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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38강.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들 (롬 6:19-23)

by coroa 2022. 10. 15.

38강.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들 (롬 6:19-23) 롬 6:19-23=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例)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38강.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들 (롬 6:19-23)

롬 6:19-23=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例)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마치 어린아이들에게 말하듯이 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내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내가 부득불 인간의 상식으로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앞서서 말한 내용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앞서서 말한 내용이 뭡니까?

우리 몸을 불의에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에 병기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그들의 이해력이 부족하여서 인간의 상식으로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면 지금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지금도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사람들이 불의에 병기와 의에 병기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습니다.

불의에 병기와 의에 병기로 드린다는 말을 인간의 윤리와 도덕적인 행함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이 설교가 되어지는 것을 보면 불의와 의를 인간의 착함과 악함으로 이해하여서 여러분 착하게 살아서 여러분의 몸을 의에 병기로 드리라고 합니다.

이 시대 이러한 설교를 들은 교인들은 의와 불의를 인간의 행함 차원으로 이해하여서 착함을 의라고 하고 악함을 불의라고 생각하기에 이른 겁니다.

 

이건 인간의 선한 삶을 폄훼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착함을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는 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정답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생각하는 불의와 하나님이 생각하는 불의가 다르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죄와 하나님이 말하는 죄가 다르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함에서 나온 것으로 더러움과 깨끗함으로 구분을 하여서 깨끗함을 의라고 하고 더러움을 불의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와 불의를 우리의 행함으로 판단하지 않고 누구 안에 있느냐로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을 의에 세계라 하고 예수 밖을 불의의 세계라고 합니다.

즉 예수 안이냐! 바깥이냐! 로 의와 불의로 구분 한다고 했습니다.

 

법 아래 있느냐!

은혜 아래 있느냐!

죄의 종이냐!

의에 종이냐! 로 판단합니다.

 

법 아래 있으면 죄의 종이고!

은혜 아래 있으면 의에 종입니다.

법 아래 있는 죄의 종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불의이고!

은혜 아래 있는 의에 종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의입니다.

 

성도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이건 영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됨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권세 아래 있는냐 를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 아래 있으면 우리의 행실이 비록 깨끗지 못하더라도 의인입니다.

반면에 법 아래 있으면 우리의 됨됨이가 아무리 착하고 깨끗하고 선 하더라도 그건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예수 바깥에서 나온 선이고 착함이고 깨끗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을 보십니다.

우리의 머리를 보십니다.

우리의 머리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성도의 주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직접적으로 보시지 않고 예수님을 거쳐서 보십니다.

예수라는 안경을 쓰고서 보세요.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선 우리가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직접대하지 않고 예수님하고 대하세요.

이걸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하고 예수로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로 옷을 입고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성도를 법으로 대하지 않고 은혜로 대하십니다.

은혜가 우리를 감싸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행실과 상관없이 의에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조건으로 살지 않고 예수님의 조건으로 사는 것을 의에 병기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리 몸에서 법이 나오면 그것은 불의에 병기가 된다고 하였고,

우리 안에서 은혜가 나오면 의에 병기라고 했습니다.

 

이걸 쉬운 말로 법이라는 동네에서 은혜라는 동네로 이사를 왔다고 비유적으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희는 은혜의 동네에 있으므로 법으로 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법으로 살면 불의에 병기로 사는 것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법에게 순종하지 말고 은혜에 순종하라고 합니다.

즉 우리 몸에서 법이 나오게 하지 말고 은혜가 나오게 하라는 말입니다.

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라고 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 본문을 잠시 살펴봅시다.

 

14-16=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하지요.

그런즉 어찌 하리요?

이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데 어떻게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순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를 짓는다는 말은 법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법에게 순종하지 말고 은혜에 순종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의 주인은 은혜이지 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많은 목사님들이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고 있어요.

인간의 행함으로 이해를 해요.

그러니 로마서 6장을 설교 할 때 성화론으로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알고 이미 예견했어요.

그 당시에도 이 부분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너희 육신이 연약하여 사람의 예(例)대로 말을 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너희의 이해력이 부족하여서 내가 부득불 인간의 상식으로 보충 설명을 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불의에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에 병기로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사는 것은 불의에 병기로 드리는 것이고!

은혜로 사는 것은 의에 병기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그릇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먹을 것을 알려 줍니다.

선악과는 먹지 말고, 생명과는 먹으라고 합니다.

 

선악과 속에는 법이 있고, 생명과 속에는 은혜가 있어요.

선악과 속에는 사망이 있고, 생명과 속에는 영생이 있어요.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은혜의 나라에서 영생하시기를 원하셨어요.

 

아담은 빈 그릇과 같은 겁니다.

무얼 담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집니다.

선악과를 담으면 법에 사람이 되어서 죽음 아래로 미끄러지고!

생명과를 담으면 은혜의 사람이 되어서 생명으로 나아가게 되어요.

 

그런데 아담은 뱀의 미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법에 나라에서 정죄를 당하여 사망에 가두어지고 만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자는 모두가 아담의 운명을 안고 태어납니다.

우린 아담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법 아래 가두어져서 살다가 정죄를 받아 결국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서 법 아래 가두어져 죽어가는 자들을 은혜 아래로 건져 주어서 산 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법에 사람을 은혜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은혜를 주셨어요.

 

우리 안에는 두 사람이 살고 있어요.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있습니다.

옛 사람은 법으로 살고, 새 사람은 은혜로 살아요.

 

비록 우리 몸은 옛 몸 그대로이지만 은혜라는 다른 법이 하나 들어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에는 너희가 법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은혜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은혜가 우리 몸을 주장하게 하고 법에게 우리 몸을 내어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비록 몸은 법 아래서 난 몸이지만 사는 것은 은혜로 살라는 거에요.

 

우리 몸은 TV 화면과 같아요.

화면은 전파를 받아서 그림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마귀는 법을 쏘아대고 성령은 은혜를 쏘아대요.

마귀의 참소에 넘어가면 우리 몸에서 법이 나오고 마귀의 참소를 이기면 우리 몸은 은혜를 그려냅니다.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몸은 법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은혜 아래 있어도 몸은 법으로 살고자 합니다.

그러니 법이 우리 몸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법이 주장하면 법이라는 전파가 우리 몸에 계속하여 부어져서 우리를 정죄해요.

나 자신도 정죄하고 남도 정죄해요. 

이 정죄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몸에 행실로 인하여 롤러코스터를 타게 되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선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나쁘게 살면 악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 구원의 확신이 미친여 자 널뛰듯이 왔다 갔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는다고 하고 돼지가 씻었다가 도로 눕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법이 우리 몸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꼬라지를 보지 말고 나는 은혜 아래 있는 자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룩을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고 주어진 거룩 안에 거하라는 말입니다.

 

의에 종으로 살면 거룩한 자가 되는 거에요.

이제는 죄에게서 해방이 되었으니 죄의 종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옮겨졌으니 율법에 참소 당하며 살지 말라는 겁니다.

율법이 아무리 우리 몸에 행실을 가지고 참소를 하더라도 요동하지 말라는 거에요.

 

율법은 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만 살아 있어요.

은혜 아래 있는 성도들에겐 율법은 죽은 것이에요.

율법이 죽었다는 말이 아니고 율법이 성도를 정죄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너희들 왜? 그따위로 살어! 라고 말하지 못해요.

 

이건 막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몸으로 인하여 참소 당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는 계속하여서 은혜가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피로 우리를 감싸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자에요.

그러니 땅에 죄인들의 법에 매일 필요가 없어요.

땅에서는 율법이 법이지만 하늘나라는 은혜가 법이에요.

그러니 우리는 은혜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발 이걸 잊지 마세요.

우린 은혜 아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속하여서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은혜가 부어지면 우리 몸에서는 은혜라는 열매가 맺힙니다.

이걸 요한복음 15장에서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과실을 맺나니” 라고 하였어요.

나무가 과실을 맺게 하세요. 

이걸 다른 말로 “금지 할 수 없는 법” 이라고 합니다.



금지 할 수 없는 법이란?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반드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에요.

이건 마치 살아있는 사람은 가만있지 않고 곰지락 꼼지락 하면서 움직이는 것과 같아요.

생명은 가만있지 못해요.

순간 순간 움직여요.

 

신앙생활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활동하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일을 하세요.

그럼 우리 몸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표현을 하게 되어 있어요.

TV 화면처럼 예수님이 하신 일을 영상으로 그려낸단 말입니다.

 

이걸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몸으로 은혜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성령의 열매라고 해요.

금지 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하구요.

 

그러니 예수님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는 반드시 이러한 은혜의 모습들이 겉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아주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언행심사(言行心思)는 그 사람의 신앙에 내면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아요.

그 안에 법에 지배당하고 사는 사람은 법을 토해내고!

그 안에 은혜로 지배당하고 사는 사람은 은혜를 토해냅니다.

 

우리 몸은 법 아래서 태어난 몸이므로 우리 안에는 두 법이 있어요.

생래적으로 있는 선악의 법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주어진 은혜의 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선악의 법이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데 성령이 침입해 오신 거에요.

마치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이 침입해 들어간 것과 같아요.

 

그러니 우리는 우리 안에 두 법이 늘 충돌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옛 사람은 가나안 원주민들처럼 장대한 거인으로 자리를 잡고서 우리 새 사람을 괴롭혀요.

옛 사람은 선악의 법 아래서 낳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으로 율법에 다스림을 받는 것이 친숙해요.

그러나 새 사람은 은혜로 낳기 때문에 성령의 소욕으로 은혜의 다스림을 받고 서툴러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령의 법이 일을 하는 은혜의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마귀는 율법으로 우리 안에 있는 은혜를 가리는 일을 합니다.

여기에 미혹을 당하면 우리 몸은 불의 병기로 사용이 되어져요.

스스로 정죄하게 되어요.

자꾸만 자기 행위로 인하여 판단 받게 되어요.

남에게도 그렇지만 자신에게도 그러해요.

 

우리가 자기 자신이나 어떤 사람의 행동을 가지고 폄론하는 것은 곧 내 안에서 법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이는 곧 내가 지금 율법적 사고로 불의에 병기로 사용이 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우리 자신도 율법에 판단을 받게 되어요.

 

예수님이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되면 늘 시험에 들고 넘어져요.

왜냐하면! 우리 몸은 환경에 변화를 받고 육신의 컨디션에 따라서 춤을 추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시절을 따라서 변해요.

 

자연히 몸에서 일어나는 경험도 달라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 옛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믿음으로 내어 놓으라고 해요.

그러나 우리 안에 새 사람은 언약을 믿고 내어 놓아요.

신앙은 자기 경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믿는 것이에요.

 

어떤 분은 거듭난 신앙을 체험으로 이해 할 수가 있느냐고 물어요.

물론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알아요.

자기 안에서 주께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이것을 거듭남의 체험이라고 하면 체험일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성도는 체험을 붙잡지 않고 언약을 붙잡아요.

거듭난 신앙의 특징이 언약을 믿는다는 겁니다.

언약이 믿어진다는 이것 이상 확실하고 좋은 체험이 없어요.

 

인간의 체험은 가변성이 있기 때문에 믿을 것이 못 되어요.

인간의 이성은 자기 몸에 경험된 것을 믿음으로 내어 놓아요.

그러나 믿음이란? 우리가 경험된 것을 신앙으로 내어 놓지 않아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앙으로 내어 놓아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을 심어 놓으셨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안에 심겨지면 우리가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개의치 않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어 가세요.

 

여기에 내 체험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내가 그 약속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기반으로 일을 하시지 않아요.

또한 우리가 안 믿는다고 하여도 그것으로 일을 하시지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다 안 믿는다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속에 심어 놓으신 약속으로 일을 하세요.

 

이걸 믿음에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서 잘 보여 주셨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들의 조건을 보고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조건과 상관없이 이삭을 낳게 하십니다.

그들이 동의하건 하지 않건 상관치 않고 말이에요.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일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나는 믿었다 안 믿었다 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것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닌 것이 아니에요.

 

이는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 되심도 동일해요.

우리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이세요.

우리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인정을 해야 주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인정과 상관없이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이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동의와 상관없이 하나님이세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요.

이렇게 하여야 “하나님 답다!” 라는 것이 있어요.

이 “답다” 라는 것에 합당하면 하나님이라고 인정을 하고 합당치 않으면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자꾸만 자기 기준에 맞는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게 경험이거든요.

자기 생각에 맞는 경험을 하면 하나님을 인정한다! 라고 합니다.

자기 생각에 미흡하면 아닌 것으로 간주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적으로 통하여서 경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거듭남도 경험으로 이해하고자 해요.

뭔가 눈물이 나고 콧물이 나서 가슴이 화끈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로 믿어지는 것으로는 미흡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믿어지는 것만큼 큰 확신은 없는데도 말이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믿어지는 것에다 뭔가 화끈한 기적을 가지고자 해요.

흔히들 방언이라도 하고, 환상이라도 보고, 하다 못해 예수님이 꿈에서라도 나타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라고 해 주어야 안심을 해요.

 

이 모두가 법 아래서 태어나서 그래요.

법은 고정화 되어 있어요.

법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경험된 것이라야 인정을 해요.

이게 죄가 주는 인식론이에요.

그래서 법 아래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을 자꾸만 기적으로 통해서 경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기적을 맛보면 하나님을 믿을 것 같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요.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음이 와야만 가능해요.

믿음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 어떤 기적을 보고 경험을 하여도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어요.

 

구약 이스라엘에 광야 40년을 기적 속에서 살았어요.

그러나 그들은 틈만 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배반했어요.

이는 인간들에겐 하나님이 눈앞에 나타나고 보여 주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받아야지만 믿어져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믿어지는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믿게 하십니다.

이 믿음을 받은 성도는 경험하지 않아도 그냥 믿어져요.

이상하게 믿어진다니까요.

 

이 믿음을 받은 성도는 경험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아요.

그냥 하나님의 약속으로 믿어요.

말씀을 통해서 믿어요.

 

이러한 믿음을 받은 성도는 자기 꼬라지를 보지 않아요.

자기 꼬라지를 가지고 신앙을 가늠하지 않아요.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살아요.

이게 의에 병기로 사는 성도들입니다.

 

마귀는 우리 몸에 나타난 것을 근거로 신앙을 희비하게 하지만!

성령은 우리 몸에 새겨진 언약을 근거로 신앙을 희비하게 하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겨주신 언약은 새 언약이에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용서 받는다는 언약이에요.

우리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신다는 대속에 언약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셔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꼬라지를 보지 않고 예수님의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의에 병기로 사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그럼 의에 병기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을 새 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19절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잘 보세요.

우리가 전에는 “불법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의에 종”이라고 합니다.



“전에” 라는 과거와,

“이제” 라는 현재를 말하고 있지요.

우리가 예전에는 이런 형편에 처하여 있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되었다고 하지요.

 

우리의 전에 형편이 어떠합니까?

불법의 종으로 살면서 더러운(불의) 것을 토하여 냈다고 합니다.

불법에서는 의가 나올 수가 없어요.

거긴 의가 없는 동네에요.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법 아래 가두어졌지요.

법이 하나님 앞에선 불법이에요.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는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의가 되지 않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아담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아담 안에서 태어났어요.

그렇다면 우리 몸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나올 수가 없겠지요.

왜냐하면! 우리 몸 자체가 법 아래서 태어난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법이 곧 죄라고 했지요.

법에 왜? 주어졌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자 보세요.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죄 때문에 법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왜? 주어졌느냐 하면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에요.

 

죄가 없으면 법이 주어질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곧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이에요.

나쁜 짓을 하고 안하고와 상관없이 죄인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법을 앞세우고 나오는 것 자체가 더러움이고 불법이고 불의이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악이고 더러움이고 불법이고 불의이고 죄에요.

그래서 10절에서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는 하나님 앞에선 우리의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것이 죄라는 말이에요.

우리의 행함에 의미를 두는 것이 불의에 병기로 사는 거에요.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행함에 의미를 두고 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라고 하는가 하면 우리 안에 있는 두 법 중에서 옛 법이 우리 몸에 의미를 가지라고 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우리 몸에서 나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해요.

 

이건 우리 안에 선악의 체계가 법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체계는 우리 몸을 근거로 활동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가지고 사는 날 동안은 항상 두 법으로 전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방불한 모습으로 살았던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몸은 율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만큼 우리 몸은 마귀가 율법으로 참소하며 공격하는 타깃이에요.

법을 가지고 들이댄단 말이에요.

 

여기에 넘어가면 우리 몸에서 법이 주장을 하게 되고 그러면 죄가 왕 노릇하여서 우리를 사망으로 끌고 가요.

사망으로 끌고 간다는 말은 우리를 지옥으로 데리고 간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된단 말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자기에게서 성신을 거두어가지 말아 달라고 했던 겁니다.

 

시편 51편을 보고 갑시다.

 

시 51:10-13=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시편 51편은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고 난 후에 토설한 기도에요.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기 몸에서 행한 것으로 선과 악으로 판단을 했어요.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인 것이 죄라고 생각했어요.

만약에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치 않고 우리야를 죽이지 않았다고 하면 죄를 안 지었다고 생각을 했을 겁니다.

 

다윗의 이러한 죄관이 바로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이 죄관이에요.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은 자기 몸으로 행한 것으로 선악을 판단해요.

간음하고 살인하는 것처럼 나쁜 짓을 하면 죄라고 하고 이러한 것을 안 하면 죄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이러한 죄관을 바꿔주는 일을 하십니다.

여기에 밧세바와 간음하는 사건과 우리야를 죽이는 살인 사건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지 않고 우리야를 죽이지 않았을 때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괜찮은 인간인줄 알았어요.

그래서 통회하지도 않고 상한 마음도 없었어요.

 

그런데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이고 나자 자기 안에 법이 발동을 해서 에이! 이 나쁜 놈이라고 하는 겁니다.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에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다윗의 실존을 알려 줍니다.

너 자체가 죄라고 합니다.

모친이 죄 중에 너를 잉태하였고 너는 죄악 중에 출생을 하였다고 알려 줍니다.

그런데도 너는 지금까지 너에게서 나오는 행동으로 죄다 아니다 라고 판단을 하였지 않느냐!

그러니 너의 죄관이 틀렸다는 거에요.

하나님 앞에서는 너 자체가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알려 주신 겁니다.

 

다윗은 나단을 통하여서 자기 실존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어요.

자신이 뭔가 의로워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긍휼하심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것을 알았어요.

그럼에도 자기는 지금까지 자기 행위로 죄다 아니다를 판단하고 살았어요.

 

이 모두가 자기 안에 선악의 법이 작동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놈에 법이 자기를 죄인으로 몰아넣어서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자기 안에 성령이 이제는 나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서 구원을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건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이 고백을 하고 있어요.

자기 안에 옛 법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고 자기 행실을 참소를 하니 괴로운 겁니다.

그래서 아!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좀 건져 줄 사람이 없나! 라고 탄식을 합니다.

그러자 성령이 바울의 눈을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돌려줍니다.

 

바울아! 바울아!

넌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알려 줍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너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시켜 의와 생명의 법 아래로 옮겨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야!~ 이제 법에 참소 당하던 것에서부터 해방이다! 라고 하면서 잠시 잃어버렸던 구원의 즐거움을 다시 회복하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니 안심하고 살라고 하잖아요.

 

지금 우리 안에 이 믿음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마귀가 우리 안에서 법으로 우리 행위를 가지고 참소 할 줄을 아시고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법이 아무리 참소를 하더라도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고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서 너희는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결코 정죄당하지 않으니 안심하고 살라고 알려 주세요.

우린 이 믿음으로 우리 꼬라지를 보지 않고 뻔뻔스럽게 살고 있는 겁니다.

이게 의에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고 사는 것입니다.

 

마귀는 율법으로 계속하여서 우리 몸에 행실을 가지고 참소를 합니다.

우리 몸이 죽을 때까지 이 참소를 피할 수가 없어요.

그럼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참소를 막아내야 합니다.

법을 은혜로 이겨야 합니다.

 

마귀의 참소를 막아주는 것이 새 언약이에요.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율법의 참소를 막아주는 새 언약이 믿어지도록 믿음을 주셨어요.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입은 자로서 죄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본문에서 전에는 너희가 불법의 종으로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불법에 종으로 있을 때가 언제인가요?

율법 아래 있을 때이지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는 토하여지는 것마다 불법이었어요.

더러움이었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더러움을 우리의 어떤 행동에 국한하여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 아래 있는 것 자체를 더러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이라는 동네 자체가 더러운 동네에요.

그런데 우리는 예전에 율법이라는 동네에 살면서 다윗처럼 우리의 행함으로 더러운 것과 더럽지 않은 것으로 구분을 했어요.

 

율법이라는 동네에서는 율법이 정해 놓은 의와 불의의 기준을 가지고 더럽지 않다는 것을 의로 여겼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더럽지 않고 의롭다 하는 그것조차도 더러움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이라는 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우리 인간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요.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요.

죄인이지만 그래도 덜 죄인이라는 것이 깔려 있어요.

선악의 구조에서 배운 선악의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의 행동에서 선한 일과 악한 일로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것이 불쑥 불쑥 튀어 나와요.

자기 행실에서 의와 불의를 구분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회개하라고 소리치면 우리들은 행실을 뜯어 고치기에 바빠요.

이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에요.

정답이 아니란 말입니다.

 

회개란? 나를 바라보던 것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에요.

 

내 행위를 붙잡지 않고 예수님의 행위를 붙잡는 것이에요.

새 언약을 믿는 것이에요.

율법적으로 나를 반듯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용서가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에요.

옛 언약 아래 있으면 맨 날 우리 행실 뜯어 고친다고 볼 일을 다 봐요.

그러나 새 언약 안에서는 우리를 볼 겨를이 없이 예수그리스도를 보아요.

예수님이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요.

 

그런데 마귀라는 놈이 우리에게 옛 법을 가지고 자꾸만 들이대요.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참소를 한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다고 난리를 쳐요.

자기 행위로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 안에서 쉼을 얻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주는 참소를 벗어나고자 율법적 선이라고 하는 행함을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두어지면 우리가 착하고 깨끗하게 살았다고 하는 것이 부정당하면 화가 나요.

난 착하게 살았다고 살았는데!

그건 착함이 아니라고 하면 반발심이 생겨요.

 

여기에 반발하여 나타나는 것이 그럼 죄 지어도 되겠네! 라는 반응이에요.

내 삶이 부정당할 것 같으면 구태여 깨끗하고 착하게 살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

우리 행위는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고 하니까!

아무 것도 안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막 살아도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잖아!

율법이 나에게 너 왜? 그래 그럴 수 없잖아!

그래서 막 사는 인간들이 있어요.

 

아니! 우리는 우리 맘대로 살 수가 없는 예수의 종이에요.

예수의 종이 어떻게 내 맘대로 살거야! 라고 합니까?

내 맘대로 산다는 것은 자기가 주인이란 말이잖아요.

자기 몸에 사욕을 쫓고 있잖아요.

 

이런 사람이 바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에요.

스스로는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율법 아래 갇혀 있어요.

그러니 내 맘대로 살거야! 라고 자기 몸을 주장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내 맘대로 살거야! 라는 것이 법 아래 있다는 것을 추호도 몰라요.

그러니까 자기 몸을 주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다닐 필요가 뭐가 있느냐!

헌금할 필요가 없다!

교회에 와도 봉사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고 빈둥거리고 놀아요.

저는 이런 자들을 예수의 십자가를 자기 유익에 이용하는 영지주의자라고 합니다.

 

성도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어요.

율법 아래서는 내 맘대로 살았어요.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내 맘대로 살 거야! 가 허용이 되지 않아요.

 

이 말을 잘 이해 하셔야 해요.

성도는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에요.

복음으로 자기 죄 짓는 것을 정당화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내 맘대로 살아도 돼! 라는 것 속에는 속죄 받음에 대한 감사와 죄에 대함 상한 심령이 없어요.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서 넘어진다는 것을 알면 죄를 지으면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내 맘대로 살거야! 라고 하지 않아요.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나를 위하여 구원한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구원을 하셨어요.

예수님은 우리 맘대로 살라고 구원을 하시지 않았어요.

도리어 우리를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구원 했어요.

 

그러니 우리는 자유가 갈수록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살거야! 를 포기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건 우리가 해 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간섭을 해 가세요.

그래서 성경에 기록이 된 믿음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손에 이끌림을 받아서 예수그리스도의 삶에 동참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들의 원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끌고 갔어요.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해요.

자기 부인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하게 하세요.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전토나 자식이나 아비나 어미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어요.

이는 우리를 위한 예수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예수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다 차압을 당한다는 말이에요.

 

성경에 기록이 된 믿음에 사람들은 모두가 이처럼 자기 인생을 차압당하였어요.

 

이게 주님이 가신 길이고 십자가의 길이에요.

예수님만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게 아니고 우리도 그리로 가게 되어 있어요.

성도는 예수님이 가신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으로 연합이 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옛 사람을 죽이셨어요.

그래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세상에 대하여 살고자 하는 우리 옛 사람의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단행 하세요.

 

세상에서 승승장구하여 영웅호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빼앗기고 우겨쌈을 당하고 버려짐을 당하는 삶으로 미끄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나라는 이 세상에 없고 하늘에 있음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랬잖아요.

야~ 베드로야 젊어서는 니 맘대로 살았지만 늙어서는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를 띠고 가게 될 것이다!

이건 주께서 베드로를 이끄신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베드로는 갈수록 내 맘대로 살거야! 는 예수님에게 차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우리)에게 야! 이제부터 네 맘대로 살지 말고 이젠 날 위해 살어!

내가 그렇게 인도 할거야!

그런단 말이에요.

 

은혜가 우리를 의에 종으로 살게 해요.

의에 종으로 사는 모습이 율법에서 해방된 모습으로서의 삶이며 또한 몸의 사욕을 쫓는데서 돌이키는 것으로 나타나요.

복음을 자기 맘대로 사는 것에 이용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에 사람들을 보세요.

단 한 사람도 자기 맘대로 산 사람이 없어요.

하나님이 살지 못하게 하셨어요.

모두가 하나님이 간섭을 해서 자기 인생이 차압당하는 식으로 살았어요.

 

그렇다고 그들이 거룩하게 살았다는 말이 아니에요.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게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입니다.

모든 성도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사람들 속에 포함되어 있어요.

 

이게 은혜 아래 있는 의에 종들의 모습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고 자꾸만 자기가 원치 않는 길로 미끄러져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살도록 되어 있어요.

즉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성막에 보면 각양의 그릇들이 있어요.

 

성막의 실체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은 예수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모습이에요.

그럼 성막의 그릇들은 모두가 성도의 모형들인 겁니다.

 

그릇은 성막을 위하여 사용이 되어요.

그럼 성도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사용이 되어지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성도를 예수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몸을 위한 지체들이지 지체를 위하여 몸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건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 몸을 비교해서 이해 해 보세요.

우리 몸은 수많은 세포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세포마다 독립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이 세포의 생명은 몸에 연합이 되어 있을 때만 살 수가 있어요.

세포는 몸을 떠나면 즉시로 죽어버려요.

몸을 위하여 사는 것이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되어요.

그러므로 세포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몸을 위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연합이에요.

 

우리가 바로 그런 존재에요.

예수님은 몸이고 우린 그 몸에 지체들이에요.

우리 각 사람이 몸에 세포처럼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산 자들이에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이 되어서 살아가는 산 자들이에요.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지면 그 즉시로 죽어요.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기생하면서 사는 존재들인 겁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더욱 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해요.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존재를 예수 안에서 사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들을 보세요.

전부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그의 부르심 안에서! 라고 하잖아요.

 

지체는 몸을 위하여 존재해요.

몸을 떠난 지체는 죽은 거에요.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소모품으로 사용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서 말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세요.

성령이 임하자 율법 아래 있던 자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었어요.

 

복음을 듣는 무리들 위에 성령이 임합니다.

그러자 율법에 포로 된 자들에게 자유가 임합니다.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은혜라는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그러자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동안 율법 아래서 자기 것이라고 꽉 움켜잡았던 것들을 예수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내어 놓기 시작을 합니다.

날마다 모여서 교제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자 너도 나도 이상한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자기를 위하여 살았는데 성령이 임하고 나니 예수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사는 자로 바뀌게 되었어요.

그래서 자기 것을 교회를 위하여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이건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에요.

성령이 임하니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에요.

 

은혜가 그들 속에서 왕 노릇을 하니까 법 아래서는 꿈꾸지도 못하던 일들을 하게 되었어요.

율법 아래서는 자기 것이라고 여기던 그 알토란 같은 돈을 성령이 임하자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 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하잖아요.

그러면서 매일 모여서 찬송하고 교제하잖아요.

 

성령이 그 안에서 역동적으로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삶 속에서 구체화 된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날마다 모여서 찬송하고 감사하며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교제하는 그림들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으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천국의 모습이에요.

 

이건 율법 아래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에요.

율법 아래서는 움켜잡은 손을 펴지 못해요.

율법은 내 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해요.

그래서 무엇이든지 움켜잡아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자 움켜잡았던 손이 펴지는 것입니다.

나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율법 아래서 움켜잡았던 손을 펴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자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자가 되면 우열이 사라지고 힘에 균형이 무너져요.

 

인간의 조건이 사라져요.

세상 가치가 사라져요.

서로가 서로를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피에 가치로 대해요.

그러니 교회 안에서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천국의 모습이에요.

 

이사야가 말하는 천국을 보세요.

어린 양이 사자와 함께 놀고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상함을 입지 않잖아요.

이건 힘에 균형이 사라진 모습이에요.

서로 하나로 상생(相生)하는 모습이에요.

 

이 세상은 힘에 논리로 다스려져요.

약육강식의 세상이에요.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양은 사자의 밥이에요.

함께 할 수가 없어요.

 

이걸 우리 인간들에게 적용하면 인간들 세상에서는 힘에 논리로 인간의 조건으로서 빈부(貧富)와 귀천(貴賤)으로 나누어요.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함께 하지 않아요.

많이 배운 자와 못 배운자 간에 차별이 생겨요.

자기 안에 법이 작동을 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차별하고 살아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인간의 외모와 조건이 사라졌어요.

인종과 신분의 벽이 허물어 졌어요.

막힌 담이 허물어 져 버렸어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 힘이라는 벽이 허물어 진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어요.

 

그래서 교회로 모일 때는 자기 외모나 조건으로 모이지 않고 모두가 하나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한 몸이니까 누구라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내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유무상통(有無相通)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것을 빼앗김을 당하잖아요.

강제가 아닌 자발적으로 말이에요.

그것도 기쁨으로 내어 놓잖아요.

이게 그 안에 성령이 임하고 천국이 이루어진 자들의 모습이에요.

성도에겐 반드시 이러한 정신으로서의 삶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이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은혜가 임하니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더란 것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 받아 보세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요.

 

어디에 막 살거야!

내 맘대로 살거야! 라는 말을 할 수가 있나요?

없어요.

결단코 그럴 순 없어요.

 

만약에 예수를 믿고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이런 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인간이 만든 사사로운 복음을 들은 자들이지 예수의 복음을 들은 자들이 아니에요.,

자기가 만든 복음을 들으니까 내 맘대로 살거야! 라고 자기 몸뚱이를 챙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복음이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지 가슴 속으로 내려오지 않고 있다는 증거에요.

이걸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고 죽었다고 해요.

어느 시대고 복음을 악용하는 자들이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삼아서 예수님의 피를 욕되게 하는 자들이 있어요.

 

흔히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데!

복음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구원의 증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복음을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복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이에요.

 

복음은 생명이기 때문에 반드시 어떤 활동을 하게 되어 있어요.

복음이 예수님의 생명이잖아요.

그럼 예수님의 생명에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그러잖아요.

예수님이 나무이고 우린 그 가지들이라고 하잖아요.

가지가 열매를 맺는데 자기가 맺는 것이 아니고 뿌리에서 공급해 주는 진액으로 맺는다고 하잖아요.

 

산 나무는 반드시 뿌리가 나 살았다는 증거로 가지에게 진액을 공급을 해서 열매를 맺도록 해요.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거에요.

강요도 아니고 억지가 아니에요.

 

그런데 교회 안에 가짜들이 있어요.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복음으로의 삶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는 자들이에요.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니고 지식으로 예수에 대하여 아는 자들이에요.

예수와 한 몸이 아니고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를 연구하고 분석하고 아는 자들이에요.

복음을 학습적으로 아는 자들이에요.

 

이런 자들의 특징이 입으로는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이에요.

한마디로 말만 하고 아무것도 안하는 자들이에요.

바울의 서신서들을 보세요.

이러한 자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니므로 이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하잖아요.

 

분명히 말합니다.

복음은 생명이에요.

반드시 어떤 현상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이걸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 온전하다고 해요.

 

나타나는 삶은 그 사람의 신앙의 한 모습이에요.

 

예수와 연합이 된 자는 예수로 살고 예수와 연합이 되지 않은 자는 예수와 다르게 살아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복음 정신과 반하는 짓들을 하고 사는 것은 예수와 연합 되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건 그 사람의 사고를 가지고 말하는 거에요.

어떤 정신으로 사느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지식은 교만케 해요.

믿음이 화합을 하지 못하는 지식은 자신을 죽여요.

결국 그 안다고 하는 지식이 부메랑으로 돌아와서 자신을 죽여요.

스스로의 행동으로 자신은 예수와 한 몸이 아니고 떨어진 자라는 것을 드러내요.

 

난 복음과 상관없는 자라는 것으로 드러내요.

스스로의 삶으로 말이에요.

이러한 것은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어리석음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세요.

사랑이 없이도 크고 비밀한 것들을 깨닫고 천사의 말을 할 수가 있다고 하잖아요.

사랑이 없이도 신을 옮길 수 있다고 하잖아요.

자기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줄 수가 있다고 하잖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를 안 믿어도 복음을 지식으로 알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봉사도 할 수 있고 헌신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이는 그 앎이 예수의 생명이 아니고 지식으로서 죽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복음이 믿음으로 화합을 일으키지 못하고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신자라고 보면 안 되어요.

얼마든지 듣고 배워서 복음의 내용을 지식으로 이해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변론을 좋아하는 말쟁이라고 하였어요.

입으로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했어요.

 

이런 자들은 그냥 내비 두어야 해요.

신앙생활은 누가 시켜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시켜서 하면 그건 행위가 되어요.

나중에 그 행위로 힘을 삼아서 꼴값을 떨어요.

 

복음이 증거가 되면 반드시 두 부류의 모습으로 나타나요.

입으로 믿는 자들하고 손과 발과 온 몸으로 믿는 자들로 구분이 되어요.

간사스럽게 믿는 자들과 순진하게 믿는 자들로 구분이 되어요.

 

일하지 않고 입으로 믿는 자들을 뭐라고 하면 안 되어요.

그냥 차별성으로 두어야 해요.

그냥 그렇게 사세요! 라고 가만히 두세요.

괜히 건들면 자기 믿음 없음이 들통이 나니까 물어 버려요.

 

이 시대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 중에서 이런 자들이 엄청 많아요.

이런 자들 때문에 복음이 가려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전 이런 자들에게 차라리 율법주의자가 되라고 합니다.

성화주의자가 되라고 해요.

 

이런 자들은 대 부분이 율법 생활을 해 보지 않았어요.

그냥 수박 겉핥기 식으로 변죽만 울리다가 온 자들입니다.

진짜 율법 아래서 종 노릇을 해 본 사람들은 복음을 받으면 더 하고자 해요.

진짜 복음 아는 사람들은 스스로 율법 아래로 들어가요.

 

율법주의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스스로를 하나님 말씀에 가두고자 해요.

하나님 말씀에 자신을 매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보면 귀를 뚫은 종에 이야기로 나타나고 있어요.

이걸 자원하는 종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21장을 봅시다.

 

출 21:1-6= “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하니라 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 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요 3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 들었으면 그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4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줌으로 그 아내가 자녀간 낳았으면 그 아내와 그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5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어떤 사람이 남의 집에 종살이를 하였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7년이 되면 종에서 풀어 주어야 해요.

그래서 주인이 종에게 이제 종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몸으로서 집에 가라고 합니다.

이젠 종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 종이 그 주인을 떠나기가 싫은 겁니다.

너무도 잘 해 주어서 그냥 그 주인의 종으로 살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주인님 나 안 갈래요!

나는 이대로 주인님의 종으로 살래요!

그러는 겁니다.

 

그럼 주인은 그 종을 성전의 재판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말합니다.

재판장님!

이 사람이 종에서 해방을 시켜 주었는데도 그냥 우리 집에서 종으로 살겠다고 자원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느냐! 라고 하면 재판장이 그 종을 성전 문에 데리고 가서 그 귀를 송곳으로 뚫어버려요.

 

그리곤 재판장은 이 사람은 이제부터 그 주인의 영원한 종이라고 선포를 해요.

이걸 “자원하는 종” 혹은 “귀를 뚫은 종” 이라고 합니다.

귀를 뚫는 것은 주인의 말만 듣겠다는 것이에요.

자기 생각이나 자기 말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요.

그 은혜가 너무도 귀하여서 떠나기 싫은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떠나기 싫어해요.

그리스도를 떠나기 싫어요.

그래서 스스로 그 은혜의 종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봉사하고 충성을 해요.

 

이렇게 은혜의 종으로서의 모습으로 산 사람이 바울이었어요.

바울은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어요.

그러나 율법의 규례를 지켰어요.

율법 신앙을 하였다는 말이 아니고 율법도 복음으로 이해하였단 말입니다.

스스로를 법 아래 가두어서 종으로 살았어요.

법에 종으로 살았단 말이 아니고 은혜 안에서 법을 지키고자 하였단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는 모든 것이 가(可)하나 모든 것이 유익된 것이 아니라고 하였던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성도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한 자이지만 다 유익(자유) 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 맘대로 살 수가 있지만 자기 맘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유를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은혜에 종으로 살려고 모든 것이 가(可)하다고 하는 자유를 포기한단 말입니다.

이게 진정한 복음 안에서 자유자에요.

 

그러니 복음 안에서 자유하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복음에 종이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 하였다고 하니 이제 맘대로 죄짓고 사는 자유자가 아니라 반대로 이젠 죄 안 짓는 자유자로 살고자 해요.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고 지향성을 말하는 겁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진정한 복음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에요.

 

이게 오늘 분문 말씀이에요.

그러니 복음 안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기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자는 복음 안에 거하는 자가 아니고 복음 바깥에서 복음을 이용하는 자들이에요.

성경은 이런 자들을 신자라고 하지 않아요.

 

요한계시록 11장에서 이런 자들을 일컬어 성전 바깥 뜰에 있는 자라고 해요.

이들은 척량 대상이 아니에요.

그냥 짐승 밥으로 내 버려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복음 안다고 하면서 복음에 반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면 너희가 죄의 종일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죄 아래 있을 때는 의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의가 있는 줄도 생각지 않고 그냥 죄가 이끄는 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 때는 죄를 지어도 전혀 부담이 없었어요.

이걸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 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때는 우리가 사망에 속한 일들만 하였어요.

그 때는 육체의 소욕대로만 살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의에 종이에요.

의에 종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반대로 죄에게 자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전에 우리가 죄 아래 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살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죄가 주인이 되어서 우리를 가지고 놀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때는 의를 행하고 싶어도 의를 행할 수가 없었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의를 몰랐어요.

그러니 의에 대하여 소경이었던 겁니다.

이걸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죄에서 해방이 되어서 의에 종이 되었어요.

이젠 의가 주인이에요.

의가 주인이니까 이제는 역설적으로 죄에게 종 노릇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죄에게 종 노릇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죄에 대하여 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젠 죄에 자유 한 자가 되었어요.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이걸 죄에게 자유하다고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의에 종으로서 거룩함에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 진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를 위하여 살게 된단 말입니다.

의가 우리 안에서 주인이 되어서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은사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이미 받았어요.

영생 안에서 살고 있어요.

우리 몸에 영생이 심겨져 있어요.

그러므로 성도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봅시다.

 

고전 15:55-58=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쏘는 것은 죄이고!

죄를 주장하는 것은 율법 아니냐!

 

그러나 우리는 그 죄와 사망의 권능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이 되어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러니 죄의 종으로 살지 말고 의에 종으로 사세요.

법 아래 살지 말고 은혜 아래서 감사하며 사세요.

 

이 세상은 죄라는 탄광촌과 같아요.

 

탄광촌에서 살면 자연히 연탄이 옷에 묻게 되어 있어요.

옷에 연탄이 묻을 까봐서 집안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있지 마시고 옷에 연탄이 묻더라도 마음껏 활보하고 사세요.

 

엄마가 아이 옷에 연탄이 묻었다고 나무라지 않아요.

엄마는 탄광촌에 살면 자연히 옷에 연탄이 묻는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옷에 연탄이 묻는다고 집안에 틀어 박혀 있지 말고 나가서 마음껏 뛰노세요.

옷에 연탄 묻을까봐서 집구석에 쳐 박혀 있으면 엄마가 속 터져요.

 

그러니 마음껏 봉사하고 충성하고 사세요.

누가 여러분이 교회를 위하여 열심 내는 것을 나댄다고 하면 나대세요.

나대는 특심을 교만이라고 하면 교만 하세요.

나 교만 안 할래 하면서 나 대는 것을 멈추고 특심을 버리지 말고 차라리 나대고 특심하면서 교만 하세요.

주님이 알아주면 되잖아요.

 

또 어떤 놈들이 여러분의 열심을 행위라고 하면 그래 그렇게 생각하세요! 라고 씨익~ 웃어 주고 더 열심히 자원하는 종처럼 사세요.

아무 것도 안하려고 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세요.

 

우린 비록 우리 행실이라는 옷에 죄라는 연탄이 묻어도 은혜 아래 있어요.

은혜가 그 어떤 죄라는 연탄도 다 덮어 주세요.

은혜가 비처럼 뿌려져요.

 

스가랴 3장을 보고 마칩시다.

 

슥 3:1-5=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보세요.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고 사단이 참소를 하지요.

그러자 하나님이 사단을 책망하면서 천사에게 명합니다.

야! 여기 여호수아에게 흰 옷을 입혀 주라고 하잖아요.

 

이는 마귀가 여호수아의 죄를 고발을 하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의에 옷을 입혀 주잖아요.

여호수아는 모든 성도의 예표에요.

 

마귀가 우리를 참소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입혀 주세요.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해요.

그렇다고 죄 지으면서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적인 죄를 짓는 것이 죄가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안 믿는 것이 죄에요.

그렇다고 죄 지어도 된다는 말은 더 더욱 아니에요.

 

무슨 말을 못하겠어요.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죄 정함으로부터 자유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에요.

죄의 종이 아니고 의에 종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 법이나 죄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에요.

법이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죄라고 정죄하지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죄를 두려워하지 말고 죄를 이기고 사세요.

 

옷에 연탄이 묻을까봐 걱정하지 말고 살란 말이에요.

그렇다고 일부러 묻히진 마세요.

그럼 엄마한데 혼 나요.

놀다가 묻는 것은 나무라지 않지만 일부러 묻히면 매를 맞아야 해요.

육신을 입고 죄 아래서 살자면 죄를 안 지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죄를 일부러 즐기진 말란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잘 새겨서 들으세요.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에요.

죄와 상관없는 자로 사세요.

비록 살아가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 하여도 정죄치 말고 이런 내가 살고 있음이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때문임을 알고 감사하며 사십시요.

이게 죄아래 살지 않고 은혜 아래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8절을 보세요.

 

히 9: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상관없는 자에게 두 번째 나타나신다고 하잖아요.

죄와 상관이 없다는 말은 죄를 안 짓고 사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죄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자라는 말이에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죄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어요.

죄의 종이 아니고 의에 종이에요.

그러니까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이미 예수님이 두 번째 나타나셨어요.

영적으로 재림을 하셨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신다고 하셨지요.

이는 성령으로 오신다는 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 할 때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지요.

이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상징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육체로 죽으시고 부활을 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구름타고 오신 것과 같은 말인 거에요.

영적으로 그렇단 말입니다.

 

영적으로 성령의 오심으로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진 자들은 이미 영생 안에서 살아요.

천국으로 산단 말입니다.

그러니 현재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는 것은 지금 영적으로 예수님이 자기 안에 성령으로 두 번째 오신 주님 안에 있는 자들을 데리러 오세요.

그러니 자기 안에 예수님이 거하는 성도는 몇 년도에 예수님이 재림을 하신다는 극단적인 종말론자들의 말에 현혹당하지 않은 겁니다.

 

현재 자기 안에 두 번째로 오신 예수님이 없는 자들이 역사적인 예수님의 재림을 호들갑을 떨면서 이야기하는 거에요.

역사적으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지금 여기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현재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없이 장차 역사적으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은 그 안에 두 번째로 오신 예수님이 없다는 반증이에요.

이들은 육적 신자들이에요.

 

육적 신자들은 마치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쥐들이 알고 난리를 치듯이 육적 신자들이 종말의 현상들을 보고 난리를 치는 거에요.

그러니 불안해서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행함으로 사는 거에요.

 

종말을 외치는 자들치고 행함을 강조하지 않는 자들이 없어요.

우리가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고 하잖아요.

이는 모두가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아니 어떻게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건가요?

 

주님을 맞이할 준비는 예수님이 자기 신부들에게 이미 빙폐물들을 보내 주었어요.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의 신부감을 점지하고선 집에서 가장 똑똑한 종을 아들의 신부가 될 여자에게 보내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에게 자기의 종인 엘리에셀을 보낸 것과 같아요.

이 종을 쇼시벤이라고 해요.

아버지가 쇼시벤을 보낼 때 그냥 보내지 않고 신랑이 주는 빙폐물을 주어서 보내요.

 

그럼 신부될 여자는 신랑이 준 빙폐물로 단장을 하고 기다립니다.

빙폐물 속에는 머리단장품에서부터 귀걸이도 있고 목걸이도 있고 옷도 있고 향수도 있고 신부에게 필요한 것이 다 있어요.

신부는 그걸로 치장을 하는 겁니다.

 

아가서를 보면 이러한 것이 나와 있어요.

술람미는 솔로몬이 준 예물로 치장을 하고 있어요.

술람미는 자기 것이라고 하나도 없어요.

다 솔로몬이 준 것이에요.

하지만 예루살렘 여자들은 전부 자기 것들로 치장을 했어요.

술람미는 솔로몬의 의로 단장을 하였고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기 행함이라는 의로 단장을 했어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성도를 사랑하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의로 단장한 자들을 신부로 맞이하세요.

빙폐물은 신약식으로 말하면 의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로 주어지는 의에요.

 

쇼시벤은 신부될 여자에게 신랑에 대하여 상세한 정보를 알려주어요.

신랑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에서부터!

취향은 어떻고!

성격은 어떠하며!

어떤 색깔의 옷을 좋아하는지 등등을 다 알려주어요.

그럼 신부가 될 여자는 쇼시벤이 알려준 정보를 바탕으로 신부 수업을 하게 되어요.

 

그리곤 밤에 등불을 들고 기다립니다.

이 때 들러리들이 함께 등불을 들고 기다려요.

이스라엘은 신랑이 밤에 신부 집으로 가요.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여러 등불이 켜진 들러리들 중에서 자기가 준 빙폐물로 단장을 한 신부만 데리고 오는 겁니다.

 

이것을 신약식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신부가 될 성도들에게 성령을 쇼시벤으로 보내 주셨어요.

성령이 오셔서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의로 단장을 시키세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에 의로 사는 것입니다.

새 언약을 믿음으로서 산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죄와 상관 없는 자로서 의에 종으로 살아가요.

법 아래서 살지 않고 은혜 아래서 살아요.

죄의 종이 아니라 의에 종으로 살아요.

은혜 아래 있고 의에 종인 자들은 더 이상 죄와 상관이 없는 자들이에요.

 

이들에겐 이미 예수님이 두 번째로 와 계세요.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했지요.

이는 영적으로 신랑으로 오셨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성령이 성도 안에 오심으로서 예수님의 두 번째 오심도 영적으로는 함께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예수님을 맞이한 성도는 더 이상 예수님을 먼 훗날에 오시는 분으로 이해하지 않아요.

현재 신랑과 함께 살아요.

이걸 주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오셨잖아요.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첫 번째 오신 주님이고 성령으로 오신 주님은 두 번째 오신 주님이세요.

그러니 자기 안에 예수님이 오신 자는 죄와 상관없이 살아요.

정죄함이 없이 산다는 말입니다.

법으로 살지 않고 은혜로 살아요.

 

그러니까 이미 천국으로 사는 겁니다.

영생하는 자로서 살아요.

그러므로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자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가치를 초월한 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받은 특권입니다.

이 특권을 포기하지 마세요.

흔들리지 말고 누리세요.

 

신앙은 누림입니다.

이 누림으로 평강가운데 사세요.

누림이 없는 신앙은 관념이고 허상이에요.

 

영생을 누리고 죄에서 자유한 자로서 평안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 아래 있던 자들을 은혜 아래로 옮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은혜 아래 옮겨진 자로서 법에 대하여 자유한 자로 살게 하옵소서. 의에 종으로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당당함으로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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