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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 강해)34강. 여호와의 안식 (히 4:1-11)

by coroa 2022. 11. 7.

 

 

34강. 여호와의 안식 (히 4:1-11) 히 4:1-11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창새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34강. 여호와의 안식 (히 4:1-11)

히 4:1-11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4.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보면 천국 가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가나안에 들어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라고 하면 안심을 하겠는데 그 반대로 광야에서 멸망당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불안 한 것입니다.

 

천국(가나안)은 뭔가 붙잡아야 한다고 하니까 더 불안 한 것입니다.

못 붙잡으면 어찌되나?

그러면 짤리는가?

도대체 불안 불안해서 예수를 못 믿겠어요.

 

오늘 본문은 표면적으로 들으면 공포 분위기가 철철 넘쳐요.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그러면 짤린다! 라고 하잖아요.

두려워하라고 하잖아요.

가나안에 넣어 준다고 해 놓고선 광야에서 못 들어 갈수도 있다고 하잖아요.

 

안식도 그냥 안식이라고 하면 좋은데 그렇지가 않아요.

안식도 종류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요.

“제 칠일 하나님의 안식이 있고,”

“여호수아가 준 안식이 있고,”

“아직 남아 있는 안식이 있다”고 하잖아요.

 

아직 남아 있는 안식은 다윗의 말대로 어느 날을 정하여서 오늘 날이라고 하면서 그의 음성을 들으라고 합니다.

오늘 날이라고 하면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는 말입니다.

 

이러면 히브리서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냥 흘러 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이야기로 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안식하는 것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만약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데리고 들어간 것이 안식이라고 한다면 다른 안식을 말하지 않았을 것 아니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가나안이 안식의 세계가 아니란 말입니다.

가나안은 단지 안식의 세계에 모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모형을 붙잡고 실상이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안식의 세계가 가나안인줄 알고 가나안에 들어갔는데 그러나 하늘에 있는 본향이 안식의 세계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가나안에서도 여전히 안식의 세계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또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쉰다고 합니다.

그러니 너희들도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아니 천국은 공짜로 넣어 준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더러 힘쓰라고 합니까?

힘 안 쓰면 탈락 합니까?

 

그리고 믿으면 믿는 것이지 믿음에 화합치 못하는 믿음은 또 뭡니까?

믿음에 화합치 못하는 믿음도 있답니다.

어떤 것이 믿음에 화합치 못하는 믿음입니까?

 

이러면 무섭습니다.

내 믿음은 믿음에 화합한 믿음인가?

나도 믿음에 화합하지 못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걱정이 되지요.

 

말로는 예수 믿으면 된다고 해 놓고선 믿음에 화합했냐? 안했냐? 라고 따지고 있으니 참으로 복잡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을 표면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 얽힌 실타래 같은 것을 어찌 풉니까?

그렇다고 포기 할 순 없잖아요.

안식에 안 넣어 준다고 하니까 천국에 가려면 힘들어도 머리에 쥐가 나도 해법을 알아야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지요.

 

모르면 물어야 해요.

알 때까지 물으셔야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궁금한 것을 묻듯이 물어야 합니다.

 

엄마! 하늘에 달은 왜 떠 있어!

엄마! 바다에는 왜 파도가 쳐!

엄마! 저건 왜 저렇게 생겼어!

엄마! 왜 밥 먹어야 되는데!

엄마! 왜 사람이 죽어!

 

어린 아이들 특징이 뭡니까?

온통 궁금해 하잖아요.

어린 아이들은 질문을 그치지 않아요.

시시한 것 같아도 모르면 물어야 합니다.

모르면서 아는 척 하다가 지옥에 가는 것 보다는 모르면 물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낫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쉬지 말고 물으라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물으면 하나님이 쉬지 않고 깨닫는 길을 열어 주세요.

책을 통하여서든지 아니면 설교를 듣다가 보면 깨달아 질 때가 있어요.

책이나 설교가 다른 뜻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힌트가 되어서 내가 고민을 하던 것의 해답으로 깨달아 질 때가 있어요.

 

고민하던 것이 하나가 풀리면 마치 흐르는 도랑의 물이 쓰레기로 꽉 막혀 있을 때 물꼬만 살짝 터 주면 물살이 터져나가듯이 술술 풀려져요.

하나가 풀리면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이 풀려져요.

 

말씀이 깨달아진다는 말입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는 식으로 깨달아져요.

그러면 얼마나 기쁘고 황홀한지 몰라요.

 

전 율법 아래 있을 때 기도를 엄청 많이 했어요.

하루에 12시간을 했으니까요.

틈만 나면 기도했어요.

그만큼 말씀에 대하여 곤고함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저를 보고 믿음이 좋다고 하는데 전 아니었거든요.

그러니 자연히 기도를 많이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달음질을 해요.

깨달아져요.

물론 그 당시엔 율법 아래서의 깨달음이었어요.

그러나 그 깨달음이 당시의 갈급한 심령을 시원케 해 주었어요.

 

그러다가 또 갈급해지는 것입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또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또 다시 진리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진주 장사가 좋은 진주를 구하러 다니듯이 찾게 되어요.

그러면 사람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책을 통하여서든지 또 깨닫게 해 주세요.

말씀을 깨달아 가는 것은 마치 사람이 성장하는 것과 같아요.

단계가 있어요.

 

처음엔 희미하던 것들이 점차 밝히 드러나요.

막연하던 것이 손에 잡혀요.

아! 이것이구나! 라고 깨달아져요.

 

마치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대로 내가 어렸을 때는 어린아이 같이 생각을 하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 것처럼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도 동일해요.

말씀을 깨닫는 것도 그러해요.

율법 아래 있다가 십자가 안으로 끌고 오는 것입니다.

율법이 몽학선생처럼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셨어요.

 

율법 신앙은 배척하여야 하지만 율법은 배척하면 안 되어요.

바리새인들이 책망 받은 것은 율법 신앙 때문이지 율법 때문이 아니었어요.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이는 율법이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율법이 없으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없어요.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 주기 위해서 지금도 율법은 열심히 몽학선생이 되어서 성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인도하고 계세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율법을 지나 믿음으로 끌고 와요.

 

그래서 바울도 예수님은 율법 아래 있는 자를 속량하러 오셨다고 증거해 주고 있어요.

 

갈 4:1-5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보세요.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셨다고 하지요.

원래 아들이지만 잠시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게 내 버려두셨어요.

정한 때까지 율법이 후견인이 되어서 종노릇시킨 것입니다.

그러다가 때가 차매 율법에서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때가 차매 오셨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을 만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을 깨닫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때는 하나님이 주관을 하세요.

아무 때나 예수를 믿을 수도 없거니와 아무 때나 말씀이 깨달아지는 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모든 신앙은 율법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 아래 있는 성도를 은혜 아래로 빼내 온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십자가 밖이고,

은혜는 십자가 안이에요.

 

신앙은 율법으로부터 출발하여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스려 가는 코스에요.

마치 기차가 레일을 따라 가듯이 신앙도 정해진 코스가 있어요.

 

구원은 마치 이스라엘을 애굽에 종노릇하다가 가나안으로 불러내는 것과 같아요.

종노릇을 해 보아야 해방의 기쁨을 알아요.

죽도록 일을 하여야 안식의 기쁨을 알아요.

 

애굽에서 종살이를 해 보아야 안식의 세계로 불러 주심에 대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 아래서 태어나게 한 것은 죄의 무서움도 알고, 죄에서 건짐 받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사랑인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은혜는 율법을 모르고서는 주어지지 않아요.

율법을 바탕에 깔고 은혜가 주어져요.

새 언약은 옛 언약의 바탕 위에서 주어져요.

옛 언약은 새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율법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종으로 살지 않고 자기 종으로 살고 있어요.

왜 구원 해 주셨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복음에 반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디에 있어도 종이에요.

 

예수의 종이냐!

마귀의 종이냐! 에요.

내가 주인인 적은 없었어요.

 

육신은 누가 주인이냐에 따라서 주인이 요구하는 삶을 살게 되어 있어요.

마귀가 주인이면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

예수님이 주인이면 성령의 소욕대로 살아요.

육신의 소욕은 자기 정욕대로 살게 하고 자기 자랑을 하게 해요.

하지만 성령의 소욕은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을 박게 하고 예수님을 자랑하게 해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말하지만 자기정욕대로 자기를 자랑하면서 살고 있어요.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지식이고 관념이에요.

 

지식이나 관념은 힘이 없어요.

말하는 것을 보면 엄청 믿음이 좋은 것 같아도 조그마한 시험이 와도 넘어져요.

거품처럼 물만 부으면 푹 꺼져 버려요.

지식이나 관념은 신앙생활에 감격이나 기쁨이나 감사가 없어요.

말씀이 생명의 역사로 나타나지 않아요.

 

전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나 감사나 기쁨이 없으면 옳은 믿음으로 안 보아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주는 죄사함의 은혜를 못 느끼기 때문에 십자가가 능력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를 말해도 무덤덤해요.

물에 물탄 듯이,

술에 술 탄 듯이 반응이 없고 감동이 없어요.

율법 아래서 종노릇을 안 해보아서 십자가가 주는 해방의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해 내는 도구와 같아요.

바람이 스치고 가면 나뭇가지가 떨림으로 반응하잖아요.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의 은혜가 스치고 지나가면 뭔가 반응이 나타나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복음으로 나를 스치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떨림이 있어요.

그 떨림이 겉으로 표현 될 때는 감사로 기쁨으로 찬송으로 헌신으로 봉사로 나타나요.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은 십자가 복음이 가져다주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로 하여금 가만히 있게 하지 않아요.

은혜를 증거케 해요.

 

살아 있다는 것은 반드시 반응이 있어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분명한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도 무덤덤한 사람들은 지식으로 아는 화석화 된 십자가이기 때문에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지식이니 수십 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교회 오는 것이 힘이 들고 말씀 듣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애통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있다면 복음에 대한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에요.

복음을 말해도 반응이 없다는 것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면 남의 이야기가 되어요.

내가 죄인임을 알아야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복음으로 들려요.

내가 죄인임을 알아야 예수님이 내 구주가 되어요.

제가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를 목숨처럼 여기는 것도 율법의 긴 터널을 지나 왔기 때문이에요.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였기 때문에 복음으로 인하여 쉼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처한 상황에서 궁금하면 하나님께 물어야 해요.

깨닫는 것도 단계가 있어요.

오늘 깨달은 것이 내일이면 식은 밥이 되어요.

날마다 새로 지은 밥을 먹어야 해요.

설교 준비를 해도 막상 주일날 설교를 할 땐 준비된 것이 안 나오고 그 때 그 때 새로운 깨달음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폭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져 가야해요.

난 다 안다고 시건방 떨지 마세요.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은 끝이 없어요.

다 알았다는 것이 없어요.

항상 알아가야 해요.

이제 다 알았으니 그만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 항상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용할 양식이란 금방 금방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이에요.

성령이 새로 지은 따끈따끈한 밥을 주는 것입니다.

 

광야에 나온 백성들에게 날마다 은혜를 주셨어요.

날마다 내려준 그 은혜의 상징이 만나에요.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날마다 만나를 내려 주셨지요.

 

이는 날마다 말씀을 주셨다는 말이에요.

이름하여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날마다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해요.

날마다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안 되지요.

 

만나를 매일 준 것은 저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나는 저축하면 썩어요.

저축한다는 것은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나간 은혜는 잊어버리고 새로운 은혜를 받으라는 말입니다.

 

지난 과거 은혜를 고정화 시켜서 붙잡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날마다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옛 세포가 죽고 새 세포가 새로 생겨나듯이 새로운 은혜를 맛보고 살아야 해요.

 

언약도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말하는 것도 이와 같아요.

옛 언약을 붙잡으면 안 되어요.

새 언약을 붙잡아야 해요.

 

오늘 말씀이 그 내용이에요.

제 칠일 안식일을 말하고 있지요.

하나님께선 제 칠일엔 모든 일을 쉬시고 안식하셨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그 안식의 세계로 불러들인다고 하잖아요.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있어 제 칠일 안식일은 언제입니까?

만나가 그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매일 만나를 주셨어요.

그리곤 일곱째 되는 날은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하여서 만나를 주시지 않았어요.

 

광야 이스라엘에게 있어 일이란 날마다 만나를 거두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 만나를 거둔 것은 엿새 동안 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째 날에 만나를 거두지 않은 것은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하는 것이었어요.

이렇게 되면 만나는 배부름을 위한 양식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안식의 세계(가나안)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약속이고 말씀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것은 아브라함 언약 때문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을 기억해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것입니다.

그러니 언약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안식의 세계에요.

애굽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던 종의 세계였다면,

가나안은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쉬는 하나님의 안식의 세계에요.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 광야가 있어요.

광야 길에서 쉼은 만나가 그치는 일곱째 날이었어요.

엿새 동안 내리던 만나가 일곱째 날에는 그쳤어요.

이는 만나가 일곱째 날을 알려주고 여호와의 안식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배부름을 주는 음식으로만 먹고 만나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약속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만나를 먹으면서도 만나가 의미하는 것을 몰랐어요.

 

이를 본문에서 믿음에 화합치 못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눈으로 만나를 보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만나를 보았다고 한다면 일곱째 날 여호와의 안식의 세계로 들어갔어야 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어요.

이는 믿음에 화합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성도의 구원 사건으로 봅시다.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데 두 언약이 있지요.

출애굽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하였어요.

그리곤 광야에서 가나안은 모세 언약으로 들어가요.

법궤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건넌 것은 모세언약으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법궤 속에는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주어진 두 번째 돌 판이 들어가 있어요.

 

첫 번째 돌 판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약속한 계약서에요.

누구든지 어기면 죽는다고 목숨을 걸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그 첫 번째 계약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함으로서 깨어졌어요.

하나님이 계약서대로 이스라엘을 죽일 때 모세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이스라엘을 살렸어요.

 

하나님은 모세의 목숨을 담보로 두 번째 돌 판을 주었어요.

이스라엘은 모세의 목숨 안에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하려고 두 번째 돌 판을 법궤에 보관토록 했습니다.

두 번째 돌 판은 모세의 목숨으로 맺은 언약이에요.

 

모세 언약이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세운 언약이에요.

겉보기에는 자기들이 지켜야 할 내용이 적혀 있는 율법이지만 그 안에 담겨진 의미는 모세의 목숨으로 산다는 것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켜서 사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놓치면 안 되어요.

 

언약적으로 보면 첫 번째 돌판은 옛 언약이 되고, 두 번째 돌판은 새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돌 판은 우리가 지켜야 하지만,

두 번째 돌 판은 예수님의 죽음이 담겨져 있어요.

가나안을 두 번째 돌 판이 담긴 법궤를 앞세우고 들어간 것은 장차 천국은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한 1 세대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지요.

가나안은 광야에서 태어난 2 세대들이 들어갔잖아요.

그럼 광야에서 죽은 1 세대들은 전부 지옥에 간 것일까요?

아니지요.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이 있다고 하잖아요.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합니까?

 

10-11절.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이 어느 시대를 말하고 있나요?

광야 시대를 말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간 사람이 있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지금 우리에게 너희도 이들처럼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광야에서 안식에 들어간 자는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들이지요.

그럼 광야에도 여호와의 안식의 세계가 있었다는 말이 되지요.

광야에서 여호와의 안식의 세계가 바로 일곱째 날인 것입니다.

엿새 동안 만나를 거두다가 일곱째 날에 쉬는 것이 여호와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도 만나를 거두러 나간 자들이 있었지요.

그렇다고 한다면 일곱째 날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자들은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치 않은 자들이 되는 것이지요.

문자적으로 본다면 이들은 모두가 광야에서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치 못하고 멸망을 받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들을 강퍅한 자이고 믿음에 화합을 이루지 못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것은 저주 받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 세계는 안식의 세계에요.

 

안식이란? 일하지 않고 쉬는 거예요.

애굽에서는 자기 노력으로 먹고 살았어요.

하지만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먹고 살았어요.

 

광야에서 자기 노력으로 살고자 하면 안 되어요.

그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도 만나를 거두러 나간 자들이 있었어요.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까 안식일에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내 힘으로 살았지만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았어요.

내 힘으로 사는 것을 법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사는 것을 은혜로 산다고 합니다.

애굽은 법으로 살아가고 광야는 은혜로 살아가요.

애굽에선 내 힘으로 살았지만 광야에선 하나님 은혜로 살아요.

그 상징이 만나에요.

만나는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입니다.

만나를 주신 것은 너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광야의 이스라엘이 만나를 먹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 주시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살았으면 광야는 안식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에겐 가나안이다! 광야다! 애굽이다! 라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살면 그곳이 안식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이 거저 살게 해 주시는 은혜로 산다는 것을 모르면 여호와의 안식에 참예하지 못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매일 거저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도 자기 힘을 의지하고자 했어요.

하나님은 보지 않고 환경만 보았어요.

하나님 거저 살게 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지 않으니까 자꾸만 환경을 보고서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나를 먹으면서도 맨 날 불평하고 원망한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한다는 것은 은혜 아래 있지 않다는 증거에요.

은혜 아래 있으면 원망과 불평이 생길 수가 없어요.

모든 게 감사할 뿐이에요.

 

이걸 지금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고 살면 그 사람은 이미 여호와의 안식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미 천국에 와 있다는 말입니다.

 

광야에서 불평하면 애굽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러니 들어가야 할 안식이 남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나를 먹으면서 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구나!

 

하나님이 거저 살게 해 주시는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았다면 광야는 안식의 세계가 되어요.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았어도 안식 할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만나를 먹으면서도 안식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들어가야 할 안식이 남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안식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봅시다.

 

안식이란? 쉬는 것입니다.

쉰다는 것은 일을 다 마쳤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함이 없으면 쉼도 없어요.

안식은 반드시 일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안식하셨는지 살펴봅시다.

 

창세기 2장입니다.

 

창 2:1-3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고 하니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을 다 만드셨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천지 속에 담을 만물도 만드셨어요.

 

천지와 만물은 엄밀히 말하면 달라요.

천지는 공간이고, 만물은 내용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을 통칭해서 천지만물(天地萬物)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진 나누어서 공간을 만들었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진 나누어진 공간에 집어넣을 것을 만들었어요.

이것은 마치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그 속에 생기를 불어 넣은 것과도 같아요.

흙으로 된 육신은 천지와 같고 육신 속에 담긴 영혼은 만물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는 역사에 속한 창조에요.

그런데 그 역사를 가지고 하나님은 묵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묵시는 세상 밖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말해요.

 

보이는 것을 역사(歷史)라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묵시(黙示)라고 합니다.

피조물의 세상을 역사라고 하고, 창조주의 세계를 묵시라고 해요.

 

히브리서 11장 3절을 보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는 보이는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말이에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하려고 보이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다시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가지고 보이는 천지를 창조 한 것입니다.

보이는 천지 창조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왜 이렇게 일을 하셨는가 하면 보이는 세계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해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천지와 만물을 만드셨는지 알아야겠지요.

그럼 보이는 천지만물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로 풀어 봅시다.

 

바울의 증거를 봅시다.

 

골 1:16-17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자 보세요.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가 되었다고 하지요.

여기서 그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만물보다 먼저 계셨다고 하지요.

그리곤 만물이 예수님 안에서 섰다고 합니다.

섰다는 말은 존재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했는데!

왜 창조 했나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 했어요.

예수님이 없으면 만물은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 때문에 만물이 있는 것입니다.

만물 속에는 우리도 포함 되어 있어요.

 

만물이란? 천지에요.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모두에요.

보이는 것은 인간들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물들이에요.

 

영물은 천사를 말해요.

천사도 좋은 천사가 있고 나쁜 천사가 있어요.

나쁜 천사를 마귀라고 합니다.

그러니 만물 속엔 나쁜 마귀도 들어 있고 좋은 천사도 들어 있고 인간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만물을 가지고 뭔가 할 일이 있어서 창조 하였을 것 아닙니까?

뭔가 필요해서 만들었을 것이잖아요.

필요해서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 필요가 다 끝나면 사라질 것이란 것도 포함되어 있지요.

 

만물은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있어요.

유한(有限) 한 것입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세계를 역사 세계라고 합니다.

 

만물이 예수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했어요.

그럼 만물은 예수를 보여주는 도구인 것입니다.

역사 세계는 묵시 세계를 보여주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다 보여주면 철거 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주님만 영존하고 보이는 이 세상은 다 멸망 할 것이라고 했어요.

 

히 1:10-12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자 보세요.

주께서 땅에 기초도 두셨고 하늘도 지으셨다고 하지요.

하늘도 있고 땅도 있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천지입니다.

그런데 주는 영존 하지만 천지에 속한 것들은 다 멸망 할 것이라고 합니다.

 

잘 보세요.

남을 것이 있고 사라질 것이 있어요.

주는 영존 하시고 만물은 다 멸망해요.

 

남는 것은 주님이시고, 사라질 것은 천지만물이애요.

예수님만 남기고 나머진 모두 사라질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 하나가 나옵니다.

반복하는 것이지만 중요하니 다시 봅니다.

 

다시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5-17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천지 만물이 누구를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고 합니까?

그를 위해서라고 하지요.

그가 누구라고 했지요?

예수님이지요.

 

자 봅시다.

예수님이 예수님을 위해서 천지만물을 만들었어요.

천지만물을 가지고 예수님을 드러내려고 만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만물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다 끝나면 만물은 철거가 되어요.

 

일이 다 끝나면 천지만물은 용도폐기가 되어요.

용도란? 사용되어진다는 뜻입니다.

폐기란?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이젠 일할 것이 없이 쉰다는 말이잖아요.

용도는 일이고 폐기는 안식이에요.

 

이렇게 다 사용되어지고 쉬는 것을 안식(安息)이라고 합니다.

천지만물이 예수님이 다 사용하시고 나면 더 이상 일할 것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죽는 것을 잠 잔다!

혹은 안식한다고 하지요.

제가 참 기쁘게 보는 말씀 중에 하나인데 봅시다.

 

이사야 57장입니다.

 

사 57:1-2절.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자 보세요.

의인의 죽음을 침상에 쉬는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을 너무도 복된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잖아요.

이런 말씀이 믿어진다면 어찌 죽는 것을 두려워하겠어요.

제가 장례식 때 꼭 하는 설교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안식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에요.

죽음은 예수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해요.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창조가 되었다가, 예수님에게 사용되어지다가,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게 되는 것이예요.

 

아직 세상이나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직도 예수님이 뭔가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에요.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우리 몸으로 뭔가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뭔가 할 일이 다 끝나면 우리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 안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 안에서 나왔잖아요.

예수 안에서 나왔다는 것은 뭔가 필요해서 나온 거지요.

필요가 다 끝나면 다시 예수 안으로 들어가겠지요.

예수 안으로 다시 돌아가면 안식이 되지요.

 

이처럼 원래로 돌아가는 것을 창세기 2장에선 모든 일을 다 하시고 쉬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을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그래서 성경은 안식을 말할 때 항상 여호와의 안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예수님을 말해요.

 

창세기에 보면 엘로힘이라는 하나님과 여호와라는 하나님이라는 두 하나님이 나와요.

엘로힘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고, 여호와 하나님은 구속주 하나님이에요.

그러니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은 엘로힘 하나님으로 창조주 하나님이에요.

 

이 엘로힘 하나님은 죄와 상관이 없는 하나님이에요.

흔히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나자 여호와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범죄했다는 말은 원래 상태가 아니란 말입니다.

 

창세기 1 장에서 보시기에 좋았다 라고 한 세상이 인간의 범죄로 망가졌어요.

망가진 것을 다시 원 상태로 되돌리는 일을 하시기 위해서 나타난 하나님이 여호와에요.

여호와 하나님을 다른 말로 구속주(救贖主)라고 합니다.

구속주란 말은 죄를 속량해주는 구원자란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죄 있는 곳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에요.

죄 있는 곳에 오신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인간의 육신으로 오셔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요.

범죄한 인간을 원래 상태로 만들려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천지만물을 왜 만들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서라고 했지요.

예수님의 무엇을 위해서 만들었을까요?

살펴봅시다.

 

태초에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을 위해서 나라를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아들이 주인인 그런 나라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름하여 아들의 나라입니다.

 

나라가 되려면 땅과 백성이 있어야겠지요.

그래서 하늘에다 천국과 지옥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역사에 속한 하늘이 아니고 피조 세계 바깥에 있는 하늘을 말해요.

하나님 나라의 하늘이에요.

 

이를 바울은 삼층천이라고 했어요.

삼층천은 하늘 나라를 말해요.

신의 세계 곧 영의 세계란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본 따서 이 세상을 만든 것입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인 것입니다.

모델하우수와 같아요.

 

아파트가 다 지어지면 모델 하우스를 헐어버리잖아요.

이와 같이 이 세상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완성 되면 허물어 버려요.

이 세상은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세상인 것입니다.

 

이를 안개라고 해요.

모든 피조물은 잠간 보이다가 사라질 안개에요.

하나님은 잠간 보이다가 사라질 안개를 가지고 아들이신 예수님을 주(主)의 자리에 앉히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주(主)의 자리란? 심판 주란 말입니다.

심판이란? 갈라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주가 되는가 하면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살아나서 되어요.

 

빌립보서 2장을 한 번 살펴봅시다.

 

빌 2:5-11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을 근본 하나님의 본체(本體)시라고 하지요.

그런데 종(從)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합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와서 십자가에 죽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그 아들을 부활케 하였어요.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이제 이긴 자가 되어서 세상을 심판하는 주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살리셔서 모든 만물 위에 두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을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여서 예수님을 주(主)라고 시인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란 천국에 있는 자를 말하고,

땅 아래 있는 자는 지옥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둘 다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한다고 합니다.

 

이건 마치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에서처럼 지옥에 간 부자가 하나님을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라고 부르는 것과 같아요.

아버지라고 부르잖아요.

다른 말로 주여 라는 말입니다.

주(主)란 임금이고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주를 예수님이라고 봅시다.

그럼 예수님은 지옥에 간 부자나 천국에 간 나사로에게 주가 되지요.

예수님이 심판주로서 주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이나 지옥 모두가 예수님의 주권 아래 있어요.

그래서 천국에 간 성도나 지옥에 간 자들 모두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모든 만물이 주라고 시인하게 만든다고 하지요.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만들고자 하는 아들의 나라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만들어지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 나라 백성들도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생겨난 사람이라야 해요.

 

예수님에 의해서 생겨났다가,

예수님의 죽음 안으로 들어갔다가,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생겨난 사람이라야 예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사람의 모양으로 와서 십자가에 죽어야만 합니까? 라는 의문이 생기지요.

아까 예수님을 일컬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지요.

여호와는 구원자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려면 자기 백성들이 죄 아래 갇혀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야 건져 낼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자기백성들이 죄와 사망 아래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굽에서 종 살이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애굽이에요.

죄 아래 있어요.

 

죄 아래 자기 백성들이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주라는 이름인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뭡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주 주실 분이란 말이잖아요.

그러니 아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건져 내시려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건져낼 백성은 죄에 갇혀 있어야 하겠지요.

예수님이 건져 주는 것이 되려면 스스로 죄에서 나올 수가 없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것도 자기가 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시청각교제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은 선택하고 그 후손을 이방의 객으로 살게 하였다가 가나안 땅으로 불러들인다고 하지요.

 

이렇게 되면 애굽은 죄의 나라가 되고 가나안은 예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는 것은 죄에서 건짐 받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모세를 구원자로 애굽으로 보낸 것입니다.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은 모세가 옴으로서 자기들이 애굽에 붙잡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모세가 와서 너희들은 바로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떠나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서 빼내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에겐 출애굽은 모형이에요.

실상은 죄로부터 건짐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애굽에 갇혀 있다는 것은 아는데 자신들이 죄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몰라요.

진짜 빠져 나와야 할 것은 애굽이 아니라 죄에요.

 

그럼 이스라엘이 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잖아요.

너희들은 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율법을 주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어서 인간의 실존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죄 아래 갇혀 있다고 알려 주는 거예요.

광야는 이 사실을 알게 해 주는 곳입니다.

광야에서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안식하고 모르는 자는 여전히 애굽에서처럼 저주 받는 것입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 때문에 죽음에서 살았어요.

출애굽 한 자들은 다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어요.

그런데 그 피가 어째서 죽음에서 건져주는 피인 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 의미를 모르면 가나안에 들어 갈수가 없어요.

가나안에 들어갈 사람은 어린양의 피로서 태어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들어갈 가나안은 천국의 상징이에요.

그럼 천국에서 살려면 아들의 죽음에 의미를 알아야지요.

왜 예수님이 내 대신 죽었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라고 시인 할 수 있잖아요.

 

비록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어린 양의 피에 의미를 모르면 출애굽 한 의미가 없어요.

그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하는 곳이 바로 광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와서 하는 원망을 한 번 들어 보세요.

 

출 16:2-3절.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과 홍해 바다를 건너오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다 체험했어요.

그리고 왜? 출애굽을 시켰는지 모세를 통하여서 다 들었어요.

그럼에도 광야에 나와서 애굽을 동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는 것을 잘 보세요.

애굽의 고기가 먹고 싶다!

잘 먹다가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던데!

차라리 애굽에서 고기를 실컷 먹다가 여호와 손에 죽는 것이 나았을 뻔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굶겨 죽이려고 이리로 불러 낸 겁니까? 라고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괜히 출애굽 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만나를 주십니다.

 

땅에서 얻은 애굽의 음식과 다른 하늘에서 오는 음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만나로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본적(本籍)은 땅이 아니고 하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를 주시되 제 칠일에는 주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제 칠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너희는 여호와의 안식에 참예할 자라는 뜻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만나를 먹으면서 안식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육일 동안은 내리고 일곱째 날 안식일에는 만나가 안 내린 것입니다.

만나가 육일 동안 내리고 제 칠일에는 안 내린 것은 만나가 안식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만나가 안식의 세계를 상징하는 가나안에 도착하니 안 내린 것입니다.

 

시간적인 의미에서 광야에서는 제 칠일 여호와의 안식일에 안 내렸지만, 장소적인 의미로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 만나가 그친 것입니다.

그러니 만나는 그냥 양식이 아니고 여호와의 안식의 세계로 인도하는 양식인 셈입니다.

그래서 제 칠일 여호와의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계명이라 하고 율법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출 16:27-30절.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30.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지 말라는 것을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만나를 통하여서 죄를 고발하고자 함입니다.

안식일에는 거두지 말라고 했는데 백성들은 안식일 날에 쉬지 않고 만나를 거두러 나갔어요.

 

이렇게 되면 만나는 곧 그들의 죄를 드러내는 율법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뭐냐!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하지 않는 자는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려고 나간 자들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하지 않는 자들을 죽여서 장사를 지내게 하고 대대로 기억케 하시려고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 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을 할 수가 있습니까?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 하려면 죄가 없어야 합니다.

원래 창조 상태로 돌아가야 해요.

 

그럼 죄인이 어떻게 죄 없는 상태로 돌아 갈수가 있습니까?

이는 누군가가 죄 값을 대신 담당해 주어야만 가능해집니다.

그것도 죄 없는 분이 담당해 주어야 해요.

 

이걸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뿌림을 통해서 알려 주었어요.

그래서 죽음의 나라인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하려고 성막을 주어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죽음으로부터 건져 준 어린 양의 죽음에 의미를 잊어선 안 됩니다.

어린 양의 의미를 잊는다는 것은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고 맙니다.

 

어린 양의 대신 죽음에 의미를 안다는 것이 뭡니까?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지요.

그럼 인간의 죄는 누가 고발해 줍니까?율법이지요.

 

그래서 광야에서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케 하는 만나를 주시고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이 누구에게로 인도를 합니까?

바울은 율법이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했어요.

율법을 붙잡으면 안 되고 율법이 인도하는 것을 붙잡아야 해요.

 

율법은 옛 언약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새 언약이에요.

그럼 신약에선 율법을 통하여서 새 언약을 붙잡아야 해요.

율법을 붙잡으면 안 되고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자기 대신 죽어준 어린 양을 붙잡아야 해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죽어준 것은 모세였어요.

 

자 보세요.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당도하자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부르지요.

불러서 율법을 주시면서 이스라엘에게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지만, 지키지 못할 시엔 죽음을 당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주제를 모르고 율법을 지키면 세상에서 가장 잘 살게 해 준다는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덜컹 계약을 맺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쌍방간에 누구든지 계약을 어길 시에는 죽는다고 하는 목숨을 담보로 하고서는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래서 양푼이에 피를 담아서 머리 위에 뿌리고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는 동안 이미 산 아래서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우상숭배로 계약을 어겨 버립니다.

이 사실을 안 모세가 계약서인 돌 판을 깨트려 버립니다.

이는 계약을 파기하는 의미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계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 때 모세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하여서 이스라엘을 살려 냅니다.

모세의 이 모습이 곧 예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운명은 모세 속으로 귀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율법은 이미 계약 파기가 되어서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적힌 두 돌 판을 다시 만들어 줍니다.

그리곤 두 돌 판을 법궤 속에 잘 보관하라고 합니다.

두 돌 판은 지킴에 목적이 있지 않고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볼 때마다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살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해요.

편의상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한 것을 모세의 죽음이라고 합시다.

왜냐하면! 모세가 자기 생명을 담보로 이스라엘을 살려 낸 것은 신약의 예수님이 자기 목숨으로 자기 백성들을 살려내는 것의 표상이니까요.

 

이스라엘은 모세의 생명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모세의 죽음으로 산다는 것을 모르면 율법을 어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율법을 지키는 것은 곧 모세의 죽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안식은 모세의 죽음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모세의 죽음 밖에는 안식이 없어요.

이렇게 되면 안식이 주어지는 것이 바뀐 것이 됩니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서 모세의 죽음 안에서 산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스라엘의 안식은 모세의 죽음 안에 있어요.

이스라엘은 모세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독자적으로 말씀을 지켜서 살고자 하는 것은 모세의 죽음과 상관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첫 번째 돌 판에 가두어지는 것입니다.

첫 번째 돌판은 자기가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돌 판으로 살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어요.

이러한 상태를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문다고 합니다.

너 왜 율법대로 살지 않느냐고 닦달을 해 댑니다.

언제까지 닦달 하느냐 하면 율법이 겨냥하는 끝까지 닦달합니다.

 

율법의 끝이 뭡니까?

죽음이잖아요.

하나님이 죄인의 죄를 드러나게 하여서 죽이려고 율법을 주셨잖아요.

인간의 죄를 드러내라고 율법을 주었으니 율법은 죄인이 죽을 때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죽으라고 합니다.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주어진 두 번째 돌 판에 의미를 모르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에 쫓김 당해요.

그럼 늘 불안 한 것입니다.

이걸 신약 식으로 이해해 봅시다.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이스라엘이 살아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살아난 것의 모형이라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과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의 차이성이 나타나겠지요.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두 번째 돌 판과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주어진 것이므로 내가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겠지요.

반면에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은 첫 번째 돌 판의 계약대로 말씀이 따라 다니면서 너 왜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고 몰아 칠 것이 아닙니까?

 

십자가 안에 들어간 사람은 자기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자유 한데,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매여 있어요.

많은 분들이 성령의 오심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어요.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거하려고 오셨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살려내심으로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어요.

성령은 이 사실을 증거하시고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잖아요.

이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증거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성령은 성도를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지 않아요.

도리어 네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예수님이 너 대신 죽었다는 것을 알려 주어요.

 

성령은 성도를 예수님과 연합케 하세요.

예수님이 죽을 때 너도 죽었다고 가르쳐 주어요.

성령을 받은 성도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들은 날마다 죽자 라고 합니다.

여러분 “죽자”와 “죽었다”는 달라요.

성도는 “죽어야지” 하는 자가 아니라 “죽은 자”에요.

“죽어야지” 하는 것은 십자가 밖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간 사람은 “죽은 자”로 살지 “죽어야지” 하는 자로 살지 않아요.

 

“죽자” 라고 하는 사람은 말씀을 지키자고 하고!

“죽었다” 라고 하는 사람은 말씀과 상관없다는 말이에요.

이건 말씀과 상관없이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말씀 지킴과 상관없이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으로 살아간다는 뜻이에요.

 

우린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에요.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법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성경을 보게 되면 그 어떤 말씀 앞에서도 모든 것이 예수님이 다 이루어 주신 것임을 알기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하라” “하지 말라”는 것에 매여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가 말씀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자기 행함의 여부에 따라서 울다가 웃다가 해요.

이건 율법에 대하여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 행실에 희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는 것에 포카스가 맞추어져 있지 않아요.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에 맞추어져 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십자가 도 이외는 전하지 않기로 작정을 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십자가 도가 창세전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은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하신 약속이에요.

이를 말씀이라고도 하고 언약이라고도 합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세요.

 

약속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하신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하겠다고 한 것이 약속이에요.

마치 아브람과 사래에게 아들을 줄께! 라고 한 것과 같아요.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는 아브람이나 사래의 조건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사래가 늙은 할머니가 되었든 상관없어요.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이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생산 할 수가 없는 몸에서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삭을 낳기 위해서 아브람이나 사래가 한 일이란 아무 것도 없어요.

아브람과 사래는 도리어 하나님 약속을 안 믿었어요.

비웃었어요.

 

왜 비웃었습니까?

자기 꼬라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을 보니 이건 불가능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내년 이맘 때 아들을 준다고 하자 대 놓고 비웃은 것입니다.

웃기고 있네!

 

하나님의 그 비웃음 속에서도 자기 약속을 자기가 이루었어요.

그러니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도 새 언약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 뭡니까?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이 구원을 받는 것이잖아요.

예수님이 자기 피로서 성도를 의롭게 해 주겠다는 것이 새 언약이에요.

 

성도의 구원은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백성들이 구원 받는 것은 예수님이 홀로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요.

 

이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은 안식의 세계로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안식 안에 들어온 사람은 속된 말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어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박수치고 감사하고 찬양하면 되어요.

 

그러나 이 사실이 안 믿어지면 성령 받아서 자기가 말씀을 지키고자 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에게 박수가 안 나와요.

자기가 행한 것으로 박수가 나와요.

 

다른 말로 죽자! 죽자 해서 아! 오늘은 나를 부인하고 죽었구나! 라고 좋아해요.

물론 성경적으로 보면 죽은 것이 아니지만 본인은 죽었다고 생각해요.

죽은 자로 사는 것하고, 죽어야지 하는 것하고 근본적으로 달라요.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넌 죽은 자라는 말이에요.

이걸 십자가 밖에 있는 자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행위로 두고 있어요.

난 부인해야 돼!

난 부인하여야 해! 라고 씨름하고 있어요.

 

자기 부인은 주께서 해 주세요.

성령이 늘 우리에게 넌 죽은 자라고 알려줘요.

부인이란? 죽었다는 말이에요.

죽은 놈이 왜 세상에 대하여 살고자 하는데! 라고 책망을 해요.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는 말은 죽은 자로 산다는 말이지,

난 죽어야 돼! 난 죽어야 돼! 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걸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이 들을 때는 “죽자” “나를 부인하자” 로 이해해요.

그러니까 바울의 나는 날마다 죽노라 는 말을 자기 행함으로 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죽읍시다! 라고 교인들에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백번 죽어 보세요.

좀비처럼 또 살아나요.

그건 죽은 것이 아니에요.

 

안 죽었으니 죽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으니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는 것입니다.

난 부인 했다!

넌 부인 못했지!

난 부인하고 사는데!

넌 언제까지 부인하지 않을래 하면서 남에게 꼴깞을 떨어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죽은 자로 살아요.

자기 행위를 신경 쓰지 않아요.

자기 행위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걸 사람들이 오해해서 개판으로 산다고 생각해요.

윤리적인 잣대로 방종하고 방탕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달라요.

자기 행위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말은 예수만 바라보고 산다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 의미를 모르니까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십자가 도를 지식으로 아는 자이지 그 안에 예수를 품은 자들이 아니에요.

내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 받았으니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막 살아야지! 하는 사람은 십자가 안에 들어온 사람이 아니에요.

그 안에 예수가 없으니까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은 내 마음대로가 없어요.

내가 죽었는데 어찌 내 마음대로 살겠어요.

바울은 십자가 안에 들어온 나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어요.

 

성도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이잖아요.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살아야지가 없지요.

내 마음대로 못 사는 것이 십자가 안이에요.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내 마음대로 못 사는 사람이 십자가 안에 들어온 사람이에요.

내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이에요.

십자가 밖에서 자기가 살아 있으니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십자가 안에 있는 자는 죄를 안 짓고 산다는 말이 아니에요.

사도들이 죄 안 짓고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바울이 죄 안 지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들이나 우리나 다 같은 성정을 가졌어요.

 

죄 아래서 난 몸을 가지고서 어찌 죄를 안 짓고 살겠에요.

그건 불가능해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성도는 죄를 안 짓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에요.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해 할까봐 다시 말합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오면 언행심사가 반듯하게 완벽하게 산다는 말이 아니에요.

죄인은 십자가 안이나 십자가 밖이나 완벽하게 살 수가 없어요.

죄인의 몸으로 어떻게 완벽하게 삽니까?

그건 불가능해요.

 

그럼 뭐가 다르냐?

십자가 밖에선 자기가 자기를 책임지고자해요.

그러나 십자가 안은 자기가 자기를 책임지지 않고 예수님에게 전가시켜요.

 

이게 삶으로 나타나면 십자가 안에 있는 성도는 ‘나는 없는 자’로 나타나요.

반대로 십자가 밖에 있는 자에겐 ‘난 있는 자’로 나타나요.

십자가 밖에 있는 자는 자기를 위해 살고, 십자가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를 위하여 살아요.

 

십자가 안에 있는 성도는 자기 유익을 구치 않아요.

신앙생활을 자기 치장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난 이렇게 변했다!

난 이런 일을 했다! 라고 자랑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십자가 밖에 있는 자들은 입술로는 십자가! 십자가 하지만 자기가 부인이 안 돼요.

항상 자기를 바탕에 깔고 있어요.

이걸 산상보훈에선 모래위에 집을 짓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 행함에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낙망하고 비관해요.

늘 자기 행함에 저울질 당하므로 자기 행함에 따라서 희비가 교차해요.

 

그러나 십자가 안에 있는 성도는 동일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여도 그 잘못으로 인하여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이런 죄인이 예수 안에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뿌림에 더욱 더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한계성을 분명하게 알고 더욱 더 십자가 피를 감사하고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은혜를 더욱 더 크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오해해서 악용하는 자들이 있어요.

바울이 그러지요.,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 짓자 라고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지요.

 

이런 자는 가짜에요.

이런 가짜들 때문에 십자가가 모독을 당하는 것입니다.

가짜들은 자기가 죄를 짓는 것을 합리화시켜요.

자기를 죄에다 방임(放任)해 버려요.

 

방임이란? 죄에다 육신을 내 맡긴다는 말입니다.

죄를 즐기는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 짓는다고 하면서 방탕과 방종을 합리화해요.

 

육신의 소욕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이 이끄는 대로 산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육신의 소욕과 싸우는 자에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해요.

이는 죄를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죄의 무서움을 알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를 못 이겨요.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욱더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므로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점점 더 나아지라는 말이 아니고 죄를 미워하고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귀가 육신의 소욕을 일으키면 성령이 그래요.

야! 너 죽었는데 왜 그래!

왜 그런 욕심을 내는데! 라고 책망해요.

이런 책망이 일어나면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이 깨달아져요.

 

제 이야기로 비유할게요.

전 제 아내와 가끔 티격태격해요.

성격이 서로 다른 사람이 하나로 살려고 하니 싸움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애당초 하나 될 수 없는 것을 하나 되고자 하니 불가능한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고자 하려니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해하기를 복음을 알면 성질 머리가 죽는 줄 알아요.

그래서 목사는 싸우지 않고 천사처럼 사는 줄 알아요.

그러나 그건 신기루에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동화에요.

 

실상은 가끔 싸웁니다.

제 경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죄인의 몸으로 사는 사람이 죄가 없을 수 없어요.

그러니 다툼은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물론 참고 또 참고 하지만 때로는 참아지지가 않아요.

그러면 말로 다투지요.

물론 큰 싸움은 아니고 사소한 것으로 티격태격한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티격 태격의 다툼도 하고나면 항상 다치는 것은 저에요.

설교를 준비하고 말씀을 보아야 하는 목사에게 마음이 심란하면 영감이 사라지고 말씀이 눈에 안 들어오고 깨달아지지도 않아요.

목사가 말씀이 속에서 달음질하지 않으면 마음이 지옥이 됩니다.

 

아내와 다투면 화가 나고, 화가 나면 말씀은 숨어 버리고 사라져요.

그래서 가능하면 참고 다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떤 문제가 생겨서 의견 충돌이 일어나면 욱!하는 불뚝 성질이 일어나 언성을 높이면 금방 분위기는 영하 50도로 급랭해요.

 

그러면 함께 있을 수가 없어요.

있으면 마음에 불이 꺼지지 않아요.

그래서 전 다투고 나면 항상 교회로 달려옵니다.

교회에 와서 기도해요.

그러면 성령이 여지없이 책망해요.

 

어이구! 이 등신아!

마누라 하고 싸워서 득 본 것이 뭐가 있냐?

죽은 놈이 왜 또 살아 가지고 설치다가 마음을 다치느냐! 라고 해요.

니가 마음이 다치면 누가 좋아 하겠느냐!

 

성난 마음 때문에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으면 누가 좋아하겠느냐!

마귀가 좋아 하지 않겠느냐! 라고 하면 정신이 번쩍 들어요.

야! 또 마귀 좋아하는 일을 했구나!

주여! 또 등신짓을 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어요.

 

목사에게 가장 큰 고통은 영감이 안 떠오르는 것입니다.

말씀이 머릿속에서 달음질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감이 안 오면 미쳐요.

성질머리 한 번 내 보세요.

머릿속에 깜깜해져요.

 

죄에 대하여 죽은 놈이 또 지랄을 떨었네!

지랄을 떠니까 내가 나에게 화가 나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산 자로 사니까 지랄을 떠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죽은 놈이 산 자처럼 지랄 떠는 이 불쌍한 죄인을 긍휼히 여겨주세요 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 아내와 싸우면 항상 제가 먼저 풀어요.

복음 때문에 항상 먼저 풀어야 해요.

복음 때문에 푸는 것입니다.

 

마음에 분노를 품고 있으면 품고 있는 것만큼 내가 다쳐요.

분노가 불이에요.

마음에 분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을 태워요.

본인이 빨리 꺼야 손해를 덜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시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아버지가 하는 일을 보고 한다고 하지요.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고 하니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일을 한다는 것은 안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 아버지가 안식하지 못하느냐?

자기 백성들이 죄 아래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살려 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은 여섯째 날에 속한 것이 되지요.

하나님이 안식을 하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날이라야 하나님이 안식하잖아요.

 

자기 백성이 죄 아래 있고선 일곱째 날이 될 수가 없잖아요.

자기 백성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입니다.

죽을 때 혼자 죽지 않고 자기백성들과 같이 죽었어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어떻게 안식을 주시는가 하면 우리를 십자가에 죽여서 주십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구원을 얻은 성도에겐 안식을 주는 능력이 되는 비밀인 것입니다.

 

이제 성령이 오셔서 이 사실을 알게 해 주십니다.

성령을 오셔서 우리가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세요.

성령이 성도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죽게 하시고, 정과 욕심을 죽게 하세요.

버리고 빼앗기고 망하도록 하세요.

그래서 세상에 대한 기득권이 없도록 하세요.

 

그런데 말이죠.

다 빼앗기고 없으면 안식이 주어져요.

욕심을 가지면 지옥이 되는데, 욕심이 죽으면 천국이 되어요.

 

누구하고 싸워도 내가 지면 안식이 되는데 이기면 좋은 것이 아니고 더 찜찜해요.

그러니 이긴 것이 이긴 게 아니고 진 것이 이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지고도 이기는 것이 십자가 도에요.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아요.

역설적이지요.

이게 십자가 원리에요.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이 원리를 몰라요.

그러니 이기려 하고!

높은 자가 되려고 하고!

섬김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성도는 비우고 살아요.

오해하면 오해 받고!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먹어요.

그려러니 해요.

 

그런데 진 것 같은데 이긴 자가 되어 있어요.

뭔가 알 수 없는 평화의 능력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는 것을 느껴요.

이게 십자가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은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능력인 것입니다.

 

죽은 자로 사세요.

그럴 때 안식을 누릴 수가 있어요.

우리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죽은 자로서 안식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벗겨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주신 것으로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날마다 안식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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