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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룻기 강해

7강. 흠 있는 며느리 재혼시키기 (룻 3:1-18)

by coroa 2020. 10. 15.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7강. 흠 있는 며느리 재혼시키기 (룻 3:1-18)

 

-.정낙원 목사

 

 

 

오늘은 좀 헷갈릴 수 있으니 잘 음미하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인간의 상식으로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것은 창조에 속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일은 피조물 바깥 세상에 속한 일입니다.

인간의 역사 바깥에 일이란 뜻입니다.

역사에 속한 피조물들은 창조에 관한 일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에서의 창조 개념은 있음에서 있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서 가구를 만드는 일을 말합니다.

이건 창조가 아니고 변화입니다.

있는 것으로 다른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변화는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지만 창조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창조란 무엇인가요?

없는데서 있게 된 것입니다.

없음이 하나님에 의하여 있음이 되었습니다.

 

변화와 창조는 다릅니다.

변화는 피조물이 행할 수 있는 것이지만 창조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습니다.

변화는 유(有)에서 유(有)로 나아가는 일이지만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이 나오는 것을 창조라고 합니다.

 

성경은 창조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함은 세상 사는 이야기가 아니고 죽은 자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아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살아나는 일을 세상에선 기적이라고 합니다.

인간 세상에서 기적이란?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야기가 기적에 속한 것들이에요.

그래서 성경에는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이야기들로 기술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적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에 방법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피조물 입장에선 다 기적입니다.

창조 자체가 기적입니다.

성경은 창조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성경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룻기가 성경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것은 룻의 이야기도 창조에 속한 이야기가 됩니다.

앞서 창조란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조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일입니다.

 

성경에선 없음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있음을 창조 또는 구원이라고 합니다.

창조나 구원은 반드시 외부의 힘에 의하여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순전히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구원이란? 죽음에서 살아난 것입니다.

외부의 힘에 의하여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예수님)의 일하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구원을 다른 말로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거듭났다는 말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다는 말인데!

이는 창조가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창조는 과정이 없습니다.

말씀과 동시에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있으라!

그러면 즉시로 완료로 나타납니다.

서서히 나아지는 것이 아니고 즉시로 완성품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창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모습으로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면 벌떡 일어나 걸어갑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일어나라 하면 즉시로 툭툭 털고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풍랑을 잠잠하라고 하면 금새 잠잠해 집니다.

이게 창조의 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앉은뱅이나 중풍병자에게 주사를 놓고!

약을 먹이고!

물리치료를 하여서 조금씩 점차적으로 다리에 근육을 붙게 하여 걷게 합니다.

이게 피조물들이 행하는 치료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료법은 이러한 과정들이 전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냥 일어나 걸으라고 하면 걷습니다.

38년 된 병자도 예수님이 일어나라고 하면 벌떡 일어납니다.

이걸 우리 믿음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너 예수 믿어 그러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집니다.

예수가 믿어지니 믿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다 이러합니다.

 

말씀과 동시에 사건이 일어납니다.

말씀과 동시에 완료가 됩니다.

서서히 점진적이 없어요.

그냥 즉시로 완성이 됩니다.

이게 창조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즉각적이고 완료적으로 주어집니다.

점진적으로 되어져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 왜? 점진적일 수가 없는가 하면 창세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전에 구원 될 자와 아닌 자로 구분이 되어 있어요.

마치 야곱과 에서처럼 말입니다.

에서가 서서히 변해서 야곱이 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야곱으로 태어납니다.

 

구원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 받는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원래 하나님의 아들인데 잠시 마귀에게 속아서 종노릇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야! 이 놈아 넌! 창세전부터 이미 하나님 아들이야! 알려 주셨어요.

마귀의 자식이 조금씩 변해서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마귀의 자식이 하나님 아들로 진화되는 것이 아니고 애초 하나님 자녀로 창조가 되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구원사적인 일들은 모두가 과정이 필요가 없고 즉시로 종결 되는 사건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누워 있던 38년 된 병자는 즉시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일어나 걷고 뛰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이처럼 과정이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창조에 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과정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우발적 사건이란 말입니다.

또한 우발적이라 함은 예측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건 인간 입장에선 반칙입니다.

반칙이란? 경우를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반칙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반칙적인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야기의 전개 방식이 순차적이지 않습니다.

서론이 이렇고!

본론은 이러하고!

결론은 이렇습니다! 라는 것이 없습니다.

 

창조는 곧 종말이고 종말은 곧 창조입니다.

종말이 시작이고 시작이 종말입니다.

십자가는 종말과 시작을 함께 함유하고 있습니다.

이건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라면 처녀가 결혼해서 남편과 사랑을 나누고 임신을 하여서 아이를 낳았다는 식으로 순차적인 이야기가 전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야기는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먼저 나온 세례요한이 늦게 나온 예수님을 보고 자기보다 앞선 형님이라고 합니다.

 

나이 오십도 안 된 새파란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천년이나 앞서 살았던 다윗이 자기를 보고 주(主)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그들보다 먼저 있었다고 합니다.

이걸 믿으라고 합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러면 미쳤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인간 세상에선 이런 것을 정신이 나갔다고 합니다.

미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런 이야기를 믿으라고 합니다.

 

성경의 구조가 이러합니다.

성경의 서술이 선은 이렇고 후는 저렇다는 식으로서의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비논리적입니다.

앞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뒤에서는 저렇게 말합니다.

 

육적으로는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마치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성경을 읽기는 읽는데 도무지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빌립이 자세히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 줍니다.

예수님 이야기로 푸니 풀려 지는 것입니다.

비논리도 비상식도 예수님 이야기로 풀면 상식이 되고 논리가 됩니다.

 

성경은 소설책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말하고 있지만 역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신 묵시 이야기입니다.

창조에 속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 밖 창조에 속한 이야기를 역사라는 틀을 빌려서 말할 뿐입니다.

역사는 순서가 있고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묵시는 순서와 과정이 없습니다.

그냥 말하고 싶은 것만 뜬금없이 말을 합니다.

 

설교 초두에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오늘 본문을 이 원리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도 창조에 속한 이야기입니다.

구원 이야기란 말입니다.

구원이야기이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나오미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나오미의 모습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나오미 라는 한 여인 속에 다양한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오미 그러면 아! 하나님을 떠났다가 하나님께 된통 얻어맞아 신랑 잡아먹고 돌아온 여자!

그러지 말란 말입니다.

단편적으로 보지 말란 뜻입니다.

 

나오미 속에는 죄인의 모습도 담겨져 있지만 보혜사적인 모습도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이중 계시(啓示)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이 우리 성도의 모습이기도 하면서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모세가 나의 모습이면서도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나오미가 죄인인 룻이 될 때도 있고!

나오미가 룻을 돕는 보혜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공동번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룻 3장 1절 “어느 날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얘야! 내가 너에게 남편을 구해 주겠다. 너도 이제 재혼을 하여 다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나오미가 룻에게 신랑을 구해 주겠다고 합니다.

새 신랑을 만나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라는 남편에게 중매를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룻을 돕는 자로서 나오미 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시집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룻을 시집보내는 주체가 나오미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얘야! 내가 너에게 남편을 구해 주겠다고 합니다.

룻은 나오미가 시키는 대로 하여서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고 자식을 얻게 됩니다.

어쩌면 나오미는 룻의 신랑감을 자기가 이미 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참 재미가 있지요.

시 어머니가 며느리 재혼시키는 이야기입니다.

왜? 재혼을 시키는가 하면 자신의 가문을 잇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초혼이 아니고 재혼이에요.

이걸 기억하세요.

여기에 엄청난 영적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재혼을 하게 되면 며느리는 다른 집안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재혼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알다시피 며느리는 결혼 지참금을 주고서 사 왔어요.

많은 값을 치루고 사 왔어요.

 

그러니 며느리는 그 집안의 재산과 같아요.

남편이 죽었다 하여도 다른데 시집을 가면 안 되고 수절을 하면서 집안을 지켜야 한단 말입니다.

며느리는 내 집안 일꾼이에요.

특히나 시어머니 혼자 사는 집에서의 며느리는 더 더욱 재혼을 시킬 수가 없어요.

 

얼마 전 MBC TV에서 “불굴의 며느리” 라는 일일연속극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보면 시어머니인 강부자가 만월당이라는 300년 전통의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서 며느리의 재혼을 막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국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반대에 재혼을 하지 못하였어요.

이게 시어머니에요.

 

그런데 지금 나오미는 며느리를 시집보내는 일을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나오미의 이러한 행동은 인간들 살아가는 이야기가 아니고 영적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계시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나오미가 며느리를 재혼 시키고자 하는 영적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이 있습니다.

그 율법에 의하면 며느리는 가문을 이을 자식을 낳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집을 와서 남편과 살다가 남편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게 되면 그 남편의 형제가 형수에게 들어가 자식을 낳아 주어야 합니다.

이는 가문을 잇기 위한 것입니다.

 

이걸 “시형제 결혼법” 이라고 합니다.

또는 “계대 결혼법” 이라고도 해요.

지금 나오미는 이 결혼을 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알다시피 룻의 남편은 형제들이 없어요.

다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가문이 끊겨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가문이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친척 중에서 누군가가 대신 형제 노릇을 해 주어야하는 제도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이걸 “고엘 제도” 라고 합니다.

대신 담당해 주는 사람을 “고엘” 이라고 해요.

나오미가 지금 그 고엘을 보아스로 지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기업을 이어주어야 하는 자로 지목이 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고엘 제도를 통해서 가문을 잇고자 합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자기 가문을 잇고자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이 자식을 낳으면 결국 나오미의 가문이 이어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룻은 자식을 낳아도 자기 자식이 되지 못하고 시어머니 호적에 입적이 되었어요.

결국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이용하여서 자기 가문을 되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룻은 나오미의 가문을 위하여 희생당한 여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가문은 룻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어져 가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룻의 희생이 바로 장차 오실 메시야의 희생을 담고 있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족보에 보면 룻이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룻과 같이 희생당한 자들이 기록이 되어 있다는 말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이 맥을 따라서 오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살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의 고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새로운 피조물인 “나” 라는 천국백성으로서의 기업을 잇게 하기 위해서 희생을 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기업을 이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 때문입니다.

그러니 룻이 보아스를 통해 가문을 이어가는 이야기는 곧 성도의 구원이야기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룻이 가문을 이어갈 자식을 낳게 되는 모든 일을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주도를 합니다.

룻은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였어요.

재혼의 상대도 시어머니가 골랐어요.

룻은 시어머니 장단에 춤을 춘 것뿐이에요.

 

앞서서 나오미를 돕는 보혜사라고 하였지요.

룻이 재혼을 하는데 돕는 자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왜? 돕는가 하면 자기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보혜사는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성령이 누구 가문을 잇게 하려고 누구를 돕습니까?

예수님의 가문을 잇도록 성도를 돕지요.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가문을 이어가도록 이용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문을 잇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남기기 위해서 성도를 희생 제물로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 가문이 살아나고!

예수님은 우리의 희생으로 예수님의 가문을 이어갑니다.

 

예수님의 가문을 이어간다는 것은 우리를 제물로 이 땅에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예수 때문에 살았고!

예수님은 나를 예수님의 증인으로 이용하고 있으니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 나오미가 그러고 있어요.

룻을 가지고 자기 가문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1절에 보면 나오미가 룻에게 자신이 신랑감을 찾아 준다고 하지요.

나오미가 룻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오미는 보아스를 잘 알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는 룻의 남편이 될 사람을 이미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룻에게 보아스에 관하여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데 나오미와 보아스는 잘 아는 사이란 말입니다.

룻은 보아스가 초면이지만 나오미는 구면이에요.

보아스는 나오미가 예루살렘에서 모압으로 내려가기 전에 이미 알고 지내던 사람입니다.

 

자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예루살렘은 축복의 땅입니다.

반대로 모압은 저주의 땅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늘이고 모압은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가 저주의 땅입니다.

축복의 땅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하늘을 말하고 모압은 이 세상을 말합니다.

 

룻은 모압에 살고 있었습니다.

저주 받은 땅에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축복의 땅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나오미라는 여인을 통해서 주소지가 모압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집니다.

영적으로 땅에서 하늘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 이야기로 전환해 봅시다.

예수님은 나오미처럼 축복의 땅인 예루살렘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은 축복의 나라인 하늘 예루살렘에서 저주 받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어요.

이렇게 되면 우리는 모압이라는 저주 받은 곳에서 태어나 살고 있던 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땅에서 하늘로 주소지가 바뀝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모압이라는 땅에서 예루살렘이라는 하늘나라로 호적을 옮겨 주셨습니다.

호적이 옮겨진다는 것은 남편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예수님에게 시집을 보내서 호적을 옮기게 해 준 것입니다.

성령이 보혜사가 되어서 도와준 것입니다.

마치 나오미가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는 룻을 돕는 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를 잘 알아요.

보아스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일을 하고 무슨 말을 할지를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며느리에게 어떻게 하면 보아스의 사랑을 받는지 그 방법까지 세세하게 다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에게 나아 갈 때 입어야 할 옷도 입혀줍니다.

어떤 향수를 발라야 할지도 알려 줍니다.

또 보아스를 어디에서!

어떻게!

어느 때에 만나야 하는지도 알려 줍니다.

 

심지어 어느 때에 보아스에게 애교를 부려야하며!

어떤 행동과 어떤 말을 하여야 하는지 까지도 소상하게 가르쳐 줍니다.

이건 마치 성령이 예수님의 속속들을 다 알고 계신 것과 같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어요.

 

요즘말로 성격이나 취향이나 행동까지 다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심지어 보아스가 룻의 청을 거절할 수 없는 말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나오미가 보아스와 오래도록 살아본 사람처럼 말해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룻은 나오미가 시키는 대로 하고 보아스로부터 신랑이 되겠다는 약조를 받아 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지금까지 나오미는 하나님을 떠나 징계를 받은 성도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서의 나오미입니다.

이건 마치 신랑과 오래도록 살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어 신랑의 숨소리만 들어도 이 사람의 기분이 어떤지를 다 아는 것 같은 아내처럼 보아스의 속속들을 다 꿰뚫고 있습니다.

 

이래서 성경을 소설책 읽듯이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상식으로 보아선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지혜로는 해석을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해석을 하려면 어떤 스토리가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전개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성경의 이야기는 전혀 앞 뒤가 맞지를 않아요.

앞에선 이랬다가 뒤에선 저랬다가 합니다.

반전이 일어나요.

 

우리 상식으로는 나오미는 그냥 시종일관 하나님을 떠났다가 남편을 잡아먹은 저주 받은 여자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마치 보아스의 마음을 다 알고 어떻게 하면 복을 받는지를 며느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치 보아스와 살아본 사람처럼 말이에요.

그리고는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을 보냅니다.

 

이건 마치 성령이 성도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 주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을 압니다.

또한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성도는 성령의 알려 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나오미가 룻에게 코디를 해서 보아스를 만나게 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룻은 나오미가 시키는 대로 했어요.

그리곤 결국엔 보아스와 결혼을 하여서 자식을 낳아 무너진 가문을 회복하여 기업을 이어 가게 됩니다.

 

신약에 오면 성도를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코디를 해 주는 분은 성령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의 나오미는 성령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오미가 룻에게 하는 행동은 계시사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뜻이 됩니다.

죄인으로서 나오미가 아니라 보혜사로서의 나오미입니다.

 

성경에서는 한 인물 속에는 죄인의 모습도 있지만 예수님의 모습도 있습니다.

어떨 때는 죄인을 계시하고 있고!

어떨 땐 예수님의 모습을 계시하기도 한답니다.

 

자 이렇게 생각하세요.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 라고 합니다.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또한 예수님이 우리 성도 안에 계시고 우리가 또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주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주 안에 있습니다.

 

그럼 나는 누구입니까?

때론 예수님을 보여주는 “증인”이기도 하고, 때론 죄인으로서의 “나” 이기도 하겠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치 않는 자는 나를 영접치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세상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파송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사자라고 합니다.

 

이럴 땐 제자들이 하는 말들은 제자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러면 제자들은 계시사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제자들을 통하여서 예수님에 대하여 알 수가 있어집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됩니다.

 

제자들은 가는 곳마다 예수님에 대하여서 알려 줍니다.

구원의 길을 알려 줍니다.

그럼 이방인들은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마치 룻이 나오미가 시키는 대로 하여서 보아스에게 시집을 가서 복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을 나오미에게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이 나오미를 룻에게 파송했다고 봅시다.

그럼 나오미는 룻에게 계시사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되겠지요.

룻은 나오미가 일러준 대로 하여서 보아스로부터 기업을 잇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되잖아요.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선 죄인이지만 세상 앞에선 하나님의 사자(使者)들입니다.

나오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신랑 잡아먹은 죄인이지만 룻 앞에선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룻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여호와의 사자인 셈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세요.

 

그래서 성경을 인간의 생각으로 소설 읽듯이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계시의 책입니다.

계시란? 사건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전체의 내용이 하나의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내용 속에는 각각의 사건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사건 속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살펴봅니다.

요한계시록은 전체가 하나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각장 마다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각 장을 이야기 식으로 전개하여서 이해를 하고자 하면 하나로 연결이 안 되어요.

앞뒤가 안 맞아요.

 

이걸 묵시 문학이라고 합니다.

묵시 문학은 사건 중심을 기술하고 있어요.

그러니 한 사건 사건마다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시 중심으로 얽혀져 있는 것을 영적 구조라고 합니다.

 

영적 구조란? 사건 중심을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건 중심이라는 말은 각각의 의미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걸 구조적으로 말합니다.

구조란? 서로 서로 얽혀서 집을 짓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건 사건이 모여서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수평적 구조와 수직적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수평적 구조란? 역사적 나열을 말하고!

수직적 구조란? 영적인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7장을 보면 하늘과 땅 이야기를 합니다.

이를 아론의 반차와 멜기세덱의 반차로 말하고 있습니다.

아론은 이 세상 역사에 속한 제사장이고 멜기세덱은 하늘에 속한 제사장입니다.

 

그러니 하늘에는 멜기세덱의 반차가 흐르고 땅에는 아론의 반차가 흐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늘에 있는 멜기세덱의 반차가 아론의 반차에 침투해 옵니다.

이건 마치 고요한 호숫가에 돌을 하나 던지면 잔잔하던 호수에 여울이~ ~ 일어나 온 호수에 파장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말이 좋아 사건이지 호수 입장에선 난리입니다.

전쟁입니다.

멀쩡한 집안에 누가 예수를 믿으면 틈이 벌어지고 보이지 않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과 같아요.

이처럼 멜기세덱의 반차는 역사 속에서 우발적으로 이러한 사건을 일으킵니다.

기존에 질서를 뒤 흔드는 사건을 일으켜요.

 

멜기세덱의 반차는 족보가 없어요.

하지만 아론의 반차는 족보가 있어요.

족보가 있다는 것은 연속성이고 족보가 없다는 것은 불연속성이라는 뜻입니다.

 

아론의 반차에 속한 제사장들은 순번이 정해져 있어요.

그러나 멜기세덱의 반차는 순번이 없어요.

예고 없이 툭툭 터져 나와요.

이런 구조를 묵시적 구조라고 합니다.

 

아론의 반차에 속한 제사장들 입장에선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한 제사장들은 이단으로 보여요.

순번도 없이 불쑥 나타나서 내가 제사장이다 그런단 말입니다.

마치 헤롯이라는 유대인의 왕이 버젓이 있는데 동방박사들이 찾아와서 방금 유대인의 왕이 났는데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아요.

 

헤롯 입장에선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자신이 왕인데 말이죠.

그러니 헤롯이 내가 왕인데 어느 놈이 왕을 사칭하느냐 라고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막절에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아무나 할 수가 없어요.

오직 정해진 사람만이 할 수기 있는 영역입니다.

유대인에겐 자타가 공인하는 성경학자들인 서기관이나 율법사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불쑥 나타나서 성경을 강론하고 있어요.

아론의 반차 입장에선 예수님은 무자격자이고 이단입니다.

이걸 용납하면 기존에 질서가 무너져요.

반칙이에요.

 

이걸 용납하면 혼란이 일어나요.

기존에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뭐가 되겠어요.

졸지에 가짜가 되는 겁니다.

이걸 제사장들이 두고 볼 수가 없지요.

그래서 예수를 죽인 겁니다.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로 쫓아서 온 왕이고 제사장입니다.

이처럼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것을 묵시적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처럼 일을 하시므로 수직적 구조라고 합니다.

 

역사는 수평적 구조로 일직선으로 쭉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일렬로 쭈욱~ 연결이 되어서 흐릅니다.

연속성이 있습니다.

연속성이 있다는 것은 예측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인간의 일생은 예측이 가능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어요.

이게 인생이고 역사에요.

 

그러나 묵시는 수직적 구조로 되어 있어요.

불 연속성이에요.

묵시 속에서는 항상 오늘이에요.

과거 현재 미래가 없어요.

 

멜기세덱은 태어난 날도 없고 끝나는 날도 없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끝도 없어요.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장차에도 있어요.

이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는 역사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수직적 구조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각각 달라요.

마치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툭툭 던져 준단 말입니다.

보따리마다 이야기가 달라요.

 

이걸 요한계시록에서는 봉인 된 책을 어린양이 그 인(印)을 하나씩 뗄 때마다 이 땅에서 사건들이 하나 씩 툭툭 터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각장 마다 “본다” 는 말을 합니다.



내가 보니!

내가 또 보니!

또 내가 보니! 라는 식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볼 때마다 다른 그림이 보입니다.

 

이쪽을 보니 하늘에 모습이 보이고!

저쪽을 보니 땅에 모습이 보이고!

이쪽을 보니 안식하는 모습이 보이고!

저쪽을 보니 고난 받는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동쪽으로 보았다가!

서쪽으로 보았다가!

남쪽으로 보았다가!

북쪽으로 보았다가 하는 것과 같아요.

 

제가 과거에 대전에 있는 독립박물관에 견학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이 옴니버스 영화입니다.

영화관 전체가 스크린인 겁니다.

천장과 사방의 모든 것에서 영화가 상영이 되어요.

그런데 다 다른 영화에요.

 

동쪽으로 보면 한국의 절경이 나오고!

서쪽으로 보면 미국의 그랜드 캐넌이 나오고!

남쪽으로 보면 호주의 오페라 하우수가 있는 아름다운 해변이 나오고!

북쪽으로 보면 알라스카의 얼음 속에서 사는 모습이 나와요.

 

영화 전체는 지구촌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그림마다 다 다른 사건들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지붕 안에서 온 세계의 이야기들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쪽 동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고!

서쪽 동네에선 저런 일이 일어나고 있고!

남쪽 동네에선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고 있고!

북쪽 동네에서는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을 보는 것과 같았어요.

사도요한이 볼 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인류 전체를 다 본 것입니다.

창조에서 종말까지 다 보았어요.

이게 묵시문학의 특징이에요.

 

동쪽 동네는 지금 봄이라서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서쪽 동네는 가을이라 추수하고 있어요.

반면에 남쪽 동네는 지금 여름이라 해수욕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북쪽 동네는 겨울이라 꽁꽁 얼어서 을씨년스러워요.

 

실제로 이러한 일들이 지구라는 한 땅덩어리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하나의 지구를 가지고 갖가지 사건들을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계시사적인 의미로 보면 묵시적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한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사건마다 다양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한쪽은 씨 뿌리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고!

한쪽에선 추수하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고!

한쪽에선 즐겁고 안식하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고!

한쪽에선 차가운 방에서 벌벌 떨고 있어요.

 

마치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내려다보니 미국에선 가뭄이 일어나고 있고!

태국에선 홍수가 일어나고 있고!

한 쪽에선 먹지 못해서 굶어 죽어 가고 있는데!

다른 한 쪽에선 너무 먹어서 죽어 가고 있는 것과 같아요.

 

우주에서 내려다보면 지구 구석 구석마다 다양한 모습들이 사건 사건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게 묵시적 구조에서 바라보는 세상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바로 이러한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역사를 통해서 영적인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은 인류사 전체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 이야기이면서 나의 신앙적인 이야기인 겁니다.

2천 년 전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땅 덩어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도 사건 중심으로 다루고 있어요.

왜냐하면! 묵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의미에서 보면 연속성이 될 수가 있지만 사건으로 보면 불 연속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오미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 속에 연속과 불 연속성이라는 계시사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오미가 룻에게 신랑을 만나게 하고 사랑을 나누어 아들을 얻게 하는 내용은 보혜사로서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오미는 보아스에 대하여 속속들이 다 알고 룻에게 그 보아스의 비밀들을 다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내가 너를 새 신랑을 맞이하는 시집을 보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가 알려준 대로 하였습니다.

보아스 역시 나오미가 룻에게 말한 대로 룻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이건 나오미와 보아스가 둘이 아니라 하나란 말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하나란 말입니다.

마치 성령과 예수님이 하나이듯이 말입니다.

보아스를 복을 주는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룻은 성도입니다.

성도를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나오미가 이방여자 룻을 보아스에게 데리고 와서 복을 받게 해 주고 있는 것은 성령이 이방인인 우리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여서 구원을 받게 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나오미의 이러한 그림을 크게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예수에게로 이끌어서 구원을 받게 하는 내용과 방불합니다.

 

나오미의 이러한 보혜사적인 모습이 리브가에게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미가 하는 것은 마치 리브가가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도록 도와주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리브기가 야곱에게 장자권의 축복을 받게 하잖아요.

야곱은 리브기가 시켜주는 대로 하고선 축복을 받습니다.

룻이나 야곱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곁에서 도와주는 보혜사의 도움을 입고 복을 받았습니다.

 

우린 구원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는데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우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와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려면 우리 노력이나 정성은 배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 홀로 다 이루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만 고스란히 남게 됩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 기업을 잇는 일엔 룻이 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전부 나오미가 했어요.

나오미는 보아스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룻에게 목욕을 시키고!

기름을 바르게 하고!

옷을 입혀서 타작마당으로 보냅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말대로 보아스의 타작마당으로 가니 그곳에 보아스가 있는 것입니다.

 

밤이 되자 보아스가 노적가리 곁에 눕습니다.

노적가리란? 추수된 곡식을 모아둔 곳입니다.

밭에서 추수를 한 곡식들을 임시로 모아두는 곳이에요.

노적가리에 보관이 된 곡식은 나중에 추수를 다 하고 나면 집으로 옮겨 갑니다.

 

노적가리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보면 광야에 있는 우리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목축업을 하고 사는 민족입니다.

목축업은 도시에서 할 수가 없어요.

도시와 멀리 떨어진 광야에서 합니다.

 

목동들은 봄이 되면 양과 염소를 광야로 끌고 나갑니다.

이 때 양들이 좋은 꼴을 먹고 살찐 양들이 되고 교미를 하고 새끼를 낳게 됩니다.

그러다가 겨울이 오면 집으로 돌아옵니다.

겨울이 닥치면 집으로 돌아와서 안전하게 안식을 하게 됩니다.

 

양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광야에서 살아요.

그러므로 목동들은 광야에 양들이 임시 거처할 우리를 만들어 놓았어요.

돌로 담을 쌓고 가시로 울타리를 쳐서 짐승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목자는 그 문 앞에서 잠을 자면서 지킵니다.

 

목자가 문에서 잠을 자면서 지키는 것은 짐승도 그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할 뿐 더러 양들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목자와 양의 비유는 이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는 양의 문을 지키는 목자라고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임시 거처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곳이 어딘가 하면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이라는 밭에서 추수가 된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장차 영원한 집인 천국에 가기까지 임시로 거처 하여야 하는 우리인 것입니다.

마치 광야에 있는 양들이 임시로 거처하는 우리와 같습니다.

이 교회라는 우리에 누가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계세요.

예수님이 교회를 지키십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이 일곱 촛대 사이를 다니시면서 불꽃같은 눈으로 지키시고 계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치 보아스가 추수된 곡식을 임시로 저장하는 노적가리 곁을 지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노적가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노적가리 곁에 곡식의 주인이신 보아스 처럼 예수님이 계십니다.

보아스가 왜? 노적가리 곁에 누워 있습니까?

이는 추수된 곡식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당시에는 곡식을 추수한 것을 훔쳐가는 도적들이 많았어요.

이웃에 사는 부족들이 밤에 몰래 와서 훔쳐가곤 했어요.

밭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요.

그러므로 추수가 다 할 때까지는 밭에 노적가리로 임시 창고를 만들어서 추수된 곡식을 보관하고서는 종들 중에서도 아주 충실한 종들을 시켜서 지키게 하거나 아니면 주인이 지켰어요.

 

지금 보아스가 그 노적가리 곁에서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한번 보고 갑시다.

 

6-9= “그가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시모의 명대로 다 하니라 7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서 가서 노적가리 곁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8 밤 중에 그 사람이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웠는지라 9 가로되 네가 누구뇨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룻이 보아스의 타작마당에 가니 나오미의 말대로 보아스가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룻은 나오미가 시키는 대로 보아스가 노적가리 곁에서 잠자리에 들자 나아갑니다.

그리곤 보아스가 덮는 이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룻이 나오미가 시키는대로 다 합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깜짝 놀라서 너는 누구냐! 라고 합니다.

이에 룻이 “나는 당신의 시녀입니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시녀란 말은 그저 단순하게 허드렛일을 수종 드는 종이란 의미보다는 침실을 수종 드는 여종을 말합니다.

 

2절에 보면 “시녀” 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나~아라” 라고 하는데 이는 처녀 종을 말합니다.

그러나 9절에서 말하는 “시녀” 는 “아~마” 라고 하는데 이는 남자를 경험한 허물이 있는 여자를 말합니다.

이는 죄인이란 말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룻은 지금 보아스에게 나는 “아~마 입니다” 라고 허물이 있는 죄인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보아스의 은혜를 입어야 할 자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룻이 “나는 당신의 시녀 즉 “아~마” 입니다!” 라는 말은 “나는 허물이 있는 죄인입니다!”

“난 정결한 처녀가 아니고 난 수치가 많은 여자입니다!”

그러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어 주소서!”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엄청난 고백입니다.

 

이건 인간의 윤리로 보면 안 되어요.

영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옷자락으로 덮는다” 는 말은 암탉이 날개로 병아리를 품는 모습이에요.

그러니 룻은 지금 보아스에게 “은혜로 불쌍히 여겨 달라” 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당신이 아니고서는 나를 받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를 불쌍히 여겨 구원해 달라” 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죄인을 구원하는 메시야란 말입니다.

룻은 지금 보아스는 자신의 허물을 덮어주는 메시야라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놀라운 고백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고백이에요.

룻은 성령과 같은 나오미를 통해서 보아스가 허물을 덮어주는 남편임을 알았어요.

아까 나오미가 며느리를 재혼을 시킨다고 했지요.

 

재혼을 시키는 목적은 안식케 하기 위함입니다.

복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안식이란? 수고와 슬픔의 반대말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허물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인 것입니다.

 

재혼이란? 이미 결혼을 한 여자가 다시 결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결혼한 여자가 다시 재혼을 한다는 것은 결격사유가 생긴 겁니다.

허물이 있는 여자란 말입니다.

 

허물 있는 여자를 누가 받아 주겠어요.

오직 그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사람만 받아 줄 수가 있어요.

자비로운 사람만이 허물 있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이걸 복음적으로 말해 봅시다.

우리의 허물을 덮어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에요.

 

우린 원래 율법이라는 남편과 살았어요.

그러다가 예수라는 새 남편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남편이라고 했어요.

 

로마서 7장을 봅시다.

 

롬 7:1-6=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우리는 원래 율법이라는 남편에게 속하여 살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이라는 남편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제 그 남편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케 되었습니다.

 

그리곤 예수라는 남편에게 재혼을 하였습니다.

허물이 많은 여자를 예수라는 새 남편이 다 용서하고 덮어 주셨어요.

이게 구원이에요.

 

이걸 룻에게 적용해 봅시다.

룻의 첫 남편이 죽었지요.

그리곤 이제 보아스라는 새 남편에게 재혼을 하게 되지요.

 

그럼 룻의 첫 남편은 신약식으로 말하면 율법이라는 남편이 되겠지요.

그럼 재혼을 하게 되는 보아스라는 남편은 어떤 남편일까요?

예수라는 남편이지요.

 

예수라는 남편은 누구를 아내로 맞이합니까?

허물이 있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처녀가 아니라 이미 결혼을 하여서 허물이 있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세요.

이걸 일컬어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룻처럼 당신의 은혜로 날 덮어 주세요! 라는 고백을 할 수가 있어요.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면 이런 고백이 안 나와요.

룻이 이러한 고백을 하게 된 바탕엔 나오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룻이 추수하는 타작마당에서 보아스에게 사랑 고백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추수를 영적인 의미로 구원이라고 합니다.

기존에 살던 밭에서 뽑힘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구원하시곤 보라! 밭이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하지요.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주여 구원해 주소서! 라고 하는 것은 율법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추수하십니다.

수가성 여자도 남편을 여럿 잡아먹은 여자입니다.

허물이 많은 여자에요.

그런 여자에게 예수님이 새로운 남편이 됩니다.

 


예수님에게 재혼할 상대는 반드시 율법이라는 남편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여자라야 합니다.

율법으로 죽음 당한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안단 말입니다.

예수라는 남편은 은혜의 남편입니다.

은혜를 알려면 반드시 정죄와 죽음을 경험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남편은 옛 남편을 잡아먹은 과부와 재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이 숨기고 싶어하는 과거사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죄를 고발하는 이유는 너는 긍휼을 입어야 할 자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수가성 여인에게 죄를 고발하는 율법 역할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 서게 되면 숨은 죄가 드러나게 됩니다.

죄를 토설하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라는 고백이 나와야 예수를 바로 만난 사람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밭이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율법으로 죄가 고발당하여야 율법 아래서 건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룻처럼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어 주소서! 라는 고백을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율법으로부터 추수를 당하는 것입니다.

율법에게 추수당하여 은혜 안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율법이라는 남편에게 죽임 당하였어요.

그리곤 새 사람이 예수라는 남편에게 시집을 가서 천국에 기업을 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작마당 노적가리 곁에서 “재혼의 사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그럽니다.

여자여! 네 마음이 갸륵하구나!

어떻게 젊은 남자를 따라가지 않고 나같이 늙은 사람을 택하였느냐!

네 사랑이 귀하구나! 라고 합니다.

 

이 말은 룻이 육신의 정욕으로 보아스를 찾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정욕이란? 신약적인 의미에서 육신의 위하여 찾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세상 것을 얻고자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룻은 기업을 잇고자 합니다.

 

보아스의 말은 이러합니다.

네가 만약에 먹고 사는 문제로 재혼을 한다고 하면 힘 있고 근사한 젊은 남자를 찾아 갈 테인데 나 같이 힘없고 늙은 사람을 찾아 온 것은 먹고 사는 문제보다 네 허물을 감싸주고 덮어주는 그 일이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하지 않고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한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죄사함 받는 문제가 더 중하다는 말입니다.

 

죄사함의 문제가 더 중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옷자락으로 덮어 주십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구원해 주십니다.

 

그럼 자신이 죄인임을 누가 알려 줍니까?

성령입니다.

그럼 룻을 보아스에게 보낸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오미입니다.

그러니 나오미는 룻에게 성령과 같은 보혜사가 되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보아스의 옷자락으로 덮어줌의 은혜를 입게 된 것입니다.

 

룻이 이러한 고백을 듣고 보아스가 약속을 합니다.

보아스가 내가 반드시 너의 기업을 이어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면서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게 룻에게 보리 여섯 되를 되어 줍니다.

사람들 몰래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이게 또 계시사적으로 비밀입니다.

룻은 보아스가 준 보리 여섯 되를 나오미에게 가지고 갑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룻에게 준 보리 여섯 되의 의미를 대뜸 압니다.

 

그래서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얘야! 그 사람이 이 사건을 어떻게 성취하는지 그 때까지 기다리자고 합니다.

넌 가만히 있으면 보아스가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일을 다 할 것이라고 합니다.

 

18절 “이에 시모가 가로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아마도 그 사람이 너에게 약조 한 것을 이루려고 지금쯤 동분서주 하고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룻은 약속을 받고 왔습니다.

그 증거로 보리 여섯 되를 받아 왔어요.

 

그럼 이걸 신약식으로 해석해 봅시다.

먼저 호크마 주석을 참고해 봅시다.

 

“안식년 규례(출 23:10,11;레 25:2-7,20-22;신 15:1-15)에 따르면, 6년은 봉사와 수고의 기간이며 7년째는 안식과 해방의 순간이다. 따라서 보아스는 룻에게 6번 보리를 되어 줌으로써, 수고와 노역의 긴 기간이 이제 다 되었음을 암시한 듯하다. 비록 당시 룻은 히브리인들의 관습과 규례에 익숙치 못했으므로 그 의미를 잘 몰랐다고 해도, 룻으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은 나오미는 즉각 그 상징적 의미를 알았던 것 같다(18절)“.

 

호크마 주석에선 보리 여섯 되를 안식년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안식년이란? 천국에서의 안식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보리 여섯 되는 천국에서 안식하는 때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은 엿새가 지난 후 일곱째 날에 주어집니다.

이건 창조의 이야기입니다.

엿새 동안 창조하는 이야기입니다.

 

나오미가 보리 여섯 되를 보고 기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기간이란? 여섯 날이란 뜻입니다.

여섯 날이 지나면 룻은 기업을 잇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룻은 보아스에게 당신은 나에게 기업을 이어줄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보아스는 룻에게 보리 여섯 되를 주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럼 보리 여섯 되는 여섯 기간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섯 기간이 지나면 기업을 잇게 되어 안식을 하게 됩니다.

안식은 모든 일을 마치고 쉬는 날입니다.

 

그럼 우리가 쉬는 날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거나 아니면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예수님 품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날은 엿새 속에 포함이 된 날들입니다.

엿새 동안은 수고하고 땀 흘리는 날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엿새에 속한 일을 하고 게십니다.

엿새가 차게 되면 그 때 예수님은 재림 하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여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성도에게 기업이란? 천국입니다.

그럼 보아스가 룻에게 기업을 이어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보리 여섯 되를 준 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엿새 동안 일을 마치고 일곱째 되는 날에 주어지는 천국에서의 안식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보아스의 약속을 예수님의 약속으로 봅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치 보아스가 룻에겐 기업을 이어주겠다고 하는 것과 동일한 약속을 하였습니다.

 

성도가 얻을 기업은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한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보아스가 타작마당에서 룻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교회는 이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제 교회(우리)는 그 약속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루시는가 기다리면 됩니다.

기다리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천국은 안식하는 곳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쉬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하실 때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일곱째 되는 날에 안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안식 하실 수 있도록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땅에서 하늘로 뽑아내는 추수하는 일을 하십니다.

율법에서 은혜로 불러내는 일을 하십니다.

 

그럼 보아스가 룻에게 보리 여섯 되를 되어준 것은 창조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오미는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보아스가 어떻게 일하는지 두고 보자고 한 것입니다.

그럼 기업이 성사되는 그 날이 보리 여섯 되에 담겨진 기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오미가 좋은 신랑을 만나게 하여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서 안식하게 해 주겠다고 하잖아요.

안식이 언제 주어집니까?

창조 사역으로 보면 언제 안식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안식도 엿새가 지난 후 일곱째 날에 주어집니다.

 

이걸 보아스가 룻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보세요.

보아스가 룻에게 준 보리 여섯 되를 창조의 한 날로 계산해 보세요.

그럼 보아스가 보리 여섯 되를 되어 준 것은 여섯째 날까지 일하는 일이 마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나오미는 이걸 알았어요. 

그러니 나오미가 룻에게 얘야! 보아스가 보리 여섯 되를 주었으니 그 때까지 어떻게 일하는지 기다려 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반드시 성취 할 것이라고 합니다.

보아스가 다 하고 나면 너를 부를 것이다!

그러니 넌 그때까지 기다리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약속을 현재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라는 옷자락으로 덮음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밀 추수와 보리 추수에 대하여 살펴보았지요.

보리 추수는 초림을 말하고,

밀 추수는 재림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보리 추수는 육적 이스라엘을 추수하는 것이고,

밀 추수는 영적 이스라엘을 추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보아스가 보리 추수를 하고 있지요.

그러니 영적으로 추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적 신자와 영적 신자를 추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로 살펴봅니다.

여섯째 날에 짐승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지요.

영적으로 짐승은 육에 속한 자이고 사람은 영에 속한 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들을 갈라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영적으로 말하면 여섯째 날인 겁니다.

이제 곧 엿새가 찰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들이 갈라 질 것입니다.

다 갈라져서 일곱째 날이 되면 안식을 하게 됩니다.

 

엿새는 역사에 속한 날이고 일곱째 날은 묵시에 속한 날입니다.

그럼 엿새 속에 있는 사람이 있고 일곱째 날에 속한 사람도 있어요.

성도는 영적으로 일곱째 날에 이미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 안이 일곱째 날이에요.

우리는 지금 영적으로 예수 안에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곱째 날에 들어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일곱째 날에 속하였지만 육적으로는 아직 여섯째 날이에요.

우리는 룻처럼 보리 여섯 되를 받았어요.

보리 여섯 되를 받은 것은 일곱째 날 안식을 약속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약속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이 이 약속을 어떻게 성취하는가 구경만 하면 됩니다.

 

신앙생활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주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구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안식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가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다 하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안식일인 것입니다.

 

구원이란? 여호와의 안식에 초대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안식으로의 초대를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니 나오미의 말대로 예수님이 안식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 믿음으로 기다리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엿새가 차기까지!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허물 많은 죄인을 은혜의 옷자락으로 덮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안식으로 초대하는 약속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 약속이 믿어지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우리가 뱉어내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감사만 되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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