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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 39강. 남편따라 바뀌는 여자의 팔자 (롬 7:1-4)

by coroa 2022. 10. 23.

39강. 남편따라 바뀌는 여자의 팔자 (롬 7:1-4)

롬 7:1-4=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39강. 남편따라 바뀌는 여자의 팔자 (롬 7:1-4)

롬 7:1-4=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 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정낙원 목사

 

오늘은 성도의 구원이 여자가 어떤 남편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옛말에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뒤웅박이란? 박을 쪼개지 않고 꼭지 부분을 자르고 그 속을 파내서 만든 독(단지)을 말합니다.

부잣집에서는 이 뒤웅박 단지에다가 바늘과 실이나 성냥과 같이 손쉽게 쓰는 것들을 담아 놓고 사용을 했어요.

혹은 곡물을 담는 단지로도 사용하였어요.

 

옛날엔 쌀이나 바늘이나 성냥과 같은 것은 귀하였어요.

그래서 부자 집에서는 뒤웅박을 소중히 잘 간수하였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귀한 것들이 없으니까 짐승 밥인 여물을 담아 놓고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동일한 단지이지만 어느 집에서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그 용도가 귀한 것과 천한 것으로 극과 극으로 차이가 났습니다.

부자 집에 사용이 되어지면 귀한 것으로 잘 간수되어지는 귀한 뒤웅박이 되고,

가난한 집에 사용이 되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천한 뒤웅박이 되는 것입니다.

 

여자 팔자도 이와 같다고 하여서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합니다.

여자는 뒤웅박처럼 누구에게 시집을 가느냐에 따라서 신분이 달라져요.

어느 남편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마님 대접을 받기도 하고 천한 것으로 대접을 받기도 합니다.

 

이처럼 여자의 신분은 남편의 위치에 따라서 결정이 되어요.

하늘과 땅처럼 달라져요.

이것은 여자의 운명은 남편에게 종속적 관계로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러한 이치는 모두가 예수님과 성도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표상적인 것들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운명은 여자의 팔자와 같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술람미라는 노예가 있습니다.

그냥 두었으면 이름 없는 들풀처럼 일평생 종노릇하면서 뼈 빠지게 일만 하다가 사라질 그렇고 그런 비천한 여자입니다.

여자라기보다는 그냥 거지같은 노예라 불리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솔로몬이라는 왕에게 은혜를 입게 됩니다.

왕의 은혜를 입자 순식간에 신분이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노예에서 왕비가 되었습니다.

 

남편에 의해서 가장 비천한 신분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으로 격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건 아마도 그 어느 세상에서도 볼 수 없는 반전(反轉) 드라마일 것입니다.

이는 부자가 지옥에 가고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앉은 것과 같아요.

 

성경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성도의 구원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반전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반전일 것입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하나님은 성도를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고 하였어요.

이 얼마나 반전입니까?

 

솔로몬이 예루살렘 여자들 앞에서 술람미를 왕비로 선포한 것은 원수의 목전에 상을 베푼 것과 같아요.

술람미를 핍박하고 조롱하던 예루살렘 여자들은 기겁을 합니다.

이건 예수님이 오셔서 바리새인들 앞에서 세리와 창기들을 천국으로 보낸 것과 같아요.

이러한 이야기는 에스더 이야기에서도 볼 수가 있어요.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이러한 것으로 구성 되어 있어요.

이는 죄로 인하여 저주 받아야 할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을 받아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이야기를 해주고자 함입니다.

성도위 구원은 술람미가 솔로몬을 만나 왕비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인간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팔자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남편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천국 백성이 되기도 하고 지옥 백성이 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고 합니다.

 

머리란? 책임을 지는 분이란 말입니다.

여자의 운명은 머리가 되는 남자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를 책임지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 신랑이 누구이냐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참으로 마음이 설레고 흥분이 되는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옛 말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는 성경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나의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아무리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죄사함이 주어졌다고 하여도 그 죄사함이 나의 것이 아니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가 나의 구주여야 해요.

 

2천 년 전에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죽은 그 예수로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계셨던 그 역사적 예수로만 있으면 안 되어요.

역사를 넘어서 지금 살아서 우리 안에 와 계신 묵시적 예수가 되어야 해요.

 

무슨 말인고 하니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죽은 역사적 예수가 부활하여 그리스도가 되셔서 내 안에 묵시적으로 와 계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과거 예수나 미래 예수여서는 안 되어요.

지금 현재 나와 함께 동거하면서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예수여야 한단 말입니다.

 

이 시대 많은 분들이 역사적 예수는 아는데 묵시적 예수는 몰라요.

과거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는 아는데 현재 성령으로 우리 안에 와 계신 그리스도 되신 예수는 몰라요.

예수는 아는데 그리스도는 몰라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하는데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없는 겁니다.

 

마르다 처럼 장차 먼 훗날에 오는 천국은 아는데 지금 천국이 없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예수에 대하여 박사인데 삶 속에서는 예수그리스도가 없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관념으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는 것도 지식에 머물러 있어요.

그러니 안다는 것이 삶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을 고작하여서 변론하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워요.

예수을 안다는 것이 단순히 지식이라면 교만해지고 말쟁이가 되지만,

예수가 내 안에 그리스도로 살아 있으면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예수가 지식이면 법이 나타나게 되고,

예수가 사랑이면 덕이 나타나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가면 너희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너희의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하였던 겁니다.

 

이 시대 우리의 신앙이 마치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같아요.

특히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더욱 더 그러합니다.

입으로는 복음에 대하여서는 청산유수인데 손발은 움직이지 않는 중풍병자인 것입니다.

이걸 귀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가슴 속에서 따뜻함이 나오지 않고 쌀쌀 맞음이 묻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을 감싸고 위로하고 아픈 상처를 싸매고 살려내는 것보다 도리어 사람들을 시험 들게 하고 상처 주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복음이 지식이라서 반(反) 복음 적인 일들을 서슴치 않고 행하게 되는 겁니다.

 

무늬만 예수이지 그 안을 보면 마귀가 들어 앉아 있어요.

다른 예수에요.

이런 자들을 일컬어 적 그리스도 라고 합니다.

예수를 가리는 짓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적 그리스도가 뭔가요?

그리스도의 반대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그 행사 머리는 그리스도와 반대 짓을 한다는 말입니다.

입술로는 예수 예수하는데 하는 짓을 보면 마귀 짓이에요.

 

그러니까 복음 안에서 섬기지 못하고 복음 아는 것으로 상좌에 앉아서 으뜸 노릇을 하고 잘난 척 하면서 남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선생 노릇을 하는 겁니다.

변론을 일삼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귀 짓을 하고 있어요.

이 모두가 그 속에 묵시적으로 와 계신 예수가 없어서 그래요.

 

지난번 요한복음 강해를 올렸는데 어떤 분이 댓글로 참으로 귀중한 질문을 하였어요.

성경에 보면 거지로 살았던 나사로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가 있는데 어느 것이 현실입니까? 라는 질문이에요.

 

그래서 제가 답을 하기를 둘 다 현실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역사 속에서 묵시적 존재로서 현재를 살고 있어요.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육신으로 살면서 예수 안에서 살아요.

육신은 역사에 속하였지만 예수 안은 묵시에 속하였어요.

몸은 비록 고난을 당하지만 마음은 예수 안에서 천국으로 살아요.

 

그러니 지옥과 천국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겁니다.

성도는 묵시적 존재로서 역사에 살고 있어요.

그러므로 거지 나사로가 되기도 하고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거지로 사는 나사로는 지옥이에요.

반면에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는 천국이에요.

우린 이 세상에서 거지 나사로로 살고 있어요.

 

거지란? 이 세상에 분깃이 없는 자를 말해요.

이는 성도들의 이 세상에서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어요.

성도는 이 세상에 분깃이 없는 나그네요 외국인이에요.

 

하지만 성도는 그 안에 예수님이 계세요.

육신은 세상이라는 현실 속에서 비록 거지로 살고 있지만,

그 마음은 예수 안에서 하늘에 가치인 천국으로 살고 있어요.

성령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낙심치 않은 것은 그 고난이 곧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십자가의 흔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고난 가운데서도 낙심치 않는 것은 성령이 그 위에 머물러 위로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역사적으로는 거지 나사로로 살지만 묵시적으로는 예수라는 아브라함 품에 거하여 안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는 이를 알아요.

바울의 간증을 들어 봅시다.

 

고린도후서 1장을 봅니다.

 

고후 1:3-10=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바울은 먼저 찬송을 합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찬송을 하면 그 다음에는 좋은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소개하기를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고 하니,

모든 자비의 하나님이시고 환란 중에 위로하시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뭔가 어패가 있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가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대하듯이 대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가 하면 환란 중에 위로하시는 것으로 대하신다는 말입니다.

 

위로는 환란 당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환란이 없으면 위로가 필요치 않아요.

하나님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 때문에 환란 당하는 자들의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럼 위로의 하나님이 되려면 자기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할까요?

환란 가운데 있어야 하겠지요.

그 환란 가운데 있는 모습이 바로 거지 나사로의 모습입니다.

나사로는 개가 와서 핥듯이 조롱당하면서 수욕을 당하며 살았어요.

 

나사로의 모습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도 조롱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버림을 당하였어요.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위로를 받았어요.

예수님은 늘 아버지와 함께 있었어요.

그러니 환란 속에서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가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가 당하는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므로 그리스도의 위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위로가 고난을 이기게 하더란 말입니다.

 

자신들은 아시아에서 살 소망까지 끊어져 자살을 하고 싶을 정도로 힘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속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아! 바울아~ 환경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위로하더란 겁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아~!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망 가운데 던져 놓고서는 그 권세로부터 건지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그 분을 의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거지 나사로처럼 몸은 지옥에서 살았지만 그 마음은 천국으로 살았어요.

그러니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살았던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천국과 지옥 두 사이에 끼어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고난 속에서 위로를 받는 자들이에요.

지옥 속에서 천국을 소망하게 되어 있어요.

이상하게도 고난 속에서 위로를 받게 된단 말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천국과 지옥이라는 두 극단의 경험을 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성도를 그렇게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험으로 알아진 하나님이라야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머리로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뚜막에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듯이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내 안에서 소금이 음식에 녹아서 음식과 하나가 되듯이 예수님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나의 주시오 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외부에서 그리스도를 찾지 않게 되어요.

예수를 남에게 묻지 않는단 말입니다.

예수와 하나로 사는 성도는 자기 신앙을 남에게 묻지 않아요.

이는 자기 안에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나의 주가 되어야 합니다.

믿어져야 합니다.

이러할 때 더 이상 예수를 찾아다니지 않고 함께 누림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저에게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가 믿어지느냐고 물어요.

자신은 진짜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고 싶다고 해요.

그래서 저에게 어떻게 하면 예수가 믿어지고 하나님 약속이 믿어지느냐고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제 마음이 무거워요.

물론 그러한 질문을 하시는 분의 마음을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가요.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럴까?

 

그러나 제가 어찌 해 줄 수가 없어요.

제가 그분에게 믿음을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믿어지게 해 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안 믿어지니까 묻는 것입니다. 

저도 참으로 답답합니다.

어찌 말해주어야 합니까?

말을 해 주어서 믿어질 것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일러바쳐요.

하나님! 제 눈을 여시고 마음을 열어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게 해 주셨듯이 저 분에게도 좀 믿어지는 은혜를 주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밖에 없어요.

 

예수를 믿는 데에는 방법이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받으면 저절로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가 저에게 예수를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답을 줄 수가 없어요.

이건 인정머리가 없어서가 아니에요.

 

전 드라마를 보아도 눈물을 펑펑 흘리는 사람이에요.

마음이 여려도 너무~ 여려요..

이렇게 여린 사람이 왜? 주지 않겠어요.

줄 수만 있다면 다 주고 말겠어요.

 

그냥 제 믿음을 확 꺼내 주고 싶어요.

그러나 그런다고 그 분에게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버선 뒤집듯이 뒤집어 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는 제가 알려 준다고 해서 믿어지는 분이 아니잖아요.

저는 방법론을 말하고 있지 않아요.

이렇게 하면 예수가 믿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저처럼 하면 예수가 믿어진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에요.

 

다만 저는 이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제가 만난 예수는 이런 분이다! 라고 증거하는 것뿐이에요.

혹여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아는데 있어서 참고가 될까봐서 말하는 것일 뿐이에요.

 

저는 제가 만난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나는 이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이렇게 간섭해 오셨습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어요.

 

제 설교는 제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깨달은 것을 증거하는 간증이에요.

하나님이 저에게 성경을 이렇게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라고 간증하는 거에요.

그러니 저 보고 설교를 왜? 그런 식으로 하느냐고 따지면 안 되어요.

이는 제가 받은 은혜가 그러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안 되면 안 들으면 되어요.

제가 만난 하나님을 자기 기준으로 끼워 맞추려고 하면 안 되어요.

제가 만난 하나님이 여러분과 동일하면 아~ 한 성령 안에서 만난 형제이구나! 하고 사귐을 가지면 되어요.

 

하나님의 은혜는 각 사람마다 깨닫는 폭이 달라요.

깊이가 달라요.

사람마다 다 같을 수가 없어요.

그리니까 각 사람마다 표현하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독점적으로 행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린 하나님의 은혜를 읽어내고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요.

지극히 미미하게만 보고 깨달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 은혜를 정형화 시켜서 판단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십자가 도를 증거하면 자기하고 달리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면 안 된다구요.

 

누구를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는 가말리엘의 지혜가 필요해요.

하나님께로 난 것이면 우리 힘으로 막을 수가 없어요.

반대로 하나님께로 나지 않았으면 우리가 막지 않아도 하나님이 무너지게 할 것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판단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와 다르다고 훼방질 하면 안 되어요.

그건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예를 들어서 음식점에 가서 자기 입맛에 안 맞으면 안 먹으면 되잖아요.

앞으로 그 식당에 안 가면 되어요.

자기 입맛에 안 맞는다고 주방장을 두들겨 패고 식당에 불을 지르면 안 되잖아요.

 

자기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하는 주방장을 찾아 가세요.

그래서 그 집을 단골로 이용하면 되잖아요.

남들은 맛나게 먹고 있는데 자기 입맛에 안 맞는다고 상을 뒤집어엎고 지랄을 하면 안 되지요.

 

그럼 순사가 잡아가요.

하나님이 넌 뭔데 지랄하느냐고 혼내요.

우리는 누구를 심판할 권세가 없어요.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고 너나 잘하세요.

 

지난번 ‘나는 가수다’ 에서 ‘더원’ 이라는 가수가 ‘아시나요’ 라는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 내용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자신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아버지 당신 때문이라는 겁니다.

 

비록 당신은 여기에 없고 하늘에 있지만 내 가슴 속에 소리는 하늘에 계신 당신을 향하여 소리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소리가 들리시나요!”

“내 가슴 속에서 당신께 외치는 이 소리가 들리시나요” 라고 외칩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려요.

그 노래를 듣는 청중들의 반응이 우는 분과 무덤덤한 분으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어떤 분은 얼굴을 파묻고 흑흑~ 하면서 흐느끼고 우는가 하면 어떤 분은 멀뚱멀뚱하고 있어요.

 

노래를 들으면서 왜? 울까요?

모두가 그 노래가 주는 사연을 안고 있기 때문이입니다.

그 노래가 곧 자기 이야기로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노래는 한 사람이 부르지만 그 감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이(轉移)가 되어 함께 자신의 노래로서 불러지는 것입니다.

 

제 설교도 마찬가지에요.

각자 자기에게 하는 이야기로 들려지는 사람이 있어요.

자기 이야기로 들려지면 은혜가 되어요.

 

어떤 분들은 저에게 전화를 해서 엉~엉 우는 분들이 있어요.

펑펑 울어요.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아서 우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런 분들이 참 많아요.

 

그럼 저는 전화상이지만 제 품을 내어 주어요.

그래 마음껏 우세요!

실컷 울라고 합니다.

저도 과거에 복음을 알고 나서 엄청 울었거든요.

 

밥을 먹다가도 울고!

설교를 하다가도 울고!

차 운전을 하다가도 울고!

심지어 드라마를 보다가도 예수님과 오버랩이 되어서 울어요.

 

많은 분들이 제 설교를 읽으면 눈물이 쏟아진데요.

그래서 설교를 읽으면서 많이 운다고 해요.

왜? 그런가요?

자신의 이야기로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는 가수다” 에서 가수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우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시대 교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어요.

이 시대 수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예수님 이야기를 합니다.

십자가를 말하고 언약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예수가 내 심장을 뛰게 하고 내 가슴을 울리고 있느냐 에요.

예수님의 사연이 내 사연으로 들려지느냐를 묻고 싶어요.

증거 되어지는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 내 감정이 이입이 되어 나를 울게 하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보여지고 감사가 되어지느냐 입니다.

 

예수님이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애통해 하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이 시대가 그러해요.

복음을 전해도 기뻐하지 않아요.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설교를 심사하는 심사위원이 되었어요.

누가 설교를 하면 평가하기에 바빠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 그래 너 한번 설교 해 봐라!

내가 평가 해 줄 테니! 라면서 채점을 하고 있어요.

예수도 채점 대상이에요.

 

이 얼마나 가난합니까?

예수를 말하나 예수로 사는 것이 없으니 말이에요.

왜? 그럴까요?

이는 모두가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자는 어느 남편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맞는 셈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율법과 그리스도를 남편이라고 합니다.

율법이라는 남편이 있고 그리스도라는 남편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 두 남편 중 어느 하나에 속하여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율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율법이라는 남편과 살았어요.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1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 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잘 보세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이을 자들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율법 아래 나게 하셨어요.

여기서 율법을 후견인과 청지기라고 합니다.

 

후견인과 청지기란? 교육하는 선생이란 말입니다.

무슨 교육을 하고 가르치는가 하면 인간은 왜? 죄인인지를 가르쳐요.

왜? 인간은 독자적으로 구원을 이룰 수가 없으며!

인간에게서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오지 않는지를 알려 주어요.

 

율법은 한마디로 인간을 절망케 만들어요.

그리하여 구원자 되신 예수그리스도를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은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했어요.

 

몽학선생이란? 길잡이란 말입니다.

율법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길잡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아래 두어서 그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 때가 되었어요.

그 때가 되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빼내 오십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율법 아래서는 종노릇하면서 살았어요.

우리도 종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서 종에서 아들로 신분을 바꿔치기 해 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하려고 우리에게 “아들에 영”을 보내 주신 겁니다.

 

아들에 영을 받고 보니 우리가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젠 하나님 앞에 종으로 나아가지 않고 아들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젠 아들이니 다시는 율법에 종노릇하지 말라고 합니다.

율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율법에 종노릇하면 아버지가 화를 내요.

아들은 율법에 다스림을 받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부리는 자에요.

이게 엄청 중요해요.

 

율법을 뭐라고 하던가요.

후견인과 청지기라고 하지요.

이건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왕자가 어렸을 때 신하를 스승으로 두고 학문을 배우는 것과 같아요.

 

왕자가 커서 세자가 되면 스승을 넘어서 있어야 해요.

이젠 스승을 다스려야 합니다.

스승은 세자의 신하에요.

 

세자가 되었다고 하여서 스승을 막 대하지 않아요.

귀하게 대해요.

그러나 스승을 다스리지 다스림을 받지 않아요.

이제 주종(主從)의 관계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가 그러합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하나님께서 정한 때까지 율법에 가르침을 받았어요.

 

그러다가 때가 되어서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에서 은혜로 부르셨어요.

이젠 은혜 아래 있어요.

율법 아래서는 종으로 살았지만 이젠 은혜 아래서 율법을 종으로 부려야 할 입장이에요.

율법을 종으로 부린다는 말은 율법을 넘어서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율법에 매여선 안 된단 말입니다.

율법 아래 매일 필요는 없지만 율법을 폐기시키면 안 되어요.

율법을 잘 이용하면 되어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천국에 서기관은 옛 것과 새 것을 골고루 잘 사용하는 자라고 했지요.



마 13:5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다

                  마치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

 



옛 것은 율법이고 새 것은 은혜에요.

율법도 신앙의 유익에 따라서 적절하게 잘 사용하면 되어요.

 

율법을 통하여서 자기 죄를 깨닫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보면 되어요.

율법을 거울삼아서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하면 됩니다.

이게 율법을 다스리는 겁니다.

 

성도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죄의 종이 아니고 의에 종입니다.

이것은 구조적인 말이지 우리 몸의 변화로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두 부류로 보세요.



아담 안의 사람이냐!

예수 안의 사람이냐!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죄의 종이라고 하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의에 종이라고 하세요.

 

아담 안은 죽은 자로 간주하고 예수 안은 산 자로 간주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들의 독자적 생명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독자적 생명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고 어느 생명 안에서 사느냐로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생명이냐! 예수의 생명이냐! 로 판단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 있으면 아무리 고상하고 아름답더라도 죽음이고!

예수 안에 있으면 못 배우고 추해도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산 자만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두 영역으로 보세요.

 

법 아래 있느냐!

아니면 은혜 아래 있느냐!

법 아래 있는 자는 죽은 자라고 하고!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산 자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서 성도의 신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비록 몸뚱이는 아담의 몸뚱이지만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의에 종이라고 합니다.

의에 종은 은혜로 대하신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우리는 의에 종이에요.

이는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비록 죄인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이에요.

 

그래서 성도를 예수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은 자라고 합니다.

얻었다는 것은 내 조건으로 따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로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는 의에 종이라 인정하세요.

그래서 은혜로 대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믿음이 동원이 됩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꼬라지로 우리의 신분을 판단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우리의 신분을 판단하라고 간섭을 하세요.

믿음이 우리의 정체성을 너희는 의에 종이라고 알려 주신단 말입니다.

 

이 사실을 남편과 아내로 비유하여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롬 7:1-4=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 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지금 율법을 남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이라는 신랑 아래서 살았어요.

이 율법이라는 신랑은 인정머리가 없어요.

 

조금만 잘못을 해도 추상같이 닦달을 합니다.

말을 안들으면 우리를 옥에 가두고 죽음으로 내 몰아요.

아주 무자비한 놈이에요.

그러니 율법이라는 남편하고 사는 동안에는 한 숨도 편할 날이 없는 겁니다.

두려움으로 살았어요.

 

우리는 죄 아래서 낳어요.

그렇기 때문에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율법이라는 신랑의 뜻대로 살 수가 없어요.

늘 신랑의 뜻을 어기고 살았어요.

 

율법이라는 신랑이 우리를 죽이겠다고 난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이라는 신랑 아래서 종노릇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살았습니다.

한숨과 절망과 아픔으로 살았어요.

 

눈만 뜨면 이 놈에 신랑을 떠나고 싶은 겁니다.

신랑이 죽었으면 했어요.

그런데 이 놈에 율법이라는 신랑은 죽지도 않아요.

천지가 없어져도 신랑은 사라지지 않아요.

우리 스스로는 율법이라는 신랑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팔자려니 하고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예수라는 양반이 찾아 온 겁니다.

예수가 찾아와서 가만히 보니 율법이 여자를 종처럼 부리고 학대하면서 법대로 살지 않았다고 인정머리 없이 죽음으로 내 모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에게 말합니다.

 

여보시오!

어찌 여인을 그리 학대한단 말입니까!

내가 그 여자가 못하는 것을 대신 해 주겠소!

그러니 그 여자를 내게 파시오!

내가 값을 주고 그 여인을 사겠소! 라고 합니다.



그러자 율법이 좋소!

당신이 내 아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다 해 주시오!

이 여자를 당신이 가지고 가고 당신이 내 요구를 다 들어 주시오! 라고 해서 거래를 마쳤어요.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여인의 목숨 값으로 대신 주고 여인을 율법으로부터 사 온 것입니다.



여자는 신랑이 바뀐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신랑으로부터 자유한 몸이 된 것입니다.

여자는 예수라는 신랑과 재혼을 한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와 함께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이제 여인은 율법이라는 남편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남편이 죽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여인을 율법이라는 남편으로부터 사 왔기 때문에,

이제는 율법의 아내가 아니고 예수님의 아내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핏 값으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사 왔어요.

예수님은 우리의 피 남편이에요.

이제 신랑이 바뀐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신랑과 살 때는 율법을 어기면 간음하는 것이었어요.

여기서 간음이란?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그건 간음하는 것과 같았어요.

 

그래서 남편 살아생전에 남편 말을 어기면 음부(淫婦)라고 하였지만,

이제는 남편과 사별(死別)을 하고 다른 신랑에게 시집을 왔기 때문에 옛날 신랑인 율법의 말을 안 듣는다고 하여서 음부(淫婦)라고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음부(淫婦)란? 남편을 두고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운 여자란 말입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땐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바람피우는 것과 같았어요.

그런데 이젠 율법이라는 신랑과 헤어지고 예수라는 남편에게 시집을 왔어요.

 

율법이라는 신랑은 죽었어요.

율법이 죽었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 되었단 말입니다.

율법이 더 이상 내 신랑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죽지 않아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이 죽지 않아요.

다른 말로 내 몸뚱이가 죽기 전에는 율법이 죽지 않아요.

계속해서 우리 곁에서 신랑 노릇을 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율법에게 너 왜? 내 신랑도 아니면서 내 신랑 노릇하고자 하는데, 라고 하면서 율법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탈북한 분들이 북한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걸 예수를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분명히 알고 계세요.

우리 신랑은 예수에요.

율법이 이제 나를 주장 할 수가 없어요.

율법이 우리에게 너 왜? 내 말 안 들어!

그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젠 내 신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라는 신랑하고 살면서 율법을 어긴다고 해도 간음하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율법과 어울리면 간음이 되어요.

이젠 간음이 바뀌게 되었어요.

율법의 말을 듣는 것이 간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한 말이기 잘 기억하세요.

 

그래서 바울은 이제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예수에 대하여 살았으니 예수에 대하여 열매를 맺고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거에요.

 

우리의 옛날 신랑인 율법은 우리를 법으로 대하였어요.

눈만 뜨면 닦달을 했어요.

우린 율법 아래서 우울증이 걸렸어요.

아무리 해도 끝이 없으니 죽을 지경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라는 신랑은 너무도 자비로워요.

모든 것을 다 용서해 주세요.

우리의 잘못을 책하지 않고 덮어주세요.

모두 자기가 책임을 지세요.

 

마치 살림살이를 잘못하여도 신랑이 모두 감싸주는 것과 같은 겁니다.

늦잠을 자도 덮어주고!

음식을 못해도 감싸주고!

설거지 하다가 그릇을 깨도 괜찮다고 해요.

 

이건 예전에 율법이라는 신랑과 달라도 너무~ 달라요.

예전엔 지옥생활이었는데 이젠 천국생활인 겁니다.

신랑이 우리 형편을 너무도 잘 알아요.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행함을 가지고 닦달을 하지 않는 겁니다.

 

어째서 예수님이 우리 형편을 이렇게 잘 아는가 하면 우리와 같은 몸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걸 체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아요.

그래서 우리의 허물을 가지고 탓하지 않고 감싸 주시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광해 왕이 된 남자’ 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과 당쟁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광해군 시절 이야기입니다.

왕인 광해는 항상 사방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을 경계하여야 하고 언제 암살을 당할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이 먹는 음식에 독이 들어 있지는 않는지!

또는 밤에 자객이 들이 닥쳐 자기 목숨을 끊지는 않을까 늘 두려움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유일하게 믿는 도승지인 ‘허균’에게 방법을 제시합니다.

자신을 대신하여 위험에 노출되어도 관찮을 대역을 찾아서 대리 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에 허균은 기방의 취객들 사이에 걸쭉한 만담으로 인기를 끌던 왕을 쏙 빼 닮은 ‘하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왕궁으로 데리고 가서 가짜 왕을 만듭니다.

 

하선은 도승지 허균의 손에 이끌려 영문도 모른 채 궁에 끌려가서 광해 임금이 자리를 비운 하룻밤을 가슴 조아리면서 왕의 대역을 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왕의 흉내를 완벽하게 내는 거에요.

 

그러던 어느 날 광해 임금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도승지 허균은 광해 임금이 치료를 받는 동안 하선에게 광해군을 대신하여 왕의 대역을 할 것을 명합니다.

 

도승지 허균은 하선을 광해 왕과 똑같이 만들어 버립니다.

말투에서부터 하는 행동까지 똑 같이 만듭니다.

하선은 저잣거리의 한낱 만담꾼에서 하루아침에 조선의 왕이 되어버립니다.

 

졸지에 왕이 된 하선은 도승지 허균의 지시 하에 왕의 정사를 배웁니다.

신하들을 대하는 것에서부터 국정을 다스리는 법까지 배웁니다.

하지만 겉은 같지만 그 속은 다르므로 다른 생각을 하기에 이릅니다.

처음에는 도승지 허균의 말에 순순히 응하였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서 나랏일을 처리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하선은 진짜 임금인 광해와 다르게 신하들을 대합니다.

따뜻함과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다스립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면으로 인정으로 다스립니다.

그러자 그동안 암울한 기운이 돌던 궁 안이 조금씩 생기가 넘치고 술렁이기 시작을 합니다.

 

하선은 점점 왕이 되어 갑니다.

왕은 왕이지만 광해와 전혀 다른 왕이 되어갑니다.

백성들의 삶을 우선으로 챙기는 왕이 되어 갑니다.

 

도승지 허균은 이러한 광해와 다른 하선의 왕 노릇에 당황하면서도 그의 매력에 서서히 빠져 들기 시작을 해요.

그 사이 광해 임금이 해독(解毒)이 되고 병에서 놓임을 받고 자기 자리로 돌아오고자 합니다.

 

도승지 허균은 가짜 왕인 하선이 백성을 아끼는 그런 마음에 감동을 받고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왕 그것이 그대가 꿈꾸는 왕이라고 하면 그 꿈을 내가 이루어 드리겠다고 하면서 진짜 왕인 광해군이 돌아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진짜 왕이 한 번 되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곤 도승지 허균은 은밀히 보름동안 광해가 사경을 헤맬 때 가짜 왕인 하선이 왕으로서 행한 행적들을 기록한 승정원 일기를 진짜 왕에게 가져다주어서 알려 줍니다.

진짜 왕인 광해에게 그 동안 가짜 왕이 한 일을 자기가 한 일인 것처럼 하여서 자신이 없을 때 가짜 왕이 왕 노릇한 사실을 감추게 합니다.

 

도승지 허균은 진짜 왕이 오기 전에 가짜 왕으로서 진짜 왕인 광해군이 정적들의 반대로 하지 못하던 일을 해치워 버립니다.

이에 가짜 왕인 하선은 백성을 위한 정책을 발표하고 백성들이 명나라로 끌려가는 것을 막아 버리고 신하들의 그릇된 나라사랑을 지적하면서 호되게 책망을 합니다.

 

그대들은 사대의 예(禮)를 말하는데!

나에겐 사대의 예(禮)보다 내 백성의 목숨이 백 곱절 천 곱절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백성을 우습게 여기는 신하는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 백성도 지키지 못하는 자가 어찌 왕이 될 수가 있느냐! 라고 하면서 신하들이 명나라 파병을 주장하는 것을 일거에 묵살해 버립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짜 왕이지만 잠시 동안 왕 노릇을 한 하선이 백성의 입장에 서서 정책을 발표한 것은 바로 하선이 백성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왕 노릇을 하는 이것을 체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셨기에 우리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아세요.

그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우리와 같이 체휼하셨다고 합니다.

이는 곧 광해가 된 하선이 백성 입장에서 왕에 권한을 사용하는 것과 같아요.

 

예수라는 남편은 하나님 입장에서 우리를 대하지 않고 죄인의 입장에서 대하세요.

그래서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반대로 율법이라는 남편은 인간의 입장을 고려치 않고 법으로 윽박지르고 공포로 대해요.

마치 폭군처럼 말이에요.

 

율법은 여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치 않고 자기 입장만 내 세우고 여자를 옥 죄었어요.

자유를 박탈하고 종처럼 부렸어요.

여자는 율법이라는 남편 아래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두려워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라는 남편은 전혀 다릅니다.

인애과 긍휼로 대합니다.

마치 하선과 같이 자기 백성은 자기가 지킨다는 마음으로 말이에요.

예수님은 죄인의 입장을 아시고 정죄하지 않는 겁니다.

 

마치 어미가 갓난아이를 대하듯이 말이에요.

어미가 갓난아이가 바지에 똥을 싸고 오줌을 눈 것을 가지고 나무라지 않아요.

아무 말 없이 다 치워주고 씻겨주어요.

이는 갓난아이를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를 내어주고 구원을 해 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좋은 은사를 주어서 보살펴 주십니다.

원수가 되었을 때 살려 주었어요.

이젠 원수가 아니고 화목된 상태에요.

화목하였으니 오죽 잘 알아서 대하시지 않겠느냐 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성도의 신분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 받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은혜 아래 있으면서 법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율법 아래서 하던 근성이 몸에 배어 있어서 우리 몸의 행실을 가지고 자신을 판단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에 종으로 본다고 하여도 우리는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대하시는데도 우린 스스로 법으로 대하고 있어요.

자기가 법을 가지고 자기를 판단하고 있어요.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우린 원래 법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린 비록 은혜 아래 있다고 하여도 법이 익숙해요.

은혜가 낯설어요.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여도 본능적으로 자기 행위를 법으로 판단을 해요.

예수라는 남편하고 살면서도 율법이라는 옛 남편의 말을 듣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왜? 남에 신랑의 말을 듣느냐고 합니다.

 

전에는 우리가 법 아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란 겁니다.

이제 우리는 은혜 아래 있어요.

그런데 왜? 법에 말을 듣느냐고 책망하는 겁니다.

율법이 남편이 아니고 은혜가 남편이라고 비유하여서 알려 주고 있는 거에요.

은혜라는 남편은 예수그리스도에요.

 

바울은 성도의 존재를 여러 가지로 비유하면서 말해주고 있어요.

 

바울은 우리가 알아듣는 것이 둔하니까 이렇게 저렇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겁니다.

법과 은혜를 남편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쉬운 예로 설명을 하고 있는 거에요.

 

로마서는 하나의 주제를 이야기 하고 있어요.

율법에 의(義) 말고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말해주고 있어요.

이걸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겁니다.

 

하나의 이야기이지만 여러 가지로 그 은혜의 풍성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풀어내는 데에는 그만큼 다양함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만유를 가지고 자신을 계시(啓示)하시고 있어요.

 

그럼 우리는 만유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호흡하면서 오감(五感)으로 느껴야 합니다.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읽어낼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느끼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저도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가지 이야기로 비유하면서 풀어가고 있는 겁니다.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는데 하나의 철칙이 있어요.

 

무조건 쉽게 하자에요.

설교의 목적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는데 있어요.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들을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것으로 비유하여서 이렇게 저렇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때론 비속어도 써가고 험한 욕도 해 가면서 말이에요.

 

저도 고상하고 점잖은 말로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써가면서 이야기 하고 싶어요.

그러나 거기엔 은혜가 없어요.

저는 신학이라는 틀에 가두어진 설교를 하지 않고 사람들이 가장 쉽게 알아듣기 좋은 것으로 설교를 하고자 해요.

 

어떻게 하든지 설교 속에서 학문적인 냄새가 나지 않게 하려고 해요.

제 안에 계시는 분이 그걸 허락하지 않아요.

내 안에 계시는 주께서 내 이미지 관리 하려고 하지 말고 선지자처럼 하라고 해요.

설교를 하다가 보면 속에서 불이 붙는 것 같아서 감정을 속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감정을 내 안에서 휘몰아치니까 그냥 쏟아 내는 것입니다.

설교를 요약한 원고를 준비하여도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고 보이지가 않아요.

기껏 준비해 놓고서는 그 순간에 감동을 주는 대로 하게 되어요.

 

속에서 주님이 그러는 것 같아요.

야! 임마!

네가 준비한 설교 원고는 어제 지은 식은 밥이 아니냐!

오늘 온 성도들에게는 오늘 지은 따뜻한 밥을 먹여야 할 것이 아니냐!

내 백성들에게 어제 지어 놓은 식은 밥을 먹일래!

 

그러니 어제 만든 원고 보지 말고 성도들에게는 오늘 지은 따끈따끈한 밥을 주라고 해요.

오늘 성도들에게 주어야 할 은혜가 있으니 원고 보지 말고 하라고 해요.

그래서 기껏 준비해 놓은 원고도 보지 못하고 그냥 소리치게 되는 겁니다.

전 지금까지 설교를 준비한 원고 그대로 해 본 적이 거의 없어요.

항상 설교 할 때마다 말씀이 회돌이를 치니까 그냥 그때 주시는 감동으로 소리치게 되는 겁니다.

 

무슨 팔자가 이런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설교 한번 하고 나면 진액이 쭉 빠져서 축 처져요.

목은 항상 터지고 아프고!

그래서 하나님에게 늘 징징대는 겁니다.

 

저는 조근 조근 원고 보면서 설교하는 목사님들을 보면 제일 부러워요.

아! 나도 저 분들처럼 설교 좀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여러 번 시도해 보았어요.

그런데 제가 은혜가 안 되어요.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팔자대로 하자!

 

설교를 하고 나면 제 아내에게 무진장 욕을 먹어요.

기껏 설교 잘하고선 험한 말을 해서 다 버려 놓았다고 해요.

비속어를 쓰고 때론 거친 말을 하기도 하니까 귀한 설교를 버리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거에요

아내 입장에선 안쓰러우니까 그럴 만도 하지요.

 

그래서 고쳐보겠다고 하지만 강단에 서면 이게 안 되어요.

예전에는 강단 위에 “소리치지 말고 작게 하기!”

“비속어 쓰지 말고 고운 말 사용하기!” 라고 크게 써 놓아도 보았어요.

그런데 안 되어요.

 

많은 분들이 제 설교를 동영상이나 음성 파일로 올려 달라고 합니다.

집사님들도 실시간 방송을 하자고 하는데 아직까지 마음이 허락지 않아요.

그게 의식이 되면 내 마음껏 못 할 것 같으니 하지 말자고 해서 안하고 있어요.

어떤 분은 동영상 파일을 올려 줄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울겠다고 하는 분도 있어요.

 

그럼에도 못 올리는 것은 설교에 그때마다 현장의 감정에 북 받쳐서 하기 때문에 그 현장에 있지 않고 들으면 오해하기 때문이에요.

현장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 분위가 봐 가면서 소리를 치고 비속어도 쓰기 때문입니다.

 

제 설교는 한 마디로 시장터나 전쟁터에서 소리치는 특무상사와 같다고 보면 되어요.

험해요.

그래서 음성 파일을 못 올리니 양해를 하세요.

글을 보면서 글 속에서도 이러한 감정이 그대로 표현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가능한 걸러서 한다고 하여도 못 거를 때가 있으니 이해하세요.

 

설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격을 수양케 하는 도덕률을 전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격 수양을 하려면 지리산 청학동에 계시는 유교 선비들을 불러서 설교하게 하면 되어요.

그러나 설교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에요.

먼저 인간의 죄를 고발하는 것이에요.

 

이런 죄인들이 어떻게 구원을 입고 천국백성이 되었는지를 이야기 해 주는 것이란 말입니다.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와 긍휼을 입고 사는지!

내가 살고 있는 바탕에 하나님의 어떤 자기희생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에요.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죄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때론 막대기로 때리기도 하고!

때론 지팡이로 안을 때가 있어요.

그러니 항상 좋은 소리만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좋은 소리보다 격한 소리를 할 때가 더 많아요.

 

예수님을 보세요.

시장통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써가면서 인간의 죄인 됨을 적나라하게 고발하잖아요.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고상한 말로 인격을 수양케 하는 말을 했어요.

설교자는 의사와 같이 환자의 병을 보아야지 그 환자를 살피면 병을 다스릴 수가 없어요.

 

확 뒤집을 때는 뒤집고!

잘라낼 때는 잘라내고!

꿰맬 때는 꿰매야 해요.

 

속은 푹푹 썩어 가는데 껍데기만 소독해 주면 안 되어요.

환자 입장에선 수술하지 않고 치료해 주는 간호사가 좋지!

수술하는 의사는 좋지 않아요.

 

생명은 썩은 거름 더미에서 나는 것이지 잘 포장 되어진 아스팔트 길에서 나는 것이 아니에요.

설교를 인격 수양하는 교훈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설교는 죄인을 깨트리는 하나님의 방망이가 되어서 죄인들의 죄를 폭로하고 완고한 인간들을 깨부수는 것이에요.

 

예레미야 23장을 봅시다.

 

렘 23:16-3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18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19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20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21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22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25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26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27 그들이 서로 몽사를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열조가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3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며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지금 예레미야에게 성령이 감동을 하여서 말씀을 하십니다.

뭐라고 합니까?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하지요.

 

누가 거짓 선지자입니까?

한마디로 죄인들에게 달콤한 말로 위로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재앙이 없다고 하고 평안하다고 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자 보세요.

지금 하나님이 천상에서 어전 회의를 합니다.

어떤 회의인가 하면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보내는 회의에요.

모세 언약에 따라서 이 놈들을 가나안에서 좇아내는 일을 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선지자들을 전부 하늘 어전 회의에 참석을 하도록 하여서 내가 혹독하게 이 백성들을 다스릴 것을 알려 줍니다.

그리곤 어전 회의에 참석한 선지자들에게 너희들은 가서 오늘 이 어전 회의에서 행한 내 마음을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반석을 부수는 방망이처럼 무섭다는 것을 알려 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놈들이 이 사태를 모르고 백성들과 노닥거리면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면서 너희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세상(바알)과 짝하게 하여서 하나님을 다 떠나게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야~! 이 놈들은 내가 보내지 않은 거짓 선지자들이니 내 백성들에게 이 놈들 말을 듣지 말라고 알려 주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설교 시간은 육과 영이 피가 튀는 전쟁을 하는 시간이에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터란 말이에요.

전쟁하는 곳에 점잖은 말이 통용되지 않아요.

욕이 난무하고 하나님의 폭력이 난무해요.

 

이번 추석에 TV에서 방영하는 ‘고지전’이라는 영화를 보았어요.

거기에 보면 두 장교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방첩대 장교이고 한 사람은 전쟁터에서 사선(死線)을 넘나들면서 전선에서 싸우는 장교에요.

 

방첩대 중위인 ‘강은표(신하균)’는 전쟁터에서 근무하지 않고 후방에서 근무해서 인격적으로 고상하고 점잖아요.

그런데 전투가 치열한 '애록'이라는 고지에 방첩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부임을 하게 됩니다.

애록 고지는 수없이 뺏고 빼앗기는 요충지에요.

이러한 고지의 형편을 모르는 방첩대 장교인 강은표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터에서 고매하게 인격적으로 일을 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애록 고지에 강은표의 친구인 ‘김수혁(고수)’라는 중위가 부하들을 지휘하고 있었어요.

김수혁이라는 중위는 이등병에서 중위가 된 전쟁터에서 자란 야전 소대장이에요.

김수혁이는 부하들에게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때로는 발로 걷어차면서 인격을 상실한 사람처럼 행동을 해요.

 

이러한 김수혁의 행동이 점잖은 방첩대 장교인 강은표에겐 너무도 충격적이었어요.

어릴 적 동문수학 하면서 알던 자기 친구 수혁과는 너무도 달라져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심리적인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러다가 전투가 벌어지고 자기 곁에서 병사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서 강은표도 서서히 야수처럼 변해가게 됩니다.

 

전쟁터에서는 부하들을 살리는 것이 최고 인격이고!

전쟁터는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고 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적과 싸우는 데에는 고매한 인격이 중요치 않고 어찌 하든지 부하들을 살리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최고의 부하사랑임을 알게 됩니다.

 

인격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 보다 더 우선 일순 없다는 말입니다.

살기 위해서 부하들에게 욕을 하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상관은 죽지 않기 위해서 때론 부하들을 강하게 몰아치는 야차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전 회의에서 선지자들에게 야전에서 싸우는 특무상사가 되라고 합니다.

가서 내 백성들을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라고 합니다.

말씀에 방망이를 들고 그들이 완악한 심령들을 깨트리라고 합니다.

불같이 태우라고 합니다.

 

전 지금 전쟁터에서 영과 육이 피 터지는 전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조용 조용하게 미사여구 써가면서 아름다운 말로 포장해서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다고 미사여구 사용하여 설교하는 것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에요.

저는 다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더 사실적으로 말을 할까!

그래서 일부러 더 충격적인 말을 골라서 사용하고 있어요.

 

목사는 강단에서 설교 할 때는 선지자적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선지자는 인정에 매이면 안 되어요.

죄인을 행하여 소리쳐야 해요.

 

그리하여 철저하게 죄인을 만들어서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여야 합니다.

복음 속에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없어요.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고 인간의 의는 배설물이라고 증거해 주어야 해요.

 

그래서 선지자들은 모두가 미움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의 모습 속에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져 있어요.

예수님은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의 심정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였어요.

 

모든 성도는 이러한 선지자적 마음이 있어야 해요.

먼저 자기 자신에게 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말씀 앞에 부서져야 합니다.

내게 선함이 없고 내 의가 무가치함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내 자신을 관대하게 세우지 마세요.

냉정해지세요.

말씀 앞에 해부당하여야 해요.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율법이라는 옛 남편을 통해서 예수라는 새 남편을 보세야 해요.

그래야 내가 어떤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알게 되어요.

감사가 되어요.

그 은혜를 알아야 예수라는 새 남편의 소중함을 알아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폐기하지 않고 우리 곁에 두신 것은 그 율법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하기 위함이에요.

율법이라는 무자비한 옛 남편을 통해서 지금 살고 있는 은혜라는 새 남편의 사랑을 깊이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광해가 된 남자 라는 영화에서 사월이라는 나인이 있는데 이 나인은 가짜 왕인 하선에게 진심 어린 인간적인 사랑을 받게 되어요.

그동안 왕에게 느껴 보지 못하던 따뜻한 마음을 받게 되어요.

그런데 왕의 정적인 간신들이 사월이에게 왕을 독살하라고 하면서 음식에 독약을 타게 합니다.

이 때 사월이는 왕 대신 자신이 그 독약을 먹고 죽어 버립니다.

 

사월이는 왕에게 받은 사랑이 있어요.

그러므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왕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왕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되돌려 준 것입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하나님은 영화 속에 사월이라는 한 나인을 통해서 사랑을 받은 자가 어떠한 모습으로 그 사랑을 토해내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화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반드시 그 받은 사랑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것으로 나타남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도 누군가를 사랑해 보셨지요.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싶어지잖아요.

우리의 남편이신 예수님이 이런 사랑을 우리에게 하고 있어요.

우린 이런 사랑을 받고 있어요.

 

우리의 새로운 남편은 우리의 허물을 들추어 내지 않아요.

용서해 주세요.

우리의 모든 허물을 자기가 짊어져요.

 

신앙생활이란? 남편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가는 것이에요.

그 깨달음이 나를 그 사랑 앞에 복종케 해 가는 것이에요.

그 사랑이 너무도 크고 깊어서 복종을 하는 겁니다.

 

예수라는 남편의 사랑이 우리 온 몸과 마음속에 마치 김치에 양념이 배이듯이 배여서 마치 호수에 돌 하나를 던지면 그 여울이 온 호수를 퍼져 나가듯이 예수의 사랑이 우리 삶 속에서 흘러 나와야 해요.

남편에 사랑을 흠뻑 받은 여자처럼 행복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 행복이 삶 속에서 관대함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게 사랑받은 여자의 모습이에요.

 

우리의 남편이신 예수님은 이런 사랑을 알기를 바라세요.

그 사랑을 알게 하시려고 지금도 변함없이 율법의 참소를 자기 피로 막아 주시는 겁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세요.

 

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이에요.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에요.

우리를 덮어주는 남편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그 남편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그 남편을 사랑하여야 해요.

남편 안에서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부디 남편의 사랑을 헛되이 돌리지 마시고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우리의 신랑으로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름 없는 들풀처럼 살다가 갈 천하디 천한 인생을 그 귀한 하늘에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이 사랑을 가슴에 간직하고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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