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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 강해)31강.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6)

by coroa 2022. 10. 27.

 

 

31강.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6)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창새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31강.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6)

히 3:1-6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정낙원 목사

 

무슨 문제를 만나서 고민을 하면 목사들은 의례히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라고 하면서 교인들에게 기도 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고 강조합니다.

의심하지 말고 응답해 주실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주저하면 왜 못 믿느냐고!

어째서 믿음이 없느냐고 타박을 합니다.

믿음 없다는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목사 앞에서는 믿음 있는 척 예! 라고 대답은 합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누군 믿기 싫어서 그런 줄 아느냐!

나도 믿고 싶다고 합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누군 예수 믿기 싫어서 안 믿습니까?

안 믿어지는 걸 어찌합니까?

 

그럼에도 교회에 다니는 것은 주변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자기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돈이 장에 가면 거름지고 장에 간다는 심정으로 그냥 막연하게 다니는 것입니다.

스스로 위안을 받고자 “교회 다니는 것이 곧 예수 믿는 것” 이라는 등식으로 다니고 있어요.

늘 하던 것이니 습관이 되어서 교회를 안가면 뭔가 찜찜하니 취미삼아 습관처럼 다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의 특징이 믿음에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성경을 열면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도 실상에선 그리 중요한 문제기 아니에요.

믿음 없어도 얼마든지 목사도 하고 장로도 하고 집사도 하고 교회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믿음을 누가 검사 할 것도 아니고!

믿음을 버선 뒤집어 보이듯이 보일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니 그냥 믿는다고 하면 끝인 거예요.

최소한도 한국 교회 안에선 너도 나도 믿습니다!

그러면 믿음 있는 것입니다.

본인이 믿는다고 하는데서야 누가 말릴 이유가 없지요.

 

목사들이야 어차피 교인들 믿음엔 관심도 없고 오로지 교회만 충성하고 돈만 잘 내면 그것으로 땡이니 구태여 감추고 싶은 것을 건드려서 기분 나쁘게 할 이유가 없어요.

괜히 믿음 없단 말을 해서 마음 상하게 해서 교회라도 옮기면 사단이 나거든요.

목사 본인도 믿음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이유가 없거든요.

그러니 목사나 교인이나 서로 서로 얼굴 빤히 쳐다보면서 연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그걸 어떻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제 말에 동의하지 아니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제 경험상 그렇게 말을 합니다.

물론 제 경험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과거 수십 년 동안을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는 척 하면서 교회 안에서 믿음 좋은 집사라고 인정받고 살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서도 집사 노릇하고 남전도회 회장도 했어요.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어디 물건처럼 눈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스스로에게 속기도하고 남도 속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믿음을 받고 보니 훤히 보이는 거예요.

 

목사님 그걸 어떻게 봅니까?

목사님이 어디 점쟁이 입니까? 라고 하겠지요.

점쟁이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이 특징이 있기 때문이에요.

 

성경에 보면 믿음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같이 동일한 특징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특징이 나타나면 아! 저 분은 하나님의 믿음을 받았구나!

나타나지 않으면 아! 저 사람은 가짜구나! 분별이 돼요.

이건 여러분 스스로도 얼마든지 분별이 가능해요.

 

그럼 지금부터 믿음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그러므로 믿음 속에는 우리의 것이 담겨 있지 않고 하나님의 것만 듬뿍 담겨져 있어요.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믿음에는 특징이 있어요.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믿음 속에는 우리 것이 담겨 있어요.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담겨져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믿음 속에는 하나님 것만 담겨져 있어요.

즉 하늘에 신령한 것이 담겨져 있어요.

이를 영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게 해 주시지 않으면 예수 믿을 사람은 단 하나도 없어요.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은 사람은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우리에게 유익이 전혀 없어요.

왜냐하면! 믿음 속에는 땅에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 속에는 도리어 땅에 것을 차압 당하는 것이 담겨져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받으면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에요.

믿음을 받으면 한마디로 신세를 망쳐요.

자극적인 말로 신세를 망칩니다.

인생을 말아먹게 하는 것이 믿음이에요.

 

그 사람들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믿음이라는 선물 보따리를 주셨어요.

믿음이라는 선물 보따리를 풀어 보니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탁 깨 보면 거기서 예수님이 튀어 나와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터져 나와요.

그 피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살펴보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이기고, 세상에 그 어떤 죄로부터 정죄함을 막아주는 능력인 거예요.

편의상 이해를 돕기 위해서 믿음을 물건이라고 했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히브리서 11장을 우리는 흔히 믿음 장(場)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말해주고 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벨로 시작하여서 에녹으로, 노아로, 아브라함으로, 모세로, 이스라엘로, 사사로, 다윗으로, 이게 발전적으로 신약으로 넘어오면 12제자들로, 바울로, 초대교회 성도들로 해서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어요.

 

믿음은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있었어요.

인류역사가 시작되자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던져 주시는 것입니다.

 

아벨아 믿음 받아라!

노아야! 옜다 여기 믿음 받아라!

아브라함아! 믿음을 받아라! 하고 던져 주었어요.

 

믿음이라는 선물 보따리를 받으니!

어라! 이젠 믿음이 도리어 주체가 되어서 믿음을 받은 사람을 질질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마치 고기가 미끼를 먹었는데 그 속에 낚시 바늘이 있는 것과 같아요.

미끼를 먹은 고기는 낚시 줄에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면 그러해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상하게 죽는 길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좁은 길로 몰아치는 거예요.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믿음이 주인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살고 싶은데,

믿음이 네 인생은 너의 것이 아니고 예수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따집니다.

하나님! 정말 이럴 겁니까?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아니! 누가 믿음을 달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왜 이런 개 고생을 해야 합니까? 라고 따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응! 너희들은 창세전에 예수님 것으로 선택이 되어서 그래!

예수를 위해서 너희를 창조했거든!

넌 원래 없는 자였는데 내가 예수를 위해서 만든 거야!

그러니 넌 니 것이 아니고 예수의 것이야!

 

예수님이 누군데요?

내 아들!

하나님 아들이 뭐하려고 세상에 왔습니까?

죽으려고!

 

아니 하나님 아들이라면서 왜 죽습니까?

응! 그건 메시야이기 때문에 그래!

메시야가 뭔데요.

응! 자기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구원자야!

 

메시야가 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합니까?

그건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건지려고 대신 죽어 준거야!

너희들도 그 메시야의 죽으심 때문에 죄에서 건짐 받았어!

그래서 내가 이제부터 너희들 인생을 내 아들을 위하여 차압을 하는 거야!

 

너희들에게 믿음을 준 것도 장차 오실 메시야의 삶에 미리 동참하라고 준거야!

그래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마다 누구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예수님 피(고난)로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 하는 거야!

 

이렇게 되면 믿음은 뭐냐!

예수님 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피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이 준 믿음을 받은 자이고!

예수님 피 이야기를 하지 않는 자는 자기가 만든 믿음을 가진 자에요.

그래서 제가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을 분별한다고 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을 구별해 내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아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갖다 대면 가짜들은 다 도망을 쳐요.

신경질을 내요.

 

제가 아는 어떤 교회는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십자가 피 전하지 말고 듣기 좋은 설교를 하라고 당을 지어서 공격을 한대요.

교회가 임대로 있을 땐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제 자기 건물을 샀어요.

몇 억 되는 건물을 가지고 있으니 이제부터 교회 부흥시켜야 한 대요.

교회가 부흥되려면 십자가 피 전하면 안 되고 듣기 좋은 말을 해야 한다고 목사님 보고 나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요구하는 듣기 좋은 말이 뭐겠어요.

윤리 도덕이고 복 받고 잘 산다는 거예요.

땅에 말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게 곧 뭐냐 하면 가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에요.

그러니 십자가 피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지고 진단을 하면 진짜와 가짜가 금방 드러나요.

못 속여요.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믿음 속에 뭐가 들어 있다고요?

예수님의 피 입니다.

피!

 

이걸 잊으면 안돼요.

예수님 피(고난에 동참)를 위해서 믿음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을 받은 사람은 히브리서 11장의 위인들과 같이 하나같이 삶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풀어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벨이 받았던 믿음이나 지금 우리가 받은 믿음은 동일해요.

예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것처럼 믿음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해요.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 나라 것이기 때문이에요.

 

중요한 말이니 잘 새겨들으세요.

 

믿음은 말이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했지요.

과거에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장차도 있는 거예요.

그럼 믿음에 사람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에게만 믿음을 줘요.

아무나 받고 싶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을 해서 줘요.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선택을 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곡소리 내며 살아야 해요.

죽을 고생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다 이런 사람들이었어요.

물론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구요.

 

선지자 중에서 이런 사람을 하나 살펴볼까요?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 1장입니다.

 

렘 1:5절.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복중에 짓기 전에 택정을 했다고 하지요.

복중에 짓기 전은 창세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만들어지기 전에 구별했다고 합니다.

 

뭘 하려고 구별을 했는가 하면 선지자로 구별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가 되려고 태어난 것입니다.

이미 창세전에 운명이 결정 났어요.

 

예레미야는 졸지에 선지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선지자가 되었어요.

세상에 이런 기구한 운명이 어디에 있나요?

 

그래서 예레미야가 오! 슬프도소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6절을 보세요.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레미야야!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선택했다! 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아! 슬프도소이다! 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 재수 없어!

이제 망했구나! 신세 버렸구나!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한데요.

하나님 한데 항의하는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나요?

 

한국교회 교인들 같으면 하나님이 내가 너를 선택 했다 그러면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간증하고 돌아다닌다고 난리 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나를 신학교에 가서 목사 되라고 했다! 라고 온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자랑하고 다닐 텐데 말이죠.

 

아마 명함을 새겨서 다닐 거예요.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에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재수 옴 붙었다고 탄식하고 있어요.

이건 뭔가 달라도 한참 다르지요.

그래요.

달라요.

한국교회 교인들의 신앙과 달라요.

 

예레미야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원망과 불평을 듣고 계신데!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대접을 받고 있으니 뭔가 달라도 한참 다르지요.

예레미야가 틀렸던가!

한국교회 교인들이 틀렸던가!

둘 중에 하나는 틀렸어요.

 

예레미야는 성경에 나와 있으니 틀리진 않았으니까 그럼 한국교회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 교인들은 틀리지 않았다고 해요.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마다 이상한 괴물들이 돌아다녀요.

이상한 신앙을 가진 괴물들이 진짜 신자들을 잡아먹고 있어요.

 

이런 상태를 일컬어 바로가 꾼 꿈처럼 파리한 소가 살찐 소를 잡아먹는다고 해요.

정상적이라고 한다면 살찌고 힘 있는 놈이 비실비실하는 놈을 잡아먹어야 하는데 바로가 다스리는 세상은 반대로 살찌고 힘 있는 놈이 비실비실하고 힘없는 놈에게 잡아 먹혀요.

최홍만이가 세 살짜리 꼬마에게 흠씬 얻어터진다니까요?

이게 죄 아래 있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름하여 역리(逆理) 현상이에요.

 

진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가짜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부터 쫓겨나고 있어요.

역리(逆理) 현상이 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역리(逆理) 현상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런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지금은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어요.

진짜 예수쟁이들이 가짜 예수쟁이들에게 죽임 당하고 있어요.

 

예레미야가 순순히 복음 전한 줄 아세요.

아니에요.

늘 원망하고 투덜거리면서 전했어요.

믿음이 덮치면 순종이 나오는 게 아니고 불순종이 나와요.

순종치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순종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말이에요.

 

믿음은 항상 우리의 죄를 고발하면서 다가와요.

이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이에요.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사람들은 모두가 믿음이 질질 끌고 다닌 사람들이에요.

믿음이 질질 끌고 다녔다는 말은 불순종했다는 말입니다.

말을 안 들으니 질질 끌고 다닌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죽는 길이에요.

그런데 인간의 본성은 넓은 길로 가고 싶어 하고 살고자 해요.

하나님의 뜻과 역설적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을 주어서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길로 질질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프지요.

원망이 나오지요.

하나님을 죽이겠다고 해요.

그래서 발생 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에요.

 

신앙생활은 아파요.

그것도 많이 아파요.

아파도 도망가지 못하기 때문에 고난인 것입니다.

하나님 손에 붙잡히면 도망을 치지 못해요.

무슨 놈에 팔자가 요나처럼 도망가도 기어코 잡혀 와서 그 일을 하고 맙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하기 전에는 죽지도 못해요.

아주 고약한 팔자예요.

 

왜 예레미야가 탄식합니까?

멸망하는 이스라엘 앞에 선지자로 세움을 입었다는 것은 죽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받고 보니 그 속에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다가 죽임 당하여야 하는 것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재수 더럽게 없다고 하면서 오 슬프도소이다 라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다가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운명이거든요

이런 몹쓸 운명이 믿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환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 슬프도소이다! 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 드는 것입니다.

이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라는 말과 같아요.

 

복음을 받으면 그 속에 고난이 들어 있어요.

복음을 탁하고 깨면 그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툭 터져 나와요.

그 피가 자기 온 몸에 확 뿌려져요.

예수님의 운명이 뒤집어 씌워지는 것입니다.

이건 죽는다는 말이에요.

넌 이제 죽은 목숨이야! 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런 고약한 팔자가 언제 결정이 되었다구요?

창세전에 결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죽임 당하기로 작정되어서 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았듯이,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기로 작정을 받고 이 세상에 보내어졌어요.

 

사도 바울도 믿음을 받고 보니 자신은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기로 작정이 된 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바울이 비록 지금 살고 있지만 믿음으로 보니 이미 창세전에 있던 자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바울에게 믿음이 덮쳐오니 창세전에 있던 자를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서 이 세상에 보내시고 예수를 믿게 하셨다는 것을 알았어요.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구원받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에 다메섹 도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지만 바울만 예수님 음성을 듣고 꼬꾸라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울에게만 나타나서 예수를 믿게 만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은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는 팔자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바울은 이 팔자는 자기 손으로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왜냐하면! 자기 팔자를 쥐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간 것입니다.

도망간다고 면제 될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을 일컬어 창세전에 계신 분이라고 하지요.

세례 요한이 그러지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앞선 분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은 세례 요한 보다 6개월 늦게 태어났어요.

세상 식으로 말하면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형이에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자기보다 늦게 태어난 예수님을 보고 자기보다 앞서 계신 분이라고 합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있기 전에 예수님이 계셨단 말이에요.

 

이건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역사에 속하였기 때문이에요.

역사는 시간이 수평적으로 한 줄로 길게 늘어선 선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1년에서 시작하여 10년-100년-1000년-4000년-6000년 이라는 식으로 쭉 늘어져 있어요.

인류 역사를 6천년으로 가상해서 말을 합시다.

아담을 1년 시대에 속한 자라고 하면 지금 이 시대 6000년에 속한 우리로서는 아담을 볼 수도 없고 만날 수가 없어요.

시간은 뒤로 가지 않고 앞으로만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묵시의 나라에요.

묵시를 영이라고도 하고 하늘이라고도 해요.

천국을 일컬어 영원세계라고 하지요.

영생하는 곳이니까요.

 

천국은 오늘과 내일과 같은 시간이 없어요.

항상 오늘이에요.

역사에서 보면 묵시는 수평적 구조로 된 것이 아니고 수직적 구조로 되어 있어요.

무슨 말인지 어렵지요.

 

아주 쉽게 설명할께요.

 

하늘에 해가 떠 있지요.

그 해를 울산에서 보아도 거기에 있고, 서울에서 보아도 거기에 있어요.

울산과 서울은 수평적으로는 길게 천리나 떨어져 있어요.

그러나 해는 땅을 수직적으로 보기 때문에 여기서도 그 자리이고 천리 밖에서도 그 자리에요.

울산에서 본 해가 서울에서도 보여요.

수평적으로는 안 보이는데 수직적으로는 다 보여요.

하늘에서 보면 울산이나 서울이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같아요.

 

길이를 시간으로 생각해 보세요.

 

1년에서 보아도 해는 그 자리에 있고,

1000년에서 보아도 해는 그 자리에 있고,

6000년에 보아도 해는 그 자리에 있어요.

 

해를 예수님 또는 믿음이라고 생각해서 보세요.

 

1년에 있던 예수님(믿음)도 그 예수님(믿음)이고,

1000년에 있던 그 예수님(믿음)도 그 예수님(믿음)이고,

6000년인 지금 보는 예수님(믿음)도 과거에 보았던 그 예수님(믿음)이에요.

 

1년에 살았던 사람도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았고,

1000년에 살았던 사람도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았고,

지금도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고 있어요.

 

아담이 살았던 1년에서 본 예수님(믿음)이나,

아브라함이 2000년에서 본 예수님(믿음)이나,

예수님의 초림 때인 4000년에 본 예수님(믿음)이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6000년에서 본 예수님(믿음)은 동일하지요.

 

역사에 속하여 수평적인 구조를 가지고 2000년에 태어난 사람 입장에선 1년에 있던 예수님(믿음)을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모르지요.

1000년에 태어난 사람 입장에선 1년은 보이지 않는 지나간 시간이기 때문이에요.

만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시간이에요.

 

그런데 믿음이 덮쳐 오면 지구에 있던 사람을 하늘로 확 끌어 올려요.

인식을 “수평적 구조”에서 “수직적 구조”로 바꿔버려요.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아요.

그러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가 한 눈에 들어와요.

거리에 의미도 시간의 의미도 없어요.

 

이걸 사도 바울은 영 안에서 함께 있다고 한 것입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바울은 어디에서도 각 교회와 함께 한 것입니다.

떨어져 있어도 하나이고 같이 있어도 하나에요.

 

예수님 앞에서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이 있었어요.

누구입니까?

백부장이지요.

자기 하인이 중풍병에 들어서 다른 동네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 갔어요.

 

쉬운 말로 자기 집은 울산인데 예수님이 부산에 계셨어요.

그래서 부산까지 찾아가서 자기 하인의 병을 좀 고쳐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울산에 있는 백부장의 집에 가자고 하니 백부장은 아니 예수님이 말씀만 하면 될 것을 무엇하러 간다고 합니까? 라고 하지요.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야! 이스라엘에서도 이런 믿음을 만나 본 적이 없다고 하잖아요.

맞아요.

백부장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그 어떤 곳에서도 능력이 나타난다고 본 것입니다.

 

백부장은 하늘에서 울산과 부산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고 자시고 할 것이 없이 여기서 말하면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믿음인가요.

그러니 예수님이 칭찬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백부장을 일컬어 천국엔 이런 사람이 가고 아브라함의 본 자손들은 전부다 쫓겨난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오면 백부장처럼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져요.

 

믿음이 오면 울산도 하늘 아래고 서울도 하늘 아래에요.

믿음이 오면 어제도 오늘이고, 오늘도 오늘이고, 내일도 오늘이에요.

항상 오늘이에요.

1년도 오늘이고, 2000년도 오늘이고, 6000년도 오늘이에요.

 

바울이 삼층천에 가 보니 자기가 있는 거예요.

아직 죽을 날이 멀었는데 이미 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묵시라서 가능해요.

 

지금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오니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하늘에 올라가 보니 자기가 태어난 시점 전에 이미 예수님이 계신 것을 본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어제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도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곤 나보다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앞선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받으면 이게 믿어져요.

제가 히브리서 11장을 먼저 강해한 것은 믿음이 뭔지를 먼저 알아야 하였기에 그런 것입니다.

역사의 최초 인물인 아벨부터 믿음이 어떻게 간섭하였는지 살펴본 것입니다.

믿음이 사람을 어떻게 요리하는지를 살펴 본 것입니다.

 

모두 살펴보니 한결같이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였더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예수님의 고난에 밀어 넣더란 말이에요.

마치 붕어빵 틀에서 찍어낸 붕어빵처럼 모두가 동일한 모습이더란 말입니다.

작년에 찍어낸 붕어빵이나, 올해 찍어낸 붕어빵이나 같아요.

 

믿음도 이와 같아요.

아벨이 받았던 믿음이나, 바울이 받았던 믿음이나, 지금 우리가 받은 믿음이나 다 같아요.

히브리서 11장의 인물들은 역사적으로 보면 각각 살던 시대가 달라요.

수십 년 또는 수백 년이나 수천 년의 시간이라는 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살아간 모습은 다 동일해요.

 

그렇다면 지금도 시간적으로 수천 년 떨어져 있지만 동일한 믿음을 받은 성도라면 수천 년 전에 살았던 믿음에 사람들과 동일한 성격의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2제자들과 같이 바울과 같이 살아가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뭡니까?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거지요.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제대로 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하게 좀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를 모르면 어찌하겠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가 누군지 좀 깊이 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다 예수 믿는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를 몰라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야! 한국교회 교인들아! 예수를 좀 제대로 알고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 세상을 역사의 나라라고 했지요.

요한계시록 2장 3장을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그 일곱 교회는 역사적으로 보면 한 줄로 쭉 늘어져 있어요.

교회를 쭉 늘어놓으면 에베소 교회가 초대교회가 되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역사 맨 마지막 때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역사에 속한 곳이 아니고 묵시에 속한 곳이에요.

묵시적 교회가 역사 속에 있어요.

비록 세상이라는 역사에 속하였지만 묵시적인 곳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역사에 속한 것이지만 어느 시대나 묵시적 해석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묵시적 해석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이건 나중에 아시아의 일곱 교회 특강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때 상세하게 역사적 해석과 묵시적 해석으로 살펴 볼 것입니다.

묵시가 역사 속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살펴 볼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 하면 일곱 교회를 역사로 쭉 늘어놓고 보면 맨 마지막에 있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이니까 예수님이 재림하기 직전의 교회 상이라고 보면 되어요.

라오디게아 교회가 끝나면 4장에서 바로 천국이 보이지요.

이는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역사적 교회도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역사적으로 보면 지금 이 시대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책망을 합니다.

이 시대 교회를 보고 책망하는 거예요.

 

계 3: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예수님의 책망을 보세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 눈에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시대 교회와 교인들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지요.

이 시대 교회와 교인들은 모두가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해요.

목사들이 시키는 대로 하니까 그게 믿음인줄 알아요.

 

교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면 목사의 말이 예수님의 말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면 무슨 불경한 일이라도 되는 줄로 생각을 해요.

믿음 없는 짓이라고 여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목사들은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서 공교하게 지어낸 말로 교인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이런 말에 속는 것은 교인도 소경이기 때문이에요.

 

목사들은 성경대로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봐라!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 고 하지 않았느냐!

난 성경에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데 뭐가 잘못이냐! 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이 말에 반박을 못해요.

맞아!

우리 목사님은 성경대로 가르치고 있어!

주의 종에게 덤비는 것은 하나님께 덤비는 것이 라는 법을 스스로 만들어서 가두어버려요.

이런 사람들에겐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

 

분명히 말합니다.

성경대로 살면 지옥 가요.

성경대로 살다가 지옥 간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에요.

 

참 이상하지요.

아니 말씀대로 산 사람은 지옥에 가고 말씀과 상관없는 세리와 창기들은 천당에 갔어요.

이 모순을 어찌 이성으로 이해하겠어요.

 

이 역설(逆說)을 넘지 못하면 우리도 라오디게아 교인들과 같이 되요.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생각해요.

그게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의 법이고 사상이에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당연히 천국에 간다고 믿었어요.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어요.

선악의 법으로 보면 말씀대로 사는 자기들은 너무 너무 믿음이 좋은 것입니다.

자신들이 행하는 종교적 열심을 보면 틀림이 없어요.

 

라오디게아 교회가 스스로를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들이 행한 것을 믿음의 근거로 말하고 있는 거예요.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헌금하고 했어요.

성경대로 살았어요.

 

목사가 시키는 대로 살았다니까요.

부족한 것이 없어요.

부요해요.

모두가 믿음에 관하여서는 부자에요.

자기가 행한 것이 있거든요.

 

교회 충성하지요.

이웃사랑하지요.

구제나 헌금 잘하지요.

목사 말 잘 듣지요.

거기다가 예수까지 믿는다고 하고 있어요.

자기 행위로 볼 때 부자고 부요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나 같이 이렇게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어떻게 죄인이냐! 라는 것입니다.

 

탕자 비유에서 누가 천국에 갔습니까?

아버지의 명(令)대로 산 맏아들입니까?

아버지 명(令)을 거역한 탕자입니까?

아버지 명(令)을 거역한 탕자에요.

 

왜 아버지 명(令)대로 산 맏아들은 지옥에 가고,

아버지 명(令)을 어긴 탕자가 천당에 갑니까?

이는 맏아들에겐 아버지의 긍휼이 없고, 탕자에겐 아버지 긍휼이 있어요.

탕자는 아버지 것을 가득 채워져 있는데, 맏아들에겐 아버지께 없어요.

맏아들에게는 자기 의로 가득 채워져 있어요.

너무도 잘 났기 때문에 아버지 것을 채울 필요가 없어요.

아버지 것이 들어갈 틈이 없어요.

 

그런데 어쩝니까?

천국엔 아버지 것으로 가는 곳인데!

천국은 아버지 긍휼을 입은 자가 가는 곳이에요.

아버지 긍휼이 없는 사람은 못가요.

 

이를 다른 말로 죄인이 간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자기 의로 가득한 의인은 천국에 못가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입혀준 예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의(義)가 없단 말입니다.

 

의인에겐 예수님의 의(피)가 필요 없어요.

예수님이 대신 죽어줄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너무 잘나서 예수가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나라인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천국엔 예수님의 의(義)를 몽땅 뒤집어 쓴 사람이 가요.

자기 의(義)가 털끝만치라도 있으면 못가요.

 

천국의 문에 가면 천사들이 MRI로 검문검색을 해요.

예수의 피 말고 다른 것이 있는지 없는지 철저하게 확인한단 말입니다.

마치 비행기를 타려고 검문 대를 통과하면 온 몸을 낱낱이 검색하는 것과 같아요.

 

말씀대로 산 바리새인이나 맏아들은 예수의 피가 없으니 천국 문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원통했으면 이빨을 뿌드득 뿌드득 갈겠어요.

남에게 속으면 이빨을 간다고 하지요.

사기 당했기 때문에 이빨을 뿌드득 뿌드득 가는 것입니다.

우수갯소리로 아마도 지옥에 가면 거짓 목사들은 전부 대머릴 거예요.

왜냐하면! 그 목사에게 속아서 이빨 가는 교인들에게 머리를 쥐어 뜯겨서 그럴 것입니다.

 

이 시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죄라고 아무도 가르치지 않아요.

신앙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해요.

무슨 망발을 하느냐! 라고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물어뜯어요.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너무도 잘났어요.

예수의 피가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났어요.

 

그래서 성화주의 개혁주의자들은 예수의 피를 증거하면 이단이라고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의 피에 머물러 있느냐! 라고 비아냥 거려요.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그 십자가에 머물러 있느냐! 라고 해요.

언뜻 들으면 엄청 신앙이 좋은 것처럼 들려요.

그런데 곰곰이 음미하면 불신자라는 게 깨달아져요.

 

예수는 누가 믿습니까?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가 믿지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는 자기에게서 의로운 행위가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아요.

자기 안은 죄를 생산해 내는 공장이라는 것을 알아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는 절대로 예수님의 피를 버릴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피를 넘어가지 않는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피가 자기의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주시기 때문이에요.

피가 없으면 죽는 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피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제사를 열심히 드리는데 상한 심령이 없어요.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이 없어요.

너무도 제사를 잘 드리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어찌합니까?

예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상한 심령을 원하는데!

하나님께 긍휼이 여겨달라고 하는 것을 바라는데!

탕자처럼 아버지여! 저를 품꾼의 하나로 써 주소서! 라는 사람을 원해요.

 

신자가 누구냐?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에요.

자기에겐 의(義)가 없다는 것을 아는 자에요.

그래서 엄마 치맛자락 붙잡고 놓지 않고 살았던 야곱처럼 예수님 피를 붙잡고 놓지 않는 거예요.

난 예수님의 피가 없으면 못삽니다! 라고 매 달리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에서 죄인을 찾아 볼 수가 없어요.

그 누구도 자기가 죄인인줄 몰라요.

너무도 잘 났어요.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이에요.

 

스스로는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이 보시기엔 영 아니올시다! 라는 것입니다.

그건 니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꿈 깨라는 것입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붙잡고 있느냐? 라고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예수도 모르면서 예수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좀 제대로 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히 3:1-6=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그러므로” 라는 말은 앞에 말을 상기 시키는 말입니다.

앞에 말을 이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앞의 말이 무엇인가요?

2장 내용이지요.

 

지난 시간 살펴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자기백성들을 죽음에서 건져낸 것이지요.

자기 몸으로 성도들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신 것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같이 죽은 자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걸 시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풀무불 속에서 바라본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늘에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풀무불 속이 하늘나라에요.

십자가 너머가 하늘나라에요.

 

십자가 너머에 가면 누가 기다린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기다린다고 했지요.

스데반이 죽으니 누가 기다립디까?

예수님이 기다리지요.

 

그런데 하늘에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라고 하면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고 하지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이미 하늘에 가 있으면 성화주의자들의 말처럼 이젠 예수의 십자가 피를 넘어서서 올바른 인간이 되라고 해야 하잖아요.

거룩하게 성화하고 온전해 지라고 해야 하잖아요.

성화주의자들의 말대로라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하늘에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하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예수님을 “우리의 믿는 사도시며, 대 제사장” 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사도라고 하면 바울이나 12제자를 말하잖아요.

예수님을 대 제사장이라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사도라는 말엔 조금 생각을 해 보아야겠지요.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를 깊이 좀 생각해 보라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예수님을 사도라고 하잖아요.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이 왜 사도라고 했는지 알아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사도가 뭣하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지요.

한마디로 예수님의 피로서 맺은 새 언약을 증거하는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증거해요.

그렇다면 예수님도 12 사도처럼 구약 교회에다 이 사실을 증거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조금 어려우니 잘 생각하면서 들으세요.

 

히브리서가 뭐라고 했지요.

히브리서가 쓰이게 된 배경은 유대교인들 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했지요.

왜 유대교에서 개종한 자들을 위해서 쓰여졌느냐! 하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자 수많은 핍박과 환란이 닥쳤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것은 단 하나에요.

율법신앙을 거부하기 때문이에요.

이건 마치 예수님께서 율법신앙을 틀렸다고 고발하다가 죽임 당하는 것과 같아요.

지금도 이런 맥은 그대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지금은 성화론 자들이 유대인들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요.

성화론 신앙이 율법신앙이에요.

그 뿌리가 같아요.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그 뿌리는 동일해요.

 

이유야 어떻튼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전부 그 근본은 유대교와 같아요.

예수님의 피를 믿지 않는 것엔 동일해요.

그래서 똑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십자가 피를 말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자가 누군가 하면 성화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에요.

이들은 한마디로 왜 인간들이 행하는 거룩한 종교생활을 부정하느냐 에요.

인간도 얼마든지 착한 삶을 살 수가 있는데 왜 부정하느냐 에요.

인간도 얼마든지 거룩해질 수가 있는데 왜 인정하지 않느냐 에요.

 

이들은 유대인들처럼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유대인들은 율법신앙을 버릴 수가 없어요.

그건 조상대대로 내려온 전통신앙이에요.

그 율법 신앙의 꼭대기에 모세가 있어요.

 

유대인에게 있어 모세는 신과 같은 존재예요.

율법 신앙의 조상이 모세라고 믿고 있어요.

그러나 모세는 율법 신앙의 조상이 아니에요.

유대인들이 오해한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서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율법신앙의 조상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 언약을 보면 모세는 율법 신앙을 가르치지 않았어요.

율법을 하나님께 받아서 준 것은 사실이지만 율법신앙을 가르치진 않았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면 나를 믿었을 것이라고 하지요.

이는 모세도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이에요.

그 증거가 변화 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깨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는 율법신앙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율법이 어떻게 주어졌는지부터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로서 출애굽을 하고 시내 산에 도착합니다.

시내 산은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던 곳이에요.

 

출 3:12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모세는 하나님 명령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사명을 준 산까지 무사히 데리고 왔어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가 사명을 받던 그 산에 데리고 오자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 산으로 올라오게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불러서 하나님의 뜻을 쭉 설명을 해 줍니다.

한마디로 율법이에요.

함축하면 십계명이에요.

 

하나님이 내가 이 백성을 이렇게 만들고 싶은데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킬 수 있는지 물어 보라고 합니다.

이에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통고해 줍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는데 율법 속에는 축복과 저주가 들어가 있다고 알려 주면서!

누구든지 율법대로 살면 엄청난 축복을 받고,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어요.

 

그러자 백성들이 축복에 눈이 어두워 그만 지키겠다고 계약서를 쓰자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양푼이에 피를 담아서 그들의 머리위에 뿌리면서 계역을 체결했어요.

누구든지 계약을 어기는 사람은 이 짐승처럼 죽임을 당한다는 계약입니다.

 

그래서 됐나!

됐다! 하고선 계약서에 싸인을 했어요.

이제 모세가 그 계약서를 들고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그러면서 사십일 동안 율법을 적은 두 돌 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서 백성들이 모세가 빨리 안 오자 죽은 줄 알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 금송아지가 바로 우리를 애굽에서 빼내 준 신(神)이라고 축제를 벌입니다.

모세가 내려와 보니 가관인 것입니다.

그래서 뿔따구가 나서 모세가 두 돌 판을 깨트려 버립니다.

 

돌 판을 깨트렸다는 것은 계약이 깨어졌다는 뜻입니다.

계약이 뭡니까?

누구든지 계약을 어기면 죽는다고 했지요.

그러자 하나님이 계약대로 이스라엘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백성들이 죽어나가 자빠지는 모습을 본 모세가 급히 하나님께 엎드리면서 자가 목숨을 담보로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의 목숨을 담보로 이스라엘을 살려줍니다.

이제 이스라엘 목숨은 모세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모세의 생명으로 살고 있는 거예요.

마치 신약 시대에 오면 성도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과 같아요.

이스라엘이 모세의 운명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신약의 성도는 예수님의 운명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구약 마당에 예수님의 표상으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서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을 담아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다시 율법이 적힌 두 돌 판을 만들어 줍니다.

그리곤 이 두 돌 판을 성막의 법궤 속에 담아 두라고 합니다.

두 돌 판엔 여전히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말씀들이 적혀 있어요.

그러나 그 말씀은 이미 지키지 못한 불가능한 말씀이에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율법을 대할 때마다 지키려고 덤비면 안 되어요.

율법을 볼 때마다 아! 우린 이미 말씀을 어긴 자들이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살고 있는 거지! 라고 했어야 해요.

 

두 돌 판은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지키라고 있는 게 아니고 너희는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고, 그럼에도 죽지 않고 사는 것은 모세의 생명 때문이라는 것을 알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말에 순종하여야 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매번 모세에게 대들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설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은 율법을 오해하였기 때문이에요.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제사를 드리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도 유대인들은 말씀대로 살기에 바빴어요.

제사 지내기에 바빴단 말입니다.

예수를 믿을 겨를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께선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가르쳐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위가 바로 사도의 행위에요.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어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으니 사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12사도들과 같이 오직 예수님의 피만 전했어요.

너희가 하나님 앞에 긍휼을 입고 산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 것입니다.

지금도 성화주의자들이 이걸 몰라요.

열심히 말씀대로 살기엔 바쁜데 정작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산다는 긍휼이 없어요.

 

우리가 말씀을 지켜서 사는게 아니라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때문에 살고 있구나!를 알아야 해요.

이 사실을 안다면 예수님의 피를 우습게 여길 수가 없어요.

생명처럼 여길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보니 온 유대인들이 율법신앙에 푹 빠져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도에 신분으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제사가 아니라 모세처럼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자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을 믿으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귀엔 들리지 않는 말이지만!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교 신자들에게 예수님을 모세와 비교하여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 충성된 종으로 일을 했다고 한다면,

지금은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충성된 종으로 일한 것은 짐승의 피로서 정결케 된다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아들로서 일한 것은 자기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것입니다.

종과 아들 중에 아버지가 누구 말을 듣겠느냐 입니다.

누가 아버지의 마음을 더 잘 알겠느냐 에요.

 

그러니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을 사도라고 한 말을 이해하겠지요.

사도들이 예수의 피를 증거 했듯이 지금 예수님도 구약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게 깨끗케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이 사도이지만 대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 제사장이란?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속죄 제사를 드리는 분이에요.

이스라엘에겐 속죄일이란 큰 명절이 있어요.

매년 7월 10일 되면 속죄일로 지켜요.

 

이스라엘 속엔 제사장이 있고 대 제사장이 있어요.

일반 제사장은 일 년 열두 달 24반차를 정해서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백성들의 제사를 지내줘요.

쉽게 말하면 개인 개인의 죄 문제와 사소한 것들을 처리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대 제사장은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하여서 일 년에 단 한 차례 속죄일에 제사를 지냅니다.

속죄일 제사는 일반 제사와 달리 온 민족이 죄를 벗는 제사에요.

이 날 대 제사장의 제사 여부에 따라서 이스라엘 전체의 죄가 사해지느냐 마느냐 차이가 나요.

그러니 온 이스라엘의 운명이 달린 제사이지요.

 

만약 대 제사장이 부정하면 그 자리에서 즉사를 시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차이는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피를 드리느냐 마느냐 에요.

하나님께서 대 제사장이 가지고 온 피를 보시고 결정을 해요.

 

대제사장은 피를 가지고 법궤 위에 뿌려요.

아까 법궤 속에 뭐가 들어 있다고 했나요?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받은 두 돌 판이 있다고 했지요.

물론 그 속엔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들어 있어요.

이 세 가지는 모두가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고발하는 것들이에요.

 

그러니 법궤 안에 범죄한 이스라엘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는 그들 위에 뿌려지는 피가 결정해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피가 뿌려지면 하나님께서 용서한다는 증표로 구름이 덮입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은혜로 용서한다는 의미에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지금 예수님을 온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케 하는 제사를 지내는 대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대 제사장은 어떤 분인가 봅시다.

 

히브리서 9장을 봅시다.

 

히 9:11-12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잘 보세요.

예수님을 대 제사장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피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담보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나아가는 거예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것입니다.

속죄일에 대 제사장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다 해요.

예수님이 대 제사장이 되어서 혼자서 다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들이 끼어들 틈이 없어요.

인간들이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는게 없어요.

유대인들의 주장대로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없어요.

 

모세에게 속한 대 제사장은 기껏해야 짐승의 피로서 매년 속죄 제사를 드렸지만, 아들은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렸어요.

어느 것이 더 귀하고 중요하고 가치가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제사를 더 귀하게 여기겠느냐 에요.

 

아들의 제사를 받지, 종에 것을 받겠느냐 이 말이에요.

아들의 죽음에 의미를 두지 짐승의 죽음에 의미를 두겠느냐 예요.

그러니 유대교 신자들에게 누구 말을 들어야 하겠느냐 고 묻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한 율법이냐?

예수님 피를 믿어야 하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히브리서가 왜 써졌다고 했지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유대교 신자들을 겨냥한 것이라고 했지요.

율법신앙은 제사 신앙이에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제사신앙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냐 이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말씀을 지키지 못해서 예수를 믿는 것인데!

예수를 믿으니 말씀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얼마나 모순이냐 이 말이에요.

 

성화주의가 엉터리인게 <예수 믿기 + 말씀대로 살기> 를 가르치거든요

지금 히브리서를 쓰는 당시의 신앙이 지금 성화주의와 같아요.

예수님이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뤄서 천국에 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 받는다는 게 어디 있냐 이 말입니다.

 

이러면 성화주의자들이 그래요.

우리가 언제 말씀 지켜서 구원을 받자고 하느냐?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상급을 받자고 하지! 라고 해요.

이것도 엉터리인게 하나님은 아들이 한 일을 귀하게 여기고 자랑할 때 영광 받아요.

아버지는 아들을 자랑하면 제일 기뻐해요.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아들을 대신 죽게 해서 말씀을 지키지 못한 죄 값을 청산했는데,

그 아들을 믿는다는 놈들이 이제 우리가 말씀대로 살겠으니 영광 받으세요! 라고 하면 어쩝니까?

이건 하나님을 모욕하고, 아들의 죽음을 개 죽음으로 만드는 게에요.

하나님 앞에 진노를 사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해요.

 

이런 경을 칠 일을 하면서 천국에서 상급을 받겠다고 하고 있어요.

상급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 마칩시다.

어떤 분이 블로그에 상급에 대해서 궁금해서 묻길래 간단하게 달아 놓았는데 여기서 살펴봅시다.

 

사람들은 상급이라고 하면 자기가 한 노력의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 세상 아래선 그래요.

목사들이 세상 가치관으로 신앙생활을 접근하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교인들도 세상 가치관으로 나오니 그럴듯한 것입니다.

 

맞아!

세상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만큼 차등이 있어!

그러니 천국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 한 사람과 농땡이치고 한 사람과는 다를거야!

천국엔 이 땅에서 행한 것에 따라서 상급도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들여다보면 신앙생활을 자기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어요.

 

구원을 우리가 이룬 겁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시켜준 겁니까?

예수님이 시켜준 것이지요.

내 노력이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아요.

 

그럼 구원된 것을 가지고 상급 운운은 하지 않겠지요.

왜냐하면! 구원은 차등이 없으니까요.

그렇잖아요.

 

그래요.

성화론 자들도 구원을 가지고는 상급을 운운하지 않아요.

이들은 구원 이후에 사는 것으로 말해요.

어떻게 살았느냐!

열심히 충성했느냐!

농땡이 쳤느냐!

 

이들은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이 달란트를 남긴 자와 못 남긴 자 간에 어찌 같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많이 남긴 자는 많이 받고 적게 남긴 자는 적게 받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열심히 해서 많이 남긴 자가 되어야 천국에 가서도 많은 상급을 받을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가르쳐요.

 

목사들이 그러지요.

상급을 말할 땐 반드시 달란트 비유를 가지고 해요.

이들을 봐라! 주인이 자기 종에게 달란트를 주지 않았느냐?

그러니 달란트 비유는 종들의 충성을 말하는 상급이야기라고 해요.

 

자 보세요.

달란트 비유는 상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 받은 자와 구원 받지 못한 자의 차별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진짜 종과 가짜 종의 차이가 이렇게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란트를 남긴 종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케 하지만 달란트를 남기지 못한 종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어요.

주인의 즐거움은 천국 잔치를 말하고,

바깥 어두운 곳은 지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달란트 비유는 상급이야기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와 구원 받지 못한 자의 평상시 삶에 자세를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구원 받은 자는 주인이 있든 없든 항상 주인 앞에 있다는 자세로 살아가지만, 구원 받지 못한 자는 주인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요.

 

악한 종에겐 주인이 없어요.

눈에 안 보이니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주인이 올 때쯤 자기가 잔머리를 굴려서 그 때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런 놈이 가짜라는 것입니다.

 

상급론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가르치면 이런 말을 해요.

에이! 난 구원만 받으면 됐지!

상급 안 받으면 어때!]

그러면서 농땡이 치는 사람이 있어요.

 

이러면 상급 받고자 충성하는 사람이나 상급 안 받는다고 농땡이 치는 사람이 동일한 것은 노림수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상급이 없다고 하면 일 안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하나님이 공급하는 은혜로 일하는 것이 아니니 자기 일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성화론이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보세요.

구원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거지요.

로마서 11장을 보면 감람나무에 접붙임 비유로 말하지요.

요한복음 15장에선 포도나무 비유로 말하지요.

 

붙어 있는 가지는 누구 힘으로 삽니까?

나무의 힘으로 살지요.

나무가 공급하는 생명의 진액으로 살지요.

그럼 가지가 행한 행함은 누구의 행함입니까?

나무의 행함이지요.

 

나무가 만약 진액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가지는 말라 죽어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이 진액을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일을 하게 하였지 우리가 한 게 아니에요.

 

그럼 상을 달라고 할 수가 있어요?

없어요?

만약 상을 받는다고 해도 상을 누가 받아야 하나요.

나무가 받아야 하지요.

도리어 가지가 나무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성화주의자들은 성도들이 행한 결과에 따라서 상급을 달라고 해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말이 안 되지요.

속된 말로 물에 빠진 놈 건져 놓았더니 보따리 내어 놓으라는 것과 같아요.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신앙생활을 우리 힘으로 할 수가 있나요?

없나요?

없지요.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하잖아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을 은혜라고 해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신앙생활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은혜에요.

지금이라도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 여기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저 역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이런 설교를 할 수가 없어요.

예수를 믿을 수도 없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은 개인용도가 아니란 것입니다.

이게 너무 중요해요.

이걸 모르니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내 개인을 위하여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레미야를 창세전에 선택했다고 하지요.

누구를 위해서 선택했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선지자로 부르잖아요.

그럼 예레미야의 구원은 예레미야 자신을 위한 겁니까?

하나님을 위한 겁니까?

하나님을 위한 거지요.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을 예수님으로 바꿔서 보세요.

그럼 우리를 구원한 것은 내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나 개인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구원이 되지요.

예수님을 위한 구원이라고 한다면 내가 상을 받을 것이 없어요.

예수님이 받아야 하는 거잖아요.

난 예수 안에 복속이 되었으니 내가 받을 것이 없잖아요.

이해되시지요.

 

구원을 개인용으로 생각하니 상급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 개인을 위한 구원이라고 한다면 상급이 다를 수가 있어요.

그러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구원이에요.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이라고 했어요.

한 몸에 붙어 있는 자체에요.

지체가 각각 있는 것이 아니고 한 몸에 있어요.

 

그러니 한 영광 안에 있는 것이지 지체들이 따로 따로 영광을 받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따로 따로 받는 영광이 없기 때문에 상급에 차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몸이 영광을 받으면 온 지체가 영광을 받고 몸이 수욕을 당하면 온 지체가 수욕을 당해요.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영광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이걸 요한계시록에선 하늘 예루살렘 성(城)이라고 했어요.

 

요한계시록 21장을 봅시다.

 

계 21:9-23절.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째는 청옥이요, 열 두째는 자정이라 21.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잘 보세요.

천사가 사도요한에게 어린 양의 신부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보았더니 하늘에서 거룩한 성(城) 예루살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城)이 전부 보석으로 지어졌어요.

성곽의 기초석을 보니 12가지 보석이에요.

 

성곽의 문패를 보니 어린 양의 12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어요.

어린 양의 12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것은 12 사도의 신앙 고백위에 세워졌다는 말이에요.

12 사도의 신앙고백은 다름 아닌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에요.

 

예수님께서 그리시지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잖아요.

교회가 누구입니까?

성도잖아요.

그럼 천사가 보여준 예루살렘 성(城)이 12 사도의 문패가 달렸다고 하면 12 사도들과 같은 신앙고백을 한 성도가 바로 예루살렘 성(城)이란 말입니다.

 

베드로가 그랬지요.

예수님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버려진 돌인 예수님을 신령한 집을 짓는데 모퉁잇돌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리곤 예수님처럼 버려지는 성도들을 하나 둘씩 주워서 그 모퉁잇돌을 기준으로 해서 신령한 집을 짓는 거예요.

그 버려진 자들로 지어진 집이 바로 요한계시록에선 하늘 예루살렘 성(城)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보석으로 지어진 성 안에 어린 양의 등으로서 쓱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부들에게 들어 온 것입니다.

그러니 어린 양의 신부들인 보석이 각각의 휘황찬란한 빛을 내는 것입니다.

상상을 해보세요.

얼마나 영광스럽겠는가!

 

성도의 영광은 어린 양이 살아갈 하늘 예루살렘 성에 보석으로 간택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상이란 말입니다.

보석으로 지어진 집에 속하였다는 것이 상이에요.

 

그 어디에 상급에 차등이 있고 상이 따로 있습니까?

없어요.

성도는 어린 양의 신부로 선택 받은 것 자체가 상인 것입니다.

영광된 어린 양이 거할 성에 벽돌이 되었다는 것이 상인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행함이 천국에서 상급으로 주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식하고 엉터리인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무식한 놈들이 한국교회에선 선생 노릇을 하고 있어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니 상이라는 말이 있으니 그걸 마치 상급인냥 가르치고 있단 말입니다.

 

성경에 상이라는 말이 있다고 해서 그걸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돼요.

그러면 유대주의가 돼요.

유대인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다가 망한 자들이에요.

지금은 성화주의 개혁주의자들이 그들과 한통속이라서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한 뿌리라서 그런 것입니다.

 

이런 소경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교인들은 말해 무엇 하겠어요.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

꼴에 고집들은 있어 가지고 말을 들어 쳐 먹나요.

안 들어요.

도리어 바락바락 덤비면서 이단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하게 성화하여야 한다고 부르짖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죽였어요.

지금도 똑 같아요.

그 바리새인들의 후예가 바로 성화주의를 외치고 개혁주의를 외치는 인간들이에요.

이들이 충성하면 상 받는다는 달콤한 감언이설로 교인들을 혹세무민하고 있어요.

이들의 말을 듣는 교인들은 더 큰 상을 받기 위해 집도 팔아 바치고 전세금 빼서 바치고 있어요.

 

제가 아는 집사님이 일전에 왜 하나님께 바친 대로 복을 받는다고 안 가르쳐 주었느냐? 고 저 한데 따져요.

많이 심은 자는 많이 받고 적게 심은 자는 적게 받는다고 왜?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불평해요.

자식들을 위해서 미리 씨앗을 뿌리면 나중에 자식들이 그 열매를 따 먹는다고 기도원에서 집회하는 목사가 가르쳐 주더래요.

그걸 알았으면 진즉부터 심었을 거라고 후회가 막급하다는 것입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집사님 하나님이 언제 거래하자고 하던가요?

하나님이 언제 바치면 채워준다고 했나요?

왜 그런 무당의 말을 듣느냐고 해도 소용없어요.

제 말이 들어갈 틈이 없어요.

아무리 가르쳐 줘도 안 듣고 도리어 제가 이상하대요.

자기하고 나하고 다른 것은 알아요.

 

이걸 어찌하여야 합니까?

 

예수가 누구신지도 모르면서 예수를 믿고 있어요.

그러니 히브리서의 오늘 말씀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인자는 머릴 둘 곳이 없어져 버렸어요.

 

이제 말씀을 가름합시다.

 

여러분이 믿는 예수는 과연 누구십니까?

어떤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찾습니까?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사도바울의 말로 대신 하겠습니다.

 

고후 13: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여러분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스스로 확증해 보세요.

부디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는 은혜가 임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많은데 진짜 예수를 믿는 자들이 희귀한 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것인지 늘 확증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도록 믿음이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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