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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22강. 가나안에 쌓는 제단 (창 12:1-9)

by coroa 2021. 1. 15.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2강. 가나안에 쌓는 제단 (창 12:1-9).-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창세전에 이미 계획된 일들입니다.

이 일을 자기 백성들을 가지고 펼쳐 보이십니다.

창세전에 감췄던 비밀을 드러내는 일에 자기 백성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아들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셔서,

그 아들을 통해서 복을 받는 사람과 저주를 받는 사람이 나눠지는 일들을 벌이십니다.

 

그 일들을 구약에선 예표적으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선택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예표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예표하는가 하면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라함을 찾아 가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말씀을 좇아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말씀이 아브라함은 기나안으로 인도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했을 때 그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막상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주지 않습니다.

그 땅은 단지 상징적인 것이고 실제는 이 세상이 아닌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정착하지 못하고 나그네 생활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 땅은 천국을 예표합니다.

 

하면서도 실제 천국보다 이 세상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로 봤을 때 아브라함이 말씀을 좇아 가나안 땅에 들어 간 것은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에 근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제 가나안에 사는 자들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을 자와 저주 받을 자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통해서 복을 받는 사람과 저주 받는 사람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비어있는 땅이 아니고 원주민이 차지하고 있는 땅입니다.

원주민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이 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입니다

바알은 남자 신이고, 아세라는 여자 신입니다

바알은 풍요를 주는 신이고, 아세라는 다산을 주는 신입니다.

 

풍요와 다산은 모든 인간이 꿈꾸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로망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주고 자기 이름을 창대케 해주는 그런 신을 원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의 신들이 그런 신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곳에 아브라함이 가나안 인들이 섬기는 신과 다른 신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아브라함이 모시고 들어간 여호와라는 신은 인간의 이름을 내고 세상에서 창대케 해 주는 그런 신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인간의 이름을 기각시키는 그런 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에 넣은 것은 하실 일이 있어서 입니다.

하나님을 소개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단을 쌓는 일을 합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8절을 보면

 

7-8=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자 보세요.

지금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니 그곳에 원주민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원주민들이 섬기는 신이 있는 겁니다.

그런 땅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여호와의 이름을 앞세워 들여보내시고는 그를 통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단을 쌓는 일을 하게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 땅은 여호와의 땅이란 말입니다.

여호와의 땅인데 너희 신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여호와의 단을 쌓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 땅 찾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인생에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이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마귀를 섬기고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원래 우리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주관하고 있어요.

마귀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어요.

근데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나님의 깃발을 꼽아 주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땅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가나안 땅도 하나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땅에 가나안 신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나안에 하나님을 알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단을 쌓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단을 쌓는다는 것은 이 땅은 여호와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간 것은 하나님이 들어가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앞세워 일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야기를 했잖아요.

누구든지 너를 축복하는 자는 내가 그를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나도 그를 저주한다고 말입니다.

 

축복과 저주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하지만 실제로 축복과 저주는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복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의 예표의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으로 말하면 예수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복에 사람을 보냈는데 그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복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 역설로 읽을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무슨 밀인고 하니 신약을 가지고 구약을 재조명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구약이 쉽게 보입니다.

 

신약의 이야기는 예수님 이야기이지죠?

그 예수님 이야기를 가지고 아브라함의 일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는 모든 일들이 결국 예수님이 하시는 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 뜻을 펼치러 왔습니다.

이걸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을 가지고 보여 주셨어요.

아버지의 뜻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단을 쌓는 일들로 보여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단을 쌓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한다는 것입니다.

장차 가나안 정복 전쟁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장차 일어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실제 가서 총 칼 들고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가서 여호와의 단을 쌓는 일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들어가기 전에는 가나안에는 여호와의 단이 없었습니다.

전부 바알과 아세라 단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알과 아세라의 단을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여호와의 단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우리 안에 마귀라는 놈이 주인으로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마귀를 밀어 내 버리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앉히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가나안 전쟁 이야기는 결국 우리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한 군데 정착하지 않고 자꾸 가나안 전역을 옮겨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단을 쌓지요.

 

아브라함은 지금 영적인 의미에서 가나안 땅을 전부 여호와의 것이라고 말뚝을 박아 놓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여호수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켜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열두 지파를 세워놓고 땅은 분배케 하신 것입니다.

전쟁을 하기도 전에 이미 땅을 분배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미 찜을 해 놓았기 때문이에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여호와의 단을 쌓잖아요.

이건 이 땅은 여호와의 땅이라고 말뚝을 박아 놓는 것과 같아요.

 

나중에 여호수아가 아브라함이 박아 놓은 그 땅을 차지하여서 이스라엘의 12 지파에게 분배 해 준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다시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는 것은 이건 원래 하나님 땅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거에요.

가나안 원주민들이 자기들 땅이라고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내서 이 땅은 너희들 땅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의 땅이라고 알려 주는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순순히 내어 줍니까?

안 내주지요.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빼내 가나안 땅에 집어넣었는데 가나안 땅에 가서 아브라함이 하는 일을 가만 보니 자기 집 짓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단을 쌓는 일을 하더란 말이지요.

 

이것을 신약적으로 보면 그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이라 했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하는 일을 보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 시키는 일을 하지 않고 가는 곳마다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인들 속에다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가 가만있나요?

난리를 치잖아요.

우리가 다 겪었던 일이잖아요.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병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났잖아요.

순순히 예수 믿은 사람들은 없어요.

 

첨엔 갖가지 방해가 있었어요.

가족들이 반대 하든지,

아니면 집안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서 어른들이 한 집안에 두 신을 섬길 수 없다고 하면서 절에 다니든지 교회 다니든지 하나만 하라고 하잖아요.

 

암튼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감으로 인해 새로운 질서가 잡힙니다.

기존의 가나안 땅에서는 복과 저주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감으로 인해 이 법칙이 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새로운 법이란? 아브라함이 제시하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면 살고 안 맏아들이면 죽습니다.

타협이 없어요.

완전히 폭력적이에요.

 

구원은 폭력적이에요.

타협이 없어요.

하나님이 정한 기준에 들면 살고 안 들면 죽어요.

그래서 폭력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복이 그래요.

아브라함을 영접하면 복 받고 엽접 안하면 저주에요.

가나안 사람들 입장에서는 뭐 이런게 있어 라고 반발 할 수가 있어요.

자기들 복 받는 기준이 있잖아요.

 

우리도 그렀습니다.

우리도 예수 믿기 전에는 우리 기준의 복 받는 것이 있었습니다.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고 했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의 개념은 선악과가 주는 복과 저주의 개념입니다.

 

그것은 착하게 살면 복 받고 나쁘게 살면 저주받는 것으로 되어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복과 저주의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십니다.

내가 착하게 사느냐 악하게 사느냐로 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로 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요?

인간들의 사고는 내가 복 받을 짓을 하면 복을 받고 벌 받을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전부 선악과가 주는 인과율입니다.

 

인과율이 뭡니까?

원인에 의한 결과잖아요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복 받을 짓을 해서 받는 것이 복이라면 그게 복입니까? 아니에요?

복은 내 조건과 상관없이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니 복 받을 짓을 해서 복을 받는 것은 복이 아니지요.

댓가이지요.

 

우리의 어떤 원인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복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복은 내 원인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질 때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내가 복 받을 짓을 해서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방 종교에 잘 나타나 있어요.

이방 종교의 대표로 불교를 꼽을 수 있어요.

불교에서는 지성이면 감천 한다고 합니다.

땅에서 지극정성으로 빌면 하늘도 감동해서 응답해 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방 종교는 모두가 내가 열심히 치성을 드리면 그 치성에 신도 감읍해서 소원을 들어준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고 가르쳐요.

결국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복을 따내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내 정성으로 따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복이 아니지요.

그것은 내가 정성을 쏟은 것에 대한 삯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은 내 정성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주어지는 복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 이유는 내가 배제되기 때문이에요.

인간들은 자기가 배제되는 것을 싫어해요.

 

그래서 복도 내가 복 받을 짓을 해서 받아야 자랑스러운 거에요.

봐라! 내가 이렇게 복 받을 짓을 하니까 복을 받았잖아 자랑하고 싶는 겁니다.

복도 받고 자기도 자랑하고 얼마나 좋아요.

일석이조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복은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잖아요.

이게 언제 주어질지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까 불안한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인간 쪽에서 신을 움직여서 복을 얻어내려는 것입니다.

복을 자기 소유화 시켜 놓아야 안심이 되거든요.

 

가나안 땅에도 모두 그런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세계에 하나님께서 전혀 다른 복의 개념을 가지고 그 땅에 침투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나안 땅에 제시하는 복의 기준은 뭡니까?

 

이제는 너희들이 산당에 와서 열심히 제사를 지내서 복을 따내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받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단 말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안 믿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착하게 사는 사람이 천당 가지 무슨 예수를 믿어야 천당 가느냐 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니라고, 예수 믿어야 천국 간다고 하면 그건 니들 얘기고 우리는 착하게 살면 천당 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TV에서 보면 어떤 착한 사람이 죽으면 다들 그러지요.

저 사람은 착하게 살았으니까 좋은 데 갔을 거라고 하잖아요.

천국에서 잘 살아 그러잖아요.

하지만 그건 사람들의 바램일 뿐입니다.

 

천국은 우리 맘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천국의 주인이 오라고 해야 갈 수가 있어요.

우리가 아무리 가고 싶어도 못가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곳이 있고 나쁜 곳이 있다고 합시다.

그럼 그곳 주인이 있겠지요.

좋은 곳의 주인이 오라고 해야 갈 수 있지 내 마음대로 가자고 해서 가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좋고 나쁜 그런 곳이 있다면 그 곳의 주인도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럼 그 주인이 결정을 하겠지요.

너는 이 쪽으로 가고 너는 저 쪽으로 가고

 

그게 인간 쪽에서 결정이 됩니까?

안되지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착하게 살면 좋은 곳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이론이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펴 보면 그 이론은 완전히 허구로 드러납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허구로 알고 있는 세계에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이 가나안 땅에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편만하게 증거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빌딩 짓고 정착하게 하지 않고 자꾸만 밀려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단을 쌓습니다.

단이 쌓아지는 곳 마다 그 땅은 여호와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땅이 되는 동시에 반대로 가나안 신은 축출을 당하는 것입니다

 

쉬운 얘기로 이 세상은 신들의 싸움터에요

신들이 싸움하는데 그 신들이 인간을 대리자로 내세워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보세요.

위에서 용과 예수님이 전쟁을 하는데 밑에는 누가 있나요?

여자의 후손이 있고 뱀의 후손들이 있습니다.

 

이 둘이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지고서 전쟁을 하시는 겁니다.

실제 사람의 배후엔 신들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신들의 전쟁입니다.

가나안 전쟁이 우리가 보기에는 인간들의 전쟁 같지만 그 이면엔 하나님과 인간들이 고안해 낸 우상과의 전쟁인 것입니다.

 

지금 뭐라고 그러는가요?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네 이름을 창대케 해 준다고 하시지요?

아브라함이 지금 말씀을 좇아 들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창대케 해 준다고 했잖아요.

 

오늘 본문 6절에 보니까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라고 합니다.

 

자 보세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세겜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로 갑니다.

 

상수리나무는 그 당시에는 신탁을 받는 나무로 여겼어요.

그래서 상수리나무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수리나무를 신이 임재 하는 나무라 해서 귀하게 여겼습니다.

 

우리나라도 시골에 가면 이상하게 생긴 고목에 금줄을 쳐놓고 하잖아요.

이는 이 나무가 신의 나무가 그러는 겁니다.

그 나무는 함부로 베면 안 됩니다.

 

그렇듯이 상수리나무가 그런 모습인 것입니다.

거기에 가나안 거짓 신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아브라함이 가서 이 신이 가짜니까 이 가짜 신을 없애고 하나님을 앉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로 찾아가는 겁니다.

재밌는 것은 ‘세겜’이라는 말은 ‘높은 언덕’을 뜻합니다.

‘언덕에 있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상수리나무라 하지 않고 ‘모레 상수리 나무’라고 합니다.

‘마무레 상수리나무’ 이런 말 들어 보셨지요?

 

‘모레’라는 말은 ‘가르치는 선생’ ‘교사’ ‘예언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레 상수리나무는 ‘가르치는 예언자가 있는 그 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수리나무는 신이 임재 하는 나무니까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것을 합쳐 말해 보면,

세겜은 ‘언덕’이라는 의미이고,

모레는 ‘가르치는 자, 예언자’라는 의미고,

상수리는 ‘하나님의 집과 같은 의미이니까 종합하면 ‘언덕 위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서 예언자들이 가르친다’ 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을 신약적인 의미로 풀어 보면

언덕 위에 있는 집은 예수 그리스도가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신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 자체는 또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우리의 교사이고 스승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을 하십니다.

땅에 있는 자를 스승이라 하지 말라, 너희 스승은 그리스도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자체가 우리에게는 가르치는 교사고 스승입니다.

 

어디의 것을 가르칩니까?

하늘의 것을 가르치지요.

우리는 전부 땅에 있고 위에서 오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땅의 지식 밖에 모르는데 위에서 오신 분에 의해서 비로소 윗 동네애 대한 지식을 갖게 됩니다.

 

그 윗 동네에 대한 지식은 아랫 동네에 있는 사람들은 받아내지를 못합니다.

윗 동네에서 오신 그 분이 알려줄 때만 알 수가 있습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정보를 통해서 우리는 하늘의 소식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겜’에 있는 ‘모레 상수리나무’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세겜에 있는 모레 상수리나무로 데려 갔는데 거기에 지금 거짓 신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어 쫓아 버리고 하나님의 참 신이 그 자리에 자리 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무엇을 박멸하기 위함입니까?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뱀의 머리를 깨트린다고 했지요?

그 애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귀의 권세를 깨트리는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이 이해되세요?

 

지금 이 언덕에 거짓신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내서 거짓 신을 쫓아내고 여호와의 이름의 단을 새웁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마귀의 권세를 깨트려 버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새로운 하늘의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세겜에 있는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여호와의 단을 쌓은 것을 지금 식으로 이야기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이고 우리는 그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오면 십자가의 도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똑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고방식입니까?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열심히 해서 복 받자는 것입니다.

이 말 자체가 맞지 않습니다.

 

열심히 해서 복을 받는 것은 지성이면 감천이다와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은 예수로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기존에 알고 있던 우리의 이러한 신관들이 깨어져야 합니다.

 

기존에 우리가 알던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열심히 하면 복 받는다는 개념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아도 열심히 믿고 하나님 앞에 충성을 해야 복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우리의 열심으로 구원을 받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통해서 구원이 주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복이 주어진다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기존에 알고 있던 신관들이 깨트려 지겠지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날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가나안 신관 같은 것들을 깨트려 가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기존에 우리 안에 있던 세력들을 몰아내고 예수님의 것으로 채우는 일들을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일들을 우습게 여기고 안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빼낼 때 뭐라 그러셨어요?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에 가면 끝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데 끝이 아니고 이제부터 새로운 아브라함의 삶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가나안 땅에서 기존의 가나안 땅 신들을 제거하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진짜 신앙생활은 오순절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인해 시작이 됩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인해서 이 때부터는 내 안에서 전쟁이 일어납니다.

기존의 ‘나’인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인 예수의 것으로 자꾸 채우는 일들을 합니다.

 

우리 안에서 이 전쟁은 늘 일어납니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것 하고 새로운 것과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가 언제입니까?

 

구약의 마지막 때 입니다.

구약은 옛 언약입니다.

옛 언약 신앙은 율법 신앙입니다.

내가 말씀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지킴으로 인해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근데 구약은 실패했어요.

그 누구도 하나님 말씀대로 산 사람이 없어요.

그럼 언약대로 다 죽어야 합니다.

이게 율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이 죽어야 하는 그 자리에 자신의 몸을 대신 죽음에 내어줌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담당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걸 의로 여기셨어요.

그래서 새 언약을 맺습니다.

 

새 언약 하에서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이걸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서 적용을 시키세요.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면서 우리 안에서 새 언약을 가지고 일을 하시는 겁니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언약은 옛 언약입니다.

그 옛 언약은 한마디로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새 언약을 가지고 율법을 이기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일을 할 때 마다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지성이면 감천이고 열심히 하면 복 받고 하는 이런 사고들은 죄로 드러나게 되어요.

이제는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세로운 복의 개념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시면 우리 행함과 상관없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서 복을 받는 것이 우리 안에 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날마다 우리 안에서 엣 것은 폐하여지고 새 것으로 입혀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가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한은 항상 자기 행위를 근거로 해서 움직입니다.

이것은 몸의 본성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복음을 알아도 이 몸뚱이는 본능적으로 내 몸에서 발생된 것을 가지고 복이냐, 저주이냐 를 자꾸 만든다니까요.

 

착하게 살았으면 당당하고 나쁘게 살면 기가 죽어요.

자기 행함으로 희비해요.

마귀가 우리가 행한 것을 가지고 자꾸만 참소를 해 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머리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 하면서도 마음은 자기 행위로 인하여 희비 하는 겁니다.

 

그럼 성령이 우리 시선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럼 우린 그래 맞아,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셨지, 괜히 쫄았네, 그런다구요.

 

옛날에 문방구 앞에 가면 두더지 잡기 있지요?

때리면 올라오고 때리면 올라오고 때려도 때려도 자꾸 올라오잖아요.

그 모습이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그 모습으로 살아내지 못합니다.

이 몸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일들을 자꾸만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이 뭡니까?

우리가 율법대로 살지 못하여서 죽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들 행위를 가지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서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널 보지 말고 예수를 바라 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 안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납니다.

십자가의 도라는 것은 나를 근거로 해서 살고자 하는 것을 죽여 버리고 예수를 근거로 해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 십자가의 도를 적용을 시킵니다.

그럴 때 마다 내가 비록 이 땅에 살아가는 모습이 조금 비루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 해도 그럼에도 내가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 피뿌림의 은혜로 용서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달아질 때 우리는 마음의 평강을 얻고 쉼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나서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평강을 주실 때 예수님의 옆구리를 근거로 평강을 주십니다.

옆구리는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는 평강은 십자가를 통해서 주는 평강입니다.

 

이 가르침을 아브라함 식으로 말하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 여호와가 찾아 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지금 아브라함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 있는데 여호와가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얘기를 해주십니다.

이 땅이 너의 후손의 땅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너는 과거에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그 방식으로 살지 말고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방식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신약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우리로 하여금 어떤 방식으로 살도록 인도를 할까요?

율법식으로 살던 방식으로 살게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방식으로 살게 합니까?

 

예수님이 다 이루신 방식으로 살게 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계속 그 가르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의 옛사람의 사고와 옛사람이 추구하는 가치관과 싸우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같은 것을 깨트리는 전쟁을 하시는 하십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데 성령께서는 그것이 너희들에게 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화목이 돼서 그렇게 화목이 될 때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맨 날 그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하나님께서 저의 입술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사고와 개념들을 깨트리시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복음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날마다 우리 몸뚱이는 내 몸을 근거로 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죄라는 것을 규정받고 우리 몸뚱이에서 발생되는 것으로 복이 임하고 저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복이 온다는 사실을 자꾸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 여호와가 찾아 오셔서 아브라함에게 한 얘기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 찾아오신 여호와의 그 가르침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단을 쌓는 것입니다.

단을 쌓을 때 너희들이 기존에 알고 있던 가나안 신을 섬기는 개념으로 복이 오고 저주가 오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터 복이 오는 거야, 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믿으면 복이 오고 여호와의 이름을 믿지 않으면 저주가 임하고 이제는 복과 저주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그 십자가를 중심으로 복 받은 강도와 저주 받은 강도로 나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신명기 11장 26-32절 까지 봅시다.

 

신 11:26-32=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30 이 두 산은 요단강 저편 곧 해 지는 편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 31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얻으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할찌라 32 내가 오늘날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찌니라”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거기에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리심 산에 백성들을 절반 세우고 에발 산에 절반을 세워서 그리심 산에서는 축복을 하게 하고 에발 산에는 저주를 하게 합니다.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은 두 산인데 이 두 산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를 근거로 해서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한 쪽은 축복의 산이고 한 쪽은 저주의 산인데 그리심 산은 수풀이 무성한 산입니다.

이것은 수치를 덮어주는 산을 말합니다.

 

에발 산은 발가벗은 산이라는 의미로 민둥산입니다.

나무가 울창한 그리심 산에서는 축복이 선포되어 지고 벌거벗은 에발 산에서는 저주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결국 수치의 가림을 받은 자에게는 복이 임하고, 수치를 드러낸 자에게는 저주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을 신약 식으로 생각해 보세요.

구약에서는 우리의 수치를 가리는 것이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 가려진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수치를 가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수치를 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예수를 믿음으로 수치를 가리는 사람과 자기 행위를 가지고 수치를 가리려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 중간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마치 우편 강도와 좌편 강도가 나눠지듯이 복과 저주가 나뉘는 것입니다.

우편 강도는 내가 죄인인데 내 죄를 당신이 기억해서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용서해달라는 고백이 나오는 사람으로 복 받은 사람이고, 저주받은 사람은 자기 행위를 근거로 해서 예수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지금 이 시대도 교회 안에서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인해 우리가 용서받는다는 것이 증거되는 것도 있고 한 편으로는 아닙니다, 여러분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라고 하는 곳도 있단 말이지요.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 축복과 저주가 임하듯이 교회에서는 이런 양 쪽의 말이 모두 선포되어야 합니다.

에발 산의 저주도 선포가 되어야 하고 그리심 산의 축복도 선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 쪽을 갈라서 세운 것입니다.

 

하나만 들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을 설명하려면 저주를 통해서 설명이 되고 알아집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저주는 이런 것이고 복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얘기해 줘야 합니다.

 

신약에 와서 저주받을 신앙은 뭐에요?

자기 행위, 다시 말해서 옛 언약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으면 이게 저주받을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옛 언약을 폐하고 새 언약을 세우셨지요?

그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새 언약이 있고 옛 언약이 있는데 이 새 언약을 들어내기 위해선 엣 언약이 틀렸음을 드러내야 겠지요?

 

옛 언약은 우리가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우리가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저주받을 짓이고 하나님 앞에 복 받는 것은 내 허물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라고 증거되는 것을 붙잡는 사람은 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의 축복와 저주는 교회에서는 날마다 선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집어넣으면서 그들에게 주는 사명이 있습니다.

 

신명기 12장 1-7절을 봅시다.

 

신 12:1-7=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얻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2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3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 4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5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6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7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찌니라”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당부가 뭡니까?

들어가면 그 땅에 있는 신들을 전부 깨트리라고 하십니다.

신들을 깨트리고 그 자리에 여호와의 이름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지금 이 신명기는 아브라함 이후, 430년 이후의 사람들에게 준 것입니다.

430년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행했던 일들을 지금 후대의 후손들에게 또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서 그냥 놀라고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가면 반드시 기존의 그들이 섬기는 신들을 찍어내고 그 자리에 여호와의 이름을 새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들이 해야 하는 신앙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식으로 적용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기존에 갖고 있던 신관이 있고 저주와 축복의 개념을 갖고 있다니까요.

 

우리가 알고 있던 이 개념은 마귀가 주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 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기존에 알고 있던 개념들을 깨트리는 일들을 합니다.

 

너희가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나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복 받은 것이야, 라는 사고를 주입시키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몸뚱이는 옛 것이 편해요.

새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본능적으로 내가 열심히 뭔가를 해야 복을 받지, 라는 사고가 계속 들어옵니다.

그런 것들을 성령께서는 날마다 깨트리는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 행함으로 복이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일깨우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솔직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시고 그 새 언약을 우리에게 적용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날마다 우리 안에서 됩니까?

안 된다니까요!

 

이론은 알겠는데 실제 어떤 일들이 생길 것 같으면 우리 안에서 법이 발동을 합니다.

속된 얘기로 여러분이 나쁜 일을 했을 때 제일 먼저 다가오는 것이 뭡니까?

내 안의 법이 나를 참소하잖아요.

나쁜 짓 하고 나면 교회 오고 싶어요, 안 오고 싶어요?

 

우리는 나쁜 짓을 하면 본능적으로 숨고자 합니다.

하나님 낯을 피하고자 한다니까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 수치스러운 일이 생기면 그 사람은 교회를 옮기잖아요.

자기 수치를 모르는 곳으로 갑니다.

그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너의 그 수치는 그것이 있든 없든 니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스스로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뻔뻔스럽게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뻔뻔스러움이 믿음인 것입니다.

이 말을 곡해해서 듣지 마세요.

뻔뻔해 지라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음을 버리지 말란 말입니다.

 

아이들이 잘못을 했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공부를 못해서 빵점을 받았는데도 엄마한테 와서 밥 달라고 하는 아이는 엄마에게 법을 들고 나오는 겁니까? 믿음으로 나오는 겁니까?

 

믿음으로 나오잖아요.

사랑으로 나오잖아요.

내 꼬라지가 비록 빵점 맞아도 엄마 앞에 나갈 때는 그 빵점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엄마에 대한 사랑으로 밥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이를 법으로 다스리지 않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의 자녀들이 공부를 못해서 가출을 했다고 합시다.

가출을 한 아이를 여러분이 찾아 와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뭡니까?

밥 먹이는 거지요.

밥 부터 먹여 놓고 그 다음에 야단을 치지요.

 

우리 안에는 아무리 복음을 안다 할지라도 그 복음을 적용시키고 사는 것은 서툽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날마다 그 서툰 것을 간섭해서 다스리십니다.

왜 또 너는 너를 의지해서 살려고 하느냐?

왜 또 너 때문에 낙담을 하느냐 예수를 봐라!

 

로마서 7장을 한 번 보세요.

 

사도 바울이 성령이 가장 충만할 때 쓴 것이 로마서입니다.

그 로마서에서 자기 안에 두 법이 있어서 한 법은 하나님 법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한 법은 하나님 법대로 살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법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이 법이 더 강한 놈이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법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은 계속해서 짓눌림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곤한 자로다 라고 탄식을 하니까, 성령께서 바울아 왜 니 꼬라지를 보느냐? 니가 육신이 약해서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느니라.

 

어떻게요?

내가 내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네가 할 수 없는 그 죄를 예수님이 대신해서 담당해 주셔서 다 이루었느니라,

그러니까 이제는 니 꼬라지를 보지 말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는 법으로 사는 것을 영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우리는 영으로 산다 하면 정신이 멍해져서 환상 같은 거 보고 그러는 줄 아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로마서가 말하는 영으로 살고 육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육으로 사는 것은 율법 식으로 사는 것을 육으로 산다 그러고 새 언약으로 사는 것을 영으로 산다고 합니다.

 

너희 몸을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드리라는 말은 우리 몸뚱이를 가지고 착하게 살으라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가 있어요!

그 깊은 의미는 니 꼬라지를 보지 말고 예수 보고 살으라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너 육신이 약해서 못하는 그것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앞으로도 우리의 육신이 잘되는 기미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 되는 것 때문에 주눅 들지 말고 이런 나 때문에 예수님께서 피 흘리셨으니 그 피 의지해서 나아가란 말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항상 우리 안에는 이 두 법이 충돌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에 집어넣으신 것은 가나안의 기존의 질서를 꺠트리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내주하시는 것은 결국 우리 안에도 옛 법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옛 법이 한 번 네 이놈 한다고 해서 도망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일생은 사사기의 반복이에요.

 

참 재밌는 것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할 때에 그 전쟁을 하면서 가나안 원주민을 다 내쫓지 않고 조금씩 남겨 놓았습니다.

그렇게 남겨 놓은 것은 이 놈들이 여호와를 섬기는지 안 섬기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남겨 놓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 안의 죄성들을 다 없애주시는 게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서 없애주지 않는 것이 아니고 일부러 우리 안에 죄성을 남겨 두신 것은 이 죄를 통해서 계속해서 예수님의 의를 드러내는 식으로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세요.

우리가 죄를 안 지으면 예수 안 믿습니다.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다니까요.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죄를 바탕에 깔고서 일을 합니다.

그래서 이 육신은 아무리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어도 살아 내지를 못하는 겁니다.

살아내지 못하는 이 몸에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은혜와 긍휼을 부어 주십니다.

 

이게 로마서 11장 32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불순종에 가두어 두신 것은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누가 이것을 알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은 그런 얘기를 합니다.

기존에는 우리가 우리 능력으로 할 수 없었는데 성령이 왔기 때문에 이제는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분들이 추구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내가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죄 안 짓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성화주의자의 모토란 말입니다.

저는 그것을 반대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고자 하는 것은 내가 천사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이 존귀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이 찬미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 몸에 예수님의 공로를 남기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는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내가 연약할 때 드러납니다.

내가 죄를 이기지 못할 때 드러난단 말입니다.

성령이 능력이 없어서 나를 천사 못 만드는 게 아닙니다.

마치 여호수아가 능력이 없어서 가나안 족속을 다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고 일부러 시험하기 위하여 남겨 놓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속의 죄성을 끄집어 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할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들을 징계하시고 그 다음엔 용서를 부어주고 긍휼을 부어 주십니다.

이게 사사기 역사입니다.

 

사사기 역사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면 그 은혜를 받아서 또 죄를 짓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또 매를 대시고 그러면 또 죽겠다고 아우성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십니다.

그게 우리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여호와의 가르침을 받았듯이 날마다 저와 여러분들도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추구하는 옛 사람, 우리 본성 속에 자리 잡은 옛 사람의 죄성이 발각당하고 그것이 찍힌 바 되어 지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새 언약들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가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해야 하는 일들을 땅을 정복하는 개념으로 보지 마시고 신약적 의미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구약의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한 그 일을 하고 있구나…그렇게 보시란 말입니다.

그럴 때 구약의 아브라함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아브라함처럼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바알과 아세라 상을 찍어 내는 일들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 안에도 바알과 아세라가 있단 말입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뭐였나요?

풍요와 다산을 주는 신이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이 세상에 복을 주는 신이란 말이에요.

 

이것을 신약에선 뭐라 그랬나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걸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육신을 가지고 사는 한 이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가 없어요.

 

이걸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육신은 말씀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떡을 원합니다.

머리로는 말씀을 좇아가는데 몸은 떡을 쫓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간에 싸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이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싸움 속에서 우리는 내 연약함을 깨닫됩니다.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긍휼을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속에서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역설적이게도 넘어짐 속에서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주여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가 나와요..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부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단을 쌓았듯이 지금도 우리 안에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 이름의 단을 쌓는 일을 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존의 것들을 허물어 버리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기각 당할 때 마다 아파하지 말고,

아! 이것이 나의 죄였구나 생각하시고,

그 죄가 발각될 때 마다 낙망하지 말고 이런 죄 조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덮어 주시고 이겨주셨구나 라는 것을 깨달으시고 감사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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