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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룻기 강해

♣(룻기 강해) 1강. 신랑의 죽음으로 사는 여자 (룻 1:1-5)

by coroa 2022. 9. 14.

룻기 1강 룻기 1:1-5절.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1강. 신랑의 죽음으로 사는 여자 (룻 1:1-5)

룻기 1:1-5절.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지 십년 즈음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정낙원 목사

 

오늘부터 룻기를 살펴볼까 합니다.

룻기는 나오미라는 한 여인의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들을 어떻게 간섭해 가시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들의 불신앙 속에서도 한 치의 오차없이 이루어져 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준다는 말은 부정하고 흠 있는 곳에서 흠 없이 거룩한 곳으로 빼내 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창세전 언약은 죄 가운데서 불러내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므로 인간들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빼내 주시지요.

 

죄란 하나님 뜻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이란 불순종을 바탕으로 한 죄에서 건져냄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시곤 거기서 빼내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빼내 주시는가 하면 그 아들의 피로 빼내 주세요.

그럼 빼내심을 입은 백성들에겐 예수님의 공로만 오롯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만물을 그 발아래 꿇게 하시고 모든 입술로 아들을 주(主)라 고백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받은 성도들 속엔 아들이 하신 일만 담겨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살펴볼 룻기에서도 이러한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망한 한 가정을 ‘보아스’라는 한 사람이 대신 책임져 주심으로서 일으켜 세우심을 입게 되는 모습이 바로 창세전 언약의 한 그림인 것입니다.

이는 장차 예수그리스도에 의하여 하나님을 떠나 길 잃은 양처럼 세상에서 버려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같은 언약 백성들을 찾아 일으켜 세워주실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룻기는 ‘나오미’라는 한 여인의 가정사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들의 구속사 이야기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의 문제가 아니고 죄인의 구원 이야기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성도가 세상에서 성공하여 이름을 떨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 믿어 복 받고 세상에서 영웅이 되어 잘 산다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또한, 성도가 개과천선하여 반듯하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도 아닙니다.

 

구원이란 죄와 사망이라는 곳에서 의와 거룩이라는 곳으로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땅에서 하늘로 빼내는 것이에요.

이 모든 일을 예수님이 홀로 다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예수님이 시작하시고 끝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이걸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예수님께서 마귀와 전쟁을 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를 일컬어 성경에선 전리품이라고 해요.

전리품이란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선물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전리품인 성도를 아버지께 바치는데 이걸 십일조라고 해요.

이걸 아브라함 전쟁에서 보여 주셨어요.

 

롯이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아브라함이 전쟁하여 빼내 오시지요.

이때 아브라함이 전리품 중에서 십일조를 하나님(멜기세덱)에게 드립니다.

이 십일조가 바로 구원받은 성도인 겁니다.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예수님이 장차 마귀와 전쟁하여 이긴 후에 자기 백성들을 찾아와서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의 모형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의 전쟁 이야기로 가득한 것입니다.

전쟁에서 이긴 이야기를 죄인이 구원받는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저주받은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 아래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르시는가!

과거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란 영화 제목처럼 말 안 듣는 못난 자식을 끝까지 끌어안고 종국엔 못난 아들을 대신하여 당신의 죽음으로서 기어코 죄의 수렁에서 건져내는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란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마다 예수님의 지극한 희생과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랑 속에 마리아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고 인간의 영광이란 고작해서 예수님의 발을 닦는 걸레 같은 것이라는 것으로 고백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광을 예수님 홀로 받으셔야 한다는 그런 고백이 토설되어져야 합니다.

 

나의 나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관념이 아니라 삶으로 토해져야 해요.

그러기 위하여 우린 성경 속에서 우리의 악함을 발견하고 그 악함 조차도 당신의 사랑으로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여! 종이 또 이런 은혜를 입었군요!

주의 긍휼이 또 나는 건져내시는군요!

주여! 당신 홀로 만유의 주가 되시고 당신이 나의 주시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룻기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룻기를 통하여서 우리의 악함이 고발당하고 주님의 긍휼하심과 희생하심과 낮아지심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모든 것을 감수하시는 지극한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룻기가 쓰여진 시대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고 운(運)을 떼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가 어떤 때입니까?

 

사사기 21장을 봅시다.

 

삿 21:25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한 구절이 사사 시대의 영적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끝내고 죽으면서 시작된 사사 시대는 사무엘 선지자가 나타나 사울 왕을 세우기까지 기간을 말합니다.

 

그러니 사사 시대란 일반적으로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첫 사사 옷니엘이 등장할 때로부터 시작하여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왕이 등장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첫 사사 옷니엘이 등장할 때가 B.C 1367년경이고 사무엘이 사울 왕을 세울 때가 B.C 1025년경이니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대략 342년 정도가 됩니다.

 

사사기가 사사 시대를 말해주고 있는데 사사기의 내용이 타락과 징계 그리고 회복과 평안 그러다가 다시 타락하여 징계당하고 그러다가 사사를 통해 구원을 받는 그런 악순환의 연속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예수를 믿어도 불순종의 역사를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므로 사사기는 우리에게 위로의 편지가 되는 것입니다

룻기도 사사 시대에 일어난 사건이므로 우리에게 위로와 평강과 은혜가 되는 말씀이 되어요.

 

나오미를 통하여서 나를 보아야 하고!

나오미를 간섭하신 하나님을 통하여서 나를 간섭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룻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래서 그냥 땅이라고 하지 않고 약속의 땅이라고 합니다.

약속의 땅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만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이란 말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물론 그곳엔 믿음 없이도 살아가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있어요.

그들은 그들 방식대로 잘 살았어요.

모세가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할 때 그 땅의 후박을 탐지하려고 들어간 정탐꾼들의 눈엔 포도송이 하나를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갈 정도로 기름진 땅으로 보였어요.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왜 동일한 땅에 이방인은 잘 사는데, 언약의 후손들은 언약 안에서만 살 수 있고 언약을 떠나면 쫓겨나야 하는 것일까요?

 

땅이 사람을 차별하는 걸까요?

아니에요.

그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그냥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에요.

이 세상에 속한 땅이에요.

물론 구속사적 그림에선 애굽은 저주 받은 이 세상을 말하고 가나안은 천국을 말하는 것이 맞아요.

그러나 실제적 의미에선 가나안은 천국이 아니고 이 세상에 속한 하나의 땅에 불과해요.

 

그러니 가나안이라는 땅에 의미를 두어선 안 됩니다.

그냥 천국과 지옥을 말해주기 위해서 잠시 시청각 교재로 사용하신 것뿐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언약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야 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막상 가나안에 들어갔어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진짜 땅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고 가나안 땅에서 그저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엔 성도가 차지할 분깃이 없어요.

성도가 차지할 땅은 하늘에 있어요.

성도가 뿌리내리고 살아갈 땅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평안하게 산 것처럼 우리도 살 수가 있어요.

하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살면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가나안 땅에서 온갖 핍박과 환란과 저주를 받았듯이 우리도 그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란 잘라내는 저주가 아니고 사랑의 매를 말합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툭하면 하나님을 떠나 징계를 당하였듯이,

우리도 동일하게 예수를 믿으면서도 불신자들과 방불한 모습으로 살면 징계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우리의 자화상이에요.

그러니 그들을 욕하면 안 되고 그들을 통하여서 나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야~ 내가 저렇게 지독히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구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자비가 나에게도 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린 구약의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나 이방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는 동일해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그런데 한 가지 다른 것은 이스라엘 속엔 하나님의 언약이 심겨져 있고 이방인에겐 없어요.

언약이 심겨진 것과 심겨지지 않았다는 것만 달라요.

언약이 심겨진 자에겐 긍휼로 대하고 언약이 없는 자에겐 법으로 대해요.

 

그래서 이 언약이 심겨진 것과 심겨지지 않는 것이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엄청난 사건을 몰고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땅에 살아도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다르게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역설적으로 간섭을 하세요.

언약이 심겨진 자들은 옛 사람을 죽이고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방식으로 간섭을 하시기 때문에 같은 땅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되고,

언약이 심겨지지 않는 사람들은 육신의 소욕대로 살도록 유기하시기 때문에 천국 같은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는 이 세상에서 죄인이 받아야 할 저주를 몽땅 받도록 하시고,

이방인에게는 나중에 지옥에서 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이방인이 훨씬 편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인 것입니다.

 

이 원리를 놓치지 마세요.

모든 인간은 죄인이에요.

죄인은 죗값을 치러야 해요.

 

그런데 그 죗값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받게 하시고 이방인은 지옥에서 받게 하세요.

그 차이에요.

그래서 동일한 가나안 땅인데도 가나안 원주민들은 집채만 한 포도송이를 재배하는데, 이스라엘은 국물도 없는 겁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에겐 가나안 땅이 집채만 한 포도송이를 재배하는 기름진 땅이에요.

전혀 불편함이 없이 잘 살아가는 땅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기름진 땅이 아니고 살 수 없는 땅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여기에 죄인들 특유의 죄성인 자기 몸뚱이를 신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모습이 토하여져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몸뚱아리 하나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 가나안 원주민들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신들을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사사기이고 사사 시대의 역사에요.

 

가나안은 믿음으로 볼 때만 기름진 땅으로 보여요.

하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살아갈 수 없어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믿음으로 살지 않았다는 증거에요.

믿음으로 살지 않으니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 소견대로 살아간 것입니다.

 

일찍이 모세는 애굽과 가나안 땅을 비교하기를,

애굽은 저수지가 있어서 언제든지 인간의 노력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인 반면에, 가나안 땅은 산악 지대라 물을 가둘 수가 없어 인간의 노력으로 농사지을 수 없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가나안 땅에선 ‘하나님께서 먹여 살려 주시겠지’라는 믿음이 없으면 한시라도 살아갈 수 없는 곳이라고 알려주었어요.

 

가나안은 애굽에서 나온 출애굽 1세대들은 다 죽고 광야에서 출생한 2세대들이 들어갔어요.

광야에서 난 2세대들은 광야 40년 동안 농사를 짓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광야 40년 동안 단 하루도 굶지 않았고 벗은 몸으로 살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난 2세들은 그 만나를 먹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은 광야에서처럼 하나님께서 먹여 살리신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 살 수가 있어요.

그렇지 않고 당장 손에 잡히지 않고 곡간에 양식이 없다고 불안해하면 하루도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룻기의 시대적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 온 지 약 200년이 지난 후 기드온이 사사로 활동하기 직전의 시대에요.

기드온이 사사로 부르심을 입을 때가 이스라엘의 형편이 어땠습니까?

이스라엘이 다 하나님을 떠나자 하나님께서 미디안에게 이스라엘을 붙여버리잖아요.

그래서 극심한 핍박을 당하던 시기였어요.

 

미디안의 압제로 인해서 농사를 지어도 다 빼앗겨서 기드온이 밀 한 움큼을 먹고자 부엌에 숨어 포도주 틀에다 비벼서 한 끼 먹고 살 때입니다.

그러니 초근목피로 연명할 때라고 보면 됩니다.

마치 우리나라 6.25 이후 보릿고개를 넘기던 시절처럼 풀뿌리 캐 먹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먹던 시절과 같다고 보면 되겠네요.

요즘 젊은 사람들에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이지만 말이에요.

 

그러니 룻기에서 말하는 시사 시대란 가나안에 들어 온 광야 2세대들은 이미 다 죽고 난 후에 가나안에서 태어난 세대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들은 광야 생활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가나안에서 태어나고 가나안에서 자란 세대들입니다.

 

사사 시대가 왜 타락과 징계 그리고 회복의 악순환을 걷게 되었는가?

도무지 믿음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땅에 집어넣고 하늘만 쳐다보고 살라고 하니까 도저히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원주민들의 신(神)을 섬기고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살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보이는 것을 힘으로 삼고 사는 자들이에요.

그러니 죄인에게 약속이란 허구이고 관념이에요.

왜냐하면 약속은 현재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현실에선 전혀 힘이 되지 못해요.

죄인에겐 내일이란 불안 한 날이에요.

당장 눈에 보이는 현재만 중요하게 생각해요.

 

죄인에겐 죽어서 가는 천국보다 현재 세상이 중요하고 좋아요.

천국은 안 보이고 세상은 보여요.

그러니 세상을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당장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을 주는 신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도 보이지 않는 신보다는 보이는 신을 원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신이 바로 우상인 겁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살아가야 하는 가나안 땅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우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이에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사사 시대를 한마디로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각각 그 소견대로 행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들 방법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이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용서하심만이 인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성도들에게 성도가 구원받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거창하게 하나님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내가 하나님 집을 짓겠다고 하자,

하나님이 “웃기지 말라! 내가 너희 집을 지어준다.”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신앙은 어느 찬송가의 가사처럼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존귀 영광은 예수님이 받으시고 멸시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아골 골짝 어디라도 가겠나이다’라고 떠벌릴 그런 처지가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이야 가상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만 마음이지 실상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실상에선 아골 골짜기에 예수님을 밀어 넣고 우리가 존귀 영광 받고 있어요.

우린 피 철철 흘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떡 달라고 하는 종자들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그러고 있잖아요.

날 편하게 해 달라고 하잖아요.

 

좋은 신랑감 달라고 하고,

자식 좋은 대학 집어넣어 달라고 하고,

사업 잘되게 해 달라고 하고,

내가 산 펀드 대박 나게 해 달라고 하고,

주식값 올라가게 해 달라고 하는 종자들이에요.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뒷구멍으로 돈을 챙겨서 가옥에 가옥을 더하고, 펀드에 펀드를 더하고, 주식에 주식을 더하고, 부동산에 부동산을 더하는 놈들이에요.

 

십자가는 개뿔!

내 밥벌이 용이고, 돈벌이 수단일 뿐이에요.

우리가 하는 짓이 자증하고 있잖아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십자가 정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입만 열면 십자가를 말하고 천국을 말하고 있어요.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입에서 확 토해내겠다고 하겠어요.

 

우린 예수님의 십자가는 관심이 없어요.

예수님 피는 내가 죄짓고 나면 그냥 씻겨만 주면 되는 정도로 취급해요.

내 성질머리대로 내 꼴리는 대로 살 테니 그때 그때 치다꺼리만 해 주면 되어요.

 

‘어차피 난 죄인인데!

죄인이 죄짓는데 뭘 어쩌란 말이냐?’라고 하면서,

‘예수 피 믿으면 되었잖아!’라고 도리어 큰소리치고 있다구요.

 

예수 피 믿어준 것이 무슨 큰 부조라도 한 것처럼 유세를 떨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주절거리는 그 십자가 피는 시골 장터에서나 파는 돼지 피만도 못한 피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치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고 있는 그런 하나님과 같아요.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관념 속에 하나님이에요.

죽은 하나님이에요.

전혀 자신들이 삶 속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었어요.

 

이 시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와 같고 십자가와 같아요.

십자가를 아는 지식은 태산 같은데 그 십자가가 나의 삶에선 무기력해요.

그러니 세상 사람과 똑같은 가치관이나 그들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예수이고 죽은 십자가이고 죽은 피인 겁니다.

십자가는 액세서리이고 부적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사 시대와 지금 우리를 별개로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바로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에요.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러 가는 그런 죄인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 가나안 땅을 떠나 이방 나라로 가서 우상과 간음하며 살고 있는 자들이에요.

 

알다시피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왕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말합니다.

이건 마치 이 시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와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이 모습과 동일합니다.

그러니 지금도 사사 시대는 연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마세요.

우리가 바로 사사 시대를 살아가던 이스라엘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성정(性情)이 같아요.

똑같은 인간들이란 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으면 우리도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들이에요.

 

그들도 언약의 후손이었듯이 우리도 언약의 후손이에요.

언약의 후손이 죄를 짓고 살았듯이 우리도 죄를 짓고 살고 있어요.

그들이 매를 맞았으면 우리도 매를 맞아야 하고,

그들이 용서를 받았으면 우리도 용서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모습은 곧 우리의 거울이고 우리들의 자화상(自畵像)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가게 하시면서도 애끓게 말씀하셨어요.

“얘들아! 내가 너희에게 이러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을 주기 위함이야.”라고 하셨어요.

어째서 이방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평안입니까?

이는 언약 속에 말 안 들으면 매 맞는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 속에는 “너희가 내 말을 안 들으면 두들겨 패기는 하여도 은총을 빼앗지 않고 나의(하나님) 사랑을 절대 취소하지 않겠다”라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 언약 백성들이 당하는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언약의 후손이기에 두들겨 팰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야 천국에서 안 맞아요.

이 땅에서 안 맞으면 지옥에 가서 맞아요.

죄인은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해요.

 

우린 죄인이에요.

그러므로 이 땅에서 죽도록 두들겨 맞아야 합니다.

죗값을 톡톡히 치러야 해요.

죗값을 치르라고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똑같이 남의 집에 도적질했어요.

그러다 붙잡혔어요.

경찰서에서 연락이 온 겁니다.

가 보니 도적맞은 집 주인과 경찰들이 에워싸 있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흠씬 두들겨 패는 겁니다.

두들겨 패면서 “이 놈이, 잘못된 것은 모두 다 내가 잘못 키워서 그렇습니다.”라고 하면서 훔친 것에 대한 변상을 해 주고 데리고 왔어요.

그리곤 집으로 데리고 가서 “많이 아프지. 다시는 그러지 마라.” 하면서 치료해 주잖아요.

남에 새끼는 그냥 법대로 처리하라고 버려두어요.

그럼 그 남의 자식은 감옥에 가야지요.

 

지금 하나님이 언약의 백성과 아닌 자들을 그렇게 대우하세요.

언약 백성이기에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성도에겐 징계가 따르고, 불신자들에겐 아무런 징계가 없는 겁니다.

아삽이 이 사실을 알고 실족할 뻔하였다고 했어요.

 

시편 73편이 이 이야기에요.

아니 어떻게 믿지 않는 놈들은 하는 것마다 잘되는데,

왜 하님의 백성들은 하는 것마다 안 되느냐고 하나님께 따지잖아요.

그러다가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응답을 받았어요.

하나님이 “야~ 저 놈들은 나중에 지옥에서 두들겨 패려고 유보하고 있고,

너희는 여기서 두들겨 패는 거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아삽이 “어이쿠~ 하나님 고맙습니다!”라고 했다니까요.

 

성도들이 세상에서 고난받는 것은 모두가 나중에 받아야 할 것을 미리 받기 때문이에요.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징계가 없다면 그건 사생아라고 했어요.

지옥 갈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두들겨 패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이 땅에서 고난당하는 것은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 비밀을 부디 아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사사시대 타락한 이스라엘을 실컷 두들겨 패고는 기어코 다시 하나님 품으로 불러들여서 치료하시고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이스라엘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도 그 이스라엘 속에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타락하면 동일하게 매를 맞고,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이켜 우리를 보듬어 안아 주심을 받는 동일한 그 은혜를 입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사사 시대를 봅시다.

그 시대 왕이 없어서 각각 소견대로 행하였다고 하지요.

각각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다는 말은 자기가 왕이 되어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같아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난 아담은 아비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은 신세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 살아야 했어요.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 살아가야 하는 풍전등화와 같은 인생살이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그 판단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스스로 독자적으로 살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려서부터 누구에게 간섭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선악과가 준 것으로,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죄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을 파멸로 몰아갑니다.

 

그러니 죄가 주는 그 어떤 것도 결과적으로는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스스로 왕이 되어 살아가는 자들의 인생은 파멸이고 저주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의 인생을 누군가 책임져 주지 않는다면 그건 결국 멸망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왕이 없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흉년이 든다는 것입니다.

흉년이란 단순하게 먹을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죽음에 내 던져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나오미 가정에 힘의 상징인 남자들이 다 죽임당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내린 저주가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붙좇아서 내려진 형벌이 종신토록 흙을 먹는 것이고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땅을 개간하고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먹을 것을 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독자적으로 먹고 살아갈 궁리를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먹고 사는 일이 법을 앞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흘 굶어 남의 집 담을 안 넘을 사람이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제일 서러운 것이 먹지 못한 설움입니다.

 

이러한 설움이 어디서 기인 되었습니까?

모두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왕이 되어서 살면 잘 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망하는 삶이라는 것을 성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걸 예수님은 탕자 비유에서 말씀해 주셨어요.

물론 탕자의 비유는 다른 의도로 말씀하신 것이지만,

일차적으로 부모를 떠나면 굶어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탕자가 왜 아버지를 떠나고 싶었을까요?

아버지로부터 간섭받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어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독자적으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탕자는 곧 사사 시대 이스라엘과 같은 것입니다.

곧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해요.

 

그래서 아버지는 “그래, 아버지 간섭 없이 한번 살아보아라”라며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짓고 살면 잠시 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어요.

“그래, 한번 실컷 죄짓고 살아보아라”라고 하세요.

그리곤 그 죗값이 얼마나 처참하고 아픈 것인 줄을 나중에 깨닫게 하십니다.

룻기가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달콤한데 그 결말은 엄청난 고통을 안겨다 주어요.

우린 그걸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당장 죄짓는 일이 재미가 있어서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는 나오미와 룻이라는 과부가 주인공이에요.

그러니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과 그 두 아들은 나오미가 하나님을 떠나면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되는지를 말해주기 위해서 등장시킨 인물이에요.

 

중요한 이야기니 잘 들으세요.

룻기의 주인공은 나오미에요.

나오미는 성도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그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주인공인 나오미가 하나님을 떠나 이방 나라로 가자 죽어버렸어요.

그러자 나오미는 더 이상 거기서 살 수 없어서 다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이는 곧 우리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간음하고 살자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이 죽은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어요.

그런데 우린 그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 화목이 되었어요.

나오미가 남편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다시 돌아온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나오미의 죄 때문에 남편이 죽었듯이,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룻기에서 예표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신랑 잡아 먹고 산 여자’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누군가가 희생당하는 이야기가 성경의 중심 사상이에요.

그 누군가가 바로 예수님인 겁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나오미가 남편과 아들을 이방 나라에서 잃어버린 것은 우리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가 의지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은 이중적으로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힘으로 삼고 있는 것을 다 빼앗아 간다는 것으로 살펴볼게요.

 

나오미가 지금 탕자처럼 아버지 집을 떠났어요.

그래서 거기서 힘을 상징하는 남편과 두 아들마저 잃어버리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의지할 것 아무것도 없는 그런 신세로 떨어지고 말았어요.

 

나오미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 줄 몰라요.

강도들이 우글거리고 도적들이 우글거린다는 것을 몰라요.

결국, 나오미는 가진 것 다 털어먹고 거지가 됩니다.

이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 마귀라는 강도를 만나서 거지가 된다는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도 말했듯이 우린 모두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자들이에요

 

지금 사사 시대가 그런 꼴을 당한 겁니다.

하나님을 왕에서 밀어내고 자기가 왕이 되고 나니 찾아온 것이 기근입니다.

당장 목구멍에 풀칠해야 하는 급박한 일이 닥치고 말았어요.

 

이건 성도가 신앙을 버리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는 형국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과 같아요.

믿음이 있을 때는 ‘사나 죽으나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라는 배짱이 있었는데,

믿음을 엿 바꿔 먹고 나니까 통장에 잔고가 없으니까 불안한 겁니다.

살아갈 일이 태산인 겁니다.

동일한 환경에서 믿음이 있을 땐 근심·걱정이 없었는데,

믿음이 떨어지고 나면 근심·걱정이 태산인 겁니다.

 

믿음이 없으면 근심 걱정이 끊이질 않아요.

저 역시 믿음이 있을 땐 노후 걱정이 안 되는데,

믿음이 약해지면 노후 걱정을 하게 되어요.

‘야! 이렇게 목회하다가 늙으면 어쩌지?’

온갖 걱정이 앞선단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을 땐 들에 풀 한 포기도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시는데,

뭘! 까짓것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되지!

그런다구요.

그러다가 믿음이 떨어져 보세요.

온갖 근심·걱정이 앞을 가려요.

 

결국, 환경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 믿음이 문제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요만큼이라도 신앙을 지키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눈만 뜨면 ‘어찌 살까?’ 걱정이에요.

살아가는 일에 근심·걱정이 생긴다는 말은 곧 우리가 지금 사사 시대 사람들처럼 살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살 궁리하려고 하나님도 이용하고 십자가도 이용하고 교회도 이용하잖아요.

 

하나님을 떠나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이 먹고 살아갈 근심·걱정이에요.

근심·걱정이 엄습하면 그걸 치워야 합니다.

그걸 두고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요.

그럼 해결책을 모색하여야지요.

어떻게 모색하는지 살펴봅시다.

 

잠시 상황을 다시 정리하고 갑시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베들레헴이라는 동네에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라고 합니다.

그 아내는 나오미이고 두 아들은 말론과 기룐이며 이들은 모두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 한 사람의 가정사를 이렇게 소상하게 말하고 있을까요?

이는 이 가정이 어떤 가정인가를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먼저 가장인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주는 의미입니다.

엘리멜렉이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름 한번 멋지지요.

 

엘리멜렉 속에 이중 계시가 담겨 있어요.

나오미 입장에서는 남편인 엘리멜렉이 예수님의 모형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엘리멜렉은 곧 우리를 예표하고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면 엘리멜렉처럼 죽기 때문이에요.

 

전도서에 보면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다고 했어요.

이름이란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에요.

이름 속엔 그 사람의 운명이 담겨 있어요.

넌 이런 인간이 되라는 뜻이에요.

 

최초에 인간의 이름을 하나님이 지어주셨지요.

뭐라고 지어주셨습니까?

아담이라고 지어주셨지요.

아담이란 이름은 ‘흙’ 또는 ‘먼지’ ‘티끌’이란 말입니다.

이는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뭐냐?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낫팅(Not-thing)이에요.

먼지에요.

 

사 2:22절.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시 146:4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시 104:29절.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했어요.

잘난 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호흡의 주인이 하나님이에요.

처음 아담을 흙으로 만들고 그 코에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으셨지요.

그러니 인간의 호흡은 하나님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호흡을 취하시면 본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실존이에요.

그냥 훅 불면 날아갈 먼지란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해도 먼지에요.

영웅호걸이라고 해도 먼지에요.

 

이런 먼지가 하나님을 떠나 살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웃깁니까.

우리가 지금 이런 웃긴 짓을 하고 있어요.

아주 꼴값을 떨고 있다구요.

 

흙 주제에 돈 좀 있다고 까불고 있고,

흙 주제에 권력 좀 잡았다고 교만을 떨고,

흙 주제에 예쁘다고 건방을 떨고,

흙 주제에 복음 쬐끔 아는 것을 가지고 우주를 논하고 예수를 논하고 하나님을 논하고 있다구요.

 

잘난 척 꼴값을 떤다는 말은 그 앞에 하나님이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나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을 떠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소견대로 판단한다고 하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을 알면 입을 닫아야 하는데 입을 열고 나불거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눈에 안 보인다는 말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몰랐을 땐 하나님까지 논했어요.

엄청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입을 가렸어요.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의 특징이 주둥이를 닫는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유구무언이 되어요.

촐싹거리지 않아요.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다 안다고 까불락 거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잖아요.

뭘 다 안다고 하는 자는 아직도 다 모르고 있는 자라고...

 

고전 8:2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그런데 우린 이 말이 귀에 안 들려요.

우리도 엘리멜렉과 같이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라는 귀한 이름을 가졌지만,

하는 짓은 ‘내가 하나님이다’라고 살고 있어요.

 

하나님이 나의 왕이라고 한다면 내가 염려하고 걱정할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지 하고 안심하고 살아야 하잖아요.

또한, 남의 일에 간섭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전부 자기가 다 하여야 안심이 되어요.

 

자신이 먼지이고 티끌인 줄 알면 “아이구~ 하나님 난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세요!”

“내가 산다는 것이 하나님께 방해 거리만 되는군요!”라고 해야 합니다.

이게 모두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인근에 있는 동네에요.

알다시피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어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출생할 것을 예언하였어요.

다윗도 베들레헴 출신이에요.

이러면 베들레헴은 왕이 사는 동네가 되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란 뜻이에요.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였어요.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그 속에 생명이 있고 영생을 한다고 하셨어요.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난 것은 예수님을 떠난 것과도 같은 겁니다.

 

교회를 일컬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어요.

이러면 교회 또한 떡집과 같은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영적으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곧 우리 자신이기도 하구요.

 

베들레헴 속에는 여러 가지 영적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예수님의 고향이기도 하고,

다윗이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곳이기도 하고,

생명의 떡이 있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떡집에 떡이 떨어졌어요.

이건 교회가 말씀이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나’라고 했으니 내 안에 떡이 떨어진 겁니다.

말씀에 기근을 당한 겁니다.

 

말씀에 기근을 당한다는 뜻은 복음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에요.

복음을 아는 것하고 복음으로 사는 것은 달라요.

떡은 양식이에요.

양식은 지식으로 분석하고 구경하는 것이 아니고 먹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힘으로 살아가요.

 

떡은 곧 생명인 것입니다.

떡을 먹어야 살아 움직여요.

떡이 복음이에요.

그럼 복음을 양식으로 먹어야 배부름을 얻고 그 힘으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양식으로 먹고 살아야 기근을 당하지 않아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약속을 떠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자 보세요.

나오미와 엘리멜렉에 살던 곳이 베들레헴 에브랏이라고 했지요.

에브랏이란 ‘곡물이 생산되는 땅’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은 떡집이에요.

곡물이 생산되는 땅이란 말은 떡을 만들 재료가 풍성한 곳이란 말입니다.

그럼 그 곡물로 떡을 만들어 먹어야 하잖아요.

 

한마디로 떡이 떨어질 수 없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럼 기근을 당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곡물이 풍성하게 나는 땅에서 떡을 만들어 먹지 못해서 기근을 당하고 있어요.

이는 그림의 떡이란 말입니다.

 

마치, 이 시대 우리 모습과 같지요.

우린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말씀을 먹지 않고 있어요.

분석만 하고 있어요.

지식으로 쌓고 있어요.

현실의 삶 속에서 말씀은 죽어있어요.

 

쉬운 말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배부름을 얻지 못하고 있어요.

이걸 지식이고 관념이라고 해요.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은 그림의 떡과 같아요.

복음을 말하지만 복음으로 살지 못하고,

십자가를 말하나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어서 아는 것은 많은데, 그 많이 아는 것이 양식이 되지 않고 지식으로만 습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많이 들어서 알면 뭣합니까.

삶 속에서 전혀 복음이 능력으로 나타나지 못하고 있는데...

생명의 떡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었으면 예수님과 같은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데, 우린 마귀 짓을 하면서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안다고 하는 십자가는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떡이 없는 것과 같이 나를 배고프게 하는 죽은 지식인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삶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으니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못하고 자기 방식으로 살고자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복음이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으면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어요.

자기가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 복음!’하고 ‘십자가! 십자가!’하면서 자기 살아갈 궁리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왕 되심을 밀어내고 내가 왕이 되어 자기 소견대로 사는 사사 시대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원래 흉년이 들지 않는 땅이에요.

 

신명기를 봅시다.

 

신 11:13-17절.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16.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 절하므로 17.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가나안 땅을 일컬어 약속의 땅이라고 하지요.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사는 곳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서 농사지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너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살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못 믿고 조급해서 다른 신을 찾으면 그땐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 하겠답니다.

이걸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만 믿으면 절대로 하늘이 닫히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가나안에선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면 절대로 굶을 일은 발생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면 기근을 당할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광야 사십 년 동안도 하루도 굶기지 않고 입히고 먹이셨잖아요.

그런 하나님이 가나안에 들여보내 놓고선 왜 굶기겠어요.

약속만 믿고 살면 안 굶겨요.

 

그런데 지금 그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어요.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늘을 닫아 비 오지 못하게 해서 기근 당한 것입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우리의 심령이 가나안이에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약속을 심어주셨어요.

우린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살고 있어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기고,

여호와는 살리기도 하시고,

여호와는 가난케도 하시고,

여호와는 부하게도 하시고,

여호와는 병들게도 하시고,

여호와는 고치기도 하세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가 되셔서 때로는 푸른 초장 맑은 시냇가로도 인도하시고,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하세요.

한마디로 여호와 마음대로 우리 인생을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진다고 한다면 우리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희노애락의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라고 믿고 살아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요.

성도에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고 있어요.

잘 돌아가고 있다구요.

 

내가 흥해도 잘 돌아가고 있고, 망해도 잘 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판단하고 있어요.

나에게 좋은 일이나 편안한 일만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믿어요.

그러니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의 일과 아닌 일로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 자신 모두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도구로 쓰임 받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좋은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나쁜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고 구분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좋은 일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나쁜 일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에요.

가난케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부하게도 하신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에요.

죽으나 사나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내게 좋은 것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믿고 있어요.

내 삶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믿음으로 보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어요.

그런데 우린 감사할 것과 감사하지 않을 것으로 구분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자기 생각으로 살아갈 궁리를 하게 되어 있어요.

지금 엘리멜렉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 기근을 맞이하였고,

기근이 드니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나님이고 뭐고 우선 살고 봐야겠다며

식솔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모압이 어떤 땅입니까?

‘모압’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지요?

발람이 생각나지요.

모압 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매수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하였잖아요.

발람이 아무리 저주하고자 하여도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바꿔버리지요.

 

그러자 꾀를 내어서 싯딤 골짜기에서 여자 무희(舞姬)들을 동원해서 광야 노정에 지친 이스라엘 남자들을 미인계(美人計)로 유혹하여 음행케 만들어 결국엔 이방신인 바알브올을 섬기게 만들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염병을 보내서 24000명이나 죽여 버립니다.

이때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질투심으로 일어나 미디안 여인과 붙어난 이스라엘의 한 족장을 죽여서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한 그런 곳이에요.

 

이처럼 모압은 이스라엘에겐 원수의 나라이고 저주의 땅이에요.

그런데 지금 엘리멜렉이 자기 식솔들을 거느리고 먹고 살기 위해서 원수의 나라, 저주받은 그 땅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선 이를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이건 믿음으로 살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살아갈 궁리를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우리도 복음 핑계 대고 살 궁리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무엇이든지 자기 힘으로 삼고자 해요.

그래서 신앙도 자기 유익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들이 ‘어떻게 하면 잘 살까?’라는 지침서가 아니에요.

‘인생을 이렇게 하면 성공하고 저렇게 하면 실패한다’라는 것을 말해주는 책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잘 살까?’라는 것을 가르치는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주제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행복엔 관심이 없어요.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분은 예수님이세요.

창세전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간에 약속이에요.

이 약속을 위해서 만물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애초부터 약속 속엔 인간들은 배제가 되어 있어요.

당연히 인간들의 살아가는 일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모든 성경은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약속이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하나님 스스로에게 하신 것이에요.

‘난 이렇게 세상을 경영하겠다’라고 선포한 것이 약속이에요.

그러니 약속이 누군가에게 떨어지면 그 사람의 자질이나 순종과 불순종과 상관없이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야~ 내가 너를 복에 조상으로 만들어 줄게!”

그러는 것과 같아요.

아브라함은 가만히 있다가 복에 조상이 되고 말았어요.

아브라함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복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고야 말겠다’라는 하나님의 의지이고 선포인 것입니다.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은 이미 완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않아요.

거짓말도 하지 못해요.

식언치 못한다는 것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약속은 완성품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게 약속이에요.

하나님의 약속 속에는 하나님의 의지만 담겨 있어요.

우리 의지나 각오는 소용없어요.

 

약속이란 가수 남진이 부른 ‘둥지’라는 노랫말과 같아요.

 

‘넌 그저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 줄게!’

‘내 품에 둥지를 틀어!’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거나 우리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우린 죄인이에요.

죄인은 하나님과 상의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그런 대상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위하여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입니다.

그리고 우린 피조물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동의를 구하거나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피조물은 철저하게 창조주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면 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마치 드라마를 찍는 감독과 배우(탤런트)와 같아요.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를 연출하는 감독입니다.

감독은 드라마를 찍기 위해서 배우에서부터 모든 셋트까지 다 준비를 합니다.

 

감독은 배우를 선정할 때 인물이나 지식을 보고 뽑는 것이 아니에요.

그 역할을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입니다.

외모에서부터 성격까지 드라마의 배역에 가장 잘 맞는 배우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각자의 배역을 맡고 이 세상에 보내심을 입었어요.

드라마를 보면 주연에서부터 조연과 단역 그리고 손님 1 손님 2, 3, 4, 5,,,,,,

지나가는 사람 1,2,3,4,,,,, 수많은 사람들이 출연을 합니다.

 

어떤 이는 이름이 있고 어떤 이는 이름이 없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드라마에 출연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역사가 바로 하나님이 창세전 언약을 찍는 셋트장인 겁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처럼 각각의 용도에 맞는 그릇들을 만들어서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배역을 맡겨 주세요.

우린 모두가 배역을 맡고서 이 세상에 보내심을 입은 겁니다.

예레미야에서 이를 잘 증거해 주고 있으니 한번 보고 갑시다.

 

예레미야 1장을 봅시다.

 

렘 1:4-7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어느 날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찾아갑니다.

이 때 예레미야의 나이는 정확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열방의 선지자로 선택을 하였다고 하니까 왜 하필 나냐! 라고 항변하는 것을 보아서는 철이 들었을 때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운명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을 보아서는 청년은 되었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암튼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찾아가서 사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짖기 전에 알았고 태에서 나오기 전에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합니다.

복중에 짖기 전이라는 말은 잉태하기 전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려고 계획을 세우고 난 후에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적합한 사람을 잉태를 시키셨다는 말입니다.

이걸 언약이 먼저이고 창조가 나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계획을 세우시고 예레미야를 잉태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출생하기 전에 선지자고 낙점을 하신 것입니다.

마치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 받을 자와 미움 받을 자로 선택을 한 것과 같습니다.

토기로 따지면 야곱은 사랑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 하였고, 에서는 진노를 담는 그릇으로 창조한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잘 살고 있는 예레미야를 찾아가서 따라 오라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내가 왜 하나님을 따라갑니까? 라고 항의하자,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지었어 이놈아!

내가 네 주인이야!

헐~~~~

 

예레미야는 선지자 역할을 하도록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걸 예레미야는 알고 인간적인 의미에서 ‘아~ 슬프다’라고 하면서 ‘더러운 팔자’라고 투덜거린 것입니다.

선지자는 바른 소리 하다가 죽임당하는 자들이에요.

그러니 슬프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멘! 할레루야! 가 아니고,,

재수 없게 걸렸다고 원망하였어요.

왜 그런가요?

인생이 차압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게 성도의 운명이에요.

 

예레미야는 자기의 원함과 상관없이 선지자가 되었어요.

하나님이 예레미야 입에다가 무슨 말을 할지 넣어 주셨어요.

그리고 누구에게 가서 어떤 말을 할지를 알려 주십니다.

예레미야는 마치 전기에 감전이 된 사람처럼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하게 됩니다.

이를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일단 배역이 정해지면 감독은 그 배역을 통하여 그려내고자 하는 그림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역을 맡은 배우들에게 지시합니다.

배우들의 몸짓 발짓 하나에서부터 얼굴 표정과 감정 하나하나까지 다 섬세하게 지시합니다.

시나리오엔 배우들의 대사에서부터 옷이나 행동이나 감정이 다 적혀 있어요.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땐 저렇게 하라”라는 식의 표정 하나에서부터 행동 하나까지 모든 지시문들이 있어요.

 

그 드라마는 감독의 작품이지 배우의 작품이 아니에요.

그래서 감독은 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상황, 장소, 소품 하나까지도 다 준비하는 겁니다.

배우는 감독의 지시에 따라서 연기만 하면 되어요.

드라마 속에서는 배우의 생각은 필요가 없어요.

배우는 각자 맡은 역할만 충실히 하면 되어요.

그리고 감독은 드라마를 즉흥적으로 찍는 것이 아니고 미리 짜여진 시나리오대로 찍어요.

 

이처럼 성도는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는 데 필요해서 만들어진 배우들이에요.

각자 맡은 배역이 있어요.

그래서 성도의 일생은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된 그 시나리오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찍으시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에서는 인간의 애드립은 일절 허용하지 않아요.

애드립이란 배우가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드라마에는 배우가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혼자서 다 알아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다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에요.

요한계시록 6장을 보면 어린양이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을 아버지께로 받아서 인봉을 하나씩 하나씩 떼어 내십니다.

그러자 지상에서 말들이 뛰기 시작합니다.

말들이 뛰니 이 세상에서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들도 일어나고,

전쟁도 일어나고,

기근도 일어나고,

전염병들도 일어납니다.

한마디로 세상에 혼란이 닥치고 재앙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문자적인 의미도 있지만, 그 속에 영적인 것도 담겨져 있어요.

 

이로 보건대,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천재지변은 하나님이 허락한 것입니다.

온 세계가 코로나로 펜데믹 현상이 일어난 것도 어린 양의 허락 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록한 성경을 펴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나 사고는 모두 어린양의 손에서 비롯되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인간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에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라마 속에 나오는 배우의 인생을 감독이 조정하듯이,

우리 인생도 하나님이 조정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태어나고 죽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기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부모 아래서 태어나게 하시고,

어떤 환경에서 자라게 하시고,

어떤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자식은 몇 명을 낳고,

무슨 직업으로 어떤 일을 하다가 어떻게 죽는지 다 정해져 있어요.

 

또한, 그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인생길에 어디에서 어디까지는 어떤 동무들과 길을 가고,

몇 살 때는 누구를 만나서 무슨 일을 하고,

몇 살 때는 또 어떤 친구들을 만나서 어디로 가는지 정해져 있어요.

 

유치원에서 만나는 친구가 있고,

대학생이 되어서 만나는 친구가 있고,

장년이 되어서 회사에서 만나는 친구가 있고,

늙어서 경로당에서 만나는 친구가 있어요.

 

우리 신앙에 적용하면 율법 아래서 만나 교제하는 사람이 있고,

이단에 빠져서 교제하는 사람이 있고,

복음 안에서 만나 교제하는 사람이 있어요.

복음 안에서도 각양의 동무들이 있어요.

 

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짐도 모두가 하나님의 주관하심 속에서 일어나요.

그러니 오늘 죽고 못 살 것 같은 친구도 내일이면 헤어질 수가 있어요.

그러니 만나고 헤어짐을 그리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 동무가 아니라도 다른 길동무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대로 우리의 인생길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말씀을 좇아가면 또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 인생의 총감독이신 하나님이 알아서 미리미리 준비해 두셨어요.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각자 주어진 여정을 따라 살도록 감독이신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서 저는 가수 노사연이 부른 ‘만남’이라는 노래를 참 좋아합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요!’

 

여기서 바램이란 운명이란 말입니다.

정해져 있었던 것이란 뜻입니다.

맞아요.

우리 만남은 이미 창세전에 정해져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 바램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도원의 품꾼들을 부르는 것처럼 각 사람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때가 다 달라요.

예수를 믿는 때가 달라요.

 

어떤 사람은 모태로부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학생 시절에 믿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청년 시절에 믿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장년 시절에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인생이 다하는 말년에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 안 믿는 사람과 결혼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 노릇을 하고,

어떤 사람은 집사 노릇을 하고,

어떤 사람은 장로나 권사 노릇을 합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께서 토기를 만들듯이 각 사람에게 맞도록 배역을 맡긴 것입니다.

그러니 남의 배역을 부러워하거나 탐낼 필요가 없는 겁니다.

우린 다만 하나님께서 세상에 던져 놓은 약속을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도구란 독자적인 인생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걸 성경에선 종이라고 해요.

종은 자기 인생이 없어요.

주인의 인생에 사용되어지는 도구일 뿐이에요.

 

거지 나사로는 일평생 거지 역할을 하다가 천국으로 갔고,

부자는 일평생 세상 일락에 빠져서 호의호식하다가 지옥으로 갔어요.

부자가 지옥 가고 싶어서 지옥에 간 것이 아니고,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간 것도 자기가 천국에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이처럼 하나님이 각자 정한 배역에 따라 연기하다가, 각자 정해진 곳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진다면 우리의 인생살이가 가벼워요.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이 우리가 아등바등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맡겨 준 배역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발 이 사실이 믿어지시길 기도합니다.

 

모든 사람은 정해진 운명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인생을 바꿀 수가 없어요.

야곱이 에서가 될 수가 없고, 에서가 야곱의 운명으로 바뀌지도 않아요.

야곱이나 에서는 어미의 태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정해진 운명을 받고 나왔어요.

그 운명대로 살다가 정해진 곳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이건 우리가 변경시킬 수도 없고 팔자를 바꿀 수도 없어요.

 

좀 쇼킹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왜 이런 말 하는지 잘 새겨서 들으세요.

 

그러니 구원받고자 애쓰지도 마시고,

지옥 갈 것이라고 두려워도 하지 마세요.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애쓴다고 해결될 일들이 아니에요.

구원받기로 작정 된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구원을 받게 되어 있어요.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의 비유나 드라크마 비유에서 이를 잘 말해주고 있어요.

잃어버려진 드라크마나 잃어 버린 양을 주인이 찾아내요.

잃어버려진 자들은 그냥 잃어버려진 대로 살고 있으면 주인이 알아서 찾아내세요.

 

구원이란 버려졌다가 찾아짐을 당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구원 속에는 우리의 공로는 털끝만치도 없고 모두가 주인의 공로만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자 하지도 말고,

복음을 알고자 애쓰지도 마세요.

구원받기로 작정이 된 성도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복음이 깨달아지게 해 주세요.

 

예수를 믿거나 복음을 아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믿어지고 알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노력으로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복음은 배워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를 믿고자 하지 말고, 복음을 알려고 애쓰고 노력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믿음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이에요.

잘 새겨서 들으세요.

 

이게 믿어지는 사람은 아멘이 되는데

안 믿어지는 사람은 “그럼 인간은 로봇이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단 말이냐?

인간에게도 자유의지가 있지 않느냐?”라고 따져요.

 

이렇게 묻고 따진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나는 뭐냐?”라고 자꾸만 자기를 하나님의 일하심에 끼워 넣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냥 소모품으로 살면 되는데, 죄가 소모품으로 살고 싶지 않고 왕으로 살게 하니까 자기 주체를 자꾸만 챙기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노력해서 예수가 믿어지고, 복음을 배워서 알아진 것이면 꼭 그 아는 것으로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남들 앞에 잘난 척하게 되어 있어요.

 

난 복음을 아는데, 넌 왜 모르느냐?

남들과 차별성을 두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을 무시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마귀적인 행사머리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어디에 사도들이 그렇게 행동하였나요.

오순절 성령 받은 성도들이 어디에 그런 행사머리를 하였나요.

모두가 남을 섬기고 자신을 낮추었어요.

 

우리의 모습을 이들과 비교해 보세요.

베뢰아 교인들과 같이 성경을 상고하세요.

복음 전한다고 해서 다 구원받은 자가 아니에요.

버리는 카드로 사용하고 있는 자들이 수두룩해요.

 

마태복음 7장을 보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주 앞에 나와서 “주여!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도 행하고 복음도 전하고 목사 노릇 했습니다”라고 자랑하다가 주님이 “난 널 모르다”라고 하잖아요.

그게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어요.

이걸 알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말씀 앞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투영시켜 보아야 해요.

그래서 바울은 너희 안에 믿음이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한 것입니다.

어떤 믿음이냐 확인해 보라는 겁니다.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여셔서 복음을 듣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천국 백성으로 택함을 입었다면 아버지께서 예수 앞으로 이끌어서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안 것도 주께서 알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은 한 알갱이라도 버리지 않고 다 찾아내십니다.

천국 가기로 작정이 되었으면 반드시 예수가 믿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예수 믿고자 노력도 하지 마시고 애쓰지도 말라고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애쓴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택한 사람은 이단에 빠져 있어도 하나님이 반드시 끄집어낼 것이고,

아닌 사람은 아무리 복음이 전해지는 교회 안에 있어도 안 믿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어느 교회가 복음 없다고 판단하지도 마시고,

어느 교회는 복음 전한다고 자랑할 필요도 없어요.

 

하나님이 알아서 건질 자는 건지고 버릴 자는 버립니다.

살 자는 침몰하는 타이타닉 속에서도 살아날 것이고,

죽을 자는 구명보트 타고도 심장마비로 죽어요.

침몰하는 타이타닉을 타고 있느냐 구명보트를 타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아요.

다시 말해서 내가 어느 교회에 있느냐가 중요치 않단 말입니다.

 

우린 우리가 원해서 우리의 노력으로 예수를 믿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믿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믿지 못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믿어지면 믿어지는 대로 사시고, 안 믿어지면 안 믿어지는 대로 살면 됩니다.

 

내가 야곱처럼 천국 가기로 작정이 되었으면 기어이 장자권의 축복을 받도록 역사를 하실 것이고,

내가 에서처럼 지옥 가기로 작정이 되었으면 준 장자권도 팔아먹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야곱이 잘나서도 아니고 에서가 못나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을 하셨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 마음이지 우리 마음이 아닙니다.

누가 누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그 사람의 마음이듯이,

하나님도 누굴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도 하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기로 작정 된 사람일 것 같으면 야곱처럼 인생에 개입하셔서 기어코 천국으로 인도 하실 것이고, 하나님이 미워하기로 작정 된 사람일 것 같으면 에서처럼 살게 하다가 지옥으로 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본인이 복음을 전해도 그 복음과 상관없는 삶을 살다가 지옥 갈 수가 있어요.

복음 전한 것이 천국 가는 기준이 아니에요.

가룟 유다도 복음 전했어요.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를 들어서도 복음을 증거케 할 수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을 다스리고 있음을 알아요.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는 사람은 이걸 알아요.

‘야~ 내 인생 내 것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알아요.

본인이 안다니까요.

그러니 조급함이 없는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개의치 않아요.

자기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안 살아진다는 것을 아는 자는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감사하면서 살아가요.

 

제가 은혜를 받고 보니 우리가 애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린 쓸데없는 싸움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내가 복음이 믿어진 것도 내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이니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누가 복음을 모른다고 해서 타박하거나 비웃고 싸울 일도 아니에요.

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주인으로서 알아서 간섭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린 그냥 각자 믿어지는 대로 깨달아지는 대로 감사하면서 살면 됩니다.

그럼에도 우린 어리석게도 감사하면서 살지 못하고 남의 신앙을 이래라저래라 감 놔라 대추 놔라 간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간섭하시는 감독이신 하나님이 두 눈 부릅뜨고 살아서 계시는데 우리가 감독 노릇 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교만하고 경거망동한 짓들입니까!

 

복음을 알게 해 주었으면 “감사합니다!” 하고 복음에 빚진 자로서 살면 되는데,

그건 안 하고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복음을 깨달은 것처럼 남들 위에서 선생 노릇을 하고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고 있습니다.

 

우린 심판자가 아니고 심판받을 자들입니다.

제발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너나 잘하세요.

남 판단하지 말고 너나 하나님 앞에 판단 받을 자세로 사세요.

제발!

 

하나님이 천국으로 보내기로 작정을 하셨으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천국으로 가게 되어 있고, 지옥으로 보내기로 작정을 했으면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 가기로 작정이 되었으면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의 운명으로 이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고, 지옥 가기로 작정이 되었으면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의 운명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속된 말로 천국 갈 사람은 예수님처럼 핍박받고 조롱당하고 버림당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고,

지옥 갈 사람은 ‘복음! 복음!’하고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도 맨 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마귀 짓하고 살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알라고 하셨어요.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느냐가 중요치 않고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해요.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어요.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잘난 척 나대는 인간들에게 내가 가면 너희들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고, 너희들의 능력 즉 너희들의 삶을 가지고 판단하겠다고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해도 예수님의 정신으로서의 삶이 나타나지 않으면 헛것이에요.

옳은 믿음엔 반드시 옳은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 속에 예수가 있으면 예수의 삶이 나오고,

그 속에 마귀가 있으면 마귀의 삶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용서받음이 있는 자에게서는 용서가 나와요.

하지만 지식으로 아는 자에겐 용서가 관념이기 때문에 법이 나와요.

마치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처럼 법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분명히 하나님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탕감을 관념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 주지 못하고 옥에 가두어 버리는 법을 집행하고 만 것입니다.

이건 왕의 탕감을 관념으로 지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용서가 나오지 않고 법이 나오는 겁니다.

 

십자가 도를 관념으로 알면 남에게 법으로 대하게 되어 있어요.

자신이 용서받음이 없기 때문에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도를 관념으로 알고 있는 자들에게선 용서가 나오지 않고 정죄하는 법이 나와요.

십자가로 용서받은 것이 실제인 사람은 삶 속에서 용서받은 자로서의 긍휼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예요.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리고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듯이 지극히 자연스러워요.

 

십자가를 말하면서 용서와 긍휼이 나오지 않는 십자가는 관념이고 지식이에요.

죽은 십자가에요.

삶으로 토해내는 것이 마귀이면 천사의 말을 해도 마귀인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어요.

지식이 아니고 삶이에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셨어요.

피는 죄사함을 위하여 흘리는 것이고,

살은 죄사함 받은 자들이 먹어야 할 양식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요.

예수의 피를 마신 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함이 없어요.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살을 먹어야 해요.

피로 용서받은 자로서의 삶은 예수님의 살을 먹음으로써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살은 죄사함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새 사람이 먹을 양식이에요.

양식을 먹어야 예수의 삶을 살 수가 있어요.

 

예수님은 육신으로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죄사함을 주셨어요.

이제 그 죄사함 받은 성도에게 성령이 예수의 생명으로 성도들 안에 오십니다.

성령이 곧 예수님의 살과 같이 우리 안에서 양식으로 우리 삶을 간섭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하나같이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도록 이끌림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살을 양식으로 먹은 자들의 삶을 일컬어 야고보서에선 믿음과 행함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살은 행함이에요.

그러니 믿음을 받은 자는 반드시 행함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믿음과 행함은 분리할 수가 없어요.

신앙과 삶은 분리되지 않아요.

십자가를 아는 것과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살아가는 삶은 분리가 되지 않아요.

 

예수님의 피를 마신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참아주고 용서하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들이 일어나요.

이런 삶이 없으면 가짜에요.

그 피는 지식이고 죽은 피에요.

그래서 야고보서에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은 귀신의 믿음이 있고, 죽은 믿음이 있다고 했어요.

그럼 어떤 것이 죽은 믿음이고 어떤 것이 귀신의 믿음인가요?

믿음을 복음이라고 하고 십자가라고 해 봅시다.

그럼 어느 것이 죽은 복음이고 귀신의 복음입니까?

어느 것이 죽은 십자가이고 어느 것이 귀신의 십자가입니까?

그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했으니까,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죽은 복음이고 귀신의 복음이고 죽은 십자가이고 귀신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죽은 복음과 죽은 십자가는 절대로 자기 삶에 변화를 몰고 오지 못해요.

복음을 양식으로 먹은 것이 아니고 지식으로 습득한 것이기 때문에 삶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은 십자가이기 때문에 용서받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 내지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가 나오지 않고 정죄와 심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일컬어 유다서에선 물 없는 구름이라고 하고 열매 없는 가을 나무라고 했어요.

나무에 열매가 없다는 것과 구름에 물이 없다는 것은 거짓이고 사기란 말입니다.

나무나 구름을 형식이라고 한다면, 열매나 물은 내용이에요.

나무나 구름을 복음 아는 것이라고 한다면, 열매나 물은 복음에 합당한 삶이에요.

나무나 구름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열매나 물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행함이에요.

 

가을이 되면 나무에 열매가 맺혀야 정상이고 구름 속에 물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에요.

그럼에도 유다는 거짓 선지자들이나 거짓 신자들을 열매 없는 가을나무라고 하고 물 없는 구름이라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것은 귀신의 믿음이고 죽임 믿음이고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교회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도 이런 자들이 있었어요.

입으로만 ‘예수! 예수!’ 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말로만 ‘십자가! 십자가!’ 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그러니 사도들이 이런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봐라! 이런 사람들은 귀신의 믿음이고 죽은 믿음이다”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만 주시지 않고 살도 주셨어요.

죄사함만 주시지 않고 죄사함 받은 자로서 살아갈 삶도 주셨어요.

유월절에도 피는 문에 바르고 양고기는 구워 먹게 하셨어요.

피는 죽음을 넘어가게 하였고, 고기는 죽음을 넘긴 성도가 먹고 살아가야 할 양식인 겁니다.

 

피와 고기를 믿음과 행함으로 말하면 피는 믿음을 위한 것이고, 고기는 행함을 위한 것입니다.

믿음만 주시지 않고 행함도 주셨어요.

피와 살은 분리되지 않아요.

믿음과 행함은 하나에요.

진짜 예수님의 피를 마신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건 가짜에요.

가짜 피를 마시고 가짜 살을 먹은 거예요.

지식으로 알고 관념으로 아는 십자가에요.

그러니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사람을 입은 삶이 나타나지 않고 옛 사람의 삶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삶이란 어떤 행위를 국한시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죄에 대하여 아파하고 용서받은 자로서의 삶을 말해요.

내가 지금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가고 있는지의 지향성을 말해요.

나는 어떤 사람으로 부르심을 입었는지의 가치성을 말해요.

그러니 어떤 자로서 무엇으로 부르심을 입었는지 아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빼내심을 입고 의와 거룩으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그러므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지향하는 삶이 있고,

새 사람의 지향하는 삶이 따로 있어요.

옛 사람이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는 것이었다면,

새 사람으로 육신의 정욕을 죽이는 식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도는 늘 자기 부인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죽임당하는 모습으로 살아지게 된단 말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문의했어요.

자기 교회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염소는 지옥에 가고 양은 천국에 가니 염소가 되지 말고 양이 되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무식한 말입니까?

 

염소와 양은 종자가 달라요.

염소는 원래부터 염소이고, 양은 원래부터 양이에요.

염소가 열심히 성화해서 양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에요.

염소는 아무리 열심히 성화해도 염소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반면에 양도 마찬가지예요.

양이 개판이라고 해서 염소가 되지 않아요.

양은 무슨 짓을 해도 양이에요.

양이 나쁜 짓을 했다고 해서 염소가 되지 않아요.

양은 양이고 염소는 염소예요.

 

이걸 야곱과 에서로 비유합니다.

야곱은 야곱으로 태어나 야곱의 인생으로 살다가 야곱이 가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에서로 태어나고 에서로 살다가 에서가 가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각자 자기 본성대로 성깔대로 살다가 정해진 곳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양과 염소가 성질이 다르듯이 야곱과 에서도 성질이 달라요.

양과 염소는 어렸을 적에는 잘 몰라요.

그러나 커 가면서 각각의 성질을 나타내게 되어 있어요.

한 목자의 보살핌 속에 살아가면서도 각자의 본성을 드러내면서 커 가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도 마찬가지예요.

한 부모 아래 태어나서 자라면서 야곱은 야곱으로서의 본성으로 살아가고,

에서는 에서로서의 본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예수님의 운명으로, 에서는 마귀의 운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야곱은 예수님처럼 미움당하며 살고, 에서는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을 핍박하게 됩니다.

 

이걸 이 시대 교회 안에 성도에게 적용하면 한 교회 안에도 양과 염소가 있어요.

양은 양으로서의 본성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염소는 염소로서의 신앙생활을 해요.

동일한 말씀을 들어도 각각 나타나는 반응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꼭 자기 행사머리를 해요.

마치 동일한 물을 마셔도 양이 물을 먹으면 젖을 내지만,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을 내는 것과 같아요.

 

복음을 알아갈수록 자기 성질이 분명하게 나타나요.

어떤 사람은 복음에 자신이 흡수당해서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복음과 겉돌아서 마귀 짓을 하면서 살아가요.

어떤 사람은 복음에 양념이 배듯이 자기 삶 속에서 배어 나오는데,

어떤 사람은 복음이라는 양념이 배이지 않아서 삶 속에서 나타나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들은 말씀으로 양처럼 젖을 내지만 어떤 사람은 뱀처럼 독을 품어 내요.

양은 남에게 유익을 주고 섬기고 베풀고 하는데 뱀은 남을 물고 죽이는 일을 해요.

 

복음을 지식으로는 엄청 많이 아는 것 같은데 그 앎이 생명을 살리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고 죽이는 식으로 나타나요.

남을 무시하고 정죄하고 판단하면서 피해를 주는 식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교회나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로 살아요.

이건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하여도 안 고쳐져요.

하지 말라고 하면 성질을 내고 물어요.

그 본성이 뱀이기 때문이에요.

 

뱀이고 염소이기 때문에 사람에게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말한 겁니다.

지식으로 아는 사람은 교만하고, 믿음으로 받은 사람은 덕을 세우고 사랑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이건 이렇게 하라고 시켜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자기 안에 예수의 유전자가 있으면 덕으로 토해내고,

뱀의 유전자가 있으면 남에게 아픔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세요.

이는 양들을 통하여서 이리를 들추어내고자 함입니다.

이리들이 양을 죽여주어야 해요.

그래야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여주어야만 하듯이 지금도 염소들이 양을 죽어주어야 해요.

그래야 창세전 언약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이고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신자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집에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듯이 말이에요.

육에 속한 이스마엘은 강한 자이고 약속으로 난 이삭은 약해요.

이스마엘은 염소이고 이삭은 양이에요.

육으로 난 자가 영으로 난 자를 죽여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교회 안에서 계속하여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어느 조직이든 교회이든 반드시 이런 구조로 만들어 놓았어요.

 

신앙의 싸움은 형제 싸움이에요.

육에 속한 자가 영에 속한 자를 핍박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항상 어느 조직이나 집단이나 교회이든 육에 속한 자들이 주류로 자리 잡아서 그 조직의 법을 가지고 힘없는 자들을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조직에 해가 되는 자는 다 쫓아내는 것입니다.

이걸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 열심이라고 하는 집단에서 항상 발생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이 바로 교회 안에서 죽임당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러니 교회 안에 양들은 이런 염소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고 시험에 들고 그래요.

동일한 말씀을 들어도 나타내는 모습은 극명하게 달라요.

어떤 사람은 그 말씀에 자신을 죽임당하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가지고 자신은 죽지 않고 남을 죽이는 모습으로 살아가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셨다고 한다면 예수에게 속한 성도는 그 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되는데 뱀에게 속한 사람은 예수의 생명과 반하는 마귀적인 생명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마귀적인 생명을 토해지는 그 현장엔 반드시 정죄와 심판이 난무해요.

예수님이 이 정죄에 걸려서 죽으셨어요.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배치해 놓으신 구조에요.

어떤 이는 양으로 배치되어 있고,

어떤 이는 염소로 배치되어 있어요.

각자 맡겨진 운명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어요.

이처럼 우리 인생은 각자 살아갈 길이 있기 때문에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기 때문에 우리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에 제 뜻대로 인생을 살라고 하셨으면 목사 안 합니다.

재벌이 되든가 권력가가 되었어요.

설령 목사가 되었다고 하여도 이런 목사 노릇 안 합니다.

이게 뭡니까?

만날 욕이나 먹고!

 

하나님이 저의 목사 인생에 개입하지 않았으면 세계 제일의 교회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저도 누구 못지않게 야망이 크고 욕심이 있어요.

그런데 예레미야의 말대로 재수 없게 하나님이 내 목사 인생에 개입을 하셔서 잘 되는 교회도 다 훼방을 놓고 요 모양 요 꼴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야곱처럼 더럽게 재수 없이 얻어걸려서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투덜거리지 아니할 수가 없는 인생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왜 내 인생에 태클을 거느냐고 앙앙거리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내가 앙앙거릴 때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시는 줄 아세요.

“야! 정낙원이 너에게 딱 맞는 역할이다”

“이건 너 아니면 아무도 못 하는 역할이다”라고 염장을 질러요.

그럼 저는 “알았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을 던지게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과 얍복강에서 씨름하던 야곱처럼 하나님을 이기려고 샅바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얻어터지면서 말이에요.

나오느니 한숨이고,

뱉어내느니 “빨리 죽여주세요!”에요.

 

그래서 십자가의 길이 멍에인 것입니다.

우리 목에 짊어진 멍에는 우리가 벗어 낼 수가 없습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두 마리 암소에게 법궤가 짊어졌듯이 우리에게도 언약이라는 법궤가 짊어져 있습니다.

그럼 그 언약이 우리 인생을 소고삐 끌듯이 끌고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코뚜레한 소는 도망가면 갈수록 아픔만 더 가중되어요.

그러니 그냥 순종하고 사는 게 덜 아픔 당하는 것입니다.

말은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순종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우리 인생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린 눈만 뜨면 자기 인생을 개척하려고 발버둥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시나리오대로 살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린 하나님 손길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우린 하나님 앞에 굴복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 보면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저 세상으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보이는 세상은 현재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땅이에요.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상은 하늘나라에요.

그러니 이 세상은 하늘나라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하늘나라를 본떠서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은 가짜이고, 저세상이 진짜예요.

이 세상은 복사본이란 말입니다.

진품은 하늘에 있어요.

 

바울이 삼층천에서 이걸 보았어요.

삼층천에 있는 바울은 진짜이고, 세상에 있는 바울은 가짜에요.

바울은 이미 완성된 자로서 삼층천에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저 아래 세상에 보니 가짜 바울이 생고생하면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주님, 삼층천에 있는 바울은 누구이고, 저 아래 세상에 있는 바울은 누구입니까?

응, 삼층천에 있는 바울은 진짜이고 저 아래 세상에 있는 것은 가짜야!

가짜가 죽으면 진짜 몸을 줄게 그러시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얘들아!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너희 진짜 장막이 너희 가짜에게 덧입혀져서 부활하니 염려하지 말아라”라고 위로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알게 된 바울은 세상에 내려와서 “주님, 언제 날 죽여주실 겁니까?”라고 데모하였어요.

“언제 나를 육신의 장막에서 제대시켜 주실 건데요?”라고 청을 하였다니까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장에서 이 세상의 만물은 장차 다 철거가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아파트 모델 하우스처럼 용도가 다 끝나면 철거가 될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에게 이 세상은 가짜이니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코 박고 살지 말고 떠날 생각으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말뚝을 박고 살고자 하잖아요.

틈만 나면 나오미처럼 이방나라에 가서 코 박고 살고자 하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이 자꾸만 우리가 세상에 박아 놓은 말뚝을 빼내는 일들을 벌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말뚝을 박고,

하나님은 눈만 뜨면 말뚝을 빼내고!

이 싸움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고달픈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본성과 자꾸만 반대되는 곳으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린 끌려가면서 곱게 가지 않고 원망하고 반항하면서 가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저주의 땅에 누가 내려갑니까?

자칭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내려갔어요.

성경에는 내려갔다는 말을 종종 사용하는데 이는 타락을 의미할 때 사용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생각나지요.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갑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에요.

그럼 엠마오는 타락한 곳이란 말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요.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엘리멜렉 가정도 먹고 살려고 모압으로 내려갔다가 몽땅 망하고 다시 그 자리로 올라갑니다.

내려갈 때는 신랑도 있고 아들도 있었는데 올라올 때는 신랑도 죽고 아들도 죽고 과부 신세가 되어서 올라옵니다.

차라리 안 내려간 것만도 못하게 되었어요.

 

꼭 탕자와 같아요.

우린 세상에서 성공할 수가 없어요.

세상에서 얻는 것이 아니고 다 빼앗겨요.

 

세상은 힘의 나라에요.

힘 있는 자가 살아가는 곳이에요.

남자란 힘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가장을 일컬어 집안의 대들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나오미 집안의 남자가 죽었어요.

가장인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었어요.

세 남자가 죽었다는 것은 집안이 완전히 망했다는 말입니다.

집의 기둥이 무너졌다는 말입니다.

남자가 죽었다는 것은 힘을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뜻이에요.

이건 저주 중의 저주에요.

 

생각해 보세요.

모압은 저주받은 곳이에요.

이 세상은 저주받은 곳입니다.

저주받은 곳에서 아무리 성공하여도 저주에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걸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룻기를 통하여서 교훈하고 있는 겁니다.

“얘들아~ 너희들 날 떠나서는 죽는다!”

“집안이 무너진다!”

“결국, 빈털털이로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단다!”

“그러니 내 말을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언제쯤 우린 이 말씀이 귀에 들어올까요?

아마도 나오미처럼 다 잃어버리고 난 후에나 들려질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나오미니까요.

망하고 지옥 같은 환경 속에서 “주여!” 하고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린 빈손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찾아가지 않는 악당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을 안들으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탕자처럼 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의지할 것이 없는 빈손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말대로 아골 골짜기에 집어 놓고선 하늘을 바라보는 소망의 문으로 삼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지금 탕자가 되어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자식이 안 죽었으면 안 돌아가요.

그러니 남편이 죽고 아들이 죽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이런 복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백성들에게 주세요.

참 이상한 복이지요.

 

그런데 이 복을 언제쯤 알게 되는가 하면 아버지 집에 돌아오고 나면 알게 되어요.

‘아~! 모압에서 망한 것이 복이구나!’

물론 그땐 병들고 늙고 재산 다 털어먹고 개털 모자 쓰고 있을 때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알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있을 때 나오지 않아요.

항상 없을 때 나와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내가 약할 때가 가장 강함이라고!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 있을 때라고 했잖아요.

그러므로 나오미의 망함은 곧 사는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나오미처럼 간섭하실 것입니다.

결국, 룻기는 우리도 나오미처럼 탕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고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오미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을 룻기를 통해서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나오미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기대하면서 룻기를 살펴봅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린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바로 엘리멜렉이고 나오미입니다. 내 몸뚱이 하나 살자고 하나님을 떠난 탕자들입니다. 이런 탕자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기어코 언약의 자리로 축복의 자리로 끌어올리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룻기를 통해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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