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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13강. 방주 위로 부는 바람 (창 8:1-19)

by coroa 2020. 10. 17.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3강. 방주 위로 부는 바람 (창 8:1-19)

-.정낙원 목사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다 보면 특별히 은혜가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말씀이 동일합니다만 특별하게 은혜 되는 말씀이 있어요.

저는 오늘 이 8장 1절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굉장히 설레고 흥분이 됐습니다.

 

1절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홍수로서 심판을 하셨지만 그 심판 속에서 자기 백성들이 타고 있는 방주는 바람으로 권념하셨다고 합니다.

 

‘권념하셨다’는 이 말은 ‘기억하고 지킨다’는 말입니다.

뭘 기억을 하는 걸까요?

‘아~ 저기에 내 새끼들이 타고 있지’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방주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창세지 1장 2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수면 위란? 물 위라는 뜻입니다.

물 위로 누가 운행합니까?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지요.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한다는 것은 이 세상은 모두 물 속에 잠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이나 노아 홍수 모습이나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요한계시록 12장에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니까 용이 땅으로 내어 쫓깁니다.

그 용은 입에서 물을 강 같이 토해 내서 땅에 있는 여자의 후손들을 큰 홍수로 집어 삼키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이나 노아 시대나 요한계시록의 말씀이나 모두가 같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실 때 항상 이런 큰 맥으로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다뤄가시는가 하는 구조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언약을 하나 세우셨습니다.

이 언약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는 것입니다

구원입니다.

 

이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해서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역사 자체가 죄에서 건지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이 역사는 죄로 가득 차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물 속에 잠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 물이 죄를 상징해요.

 

갈라디아서 3장 22절을 봅니다.

 

갈 3장 22절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죄 아래 가두어 놓았다고 합니다.

죄 아래 가두어 놓은 것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백성을 그 죄에서 건져내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창세전 언약입니다.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구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에 창조되면서부터 죄 아래 가두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해놓고 그 창조된 세계가 물 속에 잠겨져 있는 모습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창조 과학회에서 말하듯이 이 세상을 어떤 물건 만들듯이 만든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만물을 안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우주 만물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역사 우주 만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의 시청각 교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그 언약의 내용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서 건져내는 것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이 만물 자체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서 건져내는 것을 보여주는 부교재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만물을 통해서 그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 흑암과 깊음과 혼돈과 그런 상태라고 합니다.

만물이 물 속에 잠겨 있는데 ,

그 물 위에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는 것입니다.



성신이 운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운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운행합니까?

이는 뭔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뭐라 그러는가요?

모든 세상이 홍수 속에 잠겼는데 그 홍수 위에 방주가 하나 떠 다니고 있습니다.

떠 다니는 그 방주 속에 자기 백성들이 타고 있습니다.



방주 안에 구원 받은 모든 성도를 상징하는 노아의 여덟 식구들이 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방주를 권념하시는 것입니다.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권념이란? 기억하고 지킨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 세상을 보았어요.

갈라디아서 3장 2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죄 아래 가두어두었다고 합니다.

죄 아래 가두어 놓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믿음으로 구원시키려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노아 시대는 물 속에 잠긴 것이고,

지금 이 시대는 죄 아래 가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와 물을 영적으로 같은 의미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가 탄 그 방주를 지켜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의 열심과 정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노아 홍수가 오기 전에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러지요?

하나님이 홍수를 붓기 전이 은혜라는 옷을 입혀준 겁니다.

우리를 지켜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의 열심이나 정성, 노력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에게 주셨던 언약들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 보낼 때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언약을 담아서 보냈습니다.

 

그 언약이 뭐에요?

죄에서 너를 구해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했을 것 같으면 그 언약은 하나님이 지킵니다.



언약이란? 약속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제가 모든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이 지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성경을 일컬어 우리가 구약, 신약이라고 하잖아요.

신약은 새 언약이고, 구약은 엣 언약이고

이 둘을 하나로 말하면 그냥 ‘언약’ 인 것입니다.

 

이 성경이 언약의 책이라면 이 언약은 하나님이 지키는 것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하신 것이지 우리보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언약은 하나님만이 지킬 수가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는데,

그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이 계셨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언약을 맺는 겁니다.

 

이번에 서울 갔더니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하십니다.

왜 창세전 언약을 그렇게 맺어야 했습니까?

언약을 맺은 이유가 뭡니까?

 

그래서 제가 미국의 디즈니랜드를 가지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큰 부잣집의 외동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의 생일 선물로 만든 것이 디즈니랜드라고 합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전 그렇게 들었습니다.

얼마나 아들이 이쁘고 사랑스러웠으면 그 큰 놀이동산을 만들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왜 하셨느냐?

아들에게 나라를 만들어 주시고자 하셨어요.

아들의 나라를 만들어 주는 것이 창세전 언약의 내용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을 만유의 주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 위에 있는 것이나 하늘 아래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모든 것이 무릎을 꿇고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인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구원받은 사람도 예수님을 주라고 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예수님을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지옥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지옥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나라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만든 것은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동시에 만들었단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주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심판주 잖아요.

심판이라는 것은 갈라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주가 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두신 것입니다.

 

이를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보여 주셨어요.

이걸 그대로 아브라함 집안에 이스마엘과 이삭으로 배치해 두셨어요.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보여주셨어요.

 

자기들의 어떤 잘잘못으로 야곱은 구원받고 에서는 저주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단 말입니다.

왜? 예수님을 주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야곱도 있어야 하고 에서도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걸 토기장이 비유로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 때 귀히 쓸 것도 만들고 천히 쓸 것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따질 수 없습니다.

그릇이 기분 나빠서 나 왜 그렇게 만들었어요! 라고 하면 그냥 깨버리는 겁니다.

 

‘죄’가 뭐냐 하면 토기장이가 하는 일에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의’는 토기장이가 하는 일에 아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이 하는 일에 반기를 드는 자들이었습니다.

죄가 우리를 장악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항상 자기중심으로 움직이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중심으로 다스려 가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다스려 갑니다.

그럼 필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다스려 가는 것에 반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죄란 말이지요.

우리는 원래 그런 자였어요.

그런데 구원을 받았어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불순종 가운데서 태어났고,

그런 불순종의 아들들이었는데,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덮쳐 와서 구원을 받았어요.

하나님이 불 순종하는 자들에게 순종의 영을 부어 주셨습니다.

 

성령은 순종의 영이에요.

성령이 하나님이 하는 일에 수긍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보니까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를 위해서 지어졌구나를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 죄 아래 있으면서 내가 왕이요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 내서 왕은 따로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그 왕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그렇군요…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아들의 나라라고 하잖아요.

우리를 그 아들의 나라에 살게 하기 위해서 아들의 영을 준 것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은 아들의 나라에 가서 아들만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에 이렇게 모인 것은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잖아요.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을 예행 연습하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온 세상이 홍수 속에 잠겨 있습니다.

그 물위에 일엽편주같이 배가 하나 떠 다니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 물어 봅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물속에 잠기게 했어요.

근데 배 하나가 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럼 물 속에 안 잠기고 물 위를 떠 다니는 배는 배의 능력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배를 떠다니게 만드시니까 떠다니는 것이지 배가 자기 힘으로 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홍수 속에 엄몰되어서 다 죽어야 하는데,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가 탄 방주를 권념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기억하고 지키십니까?

그 속에 하나님 자식이 있고 그들을 홍수 속에서 살려 준다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노아의 방주를 물 속에 빠지지 않도록 지키시고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권념입니다.

 

우리는 창세전에 죄가 가득한 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입을 때 언약을 하나 담고 왔습니다.

그 언약이 ‘내가 너를 예수의 피로 구해 줄께’ 란 말입니다.

우리는 몰랐는데 때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너 왜 거기 있느냐’ 하시면서 우리를 방주로 집어넣으시는 겁니다.

 

그 방주가 신약적인 의미로 예수님이고 십자가라고 그랬지요?

온 세상이 멸망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안위의 아들 노아를 주십니다.

저주 가운데 멸망 받아야 하는데 그 때 하나님께서 노아를 안식하게 하기 위해서 아들을 하나 줬는데 그 노아를 통해서 자기 가족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무나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 가족만 구원받게 되어 있어요.

이 땅에서 구원할 백성은 원래 하나님의 패밀리입니다.

예수님의 패밀리라니까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받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4절에 ‘우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자, 보세요.

누구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되려면 ‘나’가 존재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독자적으로는 ‘나’지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는 ‘나’는 사라져 버리고 ’우리’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애초에 ‘우리’를 택한 것입니다.

그 ‘우리’가 가족인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같이.

 

그래서 신자를 일컬어 ‘권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권속은 한 아버지에게서 낫고,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문화 속에서 사는 자들이 가족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그 교회의 본질적 의미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원받은 자들이 모여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구원을 받는 언약의 말씀을 듣고 그 안에서 서로 위하고 교제하고 사귐을 갖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주받은 곳에서 노아라는 안식을 줄 한 아들을 보내서 자기 식구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지금 자기 백성들이 죄 아래 가두어졌는데 하나님께서 노아처럼 안식을 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자기 백성만 구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건져서 노아를 방주에 태우듯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구원의 일들을 벌이기 위해서 지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전부 그 십자가 안에 태우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결국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십자가 안에 들어 온 사람들만 성령을 통해서 기억하고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게 권념하셨더라 입니다.

 

흥분되지 않으세요?

전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굉장히 흥분이 됐었는데 안 그러세요?

그림이 그려지잖아요.

 

노아 시대나 창세기 1장 2절이나, 요한계시록 12장이나, 계시록 18장에 가면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고 모든 세상이 그 음녀가 앉은 물 속에 잠겨 있는데 그 물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거기서 나오라 하잖아요.

 

성경은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보세요.

참 재밌는 것이 노아의 방주가 몇 년 동안 물 위에 떠 다녔어요?

일 년입니다.

 

정확히 하면 일 년 열흘입니다.

그동안 노아가 방주에 있었는데 일 년이라는 사이클은 뭘까요?

역사 자체가 일 년이라는 것으로 순환됩니다.

 

그러면 일 년은 온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일 년 동안 물에 잠겼다는 것은 이 세상 자체는 생겨나면서부터 죄 아래 가두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끝 날까지 죄가 지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아래 가두어져 있단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은 일 년 동안 십자가라는 방주 속에 태워서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겁니다.

이해되세요?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세초부터 세말까지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게 믿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무셔도 예수님은 못 주무셔요.

왜요?

저와 여러분을 지켜낼 사명을 예수님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 손자 요셉이를 보면서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저 녀석을 지키는 것은 지네 부모입니다.

아프면 병원 데려가고, 안 자면 재우고, 배 고프면 젖을 먹입니다.

모든 것을 부모가 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이 그런 애기를 하십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은 다 내게로 온다 하시지요?

그렇게 오는 그를 마지막에 내가 다 살린다 그러지요?

 

그러면 우리가 언제 아버지에게 배웠는가요?

이건 창세전에 아버지와 우리는 구면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창세전 언약을 드라마로 비유를 자주 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를 역사를 통해서 찍으십니다.

드라마를 찍을 때 보면 먼저 거기에 동원될 배우들을 캐스팅해서 대본을 줍니다.

그 대본을 받은 사람끼리 모여서 대본 리딩도 하잖아요.

 

그 때는 본 게임이 아니에요.

미리 연습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듯이 우리는 창세전에 그 일을 하고 왔다니까요.

언약 속에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배운 사람은 다 내게로 온다.

그러는 거에요.

우리가 창세전에 뭘 배웠느냐?

아버지가 우리한테 얘기를 해 준거에요.

 

이건 선재론을 말하는게 아니에요.

영적 의미가 그렇다는 겁니다.

영적으로 보면 창세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해요.

 

야~ 정낙원!

너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너희한테 가면 너 영접해야 한다 알았지?

그 얘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거에요.

예수님이 그 때 와서 그 말을 하니까 아는 겁니다.

 

어, 이거 우리 들었던 말인데…

그래서 요한복음에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나니’ 그러잖아요.

그래서 들려지는 겁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여시고 귀를 열어서 다 들려지게 하신다니까요.

때를 맞춰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게 아니고 그 때와 기한은 총감독 되신 하나님이 정하시는 겁니다.

 

세례 요한처럼 모태로부터 구원받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십 년 자라서 구원받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사십 년 지나서 구원받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강도처럼 죽기 전에 구원받는 사람도 있단 말이지요.

 

우리는 아무도 몰라요.

그 때를 따라서 부르시는 것은 감독의 마음입니다.

 

드라마를 보세요.

처음에 출연해서 끝까지 가는 사람도 있고 중간에 죽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 때 그때 마다 새로운 사람을 투입되기도 하고 빼기도 하잖아요.

 

우리 구원도 그렇단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일찍 은혜를 받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포도원 품꾼 비유처럼 늦게 부름 받는 사람도 있어요.

 

만약 일찍 구원을 받았으면 하나님께서 일찍 저 세상 속에 빠져 살지 않게 건져 줬으니까

감사해야지요.

우리 본질을 알아야 해요.

그래서 감사하고 살아야 해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애기를 합니다.

우편 강도처럼 죽기 전에 구원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분 정말 그래요?

 

이렇게 생각을 해 보십니다.

천국이 있어요.

천국을 예를 들어서 온갖 놀이기구가 있는 놀이동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가면 무료로 마음껏 놀고 음식도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합시다.



모든 것이 공짜이면 여러분 일찍 가고 싶어요,

늦게 가고 싶어요?

당연히 일찍 가고 싶지요.

 

더 리얼하게 말해서 만약에 뷔페 음식집이라고 합시다.

맛난 음식을 잔뜩 차려놨는데 일찍 가서 먹는 게 좋겠어요,

다 떨어지고 늦게 가는 게 좋겠어요?

일찍 가서 먹는게 좋지요.

 

천국이 어떤 곳이에요?

뷔페 집처럼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이지요?

우리는 뷔페 집은 일찍 가는 게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데 천국 가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천국을 추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관념 속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이 천국에 대해서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찾아 오셔서 천국이 이런 곳이라고 자꾸 깨닫게 해주신다 말이지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도 바울이 삼층천을 보고 왔어요.

빨리 가고 싶겠어요,

여기서 더 오래 있고 싶겠어요?

빨리 가고 싶지요.

 

그러니까 세상에 미련을 둔다는 것은 그 사람은 삼층천을 못 봤다는 애기입니다.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천국은 상상 속 관념의 천국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죽어서 극락 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 알고 있다니까요.



그런데 그 분한테 지금 죽어서 극락 가실래요? 하면 화를 냅니다.

한 번 물어보세요.

예수 안 믿는 사람한테 사람이 죽으면 천당도 가고 지옥도 간다.

그러면 전부 천당 가고 싶다.

그래요.

 

그 천당에 왜 가는데요 하고 물어 보시라니까요.

그러면 좋은 데라서 간다 그럽니다.

그럼 그 좋은 데 지금 가실래요? 하면 싫어한다니까요.

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좋은 천당은 그냥 관념인 것입니다.

 

인간은 그냥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 관념이 실상이 되면 골치가 아파져요.

실상은 댓가를 치러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상상 속에서 관념으로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실상으로 깨달아지게 하셨어요.

이게 많이 깨달아지는 사람은 이 세상에 미련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뭔 줄 아세요?

물에서 분리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물 속에 잠겨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는 물 속에 있는 자기 백성을 건져서 방주 속에 태워서 방주타고 다니게 하는 것입니다.

 

일 년 열 두 달 방주가 물 위에 떠 있다.

이 얘기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살면서 자꾸 세속과 멀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세속적 가치관이 우리 속에서 빠져 나가는 일들을 하는 거에요.

그것을 분리시키는 일들을 하십니다.

한 번 하시는 게 아니라 날마다 일을 하십니다.

 

우리 육신은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눈만 뜨면 땅이 보이는 겁니다.

세상이 보여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그 은혜를 덮쳐 오게 해서 기억하게 하십니다. 

바람을 살살 불어서 배가 떠다니게 하듯이 우리를 권념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너는 이 땅에 살 존재가 아니야!

왜 자꾸 여기를 보고 있느냐?

여기 것은 있어도 좋은 것 아니고 없어도 나쁜 것 아니야

이건 다 지나가는 것이고 그림자 같은 것이니까 여기에 매이지 말고 저 세계를 바라보고 살아! 라고 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세상에서 있으나 없으나 여기에 정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언약을 바라보고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며칠 못갑니다.

하룻밤 지나면 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체질을 아시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그 일을 지켜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남편이 되셔서 손을 잡고 애굽에서 건져 왔는데 옆에서 아무리 도와줘도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방식으로 하지 않고 내가 너희들 속으로 뚫고 들어가서 너희를 지킨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자 보세요.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셔서 그냥 계셨으면 그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 속으로 뚫고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몸으로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 땅의 몸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늘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이 부활하신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역을 받지 않고 넘나드는 것입니다.

 

옛날에 미국 우주 드라마 ‘스타트랙’을 보면 생각하는 대로 이 공간 저 공간으로 다니잖아요.

부활의 세계가 그래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역사 자체는 피조세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피조 세계가 아닌 창조 세계의 몸입니다.

창조 세계의 몸은 역사의 제한을 안 받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리면 하늘에서 오는 장막을 덧입는다니까요.

 

고린도전서 15장 42-49절을 봅시다.

 

고전 15장 42-49=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5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구원을 하시는가 하면 먼저 죽을 몸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아래 나서 가두어 지는 것입니다.

구원이 되려면 어디에 가두어져 있어야 빼낼 것 아니에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늘로 부터 온 산 떡이라고 하지요?

누구든지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 땅에서 그 산 떡을 먹은 자가 있나요?

없지요.



그 산 떡은 죽은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영생은 영생하는 자에겐 필요가 없지요.

영생은 죽은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인 아들의 생명으로 자기 백성을 살려내는 것이니까

그 창세전 언약에 있는 자들은 먼저 죽은 몸으로 오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죽은 몸으로 이 땅에 온 것입니다.

죽은 자의 조상인 아담 안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먼저 이 몸을 주고서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을 이 몸을 바꿔치기 해주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42절에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이 땅의 몸이 죽어지면 하늘에서 사는 몸을 주십니다.

땅에서 사는 것은 땅의 몸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땅에 살다가 하늘로 가야 하는 우리는 하늘의 몸이 있어요.

 

그러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예수를 믿으면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를 제대로 안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먼저 흙에서 난 육에 속한 몸을 가지고 있어요.

흙에서 난 몸을 가지고 있는데

하늘에서 오신 분인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하늘의 몸을 주신다니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 오신 지금 우리는 하늘의 몸을 가진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 하늘의 몸이라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몸을 가진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속적 가치관을 벗어 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날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일들이 일어날 때 세상 적으로 보면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고 아픈 것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 성령이 나를 주장할 때는 그것을 넉넉히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게 하늘나라의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몸은 흙에서 났으니까 반드시 흙으로 돌려줘야 합니다.

그렇게 이 몸이 죽어지면 하나님께서 새 몸을 가지고 기다리고 계시다가 주십니다.

그래서 썩을 몸을 먼저 받고 그 다음에 썩지 않을 몸을 받는 것입니다.

 

또 하나 생명의 비밀이 있는데 여러분 보세요.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에 주신 모든 생물은 그 생명을 키우기 위해 반드시 씨가 죽어야 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씨가 흙 속에 들어가서 죽지 않으면 씨가 함유하고 있는 내용을 토해내지 못해요.

 

사과 씨는 씨 하나로 여기에 두면 백 년을 둬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흙 속에 들어갔을 때 그 흙 속에서 자기를 깨트려 나무를 내잖아요.

그러듯이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오셨습니다.

왜 오셨을까요?

 

예수님이 하늘의 그 씨인데 이 씨가 가만히 두면 싹을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몸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 몸은 흙과 같이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그 씨를 잡아먹습니다.

그러면 이 몸은 후폐해지고 씨가 나를 장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자가 남자의 씨를 가지는 임신의 메카니즘입니다.

남자의 씨가 여자의 자궁에 착상을 하면 그 때부터 이 씨가 여자의 몸 속에서 자라면서 여자를 잠식해 가지요?

 

그러면 그 때부터는 여자의 몸 속에 있는 그 아이가 여자를 주장하게 됩니다.

엄마는 자동적으로 아이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 이 여자는 자기로 사는 것이 아니고 아이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 속에 들어오신 것은 그거에요.

나는 가만 두면 내가 속한 이 땅의 가치관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 몸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의 생명을 틔워내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생명을 틔워낼 때마다 우리 몸은 후패해져 갑니다.

세상 가치가 사라져 버리고 하늘의 가치가 나를 잠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내가 비록 이 땅에서 죽는다 할지라도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자기 백성들을 그렇게 다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보세요.

홍수를 부어서 온 세상을 물로 채우고 그 위에 둥둥 떠다니게 하지 말고 그냥 데려가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얘들아, 이 세상은 지금 물 속에 잠긴 것처럼 죄라는 물 속에 잠겨 있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 속에서 잠겨 있는 자가 아니야.

예수라는 분을 통해서 그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방주 속에 너희들을 태워서 이 세상에 살게 만들었어.

그렇게 살게 하는 것은 세상 사람과 너희는 다르다는 알려 주기 위함이야’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것이 하나의 고발자 형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땅에서 속한 사람은 땅 밖에 모르는데 우리는 그들과 같이 땅에 사는 사람이지만 땅이 전부가 아니고 가야할 곳이 따로 있다는 것을 증거하며 살잖아요.

이게 고발자라니까요.

 

그러니까 땅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한테

하늘에 속한 사람이 이 땅은 전부가 아니고 멸망할 것이라 하면 듣기 싫어하지요.

땅에 속한 사람은 이 땅이 영원하길 바랍니다.

자기들의 근거가 여기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이 땅의 원리를 알기 때문에 이 땅은 잠시 있다 사라지고 영원한 나라가 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미련을 안 두는 것입니다.

 

그 일을 누가 합니까?

성령이 해요.

노아의 방주를 하나님이 바람을 불어서 권념하셨듯이 성령이 우리를 지키십니다.

 

여기서 바람이 ‘르하크’라고 하는데 곧 성령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하나님의 신’이 ‘르하크’인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바람’이 곧 그 ‘르하크’입니다.

 

이 ‘르하크’가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해골 골짜기에 부는 바람입니다.

그 해골 골짜기가 이 세상 전체를 말합니다.

이 세상은 죽은 시체가 쌓여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 홍수 속에 각양의 시체들이 잠겨 있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성신을 보내시고 그 성령은 죽음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지켜내고 살려내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 있는 동네인 이 세상에서 성령께선 날마다 빼내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 기분 좋게 떠났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태어난 곳에서 내가 가진 모든 것에서 빼낸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겐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잔인하시지요.

여러분 신앙을 감상주의로 접근하지 마세요.

여러분 솔직하게 대답을 한 번 해보세요.

세상에 살 때 세상 가치로 사는 것이 편합니까,

하늘의 가치로 사는 것이 편합니까?

 

우리는 눈만 뜨면 세상 가치로 사는 것이 편합니다.

그런데 세상 가치로 안 사는 것이 우리 힘으로 되나요?

안 되지요.

 

우리 힘으로 안 되니까 ‘보혜사’가 우리에게 와 계시는 것입니다.

보혜사가 뭐에요?

돕는 자이지요?

우리가 안 되기 때문에 도우는 자가 오시는 겁니다.

그럼 그 보혜사는 소속이 어디에요?

하늘이지요.

그래서 보혜사가 우리에게 오셔서 날마다 하늘의 가치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홍수 속에서 바람이 방주를 물 위에 떠 다니게 합니다.

그 떠다니는 방주의 종착지가 아라랏 산이라고 했지요?

거기가 어디에요?

‘창조’ 또는 ‘거룩’이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역사 속에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를 타고 있는데,  

이 방주를 성령께서 늘 간섭을 하셔서 거룩한 산, 창조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가치관들은 땅의 가치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가치관으로 살도록 날마다 간섭을 해 가시는 겁니다.

 

지금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을 간섭을 하셨기 때문에 여기에 와 있다니까요!

내 능력으로 내 실력으로 교회에 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주일날 교회를 온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니까요.

 

저는 제가 알아서 왔는데요…

아니올시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해주셨기 때문에 온 것이지 그 누구도 스스로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그걸 알아요.

그렇게 때문에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그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자체를 보세요.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로 분리시키는 장소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타작마당이 뭐에요?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는 곳이잖아요.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세상 자체가 알곡과 쭉정이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가 곧 하나님의 타작마당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건지는 자로 왔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안 되기 때문에 강제로 끄집어내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끄집어냄을 당할 때 마다 우리는 순순히 응하지 않고 롯의 처같이 자꾸 세상을 뒤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은 이 세상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해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꺼내주지 않으면 스스로 나올 수 있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안 된다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자기 백성을 이 세상으로부터 빼내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빼내심을 입은 자들은 죽은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거룩’이라 합니다.

 

이 거룩이라는 것은 우리가 착하게 살아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만든 거룩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거룩하신 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놋 뱀 이야기를 하면서 인자가 놋 뱀처럼 높이 달라면 자기 백성을 하늘로 이끈다고 하지요?

이 ‘이끈다’ 말이 강제로 끌어 올린다는 말입니다.

 

크레인 아시지요?

집어서 끄집어 올리는 겁니다.

고물상 같은데 보면 파지를 끌어 올릴 때 다섯 손가락 같이 생긴 크레인으로 집어서 빼내잖아요.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 백성들을 그렇게 빼낸다니까요.

우리는 그렇게 다 빼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 자체가 빼내심을 입는 거에요.

 

빼내심을 입은 사람들은 스스로 알아요.

예를 들어 교회에 와서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고 충성을 하고 교제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게 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 사람들은 그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가 나와요.

주님께서 이 일을 하게 하셨다는 감사가 나온다니까요.

 

생각을 한 번 해 보세요.

아침에 보니 부산에 계신 조 집사님이 제일 먼저 오셨습니다.

좌우지간 제일 먼 사람이 제일 먼저 오고 제일 가까운 사람이 제일 늦게 온다니까요.

참 내…

 

여하튼 제일 먼 사람이 제일 먼저 왔는데,  

그 얘기는 누가 그 집사님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까?

하나님이죠.

 

이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제발 여러분들 범사 속에서 세밀한 일 들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신다는 그런 눈들이 좀 열리시라고요.

 

감각 없는 자같이 살지 말구요.

우리는 원래 내 몸뚱이 하나 챙기는 것이 내 본성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몸 챙기지 않게 하시고 도리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 몸을 자꾸 밀어내시더란 말이지요.

 

그렇게 밀어내셨기 때문에 여기 와있는 겁니다.

그게 감사하지요.

이게 거룩이라니까요.

 

성령께서 그 방주를 아라랏 산으로 밀어 올렸듯이 지금 저와 여러분들을 이리고 옮긴 것입니다.

거룩한 아라랏 산을 지금 터키에 있는 산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은 교회가 아라랏 산이라니까요!

교회 자체가 창조의 세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 창조의 세계를 증거하는 곳이 바로 아라랏 산인 것입니다.

 

그걸 누가 인도합니까?

성령께서 물 위에 떠다니시면서 인도하잖아요. 

그래서 노아에게 방주를 태운 것도 하나님이 하셨고,

홍수를 준 것도 하나님이 하셨고,

그 홍수 속에서 구원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셨고,

시작부터 끝까지 다 하나님이 하셨어요.

노아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구원을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구원받고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놀랍고 놀라워야 해요.

우리 솔직히 그렇지 않아요?

복음 하나 깨달아지는 것도 얼마나 놀랍습니까?

 

어제 어떤 분이 메일을 보내셨습니다.

 

성화를 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이런 얘기를 하는데 이 분이 지난번에도 메일을 보내 왔었습니다.

스스로 목회자라고 해요.



보통 목회자들은 정답만 알려고 합니다.

정답만 알아서 교인들에게 가르치려고 하기 때문에 제가 일부러 답을 안 줬어요.

그랬더니 왜 답이 없냐고 또 온 겁니다.

 

우리 블로그에 있는 글을 보면 그 문제는 다 해결이 되는데,

글을 볼 생각은 않고 답만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답을 알려준들 본인이 이 답을 도출하는 게 아닌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수학 문제의 답을 알려면 수학 공식을 풀어야 하는데,  

그 공식도 모르고 답만 외워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니까요.

본인이 왜 이 답이 답이냐? 라는 것을 알아야,

그것이 내 것이 된단 말이에요.

 

그러려면 힘들더라도 글을 봐야죠.

글은 보기 싫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시간이 많이 걸려도 봐야지요.

그래서 일부러 답을 안줬어요.

제가 무례한 것 같지만 용서하시라 하고 답을 안줬어요.

 

예를 들어서 우리 이영이가 물으면 친절히 알려줍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신다는 분이 그러면 어떡합니까?

알려줘 봐야 답 가지고 너 이거 알아 몰라 하고 선생노릇만 하려 합니다.

그건 아무 소용없어요.



그건 예수를 멀찍이 따라 다니는 것 밖에 안돼요.

예수를 본인이 만나야죠.

그래서 왜 이게 옳고? 저게 그른가? 하고 고민하셔야죠.

 

제가 예수를 먼저 만난 사람으로서 친절하게 풀어놨잖아요.

그럼 그 거라도 보면 이해가 될 텐데 시간이 없답니다.

그럼 저도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예수를 만난 것이 여러분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만난 예수를 내놓으라니까요!

그 예수가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정낙원이 만난 예수가 여러분을 구원하지 않아요!

예수님은 개개인의 구원자입니다.



나의 주시고,

나의 왕이시고,

나의 하나님이요

내 구원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만난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고 소개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이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제가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늘 그러잖아요.

저는 이 본문이 이런 식으로 이해가 되고,  

이렇게 은혜를 받는다고 하잖아요.

여기에 태클 걸지 마세요.

 

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는데,

그렇게 물어 오는 그 사람은 그럼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물어온다는 것은 자기도 답을 가지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 답은 어디서 나온 건데요?

 

여러분들이 지혜롭게 하려면 정답이다 아니다를 따지지 말고,  

저는 이렇게 은혜를 받습니다 라고 하세요.

저는 과거엔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은혜를 입고 보니 이렇게 이해가 됩니다! 라고 하세요.

 

내가 이해하는 것조차 당신이 간섭하면 안 되지요.

동의가 되면 교제하는 것이고,

동의 안 되면 떠나는 거지요.

재발 좀 이런 것으로 편 가르기 하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찾아 가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알아요.

몰라요?

지식적으로 다 알잖아요.

내려가면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그 일들을 애기하잖아요.

 

그러나 그들에게 예수는 타인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얘기 하듯이 하고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친절하게 구약의 선지자로 풀어 얘기를 해주니까,

그들의 심령이 뜨거워졌다고 하지요?

 

그러자 객관적인 예수가 자기 주관적인 예수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려가던 신앙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잖아요.

지금 제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만난 예수가 이런 분이라고 여러분에게 소개를 하면,

여러분들도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같이 여러분들 심령 속에 속된 말로 아다리가 되어서 감동이 되면 여러분의 신앙은 세상으로 내려가는 신앙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신앙이 되어져요.

 

하나님께선 자기 백성들은 그렇게 간섭을 하신다니까요.

저와 여러분들은 복음 깨달아진다는 것은 놀랍고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똑 같은 날 똑 같은 시간에 똑 같은 설교를 들어도 어떤 사람은 못 알아듣고 어떤 사람은 알아듣잖아요.

그 말은 결국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간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몸으로 집단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구원은 또 개개인에게 적용이 됩니다.


나 하나 하나 찾아 오셔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몸으로 접붙인다니까요. 

그러면 그렇게 찾아진 사람은 ‘우리’라는 모습 속에서 ‘나’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 각자 간섭해서 이 자리로 불러 놓았잖아요.

그러면 내가 ‘나’로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있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그 일들을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그 방주 속에 가두어진 백성들을 성령의 바람으로 그들을 기억하고 지켜내셨듯이,  

지금 저와 여러분들도 죄가 가득한 이 홍수 속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그 방주 속에 우리를 태워서 지켜내시고 결국 거룩한 산 아라랏 산으로 인도하시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인도함을 받은 우리는 주께서 시작하시고 주께서 다 하셨으니,  

주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라고 하면 됩니다.

이걸 우린 지금 교회를 통해서 맛보기로 하는 겁니다.

 

여러분, 옛날에 본 운동회 하기 전에 소운동회 하잖아요.

리허설처럼 하잖아요.

그렇듯이 지금 우리는 교회 안에서 리허설 한다고 생각하세요.

이 땅에서 리허설하고 본 게임할 때는 저 위에 있는 아라랏 산으로 가면 됩니다.

 

노아가 아라랏 산에 도착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방주에서 끄집어내잖아요.

방주에서 끄집어 낸 그 세상은 새로운 세계라니까요.

그러니까 비둘기가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가져 오지요?

 

이상하지 않나요?

홍수 속에 다 잠겨 있다가 비둘기가 가서 가져 온 감람나무는 새 것이에요.

헌 게 아니고,

이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신천지라는 겁니다.

창조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아니, 아라랏 산의 이름이 창조라고 했잖아요.

그러니 방주가 노아를 창조의 땅인 신천지에 내려놓은 겁니다.

그 신천신지에서 살아가는 애기는 다음 시간에 하기로 합시다.

 

오늘 제가 하나님께서는 홍수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방주에 태우시고,

방주에 탄 그 백성들을 홀로 두지 않고 눈동자처럼 권념해서 지킨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예수를 믿고 갈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홀로 두지 않고 눈동자처럼 지키신다는 이 사실을 깨닫고 세상에서 힘들고 어렵더라고 기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왕손이라니까요!

세상 적으로 가진 것 좀 없어도 당당하세요.

여러분, 돈의 가치를 이기려면 돈을 초월해야 이기는 겁니다.

누가 돈 가지고 오면 여러분은 그 돈을 초월하는 마음으로 이겨내시란 말이지요.

 

어차피 이 땅에 사는 것은 각자 배역 맡은 대로 삽니다.

다 분복이라고 하잖아요.

 

드라마를 보면 어떤 사람은 회장 역할하고 또 어떤 사람은 늘 비서만 하기도 합니다.

전원주씨 보세요.

맨 날 식모만 하잖아요.

그래도 개런티는 받잖아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 그래요.

어떤 사람은 잘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못살기도 해요.

그렇지만 그것은 세속적 가치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배역이구나 하고 그 배역에 충실히 하다가 나중에 천국가면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면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석하라 한다니까요.

그 때 가서 주인이 차려 놓은 밥상을 열심히 잡수시면서 감사하며 살면 됩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그걸 지금 우리 교회에서 배워가잔 말입니다.

절대 세상 사람들한테 기죽지 마시고,

당당한 모습으로 나는 구원의 방주를 타고,

아라랏 산으로 항해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당당함으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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