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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16강. 셈의 여호와를 찬양하라 (창 9:18-29)

by coroa 2020. 11. 21.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6강. 셈의 여호와를 찬양하라 (창 9:18-29).-

-.정낙원 목사

 

 

 

창조의 세계에 계신 하나님은 피조 세계에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피조물의 인식 체계로는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알 수가 있는냐?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는 사건화 되어서 나타나십니다.

어떤 일을 통해서 계시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건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게 됩니다.

 

그 일하심도 믿음을 받아야지만 알 수가 있어요.

성도들은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살아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믿음으로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리는 방법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알리십니다.

 

우리가 통칭 기독교 신앙을 계시 종교라고 하잖아요.

계시라는 것은 우리가 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열어 주십니다.

누구에게?

자기 백성들에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주어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잖아요.

이 때 예수님이 뭐라 하던가요?

이를 알게 한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어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하고, 선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공부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원에 들어가서 사십 일 금식하고 성경을 달달 외운다고 하나님이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 주어야 해요.

 

물론 기도하는 것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기도 해야지요.

그러나 그것을 전제로 해서 하나님이 알아지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똑똑하고 열심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많이 알겠지요.

잘나고 열심이 특심한 사람이 하나님을 많이 알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 벌리시는 일들은 전부 은혜에 속한 것으로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그 은혜라는 것은 우리 쪽의 노력의 결과로 따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공로로 인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이 우리에겐 잉여 품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공짜로 주어지기 때문에 구원은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애쓰고 노력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 오해를 해서 예정론을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원이 공짜로 주어지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것이 없겠네!

교회 다닐 필요도 없겠네!

가만있어도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면서!

이렇게 비아냥 거려요.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정을 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가시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계획한 일들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데

우리는 거기에 도구로 사용이 되어요.

 

도구로 사용되다 보니까 우리의 원함과는 상관이 없이 자꾸만 간섭을 하시는 겁니다.

난 가만히 있고 싶은 대도 하나님께서 가만있게 두지를 않는단 말이지요.

나무는 가만있고 싶은데 자꾸만 바람이 살랑거린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무가 춤을 추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이 얘기는 그냥 심심해서 놀러 오신 게 아닙니다.

우리 몸을 예수님께서 이루시기 위한 일의 어떤 도구로 쓰기 위해서 오셨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의 일을 하세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어떤 사건 속으로 자꾸만 밀려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연못에 가면 부표물들이 떠 내려 가지요.

예를 들어서 꽃이라고 합시다.

꽃이 가만있던가요?

아니지요.

자꾸만 움직이지요.

 

그건 꽃이 움직이는게 아니에요.

물이 분자 활동을 해서 움직이는 거에요.

이걸 브라운 운동이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물이 꽃을 움직이는 거에요.

그러나 겉으로 보일 때는 꽃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여요.

우리는 꽃이 움직인다 라고 하지 물이 움직이게 한다 그러지 않아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래요.

난 가만이 있고 싶은데 우리 안에 예수님이 물이 분자 운동을 일으켜서 꽃을 움직이게 하듯이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생명의 운동을 해서 우리 몸을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행하는 것은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 되는 겁니다.

 

이걸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합니다.

이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자꾸만 놓쳐요.

오해해요.

그래서 교회에 빠지지 말라고 하면 그거 행위 아닌가요? 라고 하면서 토를 다는 겁니다.

이 웬수들이,,

 

제가 말씀드립니다.

구원을 위해서는 우리가 할 게 없어요.

그 구원을 이루어 가는 부분에서는 우리는 도구로 쓰임을 받습니다.

 

우리를 왜? 구원을 했나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몸을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사용하는 겁니다.

우리 몸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사건들이 몸을 통해서 표현이 되어져요.

 

예수 믿고 나면 땡!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

그런 거 없어요.

그건 복음을 오해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 사건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해 가시는가 보여 주었어요.

노아의 식구가 홍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요.

모두 저주받아 물속에 잠겨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방법인 방주를 통해서 그들을 살려 냈습니다.

 

하나님은 방주 속에서 나온 노아의 가족에게 사명을 줍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하지요.

이건 창세기 1장에서 나온 말이에요.

그럼 노아의 구원이 창세기 1장의 창조와 같다는 뜻입니다.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누구를 쓸어 버렸나요?

육체대로 사는 자를 쓸어 버렸지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는 것이 노아 홍수를 유발케 한 원인이 됐잖아요?

그 이야기는 자기 백성들은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인데

하늘에 속한 자들이 자꾸 땅에 정착하려 하니까 하나님께서 땅을 쓸어버리신 것입니다.

 

그 속에서 노아 가족을 빼냈습니다.

그러면 방주 속에서 살아난 이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게 하겠습니까?

노아 시대에 살았던 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하겠지요.

그러기 위해서 빼내신 겁니다.

 

그러면 저주 속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제부터는 과거에 저주받았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 되겠지요?

과거에는 땅만 바라보고 살았다면 이제는 땅 보지 말고 하늘보고 살으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에게 새로운 사명을 준 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이 세계는

하나님의 은혜성만 오롯이 남는 그 세계로 만들어 가고 싶어서 입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 무엇이었습니까?

 

제사를 지낸 일입니다.

정결한 짐승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은 그 정결한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부정한 자가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그러면 홍수 이후의 이 역사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 하면

정결한 분의 죽음으로 인해서 부정한 자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수 후의 세상에 이걸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방주에서 살아난 자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자식들 많이 낳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희생 제사의 의미를 아는 자들이 편만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걸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후손들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마땅히 다 저주받아야 하는데 정결한 분의 희생을 통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전하는 거예요.

 

그러면 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자손들의 사고에는 무슨 사고가 들어 있어야 할까요?

우리가 사는 것이 우리 힘으로 사는 게 아니라 우리 대신 흠 없는 분이 죽어 주심으로 인해서

사는구나를 아는 것이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보고 살려주시는 게 아니고 흠 없는 분의 죽으심을 근거로 해서

우리를 살려 주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살고 있는 그들은 빚진 자로 살게 되겠지요.

 

누구에게 빚을 진 자인가요?

자기를 위해서 피를 흘려주신 정결한 제물 되신 분에게 빚을 진 겁니다.

신약식으로 흠 없는 제물을 의인화해서 보면 그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입니다.

 

이 역사 자체가 예수를 위하여 만들어 졌잖아요.

그럼 역사가 존재하는 것은 예수님 때문이지요.

이러면 역사 자체가 예수님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노아 식구의 구원이야기로 해 봅시다.

방주에서 살아난 노아의 자식들은 방주 때문에 살아난 것만 자랑하는 게 아니라

항상 내가 누구 때문에 살고 있는가 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지금 식으로 이야기하면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이 나로 살게 하신 분이 있단 말이지요.

왜 나를 살게 합니까?

 

저와 여러분도 노의 가족들과 똑같이 살고 있어요.

죄인이 살고 있는 것은 의로우신 그 예수님께서 피흘려 주셨기 때문이에요.

그럼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라는 것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창세전 언약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한다고 합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겠지요.

그러나 그 사람들이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그건 개의치 마세요.

어차피 안 받아 들이니까요.

 

다만 우리는 이런 일에 증거자로 세움 받은 것입니다.

쉬운 얘기로 제가 우리 훈기에게 선물을 하나 줬다고 합시다.

훈기는 제가 준 선물을 자랑하면 됩니다.

못 받은 사람은 못 받았으니 자랑 할게 없지만

받은 사람은 자랑해야지요.

나 이런 것 받았다 라고,,,

 

우리 구원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구원을 줬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구원을 자랑하면 됩니다.

그것을 찬미라고 했습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받지 못한 사람은 당연히 화가 나겠지요.

가인처럼 말이에요.

그럼 하나님이 그러십니다.

너 왜 화를 내는데?

그럼 그 사람이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냐고 반문하겠지요?

 

그 때 하나님이 뭐라 그러실까요?

내 맘이지!

내가 창조주고 내가 맘대로 하는데 네가 왜 불만이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화를 내는 그 자는 어디로 간다?

지옥에 가지요.

거기서도 순순히 있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의하지 않고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하시는 일은 다 옳은 것이라고 예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를 통해서 이 세상을 다 쓸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여셨습니다.

이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집니다.

의로운 분의 희생을 통해서 이 세상이 유지되는 것으로 사는 방식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도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무지개로 언약을 세우고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왜 다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합니까?

이는 니들이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들은 처음서부터 나쁜 놈들인데 내가 상대해서 뭐하겠냐…

내가 저 놈들 상대하지 않고 의로운 제물의 희생의 피를 보고서 용서하는 방식으로 해나가겠다고

천명하신 것입니다.

 

쉬운 말로 홍수 이전에는 인간들을 상대 했는데,

홍수 이후에는 인간들하고는 상대하지 않고 흠 없는 제물하고만 상대하겠다는 것입니다.

흠 없는 제물의 희생을 아는 자는 살려두고 모르는 자는 저주하겠다는 뜻이에요.

 

지금 역사가 유지되는 이 자체도 하나님은 노아 언약을 근거로 해서 유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당신의 아들의 피 뿌림을 통해서 유지시키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모르고 있으니까 그들은 여전히 죄인으로 남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는 죄인이고,

저들은 모르는 죄인입니다.

그 차이입니다.

 

이제 노아 이후의 자손들에게는 새로운 방식의 복과 저주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복의 자손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은혜성을 모르는 자는 저주의 자식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두 부류의 인간들이 나타납니다.

 

이건 마치 방주 속에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이 함께 있는 것과 같아요.

노아의 후손 속에서도 정한 자가 있고 부정한 자가 있어요.

희생 제물의 의미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있어요.

 

아담 안에서 가인과 아벨이 나왔듯이,

아브라함 안에서 이삭과 이스마엘이 나왔듯이,

노아 속에서도 하나님께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가 나온단 말입니다.

 

자 보세요.

성경에 나온 모든 사건은 누가 벌이신 사건인가요?

하나님이 벌이신 사건이지요?

하나님이 무엇을 위해서 벌이셨습니까?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벌이셨습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가 있습니다.

홍수 심판 이후에 노아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여셨고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해도

그 속에서도 여전히 창세전 언약이 씨눈으로 있으니까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 있겠지요.

 

그럼 이 둘을 어떻게 갈라내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로 갈라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포도주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노아가 포도주 먹고 술 취해서 발가벗고 잡니다.

노아가 술취해서 발가벗은 것도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이고,

그 아비의 수치를 드러낸 자나 덮어준 자나 이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민족과 알지 못하는 민족으로 갈라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 속에 노아가 투입이 된 것입니다.

 

노아가 투입되니까 포도주를 먹고 하체를 드러내는 일을 합니다.

셋째 아들 함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조롱을 합니다.

반대로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가려주는 일들을 하더란 말이지요.

 

노아가 깨어나서 하체에 이불이 덮여진 것을 보고 자식들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누가 이불을 덮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셈이 대답하기를 함이 아버지가 벗은 것을 보고 조롱을 하길래

우리가 가서 이불을 덮어 드렸습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노아가 셈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셈의 여호와를 찬송을 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인데 26절을 봅시다.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보세요.

노아가 지금 누구를 찬송합니까?

셈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셈으로 하여금 그 수치를 가려준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유추해 보면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준 것은

결국 여호와께서 하신 행위가 되지요?

 

이게 중요한 것인데

신자들이 이 땅에서 살면서 어떤 일들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자는 그 어떤 일들을 할 때 유발시키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 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지금 주일날 교회에 왔어요.

이 자리에 오기까지 여러분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케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이 자리에 온 내가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나를 여기로 오게 하신 그 분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교회에 와 보니까 조 집사님이 먼저 와 계셨습니다.

주일날은 제가 항상 1등으로 오는데 오늘은 제가 1등을 새치기 당한 겁니다.

세상에 별 일이 다 있습니다.

깜짝 놀라서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목사님 밥해 드리려고 왔다는 겁니다.

그 말에 눈물이 왈칵 날 뻔 했습니다.

 

조 집사님의 집이 부산인데 그 먼데서 단숨에 달려오신 것 같습니다.

이 새벽에 그 먼 곳에서 교회로 가장 먼저 오게 한 그 일을 누가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이게 적용을 시키는 게 참 힘든데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어떤 사람이 무슨 봉사를 하거나 충성을 하면 여러분들은 그 분을 칭찬하고 감사하세요.

하지만 봉사를 하고 충성을 한 본인은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우리는 남에게 칭찬 하는 것이 참 인색해요.

잘하는 건 잘한다고 하세요.

그러나 칭찬을 받는 본인은 예 감사합니다 라고 하고서는 마음속으로는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것입니다 라고 하란 말이에요.

 

우리는 꼭 못된 심뽀들이 있어서 다른 사람이 잘하는 것을 칭찬해주는데 인색합니다.

칭찬해 주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 잘한 사람을 꼭 깔아뭉개야 하겠어요?

 

그 무슨 심뽀가 그런 심뽀가 있습니까?

잘했으면 잘했다고 칭찬해 주세요.

그러나 당사자는 내가 칭찬받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건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주의 은혜로 하게 한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하면 돼요.

 

그렇게 됐을 때는 서로가 감사가 되고 윈 윈이 되는 거지요.

멀쩡히 잘하는 사람한테 와서 그러면 안돼,

하나님 영광 가로 채는 거야…라는 이런 말 하지 말란 말이지요.

열심히 일하는 소에 발목 힘줄을 끊지 말란 말입니다.

꼭 일하지 않는 것들이 잘 하는 사람들의 발목 힘줄을 끊어요.

 

교회는 서로를 칭찬해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서신서마다 칭찬하지요.

제가 과거에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바울의 그런 말들을 굉장히 유치하게 봤었습니다.

무슨 아양 떠는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사람을 칭찬하고 그러느냐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은혜를 입고 보니까 이건 유치한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잖아요.

교회 안에서 서로 알아주고 그러라 하잖아요.

그게 좋은 겁니다.

나쁜 게 아니에요.

 

무엇이든지 나쁘게 쓰는 사람이 나쁜 것이지 좋게 쓰는 사람은 뭐든 좋은 겁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감사히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봅시다.

노아가 셈으로 하여금 수치를 가려주게 한 셈의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여호와가 셈을 간섭한 겁니다.

 

반대로 함은 왜 그렇게 안했을까요?

왜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보고 조롱을 했을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함에게는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걸 봐야 해요.

저와 여러분들은 셈 입니까?

함 입니까?

 

대답 잘하세요.

셈 입니까?

함 입니까?

함이지요.

 

우리도 함처럼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자들이잖아요.

누가 은혜를 받을 것 같으면 그것도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러잖아요.

우린 함이라니까요.

그런데 이런 함 같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입히니까 셈의 행동이 나오더란 말입니다.

 

나는 셈이야,

이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린 원래 함 같은 자들인데 이런 자들에게서 셈 같은 행동이 나왔을 때는 그 행동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지금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다고 하는데 원문에 보면 그냥 포도주라 하지 않고

정관사를 하나 붙여 “그 포도주”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전에 마셨던 포도주라는 것입니다.

 

물어 봅시다.

노아 시대를 뭐라 표현합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 시대일 것 같으면 노아가 마신 포도주도 그 전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한

그 포도주란 말이지요.

 

그러면 노아의 홍수가 무엇 때문에 일어났나요?

인간들이 자기의 육신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 때문이잖아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자기 쾌락을 쫓아갔다는 겁니다.

 

노아도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어요.

은혜가 임하자 달라진 겁니다.

방주를 짓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노아가 방주를 짓는 것이 자기 실력입니까?

하나님의 실력입니까?

하나님의 실력이지요.

노아가 홍수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살아날 수 있었던 거잖아요.

 

노아도 그 시대 사람처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랬는데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는 은혜를 입혀서 방주를 짓게 한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은혜를 입지 못했기 때문에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런 겁니다.

 

결국 노아가 그 포도주를 마시고 발가벗었다는 것은 노아 자신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포도주를 먹고 발가벗고 수치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이 이해되세요?

 

비록 방주에서 살아남은 노아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국 옛날 그 짓거리를 하더란 말입니다.

노아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노아의 사건을 신약으로 말씀하셨어요.

종말의 모습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어요.

이는 종말의 모습이 영적으로는 노아의 때와 같다는 뜻입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수치를 드러낸 것과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신약에도 보면 포도주에 취하여 수치를 드러내는 일들이 있어요.

이 포도주가 신약으로 가면 음행의 포도주로 나타납니다.

 

항상 여러분들은 구약의 사건을 가지고 신약의 사건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구약의 사건은 그림자와 모형의 의미라면 신약에서는 실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주를 내어 주시면서 이것은 내 피라 그러시지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내 피라 그럽니다.

새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이게 요한계시록 17장 18장에 가서 보면 음녀가 포도주에 취하여 있어요.

세상에 푹 빠져 있어요.

그런데 그 포도주 앞에 수식어가 하나 붙는데 “음행의 포도주” 라고 합니다.

 

음녀는 타락한 교회를 말해요.

교회의 타락이란? 세상 가치에 취하여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 교회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지고서 음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음행이라는 것은 하늘의 사람이 땅의 가치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게 노아 시대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한 것으로 나타난 거예요.

이걸 지금 식으로 보면 교회가 세상 가치로 빠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세워진 교회가 하늘의 가치로 살아야 하는데

하늘의 가치로 살지 않고 땅의 가치로 살 때 이것이 ‘음행의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뿌려 주신 것은 죄와 사망 가운데서 건져 주신 것이고,

또 하나 세상가치로부터 빼내신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가지고 세상의 쾌락을 좇아가는 것으로 쓰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기복주의 사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 믿고 잘 살고 복 받아야 된다는 교리로 나타났어요.

 

보세요.

하나님이 아담이 범죄하자 그가 살아 갈 땅을 저주하시지요.

이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곳이에요.

이 땅에는 하나님의 복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땅의 복을 주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서 1장 3-4절을 봅시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디의 신령한 복을 준다고 합니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준다고 하지요.

땅에 복이 아니고 하늘에 복이에요.

 

(그림 설명)

 

위가 하늘이고 아래는 땅입니다.

우리는 위에 있다가 아래인 땅으로 보냄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땅에서 살지만 땅 사람이 아니고 하늘의 사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땅의 복이 아닌 하늘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늘의 복을 받은 사람은 비록 땅에서 살아도 자꾸 하늘을 지향하게 되어 있어요.

하늘의 가치관으로 살게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의 비밀들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예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하나 세웠습니다.

 

그럼 그 교회는 어디에 속해 있어야 합니까?

하늘에 속해 있어야 하지요.

그래서 교회를 묵시 공동체라고 하잖아요.

묵시 공동체인 교회에서는 반드시 위의 것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기 백성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

다른 말로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은혜 받고 사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 안에서 증거되는 것은 저와 여러분들이 비록 이 땅에 살면서 죄 아래 가두어져 살고 있지만

이런 죄인들이 살고 있는 바탕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주신 그 피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들이 날마다 찬송되어지고 나와야 하겠지요.

 

그런데 묵시 공동체로 세워놓은 이 교회 안에 음해의 포도주가 들어와 있습니다.

이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면 신자들의 가치관이 땅의 가치관으로 변해 버립니다.

하늘의 가치로 살아야 할 사람이 땅의 가치로 살게 됩니다.

그 땅의 가치로 사는 것이 물질 만능주의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세상과 교회의 경계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마치 에스겔서 47장의 성전 문지방에서 나오는 물이 온 세상으로 흘러가는데

거기에 보면 소성되지 못한 땅인 진펄과 개펄과 같이 되고 말았어요.

 

진펄과 개펄을 쉬운 말로 설명하면 강물과 바닷물이 합해지는 장소입니다.

두 물이 섞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항상 성경에서 타락을 이야기할 때는 두 물이 섞이는 것으로 말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뭐였습니까?

물이 합해져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갈라내는 일들을 하시지요?

그러면 그 일이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질 일이란 말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합해져 있는 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로

갈라내는 일을 하지요?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로 갈라내신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지요?

그럼 예수님이 하시는 일도 합해져 있는 두 물을 갈라내는 일을 하시는 것이겠지요.

하늘에 말과 땅에 말을 갈라내는 일을 하시겠지요.

 

하늘에 말과 땅에 말이 뭔가요?

하늘에 말은 성경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땅에 말은 성경을 인간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말은 모든 성경을 예수그리스도로 해석하는 것이고,

땅에 말은 성경을 부적처럼 기복주의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가지고 땅에 복 받는 이야기로 하면 타락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낸 것을 다시 섞는 것이 되어요.

이것이 음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복들을 주시려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곳이기 때문에 하늘의 신령한 복들을 주기 위해서 존재해요.

그런데 지금 이 시대 교회는 하늘의 것이 아니라 땅의 것을 주더란 말이지요.

 

이것을 음행의 포도주라고 합니다.

지금 노아가 포도주에 취했어요.

여기서 취하였다는 말은 술에 취하였다는 뜻이에요.

성경을 술 취함을 방탕함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노아가 포도주에 취했다는 것은 방탕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노아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노아를 간섭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홍수 이후의 노아도 여전히 죄인이에요.

죄로부터 자유로울 가 없어요.

죄가 기회를 타서 노아로 하여금 포도주를 쾌락으로 쓰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해요.

마귀라는 놈은 우리가 받은 그 은혜를 자꾸 색욕 거리로 만들어 버리게 미혹해요.

색욕거리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내 몸뚱이 중심으로 사용하는 것이 색욕거리입니다.

 

죄를 여러분이 밖에 나가서 무슨 나쁜 짓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물론 그런 것도 죄에요.

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자꾸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궁리하는 것,

세상의 유익을 도모하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조차도 포도주로 그 속에 있는 죄성들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노아도 노아 언약을 통해서 혜택을 입는 자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정결한 제물을 잡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하고 그 제물을 흠향하셔서

이제는 용서하고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그 언약 속에 노아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노아가 은혜를 입고서 방주 속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그 속엔 여전히 죄성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속의 죄성을 그대로 폭로시키면서 노아의 허물들을 아들을 통해서 덮어 주는 것으로 또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술이 깨서 자기가 덮어져 있는 것을 보고 덮어주게 하신 그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노아의 신앙은 내가 포도주를 통해서 취해 있는 이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이 허물을 우리 아들을 통해서 덮어 주게 하셨구나…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정결한 제물의 희생덕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거에요.

그래서 노아는 자기 허물을 덮어 주신 셈의 여호와를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에덴동산으로 한 번 끌고 가 봅시다.

포도주는 신약으로 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징됩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에서의 포도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에덴동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생명과는 먹고 선악과는 먹지 말라 했습니다.

그럴때 뱀이 나타나서 미혹을 하지요.

 

지금 노아가 포도주를 통해서 타락의 모습으로 나타나지요?

이 타락을 에덴동산에서 보면 아담과 하와가 누구의 말을 듣고 타락을 했습니까?

뱀의 말을 듣고 타락을 했지요.

그러면 결국 뱀의 말이 음행의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한 뱀의 말이 노아 시대로 보면 노아를 타락케 한 그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담과 하와가 뱀의 말을 통해서 죄 아래 떨어져 수치를 드러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옷을 하나 해 입히십니다.

 

감사하게도 셈이 자기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주기 위해 덮어준 옷도 거기에 정관사가 붙어서 “그 옷”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먹은 포도주도 “그 포도주” 라고 하고

셈이 아버지를 덮어준 옷도 “그 옷”이라고 하고 있어요.

 

“그 옷”이라는 것은 이미 있었던 옷이라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가 보면 뱀의 말을 듣고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수치를 가려주기 위해서 흠 없는 짐승을 한 마리 잡아서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덮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옷으로 수치를 가림 받는 이 모습이 에덴동산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 됩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율법주의라는 음행의 포도주를 먹고

전부 수치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면서 자기 옷을 벗어줘서

우리에게 덮어주신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담 시대에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그 사건은 역사 전반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 때는 포도주 사건으로 나타났고,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수치를 가려주는 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의 수치를 가려주기 위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힌 이 사건이

역사 속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모양만 바꿔서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꽃이 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기 위해서 옷을 벗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상징적으로 발가벗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벗은 옷들을 누가 가져갑니까?

밑에 있던 사람들이 제비뽑아 나눠 가져갑니다.

결국 우리는 그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벗어 주신 그 옷을 우리가 입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옷이 벗겨진 것은 에덴동산에서 양의 가죽이 벗겨지는 것과 똑같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양의 가죽을 벗겨 아담에게 입혀줬듯이

지금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발가벗기시고 그 예수님의 옷을 자기 백성에게 입혀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벗어주신 그 옷을 입고 있단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지금 예수님이 벗겨준 그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렇게 깨달아 진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 뿌려진 그 옷을 입혀주신 하나님 은헤의 영광을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아들 셈이 한 일을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그 이야기를 노아 시대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신약으로 끌고 오되 신약으로 끝나지도 말고 그것을 항상 나에게 적용을 하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Fact(사실) 에요.

실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것이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그것을 내 것으로 적용시키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적용되는 사람은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지요.

 

이렇게 생각을 해 보세요.

함이 아버지가 발가벗은 모습을 보면서 조롱을 했습니다.

이건 함이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누가 누구를 조롱을 할 때 자기는 치외법권에 두잖아요.

 

예를 들어서 나는 공부를 잘하는데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공부 못하는 사람을 조롱을 하겠지요.

똑같이 공부 못하는 사람은 조롱하지 않겠지요.

그러면 지금 함이 아버지의 수치를 보면서 조롱을 했다는 것은 자기는 벌거벗은 자가 아니라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벌거벗은 아버지를 수치로 여기는 것입니다.

반대로 셈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것이 자신의 벌거벗음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덮어 주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셈같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자신이 벌거벗은 자라는 것을 늘 깨닫게 만드십니다.

 

내가 죄인이야, 내가 죄인 중에 괴수야…라는 사실들이 늘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달아 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을 할까요?

아니면 덮어줄까요?

덮어주겠지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 이런 말이 있습니다.

To Do가 되지 말고

To Be가 되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일이 우선이 아니고 사람이 먼저라는 겁니다.

 

우리는 뭘 자꾸만 하려고 하는데 하려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나타난 일들은 원인에 의한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이 원인을 추적해 가야지 결과를 따려 하면 안 됩니다.

 

아이가 어렸을 때 부모에게 효도합니까?

어린 아이에게 아침부터 일어나서 열중 쉬엇! 차렷! 하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 하면 안 됩니다.

그건 가르칠 문제가 아니라 아이를 다 키워 놓으면 그 때 나온다니까요.

 

그런데 지금 이 시대 교회는 아이를 키울 생각은 안하고 자꾸만 뭘 하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앵벌이를 시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알려주어야 하는데 일을 자꾸만 시킨단 말이에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인간의 행함은 자랑되는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감추어지는 것입니다.

뭘 했다는 것은 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어요.

 

신앙은 To Do가 아니고,

To Be입니다!

내가 어떤 인간이 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인간이 되면 나타나는 현상은 자동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예수를 한 삼십 년 믿고 교회의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빈둥거리며 아무것도 안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이 제대로 된 걸까요?

 

교회 나온지 한 두 달 밖에 안 된 사람이 말 안 듣고 농땡이 치는 건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그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 십 년을 믿고 교회를 오래 다녀 직분도 있고 한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에게 하세요! 하고 가르칠 필요도 없습니다.

연식만 오래됐지, 그 안의 내용이 빈깡통이면 뭐라 그러겠어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만큼 나오게 되어 있다니까요.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가 나로 하여금 가만있게 하질 않아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가슴을 가리키며)

 

우리 여기가 베데스다 못과 같은 곳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떨어지면 이 베데스다 못이 가만히 있질 않고 출렁거립니다.

어떤 운동을 한단 말이지요.

베데스다 못은 천사가 가끔 물을 동하게 하면 어떤 병자들도 다 낫는다고 하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베데스다 못같이 우리 이 몸에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이 되면 이 은혜가 나로 하여금 가만있질 못하게 하고 생명의 운동을 일으킵니다.

그 생명의 운동을 일으킬 때 때로는 원수도 사랑하고 안하던 짓도 하고 남 섬기며 봉사도 하고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서 그런 일들을 하게 한다니까요.

 

그럼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이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거기 베데스다 못에 천사가 안 동한 거지요.

그럼 내버려 둬야지요.

그 사람은 아닌 것으로 그냥 내버려 둬야 합니다.

거기에다가 대고 찔러서 자꾸 하라 하면 하고 나서도 문제 생깁니다.

 

제 말뜻을 알겠어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원동력은 내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십니다.

그럴 때 비로소 To Be에서 To Do가 나온다니까요.

내가 어떤 사람이 되면 자동적으로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셈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토해내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 노아가 그러잖아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합니다.

 

결국 노아는 뭘 봤습니까?

하나님께서 셈 속에서 일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셈 안에서 수치를 가려주는 은혜의 삶을 살게 하신 그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린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우리가 뭔가 일들을 했을 때 본인이 더 잘 압니다.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니까요.

 

제가 설교를 해 보면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많이 하는데

설교를 준비하려고 서재에 앉아 있을 때는 어떤 감동들이 오는 게 있어요.

그 감동을 가지고 이렇게 두 장의 원고를 만들어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 단상에 서면 준비한 것은 가려져 버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오는 것이 있습니다.

준비한 원고 대신 그 순간 성령이 감동을 주시는 것을 전하게 되어요.

저는 한 번도 제가 준비한 원고대로 설교를 한 적이 없어요.

요약으로 원고를 충실히 준비해요.

안하면 불안해요.

 

그러나 막상 설교 시간에 서면 또 다른 감동을 주세요.

그래서 저는 원고 설교를 못해요.

수 없이 시도를 해 보았지만 안 되어요.

이렇게 말하니 제가 좀 이상해 보이세요?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 하면 제가 설교를 하고 나서도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설교는 책꽂이에 꽂아 놨다가 언제든지 빼내 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감동이 와야 합니다.

그 감동이 안 오면 설교가 안 나와요.

그렇지 않은 설교는 하나의 지식 전달일 뿐입니다.

여기저기서 짜집기해서 만들 뿐입니다.

 

여러분, 좋은 설교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능력 있는 설교는 감동이 오지 않으면 안 된다니까요.

좋은 설교로는 생명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설교가 될 때는 그 설교로 생명이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설교의 어떤 팁을 얻으려고 합니다.

제가 외부에 강의를 가면 많은 목사님들이 오세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설교 자료를 얻으려고 오세요.

자료를 달라고 해요.

 

그렇게 자료 얻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자료가 없어서 설교를 못하는 게 아닙니다.

설교의 원천은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역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래요.

성경을 많이 읽으세요.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은 우리 안에 음식 재료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가 읽은 것을 재료로 해서 요리를 만들어 내신다니까요.

 

쉐프는 레시피 가지고서 요리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오래 숙련된 경험과 그런 것들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의 음식이 왜 그렇게 맛있는가요?

 

조미료 많이 넣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이상하게 손 맛이 나오지요?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 은혜를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때 성령의 감동을 주시면 여러분도 훨씬 많은 깊이들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할 때 저는 이런 각도로 설교를 해요.

하지만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깨닫게 해 주실 때는

여러분들이 더 확대해서 더 깨달아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제가 하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은혜는 우리가 다 담아내지를 못합니다.

 

저는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제가 받은 그릇으로 담아 낼 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은혜를 가지고 다시 응용하고 적용이 될 때에는

더 많은 것을 깨닫고 담아 낼 수가 있어진다니까요.

 

어느 목사만 설교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목사를 추종하면 큰일 납니다.

그 목사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 목사가 아는 것도 아주 조금일 뿐입니다.

빙산의 일각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셔서

그 성령의 감동이 우리에게 오면 어떤 일들을 하게 되는데

그 일들이 결국 셈과 같이 내가 받은 그 은혜를 쏟아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셈이 아버지의 수치를 가릴 수 있는 것은 본인도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줌을 입은 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리는 것입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고

가려준 것이 있기 때문에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주세요.

 

예베소서 4장 31-32절을 봅시다.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보세요.

악독이나 노함이나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모든 일들을 우리가 스스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런 것들은 내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이 사실이 깨달아질 때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일들이 버린 것이 먼저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것이 먼저란 말이지요.

 

32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용서받는 게 먼저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용서를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앞에

내가 용서할 자를 세워 놔 보는 거에요.

이 말은 쉬운 얘기로 하나님께서 제게 시험 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수 같은 인간을 내 앞에 시험지로 내어놓는 겁니다.

 

하나님은 마치 노아의 아들들에게 시험지를 내놓은 것과 같습니다.

시험지는 아버지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내놓은 거에요.

그럼 이제 둘이 시험을 쳐야 합니다.

한 놈은 자기도 벌거벗은 자였는데 이 수치를 가려줌을 입은 것을 알고 한 놈은 그것을 모르는 겁니다.

 

함은 자기가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조롱하며 수치를 드러냈고 셈은 나도 하나님으로부터 덮어주심을 입었고 나도 벌거벗은 자였는데 덮음을 입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버지를 덮어주는 모습으로 답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깨어나서 셈의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셈이 이렇게 한 것은 셈의 실력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구나,

저 놈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덮음을 입었구나

그러니까 이런 행동을 하는구나 를 알고 셈을 축복하고

그 수치를 드러낸 함은 용서를 모르는 자이구나를 알고 저주를 한 것입니다.

 

이제는 노아의 후손을 통해서 온 세계 민족들이 나눠지는데 그 때 저주받은 민족은 함처럼

수치를 드러내는 자들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의 삶을 통해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는 그 행동은 반드시 원인에 의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그 원인을 지금 보시는 것입니다.

셈이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준 행동의 원인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수치를 가림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고 게시는 겁니다.

 

그래서 노아가 셈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적용을 하면 저와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일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할 때 마다 우리는 내가 먼저 죄인이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누가 잘못을 하더라도 손가락질 하지 말고 나도 똑같은 인간인데

이런 인간이 용서 받고 살고 있어! 라는 마음을 갇게 되면 덮어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허물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 앞에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을 내어 놓습니다.

알다시피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을 신앙으로 자랑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율법으로 보면 정죄 받아야 할 간음한 여자를 내어 놓고 문제를 풀게 합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아는 율법으로 문제를 풉니다.

죽이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용서해 주십니다.

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은 극과 극으로 시험지를 풉니까?

이는 예수님은 죄인의 아픔에 동참을 하였고 바리새인들은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롭다 여겼기 때문에 여인을 돌로 치라고 답을 쓴 겁니다.

 

사람은 내가 연약하면 같은 연약 속에 있는 사람을 참소하고 그 사람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내가 약할 때 약한 사람은 내 편이 되는 것이고

내가 강하다고 생각이 되면 약한 사람 괴롭히게 되어요.

 

요즘 학교에서 왜 왕따가 생깁니까?

어떤 학생들이 왕따를 시킵니까?

자기는 힘 있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그렇게 하지요?

내가 못났다고 생각하면 왕따 안해요.

같이 친구가 되지요.

 

우리 신앙 생활 속에서도 이런 모습을 한 번 보세요.

교회 내에서도 왕따 시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말이에요.

누가 교회 안에서 잘난 척하면서 왕따를 시킵니까?

스스로 성경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을 비난하며 그러잖아요.

그건 결국 스스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실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씀을 깨닫는 것 조차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깨닫게 해주셔서 아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을 깔보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왜요?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아는지 모르는 지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어떤 은혜를 입고 있는가?

내가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가?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자기 백성에게 얘기합니다.

너희들이 어떤 은혜와 사랑을 입고 있는지를 제발 좀 알으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을 보세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이 새끼들을 먹이고 입히고 살렸건만 짐승만도 못한 이 놈들이 날 몰라 본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탄식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뭘 받고자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은혜를 모르고 있는 것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러십니다.

 

수많은 성경을 통해서

네가 나에게 이런 은혜를 입고 사는 것을 아느냐?

그것을 묻고 계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맞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용서를 입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가 연약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참아주고 기도하고 이해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 말이지요.

우리가 다 가야할 길이 그 길이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가신다니까요.

그래서 2014년도에는 여러분 속에서 일하신 주님의 모습들이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많이 확대되어

표현되어지는 한 해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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