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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성경강해) 01강. 가인과 아벨 그리고 나 (창 4장 1-15)

by coroa 2020. 6. 29.

-.01강. 가인과 아벨 그리고 나 (창 4장 1-15).-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정낙원 목사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의 인류의 역사는 가인과 아벨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시면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셨던 그 언약을 에덴동산에서 큰 틀로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샘플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창세전 언약의 내용은 자기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그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에덴동산에서는 아담을 창조해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와 찬미하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는데 에덴동산에선 어떻게 되었습니까?

실패를 했습니다.



만약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미혹당하지 않고

즉 죄 짓지 않고 바로 생명과를 먹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 영생을 했다면 창세전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창세전 언약이 겨냥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그 죽으심으로 인해 자기 백성이 죄에서 건짐 받는 것이 창세전 언약의 정점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담이 타락하지도 않고 바로 생명과를 먹어 영생하게 된다면 이 땅의 역사라는 시나리오가 필요가 없어 집니다.

예수님이 오실 필요도 없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도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렇게 질문해 오시는 분들 계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담 앞에 선악과를 둬서 그것을 먹게 하고 그 죄로 인해 우리를 이렇게 생 고생을 시키냐고 따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생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을 통해서 고생이 없는 세계를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알게 하려면 사랑 안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반대되는 미움의 자리에 던져 놓고 거기에서 비로소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탕자 비유에 보면 아버지가 그 철없는 자식이 재산을 달라고 하자 재산을 떼어 주고 밖으로 나가게 내버려 둡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그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아버지 집의 귀함을 모르는 이 아들은 계속 그 집에 살고 있었으면 툴툴거리기만 하고 고마움을 몰랐을 것입니다.

 

아들이 왜 아버지 집을 떠나려 하겠습니까?

아버지 집이 좋으면 떠났을까요?

뭔가 불만이 있으니 떠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한 그 좋은 집에 사는데 뭐가 불만이겠습니까?

딱 한가지입니다.

자기도 아버지처럼 해보고 싶은 겁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근성입니다.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성입니다.

 

자식들은 아무리 좋은 환경을 줘도 부모에게 간섭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독립해서 내가 왕 노릇 해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른 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제일 소망이 무엇입니까?

빨리 어른이 되어 부모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 아니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린 모두 일탈을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뭔가 자꾸 벗어나고 싶은 거에요.

나만의 세계를 가지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왕노릇하고 싶은 겁니다.

 

탕자비유에서 아버지는 그냥 내버려 둡니다.

집 나가니 고생인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집을 나가 보니 비로소 아버지 집을 알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 집이 너무 너무 좋은 집이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 하나 알게 하시려고 비싼 수업료는 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겐 천국이라는 좋은 나라가 있는데

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주받은 이 역사 세계에 우리를 던져 놓고 그 아들이 와서 죽어서 우리를 데려가는 비싼 수업료를 내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에 보면 만물이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그러지요?

아담과 하와을 통해 이것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아담 속에서 하와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와 스스로 아담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데리고 가서 함께 하게 해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로부터 나왔다가 예수에게로 다시 돌아갈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어떻게 나와서 어떻게 예수에게로 돌아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섭하셔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십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발 믿음가지고 다투지 마세요.

부부 간에도 그런 것으로 다투지 마세요.

절대 신앙적인 것은 터치해선 안 될 문제입니다.

내가 믿어지게 해 줄 수 있으면 되지만 그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냥 믿어지면 믿어지는 자로 사세요.

믿어지니까 더 내가 양보하고 참아주고 이해하고 그게 믿어지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억지로 하려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음식 먹을 때 가장 짜증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식성과 취향이 있는데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게 하면 제일 화가 납니다.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겁니다.

인간 모두가 그렇습니다.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이 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누구에게 설명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억지로 믿어지게 할 순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키우듯이 성질나면 갖다 버려도 수없이 갖다 버릴 텐데 참잖아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는 겁니다.

 

그런 것처럼 믿음을 먼저 받은 사람은 항상 인내가 필요합니다.

늘 말씀드렸듯이 제가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을 정말 심하게 해봤기 때문에 누가 율법 아래 있는 것을 보면 측은지심이 생깁니다.

 

과거엔 법이 작동해서 그것도 모르냐고 나무랐지만 이젠 기다려집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열어주시겠지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을 만나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 눈과 귀를 열어 주셔서 예수와 그리스도가 믿어지고 이 십자가가 믿어지고 새 언약이 믿어졌듯이 저 분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허락해 주셔서 믿어지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이게 먼저 사랑을 받은 사람의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율법에 특심한 자였는데 그 율법 아래 있을 때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다가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보니 알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셔서 은혜를 입고 보니 이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을 핍박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오히려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복음을 받으면 일시적으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알았다는 것으로 내가 한 번 무언가를 자랑하고 싶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 지속되면 결국엔 법이 나오게 됩니다.

사람을 살려야 하는 복음으로 정죄하고 비판하고 죽이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내가 과거에 그런 형편에 있었던 것을 잊지 마세요.

그 마음이 있을 땐 설령 내 가족 중에 누가 그렇더라도 그냥 참아주고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울어야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주여 눈 열어 주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십시오 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내 마음에 안 들면 꼭 마귀 짓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이 큰 틀에서 이런 식으로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처럼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가 지난 시간에 전체적인 개요를 살펴봤는데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떠나갈 때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깨트릴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왔잖아요.

그래서 그 구도를 이 역사 속에 깔아 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역사 속엔 뱀의 후손의 계열이 있고 여자의 후손의 계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모든 이 땅의 인간은 두 부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볼 떈 민족도 다양하고 여러 모습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땐 뱀의 후손 그리고 여자의 후손 두 부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두 부류를 이야기 할때 가인과 아벨은 서로를 고발하는 원수지간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틀로 봤을 떈 가인이나 아벨이나 아담 안에서 나온 죄인입니다.

오늘 굉장히 중요한 공부를 하는데 가인을 타자로 보시면 안 됩니다.

가인이 곧 나입니다.

내가 곧 가인이고 내가 곧 아벨입니다.

 

보세요.

지금 아담 안에서 누가 나왔습니까?

가인과 아벨이 나왔습니다.

 

한 아담 안에서 가인과 아벨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은 저주받은 아담의 계통이고 아벨은 예수의 계통입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들이 한 아담 안에서 출생했는데 내 안에도 두 계통이 있는 것입니다.

 

나도 가인과 같이 저주받아야 할 계통이 있고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계통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옛 사람은 반드시 죽고 새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우리 안에 엣 사람도 있고 새 사람이 있습니다.

 

이 옛 사람은 늘 마귀 짓을 합니다.

새사람을 늘 공격합니다.

이게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형국입니다.

 

그러니까 가인과 아벨을 큰 틀에선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으로 보지만 그것을 나에게로 적용을 시킬 땐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내 이야기가 되었을 때 가인은 나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봤을 때 하나님께서 범죄 한 가인에게 우리가 죄를 지었으면 마땅히 죽여야 하는데 가인에게 지금 표를 주고 살려 내십니다.

이 이야기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했을 때 당연히 죽여야 하는데 하나님께선 가죽옷을 입혀 살려 주시는 것처럼 범죄 한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 준 것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가인에게 표를 주시는 것도 가인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이 가인이 되고 아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옛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가인으로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내 안에 두 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두 법은 두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또 그 안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이 사람을 핍박하는 자가 있습니다.

 

바울 속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아벨 계통이고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는 것은 가인의 계통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누가 이깁니까?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는 자가 이겨 날마다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는 자를 죽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인과 아벨은 우리 안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실 때 한 사건을 가지고 단편적으로 보시지 말고 이중 계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육적으로도 보고 영적으로도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냥 우리가 문자적으로 보면 소설처럼 하나의 이야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왜 이런 구도를 만들었을까 생각을 해보세요.

가인 같으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 죽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살려 놓으십니다.

그것도 표를 줘서 절대 죽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표를 줬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뭔가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가인을 나쁜 의미로 접근하지 말고 내 안의 가인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항상 아담 안에서 태어난 가인은 옛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난 새 사람은 아벨입니다.

그러면 결국 내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전쟁을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 주시는가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어요.

이 은혜를 받은 자는 가인입니까

아벨입니까?

아벨이지요?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 받는 것을 우리 옛사람이 미워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우리 옛 사람을 고발하는 식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죄인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투입되면 죄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을 때는 죄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제사를 지내기 전에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둘의 제사를 똑같이 받았으면 싸웠을까요?

안 싸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아벨의 제사를 받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해 버리십니다.

그러자 가인은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가인이 그 제사에 의미를 뒀다는 것입니다.

그 제사 속에 자기 공로라는 노력과 내 피 땀이 들어 있는데,

왜? 무시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가장 근본적인 죄는 무시당할 때 일어납니다.



부모가 화가 날 때가 언제입니까?

그 아이가 부모의 말을 무시할 때입니다.

말을 무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능적으로 화가 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부정당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뭡니까?

내가 부정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나라는 존재가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죄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내가 좋다하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 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지 내 열심으로 내 좋은 것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근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이것을 먼저 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뭘 좋아하시는가?

하나님이 뭘 기뻐하시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받으시는 것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남은 자는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배척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으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새로운 민족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예수 안에서 나온 자는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남은 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육적으로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전체적인 틀에서 세계만방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했다면 온 세계에서 남은 자는 누가 되죠?

이스라엘이 되겠죠?

 

그런데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났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서 또 걸러내더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속에서 유다지파를 걸러냅니다.

그렇게 유다 지파가 전부 남은 자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보니까 유다 지파도 가짜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 마지막에 남은 자는 유다 지파 중에서도 예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를 통해서 이제 남은 자를 새로 생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나온 자는 무조건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남은 자인 것입니다.

교회가 남은 자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남은 자는 우리가 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겨둔 자들인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런 얘기를 합니다.

온 이스라엘 모두 바알과 아세라를 쫓아가고 나만 남았습니다.

엘리야는 스스로가 남은 자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 말 속엔 다른 사람은 저렇게 쫓아갔는데 나만 믿음 지켰다는 사고가 가득차 있습니다.

이게 엘리야이즘입니다.

자기는 의롭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너 말고 내가 남겨둔 자가 칠천 명이 있다고 하십니다.

 

남겨진 자가 칠천 명이 있다는 것은 너는 남은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엘리야가 구원받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엘리야 같은 사고를 가진 자는 남은 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남은 자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남은 자는 하나님이 남겨둔 자들입니다.

은혜로 남겨진 자들입니다.

 

그 칠천 명이 드러나 있습니까?

숨겨져 있습니까?

숨겨져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면 지금 이 교회의 모습이 엘리야 시대와 같은 모습인데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남겨진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고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지극히 숨겨진 모습으로 미미하게 남겨져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자꾸 화려한 꿈을 가집니다.

옐리야 처럼 하나님을 폭풍 가운데와 불과 같이 지진과 같이 나타나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엘리야에게 있어 하나님다움은 능력입니다.

이게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상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불위 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역사 속에 방문하는 하나님은 죽으러 오신 하나님입니다.

희생 제물로 죽으러 오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에겐 진짜 하나님이 포착되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을 모르면 죄인 된 인간 본능 속에 알고 있는 하나님 관을 가지고 교회에 와서도 그 분을 찾게 됩니다.

 

능력의 하나님으로 세상에서 나의 성공을 도우는 그런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교회는 커야 하고 복음을 전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와야 된다는 영웅주의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엔 복음을 곡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곡해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영웅 만들어 쓰신 적이 없습니다.

모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과연 저 사람이 신자인가,

주의 종인가 싶게 쓰셨습니다.

 

이것을 가루 서 말 속에 누룩 같고 겨자씨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화려한 것을 꿈꿉니다.

우리가 복음 깨닫고 나면 밖에 나가서 자랑하고 싶고 사람들이 알아봐 주길 바라지 않습니까?

내 안에 그런 네피림 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그런 나를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또 다시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떠나지 마세요,

주님이 날 떠나시면 내 안의 이 마음이 또 튀어나와 영웅되고 싶어 합니다.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날마다 이게 깨트려집니다.

복음을 깨닫게 된 것도 내 것으로 행사하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을 하시지 않고 그 마음을 비껴가는 것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자기 백성을 다루시고 일해 가시는 것에 환상을 가지지 마세요.

미미합니다.



지난 시간에 가인의 이름은 무엇이라 했습니까?

‘있음’ 이요 아벨은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자의 후손 게통은 아벨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여인의 후손으로 오는 메시야의 계통 속에 있는 사람은 이 땅에서 ‘없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없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미한 모습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들 마음에도 이런 복음을 전하는 우리 교회가 많은 사람들이 와서 좀 커졌으면 좋겠다 싶은 영웅 사상 있지요?

저에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그렇게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인으로 ‘있음’으로 내 이름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이 세상에서 확장하고 꿈을 펼쳐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를 보면 전부 적극적 사고, 긍정적 마인드로 이 땅에서 잘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 전부 가인 사상입니다.

그게 엘리야가 가지고 있던 사고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비껴가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이 세상을 다뤄 가실 거면 이렇게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한 방에 해결하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가 수 천년동안 흘러 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시고 참으시고 속된 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망신 당하실 만큼 당하고 계시다는 애기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당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조롱당함이 극에 달할 때를 죄악이 관영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 때처럼 모든 사람이 외형적으로 봤을 때 하나님을 떠난 것 같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남겨진 자들이 있는 겁니다.



엘리야의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 떄에 남은 자들은 그 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세상이 모두 큰 길로 가고 모두 성공을 향해 달려가더라도 여러분은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길이 우리의 원함이 아니어도 주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결국 우리는 버려짐 당하고 자꾸만 내가 기각당하고 부정당하는 그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먼저 화가 납니다.

가인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내 제사는 안 받습니까 라고 외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예수를 죽이는 살인자로 나타납니다.

이 말이 이해되십니까?

이해 되셔야 합니다.

 

여러분 절대로 여러분들이 예수를 안 죽이는 자들이 되면 안 됩니다.

내가 예수를 죽였다고 하는 자들이 천국에 갑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용서받은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용서는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죄인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 앞에 죄는 예수를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우리 편을 안 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복음을 알고 예수를 믿어도 이 복음을 가지고 또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이 복음 아는 것으로 내 이름을 떨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면 이 일 자체가 예수를 이용하는 것이 되고 예수를 수단으로 쓰는 것이 결국엔 예수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인입니다.

이런 가인을 하나님께서 표를 주시고 살려 주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아셔야 해요.

마땅히 징벌 받아야 하는데 징벌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표를 줘서 살려내십니다.

 

죄 안 짓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거룩해 진다고 생각하지도 마세요.

우린 그런 자들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는 그런 생각을 가지세요.

거룩하려 애쓰시고 누구보다 잘 살기 위해 해보세요.

그런데 우리 안에는 그런 것을 지켜낼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늘 고발당하세요.

 

그리고 나는 눈만 뜨면 예수를 이용하는 자지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다가온다면 이 땅에서 빼내 오는 것으로 옵니다.

이 땅은 저주받은 곳이니까.

저주받은 곳에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을 붙박이처럼 살게 하지 않습니다.

빼내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구원의 역사는 전부 빼내는 것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구원하실 때 갈대아 우르에서 빼내는 것으로 시작하십니다.

갈대아 우르는 자기가 태어나고 의지하고 자기 힘이 있는 곳입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기득권이 있는 곳이 갈대아 우르입니다.

그 곳에서 빼내는 것이 구원입니다

죄악 된 세상을 상징하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무슨 장사를 합니까?

우상 장사를 합니다.

 

이 세상 자체가 우상 장사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 아브라함을 찾아가 거기서 빼내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겐 죽음입니다.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빼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가나안까지 쫓아갔다고 생각하십니까?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이 말씀을 좇아서 갔다고 하니까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말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이 아브라함을 고삐 끌듯이 끌고 간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선 ‘믿음으로’라고 합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순히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안 따라 갔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 ‘믿음으로’가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순순히 안 따라 가니까 말씀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와서 믿게 해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못 믿는 자인데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 오니까

그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게 만들더란 말이죠.

 

그래서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믿었다로 나오면 안 되고,

나는 못 믿는 자인데 주께서 믿어지게 해 주셨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그 바탕에 항상 누구의 영광이 드러납니까?

날 믿게 해주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주일날 오셨습니다.

서로 서로 만나고 싶어 하고 한 마음으로 온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여러분이 한 것이 아니고 여러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간섭을 한 것입니다.

 

모두 자기 의로 가득해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니,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결국 너와 나를 여기에 있게 하신 것은 주의 은혜구나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랑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해서 봐라 나는 한 번에 알아먹고 왔잖아…

그건 아닙니다.

그렇게 제대로 알아먹고 왔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말씀대로 살아야지요.

그런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는 결코 잘난 인간이 아닙니다.

자기의 필요에 따라 부인을 두 번씩이나 팔아 넘긴 자입니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의 인내하심과 간섭하심으로 아브라함 되게 만드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그 자리까지 가게 하셨습니다.

혹자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까지 바친 믿음을 말하지만 그건 아브라함의 실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끌고 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지금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 죽음으로 아벨은 없는 인물이 됩니다.

그런데 아벨을 죽인 그 가인을 하나님께서는 표를 하나 주어 지켜내더란 말입니다.

 

그 표가 신약적으로 와서 보면 저와 여러분들도 받은 것입니다.

무엇이지요?

성령의 인침입니다.

 

성령의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이것은 내 소유라는 것입니다.

표라는 것은 구약에선 종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소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것은 가인과 다른 사람를 구분해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세요.

지금 가인이 있고 가인 말고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가인이 뭐라고 합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 죽일까 두렵습니다! 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가인을 죽이고자 하는 자들이 뱀의 후손이 되고 가인은 여자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가지고 봤을 때는 뱀의 후손의 역할을 했고 아벨은 여자의 후손이 되었지만,

아벨이 죽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표를 줬잖아요.

그것은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할 놈을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살려내시는가 하면 표를 주어 그를 지켜내시더란 말입니다.

그럴 때는 표 받은 가인은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표를 줬습니다.

그래서 그 표를 받음으로 인해서 우린 하나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안 보여도 여러분의 이마에는 예수님이 주신 표가 있습니다.

 

마귀는 그것을 알아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 이마에 예수님의 인치심을 보고 마귀는 항상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에 속한 자를 핍박하고 죽이는 식으로 다가 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죄가 투입될 때 드러납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않았을 때는 죄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공격을 안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복음 모르고 그냥 율법 지키고 열심히 하면 교회 안에서 이단 소리 안 듣습니다.

다 같은 부류인데 그 속에서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알고 언약을 알고 복을 알고 나니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다른 소리를 하는 우리를 싫어합니다.

그것은 그 분들 속에 있는 영이 먼저 아는 것입니다.

같은 영 안에 잇는 사람은 이상하게 끌립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 마치 핏줄이 당기는 거처럼 끌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교회 안에 있어도 안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복음을 입으로 말해도 담이 쳐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 안에 영이 서로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께서 하십니다.



교회라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 몸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내가 교회지요?

그러면 그 교회를 누가 관리합니까?

예수님이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했지요?

그러면 그 지체를 분별하고 알아보는 것이 납니까?

나를 교회되게 하신 그리스도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한 성령 안에 잇는 지체들은 기가 막히게 알아 보고 당기십니다.

교제하게 하고 연합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리 교회 안에서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도 심지어 내 가족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그 교회가 아닌 자는 이상하게 거리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지켜내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누구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대해 너무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십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떄를 정하시고 만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렇게 간섭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제 가인에게 표를 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눈동자는 이제 가인에게로 쏠려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을 죽이는 자에겐 칠 배나 갚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가인이 아벨을 죽인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으로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을 지켜주시고 살려두시는 이유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이 자가 살고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셔서 내가 살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겠지요.

 

그거 하나 바라고 하나님이 가인을 살려 두신 것입니다.

가인이 이쁘고 잘나서가 아닙니다.

가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관리해나가시는 가를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다른 백성과 가인을 비교했을 때 가인은 하나님의 백성 계통이 되고 가인을 죽이려는 자는 마귀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인의 후손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나올 땐 또 죄인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 셋을 줍니다.

그럴 때 가인은 또 뱀의 후손으로 드러납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재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마땅히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것으로 죽여야 하는데 가죽옷을 입혀 살려줬듯이 범죄한 가인도 죽이지 않고 표를 줘서 살려냅니다.

 

그 구도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을 살려둬야 하는 이유가 벰의 후손이 계속 살아 있어야 여인의 후손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 자 인 것을 이미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열 두 제자 반열에 끌어 들인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을 배도하고 팔아넘기는 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 없이 예수님 혼자 죽으시면 안 됩니다.

누가 죽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스스로 죽는 자가 아니고 죽임은 당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죽인 자는 악의 세력이 되고 악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구도가 역사 속에서 계속 재현이 되어 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 속에서는 하나님이 가인에게 이렇게 표를 줘서 가인을 보호하시는 것은 결국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가죽옷을 입혀 살려줬듯이 하나님이 가인에게도 이런 은혜를 주셨구나…

 

그러면 이 본문 속에서 가인을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 자신이 가인이었구나!

이런 가인이 용서받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라는 것을 생각하시란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저와 여러분들이 가인을 살려주신 그 하나님의 진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죄는 하나님의 사랑이 투입될 때 드러난다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사람들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터인데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 했습니다.

 

이 구절을 찾아봅시다.



요 15장 18-19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세상이 나(예수)를 미워한다고 하지요?

그러면 세상은 나를 미워하는 겁니까?

예수를 미워하는 겁니까?

예수를 미워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말씀드린 대로 귀신은 예수쟁이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귀신을 푸닥거리하는 그런 의미로 생각지 말고 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귀신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모르는 것은 전부 귀신입니다.



이 귀신들은 예수님의 피를 믿는 신자를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무당을 분별하십시오.

무당이 뭡니까?

신과 인간의 중간에서 매개체가 되어 길흉화복을 점치는 자가 무당입니다.

 

그 무당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 안에 양복 입은 무당이 많잖아요.

목사들이 무당입니다.

세상에 복을 주겠다고 하는 자들은 모두가 무당입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세요.

마귀가 예수님에게 무얼 주겠다고 합니까?

세상 부귀영화입니다.

영웅호걸 만들어 주겟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도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산다는 것을 가르치는 자는 마귀입니다.

 

그 무당들은 여러분이 복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기가 막히게 알아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화려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은 뽑아내고 건져 내십니다.

 

그래서 스가랴서에 보면 목자가 양 떼를 치면 다 흩어지는데 그 중에 가장 작은 무리들에 하나님의 은혜가 드리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버림당하고 미움당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유대교를 말합니다.

이 온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광의적인 의미이고 예수님께서 ‘세상은’ 이라고 할 때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무리를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그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교 중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저희들이 너희를 미워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시대로 당겨와 보면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뿌림 안에 거했기 때문에 육에 속한 자들이 여러분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러잖아요.

 

미움을 받을 것 같으면 마태복음 5장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러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쁨보다 화가 납니다.

 

내가 예수를 알고 복음을 믿었다는 것으로 내 입지를 굳히고 영광을 보려는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가 계속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사랑하는 자도 아니고 예수를 이용하고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구나! 를 알게 되고 그렇게 우리는 자꾸 가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잘남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가인이 맞습니다.

이런 가인을 주께서 용서하시고 은혜로 표를 주셔서 살려주신 그 은혜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 속에서 늘 감사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