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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23강. 구원의 법칙 (창 12:10-13:4)

by coroa 2021. 2. 12.

 

마가 13:5~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23강. 구원의 법칙 (창 12:10-13:4).-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를 예표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때는 항상 이중적인 계시로 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때는 우리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또 복의 근원으로 애기할 때는 진짜 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다고도 했습니다.

아브라함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할 아브라함이 기근이 드니까 애굽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봤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애굽으로 가는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해도 자기 육신을 이길 인간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이 육신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 몸은 눈만 뜨면 계속해서 달라고 합니다.

몸뚱이는 떡을 먹지 않고선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신은 말씀보다 떡을 더 원합니다.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육신을 가지고는 하나님 말씀 앞에 늘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너희는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야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앞에 서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두 법이 있어요.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두 법이 있다고 합니다.

한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반하여 다른 한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근데 자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법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 먹은 대로 안 되니까 탄식이 나오는 거에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해서 할 수 없으니까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나를 이 괴상한 몸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가 없겠느냐? 라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그랬어요.

아브람은 애굽에 내려가서 자기가 살기 위해서 아내를 팔아먹습니다.

아내를 팔아먹을 때 심정이 어땠겠어요.

참담하지 않겠어요.

아내를 볼 때마다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지 않겠어요.

 

아브람은 아내를 통해서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아내 때문에 살아났어요.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사래가 바로에게 겁탈당한 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에요.

여자에게 있어 정조는 생명과 같아요.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여자가 간음 하면 돌로 쳐 죽음을 당하였어요.

근데 사래가 바로에게 겁탈 당하였어요.

아브람 대신 사래가 죽었어요.

 

이렇게 되면 사래는 아브람의 대속주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죄인으로 드러나고 사래는 흠 없는 희생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보낼 때 뱀의 머리를 깨트릴 자가 여자의 후손으로 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이름을 ‘하와’로 지어 줬는데 그 뜻은 ‘산 자의 어미’ 입니다.

이러면 남자들에게 있어서 여자는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왜요?

여자의 품 속에 약속의 자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복의 자손으로 세움을 입었지만 실제 그 복의 조상은 사래의 뱃 속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때 사래는 아직 잉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잠정적으로 봤을 때는 사래 속에 약속의 아들이 들어 가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을 때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후손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의 옆구리에 후손들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왜 하필 옆구리라고 합니까?

이는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옆구리에 창이 찔려 물과 피를 흘리고 우리를 낳을 것을 예표하고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모든 성도들이 나왔듯이 아브라함의 옆구리 속에서 언약의 후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할례를 행하게 합니다.

생식기를 잘라버립니다.

남자가 생식기를 잘라낸다는 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생식기가 잘라지고 난 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줍니다.

이 때는 사라의 경수도 끊어진 상태입니다.

근데 하나님이 사라에게 아들을 주었어요.

이러면 사라가 낳은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들이에요.

 

그런데 이삭으로부터 야곱이 나오고 그 야곱으로부터 12 지파가 나옵니다.

이 12 지파가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이삭처럼 하나님 아들들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장자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라의 몸에 하나님의 아들을 주셨지요.

이렇게 되면 사라는 산 자의 어미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로 인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죽어야 하는데 사라를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사라가 낳은 아들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펼쳐 가십니다.

이삭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온 자에요.

묵시에서 역사로 오신 자에요.

 

묵시에서 역사로 오신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삭을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를 다스려 가실 때 한 사람 중심으로 다스려 가십니다.

성경은 그 한 사람을 이 세상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한 남자가 바로 예수입니다.

 

만물이 예수로부터 나왔고 예수로 말미암고 예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역사라는 모든 시나리오는 예수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그 예수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을 구약에서는 예표적으로 아브라함과 사래를 통해서 보여 주시는 겁니다.

 

지금 아브라함이나 사래는 바로 앞에 복과 저주의 기호로 서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후대하면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받는 것으로 됩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찾아 가셔서 아브라함을 불러내고 그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에 집어넣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직까지 자기를 간섭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간섭해서 자기를 간섭하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주어야 할 것 아니에요?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바로를 도구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라는 것은 ‘큰 집’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이 세상의 최고의 권세를 말합니다.

‘바로’ 앞에서 모두가 무릎을 꿇습니다.

 

최고의 권세를 가진 그 앞에 아브라함과 사래를 세워놨습니다.

마음껏 유린당하고 빼앗길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큰 산 앞에 아브라함이 서 있는 형국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위해 여리고성이라는 큰 벽에 부딪힌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립니다.

 

대포 쏘고 미사일 쏴서 무너뜨린 게 아닙니다.

나팔 불고 소리쳐서 무너뜨립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우리와 함께 하는 분이 이렇게 대단한 분이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렇게 철옹성 같은 여리고성도 결국 하나님 앞에는 모래처럼 무너져 내리는구나 를 배우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바로라는 큰 왕 앞에 세워놓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궁여지책으로 아내를 팔아먹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는 권세를 가진 자가 바로 왕인데 하나님께서는 사래라는 한 사람을 통해서 바로조차도 깨트려 버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은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 바로도 혼내는 하나님이구나를 알게 됩니다.

 

바로는 세상의 모든 권세를 총칭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권세조차도 좌지우지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를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준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앞으로 세상의 그 어떤 권세도 두려워하지 않겠지요.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 해봅시다.

지금 저와 여러분을 간섭하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지요.

만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보세요.

 

하나님께서 바로를 누구 때문에 저주를 합니까?

사래 때문에 저주를 하지요

그 사래 뱃 속에는 약속의 아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후대를 봤을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래는 지금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낳아줄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래를 건드리는 것은 결국 예수를 건드리는 것과 같은 것이 됩니다.

쉬운 얘기로 하나님께서 바로를 혼낼 때 ‘왜 예수를 건드리느냐!’ 이걸로 혼을 내는 것입니다.

이해되지요?

 

만약에 우리 이 집사님이 누가 이영이를 때렸다면 누가 내 아들을 혼내! 하고 가서 그 때린 아이를 혼 줄을 내겠지요.

같은 거에요.

 

하나님께서 구약에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하나님의 기호로 세워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건들면 가만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세력은 큰 제국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봤을 때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제국인데 결국 그 제국들도 하나님의 손에는 추풍낙엽처럼 부서지더란 말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야! 진짜 세상 권세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나님이 최고이구나! 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밖에 없구나! 하고 잘 섬겨야 하는데 그들이 어땠습니까?

잘 섬기지 못합니다.

이런 악당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그 악당들이에요.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영악스럽고 더 나쁜 악당이라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살면서도 세상에 나가면 아브라함이 자기 살고자 사래를 팔아 먹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팔아 먹습니다.

예수를 팔아 먹어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교훈을 받아야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를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간섭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간섭조차도 감당해내지 못하는 인간이구나를 아셔야 합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가망이 없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바탕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쉬운 애기로 할께요.

아브라함이 애굽에 왜 내려갔습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 살기 위해서 갔지요.

 

그러면 여러분에게도 한 번 물어 봅시다.

여러분들은 왜 신앙생활을 제대로 안합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왜 교회를 잘 안 나옵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지요.

결국 떡이 더 커 보이더란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습니다.

자기 일신상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해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거창한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소한 것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간섭해 오셨네요, 고맙습니다, 라고 해야 해요.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간섭하시는 손길들을 많이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적으로 얘기하면 아이들이 자라면서 철들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부모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철이 들 때 비로소 부모에 대한 공경, 효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공경해라! 공경해라!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것은 배워서 나오는 것이지 진정한 공경이 아닙니다.

배워서 한 공경은 나중에 뒤에 가면 반드시 댓가를 요구하게 됩니다.

나 공경했잖아요! 하고 유산 달라 그래요.

 

드라마를 보면 재산이 많은 부모가 있었습니다.

부모가 재산이 많다 보니 자식들이 평소에는 잘 오지도 않다가 명절 때만 되면 얼굴이라도 비치러 옵니다.

그리고 서로 부모의 재산을 탐냅니다.

그게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난 아닌데요, 라고 하는 분이 있는가요?

 

아니에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

그런 사고를 가지고 부모에게 찾아오는 것이 효도입니까?

아니에요.

부모는 다 압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그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의 가정이라는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합니까?

그것은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간섭하시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지금까지 찍어놓은 요셉이의 동영상을 봤습니다.

태어나서 일 년 정도 자란 것을 찍은 것입니다.

그 동영상을 나중에 아이가 자라면 보여 줄 거에요.

네가 이렇게 아기였는데 어떻게 은혜를 입고 자랐는지를 보여 줄 거에요.

그러면 아이는 자라서 그것을 보고 내가 이렇게 자란 것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가 돌봐 줘서이구나를 알게 되겠지요.

 

아마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비디오로 보여 주실 것 같아요.

그러면 전 아마 맨 날 도망가고 하나님 앞에 죄 짓는 모습만 보일 거에요.

그랬을 때 우리가 할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찬송은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감사는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툭 하면 도망가고 툭 하면 삐지고 그러는데,,

 

우리는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은 금 패물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은금패물을 볼 때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이 날까요?

아이고 좋아라 그런 생각이 들까요?

아니지요.

 

마누라 팔아 먹은 놈이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아내를 볼 때 마다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정작 아내는 말이 없지만 사래는 마음속으로 에라이! 이 등신아, 저 하나 살겠다고 마누라를 팔아 먹냐? 그런 생각 안 들었겠어요?

 

나중에 보세요.

이삭이라는 아들을 줄 때도 그렇잖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래를 찾아와서 이삭을 준다고 할 때 아브라함과 사래의 반응이 어떠했나요?

 

아이구, 하나님 드디어 주시는군요.

할렐루야 아멘 했나요?

아니지요?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비웃었어요.

비웃었는데 아들을 낳습니다.

그들은 아니라고 하였는데도 하나님은 주셨어요.

그리고 아이의 이름을 이삭으로 지으라고 하십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비웃음’입니다.

그러면 이삭을 부를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들까요?

내가 하나님 앞에 비웃었던 자구나 라는 생각이 나겠지요.

 

아브라함에게는 평생 이삭과 아내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 드러나는 거울로 비춰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죄를 고발하는 것을 가장 사랑하는 가족으로 배치해 놓았어요.

이게 죽을 노릇입니다.

아브라함은 마누라와 자식을 볼 때마다 아!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악한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다뤄가시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게 만들어 가십니다.

입을 닫게 하십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죽이시든 살리시든 모든 것이 은혜인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의 깊이를 몰랐을 때는 하나님에 대하여 추상적이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 은혜로 살지요, 은혜로 살지요, 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맞아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어요.

그러나 그건 립 서비스에 불과해요.

 

어떤 일이 닥쳐 보세요.

하나님이 뭐고 없어요.

눈에 안 보여요.

자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해요.

 

그러나 산전수전을 겪고 오면서 내가 진짜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 낯을 들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주의 은혜입니다, 라는 진짜 고백이 나옵니다.

목소리도 크게 안 나와요.

그냥 숨죽이듯 소리를 삼키며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운동하는 진짜 고수들은 힘을 쓰지 않습니다.

고수가 아닐수록 힘이 들어갑니다.

복싱하는 사람들도 아마추어는 어깨 힘이 잔뜩 들어가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아마추어일수록 큰소리를 칩니다.

대단한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 혼자 다 아는 것처럼 나섭니다.

그건 빈 깡통입니다.

 

진짜 예수를 만나고, 자기가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있는 듯 없는 듯 해요.

 

지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왜 이런 일생일대의 수치를 겪게 하셨을까요?

그건 아브라함의 실존을 고발하기 위함이에요.

넌 이런 자라는 것을 까발리는 것입니다.

 

다시 물어 봅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12장에서 아내를 팔아먹었는데 나중에 이런 짓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또 했어요.

그런 환경이 처하면 또 팔아먹어요.

 

한 번 팔아먹은 사람이 두 번 못하겠어요?

두 번 한 사람이 세 번 못하겠어요?

결국 우리는 팔아먹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래를 팔아먹은 것은 예수 팔아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래가 생명의 근원인데 예수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내 목구멍을 위해서 수시로 예수를 팔아먹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팔아먹고, 내일도 팔아먹는다니까요.

 

이것을 아시라구요!

내가 예수를 팔아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다른 사람에 대한 정죄가 안 나옵니다.

긍휼이 나와요.

아직도 남에게 손가락질을 한다는 것은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에는 누가 복음 안다.

그러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과연 그러한가 싶어요.

머리로는 알겠지요.

 

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는 수학 공식을 외웁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와서는 그것을 응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세상에 나와 응용하기 위해 배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복음을 지식으로 담았을 것 같으면 이 담겨진 지식이 실제 삶 속에서 풀어져 나와 줘야 합니다.

풀어져 나오지 않는 지식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가상 임신이라는 것을 하지요?

진짜 임신이 아닌데 임신한 것처럼 느끼잖아요.

이 시대 신자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복음이 상상복음입니다.

그러니까 말은 복음이고 머리로는 복음인데 실제 뱉어져 나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복음 알면 겸손이 나와야 하는데 교만이 나와요.

거만하고 잘난 척해요.

이게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허구들이 자꾸 까발려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점잖게 예수 잘 믿는다고 앉아 계시지만 제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니까요.

목사님은요 라고 물으십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다 그래요.

도낀 개낀이에요.

 

그러니 우리끼리는 서로 차별하지 맙시다.

너도 못났고 나도 못났으니까 서로 말하지 말고 그냥 주님만 바라보고 삽시다.

신앙은 저와 여러분은 엉망이고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때문에 살고 있다는 그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니까 예수님만 자랑하고 삽시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중심으로 다스려 가는데,

그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자기 백성을 대신해서 죽어주신 분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한 사람을 만유의 주로 삼았어요.

그 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창세전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어떤 것이었나요?

버려졌다가 되찾음 당하는 것입니다.

죽었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피를 흘려주시고 그들을 살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해서 속전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는 바탕 속에는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주셨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본문 속에서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하는데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구조적으로 보면 애굽이 높은 곳에 있었어요.

그리고 가나안이라는 말의 뜻이 ‘낮은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갔다면 ‘내려갔다’는 말을 쓰면 안 되고 ‘올라갔다’는 말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도 왜 내려갔다는 표현을 했는지 영적으로 봐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내려갔다’는 것은 전부 ‘타락’을 의미합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지요?

엠미오로 내려가다 예수님을 만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성경에는 내려가고 올라가는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요나도 니느웨로 가라 했는데 욥바로 내려가더라는 표현을 씁니다.

 

지금 가나안에 머물러야 할 사람이 애굽으로 가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낮은 땅이고 애굽은 높은 땅입니다.

그런데 낮은 땅에 있는 자가 높은 땅으로 가는데 내려가더라는 표현을 씁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타락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은 언약의 땅이고 애굽은 비언약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이라는 말 자체가 ‘검은 땅’ ‘검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애굽은 언약이 없는 죽은 곳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디에서 살아야 하나요?

약속의 땅에 살아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서 살아야 하는 자가 약속이 없는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약속이 없는 땅으로 내려가니까 결국 자기가 받은 생명조차 빼앗기는 형편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묵인하시고 방치를 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방식이 죽었던 자를 살리는 식으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 자체가 죽은 자를 살리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죄 아래 가두어진 자를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의롭게 되는 구조를 근거로 해서 이 세상을 창조했잖아요.

 

그래서 창조 자체가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타납니다.

저녁이 되서 아침이 되니 곧 첫째 날이니라 하지요?

저녁은 타락을 상징하고 아침은 회복을 상징합니다.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니까요.

 

이것을 예수님에게 적용해보세요.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가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하늘에 계실 분이 왜 내려오셨습니까?

이 땅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올라가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나오미 비유를 했습니다.

나오미도 원래 베들레헴에 살아야 할 사람이 모압으로 내려갔다가 남편 죽고 아들도 죽고 다시 올라오잖아요.

 

지금 아브라함도 그 모습입니다.

애굽에 내려갔더니 결국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는 일들을 당하더란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께서 다시 거기에서 가나안으로 올라오게 만드십니다.

이 올라오는 과정에서 재미있는 것이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뭔가 가지고 올라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했지요?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서 애굽에 있는 은금 보물을 가지고 올라 온 것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올라가는 것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은금패물로 무엇 만듭니까?

성막에 쓸 재료들을 만들지요.

성막이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 성전으로 나오는데 거기에 사용되는 재료가 각종 보석들이에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지금 하늘 예루살렘 성전에 지을 보석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 보석들은 모두가 사래의 희생을 통해서 얻어진 것들이에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애굽의 바로에게 있던 은금 패물을 가지고 온다할 때 그 재물을 재물로 보지 말고 의인화해서 사람으로 보세요.

구원 받은 성도로 보세요.

 

예수님께서 구원을 말하실 때 이런 비유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집에 들어가서 그 집주인을 결박을 시켜놓고 세간살이를 가져온다! 그러지요?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실 때 구원에 관해서 말하십니다.

그러면 세간살이는 자기 백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서 사래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바로에게 있던 재물을 가지고 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분의 죽으심으로 인해 마귀에 사로잡혔던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셨잖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내려가셔서 무덤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 올리는 일들을 하잖아요.

아브라함은 하나의 시청각 교재로 예표적인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예표가 신약에 오면 예수 그리스도 라는 실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세요.

가나안에 있어야 할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에 계셔야 할 예수님이 이 세상으로 내려간 것과 같습니다.

내려 가서 그 애굽에 있는 바로의 재물을 가지고 올라오듯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 있는 아브라함 언약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할 때 네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나올 때는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온다고 합니다.

그 재물을 의인화시키면 결국 자기 백성인 것입니다.

이해되지요?

 

창세전 언약 자체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 조차도 버려졌다가 다시 되찾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너의 구원이 어떤 구원인지 아느냐?

이렇게 버려지고 타락된 것에서 반드시 어떤 희생을 지불하고 네가 올라 오게 되어 있는 거야.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서 치른 댓가가 뭡니까?

사래가 겁탈당하는 댓가를 치룬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적용하면 쉬운 얘기로 저와 여러분들이 신앙을 버리고 세상으로 내려가게 되면 세상에 내려 간 것 때문에 반드시 여러분들이 다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얘기를 하십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두 주인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재물입니다.

재물도 의인화해서 하나의 신의 반열에 올려 놓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재물을 쫓아갑니다.

나타나는 것은 재물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우리가 섬기는 신으로 보이는 겁니다.

맘몬신이라니까요.

 

그 맘몬신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배도한 것이 되어 버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배도하면 배도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예수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그 단회적인 사건이 우리 삶 속에서는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고 있단 말입니다.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자가 신자입니다.

그것이 깨달아질 때 우리는 주님 앞에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을 베푸소서, 라는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헤가 아니면 안 되는군요,

내 힘으로는 내 의지로는 내 각오로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가 아니네요.

결국 나는 내 몸을 섬기는 자입니다.

우리 몸이 곧 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눈만 뜨면 몸을 챙기는 것입니다.

 

왜 몸을 챙기나요?

내 몸은 소중하니까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니 몸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내 아들이 소중하다! 하십니다.

우리는 내 몸이 더 소중하다고 우기지요.

결국 우리는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일들을 영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 앞에 서면 맞구나, 내 실존이 이런 자이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죄인은 하나님께서 정답을 가르쳐 줘도 정답대로 살 수 없는 것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정답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면 안 되지 하고 그렇게 합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이 한 그대로를 합니까?

그대로 하고 있다니까요.

아무리 교훈을 줘도 그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결국 우리는 아브라함의 행실을 그대로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을 합시다.

이런 아브라함의 행실머리를 보고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게 하잖아요.

그럼 결국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뭐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렇게 간섭해서 결국엔 하나님이 계획된 그 자리에 세우시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의 꼬라지가 이래도 하나님의 그 열심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자리에 세워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믿어져야 낙심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아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낙심이 안 된다니까요.

여러분들이 말씀 앞에 섰을 때

그래, 내 꼬라지가 원래 이러니 내 맘대로 살자 하는 것과,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다른 것입니다.

 

답을 아는데 그 답을 못 썼을 때는 안타까움이 나오잖아요.

이걸 상한 심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답을 모르고 못 쓰는 건 안타깝지가 않아요.

원래 답을 모르니까 아쉬울 게 없지요.

 

구원이란? 되찾음이잖아요.

잃어버려졌다가 다시 찾아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누가 찾느냐 하면 주인이 찾아요.

우리 주인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에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나왔잖아요.

하와처럼 예수라는 아담 속에서 나왔어요.

그러니까 아담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은 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것은 원래 내 수중에 있다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 수중에 있다가 잃어버렸으니까 찾으러 가는 겁니다.

원래 내 것이 아니면 잃어버린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되지요.

 

쉬운 말로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백성들을 이 땅에 쏟아 놓았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 하나 다 찾아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데리고 갈 때 성도에게는 찾아내신 예수님의 공로가 그 속에 담겨져 가는 것입니다.

 

찾아짐을 받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천국에서 예수님이 날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난 이 자리에 오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날 이 여기에 앉혔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양에게 계속해서 찬양을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지금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있는데 그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말이지요.

 

하나님은 이 만유를 다스리는 분이시고,

세상 권세를 다 깨트리는 분이시고,

그래서 세상 권세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고 가르쳐 줬는데 아브라함 눈에는 여전히 세상이 보이고 그 세상 권세에 굴복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연약한 아브라함을 창세기 12장에서 약속했던 것 같이 복의 자리로 데려다 놓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나님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이 다 이뤄내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의 희생으로 성취가 되어요.

그래서 창세기가 한 사람의 희생을 통해서 자기 백성이 살아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희생당한 요셉이 형제들을 살려내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애굽에 내려 가서 한 사람의 희생을 통해서 살아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우리 역시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서 구원받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될려면 반드시 어둠에서 빛으로, 타락에서 다시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탕자 비유에서 아버지가 집 나가는 자식을 붙잡지 않는 것입니다.

붙잡지 않는 이유가 이 자식이 아비 집의 고마움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비 집을 떠나가서 한 번 망해 봐야 돼요.

 

망해봐야 우리 아버지 집이 좋은 집이었구나를 알게 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나가서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돌아 왔을 때 비로소 진짜 아들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아버지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아들은 아비의 마음으로 집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돌아 온 탕자에게 인장반지를 끼워주는 것입니다.

이 집안을 아비의 마음으로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그게 없습니다.

아비의 마음이 없습니다.

 

결국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데 버려졌다가 다시 되찾는 것으로 합니다.

죄에서 건짐 받는 것으로 해요.

죄에서 건짐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죄 아래 있는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내가 타락한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절대 타락된 사람을 욕을 할 수 없습니다.

쉬운 말로 내가 도둑놈이면 도둑놈을 욕하지 못하지요.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세워놓고 그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이 뭡니까?

간음한 여자가 나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은 간음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려는 자들이 나쁜 놈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너희들이 간음한 자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간음한 여인을 세워놨는데 그들은 우리는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내가 간음 안했다면 용서가 주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죄인인 줄 모르면 용서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은혜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겐 계속 하나님의 은혜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 은혜가 은혜로 드러날 때는 아브라함이 실수하고 늘 타락된 모습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모습으로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을 해주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불순종해요.

그러면 그 때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구나 를 깨닫게 된단 말입니다.

 

이걸 또 악용을 해서 그러니까 죄를 열심히 지어야 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어요.

막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어요.

세상에 참…

 

말씀을 곡해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의 뒤치다꺼리 해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오해 하지 마세요.

 

만약 여러분들이 그래, 난 죄인이 맞아,

그래서 내가 죄를 지으면 예수님께서 열심히 씻어 주실거야, 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자는 예수님의 피를 자기 사욕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이용하는 거지요.

이게 악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피 흘려 주셨다는 것을 안다면 내가 죄애 대해서 아파함이 있고 죄에 대해 멀리하는 성향이 생기는 것이지 예수님의 죄사함을 가지고 내 맘대로 먹고 마시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밖에 나가서 열심히 돈 벌어 오는 것을 안다면 자식들은 어떻게 할까요?

돈을 아끼고 살겠지요.

풍덩풍덩하게 쓰지 않겠지요.

 

제가 예전에 회사에 다닐 때 집에 부인들을 회사에 한 번씩 초청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아내들에게 당신 남편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들은 집에 있을 때는 모르고 있다가 실제 남편이 근무하는 곳에 가서 보니까 힘겹게 돈을 벌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 모습을 봤을 때 아내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어떻게 쓰게 될까요?

어차피 우리 남편은 또 돈 벌어 놀 텐데 하고 그냥 마구 씁니까?

진짜 지혜로운 아내라면 남편이 이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서 나를 먹여 살리는구나 라는 생각으로 돈 쓰는 것을 귀히 여기겠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진짜 믿어지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살지 않겠지요.

내가 잘못하면 예수님의 은혜가 더 드러나니까 난 잘못해도 돼! 이러지 않겠지요.

 

지난번에 어떤 집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목사님, 죄를 많이 지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 드러나잖아요.

어떤 목사가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무슨 복음이 그런 게 있어요?

그런 복음은 없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우리의 색욕거리가 아닙니다.

 

아파야지요!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지향성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로마서 12장에서는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뭐를 드리라고 하나요?

이 몸뚱이를 드리래요.

산 제사라는 것은 날마나 죽임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사욕을 위해서 복음을 쓰는 사람이 그게 산 제사입니까?

아니지요.

 

여러분, 말씀을 곡해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사람을 보면 아파요

왜 복음을 저런 식으로 이해를 할까?

왜 저렇게 들려졌을까 싶어서 가슴이 아파요.

 

복음을 곡해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드러내려면 내가 교회도 열심히 안 나오고 헌금도 열심히 안하면 이게 죄이구나 하고 드러나고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 드러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그게 복음입니까?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짜 예수님이 나를 위해 피 흘려 주신 것을 사실로 믿어지고 깨달아진다면 비록 우리 몸뚱이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죄에 대해서 멀리하고자 하고 아파하는 상한 심령이 일어나야 한단 말입니다.

 

상한 심령은 답을 알았는데 답대로 못살 때 일어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죄 지으면 예수님의 피 뿌림이 더 은혜가 되고 영광이 되니까 우리는 죄 지어도 되겠네 한다면 그것이 상한 심령입니까?

아니지요.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고

봐라!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서 그런 짓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줘서 다시 돌아오게 하잖아, 그러니 또 내려가자!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꾀를 부려서 마누라를 팔아먹으니까 돈이 생긴다고 생각하고 돈 떨어지면 또 내려가서 그런 짓을 반복하겠지요.

우리가 그런 식으로 오해를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마누라를 볼 때마다 여보 미안하오, 하는 마음이어야지요.

나중에 그런 일들이 또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 앞에선 미안하고 죄송해요 하면서 다시는 안 그럴께요 해야지요.

 

하지만 나중에 그런 환경이 닥치면 또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자세는 아니야 그러면 안 돼, 이렇게 하면 안 돼 하는 마음이 들어야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항상 복음을 자기 유리한 쪽으로 악용을 합니다.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자 보세요.

로마서를 보면 로마서의 구조가 1장에서 11장까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고 우리에게 의를 주신 것을 설명합니다.

 

1장에서 11장까지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리라고 합니다.

교리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이야기 해주는 것입니다.

 

12장부터 16장까지는 그 교리를 가지고 실제 우리 몸으로 살아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12장에서부터 16장까지의 내용들이 우리 삶에서 피터지게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의 교리를 머리로 외우는 것이 아니고 삶으로 나타나야 해요.

그래서 12장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자기와 싸우는 것입니다.

아프고 부인되고 부정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이 없으면 무슨 아픔이 있습니까?

머리로 공식으로만 알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을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영지주의는 지식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이 그런 자들과 싸웠습니다.

신약 서신서가 다 그 얘기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이 서신서를 쓰면서 더 윤리적이고 더 도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보고 살아내란 얘기가 아니고 우리에게 대입을 시켜주는 것입니다.

그 일을 우리가 못하니까 성령의 은사를 줘서 우리 몸을 제물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뭡니까?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집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귐을 가질 때 우리는 말씀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이 자꾸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죄인이었는데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살고 있구나,

그것에 고맙고 감사함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끝까지 주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죄인이 살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군요.

하나님의 용서하심이었군요.

그 은혜가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까 이젠 내 뜻대로 살아도 또 예수님이 씻겨주겠지 하고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됩니다.

제발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 말씀 하나 하나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배워나가야 합니다.

 

지금 보세요.

오늘 본문 13장 4절에 보면

 

3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 제일 먼저 단을 쌓은 곳이 있지요?

그 단을 쌓았을 때 무슨 의미로 쌓았을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이 약속한 땅으로 무사히 인도해 들이셨군요! 라고 감사하는 의미로 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이 그 감사의 단을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애굽에서 범죄하고 다시 돌아 와서 원래 쌓았던 단 앞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나같은 죄인이 애굽에서 범죄한 자인데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로 원래 자리로 돌아 왔군요,…그 긍휼의 자리로 돌아 왔군요, 감사합니다.

그럴 때 여기가 감사의 단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신앙도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세상을 이길 수는 없어요.

죄를 안 지을 순 없어요.

죄를 짓지만 죄에 대해서 아파함이 있고,

죄에 대해서 멀리하려는 경향성이 있어야 하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용서받은 자리로 돌아 왔을 때,

그 때는 이런 죄인이 하나님 뜻대로 살아내지 못하였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불러주셨음에 대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자체는 감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는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게 에베소서 1장의 창세전 언약의 결론 부분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올라와서 원래 자기가 쌓았던 그 단 앞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가 마땅히 바로에게 잡혀 죽어야 할 자인데 내가 죽지 않고 돌아 온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군요.

그 은혜에 감사라는 것으로 단을 쌓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삶 속에서 가정에 있든지 직장에 있든지 교회에 나오든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바탕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단들을 쌓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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