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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룻기 강해

8강. 무명의 고엘과 유명의 고엘 (룻 4:1-12)

by coroa 2020. 10. 23.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8강. 무명의 고엘과 유명의 고엘 (룻 4:1-12)

-.정낙원 목사

 

 

 

인간은 일평생 손익 계산을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이 내게 유익이 되느냐!

아니면 손해가 되느냐!

유익이 되면 가까이 하고 불이익이 되면 멀리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항상 머릿속에는 계산을 하고 만나게 됩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러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기주의자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은 그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이걸 악이다! 나쁘다! 로 접근하지 마세요.

인간은 이런 자라는 것으로 이해하십시오.

사귐을 갖되 뭔가 바라는 마음으로는 만나지 마세요.

그래야 실족하지 않습니다.

괜히 뭔가 바라다가 자기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족합니다.

 

저 사람은 목사이기 때문에 안 그럴 거야!

저 사람은 스님이기 때문에 안 그럴 거야!

저 사람은 신실한 종교인이기 때문에 안 그럴 거야! 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인간의 본성은 종교와 상관없이 나타납니다.

신앙심과 상관없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훈련하여 약간의 경중은 있을 수 있으니 본성은 아주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죄인입니다.

 

이건 스스로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죄인의 본성이에요.

복음을 알아도 이 본성은 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복음을 아는 성도나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 할지라도 유(有), 불리(不利)를 계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타락했다고 하지 말고 타고난 본능이 그렇구나! 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천사 같은 지킬 박사도 있고, 악마 같은 하이드 도 있습니다.

때론 천사의 모습이 나타나는가 하면 때론 악마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누가 나 인가?

둘 다 나 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처음부터 속이는 자라고 했습니다.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귀 아래서 태어난 죄인을 일컬어 거짓말쟁이라고 합니다.

마귀의 종으로 태어나는 인간은 일평생 시절을 쫓아서 가면을 바꿔가면서 살아갑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카멜레온처럼 사람에 따라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납니다.

 

때론 자상한 모습으로!

때론 신경질 적인 모습으로!

때론 예수님 모습으로!

때론 악귀의 모습으로! 수시로 가면을 바꾸어 가면서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이 가면을 확 벗겨 버리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 앞에서 인간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집니다.

자기 안에 선이 없음이 드러납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를 일컬어 빛이 어둠이 비추었다고 합니다.

예수 앞에 서면 인간의 실상이 폭로가 됩니다.

자기가 죄인 인줄 알아요.

속으로 하나님을 미워하면서도 겉으로 사랑하는 척 하는 위선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도는 예수님(말씀)을 통해서 이러한 것이 악이고 죄인 줄 아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 말씀 앞에선 상한 심령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보면 자신의 한계를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 실존에 대한 자인식으로부터 비롯되어진 애통이고 탄식이므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러한 애통함과 탄식이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은혜를 받을 땐 잠시나마 말씀에 순종이 되는 것 같지만!

그것도 잠시 뿐 금새 또 육신의 본성으로 돌아가므로 그러한 날들이 많지가 않습니다.

그만큼 육신의 소욕이 강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은혜 아래 감사하고 살아가는 날보다 은혜를 잊고 사는 날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늘 곤고하다고 했습니다.

곤고함이란? 하나님 뜻 앞에서 자기 부족함을 알 때 나타납니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한 이 딜레마를 벗어 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로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가 더욱 더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행위로 아니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이 그렇게 위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사도요한은 이것을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넓게는 마귀의 권세를 말하고 작게는 내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말합니다.

믿음으로만 사단의 참소를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세상의 가치를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이러한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이 믿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믿음이 육신의 소욕과 세상의 가치를 초월하게 살게 하십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독야청정하게 산다는 말이 아니고 이러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성향(性向)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물론 잘 안 되지만 말이에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지향성이 수시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가두지 않고 벗어나고자 한단 말입니다.

 

성도는 성령이 그 안에 계시므로 세상에 대한 반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의 소욕과 싸워요.

그래서 곤고하고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산 사람과 자기 꾀로 산 사람이 나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부연 설명이 필요합니다.

율법에 보면 “고엘” 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고엘” 이라는 제도를 한마디로 말하면 누가 “대신 담당해 주는 제도”입니다.

내 연약함을 강한 자가 담당해 주어서 나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고엘” 제도의 궁극적 목적은 예수그리스도가 죄인의 죄를 대신 담당을 해 주어서 죄인이 살아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 속에 이러한 고엘 제도를 주신 것은 예수님께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해 주어서 우리가 산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그럼 “고엘” 제도를 잠시 살펴봅시다.

“고엘” 제도 속에는 친족 중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남편이 죽으면 그 형제가 죽은 형제를 대신하여 아들을 낳아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 “계대 혼인법” 이라고 하고 또는 “시 형제 결혼법” 이라고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집에 아들이 있어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럼 그 죽은 사람의 시 동생이 형수에게 들어가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합니다.

 

만약에 시 동생이 없다고 하면 그 가까운 친족 중에서 자식을 낳아 주어 그 가문의 기업을 이어 가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끊지 말고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이걸 “고엘 제도”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 ‘나오미’ 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남편은 ‘엘리멜렉’ 이고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자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잠시 동안 잘 살았습니다.

거기서 두 아들이 모압 여인과 혼인을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몰라도 남편과 아들이 비명횡사를 당하는 일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집안에 남자가 다 죽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졸지에 나오미라는 시 어머니도 과부가 되었고, 두 며느리도 과부가 되었습니다.

과부 셋이서 타관객지에서 살기란 만만치 않습니다.

나오미는 궁여지책으로 수치를 무릅쓰고 떠나갔던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기로 합니다.

떠날 때는 풍족하게 떠났는데 돌아 올 땐 거지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이스라엘 사람인고로 고엘 제도를 알고 있습니다.

고엘 제도로 한다면 자기가 아들을 낳아서 그 아들을 키워서 장성하면 며느리에게 주어서 고엘의 의무를 감당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나이가 많고 늙어서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내가 아들을 낳아 장성하게 키워서 너희에게 고엘로 줄 수가 없으니 너희가 각자 자기 살 길을 찾아서 떠나라고 합니다.

이에 두 며느리 중에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자기 신을 찾아서 떠나갑니다.

 

그런데 둘째 며느리인 ‘룻’은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면서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나오미가 섬기는 그 하나님을 자신도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룻은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따라 왔습니다.

이제 나오미 가문을 일으켜 줄 자식을 낳아줄 고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자기 친족 중에서 기업을 이어줄 자를 찾습니다.

그 사람은 ‘보아스’라는 사람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보내어서 기업을 이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보아스는 알았다고 하면서 룻에게 보리 여섯 되를 되어 주고선 가서 기다리라고 합니다.

보아스가 고엘이 되고자 했는데 나오미에게 자기 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그 친족에게 나오미의 고엘이 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친족은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고 하면서 고엘을 거부해 버립니다.

나오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는 이유로 고엘 되기를 거부하자 보아스가 대신 나오미의 고엘이 되어 줍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그럼 이걸 복음적으로 풀어 보아야지요.

모든 성경은 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도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풀어 보아야 합니다.

보아스가 나오미의 고엘이 되는 것 속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씨앗처럼 숨겨져 있습니다.

그 씨앗을 찾아봅시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것은 고엘의 의무를 감당하여야 하는 두 사람 이야기입니다.

 

고엘 제도는 율법입니다.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오미의 고엘 되기를 거부한 사람은 저주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나오미의 고엘이 된 보아스는 복에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의 고엘 되기를 거부한 사람은 저주에 속한 사람이고 보아스는 복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무명”으로서 이름 없는 한 사람이 나오고!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유명”으로서 “보아스” 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옵니다.

이름 없는 한 사람은 자신에게 손해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보아스 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붙좇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 유익을 위하여 언약을 버리고!

다른 한 사람은 언약을 위하여 자기 유익을 버린 사람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대조가 되는 두 사람입니다.

 

그럼 왜? 한 사람은 이름 없는 무명으로 나타나고!

한 사람은 이름 있는 유명으로 나타날까요?

이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엔 엄청난 영적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건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우리 이야  기로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물론 오늘 본문은 우리 이야기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나에게 조명을 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두 사람을 우리의 삶에 적용을 한다면 나는 과연 어디에 속하였을까요?

 

나는 누굴까요?

나는 어디에 속하여 있을까요?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요?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요?

늘 묻고 또 물으셔야 합니다.

 

스스로 진단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버린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내 유익을 포기하고 사는 보아스 인지 스스로 냉정하게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린 본능적으로 자신은 선한 쪽에 세우고자 합니다.

복 받는 자리에 세우고자 합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다 남이 틀린 사람으로 몰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광경을 맞이하면 대뜸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고 하면서 고엘을 거부한 전자를 욕하면서도 자신을 그 사람과 분리하고, 도리어 후자인 보아스 편에 서서 자신의 괜찮음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우린 모두가 내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전자에 속하였어요.

우린 손해 보기 싫어해요.

내게 손해가 된다고 하면 하나님도 갖다 버릴 사람들이에요.

우린 범사를 이름 없는 전자와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꼭 복 받은 자 편에 세운단 말입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성경을 볼 때 항상 하나님을 거역하고 저주 받은 사람들 편에 나를 세우고 보셔야 합니다.

나를 죄인의 자리에 세우란 말입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광야에서도 불평하고 원망하고 툭 하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린 이상하게 여호수아 갈렙 편에 자기를 세워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사람들을 나쁜 놈들이라고 비판을 합니다.

 

이건 아니에요.

내가 바로 모세에게 돌을 던지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에요.

지금도 수 없이 예수 안 믿겠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죄인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어요.

인간은 이런 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광야 길로 인도한 것은 이 놈들을 잡아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어떤 자들인가를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너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자 함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깊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 턱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자신들을 괴롭히고 들들 볶는 그런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떠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 놈들을 여기까지 빼내 오기 위해서 너무도 큰 희생을 치루었습니다.

죄 없는 당신의 아들이 죽는 댓가를 치루고 애굽에서 빼내 왔습니다.

흠 없는 어린 양의 죽음은 곧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죽음과 맞 바뀌치기 한 민족입니다.

그 이스라엘이 지금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원망하고 불평하고 돌을 던져도 버리지 않고 기어코 당신의 나라에 데리고 갑니다.

우린 그 나라에 가서야 비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천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성경 속에 인물들을 보면서 나를 투사하여 보아야 합니다.

내가 곧 그 사람들이라고 보여야 해요.

 

내가 가인이고!

내가 요셉을 팔아먹은 나쁜 악당 같은 형제들이고!

내가 예수님 대신 풀려난 살인자 바라바이고!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고 소리친 군중들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들의 잘 됨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배역하는데!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인간은 자신의 죽음으로 감싸 안고 기어코 살려낸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를 보세요.

전 사사기를 읽을 때마다 주여~ 소리가 끊이질 않아요.

내 모습이 그대로 보여지기 때문에 할 말을 잃습니다.

“야! 정말로 지독하다!”

“어쩜 이렇게도 배은망덕 할 수가 있느냐!”

 

인간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싫어하는 존재이구나! 를 알게 되어요.

그러니 “인간은 안 되는구나!” 를 알게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난 더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어요.

그러니 그저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어디 가리이까!”

“주여 나를 떠나지 마소서!”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잘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그 긍휼의 마음을 보아야 해요.

그래서 성경을 볼 때마다 야!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고 살고 있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주여! 오늘도 이런 인간이 주께 은혜를 입고 사는군요!”

감사합니다! 가 되어야 해요.

그리 할 때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여 나는 개 입니다!”

그러니 주인의 밥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긍휼히 여겨 주소서!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되어집니다.

그러니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겠지요.

이 깨달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셔야 합니다.

성경 속에 날 집어넣고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편에 세우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난 저런 놈들과 달라!

난 그래도 저렇지는 않아!

저 정도로 타락한 자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감사하기 보단 원망이 앞서는 것입니다.

억울하다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왜? 날 몰라주느냐고 하잖아요.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눈만 뜨면 원망하고 불평하잖아요.

꼭 자식들 같아요.

 

자식을 키워보면 알 수가 있듯이 어디 자식이 말을 들어 쳐 먹는가요!

그런 자식은 없어요.

다 자식들은 한숨을 쉬면서 키워요.

자식이란 자체가 낳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애물단지에요.

들어가면서 한 숨 쉬고 나가면서 한 숨 쉬면서 키우는 것이 자식에요.

 

그런데 어느 놈 하나 이런 은혜를 아느냐 하면 몰라요.

다 자기가 잘나서 이렇게 컸다고 생각해요.

이 자식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생각해 보세요.

부모님들에게 감사를 많이 했습니까!

아니면 원망하고 불평을 많이 했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떨지 몰라도 전 원망하고 불평을 많이 했어요.

 

왜? 우리 부모는 이럴까!

그러면서 항상 옆집 친구 부모가 내 부모였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난 왜? 이렇게 가난한 집에 태어났는가!

좀 부잣집에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전 어릴 때 이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지 말고 저 잘 사는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마음이 참 많았어요.

 

그런데 말이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라요.

세상에!

내가 한국 사람이고!

내 부모가 늙어서 날 낳아 주고 키워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 늙은이들이 날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까!

전 아버지가 58세에 엄마가 47세에 저를 낳았어요.

그러니 어쩌면 없어야 할 자인데 생겨난 겁니다.

 

지금 목사가 되고 복음을 깨닫고 보니 야! 내가 없는데서 있게 된 이삭이구나!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태어난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지금 이 시대 이렇게 복음을 증거 하라고 그 늙은이들 몸을 빌려서 날 낳게 하셨구나!

그리고 그 보릿고개 넘어가면서도 날 키워주셨구나!

 

지금 제가 자식들을 키워보면서 생각하면 저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이 너무도 고마운 겁니다.

지금 저 같으면 못 키울 것 같은데 이렇게 잘 키워주셨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러한 감사도 내가 목사가 되어 복음을 깨달아서 알게 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늘 마음 한 가운데 부모에 대한 원망은 아니더라도 아쉬움은 있을 것 같아요.

지금에서야 내가 자식을 키워가면서 보니 내가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너무도 큰 은혜를 입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전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땐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에 알고 있는 하나님 일이라야 고작해서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말씀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하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밥숟가락만 빼면 성경 읽고 기도하고 집회에 쫓아다녔어요.

 

집에서 산 날보다 교회에서 산 날이 더 많아요.

틈만 나면 기도원으로 산으로 기도하러 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각양의 은사들을 체험하게 되고 그 은사 행하는 것이 하나님 일인 줄 알았거든요.

 

율법 아래선 내 삶을 성과 속으로 분리해 놓았어요.

교회에 연관된 일만 하나님 일이고,

그 밖은 세상일은 하나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직장을 다니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일이 아니라고 여겼어요.

그러니 삶을 이분법으로 구분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TV나 일반 잡지책을 보는 것도 속하다고 여겨서 집에서 아예 없앴어요.

가족들에게도 이러한 것은 금지하여서 보지 못하게 하였어요.

오로지 목사님들 설교 테이프만 듣고 성경만 읽었어요.

약 20여년을 그렇게 살았어요.

 

그 당시엔 이게 신앙인 줄 알았거든요.

실제로 목사님들이 그렇게 가르쳤구요.

우린 이런 가르침 속에서 신앙을 키워왔어요.

 

그런데 복음을 깨닫고 보니 내가 바리새인이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가 유대인이었던 것입니다.

내 행위로 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땐 진짜 한 열심 했어요.

아직도 이러한 사고가 잔재로 남아서 때론 성도들이 교회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러면 되느냐고 합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에요.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어디에서 어디까지 구분하지 않아요.

모든 삶을 간섭하시고 계세요.

그러니 우리의 모든 삶이 다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안다고 하면 신앙생활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자세로 하게 되어요.

이건 죄 안 짓고 온전하게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 짓고 살면서도 하나님 앞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죄송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어떤 분이 블로그에 댓글을 다셨는데 어찌 고마운지요.

그 분의 고백을 보면 자신은 늘 주님을 모욕하고 살고 있다고 해요.

하나님 앞에 너무도 죄송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뻔뻔스럽게 살고 있다고 해요.

 

맞아요.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 분이 정신과 의사이신데 너무도 자기 마음을 그대로 토설해 놓으신 겁니다.

참 솔직하지요.

 

보통 보면 댓글에 자기 신앙 있음을 자랑하고자 엄청 유식한 척 글을 쓰잖아요?

남을 가르치고자 하는 식으로!

나 이 정도 실력 있어!

나 이런 사람이야! 라고 하듯이 자기변호와 자기 잘남을 드러내는데 말이죠.

 

글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묻어 나와요.

진짜 은혜 받아서 고백하는 글인지!

남한데 뻐기고 싶어서 하는 말인지!

학습으로 알아서 지식으로 풀어내는 글인지!

보면 알아요.

 

암튼 우리의 신앙은 내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 받은 것을 토해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앉고 일어섬 모두가 하나님께 받은 것임에도 우린 선별하여서 구분하잖아요.

신앙이 좋다는 말은 자기 삶을 성과 속으로 구별치 않고 범사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임을 알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감사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뭡니까?

글자 풀이로 하면 복된 소리잖아요.

기쁜 소식이잖아요.

 

그럼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하는 것은 기쁜 소식을 안다는 말이 됩니다.

복음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께 엄청난 은혜를 입고 산다는 것을 알고 기뻐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을 아는 것이에요.

 

복음의 내용이 뭔가요?

예수님 이야기이지요.

예수님이 고맙고 기뻐야 해요.

야! 내가 예수님 때문에 살고 있구나!

이런 황감할 때가 어디 있느냐!

이걸 많이 아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에요.

 

어째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관과 다르지요.

우리는 신앙이 좋다고 하면 어떤 일을 많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교회 일을 열심히 하거나!

헌금을 잘 하거나!

말씀을 많이 알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아~ 저 사람 믿음이 좋네! 라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으로 판단 할 수도 있어요.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러한 일로서 참 신앙을 판단하기는 무리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마음에 없는 것을 얼마든지 연기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짐승과 인간의 차이가 뭔 줄 아세요.

짐승은 본능적으로 호(好) 불호(不好)를 분명히 드러내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분명하게 표현을 합니다.

짐승은 자기감정을 속이거나 위장하지 않아요.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속 다르고 겉이 달라요.

마음과 행동이 다르단 말입니다.

그러니 마음에는 칼을 갈고 있으면서 겉으론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할 수 있단 말입니다.

믿음이 없으면서 믿는 척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 이미지 관리를 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위장 할 수 있단 말입니다.

제가 과거 그랬으니까요.

 

남들은 내 열심과 충성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아닌 겁니다.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하고 다양한 은사들을 맛보고 행하지만 네 마음 한 구석에선 늘 곤고했어요.

이건 아닌데!

꼭 화장실 볼 일 보고 뒤처리 안 한 것처럼 뭔가 찜찜하단 말이에요.

 

목사님들은 믿음이 좋다고 하여도 전 아닌 거예요.

내가 아니라고 여겨지면 대책이 없어요..

너무도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힘이 들어서 자살을 하려고 하였으니까요.

이 괴로움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공감하지 못해요.

 

밤새도록 방언 기도하면 뭣합니까?

그 때 뿐인데!

꿈을 꾸고!

입신을 들어가고!

환상을 보면 뭣해요.

그 때 뿐이에요.

마치 겨처럼 먹을 땐 엄청 배가 부른 것 같다가도 금세 푹 꺼져 버려요.

 

하루라도 꿈을 꾸지 않거나 환상을 보지 않으면 불안 한 겁니다.

이거 하나님이 날 버린 것이 아닌가!

그럼 더 열심을 내는 겁니다.

참으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너무 힘이 드니까?

기도 할 때마다 울부짖는 겁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말하지도 못하겠고!

말하면 믿음 없단 소릴 듣잖아요.

그러니 믿음 있는 척 연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속 다르고 겉 다른 것입니다.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겉으론 남들이 보기엔 하나님을 엄청 사랑하는 척 했단 말입니다.

 

혼자서는 수없이 신앙을 포기 했어요.

에이! 나 예수 안 믿을래!

그런데 어디 그게 그렇게 됩니까?

안 믿는 것이 더 힘들어요.

이건 완전히 광야에요.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앞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진퇴양난인 겁니다.

그땐 그렇게 하나님이 밉고 야속했어요.

마음 속으로 수없이 하나님을 죽였어요.

 

그러다가 복음을 깨닫게 되고 지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마다 은혜 받을 때가 있어요.

 

그러니 조급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니까요.

당신이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다고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를 주시고 복음이 깨달아지도록 인도 하실 것입니다

어쩜 이 블로그에 오셔서 글을 읽고 있다는 것 자체가 때인 줄 모릅니다.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시니 우린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광야 길이 아무리 끝이 없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불평하고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간다고 하여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을 광야에서 죽이는 한이 있어도 애굽으로는 돌려보내지 않아요.

홍해를 건너 온 사람들 중에선 단 한 사람도 애굽으로 돌아간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우린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팔자에요.

 

우리가 얻은 구원은 우리가 지랄한다고 취소되는 것이 아니에요.

왜? 그런가요?

우리 몸에 아들에 피가 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피가 우리를 구원해 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를 뒤집어쓰고서도 지랄을 떠는 인간들이에요.

하나님은 지랄 떠는 우리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덮고 있는 예수님 피를 보시고 넉넉히 천국으로 인도해 들이십니다.

 

이게 성도의 구원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의 광야 이야기가 성경에 쓰여 있고 불순종을 밥 먹듯이 하는 사사기가 성경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러한 것을 성경에 기록케 한 것은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는 것을 말이에요.

 

너희들 땡(복) 잡았다고 알려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땡(복)이 우리에겐 땡(복)으로 안 보이고 개떡(저주)으로 보이니 문제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그 “개떡 같은 눈(육에 눈)”을 “찰떡같은 눈(영에 눈)”으로 바꿔 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비늘”을 떨어지게 하는 일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전 전화 상담을 참 많이 받아요.

블로그가 알려지다가 보니 온 세계에서 전화가 와요.

전화상이라 신분이 노출 되지 않으니 속마음을 다 털어 놓는 분들이 참 많아요.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 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서 자살하고 싶다고 하는 분들도 있어요.

전 이런 분들이 마음을 너무도 잘 알아요.

제가 그랬으니까요.

 

이런 분들은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 놓아요.

대화를 하다가 보면 많이 울기도 해요.

어떤 분은 방성대곡을 해요.

그럼 전 과거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미어져요.

곁에 있으면 손을 꼭 잡아 드리고 싶고 안아주고 싶어요.

 

전 과거 제가 그렇게 힘들고 많이 울었거든요.

어디 이야기 할 데가 없어서 자살하고자 했으니까요.

그러니 동병상련이지요.

 

이런 분들이 특징이 교회에 열심은 특심한데 마음이 허해요.

교회에 열심히 특심하다는 말은 겉으로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믿음이 좋은 것으로 비추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억지춘향으로 믿음 있는 척 한다는 거에요.

교회 일에 앞장을 서서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이게 신앙이 아니란 것을 알아요.

마음에 기쁨이 없어요.

쉼도 없구요.

이건 제가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 그래 보았기 때문에 그 심정을 너무도 잘 알아요.

 

어떤 분은 교회에서 많은 분들에게 상담을 해 준다고 해요.

왜냐하면! 기도 많이 하고 말씀을 많이 알고 교회에 열심과 충성이 대단하니까 다른 분들의 눈에는 믿음이 엄청 좋다고 생각하여서 상담을 요청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기도 해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안 해 준다고 할 수는 없으니 기도 해 준다고 합니다.

하지만 본인도 지금 죽겠는데 무슨 기도가 되겠어요.

그냥 해 오던 방식대로 주여 믿습니다! 라고 기도해 주는 것이에요.

저도 예전에 누가 기도해 달라고 하면 함께 방언기도 하면서 주여 믿습니다! 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기도해 주고 상담해 주면서도 정작 본인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요.

본인이 본인을 잘 알잖아요.

하지만 해 달라고 하니 해 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무슨 상담이 되겠어요.

상담을 해 주어도 자기하고 별반 다르지 않아요.

 

상담자나 상담을 하시는 분이나 믿음 없긴 마찬가지이니 도낀 개낀이지요.

그러니 상담을 하면서도 속으론 내가 믿어지지 않는데 어찌 당신에게 믿음 운운하겠느냐고 답답하다는 겁니다.

물론 상담을 할 때는 아닌 것처럼 하지요.

자기는 믿음이 엄청 좋은 것처럼 말이에요.

예수 믿는 것처럼 한다는 겁니다.

 

전 그 소리를 듣고 웃어요.

과거 제 모습이었거든요.

이 시대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좋다 나쁘다는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대동소이해요.

거의가 그 사람의 열심을 보고서 판단합니다.

 

제가 과거에 한 열심 했거든요.

열심과 충성과 성경을 많이 아는 것으로 따지면 교회 안에서 절 따라 올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니 자연히 정낙원 집사는 믿음이 좋다! 라고 인식이 되어 있어서 상담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그런 고민을 말하는 분들이 이야기를 들으면 연민이 가요.

야! 저 분이 얼마나 힘이 들까!

 

여러분 진리에 대하여 고민에 빠지면 무서워요.

삶에 의미가 없어지고 의욕이 없어요.

이게 뭐냐!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사람들 앞에선 허~ 허! 믿음 있는 척은 하여야 하고!

입에서 주여~ 소리가 떠남이 없고!

아멘! 할렐루야는 습관처럼 토해졌어요.

 

겉으론 주여! 하여도 속으론 나여! 했어요.

내가 위선자라는 것을 아니까 죽겠는 겁니다.

마치 호랑이 등에 타고서 내리지도 못하고 가지도 못하는 그런 심정이에요.

그래서 저는 상담을 하면서 솔직하게 말해 줍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고 합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억지로 하면 할수록 힘이 들어지니!

믿어지는 것만큼만 하라고 합니다. 

안 믿어지면 하지 말고!

교회도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먼저 솔직하셔야 한다고!

내가 나를 속이면 답이 없으니까 절대로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남에 눈치 보지도 말고!

체면이고 이미지고 뭐고 다 벗어 던지고 마음이 가는대로 해 보라고 합니다.

 

신앙의 치료는 내가 먼저 개뿔도 아니란 것을 아는 데부터 시작이 되어요.

난 예수를 안 믿는 자라는 것을 아는 데부터 시작이 되어요.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되어요.

내가 죄인임을 알아야 내게 의미를 두지 않게 되어요.

좌우지간 나에게선 하나님의 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죄를 안 지으려고 하지 말고!

난 죄를 이길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자각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수개 소리로 죄도 좀 지어 보라고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죄인에게서 죄 아닌 것이 어디에 있나요.

술을 먹어도 죄이고 안 먹어도 죄에요.

도적질해도 죄이고 안 해도 죄에요.

성경이 말하는 죄란? 예수 안 믿는 것이에요.

우리 행실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판단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 눈을 예수님에게서 떼게 합니다.

어떻게 떼게 하는가 하면 자기 행실로 떼게 만들어요.

자기 꼬라지로 죄다 아니다 로 판단하게 한단 말입니다.

자기 양심상 괜찮은 일을 했다 싶으면 안심이 되는데 그렇지 않고 비양심적으로 살았다 싶으면 괴롭고 불안하고 두려워요.

 

이게 율법 아래 있는 것이거든요.

스스로 법 아래 가두어져 있는 상태에요.

마귀는 우리를 율법 아래 가두고자 해요.

율법 아래 가두어지게 되면 맨 날 자기 꼬라지로 울다가 웃다가 해요.

 

바울이 이런 고민을 하다가 혼났잖아요.

로마서 7장이 이 내용이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오호라 난 곤고한 자라고 고백하잖아요.

이 말을 직역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아~ 죽겠다!

죽고 싶다! 그런 말이에요.

 

그럼 바울이 만약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어찌 될까요?

이런 탄식을 안 하겠지요.

그럼 지금 바울은 누굴 믿고 있나요?

자기 자신을 믿고 있지요.

자기 행실을 믿고 있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해 주신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 라는 자기 자신을 믿고 있잖아요.

이게 바로 새 언약 하에선 죄이고 불신앙이에요.

 

그러자 성령이 바울의 뒷통수를 치면서 야! 이놈아!

왜? 니 꼬라지를 보느냐!

저기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보이지 않느냐!

너희들이 죄를 못 이기니까 하나님이 죄 없는 그 아들을 보내서 너희 죄를 대신 담당케 하여서 죄 때문에 죽어가는 너희들을 살려준 것이 아니냐!

그러니 니 꼬라지 보지 말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죄관을 바꿔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걸 깨닫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는 성경의 핵심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정죄함이 없는 세계가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에서는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따지지 않아요.

예수 믿느냐 안 믿느냐만 따져요.

내 죄를 예수님이 다 담당 한 것을 믿느나 안 믿느냐만 따져요.

 

그러니 우리의 윤리 도덕적인 행실로 인하여 죄다 아니다 판단하는 것은 아직 예수를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새 언약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윤리 도덕을 버려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술도 먹어보고!

주일날 놀러도 다녀보고!

당신이 반듯하다고 하는 그 신앙을 버려 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아보라고 했어요.

내가 죄인 인줄 모르면 예수 믿지 말라고 했어요.

 

야~ 이거 큰일 났다!

세상에 죄 지으라고 하는 목사가 어디 있나요!

말 귀를 못 알아먹으면 전 이제 이단이 되게 생겼어요.

제발 제가 무슨 뜻으로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지 아셔야 합니다.

 

또 오해하실라!

이건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구원을 받는 일에 있어서는 인간의 행실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막 살고 안 살고는 그 사람 마음입니다.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성도는 육신의 소욕과 늘 싸우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막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막 안 사는 것도 아니랍니다.

막 살기도 하고 막 안 살기도 해요.

 

때론 성령의 소욕이 이기기도 하고 때론 육신의 소욕이 이기기도 해요.

그럼 우리 몸은 성령의 도구로 의에 병기로 사용이 되기도 하고 육신의 소욕으로 불의에 병기로 사용되기도 해요.

그러니 우리 몸은 믿을 것이 못 된단 말입니다.

죄인의 몸은 믿을 것이 못되기 때문에 죄인의 몸에서 나오는 것으로 신앙의 근거로 붙잡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나 착게 살았는데요 붙잡지 말고 주여 난 죄인이군요 를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의롭게 살았다고 하는 그 착한 삶을 한 번 버려 보란 말입니다.

그럼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어요

잘 이해하세요.

 

말 귀가 없어서 제 말을 못 알아 듣는 사람은 절대로 죄 지으면 안 되어요.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사세요.

술 먹으면 안 되고!

도적질 하면 안 되고!

주일 성수 잘 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 하셔야 해요.

 

제가 죄 지어 보라는 말이 걸림이 되면 이렇게 살으란 말입니다.

저는 분명히 죄 짓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니 제 말을 받을 만 한 사람은 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죄 지으면 안 됩니다.

야! 어렵다~ 어려워!

 

제가 상담을 그렇게 하여도 그 분에겐 이게 쉽지 않아요.

그 안에 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 그 속에 있으면 아무리 은혜로 살라고 하여도 안 되어요.

은혜조차도 법으로 바꿔버려요.

 

지금까지 지켜온 자기를 버려야 하는데 힘들어요.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자기를 이기지 못해서 그래요.

자기가 가장 강적이에요.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데!

그게 어디 싶나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해요.

항상 나 있음으로 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인데!

나를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개차반 되는 사건 속으로 휘몰아 넣는 것입니다.

완전히 묵사발 만드는 일을 벌린단 말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자라는 것을 알게 만들어요.

야! 내가 진짜 나쁜 인간이구나! 를 알게 만들어요.

 

그래서 남을 정죄하던 그 주둥이를 닫게 합니다.

물론 우리는 또 이 주둥이로 죄도 경중을 따져서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구분을 시키지만 말이에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선 우리가 형편없다는 것을 깨닫는 일들을 벌리신다는 것입니다.

난 진짜 저주 받아야 할 악당임을 알게 해 주세요.

 

이럴 때 비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기 시작해요.

느껴지기 시작한단 말입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서 왜? 하나님께서 간섭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참하고 쪼다처럼 구경거리로 만드는가! 의아해 했어요.

 

다윗을 가지고 한번 살펴봅시다.

전 다윗을 다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서 엄청난 은혜를 받았어요.

성경은 다윗을 일컬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합니다.

우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면 엄청나게 착하고 훌륭하게 잘 살았겠구나! 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도리어 정 반대에요.

 

다윗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이 다윗을 높이 들어서 사용한 것이 아니고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렸어요.

다윗의 부끄러운 치부를 다 드러내게 하여서 개망신을 시켰어요.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인 것을 완전 범죄로 다 만들어 놓았는데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다 들통 나게 만들었어요.

 

아니 선지자를 보낼 것이라고 한다면 죄 짓기 전에 미리 보내서 네! 이놈 그래야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죄 짓고 난 후에 보냅니다.

그리곤 완전히 까발립니다

에이~ 이 더러운 놈아!

그래 왕이 되어 가지고 그런 짓을 하느냐!

 

왕의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쪽 팔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은 백성들 면목이 없는 겁니다.

아니 그 충신을 자기 바람 피운것 감추고자 죽였으니 이게 어디 왕인가요!

깡패지!

 

지금 아마도 이명박 대통령이 그럴 겁니다.

친 인척들 비리가 툭툭 처져 나오잖아요.

그러지 않아도 죽을 지경인데 친척이란 인간들이 엎어진데 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쪽 팔리겠어요.

 

다윗도 마찬가지에요.

자식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쫓겨 다니지를 않나!

점입가경이라고 하듯이 아들이라는 놈이 한 술 더 떠서 아비의 후궁들을 백주 대낮에 겁간을 하는 치욕을 당하게 하지를 않나!

말년에는 멀쩡히 잘 있는 다윗의 마음을 격동시켜서 인구조사를 하게 하여서 완전히 작살을 내 버립니다.

 

다윗은 죽을 때도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고 죽었어요.

그러니 아마도 다윗은 천국에서 지금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개그 콘서트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 받고 천국에 왔다는 것을 안단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가장 마음에 합한 자들을 다스려 가는 방식입니다.

성경은 이런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전혀 낯설어요.

그러니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마음이 너무도 깊어서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을 어찌 사랑할 수가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 할 수가 있겠어요.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린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를 깊이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런 깊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과부인 나오미를 사랑하여 기업을 잇게 하는 모습을 통해서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럼 본문을 탐사해 봅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 사람이 나오지요.

이름 없는 한 사람은 자기 손해를 보지 않고자 나오미를 나 몰라라 하고!

보아스는 나오미를 자기 사랑으로 감싸서 살려 줍니다.

 

이 두 사람을 “두 사람” 이라는 차원과,

“두 언약” 이라는 차원에서 살펴봅시다.

두 가지 의미로 살펴보지는 것입니다.

 

이제 구속사로 풀어 봅시다.

“두 사람”이라 함은 “두 조상”을 말합니다.

두 조상은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을 말합니다.

“아담은 육에 조상”이고, “예수님은 영에 조상”입니다.

 

그러니 나오미에게 기업을 무를 책임이 있는 처음 사람은 첫 아담으로 생각하고,

보아스를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으로 생각해 봅니다.

이걸 “두 언약”으로도 생각해 볼 수가 있어요.

 

그럼 첫 아담을 상징하는 첫 사람은 “옛 언약”을 상징하고!

둘째 아담을 상징하는 보아스는 “새 언약”을 상징하겠지요.

그럼 “율법”과 “은혜”로 풀어지겠지요.

 

이 두 의미를 가지고 본문을 해석하면 훨씬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다로 살펴 볼 것입니다.

두 언약은 나중에 살펴보고 먼저 두 조상으로 살펴봅니다.

잘 이해하세요.

 

그럼 먼저 두 사람으로 풀어 봅시다.

 

첫 아담과 예수님으로 해석해 봅니다.

나오미는 죄인을 상징합니다.

우리들입니다.

나오미를 우리와 하나로 생각하세요.

그러니 나오미의 기업을 잇는다는 것은 죄인이 구원받는 것으로 이해 할 수가 있어요.

 

그럼 죄인인 나오미를 누가 구원 하느냐 입니다.

누가 우리의 구원자인가?

기업을 이어준다는 말은 대신 담당해 준다는 말입니다.

죄인의 죄를 대신 담당해 준다는 말이에요.

그럼 나오미에게 기업을 이어준다는 것은 누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 주는 분이냐! 로 답이 풀어지겠지요.

 

먼저 보아스가 나오미에게 그럽니다.

이 세상 법도로 하면 자기보다 먼저 우선 순위로 기업을 무를 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에게 물어 보고 그가 너를 책임진다고 하면 너를 그에게 보낼 것이고!

그렇지 않고 그가 널 책임지지 못하겠다고 하면 보아스가 자신이 나오미를 책임지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법대로 보아스가 첫 째로 나오미와 가까운 기업 무를 사람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친족 중에 과부가 된 사람이 있는데!

지금 그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그러니 당신이 그 사람을 살도록 책임을 져 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쉬운 말로 당신 생명을 주어서 그 사람을 살려 낼 수가 있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에 그 사람이 손 사래 치면서 싫다고 합니다.

아니~ 내가 왜? 그 여자 때문에 손해를 보느냐!

난 내가 사는 것도 급하기 때문에 남을 책임져줄 만한 여유가 없다고 하면서 책임을 회피합니다.

쉬운 말로 내 인생도 살기 바쁜데 어찌 남에 인생까지 책임져 준단 말인가!

이게 바로 첫 아담을 상징해요.

 

바울은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이렇게 말했어요.

 

고린도 전서 15장을 봅시다.

 

고전 15:45-47=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바울은 아담과 예수님을 두 조상으로 대조하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할게요.

산 영이란? 죽은 목숨으로 살고 있는 자란 말입니다.

이 목숨은 죽으면 끝이에요.

이건 죄인의 목숨을 말해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죽은 자가 되었지요.

죽은 자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산 영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세요.

설려 주는 영이란 말은 생명을 공급해 주는 분이란 말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 주시는 분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들을 살려 주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고 ‘육 있는 자’라고 하지요.

땅에서 났고 ‘흙에 속한 자’라고 하지요.

첫 사람은 육이고!

죽은 자이고!

흙에 속한 자에요.

 

죽은 자는 이름이 없어요.

흙에 속한 자는 이름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흙에 속하여 코로 호흡하는 자는 수에 칠 가치가 없다고 하셨어요.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분이세요.

영생의 나라에선 죽은 자는 수에 치지 않아요.

이름이 없단 말입니다.

 

이걸 그대로 나오미의 기업을 이어줄 고엘로 적용해 보세요.

첫 사람 고엘은 이름이 없지요.

이름이 없다는 것은 죽은 자란 말입니다.

흙에서 속한 자란 말이에요.

 

이 사람은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이기 때문에 나오미를 살려 낼 수가 없어요.

그러니 보아스가 당신 나오미를 살려 낼 수가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아니요! 난 살려 내지 못합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난 책임 질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에요.

 

나는 내 몸뚱이 하나도 간수하기 힘이 든데 어찌 남의 몸뚱이까지 감당 한단 말이요!

내 죄도 어찌 하지 못하는데 남에 죄를 책임 질 수 있단 말입니까!

난 못하오!

그러니 보아스 당신이 책임지시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아스 가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산 자란 말입니다.

이름은 산 자에게만 주어져요.

죽은 자에겐 이름이 없어요.

죽으면 이름이 삭제되어요.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은 죽은 자에요.

이름이 없어요.

오직 예수님만 이름이 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라는 이름을 받고 오셨어요.

그 예수라는 이름을 받고 왔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은 아버지 이름으로 오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이사야 9장을 봅시다.

 

사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보세요.

하나님이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지요.

그런데 그 이름이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고 합니다.

 

“한 아들”이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여기서 한 아들이란 말은 여럿 중에 한 사람이란 말이 아니고 오직 그 한 사람이란 말이에요.

독생자란 말입니다.

독생자란 외 아들이 아니고 홀로 사는 자란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에게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요.

이름이란? 그 뜻을 이루는 분이란 말입니다.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일들을 하신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이름이 예수에요.

그런데 그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이 담겨져 있어요.

예수라는 이름으로서는 자기 백성을 죄에게 구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구원자 되신 예수님이 기묘자이고 모사이고 하나님이고 아버지이고 평강의 왕이에요.

예수님이 이 일을 다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보아스가 이름을 가지고서 나오미의 고엘이 되는 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나오미와 같은 우리 죄인들을 죄에서 건져내어 하늘나라 기업을 잇게 해 주신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름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나오미의 고엘로서의 첫 사람이 이름이 없다는 것은 육에 속한 죽은 자란 말입니다.

육에서 난 자는 그 누구도 남의 죄를 대신 담당 해 줄 수가 없어요.

자신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내 코가 석자란 말이에요.

자기도 죄라는 바다에 빠져서 살려 달라고 허우적거리는데 어찌 같이 빠진 사람을 건져주겠다고 하느냔 말입니다.

그래서 난 나오미의 고엘이 되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 사람은 나오미에게 네 죄는 네가 감당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와 나는 남남으로 다르다는 말입니다.

분명이 법적으로 따지면 기업을 이어주어야 하는 책임이 있는 사람인데도 자기 유익에 손해가 된다고 거절해 버립니다.

 

이게 바로 죄 아래서 태어난 아담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 줄 인간이 없습니다.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공자도, 석가모니도, 마호멧트도, 간디도, 나폴레옹도, 이순신 장군도, 스님도, 목사도,,,

그 어떤 날고 긴다고 하는 인간도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해 줄 위인이 없어요.

다 자기 살기 바쁩니다.

스스로의 죄도 감당하기에 바빠요.

 

아담 안에서는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에요.

그러니 책임지고 자시고 할 일이 없어요.

그래서 난 안하겠다고 합니다.

아니~ 못 하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책임질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걸 우리 구원 문제로 접근해 봅시다.

 

누군가가 우리를 구원하려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흠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내가 저 사람의 죄를 대신 책임지겠소! 라고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죄 없는 인간이 없어요.

다 죄인이에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내가 저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해 주겠소! 라고 할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다 함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 앞에선 불의한 자란 말입니다.

불의한 자에게서는 의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 해 줄 수 있는 인간이 없어요.

자기 코가 석자인데 어찌 남을 돌볼 겨를이 있겠어요.

그래서 그 어떤 인간도 처음 사람처럼 난 손해 볼 수가 없다고 하면서 각자 자기 갈 길로 가 버립니다.

이게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 로서 두 사람으로 비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이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름이 없다는 말은 없다는 말입니다.

 

“넌 없는 자야!”

“넌 죽은 자야!”

“낫팅” 이란 말이에요.

이걸 성경에선 “티끌(흙)”이라고 합니다.

 

흙이란? 죽은 자란 말이에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이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름 없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나오미의 기업을 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업을 무른 다는 것은 생명을 준다는 말입니다.

남에게 생명을 주려면 자기가 산 자라야 해요.

 

그런데 처음 기업을 무를 자는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에요.

죽은 자에게서는 죽음이 나와요.

다른 말로 죄인에게서는 죄만 나온다는 말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에게 의를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죽은 자에요.

죄인이에요.

그러니 첫 아담아래서는 그 누구라도 대속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석가모니)를 믿어도 안 되어요.

공자(유교)르 믿어도 안 되어요.

마호멧트(이스람교)를 믿어도 안 되어요.

목사를 믿어도 안 되어요.

다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서 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을 구원해 주실 분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이라야만 해요.

세상 밖에서 오셔야 한단 말입니다.

혈통으로 나지 않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 분이 누구인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늘로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이름이 있는 산 자에요.

하나님께서 이름을 주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예수님만 산 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은 예수 밖은 전부 죽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 영생하시며 산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예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시온 산이 나오는데 거기에 십 사만 사천 명이 어린 양과 더불어서 다닙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마에 전부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어요.

이는 어린 양 안에서 사는 자란 말입니다.

 

어린 양의 이름이 없는 자는 죽은 자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의 이마에 인을 쳐 주시는데 어린 양의 이름을 새겨 주시는 것입니다.

너 예수꺼! 라고 불 도장을 콱 찍어 놓았어요.

 

그러니 첫 번째 기업을 무를 이름 없는 한 사람은 첫 사람 아담을 상징하고!

그리고 두 번째 기업을 무를 보아스는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오미라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나오미처럼 의지할 것 하나 없이 죽어가야 할 죄인이에요.

 

그런데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셔서 우리의 기업을 무르게 해 주신다고 발 벗고 나섭니다.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서 말이에요.

예수님은 나오미처럼 버림받아야 할 죄인들을 위해서 자기희생으로 살려 내셨습니다.

최대한 쉽게 설명을 한다고 하였는데 이해 되셨나 모르겠네요.

이해 되셨다 하고 넘어 갑니다.

 

이번에는 두 사람을 “두 언약”으로 풀어봅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지요.

그럼 이름 없는 사람을 언약으로 본다고 하면 “죽은 언약”이란 말이지요.

이걸 에덴동산의 두 과실로 말하면 선악과란 말입니다.

선악과는 죽이는 언약이에요.

그 안엔 생명이 없어요.

 

“죽은 언약”이라 함은 그 언약 속에서는 생명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죽음만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럼 죽음으로 내 모는 언약이 무엇인가요?

옛 언약인 율법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언약이에요.

이게 엄청 중요해요.

율법은 아무리 완벽하게 지켜도 그 속에 생명이 없어요.

 

이건 마치 선악과를 먹으나 안 먹으나 그 안에서는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아요.

영생은 생명과 속에만 있어요.

그러니 난 선악과 안 먹었는데요! 라고 나오면 안 된단 말입니다.

다른 말로 나 율법 지켰는데요! 라고 나오면 안 된단 말이에요.

이렇게 나왔다가 망한 민족이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사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율법 속엔 생명이 없어요.

예수 안에 생명이 있어요.

그러니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우리 율법 지켰는데요! 라고만 하였지 정작 예수가 왔는데도 배척했어요.

 

이렇게 되면 차라리 율법을 어기고 주여 살려 주세요! 라고 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뻔했어요.

자기가 율법을 어기고 아! 난 율법을 어긴 죄인이구나! 를 알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서소! 라고 했어야 했단 말입니다. 

이걸 아까 상담 이야기를 하면서 차라리 윤리 도덕으로 살지 말고 죄를 지어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지요.

 

이 시대 교회들이 이걸 몰라요.

특히 개혁주의자들이 몰라요.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의가 되는 줄 알아요.

 

그러나 하나님 말씀 지킴 속에 의가 있지 않고 의는 예수님 안에 있어요.

이게 비밀이에요.

이 비밀을 개혁주의자들이 몰라요.

 

개혁주의자들이 주장이 뭔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잖아요.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해요.

 

개혁주의자들의 ‘캐치 플레이즈’가 뭔 줄 아세요.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오직 은혜! 라고 해요.

 

그런데 하는 짓거리는 이와 정반대에요.

믿음이니!

말씀이니!

은혜니! 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들입니다.

인간이 얻어 내는 것들이 아니에요.

 

그러니 믿음이니!

은혜니!

말씀 속에는 인간의 행함이 들어갈 틈이 없어요.

 

‘슬로건’ 대로 라면 인간들이 뭘 어쩌고 저쩌고 할 것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믿음이나!

은혜나!

말씀은 모두가 인간을 떠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거저 주는 선물이에요.

“믿습니다” 라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주셔야지만 믿어져요.

그러니 믿음을 위해서 우리가 뭘 하여야 할 것이 없습니다.

 

“은혜도”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 내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말씀도” 우리가 지켜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도 정미하여서 의인이라야만 지킬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그 어떤 인간도 지킬 수가 없어요.

오직 죄가 없으신 예수님만 지킬 수가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말씀을 주실 때에는 지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너희는 내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주신 것입니다.

이걸 개혁주의자들이 몰라요.

 

개혁주의가 주창하는 ‘슬로건’ 대로 라고 한다면 '인간 포기 선언'이 나와야 해요.

진정한 개혁주의라고 한다면 우린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봅시다!”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열심히 합시다!”

“최선을 다하여 지킵시다!” 라고 하면서 예수를 가리고 있단 말입니다.

마치 율법을 열심히 지킨 유대인들과 같아요.

 

‘슬로건’은 “우린 안 됩니다!” 라는 ‘슬로건’을 내 걸고는,

하는 짓은 “우리 합시다!” 그러고 있어요.

“우리 잘해 봅시다!”

“열심히 해 봅시다!”

조금만 더! 영차~ 영차!

모순적으로 그런단 말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자기를 포기하는 주여! 가 아니고!

내가 할게요! 라는 주여! 에요.

그러니 주여~가 전혀 다른 주여~ 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이면 “우리 좋은 신자가 됩시다!”

“우리 좋은 교회를 만듭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해야 하는데 도리어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기고 있어요.

그러니 개혁주의 끝에 가면 예수님은 간 곳 없고 오로지 인간들만 난무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가 난무하고!

“인간의 자랑”만 난무하고!

“인간의 가능성”만 난무하고 있어요.

사람을 교만케 하고!

도리어 예수를 안 믿게 만들어요.

이건 비 성격적이에요.

 

제가 얼마 전에 어떤 개혁주의 목사와 다툰 이야기를 했지요.

정 교인,

준 교인,

손님 교인으로 분류한다는 그 목사 말이에요.

그 사람은 스스로를 개혁주의자라고 해요.

 

그래서 설교 시간에 기독교 강요를 가르치고!

소 요리, 대 요리 문답을 가르치고!

각양의 신조들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교인들을 개혁주의 전통과 교리로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교인들의 의식 속에 한국교회는 다 틀렸고 자기들 교회만 참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교회 교인들은 엄청난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긍심은 자기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다르다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행함에서 자긍심이 나와요.

인간의 자긍심은 자기 의에서 나와요.

 

예수의 피에서는 자긍심이 나오지 않고 상한 심령이 나와요.

내가 진짜 죄인이라는 것을 알면 자긍심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주여 살려 주세요!” 가 나온다니까요.

 

진짜 개혁주의 ‘슬로건’ 대로 라고 하면 지금 개혁주의가 표방하는 것과 반대로 되어야 해요.

“주님 우린 안 됩니다!”

그러니 “주님이 하신 것만 믿겠습니다!” 라고 나와야 한단 말이에요.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말씀! 이라고 하면서,

은근히 사람의 열심으로 사람 간에 차별을 두게 하고!

서열을 정하고!

차등을 나누고 있어요.

 

이 모두의 기저에는 인간의 행함이 깔려 있어요.

그러니 오직 은혜가 아니고!

오직 믿음이 아니고!

도리어 오직 행함인 것입니다.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 속에는 차별이니 차등이니 서열이 없어요.

예수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어요.

열심을 낸 자나 열심을 내지 않은 자나 차등이 없어요.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그 은혜에 감사할 뿐이에요.

 

예수 안에선 율법을 지킨 자나 율법을 안 지킨 자나 차별이 없어요.

이건 율법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율법과 상관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예수 안은 법에 나라가 아니고 은혜의 나라에요.

그래서 율법 지킴과 안 지킴과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선 율법이 다른 역할을 해요.

은혜를 드러내는 역할을 해요.

 

그러니 진정으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라고 한다고 하면 인간의 행함은 빠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게 나와야 개혁주의 ‘슬로건’에 맞는 개혁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개혁주의자들에게서는 그들이 주창하는 ‘슬로건’과는 정반대 현상을 나타내고 있어요.

그러니 개혁주의가 아니고 “개 껍떼기” 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슬로건’은 진짜 좋아요.

너무~ 너무 좋아요.

그러나 하는 짓거리는 “개 껍떼기” 개혁인 것입니다.

토하고 싶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저도 개혁주의 슬로건에 동의해요.

저도 개혁주의 신앙을 표방하고 있어요.

그러나 작금에 개혁주의하고는 달라요.

개혁주의라는 말은 같으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완전히 달라요.

저는 인간의 가능성은 철저히 배격해요.

 

의미가 좋다고 해서 진리일 순 없어요.

진정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신앙일 순 없어요.

신앙이란? 자기 주제부터 먼저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인간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어요.

너희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신앙이지 내가 뭘 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내가 뭘 하겠다고 나대지 않아요.

“주여! 난 안 됩니다!”

“주께서 해 주셔야 합니다!” 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으싸!~ 으싸! 하지 않아요.

“난 할 수 있어” 라고 하지 않아요.

도리어 “난 안 돼” 라고 해요.

“주여 살려 주세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주님이 다 하셨습니다!” 가 나와요.

“예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이걸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이건 예수 밖에 있는 사람에겐 아무리 설명해도 몰라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척 알아먹는데!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말해 주어도 그 말뜻을 몰라요.

그러니 기껏 묻는다는 것이 그럼 성도가 아무 것도 하지 말란 말이냐! 라고 물어요.

 

아니!

누가 성도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했나요!

해요!

그것도 아주 열심히!

그런데 자기가 하지 않아요!

이 또 무슨 말인고?

 

자기 안에 주께서 하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이런 사람들에겐 이렇게 해야 하겠다!

저렇게 해야 하겠다! 라는 것이 없어요.

자기가 계획을 세울 필요도 없고!

자기가 해야 한다는 것도 없어요.

그런데 해요.

 

오잉~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야?

야! 말이 무척 어렵다~ 어려워!

한국말이 이렇게 어려운 줄을 몰랐네!

 

좌우지간 인간의 가능성을 두는 것은 전부 율법이에요.

율법은 기업을 이어주지 못해요.

오늘 본문에서 고엘을 거부한 첫 사람은 언약으로 따지면 생명을 살리지 못하는 옛 언약이고 율법이에요.

 

율법 안에선 전부 죽은 자만 나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음에 가두려고 율법을 주셨어요.

죄 애래 가두려고 율법을 주었다니까요?

율법이 뭔지 살펴보고 갑시다.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22-24=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잘 보세요.

성경이 뭐라고 하는가요?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하지요.

 

죄 아래 ‘가두었다’는 말은 우리 힘으로 죄를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죄에게 가두어져 있으니 죄가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게 죄인의 한계에요.

 

성경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다 율법적 기능을 담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준 것은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 에요.

율법을 준 것은 너희가 지금 죄 아래 가두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래서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 준 것이라고 합니다.

범죄 안했으면 율법이 필요가 없을 터인데 범죄해서 율법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너희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3장입니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이 말을 합니다.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너희들 다 죽었어!”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온 입을 막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어요.

그러니 율법 앞에 서면 주둥이를 닫아야 해요.

 

여러분 언제 주둥이가 닫칩니까?

자기가 죄인인줄 알아야 주둥이가 닫쳐요.

내가 못난 자라는 것을 알아야 찍 소리 못한단 말입니다.

 

가정에서 자식들 키워보면 알잖아요.

시험 빵점 맞거나 사고치고 오면 찍 소리 못하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마누라가 동창회 같다가 술 처먹고 늦게 들어오면 남편에게 찍 소리 못하지요.

반대로 남편이 룸살롱에서 술 퍼먹고 놀다가 마누라 한데 들키면 찍 소리 못하잖아요.

인간은 잘한 것이 있으면 큰 소리치고, 잘못하였다고 생각하면 찍 소리 못해요.

그래서 아까 인간의 자긍심은 자기 행함에서 나온다고 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인간은 죄인이 되었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 주제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서 큰 소리 치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으로 주어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니들 이러고도 큰 소리 칠 수 있느냐!

이런 죄인인데 할 말이 있느냐!

니들 주제를 좀 파악하라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율법을 죄인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죄인이 아니면 율법을 주실 필요가 없어요.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넌 죄인이란 말입니다.

이 바탕을 깔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럼 율법을 받으면 아! 난 죄인이구나!

난 죽어야 할 자이구나! 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역사하는 곳마다 죄가 폭로가 되고 하나님의 진노가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율법을 통하여서 죄를 깨달아야 하고 그 죄를 사해 주실 메시야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보세요.

율법은 약속의 지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하지요.

즉 율법이 예수님에게로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몽학선생이라고 해요.

예수에게 인도하는 길잡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율법을 따라가면 예수가 나와요.

예수를 만난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가 없어요.

율법이 폐기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더 이상 율법에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만났잖아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 사람이 율법을 완전히 지킨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를 못 만난 자는 율법을 하나도 안 지킨 것이 되어요.

율법을 열심히 지켰다고 자랑하면서 예수를 배척한 유대인들은 율법을 하나도 안 지킨 것이 되고, 도리어 예수를 만난 율법을 밥 먹듯이 범하고 산 세리와 창기들은 율법을 다 지킨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걸 유대인들이 납득을 하겠어요.

못해요.

그러니 이런 말을 하는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지금도 개혁주의 자들이 이런 말을 하면 죽이려고 해요.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면서 말이에요.

 

지금 식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개혁주의자들에게 예수 믿으면 됩니다! 라고 하면 이 말을 이해하겠어요.

못해요.

개혁주의 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의미를 몰라요.

문자적으로 해석하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도리어 넌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인데 이들은 지키겠다고 덥석 물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처럼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다시 말합니다.

율법 속엔 생명이 없어요.

그러니 율법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이름 없는 사람처럼 나오미의 기업을 이어줄 수가 없어요.

죄인을 구원시켜 주지 못한단 말입니다.

 

생명은 오직 복음 속에 있어요.

복음이란? 새 언약을 말해요.

옛 언약을 법이라고 하면 새 언약은 은혜에요.

은혜란 법에 반대말입니다.

 

법을 죽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법 아래 있는 자는 다 죽고, 은혜 아래 있는 자는 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다 살아나요.

살아난다는 것은 기업을 잇게 된다는 말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맺었어요.

그럼 예수님이 새 언약이 어떻게 세우지는 지를 살펴봅시다.

 

마태복음 26장입니다.

 

마 26:26-28=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유월절을 지킵니다.

알다시피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어린 양의 대신 죽어주심으로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절기에요.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발라서 죽음에 재앙을 넘긴 그날이 유월절이에요.

그러니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를 뒤집어쓰고서 애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피에 민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절기를 만들어서 대대로 기념케 하셨어요.

기념이란? 과거에 경험된 것을 현재화 시키는 것입니다.

과거 경험한 사건을 현재 속에서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기념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유월절만 되면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서 피는 문에 바르고 고기는 불에 구어서 먹으면서 출애굽의 역사를 현재 속에서 기념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유월절을 양 고기 대신에 ‘떡과 포도주’로 지키고 있습니다.

‘떡’을 일컬어 ‘예수님 살’이라고 하고!

‘포도주’를 일컬어 ‘예수님 피’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떡이나 포도주가 아니고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으로서 새 언약을 세운다는 말입니다.

새 언약이란? 옛 언약을 대조하여서 말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인간이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새 언약은 예수님이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 언약 하에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 지켜주세요.

예수님이 지켜 주신 것을 믿는 것이에요.

이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이서 맺었어요.

그러니 새 언약에선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책임 져 주는 언약인 것입니다.

왜? 책임을 져 줍니까?

우리가 안 되니까 책임져 주시는 거에요.

 

아까 율법은 죽이는 것이라고 했지요.

맞아요.

율법이 죽여 놓은 것을 예수님이 살려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 언약은 살려주는 언약인 것입니다.

 

살려 준다는 것은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나오미의 기업을 이어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보아스는 새 언약과 같은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어요.

 

그래서 보아스가 먼저 있는 율법에게 야! 너 나오미의 죄를 책임져! 라고 하자!

율법이 난 책임 질수가 없어!

난 죽일 뿐이야!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어!

그러니 율법이 보아스에게 "네가 나 대신 나오미를 책임져 줄래!"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알았어!

그럼 내가 나오미를 책임질게!

그리곤 보아스가 나오미의 기업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죽여 놓은 자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세요.

그러니 하나님은 옛 언약과 새 언약 두 가지를 가지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옛 언약으로 죄 아래 가두어 놓고!

새 언약으로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성도가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보아야 하는 이유는 지키고자 함이 아니고 자기 죄를 고발당하고자 함입니다.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6=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잘 보세요.

하나님 말씀이 뭘 합니까?

살아서 수술하는 킬이 되어서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하지요.

마음에 생각과 뜻을 감찰하여서 우리를 완전히 발가벗긴다고 하지요.

 

한마디로 말씀이 우리의 몸과 마음 모두를 하나님 앞에 죄라고 까발린단 말입니다.

그러니 말씀 앞에 서면 우린 홀딱 벗겨지는 거에요.

내 자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폭로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칼’이라고 하고 ‘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어둠이에요.

빛 앞에 서면 우리 실체가 다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율법이 하는 일이에요.

말씀이 칼이 되어서 우릴 죄인이라고 죽인단 말입니다.

 

그리고선 우리의 시선을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게로 향하게 하세요.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서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하신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죄를 까발리는 것은 예수를 붙잡게 하고자 함입니다.

이걸 아까 율법이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말씀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만 바라보게 되어 있어요.

이런 사람이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에요.

그 안에 성령이 임한 성도에요.

 

그 안에 성령이 임한 성도는 예수님만 바라보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않는단 말입니다.

뭘 안한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가 한 일을 의라고 붙잡지 않는단 말입니다.

 

난 죽은 자이고!

예수의 생명으로 사는 자이구나! 를 아는 사람이 성령 받은 성도에요.

그렇지 않고 자기에게 가능성을 두는 사람은 종교인이지 성도가 아니에요.

성령이 그 안에 없기 때문에 예수를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믿는 것이지 내가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개혁주의자들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예수를 안 믿는 자들입니다.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은사 받은 것을 붙잡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밥 퍼주는 사랑을 붙잡고 있어요.

이러한 것은 모든 종교에서 다 하는 것이에요.

 

이러한 것을 백날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오지 않아요.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그런 것 한다고 죄사함이 주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이러한 것을 신앙으로 내어 놓지 말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예수님 피에서만 나와요.

하나님의 생명은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에서만 나와요.

죄사함은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서만 나와요.

그러니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이지 어떤 종교적인 사랑 행위가 아니에요.

 

이러한 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제발 좀 말귀를 알아먹으세요.

그러니 이러한 것에 한 눈 팔지 말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란 말입니다.

제발 무슨 말인지 좀 분간을 하세요.

 

우린 나오미에요.

죄인이란 말입니다.

이런 죄인의 인생을 대신 책임 져 주실 분은 “보아스”처럼 이름 있는 고엘뿐입니다.

“예수” 라는 이름을 가진 “구주” 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주 예수가 나의 고엘 임이 믿어진다면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안심하고 감사하며 사세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예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어요.

 

로마서 8장을 보세요.

 

롬 8:33-39=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보세요.

어떤 놈이 우리를 송사한다고 하느냐!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는데 누구냐!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데 그 어떤 놈이 우리를 참소 한단 말입니까?

마귀도 성도를 참소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도 간구하지요.

누가 내 피가 발라진 성도를 죄인으로 송사하느냐 입니다.

누가 내 사랑을 받은 성도를 내 사랑에서 끊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마귀가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었다고 참소하자 하나님이 흰옷을 입혀서 마귀의 주둥이를 막아 버렸어요.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이란? 우리의 행실들입니다.

흰옷이란? 예수님의 의(義)에 옷이에요.

예수님의 대속에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도살당할 양처럼 풍전등화 신세로 살고 있지만 절대로 우리의 신앙을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위험이나, 칼이나, 기근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아요.

그건 예수 때문에 잠시 당하는 고난이에요.

구원 받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에요.

 

“최종병기 활” 이라는 영화에 보면 마지막 엔딩 부분에 바람이 부는데서 화살을 쏘면서 “바람은 피하는 것이 아니고 극복하는 것이다” 라는 아주 유명한 대사가 나옵니다.

아니 영화에서 어찌 이런 복음적인 이야기가 나올까요?

 

고난은 피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극복하고 헤쳐 나가는 것이에요.

예수 때문에 당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허~ 허! 하고 웃으면서 지나가세요.

 

그러니 조금 어렵다고 징징거리지 마세요.

그래 까짓거 잠시 후면 눈물 없고 고통 없는 곳으로 갈 터인데!

그걸 알라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쪼끔씩 맛 뵈기로 보여 주신단 말입니다.

그럼 마음이 천국이 되어요.

 

은혜 받아 보세요.

세상살이가 작아 보여요.

우릴 책임져 주시는 예수 라는 고엘이 있잖아요.

그러니 감사하면서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저주 받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잠시 났다가 사라질 들풀과 같은 인생을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구원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기업을 잇게 해 주는 고엘로 계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 범사가 감사가 되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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