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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18강. 바벨탑 (창 11:1-9)

by coroa 2020. 12. 10.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8강. 바벨탑 (창 11:1-9).-

-.정낙원 목사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만드시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 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들에게 위임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만물을 채우셨듯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을 통해서

그 천지 만물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해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만들었습니다.

이걸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후의 인류는 하는 것마다 하나님께 거역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건 홍수 후에 살아난 인간들에게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혹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못할 일이 없으신데,

인간들이 죄를 안 짓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요.

 

특히 오늘 우리가 바벨탑 사건을 살펴 볼 텐데,

이 사건을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해서 바벨탑 안 짓게 하면 되잖아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게 하실 수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바벨탑을 다 지어놓으니까 허물어버리십니다.

아니 허물어 버릴걸 짓기 전에 말리면 되잖아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 지을 때까지 침묵하다가 다 짓고 나니까 네 이놈들 한단 말입니다.

 

또 신약으로 와서는 마찬가지에요.

예수를 안 죽이게 하면 되잖아요.

죽이게 해 놓고선 나중에 성령을 보내서 너희들 왜? 예수 죽였어 그런단 말입니다.

꼭 뒷북을 치는 것처럼 일을 하세요.

 

물론 그렇게 안 하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다 있는 것입니다.

 

이는 창세전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죄에 빠졌다가 살려주는 은혜 언약이에요.

이걸 천지 만물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천지와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자 창조한 천지와 만물도 히브리서 1장 1-12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 하실 때 철거하기 위해서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는 또 묻습니다.

아니 철거할 것을 왜 만드셨나요? 라고,,,

 

그럼 하나님이 필요해서 라고 합니다.

역사 자체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목적을 다 이루시면 이 세상은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허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허상은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습니다.

이 역사 자체가 그림자에요.

그림자는 실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림자와 실상은 서로 드러내는 짝이에요.

하늘이라는 실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반대인 땅이라는 허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은 모두가 허상이에요.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흙 아래서 태어난 것은 모두 죽어 반납 될 몸입니다.

반납 될 몸을 왜 주셨을까요?

이는 온전한 몸을 알려주기 위해서 온전과 반대되는 몸을 주신 것입니다.

마치 빛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빛의 반대인 어둠을 보여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펼치시는 하나님의 뜻은 창세전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창세전 언약은 죄 아래서 자기 백성을 은혜로 구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고 간섭을 한다 할지라도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쉬운 말로 구원 받았다고 해서 온전하게 살 수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사는 한은 구원을 받아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해요.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죄성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통해서 모든 민족을 다 쓸어버리시고 노아 가족만 구원을 해 내셨습니다.

노아의 가족은 눈으로 분명히 봤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봤습니다.

 

그러면 이제 정신 차리고 잘하자

다시는 죄 지으면 안 되겠구나!

하나님 앞에 덤비면 안 되겠구나!

이래야 하는데 인간들은 그렇지 않더란 말입니다.

지나고 나니까 또 그 짓을 하는 겁니다.

이게 바벨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죄가 바벨탑을 쌓게 한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일컬어 죄 아래 팔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역사 속에는 죄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줘도 인간들은 그 은혜를 감당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줘도 우리는 그 은혜를 하나님께 대적하는 모습으로 드러내더라는 것을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 역사를 우주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나’ 라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만물이에요.

우리가 역사에요.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리 은혜를 많이 입어도 그 은혜를 다 담아내지 못해요.

아무리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서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해도 안 되어요.

왜 그럴까요?

 

이 몸이 죄 아래서 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더라도

결국 이 몸뚱이가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내지 못하더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나쁜 사람들을 보고 욕하면 안 되어요,

하나님을 거역하는 그런 사람들을 타인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 사람들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여야 해요. 

그렇게 될 때 이 성경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이 성경 이야기가 구약의 이스라엘의 이야기로만 들려지면 안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성경 볼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면 안 되고,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해요.

 

초대 교회의 예수가 되면 안 되고, 내 예수가 되어야 해요.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나의 예수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가 현재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참 안타까와하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인 지식들은 나름 해박합니다.

잘 알아요.

그런데 신앙생활 하는 모습을 보면 영 아니에요.

아는 것하고 사는 것하고 하늘과 땅처럼 달라요.

저 사람이 신자 맞나 라고 할 정도로 괴리가 있어요.

 

성경적인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 달달 외운들 무슨 소용입니까?

주일학교부터 신앙생활 해 오신 분들은 잘 알 거에요.

어렸을 때 교회에서 성경 퀴즈대회나 암송대회 같은 거 하지요?

그럴 때 우리는 성경을 달달 외워서 상도 받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게 신앙입니까?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늘 착각을 합니다.

무언가를 아는 것으로 신앙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에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온전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아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를 안다는 그 앎이 앎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가 타자가 됩니다.

 

따로 국밥이 되어요.

예수 하고 나하도 따로 따로가 되어요.

예수님은 저만치 거기에 혼자 계세요.

 

앎이 내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와 함께 동행이 되어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만드신 것은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역사 자체를 나로 보라고 했지요?

내가 역사란 말입니다.

그럼 내 인생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드러나겠지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일을 하시듯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일들을 하세요.

이걸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에 투입이 됐듯이 예수님이 우리 속에 투입되어 오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듯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일들을 하신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할까요?

창세전 언약을 우리 속에서 구현을 시켜 내는 일을 하십니다.

창세전 언약은 은혜 언약이라고 했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 몸은 계속해서 죄성들이 터져 나와요.

우리 안에 숨은 죄들이 발각이 됩니다.

그럼 우리는 예수님의 피 공로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 예수님의 피로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현재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몰고 왔습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그 하나님 나라는 세세토록 어린 양을 찬미하는 나라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어린 양을 세세토록 찬미하는 일들을 발생시키십니다.

어떻게 발생시키는가 하면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그 죄를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게 만들어요.

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구나를 알게 된단 말입니다.

 

용서받고 산다는 것이 깨달아 질 때 내 안에서 그 은혜의 영광에 대한 찬미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마치 밤에 폭죽 터지듯이 우리 안에서 감사와 찬송으로 펑펑 터지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깨달아지면 나 같은 이런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이 놀랍고 놀랍다는 것이 깨달아지고 내 안에서 폭죽놀이가 일어납니다.

그 폭죽놀이가 감사로 나타나고 봉사로 나타나고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이런게 신앙생활이에요.

 

신앙은 화석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생명을 고정화 시킬 수 있습니까?

싸매 놓을 수가 있나요?

없어요.

자라는 아이를 보고 그 아이에게 어떤 틀을 만들어서 이렇게 자라라고 하면 그렇게 됩니까?

안 되어요.

 

생명을 날마다 자라는 거에요.

생명은 어떻게 가둘 수가 없어요.

계속해서 어떤 사건들을 만들어내요.

 

제발 신앙을 어떤 고정화 된 것으로 생각지 마세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 다양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를 감사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에 칼럼을 한 번 보세요.

제가 과거에 율법 아래 있을 때가 생각나서 이런 글을 쓴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실수한 것들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 땐 철이 덜 들어서 복음을 가지고 남을 죽이는 칼 놀이 했어요.

 

이번 주가 설 명절입니다.

내가 법 아래 있을 때는 명절 때 가족끼리 만나면 좀 화목하고 재밌게 지내면 되잖아요.

그런데 나는 복음을 안다는 것으로 혼자 잘난 척을 하면서 형제들에게는 복음도 모른다고 무시하고 상대도 하지 않곤 했었습니다.

 

복음을 알면서도 복음을 사랑으로 풀어내지 못하고 법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명절 때만 되면 그랬어요.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그 시간에 괜히 뻘쭘해져서 불편해지곤 했어요.

이게 뭡니까?

 

그런 것들이 지나고 보니까 내가 참 어리석은 짓을 했더란 말입니다.

복음을 타협하고 변개시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가졌더라면 넉넉함이 나와야 하지 않느냐 입니다.

 

이 글이 유익이 될 것 같아서 옮겨 놨습니다.

 

미국에 있는 모퉁잇돌 모임의 서영주 집사님이 쓴 글입니다.

참 좋아서 인용합니다.

 

내용이 뭔고 하니,,

목도리를 하나 샀는데 그 목도리는 진짜 진품입니다.

그런데 그 목도리에 붙어 있는 상표가 걸리적 거리는 겁니다.

그것을 잘라 내면 남들이 진품으로 알아봐 주지 않을 것 같고 놔두자니 모양을 망치는 것 같아서 고민하는 내용입니다.

 

이걸 잘라내야 하나요?

안 잘라내야 하나요?

남에게 보이고 과시하기 위해서라면 잘라내지 말아야지요.

그러나 내가 진품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잘라내도 괜찮아요.

결국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타인을 의식하는 거예요.

내가 예수를 믿고 예수님과 나와 관계가 온전하면 다른 사람이 날 뭘로 평가하든 신경 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내 신앙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분석해서 평가받으려고 합니다.

나 잘난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자랑하자면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어야 해요.

그러다 보면 넉넉함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제발 여러분들 이번 설 명절에는 가셔서 좀 넉넉해지세요.

복음 가지고 타박하거나 싸우지 마세요.

그 분들이 혹여 무슨 쓴 소리를 하고 이단이란 말을 해도 그냥 씩 웃어넘기세요.

그걸 되받아쳐 싸우고 얼굴 붉히는 일을 만들지 말고 넉넉하게 대하세요.

 

우리가 예수를 알고 예수 안에서 살면 관대함이 나옵니다.

관대함은 가진 자만이 내놓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진품을 가졌을 때 관대함이 나옵니다.

진품이 아닌 짝퉁을 가졌다면 까칠해지지요.

들통날까봐서요.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자기 신앙을 날마다 점검받아야 합니다.

과연 내 신앙이 성경에 비추어 그러한가?

베뢰아 교인같이 성경이 과연 그러한가 상고하는 것처럼 우리도 과연 내 신앙이 성경이 말하는 것과 같은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발 사람들이 만든 어떤 틀에 매이지 마세요.

틀에 매이면 결국에 내 신앙을 그 틀 속에 자꾸 끼워 넣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안에서 신앙생활을 점검하지 못하고 자꾸 타인을 의식하게 됩니다.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여러분, 제 눈치도 보지 마세요!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았어요!

제가 여러분에게 구원을 준 사람이 아닙니다.

 

저도 제 코가 석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하는가!

서로 상고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오늘 이 말씀을 전하면서 또 고발당하고 있어요.

과거에는 바벨탑 사건을 은혜롭게 설교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이 본문이 굉장히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왜 이럴까?

내 안에 바벨탑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과거에 제가 했던 설교의 경험을 가지고 또 그렇게 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게 사람이 환장할 노릇입니다.

과거에 잘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면 되겠지 했는데 통 영감이 안 오는 겁니다.

이게 안 열리니 큰일인 겁니다.

아주 좋은 경험을 또 한 것입니다.

 

예전에 아무리 설교를 유창하게 잘했다 하더라도 그건 흘러간 물이에요.

그건 그 때 은혜를 준 것이에요.

열 살 때 받은 은혜를 가지고 스무 살 때 써 먹으면 안 되어요.

스무 살에는 스무 살에 필요한 은혜가 있어요.

그런데 우린 옛날에 받은 은혜를 평생 울궈 먹고자 해요

옛날에, 옛날에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살아계신 분이세요.

이는 항상 은혜를 주신단 말입니다.

지금 은혜 주는 것이 있어요.

그것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엔 이렇게 얘기했는데 그 때는 그 수준으로 그렇게 본 것입니다.

우리 이영이가 6살인데 이 때는 6살 인생 밖에 못 보아요.

스무 살 떄 보는 인생하고 오십 세가 되어서 보는 인생은 각각 다 다릅니다.

똑같은 세상을 사는 것인데도 나이에 따라서 달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무궁무진 합니다.

은혜도 무궁무진해요.

마치 에스겔서 47장의 말씀처럼 발목에 물이 찼을 때는 발목에 물이 채인 것만큼 행동하게 되고, 무릎에 채이면 무릎만큼 행동하고, 허리에 채이면 허리만큼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각자의 신앙이라는 것을 생명의 자람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자람에 따라서 깨닫는 폭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란 간다는 이 말을 또 곡해하지 마세요.

성장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는 깊이를 말해요.

우리가 성화된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더 많이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많이 깨달으면 범사 속에서 그냥 감사가 나옵니다.

 

과거에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는 좋은 일 있을 때만 감사 헌금들을 했습니다.

시험에 합격해서 감사하고 하잖아요.

그런데 은혜 아래 거하게 되면 시험에 떨어져도 감사가 나옵니다.

병 걸려도 감사가 나오고 아픈 일 당해도 감사가 나옵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간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사무엘서 2장에 보세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죽이기도 하기고 살리기도 하세요.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케도 하십니다.

믿음으로 보면 잘 되어도 감사이고 못 되어도 감사인 겁니다.

 

그런데 우린 그렇지 않잖아요.

대기업에 입사하면 감사 헌금을 하고, 거기서 잘리면 교회도 안 나오잖아요.

결국 우리는 우리가 만든 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감사이고 저런 것은 감사 아니야 라고 해 놓았어요.

자기가 정한 기준에 못 미치면 감사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시는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그걸 깨닫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살게 하시는 것도 감사, 데려가시는 것도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에스겔 47장에 물이 창일해져 그 물 속에 잠겼을 때처럼 물의 힘으로 유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물의 힘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니까요.

물에 안 잠기면 내 힘으로 가게 되지요.

 

오늘 살펴보는 바벨탑 사건을 어떤 문자적인 풀이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바벨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바벨’이라는 말은 ‘신의 문’이라는 뜻입니다.

신에게 나가는 길이란 뜻입니다.

원래의 의미는 ‘신의 문’ 이라는 말로 신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지명으로 불러지면 바벨론이라고 하는데 이는 ‘혼잡케 하다’ 라는 뜻이 됩니다.

 

바벨탑이 어떤 모습입니까?

왜? 바벨탑을 쌓았는가요?

인간들이 힘으로 성을 쌓고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했잖아요?

결국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바벨탑 사상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어떨 때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옵니까?

자기의 ‘의’가 있을 때 나옵니다.

내가 뭔가 조금이라도 잘한 것이 있다고 생각될 때 그것을 의지해서 나오잖아요.

이것은 모든 인간들이 다 가지고 있어요.

이걸 자기 의라고 합니다.

 

보세요.

우리 안에는 옛 사람이 있고 새 사람이 있습니다.

옛 사람은 율법에 속했고 새 사람은 은혜에 속해 있습니다.

쉬운 얘기로 옛 사람은 구약의 사람이고 새 사람은 신약의 사람입니다.

 

옛 사람은 법으로 삽니다.

법으로 사는 건 항상 자기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사람의 습성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고 이런 습성이 사라진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 몸을 가지고 있는 한은 항상 내가 한 것에 대한 의미를 본능적으로 찾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 그게 아닌데요.…

뭐가 아니에요?

여러분이 한 일을 제가 부정해 보세요.

그럼 화를 내잖아요.

 

지금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온 것에 대해서 ‘목사님, 전 교회에 나온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데요! 라고 생각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면 여러분들은 화를 내요.

화가 난다는 것 자체가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몸뚱이가 있으면 그림자가 없어지지 않듯이

우리 몸은 항상 이 몸뚱이가 행하는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안하고 싶어도 마귀란 놈은 우리 안에 와서 계속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탑은 다른 누가 쌓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쌓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그 바벨탑을 허물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 안 허물면 그걸 타고 하늘까지 올라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물어 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해요!

 

우리 옛사람은 날마다 바벨탑을 쌓고 우리 속사람은 그 바벨탑을 허무는 일을 합니다.

그러면 내 안이 전쟁터가 되는 것입니다.

전쟁하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몸뚱이는 이 둘 사이에 껴서 곤곤한 것입니다.

아파요.

 

예수 잘 믿고 싶지요?

진짜 예수 잘 믿고 싶지요?

그 마음은 가지고 계세요.

그런데 그게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잘되면 여러분들은 예수를 안 찾습니다.

성화와 성화주의를 구별을 하세요.

 

이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성화는 성도의 삶에 지향성을 말하고,

성화주의는 자기 가치를 챙기는 것이에요.

무엇이든지 주의가 되면 그게 본질이 되어요.

본질이 되면 답이 되어요.

이렇게 되면 성화 안하면 신앙 없음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성화는 반대하지 않아요.

장려해요.

그러나 성화주의는 반대에요.

착하게 산 것을 의로운 것이라고 자랑하면 성화주의에요.

 

우리 인간들은 내가 온전해지면 그걸 의지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은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뜻이에요.

 

그래서 그 뜻은 항상 품고 있어야 해요.

하지만 내가 온전하고 거룩해 질 때는 예수그리스도를 제쳐 버리고 나의 온전하고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니까요.

그러면 결국 내가 온전하고 거룩한 것이 바벨탑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이 이해되세요?

우리는 온전하고자 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으되 온전해질 수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질문을 하시겠지요.

 

목사님,

온전한 것이 무엇입니까?

윤리 도덕적인 것입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온전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하신 분이니까 하나님의 속성으로 사는 것이 온전한 것인데,

우리가 그 하나님의 속성으로 살아내지 못합니다.

 

흔히 우리가 착각을 하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셨으면 온전하게 살아내면 안됩니까?

성령이 하나님의 능력인데 살아 내게 하잖아요? 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너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용서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사실들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몸뚱이로는 아무리 갈고 닦아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뚱이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 남아 있기를 원해요.

우리가 사는 바탕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라는 그 고백을 듣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쫓아가려는 마음은 있으되 그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늘 고발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에 상한 심령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 내가 내 의로 해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인간이 아니네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전 이 바벨탑 사건으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은혜를 받은 것이 그 부분입니다.

이 바벨탑을 쌓는 것은 결국에 노아의 후손들이라는 말입니다.

구음이 하나고 언어가 하나였다는 것은 한 족속들인데 결국 하는 짓이 자기들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벨’이 무슨 뜻이라고 했어요?

‘신의 문’이라고 했지요.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의 문’이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내쫓고 에덴동산의 문을 잠가놓았잖아요.

 

그러면 그 에덴동산의 문은 하나님이 열어줄 때 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 힘으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벨탑입니다.

 

지금 인간들이 힘을 모아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 허물고 흩어버리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가지고 우리를 고발하는 겁니다.

너희가 바벨탑을 쌓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 자신이 바벨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벨탑’이라고 하면 어떤 모습으로 접근을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접근하지 말고 우리 안에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는 속성들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 안에 죄가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게 어떤 의미를 부여해서 내가 부여한 의미가 충족되면

그것을 부여잡고 하나님 앞에 신앙이라고 내어 놓는다니까요.

나 이렇게 했잖아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각시키십니다.

그건 니 꺼지.

니 몸에서 발생 된 거지.

 

하나님의 의는 우리 몸에서 발생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몸에서 발생된 것만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하나님의 몸에서 발생된 ‘의’가 어디에 있어요?

 

예수님에게 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의를 들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죄가 우리 걸 들고 가라고 해요.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우리의 의는 항상 부딪히겠지요.

 

그러면 이 부딪힘 속에서 우리가 우리의 의를 포기합니까?

예수의 의를 밀어냅니까?

우리의 속성은 우리 걸 포기 못해요.

그래서 자기 걸 챙기고 예수님의 의를 밀어내는 것입니다.

이 때 성령이 그게 죄라고 고발을 해요.

그럼 우린 주여 죄인 맞습니다 라고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뭔가를 한 것과 내 열심으로 한 것 중 남는 것은 내 열심으로 한 것이 남습니다.

이건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이 지나도 안 없어집니다.

죽을 때까지 가요.

 

흔히들 사람들이 그렇잖아요.

내가 옛날에 학생 회장도 했고 여전도회 회장도 했다는 그런 얘기들을 하잖아요.

그 걸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못 잊는 겁니다.

 

지금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홍수에서 살아난 자들이라면 진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살아야 하는데

감사는 커녕 오히려 하나님 앞에 대적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대적하는 이 모습들이 결국엔 죄인들이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의 본질이고,,,

 

다니엘서에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하나님께서 신상을 보여주십니다.

머리는 금이요, 가슴은 은이요, 다리는 철이요, 하면서 금 신상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이 땅에 앞으로 일어날 제국들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지금 바벨론의 시날 평지에 세워진 신상인데

이 신상이 이 땅에 일어날 제국들을 상징한다면 결국 이 세상 자체가 바벨론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고가 바벨탑 사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17장에서 보면 바벨론의 실체가 타락한 교회로 드러납니다.

 

계 17:1-6절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 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창세기에 일어났던 바벨탑 사건을 나중에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서 보니까

그 바벨탑이 결국 교회로 들어와 있더라는 겁니다.

6절에 보니까 교회가 성도들의 피에 취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기이히 여기는 겁니다.

어떻게 교회가 성도의 피에 취해 있느냐 이 말이지요.

결국 교회가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타락을 구약에서는 바벨탑 쌓는 것으로 예표적으로 보여준 것이에요.

이것이 신약에서는 교회의 타락된 모습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타락이란? 인간의 가치를 긍정해 주는 것입니다.

이걸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종말의 교회들은 인간들의 가능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인본주의 사상으로 가득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음녀가 취한 음행의 포도주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노리는 것은 세상이 아닙니다.

마귀가 공격하는 곳은 교회이지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은 이미 마귀 수중에 떨어져 있습니다.

 

교회 안에 마귀가 침투해서 두 가지 말을 섞어 혼합주의를 일으킵니다.

이것이 창세기 2장 2절에 보면 에덴동산에서 뱀이 여자에게 접근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왜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미혹한 마귀를 뱀으로 말을 하는가 하면

표상학적으로 뱀의 특징이 두 혀를 가지고 두 가지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일을 해요.

 

창세기 11장에 바벨탑을 쌓는 곳이 시날 평지입니다.

이 ‘시날’ 평지는 두 물이 갈라지는 곳입니다.

‘시날’이라는 의미가 유브라데 강하고 티그리스 강이 갈라지는 곳을 시날 땅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누가 사는가 하면 니므롯이 살아요.

 

함의 후손인 니므롯을 영걸이라고 하지요?

영걸이란? 인간의 힘으로 사는 자라는 뜻이에요.

인간의 영웅주의가 모여서 두 가지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항상 뱀이 들어 와서 두 가지 말을 하게 합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섞어 버리는 것입니다.

인본과 신본이 섞이는 것을 음행의 포도주라고 합니다.

음행의 포도주가 말씀으로 나타나면 갈라디안식 신앙으로 나타나요.

예수 믿기에다가 율법지킴으로 온전해 진다는 것이에요.

바울은 이걸 다른 복음이라고 했어요.

 

음행의 포도주가 지향성과 가치성으로 나타나면 땅을 지향하게 만들어요.

음행의 포도주가 우리에게 다가 올 때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천국을 땅에서 누리라고 해요.

육신을 즐겁게 해 주어요.

 

예레미야 51장 12-13절을 봅시다.

 

렘 51:12-13절 “바벨론 성벽을 향하여 기를 세우고 튼튼히 지키며 파숫군을 세우며 복병을 베풀어 방비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거민에 대하여 말씀하신대로 경영하시고 행하심이로다 13 많은 물 가에 거하여 재물이 많은 자여 네 탐남의 한정 네 결국이 이르렀도다”

 

‘많은 물가에 거하며’

이 얘기를 요한계시록 17장에서 보면 음녀가 어디에 앉아 있다고 했나요?

많은 물 위에 앉았다고 합니다.

 

창세기에서 바벨탑을 쌓을 때 이들은 구음이 하나고 언어가 하나여서 흩어짐을 면하고 힘을 모아 하나님께 대적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죠?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서 온 세상 열국의 나라를 자기 치맛자락으로 끌어 안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나타날 때는 이 시대 교회가 세상의 사상과 하늘의 사상이 섞여서 모두를 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묵시 공동체와 언약 공동체인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은 하늘의 신령한 것을 줘야 하는데 하늘의 것을 주지 않고 자꾸 땅의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땅의 부귀영화를 꿈꾸어요.

흙에서 정착하고자 해요.

구원은 땅을 떠나는 것입니다.

땅에 가치를 버리는 것이에요.

 

그런데 지금 교회가 그 기복주의와 신비주의를 주고 있어요.

교회가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 이런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니므롯 사상입니다.

 

바벨탑을 왜 쌓습니까?

홍수로 진멸당한 모습을 보고 이제는 우리 힘을 모아 이 죽음을 이겨내자는 것입니다.

이게 바벨 사상입니다.

 

다시 예레미야 51장 17절, 18절을 보세요.

 

렘 51:17-18절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만든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8 그것들은 헛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시는 때에 멸망할 것이나”

 

지금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이 뭐에요?

자기 육신입니다.

결국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자기 육신이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이 누구에요?

내가 우상입니다.

신의 힘을 이용해 내 탐욕을 채우는 것이 우상 숭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 중에서 제 2 계명을 보면 너희는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결국 우상은 내가 나를 위해서 신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신을 찾는 것은 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내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신을 찾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0장과 51장은 바벨론의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이 요한계시록에 오니까 교회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교회를 일컬어서 계시록에서는 음녀라고도 하고 바벨론이라고 하고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해요.

지금 이 시대 교회가 귀신의 처소가 된 것은 교회가 땅의 것을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영에 사로잡힌 거짓 선지자들이 성경이라는 하늘의 말을 땅의 것으로 풀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늘의 말씀을 땅의 것으로 풀 때 이것이 도적질이 됩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런 말을 하십니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않았는데 그들은 내 말을 도적질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이 땅의 평화를 꿈꾸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적용을 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데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풍족해지고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을 꿈을 꿉니다.

 

그런 꿈 안 꾸세요?

여러분들이 예수님 믿을 때 오늘도 저주 받아야 해,

이러고 믿으세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설교를 해도 오늘 설교하고 돌 맞아 죽자!

이런 맘으로 하지 않아요!

오늘 설교 잘해서 인기 좀 얻자 이런 마음이 가득해요.

 

저도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제가 블로그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많이 알려졌습니다.

지금은 제가 한계가 왔어요.

안하려고 합니다.

 

블로그를 닫으려고 합니다.

지금 요한복음이 끝났습니다.

어떤 분은 요한계시록도 해주시고 하면서 이런 저런 바램들이 들어옵니다.

 

은연 중에 내가 이 말씀을 가지고 블로그를 통해서 내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즐기고 있더란 말입니다.

이게 아니구나…

그래서 이젠 닫아야겠구나 생각을 하는 겁니다.

 

지금 계획은 그래요.

로마서 끝나면 닫으려고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한편으로 또 그런 분들도 계세요.

아이고, 목사님 많은 사람들이 이걸로 은혜 받고 있는데 닫으면 어떡해요.

그 말도 맞습니다.

 

그러면 전 이 두 가운데 쏠려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합니다.

마음을 그렇게 먹으면 됩니다.

내가 이것으로 영광을 찾거나 의미 안두면 되지…하고 생각하겠지만

 

의미를 안둘 수가 없어요.

내가 써 놓은 글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안둘 수 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이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 가서 댓글 하나만 달아도 반응을 살피지 않나요?

내가 댓글이라도 하나 달면 거기에 대한 다른 사람의 반응을 살피는 게 인간입니다.

 

솔직히 저도 글을 써놓고 댓글이 없으면 서운해집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글을 쓸 때는 그런 생각 않고 씁니다.

 

하나님 주신 은혜로 쓰는데 꼭 쓰고 나면 반응을 보게 된다니까요.

댓글이 달리면 고맙고 안 달리면 섭섭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느낍니다.

 

성령의 감동을 주셔서 저로 하여금 쓰게 해놓고 그것으로 내 영광 챙길 것 같으니까

내 죄를 고발하시는 겁니다.

그건 니 꺼 아닌데 왜 네가 영광을 챙기려 하느냐 라고 발각을 시킵니다.

그렇게 발각당할 때 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 기쁘고 고맙고 감사하지 않아요.

싫다니까요.

여러분 신앙생활을 싸이코가 아닙니다.

 

매 맞으면 아픕니다.

매 맞으면서도 아, 좋다 하면 그건 정신병자이지요.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생활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격하면 싫다니까요.

 

날 부정하는 하나님이 싫다니까요.

이처럼 우리 안에는 바벨탑 쌓는 죄성이 항상 꿈틀 거려요.

그래서 예레미야서에서는 이 몸뚱이가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우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우상을 깨트리지 않고 길이길이 보전하고 싶어 합니다.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한은 이 탐욕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탐욕을 챙깁니다.

우리는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한은 혈류병 여자처럼 죄를 흘리고 다닐 수밖에 없어요.

 

죄를 줄줄 쏟고 다닙니다.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내가 정말 이런 악당이구나…

이런 악당이라는 것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예레미야 50장으로 가보세요

 

24절 “바벨론아 내가 너를 잡으려고 올무를 놓았더니 네가 깨닫지 못하고 걸렸고 네가 나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만난바 되어 잡혔도다”

 

이 말씀이 참 재밌는데 보세요.

우리 몸뚱이는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펼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했지요?

창세전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내가 용서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를 받으려면 내 속에서는 항상 죄가 드러나야 합니다.

그 죄는 반드시 우리 몸뚱이 챙기는 것으로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24절 얘기가 쉬운 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잡으려고 미끼를 던져 놓은 것입니다.

 

그 미끼를 우리가 덥석 물어 버렸습니다.

그 미끼는 이 육신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인간도 자기 몸뚱이를 이기는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 몸을 못 이깁니다.

타고난 본성이 눈만 뜨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입니다.

내 입신양명을 꿈꿉니다.

그것도 예수의 이름까지 이용하면서 말이에요.

이게 우상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의 구조를 그런 몸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그것을 덥석 물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죄로 규정을 시켜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죄는 우리 몸의 사욕을 주겠다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몸이 없으면 죄도 없습니다.

죄라는 놈은 마치 암처럼 우리 몸에서 기생하고 있어요.

내 몸이 죽으면 암도 죽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몸뚱이가 있는 한은 죄는 계속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쫓아갈 수밖에 없는 몸을 준 것은

이 몸뚱이로는 육체의 사욕을 좇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올무를 놓은 것입니다.

 

너는 절대로 네 몸을 이길 수 없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내 몸을 가지고 있는 한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해야 되겠지요.

내가 죄인인 줄 알고 주여!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 은혜, 그 긍휼을 내게 허락해 주소서.

 

이럴 때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인의 밥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 하나라도 주워 먹는 심정으로 주님 앞에 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창세전 언약인 은혜가 우리 몸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다른 게 아닙니다.

이 산을 들어서 저 쪽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에서 어떻게 가르칩니까?

영웅주의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힘을 이용해서 세계를 정복하자는 것입니다.

 

나가자! 나가자! 입니다.

아니에요.

그게 ‘니므롯’ 사상입니다.

 

그럼 또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그럼 전도하는 게 나쁩니까?

아니에요.

 

전도하는 것을 나쁘다는 게 아니라

인간은 전도를 하든, 순교를 하든,

뭐를 하든 거기에 대한 의미를 챙기고자 한다는 게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제가 나무라는 것입니다.

이걸 가지고 또 악용해서 그럴 줄 알고 난 전도 안 해.

전도하면 그 의미를 챙길까봐 안하지! 하면 그건 더 악당입니다.

 

인간이 어떤 종자인가 하면 하라고 하면 안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해요.

그래서 노아 홍수가 지나서 제일 먼저 인간들에게 나타난 모습이 바벨탑 쌓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홍수에서 살아난 노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했습니다.

충만 하라는 것은 흩어지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가라 가라 흩어져라 하고 가야하는데,

가지 않고 모여서 그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자기 힘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본주의입니다.

 

인본주의를 철학적인 의미로 고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내가 나를 믿고 사는 것이 인본주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는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한은 인본주의를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우리 스스로 허물지 못하는 그것을 허물어 버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바벨탑 사건을 저주라 생각하지 말고 감사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성경이야기는 수신자가 자기 백성입니다.

그러면 자기 백성에게 주신 모든 것은 복인 것입니다.

 

이 안에 있는 이야기 모두가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 속에 나와 있는 모든 이야기는 수신자인 교회,

우리에게 준 것이니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 내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을 보면서도 남의 이야기로 보지 말고 내가 바벨탑을 쌓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율법 아래에 있다가 은혜 안으로 건져졌지만 여전히 또 율법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구나 를 깨달으셔야 합니다.

 

바벨탑의 구호가 뭔가요?

 

우리 이름을 내고,

하늘에 닿고,

흩어짐을 면하자, 이 세 가지입니다.

 

쌓는 목적이 이 세 가지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 이야기입니다.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이것이 발동을 한다니까요.

 

여러분, 마귀가 잠자고 있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 뱀이 있었듯이 우리 안에 마귀가 있다니까요.

이 마귀가 날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교묘하게 말을 바꿔치기 하면서

내 사욕을 쫓는 식으로 변개를 시킵니다.

그게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런 것이 발각 당하게 만들고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우리 스스로가 그 바벨탑을 허물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허무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 허묾 당하는 일들이 때로는 여러 가지 사건으로,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몸뚱이가 건강하고 평안하게 잘 살 때는 하나님 안 찾다가 몸 아프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은 내가 그동안 의지하며 가지고 있던 건강이나 물질이 바벨탑 역할을 한 것입니다.

 

건강 믿고 하나님 떠나 살면 건강이 바벨탑이고,

물질 믿고 예수 떠나 살면 물질이 바벨탑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에 방해 되는 그것들을 허물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거두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빼앗기고 나면 그 때 바로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여 하고 다시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복이에요.

 

하나님은 어떤 일들을 통해서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만드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이 예상치 못한 어떤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안에서 허무는 작업을 하시는구나 생각하세요.

그 허무는 것은 결국 그것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생각하시고,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아프고 힘든 일이 닥칠지라도 낙망하지 마시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더 깊이 나아가는 단초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속에서 감사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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