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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 강해)35강. 살아서 죄인을 해부하는 말씀 (히 4:12-13)

by coroa 2022. 11. 9.

 

 

히 4:12-13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창새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35강. 살아서 죄인을 해부하는 말씀 (히 4:12-13)

히 4:12-13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정낙원 목사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남의 탓으로 돌리고자 합니다.

이는 모두가 죄가 수치를 감추고자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빛이라 하고, 성도들을 빛의 아들이고 낮에 속하였다 라고 하는 것도 죄의 속성과 반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에 거한 성도는 죄를 숨기고자 하지 않고 회개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술하는 칼”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에요.

칼은 칼인데 스스로 살아서 운동하는 칼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희한한 칼이지요.

살아서 운동한다는 것은 말씀이 스스로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의 간섭 없이 말씀 자체가 알아서 다 한다는 말입니다.

 

수술을 한다는 것은 말씀 자체가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하지요.

이는 말씀이 마치 MRI 와 같아요.

 

맞아요.

말씀이 만물을 훤히 꿰뚫고 있는 MRI 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벌거벗은 모습으로 다 드러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만물 속에 포함되어 있으니 인간도 말씀 앞에 서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그 어떤 피조물들도 하나님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이는 모든 피조물이 말씀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피조물을 만들었으니 그 어떤 피조물도 말씀 앞에만 서면 감추인 본질이 발가벗김 당하듯이 다 드러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속이고 숨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죄라는 놈이 하나님도 속일 수 있고 숨을 수 있다고 가르쳐요.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은 멀리서도 우리 생각을 감찰하시고 우리의 앉고 일어섬도 훤히 손바닥 손금 보듯이 다 보고 계신다고 증거해 주고 있어요.

 

어저께 제 컴퓨터가 말썽을 부려서 컴퓨터를 잘 아시는 분에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좀 알려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분이 전화로 시키는대로 했어요.

 

그런데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어요.

처음 보는 광경이라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제 컴퓨터를 그 분이 자기 집에서 훤히 다 보고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컴퓨터 이곳저곳을 낱낱이 다 살펴보고 있어요.

저 쪽에서 내 컴퓨터에 있는 폴더를 열고 확인하고, 버릴 것과 남겨둘 것을 검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프로그램 중에 못쓰는 것은 삭제를 하고, 필요한 것은 설치하고 하는 것입니다.

내 컴퓨터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저쪽에서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니까요.

마치 현장에서 하듯이 말이에요.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참으로 묘하더라고요.

마치 내가 발가벗김 당하여서 취조 당하고 있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그래 하나님도 나를 이렇게 들어다 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내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하나님이 다 알고 있어요.

 

이걸 복음적으로 이해해 봅시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창조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가 된 피조물인 인간도 과학이라는 것으로 남의 속을 훤히 다 들여다보는데 하물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들 속속들을 얼마나 더 다 들여다보지 못하겠느냐 에요.

 

눈(眼)을 지으신 자가 어찌 보지 못하겠으며,

귀(耳)를 지으신 자가 어찌 듣지 못하겠으며,

마음(心)을 지으신 자가 어찌 그 마음속을 모르겠어요.

 

하나님은 우리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다 알고 계세요.

지금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다 들여다보고 있어요.

저 놈이 설교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 인간이 설교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단 말입니다.

 

마음속으로 누굴 미워하고,

누굴 시기하고,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단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이용해서 무엇을 챙기고자 하는지 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인간들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훤히 보고 있는데 그걸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요.

사람만 속이면 감추어진다고 믿고 열심히 사람의 눈을 속이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속이고 감추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는 일을 하십니다.

 

말씀으로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은 말씀 자체에요.

만물은 예수님 앞에 서면 발가벗겨져요.

속일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인간들 마음을 훤히 다 읽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만물은 창조주이신 예수님 앞에 서면 마음에 숨은 것이 다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참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과 인간은 술래잡기를 해요.

우리는 죄를 숨기고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찾아내고 드러나게 만들어요.

그러니 죄인에겐 예수님은 비정한 분입니다.

좀 숨겨 주었으면 좋은데 다 까발리잖아요.

들키면 화가 나요.

왜 내 자존심을 건드려서 기분 나쁘게 하느냐,

그래서 어둠이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빛이라고 하지요.

이는 어둠이 빛 앞에 다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둠이 스스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겠어요?

안 나오고 숨어 버리지요.

 

구약 이스라엘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을 다루는지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였어요.

광야에 나오니 율법을 주십니다.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을 수술하겠다는 것입니다.

발가벗기겠다는 것입니다.

 

왜 발가벗기겠어요.

이는 위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르기 때문이에요.

 

너희들에 속에 이런 것이 들어 있다고 폭로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죄를 까발리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이스라엘 속에 있는 것을 다 꺼내 놓도록 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인간 속에 들어 있는 죄를 끄집어내려고 주신 것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神)을 두지 말라는 것은 너희가 지금 다른 신(神)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것은 우상숭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네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것은 이웃을 해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은 도적질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것은 탐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것 안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안하면 말씀을 지키는 줄 알았어요.

그러니 율법을 지키기에 바빴지 율법으로 자기 속에 죄를 끄집어내지를 못한 것입니다.

 

이건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지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야 율법을 바로 지킨 것이 되어요.

하나님이 말씀을 준 것은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라고 준 것인데 이스라엘은 도리어 감추어 버렸어요.

 

나! 살인 안 했는데요.

나! 우상숭배 하지 않았는데요.

나! 이웃 사랑 했는데요.

나! 안식일을 지켰는데요.

나! 십일조 철저하게 했는데요.

 

바리새인들처럼 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이웃사랑하고 살았는데요!

나! 하나님 말씀 지키고 살았는데요! 라고 자랑하기에 바쁜 것입니다.

이를 어째야 합니까?

칭찬해야 합니까?

매질을 해야 합니까?

 

죄란? 헛다리 짚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헛다리 짚은 것입니다.

 

애굽에선 말씀이 없으니 자기가 죄인인줄 몰랐어요.

자기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몰라요.

위장하고 살 수 있어요.

마음이 깜깜한 어둠이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젠 애굽이 아니고 광야에 왔어요.

불기둥이 환히 비취는 광야란 말입니다.

이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말씀을 받았으니 위장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이스라엘을 해부하겠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어서 너희는 이런 인간이라고 사정없이 고발하고 있어요.

그래야 죄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발당하는 자 입장에선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추고 싶어하는 죄성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알아도 누구에게 비판당해 보세요 마음이 상해지지요.

복음은 죄성을 그대로 들추어내면서 일을 해요.

 

저도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건데 새로운 죄들의 튀어나와요.

성경을 보면서도 과거엔 죄로 깨닫지 못하던 것들이 죄로 드러나기 시작해요.

숨어서 잠복하고 있던 것들이 하나 둘씩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예전엔 아무렇지 않던 것들이 이젠 문제가 되어 역정을 내곤해요.

그럴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래요.

야! 내가 이런 인간이었나 싶어요.

 

난 그래도 괜찮은 인간인줄 알았는데 형편없는 쓰레기라는 것이 점점 드러나요.

과거엔 그래도 남도 배려하고 했는데 이젠 몸이 힘에 부치는지 자꾸만 짜증이 나고 내 몸만 챙기고자 하는 이기주의자가 되어가요.

원래 이기주의자라는 것이 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뿐이에요.

없던 것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원래 있던 것이 이젠 본격적으로 나타날 뿐이에요.

인간이란 자기 몽뚱아리 컨디션에 따라서 죄성이 드러나기도 하고 잠복하기도 해요.

 

늙으면 개가 된다는 말이 몸뚱아리 하나 가누기 힘들기 때문에 본능대로 살아서 그래요.

노인네들 오줌 마려워 보세요.

아무데서나 그냥 내 질러요.

사람을 의식하지 않아요.

오로지 본능대로 살아요.

본능대로 사니 짐승이지요.

 

젊은이들은 아직은 이성이 있고 근력이 있으니 절제하니 반듯한 행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나이 들어 늙고 힘이 부치고 기력이 쇠잔해져 보세요.

속에 잠복해 있던 본성들이 하나 둘씩 머리를 내세우지요.

그러면 본능대로 사는 개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잘못을 덮어주기를 바래요.

세상은 그걸 사랑이라고 해요.

그러나 하나님 사랑은 수치를 드러내고 까발리고 폭로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면 묵사발을 만들어요.

아주 처참할 정도로 내 가치를 뭉개 버려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지금까지 애지중지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겼던 자기가 쌓아왔던 모든 것들이 배설물이라는 것을 깨닫잖아요.

지금까지 배설물만 잔뜩 모았던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미련 없이 다 버렸잖아요.

 

성도는 말씀을 통해 마음속에 감추어진 것이 다 폭로되어져야 해요.

내가 소중하다고 여긴 것들이 다 배설물과 같이 쓸모없는 것임을 알아야 해요.

지금까지 전도한 것도 배설물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자랑한 것도 배설물이고,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했던 것도 다 배설물이란 것을 알아야 해요.

우린 지금까지 이런 것들을 훈장처럼 마일리지 쌓듯이 쌓아서 의(義)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이용해서 자기 의를 축적한 것이 악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깨비를 진리인줄 알고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말씀이 우리를 고발하지 않았다면 우린 아직도 바울이 배설물로 버렸던 것들을 모으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말씀은 살아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악함을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해요.

인간의 죄성은 복음을 아나 모르나 항상 하나님 말씀을 이용하라고 해요.

말씀에 순종해서 자기 유익을 얻으라고 해요.

이렇게 되면 말씀을 가지고 흥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지켜 줄 테니 복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말씀은 말씀 본연의 일을 합니다.

말씀을 순종해서 복을 받고자 하는 그것이 죄라고 폭로시킵니다.

말씀 순종이라는 배후에 감추어진 자기 사랑이라는 악의 정체를 폭로시키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기 위한 순종은 하나님이 바라는 순종이 아니에요.

그건 거래에요.

말씀이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순종할 수 없는 죄를 들추어내기 위함이지, 순종을 이끌어 내고자 함이 아니에요.

광야에서 율법을 준 것은 그들 속에 죄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준 것이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오해 했어요.

그래서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다가 망한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이렇게 말씀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죄는 어느 시대나 동일하게 역사하기 때문이에요.

 

초림 때에는 예수님은 말씀대로 산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였어요.

지금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성화주의자들을 저주하세요.

예수님이 왜 말씀대로 산 자들을 저주 하셨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자랑한 의는 자기들이 말씀을 지켜서 만든 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만든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왔기 때문이에요.

 

말씀대로 산 것을 나무란 것이 아니고 그것을 위로 붙잡고 있기 때문에 나무란 것입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이 말씀대로 산 것은 칭찬 하셨어요.

제자들에게도 저들의 삶을 본 받으라고 했어요.

다만 그들은 죄인에게서 나온 것을 붙잡고 있으니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에 의로 가는 곳이에요.

천국 가는 의는 하나님이 주세요.

인간의 정성으로 만들거나 노력으로 따내는 것이 아니에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명령이니 말씀에 순종을 했어요.

사랑하지 않으면 순종하지 말아야 하는데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니까 순종한 거예요.

 

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순종합니까?

하나님 앞에 떳떳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말씀에 순종하였다는 것이 자기 의가 되어서, 그 의를 바탕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뱀 새끼처럼 모가지 곧추 세우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의는 인간들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에요.

이 세상엔 없는 하늘에 의에요.

이 의는 인간을 차별하지 않고 거져 주어지는 의에요.

거져 주니 자랑하면 안 되고 감사하여야 해요.

 

만약 인간이 의를 만들라고 하면 잘한 놈 못한 놈으로 차별이 생겨요.

그러면 천국은 등급별로 차별을 두어야 하고 그러면 능력별로 사는 동네가 달라져요.

인간의 조건으로 달라진단 말입니다.

이런 천국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이에요.

 

천국은 우리 원대로 가지 않고 하나님이 불러 주어야 가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천국 복음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갈라내지요.

의미심장한 말이 있는데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13:10-11절입니다.

 

마 13:10-11절.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예수님이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들으면서도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영 마뜩치 않은 것입니다.

아니! 무슨 이야기를 하려면 딱 까놓고 하지 않고 이상하게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묻습니다.

 

주님도 참 딱하십니다.

무슨 말이든지 딱 까놓고 말하지 않고 왜 그렇게 비밀스럽게 말합니까?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먹도록 이야기 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라고 물었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그럽니다.

그럼 천국복음은 너희에게만 허락이 되었고, 저 쪽에 저 바리새인들에겐 감춰 버렸어!

저 놈들이 못 알아먹도록 일부러 그런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제자들에겐 허락되었다는 “허락”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허락합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허락하지요.

 

무엇을 허락합니까?

천국이지요.

천국복음 듣는 것을 허락하지요.

천국을 허락한다는 말은 들어오라는 말입니다.

 

자! 중요하니 귀 기울이세요.

천국엔 누가 가느냐?

하나님이 허락하는 사람이 갑니다.

하나님이 들어오라고 해야 갈 수 있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유대인들 속에도 허락 된 자가 있고, 허락 되지 않은 자가 있다고 합니다.

허락된 자는 자기 노력을 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허락 되지 않은 자들은 자기 노력을 하겠지요.

반대로 나타날 것이 아닙니까?

 

죄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반(反)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하나님이 안 넣어 주면 내 힘으로 들어가지 뭐! 그러는 것입니다.

죄인 특유의 오기가 발동해서 하나님과 겨루고자 해요.

 

하나님은 예수를 믿게 해 주어서 구원하는데, 인간은 자기가 믿어서 구원받겠다고 해요.

믿게 해 주는 것과, 믿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요.

믿게 해 주는 것은 내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것은 자기가 믿는 거예요.

이건 믿는다는 말은 같을 지라도 믿음이 아니고 인간의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이니 잘 이해하세요.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자기가 믿는다고 하는 행함에 속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이건 천국에 가지 못해요.

천국엔 자기가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가는 곳이에요.

천국은 예수조차 믿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믿게 해 주어야만 믿을 수 있는 중풍병자와 같은 자들이 가는 곳이에요.

 

여기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니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인간은 가만있지를 못해요.

무슨 짓을 해도 합니다.

 

인간은 독자적으로 살도록 되어 있지 않아요.

마귀의 종으로 살든지, 예수의 종으로 살든지 종으로 살아요.

종이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한다는 말이에요.

 

스스로 예수 믿고자 하는 자도 뭔가를 행하고, 하나님이 믿게 해 준 자도 행해요.

스스로 믿는 자는 자기 가능성을 근거로 행하고, 하나님이 믿게 해 주는 자는 예수님의 것으로 행해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는 성도는 모든 행함의 근거를 예수님에게 두어요.

무슨 일을 하든지 모두 예수님이 하게 하셨다고 고백한단 말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자 군중들이 일제히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봅니다.

어디서 저런 능력이 나왔지 웅성거립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지요.

이건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했다고 하지요.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을 사용한 것입니다.

믿음이 역사하면 반드시 어떤 사건이 일어나요.

예수님이 사건을 일으켜요.

 

교회 안에서 헌신하게도 하고, 전도하게도 하고, 구제하게도 하고, 헌금하게도 하고,,,암튼 갖가지 일들을 일으켜요.

이걸 믿음과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란 말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일으킨 행함과 믿음은 분리시킬 수가 없어요.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고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요.

자기들에게 의미를 두지 않아요.

그러니 군중들의 시선을 자기에게 잡아 둘 필요도 없지요.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 하셨다고 군중들의 시선을 예수님에게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이 나무를 스치고 자나가자 나뭇가지가 흔들린 것과 같아요.

나뭇가지는 스스로 움직인 것이 아니고 바람이 움직였어요.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것은 나뭇가지가 흔들렸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터치한 살아 있는 믿음엔 반드시 행함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행함 말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모든 행함 속에는 나는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의에 종이라고 해요.

나를 의롭게 해 주신 분의 생명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럼 나를 의롭게 해 주신 의가 누구 의입니까?

예수님에 의이지요.

예수님의 의가 드러나자면 난 뭘 해도 죄만 발생시키는 자라는 것이 드러나겠지요.

나는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심으로 산다는 것을 고백하며 사는 것을 의에 종으로 산다고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하면 죄의 종으로 사는 거예요.

 

죄가 어떤 식으로 드러난다고 했나요?

자기 의를 고집하는 식으로 나타난다고 했지요.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말씀대로 살면서 자기가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살고, 불신자는 말씀대로 살면서 자기가 지키겠다고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은 자예요.

자기가 행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자에요.

그러니 말씀을 좇아가면서도 자기의 불가능성을 늘 확인을 받는 것입니다.

아! 이래서 죄인이구나!

이래서 인간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행함 속에는 의로워지지 못한다는 자기 불가능성을 알아가는 행함이지요.

이게 어려운 말인데!

성도는 말씀대로 사는 것은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헷갈리지요.

 

다시 말합니다.

성도나 불신자나 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해요.

여기서 불신자란? 이방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겠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을 말해요.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들에게 지킬 것을 명령으로 다가와요.

신자에게도 지키라고 하고 불신자에게도 지키라고 해요.

신자는 말씀을 지키면서 자기의 불가능성을 알기 위해서 지키고, 불신자는 가능성을 만들려고 지켜요.

 

신자는 말씀 지킴에 의 없음을 알려고 지키고, 불신자는 의 있음으로 지켜요.

신자는 말씀 앞에 서면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라고 하고, 불신자는 주여 제가 하겠나이다! 라고 해요.

그러니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 신자는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불신자는 자기 의를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말씀과 상관없이 살면 안 되어요.

말씀으로 늘 자기 연약함을 알아야 해요.

어떤 사람은 그래 난 죄인이다 어쩔래!

죄인이 죄 짓는데 뭐가 잘못이냐 라고 해요.

내 꼴리는 대로 산다 그러는데 이건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를 그렇게 욕을 하면서 구타를 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래 난 죄인이기 때문에 죄 밖에 생산해 낼 수가 없다 라고 합니다.

마치 아내를 구타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는 복음을 안다는 거예요.

이건 복음을 자기 합리화시키는데 이용하는 것입니다.

악이지요.

성도는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자이지 자기를 방임하고 방관하는 자가 아니에요.

물론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주님께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죄인이 죄 짓는 것은 당연한 것은 맞아요.

신앙은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당연한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죄을 이길 수 없는 이런 못난 자를 주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았다는 것을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학하는게 아니에요.

 

제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 난 죄인 맞다 어쩔래! 라는 식으로 자기를 방임해요.

탕자가 자기 가슴을 치면서 나는 죄인이야!

나는 죽을 죄인이야! 라고 하면서 빈둥거리고 노는 것은 아버지께 용서 받은 자가 아니에요.

용서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진정으로 아버지의 용서를 아는 자라면 죽도록 충성하면서도 자신은 아버지의 용서하심으로 산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살아야 해요.

자기 삶에서 아버지의 용서를 토해 내면서 살아야 아버지께 용서 받은 것을 아는 삶이에요.

아버지 집에 와서도 빈둥거리면서 난 죄인입니다! 라고 자학만 한다는 것은 아버지를 두 번 욕보이게 하는 거예요.

 

그건 아버지의 용서 해 주심을 모욕하는 거예요.

용서 받은 자의 모습은 적극적으로 순종하고 감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지 정상이에요.

아버지의 일을 하나도 안하면서 빈둥거리면서 난 죄인입니다! 라고 무슨 훈장처럼 자랑하는 것은 자기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에요.

자기 사랑을 자기를 학대하면서 면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건 잠시 후에 다시 살펴보기로 합시다.

아까 천국은 하나님이 허락해야만 갈 수 있다고 했지요.

여러분들이 저를 목사님 심방 해주세요! 라고 불러 주어야 제가 여러분 집에 갈 수가 있어요.

물론 목사들이 무대뽀로 가지만!

 

엄밀히 따지면 남의 집에 초대 받지 않고 가면 주거침입죄로 걸려요.

초대받지 않았는데도 남의 집에 가는 놈들이 누굽니까?

도적이고 강도들이지요.

세상 집엔 초대 받지 않아도 갈 수가 있을런지 몰라도 천국은 그렇지 못해요.

천국 문엔 천사들이 철통같이 보안을 하고 있어요.

 

초대받지 않은 놈이 가면 삐! 삐! 삐! 삐! 하고 경보가 울려요.

그러면 천사들이 야! 저놈은 도적놈이다! 라고 잡아서 지옥에 보내요.

하나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들어가려고 했으니 도적이고 강도이니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구원을 어떻게 받느냐 하면 하나님이 허락으로 받는 것입니다.

참 쉽고 간단하지요.

맞아요.

 

천국가기 엄청 쉬워요.

하나님이 허락만 하면 돼요.

허락 받은 사람에겐 쉽고 간단하지만 허락 받지 않은 사람에겐 불가능해요.

 

그러니 예수님이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천국에 오라고 허락을 받은 자인가 찾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먹는 사람은 허락받은 사람이고, 모르는 사람은 허락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허락받지도 못한 사람이 가면 강도이므로 지옥에 가요.

천국 가는 데에는 인간의 조건은 필요가 없어요.

따지지 않아요.

학벌도 따지지 않고, 출신도 따지지 않고, 빈부도 따지지 않고, 직분도 따지지 않아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뭐냐 하면 따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허락한다는 초대장만 있으면 만사 O. K 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니 하나님께서 천국에 와도 좋다고 허락한 사람에겐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마에 도장을 콱 찍어 놓은 것입니다.

넌 내꺼! 라고 찍어 놓았어요.

 

이마에 어린 양의 도장이 찍힌 사람은 무사통과에요.

천국 문 앞에 서면 문이 저절로 열려요.

천사들이 이마에 쓰인 이름을 보고 어서 오세요! 라고 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허락을 우리가 원한다고 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허락해 달라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주시기로 작정 된 자들이게만 허락해요.

 

무슨 허락입니까?

이게 중요한데!

이 세상에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허락을 해 주었어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천국 복음을 깨닫는 것은 너희에겐 허락되었고 저희에겐 비밀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고, 너희 눈을 봄으로 복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복을 주었기 때문에 내 말을 알아먹고, 복을 받아서 나를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받기로 작정 된 사람은 예수님 말씀이 쉬워요.

다 알아 먹어요.

하나님이 알아먹도록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귀도 하나님이 열어 주어야 예수님 말씀을 들을 수가 있고,

눈도 뜨게 해 주어야 예수님이 메시야로 보여 지고,

마음도 열어 주어야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믿어져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자는 아무리 들어도 못 알아요.

듣기는 듣는데 엉뚱한 발상을 해요.

엉뚱한 발상이란? 인간의 타고난 죄성으로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죄성으로 받으면 자기가 하겠다고 설치게 되요.

천국을 자기 능력으로 가겠다고 설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가겠다고 해요.

 

이게 그 유명한 성화이고 행함이잖아요.

내가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 아닙니까?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지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저기 세리와 창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았다고 자랑하잖아요.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세요.

거기에 어디 하나님께서 불러 주셔서 구원된 것이 나옵니까?

없어요.

온통 자기가 행한 것뿐이에요.

 

지금도 바리새인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천국에 오라고 허락하지도 않은 인간들은 말씀대로 살아서 가겠다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새벽부터 밤 이슬을 맞아 가면서 주여 우리의 정성을 받아 주시옵소서! 라고 고래 고래 소리를 치잖아요.

 

저도 과거에 참 많이 했습니다.

산으로 들로 바닷가로 나가서 소리소리 쳤어요.

왜 나의 간절한 이런 정성을 몰라주느냐! 라고 밤낮 가리지 않고 악다구니를 써 댔어요.

모두가 내 열심이었지 그 어디에도 하나님이 불러 준 은혜가 없었어요.

 

하다가 하다 지쳐서 야! 목사 때려치우겠다고 마음을 먹고 바둑 둘 때 영 가망이 없으면 돌을 던질 때를 찾듯이 목사 노릇 그만하고자 목사 패를 던질 때를 찾는데 느닷없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쓰나미가 밀려 왔어요.

하나님이 귀를 여시고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기이한 법도를 깨닫게 해 주셨어요.

세상에 이런 일이!

내 힘으로 천국 가겠다고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는 철저히 막더니!

에라이 모르겠다! 천국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겠다고 하니 열어준 것입니다.

 

이건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목사 때려치우겠다고 하면 은혜를 준다는 말이 아니에요.

괜히 목사 때려치우려고 하지 마세요?

저에겐 이렇게 간섭 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손에서 결정이 되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어요.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이게 믿어지는 사람은 할렐루야 아멘하면서 감사가 터져 나와요.

그러나 안 믿어지는 사람은 굉장히 기분 나빠요.

하나님 지가 뭔데!

왜 내 노력을 무시하느냐 라고 땡깡을 부립니다.

 

아까 컴퓨터 고친 이야기를 했지요.

저는 원격조정으로 컴퓨터를 고치는 것을 보고 엄청 은혜를 받았어요.

그래 맞다!

하나님께서 나도 저렇게 조정을 하셨구나!

 

그러니 내가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구나!

말로는 하나님이 다 하셨다고 하지만 그렇게 감격스럽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컴퓨터를 고치는 모습을 보고선 더욱 더 실감이 되더라고요.

 

야! 내가 여기까지 살아온 세월이 다 하나님의 조종에 의하여 살아온 인생이구나!

태어난 것에서부터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목사가 되어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것 까지 모두가 주께서 하셨구나!

우린 조종당하는 인생이에요.

누구도 자기 인생이 없어요.

다 하나님께 사용당하는 인생이에요.

 

그러면 앞날도 주께서 알아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원함과 상관없이 이루어 가시겠구나!

내가 고민하고 근심걱정 할 이유가 없구나! 라는 것이 깨달아지더라고요.

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감사할 일입니까!

 

막말로 내가 요나처럼 다시스로 도망을 쳐도 영락없이 붙잡혀 오겠구나!

붙잡혀 와서 반드시 그 일을 하도록 하고야 마시겠구나!

밀린 방학숙제 한꺼번에 하듯 해서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구나!

10년을 기다려서 못하면 20년을 살게 해서 하게 할 것이고, 20년을 못하면 50년을 살게 해서 하시겠구나!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빨리 제대를 하고 천국에 가려면 맡긴 숙제 매일 매일 하여야 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숙제란? 자기 안에 죄를 다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이 예수 처음 믿고 나온 고백이 아니에요.

죽을 때 가까워서 토해낸 고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건 지식으로 알아진 관념이에요.

진짜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요.

 

흥해도 감사!

망해도 감사!

병들어도 감사!

죽어도 감사!

사고 당하여도 감사!

손해 보아도 감사!

회사가 부도나고 회사에서 정리해고 당해도 감사가 나와야 해요.

 

이런 감사를 누가 하겠어요.

우리는 감사의 조건을 가지고 있잖아요.

감사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직 자기가 죄인임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살고 있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모르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는 사건 사고를 일으켜서 죄를 깨닫게 하고 토설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 한 우린 지옥 생활을 피하지 못해요.

그래서 우린 땅이라는 지옥에서 죄와 씨름하면서 고통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옥 같은 세상에서 오래 사는게 복입니까?

빨리 제대하고 천국에 가는 것이 복입니까?

빨리 제대하는 게 복이지요.

 

다 말은 그렇게 해요.

그런데 문제는 땅을 안 떠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떠나고 몸뚱아리는 떠날까봐서 온갖 좋은 것으로 밧줄로 묶듯이 묶고 있어요.

정답은 알면서도 정답대로 살지 않아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목적 없이 우리를 부르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목적이 있어서 불렀어요.

그러면 그 목적이 다 이루기까진 우린 죽을 수도 없어요.

제대 할 수 없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고무줄처럼 생명을 연장 시켜서라도 반드시 그 일을 이루어야 제대를 시켜주어요.

 

하나님의 계획은 취소되는 일이 없다는 뜻에서 이런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순종해서 의를 만들란 말이 아니고 우리 죄를 낱낱이 고발시켜서 유구무언(有口無言)으로 만들어서 천국에 데리고 가요.

할 말이 없게 만들어서 천국에 데리고 간단 말입니다.

그래야 천국에서 세세토록 대속해 주신 어린 양에게 찬양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오래 산다는 것은 그만큼 할 말이 있다는 말이에요.

할 말이 있다는 것은 자기 죄를 다 알지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따따부따 말이 많다는 것은 아직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주제를 모르니 잘 사네! 못 사네! 말이 많지요.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면 어떤 형편에 처하게 한다 할지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해요.

어떤 환경에서도 아멘으로 감사로 받아야 해요.

그런데도 우리는 아멘이 안 나오고 불만이 나오잖아요.

우린 늘 이런 불평불만으로 살고 있어요.

감사보다 원망으로 살아요.

 

제가 깨달은 것은 복음을 아는 것하고 복음으로 사는 것하곤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복음을 알면 복음대로 사는 줄 알아요.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반대에요.

 

어떤 분들은 제가 복음을 전하니 마음이 비단결이고 하는 행동이 천사 같은 줄 알아요.

그래서 목사님 같은 분하고 한 달만 살아 보았으면 좋겠다고 해요.

그러나 그건 착각이에요.

사람은 다 남의 손에 떡이 커 보이고 남의 것이 좋아 보여요.

하지만 전 여러분의 남편보다 더 쓸모없는 고물이고 개판이에요.

 

여러분이 바라는 천사 같은 사람은 절간에나 있어요.

절간 같은 교회에 스님 같은 목사들이에요.

그들은 거룩하고 점잖고 행동거지가 반듯해요.

화가 나도 속으로 꾹 참고! 나는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라고 해요.

 

그러나 제 마음은 명경(明鏡)처럼 맑은 것이 아니라 구정물과 같이 더러워요.

제 마음씀씀이나 삶이 섬섬옥수(纖纖玉手)처럼 비단결이 아니에요.

제 안엔 각종 악함과 더러움과 부패함들이 들어 있어요.

그 증거가 제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착각하지 마세요.

제 아내에게 물어 보세요.

환상을 깨고 저 고물덩어리 공짜로 줄테니 가져가라고 할 것입니다.

 

잘난 인간은 하나도 없어요.

다 성질머리 고약해요.

성화하는 목사들을 자기 이미지 관리를 한다고 참기나 하지만 복음 아는 목사들은 이미지 관리를 안 하니 참지도 않아요.

성깔머리 있는 그대로 내 질러요.

 

복음 아는 인간들 치고 괜찮은 인간들이 하나도 없어요.

모두가 지독한 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들이에요.

하나같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으로 사는 인간들만 수두룩해요.

 

인간적으로 겸손하기를 하나!

온유하기를 하나!

그렇다고 인정머리가 있나!

독불장군(獨不將軍) 들이에요.

 

이런 인간들이 복음을 안다는 것은 기적이에요.

이런 허물 많고 모난 목사들 입에서 복음이 증거 된다는 것이 기적이에요.

죄인의 괴수에게서 복음이 나온다! 이건 신비(神秘)에 속한 일이에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누가 이를 알리요”

 

일부러 악당 되라는 말이 아니에요.

악당 노릇 안 해도 우린 이미 충분히 악당이니 더 악당 되고자 하지 마세요.

더 악당 안 해도 우리가 악당이라는 것을 만인이 다 알아요.

 

그래요.

우린 모두가 악당이에요.

복음을 빙자하여서 자기 일신상의 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악당들이에요.

 

인간은 율법이 없이는 죄를 알 수가 없어요.

율법은 반드시 인간의 행함을 요구해요.

율법을 지켜서 의를 만들어내라는 것이 아니고, 의를 만들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라고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인간의 행함을 끄집어내고자 하신 것은 인간이 얼마나 자기사랑으로 가득 찬 죄인인가를 고발코자 함이에요.

 

내가 뭔가 해 보세요.

전도라도 하고, 봉사라도 하고, 헌금이라도 목돈으로 해 보세요.

그러면 그 행함이 나를 의로운 자라고 치장을 하게 만들어요.

우리도 복음 전한다는 것이 때로는 의가 되어서 나타나요.

하나님 나 복음 전하잖아요! 라고 머리를 든다니까요.

 

여러분들이 복음으로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도 난 저 인간들과 다르다는 자기 우월성이 바탕이 되어서 나타나는 거예요.

죄성이 바탕에 깔려 있어서 그래요.

난 복음을 알고 넌 복음을 모른다는 심판성이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에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정죄가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은 남을 까는 것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예수의 발 앞에 나아가 눈물로 발을 씻게 해요.

복음으로 분별하는 것과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을 달라요.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율법 외에 다른 의를 그토록 강조했어요.

믿음으로 얻은 의에요.

거저 주시는 예수님의 의에요.

 

그리곤 느닷없이 12장부터는 행함을 강조하는 듯한 말을 하고 있어요.

이는 행함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고 복음을 받으면 이런 현상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런 일들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나타나는 현상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배려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들이에요.

그 중에 한 대목을 봅시다.

 

롬 14:1-4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보세요.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다고 하지요.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은 아직 말씀을 깨닫는 것이 부족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그런 사람이 있거든 비판하지 말고 잘 받아주라는 거예요.

 

괜히 안다고 꼴값 떨어서 시험 들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말씀을 깨닫고 못 깨닫고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불러주셔서 가기 때문이에요.

말씀을 많아 안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으로 남을 배려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해요.

 

믿음을 표현해 내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를 수가 있어요.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심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연약한 자도 인내하고 감싸 줄 수 있는 자에요.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기다려야 해요.

우린 모두가 이단으로 태어나요.

저도 십여 년 전에는 성화주의를 외치던 이단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의 의가 아니면 안 된다는 골수분자가 되었어요.

 

지금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 내일에 알 수도 있어요.

그러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지 말고 받으라는 것입니다.

참고 기다려주라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내게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사는 것이 바른 신앙이에요.

 

생명은 공장에서 하루아침에 찍어내는게 아니에요.

어린아이가 자라듯이 오랜 세월이 필요로 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는 일은 끝이 없어요.

오늘 안다는 것도 지나고 나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래서 바울은 연약한 성도가 있으면 참고 기다려주고 보살펴 주라는 것입니다.

모른다고 비판해서 잘라내지 말란 말이에요.

왜 하나님이 부르신 자를 잘라 내느냐 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우린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런 겁니다! 라고 내어 놓으면 되요.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은 이런 겁니다! 라고 내어 놓으면 그것으로 족해요.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 두세요.

 

저도 설교를 하면서 비판하고 정죄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본 뜻은 사실은 이렇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전하다 보면 감정이 격해서 욕도 많이 하는데 본질은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비판하는 행위로 비칠 수가 있어요.

언어의 한계 상 비판하고 정죄한다고 오해는 살수가 있다는 것은 인정해요.

 

암튼 하나님께서 복음을 깨닫게 한 것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라고 한 것이 아니에요.

이런 죄인이 용서 받았다는 것을 감사하라고 준 것이에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앞에 옥합을 깨트린 것은 죄사함 받음이 너무 감사하였기 때문이에요.

옥합을 깨트리면서 너희들은 왜 안 깨트리느냐 하지 않았어요.

난 이처럼 주님의 은혜에 감격이 북받치고 황홀한데 너희는 뭐냐 라는 식으로 하지 않았어요.

 

자기가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귀하기 때문에 옥합을 깨서 예수님의 발을 씻는 것으로 나타난 것뿐이에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보니 세상에 이 보다 더 귀한 것이 없고 더 가치 있는 것이 없다는 뜻으로 전 재산과 같은 가장 귀한 옥합을 깨트린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라는 놈들을 보세요.

계산하잖아요.

아니 저게 얼마인데!

그래 저걸 발 씻는데 허비한단 말인가!

 

저 귀한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라고 하면서 설사 여자가 그런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말렸어야지! 그래 가만히 있느냐! 라고 예수님을 책망하잖아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니 마리아의 행동이 죄사함의 감사로 안 보이고 행함으로 보인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것은 자기 의를 드러냄이 아니라 감사이고 감격이에요.

이걸 야고보서에선 믿음과 함께 일하는 행함이라고 해요.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믿음이 일으킨 사건을 말해요.

믿음이 막달라 마리이에게 옥합을 깨트리게 한 것입니다.

 

이건 우리더러 흉내 내라는 것이 아니에요.

열심과 충성은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받은 은혜가 밀어내요.

믿음을 받은 자는 이런 감사의 모습으로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나타내는 방법을 다 달라요.

그러니 나타나는 것을 정형화 시킬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말이죠.

우리가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행동을 하면 반드시 마귀는 그 행함을 의지하게 만들어요.

자기가 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미혹한단 말입니다.

 

야! 너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믿음이 있느냐! 라는 식으로 영웅화해요.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치자 군중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우러러 본 것처럼 말이에요.

물론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께 시선을 돌리게 하였지만 항상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나중에 베드로가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바울에게 책망을 듣는 것을 보면 완벽하지 않단 말입니다.

 

우린 늘 넘어질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예수를 믿고 있어요.

우리는 늘 마귀의 공격을 받도록 노출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뜻하지 않게 예수의 피를 가리고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럴 때 말씀이 칼이 되어서 우리 죄를 깨닫게 하세요.

말씀이 우리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넌 이런 나쁜 인간이라고 판단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이 칼이 되어서 수술한다는 것은 우리 속엔 늘 이런 죄가 포진해 있다는 뜻이에요.

의 쌓을 일을 안 하면 우리 속에 죄가 숨 죽이고 가만히 숨어 있어요.

그러다가 의 쌓는 일을 하면 고개를 들고 예수님의 의를 가리라고 해요.

 

그러니 성도는 열심히 말씀대로 살면서 충성 하면서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석이조(一石二鳥)이지요.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입니다.

충성하고 봉사하여 남에게 유익을 주고선 자기 안에 자기 행함을 의로 삼고자 하는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봉사하지 않고 충성하지 않고 헌금하지 않으면 이런 내 속에 죄를 몰라요.

죄가 숨어서 잠복근무를 해요.

사람과 사람 간에 부딪치고 깨어지면서 튀어나와요.

그러니 교회에서 사람과 부대끼면서 난 참 나쁜 놈이라는 것을 알아가야 해요.

 

내가 바로 예수를 죽인 마귀란 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복음으로 다가와요.

죄를 깨닫는 것만큼 하나님의 은혜에 고마움을 알게 되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심이 더 크고 더 깊고 더 많이 더 길게 은혜로 감사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죄를 더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말하면서도 복음으로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전부가 복음이 머릿속에만 있어서 그래요.

그건 관념이고 지식이에요.

관념과 지식은 신앙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행함을 나무라지 않았어요.

그 행함을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책망한 것입니다.

인간 자체가 죄인인데 죄인이 행한 것을 의로운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 저주한 거예요.

 

그럼 우리도 바리새인처럼 행하여 보아야지요.

그리곤 나도 바리새인들처럼 내 행함에 의미를 두고 붙잡고자 하는 죄를 발견하여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 안엔 바리새인의 기질들이 다 들어가 있어요.

이 바리새적인 기질을 알기 위해서라도 충성을 다해 보아야지요.

내가 뭔가 해 보아야 그 행함이 나로 하여금 예수의 피보다 내 행함이 더 귀하게 여기게 만든다는 악을 발견하게 되지요.

 

장롱 면허가 되면 무사고는 되겠지요.

그러나 그 면허는 죽은 거예요.

쓸모가 없어요.

면허증을 받았으면 차를 끌고 다니면서 사고도 내 보아야 해요.

그래야 운전하는게 힘들다는 것을 알아요.

힘든 것을 알아야 하루 하루 교통지옥 속에서 사고 없이 운전하고 다닌다는 것에 감사가 되어요.

면허증의 가치는 운전을 할 때 나타나는 것이지 장롱 속에 넣어 두면 사라져요.

 

그런 차원에서 행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 보란 말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을 해 보란 말이에요.

형제를 사랑하고 행여 정신이 혼미해서 집이라도 팔아서 교회에 바쳐 보세요.

 

그러면 죄가 머리를 치켜들고 하나님 앞에 맞짱 뜨라고 해요.

이상하게 교회에 올 때 그 행함이 든든하게 하나님 앞에 세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난 예수의 피보다 내가 한 봉사와 헌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야 자기가 부인이 되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예수님의 대속하심이 은혜로 남게 되요.

 

말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나 자기 생명을 버리고 주를 따라야 한다고 해요.

그러나 삶으로 풀어 낼 때는 정 반대로 풀어져요.

말씀이 수술하는 칼이 되어서 나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너 왜?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 라고 고발을 해요.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라고 하지만, 우리는 정 반대로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진 않고 눈만 뜨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고민하고 생각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 때문에 그 나라와 그에 의가 마음속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고자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복음도 받고 영광도 받을 수 있을까를 궁리하며 생각해요.

전혀 성질이 다른 두 세계를 꿈꾸면서 살아요.

이처럼 우린 복음을 말하면서도 복음에 반(反)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과 꺼꾸러 살고 있어요.

 

이런 죄를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넌 이래서 죄인이 맞다! 라고 해요.

정죄하고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피 흘려주셨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성도가 말씀과 반(反)하는 모습으로 살면서도 낙망치 않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이에요.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불러 주셔서 구원해 주셨다는 이런 사실이 약속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말씀에 반(反)하는 다른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위로가 되고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의를 만들라고 준 것이 아니고 고발하고자 주셨어요.

그러니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그에 나라와 그에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우리를 고발하는 칼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지독히도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바라지 않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고 순종하면 교만해집니다.

이런 자는 순종 할수록 목이 곧아지고 하나님께 진노만 더 쌓아요.

 

하나님은 의인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긍휼을 구하는 자를 원하세요.

예수님의 대신 죽어주심으로 용서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를 원하세요.

이처럼 언제나 죄인에게 주어진 말씀은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고 계세요.

 

예레미야가 그러지요.

하나님 말씀은 불같고 바위를 깨트리는 방망이라고 하지요.

우린 그만큼 고집이 세고 단단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바위란 말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라는 강력한 말씀으로 깨트리는 것입니다.

깨트려서 신자 만드는 것이 아니고 신자이기 때문에 깨트리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그 누구도 의로운 자가 없어요.

다 예수를 죽인 동업자들이에요.

 

누가 예수를 죽었습니까?

자기백성들이잖아요.

왜 죽였습니까?

자기 소원 안 들어 준다고 죽였어요.

지금도 동일해요.

 

지금도 자기 소원 안 들어주면 신도 바꿔버려요.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 말씀은 살아서 성도의 숨은 죄를 고발하고 수술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결국 말씀은 하나님의 의를 붙잡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이 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까?

이는 우리 온 몸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부터 생각하는 것에서 행동 하나 하나가 다 죄라는 말입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없고 온통 죄 투성이란 말입니다.

인간 자체가 죄 공장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누르면 죄가 튀어 나와요.

 

노아 시대 그러지요.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하지요.

악한 종자로 태어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다 악해요.

 

여러분 자녀들 보세요.

꼭 죽을 꾀만 쓰잖아요.

공부하라고 하면 안하고 컨닝 페이퍼 만들고 있잖아요.

공부는 하기 싫고!

점수는 잘 받아야 하겠고!

 

그럼 방법은 딱 하나에요.

컨닝하는 것입니다.

자기 머릿속에 없으니 남에 것을 훔쳐야지요.

컨닝은 남에 것을 도적질하는 거예요.

인간이란 이처럼 남에 것을 빼앗아서라도 자기 배를 채우고자 하는 종자들이에요.

이런 못된 성질머리가 자기 힘으로 천국까지 침노하려고 해요.

 

세상에 어떤 목사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하니 싸워서 빼앗아야 된다고 가르쳐요.

어떻게 침노하느냐 하면 죽도록 충성해서 침노하라는 것입니다.

봐라!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 하셨잖아!

여러분이 예수님보다 나은 사람이냐?

예수님이 침노해서 들어가라고 했으면 싸우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 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이런 설교를 들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각오를 다지고 그래 하자!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이라!

한번 해 보는 거야!

정신 바짝 차리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어!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으리니!

넘어지면 일어나고 또 넘어지면 일어나자 라고! 연초가 되면 다짐하고 또 다짐하잖아요.

천국 가는 일인데 이런 것쯤이야 감수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자기에게 최면을 걸고 돈키호테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싸움을 하잖아요.

 

목사는 이런 자들을 믿음 좋다고 칭찬하고!

칭찬 받으면 목사가 천당에 넣어 주는 줄 알고 목사에게 인정받으려고 죽기 살기로 하잖아요.

열심히 순종해서 자기 죄를 깨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죄는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괜찮은 존재라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어찌합니까?

말씀을 지키면서 지옥으로 가고 있어요.

 

말씀이 수술하는 칼이란 말은 말씀 앞에서 수술 당하라는 말입니다.

너 자신을 좀 성경이라는 거울에 좀 비춰 보라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안약을 사서 네 꼬라지를 좀 보라고 하잖아요.

말씀을 모르니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엔 가련하고, 곤고하고, 가난하고, 소경이고, 벌거벗고 있다고 하잖아요.

 

난 괜찮은 신자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우린 괜찮지가 않아요.

우린 다 죄가 목구멍까지 꽉 차서 입만 열면 죄가 튀어나와요.

누르면 악이 터져 나와요.

 

제발 말씀 앞에서 발가벗김바 되세요.

아니 발가벗김 당하라고 말씀을 주셨는데 그 말씀으로 치장하면 어찌합니까?

말씀대로 살아서 자기를 치장하지 말고! 발가벗김 당하기 위해서 말씀대로 사세요.

이 역설의 의미를 아셔야 해요.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말씀대로 살아 보세요.

그래야 야! 난 진짜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악당이라는 것을 알 것 아닙니까?

이러고도 내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 것은 더 사기였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래야 대신 죽어 주신 예수님이 고맙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천국에 오라고 허락해 주신 것이 고맙지요.

말씀대로 살아보지도 않고 난 죄인입니다! 라는 것은 진정성이 없어요.

이런 상태를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셨어요.

 

머리로 믿으면 주둥이로는 죄인이 맞다고 하는데 죄 용서 받은 자로서의 감사가 없어요.

무덤덤해요.

말로는 엄청 신앙이 좋은 것 같은데 푹 찌르면 쓰러져요.

조그마한 시험이 와도 넘어져요.

 

꼭 장사하는 가게들 앞에서 팔 흔들면서 춤추고 있는 키 큰 인형 같아요.

옆구리에 조그마한 구멍 하나만 내면 푹 꺼지는 인형 말이에요.

우린 지식이라는 바람만 가득찬 허풍들이에요.

그러니 교회에서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 하고 교회를 옮기네! 마네! 하잖아요.

원수들과 저 인간이 나가든지! 내가 나가든지! 사생결투를 하잖아요.

 

말씀으로 자기를 죽이려고는 하지 않고 남을 찌르겠다고 돌아다니잖아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사정없이 난도질 하여서 죽이잖아요.

자기를 찔러 쪼개라고 말씀을 주었는데 자기는 찌를 생각은 하지 않고 전부 남만 찌르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엉터리로 신앙생활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해요.

신앙생활을 지식 쌓기로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해요.

 

이 시대 신앙은 지식 쌓는 것으로 변질이 되었어요.

마치 천국에 성경 많이 아는 사람이 간다고 믿는가 봐요.

성경적인 지식을 많은데 생명이 없어요.

다 맞는 말을 하는데도 왠지 생명력이 없고 공허하고 무미건조해요.

 

이게 무척 중요한 말이니 귀담아 들으세요.

바울이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말도 울리는 꽹과리 라고 하지요.

천사의 말이란? 천국이야기에요.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에요.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란 말입니다.

 

사랑이 없이도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예수 안 믿어도 예수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이게 아주 무서운 말이에요.

사람들은 착각하기를 예수 십자가를 말하면 다 십자가를 믿는다고 생각해요.

십자가를 아는 것하고, 십자가를 믿는 것하고 달라요.

 

귀신도 예수님 십자가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알아요.

알지만 안 믿어요.

아니 못 믿어요.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지 않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지 않는데도 예수 믿는 척 하는 것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아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어요.

능력이란?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사랑이 뭡니까?

예수님 자신이고, 예수님의 생명이에요.

이게 능력으로 나타나면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받았다는 믿음의 삶으로 나타나요.

믿음이 살아서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는 말은 삶으로 역사하지 핞는 것입니다.

믿음이 죽었기 때문에 울리는 꽹과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자기 자신조차에게도 전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주면 뭣합니까?

죽은 믿음인데!

 

예수 안 믿으면서도 자기 몸을 얼마든지 불사르는데 내어 줄 수가 있어요.

예수 십자가를 믿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십자가 피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속지 마세요.

 

믿음이나 생명은 항상 몸에 떨림으로 나타나요.

지진이 일어나면 표면에서 떨림이 일어나듯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면 우리 몸에 떨림이 와요.

그 떨림이 바로 예수님의 피로 주어진 구속에 은혜를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감사하지 않는 것은 신앙은 죽은 신앙이에요.

죽은 신앙은 남을 가르치려고만 하지 자기가 죽지 않아요.

주께 받은 은혜와 감사가 없으니 스스로를 제물로 내어놓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제물 될 생각을 하지 않고 남을 제물 되라고 밀어 넣잖아요.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난 죽지 않고 남을 죽이잖아요.

 

내가 봉사하고 내가 헌신하고 내가 헌금하려고 는 하지 않고 전부 남에게 전가 시키잖아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그래요.

성령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세요.

이건 우리더러 방관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왜? 내게 성령이 이런 일들을 하게 하지 않나요.

 

그건 당신의 믿음이 귀신의 믿음이고 죽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성령 운운 하면서 자기는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전혀 말씀과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고 하면 뿔다구가 나서 무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는 내가 이 교회에 나와 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어! 이것들아 하잖아요.

남이 차려 놓은 밥상머리에 앉아서 싱겁니! 짜니! 맵니 타박만 하잖아요.

쳐 먹어 주는 것만 해도 영광인줄 알라고 교만을 떨잖아요.

교회 와 주는 것으로 얼마나 크게 생색을 내고 있습니까?

 

목사의 설교에 젖어 들어서 예수의 피에 목욕을 해야 하는데!

도리어 목사가 설교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평가만 하고 있잖아요.

언제부터 판관(判官)이 되었는가요?

누가 여러분을 심판(審判)자로 세워 주셨는가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필드에서 내가 부서지고 깨어지고 터지는 선수가 되어서 뛰어야 하는데!

이 시대 교인들은 편안한 중계 석에 앉아서 땅콩 까먹으면서 중계방송하고 자빠졌어요.

그레데인 들처럼 말쟁이가 되었어요.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말씀은 내게 수술 하는 칼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말씀이라는 수술대 앞에 세우십시오.

그리고 철저하게 해부당하세요.

 

내가 얼마나 말씀과 동떨어진 인간인지를 아십시오.

내가 탕자임을 알고!

내가 예수님을 대신 죽음에 넘기우고 살아난 살인자 바라바 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대신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지고 입으로 시인되어져야 합니다.

입으로 시인되어진다는 것은 삶으로 토해낸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삶으로 소화하십시오.

말씀이 우리 혼과 영과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서 마치 삼겹살을 칼집을 내서 양념에 재듯이 우리의 모든 것들을 말씀 속에 푹 재어서 죄를 끄집어내어야 합니다.

 

나에겐 의가 없고 오직 죄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면 대신 죽어주심에 대한 감사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발씻김이 이웃에겐 사랑으로 나타나야 해요.

성화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님께 받은 사랑을 토해내란 말입니다.

 

한 말씀이라도 허투로 듣지 마세요.

흘러듣지 마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왜 죄사함의 능력이 되는지 알기 위해서라면 철저한 율법주의자가 되십시오.

율법 아래 갇혀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비로서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신 십자가가 복음에 광채로 다가온답니다.

 

이 처절한 아픔을 모르면 십자가가 주는 죄사함이 지식이 되어서 관념으로 남게 되어요.

관념이 되면 기쁘지 않아요.

배고파 보아야 음식에 고마움을 알듯이 죄를 알아야 죄사함이 기쁘지요.

십자가가 관념이니 입술로는 죄사함 받았다고 하는데 그 죄사함이 시장 통에 옷장사가 골라! 골라 라고 외치는 소리처럼 공허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시댄 율법을 안 가르쳐서 복음이 가려져 버렸어요.

오해하지 말고 새겨들으세요.

율법신앙을 가르치란 말이 아니고 율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율법과 율법 신앙은 달라요.

율법신앙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로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고, 율법은 율법대로 산다고 해서 의로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에요.

 

율법신앙은 의를 만드는 것이지만,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에요.

율법은 예수님의 피로 의로워진다고 몰아가요.

그러니 완전히 다르지요.

 

율법을 가르쳐야해요.

모든 말씀이 다 율법적 기능을 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율법으로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에요.

율법으로 죄를 고발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죄를 고발해서 고발당한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하여야 하기 때문에 율법은 없어선 안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혼과 영과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도록 하여야 예수의 피가 혼과 영과 골수와 관절 속에 스며들게 아닙니까?

그래야 나의 모든 언행심사 속에서 주님이 대신 죽어주심에 대한 감사가 뱉어질게 아닙니까!

내 모든 영역에 예수님의 피가 속죄해 주는 그런 은혜가 넘칠 것이 아닙니까!

 

그래야 우리 모든 삶 속에서 예수의 피가 복음으로만 남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해서 말씀 앞에 서십시오.

이것도 죄고 저것도 죄고 나에게서 나올 것은 온통 죄 밖에 없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래서 혼과 영과 골수와 관절 속에 예수의 피가 뿌려지도록 하십시오.

 

이 피 뿌림이 있는 자가 천국에 들어오도록 허락이 된 자들입니다.

내 열심과 행위가 아닌 예수의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바로 천국에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된 자입니다.

 

허락 받은 이 기쁨을 기쁨으로 해 주는 것이 바로 말씀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십시오.

복을 받은 자는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입니다.

명경(明鏡)같은 말씀 앞에 서서 흠과 티가 다 발견되도록 하십시오.

 

왜 말씀이 우리를 발가벗깁니까?

이는 우리가 위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날마다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수치를 가리고 괜찮은 인간으로 위장을 하고자 해요.

입술로는 최고로 예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를 가장 욕보이고 있어요.

 

무화과 잎이란? 우리 행함이에요.

죄인주제에 꼴 나게 한번 한 것을 의라고 붙잡고자 한단 말입니다.

우린 뭐라도 조금만 하면 그걸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한단 말입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그 때부터 우리 내부에서 하나님과 반항하고 싶은 것과 충돌해요.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은 우리 의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말씀대로 살았다는 행함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넌 왜 네 것을 들고 오는데! 라고 책망을 합니다.

의인인 예수의 피는 어디다 팔아먹고, 죄인인 네 피를 들고 오느냐! 라고 책망을 해 댑니다.

그 꼴랑 말씀대로 산 것을 들고 나온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뭔가를 행한 것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죄를 고발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그래서 제가 아까 열심히 율법대로 살라고 한 것입니다.

율법대로 살면 마귀가 그걸 곱게 포장을 해서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가라고 해요.

내가 말씀대로 살았다는 그 행함이 덧칠을 해서 괜찮은 인간으로 위장을 시킨단 말입니다.

 

이러면 말씀이 에이 이 나쁜 놈이라고 하면서 마치 모세가 들고 있던 십계명의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내 던져서 깨트린 것처럼 우리가 들고 온 율법 지킴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 던져서 박살을 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행함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가면 박살이 납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이 친히 말씀의 칼이 되어서 우리 속을 구석 구석 샅샅이 헤집고 다니시면서 이것도 죄고 저것도 죄라고 지적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이 잠망경처럼 우리 안에 들어와서 이런 생각이 바로 죄이고, 이런 말이 죄이고, 이런 행동이 죄라는 것을 밝혀주고 꾸짖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앞에만 서면 아!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 할꼬! 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너를 율법의 정죄로 부터 자유케 하셨다고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말씀 앞에서 해부당하여서 이런 우리의 죄를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케 하셔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피가 모든 죄에서 너를 깨끗케 하였다” 는 것이 기쁜 소식으로 들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을 받았기 때문에 주야로 말씀 앞에 감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도록 하나님이 조치해 놓으셨어요.

말씀으로 죄가 고발당하여도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세요.

그러니 주야(晝夜)로 말씀 앞에서 죄를 깨닫고 은혜 안으로 헤엄치며 기쁨으로 감사하며 노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 뿌림의 은혜가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 속에 불고기 양념이 베이듯이 잘 베여서 언행심사 모든 부분에서 용서받은 자로서의 감사와 찬미의 제사가 흘러나와야 해요.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야 해요.

난 이런 죄인이지만 이런 죄까지 십자가 피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오고 오는 세대 속에 찬미케 하려고 우리를 구원 했다는 이 사실을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죄인임을 알도록 말씀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 깊은 곳까지 다 들여다보게 하셔서 우리 안엔 의가 없고 오직 죄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런 몹쓸 죄인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어 주신 그 예수님의 피가 우리 안에 뿌려져서 불고기 양념이 베이듯이 베여서 예수그리스도의 향기를 토해내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coro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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