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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 강해) 33강.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히 3:15-19)

by coroa 2022. 11. 5.

 

 

33강.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히 3:15-19) 히 3:15-19절.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창새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33강.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히 3:15-19)

히 3:15-19절.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17.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당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지 않아서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로보건데 가나안은 하나님 약속으로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다는 말은 약속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약속을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이냐?

하나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순종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순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어집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하나님 약속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은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셔야지 만 믿을 수가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약속을 붙잡고 가나안에 들어갔다!”

혹은 “하나님 약속을 믿음으로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지게 해 주어서 들어가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결국은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넣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넣어 주셔야지 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약속은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셔야지 만 믿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께 믿음을 받은 사람이고, 실패한 사람은 믿음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러면 신앙의 본질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은 우리의 원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넣어 주셔야지 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넣어 주면 들어가기 싫어도 들어가는 것이고, 하나님이 안 넣어 주면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갑니다.

넣고 빼는 것은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 넣어 주고, 누군 안 넣어 주었어요.

다른 말로 누구는 구원 시켜주고, 누구는 탈락 시켰어요.

 

잘 알다시피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에서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고 계신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시청각교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속에는 가나안에 들어간 자와 들어가지 못한 자들로 나누어져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자들과 못 들어간 자를 통하여서 장차 천국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속에서 두 종류의 사람들의 인생유전이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을 했음에도 광야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간 사람들이 있고, 자기 힘을 의지하여 살아간 사람들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가나안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들어갔고, 탈락한 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지 않아서 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건은 하나의 표상이에요.

표상은 실상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실상은 뭡니까?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성도를 표상하고 있으니 구약 이스라엘 이야기는 곧 신약의 성도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광야에서 모세를 대적한 자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모형인 것입니다.

 

이 시대 십자가 도를 대적하는 자는 광야에서 모세를 대적한 자들과 동일해요.

그래서 지금도 교회 안에는 구약의 광야에서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 약속을 붙잡았다 라는 표현을 써도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붙잡게 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약속을 믿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 즉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은 하나님이 지키는 것이지 인간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표현은 마치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야 한다는 식의 명령법으로 기술을 하고 있어도 그 본질은 하나님께서 일하셨다는 뜻으로 이해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 속에서도 인간의 잘남이 자랑되어지면 안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증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바탕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께서 넣어 주셨다는 것이 됩니다.

그럼 여호수아와 갈렙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호수아와 갈렙을 간섭 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들을 본받자! 라고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을 믿자! 라고 하여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만 하나님께서 간섭하니 이런 모습의 삶으로 나타나더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께서 간섭하는 성도들도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환경은 달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는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 약속을 믿고 살아가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한 자는 10지파 족장들처럼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러지요.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인간은 토기라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천국 보내기로 만든 토기가 있고, 지옥 보내기로 만든 토기가 있어요.

 

토기장인 하나님이 용도에 따라서 사용할 그릇들을 이미 정해 놓았어요.

인간 쪽에서 변경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정한 길로 가게 되어 있어요.

이걸 세상 말로 운명이고 팔자라고 합니다.

인간의 조건으로 변경이 되지 않아요.

 

야곱처럼 천국의 그릇으로 만들었으면 천국으로 가게 되어 있고,

에서처럼 지옥의 그릇으로 만들었으면 지옥으로 가야해요.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고는 인간 쪽에서 선택할 수가 없어요.

야곱과 에서처럼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정한 뜻으로 이미 결정이 되었어요.

 

신약의 성도는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각자의 신앙을 확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기 코스가 어디인가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의 길을 걷고 있는지 확인 하는 거예요.

천국으로 갈 자는 가나안으로 들어간 사람들 모습으로 살 것이고,

지옥으로 갈 자는 광야에서 멸망당한 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강퍅케 하다가 저주 받은 사람들을 가지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 받은 자는 이렇다 라는 것입니다.

누가 저주 받은 자이냐?

마음이 강퍅한 자입니다.

 

강퍅한 사람은 깡패나 나쁜 사람이라고 연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아요.

강퍅이란? 고집을 세우고 말을 안 듣는다는 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목이 곧다” 라고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강팍이란? 인간 됨됨이를 말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안 듣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 됨됨이는 너무 좋은데 하나님 말을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윤리 도덕적으로 완벽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안 믿는 것과 같아요.

인간적으로 보면 흠 잡을 수 없는 선한 사람인데 하나님이 보시기엔 강퍅한 자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은 너무 착해서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마치 인도의 성자 간디처럼 예수를 안 믿었어요.

간디는 비폭력 주창자에요.

예수를 안 믿으면서도 산상보훈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해요.

산상보훈으로 자기를 치장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강퍅하다고 합니다.

 

강퍅한 자들이 왜 하나님 말씀을 안 들을까요?

이는 자기고집이 세기 때문이지요.

자기 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자아가 충만하다고 합니다.

 

로마서에 보면 죄인의 모습을 일컬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라고 합니다.

자기가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왕이에요.

그러니 하나님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신앙은 순종이에요.

하나님의 생각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에 복종하는 거예요.

믿음을 순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생각에 굴복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뜻에 굴복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린 생각대로 일하지 않는다는 뜻이 포함되어져 있어요.

하나님은 인간들 생각으로 이해 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만약 우리 생각과 같은 식으로 일을 한다고 하면 다 순종 할 수가 있어요.

강퍅한 사람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믿음을 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다 순종해서 구원 받으면 되니까요.

강퍅이니 불 순종이니 라는 것이 나타난다는 것은 우리 생각과 다르게 일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 말씀이 인간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인간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불합리하게 다가와요.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 말씀을 믿고 따를 수가 없어요.

 

믿음이 없으니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판단하니 불신하게 되고 말씀에 순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혜로 됩니다.

 

불신자들에겐 성령이 없으니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 불평이 생깁니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생기지요.

 

사람은 타인을 통해서 자기 이미지를 만들어요.

예를 들어서 말하면 젊은 여자들은 탤런트들을 보고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이미지를 만들잖아요.

 

대중들은 유명한 연예인들이 입은 옷을 입고 그들이 치장한 장신구를 치장함으로서 동일시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급기야 예쁜 여자를 롤 모델로 하여서 누구처럼 해 달라고 성형을 하잖아요.

인조인간을 만들잖아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지난번에 죽은 마이클 잭슨이에요.

원래 마이클 잭슨은 흑인이에요.

흑인이지만 귀엽고 예뻐요.

그런데 본인은 흑인이 싫고 백인처럼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고치고 또 고치고 한 것입니다.

아무리 고쳐도 만족스럽지가 않은 거예요.

나중엔 도저히 고칠 수가 없어서 망가진 얼굴로 살았어요.

남과 비교하면 만족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인간 속엔 채울 수 없는 탐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키 작은 사람은 키 큰 사람이 부럽고,

눈이 작은 사람은 눈 큰 사람이 부럽고,

뚱뚱한 사람은 날씬한 사람이 부러워요.

자기에게 만족하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아내들은 남의 남편과 자기 남편을 비교하고,

남편들은 다른 여자와 자기 아내를 비교해요.

남의 나쁜 것을 보는게 아니라 좋은 것만 보니 만족이 되겠어요.

안되지요.

 

만약 나쁘고 못된 면을 보았다면 지금 내 아내나 남편이 훨씬 좋다고 느껴요.

그런데 인간의 눈에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타인에게 찾아요.

그러니 타인의 나쁜 것은 안보이고 좋은 것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일평생 남의 집 남편이나 남의 아내나 남의 자식들을 비교하고 투덜거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볼 때도 마찬가지에요.

남에 자식들 보면 어찌 그리 잘났습니까?

남에 자식들은 다 똑똑한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내 자식은 영 못마땅해요.

혼자 볼 땐 만족이 되는데 꼭 남과 비교하면 울화가 치밀어요.

 

자식들도 부모를 볼 때 마찬가지에요.

남의 부모와 비교해서 누구 집 엄마 아빠는 이렇게 해 준다는 식으로 불평해요.

이게 인간이에요.

그러니 인간은 늘 불행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평한 이유도 애굽과 비교해서예요.

광야 생활이 애굽보다 나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빴거든요.

그러니 늘 애굽과 비교해서 투덜거리는 것입니다.

 

강퍅한 마음이 왜 생기느냐 하면 애굽과 비교하기 때문에 생겨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나온 것은 순종해서가 아니라 탐욕에서 나왔어요.

그게 광야에서 다 드러난 것입니다.

더 나은 생활을 꿈꾸고 따라 나왔는데 막상 더 어려우니까 원망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왜 이런 곳으로 인도 하느냐고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지요.

부모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형제도 버리고, 친척도 버리고, 전토까지 버리라고 하잖아요.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버리라고 하잖아요.

이는 죽으라는 말이거든요.

 

한마디로 자기를 위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속에는 날 위한 것이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온통 우리 것만 챙기고자 해요.

예수님이 말씀과는 정 반대의 것들만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온통 자기뿐이에요.

무엇을 해도 “나” 예요.

 

인간적으로 예수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러니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따라 오니까 예수님이 돌아가라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신앙생활을 예수님 말씀대로 한다면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할 이유가 없겠지요.

왜냐하면! 예수를 따르는 길은 자기부인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이지! 라고 하면 원망하거나 불평 할 것이 없어요.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정 반대로 살고자 따르잖아요.

나도 살아야겠지만 자식도 살고 부모형제도 살려야겠다고 따르잖아요.

하나도 포기 할 수 없어요.

머리털 하나라도 잃어버릴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분명히 살고자 하는 자는 돌아가라고 했는데도 우리는 꾸역꾸역 따라 다녀요.

믿어지지도 않는 예수를 왜 믿겠다고 따라 다닙니까?

이는 타고난 종교성 때문이에요.

 

죄인에게 있어 타고난 종교성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하는 신관이에요.

내가 지극 정성을 쏟으면 신(神)도 감동을 받아서 뭔가 들어주지 않겠느냐 라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믿어지지도 않는 예수를 믿겠다고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안 돌아가고 원망하며 따라 다녀요.

따라 다니면서 불평불만만 늘어놓고 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적개심이 쌓여서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고 하는데 우리는 살고자 따른단 말입니다.

 

누가 오라고 했나요.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제발 따라 오지 말고 가라고 하잖아요.

그런데도 인간들은 꾸역꾸역 따라와서 자기 소원 안 들어 준다고 돌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살고자 하지 죽고자 하는 사람이 없어요.

저 역시도 복음! 복음 하면서도 제 본능은 살고자 하지 죽고자 하지 않아요.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지 외면당하기 싫어요.

 

그러니 우리는 늘 본능과 믿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싸우다가 자기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래 천국 가는데 이까짓 것 감수하지 뭐! 그러면서 살면 되잖아요.

그런데 탐심이 이를 용납하지 않아요.

우리 탐심은 이 땅에서도 천국으로 살고 싶어 하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 행복하고자 해요.

그러니 늘 불만족스러워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제가 그랬지요.

믿음은 믿을 수 없는 환경에서 확인이 된다고!

순종은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만 확인이 되어져요.

 

맞아요.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믿음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하려고 주신 것이기 때문에 믿으라는 말 지체가 비이성적인 말인 것입니다.

말 같지 않은 말을 믿으라고 하니 믿음이 없으면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광야의 백성들이 화를 내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도무지 자기들 마음에 안 들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왜 이 따위로 일을 하느냐? 라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식으로 인도하느냐? 라고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결국 광야라는 환경이 이들에 마음을 강팍케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광야에 빼내서 성질을 내게 만든 거예요.

일부러 성질을 내라고 광야로 몰고 나간 것입니다.

광야에 내어 놓고 너희들은 강퍅한 놈들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질을 돋운 것입니다.

 

저기 여호수아와 갈렙을 봐라!

똑 같은 환경인데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순종하는데 너희들은 왜 순종하지 않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순종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12지파 족장들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말 할 때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10지파 족장들과 달랐어요.

 

10지파 족장들은 보이는 환경만 보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어요.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 약속을 믿고 들어가자고 했어요.

그러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해요.

그러니 10지파는 불순종한 것이 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순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약속을 붙잡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이런 식으로 일을 하세요.

강팍해 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 집어넣고 순종하는 자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성도는 완벽한 자가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아요.

다른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 숲에서 살지만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가야할 곳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요.

그러니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사는 자가 신자에요.

 

어려우면 어려운 데로 쉬우면 쉬운 대로 살아요.

어차피 이 세상은 광야같이 지나가는 정거장이라고 믿고 살아요.

잠시 잠간 후면 하나남 나라에 간다는 생각으로 살아요.

믿어지니 그 믿음으로 환경을 초월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도 광야는 계속되어져요.

하나님은 어느 시대고 자기 백성을 광야로 몰아내시고 통과케 하세요.

몰아내서 약속을 붙잡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광야로 나왔지만 애굽과 같은 생활을 요구하고 있었어요.

광야에서 애굽의 마음 그대로 살려고 하니 어렵고 힘이 든 것입니다.

가나안이 믿어진다면 광야는 지나가는 과정이니 이겨 낼 수가 있어요.

 

그러나 가나안이 안 믿어지면 광야는 정착하여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불평이 생기게 됩니다.

성도들도 천국이 믿어지고 세상은 지나가는 정거장이다 라고 생각하고 살면 이겨 낼 수가 있는데, 천국이 믿어지지 않으면 세상은 전부가 되기 때문에 세상에 올인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과 같은 것을 주고자 하였다면 출애굽 할 이유가 없어요.

 

출애굽을 하였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목적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를 위해서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위해서 예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것으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를 광야에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했어요.

즉 먹고 살기 위해서 출애굽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뜻을 위해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가르치려고 출애굽 시켰다고 하잖아요.

사람이 떡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성도의 삶에 목적이 먹고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란 말입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우리를 먹고 살게 하기 위해서 구원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케 하고자 선택했어요.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알려주라고 선택했어요.

그러니 성도가 되어서 자기 몸뚱아리 끌어안고 살고자 하면 안돼요.

그러면 불평불만이 사라지지 않아요.

그건 반칙이에요.

 

이 세상은 장차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라고 선택했어요.

이 세상은 장차 불 타 버릴 허구이고 실상은 하늘에 있다고 말해주어야 해요.

세상에서 구원 했다는 것은 세상이 가짜라는 것을 알려 주라고 구원한 것입니다.

세상이 가짜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빼낸 것이에요.

 

구약 식으로 말하면 애굽은 멸망당할 가짜이니까 빼낸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살 곳은 따로 있기 때문에 빼낸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어찌합니까?

 

애굽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왜 출애굽 시켰는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을 빠져 나왔다면 이제 가야할 곳을 생각하고 살아야지요.

힘들더라도 한 걸음 두 걸음 가나안으로 향하여야지 애굽으로 향하면 안 되어요.

그러면 퇴보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바뀌지 아니하면 장소와 상관없이 애굽의 재앙은 떨어지게 되어있어요.

신명기 28장에서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들어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는다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 백성에겐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악함은 옛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볼까요.

 

골 3:1-6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잖아요.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는 위엣 것을 찾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사고방식이 들어와 있다는 말이에요.

 

없는 마음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에요.

너희 안에 예수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늘에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는 두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하늘을 지향하지만 겉 사람은 땅을 지향해요.

그러니 속 사람이 겉 사람을 자꾸만 고발하는 것입니다.

넌 하늘 사람인데 왜? 땅을 바라보느냐 라고 지적을 해요.

그러면 땅을 바라보는 것이 죄라는 것이 드러나요.

 

그럴 때 그 순간은 마음이 땅에서 하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를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는 일평생 일어나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속 사람하고 겉 사람이 싸우면 겉 사람이 이겨요.

흔히들 성령 충만 받으면 천사가 되는 줄 아는데 이건 오해에요.

욕심도 사라지고 미움도 사라지는 줄 알아요.

그러나 성령은 성도를 천사로 만들고자 오신 분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하지요.

다른 보혜사는 성령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했어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잖아요.

그렇다면 성령은 왜 예수님이 성도를 대신하여 죽으셔야만 했는가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들 안에서 너희 죄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증거해줘요.

깨닫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려면 성도의 죄가 고발이 되어져야지요.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 말씀으로 성도의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의 타락은 성도를 죄인으로 고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간의 죄를 고발하여야 하는데, 성령으로 천사를 만들고 있어요.

성령 충만 받아서 하나님께 순종하여서 의로워 지라고 해요.

 

아니 하나님께 순종이 안 되어서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지아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상하게 성령 충만 받아서 하나님께 순종해서 예수님의 피가 필요 없도록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니 교회엔 바리새인들처럼 의로운 자들만 가득하지 세리와 창기같이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사람이 없어요.

 

교인들이 하나님께 순종을 하니 예수님이 괜히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되고 말았어요.

모두 성령 충만 받아서 의인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성령을 주어서 죄를 고발하여서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 받음을 알도록 하셨는데 이상하게 성령으로 예수님의 피가 필요 없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예수를 믿지 않고 천사 만드는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죄인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천사들이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모인 자들의 모임이에요.

 

죄를 고발하지 않는 성령은 가짜에요.

거짓 영이에요.

바울은 이를 다른 영이라고 했어요.

다른 영이니 교인들을 예수님 십자가 앞으로 끌고 오지 못하고, 십자가와 점점 멀어지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한국교회가 말하는 성령은 다른 영인 것입니다.

교인들이 성령 충만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곧 악령이 충만 한 것입니다.

마귀가 광명의 천사처럼 속이고 있는데도 몰라요.

이게 다 십자가에 대하여 소경이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예수님과 상관없어진 것은 모두가 마귀에게 미혹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마음이 미혹당한 자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했어요.

 

시 95:10-11절. “내가 사십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道)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위에 말씀은 오늘 본문의 말씀과 동일한 내용이에요.

광야에서 멸망당한 자들의 특징을 마음이 미혹 당하였다고 하지요.

마음을 떡에게 빼앗겼어요.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에 마음을 빼앗겼나요?

애굽의 것에 빼앗겼지요.

애굽과 자꾸만 비교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 약속에 두어야 하는데 애굽에 두고 있으니 불평이 생기지요.

그래서 시편기자는 내 도(道)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함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방법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신약에서의 하나님 도는 십자가 도예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모르면 마음이 미혹당한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성화 하느라고 예수 믿을 틈이 없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해 진다고 예수 믿을 겨를이 없어요.

성경을 펴면 예수가 보여야 하는데 자기 치장한다고 예수를 볼 시간이 없어요.

 

이런 상태를 오늘 본문에선 강퍅이라고 해요.

하나님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데,

주 예수는 안 믿고 자기 치장을 하고 있으니 강퍅한 거지요.

 

이 시대 대다수의 목사나 교인들은 십자가가 무슨 것인지 모르고 십자가를 말하고 있어요.

예수 믿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예수를 믿는다고 해요.

왜 교회에 다니는지도 모르면서 교회를 다니고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의미를 모르니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 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뜻을 모르니 내가 뭔가 하여야 한다고 설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감사가 넘치는데, 행함으로 살고자 하니 수고와 슬픔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하나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모르면서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 식으로 믿는 것입니다.

 

옛 사람의 마음으로 예수를 믿으니, 예수를 이용해서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바보인가요.

그러니 넘어지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서 백날 예수를 믿는다 하여도 소용없어요.

옛 사람이 소욕이 죄인 줄 모르면서 예수를 믿으면 반드시 예수를 죽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를 이용하고자 하는데 어디 예수님이 이용당하실 분인가요.

그러니 뿔따구가 나서 나 예수 안 믿어! 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애굽 왕 바로가 하나님을 열 번이나 시험했지요.

그런데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열 번이나 시험하였다고 하지요.

 

민 14:22절.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시험한 이유가 뭡니까?

먹고 사는 것 때문이지요.

광야에 나와서도 애굽에 음식을 요구하지요.

이는 원망하는 이스라엘이나 바로니 같은 종자란 말입니다.

 

광야에 나와서 스스로 자기들은 애굽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아브라함 후손인줄 알았는데 아닌 것입니다.

껍데기는 아브라함 후손인데 속엔 애굽인에요.

 

그러니 광야에 나와서 애굽인 행사머리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에 와서 이방인 행사머리를 하는 거예요.

위엣 것은 찾지 않고 땅에 것만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서 너희들은 아브라함 후손이 아니고 애굽 사람이라고 알려 준 것입니다.

너희들이 애굽을 동경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너희들 속에 애굽에 사고방식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지금도 교회 안에서 그대로 적용이 되요.

예수를 믿어야 하는데 성화 한다고 하니 마음이 강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온통 세상에서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요.

 

그러니 교회에 와서도 세상 것 달라고 땡깡을 부리는 것입니다.

껍데기는 교회 다니니 신자인 것 같지만 그 속엔 세상 사람이에요.

마음이 세상 사람인데 교회에 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라는 광야로 불러내서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본성은 우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잘 될 것이라는 생각해요.

그 정신으로 교회에 와요.

교회에 와서 애굽과 같은 환경을 달라고 해요.

그러면 하나님은 그게 바로 죄라고 지적을 해요.

 

이렇게 되면 육에 속한 자들은 반발을 하고 하나님에게 돌을 던집니다.

세상 것 안 주면 예수 안 믿겠다고 협박을 해요.

나 교회 안 오겠다고 해요.

이는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말과 같아요.

 

사람이란 항상 보다 나은 꿈을 꾸고 살아요.

예수를 믿어도 이 꿈을 포기가 안돼요.

내일이면 나아지겠지!

모레면 나아지겠지! 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로 인도를 해요.

이는 죄를 토해내게 하고자 함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넓은 길을 준비해 두었겠지 생각을 하잖아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아요.

 

저도 복음 전하면서 고난을 피하고자 해요.

복음은 고난을 몰고 다니는데도 육신은 복음으로 고난을 면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다시 말하지만 좁은 문을 들어가면 좁은 길이 나와요.

가도 가도 좁은 길이에요.

마치 광야 같아요.

가도 가도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고난의 길만 나오는 것입니다.

 

고난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파도처럼 늘 밀려와요.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하는 말은 고생이 늘 파도처럼 밀려오기 때문이에요.

죄인에게 안식이란 없어요.

이렇게 되면 육신은 반발을 합니다.

불평이 터져 나와요.

하나님은 기어코 불평이 터져 나오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오해하는 것은 복음을 잘 전하면 교회가 부흥된다고 생각을 해요.

저도 물론 아니란 것을 알지만 교회가 부흥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항상 있어요.

그래서 항상 개 꿈이고 탐욕이라는 것을 깨달아요.

이 개 꿈은 사라지지도 않고 버려지지가 않아요.

항상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 다녀요.

그래서 내 안에 죄를 고발을 해요.

 

여러분!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에게 기다리는 것은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죽음이었어요.

설교 잘하면 돌아오는 게 칭찬이 아니고 적개심이 가득한 돌멩이에요.

설교 잘한다는 것은 인간의 죄를 잘 고발해 낸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니 돌멩이가 날아오지요.

 

인간은 죄를 꼬깃꼬깃 숨기고자 하지 드러나고자 하지 않아요.

어찌 보면 목사와 교인은 기(氣) 싸움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인들 속에 품은 죄를 다 까발려야 하고, 교인들은 어디 한 번 찾아보라고 하고 있어요.

 

지난 번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게 자기 죄를 한번 찾아보라고 큰 소리 친 것과 같아요.

그러다가 검찰이 낱낱이 밝혀내니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자살한 것입니다.

교인들도 목사가 죄를 까발리면 아멘! 하는 게 아니고 어디 이 교회 아니면 교회가 없나 하고 다른 교회로 도망가요.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죄가 들통 나자 자살하는 것과 같아요.

이게 죄인의 어리석음이에요.

 

설교하는 것이 교인들과 얼마나 팽팽한 신경전을 치르는 줄 아세요.

영적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예수 잘 믿으면 좋은 환경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더 어려운 환경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을 해 줘야 해요.

그러면 육은 본능적으로 반발해요.

예수 잘 믿어서 좋은 환경을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그걸 죄라고 하니 가만있겠어요.

 

시 73편을 보면 아삽이라는 사람이 오해 한 내용이 나와요.

한번 살펴볼까요.

꼭 우리 생각과 같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아삽의 시는 3 부분으로 되어 있어요.

먼저 첫째부분은 1절이에요.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1절을 보면 아삽은 하나님께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는 복 받고 잘 사는 줄 알았어요.

이는 반대로 악인들은 모두 저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삽의 이런 마음은 선악의 법 아래 있는 모든 인간들의 마음이에요.

선악의 법은 선을 행하면 상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벋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선악의 하나님이 아니고 은혜의 하나님이에요.

상선벌악하는 하나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아삽은 아직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상선벌악으로 일하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실족 할 뻔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과 정 반대로 일하고 있는 하나님을 보고서 넘어질 뻔 했다고 했어요.

 

2.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아삽이 가만히 보니 악인은 망하고 선인은 흥해야 하는데,

도리어 그 반대로 선인은 망하고 악인은 만사형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뿔따구가 난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라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 잘 믿는 성도는 안 되고, 예수 안 믿는 놈은 잘 되면 누가 예수를 믿겠느냐 이 말이에요.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망하고, 거짓말을 하는 교회가 부흥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목사는 거지같고, 거짓말 하는 목사는 잘 먹고 잘 살아요.

 

그러니 열 받고 환장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전하겠어요.

 

4.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5.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6.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8.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9.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10.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11.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 되도다

 

의인은 살 때도 고난가운데 살다가 죽는 것도 비참하게 죽는데,

악인들은 살 때도 잘 살다가 죽을 때도 잘 죽더라는 것입니다.

악인은 고난이 없는데 의인은 고난 구덩이에 빠져서 나오지를 못하고 있어요.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구약의 선지자들이 죽음과 비교하면 얼마나 다릅니까?

12제자나 선지자들은 전부 비참하게 죽었어요.

고생 고생 개 고생을 하다가 전부다 개 같이 죽었어요.

 

이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에요.

이러고도 하나님이 진정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에요.

더 화가 나는 것은 악인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잘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의인들은 주식을 사면 폭삭 망하고, 악인은 사면 대박을 터뜨린다는 말과 같아요.

의인이 땅을 사면 값이 내려가고, 악인이 땅을 사면 값이 올라가요.

악인은 넘어지면 돈을 줍는데, 의인은 넘어지면 코가 부러져요.

 

악인들은 하는 것마다 잘 되는데, 의인은 하는 것마다 망해요.

그러니 악인들이 거만해 지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교인들에게 야! 너희가 믿는 신이 진짜 하나님이라면 한 번 나와 보라고 해!

너희들이 나보다 더 잘살게 해 달라고 해 보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입니다.

 

복음적으로 말하면 정목사 당신은 그렇게 복음을 잘 전한다면서 왜 당신 교회는 부흥이 안 되느냐? 라고 비아냥거리는 것과 같아요.

복음 전하는 교회가 그렇게 교인도 없느냐? 라고 조롱하고 있어요.

 

가짜 교회는 전도를 안 해도 교인들이 매주 자발적으로 찾아와서 등록을 하는데!

복음 전한다는 교회는 일 년 열두 달을 가도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 안 해요.

도리어 있던 교인들도 다른 교회로 빠져 나가요.

 

14.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15.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악인들에게 재물이 더해지는 것은 교회로 말하면 부흥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고만장(氣高萬丈) 하는 거예요.

반대로 복음대로 사는 성도에겐 당하느니 재앙인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교회에 찾아오는 것은 빚쟁이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복음을 전하니 다른 교회로 가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목사로서 얼마나 열 받겠어요.

하나님에게 안 따지겠어요.

 

그래서 아삽이 하나님께 따지려고 기도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 지금 제 정신입니까?똑바로 좀 하세요! 라고 따지는 것입니다.

 

16.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18.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19.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20.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21.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그러다가 하나님께 대답을 들은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에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고 합니다.

기도하다가 깨달은 것입니다.

말씀을 보다가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다가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이 야! 저 놈들은 잠시 살다가 지옥에 갈 놈들이 아니냐!

저 놈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고 너희는 천국이 준비 되어 있지 않느냐!

그러니 지금 잠간 잘 살도록 놔둔 것이라고 합니다.

 

너는 잠간 고생하다가 천국에 갈 텐데! 뭘 그걸 가지고 그리 불만이냐! 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악인들이 형통하는 것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는 것입니다.

꿈을 깨고 나면 다 잊어버리듯이 저 놈들의 영화도 다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삽이 잘못 했다고 합니다.

내가 짐승새끼라고 합니다.

내가 짐승처럼 육신의 것만 바라보고 살았다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27.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복이란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를 떠난 자들은 결국엔 다 망하는 것이니 부러워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합니다.

다시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아삽처럼 오해하고 있어요.

예수 잘 믿으면 잘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런 오해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니 신앙생활이 기쁠 리가 있겠어요.

무슨 감사가 나오겠어요.

나오느니 원망이고 불평이지요.

 

광야 이스라엘이 지금 그런 것입니다.

아삽과 같은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일평생 투덜거리면서 광야를 헤매는 것입니다.

결국 그러다가 죽어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죽어갔어요.

 

말은 감사하자고 해요.

그러나 실제론 정반대 원망이 터져 나와요.

육을 가진 인간이 배고프고 삶이 어려운데 어찌 감사가 나옵니까?

그건 불가능해요.

육은 두렵고 떨려요.

 

모세나 여호수아 갈렙이 범사에 감사합니다! 라고 살지 않았어요.

전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보아요.

왜냐하면! 그들도 광야에서 멸망당한 사람들과 똑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이기 때문입니다.

성정(性情)이 같다는 말은 성질머리가 똑 같다는 말이에요.

다른 사람이 원망하고 불평했으면 그들도 원망하고 불평했어요.

 

모세가 신경질 낸 것을 보면 여호수아 갈렙도 신경질을 냈다고 보아야 해요.

욕을 하고 원망하고 하는 경중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요.

적극적으로 돌을 던지거나 욕을 하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심정적으로는 그들처럼 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천사가 아니고 죄인이에요.

죄인에게서 죄가 터져 나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열 번을 원망하든 한 번을 원망하든 숫자는 중요치 않아요.

야고보서에 보세요.

열 가지 계명 중에 한 가지만 어겨도 다 어긴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속으로 욕을 했든 겉으로 욕을 하였든 욕을 한 것은 동일해요.

열 번을 원망했든 한 번을 원망했든 원망한 건 동일해요.

 

성경은 너는 원망을 몇 번 했느냐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넌 원망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 받아야 할 인간이 살고 있는 배경에 예수님의 희생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라고 이스라엘이라는 배반의 역사를 기록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너희들 봐라!

구약 이스라엘과 너희와 뭐가 다른가?

다른 것이란?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멸망당했는데 우린 구원 받았어요.

 

하나님이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의 성도를 달리 대우하셨기 때문이에요.

달리 대우하신 배경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어요.

우리에게 물어야 할 죄를 예수님에게 대신 물었다는 것이 달라요.

우리의 구원 바탕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깔려 있다는 것을 알라고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서 우리의 구원 바탕에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에 대한 은혜를 더 깊이 많이 알아가야 합니다.

그 이유를 찾고 그 일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을 보는 이유에요.

 

그래서 바울은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엡 3:14-19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이 뭐라고 기도합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넓은지, 얼마나 긴지,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높은지 알기를 바란다고 하잖아요.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긴 그 사랑을 많이 알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마세요.

거지같이 살아도 천국에 간다는 것하고, 거지같은 삶 속에서 감사하고 산다는 것하고는 달라요.

요즘 같이 살기 어려운데 회사에서 실직당하여 보세요.

감사가 안 나와요.

원망과 불평이 나와요.

 

목마르고 굶어 보세요.

어찌 감사가 나오겠어요.

그건 천사들이나 가능해요.

 

우리는 천사가 아니에요.

우린 육신을 가진 죄인이에요.

죄인에게선 죄가 나오지 감사가 안 나와요.

 

전 과거에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니 기도하고 성경대로 살면 범사에 감사가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은혜를 받고 보니 그건 육신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우리의 불가능성을 말해 주려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임을 알았어요.

기도하고 성경대로 산다고 죄성이 사라지지 않아요.

 

범사에 감사는 죄인으로서는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예수 믿는다고 범사에 감사해야지 하지 마세요.

물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세요.

그러나 그렇게 안 살아진다는 것을 아세요.

 

범사에 감사가 안 된다고 해서 죽지 마세요.

범사에 감사가 안 되면 하나님께 난 이런 인간이네요! 라고 이실직고 하세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도 없는 죄인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면 어찌합니까?

입만 열면 불평과 원망이 봇물처럼 줄 줄 새 나오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이런 인간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해요.

 

그래서 아! 난 하나님 말씀 앞에선 중풍병자구나!

내겐 하나님 말씀은 그림의 떡이구나! 를 알아야 해요.

내가 바로 강퍅한 자인데!

그런 악당이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구원을 받았구나 생각하세요.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앞에 두면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라는 고백이 터져 나와야 해요.

주여 살려 주세요! 라고 하라고 지키지도 못할 말씀을 준 것입니다.

천사들이나 지킬 말씀을 죄인에게 준 것은 넌 죄인이야! 를 알리고자 준 것이에요.

 

그러면 우린 하나님 말씀 앞에 하나님 전 죄인 맞습니다.

죄인이므로 당연히 저주 받아야 하는 인간입니다! 라고 고백하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여야 해요.

그럴 때 나 대신 죽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으로 와 닿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예수님에게 대신 전가 시켜서 우리를 의롭게 해 주셨구나! 를 알아야 해요.

그래서 말씀 앞에 서면 지켜야지가 나오면 안 되고,

이 말씀을 내 대신 지켜주신 예수님이 떠올라야 해요.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었구나! 를 알아야 해요.

 

성경을 통해서 나도 동일하게 멸망 받아야 하는데 용서 받고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래야 신앙생활이 감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도 원망하고 불평하였지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심겨져 있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자격으로는 구원 될 자가 아무도 없어요.

원망하라고 원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밀어 넣었잖아요.

인간들 속에 원망과 불평과 하나님을 미워하는 마음들을 토해 내라고 광야로 몰아갔잖아요.

그러니 인간은 원망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용서받고 살고 있으니 이게 웬 은혜이고 사랑입니까?

이런 은혜와 사랑이 어떻게 주어졌느냐 예요.

그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우리에게 묻지 아니하시고 예수그리스도에게 물으셨기 때문이에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우리의 행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겐 구원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이 성도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고 다 안식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 주시기 때문에 넉넉히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실패 할 수 없음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이 확실한 약속을 믿으시고 세상을 담대하게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법대로 하면 우리도 구약이스라엘처럼 광야에서 다 멸망당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넉넉히 안식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됨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coro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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