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룻기 강해

6강. 보아스가 주는 볶은 곡식 (룻 2:10-23)

by coroa 2020. 10. 6.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6강. 보아스가 주는 볶은 곡식 (룻 2:10-23).-

 

-.정낙원 목사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셨다 함은 만물의 주인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주인으로서 만물의 주관하고 계십니다.

다스리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룻이 보아스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필연이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둘의 만남은 창세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시나리오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을 보아스와 룻의 만남을 통하여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룻은 과부입니다.

약육강식이라는 힘의 법칙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에서 의지할 남편이 없는 과부는 죽은 목숨과 같습니다.

힘의 논리로 다스려지는 세계에서 힘이 없는 자는 죽은 자와 같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와 같은 과부인 룻이 보아스를 만납니다.

 

보아스를 일컬어 “유력한 자” 라고 합니다.

유력한 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이쉬 깁보르 하일” 이라고 하는데 이는 합성어입니다.  

 

“이쉬” 란 “남자”를 말합니다.

“깁 보르” 는 “전능한” “용맹하고 강하다” 는 뜻입니다.

“하일” 은 “재물” 이나 “힘”을 말하는데 때론 “군대”라는 말로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력한 자라는 “이쉬 깁보르 하일” 이라는 말은 아주 “전능하고도 강한 힘을 가진 사람” 이란 뜻입니다.

 

의역을 하면 “큰 부자” 라고도 할 수가 있고!

“큰 용사” 라고도 할 수가 있고!

“전능한 왕” 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보아스” 라는 말이 “힘이 센 자” 또는 “복 된 자” 라는 뜻을 담고 있으므로

신약적인 의미로 보면 “메시야” 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를 일컬어 “기업 무를 자” 라고 합니다.

 

기업 무를 자란? 기업을 잇게 해 주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집안으로 말하면 멸문지화로 망한 가문을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과부에게 기업을 이어준다는 말은 자식을 생산해 준다는 말입니다.

여자에게 있어 자식이 없다는 것은 저주이고 수치입니다.

 

성경은 죄를 수치라고 하고, 의를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죄를 가려주고 의를 주는 자란 뜻입니다. 

이러면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가 우리 성도들의 구원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예수님을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살려 주는 영” 이라고 하고 인간은 “산 영” 이라고 합니다.

“살려주는 영”이란? 죽은 자를 살려 주는 분이란 뜻입니다.

“산 영”이란? 사망을 안고 살아가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니 실상은 죽은 자란 뜻입니다.

 

알다시피 나오미와 룻은 과부입니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라는 새로운 남편을 통해서 아들을 얻습니다.

 

룻은 남편이 둘인 셈입니다.

한 남편은 이방인이었던 죄인에게서 건져주는 남편이었고!

한 남편은 기업을 이어주는 남편입니다.

 

이 두 남편을 예수님에게 적용해 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어 준 남편은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어주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서 우리가 죄사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죽었던 자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를 나오미(룻)의 두 남편으로 적용해봅시다.

나오미(룻)의 첫 남편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둘째 남편인 보아스는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나오미와 룻은 두 여자가 아니라 한 여자입니다.

나오미는 우리 옛 사람을 상징하고, 룻은 새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룻이 낳은 자식을 나오미가 낳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모압은 저주 받은 땅입니다.

예루살렘은 축복의 땅입니다.

저주 받은 땅에서 축복의 땅으로 돌아 갈 수가 있는 것은 남편의 죽음 때문입니다.

남편이 죽음이 축복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죽음으로 천국 문을 열어 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새롭고 산 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에덴의 막힌 담을 열어 놓았습니다.

저주에서 축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보아스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유력자를 룻이 만난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과부인 룻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아스의 마음을 주관하셨기 때문에 룻을 보고 은혜를 베풀게 된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신과 룻의 만남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룻에게 여호와께서 너를 기억하사 은혜의 날개 아래로 품어 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엔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만나는 필연적인 만남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라도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나에게로 올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해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바탕엔 하나님의 은혜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은혜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십니다.

만날 자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세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가 기르신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참새보다 더욱 귀하다고 했습니다.

참새도 기르시는 하나님이 하물며 너희를 기르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리고 합니다.

 

우리는 그의 양입니다.

그런데 목자가 양을 인도합니다.

때론 쉴만한 물가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때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합니다.

양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 다닐 뿐입니다. 

이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처한 그 환경도 모두가 하나님이 목자처럼 허락하신 환경입니다.

이것이 믿어진다면 범사가 감사가 되어 집니다.

나의 현실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모두가 예가 됩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보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니 범사가 감사되지 않고 불평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룻의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을 통찰하여야 합니다.

우리 일생도 룻처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방 여자인 룻이 하나님의 백성인 남편을 만나서 호적이 옮겨진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남편의 죽음으로 과부가 되어 자기가 태어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남편의 나라인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또한 보아스라는 기업을 이어줄 유력자를 만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룻은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와 새로운 인생이 시작이 됩니다.

이방여자 룻은 죽고 이제 베들레헴 여자 룻이 되었습니다. 

룻에게 제 2막의 인생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이젠 이방여자 룻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룻으로의 인생입니다.

 

이방여자였던 룻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이 된 것은 죄인이 구원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룻처럼 이방여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남편을 만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룻에겐 두 남편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방여인인 죄인으로서 만난 남편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난 후 과부로서 만난 남편이 있습니다.

죄인으로서 만난 남편을 죽었고, 이스라엘 나라로 올라와서 만난 남편은 살아 있습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러합니다.

우리도 두 남편이 있습니다.

죄인일 때 만난 남편은 예수라는 남편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린 십자가에 죽은 남편을 통해서 이방인에서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죽었던 예수님이 부활을 하시고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새로운 남편으로 오신 겁니다.

이 남편이 우리에게 기업을 이어줍니다.

 

그러니 룻이 만난 두 남편은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과 부활하시고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룻에게 있어 보아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보아스처럼 새로운 남편으로 와 계십니다.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기업을 이어주십니다.

 

그럼 보아스가 룻을 어떻게 보호하는지 살펴봅시다.

 

보아스는 룻에게 자기 밭의 곡식에 이삭을 줍니다.

베들레헴의 물을 줍니다.

볶은 곡식을 줍니다.

 

앞서 보아스와 룻의 만남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보아스는 예수님의 예표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보아스가 룻에게 하는 모든 것은 계시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하는 행위 하나 하나가 모두 예수님의 자기 백성을 구속하는 계시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일도!

베들레헴에서 길어온 물을 마시는 것도!

보아스가 룻에게 주어서 먹게 한 볶은 곡식도!

룻에게 보아스의 밭 이외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하는 것도 계시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은 보아스가 룻에게 하신 일들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보아스는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룻은 육적인 것을 받았지만 우리는 영적인 것을 받습니다.

룻이 보아스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영적인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보아스와 룻의 이야기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먼저 염려가 되어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자칫하면 알레고리로 곡해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알레고리란? 은유적인 해석법을 말합니다.

성경 해석의 한 방법입니다.

 

바울도 알레고리적 해석을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사라와 하갈을 가지고 두 언약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사라는 하늘 예루살렘이라고 하고 하갈을 시내산이라고 했어요.

이게 알레고리 해석이에요.

이런 해석을 영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나쁜 알레고리 해석은 성경에 보니 동방에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또한 예수님이 구름 타고 재림을 하시는데 구름은 물이고 물은 곧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을 받은 자가 바로 재림 예수다!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은 한 사람을 들어서 사용 하였다!

구약에는 모세를 들어서 사용하였고!

신약에는 예수를 들어서 사용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예수가 부활하여 영으로 어느 한 사람에게 왔다!

그 분이 바로 다른 보혜사인데!

그가 누구냐 하면 이00 이다!

이00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그게 바로 신천지이다!

이런 것이 바로 나쁜 이단적인 알레고리 해석이에요.

 

성경은 창세전 언약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은 묵시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묵시에 속한 언약을 역사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묵시에 속한 일을 역사로 풀어 낼 때는 은유적일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그냥 우리처럼 평범한 인간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들 입장에서는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은유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은유란? 묵시를 역사로 표현하는 하나의 언어입니다.

알다시피 역사는 묵시로부터 나왔잖아요.

그러니 역사는 묵시의 그림자입니다.

세상이라는 역사는 보이지 않는 하늘이라는 묵시에 속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잠시 동안 필요해서 만든 겁니다.

 

이 세상은 묵시에 계신 실상이신 예수님을 말해주기 위해서 허상인 역사를 가지고 은유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허상이에요.

실상은 하늘에 있어요.

실상은 예수님이고 모두가 허상이에요. 

예수님만 실상이에요.

 

그러니 목사들이 자기 팬 클럽을 만들면 안 되어요.

목사를 추종하게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교인들 눈에 목사가 보이면 안 되고 예수가 보여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많은 목사들이 자기 팬 클럽을 만들고 있어요.

자기 기쁨조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목사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나중엔 그 목사의 말이 진리가 되어 버려요.

그 목사만 진짜 목사이고 나머진 다 가짜라고 해 버린단 말입니다.

목사들이 이걸 은근히 즐겨요.

교인들이 자기를 따르도록 만들어요.

이것이 바로 거짓 종들의 특징입니다.

 

이건 아주 무서운 겁니다.

목사의 임무는 교인들이 자기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무슨 신령한 것처럼 행사해선 안 된단 말입니다.

행여라도 교인들이 목사에게 무슨 영험한 것이라도 있는가 싶어서 쫓아다니게 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럼 그 목사는 교주가 되어서 예수를 가리는 마귀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적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교주가 되고 싶어 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어요.

왕 노릇하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자기를 따르는 사람 몇 명만 있어도 교주 노릇하고자 하는 겁니다.

이건 죄의 본성이에요.

 

마귀는 이 본성을 자꾸만 부추깁니다.

반대로 성령은 이 본성을 깨트립니다.

목사는 이 싸움을 게을리 하면 안 되어요.

어느 순간 교주가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은 보이는 예수를 원해요.

그러니 신천지 이00가 다른 보혜사라고 하여도 믿는 겁니다.

목사의 말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고 목사의 어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경이 그러한가 상고하여야 합니다.

 

목사들은 교묘하게 성경을 인용하여서 자기 입지를 넓히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틈만 나면 자기 세계를 넓히고자 합니다.

왕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내 교회를 만들고 싶어 하고 내 교인들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온 교회 교인들이 자기 말 한마디가 법이 되고 진리처럼 통용이 되는 그런 왕국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예수 이외는 보이지 않게 해 주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만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에게 엘리트 의식을 심어주어서도 안 되어요.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라!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라는 것도 심어주면 안 되어요.

인간은 무엇인가 특별하다고 생각되면 그걸 붙잡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이든지! 교회이든지! 의미를 부여하면 우상이 되어요.

 

우상이 뭡니까?

형상을 본뜬 인형이란 말입니다.

실상을 본떠서 그려놓은 허상이란 말입니다.

실상은 하늘에 있어요.

 

우린 모두가 허상입니다.

예수님만 실상입니다.

허상은 실상이 오면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허상이 실상의 자리에 앉아서 실상을 가리는 짓을 하게 되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부 영적인 이야기입니다.

영적이라 함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란 말입니다. 

보아스는 예수님을 예표하고 룻은 성도를 예표합니다.

 

자! 그럼 먼저 밭에 의미를 좋은 알레고리인 영적으로 해석해 봅시다.

 

보아스와 룻의 만남이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보아스의 밭입니다.

그것도 추수하는 밭입니다.

 

하나님께서 룻을 인도한 밭이 보아스의 추수하는 밭입니다.

추수를 다른 말로 타작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타작마당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합니다.

 

눅 3: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타작이라 함은 심판을 말합니다.

알곡은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웁니다.

곡간에 들이는 것은 천국을 말하고 불에 태움은 지옥을 말합니다.

이는 모두가 성도의 구원이야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보아스의 밭을 신약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예수님의 밭이 됩니다.

예수님의 밭이 어디입니까?

교회입니다.

 

추수하는 밭을 타작마당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타작하러 오신 밭이 어딥니까?

구약교회이지요.

예수님이 구약교회에 오셔서 추수를 합니다.

 

오늘본문을 보면 보리 추수와 밀 추수 두 추수가 나옵니다.

보아스의 밭에 추수를 예수님의 추수로 살펴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영적 의미를 이스라엘의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두 번 추수하세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세 번 하세요.

초림으로 오셔서 구약 이스라엘을 추수합니다.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을 가릅니다.

혈통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로 가릅니다.

이게 첫 번째 추수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추수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영과 육을 갈라지는 추수를 합니다.

이건 영적인 추수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추수는 예수님이 재림을 하셔서 하는 추수입니다.

이 때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영원한 추수가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 추수입니다.

첫 번째 추수는 초림으로 오셔서 구약 이스라엘 속에서 영적 이스라엘을 추수하는 것입니다.

혈통적 이스라엘 속에서 영적 이스라엘을 뽑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12 제자로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 추수는 예수님이 재림을 하셔서 신약의 교회 안에서 육적 신자와 영적 신자를 추수하는 것입니다.

마치 그물 가운데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갈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초림은 재림의 그림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농사를 두 번 짓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보리 농사와 밀 농사가 나옵니다.

보리 농사는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을 지나 봄에 수확을 합니다.

그리고 밀은 봄에 파종하여 가을에 수확을 합니다.

 

물론 밀 농사도 보리처럼 겨울에 파종하여 봄에 거두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보리 농사와 밀 농사를 구분하는 것은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보리 농사와 밀 농사로 은유적으로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보리와 밀 추수는 가을에 심고 봄에 추수하는 것인지, 아니면 봄에 추수하여 가을에 추수하는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봄 추수인지 가을 추수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보리와 밀 추수를 가지고서 자기 백성들의 구원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리 농사는 유대인을 말하고, 밀은 이방인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7대 절기를 보면 이스라엘은 두 번 추수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봄 절기인 초실절에 첫 이삭을 하나님께 요제로 드리는 것이 있고!

가을 절기인 나팔절에 추수한 곡식을 성전에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세 번입니다.

초실절에 첫 이삭을 드리는 제사가 있고!

오순절에 드리는 제사가 있고!

나팔절에 드리는 제사가 있습니다.

 

초실절에 첫 이삭을 드리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물론 이 때 구약의 성도들이 함께 부활을 합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봅시다.

 

마 27:50-53=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실 때 무덤이 열립니다.

이 무덤은 구약 성도들의 무덤입니다.

무덤이 열린다는 것은 사망이 삼켰던 자들을 토해낸다는 말입니다.

 

마치 고기가 요나를 소화시키지 못하고 토해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망이 예수님을 삼켰는데 이건 자기가 소화 시킬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엨~ 하고 토해낸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토해냄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무덤에서 나온 성도들이 거룩한 성으로 들어갑니다.

거룩한 성이란? 하늘 예루살렘 성을 말합니다.

곧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그 동안 막혔던 천국의 문을 자기 몸으로 열어버린 것입니다.

이걸 성소의 휘장이 찢겼다고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을 새롭고 산 길이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올 때 함께 나온 자들은 구약 이스라엘이 살아나는 모형입니다.

첫 이삭들인 겁니다.

그러니 초실절에 구약의 성도들을 추수한 것입니다.

이게 보리 추수에요.

 

구약 이스라엘이 마치 보리처럼 죽음이라는 겨울 속에 가두어져 있다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봄에 새 생명으로 거듭나 추수를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보리 추수는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 구약 이스라엘을 추수하는 것의 모형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신약에 농사를 짓습니다.

오순절에 성령 강림으로서 새로운 농사가 시작이 됩니다.

오순절 날에 천하만국으로부터 올라온 유대인들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이 일어납니다.

 

오순절이 되면 떡 두덩이를 하나님 앞에 제사로 드립니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실제로 오순절 날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구원을 받는 사건들이 일어났어요.

그러니 떡 두덩이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떡이란? 곡식이 깨어져 가루가 되어 기름에 반죽이 되어서 만들어집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 옛 사람은 곡식이 깨어지듯이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납니다.

 

성령이 임하면 옛 사람의 흔적은 사라지고 가루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께 바쳐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에 드리는 제사로서 영적인 밀 추수입니다.

밀이 깨어져 밀가루가 되어서 떡으로 만들어져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밀 농사를 두 번 짓는다고 하였지요.

보리처럼 가을에 파종하여 봄에 추수하는 것이 있고!

봄에 파종하여 가을에 추수하는 것이 있어요.

 

가을에 파종하여 봄에 추수하는 밀은 보리 추수가 끝나고 약 한 달 후에 추수를 합니다.

이건 마치 초실절이 지나 오순절에 추수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1년에 세 번 추수하는 시기가 있는 셈입니다.

 

이건 절기를 보아도 나타나 있어요.

 

초실절에는 보리 추수를 하고!

오순절에는 겨울 밀 추수를 하고!

나팔절에는 봄에 뿌린 밀 추수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추수하는 시기는 통상적으로 봄 추수와 가을 추수로 나눕니다.

봄 추수는 보리 추수라고 하고!

가을 추수는 밀 추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이제부터 이방인 구원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오순절에 새로운 씨를 밭에 파종을 한 것입니다.

이건 봄에 밀을 뿌려서 넉 달 동안 농사를 지어 나팔절에 추수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나팔절은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재림을 할 때 오순절 이후 무덤 속에 있는 성도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때 일어나는 성도들은 봄에 파종하여 가을에 추수하는 밀과 같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오늘 본문을 보면 룻이 보리 추수와 밀 추수 때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입니다.

이걸 교회의 추수로 보면 교회 안에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처럼 두 번의 심판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 하는 추수는 보리 추수가 되고 재림으로 하는 추수는 밀 추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 하신 구약교회의 추수는 보아스의 밭에서 먼저하는 보리 추수가 되고!

예수님이 재림 하셔서 하는 신약교회 추수는 나중에 하는 밀 추수와 같다는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구속사적인 의미에서의 밭에 영적의미를 살펴봅니다.

 

밭이란? 곡식을 얻기 위해서 농부가 씨를 뿌려서 농사를 짓는 곳입니다.

농부가 자기가 필요한 곡식을 심어서 소출을 얻는 곳이 밭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밭에 곡식을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아브라함이 밭을 하나 산 사건이 있습니다.

여기에 엄청난 영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어요.

아브라함이 밭을 산 것은 장차 예수님이 하실 일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지요.

이게 신약에 오면 예수님으로 귀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예표이고 예수님은 실상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하는 일이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계시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는 일 속에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밭을 무슨 용도로 왜? 구입을 했는지 봅시다.

 

창세기 23장입니다.

 

창 23:1-20=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2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3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 ~ 9 그로 그 밭 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 ~ 19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20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 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

 

아브라함이 헷 족속의 땅에 우거 할 때에 아내 사라가 죽습니다.

아브라함이 헷 족속의 왕인 에브론에게 아내 사라를 장사하려고 밭을 하나 삽니다.

은 사백 세겔을 주고서 막벨라 굴을 삽니다.

 

그리곤 아브라함은 그 밭에 아내 사라를 장사합니다.

그 후로 막벨라 굴은 아브라함 소유의 매장지가 됩니다.

이게 나중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들어가는 곳이 됩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선 이 무덤을 열조의 묘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산 밭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열조가 들어갈 무덤인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방나라에 유일하게 값을 주고 산 것이 열조들이 들어갈 무덤인 것입니다.

 

이걸 신약에 예수님 사건으로 조명해 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예표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한 일이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아브라함과 같은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값을 주고 밭을 하나 산 것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銀) 삼십에 팔고 예수님이 죽자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 돈을 성전에 바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그 돈으로 “아겔다마” 라는 “피 밭”을 하나 삽니다.

그리곤 그 밭을 “나그네들의 무덤”을 삼아버립니다.

 

성경은 성도를 일컬어 나그네라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의 핏 값으로 산 밭을 나그네의 무덤으로 삼았다는 것은 곧 나그네 같은 성도들의 무덤인 셈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의 핏 값으로 산 곳은 교회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일컬어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피 밭인 겁니다.

나그네들의 무덤입니다.

 

구약 식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무덤인 겁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곤 예수님의 아내가 됩니다.

 

예수님의 아내가 누구입니까?

성도들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핏 값으로 교회를 산 것은 성도들이 안식할 무덤으로 삼고자 함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성도들이 묻힐 무덤입니다.

교회는 성도의 옛 사람이 죽어 장사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 사람이 죽는 곳입니다.

이렇게 옛 사람이 죽는 것을 추수라고 합니다.

 

법에 속한 옛 사람이 죽고 은혜에 속한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성도는 예수와 함께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날마다 옛 사람이 추수가 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니 교회는 이중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옛 사람에게는 무덤이지만 새 사람에겐 천국입니다.

성도가 교회에서 버려야 할 것이 있고 얻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옛 것은 버려야 하지만 새 것은 입어야 합니다.

땅에 것은 버려야 하지만 하늘에 것은 얻어야 합니다.

 

보아스의 밭은 교회의 예표라고 하였으니 그럼 룻이 추수하는 밭에서 보아스로부터 얻은 것이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준 것도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 보아스가 룻에게 준 것이 무엇입니까?볶은 곡식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보아스가 룻에게 준 볶은 곡식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볶은 곡식이란? 불에 익힌 음식을 말합니다.

그럼 누가 볶은 곡식을 먹을까요? 

사무엘상 17장 17절을 보면 이새가 다윗에게 볶은 곡식을 주어서 전쟁하는 형들에게 가져다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삼상 17:17 “이새가 그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볶은 곡식은 부패하지 않아서 전쟁하는 군인들이 먹는 음식입니다.

전쟁터에서는 빨리 먹고 싸워야하기 때문에 음식을 온전하게 조리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볶은 곡식을 비상식량으로 나누어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여호수아 5장을 봅시다.

 

수 5:10-12=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 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11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12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쟁을 하기 전에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할례란?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할례를 통하여 광야에 사람이 죽었습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킵니다.

알다시피 유월절은 어린 양의 피로서 죽음에서 살아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을 기념한다는 것은 “나는 어린 양의 피 안에서 사는 자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아니고 어린 양 안에서 나입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걸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광야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그리곤 할례 받은 자들에게 유월절을 지키게 합니다.

할례를 받고 유월절에 동참한 백성들에게 볶은 곡식을 먹입니다.

 

그러자 광야 사십 년 동안 먹었던 만나가 그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고 유월절을 지키자 만나가 그칩니다.

 

이제 새로운 양식을 줍니다.

새로운 양식을 준다는 것은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는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동안 두 지도자가 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입니다.

모세는 출애굽을 시킨 인도자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입성 시키는 인도자입니다.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출애굽에서부터 가나안까지는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빼내심을 입고 천국에 가는 것의 모형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구원을 받고 천국을 가는데 두 인도자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알다시피 성도를 구원하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럼 모세처럼 출애굽 시킨 분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할례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신약에선 할례를 세례라고 하는데 세례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장사 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심을 입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빼내심을 입은 자들에게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서 우리 안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천국은 곧 가나안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호수아는 곧 신약에서는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구약 식으로 말하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모세와 같고!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은 여호수아와 같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쟁을 할 백성들에게 볶은 곡식을 주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도들에게 숯불에 구운 떡을 줍니다.

볶은 곡식이나 숯불에 구운 떡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 영적 의미는 동일합니다.

 

지금 볶은 곡식 이야기를 합니다.

할례 받은 자들이 먹고 살아갈 양식이야기 입니다.

볶은 곡식은 가나안에서 먹을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할례를 받고 유월절을 지키자 양식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제 다른 인간이란 말입니다.

옛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할례 받기 전에는 죄인이었다고 한다면 할례를 받고 난 후는 의인입니다.

의인이란? 예수님의 의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자기 행실을 보지 않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할례 받기 전의 사람을 육이라고 한다면 할례를 받고 난 후의 사람은 영에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영에 사람이 먹을 양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영에 사람이 먹을 양식이 바로 볶은 곡식입니다.

 

성도가 먹을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그럼 볶은 곡식도 말씀이란 말입니다.

 

볶은 곡식은 누가 먹는다고 했나요?

전쟁하는 군인이 먹는 것이라 했습니다.

추수하는 일꾼이 먹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볶은 곡식은 전쟁하는 군인이 먹는 양식이라고 했지요.

그럼 가나안은 전쟁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맞습니다.

가나안은 전쟁하는 곳이에요.

볶은 곡식을 먹은 이스라엘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쫓아내는 전쟁을 하여야 합니다.

 

볶은 곡식을 유월절 이튿날부터 먹었다는 것을 신약으로 말하면 예수의 피 안에 있는 성도가 먹어야 할 양식이란 말입니다.

할례를 받고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은 옛 사람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다음 날부터 광야에서 먹던 만나가 그치고 양식인 볶은 곡식을 준 것입니다.

볶은 곡식은 가나안에서 먹을 양식입니다.

볶은 곡식을 먹고 가나안 전쟁을 하여야 합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성도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으로 바뀝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적으로 가나안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옛 사람과 싸우는 전쟁입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싸움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마귀는 항상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참소를 합니다.

이 때 성령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마귀의 참소를 막아 줍니다.

이게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새 언약을 근거로 사단의 참소를 막아줍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해 주신 새 언약의 말씀이며 곧 볶은 곡식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은 먼저 새 언약으로 옛 언약을 이기게 하시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육신의 소욕과 싸우는 일입니다.

 

가나안은 우리 안에 주어진 천국의 모형입니다.

가나안에 원주민이 살고 있듯이 우리 안에도 우리 옛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싸웁니다.

이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먹어야 할 양식이 볶은 곡식입니다.

양식을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가나안 전쟁을 앞두고 볶은 곡식을 먹입니다.

구약에서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쟁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였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먹입니다.

그게 바로 “숯불에 구운 떡” 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봅시다.

 

요 21: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님께서 부활을 하시고 난 후 제자들을 찾아 갑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을 찾아가서 숯불에 구운 떡과 고기를 먹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조반이라고 해요.

 

조반이란? 아침입니다.

아침이란? 새로운 날을 말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새로운 세상의 아침을 해서 먹였다는 말입니다.

그 아침 양식이 뭔고 하니 숯불에 구운 떡입니다.

 

아침은 새로운 날이 시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새로운 날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 시작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이 몰고 온 나라는 빛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죄와 사망이라는 어둠을 물리치고 찬란한 생명의 세계를 여신 것입니다.

그래서 조반을 먹이시는 겁니다.

새로운 양식을 먹입니다.

그게 바로 숯불에 구운 떡입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내가 죽은 줄 알았지만!

나는 이렇게 죽음을 이기고 부활을 하였단다!

이제 내가 너희들을 이 부활의 세계로 초대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작을 알리는 이른 새벽에 숯불에 구운 떡과 고기를 조반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장만하여서 말이에요.

제자들은 이 조반을 먹고 난 후 고기 잡던 일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 속으로 뛰어 들게 됩니다.

영적 전쟁 속으로 뛰어들게 됩니다.

 

며칠 후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리곤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들어갑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유대교와 같은 옛 언약에 속한 신앙과의 전쟁을 벌립니다.

영적 가나안 전쟁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떡은 곧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숯불에 구운 떡은 어떤 말씀일까요?

이는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6장 17절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고 합니다.

성령의 검이란? 성령에 감동으로 주신 말씀이란 말입니다.

이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해석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해석케 해 주는 말씀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성령께서 해석케 해 주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반대로 성령의 감동 없이 성경을 해석하는 말씀이 있다는 것이 됩니다.

성령의 감동 없이 하는 해석은 인간 입장에서 해석하는 말씀입니다.

이걸 인본주의 해석이라고 합니다.

 

인본주의 해석은 옛 사람의 해석이고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해석은 새 사람의 해석입니다.

이 두 해석은 극과 극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단적입니다.

이러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도 안에 가나안 전쟁이 일어납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전쟁을 하게 됩니다.

전쟁을 하려면 말씀이라는 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양식이라고 했으니 볶은 곡식과 같은 말씀을 먹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옛 사람과 전쟁을 하지요.

 

그럼 새 사람이 먹어야 할 볶은 곡식 같은 말씀을 먹어야 하잖아요.

그 볶은 곡식 같은 말씀이 바로 성령의 감동으로 주시는 말씀이에요.

거듭난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하지요.

성령이 새롭게 말씀을 보는 눈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옛 언약식이 아닌 새 언약식으로 보는 눈을 주세요.

 

성령이 임하면 모든 말씀을 새 언약으로 해석합니다.

새 언약으로 해석한다 함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말씀을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새로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알려 주십니다.

 

이렇게 되면 기존에 알고 있던 옛 언약식으로 해석하면 죄가 되어요.

그래서 성령이 새로운 죄관과, 새로운 의관과, 새로운 심판관을 가지고 기존에 옛 언약의 기준으로 가지고 해석하던 것을 죄라고 책망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옛 언약식 해석과 새 언약식 해석 간에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히브리서 7장을 보면 이 세상에는 아론의 반차로 온 제사장과, 멜기세덱의 반차로 온 제사장이 있다고 합니다.

아론의 땅에 제사장이고 멜기세덱은 하늘에 제사장입니다.

아론의 반차로 온 제사장은 땅에 속하였고, 멜기세덱으로 온 제사장은 하늘에 속하였습니다.

 

아론의 반차에 속한 자들은 땅 차원인 옛 언약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것이고,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한 자들은 하늘 차원인 새 언약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땅 차원이란? 문자적 해석이고 육적 해석이고,

하늘차원이란? 언약적 해석이고 영적이라고 합니다.

 

그럼 옛 언약식 해석과 새 언약식 해석을 알아야겠지요.

 

옛 언약식 해석이 뭔가요?

인간 중심입니다.

옛 언약은 언약의 주체가 인간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지킬 주체도 인간에게 둡니다.

 

말씀을 지킬 주체가 인간이 되면 자연히 인간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이게 문자적인 해석입니다.

이건 숯불에 구운 떡이 아니고 생 떡이에요.

볶은 곡식이 아니고 날 곡식이에요.

 

이게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의 신앙을 낳았어요.

바리새인들은 성령의 감동 없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했어요.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니 말씀을 지킬 주체를 인간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율법주의는 인간이 말씀을 지키면 의로워진다고 합니다.

이건 옛 언약식 해석입니다.

옛 언약의 신앙은 인간의 행함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게 이 시대로 말하면 성화주의에요.

성화주의는 인간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사상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하고 의로워져야 한다고 합니다.

이건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이 율법을 지키면 의로워지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율법을 지킨 자신들은 의롭다 하고 율법을 어기고 사는 세리와 창기들을 불의한 자라고 죄인 취급을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창기 같은 자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율법을 안 지키는 자는 저주 받은 자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켰다는 자기 행함을 의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을 지킨 놈이나 안 지킨 놈이나 몽땅 죄인이라고 합니다.

의는 율법 지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율법주의자들이 발끈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이 율법은 폼으로 준 줄 아느냐!

지키지도 못할 것을 왜 주었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래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율법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율법을 주었다고 합니다.

율법을 주신 의도를 알려줍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주신 의도를 잘못 짚은 겁니다.

헛 다리 짚은 거에요.

 

얼굴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거울을 주었는데 바리새인들은 거울로 화장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거울을 준 것은 너는 저주 받을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주신 것인데 말이죠.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그걸 지켜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감추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속은 송장이 썩어 풀풀 냄새가 진동하는데 겉만 치장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걸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외식은 연기하는 것이고 사기에요.

속이는 것이란 말입니다.

자신도 속고 남도 속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이 실상을 확~ 까발리는 일을 하신 겁니다.

숯불에 구운 떡과 같은 성령에 감동으로 성경을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부터 숯불에 구운 떡을 먹은 사람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영적으로 해석합니다.

 

영적이라 함은 새 언약으로 해석을 한다는 말입니다.

 

새 언약으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 말씀은 예수님이 다 지키신다는 것으로 해석해요.

중요한 말을 합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겨냥하고 있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율법을 졸졸 따라 가면 예수님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율법에 완성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어요.

 

율법의 요구가 뭔가요?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다 죽인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 말씀은 죄인은 지켜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이 자기가 어떤 주제인지를 몰라요.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없는 죄인임을 몰라요.

그러니 말씀을 지키겠다고 나대는 겁니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있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있다면 그건 의인이지 죄인이 아니에요.

의인은 구원이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자들에겐 예수가 필요가 없지요.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지금 바리새인들이 여기에 걸려 든 겁니다.

자신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죄인은 율법도 모르는 세리와 창기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이 와서 의를 준다고 해도 거절한 겁니다.

 

그런 의는 저 세리나 창기들에게나 주라고 비아냥거린 겁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게 아니다!

그건 너희들이 착각한거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소경이라서 그런다고 했어요.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아니 우리가 이렇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왜? 소경이라고 하느냐?

소경은 눈 감은 놈이 소경이지!

우리는 소경이 아니라고 바락 바락 우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차라리 너희가 소경이었던 죄가 없으려니와 눈을 떴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신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짓을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하고 있어요.

마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 같이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에라이~ 이 등신들아!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아라!

네 꼬라지가 어떤지!

네 꼬라지가 소경이라고 합니다.

 

소경이니 곤고한 것도 모르고!

가련한 것도 모르고!

가난한 것도 모르고!

벌거벗은 것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가 성경을 육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을 육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이건 불에 익히지 않은 날 음식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보면 볶은 곡식을 먹지 않아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볶은 곡식을 누가 먹는가 하면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가 먹습니다.

열왕기상 19장 6절을 보면 엘리야는 이 숯불에 구운 떡을 먹고 사십 주 사십 야를 달려 호렙 산으로 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왕상 19:5-8=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 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엘리야는 천사가 숯불에 구워준 떡을 먹고 그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산인 호렙으로 갑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살아서 승천 한 자입니다.

이는 장차 구원 받은 성도가 천국에 가는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천사를 통해서 숯불에 구워준 떡을 먹이고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천사는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속한 찬사가 엘리야에게 숯불에 구운 떡을 먹인 것은 하늘에 양식을 먹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천사가 주는 숯불에 구운 떡을 먹고 그 힘으로 천국에 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천사와 같습니다.

이 땅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숯불에 구운 떡을 제자들에게 먹인 것은 하늘에 양식을 먹인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신 숯불에 구운 떡을 먹고 이 세상을 떠납니다.

더 이상 세상 사람 아닌 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일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으로서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됩니다.

볶은 곡식은 집에서 먹는 음식이 아니고 집을 떠난 자들이 먹는 음식입니다.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가는 나그네들이 먹을 음식입니다.

이건 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유월절 양고기를 불에 구워서 먹은 것과 같아요.

출애굽이란? 세상에서 나와 천국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 올 때는 양고기를 불에 구워서 먹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빼낼 때는 볶은 곡식을 먹였습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숯불에 구운 떡을 먹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숯불에 구운 떡을 먹였습니다.

이 모두는 영적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보아스의 밭에 사람들과 다른 사람의 밭에 사람들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22절 “나오미가 자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본문을 보면 룻에게 보아스의 밭을 떠나지 말라고 합니다.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말라고 합니다.

보아스 밭에 소녀들과만 다니고 다른 밭에 사람들과는 사귐을 갖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룻이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보아스 밭을 떠나지 않고 이삭을 주웠습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보아스의 밭이 있고 다른 사람의 밭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밭에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밭에 가지도 말고 다른 밭에 사람을 만나지도 말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여기도 영적 의미가 있겠지요.

맞습니다.

 

성경은 항상 두 맥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영과 육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영맥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은 자연히 육맥이 됩니다.

 

보아스의 밭이 하늘에 속한 밭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의 밭은 땅에 속한 밭이 됩니다.

보아스가 자신의 밭에 추수꾼들에게 볶은 곡식을 먹였다고 한다면 다른 밭에 추수꾼들은 날 곡식을 먹였다는 뜻이 되겠지요.

 

곡식은 말씀을 상징합니다.

말씀을 볶았다는 말은 성령의 감동에 말씀이란 뜻입니다.

반대로 날 곡식이란? 인간의 말씀이란 뜻입니다.

 

날 곡식이란? 성령의 감동 없이 인간의 지혜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인본주의 해석이라고 합니다.

인본주의로 해석하게 되면 반드시 인간의 자랑거리가 남게 됩니다.

 

앞서서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하는 말씀과 아닌 것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니 이번엔 다른 밭에 사람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보아스와 다른 사람을 살펴봅니다.

보아스를 예수님의 모형이라고 했으니 다른 밭에 사람은 자연히 적 그리스도가 되겠지요.

적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거짓 선지자가 됩니다.

 

모든 말씀의 끝에 가면 예수님이 남아야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인본주의 해석을 하면 인간이 남아요.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목사를 바라보게 되어요.

이게 아주 무서워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오해하지 말고 편견 없이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의도와 전혀 다른 뜻으로 이해 할 수가 있어집니다.

목사님들이 설교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설교가 고착화가 되면 어떤 위험성을 낳게 되는지에 대하여 말하고자 함입니다.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의인화 하면 예수님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성도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중매쟁이라고 했습니다.

 

중매쟁이는 자기가 드러나면 안 됩니다.

신부에게 신랑을 소개해 주어야 합니다.

신부의 눈에 신랑만 보이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보이면 큰일 납니다.

반역자가 되어요.

 

구약에 보면 이런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압살롬입니다.

압살롬은 다윗에게로 가는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 했어요.

백성들을 위로하는 척 하면서 자기편으로 만들었어요.

백성들이 자기를 따르자 이젠 자신이 재판하는 일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엔 반역을 도모하고 맙니다.

이게 바로 적 그리스도에요.

 

그런데 이런 압살롬의 일을 목사들이 하고 있어요.

성도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따르게 한단 말입니다.

자기 말이 마치 진리라도 되는 냥 믿게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잘하는 것이 엄청난 미혹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목사를 추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전 이런 사람들을 많아 보아 왔어요.

처음엔 겸손하고 천사 같다가도 나중엔 광명의 천사로 변해요.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다 축출해요.

그리고 자기를 추종하는 기쁨조들만 남게 만들어요.

그리곤 왕 노릇하는 겁니다.

 

에스겔 28장을 보면 마귀의 반역을 두로 왕으로 묘사를 하는데 무역이 풍성하므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였다고 합니다.

에스겔 28장을 보고 갑시다.

 

겔 28:11-19=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2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목도하는 모든 자 앞에서 너로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19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인하여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경계거리가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보세요.

무역이 풍성하므로 강포가 가득하여 범죄하였다고 하지요.

무역이 불의하여서 성소를 더럽혔다고 하지요.

이게 엄청 중요한 말입니다.

 

성소란? 하나님의 침실이에요.

침실을 더럽혔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신부될 자들을 자기가 차지하였다는 말입니다.

압살롬처럼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 하였다는 말이에요.

한마디로 성도들을 자기가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를 따르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목사들이 이런 짓을 하고 있어요.

목사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많아지면 자기 업적을 진리화 시키고자 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이 재가하여서 한 일로 만들어 버려요.

이게 나중에 어떻게 발전하는가 하면 자기의 말이 곧 하나님 말이 되어 버립니다.

목사의 말이 곧 하나님 말씀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목사의 말이 성경과 같은 권위로 가르쳐지게 되어요.

여기에 미혹당하면 교인들은 성경이 어떠한가를 상고하지 않고!

우리 목사님이 그러는데!

항상 우리 목사님 설교는 이렇다고 하는데! 라는 식으로 빠져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그 목사의 설교는 절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그 목사의 설교는 마치 절대 무오한 것처럼 생각해 버려요.

이렇게 되면 그 목사 이외 다른 사람의 설교는 듣고자 하지 않아요.

그럼 그 목사의 설교는 김일성 주체사상처럼 고착화되고 맙니다.

 

알다시피 모든 설교는 은사로 행하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심으로서 하는 것입니다.

은사란?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때 필요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설교를 하였다 할지라도 그건 그 때 필요해서 하게 하신 말씀이에요.

 

그런데 목사들은 그 말씀을 무오한 것처럼 교리화 하여서 하나님의 은사를 자기 설교에 가두어 버리고 마는 어리석음을 곧잘 범하고 맙니다.

어떻게 가두는가 하면 자기 설교를 텍스트로 삼는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목사의 설교는 진리가 되는 겁니다.

진리가 되면 자기하고 다른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왜? 이런 말은 하는가 하면 내가 은사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남기게 되면 그 은사가 고정화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고정화 되면 그 이외의 해석들은 용납 할 수가 없어요.

자기 것이 절대적이 되고 말아요.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깨달은 것은 전부가 아니고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는 다 읽어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한 부분만 깨닫게 해 주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전부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내 설교가 진리이다 라고 절대화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은혜로운 설교를 하였다 할지라도 절대 진리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이건 쉽게 이해 할 수가 있어요.

동일한 본문을 가지고서도 볼 때마다 다른 은혜를 받잖아요.

전 동일한 본문을 가지고도 매 번 다른 은혜를 받아요.

 

오늘은 이렇게 깨달았는데 내일이면 또 다르게 깨달아져요.

책을 보아도 예전엔 그렇게 은혜를 받았는데 지금 보면 아니에요.

그러니 오늘 깨달은 것이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설교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교인들이 목사의 설교로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두고 판단하는 우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의 어록이 마치 성경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용한단 말입니다.

 

이건 마치 사사시대 때 백성들이 기드온의 에봇을 음란히 섬겼듯이 목사의 말을 신봉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걸 경계하고자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잘 이해하세요.

 

설교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설교 절대론을 경계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에 설교로만 구원을 했을 것 같으면 예수님이나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았어야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설교를 하지 군중들이 낭떠러지에 밀어서 죽이려고 했어요.

바울이 설교하자 다 떠나갔어요.

 

물론 설교를 통해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꼭 설교를 잘해서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목사의 설교 없이도 자기 백성을 찾아내세요.

그러니 우리가 전한 것을 절대시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은혜를 입고 보니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가 감지 할 수도 없고 예측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가 이렇게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나와 동일하게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내 생각엔 저건 아닌데 라고 하는데 그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고 있어요.

그걸 내가 틀렸다고 할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 하는데 왜? 내가 맞다 틀렸다고 판단합니까?

내가 판단한다는 것은 나도 하나님의 은혜를 가두고 있다는 증거에요.

그러니 판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령 그 사람이 내 생각엔 아니라고 하여도 그 판단은 주님께 맡기고 나는 내가 받은 은혜로 주님께 빚진 자로서 감사하며 살면 되어요.

 

전 지금 제 설교가 기준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건 제가 받은 은혜를 증거한 것뿐이에요.

물론 지금 제가 말하는 이것도 제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에요.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어요.

 

설교를 고착화 하면 지식으로 전락해요.

지식이 되면 기준이 됩니다.

설교가 기준이 되면 누구 누구의 설교를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하게 됩니다.

 

이건 마치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법궤를 신주단지처럼 생각하고 전쟁터에 들고 나아가는 것과 같아요.

인간들의 생각에 가두어진 법궤는 우상단지에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요.

그렇다고 에이~ 이거 약발 떨어졌네! 라고 버리면 그 때 다시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 생각으로 가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설교를 통하여서 복음을 깨닫고 은혜 받는 사람이 일어 날 수가 있어요.

그러나 반드시 설교로서만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지 말란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다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떤 사람에겐 제 설교가 약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겐 독이 될 수도 있어요.

 

각 사람마다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서 달라져요.

그러니 그 어떤 설교라 할지라도 표준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설교라 할지라도 의미를 두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항상 교인들의 시선이 자기에게 고정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중매쟁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 중매쟁이 론을 펴다가 설교 절대주의는 아니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이외 다른 것이 보이게 하면 그 사람은 보아스 밭의 추수꾼이 아니고 다른 밭에 추수꾼입니다.

자기를 추종하게 하는 자는 다른 밭에 사람입니다.

인간은 변합니다.

그러니 선한 의미에서 설교를 늘 달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전 이렇게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혹여 라도 오늘 말씀에 동의가 되지 않으면 그냥 흘러 보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에 감동으로 기록하신 말씀입니다. 늘 성경을 상고 할 때마다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는 은혜가 넘치게 하옵소서. 오늘의 말씀도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것이라면 다 잊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기억케 하옵소서. 오직 예수 이외는 보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