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룻기 강해

9강. 공짜로 얻은 아들 (룻 4:13-22)

by coroa 2021. 1. 6.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9강. 공짜로 얻은 아들 (룻 4:13-22).-

-.정낙원 목사

 

 

 

구원(救援)이란? 외부의 힘에 의하여 건짐 받고 치료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이 되려면 독자적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어디에 가두어져 있어야 하고!

스스로는 회복불능 상태로서 타자로부터 치료 받아야만 할 정도로 상처투성이라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런 상태를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졌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구원이 되려면 절망 가운데 놓여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이나 앉은뱅이나 중풍병자와 같은 갖가지 불치병들을 고쳐주신 것도 다 이러한 구원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잘 보여주는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친 이야기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보면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인이 그 사람을 살려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그냥 죽어갈 뿐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인이 다 감당을 해 주어서 고쳐 줍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공짜로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못에 물이 동한다고 하여도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냥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38년 된 병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의 구원을 보여주는 사건들을 보면 전부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구원 속에는 구원받은 사람의 공로는 전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구원을 해 주신 분의 희생만 담겨져 있습니다.

 

그럼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기 자랑을 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해 주신 분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죄인을 구원한 것은 구원 받은 죄인을 자랑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오직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자랑하고자 함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4-6=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창세전 언약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이 구원 받는 것입니다.

구원하는 이유는 그 은혜를 찬미케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찬미케 하려는 것입니다.

 

왜? 구원 했느냐?

예수님을 찬미키 위함입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의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천국에 보면 만물이 세세토록 어린양을 찬미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럼 구원 받은 자들은 반드시 어린양을 찬미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올바로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이게 구원을 받은 사람이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사람의 삶 속에서는 늘 구원 해 주심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나옵니다.

이러한 세계를 천국이라고 합니다.

천국은 오로지 어린 양만 찬송이 되어지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간 모든 사람들은 어린 양의 희생으로 살아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예수님을 통한 죄인이 구원 받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구원 이야기가 되려면 강도 만난 자가 있어야 하고!

그 강도 만난 사람을 자신의 모든 것을 들여서 고쳐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은 38년 된 병자처럼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무기력한 죄인이 있어야 하고!

이런 죄인을 치료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죄값으로 대신 내어주고 고쳐주는 메시야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 속에는 구원자와 구원 받아야 하는 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염치없이 주는 것을 넙죽 넙죽 받아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여 그 사람을 살려내는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도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나오미 라는 한 여인이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룻이라는 여인의 희생으로 낳아진 아들을 자기 아들로 받고 있습니다.

이 아들을 통해서 다윗 왕이 생기고 종국에는 예수그리스도라는 메시야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나오미가 자신의 기업을 이어갈 아들을 얻는 사건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자기백성들이 천국을 유업으로 받는 이야기로 풀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오미의 야야기는 곧 우리들의 구원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곧 나오미처럼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예수님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오늘 분문을 나오미가 아들을 얻는 사건을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풀어봅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후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아버지도 잃어버리고!

에덴동산도 잃어버리고!

영생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로 인하여 잃어버려진 것을 예수님이 다시 찾아 주십니다.

어떻게 찾아 주시는가 하면 자신의 희생으로 찾아 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희생으로 찾아진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구원이라고 합니다.

 

모든 성경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이야기입니다.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것을 예수님이 회복시켜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어디를 펴도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를 계시하는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룻기서도 구원이야기입니다.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것을 찾아 주는 이야기입니다.

룻기에서는 과부에게 아들을 낳아주는 이야기로 구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룻기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하게 끝이 납니다.

며느리가 낳은 아들을 시어머니가 자기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결론을 다윗 가문의 족보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룻기가 다윗 왕가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간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합니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자 보세요.

룻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다윗의 조상이 됩니다.

 

그런데 신약에 대문(大門)을 열면서 예수님의 족보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에 다윗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되면 룻기는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럼 룻기를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풀면 아주 이해가 쉽겠지요.

그래요.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풀면 이해가 쉽습니다.

 

구원이란?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준다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냥 되찾아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희생으로 되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럼 잃어버려진 자가 되찾음 당하는 그 바탕엔 예수님의 희생이 깔려 있겠지요.

이걸 놓치면 안 됩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에 정신이 팔리면 안 됩니다.

그럼 예수님을 위한 구원이 아니고 나를 위한 구원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의 목적이 어긋나 버립니다.

이건 또 다른 죄가 됩니다.

 

구원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시려고 구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말할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기 위해서 구원을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을 찬미케 하려고 구원의 바탕에 예수님의 희생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 받은 그 바탕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사실을 간과하게 되면 구원이 나를 위한 구원이 됩니다.

이런 구원관은 이방인들의 구원관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구원입니다.

이는 곧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나의 자존감을 챙기는 식으로 나아가면 안 됩니다.

그럼 구원의 목적을 상실한 죄가 됩니다.

 

내 자존감을 챙긴다는 것은 예수와 떨어져 있는 독자적 존재란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입니다.

성도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 몸에 부속된 존재란 뜻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자신을 위한 삶이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도록 인도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에서는 언약을 위한 부르심으로 나타납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살도록 하였습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만든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죄란?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항상 스스로 왕이 되어 사는 경향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자기 존재를 위하여 살아갑니다.

이러한 죄성이 하나님조차도 자기 삶에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죄인을 일컬어 우상숭배자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은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항상 자기 몸뚱아리를 챙기는 식으로 역사를 합니다.

구원을 받아도 예수님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구원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니 비록 구원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죄에게 미혹 당하면 신앙을 자기 삶에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가지고도 자기 우월성을 증명코자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으뜸이 되고자 합니다.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가 영광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너희를 위하여 살지 말라고 하시고 죄는 우리를 위하여 살라고 합니다.

이걸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라고 합니다.

그럼 두 소욕 간에 필연적으로 싸움이 일어나겠지요.

성도는 이러한 사고와 싸우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끊임없이 이방인들의 구원관과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고가 죄라고 고발을 합니다.

이방인이란? 자기 몸뚱이를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구원관에 빠지면 예수도 이용대상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이 아니고 나를 위한 구원이 되고 맙니다.

이러면 신앙 속에는 나 구원 받았다만 있지!

왜? 구원 했는지는 없어집니다.

예수는 나를 구원하는 데에만 필요하고 그 후로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이 자기 부인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오해하여 이방인들처럼 자기 구원을 챙기고 있습니다.

 

“왜? 구원 했느냐”

“무엇을 위하여 구원 했는가!” 는 없고!

“나 구원 받았다!” 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는지는 없고!

“나 구원 받았으니 내 맘대로 살거야!” 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자기 부인이 일어나지 않고 도리어 복음을 이용하여 자기 긍정으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이 이 지경이 되고 말다 보니 예수는 내 욕망 채워주는 수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의 피를 이용해서 자기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부인이 없고 자기 욕구대로 삽니다.

 

물론 죄인은 자기 욕구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러한 것과 싸우는 자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인하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지금 저는 우리에게 이러한 아픔이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이런 아픔을 몰라요.

왜? 구원 속에 담겨져 있는 지향성과 전혀 다른 지향으로 살고 있을까요?

이 모두가 복음을 곡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자기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곡해하면 신앙을 자기 유익을 위하여 하게 됩니다.

 

그럼 나오미처럼 자기 몸뚱이 챙기고자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어요.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살아야겠다는 것만 남아요.

이게 죄 거든요.

 

죄가 뭐냐?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창조가 된 자가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살라고 구원을 했는데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성을 우상성이라고 하는데 사도 바울은 이걸 한 마디로 탐심이라고 했습니다.

탐심이란? 곧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의 신(神)은 자기 배요 땅에 일을 생각하는 것이라” 고 했어요.

그러면서 이런 자들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 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을 봅시다.

 

빌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누가 십자가의 원수냐?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신(神)은 자기 배입니다.

 

여기서 배란? 먹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육신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땅에 일이라고 합니다.

 

땅에 일이란? 육신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왜? 육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까?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빼내기 위해서 죽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이용해서 이 땅에 말뚝을 박고자 하고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자들입니까?

그러니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신앙을 내 삶에 수단으로 생각하면 모두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징벌하십니다.

이러한 사고가 죄라는 것을 고발하고 그 생각을 회수하여서 회개케 하십니다.

 

룻기서에 보면 이렇게 살다가 징벌을 당한 자가 있습니다.

바로 나오미라는 여인입니다.

나오미의 남편은 엘리멜렉입니다.

“엘리멜렉” 이라는 이름의 뜻이 뭔고 하니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 입니다.

 

성경 속에서 이름은 하나의 계시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름 속엔 그 사람의 운명이 담겨져 있어요.

이름이란? 부모가 지어줍니다.

“넌 이런 사람이라” 는 뜻에서 지어주는 것이 이름이 갖는 의미입니다.

 

부모가 “엘리멜렉” 이라는 이름은 지어 줄 때는 너는 앞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라고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엘리멜렉의 아내를 나오미라는 여인으로 맞이하게 한 것입니다.

“나오미” 라는 이름은 “기쁨” “즐거움” “행복” 이란 뜻입니다.

 

그럼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이름을 합성하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행복이라” 는 뜻이 됩니다.

삶에 기쁨이 어디에 있다고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사는 것이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름이 갖는 의미와 정 반대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 거하는 땅을 떠나 이방으로 내려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떠나 버립니다.

이름이 갖는 의미와 전혀 다른 삶을 택한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고 하나님은 자기를 도와주는 수호신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하면 왔다가 필요 없으면 떠나 버리는 그런 신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것은 지금 식으로 그냥 이사 한 것이 아닙니다.

이건 신(神)을 바꾸는 행위와 같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도(背道)한다는 말입니다.

난 하나님이 싫어!

이방 신(神)이 좋아!

그래서 이방 나라로 삶에 근거지를 옮겨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야 할 백성이 본분을 망각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이방 신(神)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 간 것입니다.

이걸 바울 식으로 말하면 땅에 일을 생각하고 신(神)을 자기 배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 짓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의 가정에 저주를 퍼붓습니다.

이들의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합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죽여 버립니다.

잘 살고자 내려갔는데 도리어 망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만 성도에게 있어 저주란? 잘라내고자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주가 아니고 징계입니다.

 

이방인에게 내려지는 저주는 끝장을 내 버리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에게 있어 저주란? 고치고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은 저주라고 하여도 실상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의 말은 곧 “너희들 내 말 안 들으면 혼이 난다” 라는 사랑의 소리인 것입니다.

언약 속에 말 안 들으면 혼이 난다는 것이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 혼 나는 것도 언약을 이루기 위한 것이므로 복(福)인 것입니다.

 

이를 알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역설적으로 외쳤던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을 못 알아들었지만 말이에요.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렇게 다루고 계신데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대하시고 계신데 우리는 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악악댑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난 나오미가 모압이라는 이방 나라에 가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잡아먹고 청상과부가 된 것도 언약에 의한 법 집행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나오미도 나중에 다 망하고 난 다음에 이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내가 나갈 때는 풍족하게 나갔다가 하나님에게 된통 얻어맞고 빈 털털이로 돌아 왔다고 간증을 한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자기 백성에겐 저주가 없습니다.

망해도 사랑입니다.

이 땅에서 끊어진다고 하여도 사랑입니다.

이걸 알아야 두렵지가 않아요.

이 신앙이 있어야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이 능력을 알기 위해서 어째서 성도가 망하는 것이 복이고 저주가 아닌지를 살펴봅시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결정이 났어요.

야곱과 에서를 보세요.

복중에 짖기 전에 이미 구원해 놓았어요.

 

이걸 창조라고 합니다.

창조는 중간에 피조물의 조건으로 변하지 않아요.

그 상태로 완성이고 완료에요.

야곱은 천국 가기로 작정이 되어서 태어났고, 에서는 지옥 가기로 작정이 되어서 태어났어요.

 

작정(作定)이란? 완료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건 변하지 않아요.

작정을 다른 말로 하면 법입니다.

 

법이란? 그대로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작정은 중간에 어떤 이유로 인하여서 변개되거나 취소되어지지가 않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이러한 작정으로 태어났어요.

우리 모두가 이렇게 창조가 되었습니다.

 

성도는 자기 행함과 상관이 없이 구원이 완료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살아가는 것을 보아가면서 구원해 주지 않아요.

구원 해 놓고선 구원 받은 자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목적을 위하여 달달 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에 개입을 합니다.

언약을 위해서 살도록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이 간섭이 야곱으로 하여금은 장자권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나타나고!

반면에 에서는 비록 장자로 태어났지만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은 천국백성으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비록 차자(次子)로 태어났지만 장자권을 향하여 살게 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에서는 지옥 백성으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에 비록 장자(長子)로 태어났지만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서의 이러한 모습을 히브리서에서는 이걸 망령된 짓이라고 했어요.

망령되다는 말은 미쳤다는 말입니다.

미친놈이니까 미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지옥 갈 놈이기 때문에 지옥 갈 짓을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야곱은 천국 갈 놈이기 때문에 천국 갈 짓을 하는 것이에요.

이걸 복 받은 놈은 복 받을 짓을 하고, 저주 받은 놈은 저주 받을 짓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어느 것 하나 억지가 없어요.

아주 자연스러워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진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복음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은 복음을 핑계 삼고 자기 유익을 위하여 에서처럼 살아가고 있어요.

복음 복음하면서 내 맘대로 살거야! 라면서 자기 육신을 위하여 사는 자들은 모두가 망령된 에서의 계열이에요.

그러니 에서와 같은 짓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팥죽보다 장자권이 중요했고!

에서는 장자권보다 팥죽이 중요했어요.

이는 결국 두 사람의 본질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이 삶에 모습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나 에서는 모두가 아담 안에서 태어납니다.

둘 다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야곱이나 에서 모두 자기중심으로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에겐 자기 뜻으로 살지 못하도록 간섭을 합니다.

이게 신자가 당하는 아픔입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탐하는 것은 아버지의 유업을 얻고자 함입니다.

만약에 야곱이 장자권의 축복을 받으면 집에서 쫓겨난다고 했으면 안 받았을 것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손익 계신이 빠른 자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교활한 “약탈자” 라는 의미에서 야곱입니다.

 

이렇게 교활한 자가 장자의 축복을 받으면 아버지 재산은 한 푼도 물려받지 못하고 집에서 쫓겨난다고 하면 누가 받겠습니까?

당연히 안 받았을 것입니다.

장자권을 탐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 아래서 태어난 야곱은 장자권을 조상들이 살아온 관습으로 생각했습니다.

장자가 되면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셈이 어두운 에서에게 팥죽을 주고 장자권을 산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에서가 훨씬 인간미가 있어요.

 

그런데 장자권의 축복을 받자 막상 돌아온 것은 야곱이 생각하던 것과는 정 반대 현상이 돌아왔습니다.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건 야곱이 바라는 그림이 아니에요.

 

야곱은 아비로부터 장자권의 축복을 받으면 에서가 집에서 쫓겨 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러한 것은 야곱 속에 마귀적인 사고가 자리 잡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옥 백성들의 근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야곱 속에 있는 마귀적인 근성을 뽑아내는 일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천국 백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생각이 죄라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급기야 야곱을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이 수많은 꾀를 쓰면서 재산을 모아 놓은 것을 다 빼앗아 가는 방식으로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일평생 이런 삶을 살았어요.

 

그래서 야곱은 바로 앞에서 험악한 삶을 살았다고 하였어요.

야곱은 자기 인생을 한마디로 참 더러운 인생을 살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 때문에 말이에요.

이건 하나님을 욕하는 말이에요.

재수 없이 하나님에게 걸려들어서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였다는 빈정거림이에요.

 

야곱이 비 언약적으로 살았다고 해서 지옥에 보내지는 않습니다.

다만 비 언약적인 사고 때문에 아픔을 겪게 합니다.

그 비 언약적 사고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비 언약적 사고란? 땅에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힘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비 언약적 사고를 거두어 가는 식으로 간섭을 합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일어날수록 잘난 자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못난 자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니 죽을 지경인 겁니다.

이건 나오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에요.

 

잘난 맛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해요.

그런데 맨 날 쪽 팔리는 일을 당하게 하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어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만물의 찌끼같이 만든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잖아요.

이건 인간들이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 서로 높은 자리 앉겠다고 다투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전부 거지로 만들어 버렸어요.

12 제자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이 땅에서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면서 산 사람이 없어요.

다 비참하게 살다가 죽임 당했어요.

 

모두 다 바울의 말대로 만물의 찌끼처럼 살았고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살았어요.

땅에 것은 한 뼘도 못 취하였어요.

그러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게 천국 가기로 작정이 된 자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에 모습입니다.

 

죄인을 자기 본성과 반하는 쪽으로 이끄시니 얼마나 힘들고 아프겠어요.

그럴 때마다 야곱 속에 있는 죄성들이 하나 둘씩 터져 나옵니다.

신앙생활은 원리적으로는 순종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불순종으로 나타나요.

 

우린 날마다 우리 안에 있는 탐욕이라는 죄를 토해내고 살아가요.

우리의 원함과는 상반된 곳으로 끌려가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 입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만들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많을수록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쌓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을 하실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자로 드러납니다.

야곱처럼 참으로 더러운 팔자라고 한다니까요.

 

그러니 신앙생활을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마세요.

아프고 힘든 길이에요.

아프고 힘든 길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갈 수가 없고 하나님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 뒤에는 하나님께서 모질게 간섭하신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믿음을 지키고 사는 것도 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간섭의 결과이지 우리 스스로 지켜온 것이 아닙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간섭하심 때문에 지금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금 여기 이렇게 서 있는 그 바탕엔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흔적들이 고스란히 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 있던 자를 꺼내서 복음 전하는 목사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전 복음을 전해도 하나도 자랑거리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쬐끔 하나님의 사랑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어요.

내가 살아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게 해 오셨구나 를 알게 되어요.

 

나오미도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리 저리 간섭하여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나오미 스스로 온 것이 아니에요.

질질 끌려 왔어요.

 

오늘 본문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호와께서” 입니다.

 

“여호와께서~ 잉태케 하셨다”

“여호와께서~ 나오미의 잃어버린 것을 회복케 하시려고 기업 무를 자를 주셨다”

이 “여호와께서” 라는 주어(主語)를 놓치지 마세요.

 

“여호와께서” 란 말은 여호와가 그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나오미를 망하게 한 것도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고!

룻을 통해서 나오미에게 아들을 낳게 해 준 것도 “여호와께서” 하신 일입니다.

룻이나 나오미에게는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여호와는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십니다”

“여호와는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케도 하십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망하는 것도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복(福)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善)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복(福)에 민족은 그 어떤 상황에 놓였어도 복(福)이고!

저주의 민족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저주에요.

그러므로 성경은 복(福)과 저주를 어떤 환경이나 조건으로 말하지 않고 어느 영역 안에 있느냐로 구분해요.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어느 아래 있는지가 중요하지 내가 어떤 환경에 있느냐가 중요치 않아요.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복(福)이에요.

그럼 예수 안에 있는 우린 모든 것이 복(福)인 것입니다.

예수 안이라고 한다면 망해도 복(福)이고!

흥해도 복(福)입니다.

 

그러니 삶에 무게가 무겁고 힘들더라도 그걸 내 삶이라 생각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의 삶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럴 때 사도 바울 같은 안목으로 보게 됩니다.

 

우겨쌈을 당하여도 당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당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내가 땅에서 망하는 것이 복(福)이냐 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이 비밀이 깨달아질 때 비로서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라” 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범사가 감사하게 되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가벼워져요.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속에 나타난 사건이나 인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스려 가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나오미 라는 한 여인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고 계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오미 속에서 나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룻기는 우리가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것을 예수님이 대신 찾아 주셨듯이 나오미가 잃어버린 기업을 룻이 대신 되찾아 주는 구원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룻기를 어떻게 끝내는지 살펴봅시다.

 

룻기에서는 “나오미”와 “룻”이라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두 사람은 하나입니다.

“나오미는 옛 사람”을 상징하고!

“룻은 새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동일한 운명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야곱의 약전(略傳) 속에 요셉이 들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약전(略傳)이란? 이력서와 같은 뜻입니다.

야곱의 이력서(履歷書)에 요셉의 일생이 기록이 되어 있어요.

이는 두 사람의 인생이 하나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보면 야곱과 요셉은 한 사람이에요.

“야곱은 옛 사람”을 상징하고!

“요셉은 새 사람”을 상징합니다.

우리 개인에게 적용하면 야곱은 우리 옛 사람이고 요셉은 새 사람이에요.

이걸 나오미와 룻으로 비교하면 나오미는 야곱과 같고 룻은 요셉과 같아요.

 

알다시피 야곱은 얍복강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야곱은 옛 사람”이고!

“이스라엘은 새 사람” 입니다.

 

그런데 옛 사람 야곱이 얍복 강에서 죽었어요.

야곱이라는 이름이 삭제 당하였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거듭났습니다.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거듭난 것입니다.

거듭난 새 사람인 이스라엘의 삶을 요셉이 대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야곱의 약전(略傳)에 요셉의 일생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옛 사람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자이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사람은 예수 안”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옛 사람 야곱 속에는 아담의 모습이 담겨져 있고!

새 사람 요셉 속에는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도 마찬 가지입니다.

“나오미는 옛 사람”을 상징하니까, “나오미 속에는 아담의 모습”이 담겨져 있고!

“룻은 새 사람”을 상징하니까 “룻 속에는 예수님의 모습”도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구원사적으로 보면 요셉이나 룻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어요.

요셉이나 룻은 예수님의 삶을 선취적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또한 요셉이나 룻은 모든 성도의 표상입니다.

그러니 요셉이나 룻 속에는 우리 성도의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도 함께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걸 이중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이나 룻을 다루어 가는 모습 속에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야 하는 성도의 삶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나 룻의 모습 속에는 어떨 땐 예수님의 모습이 나오고, 어떨 땐 거듭난 성도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어요.

 

왜? 그런고 하니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일을 행하시는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의 사건 속에서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 이 둘을 잘 관찰해서 본문의 내용을 상고하여야 해요.

그래야 본문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를 찾게 됩니다.

 

그럼 나오미를 추적하여 봅시다.

나오미는 예루살렘에서 살던 여인입니다.

그런데 모압이라는 이방 나라로 먹고 살기 위해서 내려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립니다.

 

남편과 아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문으로서는 재앙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남자들이 없는 상태에서 낯선 이방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무너진 가문(家門)을 일으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보아스 라는 고엘을 통해서 아들을 얻게 됩니다.

 

여기에 누가 투입이 되는가 하면 룻입니다.

룻은 자기 인생이 없어요.

철저히 나오미를 위해서 희생만 합니다.

룻은 나오미의 기업을 잇게 해 주기 위하여 투입이 된 여인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룻기의 중심 인물은 나오미 임에도 제목을 룻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룻의 이야기가 룻기의 핵심이에요.

나오미는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룻은 의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룻의 희생이 곧 예수님의 희생과 같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무너진 나오미가 룻의 희생으로 기업을 이어갈 아들을 얻게 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으로 천국이라는 기업을 유업으로 받는 구원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룻기는 곧 예수님의 구속사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이러한 모습 속에는 성도의 구원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오미는 원래 예루살렘 사람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이방나라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이는 곧 아담이 에덴동산을 떠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과도 같습니다.

 

우린 여기서 인간의 본성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사람의 행복이나 기쁨이 환경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환경을 만들고자 합니다.

 

돈이 있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하고!

사업에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고!

출세하면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세상 것으로 기쁨을 찾고자 합니다.

 

나오미 역시 그랬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기근이 오자 모압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나오미는 떡이 있으면 행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언약이 있는 땅을 버리고 떡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떡을 쫓아갑니다.

떡을 얻기 위해서 신앙을 버립니다.

그러나 세상이 안겨 준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입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우린 모두가 이러한 굴레를 돌고 돌아 결국엔 처음 그 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돌아 올 땐 나오미처럼 슬픔에 사람으로 오게 됩니다.

이게 죄인들이 가는 코스에요.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가 타락과 징계 그리고 회복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내러티브가 아담이 범죄로 잃어버린 것을 예수님이 다시 찾아주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을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으로 말하는 것도 다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잃어버림과 다시 찾음 속에 구원의 의미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렸다 함은 원래 소유하던 것을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과정에 예수님의 희생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포카스는 이 예수님의 희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룻이 낳은 아들을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아들을 얻은 것입니다.

아들을 얻는 것은 기업을 잇는 것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기업을 잃어버린 여인은 나오미입니다.

그런데 이방 여인인 룻이 나오미가 잃어버린 기업을 되찾는데 희생을 합니다.

나오미는 룻의 희생으로 기업을 잇게 됩니다.

 

신약에 오면 기업을 잇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럼 나오미는 아무 일 하지도 않고 구원을 받은 것이 됩니다.

나오미는 룻이 낳아준 것을 가만히 앉아서 고스란히 얻은 것입니다.

 

이건 마치 성도의 구원에 모습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아무런 노력도 없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홀로 다 이루신 것을 우린 가만히 앉아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가 무엇인가 하면 가만히 앉아서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게 창조주와 피조물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창조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창조나 구원이나 같은 말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홀로 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는 일을 하십니다.

창조란?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없음이란? 무(無)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묵시(黙示)라는 창세전에 있던 것을 역사(歷史)라는 곳에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려낸다는 뜻입니다.

창세전에 언약된 것을 실체화 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창조 기사를 보면 하나님이 불러내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를 보세요.

하나님이 “있으라” 명령하잖아요.

 

명령(命令) 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명(命)하시면 뭔가 하나씩 툭툭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곧 명(命)하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명(命)하신다고 하는 그 명(命)이 목숨 명(命)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곧 생명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말씀 하시면 즉 명(命)하시면 생명이 툭툭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창조가 된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말씀 하시면 마치 묵시라는 생명 주머니 속에 있는 것들이 하나 둘씩 역사 속에서 창조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면 없는데서 있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건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드는 것이니 오해하지 말고 그 의미만 건지세요.

 

우리가 어렸을 때 흔히 부모님들이 하는 말입니다.

자식을 삼신(三神) 할머니가 점지해 주셨다고 하지요.

점지해 주셨다는 말은 손으로 넣어 주셨다는 말이에요.

점지(點指)란 말은 이미 있던 것을 넣어 주셨다는 말이에요.

 

아이들을 삼신(三神) 할머니가 각 사람에게 주셨어요.

안동 댁에게는 이놈을 주고!

경산 댁에게는 저놈을 주고!

광주 댁에게는 그 놈을 주고!

서울 댁에게는 요놈을 주고!

너는 이 놈하고!

너는 저놈 해라! 하는 식으로 넣어 주신 겁니다.

참 재미있지요.

 

왜? 하필 삼신(三神) 할머니 라고 할까요?

삼신(三神)이란? 신(神)이 세 분이란 말입니다.

꼭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 삼위 하나님과 같지요.

이건 무속(巫俗) 신앙 속에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만 것으로 담아 놓으신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보면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과 능력이 보인다고 했잖아요.

무속 신앙은 만물을 숭배하는 신앙이에요.

그러니 그 속에도 하나님에 대한 것들이 담겨져 있어요.

다만 그들이 모를 뿐이에요.

 

성경이 보이면 만물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어요.

하나님의 일하심이 충만 함을 읽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단 말입니다.

만물을 섬긴다는 말이 아니고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을 보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하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 것은 묵시(黙示)에요.

그리고 보이는 것은 역사(歷史)에요.

 

보이는 이 역사가 보이지 않는 묵시에서 나왔다고 하지요.

이걸 만물이 주께로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 속에 하나님의 신성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창조가 뭐라고 했나요?

불러내는 것이라고 했지요.

우리에게 적용하면 묵시 속에 있던 우리를 하나님이 야! 정낙원이 너 역사로 나가!

그래서 제가 역사 속에 생겨난 것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있던 나를 하나님이 역사로 내 보낸 것입니다.

쉬운 말로 역사 속에 있는 정낙원이는 묵시에서 역사로 잠시 출장 왔어요.

그러다가 다시 돌아가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삼층천에 갔는데 거기서 묵시 속에 있던 바울을 만났어요.

역사에 있는 바울은 묵시에 있는 바울의 그림자에요.

그러니 세상에서 온갖 고생을 하는 바울은 묵시에서 출장을 온 바울이에요.

역사 속에서 출장을 다 마치면 다시 묵시라는 삼층천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바울은 이걸 보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쫓아간다고 했어요.

바울은 죽을 날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기쁘고 신이 나는 것입니다.

빨리 귀향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군인이 제대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그랬어요.

 

요 17: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것은 창세전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가 가까이 오자 아버지여 영광 받으세요! 라고 했어요.

이는 “아버지 고맙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여 창세전에 우리가 함께 누렸던 그 영광을 다시 누리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겠어요.

이걸 알아야 해요.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제대하는 것이에요.

성도에게 죽음이란? 안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고 즐겁습니까!

그러니 죽음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것입니다.

 

제발 이 비밀을 좀 아시길 바랍니다.

이 비밀을 알아야 삶이 가벼워져요.

예수님은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하는 자기 백성들을 건져주시려고 오셨어요.

구원이란? 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구원 받은 성도라고 한다면 죽음을 감사해야지 재수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되어요.

그건 온전한 믿음이 아니에요.

죽음이 두렵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뭔가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죽음이 감사로 다가오게 되어 있어요.

 

이사야 57장을 봅시다.

 

사 57:1-2= “의인이 죽을찌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찌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의인의 죽음은 평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의인이란? 모든 성도를 지칭하고 있어요.

세상 사람들은 성도가 죽는 것을 안 되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은 곧 침상에서 편히 쉬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벗어 버리고 쉬는 것이 죽음이에요.

그러니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이 세상은 저주 받은 곳이에요.

그러니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만큼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이 복(福)이에요.

성령이 임하면 육신의 장막을 벗어날 날을 소망하게 되어요.

성도는 이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없는 자는 성령이 그 안에 없는 사람입니다.

성도가 아니에요.

그냥 교회 들락거리는 교인이에요.

교인은 종교인이지 성도가 아니에요.

 

종교인은 땅을 지향하고 살고 성도는 하늘을 소망하고 살아요.

종교인은 호적이 흙에 기록이 되어 있지만 성도는 호적이 하늘에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종교인들은 교회에 와서도 땅에 일에 관심을 두지만 성도는 세상에서 살아도 하늘에 일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처럼 묵시에서 역사로 잠시 출장을 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묵시라는 창세전 세계에서 역사라는 이 세상에 잠시 출장 왔다가 하나님 심부름을 다 하시고 다시 원래 계시던 그곳으로 돌아가셨어요.

우리도 그리로 돌아갈 겁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찾아짐을 통해서 돌아갑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이런 구원을 구약에서는 창조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어요.

신약에선 거듭남으로 말하고 있어요.

죄인이 구원하는 것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위에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을 하늘로부터 창조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듭니다.

 

태어난다는 말은 “태(胎)에서 나온다” 는 말이에요.

태(胎)란? 생명을 싸고 있는 주머니란 말입니다.

쉬운 말로 아이가 담겨져 있는 주머니란 말이에요.

그러니 태어난다는 것은 “생명 주머니”에서 빼내 주신 겁니다.

생명 안에 있던 자를 불러내신 거에요.

 

그러니 태어난다는 말은 생명 주머니에 있던 것이 세상에 나온다는 말입니다.

생명이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주머니에요.

요한복음 1장 4절을 보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했어요.

예수님 안에는 한 알의 밀알 속에 수많은 밀알들이 들어 있듯이 수많은 생명들이 들어 있어요.

 

아담 안에서 땅에 속한 온 인류가 나왔듯이!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성도가 나왔어요.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을 예수님 안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를 일컬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라고 합니다.

자기 백성이 누구입니까?

청세로부터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들이지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잖아요.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삼층천에서 선재(先在)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았잖아요.

삼층천에 있는 바울은 역사 속에 있는 바울보다 먼저 있는 자에요.

나중에 생겨난 자가 아니고 전에 있었어요.

삼층천에 있는 바울은 창세전부터 있는 바울이에요.

 

이 바울이 나중에 역사에 속한 바울이 죽으면 마중을 나갑니다.

흙에 속한 몸을 하늘에 속한 몸으로 바꿔버려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고린도후서 5장을 봅시다.

 

고후 4:16-5:5=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바울이 지금 환란 당하는 성도들에게 위로하고 있습니다.

너희들 예수 믿다가 고난 받는다고 낙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고난 받는 것은 모두가 그 속에 예수라는 보화를 질 그릇 속에 담고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땅에 장막이 무너진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땅에 있는 육신이 죽는 것은 하늘에 있는 새로운 몸을 입기 위함이라는 것이에요.

하늘에 영원한 장막이 준비가 되어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려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러한 사실들이 믿어지는 겁니다.

성도는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는 것을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은 잠간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이라고 하잖아요.

보이는 것은 역사 속에 있는 우리들이에요.

보이지 않는 것은 묵시 속에 있는 우리들이구요.

이게 믿어지고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작게 보여져요.

 

우린 이미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입니다.

이미 낳아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호적에 올려져 있는 것입니다.

마치 출생한 아이를 호적이 올리듯이 존재하는 자를 호적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선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백성들은 묵시 안에서는 이미 있던 자들입니다.

다시 바울을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더니 거기에 자기 자신이 있음을 보았잖아요.

 

쉬운 말로 세상에 있는 바울은 삼층천에 있는 바울에게서 나온 아바타에요.

그러니 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가서 창세전이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 있던 진짜 바울을 본 것입니다.

 

우리들도 바울처럼 묵시에 있다가 잠시 역사로 출장을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잃어버린 자를 다시 찾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습니다.

목자가 잃어버려진 양을 찾아서 집으로 데려갑니다.

아버지 집을 나가 살던 탕자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비유가 나옵니다.

 

위 세 가지 비유 모두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를 죄인이 회개하여 구원 받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구원이란? 주인이 잠시 잃어버려진 것을 다시 찾는 형식으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누가 찾느냐 하면 주인이 찾아요.

주인이 하나라도 빠지지 않고 다 찾아내세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여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다고 온 방을 쓸고 닦고 하잖아요.

목자가 잃은 양을 찾고자 온 들과 산으로 찾아다니잖아요.

그리고 기어코 찾잖아요.

 

왜? 주인이 찾아다니는 줄 아세요.,

그건 주인이 기쁘고 싶은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그 기쁨을 만끽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고서는 주인이 잔치를 벌리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이에요.

구원은 우리의 원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주인의 원함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도 주인이고!

다시 찾는 것도 주인이에요.

묵시 속에 있던 자를 역사로 내어 보낸 것도 주인이고!

역사 속에 있던 자를 다시 묵시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주인이 하세요.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모두가 주인이 하세요.

구원은 철저히 주인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 속에는 구원자가 일하신 흔적들만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 속에는 구원해 주신 구원자의 영광만 담겨져 있어요.

구원자란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구원 속엔 예수님의 공로만 오롯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작에서 끝까지 다 하셨어요.

 

신앙생활이란? 이러한 사실을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국에서 어린 양에게 세세토록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는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알리고자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룻기가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시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룻기는 비록 짧지만 그 속에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진액처럼 담겨 있어요.

 

성도에게 있어서 기업의 의미는 천국(영생)입니다.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준다고 하잖아요.

유업이란? 물려받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일구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공짜로 받아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셔야지만 받을 수가 있습니다.

내가 달라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구원을 받는 일에는 우리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냥 받으면 되어요.

나오미처럼 룻이 낳아준 아들을 받으면 되어요.

나오미 대신 룻이 희생했어요.

 

이처럼 기업을 얻게 된 배후에는 반드시 희생당한 의로운 사람이 있어요.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 반드시 희생당하신 분의 흔적이 있어요.

나오미가 얻은 아들은 오직 룻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의 희생으로 아들을 얻고 기업을 이어가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요.

그래서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이 뭐냐?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죄인이 구원을 받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소식이잖아요.

죄인은 독자적으로 구원받을 길이 없어요.

오로지 저주뿐입니다.

 

마치 나오미처럼 늙은 여자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과 같아요.

이제 가문에 문을 닫을 일만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누군가가 아들을 낳아 줍니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 때가 있나요!

비로서 잃어버린 기쁨을 다시 찾게 된 것입니다.

 

자 보세요.

나오미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는 나오미로 살았습니다.

나오미 라는 이름의 뜻은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압으로 내려가서 가진 것을 다 잃어버립니다.

살 소망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모압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올 땐 “마라”로 돌아옵니다.

마라란? “슬픔”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룻을 통하여서 다시 아들을 얻게 되어 기쁨을 되찾게 됩니다.

 

룻이 낳아준 아들은 기쁨의 아들입니다.

룻이 낳아준 아들은 나오미의 죽음에서 낳아진 아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낼 수가 있어야 합니다.

 

나오미에겐 엘리멜렉이라는 남편으로부터 낳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들은 나오미의 “있음에서” 낳아진 아들들입니다.

그러니 나오미의 아들입니다.

 

나오미가 자기 힘으로 낳은 아들은 죄 아래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이들은 하늘나라 기업을 이을 수가 없습니다.

천국은 혈과 육으로는 갈 수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난 자라야지만 갈 수가 있습니다.

 

나오미의 가문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가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자기 힘으로 낳은 아들들이 가문을 이어가면 안 됩니다.

그럼 자기 힘으로 지켜가는 가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오미를 “있음의 자리에서 없음의 자리”로 끌어내린 것입니다.

 

나오미의 힘으로 낳아진 아들을 거두어 가는 일을 단행하십니다.

그리곤 나오미의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아들을 주십니다.

다시 얻게 된 나오미의 아들은 자기 공로가 전혀 없는 아들입니다.

오로지 룻의 희생만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룻이 낳은 나오미의 아들에 이름을 “오벳”이라고 짓습니다.

오벳이란? “여호와의 종”이라는 뜻과, “섬기는 자” 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합해서 말하면 “여호와의 종으로서 섬기는 자” 란 뜻입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는 섬기는 자이지만 우리 인간들에겐 구원자에요.

왕이란 말입니다.

그럼 여호와의 종으로 오셔서 섬기신 왕이 누구인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룻기의 결론을 다윗 왕의 족보 이야기로 끝을 내는 것입니다.

 

이게 무진장 중요한 이야기인데 이것만 살펴보고 마칩시다.

왜? 룻기의 끝을 다윗의 족보로 마치느냐!

그리고 왜? 나오미가 얻은 아들에 족보를 베레스로 시작을 하느냐! 입니다.

 

18-22=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이게 엄청 중요해요.

“베레스”가 누구인가 하면 다말의 희생으로 낳아진 아들입니다.

 

베레스도 오벳처럼 없어야 하는 자인데 한 여인의 희생으로 있게 된 자입니다.

그러니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온 자들입니다.

이걸 창조라고 했어요.

 

그럼 베레스가 어떻게 태어난 자인지 살펴봅시다.

 

베레스의 어미는 다말입니다.

다말이 누구입니까?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다말은 자신의 희생으로 유다 가문의 대(代)를 이어주는 자식을 낳아주었습니다.

그러니 다말은 룻과 같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한 가문을 자신의 희생으로 구한 여인입니다.

 

유다는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과 혼인을 하고 엘과 오난과 셀라 라는 세 아들을 낳았어요.

유다는 알다시피 야곱의 아들입니다.

야곱의 아들이란 언약 백성입니다.

 

언약 백성이 비 언약 백성인 가나안 여자와 혼인을 한 것은 죄입니다.

거기서 얻어진 아들들은 모두가 죄 아래서 얻은 아들들이에요.

그러므로 유다의 가문을 이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가문에 다말이 큰 며느리로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엘이라는 남편이 여호와 앞에 악하므로 갑자기 죽어 버립니다.

그러자 유다가 계대 결혼법으로 둘째 아들인 오난을 형수에게 들여보내서 대를 잇는 자식을 낳도록 합니다.

 

그런데 오난이 형수가 자식을 낳아도 자기 자식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서 형수에게 씨를 주지 않고 땅에 설정해 버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 일이 악하다고 하여 대노하시고는 오난을 죽여 버립니다.

 

유다는 졸지에 두 아들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계대 결혼법대로 라면 마지막 아들인 셀라도 다말에게 주어서 자식을 생산하도록 하여야 하잖아요.

그러나 유다는 다말에게 들어가면 자식들이 죽어 나가자빠지니까 아들 잡아먹는 여자라고 하여서 셋째 아들을 살리고자 다말을 친정으로 좇아버립니다.

 

이에 다말은 쫓겨 갑니다.

하지만 유다 가문의 대를 이으려고 자신을 버립니다.

스스로 창기가 됩니다.

창기로 변장하여서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하여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가 바로 베레스 입니다.

이 베레스가 유다 가문을 이어갑니다.

 

베레스는 다말이라는 여인의 희생으로 태어난 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룻기에서 나오미의 가문을 이어주기 위하여 룻의 희생으로 낳은 아들인 오벳을 베레스의 계보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이는 오벳이나 베레스나 같은 계통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가문에서 다윗 왕이 나옵니다.

이것은 결국 다윗 왕도 이런 맥(脈)을 품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맥(脈)으로 오십니다.

그러니 오벳 속에는 메시야의 맥(脈)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오벳이나 베레스는 모두가 한 사람의 희생을 근거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없어야 할 자들인데 한 사람의 희생으로 생겨난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 속에는 “없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없음의” 흐름 속에서 누가 나오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왕이 나옵니다.

다윗 왕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합니다..

 

알다시피 다윗은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어요.

다윗의 왕 됨에는 “자격 없음”이 깔려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다윗이 아니고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이라는 자격 미달자를 왕으로 세워 놓은 것입니다.

이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자체가 그래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미달이에요.

 

이스라엘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온 민족이에요.

그러니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자체가 이 없음의 바탕 위에 세워졌어요.

이스라엘은 “없음에서 있음으로”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면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됩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성이 훼손당하면 징벌 대상입니다.

 

앞서서 살펴보았듯이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오는 것을 창조라고 했습니다.

창조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만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온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인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러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어요.

예수님도 이러한 맥(脈)으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역사 속에서는 마리아의 희생으로 낳아진 아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아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어떻게 구원을 하는가 하면 “없음에서 있음으로” 구원을 합니다.

이걸 은혜라고 해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일컬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였어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품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은혜로 낳아진 자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산 자가 되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나오미 역시 그러합니다.

 

비록 사람들이 나오미가 아들을 얻었다고 하여도 나오미는 이 아들은 자기 것이 아니고 룻의 것이라고 하여야 합니다.

나오미는 아들을 볼 때마다 이건 내가 낳은 것이 아니고 룻이 낳아준 것이란 것을 알아야 해요.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볼 때마다 이 자식은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자식이야 라고 하는 것처럼 하여야 합니다.

 

이걸 잊으면 아들을 자기 소유로 삼게 되어요.

그럼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진 은혜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을 얻은 나오미는 이제부터 아들 없음으로 사는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예수님 것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사는 바탕에는 모두가 예수님의 공로만 드러나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국에 간 성도들이 어린양에게 세세토록 찬양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찬양이란?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깨달음에서 비롯이 됩니다.

 

천국에 성도는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이 어린 양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이 땅에서도 천국으로 삽니다.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아까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 가운데 주셨다고 했지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도 천국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했어요.

찬양했어요.

 

이건 쇼를 한 것이 아니에요.

진심으로 그 안에서 우러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성령이 바울 안에서 천국으로 살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는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름합시다.

 

우린 “없음에서 있음이” 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역(逆)으로 우리 삶 속에서 “있음에서 없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를 위하여 살지 말고 예수를 위하여 살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이를 일컬어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고 합니다.

“나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분을 위하여 산다” 고 합니다.

그러니 나는 날마다 “있음에서 없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내가 부인 된 그 자리에 예수님이 오롯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까? 라고 묻지 마세요.

이건 가르쳐서 될 문제가 아니고 그 안에 성령이 알아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제대하는 그 날을 기약하면서,,,,,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원래 없던 자는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있음의 바탕엔 예수님의 대신 죽어주심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힘으로 산다는 것을 기억케 하셔서 우리의 삶이 감사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