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5강. 노아 언약과 무지개 (창 9:1-17)
-.정낙원 목사
벌써 2013년도 마지막입니다.
세월이라는 것이 언약에 따라 흘러갑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영적인 의미에서는 묵시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 몸은 역사라는 굴레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세월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우린 모두가 올 한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이 시간 지난 한 해를 마감하면서 올 한 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많은 지
한 번 헤아려 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창세기를 강해 해 오면서 우리는 참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2년 동안 9장까지 공부를 해 왔는데,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서 참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12장 까지가 어떻게 보면 성경 전체를 축약하는 것이라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이 참으로 오묘한 것은 각 장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이 전 성경을 함축하고 있어요.
2-3장으로 오면 이게 또 전 성경을 말하고 있어요.
근데 이것이 1장부터 연결이 되어 2장과 3장으로 이어지고 4-5장이 또 그래요.
그러다가 6-7장에 노아 홍수로 심판 당하여 역사를 마감하는가 싶으면
8장에서 노아부터 시작해서 12장 아브람을 부리면 또 다시 시작이 되어요.
그런데 이것이 1장부터 12장까지 연결하면 또 하나의 연속적인 이야기가 되어요.
성경이 아주 신기한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지혜로 쓰라고 하면 이렇게 쓸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성경이 창세전 언약이라는 큰 시나리오로 보여진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워요.
이 성경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땅강아지처럼 땅의 일만 생각하다 그냥 갔을 텐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어서
이 역사 세계 바깥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들을 이야기 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성경을 몰랐을 때는 내 존재를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이 땅이 전부인줄 알고 살았어요.
그런데 성경을 열고 보니까 내 존재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를 나로 있게 한 그 분이 있더란 말이지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오는 세상이 있더란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은 첫째로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배우는 것이고,
둘째로는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하여 배웁니다.
그리고 나를 존재케 하신 그 분이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이렇게 존재하게 된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워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을 배우는 겁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어서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구원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자로서는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더 많이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많이 알수록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란? 사람과 사람의 사귐과 같은 것이에요.
바울이 지금 그런 기도를 하는 겁니다.
좀 더 하나님을 많이 알라는 것입니다.
오래 사귄 사람일수록 친분이 두터워지잖아요.
처음 만난 사람은 본능적으로 경계를 해요?
그러나 오래 만난 사람은 흉허물 없이 다 털어 놓잖아요.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친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제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겠다고 합니다.
친구가 누굽니까?
속 터 넣고 이야기하는 사이잖아요.
여러분들은 속상한 것이 있으면 누구에게 말합니까?
친구에게 하잖아요?
내 맘을 다 드러내고 말 할 수 있는 사이가 친구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 합니다.
이는 속 마음을 다 털어 놓겠다는 뜻입니다.
종에게는 비밀을 말하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는 내 친구다 라고 했을 때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얘기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비밀을 공유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 비밀들을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털어놔 주겠다는 거예요.
그 일을 하려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에서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다른 보혜사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 그가 오시면 그가 너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할 것이고
나에 대하여 다 알려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50일 만에 오셨잖아요.
이 성령이 오시고 나니까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이야기들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그동안 우리는 성경을 많이 봤어요.
어떤 분들은 수십독(數十讀)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일독(一讀)을 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일독(一讀)도 못한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좌우지간 이 성경을 봤을 때 그 동안에 우리는 막연했는데 어느 순간 이 성경이 깨달아 지더란 말이지요.
저도 과거에 율법 아래에서 성경을 참 많이 읽었습니다.
수십 독을 했지만 그 때는 그냥 소설책을 보듯이 보았어요.
그냥 이스라엘의 역사 애기로 보이는 거예요.
창세기는 이런 이야기이고,
출애굽기는 이런 이야기이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게 이런 일이 있었구나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냥 남의 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제게 임하고 나니까
이 말씀이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로 들려지던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간섭하신 하나님이 나를 간섭하고 있음이 믿어지는 겁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뛰어 들어서 일을 해 가시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 이야기가 수 천 년 전의 과거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현재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풀어지더란 말입니다.
과거에 율법 아래 있을 때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제가 욕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섭을 해 주고 눈으로 보여 주고 손으로 만진 바 되게 해줬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배도할 수 있는가 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성경을 볼 때마다 에이 나쁜 놈에 새끼들,
그렇게 하나님이 도와주셨는데도 돌아서고 나면 타락한다고 저주 받아도 싸다고 했어요.
근데 말이죠.
제가 은혜를 받고 보니까 그 인간이 나더란 말이지요.
내가 바로 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었던 겁니다.
광야에서 매일 만나 얻어먹으면서도 원망하고 불평하는 그 인간이 바로 나더란 것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소서! 죽이소서! 외치던 사람이 바로 나더란 말이지요.
이 성경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로 들려지니까
그 성경 이야기 속에 나오는 수많은 죄인의 모습들이 바로 나라는 것이 깨달아 지니까
그 때부터는 성경을 보는 것이 달라지는 겁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내가 죽일 놈입니다.
그런데 이런 죽일 놈이 용서받고 은혜 받고 살고 있단 말입니다.
이게 감사한 거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는데도 버리지 않고
기어코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서 구원을 해 내더란 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육십만이 나왔는데,
이들이 광야에서 몽땅 다 죽고 가나안엔 다시 태어난 육십만이 들어갔어요.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광야에서 다 죽고 새로 난 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요?
이건 저와 여러분들이 아담 안에서 태어난 나는 죽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내가 천국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내가 이 땅에서 실패한다고 해서 그건 실패가 아니라
그 실패를 넘어서서 하나님께서는 기어코 나를 구원해 내더란 말이지요.
성경 속에서 그것이 믿어지니까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 꼬라지가 비록 이럴지라도 이 꼬라지를 넘어서서 구원해 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이라는 것이 깨달아지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제발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이 성경을 그냥 남의 이야기로 들려지면 안 됩니다.
노아 시대의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로 들려지면 안 된단 말입니다.
노아가 홍수 속에서 방주를 타고 살아났다 하더라…
남에 이야기 하듯이 하면 안 됩니다.
그 방주가 누구냐?
지금 이 시대에 와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사는 이 시대엔 거짓 사상이 물밀듯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비진리가 홍수를 이루고 있는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우리 성도를 위해서 이 복음이 들려지게 하고,
예수그리스도가 믿어지게 하고,
그 속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고 구원하는 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 노아의 사건이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사건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통해 구원의 은혜를 입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정결한 제물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노아가 지낸 제사는 그 자체가 노아의 신앙 고백이에요.
그 이야기는 결국 나 같은 죄인이 살아난 것은 정결한 분의 희생을 통해서 살아났습니다! 라는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노아 시대에 심판의 저주를 쏟아 부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해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했을까요?
창세기 5장에 보면 그 당시에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가인은 땅의 기업을 주고, 셋의 후손은 하늘의 기업을 줬습니다.
그런데 셋의 후손들이 땅의 기업을 받은 가인의 후손들의 삶을 보니 너무 부러운 겁니다.
그래서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과 결혼을 하는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땅에서 잘 살고 싶어서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과 결혼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야 할 성도들이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아가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보세요.
성도가 세상과 짝하는 것이 간음하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 나라의 언약을 받았습니다.
땅에 분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가인의 후손들은 땅에서 승승장구 영웅호걸들의 모습들로 그려져 있는데,
셋의 후손들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라는 역사로 기록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셋의 후손과 같이 하나님의 언약의 후손들은
이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자꾸 빼내는 일들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범죄 한 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저주한 것이 뭐였습니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입니다.
죄는 우리를 흙에 붙잡아 놓는 것입니다.
죄라는 놈은 우리를 흙에 가두는 일들을 합니다.
그런데 구원은 흙에서 빼내는 일들을 합니다.
우리 몸뚱이는 흙에서 났기 때문에 끊임없이 흙의 것을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본능적으로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예수를 잘 믿어도 육신은 눈만 뜨면 땅의 것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아무리 예수님께서 이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 구하지 말아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해도 ‘아이고, 주님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 몸뚱이가 그렇게 안 됩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는 진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라는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스스로가 흙을 벗어나지 못하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크레인처럼 우리를 하늘로 들어 올려서 구원을 해내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로 빼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외부의 힘 있는 세력이 강제로 끄집어서 건져내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죄 때문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일날 놀러 가지 않고 이만큼이라도 나온 것은 그만큼
주님이 여러분 속에서 세상의 정을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온 여러분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 오게 하신 그 분께 찬양을 하셔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 날씨도 추운데 여기까지 온 제가 기특하지요? 가 아니라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 내가 예배드릴 수 있게 방해거리 없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렇게 고백하셔야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있었든지 간에
지금 내가 이 예배할 수 있는 자리까지 와 졌다는 이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적 속에 삽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러한 것을 기적으로 안보잖아요
당연한 것으로 여기잖아요.
왜 당연하게 여기는가 하면 인간들은 우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성이라는 것은 항상 고정된 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줬으니까 내일도 주겠지 하는 것이 고정된 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조차도 자기 틀 속에 가둬서
‘지난 번에 이렇게 했으니까 이번에도 이렇게 하면 주시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제가 비유를 하나 들게요
만약에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면 교회가 부흥된다고 합시다.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저보고 40일 금식기도 하면 교회가 부흥한다고 말해주었어요.
그 때 개척할 때인데,,,
그래서 제가 금식기도해서 교회가 부흥했다고 칩시다.
그럼 그 다음부터 나는 금식기도하면 교회가 부흥한다는 방법론으로 목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 시키려면 금식기도 들어가요.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 그렇게 하면 있던 사람도 나가 버리게 만들어요.
이건 내가 생각하지 않던 일이에요.
내가 알던 공식이 아닌 겁니다.
그러면 전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라고 따지겠지요.
그럼 하나님이 야 이놈아 내가 니 시다바리가
내가 왜 니가 만든 법을 따라야 하는데 라고 하면서 내 기도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하나님이 내 안에 우상성을 깨트리기 위해서 내가 만든 공식을 깨트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도 자기 틀 속에 가두고자 해요.
그래서 우리는 은연중에 이렇게 하니까 복을 받았다 라는 식의 간증들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간증을 하면 꼭 그 간증한 사람대로 하려는 사람들이 일어나요.
한국교회에서 간증되는 대부분의 레퍼토리를 보면 비슷비슷해요.
교회 봉사하면 복 받는다.
기도 열심히 하면 병 고쳐진다.
전도 열심히 하면 사업도 잘 된다.
목사님 말씀 순종하면 복 받는다.
목사들이 이런 사람들을 간증시키는 것은 교인들도 본 받으라고 하는 거에요.
교회를 세워가는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것이지,
목사의 어떤 테크닉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우린 목회를 테크닉으로 하려고 해요.
방법론을 강구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을 무장해제 시키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택한 백성들에 한 해서에요.
우리가 우상숭배식으로 기도하면 도리어 정 반대의 일들을 발생 시켜서
그런 기도를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율법 아래 있을 땐 기도를 엄청 많이 했어요.
그 때는 이상하리 만치 기도 응답이 재깍 재깍했어요.
그땐 기도만 하면 이루어졌어요.
신기 할 정도로,,,
근데 이게 어느 정도 지나니까 기도 하면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나요.
일이 자꾸만 꼬여요.
그래서 나중에는 우리 집사람이 기도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기도 응답이 잘될 때는 무슨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라고 하더니만
기도하면 이상하게 일이 꼬이니까 기도하지 말라고 해요.
그러니 그동안 나는 기도를 내 소원성취용으로만 이해한 것입니다.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 겁니다.
이게 다 믿음이 없고 내 안에 우상성으로 하나님을 이해 하여서 그래요.
이건 마치 엄마가 어린 아이가 흥~ 하고 떼쓰면 과자 사주고 할 때에요.
커서도 흥! 하고 떼를 쓰면 머리를 쥐어박아요.
이 새끼가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느냐고 후려 패요.
왜? 이런가요.
이는 우리가 만든 법을 깨트리기 위함입니다.
내가 알고 있던 공식을 버리고 하나님 은혜를 구하게 만들어요.
내가 잘 나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요.
신앙이 깊어지면 내 뜻대로 안 살아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사는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걸 알게 되어요.
노아의 가족도 마찬가지에요.
홍수 속에서 살아난 노아의 가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주셔서 사는구나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잘나서 홍수 속에서 살아났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홍수 속에서 살아난 노아의 가족에게 죄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희는 내 은혜로 산다는 것을 잊지 못하게 하려고
정결한 제사를 흠향하시고 난 후 무지개로 언약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무지개 언약은 잠시 후에 설명 드리고...
마귀는 항상 우리에게 다가와 스스로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들입니다.
피조물 자체가 창조주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지 피조물이 독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뭐라 그러던가요?
공중 나는 새를 봐라!
새들이 자기들 힘으로 살았나요?
아니지요.
하나님이 살려주신 것입니다.
들에 백합화를 봐라!
백합화가 스스로 길쌈하고 그랬나요?
아니에요.
하나님이 입혀 주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들의 풀을 보고 하늘의 새를 보고서도 그것을 모르고 산단 말이지요.
우린 모두 내 힘으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눈만 뜨면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곤 합니다.
물론 우리 인간이 살면서 계획을 세우고 꿈을 가져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 꿈이나 계획들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세요.
그 꿈이 하나님의 뜻에 안 맞으면 깨뜨려 버리시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시대에 홍수 속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쳐 줍니다.
과거에 너희들이 살았던 방식으로 살지 말라고 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양식을 주신 것입니다.
홍수 이후에 뭘 먹게 합니까?
고기를 먹게 하지요?
제물의 고기입니다.
홍수 이전엔 고기를 못 먹었어요.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각 피조물들에게 양식을 주십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주실 때 우리 인간들은 채소와 열매를 먹게 했는데,
홍수 이후에는 양식을 바꿔주는 일을 하셨어요.
이제는 고기를 먹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기는 모두가 제사를 지내고 난후 제물의 고기를 말해요.
고기는 먹되 피는 먹지는 말라고 합니다.
피는 생명이니 절대로 먹어선 안 된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사를 지낸 제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너희들이 지금 살고 있는 것은 흠 없는 제물의 희생 속에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피를 뭐라고 하는가요?
생명이라고 하지요.
이는 너희는 흠 없는 제물 때문에 산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사의 고기를 새로운 양식으로 주신 것입니다.
고기는 먹되 피는 먹지 마라,
여기서 고기는 아무 고기를 잡아서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노아가 제사를 드렸던 희생재물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근거로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가 그 고기를 먹기 위해선 죄 없는 고기가 죽임당하는 거지요?
그걸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는 바탕에는 반드시 희생당한 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노아를 통해서 다시 언약을 맺잖아요.
그 제사를 통해서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이게 신약에 오면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로 맺는 새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노아 언약은 예수님의 새 언약을 겨냥하고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에 무엇을 가지고 하셨습니까?
떡과 포도주입니다.
이 떡은 내 살이다!
그리고 이 피는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대속의 피라 하면서 새 언약의 피라고 했어요.
성경에서 피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피는 우리가 먹으면 안돼요.
이건 하나님의 것이라니까요.
그리고 예수님의 살인 고기는 그 피로 용서받은 자들이 먹어야 할 양식인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들은 그 고기를 먹음으로 인해
내가 피 흘려 주신 그 분 때문에 살고 있다는 사실들을 깨닫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기를 먹으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죽어주신 희생을 통해서
내가 용서 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누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셨습니까?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죽는 것인데 이것이 누구에게 드려지는 겁니까?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이게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지만 과거에 우리가 제사를 지냈지요?
제사를 지낼 때 술을 따라서 누구에게 드립니까?
조상에게 드리지요?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음식은 누가 먹나요?
우리가 먹잖아요.
이렇듯이 예수님께서 피는 아버지에게 드리고 살은 우리에게 먹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예수님의 살을 먹으면서,
맞아, 내가 죄인인데,
내 죄가 예수님이 대신 피 흘려서 용서 받았고,
이런 용서받은 자가 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그 은혜 때문에 살고 있어, 라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만찬을 기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념이란? 과거에 사건을 현재화 시키는 거예요.
늘 오늘날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노아가 흠 없는 재물을 드려 제사를 지낸 것을 근거로 삼아서
“무지개 언약”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노아 언약” 이라고 합니다.
노아 언약은 “은혜 언약”입니다.
홍수 이후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죄관이 달라졌어요.
이제부터는 죄가 뭐냐?
홍수 이전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것을 죄로 추궁했어요.
그러나 홍수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어떤 잘못으로 인해서 심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요?
이는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난 너희들 기대 안 한다는 말이에요.
이제부터 인간들 하고 상종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홍수 속에서 살아났지만 살아난 그 인간도 여전히 육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죄를 이기질 못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흠 없는 제물하고만 상대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흠 없는 제물로 언약을 맺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들의 행동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심판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홍수 심판 이후에 죄는 정결한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에요.
은혜를 모르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 이 시대로 말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왜 죄가 되는가 하면
그들이 지금 노아 언약의 혜택을 입고 살고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안 믿는 것입니다.
노아 언약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생겼나요?
흠 없는 제물의 희생을 근거로 생긴 것입니다.
이 시대 이 세상이 존속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 때문입니다.
물어 봅시다
이 세상이 어떻게 존속이 되고 있나요?
언약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지요.
그럼 예수님께서 구원하는 일들이 끝이 나면 이 역사는 존재할까요?
존재하지 않겠지요.
쓸어버리시겠지요.
다 태우겠지요.
지금 이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여전히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6장을 보면 천상의 성도들이 세상을 멸하게 해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너희와 같이 너희 동무들의 수(數)가 찰 때까지는 잠깐 기다리라 하는 것입니다.
그 수(數)가 다 차면 어떻게 되나요?
이 세상을 끝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현재 이 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숫자가 아직 안찼다는 것입니다.
차면 심판 할 겁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자들은 아는데 세상 사람들은 몰라요.
그래서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의 죄는 다른 것 아닙니다.
제물의 희생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것이 죄란 말입니다.
그래서 노아 아들들 속에서 그 덮어줌을 모르는 함을 하나님께서 저주해 버린 것입니다.
그럼 노아 언약이 우리 가운데 어떤 식으로 다가오는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는데
다시는 물로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무지개를 주시잖아요.
무지개가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을 상징합니다.
무지개가 떠오르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마땅히 저주받아야 할 자들인데 그 저주를 받지 않고 있는 것은
정결한 재물의 공로 때문에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무지개가 신약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셔야지요?
요한계시록 10장과 4장을 봅시다.
계 10:1절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계 4:2-3=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잘 보세요.
하늘을 밟고 땅을 밟고 계신 분이 있지요.
누구신가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모습이 어떤가요?
무지개가 예수님의 머리를 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좌를 보세요.
무지개가 둘러져 있지요.
왜? 예수님 머리에 무지개가 있고 보좌에 무지개가 둘러싸여 있는가요?
이는 예수님께서 노아 언약을 성취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에서 살아난 자들에게 언약을 세웠는데
그 언약을 무엇을 근거로 해서 세웠다고 했습니까?
정결한 재물이 죽어서 세운 거지요.
그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지개를 천상에 계신 예수님이 둘러쓰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무지개 언약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조금 어려운 말을 하니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언약(言約)’과 ‘약속(約束)’을 아셔야 합니다.
같은 말 같지만 차이가 있는 말입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하신 약속을 말해요.
이 때는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이에요.
이건 하나님이 이렇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지키세요.
그 언약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오신 분을 일컬어 약속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언약 하신 것을 지키려고 오신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내가 앞으로 이렇게 할 것이라는 거잖아요.
그 언약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에는 약속이라는 말이 안 나옵니다.
전부 언약이라고 합니다.
약속은 신약에 와서 나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구약은 언약을 이루실 분이 아직 오시지 않은 시대에요.
약속은 언약을 이루실 분이 오셔야지만 사용 할 수가 있어요.
쉽게 말할게요.
언약은 하나님께서 나는 이런 식으로 일을 할 것이라는 하나의 시나리오와 같아요.
이 시나리오를 구체적으로 그려내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배우가 있어야 하지요.
시나리오는 그냥 글이지요?
그런데 그 시나리오를 찍을 때는 실제 셋트가 만들어지고 배우가 투입이 되지요?
이와 같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실 것인지 시나리오와 같아요.
그 시나리오를 역사 속에서 실제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것을 약속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언약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하신 것이고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실제적으로
이루어 내실 분과 한 것을 말해요.
이해되세요?
다시 말합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나는 이렇게 일을 할께 라는 하나님의 맹세입니다.
그러면 실제 그 일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잖아요.
아까 제가 모든 언약은 누가 지킨다고 했어요?
하나님이 지키신다고 했지요?
그러면 그 언약을 역사 속에서 펼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 계시면 안 되어요.
역사라는 필드에 오셔서 그릴 수 있는 모습으로 와야 해요.
이게 성육신이에요.
그래서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세상으로 오시면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창세전에 아버지께서 세운 언약을 실제적으로 이루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약속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약속의 후손이라 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후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맺은 그 언약을 하나님의 언약을 구현해 내기 위해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 땅에서 실현해 내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언약이라 하지 않고 약속이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잘 이해하세요.
그런데 자 보세요.
지금 요한계시록에 보면 무지개가 있는데 요한 계시록 4장 2-3절을 다시 봅시다.
계 4:2-3=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하나님 보좌에 보니까 무지개가 있지요.
그 무지개가 어떻게 되어 있나요?
무지개가 보좌를 둘렀다고 하지요.
그림을 잘 보세요.
(그림 설명)
원의 모양입니다.
반쪽이 아니고 동그랗게 완전히 있는 것은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 있는 이 무지개는 어떤 모양입니까?
반쪽만 있지요?
반쪽이라는 것은 아직 언약이 미완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노아 언약으로 무지개 언약을 줬지요?
그럼 이 언약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구현이 되어야하지요?
구약 시대는 노아 언약이 아직 역사 속에서는 미완료로 되어 있어요.
이건 예수가 오셔서 완성하여야 해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약속이라는 말이 안 나오고 언약이라는 말만 나오는 것입니다.
약속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언약을 성취하실 분으로 오셔야 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약속의 후손으로 오셨어요.
오셔서 노아 언약을 구현해 내십니다.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보좌에 앉으셨어요.
그래서 하늘 보좌에는 무지개가 반쪽으로 있지 않고 빙 둘러 온전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창세전 언약이 완전한 이 무지개 언약인데
이 완전한 언약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반쪽으로 미완료로 있어요.
그래서 노아 언약의 무지개는 반쪽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 미완료를 누가 완성을 시킵니까?
예수님께서 완성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 보니까 예수님이 무지개를 둘렀고
하나님의 보좌가 완전히 무지개로 둘러싸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언약 자체를 영원한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는 노아 언약을 근거로 해서 다스려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노아 언약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흠 없는 제물의 희생이지요?
그러니까 그 흠 없는 제물의 희생을 알기 위해서 피는 먹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기를 먹게 함으로서 희생 제물과 노아의 가족과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홍수 속에서 살아난 이 가족들과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드렸던 흠 없는 제물과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이 언약을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하신 언약을 예수에게 묶어 놓은 것입니다.
이걸 약속이라고 합니다.
약속이라는 말은 ‘묶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언약도 마찬가지이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그 의미는 조금 달라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묶어 놓은 것을 언약이라 하고,
그 언약을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실 분과 묶는 것을 약속이라고 하는 거예요.
큰 틀에서 보면 다 같은 뜻이라서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되지만 구체적인 의미로 조금 달라요.
그래서 말하는 것이니 이해하고 들으세요.
창세전 언약을 이루실 분이 누구입니까?
제가 아까 언약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맺은 거라고 했지요?
창세전에 아버지 하나님과 말씀이신 하나님이 맺은 것입니다.
그럼 이 언약을 구현을 시키기 위해서 말씀이신 그 아들을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예수가 흠 없는 재물로 와서 더러운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노아 언약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그 언약이 씨앗처럼 배태(胚胎)되어 있는 것입니다.
노아 언약이 실제적으로 이 땅에 드러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항상 묶여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들에게 홍수에서 살아난 다음
희생 제물의 고기를 먹게 하고 피는 먹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들은 그 고기를 먹을 때마나 우리가 산 것은 흠 없는 재물의 희생 덕분에 살고 있구나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나 같은 죄인이 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노아의 식구들은 피를 뿌릴 때 마다 이 피는 내 죄를 용서해주는 피이고,
고기를 먹을 때 마다 내가 지금 그 분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겁니다.
이걸 신약에서는 성찬식에 담아 놓았어요.
우리가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마시잖아요?
그리고 떡은 뭔가요?
예수님의 살을 찢김으로 인해서 우리가 그 분의 생명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노아 언약의 모습이 신약에서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 현재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받고 예수님의 살이 찢어짐으로 인해서 살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노아 언약을 완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과 약속이 이해되세요?
하나님의 언약이 이 땅에서 언약의 후손들에게 떨어질 때는
예수님께서 자기희생을 통해서 죄에서 구원해 내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서 항상 예수님의 희생을 담아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부인이라는 삶으로 나타나는 거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역사 속에서 성취가 될 때는 반드시 피가 동반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 피 인가요?
예수님의 피 입니다.
그 피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에는 먹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 순대나 선지 이런 것 먹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맛있게 잡수세요.
구약은 언약을 이루실 약속의 후손이 오시기 전이므로 피를 먹어선 안 되어요.
그러나 이젠 약속의 후손이 오셔서 언약을 완성하셨어요.
그러니 이젠 피를 먹어도 괜찮으니 잡수셔도 됩니다.
제가 아까 그런 얘기를 했지요?
구약에는 약속이라는 말이 없고 전부 언약이라는 말을 썼다고 했습니다.
그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이 실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약속이라고 하려면 언약을 이루실 예수님이 실제는 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언약은 하나의 껍데기와 같고 약속은 알맹이와 같은 것입니다.
노아 언약은 껍데기와 같고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은 알맹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이해가 되지요?
이걸 창조 사건으로 설명을 드릴게요.
창세기 1장에 보면 창조 사역이 두 파트로 나눠집니다.
먼저 파트는 하늘과 땅을 구분하는 장소를 만듭니다.
이것을 천지를 창조한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넷째 날 부터는 그 갈라놓은 장소에 채워 넣는 일들을 합니다.
그래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라고 합니다.
천지(天地)는 하나님의 언약과 같고 만물(萬物)이 채워지는 것은
약속이 성취되는 것과 같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그래서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이 미완료적인 모습으로 진행되어 가기 때문에 무지개가 반쪽으로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창세전 언약이 완전히 완성된 세계이고 충만한 세계가 되니까
무지개가 하나님의 보좌를 완전히 둘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은혜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는 못살아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만이 살 수가 있는 곳입니다.
우린 이 땅에 그 은혜를 배우고 가는 거에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어디에서 배워갑니까?
교회에요.
그러면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선 우리는 자꾸 죄인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인 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누가 우리를 자꾸 들춰줘야 하잖아요.
그 일을 누가 합니까?
교회에서 말씀으로 고발당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날마다 우리의 죄가 발각이 되고 들춰진다니까요.
죄를 들춰내는 것은 무엇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은혜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면 죄를 알아야 할 것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은 죄를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은혜가 없는 거에요
그러나 신자는 죄가 자꾸만 고발되어 지고 그 죄를 고발당하면서
이런 죄인이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 은혜를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배워가서 천국에 가면
세상에! 세상에! 나 같은 것이 천국에 왔다는 것은 말도 안 돼!
난 마땅히 지옥에 가야 하는데 천국에 왔다는 것은 말도 안 돼!…
그래서 자발적으로 찬송이 나오고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을 부를 때 그냥 생각 없이 부르지 말고 나 같은 죄인이 용서받았다니
놀랍고 또 놀랍고 놀라운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이 사실에 감읍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대통령이 박 집사님을 초청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거기에 가고 안 가고를 떠나 대통령이 나를 초청했다는 사실 자체로 감읍이 되겠지요.
그럼 대통령 생각만 해도 감사가 나오고 그러겠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다니까요.
이런 죄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그 앞에 나오게 했다는 것이 놀랍고 놀라워야 하는데
우린 꿀 먹은 벙어리도 아니고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르고 있단 말이에요.
여러분 실제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받고 산다는 것에 감격합니까?
이 감격이 없으면 안 됩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듯이
감사가 없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니까요.
그 감사를 도출해 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 속의 죄를 고발하고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당이에요.
진짜 나쁜 인간이라니까요.
하나님께는 이만큼 은혜를 받아 놓고 쬐끔 한 것으로 생색을 내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나마도 안하려고 하고 그러잖아요.
그러니 악당이지요.
악당임이 자꾸 발각당해야 합니다.
진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구나가 고발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에도 이런 인간이 지금 용서를 받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구원해 준다고 하신 창세전 언약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창세전 언약을 약속으로 주셨어요.
그 창세전 언약을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지켜내요.
이것을 일컬어 맹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맹세는 맹세를 하신 분이 반드시 지켜내십니다.
그래서 언약은 하나님이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13-18절을 봅시다
히 6:13-18=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15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맹세를 하셨는데 무엇을 위한 맹세입니까?
하나님이 말로 뱉어낸 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맹세를 했다고 합니다.
맹세는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분은 없잖아요.
그러면 그 맹세는 결국 하나님이 지켜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맹세 하신 것이 있어요.
창세전 언약입니다.
그 내용이 뭐에요?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해 내는 일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인데,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그 아들을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가서 내가 내 이름을 걸고 언약한 것을 지켜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지만 예수라는 이름을 입고 오셔서
아버지께서 말씀으로 뱉어 낸 언약을 예수님께서 실제로 자기 피를 흘려 이루어 낸단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피 흘려서 이루어 내는 것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자기 이름 걸고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그 맹세로 인해서 지금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가셔서 네가 너를 복의 근원이 만들어 준다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였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조건과 상관없이 아브라함은 반드시 복의 조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가겠다고 했으니까요.
그럼 물어 봅시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될 자격이 있나요?
없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불순종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낮아지는 모습으로
계속해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속에 이룬 그 약속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불순종을 해도
계속해서 하나님이 희생해가면서 아브라함을 끝까지 지켜내는 거예요.
그 아브라함 언약이 신약식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세상 끝날 까지
지켜준다는 그 약속 때문에 제자들이 도망가도 찾아 가셔서 그들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시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창세전에 구원해주기로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내가 못 이뤄가잖아요.
그러니까 나에게 심겨준 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셔서 나와 함께 묶여져서
(이것을 약속이라 했습니다) 아버지가 언약하신 그 언약을 이루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창세전 언약이 우리 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 된 모습으로 살아지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날마다 예수님처럼 버림당하고 부정당하고 피 흘리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쉬운 애기로 말합니다.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했고,
약속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 속에서 묶여져서 한 몸 되어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을 이루어 가는 데는 반드시 피 흘림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피 흘림으로 인해서,
예수님의 그 피 흘리심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걸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고 깨달아지고 기억이 될 때,
내 행위와 상관없이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시 안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된 상태입니다.
완성된 것을 이 땅에 보낼 때는 반쪽으로 보내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현재 약속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다시 저주하지 않고 이 땅에 계속 무지개 언약을 줌으로 인해서 이 땅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이 사실들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늘에 무지개가 뜬 것을 보고
그냥 생각 없이 바라보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시란 말이지요.
여러분 무지개 옷을 입은 사람이 구약에 누군지 아세요?
약속으로 난 요셉입니다.
요셉이 입은 채색 옷이 무지개 옷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무지개 옷을 그 요셉이 결국엔 버림당하지요?
요셉의 버림당함으로 인해 자기 형제들을 살려내잖아요.
그러면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언약의 후손들이면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채색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무지개 옷을 입혀 줬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언약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요셉처럼 버림당하는 삶의 구조 속으로 뛰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치 않아도 나를 그리로 밀어낸다니까요.
왜? 약속을 성취하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 속에 들어 오셔서 하나로 붙여 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연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그대로 우리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 역시 예수님의 운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운명으로 살아가는 삶이 날마다 이 땅을 떠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가 버려지고 빼내짐을 입는 것입니다.
내 몸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그런 사고들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가세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원치 않아도 주님께서 우리 안에 언약을 하셨고 약속을 줬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그 약속을 이뤄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은 실패될 수 없고 완전한 구원이 되고 완성된 그 자리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약속 붙잡고 살아가는 거예요.
약속 붙잡고 사는 것을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조금 어려운 공부를 했는데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이 2013년 마지막 주일인데,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언약에 이끌려 살아 오셨어요.
이 삶이 2014년도에도 여전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역사는 2013년도나 2014년도나 다를 게 없어요.
인간이 뚝 뚝 잘라 놓은 것 분이지 그냥 연결이니까
내년에도 변함없이 그 은혜 가운데 열심히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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