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4강. 홍수에서 살아난 자들의 삶에 자세 (창 8:13-22)
-.정낙원 목사
어제 집사님이 밴드에 올려주신 6분짜리의 짦은 영화 ‘사이먼과 토마스’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요즘 노아 홍수 시대 설교에서 방주를 통해 살아난 우리를 보는 것처럼 감명을 받아서 좋았습니다.
아침에 설교 전에도 또 보고 올라왔습니다.
그런 걸 올리면 여러분들 답글도 좀 올리고 그래 주세요.
피리를 불면 춤도 추고 곡을 하면 울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소 닭 보듯이 하면 안 됩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기쁘면 기쁘고 뭔가 표현을 하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을 때
결국에는 그 은혜가 우리 안에서 찬송을 끄집어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 앞에 찬송받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창세전 언약에서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라고 그랬잖아요.
창세전 언약을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는데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가면 세세토록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이 땅에서 교회 안에서 그 감사함과 고마움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만물이 다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수단이니 영화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아야 합니다.
‘사이먼과 토마스’라는 영화의 내용을 간단히 리뷰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이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에요.
허구가 아니고 사실이에요.
미국에 있는 어떤 의사 부부 가정에 자식이 세 명 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에게 사춘기가 와서 가족 간의 대화가 단절되고 삭막해져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상황을 해결해 보고자 크리스마스 선물로 태국으로의 특별한 가족 여행을 계획합니다.
그래서 가족 모두 태국으로 갔는데,
마침 그들이 여행을 간 그 때가 2004년 태국에 쓰나미가 덮친 해 입니다.
30만 명이 죽은 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쓰나미 속에서 이들이 살아났습니다.
휴양을 하고 있는데 쓰나미가 덮친겁니다.
그 일로 인하여 온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졸지에 이산가족이 된 겁니다.
서로가 찾는 겁니다.
그러다가 사춘기인 아이가 사경에 빠진 엄마와 발견하고 구해냅니다.
엄마는 쓰나미 속에서 나무에 찔려 깊은 상처 때문에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큰 아이는 엄마를 병원이 두고 아빠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다가 아빠랑 동생들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가족이 다시 만나면서 하는 얘기가 가족과 같이 사는 삶 자체가 기적이라고 해요.
miracle(기적)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기적이라고 합니다.
쓰나미에서 살아나고 보니까 쓰나미에서 살아난 것이 기적이 아니고
진짜 기적은 온 가족이 함께 산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걸 알겠다고 해요.
이러면 우린 날마다 기적으로 살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우린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은 뭔가 큰 일을 겪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소함 속에서 여러분들이 기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뭔가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범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이 이 영화의 내용과 너무 흡사해서 제가 미리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홍수 속에서 살아난 이야기입니다.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방주에서 나온 그들에게서 제일 먼저 어떤 모습이 나올까요?
감사가 나오겠지요.
노아 홍수는 2004년도에 태국에서 일어났던 그 쓰나미와 비교도 안 되잖아요.
온 세계가 다 잠기는 그런 홍수 속에서 노아 식구만 살아났습니다.
그 방주를 통해서 살아났단 말이지요.
노아가 홍수 속에서 방주를 타고 살아난 것이 노아가 고안해서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살려냈잖아요.
이걸 노아가 알았어요.
그래서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에 제일 먼저 제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난 것은 우리의 잘남이나 능력으로 살아난 게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제사로 나타납니다.
어떤 제사를 드렸나요?
정결한 짐승을 잡아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렸습니다.
노아가 드린 제사 속에 노아의 신앙이 담겨져 있습니다.
노아가 살아난 것은 방주 때문입니다.
이걸 흠 없는 제물로 나타낸 것입니다.
홍수는 하나님의 저주의 비였어요.
그 저주를 방주가 맞았어요.
노아는 그 방주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방주가 마치 부정한 짐승들을 대신하여서 죽어서 하나님 앞에 드려진 정결한 제물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방주 속에 정결한 짐승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같이 태웠어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진 것은 정결한 제물이에요.
이는 정결한 제물의 죽음으로 부정한 것들이 살아난다는 뜻을 담고 있어요.
그러니까 노아의 방주 사건은 창세전 언약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무엇입니까?
거룩하신 분의 죽음으로 인해서 부정한 자(죄인)가 구원받는 것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노아 방주 속에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실어 놨습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서는 왜?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실으라고 했는지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홍수가 끝나고 노아를 방주에서 나오게 해서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드리게 함으로
아~! 하나님께서 정결한 짐승의 희생을 통해서 부정한 짐승을 살려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노아 자신이 부정한 짐승이 되는 겁니다.
자신이 살아난 것은 정결한 짐승 때문임을 안 겁니다.
하나님은 노아 가족에게 이걸 알려주기 위해서 정결한 짐승의 제사를 지내게 한 것입니다.
잘 보세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정결한 분의 희생을 통해서 부정한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 부정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자기 백성들입니다.
노아도 자기 백성이지요.
그럼 노아도 부정한 자이지요.
하나님이 노아처럼 부정한 자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정결한 자를 희생 시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 전체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다 부정한 자입니다.
이런 부정한 자가 살고 있다는 것은 정결한 분의 희생을 통해서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홍수에서 살아난 노아 가족을 가지고 뭔가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홍수 후에 이 세상을 존재케 하는 이유가 있어요.
노아 식구의 구원이 전부라고 한다면 홍수가 끝나고 난 후
노아 식구 여덟 명만 천국에 데려가고 이 세상은 끝내 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노아의 여덟 식구를 구원하고 재 창조의 일을 하십니다.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은 이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의 내용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풀어내는지를 설명을 해주기 위함입니다.
노아 방주 사건을 예수님 십자가 사건으로 남기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 아들에 희생입니다.
내 아들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너희들이 살아난 것을 아느냐 라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아는게 신앙이에요.
그러면 우리의 신앙도 자연적으로
내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가 나오는 것으로 가야 합니다.
감사치 못하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지금 뭔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과 기쁨과 이 은혜의 고마움을 모르면 교회에 올 이유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자라면서 철이 들면 부모의 은혜를 알듯이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입니다.
점점 그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깨닫고 감사를 하게 됩니다.
감사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억지로 감사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그렇게 가게 되어 있다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이 지옥 같은 역사 속에 우리를 두시고 나중에 천국에 데려가는 것은
결국엔 거기에 가서 어린양에게 세세토록 감사와 찬양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방주 속에 두 종류의 새가 나옵니다.
까마귀와 비둘기 입니다.
까마귀와 비둘기는 성격이 완전 다른 종류입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이 두 종류의 새를 밖으로 내어 보냅니다.
그런데 각기 다른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이건 두 부류의 인간을 예표하고 있어요.
이게 노아의 아들들 중에서 은혜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타나요.
레위기 1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부정한 것과 정한 짐승을 얘기할 때 까마귀는 부정한 짐승으로 얘기합니다.
반대로 성경에서는 비둘기는 제물로 드려지는 것으로 나타나요.
노아가 홍수가 끝나고 까마귀를 내보냈더니 돌아옵니까?
안 돌아 옵니까?
안 돌아 오지요.
떠나 버립니다.
그런데 비둘기는 돌아옵니다.
물론 비둘기도 나중엔 떠나지만 둘을 똑같이 내보냈을 때 비둘기는 물이 창일해 있어 있을 곳이 없어 돌아 왔고 두 번째 내보냈을 때는 감람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 왔고 세 번째 내보냈을 때는 떠나갔지요.
보세요.
까마귀는 노아의 홍수 속에서 살아났음에도 그 노아가 방주의 문을 열고 내보내니까
주인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영영 떠나 버립니다.
까마귀와 비둘기를 의인화 시켜서 한 번 보시란 말이지요.
마치 아브라함의 집에 육으로 난 이스마엘과 영으로 난 이스라엘이 있듯이
성경은 항상 그렇게 두 구조를 가지고 애기를 하고 있으니까 노아 방주 속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안에서 만물이 나왔다고 그러지요?
그러면 예수 안에서도 정한 자와 부정한 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해되지요?
노아 방주는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방주는 교회를 상징할 수도 있고 예수님을 상징할 수도 있고 다양하게 애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라고 생각을 해보세요.
지금 방주 안에서 까마귀도 나오고 비둘기도 나왔지요?
까마귀는 배은망덕하고 비둘기는 은혜를 아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것을 사람으로 생각해보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열 문둥이 고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 중 아홉은 병 고치는 은혜를 입고도 떠나 버리지만
한 명은 병 고침의 은혜를 입고 예수님에게로 나옵니다.
열 문둥이 사건을 노아 방주로 보세요.
까마귀는 영영 떠나버렸고 비둘기는 돌아왔습니다.
하나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을 그대로 교회로 당겨 보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이 예수를 믿고 교회를 나온다고 하지만 하나는 은혜를 아는 사람이 있고,
하나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홍수 사건은 하나님의 심판 사건입니다.
홍수가 뭡니까?
모든 것을 죽이는 것이잖아요.
그렇게 모든 것을 죽인 것은 방주 역시도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비를 방주가 맞았지요?
그럼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방주 때문에 살아났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받았어요.
예수님께서 방주처럼 저주를 한 몸에 다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살아난 자들이니까…
그러면 홍수 속에서는 모든 세계가 다 죽었는데
그 속에서 비둘기는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가지고 왔더란 말이지요.
이것은 죽음 속에서 살아난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감람 새 잎사귀’ 라고 할 때,
‘새’라는 단어의 뜻은 죽었던 나무속에서 다시 싹이 나온 것을 상징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홍수로 인해 산천초목이 다 죽고 모든 짐승이 다 죽었는데 거기서 싹이 하나 난 것입니다.
죽은 나무에서 싹이 난 것입니다,
그 나무를 예수님으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온 것은 노아에게 뭔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살아난 새로운 세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난 자가 됐습니다.
그러면 예수 안에서 살아난 자들이 어떤 마음으로서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지금 노아를 통해서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오니까
이 세상은 죽음은 물러가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왔구나 하고 방주를 열고 나옵니다.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제사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의 제사 속에는 노아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노아가 제사를 드린 것은 그냥 드린 것이 아니고
노아 자신도 마땅히 홍수 속에서 엄몰되서 죽어야 할 자인데
방주 때문에 자신이 살아난 것을 알고 그것을 제사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정결한 짐승이 죽음으로 인해 부정한 자들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노아 자신도 부정한 자로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정결한 분의 희생을 통해서 내가 살아났습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방주 정신이 지금 제사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적용을 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십자가를 통해서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이 됐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삶 속에는 노아의 제사와 같은 성격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알리고자 하는 것은 의로운 자가 죽어서 부정한 자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그랬지요?
그러면 이 교회 안에는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 정신이 무엇입니까?
정한 재물(의로운 자)가 죽어서 부정한 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정한 재물이 죽어서 부정한 자를 살려내는 것이고
이것이 창세전 언약의 메카니즘인데 그것을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가 살아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날마다 자기 자신을 죽음의 자리로 내어 주겠지요.
이것을 로마서 12장에서는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라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죽어서 부정한 자가 살아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말 이해됩니까?
내가 죽는다고 저 사람이 구원받는 거 아니에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인을 살려내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내가 살아났다는 것을 삶 속에서 늘 표현이 되고 표출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노아의 제사로 나타난 것입니다.
노아가 홍수 속에서 방주로 살아난 것을 제사로 표현한 것입니다.
제사는 노아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를 통해서 살아난 신앙고백들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 신앙고백의 삶이 노아와 같이 정결한 자의 죽음으로 부정한 자들이 살아난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하는 것은 우리가 뭔가 개과천선해서 영웅호걸이 되고 천사가 되는 그런 것이 아니고 날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깨달음이 삶 속에서 감사와 찬송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 번 보세요.
점심 먹으려고 끓여 놓은 감자탕 냄새가 온 교회를 진동하고 있잖아요.
그렇듯이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머금고 있으면
이 은혜가 우리 삶 속에서 툭 툭 튀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만들어 내라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노아가 이걸 시켜서 한 게 아닙니다.
방주 속에 있으면서 보니까 모든 것이 죽어 가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까 자신들이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노아는 나오면서 제사로 내가 산 것은 정결한 짐승으로 부정한 내가 살아났습니다 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노아 정신이 이제부터는 역사 속에서 계속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서 언약을 세웁니다.
이 노아 언약은 다음 시간에 살펴볼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구원을 해주시고 어떻게 지켜 가시는지 한 번 살펴봅시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 번째 찾아가는 내용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님을 두 번이나 만났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제자들이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찾아 가십니다.
고기가 있냐고 물으실 때 제자들은 한 마리도 못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니까 고기가 153마리 잡히고 그러잖아요.
사도 요한은 그 때 예수님께서 부활 후 세 번째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벌써 두 번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직접 나타나시고 서로 얘기를 한 것입니다.
만지고 했다니까요.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못 믿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으니까 죽은 그 예수만 알고 있는 겁니다.
부활한 예수는 하나의 관념인 것입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한 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면 고기 잡으러 안 갔겠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두 번씩이나 예수님이 나타났는데 떠나더란 말이지요.
그 이야기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그저 관념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고 그 죽은 예수님은 하늘나라 멀리 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다!
내가 너희들을 떠나 있는 게 아니고 너희들 눈에는 안보이지만
항상 네가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멀리 계시는 줄 알고 있지만
예수님은 항상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고기 잡는 사건들을 벌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나고 나니까 이 사실을 실감합니다.
예수님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과 함께 한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자를 고치고 나서
이 사람을 고친 것은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결국 너희들 눈에는 예수님이 안보이지만
그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조금 전에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했던 얘기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을 해보세요.
지금 신자들은 성경적 지식은 해박해서 잘 알아요.
그런데 실제 그 예수가 우리 삶 속에서 동행한다는 사실은 없습니다.
머리 따로 삶 따로 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힘이 없는 거예요.
실제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고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이 믿어지면,
범사 속에서 나같은 죄인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이 꺠달아 진다면 감사하면서 살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가 정결한 짐승으로 제사를 지내고 나니까
그 제사를 흠양하시고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하나 주십니다.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제부터는 물 속에 잠기는 심판은 당하지 않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정결한 재물의 희생을 통해서 살아난 사람들은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절대 물 속에 잠기는 심판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 바다에 빠져 죽지 않는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이 신약적인 의미에서는 비진리가 타락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잖아요.
노아의 홍수는 그냥 물 심판이지만 그 물이 신약으로 오면 진리 문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한 것은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했잖아요.
그 죄와 사망이 다른 말로 하면 비진리란 말입니다.
그 비진리 속에서 우리를 구원해 냈잖아요.
그럼 이 세상 자체는 전부 비진리라는 물 속에 잠겨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뱀이 입에서 물을 강같이 토해낸다고 합니다.
이 말은 지금 이 세상이 뱀의 말인 비진리에 잠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약속하시기를 방주 안에서 나온 이 사람들은 정결한 재물을 통해서 부정한 자가 구원을 받았다는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은 절대로 그 뱀이 강같이 쏟아내는 물 속에 잠기지 않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이것을 어떻게 말하는지 봅시다.
16장 15-18절입니다.
막 16:15-18=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보세요.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깁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는 자들에겐 하나님께서 어떤 표적을 준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내가 수용한다는 의미로 세례를 받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떤 표적을 주신다는 겁니다.
뱀을 집으면 무슨 독을 마시더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무슨 살모사에게 물려도 죽지 않는다는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세례라는 게 뭡니까?
물 속에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 바다를 건넙니다.
그 홍해 바다를 건널 때 어떻게 건넙니까?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이 뭐라 그래요?
그들이 다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를 건너는 것은 세례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말하면 노아 홍수 시대에 다 잠겨 죽었는데 그 속에서 살아난 노아의 식구를 상징합니다.
그들이 출애굽하면서 홍해 바다에서 다 빠져 죽어야 하는데
그들이 죽지 않은 것은 모세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모세가 방주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났단 말입니다.
이것을 신약식으로 살펴보면 우리도 세례를 받으면 다 죽어야 되잖아요?
우리가 죽어야 될 이 세례를 누가 받았어요?
예수님이 받으셨지요.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지요?
이것은 그 예수님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이 모두 포함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이 사건이 실제적으로 나타난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은 이것도 하나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세례가 죽음을 상징한다고 했잖아요
장사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물 속에 잠긴 것은 장사된 것, 죽은 것입니다.
홍수 속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누가요?
예수님이…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부활하심으로 살려냈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살아난 그 사람들은 어떤 표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표적들을 줬는데 이 사람들은 절대 물로서 다시 심판하지 못합니다.
그 물이 뱀의 말이고 독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얘기가 지금 그 말입니다.
다시 보세요.
막 16: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뱀을 집고 독을 먹어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뱀 사상에 안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지금 뱀은 교회 안에 강같이 물을 토해 놨습니다.
무슨 물?
혼합주의 물을 토해놨습니다.
노아의 홍수와 같이 하늘 위의 물과 땅의 물이 섞여서 홍수를 이루듯이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섞어서 홍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비진리가 홍수를 이루는 것이 어떤 사상입니까?
예수도 믿고 행함도 하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믿음 + 행함 = 온전한 믿음
이것이 곧 뱀의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이러한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했어요.
갈라디안 신앙이 ‘믿음 + 율법 지킴 = 온전한 것’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온전한 것은 율법 지킴으로 온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 거짓 선지자들이 거기에 인간의 행함을 끼워 넣었습니다.
동등한 위치로 둔다 말이지요.
그것이 지금 이 이대 교회 안에 ‘믿음 + 행함’이라는 신앙이 가르쳐 지고 있단 말입니다.
어제 제가 블로그에 올려 놓은 글 속에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제가 참 감사한 것이 글을 쓸 때 어떤 사건들을 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이 안 풀려서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에 수요일 저녁에 예배 끝나고 갔더니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나오고 있는 겁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불교 사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의 노력으로서 내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깨달아 내가 신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건너가자 건너가자 깨달음으로 그 세계로 건너가자’ 이거든요.
쉬운 말로 이생을 떠나 신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노력과 힘으로 득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본주의 사고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사상 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입니다.
히브리즘 사상은 은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으로서는 절대 구원을 이룰 수 없고 구원은 구원을 하시는 분에 의해서만 주어진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헬레니즘 사상은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즘은 신이 인간을 찾아 오고,
헬레니즘은 인간이 신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교 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고,
불교 사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도 인간이 노력하고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이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란 말입니다
내가 열심히 득도를 하면,
내가 도를 깨달으면 내가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무엇을 믿을까’가 없고 ‘무엇을 할까’만 있어요.
그런데 지금 그 사상이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는 무엇을 믿을까는 없고 무엇을 할까만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마다 어떤 행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교회가 인간의 행함을 가르치는 불교가 됐는가요?
행함을 가르쳐야 인간들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쳐서 하는건 불교에요.
기독교는 깨달음이 감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사를 지내고 한 것이 누가 가르쳐서 한 것입니까?
아니지요.
노아가 감사해서 그렇게 한 것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안에서 일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은혜에 감격해서 하는 사람이 있고,
억지로 하는 사람이 있어요.
억지로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가 한 일에 대한 가치를 챙기게 되어 있어요.
그걸 힘으로 삼고 큰 소리를 쳐요.
이 시대 교회 안에는 뱀의 말들이 진리처럼 회자되고 있어요.
‘믿음 +행함’이 온전한 신앙인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절대 그런 비 진리라는 뱀이 토한 물 속에 잠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보세요.
하나님께서 물 속에 잠기지 않게 한다는 약속을 누구에게 합니까?
방주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합니다.
이 말은 정결한 재물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은 너희들은 절대로 내가 지켜주겠다는 것입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우리는 창세전에 이 땅에 올 때부터 언약을 하나 담고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묵시라는 창세전에서 역사로 내어 보낼 때 전부 하나의 언약을 담고 내보냅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는 그 언약이 담겨 있습니다.
그 언약은 우리가 이루어 가는 게 아니라 언약을 하신 분이 이룬단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시는 것은 이 세상 자체를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그 얘기가 아니고 물 속에서 구원을 받은 너희들은 다시는 물로 심판당하지 않게 너희들을 지켜주겠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살아난 자기 백성들은 절대로 뱀 사상과 같은 비진리에 현혹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 복음을 알고 지키는 것은 우리 능력으로 지키는 게 아니라니까요!
믿음을 지키는 것은 내가 지키는 게 아닙니다.
그 믿음을 주신 분이 지켜주기 때문에 지켜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요만큼이라도 믿음을 지키는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 왕이 무수리에게 성은을 입혀 줬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무수리가 용정을 품고 임신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그 무수리는 왕이 지켜줍니다.
왜요?
그 무수리 속에 왕의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속에 예수의 생명을 심어놨습니다.
그러면 이 예수의 생명을 잡아먹고자 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용이 잡아먹으려고 하잖아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용에게 잡아먹히지 않게끔 자기 백성은 지켜주신단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지켜내고 살아내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도 아니고 우리가 힘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그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만큼이라도 사는 것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에 대한 고백이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고 싶어하시는 겁니다.
방주에서 살려 놓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너희들 어떻게 살아났는지 아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셔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라는 것을 가르치고 싶으신 겁니다.
이 정신을 모르면 살아난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세 아들에게서 나타납니다.
노아의 세 아들에게 나타날 때 어떤 식으로 나타납니까?
하나님께서 또 노아를 타락된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냈을 때 셈과 야벳은 덮어 주고 함은 비웃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비웃은 함을 저주를 해버립니다
이 이야기는 함은 홍수 속에서 살려준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덮어 줘서 살려줬는데 함은 그 덮어줌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건 다음 시간에 상세히 설명 드릴게요.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는 지금 홍수 속에서 방주 때문에 살아난 자들입니다.
그 방주가 우리를 살려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난 자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송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는 것 자체가 감사고 찬송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설교 초두에 영화 한 편 얘기를 했지요?
그 쓰나미 속에서 살아난 사람들의 고백이 뭐였습니까?
가족과 함께 산다는 그것이 곧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이만큼이라도 믿음을 지키고 사는 것이 기적이에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내가 환경적인 것을 세상적으로 판단해서 잘 사느냐 못 사느냐를 따지지 말고
잘 살아도 은혜고 못살아도 은혜인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저주받아 죽어야 할 자들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으로 용서받고 산다는 이 자체만으로도 감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저주 속에서 살아났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물에 빠진 놈 건져 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입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왜 나를 이렇게 살게 합니까 라고 불평을 합니다.
어렵게 살고 있다는 것을 불평하고 원망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 홍수 속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홍수 속에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홍수 속에서 살아났다는 것을 놓치게 되면 보따리를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에서 구원을 받은 이 식구들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 고백이 정결한 짐승이 죽음으로서 부정한 짐승들이 살아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제사가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부정한 우리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계시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맞어,
내가 부정한 자였는데
이런 부정한 자가 정결하신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살았구나 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잊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두 번 씩이나 경험하면서도 도망갔듯이
그들을 끝까지 찾아 와서 다시 예수님의 것으로 불러내잖아요.
성령이 오고 나서 보니까 자기들은 도망갔던 자들인데
예수님이 다시 찾음으로 인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개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세요?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나서 자기들이 하는 일들이 자랑거리가 아니고
하는 일들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주의 은혜가 한 일이라는 것이 고백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우리에게 적용을 시켜봅시다.
저와 여러분들이 잘 사느냐 못사느냐 하는 것은 비본질적인 문제고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잖아요.
이 사실을 안다면 여러분이 잘 살아도 못 살아도 그 속에서 감사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건강하든 아프던 감사가 나와야 한다니까요 왜?
우리는 이미 홍수 속에서 저주받아 죽어야 할 자들인데,
그런 자가 살고 있다는 자체가 고맙고 감사함이지요.
그래서 홍수 속에서 살아난 자들은 내가 마땅히 저주받아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하는 것을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몰라요.
그러나 신자는 알고 있단 말이지요.
그것이 예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고 그것이 전도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안 받겠지요.
그들이 안 받는다고 여러분들 삐지지 마세요.
그 사람들이 받고 안 받고는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 준 사람은 들을 것이고 안 열어 준 사람은 못 듣는 거에요.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그 결과까지 책임지려 하시지 마세요.
한 사람을 구원하고 안하고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에요.
우리는 단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입었습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면 되는 것입니다.
간증하는 것입니다.
행여 나는 아는데 왜 너는 모르느냐 이러면 지금 그 사람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복음을 깨달은 것이 자기 실력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모습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는 법이 나가면 안 됩니다.
계속 은혜가 나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여러분들의 마음에 들지 않고 여러분의 생각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한 사람을 비판 정죄할 것이 아니라 나도 저래야 하는데 어쩌자고 하나님의 은헤가 내게 덮쳐 와서
복음이 들려지고 깨달아지는가 하는 거기에 감사를 해야지요.
그런데 우리는 감사를 하기 보다 깨달은 것으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잖아요.
이건 아니에요.
항상 기억을 해 보세요.
홍수 속에서 지금 노아의 식구들이 살아났습니다.
다 죽어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 살아난 자들이 할 것이라곤 하나 밖에 없습니다.
뭐에요?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땅히 저주받아야 하는데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교회가 하나의 절간같이 되어 버렸는데
교회 안에서 비진리가 선포되면 여러분들은 그것을 분별하세요.
분별을 하되 비진리 속에 있는 자들을 여러분이 무시하거나 깔보면 안 된단 말이지요.
그들이 그 비진리 속에 잠기고 싶어 잠겨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잠기게 했기 때문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물어 봅시다.
노아 홍수가 났을 때 그 혜엄 잘치는 돌고래가 왜 죽었을까요?
물 속에서 사는 것은 물이 많으면 거기가 자기 천국이 될 텐데,
그런데 거기서 죽었어요.
왜? 죽었습니까?
하나님이 죽게 하니까 죽는 거에요.
그럼 살아난 것은?
하나님이 살게 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방주 속에 부정한 짐승과 정결한 짐승을 태워놓고 가르치는 게 그거에요.
우리가 다 부정한 짐승들입니다.
내가 더럽고 부정한 놈인데
이런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정결한 재물의 희생 때문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새로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자세이어야 해요.
내가 지금 저기에서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나 대신 정결한 짐승을 죽였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 정결한 짐승의 죽음을 통해서 내가 살아난 것을 깨닫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정결한 재물의 희생 때문에 사는 것이기 때문에
잉여 품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내가 살아야 할 자가 아니고 마땅히 십자가에 저주 받아 죽어야 하는데
내가 달릴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신 것입니다.
그 사실이 성령이 오니까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감사가 나오고 고마움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뭘 잘하고 못하는 것 없이 범사 속에서 주여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소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것입니다.
지극히 미미한 것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해요.
그 은혜를 보면서 여러분들 입에서 감사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살기 힘들다 뭐다 생각하지 말고...
세상 자체로 보면 희망이 없어요.
세상 것에 마음이 뺏기지 말고 이런 세상 속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은혜구나를 아셔야 합니다.
그 은혜를 감사해야 한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그거에요.
그래서 감사치 못하는 자는 죽은 자에요.
지금도 홍수 시대와 마찬가지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시잖아요.
내가 다시 올 때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잖아요.
그 말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자기 좋은 대로 결혼하고 있는 것도 있겠지만,
지금의 영적 모습이 노아의 홍수시대와 똑같은 거에요.
인본주의가 판치는 홍수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나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를 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방주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는 자기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제사의 모습이 정결한 짐승의 죽음으로 부정한 짐승이 살아났듯이
내가 사는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살고 있구나를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있어도 감사 없어도 감사,
범사가 감사가 되어지는 그 모습이 우리가 뱉어내야 할 신앙인 것입니다.
제발 여러분들이 현실이나 환경 문제로 하나님 앞에 좋고 나쁘고를 따지지 말고 세상에 미련두지 마세요.
저는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어요.
스스로 말씀 앞에 한 번 세워 보세요.
말씀 앞에 잘난 인간이 있는지 한 번 보세요.
우리는 말씀 앞에 서면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
‘애모’라는 노래가 있지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 예수라는 그대 앞에 서면 난 작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우리를 키우려 하잖아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욥과 같이 하나님의 일을 보고 그 앞에서 입을 닫아야 한다니까요.
할 말이 없어야 해요.
이런 자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놀라야 합니다.
그러한 모습의 신앙이 찬송하는 신앙이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그거 바라시는 겁니다.
범사 속에서 남편이나 아내가 조금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래!
이건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니까,
세상 것은 다 템프로리(임시)야,
실상은 하늘에 있어! 그러고 사세요.
중요한 것은 죄악의 홍수 속에서도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은혜라는게 깨달아지고,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진다는 그것에
감사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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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 > 창세기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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