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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 강해)36강. 말씀으로 해부당한 자와 대 제사장 (히 4:12-16)

by coroa 2023. 1. 9.

36강. 말씀으로 해부당한 자와 대 제사장 (히 4:12-16)

 

 

창새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36강. 말씀으로 해부당한 자와 대 제사장 (히 4:12-16)

히 4:12-16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정낙원 목사

 

예수님께서 다른 보혜사인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요,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성령이 새로운 죄(罪)관과 의(義)관과 심판(審判)에 대해서 알려 준다는 뜻입니다.

기존의 것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무엇을 기준으로 책망할까요?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왜 발생 했습니까?

율법의 요구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로 십자가에 죽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하셨죠.

그리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가시고 난 후 성령이 오셨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이젠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심판하십니다.

율법 지킴을 의로 가지고 있는 것을 죄라고 책망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만이 의로운 것이라고 알려 주세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의가 바뀌어졌어요.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예수 믿음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성령은 이 사실을 알려 주세요.

 

알다시피 인간은 선악의 법아래 태어났기 때문에 선악의 구조에서 선과 악을 판단합니다.

선악의 법은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판단합니다.

선악의 법은 죄인에게도 선과 악이 있다고 해요.

이게 율법이에요.

 

성령이 오시면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선과 악을 나누는 선악의 구조 자체를 죄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악의 구조 자체가 죽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법 속에서는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에덴동산에 먹으면 죽는 괴실과 먹으면 영생하는 두 과실이 있었지요.

선악과는 죽음을 몰고 오고,

생명과는 영생을 몰고 오지요.

 

이걸 두 언약으로 보세요.

 

언약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지요.

옛 언약을 붙잡으면 죽고 새 언약을 붙잡으면 삽니다.

율법은 선악과처럼 선이냐! 악이냐! 즉 옳으냐! 그르냐! 로 다가오지요.

그러니 율법과 선악과는 동일한 겁니다.

 

선악과나 율법은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판단 합니다.

올바르게 살았느냐!

그르게 살았느냐!

너 말씀대로 살았어! 안 살았어! 라는 식으로 다가 와서 판단하고 정죄를 합니다.

 

선악의 구조 아래서 태어난 인간은 죽음 안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의 그 어떤 행함 속에서도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다시 말해서 율법 아래서는 구원의 능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선악의 법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선악의 법으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와서 이 구조를 깨트려버렸어요.

이제는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선과 악으로 판단하던 것을 에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라는 것으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걸 성령의 법이라고 합니다.

 

율법은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역사 한다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성령이 오시면 인간의 행함을 의지하는 것을 죄라고 규정을 해 버립니다.

반대로 의(義)는 오직 예수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속에 있다고 알려줘요.

새 언약은 알다시피 예수님의 피로 맺은 언약입니다.

그러니 성령은 예수의 피 안에만 생명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의 싸움은 예수의 피를 붙잡느냐! 안 붙잡느냐! 로 나타납니다.

즉 예수 피 안이냐! 예수 피 밖이냐! 로 가늠이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시 장자의 재앙이 닥칠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 안에 있느냐! 없느냐로 죽음과 생명이 갈라진 것과 같아요.

 

하지만 마귀는 인간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미혹을 해요.

인간의 행함 속에서도 의가 나온다고 미혹하고 있어요.

율법 아래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받지 않은 사람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이 편해요.

사람들이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것은 선악의 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와, 예수 밖에 있는 자는 그 행함을 다르게 여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주께서 일으킨 사건으로 보고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않지만,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행한 것이라고 믿고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을 하여도 그 일을 행한 주체가 자기이므로 그 행함을 부정당하거나 폄훼를 당하면 자기가 부정당함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므로 화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주체 싸움이에요.

누가 내 주인이냐 입니다.

예수가 주인이냐!

내가 주인이냐!

 

자신이 주인인 인간들은 선악의 구조에서 생명이 나온다고 믿고 있어요.

선을 행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은 예수 안에만 있잖아요.

 

이렇게 되면 인간은 전부 가짜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고 맙니다.

빛이 오니 온 세상이 어둠이라는 것으로 밝혀진 것과 같습니다.

빛에 발각된 어둠이 가만있지 않고 빛을 죽여 버린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린 어둠이기 때문에 늘 빛에 고발을 당합니다.

그 빛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이 우리를 발가벗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을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옳고 그름이 드러나게 되어요.

고발당하여지는 겁니다.

이를 지난 시간에 말씀이 수술하는 칼이 되어서 스스로 살아서 인간들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낸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어떻게 끄집어내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지난 시간에 못 다한 이야기를 보충해서 합니다.

지난 시간과 중복되는 말이 있어도 복습하신다 생각하고 양해하고 들으세요.

 

시작부터 참 어렵고 조심스러운 말을 해야 하는데 잘 이해하고 들으셔야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사람들은 무슨 말을 듣든지 자기 안에 사고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기 생각의 틀에 맞추어서 옳으니 그르니 판단을 해요.

이러면 글을 쓴 사람의 의도에서 벗어나게 되요.

 

제가 글을 쓸 땐 하나의 주제가 있어요.

아! 오늘은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가야겠구나 생각을 하면서 설교를 하게 됩니다.

하다가 보면 갑자기 다른 말을 하게도 될 때가 많아요.

하지만 그 이야기도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을 보충하기 위한 부연 설명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글을 읽더라도 오늘의 중심 주제가 뭔지를 붙잡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글에 전체 의도를 모르고 한 부분만 고등어 중간에 토막 자르듯이 보고서 이러쿵 저러쿵 시비를 걸게 되어요.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제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내용도 오해 할 소지가 있어서 그래요.

 

하지만 제가 깨달은 것으로 해석을 하니 옳으면 받아들이고 틀리다 싶으면 거부하세요.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이나 제 안에 계신 성령이 동일하다면 제 말에 동의할 것이고 아니면 동의치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다르다고 해서 비판하고 정죄하지 마세요.

그건 견해의 차이 일수 있으니 나중에 왜 그 소리를 했는지 이해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니 해석이 되지 않는 부분은 항상 머리 한 쪽에 담아 두어요.

그러면 책을 보든지 누구의 설교를 듣든지 하다가 보면 궁금해 하던 것이 해답으로 주어질 때가 있어요.

그러면 성경의 중심과 비추어 보아서 맞으면 하나의 보석으로 꿰어지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자칫하면 오해 할 소지가 있으니 잘 들어야 합니다.

 

도발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도록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시는 분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죄를 짓게 하신단 말입니다.

극단적이라 했어요.

다른 말로 죄를 드러나게 하신단 말입니다.

 

이상하지요.

아니 목사님 무슨 그런 말을 합니까? 라고 묻고 싶지요.

반사적으로 하나님은 죄를 막으시지 왜 죄를 짓도록 하십니까? 라는 반발이 나오지요.

 

우리가 알기로는 마귀가 죄를 짓게 하고 하나님은 죄를 막으신다고 믿잖아요.

한국교회에선 이렇게 가르쳐요.

마귀는 나쁜 놈!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결과론 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 맞아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 맞아요.

그런데 그 좋으심이 우리에게 과정으로 나타날 때는 나쁘게 나타납니다.

이게 굉장히 모순적으로 들리는 어려운 말이에요.

 

시작부터 어렵지요.

아마도 우리가 알던 생각과 역설적으로 말하니 당황스러울 겁니다.

그 이유를 설명할게요.

귀 담아 듣고 뜻을 헤아리고 놓치지 마시고 나중에 딴 소리하지 마세요.

 

자 봅시다.

인간은 죄인이지요.

죄 아래서 태어나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왜 보냈습니까?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키 위하여 보내셨지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아 놓았어요.

그러니 예수님은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했어요.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시고 다 살리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생명책에 녹명 된 자들을 다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세요.

그러니까 구원에 관하여서는 염려하지 마세요.

 

우리가 찾지 않아도 예수님이 목자처럼 잃은 양을 찾아가듯이 다 찾아서 반드시 천국으로 인도 하실 것입니다.

성도를 구원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약속이에요.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는 결코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 찾김을 당해요.

 

구원을 위하여서는 우리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주님이 알아서 다 해요.

때가 되면 주님이 알아서 찾아요.

 

오늘 본문을 보면 대 제사장이 나오지요.

대 제사장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에요.

 

구약에 보면 대 제사장이 있어요.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일 년에 일차씩 온 민족의 죄를 속함 받는 제사를 드리는 분입니다.

7월 10일 속죄일이 되면 대 제사장이 흠 없는 양의 피를 들고 성막의 지성소에 들어가 법궤 뚜껑에다 뿌립니다.

 

알다시피 법궤 안에는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있어요.

이것은 모두가 불순종의 증거물들이에요.

세 가지 증거물은 이스라엘을 표상하고 있어요.

그 위에 피를 뿌려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겁니다.

이 때 뿌려지는 피로 인하여 온 이스라엘을 죄가 속함 받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바로 그 대 제사장이라고 하고 있어요.

대 제사장이라는 말은 죄를 속함 받게 해 주시기 위해서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대 제사장을 굳게 잡으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 말씀이 수술하는 칼이 되어서 죄인을 해부한다고 했지요.

말씀이 인간 자체가 죄 덩어리라고 고발한다고 하였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선 말씀으로 고발당한 죄인에게 대 제사장을 바라보라고 하고 있어요.

 

히브리서 9장을 봅시다.

 

히 9:11-12절.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보세요.

예수님이 대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자기 피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하지요.

구약에선 짐승의 피를 앞세우고 나아갔지만 신약에선 자신의 피를 앞세우고 나아간다고 하지요.

그럼 성도라고 한다면 자신이 누구 때문에 죄사함을 받았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자기 피를 흘려서 성도의 죄를 용서받게 해 주셨는데 성도가 이를 모른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헛 죽음이 되고 말겠지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대 제사장으로 보냈는데 아무도 그 앞에 나아오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보낸 의미가 사라지잖아요.

 

예수님이 대 제사장으로 오셨으니 죄인들을 예수님 앞으로 불러 모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 앞에 누가 나옵니까?

죄인이지요.

예수님 앞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가 나와요.

그런데 인간들은 마귀가 미혹을 해서 자기가 죄인임을 몰라요.

 

그럼 먼저 인간의 죄를 드러내게 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예수님 앞으로 나아 갈 것 아닙니까?

넌 저주 받은 죄인이라고 하여야 어이쿠~ 주님 살려 주세요! 라고 하여야 할 것이잖아요.

그 일을 하나님이 말씀을 가지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의인이라야 지킬 수가 있어요.

죄인은 지킬 수가 없어요.

인간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서면 죄인으로 고발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말씀이 죄를 짓게 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말씀을 가지고 인간이 죄를 짓도록 해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게 한다는 말은 죄를 드러내게 하신단 말입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은 죄를 짓도록 하고 마귀는 죄를 안 짓도록 해요.

참 우습지요.

 

이걸 바리새인을 가지고 상고해 봅시다.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말씀대로 살았어요.

열심히 말씀대로 살다보니 자기가 죄인임을 몰랐어요.

 

바리새인들 입장에선 반(反) 율법적으로 산 창기나 세리들이나 죄인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산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어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의(義)를 거절한 겁니다.

자기들에게도 의(義)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한 것이 누구일까요?

하나님일까요?

마귀일까요?

마귀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 지킴을 의로 가지고 의인인척 잘난 척 꼴값을 떨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한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마귀는 항상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지 어기라고 하지 않아요.

이게 중요해요.

마귀가 하는 일과 하나님이 하는 일이 정 반대예요.

 

마귀는 우상숭배하지 말고!

도적질 하지 말고!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고!

열심과 충성으로 교회에 봉사하라고 해요.

그래서 자기가 죄인임을 가려 버리는 겁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하나님을 말씀을 지키지 말라고 하느냐?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도 말씀에 순종하라고 해요.

 

하지만 마귀가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을 달라요.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 실존을 고발하고자 함이고,

마귀는 말씀 지킨 것을 가지고 의로 삼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동일한 것이지만 그 말씀 지킴을 가지고 나타내는 결과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마귀는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라고 해요.

그런 의미에서 열심히 말씀대로 살라고 한단 말입니다.

의(義)를 만들라고 한단 말입니다.

 

어렵지요.

그래요.

어려워요.

그러니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마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라고 해요.

말씀대로 살아서 죄인임을 모르게 한단 말이에요.

자기가 괜찮은 인간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단 말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면 예수님의 피가 고맙지가 않아요.

 

신앙은 예수를 믿는 거에요.

내가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에요.

의는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마귀가 예수님이 주시는 의를 자기 행위로 가리게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의롭지 않은 자라는 것을 고발하는 일을 하세요.

죄인임을 드러내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세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속에 감추어져 있는 죄가 튀어 나오도록 하세요.

 

예를 들어서 난 우상숭배 하지 않아!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상숭배 할 수 밖에 없는 여건을 만들어 버려요.

마치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들과 간음하고 우상숭배 하듯이 거부 할 수 없는 조건 속으로 밀어 넣어서 죄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신약에 우상숭배는 탐심이지요.

그럼 하나님께서 탐심을 어떻게 끄집어내겠어요.

탐심을 깨워서 끄집어냅니다.

 

평상시 자기 안에는 탐심이 없다고 믿었어요.

항상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자족이 깨어지는 사건을 당하게 됩니다.

 

옆집 아저씨가 로또 복권에 당첨 된 겁니다.

그래서 외제차도 사고, 명품 옷에 명품 가방에 진귀한 보석으로 치장을 합니다.

그러면 갑자기 그 집이 부러워지는 겁니다.

나도 저렇게 살아 봤으면 하고 탐심이 슬슬 고개를 내 밀어요.

 

하나님이 자기 안에 갖고 싶은 것을 눈앞에 어른거리게 해서 탐심을 깨우는 겁니다.

그래서 나도 갖고 말꺼야! 욕심이 발동하도록 하세요.

욕심이 발동하면 인간은 그것을 얻고자 수단을 강구하게 되어요.

자기 힘으로 안 되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을 가지고 봐라! 넌 우상숭배하고 있잖아! 라고 고발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난 누구를 미워해본 적이 없어! 라고 한다면!

자기 마누라가 다른 남자와 걸어가는 모습을 눈에 띄게 함으로서 분노가 들끓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질투심을 유발시켜 죽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봐라! 네 안에 이런 살인하고 싶은 충동이 들어 있잖아! 라고 고발하는 겁니다.

 

난 여자를 안 좋아 하는 줄 알았는데,

아름다운 여자를 눈앞에 어른거리게 만들어서 음욕을 일어나게 만들어요.

간음죄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다윗이 여기에 걸려들었어요.

하나님께서 다윗이 옥상에 올라가 일광욕을 즐길 때 그 시간에 맞추어서 아름다운 밧세바를 목욕을 하게 만든 겁니다.

다윗 안에 들어 있는 음욕을 끄집어내려고 한 조치인 겁니다.

 

눈앞에 여인이 발가벗고 목욕을 하고 있는데 음욕이 일어나지 않을 남자가 어디에 있겠어요.

사람에게 가장 말초적인 흥분이 관음증이에요.

이거 이길 장사가 없어요.

 

그러니 여인의 발가벗은 몸을 보는 순간 잠자고 있던 음욕이 일어나 겁탈하고 만 겁니다.

겁탈하고 보니 남의 아내입니다.

그것도 충신인 우리야의 아내였어요.

여자에 눈이 멀어서 충신 우리야를 죽이는 일까지 한 것입니다.

졸지에 다윗은 간음한 자와 살인자가 되고 말았어요.

 

그래 놓고선 겉으론 시치미를 뚝 떼고 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폭로케 합니다.

다윗이 죄를 지을 땐 방관 하시던 하나님이 죄를 짓고 나자 움직이기 시작한 겁니다.

물론 다윗이 범죄하는 셋트도 하나님이 만든 것이지만 말이에요.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을 받고 다윗에게 가서 우회적으로 말합니다.

어떤 부자가 자기 집에 손님이 찾아와서 대접을 하는데 자기 양은 수만 마리가 있는데도 잡지 않고 옆집에 노인네 부부가 자식처럼 아끼는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걸 홀라당 빼앗아와서 대접을 해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윗이 비분강개하면서 세상에 어디 그런 놈이 있느냐 라고 대노합니다.

그런 놈은 당장 잡아서 이스라엘에서 악을 제거해야 하는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침 튀겨 가면서 말을 합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가 그 놈이 바로 네 놈이라고 합니다.

너는 왕이 되어서 부족한 것 없이 수많은 궁녀들을 두고서도 그래 충신의 아내를 빼앗고 그 충신마저 죽인 놈이라고 합니다.

이 때 다윗이 토설한 내용이 시편 51편입니다.

 

너무도 유명하니 찾아봅시다.

 

시 51:1-19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고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토설하는 내용입니다.

자기는 죄악 중에 출생한 자라는 겁니다.

자신은 죄를 이길 수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죄가 자기 안에서 역사를 해서 이런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죄인이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우슬초로 씻기셔서 용서 해 주는 것뿐이란 겁니다.

어떻게 들으면 아주 뻔뻔스럽지요.

이건 제사를 지내서 해결 될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내 대신 꺾으신 뼈가 내게 즐거운 소리가 되게 해 달라고 합니다.

 

본문에선 우리야 이지만 예언적 의미에선 예수님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에게 기쁜 소식이 되게 해 달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용서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성신이 알게 해 주신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성신이 임하고 나니 이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놓치지 않도록 성신을 거두지 말아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꺾으신 뼈를 바라보게 해요.

예수그리스도 십자가만 바라보게 한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대 제사장을 바라보게 한단 말이에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다윗 속에 있는 죄악성을 끄집어내려고 만든 함정에 걸려든 겁니다.

다윗이 하고 싶은 것은 하라고 멍석을 깔아 준 겁니다.

다윗은 그것도 모르고 완전 범죄를 꿈꾸고자 했어요.

 

이걸 지난번에 제가 미끼라고 했어요.

전 바닷가에 살아서 고기를 잘 잡아요.

여러분 “게” 알지요.

 

바닷가의 바위틈에 보면 작은 “게” 가 있어요.

그 놈을 잡아서 기름에 달달 볶아서 먹으면 굉장히 고소해요.

그래서 어촌에선 게를 잡아서 도시락 반찬으로 많이 해 먹곤 했어요.

 

이 놈은 평상시엔 바위 속에 숨어서 살아요.

밖에 있다가 사람의 인기척이 나면 쏜살같이 숨어요.

그냥은 잡지 못해요.

이 놈을 잡으려면 멸치를 실에다 묶고 그 놈이 숨어 있는 입구에 대고 살랑살랑 흔들어요.

그러면 그 냄새를 맡고 얼굴을 내 밀어요.

 

먹이를 눈 앞에 대고 줄듯 말듯 하면 미쳐요.

그러다가 가만히 흔들지 않고 있으면 덥석 물어 버립니다.

한번 물으면 먹이가 도망 갈까봐 안 놓아요.

그러면 실을 살살 끌어 올려서 잡곤 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게를 잡듯이 다윗을 밧세바로 잡은 겁니다.

하나님이 다윗 속에 있는 음욕이 일어나게 만들어서 간음과 살인이라는 죄를 끄집어내고자 밧세바를 미끼로 쓴 겁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던진 미끼를 홀라당 물은 겁니다.

그리곤 낚시 바늘에 코가 꿰 버렸어요.

이젠 영원히 다윗은 살인자이고 간음자로 살게 되는 겁니다.

아마도 다윗은 예쁜 여자만 보면 가슴이 철렁 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고쳐지느냐 하면 안 고쳐져요.

여러분 죄성은 없어지지 않아요.

그 순간 잠시 사라진 듯이 숨어버려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머리를 또 내밀고 또 미끼를 물어 버려요.

 

이게 인간의 한계에요.

그러니 인간은 장담하지 못해요.

언제 어떤 죄가 튀어 나올지 몰라요.

지금 죄 안 짓고 산다고 장담하지 마세요.

 

누가 범죄한 모습을 보고 난 안 그럴거야!

큰소리치지 마세요.

아마도 주께서 사랑하시면 큰소리치는 여러분에게 조만간 미끼를 던질 겁니다.

그러면 우린 미끼를 덥석 물게 되어 있어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데 안 먹곤 못 배겨요.

 

이게 하나님 말씀이 일하시는 방법이에요.

하나님은 십계명 속에 간음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라고 계명을 주셨어요.

말씀을 준 것은 그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기 위함이라고 했지요.

 

다윗은 스스로 성자인줄 알았어요.

사울이 그렇게 자기를 죽이고자 하여도 참고 또 참았어요.

최소한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이기 전까지는 완전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이 완전하게 살면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몰라요.

자기가 잘나서 살고 있다고 믿는단 말입니다.

잘낫다고 하는 놈을 천국에 데리고 가면 나 잘났어! 하고 거드름피우고 다닌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묵사발 내기로 작정 한 겁니다.

자기가 무슨 성자라도 되는 줄 알고 있는 것을 깨트려 주어야 해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죄인이 성자인줄 알고 살면 자기도 속고 남도 속아요.

 

그래서 간음을 하게 하고 살인을 하게 하여서 계명을 어기도록 한 겁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성도가 반듯하게 살지 못하게 한다는 겁니다.

야! 이거 오해하면 안 되는데?

이걸 오해하면 하나님은 죄짓게 하는 분이다! 라고 해요.

하나님은 죄를 짓게 하는 분이 아니고 인간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분이에요.

 

죄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짓는 것이지 하나님이 새삼스럽게 죄를 짓게 하지 않아요.

다만 죄를 끄집어내는 환경을 조성하실 뿐이에요.

이걸 오해하면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당연하니 죄짓자 라고 해요.

자기가 믿음이 없어 깨닫지 못하는 것을 꼭 남에게 전가 시켜서 시비를 걸어요.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화주의자들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고 아버지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성령 충만 받아서 거룩하고 온전해 지라고 하잖아요.

성화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온전하고 거룩하게 해 준다고 믿어요.

 

그러나 전 그 반대에요.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반대로 거룩하지 못하고 온전하지 못하도록 하세요.

죄인이 온전하고 거룩해 지려는 것 자체가 사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기 치지 말라고 온전과 거룩을 역행하는 사건을 일으키는 겁니다.

 

온전하고 거룩하게 한번 살아보세요.

그게 되는가?

안 되어요.

온전하게 살고자 하면 할수록 온전치 못한 부분들이 드러나요.

 

이사야 선지자가 그러지요.

예수님을 시온의 거치는 반석으로 보냈다고 하지요.

 

롬 9:31-10:3절.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시온이란?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을 일부러 넘어뜨리려고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하잖아요.

왜 넘어 뜨려야만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너무도 완벽해요.

자기들이 말씀을 지켜서 너무도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입장에선 저 놈들이 거룩하면 안 되어요.

자기 의(義)에 도취 되어서 기고만장해요.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서 넘어지게 만든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약을 살살 올리는 겁니다.

눈앞에서 알짱거리면서 그들이 하는 것에 반대로 하고 있어요.

 

바리새인들은 거룩하게 사는데 예수님은 술집 여자들과 어울려서 술을 먹질 않나 세리들과 어울리지 않나 암튼 율법이 금하는 일들만 골라하는 겁니다.

거룩하고 점잖을 떠는 놈들 앞에서 화를 돋우게 한 겁니다.

그러니 참지 못하고 죽여 버린 겁니다.

 

이렇게 약을 올려서 그들 속에 원수를 죽이고 싶은 죄를 끄집어 낸 겁니다.

그리곤 그들을 용서하는 식으로 구원을 해 내는 겁니다.

그러니 생명책에 녹명 된 자를 죄인 되게 하셔서 구원을 해 내는 겁니다.

죄인 되게 한다고 하니 또 오해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로 너희가 예수를 죽인 살인자라는 죄를 끄집어내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만들어서 구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전부가 유구무언이 되는 겁니다.

 

성도라고 다르지 않아요.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것을 늘 깨닫게 하시려고 뜻하지 않는 사건 속으로 밀어 넣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죄를 끄집어내게 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세우는 겁니다.

이런 너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자꾸만 시비 거는 사람들을 일어나게 만들어요.

그래서 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내 안에 미움과 시기와 분냄을 일으키는 겁니다.

 

제 의도와 상관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설교를 해석을 해서 깐족거려요.

여기에 말려들지 않으려니 속이 부글부글하지요.

이런 일이 닥치는 것은 교만치 말고 건방떨지 말라고 그런 것 같아요.

 

솔직히 블로그 개설한지 1 년에 100만 명이나 되는 분들이 다녀갔으니 마음이 뿌듯함이 있어요.

그래서 교만치 말라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 시험하는 것이구나 생각해요.

만약에 블로그를 개설하지 않고 설교를 올리지 않으면 시비에 휘말릴 이유가 없어요.

 

아무 소리 안하고 그져 목사입네! 하고 있으면 아무도 시비 걸지 않아요.

그러나 조금 나 댄다 라고 하면 구설수에 오르내리게 되어요.

그래서 이걸 확 때려 치워! 라고 하면 누구 좋은 일 시키겠어요.

마귀지요.

 

엊그제는 전라도 영암에서 어떤 시골 이장님이 전화를 했어요.

한 달 전에 우연히 제 블로그를 보았는데 정신이 번쩍 들더라는 겁니다.

자신은 아침에 일어나면 기독교 방송을 틀고 설교를 듣고 차 타고 가면 극동 방송을 듣는다고 해요.

 

그런데 제 블로그에 글을 한 달 만에 다 읽었다고 합니다.

세상에 그 많은 글들을 다 읽었데요.

제 설교가 장편소설이잖아요.

그런데 그 이장님에겐 길지도 않고 딱 맞대요.

읽다가 보면 벌써 다 읽었나 싶대요.

아주 책으로 출간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이젠 기독교 방송에서 나오는 목사들이 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 보인다는 겁니다.

이젠 극동 방송을 들을 수가 없대요.

얼마나 기뻐하며 흥분하면서 전화를 하는지 한 시간을 족히 넘게 했어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매일 설교를 올려 달라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 블로그를 열어서 본 글을 또 보곤 한답니다.

 

이런 분들이 요즘 들어서 종종 전화를 하세요.

그러니 신경질이 나고 짜증을 내다가도 미련하고 부족한 인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구나 생각하면 분이 삭혀지는 겁니다.

그러니 수욕을 감내하면서 나도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이 마치 다윗이 자식의 반역으로 쫓겨 가는 피난길에 시므이 라는 사람을 통해서 다윗을 저주하게 한 것처럼 다루고 계신다고 생각해요.

모든 것이 주께로 나온 것이니 어찌 하겠어요.

주님이 수욕을 받으라고 하면 수욕을 받아야지요.

 

우리는 편안하게 살고 싶어해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바래요.

그러나 어디 하나님이 우리 뜻대로 다루시나요.

어떻게 하든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다 끄집어내서 죄인 중에 괴수로 만들어서 긍휼 아래로 불러들이잖아요.

 

하나님은 지금도 성도를 이런 방식으로 다루고 계세요.

모처럼 작심하고 주일 잘 지키고 예배 빠지지 않고 교회 잘 다니려고 굳게굳게 맹세하고 주일날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손님이 찾아온다거나 오다가 차 사고가 난다거나 좌우지간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요.

그러면 각오를 다지고 맹세한 것은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아요.

 

좌우지간 우리 뜻대로 다루어 가신 적이 없어요.

제 경우에 그렇단 말입니다.

제가 뭔가 마음먹고 해야겠다고 하면 꼭 방해하는 일들이 터져요.

그러니 이젠 계획이니 각오니 안 합니다.

그냥 하루 하루 주어진 환경 속에서 감사하면서 살아요.

제겐 이것 이상 더 좋은 신앙이 없어요.

 

하루하루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알고 사는 것 이상 좋은 신앙이 없어요.

그저 살게 해 주시는 대로 사는 겁니다.

그러니 세상에 큰 미련이 없는 겁니다.

암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은 은혜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일을 하세요.

우리의 원함과 역설적으로 일하시고 계세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자기는 진심으로 율법을 지키고자 했는데 율법을 지키고자 하니 없던 것이 툭 튀어 나오더라고 하잖아요.

율법이 오니 자기 안에 탐심이 일어나더라고 하잖아요.

자기는 탐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떨어지니 탐심이 생기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탐내지 말라는 말씀으로 속에 숨어 있던 탐심을 겉으로 끄집어 낸 겁니다.

 

넌 탐심이 가득 찬 죄인이라고 고발하는 겁니다.

그리고선 이런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눈길을 돌리더라고 하잖아요.

육신이 연약하여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케 하심으로서 하게 하시더라고 하잖아요.

 

우리는 죄를 숨기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죄를 드러나게 하세요.

우리는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세요.

하나님은 인간의 의(義)를 쌓고자 하면 허물어 버리십니다.

그러니 우린 늘 하나님과 충돌하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있어요.

 

어제 상담 전화를 받았어요.

어떤 분이 울면서 말씀하시는데 참으로 안타깝더라고요.

무슨 내용인가 하면 자기 남편이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한 대요.

그러면서 맨 날 술을 먹고 죄인이 죄를 짓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면서 자신을 그렇게 폭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교회인데 교회에 갈 필요가 뭐가 있느냐 라고 하면서 이젠 집에서 죽친답니다.

이를 어찌해야 하느냐! 라고 상담을 하는데 난감하더라고요.

속에서 부아가 치밀기도 하고 남편이라는 작자가 곁에 있으면 한 대 쥐어박고 싶더라고요.

 

이런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자기 말대로 막 사는 것이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교회 안 가는 것이 무슨 큰 믿음이라도 되는 냥 큰 소리를 쳐요.

이건 교회에 가면 믿음이 있고 교회에 안가면 믿음이 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믿음이 있다면 굳이 교회 안 갈 이유가 없지요.

왜 안가는 쪽으로 사용하세요.

 

가서 이게 복음이다! 라고 말해줘야지요.

물론 미움을 받지요.

아니 복음을 증거하는데 미움이야 당연하다고 생각하여야지요.

고난을 면하려고 도피하는 것이라면 악한 겁니다.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복음 자체가 진짜와 가짜를 갈라내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요한계시록 22장을 보면 이런 것에 해답이 나와 있어요.

 

계 22:10-11절.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세요.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웠으니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말씀이 스스로 성취가 되어간다는 말이에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서워요.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믿음에 합당치 않는 자들은 말씀을 받으면 그 말씀을 악용하여서 육신의 쾌락을 위해서 사용하는 겁니다.

반대로 믿음에 거한 자는 말씀에 다스림을 받아서 자기를 말씀 아래 복종을 시킨다는 말입니다.

말씀은 양날 가진 검이라고 했지요.

 

왜 양날 가진 검일까요?

두 가지 역사를 일으키기 때문이에요.

말씀이 떨어지면 불신자는 말씀 밖으로 나가버리고, 신자는 말씀 안으로 들어와요.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유다는 말씀을 악용하는 자들은 예수의 피를 색욕거리로 삼는 자들이라고 했어요.

 

유 1: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보세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다고 하지요.

저희는 옛적부터 저주 받을 판결을 받기로 작정 된 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이 경건치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만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놈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라고 했어요.

 

한마디로 예수 안 믿는 자란 말입니다.

 

유다가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초대교회에도 이런 자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이런 자들과 치열하게 싸웠어요.

사도들의 서신서에 갖가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는 말씀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역행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반증이에요.

 

그래서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습성을 본받지 말라고 하고,

땅에 지체를 죽이라고 하는 겁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면 어찌 육신이 끄는 대로 끌려 가느냐 에요.

 

사도들의 서신은 계시를 담고 있지만 또한 성도에게 권면하는 것이에요.

이런 권면 앞에 먼저 우리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달아야 하지만 우리 자신들이 이런 것들과 싸워야 해요.

사도들이 왜 이런 권면들을 하는가 하면 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편만해서 그래요.

영지주의에 모습들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그 중에 육신의 쾌락을 좇는 겁니다.

 

구원은 영혼이 받으니 육신은 무익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받은 영혼은 육신의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서 육신의 쾌락을 좇아가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지식을 쌓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모습이라고 해서 말씀을 지식으로 쌓는 일에 몰두했어요.

 

그래서 바울이 단호하게 이런 일들을 버리라고 하는 겁니다.

바울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길어도 한 구절 구절 잘 읽어보세요.

 

에베소서 4장입니다.

 

엡 4:1-32.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 ~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하지요.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이 어떤 것인가요.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사로 섬기라는 겁니다.

교회에 각각의 직분자를 세운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주셨으니 예수를 아는 일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과 같이 마음이 허망한 것을 좇아 간사한 유혹과 사람의 궤술에 빠지지 말고 자신을 방탕과 방임에 두지 말라고 하면서 만약에 자신을 방탕과 방임에 내어 맡기는 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자는 이런 것들과 싸운다는 말입니다.

말도 좀 가려서 하고 모든 악독과 분냄도 버리고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령을 근심하지 말게 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왜 교회에 이런 말을 합니까?

교회 안에 영지주의자들이 들어와서 온통 어지럽혔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말하면 시비 거는 자들은 또 행함을 강조한다고 할 겁니다.

 

이건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라고 한다면 그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고 성령이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이런 모습으로의 삶으로 인도한다는 말이에요.

물론 항상 이런 모습으로의 삶은 살아지지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말씀 자체가 율법적 계시가 되어서 우리 죄를 고발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나타나도록 하신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의 서신서들이 대동소이하게 이런 것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은 당시 교회 안에서 이런 왜곡된 복음에 반하는 모습들이 진리처럼 행세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사도들은 단호하게 자신을 방탕과 방임으로 방종에 내어 맡기는 자는 신자가 아니라고 말한 겁니다.

 

어느 시대고 항상 말씀을 약용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초대교회부터 있었어요.

이런 영적 맥을 항상 역사 속에 나타나요.

지금도 복음을 곡해하여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은 이런 부류라고 보여요.

그러니 성경의 증거를 우습게 여기고 죄인이 죄 짓는게 뭐가 잘못이냐! 라고 하면서 예수의 피를 색욕거리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색욕이란? 자기 육신의 쾌락을 좇는 것을 말해요.

난 율법에서 해방 되었다.

그러니 봇물 터지듯이 야! 이제부턴 하나님 말씀대로 살 필요가 없구나!

이제부턴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라고 육신이 끄는 대로 끌려가는 겁니다.

예수의 피가 방종하는 것을 합법화 시켜준 꼴이 되고 만 겁니다.

 

한마디로 복음을 이원화 시켜서 자기 편한 대로 사는 겁니다.

마치 마음대로 사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면서 큰 소리 치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거치는 자가 되는 겁니다.

이런 것을 책망하면 발끈해요.

 

발끈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이런 것으로 가득차 있으니 화를 내는 겁니다.

이런 자들이 교회 안에서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서 일을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에 합당치 못한 자들을 걸러 내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복음을 안다면 행여 나의 자유함이 연약한 성도에게 시험을 주지 않는가 늘 자기를 살펴요.

이건 성화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행함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에요.

진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를 안다면 육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해요.

 

그렇지 않고 말씀에 다스림을 거부하고 육신의 소욕이 이끄는 대로 산다고 한다면 사도들이 그렇게 경계하라고 하였던 영지주의자예요.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은 없어요.

그것은 사단의 교묘한 요설이에요.

바울이 말한 공교하게 지어낸 사람의 궤술이에요.

 

이 말만 하고 마칩시다.

좋은 면이 있어서 소개를 합니다.

칼 바르트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어요.

이 분은 자유주의자들과 홀로 버티고 싸운 분입니다.

이 시대 신학의 틀을 만들어 놓으신 분이에요.

 

당시엔 자유주의가 온 교회를 뒤 덮었어요.

자유주의가 판을 치게 된 것은 계몽주의로 인하여서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고 아울러 과학이 발달하면서 시작이 되었어요.

 

예를 들어서 과거엔 병이 들면 목사님에게 기도를 받고 고쳤어요.

그러다가 문명이 발달하면서 병은 병원에서 고친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러니 이젠 병들면 목사를 찾지 않고 병원에 가서 고쳐요.

옛날엔 성경대로 안하면 죽는 줄 알았는데 아니거든요.

 

모를 땐 개기일식이라도 생기면 신의 진노로 보았는데,

과학이 발달하고 보니 태양이 지구에게 가려서 생기는 것이란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이젠 개기 일식이 생겨도 동요하지 않아요.

과거엔 번개가 치면 신이 노한 줄 알고 다 도망을 쳤는데,

과학의 발달로 번개는 제일 높은 곳이 친다는 것을 알고 건물 꼭대기에다 피뢰침을 박아서 피하는 겁니다.

 

문자가 발달하면서 이젠 신부들이 성경을 독점해서 읽던 시대가 지났어요.

성경을 보다가 보니 오류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젠 인간의 이성으로 믿어지는 것만 계시로 보고 나머진 신화로 전락시켜 버렸어요.

사람들이 이성으로 성경을 보니 현실과 다르거든요.

 

이젠 이성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니 성경이 인간의 이성으로 해석이 되어져서 이성적으로 믿어지면 하나님 말씀으로 간주하고 안 믿어지면 신화로 간주했어요.

 

이 때 칼 바르트가 나타나서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겁니다.

그래서 말씀의 신학자라고 해요.

이 분의 말년엔 서재에 성경 한권만 있었다고 해요.

그만큼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분이에요.

 

이 분의 유명한 말은 왜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해석하느냐!

성경이 인간을 해석하여야 하지! 라고 자유주의에 반기를 든 겁니다.

죄인의 이성으로 어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단 말인가 하고 인간의 이성은 틀린 것이라고 했어요.

 

아주 유명한 말이에요.

 

“내가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성경에 해석당하라” 는 말이에요.

 

얼마나 멋지고 좋은 말입니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의 해석을 받으라는 겁니다.

성경이 뭐라고 하는지 귀를 기울이라는 겁니다.

어느 신학자가 그러는데 하지 말고!

어느 목사가 그러는데 하지 말고 성경이 그 신학자의 말을 인정하는지 알아보라는 겁니다.

그 사람의 말이 성경이 증거하는 것과 일치한가 보시란 말입니다.

 

제 주변에 교인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다가 보면 심심찮게 목사의 말에 종속에 되어 있는 것을 보아요.

목사가 최고의 성경 해석자라도 되는 냥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말끝마다 우리 목사님이 그러는데! 우리 목사님이 그러는데! 하는 겁니다.

목사가 신(神)이에요.

 

이 시대 목사들의 타락은 신학교에서 배운 틀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이에요.

자기 안에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 없나 봐요.

그러니 누구의 해석은 이렇고 누구의 말은 저렇다는 식으로 말해요.

그럼 당신의 생각은 뭐냐? 라고 물으면 없어요.

 

그럼 설교는 어떻게 하느냐 라고 물으면 목사님들의 설교집을 참고 한다는 겁니다.

무엇하러 목사가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이 사람들은 성령이 어느 특정인에게만 있고 자기에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성경으로 자기 신학을 점검하여야 하는데 꺼꾸러 자기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틀린 해석을 하는 겁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여도 성도는 성경이 무어라 하는지 보아야 해요.

누가 신기한 말을 한다고 미혹당하지 마세요.

어떤 틀에도 매여선 안 되어요.

 

어느 누구도 절대적인 해석은 없어요.

성도들 안에는 성령이 다 계세요.

성령이 해석하게 하는 것이 있어요.

 

목사를 너무 과신하지 마세요.

자칫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고 목사의 종이 되어요.

목사에겐 이런 유혹은 항상 있어요.

자기 수하에 두어 자기 뜻에 복종케 하고자 해요.

 

대형교회 목사들 보세요.

자기 말 안 들으면 쫓아내잖아요.

큰 교회엔 당회장의 말이 곧 법이 되고 말았어요.

교인들에게 자기 말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냥 절대성을 두고서 교인들을 자기 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가 해석하는 것만 절대 진리라고 믿게 만들어요.

이게 사이비에요.

 

그래서 지혜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되면 속아요.

장성한 자가 되어서 성경이 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보셔야 해요.

내가 성경에 해석당하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목사들의 요설에 넘어가고 말아요.

그러면 목사의 말에 따라 춤을 추게 되는 목사의 종이 되고 마는 겁니다.

 

저의 말도 믿지 마세요.

제가 거짓 증거 할 수도 있잖아요.

왜 목사가 거짓말을 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나요?

너무 믿음이 좋아서 그런가요.

아니에요.

목사도 거짓말을 해요.

그러니 눈에 불을 켜고 살피세요.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았어요.

항상 베뢰아 교인들처럼 성경이 그러한가 상고하세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기도하세요.

 

제 말을 믿지 마시고 성경을 믿으세요.

성경을 보세요.

과연 그러한가 상고하세요.

저 사람이 말하는 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것과 일치한가 살펴보세요.

 

여러분이 소경이면 속아요.

눈뜬 자가 되셔야 해요.

속이는 자가 많이 일어났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말씀 앞에 세워서 내가 누구인지 보세요.

내 안에 진리의 영이 있는지!

그 진리의 영이 나로 어디로 인도하고 있는지 늘 점검하세요.

 

우리의 영원한 대 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 앞으로 나를 이끄시는지 확인하세요.

그리하여 그리스도 예수가 주시는 풍성한 은혜 안에서 감사하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을 대 제사장으로 보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해석당하게 하시고 나를 대 제사장 앞으로 인도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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