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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03강. 버려짐과 되 찾음 (창 3장)

by coroa 2020. 7. 29.

-.03강. 버려짐과 되 찾음 (창 3장).-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정낙원 목사

 

2013년 특강으로 시작한 때부터 거의 9개월에 걸쳐 우리는 창세기 1, 2, 3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누누히 말씀드리기를 이 창세기 1장에서부터 3장까지의 이야기는 인류 역사 전체를 조감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한 번 들어서 될 문제가 아니고 계속해서 들으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오늘 개괄적으로 정리를 하고 가인과 아벨에 대해서 다시 설명할까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처음 열면 ‘태초에 하나님이…’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시는데 그 창조라는 것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물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만든 것이 창조가 아니고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지 그 원인이 있단 말입니다.

그 원인에 의한 결과물이 창조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창세전 언약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 반드시 우리의 존재 즉 이 역사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역사를 존재케 하는 원인의 세계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 원인의 세계를 다른 말로 묵시라 하고 하나님 나라 혹은 영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의 나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그림자처럼 반대편에 역사를 만드신 것입니다.

 

잘 이해를 하세요.

하나님이 계신데 그 하나님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피조물을 만드신 것입니다.

피조물을 통해서 창조주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홀로 영광 받으시는 분인데

그럼에도 피조물을 만드신 이유는 그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장에서는 이 만물 자체가 장차 철거될 것으로 만드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자체는 가건물입니다.

 

여기는 영원한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구원을 자꾸만 빼내는 것으로 얘기합니다.

기존의 것으로부터 빼내는 것으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은 누구입니까?

그 본토 친척 아비를 의인화시키면 바로 아담입니다.

우린 모두 아담 안에서 나왔잖아요?

그 아담에서 빼내심을 입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묵시에 계신 하나님이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그럼 역사 속에 있는 이 백성들은 다시 어디로 빼냅니까?

묵시로 빼내죠.

이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다른 말로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빼내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존재인 아담 안에서 묵시적인 존재인 예수 안으로 빼낸다는 말입니다.

아담 안에 있던 자를 예수 안으로 건져내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조금의 도움도 우리는 한 게 없습니다.

구원 자체의 그 계획을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그럼 잘 생각해보세요,

역사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셨죠?

그럼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누가 주관합니까?

하나님이 하시죠.

 

 

저와 여러분들을 이 역사 속에서 존재케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죠?

그럼 저와 여러분을 누가 간섭하고 계실까요?

하나님이죠.

 

이것이 믿어질 때는 여러분의 인생이 가벼워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믿어지지 않으면 내가 자꾸 어떤 책임을 지려 합니다.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면 그 사람은 쉼을 얻지 못하고 이 세상 사는 자체가 매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스스로 존재하고자 하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고 아담 안에서 빼내심을 입은 자는 자기 인생이 없기 때문에 그냥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맡기고 사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어린 아이입니다.

천국은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하지요?

천국에는 어린아이들만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 요셉이를 보세요.

저 녀석은 지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태어난 것에서부터 지금 밥을 먹고 옷을 입는 것 하나 하나 까지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없습니다.

전부 부모가 입혀준 옷을 입고 부모가 주는 양식 먹고 있어요.

모든 것이 부모가 제공하는 것들을 받고 있습니다.

생명까지도 말이에요.

이것을 일컬어 한마디로 은혜라고 해요.

사랑이라고 합니다.

 

요셉이는 할 일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방긋 웃어주면 됩니다.

저는 손자인 요셉이에게서 많은 은혜를 받아요.

그래서 시청각 교재로 인용을 하기도 합니다.

이젠 조금 컸다고 제가 안을라치면 음…하고 소리를 냅니다.

나 있다는 겁니다.

자기를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6개월쯤 지나니 자아가 눈을 떠서 나라는 존재를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 모습이 꼭 우리 모습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까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우린 지극히 미미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입니다.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 보이는 나라가 나왔습니다.

보이는 나라는 기껏해야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 보여주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하다 여겨도 하나님이 계시해 주지 않는 것은 절대로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안다고 하는 계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다 안다고 생각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제가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혼자 복음 다 안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모두 열어 주지 않았어요.

만약 그런 자가 있다고 한다면 백 프로 이단이에요.

그 놈은 교주가 되어요.

 

우리는 모두 부분적으로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께 은혜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젖먹이가 어미의 젖을 사모하듯이 ‘주여 오늘도 은혜를 주소서,

긍휼을 베푸소서,

하나님을 더 깊이 더 많이 더 넓게 볼 수 있는 그 안목들을 주소서’ 라고 늘 기도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여러분과 같이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 여러분들이 말씀의 교만인 나르시즘과 더 알 것 없다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입니다.

다 안다는 거죠.

아니 말씀을 전하도록 쓰이는 저도 다 모르는데

저에게 듣는 여러분이 어떻게 다 안다고 하십니까?

그건 아니에요.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가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어떻게 이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담아낼 수 있습니까?

없어요.

우린 알려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 했다 라고 하시는데,

이 말을 알려 주시지 않았으면 우리가 알 수 있었을까요?

모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을 열 때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숙연해져야 합니다.

내가 겨우 이런 존재이구나를 아셔야 합니다.

 

우린 그렇잖아요.

우리의 인식론이라는게 ‘나 있음’으로 부터 출발합니다.

이게 ‘죄’ 입니다.

그렇게 내 존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내가 있어야 신도 있고,

내가 없으면 신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방인들의 사고에요.

 

그러나 성경을 열면 나 있기 이전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방인들은 죽으면 끝이라지만 아니에요.

선재(先在)해 계신 그 분 앞에 우린 가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으면 반드시 심판을 당한다(히9:27)’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주 예수를 믿으라 외치지 않아도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사시면 됩니다.

살림을 하면서 설거지를 하면서 혹은 산책하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이게 왠 은혜입니까’ 를 상고하시면 됩니다.

 

여러분들 비 왔을 때 감사해 보셨어요?

이번 여름처럼 더운 때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덥게 하시려면 빨리 데려가기나 하셨으면 좋겠는데 아무 조치도 취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불평 아닌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그런데 이 더운 날씨에 비 한 번 내리니까 더위가 사라집니다.

 

여러분 보세요.

저와 여러분이 아무리 이 세상 사는 게 힘들고 고통스럽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한 번 임하게 되면 세상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집니다.

이걸 느껴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저 멀리 앉혀 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런 거 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우리와 타자로 계시게 하면 안 됩니다.

그건 우상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싶어 하십니다.

‘나 여기 있다’

지금 그러고 싶으신 겁니다.

그런데 우린 잊고 살잖아요.

 

죄는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 잊고 사는 게 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는 늘 내가 여기 있다를 가르쳐 주십니다.

 

옛날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를 보면 남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를 남겨 두고 일찍 죽어버렸습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에 남자는 죽어서도 여자 곁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그 사실을 몰라요.

그러니까 고스트로 나오는 그 남자가 자꾸 사고를 일으킵니다.

화병도 떨어트리고 이런 저런 방법을 써 봅니다.

그래도 여자는 모릅니다.

 

그 모습이 지금 우리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를 해주시며 스스로를 보이려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릅니다.

왜요?

먹고 사는 거 쫓아가느라 그 하나님의 간섭을 알지 못합니다.

땅강아지처럼 그저 땅만 파먹고 살 궁리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따금씩 삶의 벼락을 치시는 겁니다.

 

여러분, 신자에게 징계는 축복입니다.

그걸 아셔야 해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저주란 것이 없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저주로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러잖아요.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 포로로 보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저주로 생각했어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에게 포로로 잡혀 갈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너희들의 생각은 내 생각과 하늘과 땅만큼 다르고 내가 너희들에게 주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렘29:1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던 그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알아 먹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그발 강가에서 서서 비로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그럴 때 찬양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자기 백성들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다만 징계를 당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저주로 보여지는 것이지 실제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매질을 해도 그건 사랑이지 절대 저주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미움과 저주로 받아들이지요.

‘엄마는 맨 날 나만 미워해’ 라고 합니다.

그런데 엄마는 그 자식을 사랑해서 그러는 겁니다.

 

사랑은 집착입니다.

그런데 그 집착을 당하는 사람은 피곤합니다.

사랑의 이면엔 질투가 있고 그 질투가 우리에게 올 땐 저주로 느껴집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까지 사랑하시는구나’ 입니다.

 

여러분이 어렵고 힘든 일 당할 때 그렇게 한 번 외쳐 보세요.

‘제가 그렇게 좋으세요?’ 라고요

그럼 하나님께서 씨익 웃으며

‘그래 나 너 정말 좋다’

그러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린 고난 속에서도 이겨내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시편에서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면서 토해내는 것을 한 번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요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요 라고 하잖아요.

여러분 방패가 되려면 무언가가 나에게로 날아 오고 있다는 겁니다.

창 칼이 날아 오고 화살이 날아와야 방패가 쓰이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 만큼 우리에게 갖가지 고난을 부어주시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부어주시면서 우리를 지키는 자임도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걸 좀 알라는 겁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우리도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라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창조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한 것은 그 창조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가졌던 계획들을 이 역사 속에서 풀어내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 2장, 3장에 모두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성경 전체를 축약해서 보여주는 책의 목차와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의 내용은 첫째 날 창조로 시작해 마지막 날 안식으로 끝납니다.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 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창세기 1장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그 안에 만물을 채우시고 마지막 날 쉬는 것을 알려 줍니다.

 

이것을 신약식으로 옮기면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을 빼내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채워 넣으시고 그렇게 됐을 때 그와 함께 안식을 하는 이것이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길로 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이 하나님의 은혜를 채우고 싶어 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너는 내 것이라(사43:1)’ 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 자꾸만 제 인생에 간섭을 하십니다.

희미하게 알던 하나님을 점점 더 알게 만들어 가십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아는 하나님과 십 년 후에 아는 하나님은 또 다를 수 있습니다.

그 간섭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점점 더 알아가게 되실 겁니다.

 

창세기 2장을 통해서는 실제 아담과 하와를 통해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낼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아담이 등장하고 그 속에서 여자가 나옵니다.

원래는 아담 하나만 있는 건데 여자가 나옵니다.

그 매커니즘을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셨어요.

그리고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은 거기에 뒀습니다.

그런데 그 아담 속에서 여자를 빼내시더니 또 다시 집어넣습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 속에 성경 전체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 아담 이야기를 어떻게 풀었습니까?

아담은 장차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하면서 그 오실 자가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담 속에서 여자가 나왔으면 예수님 속에서도 여자가 나옵니다.

나온 여자가 다시 아담에게 들어간다면 예수에게서 나온 여자(성도, 교회)도 다시 예수님에게로 돌아갑니다.

 

만물이 주께로 나와, 주께로 인하고, 주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이잖아요.

지금 우리가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 전체를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서 그를 불러서 모두 예수 믿게 만들고 찬양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다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 속에서는 우리의 영광은 조금도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주께서 다 하셨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을 하는 자 안에는 누구의 흔적이 담겨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흔적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흔적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겁니다.

 

 

신앙 좋음은 그 예수님의 은혜를 많이 깨달아 감사와 찬미가 많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끝에는 감사와 찬양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이 없는 신앙생활은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겁니다.

 

심지어 죽음 속에서도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쉬운 얘기로 하나님께서 새 집 만들어 놓고 헌 집에서 철거시켜 가는 것입니다.

그와 똑같은 것입니다.

새 집 이사 갈 때 좋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죽음을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 전체가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의 천지를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설명하고 여자가 남자 되는 것으로 구원을 설명한다고 했지요?

 

구원은 여자가 남자 되는 것입니다.

남자는 한 분 밖에 없습니다.

누구입니까?

 

남자의 의미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라고 합니다.

거기서 말한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우리는 모두 생명이 아닌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심 자체가 우리의 생명 없음을 고발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보고 인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에요.

 

하나님이 보실 때 코로 호흡하는 자는 하나님의 수에 칠 가치가 없습니다.

인정을 안 하십니다.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는 하나님이 상종을 안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산 자 처럼 행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짜 산 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죽은 자로 고발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남자가 아니고 남자가 되기로 작정이 된 여자들인 겁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나서 그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 하지요?

그러니까 아담도 구원을 얻기 위해서 만들어진 자입니다.

구원된 자가 아니고요.

 

아담도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로 지음을 받은 것이지 아담 자체가 영생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분이지요?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죠?

그런데 아담은 지금 산 자가 아니지요?

 

 

성경이 말하는 산 자는 영생하는 자를 말하는데

그 영생하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담에게는 지금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그 아담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상징하는 생명과를 먹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과를 먹었을 때 아담은 영생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장 22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와 하나가 되었으니 그 손을 들어 생명과를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뭐할까 하노라?

영생할까 하노라 합니다.

 

 

지금 아담이 영생할까봐 겁이 나서 얼른 내보내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은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기로 작정하고 만들었는데

그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죽은 자가 된 자가 생명과를 먹어 버리면 죽은 놈이 영생하는 겁니다.

이게 말이 이상한데 다른 말로 하면 죄인이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른 차단 시켜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의 계획은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여서 영생하는 자로 만들려는 것이었는데

이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죽은 자가 된 아담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할까봐 쫓아내고 격리를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고 죽어버린 아담은 내어 버리고 이 아담을 죽여서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저와 여러분이 아담 안에서 태어난 죄인이기 때문에 이 죄인을 죽이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두 예수를 알아야 된다고 말씀드렸죠?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저승 사자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안고 같이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왜요?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살아 있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죽이고 다시 살려 내서 원래 아담의 위치로 앉혀 놓고 거기에 영생, 생명을 집어넣는단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안고 죽으신 다음 살려주는 영이신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영생하는 자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영생된 자는 절대로 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보증으로 우리 가운데 온 사람은 죽어도 사는 것입니다.

그 성령이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우리 신자들은 절대 죽어도 죽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삼키지 못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의 무덤이 빈 무덤이 됐죠?

예수님이 분명 죽으셨는데 무덤이 토해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쉬운 말로 무덤이 예수님을 소화시키지 못해서 토해내는 것입니다.

 

절대로 죽음은 우리를 삼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됐을 것 같으면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과 연합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더라도 예수님처럼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이 몸 죽는다고 두려워하지 말란 말입니다.

이 몸 말고 새 몸이 있습니다.

우린 그것을 기다리고 사는 자입니다.

 

여기서 아무리 이 몸으로 백 년을 살아도 땅에서 난 것은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몸 자체가 저주의 몸입니다.

저주의 몸을 하나님이 어떻게 끝냅니까?

죽어서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으로 끝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저주 받은 이 몸으로 살려고 합니다.

안 죽으려고 해요.

그럴 때 하나님이 뭐라 하실까요?

‘네가 그렇게 안 죽으려 하면 계속해서 저주의 몸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래도 살겠느냐’ 라고 되물으실 겁니다.

 

그리고 새 집을 지어 놓으시고 그 새 몸 줄께 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것을 본 자들은 주여 언제 데려 가시렵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생명을 데려가신다는 것이 사모가 되고 기다려집니까?

말은 쉽습니다.

아니에요!

우린 늘 그 속에서 우리의 죄성이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어제 방송을 잠깐 듣는데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하십니다.

어떤 목사님이 스스로 설교를 잘한다고 생각을 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부인에게 설교 잘했냐고 묻곤 했답니다.

그런데 부인이 대답을 안 하는 겁니다.

남편은 은근히 화가 납니다.

왜요?

 

사람들은 자기가 내뱉은 것에 대한 반응을 살피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인간이에요.

제가 블로그에 글을 써도 반응을 살핍니다.

댓글이 없으면 섭섭해집니다.

 

그 목사님도 자기 생각엔 설교를 잘한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사모님이 칭찬을 좀 해주기를 바라는데 아무 말이 없는 겁니다.

자꾸 재촉을 하니까 사모님이 좋은 설교는 많은데 능력 있는 설교는 없다고 대꾸를 해버렸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당신이 아무리 여기저기서 베껴서 청산유수처럼 말을 해도 그 속에 생명이 안 나오면 설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모님의 실력이 대단합니다.

 

좋은 설교는 얼마든지 많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의 책을 여기 저기 짜깁기 하고 주석책의 내용을 섞으면 멋진 설교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생명의 능력이 안 나오면 그건 아닌 것입니다.

그건 강연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그런 말을 하잖아요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은 많은데 아비는 적다고요.

일만 스승은 많습니다.

스승은 그다지 책임이 없습니다.

성과를 보이면 됩니다.

 

 

하지만 아비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도 나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라도 잘 이해해서 자식의 것으로 먹이려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창세기 1장 1절 한 절만 가지고 묵상을 하더라도 그 마음에 기쁨과 든든함이 생겨야 합니다.

진도 나가서 빨리 다음 구절에 대해 알려고만 하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두 한 이야기만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이 이야기를 풀어놓았을 뿐입니다.

그럼 이 성경 전체를 둘둘 말면 뭐가 나올까요?

 

 

이 성경을 있게 하신 분이 나옵니다.

그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한 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는 게 둔하니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부간에 살면서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얼마나 아십니까?

우린 다 몰라요.

부분적으로 알 뿐입니다.

같이 살아도 그 맘 속 깊은 곳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동안에 살아왔던 경험으로 그 사람을 알잖아요.

그렇게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맘 편히 옆에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를 지식으로 머리를 키우려 하지 마세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들 앞에서 오늘은 무슨 말 하는지 한 번 들어 보자 그러잖아요.

지식 놀음입니다.

 

예수는 문자가 아니고 생명입니다.

생명은 어떻게 담아내지 못합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어떤 정형화된 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우리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난 번에는 이렇게 일하셨는데 이번에는 다르게 일하십니다.

만약에 우리의 예상대로 일하신다면 우리가 알고 있던 그 틀 속에 하나님이 가둬지게 됩니다.

우린 자꾸 그렇게 이해를 하는데 이번에 열심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셨어 라고 할 것 같으면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요?

내가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 앞에 나가니 물질도 주시고 하나님은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구나 로 알게 될 겁니다.

 

 

그래서 그 방식을 가지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다 나가서 같은 방법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오히려 가진 것도 빼앗고 강도 만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게 아 닌데요 라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러세요.

그게 나다! 라고 하십니다.

나는 복도 주고 저주도 한다 라고 하십니다.

 

여호와는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시는 겁니다.

우린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기의 백성을 어떤 식으로 간섭해 갔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세요.

저는 창세기 1, 2, 3,장을 강해하면서 굉장히 많이 은혜를 입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결국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의 그 좋은 환경에서도 범죄하고 쫓겨나잖아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 쫓겨남 속에서 다 살려낼 궁리를 하시면서 쫓아내더라는 것입니다.

가죽 옷을 입혀서 내 보내고 나가는 그들에게 너희들을 다시 불러 드릴 테니 누구를 기다리라고 하잖아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악속의 후손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결국 내 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내보냄인 것입니다.

다시 불러들이지만 약속의 자손을 보내주면 그로 인해 다시 들어 올거야 …

그럼 니가 동방 저 쪽에 나갔다 다시 들어 올 때는 니 공로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손의 공로로 돌아오니까

너는 그 분의 공로만 찬양하면 된다…라고 하십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떠나보낼 때 기다리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에덴 동편으로 내보냅니다.

어떤 분은 에덴 동편을 저주받은 곳이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성경은 동편을 소망 있는 곳,

기다리는 곳으로 말합니다.

여러분 동편에서 무엇이 뜹니까?

해가 뜨죠?

해라는 것은 의의 상징인 예수님을 상징하는데 그럼 동편에서 누구를 기다리라는 것입니까?

약속의 자손을 기다리는 겁니다.

그래서 동편에 둡니다.

 

에스겔서에도 보면 성령이 지은 성전을 보면 안식일만 되면 동편 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을 기다립니다.

그 동편에서 오는 하나님은 결국 나를 에덴 동산으로 데리고 가실 분입니다.

그래서 동쪽은 항상 소망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왜 아시아에서 복음의 꽃을 피우는지 아세요?

이건 표상학적으로 이해를 하세요.

아시아라는 의미는 해가 뜨는 곳입니다.

유럽이라는 말은 해가 지는 곳입니다.

거기엔 복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아시아에서 역동적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 아시아의 맨 끝단 조그만 나라에서 이 복음의 능력들이 엄청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서양 사람들은 학문적으로 성경을 보는 안목은 탁월해도 이것을 영적 깊이로 읽어내는 재주는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비록 학문적 지식은 일천하다 할지라도 이 속에 있는 영적 깊이를 뽑아내는 데는 도사들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새벽기도하고 금식기도 하는 사람은 한국 사람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이 역사 속에서 종말에 한국 사람들을 들어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동방에서 예수가 온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의 진의를 아시겠지요?

동쪽은 항상 메시야가 오는 소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에덴 동쪽에 살면서 누구를 기다립니다.

약속의 자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가 와서 길 잃어 버린 아담을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동쪽의 길 잃어 버린 아담으로 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영원한 집이 있다 하시면서 우리를 끌고 가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련이 남아 자꾸만 롯의 처 같이 뒤를 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 미련두지 않기 위해서 자꾸 가지치기를 해주십니다.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못하니까요.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돈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못 버립니다.

어떤 인간도 그럴 수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니까 돈 사랑하지 말라고들 합니다.

아니에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에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우리는 돈을 여전히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가 돈을 버릴 수 있는 인간이 없어요.

그럼 누가 그 일을 하게 합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항상 나에게 의미를 두지만 하나님에게 의미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장어구이를 대접하셔서 한 번 먹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장어를 먹으면서도 복음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 그랬지요?

고기는 물 속에 있을 때가 천국입니다.

어부에게 잡히는 순간 그 인생은 끝납니다.

잡히는 순간 이런 저런 방법으로 먹힐 뿐입니다.

 

민물에 살던 장어가 건져져서 이제 죽었습니다.

온갖 양념이 발라져 구워 먹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빼내서 하나님이 먹기 좋도록 회를 떠서 장어 양념구이 하듯이 예수의 피를 우리에게 발라 데리고 가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피를 다 바른 이 생선구이를 하나님 앞에 잡수시라고 가져다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셨을 땐 그 생선구이 위에 뭐가 발려져 있나요?

예수의 피가 발려져 있죠?

하나님은 그 예수의 피를 그렇게 좋아하시는 겁니다.

 

장어 구이 하나 속에도 복음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저 맛있다고만 하지 마시고 그 장어를 잡은 어부가 누구에요?

예수님입니다.

이 장어처럼 이리 저리 빠져나가는 우리를 잡아 올리셨습니다.

그렇게 붙잡아 죽이시고 완전히 회를 떠서 양념 발라 숯불에 구워 아버지 앞에 갖다 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예수님이 장차 그 나라를 아버지께 바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누구입니까?

우리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그러지요?

너희는 거룩한 나라요 제사장이라고 그러잖아요.

우리가 그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린도전서에서 하나님나라를 바친다는 것은 우리를 바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바칠 때 그냥 바치는 게 아니고 우리 몸에 예수님의 피가 발라져 있는 것입니다.

그 피 발라진 것을 아버지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 때 아버지는 그 피를 보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막에서 제사 지내는 것으로 나옵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 갈 때 피를 들고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결국 피를 바르고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다른 것 없습니다.

예수의 피 공로 의지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창세기 1, 2, 3장을 통해서 아담 하나를 가지고 샘플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내가 너희들을 구원하는 원리는 이렇게 할 거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고 4장부터는 실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성경은 4장에 나와 있는 이 아벨을 최초의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을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세상에 보냈다가 다시 찾기 위해서 보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날 데려가려고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데려갈 때 그냥 데려가지 않고 예수의 공로를 입혀 데려갑니다.

 

우리는 전부 잃은 양처럼 자기 갈 길 가고 있는데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이들을 둘레 메고 당신의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이는 것이 성경 전체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그 이야기를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샘플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는게 내가 연구를 해서 예수가 믿어지고 내가 열심을 내서 믿어지고…이건 다 이런 예수 믿기 하던 것은 율법 아래 있을 때 하던 짓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해서 못 믿었잖아요.

믿는 척만 했지요.

 

여러분 믿는 것과 믿는 척은 완전히 다릅니다.

믿는 척 하는 것은 주체가 여전히 자신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믿어지게 해 주셔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예수가 믿어지게 하지 않고 자기 백성들에게만 믿어지게 해주신단 말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겐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그 믿음이 우리 안에서 예수가 믿어지게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믿음으로 아벨은 더 좋은 예물을 바쳤다고 하는 겁니다.

결국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은 없는 그 믿음을 아벨에게만 주신 것입니다.

아벨은 그 믿음에 근거해서 양을 잡아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럼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누구 계통에 있습니까?

아벨 계통이지요.

 

 

지금 말씀드리는 이 창세기 1장 2장 3장을 잘 정리해 놓으세요.

한 번 보고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자꾸 생각하셔서 곱씹고 음미를 하세요.

추상적 관념적으로 그것이다 하지 마시고요.

 

9개월 동안 이 창세기 1, 2, 3장을 자세히 강해해 드렸습니다.

모두 이해하시고 잘 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해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결국 땅이 하늘을 통해서 하늘 되는 것을 말합니다.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천, 지에서 땅은 받는 입장이고 하늘은 주는 입장입니다.

그러면 땅은 하늘로부터 받음으로서 산물을 냅니다.

산물을 내는 것이 땅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인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아까 얘기했듯이 여자가 예수를 통해서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자는 어떻게 남자가 됩니까?

남자의 씨를 받아서 됩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여자들이 임신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여자를 주장하는 것은 여자 자신이 아니고 뱃 속에 있는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여자를 보고 남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지금 우리 속에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생명을 주어지게 될 것 같으면 우리는 이제 땅의 사람이 아니고 내 속에 들어와 있는 하늘의 사람을 통해서 내가 하늘의 원리로 사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삶의 원리가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땅이 전부인 줄 알고 있었는데 예수를 믿고 나니 땅이 전부가 아니고 이 모든 것이 허상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는 여기가 아닌 저기에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역사에서 묵시로 산다고 하는 겁니다.

 

아침에 보니 어떤 집사님이 덧글에 일곱의 안식일 속에서 여덟으로 사는 이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에 부활하셨죠?

그럼 거기에 말하는 안식은 무슨 안식입니까?

첫 창조에 속한 일곱째 날 안식입니다.

이 날은 첫 창조에 속한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안식을 깨트려 버리고 안식 후 첫 날,

첫째 날 그러니까 여덟째 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주일에 이렇게 모이는 것은 일곱째 날에 모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날을 기념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여덟째 날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 일 여덟째 날인 대안식을 아셔야 합니다.

 

초막절 얘기 때 이미 말씀드렸죠?

초막절은 마지막 여덟째 날 안식일인데 이 날을 전부 겨냥해서 초막절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은 역사 속에 있는 날이고 여덟째 날은 묵시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여덟째 날로 모이는 것은 묵시 안에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일 성수한다는 구약적 개념을 가지시지 말고 여덟째 날로 모였다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 여덟째 날이 무슨 날입니까?

예수님이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 말은 결국 그 날에 우리가 모인다는 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죽음에서 부활된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부활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어서 나중에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린 부활을 한 것입니다.

이 말을 오해해서 목사님 그럼 우린 안 죽습니까 라고 질문하지 마세요.

이 몸뚱이는 땅에서 났으니 흙으로 반납을 시켜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부활의 프로그램에 따라 죄와 상관없는 몸으로 부활을 시킵니다.

 

 

그럼 지금 현재 우린 이미 영적으로 부활된 자들입니다.

부활할 자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부활의 프로그램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와 있으면 이미 부활된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가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된 자로서 하늘의 가치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와서 자꾸 땅의 가치를 달라고 하면 안 된다 말입니다.

땅의 가치로 살게 되면 여러분은 하루도 쉼을 얻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바다로 묘사하는데 바다엔 늘 파도가 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가면 파도가 없는 유리 바다가 나옵니다.

그 유리바다가 영적으로 부활된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인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내 존재를 좀 알고 예수를 믿잔 말입니다.

도대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막연히 믿으라 하니 믿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한다면 그건 너무 가난한 신앙입니다.

한 번도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삶 속에서 체험을 못하는 겁니다.

밥상에 차려진 밥은 먹으라고 있는 것이지 구경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의 양식입니다.

그 양식을 먹은 사람은 예수로 살고 양식을 구경만 한 사람은 예수와 상관없이 그냥 자기가 사는 것입니다.

 

 

그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교회 안에도 그저 예수를 구경만 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전 너무 답답합니다.

예수를 잡수세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내 것으로 믿어지면 그 믿음이 나로 하여금 예수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 다 이루신 것으로 살게 하잖아요.

그래서 비록 현실 속에서 열악하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와 함게 십자가에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했단 사실이 믿어질 것 같으면 이 세상을 그렇게 주눅 들고 살지 않습니다.

없어도 당당합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망했다고 하나님이 망한 자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비록 아담이 범죄해서 애덴 동산에서 쫓겨났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선 그 쫓겨난 아담조차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를 불러들이기 위해서 일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조치를 다 취하시고 다시 부르는 그 과정이 우리가 이 땅으로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 과정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금 세상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낙망하지 마시고 그 속에서 나란 존재가 지금 이렇더라도 내 안에 예수님의 부활의 영이 와 있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망하고 죽어도 다시 산다는 이 사실로 담대하게 사세요.

없으면 없는 대로 사세요.

그게 능력입니다.

 

없으면 징징거리는 것이 당연한 건데

없는데도 웃을 수 있는 그것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깁니다.

내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내 양식이 될 때

그 때 내 안에서 나도 모르는 어떤 파워가 생깁니다.

그 힘으로 여러분 사세요.

 

제가 큰 소리 치는 거 다른 것 없습니다.

그 은혜가 내 안에서 힘으로 역사하니까 가진 것 하나 없는데 다 가진 것처럼 당당할 수 있는 겁니다.

주 안에서 보면 다 가진 자입니다.

 

뭐가 두렵습니까?

이 세상 끝나면 그 나라 가면 되고 더 살라 하면 살면 됩니다.

있어도 감사

없어도 감사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이 할 수 있다 할 때

그가 풍부해 처할 줄도 알고 빈곤에 처할 줄도 안다 한 것입니다.

모든 환경이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려 가는 것이 지금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를 다스려가고 있구나를 생각하시면서 좋은 일 생기면 하나님이 주시는 거구나 하고 감사하고 궂은 일 생기면 하나님께서 이거 바라보지 말고 주님 바라보라고 그러시는구나 하고 사세요.

그러면 그게 천국입니다.

 

부디 하루 하루 살면서 우리가 비록 에덴 동산 바깥에 떨어져 있지만 그 떨어져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품어져 있을 것 같으면 그 아담은 비록 에덴 동산 밖에 살지만 그 약속을 소망하고 살게 될 때 동쪽 문은 받드시 열립니다.

그 때를 사모하면서 주신 은혜로 넉넉히 이겨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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