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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 강해)30강. 죽음에서 해방 시키심 (히 2:14-18)

by coroa 2022. 7. 19.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30강. 죽음에서 해방 시키심 (히 2:14-18)

히 2:14-18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정낙원 목사

 

요즈음 의료 건강 보험 선전이 많이 나오지요.

홈 쇼핑마다 다양한 상품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과 다른 것이 눈에 뜁니다.

예전엔 80세 까지로 가입을 하였는데, 이제는 100세 까지로 가입하고 있어요.

이 말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예전에 비해서 길어졌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먹고 살기가 어렵고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서 일찍 죽었는데,

지금은 의학의 발달과 살기 좋아져서 많이 수명이 늘어났다는 말입니다.

건강에 대하여서 신경을 쓴다는 것은 그 만큼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해서 여러 가지로 살기 좋아졌다는 말입니다.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살고 싶다는 것은 죽음에 좇기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만약에 각종 병에 시달리는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고 한다면 어찌 될까요?

늙고 병든 사람으로 차고 넘칠 것이겠지요.

 

노인네들에게 나는 냄새가 고약한데!

이런 늙은이들로 가득 찬다고 한다면 온 집안이 썩는 냄새로 진동할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치매 걸려서 냄새 풀풀 나는 노인네들이 몇 대에 걸쳐서 죽지 않고 살아서 죽은 송장처럼 수발들기를 강요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남의 일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지 라고 치부 해 버릴 수 있지만 그것이 내 일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미칠 것입니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 모습으로 죽지도 않고 오래 살고 있다고 한다면 끔찍하지 않겠어요.

이걸 어찌 복이라고 하겠어요.

저주이지!

 

제가 잘 아는 장로님 한분이 계신데!

그 장로님의 아버지가 치매에 걸렸어요.

집안에 들어가면 똥 냄새가 진동을 한답니다.

그래서 집에 손님을 못 들인다고 해요.

똥을 싸고 벽에다 칠하고 먹기도 한다고 해요.

어떨 땐 발가벗고 다니고, 어떨 땐 며느리도 두들겨 패고 그런답니다.

 

몇 년째 그러고 계시니 미치겠대요.

갖다 버릴 수도 없고 환장하겠다고 해요.

신앙인으로서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하루라도 빨리 죽었으면 한다고 합니다.

솔직히 어떨 땐 죽이고 싶답니다.

하나님께 빨리 데려가 달라고 기도한다고 해요.

 

이로 보건데 죄인에게 있어서 일찍 죽는 것도 복인 것입니다.

70-80년이나 아니면 100년을 살고 죽게 하였으니 망정이지 200살까지 살게 했으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어찌 이런 말을 하는 장로님을 나무라겠어요.

장로님이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자식들에게 이런 모습으로 보이면 어쩔까 염려스럽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잘 죽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보고 목사님도 잘 죽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과거엔 누가 사고로 비명횡사하면 참 안되었다 싶었는데 그게 복이란 것을 알겠대요.

사고로 죽는 것도 복이라고 합니다.

참 의미 심장한 말이지요.

 

이 지경 되면 사람이 빨리 죽는 것도 복인 것입니다.

물론 늙고 병듦이 없이 오래 살면 좋겠지요.

그러나 죄인에게 어디 그런 것이 있나요.

 

인간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모두가 죄가 몰고 온 것입니다.

 

죄가 치매도 몰고 왔고,

죄가 죽음도 몰고 왔어요.

죄가 건강한 사람도 치매를 걸리게 만들어 버렸어요.

 

사도바울은 죄를 일컬어 부패케 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고후 11:3절.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부패한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늙는 게 뭡니까?

부패하고 변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여자 분들은 주름이 생기고, 피부에 탄력이 떨어지면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잖아요.

 

변한다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어떻게 변할지 모르잖아요.

마귀할멈으로 변할지 천사로 변할지 모르잖아요.

천사로 변하기는 불가능하고 마귀로 변할게 뻔하지요.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세요.

그 얼굴이 부럽습니까?

싫지요.

 

그런데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그렇게 변하게 되어 있어요.

왜요?

죄가 변하게 만드니까요.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에게는 이런 일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로 살아요.

난 치매 안 걸리겠지!

몹쓸 병은 모두가 남이 걸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도 그 모습을 자기 모습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그만큼 인간들은 나쁜 일은 자기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좋은 일은 자기에게 닥칠 것이라는 기대로 살아요.

그러니 난 오래 살아야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했으니 오래 오래 죽지 말고 살아야지 합니다.

 

죽기 싫어하는 인간!

이게 죄인입니다.

고통을 당하면서도 오래도록 살고 싶어하는 것이 죄인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죽음은 공포이고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죽음을 벗어나고자 신도 찾고 늙지 않는 약인 불로초를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죽음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을까요?

없겠지요.

영생하는 사람에게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은 없겠지요.

왜냐하면! 죽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오래 살고 싶다거나 죽기 싫다거나 하는 것이 없어요.

 

예수 안에서는 죽음이 없어요.

십자가에서 이미 죽임 당한 사람은 오래살고 싶다거나 죽기 싫다거나 하지 않아요.

이미 그 세계를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죽음을 알기 때문에 반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오래 살고 싶어하는 욕망은 죄인들 세계에만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 온 것은 죄 때문입니다.

아무리 특효약을 개발한다고 하여도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백약이 무효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죄의 삯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 아래 가두어져 있는 인간에겐 죽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죄는 인간이 없앨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었다 다시 태어나면 죽음과 상관없어 진다고 말합니다.

연예인들이 죽으면 하나 같이 다시 태어 날 땐 죽음 없고 고생 없는 세상에서 태어나라고 하잖아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사상입니다.

불교에서는 지금 보다 더 나은 것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지금 보시를 많이 하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 행한 보시가 공덕이 되어서 다시 환생 할 땐 더 좋은 것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불교 교리대로 다시 태어난다고 합시다.

그럼 다시 태어난 인간은 죽음에 좇기지 않습니까?

니고데모 말대로 다시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다고 하면 죽음에 쫓기지 않는가요?

그렇진 않지요.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의 몸을 빌려서 태어나야 하잖아요.

부모의 몸을 빌려서 태어난다 함은 여전히 죄 아래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죄의 몸으로 태어난다 함은 죽음을 안고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다시 환생한다고 하여도 또 죽어야 할 몸은 여전한 것입니다.

죽어야 할 몸으로 아무리 좋은 것으로 태어난다 한들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죽음과 상관없는 몸으로 다시 태어 날 순 없을까요?

있어요.

죽음을 모르는 몸으로 태어나면 되지요.

죽지 아니할 몸으로 태어나면 되어요.

아주 간단합니다.

 

아니 조금 전에 그런 몸은 없다고 했잖아요?

맞아요.

육으로는 그런 몸이 없어요.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은 죽지 아니할 몸으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해요.

 

성경은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사망은 육신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둘째 사망은 지옥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일평생 죽음에 쫓기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해방 시켜주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사망으로부터 해방 시킨다는 것은 둘째 사망을 말합니다.

육신이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입니다.

그러나 죽고 나면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죽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산다는 것은 죄와 상관이 없는 몸으로 다신 산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부활을 합니다.

 

선을 행한 자는 의인의 부활로 나아오고,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옵니다.

선을 행하였다 함은 예수 안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의인의 부활로 나아와서 천국에 갑니다.

 

선을 행한 것이 예수 안에 있는 것이라고 했으면,

악을 행하였다는 것은 예수 밖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은 악을 행한 자가 되어서 심판의 부활로 나아와서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둘째 사망에서 건지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둘째 사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시는가요?

이는 죄 아래서 난 몸을 죽이시고 죄와 상관없는 하늘의 몸으로 부활을 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태어난 자에게는 둘째 사망이 없는 것입니다.

이걸 하늘의 몸이라고 합니다.

 

죄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 죽음은 옵션으로 따라 다닙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죽음이 범접 할 수가 없는 영생을 가진 몸으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첫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만약 부활을 해도 죄를 이길 수 없는 몸으로 부활하면 죽음에 쫓기게 됩니다.

부활을 하여도 예수님의 생명으로 부활을 하여야 죽음에 좇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 몸으로 부활을 해 보아야 지금의 몸이나 다를 바 없어요.

지옥이라는 둘째 사망이 입을 벌리고 따라 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 생명과를 먹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죽음을 모르는 인간이 되었겠지요.

 

만약에 생명과를 먼저 먹고 난 후에 선악과를 먹었으면 어찌 되었을까요?

죽을까요?

죽지 않을까요?

안 죽겠지요.

 

이렇게 비유할께요.

 

전 옻을 탑니다.

옻닭을 먹으면 옻이 올라요.

과거에 모르고 옻닭을 먹었다가 혼이 났어요.

제 몸이 옻을 이기지 못했어요.

그 땐 내가 옻을 타는지 안 타는지 몰랐어요.

 

한 번 혼나고 나서 옻닭을 먹기 전에 반드시 난 옻을 탑니다! 라고 말해 줍니다.

그러면 옻 안 타는 것을 먼저 마시게 해요.

그럼 옻닭을 먹고 나도 괜찮아요.

옻닭 집에서 주는 옻이 안타는 것을 먼저 마시고 옻닭을 먹으면 옻과 상관이 없어요.

 

이처럼 죄를 이기는 영생을 가진 사람은 죽음의 세계에 떨어져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아요.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어요.

인간의 몸을 입고 있다는 것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영생을 가진 분이므로 죽음이 가둘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부활은 당연한 것입니다.

죽음이 예수님이 몸을 덥석 물었어요.

그런데 삼키고 보니 소화 할 수가 없어요.

죽음은 죄인만 소화 시킬 수가 있는데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에요.

그래서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토해 낸 것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가 소화시키지 못하고 토해 낸 것과 같아요.

요나는 물고기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또한 사자가 다니엘을 먹을 수 없었던 것과 같아요.

풀무불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태울 수가 없었던 것과 같아요.

 

참 재미있지요.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런 거예요.

죽음도 토해내는 이상한 사람들이 바로 성도에요.

 

예수님이 나사로나 나오너라! 하면 죽음이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성도는 죽음을 넘어서서 사는 사람들이에요.

죽이면 다시 살아나서 통통거리고 돌아다녀요.

 

풀무불 바깥에서 보면 불 속에 있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죽었어요.

죽으라고 불 속에 넣었잖아요.

불 바깥에서 보면 분명히 죽은 자에요.

그런데 불 속에서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어요.

이 쪽에서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예수 안에 있는 성도가 이처럼 죽여도 죽일 수가 없는 그런 인간들이란 말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불 속에 집어넣던 사람은 죽었는데 정작 불 속에 들어간 사람은 살았어요.

이렇게 되면 겉 보기에는 동일한 사람이지만 다른 종자인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불에 집어넣은 사람은 죽음이 지배하는 사람이고,

불 속에 들어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불 속에 집어넣고자 하던 사람은 불 입구에서 타 죽었잖아요.

그러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당연히 불에 타 죽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불 속에서 이상한 분 하나와 합세하여 네 사람이 걸어 다녀요.

불 바깥에서 보면 귀신과 같아요.

 

분명히 세 명을 집어넣었는데 불 속에 다른 한 분이 기다리고 있어요.

불 바깥에 있는 자들이 불 속에 기다리고 있는 분을 신(神)의 아들이라고 했어요.

맞아요.

죽음 너머는 신의 영역인 것입니다.

 

죽음 너머는 신(神)의 세계예요.

영생의 세계란 말입니다.

죽음이 없는 세계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신의 생명 안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안 탄 것입니다.

 

죽음이 생명을 삼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마치 옻닭을 먹기 전에 옻 안타는 것을 먹고 옻닭을 먹은 것과 같아요.

죽음이 가까이 하지 못하는 영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이 태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걸 율법과 은혜로 비유해 볼까요.

 

율법은 죽이는 것이지요.

율법은 마치 선악과와 같아요.

그러나 은혜는 살리는 것이지요.

생명과와 같아요.

 

율법은 인간의 의이고, 은혜는 예수님의 의에요.

인간의 의는 죽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의는 죽음도 이겨요.

예수님의 의를 가지면 죽음이 가두지를 못해요.

 

죽음을 무엇이 몰고 왔습니까?

죄이지요.

죄는 누가 참소합니까?

마귀가 율법을 가지고 참소하지요.

 

예수님은 죄와 상관이 없는 분이지요.

죄와 상관이 없다는 말은 율법이 참소치 못하는 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반(反) 율법적으로 행한다고 하여서 율법이 참소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 밖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에요.

 

이건 마치 하나님은 인간들의 법에 판단 받지 않는 것과 같아요.

인간들이 짐승들에게 판단 받지 않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고 영생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율법으로 판단 받지 않고 죄의 삯인 죽음도 가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율법이 금하는 행동을 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율법을 어긴 죄인이에요.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반 율법적인 행동을 죄라고 하지 않아요.

 

구약에 스가랴에서에 보면 여호수아가 나옵니다.

 

슥 3:3-4절.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한번은 마귀가 하나님 앞에서 여호수아를 참소합니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어요.

여호수아의 죄를 더러운 옷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율법으로 여호수아가 살아온 것을 조목 조목 더러운 옷과 같다고 참소를 합니다.

저 놈은 율법을 어기고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곁에 있는 천사에게,

더러운 옷을 벗겨내고 저기 흰 옷을 여호수아에게 입혀 주라고 합니다.

그리곤 마귀에게 이제 됐나!

참소 할게 아직도 남아 있느냐!

아니요!

그럼 가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입혀준 흰 옷이 뭘까요?

마귀의 참소를 한방에 막아 버린 그 흰 옷의 정체가 신약에선 뭘까요?

바로 예수님의 피(의, 예복)이지요.

 

신약에 마귀가 성도를 율법을 가지고 참소를 합니다.

하나님! 저기 정낙원이 있지요.

저 놈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도 않고, 온갖 못된 짓을 다하고 살았습니다.

율법에 보면 저 놈의 죄는 사형에 해당 됩니다.

그러니 법대로 죽이세요.

죽여서 공의를 세우십시오.

 

그러자 하나님 곁에 서 계시던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말합니다.

하나님! 내가 저 정낙원이 때문에 죽었거든요.

저 아둔한 것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제가 그 대신 값을 치른 것입니다.

여기 내 손에 못 자국과 옆구리에 창 자국을 보세요.

여기 머리에 가시관으로 찔린 상처를 보세요.

이 모든 상처가 저 아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제가 대신 죽어준 것입니다.

저 놈이 입고 있는 피 묻은 옷을 보세요,

그 옷에 묻은 피가 바로 내 피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묻습니다.

야! 니 몸에 발리진 피가 누구 피야!

누가 니 몸에 피를 발라줬어!

저기 계신 예수님이 그랬는데요!

하나님이 묻거들랑 예수님이 나 대신 죽었다고 말씀드리라고 하던데요!

그래!

 

하나님이 마귀에게 말합니다.

야! 저기 정낙원이 때문에 예수가 대신 죽었어!

정낙원이가 입고 있는 피 묻은 옷이 바로 예수의 옷이잖아!

그럼 됐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율법에 대하여 죽으심입니다.

율법이 성도로 하여금 참소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것입니다.

마귀가 율법을 가지고 참소하거들랑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내어 보이세요.

 

지금 제 이야기가 스가랴서의 여호수아 이야기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입니까?

여기에 어디 너 어떻게 살았냐! 라고 묻는 게 있습니까?

없잖아요.

오로지 묻는 것이란 예수의 피가 있나! 없나! 만 묻잖아요.

놀랍지요.

무슨 동화 속 이야기 같지요.

그래요.

세상 사람들 입장에선 예수 믿는다는 것은 동화 속 이야기처럼 황당해요.

 

자 다시 말합니다.

사람이 죽고 다시 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살아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와 상관없이 골 백번 다시 살아나도 죽음을 이기지 못해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 2:14-16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혈육으로 오신 이유는 혈육에 속하여서 마귀로부터 죽음에 매여 사는 자들을 놓아 주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혈육이란 육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뭐라고요?

죽음에 갇혀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하려고 오셨다고 하지요.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육신에 속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래 살고 싶지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살아도 단서가 있어요?

행복하게 오래 살아야 해요.

행복이 전제 조건입니다.

 

사람들은 불행하면 자살을 합니다.

죽음이 아무리 두려운 것이라 하여도 불행하게 사느니 죽어서 그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불행도 사라진다고 믿기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생이 전부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생은 전반전에 불과해요.

죽고 난 후 내생이 있어요.

후반전이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려서 내생을 보지 못하게 하였어요.

그래서 마귀에게 미혹당한 자들은 이생이 전부라고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생에서의 아픔을 죽음으로 벗어나고자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증거는 죽고 나면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

심판이란 갈라지는 것입니다.

영생이냐! 영벌이냐! 로 갈라져요.

죽고 나면 천국이냐! 지옥이냐! 기다리고 있어요.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인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고달파서 죽는다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셈을 하여야 하는 것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끝이라고 생각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심판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자살하지 않아요.

 

암튼 모든 사람은 죽기를 싫어합니다.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 시대 최고의 관심사가 건강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 것인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바이오(생명) 산업이 번창하는 이유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과학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가난할 때는 먹는 것이 우선이다 보니 건강에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너도 나도 건강입니다.

과거엔 새해 소원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입니다.

건강에 신경 쓴다는 것은 먹고 살만 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불행하면 빨리 죽고 싶고 행복하면 오래살고 싶어 합니다.

인간이 신을 찾는 것도 결국은 행복하게 오래 살고 싶어서입니다.

신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도 죽음이 문제는 해결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일생토록 사망에 매여 종노릇하고 있는 모습이 인간의 참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형벌을 주셨습니다.

형벌로 주어졌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허락하신 분이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우리 의지와 상관이 없습니다.

죽음은 법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인간들 선에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우리 원함과 상관이 없이 왔어요.

난 죽고 싶지 않은데 죽어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죽어야 하는 것은 죽은 조상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이에요.

조상 잘못 만나서 그래요.

 

그래서 성경은 조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두 조상이 있다고 합니다.

죽음의 조상과 영생하는 조상이 있다고 해요.

죽음의 조상은 첫 아담이라고 하고,

영생하는 조상은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걸 다른 말로 산 영(靈)과, 살려주는 영(靈)이라고 했어요.

 

고전 15:45절.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靈)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靈)이 되었나니”

 

산 영은 아담이라고 하고,

살려 주는 영은 예수님이라고 하지요.

 

산 영이란? 죽은 목숨이란 말이에요.

살려주는 영이란? 죽은 목숨을 살려 내는 분이란 말입니다.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해골 골짜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에 있는 해골은 이스라엘을 상징해요.

육적으로는 이스라엘이지만 영적으로는 성도들이에요.

 

육적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를 보여주기 위한 예표적인 인물들이에요.

이를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뭔가 보여 주려고 시청각교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에요.

그런데 모두가 해골처럼 죽었어요.

그런데 그 해골 골짜기에 생기(生氣)가 붑니다.

대언하는 영(靈)이 생기에게 저 죽은 해골들에게 불어라 라고 하니 생기가 쓰~윽 스쳐 지나가니 해골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생기가 바로 살려 주는 영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이세요.

그러니 누구든지 예수님이 터치하고 지나가면 살아나요.

 

자 보세요.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왔다고 했잖아요.

그럼 해골 골짜기의 해골도 자기의 원함과 상관없이 살아났지요.

자기들은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어느 날 생기가 마술을 부린 것입니다.

생기가 마술을 부리자 죽었던 해골들이 우르르 살아났어요.

 

조상으로 죽고 사는 운명이 결정 된다고 하였지요.

우두머리가 누구냐에 따라서 수하들의 운명이 결정이 되어요.

여기서 중요한 원리가 하나 생깁니다.

 

죽음이 타인에 의해서 왔다고 한다면,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도 타인에 의해서 와야 되는 것이지요.

 

구약 이스라엘을 예표적인 것이라 했지요.

그럼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어떻게 죽음에 문제를 해결하는지 살펴봅시다.

구약 이스라엘은 신약의 성도를 구원하는 예표적 사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애굽의 바로 왕에게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빠져 나오게 되었는지 봅시다.

하나님께서 온 애굽에 죽음의 재앙을 일으키십니다.

이스라엘도 온 세상에 속하여 있으니 제외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애굽에서 빼낸 준다고 했어요.

즉 죽음에서 살려 낸다고 했습니다.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한 약속을 기억해서 이스라엘을 살려내기로 합니다.

 

이제 마지막 재앙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오늘 밤에 온 애굽에 장자를 죽이는 심판을 단행하겠다고 알려 줍니다.

온 애굽에 장자가 죽는 재앙이 닥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은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합니다.

애굽 백성과 하나님 백성을 철저하게 구별하신다고 합니다.

 

앞서서 모세가 바로에게 찾아가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을 찾으라고 날 보냈다고 하니 바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여호와가 뭔데!

도대체 여호와가 어떤 놈인데 감히 나에게 자기 백성을 놓으라 말라 하느냐 라고 대노하지요.

 

바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가 하나님은 인정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입니다.

이는 불신자들이 천국과 지옥을 인정하지 않아도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과 같아요.

세상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도 있고, 내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없다고 생각해요.

 

이는 인간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자 하는 죄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에요.

마치 바로처럼 하나님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가 인정하건 말건 하나님 뜻대로 일을 하십니다.

 

바로가 열 가지 재앙을 당하면서도 강퍅한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모세에게 최후통첩을 합니다.

오늘 밤 온 애굽에 장자를 죽이겠다고,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한 사람도 죽지 아니할 것이라고 통고해 줍니다.

 

그러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린 양을 잡아서 문에 피를 발라 놓으라고 합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피에 달렸습니다.

누구든지 피가 있으면 넘어가고 피가 없으면 죽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살려내는 방식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노력이나 방법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됩니다.

 

믿음은 상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과학으로 입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 하시는 일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지 못하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린 양을 잡아서 피를 바르라고 하면 피를 바르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믿음이 동반 되지 않으면 안 되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들 생각으로 왜 이렇게 해야 됩니까?

이건 좀 비 상식적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제 생각엔 이런 것이 좋겠는데요? 라고 토를 달아요.

 

피를 바를래! 말래!

바르면 살고 안 바르면 죽어요.

하라는 대로 하면 살고 상식에 맞네 안 맞네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고 안하면 죽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간단해요.

예수 믿으면 구원 받고 안 믿으면 저주에요.

예수 안에는 무조건 용서고, 예수 밖은 무조건 형벌이에요.

이게 믿어지면 간단한데 안 믿어지면 복잡해져요.

안 믿어지면 믿게 할 방법이 없어요.

 

이스라엘이 어떻게 죽음에서 살아났습니까?

피 때문이지요.

피!

 

피를 바르는 것은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 아이디어에요.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죽음과 자기백성들의 죽음을 맞바꾼 것입니다.

어린양이 죽는 대신 자기 백성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건 예표입니다.

장차 성도를 죽음에서 이런 식으로 살려 낸다는 싸인 입니다.

하나님 백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싸인을 흘러 들으면 안 되어요.

싸인은 자기편만 알도록 하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준 싸인은 어린 양이 대신 죽어서 자기 백성들을 살려 낸다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죽음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대신 죽음으로 이루어지겠지요.

이건 이미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 때 보여 주었잖아요.

 

그럼 자기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농담으로 보지 않겠지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 속에서도 농담으로 여기고 어린 양의 피를 안 바른 집은 다 죽었어요.

반대로 애굽 사람일지라도 진담으로 듣고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다 살아났어요.

 

이는 하나님께서 애굽인이다! 이스라엘인이다! 따지지 않고 어린 양의 피가 발라졌느냐! 안 발라졌느냐! 만 따지겠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집만 이스라엘로 간주하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어린 양의 피가 없으면 애굽인과 같아요.

 

유월절 이후론 새로운 민족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가 있는 사람과, 어린 양의 피가 없는 사람으로 구별을 합니다.

어린 양의 피 안에 있는 사람은 무조건 살고, 어린 양의 피 밖에 있는 사람은 무조건 죽습니다.

피 안이냐! 피 밖이냐! 두 세계 뿐입니다.

 

세례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세상에 알리지요.

이는 예수님이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란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피를 바른 사람은 다 살려 줍니다.

예수님의 피를 발랐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 있다 함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어떻게 죽음에서 해방시키느냐 하면 예수님과 한 운명으로 묶어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한 운명이 된 성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같이 죽었어요.

그리고 부활 할 때 같이 부활했어요.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려고 성령이 오셨어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믿어져요.

믿어지니 그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보여요.

십자가 너머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어요.

십자가 너머에서 바라보니 더 이상 세상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십자가 너머에 있는 사람을 형제로 대해요.

십자가 바깥에 있는 사람은 형제가 아니에요.

비록 육적으로는 한 가족일지라도 신앙적으로는 한 가족이 아니에요.

예수 안 믿는 가족은 표상적 가족일 뿐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 안 믿는 자가 이혼하자고 하면 이혼해 주라고 한 것입니다.

가족도 아닌데 같이 살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먼저 이혼을 요구하진 말라고 했어요.

 

이혼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 안에 있느냐 에요.

본인이 예수 안에 있으면 상대방이 갈라서자고 하지 않으면 이혼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사세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라고 이런 남편이나 아내를 붙여주었다고 생각하세요.

세상 사는데 심심하니 하나님이 붙여 주었다고 생각하고 사시면 되요.

그러니 때가 가까웠으니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살라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새로운 가족 개념을 말씀해 주셨지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내 부모고 형제고 친척이라고!

아버지의 뜻은 예수를 믿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좌우에 강도가 달렸지요.

한 강도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갔고, 한 강도는 예수를 조롱하고 지옥에 갔어요.

이건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두 민족이 갈라진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과 예수 밖으로 갈라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의 피로 죽음으로부터 살아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고, 마귀의 백성은 안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예수의 피로서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두려워하면서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사망에서 건져 내기 위함이라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의 피로서 죽음에서 살아 난 성도는 죽음 너머에서 살겠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무덤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중요한 사건이니 성경을 한 번 보고 갑시다.

 

마 27:50-53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이 죽으시자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이 일어나 예수님이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갔다고 하지요.

예수님의 죽음과 성도의 부활이 맞바꾸어지지요.

 

보세요.

예수님이 죽으니, 죽었던 성도들이 살아났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과 성도의 살아남이 맞바꾸어진 것이지요.

이건 마치 어린 양이 죽고 이스라엘 장자가 살아난 것과 같아요.

 

우리가 살고 있는 바탕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살고 있는 그 현장에서는 반드시 나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살고 있다는 신앙고백들이 묻어 나와야 하겠지요.

이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난 구원 받았다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여야 해요.

나를 살게 하신 예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서 죽음이 넘어 갔다는 것을 자랑하여야 해요.

날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날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자랑하는 거란 말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를 자랑하면 이건 반칙이에요.

그런 구원은 없어요.

날 자랑하라고 구원하지 않았어요.

예수님 자랑하라고 구원했지!

 

그럼 예수 안에 있는 사람과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살펴봅시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건으로 살펴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갔는데도 살았지요.

 

그렇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들어간 불속이 생명의 세계가 되겠지요.

그럼 불 밖은 자연히 죽음의 세계가 되겠지요.

왜냐하면 불 속에 집어넣고자 한 자는 불 밖에서 죽임을 당했고 불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살아고 있잖아요.

그러니 불 바깥은 죽음의 세계가 되고, 불 속은 생명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꺼꾸러 생각해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불 속은 죽음의 세계이고, 불 바깥은 생명의 세계라고 생각하잖아요.

이건 불 바깥에서 바라볼 땐 그래요.

그러나 불 안에서 바라보면 바깥이 죽은 세상이고, 불 속에 생명의 세상이에요.

이게 비밀이에요.

 

불 속에는 신의 아들이 있어요.

신의 아들이 있는 곳이 생명의 세계에요.

신의 아들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불 속에 있어요.

죽음 너머에 있어요.

우리가 볼 때 죽음 속에 있다니까요.

 

풀무불을 십자가라고 생각해 보세요.

십자가는 분명히 우리가 볼 때는 저주이고 죽음이에요.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다고 하자 막았어요.

왜냐하면! 베드로는 인간의 눈으로 십자가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눈에는 예수님이 죽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이라는 죽음의 세계에서 영생의 세계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사과 씨가 죽어서 화려한 나무로 부활하는 것과 같아요.

십자가 너머가 영생의 세계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말려요.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마귀라고 한 것입니다.

마귀는 죽지 말라고 해요.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 쫓겨 다니는 이 목숨을 버리라고 합니다.

너희들 그 목숨 가지고 살면 맨 날 마귀 밥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을 갖고 있으면 마귀는 항상 쫓아다니면서 위협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마귀에게 좇기는 그 목숨을 거두려고 오신 것입니다.

어떻게 거둔다고요?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나는 방법으로 거둔다고 했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말려도 예수님은 살고자 하지 않고 죽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도 죽지 않으면 맨 날 죽음에 쫓겨 다녀요.

그래서 성령은 날마다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단행하세요.

아니! 넌 죽은 자라고 가르쳐 줘요.

죽은 놈이 왜 세상에 관심을 두느냐 라고 책망을 해요.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속에서 불 바깥에 있는 사람들 보고 뭐라고 하겠어요.

어이구! 이 불쌍한 놈들이라고 하지 않았겠어요.

 

반대로 불 바깥에 있는 놈들은 불 속에 들어간 세 친구들 보고 불쌍하다고 하겠지요.

누가 누구를 불쌍하게 여겨야 합니까?

죽었다고 생각하는 불 속에 들어간 세 친구가 살았다고 하는 불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하다고 하지요.

 

이게 십자가 안에서 바라보는 것과 십자가 밖에서 바라보는 것의 차이에요.

십자가 안에 들어와 있는 성도는 십자가 밖에 있는 자들이 불쌍해요.

하지만 십자가 밖에 있는 사람은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여요.

 

지금 제 입장에서 말할게요.

전 지금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 바깥을 바라보고 살거든요.

십자가 안에 들어와 보니 십자가 밖에 있는 것들은 전부 죽은 것들이고 배설물이에요.

 

라오디게아 교회들처럼 부자라고 시건방 떨지만 제 눈엔 가련하고 벌거벗은 소경들이에요.

자기 수치가 발가벗김 당해서 속살이 다 훤히 드러났는데도 그걸 자랑하고 있어요.

목사가 되어서 예수님의 피가 뭔지도 모르면서 교회가 큰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보면,

속으로 어이구! 이 등신아!

뱀 아가리에 머리를 디밀고 살면서 그걸 자랑하고 있나!

지옥불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부자처럼 연락하고 있구나! 라는 탄식이 나와요.

 

십자가 안에서 보면 부자다! 가난하다!

많이 배웠다! 못 배웠다!

세상 적으로 성공했다! 못했다!

교회가! 크다 작다! 라는 것은 전혀 무가치한 것들이에요.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이러한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보면 세상이 자랑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 전부 쓰잘데기 없는 것으로 보여요.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데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말이에요.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데 전혀 지장을 주거나 불편을 주지 않아요.

있으면 조금은 편리하지만 없다고 해서 징징거리고 울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도리어 목사가 되어서 영적인 일엔 가난하면서 육적인 것으로 자랑하면 불쌍해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좋아하고 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신자라고 한다면 복음에 부요하고 복음을 자랑하여야지 세상 것으로 자랑하면 어리석은 자에요.

 

제자들도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이 비밀을 몰랐어요.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죽음에 벌벌 떨고 문도 잠가놓고 살았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죽음 속으로 뛰어들었어요.

 

유대인들이 너희들 예수 전하면 죽인다고 협박하자 그래 날 죽여라! 죽여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 안이 생명의 세계이고, 예수님 밖이 죽음의 세계란 것을 알았거든요.

그러니 우릴 빨리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깐죽거린 것입니다.

 

이래도 안 죽일래!

베드로가 그러잖아요.,

감옥에서 내 보내면서 다시는 예수 이야기 하지 말라고 내 보내잖아요.

 

그럴 때 베드로가 하는 말 보세요.

내가 왜 너희들 말을 들어야 하는데!

나는 이 말을 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고 큰소리치지요.

너희들이 아무리 협박하고 공갈을 쳐도 난 계속 전할거다.

너희들 날 지금 죽이지 않으면 후회한다고 깐족거리는 것입니다.

 

이러면 미칩니다.

그러니 유대인들 입장에서 아니 저 놈들이 환장을 했나!

술 취했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을까봐서 벌벌 떨던 놈들이 뭘 잘못 쳐 먹었나!

그러지 않고서는 죽여라! 죽여라 할 수가 없거든요.

그들의 눈에는 제자들이 모습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낮 술 쳐 먹고 해롱거린다고 비아냥거린 것입니다.

낮 술 쳐 먹으면 부모도 몰라본다고 하잖아요.

이 시대 교인들이 낮 술을 쳐 먹어야 하는데 낮 술은 쳐 먹지 않고 밤 술을 쳐 먹어서 그래요.

낮 술은 빛이신 예수님이 주는 술이고, 밤 술은 어둠인 마귀가 주는 술이에요.

 

우수겟 소리지만 뼈가 있는 말이니 새겨들으세요.

낮 술은? 성령이고 십자가 복음이에요.

밤 술이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에요.

 

교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전부 마귀가 주는 술을 퍼 마시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들이 밤 술을 퍼 마시게 하고 있어요.

기독교 TV를 보세요.

전부가 밤 술을 교인들에게 먹이잖아요.

그러니 그런 설교를 들은 교인들은 세상이 두렵고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들으세요.

한 마디로 성령을 안 받아서 그래요.

제자들처럼 오순절 성령을 받았으면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내가 빨리 죽는 것이 너희들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고 하늘나라에 가야 성령이 오신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약속한 그 성령이 올 때까지 아무 소리하지 말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어요.

 

성령이 오면 너희들은 십자가 안으로 들어와서 세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보면 세상은 작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가 보면 아! 세상 별거 아니네! 라는 게 보여요.

 

삼층 천을 보고 온 바울의 눈에 세상이 어떻게 보일끼ㅏ요?

커 보일까요.

작아 보일까요.

당연히 작아 보이지요.

그러니까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동일해요.

바울처럼 삼층천을 본 성도들은 세상을 작게 보아요.

예수님의 부활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누가 죽인다고 하면 그래 빨리 죽여라 하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제자들처럼 복음 때문에 당하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요.

 

제가 은혜를 받고 제일 먼저 느낀 것이 죽음이 두렵지가 않다는 거였어요.

세상의 안목을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 있을 땐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 할까 늘 이미지 관리를 했는데!

예수 안에 들어오고 보니 타인의 눈을 의식할게 없어졌어요.

 

예수님이 그러시지요.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죽이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라고 하지요.

아버지 앞에 담대한 것은 아들의 피를 앞세우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피를 믿는지 안 믿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마귀로 하여금 죽음으로 시험케 합니다.

죽음을 넘어선 사람인지 아니면 죽음 안에 있는 사람인지 죽음으로 구분해 냅니다.

 

죽기를 무서워한다면 아직 죽음 안에 가두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십자가 밖에서 죽음을 대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어서 세상을 보세요.

그럼 세상이 작아 보여요.

 

예수님의 피를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로부터 깨끗케 해 주신다는 것이 진정으로 믿어지십니까?

예수님의 피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 시켜 주신 것이 믿어지십니까?

 

믿어지신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자세로 사시기 바랍니다.

비록 만물의 찌끼 같고 세상의 구경거리로 만들어도 낙망치 말고 사십시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말씀을 여러분이 힘들다고 하는 그 모든 것에 적용해 보세요.

 

“가난하게 하실지라도”

“교회가 망한다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이단 소리를 듣는다 할지라도”

“십자가 피를 전하다가 교인들이 다 떠나간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도말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킬 말씀이 없다는 것을 전하다가 교단에서 제명당한다 할지라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과거의 인물로만 보지 마세요.

우리가 바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입니다.

우리가 바로 세상이라는 풀무불 속에서 신의 아들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이 시대 풀무불입니다.

 

십자가가 풀무불입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가면 예수님이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멸망을 받을 자들에겐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죽음처럼 미련하게 보이지만, 구원을 얻는 자들에겐 영생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부디 이 십자가 너머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와 사망에 종노릇하던 자들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방시켜 주심을 감사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처럼 세상이라는 풀무불 속에서도 예수님과 동행함으로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자세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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