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1강. 노아의 방주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창 7:1-24).-
-.정낙원 목사
오늘 집사님이 기도를 하신 것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늘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우리가 세상에서 잘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었으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어요.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죽어 주셨습니다.
왜? 죽었느냐?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니까 우리 대신에 그 죄값으로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았으면 예수가 죽을 이유가 없어요.
여러분, 부탁하건데
제발 신앙생활을 혼동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아주 착한 사람으로 변하는 줄 알아요.
아니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천사처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가 될 것 같으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어요.
더 이상 죄 안 짓는다고 한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요.
사람들은 착각하기를 구약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실패했지만,
신약은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아니에요.
구약에 인간이나 신약에 인간이나 똑 같아요.
인간들이 변하는게 아니에요.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는 것이 달라졌어요.
구약에서는 우리와 직접 거래를 했어요.
그러니 신약은 예수님하고만 거래해요.
우리와 직접 거래하는 것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예수님하고만 거래하는 것은 새 언약이라고 해요.
구약과 신약의 신앙이 달라요.
구약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했어요.
이걸 율법을 지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약은 우리 대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주세요.
우리는 예수님이 지켜 주신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예수님이 대신 하셨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을 말해요.
예수는 누가 믿느냐?
죄인이 믿습니다.
의인은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요.
의인인데 뭣하러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 안 믿어도 의인인데,,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자기들은 의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라고 하니까 우린 괜찮고 저기 저 세리와 창기들에게 가서 예수 믿으라고 했단 말입니다.
신앙은 의 싸움이에요.
누구 의를 가지고 사느냐의 싸움입니다.
예수의 의냐?
우리의 의냐?
오늘 우리가 살펴 볼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하시고 그 방주를 통해서 노아를 구원을 시켰습니다.
노아가 만약에 독자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면 방주를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꾸 착각을 하기를 노아가 의롭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준행했다고 하니까,
노아가 완벽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성경은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누누히 얘기합니다.
모든 성경을 여러분들이 해석을 할 때 이 성경을 주신 그 목적을 벗어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경은 누구를 위해서 기록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 기록했다 하잖아요.
그치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잖아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그 죄로 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자기 백성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땅에 왜 오셨는가요?
창세전 언약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게 되어 있어요.
자기 백성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어 있어요.
예수 때문에 의롭게 된다구요.
우리가 말씀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이걸 놓치지 마세요.
그래서 제가 창세전 언약은 모든 성경을 푸는 키라고 시간 시간마다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가르칩니까?
동그라미 치고 밑줄 긋고 돼지 꼬리 치고 그러잖아요.
이것은 꼭 기억하라는 것이잖아요.
이거 중요한거니까
제발 좀 기억해라!
제가 시간 시간마다 창세전 언약을 애기하는 것은 그만큼 창세전 언약이 모든 성경을 푸는 열쇠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 창세전 언약이 무슨 언약이냐?
은혜의 언약입니다.
죄인을 예수님의 피로서 구원하는 그것이 은혜란 말이지요.
묻습니다.
노아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지요.
노아 스스로 잘나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방주를 노아가 고안했습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셨어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금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하잖아요.
아니~! 하나님 자기가 뭔데 세상을 심판을 합니까?
이는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심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나게도 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데려가기도 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피조물이 이의를 제기 할 수가 있나요?
없어요?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대체 왜 이 세상을 쓸어 버리셨느냐를 알아야 겠지요.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 마음에 안 들어서지요.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만드셨어요.
창세전 언약은 은혜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은혜를 남기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성이 상실 되면 하나님께서는 가차 없이 쓸어버리십니다.
여러분들이 토기장이라고 생각을 하십시다.
내가 토기를 만드는데 내 마음에 안 들면 깨버리잖아요.
우리도 자기가 만든 물건이 맘에 안 들면 깨트려 버리는데,
하나님은 오죽 하시겠어요.
우리가 자식을 키울 때도 마음에 안 들면 매질을 하잖아요.
하물며 하나님이신데요.
그러니까 우리는 늘 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상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모여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알게 해 주세요.
성령께서 성경을 쓰게 하셨어요.
그 성령께서 성경을 해석하게 하십니다.
그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여시고,
하나님의 그 뜻이 들려지게 하신단 말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 자기 백성이 저희 죄에서 구원을 얻게 되어 있더라 이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 자체가 어떤 모습으로 되어 있을까요?
죄 아래에 놓여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야 구원이 이루어지지요.
죄 아래 있지 않으면 구원 받을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죄 아래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죄 아래 태어났어요.
왜 그러냐?
창세전 언약 자체가 죄 아래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죄 아래서 태어나게 만들었단 말이지요.
죄 아래에서 구원하고 나면 이 죄악된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으니까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이 노아 사건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영생 주기로 작정된 그 녹명된 사람은 반드시 노아처럼 살 길을 예비해 주십니다.
아멘?
아멘입니까?
노아 자신이 방주 만들어서 어떻게 해 볼려고 한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실제 구원은 노아 한 사람이 받은 겁니다.
그 가족들은 노아에게 복속이 되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으로 가져 오면 하나님께서 예수 한 분 구원했는데,
그 예수 속에 저와 여러분들이 몽땅 들어가서 구원을 받은 거에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들을 ‘권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권속이 뭡니까?
‘가족’ 입니다.
우리는 한 family(패밀리) 란 말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한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한 가족이 구원받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 속에는 온 인류가 다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뭡니까?
하나의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지요?
‘너’, ‘나’가 모여서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전 언약의 내용을 보면 ‘나’를 구원했다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우리’가 곧 예수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패밀리에요.
가족이 누구입니까?
한 아버지 밑에서 한 피 받아서 나고 한 집에서 같이 밥 먹고 사는 자들이 가족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보내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나게 만들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먹게 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수가 만든 그 집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의 식구들이 노아가 만든 방주에 들어가듯이 말이에요.
요한복음 14장에 보세요.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너희들 거할 처소를 예비 한다 그러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만드신 그 처소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만든 그 처소가 뭐냐?
성전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하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데 거기가 바로 예수님이 만든 처소입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예수님이 만든 처소일 것 같으면 우리가 만듭니까,
예수님이 만듭니까?
예수님이 만드시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각 자 각 자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는 가만있어도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자기 백성들을 찾아 가서 불러 주신다니까요.
구원을 위하여는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이 말의 뜻을 아시겠지요?
신앙생활을 아무 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며 놀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제 말 뜻을 잘 알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그래도 노아가 방주를 지었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이 아니고,
히브리서 11장 7절에 보면 ‘믿음’이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짓게 만들었다고 한다니까요.
그 믿음이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구원될 것을 마련하시고,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겁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게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노아 시대에 홍수로 심판을 하시는 걸까요?
노아 시대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고 했지요?
원래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은 같이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이고,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예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속한 셋의 후손들이 땅에 속한 가인의 후손들과 왜 연합을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후손들에겐 땅의 기업을 줬고, 셋의 후손들에겐 하늘의 기업을 줬습니다.
그런데 셋의 후손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고 사는 가인의 후손들이 부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혼인해서 사는 것입니다.
땅에서 살려면 땅의 것을 소유한 사람이 잘 살아요.
가인의 후손들은 땅의 기업을 받았기 때문에 땅에서 승승장구하고 영웅호걸로 사는 겁니다.
그 모습이 셋의 후손들에겐 로망이에요.
부러운 거에요.
그래서 어라 모르겠다 자기 정체성도 잊은 채 땅 사람하고 짝짜꿍하고 사는 겁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게 뭔가요?
고지론 이잖아요?
예수 믿고 성공하라는 것입니다.
이건 셋의 후손을 가인의 후손과 손잡고 살라는 것이에요.
목사들이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어요.
이게 마귀 소리에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준다고 한게 뭔가요.
세상 부귀영화에요.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을 네게 줄 테니 내게 절만 하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 말을 교회에서 목사들이 하고 있어요.
목사들이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는 그 마귀 소리를 하고 있어요.
교인들은 그 말에 아멘하고 있구요.
쌍으로 미쳤어요.
그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랬나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했지요?
이 얘기는 성경 줄줄 외우면 되는 건가요?
그게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는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내 배부르고 내 육신 챙겨 먹고 살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왔기 때문에 그 언약을 위해서 사는 자다 라는 말입니다.
밥을 안 먹고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밥 안 먹고 살았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예수님도 늘 밥을 잡쉈다니까요!
밥 안 먹고 어떻게 살아요,
육신은 늘 밥을 먹어야 해요.
예수님의 말씀은 밥을 안 먹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고
성도가 사는 목적이 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 되시지요.
제발 오해 좀 하지 마세요!
먹고 사는 것을 죄악시 하면 안 되어요.
예전에 신학교 동기 중의 어떤 목사님이 지하실에 교회를 개척해 놓고 하시는 말씀이 먹을 것 없으면 까마귀가 날아 와서 먹을 것 준다고 그래요.
교인 하나도 없으면서 목사 입네 하고 거드름 피우고 빈둥거리고 노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런 까마귀는 없다고…
나중에 보니까 목회 그만 하고 돈 벌러 다니고 있어요.
밥 먹으려면 일 해야죠.
기도만 하면 누가 가져다주는가요?
그건 아니에요.
그건 성경의 진의를 곡해하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사도 바울도 열심히 일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먹고 살려고 했지요.
열심히 일한 게 뭐 잘못된 건가요?
누가 도와 줬으면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일 안했겠지요.
물론 도와줄 때도 있었어요.
도움도 받았겠지만 늘 누군가 도와주진 않았어요.
성경을 자꾸 곡해를 하면 자기 존재와 자기 가치를 챙기는 쪽으로 쓰게 됩니다.
성경은 목회하면 까마귀를 통해서 밥 먹여 준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성경은 오로지 예수님 이야기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서 한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 이 성경의 이야기이고 창세전 언약이고 역사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아들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노아도 예수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5장 29절을 봅시다.
창 5:29절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노아의 이름이 ‘안위’입니다.
안위(安慰)란? 수고하는 자들을 쉬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노아는 그 시대 수고하는 자들은 안위하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 그러던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나 내게로 오라 그러지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지요?
이게 ‘안위’ 입니다.
노아도 안위의 아들이고,
예수님도 안위의 아들로 오신 것입니다.
‘노아’ 이러면 그냥 노아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할 일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셨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어서 자기 가족들을 구원해 내듯이
예수님께서도 오셔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노아의 방주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한다 그랬어요.
노아가 예수님을 상징한다면
노아가 지은 그 방주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상징한단 말이지요.
구약은 방주 안에서 구원을 받았듯이,
신약은 십자가 안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노아 시대에 세상을 멸해버린다고 하는가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섞이지 말아야 하는 자들이 하나로 섞인 것입니다.
분리되어 살아야 할 자들이 하나로 혼합이 되니까 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늘의 가치로 살아야 하는데
땅의 가치에 매몰되어 사니까 이걸 내버려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노아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전까지는 똑같이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노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 오니까
어 ‘이게 아니구나’ 를 안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것이 내 본질이 아니구나’를 알고
그 은혜로 인해서 방주를 지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이 시대 저와 여러분도 세상에 도취해서 살고 있다니까요.
우리는 세상에 나가면 여전히 세상 것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우리도 노아 때처럼 멸망 받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린 별 탈 없이 살고 있어요.
왜? 그런가요?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오해하지 마세요.
난 세상 것 없이 산다,
그런 것 아니에요.
신앙은 염세주의처럼 산 속에 들어가서 은둔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도원 만들어 놓고 거기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왜 나는 안 되는가,
나는 육신을 이길 수 없구나,
죄를 이길 수 없구나,
난 세상을 이길 수 없는 인간이구나 를 처절하게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이런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다 예수님 때문이구나를 알고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우린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낼 수 없는 인간이구나 를 처절하게 깨닫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주시는 그 구원이 ‘은혜’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성을 훼손하는 자는 가차 없이 쳐내버리십니다.
왜 그런가 하면 창세전 언약의 결론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은혜의 찬미의 자리로 가야합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세상에 취해서 살다가 내가 이렇게 세상에 취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나오겠는가…하면서 교회에 안 오면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나와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해야지요.
못 났으니까 긍휼을 구해야지요.
요즘에 어떤 분들은 자꾸 예수를 믿고 나서 예수님처럼 산다는 사람이 나오는데 전 아주 답답해 죽겠습니다.
지난번에 충청도 계룡에 계시는 어떤 목사님이 저에게 전화를 해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얼마나 변했습니까?
성도는 천사 같이 변해야 한다고 시비를 거는 겁니다.
이 분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가르치는 성화주의자에요.
그러니까 얼마나 변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의도를 알고 그 분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얼마라고 하는데,
‘몇 프로를 얘기하는 것입니까?’
그 분은 신앙을 천사같이 변해야 한다는데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어요.
물어 봅시다.
여러분 천사가 예수 믿을까요?
안 믿을까요?
안 믿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천사는 이 땅에 우리 같은 몸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죄악 된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은 그 어떤 인간도 예수를 믿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이 몸 자체가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몸뚱이 자체가 죄 아래서 났기 때문에 죄를 못 이겨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이기라는 말씀을 자꾸 주십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계속해서 우리를 고발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말씀대로 살으라는 건데 난 안되는구나.
왜 안 됩니까…
왜 안 됩니까…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같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속 좀 해달라’고 애기를 하게 된단 말입니다.
예수를 바라보게 된단 말이에요.
말씀이 하는 일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세요.
우리 몸은 예수 없으면 죽어요.
구원 못 받아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 몸을 구원하고자 하심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구원을 말할 때 몸의 구속을 바란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몸이 변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흙에서 난 몸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하늘에 몸으로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흙에서 난 몸은 흙에 반납을 하고 하늘에서 사는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몸이 없으면 죄도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계속해서 이 몸을 가지고 죄를 발현시키는 일을 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 몸에 계속 그 죄를 덮어주는 일들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처절하게 이 몸은 안 되는구나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이 몸 좀 바꿔주세요 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하나님께서 그러십니다.
네 겉 사람, 이 땅에서 난 것은 돌려줘라
그러면 하늘의 것 줄께!
그러는 거에요.
사람이 죽으면 이 육신은 땅에서 났기 때문에 땅에 돌려줍니다.
우리는 죽음과 동시에 하늘로부터 오는 새 몸이 있어요.
하늘의 몸이 있어요.
흔히들 얘기하는 것처럼 사람이 죽으면 영혼만 연기처럼 쏙 빠져 나가는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람이 죽어서 하늘의 몸으로 덧입는 것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그 몸을 우리가 입습니다.
이 몸뚱이는 땅에서 났으니 땅에 돌려줍니다.
이 땅의 몸으로 하늘에서 못살아요!
이 몸은 절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못살아 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본질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죄와 상관이 없는 하늘의 몸을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여러분들이 죄를 짓고 싶어도 죄를 못 지어요.
왜냐! 거기의 몸은 죄와 상관이 없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죄와 상관없는 그 몸으로 구원을 받는단 말입니다.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까 몸뚱이는 여기 있고 영혼만 쏙 빠져 나와서 구천을 떠돌다 올라가는 그런 게 아니에요.
우리가 죽으면 그 즉시로 하늘에서 살 몸을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 보면 구원을 받은 영혼들이라고 하지요?
이걸 또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영혼이라 그러니까 몸은 없다 그러는데
영혼만 있고 몸은 없는 사람한테 뭔 두루마기를 입혀줍니까?
두루마기를 입혀 준다는 것은 몸이 있다는 말이잖아요.
사도 요한이 천국에 가서 전부 몸은 없고 연기 같은 유령만 보고 왔는가요?
아니잖아요.
지금 보세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쓸어버리시면서 노아를 구원하는데 노아의 뭘 구원합니까?
몸을 구원하잖아요.
이 몸이 없으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 몸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귀도 이 몸을 필요로 해요.
마귀는 이 몸으로 죄를 자꾸 드러나게 하게 하고,
예수님은 이 몸을 통해서 ‘의’를 드러내게 하세요.
그래서 몸이 필요하다니까요.
우리 몸뚱이는 백마고지 전투하듯이 북한군이 쳐들어오면 인민국기가 꼽히고,
남한이 쳐들어오면 대한민국 태극기가 펄럭이고 그러는 겁니다.
육신의 소욕이 주장하면 세상 가치로 살게 되고.
성령의 소욕이 주장하면 하늘에 가치로 살게 되어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여기서 치열하게 백마고지 전투 하듯이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서로 몸을 차지하려고 말이에요.
우리 안에서 가나안 전쟁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것이 사사기 역사입니다.
사사기 역사가 왜 복음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는가 하면 인간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고 덮어줘도 안되더라는 겁니다.
결국 육신을 못 이기더란 얘기입니다.
계속해서 이 육신을 따라가니까 하나님께서 그 육신을 이방인에게 붙여 야빈에게 팔아 버리고 결국 이 몸뚱이로 세상 좋아하는 짓을 하게 한단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몸뚱이 가지고 넌 왜 세상을 위해 사느냐?
나를 위해 살아야지,
언약을 위해서 살아야지! 하시면서 그 몸뚱이를 다시 찾아오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찾아 올 때는 죽싸게 패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게 징계이고 고난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때로는 은혜의 도구로 표현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늘 그렇지는 않습니다.
늘 은혜의 도구로 보여지면 얼마나 좋아요?
여러분 천사같이 살고 싶지요?
누가 욕해도 받아내고,
원수가 주리면 갖다 먹이고 그러고 싶지요?
그런데 실제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누가 조금만 나를 미워하면 화내고 그러는데,
그게 됩니까?
안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 겁니다.
너는 안 된다…
너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왜 안 됩니까?
그렇게 은혜를 주시고 그러는데 왜 안 되는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니 몸이 죄 아래서 낳기 때문에 안 되는거야…
그럼 우리는 그래야지요.
몸 바꿔 주세요,
이 몸 바꿔 주세요.
이게 죽음으로 나타나요.
성도에게 있어 죽음이란? 몸 바꿔치기 당하는 것입니다.
땅에 몸 주고 하늘에 몸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은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복인 겁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죽음은 몸 바꿔치기 하는 거니까요.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쓸어버릴 때 홍수로 쓸어버렸죠?
홍수가 뭡니까?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하나로 된 것입니다.
원래 창세기 1장에 보면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로 나누지요?
원래 섞여 있었는데 그것을 나눠버리는 겁니다.
섞여 있던 것을 나누는 걸 창조라고 하고,
그렇게 나누는 것을 구원이라 그랬지요?
창조는 구원과 같은 뜻이에요.
잘 이해를 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아래에서 끄집어냈는데 여전히 우리 몸뚱이는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이 죄를 못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죄를 가까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섞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섞여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징계로 다가 가십니다.
간섭을 하십니다.
간섭을 하실 때마다 거기서 빼내심을 입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이 몸을 가지고 있는 한은 악순환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하나님 뜻대로 정결하게 잘 살고 싶어도,
그게 안 되더라니까요.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께서는 계속 우리 몸에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해 주는 것으로 일을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뚱이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해서 자꾸만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창세전 언약이란 말이죠.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저는 안 됩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는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용서해 주소서…’
왜 이렇게 안 됩니까!
도와주세요!…
그래서 제가 신앙생활은 늘 “Help me!”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듯이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소경은 자기가 소경인 줄 알기 때문에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눈 뜬 자는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소경은 자기가 소경인 걸 알기 때문에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러잖아요.
너희가 본다고 하니 그저 죄가 있느니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다고 하는 자는 소경 만들고 소경은 눈뜬 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내가 죄인인 줄 아는 자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는 인간들은 그냥 죄 아래 두시는 겁니다.
우리는 늘 내가 죄를 못 이긴다는 이 사실을 깨닫는 거에요.
자, 보세요.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늘 궁창 윗물과 땅에 있는 깊음의 샘을 터뜨려 가지고 물을 하나로 만들어서 홍수라는 심판을 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방주로 빼내십니다.
이 그림을 요한계시록 12장 13-17절로 가서 한 번 봅시다.
계 12:13-17=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15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7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여자가 낳은 후손인 성도들을 용이 어떻게 타락을 시키냐 하면
입에서 강물 같은 물을 토해내서 타락케 합니다.
뱀이 물을 토해내서 성도들을 전부 뱀의 물 속에 빠져 죽이려고 합니다.
노아 홍수 시대로 보면 하나님께서 물을 쏟아 붓는 것은 전부 죽이기 위함이죠?
그런데 그 죽음 속에서 노아만 방주 속으로 빼내십니다.
그럼 계시록의 이 그림도 같은 것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손들이 있는데 그들을 뱀이 물을 강같이 흘려 다 휩쓸어 버리려고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이 여자의 후손들은 별도로 살 궁리를 만들어 주십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홍수라는 것은 하늘의 궁창 윗물과 땅의 물이 합해질 때를 말하고 이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섞여 있는 것을 갈라내는 것으로 구원을 하십니다.
마귀는 항상 하나님께서 갈라낸 것을 다시 섞는 것으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표상학적으로 마귀를 혀 둘을 가진 뱀으로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뱀은 두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뱀은 혀가 두 개에요.
두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를 섞어 버리는 거에요.
이럴 때 타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섞이면 괴물이 태어나듯이 뱀은 자꾸 뭔가를 섞어 버립니다.
뱀은 절대 하나님의 말을 틀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다가 뭔가를 첨삭을 하지요.
그렇게 해서 타락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혼합주의 입니다.
그럴 듯하게 만들어 버리면 사람들은 거기에 넘어가 버립니다.
뱀이 강같이 토해내는 말이 어떤 말일까요?
창세전 언약을 변개시키는 것으로 하겠지요?
그 창세전 언약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원을 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 창세전 언약인데 마귀는 그 하나님의 은혜성을 걷어 내는 것으로 일을 합니다.
그 은혜를 자꾸 가리는 식으로 일을 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는 영지주의로 나타났습니다.
영지주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쾌락주의가 있고, 반대로 금욕주의가 있습니다.
둘 다 영지주의입니다.
쾌락주의는 우리가 죄를 짓는 육체로는 어차피 구원을 받을 수 없으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래서 그 로고스, 지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달으면 구원받으니까
이 땅에 사는 것은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 시대 구원 받으면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그렇게 살 것 같으면 우리 몸을 구원 하신 목적이 사라져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그 몸을 구원하는 것인데
이들은 구원받은 그 몸으로 죄를 먹고 마시고 있는 거잖아요.
에베소서 4장 11-20절을 봅시다.
엡 4:11-20=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신 후에 교회를 위해서 선물을 주셨습니다.
어떤 선물인가 하면 사도와 교사에요.
사도와 교사를 교회에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들은 성도를 가르치는 자들이에요.
뭘 가르치느냐?
구원의 목적과 의미를 가르쳐요.
교회를 세우는 것은 그 교회에 속한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인데
그 그리스도의 몸은 현재 죄 아래에 있는 몸과 반대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는 방탕과 방임과 방종을 하며 살았는데
다시 말해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쾌락주의로 살았는데
이제는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방탕과 방종과 방임은 이방인일 때 그랬고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왔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에요.
몸은 자기 사욕을 위하여 사용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용하라는 거에요.
영지주의자들이 뭐라 그랬나요?
어차피 몸뚱이는 죄 아래서 낳기 때문에 몸뚱이는 죄 지어도 상관없다고 하지요.
정신으로 구원받는 거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 알아서 구원받는 거니까.
그러면 이 몸뚱이는 이방인처럼 또 쾌락주의로 가겠죠?
이게 영지주의라니까요.
지금 이 시대에 복음을 곡해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자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어차피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막 살아도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영지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그러잖아요.
왜 예수님께서 너희를 교회로 세웠느냐?
세상 사람과 다른 모습으로 세웠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방탕과 방임과 방종하는 그들이 이방인이었는데 너희는 과거엔 그랬지만 이제는 그럼 안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또 못을 하나 치고 가야 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이방인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집니까? 라고 묻습니다.
안 살아져요!
그러나 우리는 그 지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그 정답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살아져도 안 됩니다.
이게 말이 어려운데 내가 살아지면 또 은혜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뚱이가 그렇게 안 살아진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 살아지게 만드신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몸뚱이가 그 말씀대로 살아낼 수가 없어요.
그래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예를 들어서 그런 지향성도 없는 인간들이 먹고 마시고 즐기게 되면 그들이 은혜를 알까요?
모르지요.
법이라는 것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말씀은 모두가 우리에게 다가 올 땐 법으로 다가와요.
방탕과 방종과 방임하지 말라 이게 법이에요.
그런데 우리 몸은 죄 아래서 났기 때문에 방탕과 방종과 방임이라는 유전자가 있어요.
이 유전자가 자꾸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식으로 일을 해요.
결국 우리 몸뚱이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죄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방인처럼 살지 말라고 하는 거에요.
이 말이 계속해서 우리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어차피 죄인인데 뭐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당연하지 라고 하면서 죄를 먹고 마셔요.
이것이 초대 교회에 나타난 쾌락을 추구하는 영지주의였어요.
그런데 지금도 이런 논리를 펴서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어요.
신종 영지주의자들이에요.
그 다음에 금욕주의가 있는데 디모데전서 4장 1-5절을 봅시다.
딤전 4:1-5=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에베소서나 디모데전후서 모두 사도 바울이 쓴 것입니다.
아까 살펴봤던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방탕과 방종은 안 된다고 했지요?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전혀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절에 ‘귀신의 가르침’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귀신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하면 3절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금욕주의를 말합니다.
예수님 오셨을 때 이런 모습으로 있던 자들이 쿰란공동체입니다.
그들은 금욕주의로 나갔습니다.
이것이 중세시대엔 수도원 제도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신자답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은 바로 죄 안 짓는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절제하고 금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걸 3절에서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고’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화주의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세요.
양극이잖아요.
한 쪽은 완전히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이고,
또 한 쪽은 천사처럼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 다 이단입니다.
천사처럼 살면 은혜가 날아갑니다.
예수 믿음이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방탕하는 자도 공격하고 성화주의자들도 공격하는 이유가 둘 다 창세전 언약을 훼손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뱀의 말입니다.
지금 바울이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하잖아요.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들을 평가할 때 잘 보세요.
그 사람이 고상한 척 하면서 성경을 가슴에 얹고 ‘착하게 사세요…’하면
그건 마귀의 말로 보시란 말이지요!
인간은 이 몸을 가지고는 온전해 질 수가 없어요!
성경 속에서 온전해 진 인간이 있는가요?
없는가요?
없어요..
사도 바울도 스스로 안 된다고 고백하잖아요.
물론 겉으로 나타난 모습에선 조금 덜하고 더한 경중이 있을 수는 있어요.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 죄성은 못 이겨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그 고백이 몸으로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마음의 죄를 두고 한 말이잖아요!
산상수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미 너희가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했다, 그러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으면 간음했다, 그러고
마음으로 탐심을 품으면 도적질 했다고 그러잖아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누가 이겨냅니까?
못 이겨냅니다.
여러분들 생각하시기에 우리 목사님은 복음 전하시니까 이겨내시지 않을까?
아니에요!
제가 만약에 그걸 이겨낸다면 이 복음 안 전하지요.
여러분들 착하게 사셔야 합니다 라고 하겠지요.
왜요?
내가 그렇게 하니까 날 따르라고 하겠지요.
말투도 점잖게 하지 이렇게 험한 말을 쓰면서 설교하지 않겠지요.
제가 그런 목사들 많이 압니다.
아주 거룩한 척…
다들 사람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속이는 목적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익’을 탐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말에 그냥 넘어가 버립니다.
여러분은 항상 경계를 하세요.
영지주의는 이렇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둘 다 안 됩니다.
지금 요한계시록의 말씀같이 뱀이 강물처럼 이런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쏟아내니까 진리에 서지 못한 사람들은 다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홍수가 하늘에 물과 땅에 물이 하나로 섞여서 일어나지요.
노아의 홍수를 영적으로 말하면 뱀의 말이에요.
뱀의 말이란? 영지주의의 쾌락주의와 금욕주의 두 극단적 사상을 말해요.
이 시대 이러한 사상이 교회를 휩쓸고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노아’만 삽니다.
왜?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방주를 신약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철저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여~ 주님의 십자가 아니면 전 안 됩니다.
그 십자가의 피 아니면 안 됩니다!
노아가 방주 속에 들어간 것이 신약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서 주여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 안으로 피해 들어가야 합니까?
내가 안 되기 때문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다,
내가 진리다, 라는 식으로 자기가 무엇이라도 된 줄로 말하는 사람들은 전부 이단으로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 도처에 많이 있어요.
내가 진리다, 내가 말씀이다, 라고 하다가는 결국엔 내가 예수다, 라고 까지 발전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가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도 은사이니까 하나님의 것이지요.
설령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여도 그것은 내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두 예수님의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도는 예수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제가 예수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성화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예수로 살라고 하는 것은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지,
예수님처럼 살라는 게 아닙니다.
물어 봅시다.
내가 예수로 살면 예수를 믿는다!
안 믿는다!
안 믿죠!
내가 예수로 살면 되는데 예수를 왜 믿어요?
그런데 그렇게 산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가지고 공교한 논리를 만들어서 자기 이론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당신 속에 예수가 와 있지 않느냐
그러니 당신이 예수가 아니냐,
그러니까 이제 내가 예수다 라고 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가 말씀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 교회에 가면 그 목사를 말씀의 아버지라고 찬송을 한다니까요!
세상에…
그런 자를 따르는 것은 교인들이 복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가리워 버리니까 그들은 그렇게 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뱀의 말에 미혹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다 쓸어버리십니다.
그러나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그 미혹에 안 넘어가요.
넘어갈 듯 넘어갈 듯해도 하나님께서 확 잡아 빼내십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날마다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저도 수없이 이단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했습니다.
그 때 마다 하나님께서 쏙 쏙 빼내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 그 때마다 빼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거예요.
그 은혜가 여기까지 저를 오게 하시고 이 복음 전하게 하는 겁니다.
다른 거 없어요.
노아의 의로움이란 다른 거 없어요.
은혜에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은 자기 실력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의 은혜가 방주를 짓게 했지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이 노아가 방주를 짓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짓는 일을 하게 한 것입니다.
믿음이 방주를 짓게 했지요.
그럼 이 시대 하나님이 무얼 믿으라고 합니까?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요.
하나님께서 성화하랬나요?
아니잖아요!
막 살으라고 했나요?
아니잖아요.
주 예수를 믿으라고 했지요!
주 예수를 믿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것을 하나님께서 의로움으로 보신단 말이지요.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을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준행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준행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예수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신, 구약 말씀을 약탕기에 넣어 달이고 짜면 예수님이 나옵니다.
예수 믿는 것 하나만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끝에 가면 결국 예수님 믿는 것 그것 하나 붙잡는 것입니다.
그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방주 안에 있는 자들만 구원해 내고 나머지는 전부 쓸어내 버리잖아요.
결국 그들은 방주로 구원받았지요?
저와 여러분들은 무엇으로 구원받았나요?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내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느냐?
그거 아니지요.
성실하게 살고 착하게 사세요.
세상 사람들 욕먹지 않도록 살되 그 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되면 안 된단 말입니다.
본질과 비 본질을 구분 좀 하세요!
본질은 예수 믿는 것이고,
비 본질은 예수님처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본질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보세요.
살아보라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한 번 살아 보세요.
그리고 자기 한계를 아세요.
살아 보지도 않고 안 돼 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살아봐도 정말 안 되는구나…
그럴 때 내 안에서 상한 심령이 일어납니다.
그래야 주님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보니까 내 꼬라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번 살아 보라는 것은 내 꼬라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이건 여러분들 삶 속에서 경험하시란 말입니다.
제발 말씀을 곡해해서 듣지 마세요.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는 것은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 없는 자만이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나의 어떠함을 보지 말고 예수를 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는 안 보고 내가 말씀대로 산다,
아니다!
말씀대로 살 수가 없다,
그러고 있어요.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있어요.
말씀대로 사는 것도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도 내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사는 것도 신앙의 본질이 아니고,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도 신앙의 본질이 아닌 것입니다.
뭔 말인지 이해 되세요.
제가 안타까워 죽겠어요.
왜 성경이 말하는 그 진의를 모르고 이상한 데 빠져서 그것이 진리인양 따르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아니에요.
전도서 7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전 7:14-17=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지나친 의인도 되지 말고, 지나친 악인도 되지 말라 그럽니다.
어떤 사람은 진짜 착하게 살다가 벼락 맞아 죽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맨 날 나쁜 짓 하는데 장수하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알아서 그렇게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혹시 주변에 맨 날 나쁜 짓 하는데 승승장구하는 사람을 보면서 저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하고 따라 가면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자꾸 방법론을 만들려 합니다.
틀을 만들려고 해요.
저 사람은 저렇게 하니까 잘되는구나 하고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일을 안 하세요.
하나님은 여기 본문에 있는 말대로 우리 앞에 ‘형통’과 ‘곤고’를 가지고 마음대로 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쓰시는 겁니다.
때로는 형통을 줬다가 때로는 곤고를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 아래 태어난 자들이기 때문에 형통을 주면 또 그것으로 법을 만들려 합니다.
그러면 그 법을 하나님께서는 깨트리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나친 의인도 되지 말고 지나친 악인도 되지 말라는 이 이야기는 너희들의 행함의 어떤 것으로 하나님 앞에 뭔가를 따내는 법칙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냥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살으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너희 인생을 개척해서 살려 하지 말고
너 인생은 네 것이 아니고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시니까
이런 일이 생기든 저런 일이 생기든 네가 계획 세우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형통하면 형통한대로 살고
곤고하면 곤고한 대로 감사하고 살으라는 겁니다.
그게 신자의 삶입니다.
인간들은 내가 성령 충만 받아서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된다 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분들 마음에 그 마음을 가지고는 사세요.
하지만 이 몸뚱이는 안 된다는 그 한계성을 알으시라고요.
그래서 나는 끝 날까지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아니면 안 되는구나를 깨달으세요.
그래서 여러분의 삶의 끝자락에는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은혜,
그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남아줘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모습의 신앙생활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날마다 이루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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