데 성경을 많이 안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진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어떤 집사님은 앞으로 아이를 어떻게 교육을 시킬까 걱정을 하시는데,

물론 부모니까 걱정은 되겠지요.

 

하지만 아이를 보면서 그 아이의 인생도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란 걸 아시고 네 인생도 예수님 만나야 된다 라고 가르치시면 됩니다.

부모로서의 책임은 아이에게 네 인생은 하나님이 간섭 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하는 겁니다.

 

지금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 오셔서 떠나라 그러고는 하나님은 떠나가셨는가요?

아니지요.

하나님은 끝까지 동행하십니다.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은 한 번도 아브라함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늘 쫓아다니셨다니까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의식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건이 터지면 그 때서야 알게 되어요.

 

우리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는데,

우리는 기분이 좋을 때는 하나님을 의식했다가 기분 나쁘면 하나님 없습니다, 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어렵고 힘들면 징징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네 없네 하면서 불평합니다.

이러고 어떻게 삽니까, 라고 원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이 땅에 사는 것은 허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실상이 아닙니다.

 

진짜가 안 나옵니다.

허상에서는 허상만 나옵니다.

진짜는 저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늘 간섭을 하시는 겁니다.

실상을 알게 해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깨달아지면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가벼워집니다.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가볍습니다.

이게 안 보이면 이 땅의 삶이 무거워집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는 자기가 자기 인생을 관리를 해야 합니다.

 

제일 힘든 것이 내가 내 인생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것만큼 힘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늘 고민하게 됩니다.

두려움에 쫓깁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면 우리가 알던 하나님으로부터 끄집어내세요.

이게 중요한데...

 

자 보세요.

우리 인간들은 흙에서 났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흙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하나님을 알고 있어요.

이걸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상은 가짜 하나님이에요.

 

이 역사 자체가 가짜라 그랬지요?

내가 가짜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니까 내가 아는 하나님도 가짜인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은데 보세요.

 

내가 가짜입니다.

내가 가짜일 것 같으면 가짜인 내가 아는 하나님은 진짜일까요?

가짜일까요?

가짜이지요.

 

그러면 진짜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면 내가 알고 있는 가짜 하나님을 깨부숴야겠지요?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내가 바로 우상덩어리라고 한 것입니다.

다른 게 우상 아니고 내가 우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과 싸우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싸우는 자’라고 했지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싸우십니까?

이스라엘이 우상이니까 싸우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나에요.

우리가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날 좀 살려달라고 외칩니다.

그 때 하나님은 ‘넌 살면 안 돼! 너 깨져야 해!’ 라고 하십니다.

왜요? 내가 살면 계속해서 가짜 하나님을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짜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는 하나님입니다.

나를 이 땅에서 잘되게 해주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도 마찬가지 입니다.

왜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빼낼까요?

그 곳에 가만 내버려두면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알았던 그 하나님을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그런 곳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그건 가짜 복이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옮겨 버리는 것입니다.

옮겨 놔놓고 그때부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는 일들을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와 보니까

아, 하나님은 내 편 들어 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나를 이용하는 하나님이구나! 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그 때부터 계속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소모품으로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자기는 부정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기부인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내가 부인되어야지 해서 부인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자꾸 부정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꾸만 부정을 시키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고 하나님 인생으로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세요.

자기를 부인 하라고 하니까 내가 부인해야지 하고 결심을 하는데..

아니에요.

 

물어 봅시다.

어떻게 부인하실 겁니까?

그 어떤 인간도 부인 안 됩니다.

내가 부인이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 부인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쉽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면 반드시 종말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결국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난 아브람으로서는 종말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빼내신 다음에 가나안에 가서 새로운 이름을 주잖아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이것은 너는 이제 새로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름은 누가 지어줍니까?

아버지가 지어주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 새로 지어준 것은 이제부터 네 애비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되셔서 간섭을 해나가십니다.

그런데 이 간섭을 당하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징계라고 합니다.

참 아버지는 아들을 징계하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이 땅에 살아가는 삶 속에서는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자꾸 발생되는 것입니다.

 

징계라고 해서 매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이 자꾸 일어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징계입니다.

 

왜 간섭하실까요?

비록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왔다 하더라도 아직 그 인간이 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은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갖고 있던 신관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신관이 어떤 신관입니까?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와서도 끊임없이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뜻을 기각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 배도하는 역사가 계속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본받자 하지 마세요.

본받을 것 하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지금 우리에게 얘기를 해주시는 겁니다.

 

목양교회 성도들아!

신앙의 본질이 뭔지 아느냐?

아브라함을 봐라!

내가 아브라함을 간섭한 그 방식대로 내가 너희들을 간섭한다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 속에 우리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속에 포함되는 것이면 아브라함이 개판을 쳐도 구원이 탈락됐다?

안됐다?

안됐다 이지요!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면서 살아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아브라함을 구원시키셨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어떤 행위로 잘려지지 않습니다.

이것처럼 대박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 예수 믿음이 대박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서 그런 것들이 깨소금처럼 와 닿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인물들을 나로 이입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봤을 때 내가 대단한 은혜를 입었구나 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내가 대단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은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보여질 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이 조금 가벼워집니다.

 

그럴 때 자족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고.

 

사도 바울이 그러잖아요.

비천에 처할 줄도 알았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고 하잖아요.

내 형편이 어떻든지 상관없어요.

 

시집 가는 것도 유익이 아니고 혼자 사는 것도 유익이 아닙니다.

유익은 예수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인생이 가볍지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이 허상이라는 세상 속에 둔 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빼내기 위해서 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반드시 저주 속에서 빼내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어떤 언약이라고 했습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언약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저주받은 세상에 있다는 의미가 우리는 구원을 전제로 해서 이 땅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와 있는 것은 어떤 면으론 형벌적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잡혀가고 이방인에게 잡혀가고 할 때 복역의 때가 끝났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감옥 속에 집어넣었다가 빼내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집어넣었다가 빼내올 때 하나님의 은혜가 묻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그러면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상인 묵시 세계에 있던 자들을 왜 이 땅이라는 허상 세계에 던져놨습니까?

허상 세계에 던져 놨다가 실상의 세계로 빼낼 때 그냥 빼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바르고 간다니까요.

 

김을 바를 때 참기름 묻혀 굽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빼내갈 때 예수님의 피를 바르고 빼내 가십니다.

그렇게 피를 발라 빼내 간 사람은 전부 어린양에게 감사와 찬송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 땅의 교회에서 조금 맛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적 의미로 또 살펴봅시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문자적 의미로는 자기 부모로부터 떠나는 것이 맞아요.

 

그런데 신약에서 영적 의미로 봤을 때는 죄에서 빼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이 죄 아래 태어났어요?

죄를 누가 주관하는가 하면 마귀에요.

그러니 우리는 마귀 아래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니 애비가 마귀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법을 가지고 인간들을 지옥으로 보내요.

마귀는 검사와 같아요.

검사는 어떻게 하든지 죄를 씌워서 감옥에 가두는 일을 해요.

 

마귀는 법을 가지고 다스립니다.

마귀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죄인으로 고소를 해요.

마귀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사용한다니까요.

아이러니 하지요.

 

하나님이 마귀에게 하나님 말씀을 주고서는 죄인들을 옥에 가두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마귀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인간들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우리도 마귀의 참소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어요.

꼼짝없이 지옥으로 끌려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누가 고발한다고 했나요?

하나님 말씀이라고 했지요.

 

하나님 말씀을 구약에서는 율법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지요.

구약이란? 옛 언약이라는 말이고,

신약이란? 새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옛 언약을 율법이라고 하고,

새 언약을 은혜라고 합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이에요.

 

구약 이스라엘이 있고,

신약 이스라엘이 있어요.

구약 이스라엘은 죽었고,

신약 이스라엘은 살아요.

 

왜? 그럽니까?

구약 이스라엘은 율법 앞에서 전부 죄인으로 고발당하였고,

신약 이스라엘은 예수 안에서 다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우리 옛 사람을 상징해요.

우리는 전부 율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다 죽어야만 해요.

그런데 예수가 와서 살려 주신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의 요구를 대신 담당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1절부터 7절까지 봅시다.

 

갈 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잘 보세요.

우리가 원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땅으로 보내질 때는 종으로 보내졌습니다.

누구 아래서 종노릇 합니까?

율법 아래서 종노릇 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세상의 천한 초등학문이라고 합니다

실제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이고,

죄 아래 있는 세상이니까,

신자든 불신자든 전부 죄 아래 가둬져 있습니다.

 

생명책에 녹명된 자나 녹명되지 않은 자나 다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우리는 죄의 종노릇 하고 있었어요.

그 죄는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죽이잖아요.

우리는 그렇게 다 법 아래서 태어났는데 실제로는 아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야 임마,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 대신에 죄값을 치루었어,

그러는 겁니다.

우리하고 상의 하지도 않고 말입니다.

 

이걸 우리가 못 믿으니까 성령을 보내 주신 겁니다.

성령이 오고 나니까 이게 믿어지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줍니다.

그렇게 아들의 영을 받고 보니까 내가 종이 아니라 아들인 것을 알게 되었어요.

 

종으로 있을 때는 율법에게 지배를 당하고 살았습니다.

율법이 뭡니까?

내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율법이잖아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지키고 사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선 말씀을 지키는 주체가 ‘나’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항상 지켜야지 안 지키면 큰 일이 납니다.

 

이 말씀을 안 지키면 계속해서 저주에 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못 살면 계속해서 법이 나를 참소합니다.

‘너 말씀대로 살았어, 못살았어?’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대로 살 수 있습니까?

살 수가 없잖아요.

 

율법 자체가 우리 한계를 알려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이 오기 전에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있었어요.

내가 괜찮은 존재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착하게 살면 천당 가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한 번 물어 보세요.

천당이 있고 지옥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천당 갈 수 있어요, 하고 물으면 전부 착하게 살면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은 전부 천당 간다 그러지 지옥 간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난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 본질이 어떤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율법을 줘서 우리의 본질을 확 밝혀 버리십니다.

세상에 내게는 의가 없고 나는 저주받아 마땅한 자이구나를 알게 하십니다.

말씀 자체가 법이 되어서 우리에게 다가 오면 우리를 사망가운데 가두는 일들을 합니다.

 

내가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옴짝달싹 못하고 살았어요.

여러분들이 율법 신앙생활 할 때 어떠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랬어요.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할 때 본능적으로 불안함이 밀려왔습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교회 집사라면 당연히 주일날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해야 하는데 놀러 갔다 합시다.

그러면 그 마음속에 법이 와서 참소를 합니다.

그러면 찝찝한 겁니다.

 

법이 본능 속에서 우리를 참소하는 것입니다.

두려운 겁니다.

내가 말씀대로 살았을 땐 기쁘고 말씀대로 살지 못했을 땐 슬프고 그랬습니다.

그게 우리의 본질이에요.

그렇게 살았다니까요.

 

그런데 때가 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 부활 승천 하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오순절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지금도 성령을 부어 주세요.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예수가 믿어지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자유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런 죄인이라는 지적은 하지만 내가 율법을 통해서 참소는 당하지만 정죄는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당할 그 죄값을 대신 치뤄 주셨다는 것이 믿어지니까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말씀 앞에 서면 이 말씀을 예수님에게 인계를 시켜요.

예수님이 지키세요.

그래요.

예수님이 지키셨어요, 라고 해요.

예수님 뒤에 숨는 것입니다.

 

이영이가 만약에 길을 가다가 문제를 일으키게 되면 자기가 해결하지 않고 아빠 뒤에 숨잖아요.

아빠 뒤에 숨는 것은 아빠가 대신 처리해달라는 말이잖아요.

이게 믿음입니다.

 

이영이가 다른 아저씨 뒤에 숨나요?

아니지요.

자기 아빠 뒤에 숨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 오면 말씀은 반드시 성취가 되어야 합니다.

이건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고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말씀이 창조의 능력이라는 말은 반드시 말씀이 담고 있는 내용을 사건으로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랑해‘ 그러면 사랑해야 합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그 사랑을 내가 해야 했어요?

사랑 못하면 죽어요.

 

그런데 내가 할 수 있었나요?

없었나요?

안 되었지요?

여러분이 말씀대로 살아지던가요?

안 되지요.

 

그럼 우리는 말씀에 의거해서 난 참소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고 나니까 그 말씀을 내가 지킨 것이 아니고 이 말씀 대신 지킨 분이 있구나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대신 지켜주신 분이 누군가 하고 봤더니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성령 받은 사람은 말씀 앞에 서면 그 말씀을 다이렉트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거쳐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앞에 세우면 그 예수님은 말씀을 완전히 다 지켜내신 분이란 말입니다.

제가 이걸 이렇게 설명했잖아요.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언약의 대상이 아니라고,,

언약은 하나님이 한 것이니까 하나님이 지키시는 겁니다.

 

이 성경 자체가 창세전 언약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경의 모든 이야기들은 언약을 하신 당사자가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전에 언약할 때 없었어요.

창세전 언약은 아버지하고 아들이 했어요.

 

아브라함을 12장에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고 하나님께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을 때 율법이 있었나요?

없었나요?

없었어요.

율법은 아브라함이 죽고 난 후 430년 후에 주어졌다니까요.

 

그럼 묻습니다.

아브라함이 율법 지킨 것과 상관없이 구원받았지요.

그럼 믿음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라 했으니까 그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후손인 우리도 율법 지킴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율법 지킴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습니까?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을 다 지켜내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고 나니까 그것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적 의미에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은 옛 언약으로부터 떠나서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율법 안에서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태어났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우리로 하여금 율법 아래에서 은혜 아래로 빼내주셨습니다.

 

제가 그런 비유를 하잖아요.

 

항아리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이라는 항아리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라는 항아리입니다.

우리는 전부 율법이라는 항아리에 올망졸망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달랑 집어 올려서 은혜라는 항아리로 옮겨 버리신 겁니다.

 

제가 복음을 몰라서 목회를 할까 말까 굉장히 딜레마에 빠진 적이 있어요.

고민을 하면서 금식할 때 이것을 개미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금식한지 삼십 일째 되는 날, 너무 배도 고프고 힘이 없어서 양지 바른 곳에 있는 쌍 바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이 쪽 바위에도 개미가 바글바글하고, 저 쪽 바위 위에도 개미가 바글바글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쪽에 있는 개미를 덜렁 들어서 저 쪽 바위로 옮겨 놨습니다.

그 때 퍼뜩 깨달아지는 거에요.

 

제가 넘겨 준 개미한테 이쪽에 있던 개미들이 물었을 거 아네요.

낯선 놈이 어느 날 와 있으니까 물었을게 아닙니까?

야! 너 어떻게 이쪽으로 왔어?

그럴 때 그 개미가 뭐라 그랬을까요?

그 개미는 난 가만히 있는데 어떤 분이 나를 이리로 옮겨 주셨어 라고 하겠지요.

그냥 누가 옮겨 놓은 것입니다.

 

이걸 옮기는 순간 제가 깨달았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의 어떤 세력이 와서 옮겨주는 거구나.

그것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개미의 본토친척 아비 집을 제가 옮겨 주었어요.

그 개미에게는 내가 구원주에요.

이해되시지요.

 

내가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어떻게 하든지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을 이뤄가려고 했는데,

그 때는 말씀을 보기만 하면 채무가 되어서 밀려오는 겁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지키지?

어떻게 살지?

 

그런데 이것이 깨달아 져서 이쪽으로 옮겨져 보니까,

은혜 안에 들어가 보니까,

세상에 내가 지켜야 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 믿어지니까

어떤 말씀 앞에도 예수님의 피를 내어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그 속에 예수가 있는 사람은 예수를 내어 놓을 것이고

예수가 없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열심을 내어 놓으려고 하겠지요.

그러니까 자기 안에 있는 패를 한 번 내어 놓아 보라니까요.

내 패가 어떤 패를 가지고 있는 지 말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다 율법 아래 있다가 그 율법 아래에서 빼내심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 그러잖아요.

너희가 원래 아들인데 잠시 종이 되어 율법이라는 청지기 아래 두었다가 때가 되서 예수님을 보내서 빼냈다고 합니다.

 

다시 갈라디아서 4장을 보세요.

 

갈 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잘 보세요.

묻습니다.

아들의 영이 와서 우리가 아들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원래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의 영이 온 것입니까?

원래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의 영이 온 것이지요.

 

이걸 놓치지 마세요.

원래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의 영을 보내준 것입니다.

그럼 결국 성령은 자기 백성을 확증시켜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너는 원래부터 내 아들이었다는 것을 확증시켜주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령 받고 나면 내가 괜히 쫄았네…하는 것입니다.

 

마치 조선시대 왕자가 어렸을 땐 스승에게서 배움을 받습니다.

그 때는 스승이 무섭잖아요.

그런데 세자가 되고 나면 더 이상 쫄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에요.

 

이런 말씀 속에서 여러분은 춤이 나와야 합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의 영을 보내주셨구나.

그러면 내가 아들 되고 안 되고는 아버지가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 보내심을 입을 때 아버지께서 너는 아들, 너는 종 이렇게 보냈어요.

에서와 야곱처럼 결정하고 보냈어요.

 

그러면 아들인 사람은 내가 아들 되고자 할 것이 있습니까?

없겠지요.

내가 아들 되려고 노력한다면 그건 뭔가 수상합니다.

아들인 사람은 아들 되고자 노력하지 않아요.

그냥 아들로 살아요.

 

제가 요즘 들어 답답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을 신앙으로 알고 있는데,

신앙을 마치 성경적 지슥을 습득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복음 안다는 것을 가지고 잘난 척을 해요.

복음 안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게으름을 피우면서 거드름을 피워요.

이건 아니에요.

 

여러분 절대 하나님 말씀 많이 아는 게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아들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로 사는 거에요!

이러면 꼭 복음을 지식으로 알고 있는 자들이 비아냥거리면서 예수로 어떻게 삽니까? 라고 물어요.

이건 말로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럴 때 하는 말이 옛날 신구가 게맛살 선전 할 때 한 멘트가 정답이에요.

니들이 게맛을 알어!

이 말은 게를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은 게맛을 알수 없다는 말입니다.

맛은 설명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먹으면 알 수 있어요.

먹어본 사람은 설명하려고 하지 않아요.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얘기를 해줄 건가요?

그 속에 예수가 있는 사람은 예수로 사는 겁니다.

예수가 없으면 예수로 못 삽니다.

 

예수로 사는 것하고 사는 척 하는 것은 달라요.

예수로 살아야 되는데…살아야 되는데…라고 하는 것하고

예수로 사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믿음과 믿음으로 사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믿어야지! 믿어야지! 하는 것은 안 믿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 받은 사람은 그냥 믿음으로 삽니다.

믿어야지 믿어야지 그런 말 안하지요.

 

구원을 받은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지! 받아야지~ 하는 게 없습니다.

그건 우리 몫이 아닙니다.

얼마나 재밌어요.

 

보세요.

너희가 아들인고로 아버지께서 때가 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너 대신에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 시켜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렇게 예수님이 가셔서 성령을 받아서 자기 제자들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이 반드시 성령을 보내 주세요.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이제 예수를 증거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건 못 말려요.

너 예수로 살지 마,

그래도 안 되어요.

죽어도 예수를 말해요.

예수 정신으로 살게 된단 말입니다.

이걸 금지 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해요.

 

예수님이 부르시고 선택한 자기 제자들은 가만있어도 성령이 오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면 그 때부터는 아무 노력 안 해도 술술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사람은 그냥 믿음으로 사는 거에요.

믿음을 받으니까 고맙고 감사하고 그런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사람 아닌 것처럼 사는 겁니다.

 

여러분,

이 육신 자체는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눈만 뜨면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 부터 빼내심을 입은 자들은 그것과 상관없이 살아요.

그것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가치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내가 뭔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아들답게 훈육을 시켜 가시지요.

 

부모가 아이를 키울 때 보면 부모는 그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겠다는 그런 게 있잖아요.

그러면 그 때부터 아이를 다스려 가잖아요.

부모가 가진 틀로 다스려 가겠지요.

이게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을 은혜 안으로 옮겨 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본래 율법아래서 났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율법의 습성이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와서도 율법으로 살려고 그래요.

그럼 성령이 율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어,

그래요.

그럼 우린 화들짝 놀라서 그렇지 난 법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은혜로 사는 자이지 라고 해요.

 

예를 들어서 고아원에 있는 아이를 우리 집에 입양을 시켰다고 생각해 보세요.

고아원에서는 밥 먹을 때 마다 반찬을 먼저 자기 그릇에 당겨서 먹곤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못 먹으니까요.

그럼 부모는 그러지 말라고 하잖아요.

이 습성이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아요.

평생 갈 수가 있어요.

부모가 아이가 그런다고 해서 쫓아내지 않아요.

꾸중은 하지요.

 

예전에 수련회 가서 이런 광경을 봤습니다.

한 테이블에 6명이 앉아서 식사를 했어요.

반찬이 공동으로 나왔어요.

그런데 어떤 분이 좋은 반찬을 전부 자기 밥그릇으로 챙겨 가는 것입니다.

맛난 것은 먼저 다 챙겨 먹는 거에요.

자신의 밥과 국은 맨 나중에 먹어요.

이걸 고아 기질이라고 하잖아요.

 

고아로 자라다가 입양 된 아이들이 그러잖아요.

입양된 집에서 그 아버지가 이제 이 반찬 전부 니 꺼니까 니 앞에 옮겨 놓지 않아도 돼 라고 해도 아이는 그 습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자꾸 자기 앞으로 끌어 모읍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하지 말라고 그러겠지요.

 

우리 신앙이 그래요.

우리도 은혜 아래로 왔어도 이 율법적 기질이 사라지지 않아요.

율법이 편한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성령께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마라

그렇게 하지 마라

그러다 보면 나중엔 맞아 이게 아니지…하고 알게 됩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임을 했다고 합니다.

접붙임이 되면 그 때부터는 참 감람나무의 뿌리에서 그 진액을 돌 감람나무로 자꾸 밀어 넣어 줍니다.

그러다 보면 몇 년 후에 접붙임 된 나무에서 참 감람나무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듯이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 있던 우리를 은혜 아래로 옮겨놨으면 이때부터는 은혜로 사는 것이 비록 낯설지만 우리가 안 되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예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식으로 사용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안하던 짓을 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하더란 말이지요.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이 거 안하면 저주받고 내게 뭔가 해가 올 것 같아서 억지로 했는데,

은혜 아래로 와보니까 그런 것이 아니고 그냥 감사가 되어서 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안의 그리스도가 한 것이니까 행해질 때 마다 그리스도만 드러나고 그것이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로 산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한 것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게 결론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 받도록 하기 위해서 내 몸을 그렇게 사용하시겠지요.

 

지금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로 아브라함을 찾아갔다면 이 때부터 이 아브라함 속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 속에 심어 놓은 하나님의 의지를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옛 아브람의 습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찍어내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럴 때 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죽고 아브라함으로 살게 하세요.

 

이걸 사도 바울은 날마다 우리는 도살할 양처럼 죽임당할 모습으로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은혜를 받게 되면 옛날 같으면 싸워서 이기는 쪽으로 갔는데 이제는 지는 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잘나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게 하십니다.

은혜가 임하고 나면 그 은혜가 나를 재물로 삼는 것입니다.

자꾸 나를 낮추게 하고 섬기게 하고,

이건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의 주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폼으로 우리 속에 와 있지 않아요.

우리 안에서 낮잠 주무시고 계시지 않아요.

우리 몸을 가지고 당신의 삶을 그려나가세요.

그럴 때 마다 우리 인생은 차압당하고 예수의 인생으로 살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것은 우리 몸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 몸을 가지고 당신의 그림을 그려내시는 겁니다.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마다 우리 몸뚱이에서는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은혜가 터져 나오고 예수님의 성품들이 터져 나오고 하는 겁니다.

 

언제까지요?

엿새가 차기까지 하십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아들의 영을 우리 가운데 보내 주신 것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은 이제부터는 종이 아니고 아들인 것입니다.

그 아들로 사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살게 하십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린 모두 본토 친척 아비 집으로부터 떠나 온 사람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두 가지 의미로 살펴봅니다.

먼저는 역사 세계 자체가 허상이기 때문에 허상에서 빼내는 것이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빼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적인 의미로 봤을 때는 율법 안에서 은혜 안으로 빼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빼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구원을 말할 때는 율법에서 은혜로 빼내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그 의미 속에는 두 가지 의미를 다 담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왔어요.

떠나온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막대기 들고 간섭하십니다.

그 간섭함이 싫어요.

아프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데모를 합니다.

왜 인생이 이렇게 꼬이냐고 투덜거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돌아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너를 애굽에서 끄집어 낼 때 금쪽같은 내 아들의 피를 바르고 끄집어냈는데 난 죽어도 못 보낸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고집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유지되고 지켜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차피 지나가는 정거장과 같은 것이니까,

너무 세상 것 때문에 목메지 말고 하루 하루를 족한 줄로 알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사세요.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천국에 가 계실 겁니다.

거기서 우리 다 만나지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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