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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12강. 물 위에 떠 다니는 방주 (창 7:11-24)

by coroa 2020. 10. 13.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2강. 물 위에 떠 다니는 방주 (창 7:11-24).-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해서 창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은 어느 시대이든지 창세전 언약의 내용들이 역사 속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노아 시대가 구약에 일어난 오래전 옛날이야기로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노아 홍수가 일어나던 시대의 영적 상황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영적 의미는 동일한데 환경 자체가 조금 다르게 나타날 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실제 물을 쏟아져서 심판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대도 물을 쏟아 심판을 하실까요?

아니거든요.

노아 홍수 끝나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너희들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무지개 언약을 주시잖아요.

하나님은 과거에 일어났던 노아 홍수 사건처럼 반복적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노아시대처럼 홍수로 오늘날을 심판하신다 하면

아마 조선소에 가서 배 만들고 있을 겁니다.

살아남으려고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하시지 않는단 말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딱 한 번 일어나는 겁니다.

 

지금은 노아의 홍수와 같은 영적 의미가 담긴 심판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 일어났던 과거적인 사건을 지금 신약적인 의미로 재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노아의 이 사건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시대에 왜 세상을 심판하기로 작정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 혼합을 하니까 일어났잖아요.

쉬운 말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들에겐 다른 가치관으로 살도록 해 놓았는데

세상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상징적으로 홍수로 나타난 것입니다.

 

홍수란?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합해진 겁니다.

물을 말씀이라고 보세요.

그럼 하늘에 말과 땅에 말이 섞여버린 것입니다.

물을 가치관이라고 합시다.

그럼 하늘에 가치와 땅에 가치가 섞여버린 것입니다.

이걸 타락이라고 해요.

 

거룩과 비거룩이 합쳐지는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무엇입니까?

거룩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입니다.

거룩하신 분이 이 땅에 당신의 거룩을 남기기 위해서 거룩한 일을 벌이셨단 말입니다.

 

그것이 창조로 나타난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섞여져 있던 것을 갈라내는 것으로 창조 이야기를 하지요.

빛과 어둠을 갈라내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이건 빛에 아들과 어둠에 아들을 분리한다는 말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일을

빛을 어둠 속에서 불러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빛과 어둠을 분리하고 하늘과 땅을 분리했다는 것으로만 보면 안 되어요.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어떤 물건을 만들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에요.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을 창조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게 역사 속에서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으로도 분리시켜 놓은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에겐 땅의 기업을 주고,

셋의 후손에겐 하늘의 기업을 주었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가인의 후손은 땅의 가치로 살게 하셨고 셋의 후손은 하늘에 가치로 살게 하셨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가치로 살아야 하는 셋의 후손들이 땅의 가치로 사는 가인의 후손과 짝짜꿍하고 사는 것입니다.

왜? 하늘에 가치로 살아야 하는 셋의 후손이 가인의 후손과 짝짜꿍 합니까?

이는 가인의 후손들이 사는 것이 훨씬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들의 부귀영화를 보니까 부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손과 연합을 이루고 살아간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딸과 결혼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에요.

타락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갈라내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하면 거룩과 비거룩이 섞여 있는 것을 분리시키는 겁니다.

죄가 뭐냐?

분리시킨 것을 다시 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날마다 분리시키는 구원의 일들을 하시는 겁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나온 것이 하나의 분리된 모습입니다.

세상과 우리가 분리된 모습으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여러분들이 교회에 오셔야 합니다.

그냥 주일이니까 교회 간다.

그러면 안 됩니다.

 

엿새가 지나고 이레가 되면 무슨 날입니까?

거룩한 날이라고 하지요?

안식일이라고 하지요.

그냥 안식일이 아니고 여호와의 안식일이에요.

 

여호와가 안식을 하려면 자기 백성들이 다 구원을 받고 난 후에나 가능해요.

여호와가 누구냐?

구원하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여호와의 안식일이 되려면 자기 백성들이 다 구원을 받아야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는 안식일이 없어요.

 

일곱째 날도 역사 속에 속한 날이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주신 날이에요.

이 땅에서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이렇게 있습니다.

그러니 역사 속에 있는 일곱째 날인 일요일이라는 안식일은

역사 바깥에 있는 안식을 상징하는 예표적인 날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우리가 일요일에 교회로 모이는 것은 세상 바깥에 있는 안식일을 예표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은 우리는 주의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란? 역사 바깥의 날을 말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일에 교회로 모이는 것은 일주일 중에 하루 쉬는 그런 날의 개념이 아니고

세상에서 빠져 나온 것으로 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날 이렇게 모이는 것은 첫째 날에서부터 여섯째 날까지 일하고

일곱째 날 쉬는 것이 아니고 일곱째 날을 벗어난 여덟째 날로 모이는 것입니다.

왜?

일곱째 날은 이 세상에 속한 날로 창조에 속한 것이고

여덟째 날은 창조 바깥의 날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덟째 날로 모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모여야 해요.

 

항상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맞아, 나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이지’

그래서 내가 하나님에게 예배하고 성도들과 만나서 교제하고 하는 날을 여덟째 날로 모인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거룩과 비거룩 속에 있다가 그 비거룩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빼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날마다 빠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얘기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단회적 사건이 맞아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빼내시면 그것 자체가 구원의 완료요 완성입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 우리를 두었을 때는 우리의 구원은 날마다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한단 말이에요.

 

쉬운 애기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단회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되는 거에요.

그런데 그 다음부터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 간섭하시는 일들은 날마다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에 우리를 천국 데려가는 게 목적이었다면

그냥 구원하시자마자 데려가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이 역사 속에 남겨두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구원 받은 자로서 뭔가 배워야 할 게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얘기 드린 대로 가나안 땅은 그 땅의 성질을 알고 거기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것이지 아무나 집어넣는다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집어넣었다가 빼내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했다 그랬나요?

그들을 토해냈다 그러잖아요.

왜? 토해냅니까?

살 자격이 안 되니까 방 빼 그런 겁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거기서 살 수 있는 사람이 가야지

천국에서 살 수 없는 사람 갖다 놔봐야 살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할게요.

모범생하고 조폭이 있습니다.

모범생은 모범생들끼리 있어야 좋고,

조폭은 조폭끼리 있어야 좋아요.

 

조폭을 공부만 딥다 하는 모범생들과 같이 있으라고 하면 미쳐요.

반대로 모범생도 조폭들 틈에 두면 미쳐요.

그래서 하나님이 모범생은 천국에, 조폭은 지옥에 분리시켜 놓은 것입니다.

우수갯 소리로 조폭은 지옥이 편하고, 모범생은 천국이 편해요.

 

생각을 해보세요.

세상과 천국은 살아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쉬운 말로 이 세상은 움켜잡는 방식으로 삽니다.

피조 세계는 모두 ‘다고, 다고’ 하는 식으로 사는데,

천국은 창조의 원리로 주는 식으로 삽니다.

 

그렇다면 받아야 하는 사람을 천국에 가다 놓으면 거기서도 계속 받으려 하겠지요.

그러면 못산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죄를 고발하여서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잘 사네, 못 사네, 따지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세요.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완벽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는 인간은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제시해 주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거기에 못 미치는 것을 늘 발각당합니다.

그랬을 때 우리의 심령 속에서는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그러면서 진짜 몸의 구속을 구하게 됩니다.

이 몸 가지고는 안 되는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좀 살려 주세요!’ 라고 했을 때 역사 속에서 이 몸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고

하늘로부터 오는 몸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데려가시는 겁니다.

그것을 열매가 익었다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과 얘기할 때 그 여인에게 성령 이야기와 예배 이야기를 할 때

제자들이 빵 사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드리니까 이미 먹었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우리가 주지 않았는데 뭘 먹었습니까 라고 물으니

예수님께서는 내가 먹을 음식은 따로 있다고 그러지요?

 

예수님이 먹을 양식은 뭡니까?

수가성 여인과 같은 죄인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시면서 ‘보라, 밭이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밭이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 라는 얘기는 수가성 여인과 같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 라는 것을 알아보는 그것을 희어졌다,

잘 익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뭐라 그랬어요?

율법은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이지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 했단 말이지요.

그럼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과 잠깐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안 겁니다.

그래서 물동이 내던지고 동네에 들어가서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칩니다.

그러니까 수가성 여자가 메시야를 만난 것이 이 사람은 율법을 지킨 게 되는 겁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 내가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율법을 주신 용도가 뭐에요?

너는 죄인이고 죽을 수밖에 없고 저주받아야 하는데

이런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줬단 말이지요.

 

그래서 이 수가성 여인에게 예수님이 가셔서 죄를 고발한 것입니다.

남편 이야기를 하고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할 때

이 여인이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게 되잖아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이 여자가 잘 익은 곡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이런 죄인이구나,

이래서 내가 내 독자적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구나를 깨달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들이 깨달아 질 때마다 내 몸에 대해서 미련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몸을 자꾸만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로 오는 하늘의 그 몸을 자꾸 고대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은 진짜 신자들은 자꾸 이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노아 사건을 가지고서 ‘거룩’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홍수로 심판한 것은 거룩한 자와 비거룩한 자가 함께 섞여 있으니까,

그 섞여있는 것을 갈라내고 빼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로 자기 좋은 대로 결혼하고 할 때

그 속에서 ‘노아’를 끄집어내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끄집어내는가 하면 은혜를 줘서 끄집어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은혜를 주니까 노아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방주 짓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방주가 뭔가요?

심판에서 구원하는 겁니다.

그럼 이 시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는 것은 노아 방주를 짓는 것과 같아요.

노아가 어떻게 방주를 지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서 지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 오니까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노아는 신약으로 보면 모든 성도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은혜를 줍니까?

자기 백성에게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것은 노아 하나가 곧 자기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노아 이야기를 할 때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데

노아를 전 인류를 구원하는 걸로 봤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할 수 있으면서도

그 노아를 우리에게 적용하면 그 노아는 또 ‘나’란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믿어지는 은혜를 줘서 구원을 받게 하였듯이

하나님께서 타락된 세상 속에서 노아에게 은혜를 주어서 빼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누가 하느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구원 자체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창세전 언약을 맺을 때

우리는 거기에 참석하지도 않았고 생겨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간 두 분이 언약을 맺을 때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했습니다.

거기에 녹명된 자들은 전부 이 땅에 올 때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거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시온 산에 십사만 사천 명이 있는데

전부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그 어린 양의 이마를 계시록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자기 백성들에게 천사를 보내서 이마에 인치는 작업을 합니다.

이것은 구별을 하는 것입니다.

이마에 인 쳐놓고 저건 손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놓고 저주를 끌어 붓는 겁니다.

 

이건 출애굽 할 때 나타난 모습과 같습니다.

출애굽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양 피를 문에 바르게 합니다.

피를 바른 다음에 죽음의 천사들을 보내 버립니다.

가서 다 죽여라!

하지만 피 바른 집은 손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어린양의 피 바른 것이 계시록 7장에 오면 인치는 것이고

이 인친 자들이 계시록 14장에서는 어린양과 함께 시온 산에서 동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세요.

하나님께서 홍수를 끌어 붓기 전에 노아에게 인 치는 작업을 하십니다.

그 인 치는 작업이 노아에게 은혜를 줘서 방주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에게 방주를 다 만들어서 방주 안에 타게 해놓고 홍수를 끌어 붓습니다.

그런데 이 방주가 물에서 둥둥 떠다니면서 어디로 갑니까?

아라랏 산으로 갑니다.

 

(그림 설명)

지금 산이 있어요.

성경에서 항상 산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상징할 때 표현합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만나지요?

그게 산의 개념입니다.

 

아라랏 산이라 할 때 이 ‘아라랏’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창조, 거룩’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에 이르렀다는 것은 창조의 세계, 거룩한 곳에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주시고 그 방주가 결국 어디로 인도를 하는가 하면

창조의 세계, 거룩한 산으로 인도를 합니다.

 

노아가 노 저어서 간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멸망하기 전에 먼저 자기 백성을 인 치는 작업을 합니다.

그 인 치는 작업을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보내 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타듯이 성령 받은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예수님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노아 얘기를 할 때 노아가 방주를 지어서 그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을 예수님 사건으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노아를 예수님이라고 하면 노아가 지은 방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노아의 가족이 들어 있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예수님의 권속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전부 예수님의 권속이지요?

예수님은 자기 가족만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가족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쉬운 말로 구원은 하나님이 자기 새끼 찾으러 오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 찾으러 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빌딩 학원에서 불이 났습니다.

그런데 내 자식이 거기 있습니다.

어떻게 해요?

찾으러 갈 것 아니에요!

부모 입장에서는 내 자식을 찾기 전까지는 그 건물을 허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불이 나서 이제 그 건물을 허물어야 한다 해도 내 자식을 꺼내기 전까지는

허물면 안 되는 겁니다.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찾아내고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대해서 염려를 하지 마세요.

구원 문제는 우리가 염려하고 애쓴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실 몫입니다.

그래야 구원된 사람 속에 하나님의 그 은혜와 영광이 오롯이 담기게 되는 것입니다.

 

홍수가 내리는데 내가 수영하면 되지…

아니에요!

거긴 박태환이 와도 안 된다니까요.

 

물어 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바다의 고기도 죽고,

하늘을 나는 새도 죽고,

기식 있는 것은 다 죽었다고 합니다.

고기가 헤엄을 못 쳐서 죽었겠어요?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면 그 심판을 이겨낼 사람은 없습니다.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면하게 해 줘야 이겨냅니다.

 

하나님께서 그 노아의 가족들을 홍수가 난 후 끄집어내듯이

지금도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그 ‘거룩’에 대해서 예기하시는 겁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

이건 우리 보고 거룩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 설명)

보세요,

이 세상, 역사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묵시(하나님 나라)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거룩한 곳이고 아래 땅은 비거룩이 됩니다.

위의 하나님 나라만 거룩한 곳입니다.

제가 늘 얘기하듯이 거룩을 알릴 방법이 없는데 비거룩을 통해서 거룩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이 어떻게 설명이 됩니까?

거룩의 반대인 비거룩을 깔아 놔야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역사 자체는 묵시를 드러내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역사 자체는 비거룩이 되는 것입니다.

묵시 자체가 거룩한 곳이고...

그래서 이 역사는 애초부터 철거시키기 위해서 만든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에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시고 땅의 기초를 세울 때

이 세상 자체는 철거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잖아요.

오로지 남는 것은 주만 영존하시고 주의 말씀만 영영히 남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묵시 속에서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맺었던 그 언약만 이 땅에 홀로 남겨 버리고

이 세상은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쓸어버릴 이 세상은 홍수가 엄몰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홍수가 엄몰해 있는 이곳에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방주를 하나 주신 겁니다.

 

방주를 노아가 고안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노아에게 줬잖아요.

왜 주셨습니까?

가족 살리라고 주셨지요.

 

이것을 신약으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는데

그 죄 아래 가두어진 자들을 끄집어내야 하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냈단 말이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전부 십자가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 안으로 끌어당기면 십자가 밖은 저주의 세상이 되어 버리고

십자가 안은 안식의 세계가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십자가 밑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조롱할 때는 저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너머가 안식의 세계지요?

저주가 없는 세계 입니다.

그 저주가 없는 세계에서 십자가 밑에 있는 인간들을 바라보면 그들이 안타깝게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 너머에서 이 세상을 바라봤을 때는 여기가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이 쪽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가 지옥처럼 보이지만

십자가 너머 안식의 세계에서 이 쪽을 보면 여기가 저주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버림당하고 고통 받고 그래요.

오늘 기도해 주신 집사님이 아주 잘해 주셨는데 기도에서 뭐라 그랬나요?

고난을 복으로 알게 해 달라고 했지요.

우리는 과거에 내가 병들고 살기 어렵고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그런 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었다면 그런 것이 오히려 복이잖아요.

 

503장의 찬송에 그런 가사가 있지요.

 

‘이 풍랑 인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어디로 간다고 합니까?

천국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란이나 고난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아~ 이 세상은 희망이 없구나…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세요.

몸이 아프면 이 몸은 희망이 없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시라니까요.

그렇다고 몸이 아파도 고칠 생각 안하고 아프면 그냥 죽자 이러지 마시고

아프면 병원도 가고 해서 고치세요.

하지만 고쳐도 또 아파요.

 

그래서 이 몸은 한계가 있구나를 아시라니까요.

이 몸을 가지고 있는 한은 이 몸이 싫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이 몸 좀 바꿔주세요 하나님!

그러면서 천국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홍수라고 했지요?

홍수란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합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뱀이 여자의 후손들을 떠내려가게 하기 위해 물을 강같이 쏟아낸다고 합니다.

이 세상 자체는 뱀의 말로 홍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들을 살리려고 땅이 그 물을 흡수케 하여서 광야에서 살게 합니다.

 

지난 시간에 뱀의 말을 영지주의의 두 가지로 설명을 드렸는데

뱀의 말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주리실 때 마귀가 찾아와서 한 그 이야기가 곧 뱀의 말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뭐라 그랬나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 아니냐?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멋지게 성공해서 한 번 짠하고 드러나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 아니냐?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굶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 그러겠냐?

하나님 욕하지 않겠느냐 라고 합니다.

마귀의 말은 그럴 듯 하지요.

 

지금 이 시대의 기독교는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아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들 흔히 그런 얘기 안 들어 보세요?

저희 교회 집사님이 나가서 우리 교회는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뜸 그렇게 물어 온다고 합니다.

‘몇 명 모이세요?’

그러면 우리 집사님은 할 말이 없어집니다.

 

만약에 우리 교회 교인들이 많이 모인다면 그 많은 수를 자신 있게 말하겠지요.

예를 들어 만 명이 모인다고 하면 그 만 명이 복음전하는 것을 확증을 해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몇 명 모이느냐고 물었을 때

우리 교회의 교인 수가 적다고 얘기하면 단 번에 뭐 그런 복음이 있냐고 합니다.

그 사람의 사고방식은 ‘복음 = 사람 많은 모이는 것’ 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가 모두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잘 살아야지, 성공해야지 라고 가르칩니다.

이게 고지론입니다.

이게 마귀 말입니다.

 

그래서 흔히 하는 얘기가 예수 믿고 그렇게 가난하면 하나님 영광 가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전도도 안 돼.

예수 믿고 뭐라도 잘 돼야 전도도 할 것 아니냐 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는 물질적 가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전부 물질적 가치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교회 그러면 거기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회,

우리 교회처럼 작은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교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세상 가치관을 가지고 미혹을 합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마귀의 말이 틀린 게 아닙니다.

그렇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볼품없어 되겠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십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낼 때 그들에게 저주를 한 것이 있습니다.

뱀에게 저주를 한 것이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땅을 기어 다니게 만들었습니다.

뱀이 땅을 기어 다닌다는 것은 땅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너의 분깃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뱀의 후손인 가인의 후손들은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으로 드러난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나서 땅을 저주했는데

그러면 이 땅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분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없지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땅에 분깃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분깃은 위에 있습니다.

이 위의 것이 안 보이니까 하나님께서 믿음을 줘서 저기를 바라보게 하신단 말이지요.

우리도 믿음이 오니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저기가 있구나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땅의 가치를 이겨내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땅이 전부니까 땅의 것을 가지고 성도들을 미혹을 합니다.

믿음이 연약할 때는 그 미혹에 자꾸 넘어집니다.

넘어지면 하나님께서 또 빼내는 일을 하시잖아요.

이 빼내는 일들을 고린도후서 6장에서는 우리가 불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우리가 짠~하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패잔병으로 받습니다.

미아리 고개 붙잡혀 가듯이 우리는 질질 끌려가서 받는 것입니다.

화려한 구원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속지 마세요.

 

구원을 받는 것은 초라한 거에요.

그래서 신자들이 예수를 믿는데 진짜 믿는 사람들은 믿음의 모습들이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솔직히 여러분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진짜 믿음이 멋집니까?

아니지요?

 

나는 믿음도 없어, 이게 무슨…하는 생각이 스스로 들지 않으세요?

여러분들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저는 말씀 앞에 서면 참 초라해 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

아무리 내가 복음을 알고 복음을 전해도 결국은 내 무능함 내 초라함 들이 자꾸 드러나는 것입니다.

 

구원이 뭡니까?

포로로 잡혀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끄집어내는 것이잖아요.

그 포로로 잡혀 있는 자를 끄집어 낼 때 용감하고 멋진 모습으로 끄집어 내질까요?

아니에요.

초라하다니까요.

불구덩이에서 건져진 자가 무슨 영광이 있겠어요.

없어요.

 

구원을 받은 자는 자기 영광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영광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가면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을 구원해 줬다는 것에 놀라고 놀라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이 땅에서 배우고 가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구원받고 산다는 것에 놀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여러분 뜻대로 온전히 살아 내고 정말 말씀대로 살아내 진다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떳떳하게 나오게 됩니다.

보무도 당당하게 나올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들이 말씀에 비춰봤을 때 엉터리이면 어떻게 나옵니까?

쥐구멍이라도 들어가서 숨을 듯이 나오겠지요.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엉터리처럼 살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온갖 더러운 모습이라니까요.

그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만큼 우리는 마귀를 못 이겨요.

만약에 우리가 마귀를 이길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못 이기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 육신 가지고 마귀 이길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못 이기기 때문에 주여! 도와주세요.

불쌍히 여겨 주세요! 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란 놈은 항상 하늘의 백성들을 땅에 정착시키려 합니다.

주소지를 땅에 두라고 합니다.

땅의 것으로 미혹을 한단 말입니다.

이 육신은 흙에서 났기 때문에 흙을 떠나지 못합니다.

흙의 유혹으로 부터 못 이긴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꾸 땅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그 가나안 백성들에게 동화되어 사는 것입니다.

동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 가나안 땅 자체가 가인의 후손들이 일궈놓은 화려한 땅인데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겨낼 수 있습니까?

못 이겨요.

마음으로는 이기고 싶어도 몸뚱이는 못 이겨요.

그러니까 자꾸 동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자꾸 이 세상에 본능적으로 빠집니다.

그럴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건져내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이렇게 와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건져 주셨기 때문에 오는 거예요.

 

죄인이 제일 재밌는 것은 죄 짓는 것입니다.

죄 짓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힘들지도 않아요.

죄인이 죄 짓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 육신의 소욕을 못 이기니까 하나님께서 자꾸 간섭을 하십니다.

 

여러분 자녀가 게임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

여러분이 그 게임을 못하게 하면 아이가 기분 좋게 그만둡니까,

화를 내며 그만둡니까?

신경질을 내며 그만두지요?

똑같은 겁니다.

우리도.

 

우리는 눈만 뜨면 세상이 보이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빼내는 일들을 하니까

그게 아픈 겁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 것을 많이 주지 않아서 여기 와 있다니까요.

세상 것을 왕창 받은 사람은 여기에 안 온다니까요.

 

우리가 세상 것을 많이 받았다면 우리는 세상에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련히 아시고 우리가 세상 것에 취하지 않게 적당히 빼내주시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노아의 홍수와 같은 시대로 만들어 놓아 버렸습니다.

하늘의 물과 땅이 합해져서 홍수가 되었는데 지금 이 시대의 홍수는 뭡니까?

제가 물은 어떤 사상이라고 했습니다.

인본주의(땅의 물)와 신본주의(하늘의 물)가 합하면 이게 홍수입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뱀은 혀가 둘이어서 항상 두 말을 한다고 했지요.

뱀이 두 말로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섞어 버리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섞어서 내어놓는 뱀의 말은 하나님 백성이 그렇게 살아서 되겠느냐,

잘 살아야지…

이게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에게로 와서 한 말인 것입니다.

성도를 세속화 시키려 한단 말이지요.

 

요한계시록 18장에 가면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음행의 포도주에 취해 있습니다.

그럴 때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고 하잖아요.

우리가 독자적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렇게 끄집어 낼 때 우리에겐 아픔이 옵니다.

우리는 좋게 말해서 그냥 나올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징계라는 방법으로 다루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아프고 어려운 일들이 생기면

우린 그 어려운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징징거리며 나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근데 그게 복이라니까요.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런 얘기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땅에 어떤 식으로 존재를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을 것과 먹지 않을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레위기에 보면 부정한 짐승과 정한 짐승이 있지요?

우리가 먹어야 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레위기 11장1-11을 봅시다.

 

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3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4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5 사반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6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8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

9 물에 있는 모든 것 중 너희의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무릇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것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10 무릇 물에서 동하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11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넘어가서 41-44절을 보세요.

 

41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지니

42 곧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 중에 배로 밀어 다니는 것이나 네 발로 걷는 것이나

여러 발을 가진 것이라 너희가 먹지 말지니 이는 가증함이니라

43 너희는 기는바 기어 다니는 것을 인하여 자기로 가증하게 되게 말며

또한 그것을 인하여 스스로 더럽혀 부정하게 되게 말라

44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 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는데

굽이 갈라져 있는 것은 거룩하고, 굽이 갈라져 있지 않은 것은 비거룩 하다고 합니다.

되새김질 하는 것은 거룩하고, 되새김질 하지 않는 것은 비거룩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 땅에 기어 다니는 것은 부정한 것이고, 땅에서 뛰는 것은 거룩한 것이라고 합니다.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은 땅의 기운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건 뱀에게 주신 저주입니다.

그래서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비거룩이라고 하고,

땅을 벗어나는 것은 거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냥 뭘 먹고 마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존재론적으로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너희는 이 땅에 코 박고 살 자가 아니라 너희는 이 땅을 떠나는 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는 반드시 자꾸 떠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갈대아 우르로부터 떠나게 하지요?

그 ‘갈대아 우르’라는 말이 ‘강도들이 사는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데 거기가 바로 이 땅, 이 세상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은 전부 강도들이란 말이에요.

 

여러분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강도 만나 거반 죽게 된 자를 사마리아인이 구원해 주지요?

지금 우리가 전부 강도 만나 죽은 자들이라니까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 모든 자비를 들여서 우리를 고쳐주고 살려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기존의 틀에서 빼내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구원은 날마다 빼냄을 입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육신이라는 것은 가만히 있으면 본능적으로 또 옛 것을 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옛 것을 버리게끔 간섭을 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이 모인 것은 여러분의 신앙을 추인 받고자 모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추인 받을 수 있는 그런 인간이 아니에요.

아무리 예수를 믿고 복음을 안다 해도 결국 이 육신을 못 이깁니다.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 말씀이 칼이 되어 기름과 살점을 발라내듯이 자꾸 발라내는 일들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죄였구나…

 

구약에서 제물을 뜰 때도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은 전부 기름의 각을 뜨잖아요.

기름은 전부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태웁니다.

기름은 먹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고발하고 그 죄로부터 우리를 떠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은 날마다 도망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십자가 안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고발하는 것은 그 죄를 통해서 어디를 보게 합니까?

예수님을 보게 해요.

 

히브리서 4장 11-16절입니다.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지금 히브리서 4장의 내용이 안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안식은 어디에 있나요?

대 제사장이 예수 안에 있다고 하지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우리에게 안식을 주신 적이 있나요?

없어요.

 

창세기 1장에 보면 여섯 째 날 창조를 하시고 일곱 째날 복 주시며 여호와의 안식이라 그러지요?

누구의 안식이라 합니까?

여호와의 안식이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면 여호와 안에 안식을 담아 놓았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이에요.

그러면 안식을 말할 때 어떤 날을 말하지 말고 안식이 도대체 누구이냐를 따져야 합니다.

장소적인 안식은 없어요,

환경적인 천국은 없어요,

 

안식은 이 피조세계엔 없습니다.

피조세계는 허상입니다.

실상은 위에 있습니다.

 

허상 속에는 진짜 안식이 없습니다.

안식은 실상 속에만 있습니다.

안식이 허상 속에 올 때는 하나님께서 안식을 줄 자를 보냄으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을 주실 자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해서 안식이 주어집니다.

 

현재 저와 여러분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요.

근데 죄 아래 가두어진 자들은 자신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는 것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우리가 죄 아래 가두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죄 아래 가두어져 있는 것을 깨닫게 되면 나는 이 세상에서 안식을 얻을 수 없구나,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누르고 있구나,

그러면 이 진노를 벗어날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위로부터 오신 분 속으로 도망가는 것이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자 보낸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에서 안식 얘기를 해 놓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발가벗기는 것입니다.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마땅히 저주받을 자라는 것을 고발하고 나서

우리 눈길을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죄가 고발당하고 예수를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라는 안식을 주실 분을 보냈는데

이 안식은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죄를 깨닫게 하는 말씀을 준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그 백성들로 하여금 심령 골수를 낱낱이 쪼개서

내가 죄인이구나를 깨닫게 합니다.

죄인은 마땅히 저주받아야 하는데 이런 저주받을 자가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죽어 주셔서

내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 예수 안에서 평강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은 위로부터 온단 말입니다.

 

아까 제가 거룩이라는 것은 창조 세계가 거룩한 것이고 여기는 비거룩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거룩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를 구약에서는 공간적 의미로 주셨습니다.

그게 ‘성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보고 아무데나 가서 제사 지내지 말고

내 이름을 두시고자 하는 그 곳에 가서 제사를 지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인격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신약으로 오면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할 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 우리 왕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소리치지요.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잠깐 성령을 부어주니까

백성들이 예수님을 보고 저 분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구나를 안 것입니다.

 

구약에선 내 이름을 두기 위해서 어떤 장소를 하나 마련하는데

그 곳에 가서 제사를 지내라 했지요?

그럼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곳이 어디에요?

성막이고 성전으로 나타났지요?

 

그 성전의 실체인 예수님께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셨잖아요.

그러면 예수님 자체가 구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얘기하던 그 분이구나

이 예수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실 분이구나

그래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만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 안에서만 안식을 취했듯이 지금은 예수님 안에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벌리고 가신 사건이 하나 있지요?

십자가 사건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안 밖으로 역청을 칠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발라놨다니까요.

예수님의 피를 우리 심령에다가 예수의 피를 발라 놓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피가 발려진 사람은 뱀의 물인 인본주의와 신본주의가 섞인 그 물에 엄몰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성도들은

뱀이 우리에게 와서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인 너희들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서 되겠느냐,

잘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라는 말을 할 때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뱀은 또 갈라디아 식으로 믿음에 자꾸 우리의 행함을 섞는 일을 합니다.

뱀의 주특기가 섞는 것입니다.

혼합시키는 거에요.

 

갈라디아서가 뭐에요?

바울이 다니면서 십자가 복음만 전했는데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이 돌아다니면서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을 희석시키는 일을 하잖아요.

거기에 뭘 더하려고 합니까?

바울이 전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라고 했는데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은 거기에다 율법 지킴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예수를 못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온전해지는 것 아니냐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하는 말이에요.

뱀의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도 우리의 행위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뱀은 너희들이 예수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온전해지는 것이라고 가르친단 말이지요.

 

그러나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런 것에 동요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뱀이 갈라디안 식의 사상으로 믿음 더하기 행위를 말한다 할지라도

진짜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가진 사람은 거기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마귀란 놈은 궁창 윗물(하늘에 말)과 궁창 아래 물(땅에 말)을 섞어 가지고서 혼합주의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갈라디안 식으로 율법과 믿음을 섞는 것입니다.

율법적 행함에도 의가 된다고 가르쳐요.

이게 성화주의 사고에요.

 

이게 인간적으로 들으면 그럴싸하거든요.

매력적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의 가치도 챙겨주기 때문입니다.

진짜 자기 안에 예수님의 피 뿌림을 가진 자는 그 사고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노아 방주는 안 밖으로 역청을 발랐기 때문에 아무리 비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물이 침수를 못하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가 뭔가요?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섞이는 거잖아요.

 

궁창 윗물은 신본주의이고 궁창 아랫물은 인본주의 사고를 말합니다.

신본과 인본이 섞이면 홍수에요.

이 시대 교회들이 다 여기에 빠져 죽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홍수 속에서도 오직 노아의 방주만이 그 물 위에 떠 다니고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는 자는 홍수에 엄몰당하지 않습니다.

뱀의 말에 속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노아처럼 은혜를 준 자기 백성들에게는 그들 속에 예수님의 피가 안팎으로 발라져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이설(異說)에도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피가 없기 때문에 사람이 온전하게 살아야 한다는 성화주의 말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늘 그러잖아요.

온전하게 살려는 지향성은 가지고 있으되

우리는 그렇게 못산다는 것을 깨달으면 됩니다.

그럴 때 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피로 산다는 것에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사람이 진짜 안팎으로 예수의 피가 발라져 있는지 없는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홍수에 던져 놓으십니다.

예수의 피가 발라진 사람은 안 넘어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그 방주를 지을 때 그냥 짓지 말고 역청을 발라서 짓게 만드신 것입니다.

역청을 발라서 지은 방주는 물 위를 떠다닙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물 위를 떠다니는 방주’ 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에요.

지금 뱀이 강같이 쏟아내는 인본주의와 신본주의가 섞여 있는 그 사상 속에서

우리는 유유자적하게 떠 다니고 있어야 한다니까요.

떠다니면서 거룩한 산, 아라랏 산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 백성을 그렇게 다루어 가시는 겁니다.

 

노아 시대를 옛날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이 시대도 노아시대와 똑같은 영적 상황이 이 땅에 이뤄지고 있어요.

인본주의와 신본주의가 섞여서 여러분들을 미혹할 때 여러분들이 미혹당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이런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지켜내시는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 사시면서 뱀이 강같이 물을 토해내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중요한 것은 내 안 밖으로 예수의 피가 발라져 있는 것이 있으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 방주가 예수 그리스도 인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면 그 성령이 날마다 우리를 예수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예수님이 내가 가면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처소가 예비 되면 다시 오리라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처소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니까 이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어디에 머물게 합니까?

예수 피 안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예수님의 피만 거룩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피 안에서 우리는 용서받은 자로, 거룩히 여김을 받는 자로,

그런 모습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이 세상을 홍수 심판 한다 할지라도 홍수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우리는 홍수에서 살아남을 믿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 믿음을 받았어요.

그 믿음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만 줬다니까요.

그 믿음을 받은 사람들은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신경 쓰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4장 4절의 말씀같이 말씀이 나를 난도질 하더라도 거기에 주저앉지 말고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서

주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그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며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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