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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 20강. 아브라함의 복 (창 12:1-5)

by coroa 2021. 1. 5.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0강. 아브라함의 복 (창 12:1-5).-

-.정낙원 목사

 

 

 

오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 속에 담겨진 복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신 하나님 뜻을 살펴봤습니다.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요?

이는 구원이란? 기존으로부터 떠남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옮겨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토 친척 아비집이라는 것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그 아브라함을 끄집어내시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다른 세계로 인도하신 것으로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속에 담아 놓은 복들이 또 있습니다.

하늘의 복입니다.

믿음의 복입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서 예표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를 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약속하셨던 것을 이 역사를 통해서 풀어 가시는데 그 창세전에 한 몸을 준비를 하셨습니다.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바로 믿음의 조상입니다.

조상이란? 후손을 낳는 분이란 뜻입니다.

이는 곧 창조주를 지칭합니다.

이 땅에 창조주가 조상으로 오신 분이 누구신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만물이 나왔고,

그 만물이 예수로 인하여 존재하다가, 다시 예수 안으로 돌아갑니다. 

이걸 구원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예수 안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는 창조에 대한 개괄적인 것으로 말씀하시고, 12장부터는 그 창조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구원으로 나타나는지를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언약을 통하여 나타나는 구원은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실 일들을 모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을 일컬어 복의 근원이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아닙니다.

예표의 사람이에요.

 

근원이란? 뿌리란 말인데 이는 조상이라는 말이에요.

구약에서 복에 민족이 누구인가요?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의 조상이 누구인가요?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구약 이스라엘은 장차 온 세상에 나타날 영적 이스라엘을 예표하고 있어요.

이를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해요.

영적 이스라엘의 조상은 예수그리스도에요.

예수그리스도가 복에 조상이에요.

 

아브라함도 예수를 믿어서 복을 받았어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아브라함도 내 때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이나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진짜 복의 조상인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다 똑 같아요.

 

그러니 나중에 천국에 가서 아브라함을 조상님 그러면 안 되어요.

그냥 반갑다 친구야!

그래야 해요.

아담도 모세도 다윗도 엘리야도 다 친구에요.

그 친구들은 일찍 출연했고 우리는 늦게 출연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일은 마치 400M 계주하는 것과 같아요.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같은 구약의 친구들은 1번 주자 2번 주자들이고, 신약의 베드로나 바울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3번 주자들이고,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마지막 4번 주자들이에요.

지금 이 시대는 드라마의 종점을 행하고 있어요.

 

이제 곧 끝이 납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창세전 언약이라는 대하드라마는 끝이 나요.

그럼 그동안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쫑 파티를 할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천국에서의 어린 양의 혼인잔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복에 조상으로 부르신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대하드라마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는 오프닝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지목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 남자가 있어요.

겉으로 나타난 것은 아브라함인데 그 아브라함 속에 숨겨진 한 남자가 있어요.

아브라함에게는 이 남자가 바로 이삭으로 나타났어요.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지 않았어요.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아진 사람입니다.

이는 장차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이삭처럼 성령으로 낳아질 한 분이 오신 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누구신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잘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뭐라 그러는가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고 하지요.

 

아브라함이 나오고, 그 다음에 다윗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이게 무엇과 같은고 하니,

마술을 할 때 보면 마술하는 사람이 상자를 하나 가져 나오는데,

그 상자를 열면 작은 상자가 나오고,

그 작은 상자를 열면 더 작은 상자가 나오고 합니다.

 

마술 상자가 여는데 나오고 여는 데 또 나오고

그러다가 맨 마지막에 가면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물건이 나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탁 깨니까 그 속에서 이삭이 나오고 이삭을 깨니 야곱이 나오고 야곱을 깨니 요셉이 나오고 요셉을 깨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여러 선지자들로 얘기했는데 마지막에는 아들로 얘기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아브라함 속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맥을 쫓아가니까 맨 끝에 예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탁 깨니까 성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의 계시사적인 인물인데,

누구를 계시하고 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으면서 또 우리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 단편적인 계시로 보면 안 되고 이중 삼중 계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일차적으론 예수그리스도에게 적용을 하시되 거기서 끝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가 지금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구분을 시키는데 첫째 날 부터 셋째 날까지는 하나의 공간을 창조하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에는 그 안에 내용을 채우십니다.

이걸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떻게 표현을 했는가 하면 불러내시고 불러낸 것에 장식을 한다고 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치 집을 사서 그 안에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것을 장식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듯이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하나 선택해 놓고 그 때부터 아브라함을 코디하기 시작하십니다.

왜인가 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요셉이가 한복을 입고 왔습니다.

저것을 누가 입혀주었습니까?

부모가 입혀주었잖아요.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쉬워요.

자기 노력 없이 태어났지만 이제부터는 살아가는 것은 힘이 들어요.

저 녀석이 커 가면서 이제 자기 부모와 엄청난 싸움을 할 거에요.

부모로부터 계속해서 간섭을 받아야 할 테니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왜 고난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면 선택해놓고 네 맘대로 하라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간섭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지만,

그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도 하나님이 다 하세요.

우린 하나님의 손에 철저히 간섭 당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우리에게는 고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십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계획한 뜻들을 우리 속에 그려 나가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더러 거룩을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거룩의 자리로 끌고 간다는 말입니다.

 

이걸 예전에 나무와 조각가 비유로 말했습니다.

조각가가 지나가다가 불구덩이 속에서 타고 있던 나무를 하나 끄집어냈습니다.

불타는 지옥에서 나무를 끄집어내면 그 당시로는 나무 입장에서는 좋아했겠지요.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조각가가 그 나무를 도끼로 찍고 톱으로 켜고 대패로 밀고 끌로 파내면서 칼로 다듬어 가는 것입니다.

이건 불에 타는 것보다 도 더 엄청난 고통이에요.

이걸 고난이라고 해요.

 

나무는 싫어요.

그래서 맨 날 왜 나를 끄집어내서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조각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작품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리곤 전시를 합니다.

야~! 멋지다.

이걸 그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다뤄 가십니다.

예수님 손에 붙잡히면 그 분은 최고의 조각가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다뤄 가십니다.

그 때 마다 우리는 잘려져 나가고 빼앗기고 그러는 것입니다.

 

지금 보세요.

아브라함을 간섭하니까 제일 먼저 아비 집인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서 빼냄을 입습니다.

그 갈대아 우르가 뭡니까?

강도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갈대아 우르라는 말은 ‘약탈자 들이 사는 동네’ 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강도가 사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끄집어내신단 말입니다.

 

이게 언약적으로 오면 구약 교회가 되어요.

예수님이 와서 보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강도들이 우굴거리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동네가 강도의 소굴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타락한 구약 교회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이들이 대표적으로 나타난 것이 12 제자들이에요.

 

율법이 뭔가요?

하라, 하지 말라, 는 것이잖아요.

해, 안하면 죽어,

그래서 전부 종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끄집어내시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해요.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제일 먼저 떠남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가셔서 기존의 있는 곳으로부터 ‘나와라’ 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근거를 없애는 것입니다.

 

근본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떠난 온 아브라함에게 이름을 바꿔 주십니다.

이름을 바꿔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새로운 아버지가 되어서 이제부터 너를 간섭해 나갈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가 바라는 모습의 사람으로 다듬어 가실 것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다루어 가는가 하면 은혜를 보여주는 사람으로 다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실수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에요.

 

아까 제가 그랬잖아요.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셨을 때 강도의 굴혈로부터 우리를 구해냈다고 했잖아요.

그 강도의 굴혈은 율법이라 그랬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은혜의 동네로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은혜를 공급합니다.

그런데 은혜가 드러나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자꾸 율법을 가지고 고발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율법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죄가 고발당하고는 예수를 바라보게 되어요.

야~ 내가 말씀대로 하면 죽어야 하는데 예수 때문에 살고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사람은 아브라함을 본받자고 하는데 그건 성경을 잘못 보고 있는 거에요.

아브라함은 본받을 인물이 안 되어요.

아브라함이나 우리나 다 똑 같아요.

불순종의 자식들이에요.

그럼에도 은혜로 살고 있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계속해서 은혜를 공급합니다.

아브라함이 실수를 하고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계속해서 하나님은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법으로 사는 쪽에서 볼 때는 잘못하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잘못해도 벌을 받는 게 아니더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은혜와 용서를 부어주십니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이 쪽과 저 쪽은 차별성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는 것입니다.

 

복이 뭐냐?

돈 많이 벌고 그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는 것이 복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도 여러분 얼굴은 하나도 기쁘지 않아 보이네요.

죄인이 용서받는 게 복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복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는다, 그러지요?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예표한다.

그랬지요?

 

그러면 예수님 자체가 복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복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어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에 복은 내가 예수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복입니다.

구원이 복이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왜요?

우리 머릿속에는 세상에 관한 복들이 가득 채워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세상 것을 복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것을 복이라 하신 적이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땅의 복을 줬는데 그 구약의 땅은 상징적으로 천국을 말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가도 그 곳의 땅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저 위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브라함을 가지고 저와 여러분에게 시청각교재로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간섭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이렇게 간섭당하고 있구나, 를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세요.

 

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어디로 가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땅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리로 옮겨 심은 것입니다.

 

쉬운 말로 이쪽에 모판을 준비해 놓고,

저쪽 모판에 있던 사람을 끄집어내서,

이쪽으로 옮겨 심는 겁니다.

 

저 쪽 모판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온 곳인데,

거기서 뽑혔다는 것은 거기로부터 죽음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쪽 모판은 새로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구원은 종말을 전제로 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존에 있던 곳으로부터 떠나오는 것이 종말입니다.

지금 본토 친철 아비 집으로부터 떠나는 것도 아브람에겐 종말이 되는 것이지요.

 

종말은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거기서 떠나면 끝입니다.

 

과거에 베트남이 패망할 때 그 베트남에 한국 사람이 가서 돈을 벌어 땅을 사고 재산을 모아놨는데 베트남이 멸망하면 그 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몸 하나 빠져나오면 그만입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이 땅을 근거로 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 땅의 것이 있다고 자랑 할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해서 불평할 일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여기 것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야 하기 때문이에요.

 

허상을 자꾸 실상인양 목을 매지 마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힘들어요.

우린 그것을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본토 친척이 어디입니까?

이 땅이에요.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 코 박고 살잖아요.

 

흙에서 나서 흙의 기운으로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너희는 흙의 기운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말씀의 기운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늘에서 주는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으로 살아야 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하늘에 기운을 공급해 주세요.

그럼 그 하늘의 생명을 공급받는 사람들은 관심사가 하늘에 것으로 채워져요.

 

골 3:2절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

 

엡 4:22절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위에 걸 생각하라고 하는 겁니다.

하늘에 사람이니까 하늘에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땅에 것 생각하면 땅 사람이고 하늘 것 생각하면 하늘에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빼내서 갈대아 우르의 때 국물을 빼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입고 있던 옷은 몽땅 벗겨 버리고 새로운 옷을 입혀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입혀주고 싶은 옷은 은혜의 옷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죄성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실수투성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잖아요.

이렇게 실수를 하고 잘못된 사람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더란 말이지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비록 못나고 하나님 뜻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바보 같다 할지라도 결국 나를 나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서 내가 너를 복 주고 복 주리라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복의 자리로 인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아비 집에서 빼내시면서 이 땅 말고 새로운 땅 줄께 라고 하십니다.

그 새로운 땅은 니가 계획하고 니 생각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넌 그냥 따라 오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앞에 말씀이 나타나서 말씀이 아브라함을 끌고 가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세요.

 

4절 “이에 아브람이 말씀을 좇아갔고…”

 

이건 아브람이 말씀을 따라 갔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 반대에요.

말씀이 아브람을 끌고 갔다는 뜻이에요.

쉬운 말로 말씀이 앞에서 인도를 하니까 아브람은 그 뒤를 졸졸 따라간 거에요.

 

이번에 강원도에 눈 폭탄이 내렸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실제 그런 눈이 내려서 터널을 뚫고 이웃 집으로 간 기억이 있어요.

우리 집하고 옆 집이 가까운데도 눈 때문에 갈 수가 없어요.

그러자 어른들이 길을 하나 냅니다.

 

그러면 아이는 그 길 따라 가면 되는 겁니다.

그 길을 아이가 냅니까?

어른이 내지요.

 

하나님께서 먼저 길을 내 주십니다.

먼저 따라가는 사람은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앞에서 길을 내 주시겠지’ 하고 따라 가면 됩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그렇게 아브라함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그러십니다.

아브람아! 네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은 네 진짜 애비가 누구인지 가르쳐 주겠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의 네 아비는 가짜라는 것입니다.

너의 진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불러 놓고서는 네가 머물 땅은 이 세상에 없고 저 하늘에 있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보고서는 이 땅에서 장막 셍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제가 그런 얘기를 했잖아요. (그림 설명)

위에 하나님 나라가 있고 그 하나님 나라가 실상입니다.

위에 있는 실상에서, 아래에 있는 역사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역사 자체는 전부 허상인 것입니다.

 

역사에 속한 것은 무조건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철거가 되어야 합니다.

나도 철거가 되어야 하고 역사 속에 오신 예수도 죽어야 합니다.

역사 속에 육신으로 오신 예수가 안 죽으면 묵시 속의 영으로 오시는 예수가 올 수가 없어요.

 

역사 속에 오신 예수는 씨처럼 죽어야 해요.

그럼 묵시 속에 영으로 살아나셔서 우리 가운데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난 것은 다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난 우리도 죽어야 해요.

우리도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이 역사 자체가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실상은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이 몸뚱이 자체가 땅에서 난 것이기 때문에 이 몸은 땅에 반납을 하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다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도 이 역사 속에 있기 때문에 허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허상 속에서 실상으로 빼내십니다.

갈대아 우르가 허상이고 실상이 가나안이에요.

근데 가나안에 들어오고 보니까 가나안도 실상이 아니고 허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실상이 어디에 있나요?

하늘에 있지요.

그 실상이 있는 곳으로 앞에서 인도하는 분이 누구인가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쫓아가면 실상이 나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가나안 땅 주지 않고 말씀이신 분이 저 위를 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부터 16절까지 봅시다.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보세요.

지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흙에서 났기 때문에 흙의 개념으로 복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의 것으로 주는 것은 복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쉬운 얘기로 이 땅은 전부 저주받은 곳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살아 갈 근본 된 토지인 땅을 저주해 버리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전부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것 가졌다고 복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늘에서 봤을 때 이 지구 자체가 저주 덩어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한국에서 미국으로 빼내는 것이 복입니까?

아니지요.

땅에서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미국 시민권 받으면 복이라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위에서 볼 땐 한국 시민권이나 미국 시민권이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빼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땅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나안에 오자 하나님께서는 여기나 저기나 똑같이 저주받은 곳이라고 하면서 네가 받을 땅은 저 위에 있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저 위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그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전부 나그네처럼 하늘에 있는 한 성을 바라 보고 살았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요.

 

땅에 속해서 땅의 가치로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하늘을 바라 보고 사는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겠지요.

땅의 가치로 사는 사람들이 봤을 때는 맨 날 천국이야기나 하고 구원이야기만 하면 정신 나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흔히 예배당에 가면 떡이 나오느냐 밥이 나오느냐 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천국이 있다고 하면서 사람이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하면 드디어 미쳤구나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말이 예수도 적당히 믿으라고 합니다.

 

여러분 적당히 예수 믿으면 안 됩니다.

올인해야 해요.

세상도 즐기고 천국도 즐기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경계인을 허락하지 않아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니까요.

 

아브라함이 이 갈대아 우르에서 뽑혀 나왔을 때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겠습니까?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마세요.

구원이라는 것은 기존의 내가 있던 곳의 근본을 끊어 버리고 새로운 근본으로 옮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파요.

그것도 많이 아파요.

엄청,,

 

구원이란? 데라 라는 아비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이라는 아비로 호적이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 땅에서는 결혼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보여주고 있어요.

여자들이 결혼을 하면 남자한테 시집을 간다고 하지요?

구원이란? 여자들이 남자에게 시집을 가면 친정의 호적에서는 파내지고 시댁으로 옮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 문화가 뿌리로 내린 미국 같은 곳에서는 여성의 성은 사라져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라 갑니다.

이게 맞아요.

그 때부터는 친정의 사람이 아니고 시댁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해요.

 

여자는 시집을 가서 자식을 놓고 살면 시댁이 내 것이 됩니다.

아무리 친정이 좋고 그래도 며칠만 지나면 불편합니다.

내 집이 편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브라함을 그렇게 간섭을 해서 옮겨 놨습니다.

우리가 원래 근본은 이 땅에서 마귀 아래서 태어나 우리의 아비는 마귀였는데 하나님께서 마귀라는 애비 아래 있는 우리를 끄집어내서 하나님이라는 아비한테 접붙임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 때 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다가 아버지의 것으로 채우는 일을 하십니다.

이런 일들을 하다 보면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은 다 빼앗김을 당합니다.

계속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신앙생활에서는 반드시 버려야 할 것과 취할 것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몸의 구조로서도 보여주십니다.

우리의 세포는 늘 만들어 지고 죽고 하지요?

그렇다면 지금 나는 내가 아닌 것입니다.

또 다른 나로 자꾸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구워하시면 그 때부터 옛사람의 것들은 뽑아내시고 새 사람의 것으로 자꾸 채우는 일들을 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몸은 날마다 죽어져 나가는 아픔들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하나요?

엿새가 차기까지 입니다.

즉 이 몸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오늘 본문 2절에 봅시다.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이게 어려운데,,

잘 보세요.

“내” 와 “네” 를 잘 구분하세요.

 

“내가”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네가”는 아브람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고 하지요.

그래서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케 해 준다고 하시지요.

“네 이름”을 창대케 한다고 합니다.

 

누구 이름을 창대케 한다고 하나요?

아브람이지요.

근데 아브람을 누가 데리고 다닙니까?

하나님이 데리고 다니지요.

 

하나님이 아브람 속에서 일을 하는 거에요.

이러면 아브람의 이름이 창대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창대케 되겠지요.

겉으로는 아브람 이름이 창대케 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는 하나님 이름이 창대케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나요?

 

잘 보세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이름을 창대케 하고자 하심입니다.

이는 아브람 너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만방에 퍼져나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을 복에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복에 조상이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민족들에게 아브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복에 근원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아브람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주는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12장, 아브람을 부르기 전에 사건이 뭔가요?

11장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나요?

바벨탑 쌓는 사건이 있었지요.

바벨탑을 허물고 아브람을 부르는 사건이 나타나지요.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을 때 누구 이름을 내기 위해 쌓았습니까?

인간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땅 자체는 인간들 이름을 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하나님 이름을 내기 위해서 만든 곳인데 죄가 개입되면서 이 세상이 인간들 이름이 남도록 일을 합니다.

 

그러면 결국에 이 세상 자체는 인간들 나라가 되어 버립니다.

인간의 이름을 낸다는 것은 이 세상 자체를 인간 세상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든 것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럼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바벨탑 사상을 허물어져야하겠지요.

 

인간들은 인간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이 땅을 지배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름을 박살내는 것으로 다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름들을 아브람이라는 이름으로 공격하고 잠식해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신약에서 예수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모두가 우리 이름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어요.

그리고는 우리 안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 이름으로 오셨나요?

하나님 이름으로 오셨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브람처럼 우리 안에 오셔서 자기 이름을 내는데 이는 곧 하나님 이름을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님을 앞세워서 하나님 이름을 내는 일을 벌리신 것입니다.

지금 이해되세요?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가나안 전쟁이 기존의 가나안 원주민들이 있는데 이스라엘 민족들이 처음부터 집어 먹는 게 아니고 조금씩 조금씩 정복해 나갑니다.

 

정복할 때 마다 이스라엘 이름을 남기지요?

여러분들이 땅을 사면 그 땅을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하지요?

지금 세상이라는 기존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원래 이 역사를 만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만들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죄가 인간의 이름으로 푯말을 세워 놔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 땅에 심기를 원합니다.

 

그게 아브라함을 통해 하시는 겁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 세상을 정복하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땅을 차지했다는 그런 개념은 아닙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천하 만민에게 구원 얻을 이름은 예수라는 이름 외에는 준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는 이 말씀은 결국 신약식으로 하면 예수라는 이름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시온 산에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 전부 어린양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전부 자기 이름으로 살고 있던 자들에게 예수님이 가셔서 그들의 이마에 예수님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너 내 꺼!’ 라고 도장을 찍으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예수님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남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니까 결국은 하나님 이름이 남겨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이마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니까요.

예수님께서 너는 내 소유라는 의미로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 이마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하는 이 얘기는 이제부터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진짜 구원 얻는 민족들이 일어나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름 속에서 열국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름을 뭐라 그래요?

열국의 아비라 그러잖아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늘의 백성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쏟아져 나오는 거에요.

그걸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아브라함이 신약에 오면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라는 분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렇게 되면 예수그리스도가 열국의 아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열국의 아비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해되지요?

 

그래서 이사야서에 보면 예수님을 기묘자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그러는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의미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낳았기 때문에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마에는 전부 우리를 낳아주신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 땅에 흩어져 있는 자기 백성들을 전부 찾아와서 자기 이름 남기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은 이 세상에 예수라는 이름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왜요? 이 세상 자체가 예수를 위해서 창조된 것인데 죄가 예수라는 이름을 가려버리고 자기들 이름을 전부 새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이미 창세전에 새겨졌어요.

원래 새겨진 것을 찾아내는 일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이야기 할 때 원래 주인의 것이었는데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 15장에 보면 여자가 드라크마 하나를 잃어버렸지요?

누가 잃어버렸나요?

여자이지요.

여자가 잃어버렸기 때문에 여자가 찾는 거에요.

 

목자와 양 비유하지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누가 찾아 갑니까?

주인이 찾아가는 겁니다.

주인이 가서 잃어버린 그 한 마리 양을 찾으니까 주인이 기쁜 겁니다.

그래서 잔치를 벌리는 것입니다.

천국은 주인의 기쁨을 잔치하는 곳입니다.

 

이것을 창세기 2장 1절에 여호와의 안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안식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안식에 초대받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에 노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가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곧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전부 자기가 자기를 예배하고 자기가 영광 받는 삶을 살았어요.

이건 반칙이에요.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를 만들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만들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죄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영광을 위해 살게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오셔서 너는 너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이야 라고 안식일 날 나에게 나와서 영광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안식이라 하면 ‘쉰다’ 혹은 ‘노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데 그런 건 없습니다.

성경에 그런 노는 구원은 없습니다.

일하는 구원이에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하나님의 종 또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 집에서 일하는 자이지 노는 자가 아니에요.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니까 너무 너무 기뻐서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실감하시려면 여러분들이 자식을 한 번 잃어버렸다가 찾아 봐야합니다.

제가 우스개로 하는 말이지만 그럴 때 그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다시 찾은 기분을 안다니까요.

하다 못해 지갑이라도 잃어버렸다가 찾아보세요.

 

얼마나 기쁜지요.

구원이 이런 것이구나 를 알기 위해서 좀 잃어버리고 살아 보세요.

하나님이 얼마나 기뻤으면 잔치를 벌였겠어요?

하나님께서 잔치를 벌릴 만큼 우리가 존귀한 자라니까요.

 

여러분들 자꾸 비하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곡해해서 피학증 환자처럼 맨 날 징징거리고 고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신자는 존귀한 자입니다.

왜 스스로 비하를 합니까?

억지로 이 땅에서 자기가 고난을 자초하려 하지 마세요.

 

고난을 자초하는 것은 그냥 생고생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범사에 감사하며 사세요.

예를 들어서 만약에 내게 부요를 주셨다면 그 부요를 주신 분도 주님이라 생각하고 감사하고 사세요.

몸에 사욕을 쫓으란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누리라고 준 부요를 누리지 못하고 맨 날 징징거리면 그것을 주신 의미가 없잖아요.

예를 들어서 A라는 사람도 부요를 가지고 있고,

B라는 사람도 부요를 가지고 있는데,

A는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고 B라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A 라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부요를 자기 몸뚱이 즐기고 살겠지요.

그러나 B라는 사람은 그렇게 누리지 않고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시는 자도 여호와시니 이 모든 것들은 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 때 똑같은 부요를 누려도 이 사람 자체가 고발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처했는가를 따지지 마시고 좋은 환경에 있을 것 같으면 감사하며 누리세요.

하지만 거기에 내 마음이 빼앗기면 안 되지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한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으로 얘기를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하나님 것을 찾아오는 것으로 구원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았을 때는 구원받은 그 사람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찍혀 있겠지요.

그럴 때 여호와의 이름이 창대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 이름을 찍는 것은 결국 아브라함에게 네 이름이 창대케 되리라는 말씀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3절을 봅시다.

 

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함으로 인해 새로운 복의 기준이 생겼습니다.

복과 저주의 기준이 생긴 것입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기존의 아브라함은 선택하기 전에는 아브라함이나 다른 사람이나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너 복!’ 이렇게 하면 기존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저주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속에 찾아 오셔서 아브라함 하나를 끄집어내고는 ‘너 이제 복 해!’

이러면 아브라함만 복이 되고 나머지는 자기 조건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전부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의 자손으로 선택이 되면 그 때부터 공공의 적이 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졸지에 저주의 사람이 되어 버렸잖아요.

누구 때문에? 아브라함 하나 때문에요.

그럼 아브라함을 죽이면 전부 같은 자가 되겠지요.

 

그래서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자를 끊어내자고 하면서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이게 시편 2편에 나옵니다.

군왕들이 일어나서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들을 끊어버리자고 합니다.

복의 사람인 예수를 죽이고자 온 세상이 대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인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님을 통해서 복과 저주가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사는가 안 사는가 하는 것은 전부 의미가 없어져 버리지요?

 

예수에게 속한 사람은 무조건 복이고 예수에게서 떨어져 있는 사람은 무조건 저주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들이 받아들일까요?

못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횡포라고 하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인간들의 상식과 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주어졌다는 것이 새로운 심판의 기준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라는 이름 안에 속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공공의 적이 되고 미운 오리 새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하시는 겁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터인데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 세상이 성도를 미워하겠어요?

흔히들 여러분이 안 믿는 사람에게 가서 우리는 죽어서 천국 간다 그러면 그 사람들 기분 나빠합니다.

 

너희들은 뭐 때문에 천국 가는데 하고 묻지요.

예수 믿기 때문에 천국 간다 하면 기분 나빠해요.

그들은 우리가 천국 간다 하는 것으로 기분 나빠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도 다 자기들은 천국 간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은 착하게 살면 천국 간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쟁이들은 와서 착하게 살아서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예수 믿어서 간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화가 나는 겁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천국 개념이 완전히 지옥이 되어 버리잖아요.

 

과거에 저희 매형이 그랬습니다.

이 분은 착하게 살면 천당간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볼 때 마다 아니에요 천국은 예수 믿어야 갑니다, 라고 하면, 싫어해요.

 

그 분이 폐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제가 병문안을 갈 때 마다 그러거든요.

매형, 예수 믿어야 됩니다.

그런데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 매형의 사촌 형이 포항에서 목사를 하는데 그 사람이 소위 말하는 날라리입니다.

그 사촌 형이라는 분은 제사도 지낸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가서 말하면 매형이 하는 말이 내 사촌형은 그런 말 안하는데 처남만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하는 겁니다.

기분 나쁘다는 거에요.

 

그러다가 임종을 앞두고 연락이 와서 갔습니다.

제가 목사이다 보니까 마지막에 혹시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그 분의 손을 잡고 그 때는 제가 정 목사 왔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손에 손대지 말라고 하면서 고함을 치는 겁니다.

제가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러면서 제가 깨달은 게 이게 인력으로 되는 게 아니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 가셨습니다.

 

결국 내가 알고 있던 그 천당 개념이 착함으로 갈 수 있는데 예수 믿어야 간다고 하니까 기분이 나쁜 겁니다.

이걸 용납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핍박 받는 거에요.

 

사람이 착하게 살아서 천당 간다면 그 천당 가는 것에 대한 자기의미가 있겠지요.

내가 이 천국을 쟁취해냈다는 성취감이 있겠지요.

그 성취감으로 사는 것이 인간인데,

그 성취감을 예수쟁이들이 박살을 내니까 누가 좋아합니까?

당연히 싫어하지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 개념은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가지고 죄냐 아니냐를 따집니다.

그게 세상 기준입니다.

세상 기준에서는 나쁜 짓 하면 죄인이고 착한 일 하면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들 입장에서는 그게 맞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너를 복의 근원 만든다 하시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할거야 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 착한 일을 하고 안하고는 상관없이 아브라함 하나 때문에 졸지에 악인으로 분류가 되니까 이것을 어떻게 용납을 하겠어요?

못하지요.

 

그 아브라함의 실체로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신앙을 인정하셨다면 예수님을 절대 죽이려 하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관 말고 새로운 구원관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나를 믿어야 된다고 하니까 율법 지켜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 하면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지켜온 것이 뭐가 되냐는 것이지요.

 

축복이 다 날아가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 이름을 통해서 구원받을 자 저주받을 자를 구분시켜 버리셨습니다.

 

아브라함 식으로 하면 아브라함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할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할 것이라고 했듯이 예수님에게 적용을 시키면 예수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인정하고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어 버리지요.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한 사람을 보내기로 작정을 했단 말이지요.

이 역사 자체는 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 속에서 사건으로 전개시키는 하나의 필드일 뿐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계획하셨던 것이 뭐냐 하면 한 사람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5-7절을 보세요.

 

5-7=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 얘기를 하십니다.

원래 아버지께서는 한 몸을 예비한 것 아닙니까

두루마리 책에 나를 기록한 것 그 것 때문에 제가 왔습니다, 라고 하고 있어요.

 

그 한 몸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약속을 하시기를 예수라는 한 분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다 구원하는 식으로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예수님 자체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인정하면 그 사람은 복의 사람이 되고 예수를 부정하면 그 사람은 저주의 사람으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분을 하나의 기준으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것을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그 싸움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믿음을 받은 사람이고, 이걸 안 받아들이는 사람은 믿음을 받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억지로 이걸 받아들이세요, 라고 강요할 문제가 아닙니다.

제발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의 신앙적인 문제로 변론하거나 다툼하지 마세요.

번론하고 다퉈서 믿음이 생길 거라면 그건 똑똑한 사람들이 믿음이 좋지요.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믿음이 좋다 하겠지요.

그러나 ‘믿음’은 말 잘하고 똑똑하다고 생기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그 사람들은 내가 받을 만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또 그런 애기들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좀 나아서 그랬겠지 하는데 아니에요.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다른 사람보다 나았다는 그런 얘기 없습니다.

나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선택이 되어야 할 때 비로소 그 자리에 은혜가 남습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에게 다른 사람보다 조금 잘났다는 어떤 조건이 있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그 잘난 것이 은혜를 가려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일을 하시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만 남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에는 우리의 조건은 요만큼이라도 영향이 없습니다.

 

똑똑하지 않아도 괜찮고

많이 배우지 않아도 괜찮고

가난해도 괜찮습니다.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오셔서 일방적으로 ‘너 내 꺼해’ 하면 끝입니다.

그럼 우리는 물어야지요.

하나님 저는 저 옆에 있는 사람보다 똑똑하지도 못하고 그런데 왜 나를 찜해서 택했습니까? 라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그러시지요.

네 자랑하지 말고 내 자랑하라고 그랬다, 라고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그를 통해서 계속해서 그를 간섭하신다는 것을 남기는 일들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했던 사건들을 지금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 하나 구현을 시켜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어떤 식으로 자기 백성들을 간섭해 나가실 건가 하는 것을 아브라함을 자기고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할 일들을 이 아브라함 속에 담아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날마다 우리 생각들은 기각당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셨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살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 동화책에 보면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제목이 참 자극적이지만 우리도 그렇게 물어야 합니다.

‘누가 내 몸에 하나님의 흔적을 새겼나?’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 몸에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거에요.

이걸 물어야 합니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을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오셔서 뭔가 하신 일이 있잖아요.

그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했구나, 저런 일을 했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일하심에 압도당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게 하신 일들이 그것이 크게 보이면 나중에 욥처럼 유구무언이 되는 겁니다.

내가 잘 살든 못살든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당신이 이루고자 한 일들을 우리 몸에 새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도 그러잖아요.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새겼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난 받을 때 기분 좋게 받았습니까?

아니에요.

 

고난 받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나요?

없어요.

그런데 바울이 은혜를 입고 보니까 그 고난조차도 하나님께서 예수의 흔적을 자기 몸에 새긴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러잖아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 흔적들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새기는 일들을 하시는 겁니다.

 

앞으로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브라함 속에 예수의 흔적을 새기는지 살펴봅시다.

우리는 아브라함 속에 우리 자신을 이입 시켜서 아브라함 일생에 나타나는 일들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다뤄왔구나,

여기까지 인도한 것이 하나님의 계획된 뜻이었을 알아야 합니다.

난 내가 잘나서 여기까지 온 줄 알았는데 모두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나를 간섭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요만큼이라도 복음이 들려지고 깨달아지는 것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고 감사해야 해요.

그래서 지금 현재 있는 삶 속에서 자족하시고 감사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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