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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37강. 너희 몸을 의에 병기로 드려라 (롬 6:12-18)

by coroa 2022. 10. 14.

37강. 너희 몸을 의에 병기로 드려라 (롬 6:12-18)

 

 

 

 

 

 

37강. 너희 몸을 의에 병기로 드려라 (롬 6:12-18)

롬 6:12-18=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은 많은 오해를 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성화주의자들은 오늘 본문을 인용하여 성도의 성화된 삶을 강조합니다.

이는 오늘 본문 중에서 너희는 몸에 사욕을 순종치 말고 너희 지체를 불의에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에 병기로 드리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표피적으로 들으면 그렇게 들립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로마서가 말해오고 있는 논리로 보면 오늘 본문을 성도의 행함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 우리는 과연 그러한가?

바울이 지금 이러한 뜻으로 이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고 있을까?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오늘 본문이 성도의 변화된 성화의 삶에 관한 말씀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바울이 주장해 온 율법 외에 다른 의인 믿음으로 난 의와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지는 7장부터 11장까지 율법 외에 다른 의를 말하는 것과도 전혀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1장부터 11장까지 줄곧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

인간에게선 선이 없다!

인간의 행함에선 의가 나올 수 없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6장에서 그것도 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고 의에 대하여 산 자라고 해 놓고 똑 바로 살아야 한다!

성화해라!

그럴 순 없기 때문입니다.

 

앞 뒤로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다가 갑자기 행함을 이야기 할 순 없어요.

비록 행함으로 들리는 말이지만 이 역시도 믿음에 속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믿음 안에서 보면 본문 해석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그냥 율법이 아니고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그 논지 그대로 물 흐르듯이 해석을 하면 되어요.

성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이야기 한다고 보면 쉬워요.

이제 그 이야기를 해 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몇 가지 상대적인 것들이 나옵니다.

 

첫째는 불의(不義)에 병기와, 의(義)에 병기이고!

둘째는 법(法) 아래와, 은혜(恩惠) 아래이고!

셋째는 죄(罪)의 종이 아니고, 의(義)에 종이라는 말입니다.

모두가 상반된 것으로 서로를 드러내 주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세상의 두 구조(構造)에요.

인간은 이 두 구조로 나누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은 두 부류로 분류해 놓으셨어요.

 

법 아래 있는 자와 은혜 아래 있는 자로 구분해 놓았어요.

이걸 다른 말로 죄의 종과 의에 종이라고 합니다.

의에 종은 천국 백성이고, 죄의 종은 지옥 백성이에요.

 

지옥 백성에게는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고!

천국 백성에게는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고 있어요.

지옥 백성은 법 아래서 살아가고!

천국 백성은 은혜 아래서 살아가고 있어요.

 

알다시피 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죄와 사망이 왕 노릇을 하고,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의와 생명이 왕 노릇을 합니다.

그러므로 법 아래 있는 자는 다 죽고, 은혜 아래 있는 자는 다 살아요.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본인의 의사나 행위와 상관없이 죄의 종으로서 다 죽어요.

이와 반대로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나 행위와 상관없이 의의 종으로서 다 살아요.

 

쉬운 말로 인간은 자기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해요.

그러므로 내가 지금 어느 권세 아래 있는지!

나의 주인은 누구인지!

또한 그 주인은 어떤 주인인지 살펴보아야 해요.

법을 집행하여 사람을 죽이는 폭군(暴君)인지,

아니면 은혜로 덮어주고 살리는 성군(聖君)인지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의(義)라는 주인 아래 있으면 무조건 의에 종으로서 살고!

죄(罪) 라는 주인 아래 있으면 무조건 죄의 종으로서 죽어요.

의에 주인은 예수님이고, 죄에 주인은 마귀(아담)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주인이 누구이냐에 따라서 죄의 종이 되기도 하고 의에 종이 되기도 합니다.

 

종의 운명은 주인으로 결정이 되고 종의 생명은 주인이 책임을 집니다.

종에게는 자기 주권이 없어요.

주인이 책임을 진다는 것은 곧 종은 주인의 운명에 동참되어 살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조선 시대에 보면 주인이 충신(忠臣)이면 종도 충신이 되고, 주인이 역적(逆賊)이면 종도 역적이 되었어요.

 

죄의 종은 법 아래 있고, 의에 종은 은혜 아래 있어요.

법 아래는 생명이 없어요.

법은 인간을 죄인을 만들어서 죽이려고 동원이 되었어요.

그러므로 법 아래 있는 자는 모두가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 법이 동원이 되었는가 하면 인간들을 죄인이라고 고발하기 위함이에요.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죄인이에요.

그럼 그 후손도 자연히 죄인입니다.

 

그런데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들이 자신들이 죄인 인줄을 몰라요.

자기 조상이 죄인인데도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어서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일을 하십니다.

죄인은 죽어야 할 자라고 통고해 줍니다.

그러니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사망 선고를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가지고 일을 하세요.

죽은 자를 가지고 창조에 속한 일을 하십니다.

살리는 일을 하세요.

 

죽음이란 없음이에요.

없음을 가지고 있음을 만드는 겁니다.

이걸 창조라고 합니다.

 

여기서 없음이란? 무(無)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말해요.

죽음을 의인화 하면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죄인을 가지고 의인이 되게 하는 창조의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이에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죄의 종에서 의에 종으로 삼아 주셨다고 합니다.

 

법 아래 있는 자를 은혜 아래로 불러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어요.

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빼내심을 입었어요.

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우리는 죽음의 동네에서 산 동네로 옮겨졌다는 말입니다.

 

은혜란? 덮어줌을 입는다는 말입니다.

수치를 가려주심을 입는다는 말입니다.

덮어줌과 가려주심이 최초로 나타난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죄로 인하여 죽은 자가 되어서 수치가 드러나자 하나님은 가죽 옷으로 가려주십니다.

가죽 옷으로 죽은 자의 수치를 가려주십니다.

이게 은혜에요.

 

그러니 은혜의 바탕엔 의로운 제물의 희생이 있습니다.

흠 없는 제물의 죽음이 있어요.

이렇게 되면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는 말은 누군가가 흠 없는 분이 나 대신 희생을 당하였다는 말입니다.

우린 그 희생당하신 분에 의해서 죄라는 수치를 가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이걸 의롭다 함을 입었다고 해요.

 

우린 죄인인데 의로운 분의 희생으로 의롭다함을 입었어요.

“입었다” 는 말은 하나님이 입혀 주셨다는 말이지 내가 알아서 입었다는 말이 아니에요.

마치 마네킹에게 코디네이터가 옷을 입히듯이 하나님이 입혀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자가 아니고 의롭다 함을 입은 자에요.

이걸 놓치면 구원이 은혜로 남지 않고 자기 자랑거리가 되어요.

 

그럼 우리의 수치를 가려 주시려고 희생당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누굴 죽였습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은혜 아래 거하고 의에 종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 때문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신앙이란? 이 사실을 알고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생 안으로 복속(服屬)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없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이게 종입니다.

 

이런 상태를 은혜 아래 거한다고 하고 의에 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이 곡해 하여 그럼 내 맘대로 막 살아도 되겠네 라고 합니다.

이에 바울은 단호하게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고 합니다.

그러면서 죄가 너희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서 몸에 사욕을 순종치 말라고 합니다.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지 말고 의에 병기로 사용하라고 합니다.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는 것과 의에 병기로 사용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먼저 불의와 의를 알아야겠지요.

불의(不義)가 뭔가요?

글자 그대로 의(義)가 아니란 말이지요.

 

의란? 옳음이에요.

그럼 불의란 말은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걸 먼저 육적인 해석으로서 우리의 삶으로 적용해 보세요.

 

불의란 옳지 않음이라고 했으니까 그럼 우리의 무엇이 옳지 않습니까?

우리 몸이 옳지 않다는 거에요.

우리 몸이 잘못 사용되어지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을 하나님이 바라는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에 육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육적으로 잘못 사용하는 것이 있고 영적으로 잘못 사용하는 것이 있어요.

 

먼저 육적으로 우리 몸이 어떻게 잘못 사용되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하나님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어요.

그러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계명이란? 법이에요.

법이라는 말 속에는 목적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우리 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사용이 되어져야 합니다.

이런 상태를 옳음이라고 해요.

옳음을 다른 말로 의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창조의 목적대로 라고 한다면 우리 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게 일차적으로 우리 몸으로 행하여야 하는 옳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린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아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이웃도 사랑하지 않아요.

우린 오직 자기 자신만 사랑해요.

죄인은 자기 이외에 남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본능적으로 불가능해요.

 

그럼 우리는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먼저 해석을 한다고 하면 우리 몸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도구로 사용을 하여야 합니다.

다른 말로 우리 몸을 내 사욕을 쫓는데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몸에 사욕이란 죄에요.

 

그러니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받으면 죄 짓는데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 몸을 불의에 병기로 드리지 말라는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너희 몸으로 죄 짓지 말라는 말입니다.

불의가 죄 짓는 거라고 한다면, 의는 불의의 반대이니 죄 안 짓는 거잖아요.

문자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게 육적 해석이에요.

 

그럼 오늘 본문을 일차적으로 해석을 할 때는 여러분 죄 짓지 마세요! 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몸뚱이 함부로 굴리지 마세요! 라고 하여야 합니다.

일차적으로 그렇게 적용하세요.

 

모든 성경은 일차적으로 문자로 받으세요.

그러나 여기에 그치면 안 되어요.

그럼 율법주의가 되어요.

이건 죽는 신앙이에요.

 

그럼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문자 속에 뜻을 붙잡아야 해요.

하나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 진의(眞意)를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 뜻을 찾아야 한단 말입니다.

 

성경은 문자 속에 성령의 감동으로 하신 뜻이 담겨져 있어요.

우린 그 성령의 감동으로 뜻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럼 문자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럼 그 뜻을 어떻게 찾습니까?

그것은 성령이 알려 주십니다.

성령께서 문자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세요.

 

이걸 영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우린 이 영적 해석을 하여야 해요.

그러니 성경을 성령이 감동해 주시는 것으로 읽어야 한단 말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므로 영으로 읽는다는 말은 예수로 해석한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을 했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이 성경을 해석을 하면 모든 성경을 예수님과 관련이 된 것으로 해석을 하시겠지요.

그러니 성령은 성경 어느 본문을 보더라도 예수님에 관한 것으로 해석을 하세요.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면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진단 말입니다.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을 했잖아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을 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문자 속에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뜻이 숨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알다시피 우리가 사용하는 글로 써져 있어요.

글은 기호에요.

기호(旗號)란? 소리를 그림으로 표시한 것이에요.

그러니 글은 소리를 나타내는 그림인 것입니다.

우린 글이라는 그림을 통하여서 소리의 진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글이라는 그림 속에 성령의 감동으로 뜻을 담아 놓았어요.

하나님이 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아 놓았단 말입니다.

성령께서 문자 속에 담아 놓은 뜻은 오직 성령만이 알겠지요.

그래서 성경은 오직 성령을 받은 성도만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성경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지요.

맞아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성경을 알기를 원치 않아요.

하지만 오직 성령을 받은 자만이 알도록 해놓았어요.

 

고린도전서 2장을 봅시다.

 

고전 2:9-10=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이 있어요.

이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비밀로 해 놓았어요.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해도 깨닫지 못하게 해 놓으셨어요.

 

먼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지요.

그들에게 뭔가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있어요.

예비하신 것이 있단 말입니다.

 

다 알면 안 되기 때문에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 이외에 사람들은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뭔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게 해 놓으신 겁니다.

아무리 보아도 모르게 해 놓았어요.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은 그냥 문자만 보아요.

그러나 자기 백성들은 문자 속에 뜻을 읽어내요.

 

쉬운 말로 하나님께서 뭔가를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하도록 하셨어요.

하나님이 하는 말을 육에 속한 인간들은 알아먹지 못해요.

무슨 말을 하는거야 라고 이해하지 못해요.

 

누가 알아먹는가 하면 성령을 받은 성도들만 알아먹어요.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문자를 통해서 그 문자 속에 있는 내용을 붙잡는 겁니다.

문자는 겉으로 드러난 것이에요.

이건 누구나 해석이 가능해요.

 

하나님은 그 문자 속에 하나님의 뜻을 담아 놓았어요.

문자는 뜻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아요.

우리는 문자 라는 그릇 속에 담겨져 있는 뜻을 먹어야 해요.

뜻을 편의상 알맹이라고 합시다.

 

성령이 하시는 말씀이 알맹이에요.

그 알맹이 속에 생명이 있어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그 알맹이를 먹어요.

생명을 먹는단 말입니다.

 

문자는 쌀과 같아요.

쌀 속에 영양분이 있어요.

겉으로는 쌀만 보여요.

 

우리가 밥을 먹는 것은 쌀 속에 있는 영양분을 먹는 겁니다.

우리 몸은 쌀 속에 있는 영양분만 섭취하고 껍데기는 똥으로 내 보내요.

성경도 이와 같아요.

드러난 문자는 쌀과 같고 문자 속에 담긴 뜻은 양분과 같아요.

우리는 문자 속에 있는 뜻을 먹는 것입니다.

 

말라기 2장을 봅시다.

 

말 2:1-3= “너의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지금 하나님이 엄청 화가 났어요.

구약을 마감하려고 해요.

그래서 제사장들을 부릅니다.

 

제사장들은 제사를 지내는 자들이에요.

지금 식으로 우리 모두가 제사장들이에요.

그러니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인 거에요.

 

야! 제사장들 너희들 이리 와 봐라!

너희들은 어떻게 내 말을 그렇게도 못 알아먹느냐!

내가 언제 제사를 원했느냐!

그 제사 속에 담긴 의미를 붙잡으라고 했지!

 

그런데도 너희들은 내가 그렇게 말을 해도 안 들어 처 먹는 놈들이야!

그래서 나도 이젠 포기했다!

너희들 얼굴에 절기의 똥을 처 바를 것이라고 합니다.

이건 너희가 똥처럼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에요.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 벼락과 같은 말씀입니까?

이스라엘은 절기를 꼬박 꼬박 지켰어요.

그것도 정성껏!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절기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모르고 지켰어요.

절기를 지켰다는 것만 있었지, 왜? 절기를 지켜야 하는지가 없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에라이~ 이 등신들아!

내가 언제 절기라는 제사를 지내라고 했느냐!그 제사 속에 의미를 붙잡으라고 했지!

제사의 의미도 모르면서 제사를 지내는게 그게 제사냐!

무당 푸닥거리이지! 그런 말이에요.

 

하나님이 묻습니다.

너희들 제사를 왜? 지내는데!

그러자 제사장들이 그야 죄 지었으니까 지내지요.

 

이에 하나님이 그래 그럼 너희들은 그 제사를 어떤 마음으로 지내야 하는데?

죄 지어서 지낸다면서!

그럼 제사 지낼 때 어떤 마음으로 지내야 하느냐고?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

죄 용서 받음에 감사가 담겨져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들은 언제 그런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느냐!

안 지냈잖아!

너희들은 하나님이 제사 지내라고 했으니 마지못해서 지냈잖아!

하나님 명령이니까 지내고 있잖아!

제사 안 지내면 하나님이 혼 낼까봐서 지내고 있잖아!

제사지내면 하나님이 복을 줄까봐서 지내고 있잖아!

 

내가 언제 그런 제사 지내라고 했느냐!

내가 제물을 못 받아먹어서 환장을 한 줄 아느냐!

왜? 제사를 지내는지 그 제사 속에 담긴 의미도 모르고 지내는 제사는 똥과 같은 거야!

내가 그 똥을 너희 얼굴에 처 바를거야!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외식 신앙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저도 말라기 선지자의 심정으로 여러분에게 고발을 하고 있어요.

이 시대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자들에게 말이에요.

그건 똥이라고 말이에요.

 

문자적으로 성경을 보면 그건 똥을 먹는 것과 같아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똥을 얼굴에 처 바르는 것과 같아요.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인간의 상식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성령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가 해석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럼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야! 하나님이 우리 몸을 몸에 사욕을 쫓지 말고 불의에 병기로 사용하지 말라고 했으니 죄 지으면 안 되겠네!

여러분 착하게 사세요!

악하게 살면 안 돼요! 라고 해석을 해요.

 

이게 지금 이 시대 한국교회 안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해석이에요.

대 부분의 목사님들이 이렇게 해석을 해요.

봐라! 하나님이 우리 몸을 불의에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에 병기로 드리라고 하잖아!

그러니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라고 가르쳐요.

 

그럼 교인들은 착하게 살고자 해요.

어떻게 착하게 사느냐 하면 자기 상식으로서의 착함으로 살아요.

인간들이 규정해 놓은 착함으로 살아요.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들이 규정해 놓은 착함을 하나님 앞에서도 착함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곧 죄인 줄 몰라요.

인간적으로 착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착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죄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착함은 다른데 있어요.

 

하나님의 착함은 예수 안에만 있어요.

아담 안에서는 하나님이 바라는 착함이 없어요.

착함이란 어떤 행동이 아니고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 착함이에요.

예수 안에 있으면 착함으로 인정을 해요.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에요.

그럼 묻습니다.

누가 예수를 믿습니까?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자가 믿지요.

 

그런 우리가 어떻게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되는가요?

하나님 말씀으로 알게 되지요.

히브리서 4장 12절을 보면 하나님 말씀은 살아서 우리의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서 발가벗긴다고 하잖아요.

발가벗긴다는 말은 죄를 드러나게 한다는 말이에요.

 

그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오늘 본문을 어떻게 해석을 할까요?

오늘 본문이 하나님이 우리더러 우리 몸에 사욕을 좇지 말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은 수술하는 칼이라고 했지요.

그럼 몸에 사욕을 좇지 말라는 그 말씀이 수술하는 칼이 되어서 우리 안에 죄를 끄집어내겠지요.

 

어떻게 끄집어냅니까?

하나님이 우리더러 몸에 사욕을 쫓지 말라는 것은 아! 우리가 지금 몸에 사욕을 쫓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시는구나!

 

그래서 주여 우리는 몸에 사욕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하여야겠지요.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죄인으로 드러나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겠지요.

이러한 상태를 불의에 병기로 드리지 않고 의에 병기로 드린다고 해요.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여서 우리가 지키겠다고 하면 그것은 율법에 속한 것으로서 죄가 되기 때문에 우리 몸으로 불의에 병기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죄를 깨닫고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나아가면 그것은 곧 우리 몸이 의에 병기로 사용이 되어지는 것이에요.

 

우리 몸은 의를 담는 그릇이에요.

율법에 의를 담든지 아니면 율법 외에 의인 예수님에 의를 담든지 담아요.

율법에 의가 나오면 불의에 병기가 되고, 예수님의 의가 나오면 의에 병기가 되어요.

예수님의 의가 나오면 의에 병기이고, 예수님 이외에 의가 나오면 불의에 병기인 겁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율법에 의를 담고 있고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님에 의를 담고 있어요.

그러니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법 아래 있기 때문에 말씀을 받으면 본능적으로 문자적으로 이해를 하여서 자기가 지키고자 해요.

그래서 자기 의를 만들고자 해요.

이게 불의의 병기에요.

 

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말씀을 통해서 자기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요.예수님 의를 붙잡아요.

그러니 아담 안에 있는 자는 자기 몸을 불의를 드러내는데 시용하고 있으니 불의의 병기가 되는 것이고,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자기 몸에서 예수님의 의를 드러내고 있으므로 의에 병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원래 선악의 법을 머금고 태어났어요.

선악의 법은 자기 몸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선과 악을 나누어요.

그러니 자기 몸이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해요.

 

내가 착하게 살면 선이라 하고 나쁘게 살면 악이라고 해요.

그런데 이 기준은 환경에 따라서 변해요.

인간이 정한 선악의 기준은 인간의 가치 판단에 따라서 달라져요.

 

예를 들어서 오늘 선이라고 한 것이 나중에는 악이 되기도 하고, 지금 악이라고 한 것이 나중에는 선이 되기도 해요.

한국에서 선이라고 하는 것이 아프리카에 가면 악이 될 수도 있어요.

 

굳이 아프리카에 가지 않더라도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선악의 기준도 달라져요.

자기 몸뚱이에 따라서 달라져요.

인간이 선이라고 내어 놓는 것은 최고의 가치를 말해요.

그런데 그 가치가 시절을 따라서 변해요.

 

예를 들어서 말하면 젊은 대학 시절에는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민주화 운동을 하고 데모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 생각하여서 여기에 동참하면 선이고 동참하지 않으면 악이라고 했어요.

그 당시에는 그것이 공부보다 더 가치 있다고 여겼어요.

 

그런데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시집가고 장가가서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면 민주화 운동하는 것보다 먹고 사는 것이 더 가치 있음을 알게 되어요.

가장(家長)으로서의 최고의 가치는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지 사회정의가 아니에요.

이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우선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가장으로서의 우선은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지 데모하는 것이 아니에요.

장가가서도 가족을 부양할 생각은 하지 않고 데모 하러 다니는 것을 옳은 일이 아니에요.

그건 자기 신념으로 가장의 책임을 면피하고 있는 것이에요.

 

인간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 이상 최고의 가치가 없어요.

그런데 성경을 열면 인간이 산다는 것 보다 더 앞선 가치와 본분이 있어요.

예수를 믿는 믿음이에요.

떡 보다 말씀이라고 해요.

 

육신 아래 있는 우리에겐 떡이 생명이지 말씀이 생명일 수가 없어요.

떡하고 말씀이 있으면 우린 떡을 택하지 말씀을 택하지 않아요.

이게 우리 육신의 본능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본능과 반하는 일들이 일어나요.

내가 산다는 것보다 예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떡을 안 먹는다는 것이 아니고 떡 보다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래서 성도는 떡을 집으면서도 내 몸뚱이를 챙기고자 하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똑 같이 떡을 먹으면서도 신자는 그것이 죄인 줄 알고 불 신자는 몰라요.

신자는 자기 몸뚱이 부여잡고 산다는 것 자체가 죄라는 것을 알고 그럼에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아는데 불신자는 몰라요.

 

그래서 신자는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대신 죽어 주심으로 산다는 것을 알아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므로 믿음으로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환경에 개의치 않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죄로 가득해요.

죄인은 그 자체가 죄에요.

그러니까 죄인의 몸에서 나타나는 행동을 가지고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불의에요.

인간의 행위는 의가 아니에요.

 

의가 아니란 말은 불의란 말입니다.

그러니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말라는 것은 우리 몸을 기준으로 선(善)이다 악(惡)이다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지고 선이다 악이다 판단하는 그것을 죄라고 해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을 가지고 이건 죄다! 아니다! 를 구분하는 것 자체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우리 몸에서 나타난 결과를 가지고 선과 악으로 구분을 해요.

그래서 선이라고 하는 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나 착하지요.

그런단 말입니다.

 

우린 태어나면서부터 이렇게 살았어요.

우리의 행동으로 선악으로 판단 받으면서 살았어요.

이걸 율법 아래서 죄의 종으로 살았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은 선악의 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은혜 아래로 자리를 옮겨주셨어요.

우린 선악의 법으로 판단 받던 자리에서 은혜의 자리로 빼내심을 입었습니다.

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이사 왔어요.

이제 의에 종이 되었어요.

의에 종이란 말은 의로우신 분에 종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우리 몸뚱이에서 나온 것으로 선과 악으로 구분을 당했어요.

그런데 은혜 아래서는 우리 몸뚱이에서 나온 것으로 판단하지 않아요.

판단 기준이 따로 있어요.

무슨 기준인가 하면 예수를 믿는 믿음이에요.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가 기준이에요.

 

그러니 은혜 아래서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안 믿는 것이 몸의 사욕을 좇는 것이 되어요.

은혜 아래서는 예수를 안 믿고 자기 몸뚱이가 행한 것으로 선이다 혹은 악이다 라고 판단하는 그것이 몸에 사욕을 쫓는 것이 되고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는 것이 되어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안 믿고 자기 행함에 가치를 두고자 하는 것이 몸에 사욕을 좇는 것이고 불의에 병기로 드리는 것이에요.

쉬운 말로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면 의에 병기로 드리는 것이고, 옛 언약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불의에 병기로 드리는 것이에요.

 

마귀는 자기 몸에 가치를 챙기도록 미혹해요.

예수 믿는 내 자신에게 의미를 두라고 미혹한단 말입니다.

여기에 걸려들면 모든 것을 자기 행함 차원으로 끌어 당겨요.

그리하여 자기 행함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요.

 

이런 사고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많이 이런 사고로 사는 줄 몰라요.

우리는 생래적으로 우리가 행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있어요.

이는 자기 사랑 때문이에요.

 

그래서 나는 예수 믿는다!

나는 복음 안다!

나는 봉사 했다!

나는 헌금 했다!

 

꼭 내가 뭘 했다고 하는 겁니다.

한 것이 있기 때문에 했다고 하는 거에요.

만약에 안 했으면 뭐라고 합니까?

안 했다고 하겠지요.

 

결국 했다 안 했다 라는 것을 누구의 것으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까?

나에게서 나온 것으로 판단하고 있어요.

이게 옛 언약식 신앙이에요.

 

그러나 성경을 열면 이렇게 말하지 않아요.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셨다고 해요.

행함의 주체를 예수님에게 두어요.

나는 빠지고 예수를 내세워요.

이게 새 언약식 신앙이에요.

 

베드로와 요한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베드로와 요한에게 쏠립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쳤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자 베드로가 이 앉은뱅이를 고친 것은 자기들이 아니고 주 예수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에게로 돌립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게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에요.

 

믿음은 추상이에요.

그런데 뭔가 일을 하는 능력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항상 동사(動詞)로 표현을 합니다.

 

동사(動詞)란? 움직인단 말이에요.

어떤 사건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그럼 믿음을 받은 성도는 어떤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가만있지 못해요.

 

믿음이 가만있지 않고 예수님의 생명의 활동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것을 우리 몸에서 표출을 시킨단 말입니다.

이게 믿음에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로 나타나요.

 

베드로에겐 앉은뱅이를 고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자기가 고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고쳤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거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했거든!

우릴 쳐다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봐!

그러는 겁니다.

 

아까 말했지요.

우린 종이라고!

종은 자기 행함이 없어요.

모두가 주인의 행함이에요.

 

그런데 마귀는 종으로 살지 말고 주인으로 살라고 미혹을 해요.

예수님의 것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행한 것으로 내어 놓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 복음 전했잖아!

나 충성 했잖아!

나 헌금 했잖아! 라고 하는 거에요.

 

자기가 행한 것을 의지하고 큰 소리를 친단 말입니다.

안하면 기가 죽고, 하면 기가 살고 그래요.

우리 육신은 본능적으로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태생적으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사는 도적놈들인 겁니다.

딱히 남에 것을 훔쳐서 도둑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도둑질하고 사는 도적놈들인 거에요.

 

우린 모두가 이 함정에 빠져 있어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 자기가 소외당하면 섭섭하다고 삐지는 겁니다.

왜? 날 무시하느냐!

왜? 날 몰라주느냐!

내가 이 교회에서 한 것이 얼마인데!

온 통 나! 나에요.

 

이게 바로 자기 몸에 사욕을 쫓는 것이고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불의를 뭐라고 했나요?

의가 아닌 것이라고 했지요.

 

의를 의인화 하여서 봅시다.

그럼 의인이 누구냐로 물어지겠지요.

의인이 누구입니까?예수님이에요.

 

아담 안에서는 의인이 없어요.

모두가 죄인이에요.

불의한 자들이에요.

 

그러니까 너희 몸을 의에 병기로 드리라는 말은 의 되신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이에요.

불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은 예수 안 믿는 것이에요.

죄는 항상 내 몸을 근거로 역사해요.

내 몸에 의미를 부여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 몸에 의미를 두는 것이 몸에 사욕이고 불의에 병기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자입니다.

 

이를 쉬운 말로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은혜라는 동네로 이사 온 자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동네가 있다고 했지요.

무슨 동네인가 하면 율법이라는 동네와 은혜라는 동네에요.

 

동네를 의인화 하여서 사람이라고 봅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로 판단하세요.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라고 판단하세요.

그럼 두 동네는 아담이라는 동네와 예수라는 동네가 되겠지요.

 

아담의 동네는 법으로 다스려지고,

예수라는 동네는 은혜로 다스려져요.

율법이라는 동네의 조상은 아담이고,

은혜라는 동네의 조상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동네마다 다스리는 법이 있어요.

율법이라는 동네의 법은 허물을 들추어내서 정죄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라는 동네는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여 살립니다.

그래서 아담은 죽은 자의 조상이 되고 예수는 산 자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동네는 항상 피 비린내가 진동을 해요.

입만 열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정죄하고 남을 헐뜯어요.

이는 그 속에서 죽이는 법이 작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율법적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어요.

 

하지만 은혜라는 동네는 은혜라는 향기가 나요.

이 동네 사람들은 늘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 받기 때문에 사람들을 살려 냅니다.

만나면 감사하고 섬기고 사랑하면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요.

이는 그 속에서 생명의 법이 작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언행심사가 곧 그들의 실존을 보여주는 열매인 거에요.

 

우린 원래 아담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죽은 자로 태어나서 법에 다스림을 받다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우리를 예수 안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은혜로 다스림을 받아 살게 하셨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몸은 법 아래서 태어나서 은혜가 낯설어요.

은혜로 사는 것이 어설퍼요.

자꾸만 옛 습성이 나오는 겁니다.

옛 습성으로 살고자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간섭을 하십니다.

옛 습성인 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라고 하세요.

우리 몸을 가지고 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라고 간섭을 하세요.

비록 몸뚱이는 옛날 몸뚱이지만 사는 동네가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동네에 맞는 법으로 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므로” 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내용을 연결시켜서 끌어당긴다는 뜻입니다.

그럼 앞에서 말한 내용이 뭔가요?

오늘 본문이 12절로 시작을 하니까 그럼 앞에 내용이 11절이 되겠지요.

 

11절을 봅시다.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 자로 여기라고 합니다.

 

두 가지 여김이 있습니다.

먼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고!

둘째는 “예수 안에서 산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여기라” 는 말은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을 해 주시니까 그대로 믿고 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믿으란 말입니다.  

믿으란 말은 하나님의 판단과 평가를 받아들이란 말입니다.

우리 꼬라지를 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힌트가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 몸을 불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법 아래 있지 말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은혜의 동네에 살고 있으니 죄의 종으로 살지 말고 의에 종으로 살라는 겁니다.

 

항상 강조하는 것은 모든 말씀을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도 우리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하고 있겠지요.

성경이 우리더러 이것은 하지 말고 저것은 하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하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합니까?

무얼 하지 말고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우리 몸을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하지요.

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라고 하지요.

죄의 종으로 살지 말고 의에 종으로 살라고 하지요.

 

우리는 원래 죄 아래서 법으로 우리 몸을 불의에 병기로 사용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죄 아래 있던 자를 의에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법으로 대하지 않고 은혜로 대하십니다.

이제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살라고 합니다.

 

무엇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하십니까?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이고!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법에 대하여 살고 있고, 죄에 대하여 살고 있어요.

우리 몸을 불의의 병기로 사용을 한단 말이에요.

분명히 법에 대하여 죽었고 죄에 대하여 죽었는데도 말이에요.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본능적으로 법이 튀어 나와요.

그리고 금새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아요.

 

우리는 은혜라는 동네로 이사를 와서도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살던 행사 머리를 그대로 하고 있단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를 자꾸만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적용을 받던 그대로 적용을 한단 말이에요.

자기 행함으로 선과 악을 구분한단 말이에요.

 

예를 들어 우리들이 무슨 잘못을 하면 스스로 율법으로 정죄를 하여서 하나님 눈치를 살살보고 두려워한단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데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법으로 우리 잘못을 따지고 묻고 있어요.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예를 들어서 우리는 세상에서 지탄하는 큰 죄라도 지으면 교회에 안 오잖아요.

착한 일을 하면 어깨 힘을 주고 오는데 죄라도 짓고 나면 교회에 와도 기가 죽어서 오잖아요.

이게 모두가 자기 안에서 법이 작동을 하기 때문이에요.

예수를 믿어도 이 법은 죽지를 않아요.

우리 몸뚱이가 살아 있는 한 괴롭혀요.

 

그래서 우리는 은혜 아래서 감사하면서 살지 못하고 도리어 법으로 겁을 내면서 산단 말이에요.

자기 몸을 자학하고 있어요.

자기 꼬라지로 울다가 웃다고 하고 있어요.

이건 자기를 믿는 것이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에요.

 

베드로를 가지고 설명을 할게요.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어요.

너는 나를 부인하고 저주 할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죽지 않게 막아 준다고 큰 소리 쳐도 예수님이 고맙다고 하지 않은 겁니다.

도리어 넌 오늘 밤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했어요. 

그러자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하십니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내가 목숨 바쳐서라도 반드시 예수님을 지켜 줄 겁니다! 라고 호언장담을 했어요.

 

그런데 그날 밤 베드로는 예수님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서 부인했어요.

그것도 그냥 부인하지 않고 저주를 하면서 말이에요.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저주하고 부인한다고 해서 전혀 섭섭해 하지 않았어요.

그게 베드로의 실존인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고 베드로를 찾아 가잖아요.

찾아 가서 조반을 해서 먹이잖아요.

참으로 우리 주님은 속도 좋으셔!

나 같으면 먼저 너 이 새끼! 이리 와 봐!

너 나 한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면서 귀 싸대기를 왕복으로 후려 팰 텐데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말하지 않고 아침 밥을 해 먹이고 있어요.

그것도 고기반찬을 해서 말이에요.

아침을 다 먹여 놓고 그리고는 묻습니다.

 

베드로야! 너 날 사랑하니!

이에 베드로가 화들짝 놀라서 아니~ 뭘 그걸 묻습니까!

내가 주님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이 더 잘 알잖아요!

다 알면서 뭘 묻습니까!

누구 염장 지를 일이 있습니까!

 

베드로가 묻습니다.

근데 주님 난 진심으로 주님 지켜주고자 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주님을 지키려고 하니까 겁이 덜컹 나는 거에요.

그래서 순식간에 나도 모르게 그만 주님을 저주하고 부인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내 의지나 각오대로 되지 않는 겁니까!

이에 예수님이 알려줍니다.

응!

그건 말이야!

마귀가 널 밀까부리듯이 까불고 있어서 그래!

그래서 니 맘대로 안 되는 거야!

 

그럼 앞으로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또 마귀가 우리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잖아!

내가 아버지에게 기도하고 있어!

 

아버지! 저 놈들이 마귀에게 넘어지더라도 내 피를 보시고 용서 해 주셔야 합니다!

아버지가 저 하고 약속을 했잖아요!

내가 저 놈들에게 내 피를 들고 아버지께 찾아 가라고 할 테니까!그럼 아버지는 저 놈들이 아버지 뜻대로 살지 못해서 내 피를 들고 와서 아버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라고 하면 아버지는 내 피를 보시고 용서 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대답을 합니다.

알았다!

저 놈들이 네 피를 보이면!

내가 네 피를 보고 용서 해 줄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우리가 아버지 뜻대로 못 산다고 해도 예수님 피를 앞세우고 아버지께 용서 해 달라고 하면 되겠네요!

그럼!

그렇고 말고!

그렇게 살아야 해!

그게 의에 종으로 사는 것이야!

 

그런데 우리는 순간 순간 마귀의 꾐에 넘어가 죄의 종으로 살아요.

자기 꼬라지를 보고 넘어진단 말입니다.

이걸 알고 바울이 지금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우린 비록 죄를 짓고 살아도 의에 종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은혜의 동네에 사는 자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꼬라지로 판단 받던 동네에서 우리 꼬라지로 판단 받지 않는 동네로 이사를 왔어요.

하나님은 우리 꼬라지로 판단하지 않아요.

우린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행동으로 판단하지 않고 예수 안에 거하느냐 아니냐 로만 판단해요.

예수님의 피를 믿느냐 안 믿느냐를 보세요.

법적 책임을 안 묻는단 말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어요.

죄에 대하여 죽었어요.

그러니 우리 행실로 인한 율법적 정죄가 없어요.

하나님이 율법을 가지고 따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담 안에서 예수 안으로 옮겨 주실 때 따지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걸 못 믿는 겁니다.

마귀가 자꾸만 이 사실을 잊게 만들어요.

몸뚱이가 옛날 몸뚱이다 보니 자꾸만 하나님 약속을 의심하는 거에요.

야! 이거 이러다가 나 짤리는 것 아니야!

그러면서 하나님 눈치를 살살 살피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 너 왜 그러는데!

여기서는 그 누가 너의 잘못을 책하지 않어!

그러니 눈치 보지 말고 살어!

 

내가 너를 더 이상 니 꼬라지로 인하여 눈치 보지 말라고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은혜라는 동네로 이사를 시킨 거잖아!

너를 은혜의 동네로 이사를 시키기 위해서 내 아들을 죽였어!

예수가 피 흘렸다구!

 

그러니까 니가 여기서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살던 행사머리를 살면 내 아들을 죽이고 너를 이곳으로 이사 시킨 것이 뭐가 되겠느냐!

내 아들이 죽은 것이 헛 것이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앞으로는 니 꼬라지를 보지 말고 내 아들의 피를 믿고 내가 너에게 베풀어준 은혜로 살란 말이야!

알겠니!

 

지금 하나님이 은혜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을 하고 있어요.

법 아래서 살던 자들을 은혜 아래로 불러 놓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 몸을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말라는 말은 우리의 행동거지를 똑바로 하라는 차원의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걸 넘어선 훨씬 깊은 이야기란 말이에요.

 

너 앞으로 잘해!

그런게 아니란 말이에요.

너 앞으로 몸뚱이로 죄 짓지마!

그런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얘들아~ 내 말 잘 들어라!

너희들은 죄 아래서 난 몸뚱이를 가지고 있어서 죄를 짓게 되어 있단다!

 

너희들이 비록 여기 은혜의 동네에서 살아도 너희 몸으로는 죄를 이길 수가 없어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어!

그렇더라도 여기서는 너희들 행실을 가지고 법적 책임을 묻지 않으니 너희가 설령 죄를 짓더라도 아! 이 동네는 은혜의 동네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그래 맞아!

하나님이 나를 이 은혜의 동네로 이사를 시키기 위해서 그 아들을 죽이고 데리고 온 거지!

예수의 피를 바르고 온 거지!

내 몸에 예수님의 의가 있지!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비록 죄를 짓더라도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내 행실 때문에 정죄 당하던 그런 일은 없으니까 감사하고 살아야지!

그래야 한단 말입니다.

 

우린 그릇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그릇이에요.

예수에 의를 보여주는 그릇이라고요.

법을 보여주는 그릇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 몸에다 은혜를 담아 놓았어요.

예수에 의를 담아 놓았어요.

그러므로 우리 몸에서 은혜가 나와야 해요.

예수에 의가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난 내 몸을 불의의 그릇으로 보여지면 안 되고 의에 그릇으로 보여주어야 돼?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어야 한단 말이야!

예수에 의를 보여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내 비록 내 몸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어서 하나님 뜻대로 살지는 못하지만 이런 죄인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해요.

예수의 의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율법이 우리 행위를 가지고 참소 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의로 율법의 정죄와 마귀의 참소를 이겨내야 한단 말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시켜 주셨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잖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구원을 했단 말입니다.

죄인인줄 알고 했다구요!

죄인인줄 알고 했다는 것은 죄지을 것을 뻔히 알고 구원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대하시는 거에요.

죄 안 지으면 은혜로 대할 필요가 없어요.

은혜는 죄인에게만 필요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야! 너의 구원을 취소해야 하겠다고 하진 않는단 말입니다.

죄 지을 줄 뻔히 알고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의롭다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를 더 진노하심에서 구원시켜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동네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계속해서 비처럼 뿌려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 몸은 죄를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은혜를 비처럼 뿌려 주시는 겁니다.

이걸 은혜가 왕 노릇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몸이 비록 죄를 짓더라도 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란 말입니다.

죄 가운데서 은혜의 고마움을 깨닫고 감사하란 말입니다.

이게 우리 몸을 의에 병기로 드리는 것이에요.

 

우리 몸을 율법이 주장하지 못하게 하란 말입니다.

율법이 우리 몸을 주장하면 우리 몸은 불의의 병기가 되어요.

불의의 병기란 죄의 종으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바울이 뭐라고 하는가요?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잖아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죄 문제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해요.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고!

더 이상 죄로 인하여 법으로 정죄당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율법이 우리의 행실을 가지고 참소를 하면!

그래 나 앞으로 잘할게!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막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율법에 따라 춤추지 말란 말입니다.

 

만약에 율법이 뭐라고 정죄하면 거기에 따라 춤을 추면 그 사람에게는 아직도 율법이 살아 있는 자에요.

우린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에요.

율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옮겨졌잖아요.

 

율법이 우리 행실을 가지고 정죄하는 잣대로 들이대면 그냥 쓰윽~ 밀어 버리세요.

야! 나~ 이래 뵈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

아직도 내가 너 아래 있는 줄 아니!

 

난 이래 뵈도 은혜의 동네에 사는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

너~ 번지 수 잘못 찾았어!

그러란 말입니다.

율법이 뭐라고 하면 그냥 예수만 바라보세요.

 

그래 미안하다 앞으로 잘 할게!

내가 너 시키는 대로 할게!

그러지 말고!

그럼 아버지가 속 타요.

어휴! 저 놈이 또 율법에게 얻어터지고 있네!

 

그럼 하나님이 책망해요.

야! 이 놈아! 내가 널 예수의 피 값으로 저 놈에게서 사왔잖아!

법 아래서 빼내 왔잖아!

그런데 왜? 저 놈 말을 듣고 지랄이냐!

너 앞으로 저 놈 말 들을래! 안 들을래!

그러면서 화를 내세요.

 

우린 죄의 종이 아니고 의에 종이에요.

의에 종이니까 불의가 우리 몸을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하여야지요.

우린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 몸에서 법이 나오지 못하게 하란 말이에요.

은혜가 보이게 하란 말입니다.

 

그러니 법이 우리 행실을 가지고 참소를 해도 은혜로 이겨내란 말입니다.

법이 우리 행실을 가지고 따지려고 하면!

야!~ 임마 난 너희 동네에 살지 않고 은혜의 동네 사람이야!

법은 너희 동네 사람들에게나 갖다 대!

우리 동네에 얼씬 거리지 말고 꺼져!

그러란 말이에요.

 

율법은 우리 행위를 가지고 끊임없이 참소를 해요.

너 죄 짓고도 어떻게 그렇게 뻔뻔 할 수가 있느냐!

이 양심도 없는 놈아! 라고 참소를 해요.

 

율법이 참소를 하면 우리는 그래 너 말대로 난 죽어야 하는 자인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셨어!

우리는 예수님에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았어!

그러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율법에게 하나님이 그 피를 보시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고 하세요.

야! 율법아!~ 나는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용서 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고마운지 몰라!

그래서 난 날마다 감사하고 살어!

그러란 말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이 말을 못 알아먹어요.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우리 행위를 가지고 판단해요.

야! 너 예수 믿는다면서 그렇게 살아도 되냐!

어떻게 예수 믿는다는 인간이 그럴 수가 있느냐! 라고 그들의 법으로 참소해요.

(저 놈들에게 이런 말 안 듣도록 죄 짓지 말고 좀 착하게 사세요!)

 

그럼 우리는 맞아! 너희들 동네에서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하는 일인데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지 않고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용서해 주셨어!

그래서 나는 이렇게 죄를 짓고도 정죄당하지 않고 용서 받고 살고 있는 거야!

 

너희들 이 동네로 이사 올래!

그래야 한단 말입니다.

율법이라는 동네와 전혀 다른 차별성을 보이란 말입니다.

은혜로서 말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병기란? 그릇과 같은 의미에요.

 

우리 몸에 법을 담지 말고 은혜를 담으라는 말이에요.

우리는 은혜라는 동네에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 우리 몸에서 은혜를 토해내야 해요.

이걸 은혜의 그릇 즉 의에 병기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지체를 의에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그러잖아요.

너희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너희는 죄의 종이 아니고 의에 종이다!

그러니 의에 종 답게 살으라!

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를 보여주면서 살으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은혜로 살면 자연적으로 법 아래 있는 자들과 차별성으로 드러나게 되어요.

율법이라는 동네에서는 자기 행위로 허물이 까발려져서 난도질당하여 죽어가고 있는데!

은혜의 동네 사람들은 허물의 사함을 입고 용서 받음으로 감사함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이게 의에 병기로 사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이 너희 자신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살라고 하잖아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한다고 하잖아요.

죄가 주관치 못한다고 하는 것은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로 인하여 정죄함이 없다는 말이에요.

 

로마서 8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잖아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죄를 지어도 그것을 죄로 규정해서 심판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이걸 죄에서 자유하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치 않는다고 했지요.

이건 앞으로 간음해도 괜찮다는 뜻의 말이 아니에요.

내가 너의 행실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정죄하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예를 들어서 어떤 바보를 둔 부모가 있어요.

하는 것마다 사고를 쳐요.

그래서 부모가 내가 네 행동 하나 하나를 따져서 뭘 하겠니!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부모는 바보의 행동 하나 하나를 가지고 따지지 않아요.

그냥 불쌍히 여겨요.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나서 죄의 종으로 살고 있어요.

이러한 죄의 종에게 죄 짓지 말라는 말은 그건 죄를 짓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고 해 놓고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했어요.

 

이건 그 여자에게 앞으로 죄 짓지마!

그럼 너 짤린다!

그런 말이 아니고 너는 정죄함이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에요.

설령 네가 죄를 짓더라도 내가 너를 용서 해 준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이에요.

우리는 죄를 안 짓고 사는 자가 아니라 죄를 짓고서도 용서 받고 사는 자들이에요.

 

우리는 간음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이고!

우리는 살인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이고!

우리는 도적질 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이고!

우리는 우상 숭배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잘 할 수 있으면 용서가 필요치 않아요.

잘 하면 은혜가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의로워질 수 있으면 의롭다함을 입을 필요가 없어요.

 

의롭다 해 주는 것은 독자적으로 의로워질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해방을 시켜 준 것은 우리 스스로 법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해방을 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죄사함을 주시는 것이에요.

 

바울은 우리의 존재가 어떤 자들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에요.

 

오늘본문은 우리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느 아래 있는지!

너희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하고 있어요.

너희가 지금 누구의 권세 아래 있느냐를 말해주고 있는 거에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너희가 누구의 종으로 살아야 마땅하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있어요.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어요.

신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12장 이후부터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로마서 7장에서는 우리가 율법이라는 남편에게서 예수라는 남편에게로 시집을 왔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랑이 바뀌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죄의 종에서 의에 종이 되었다고 하고!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사는 동네가 다르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우리 주인이 예수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17-18절에 뭐라고 하던가요?

 

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이 되어 의에 종이 되었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이 뭔가요?

 

복음이지요.

복음이란?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의 피 뿌리심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잖아요.

우리는 그 복음을 믿음으로서 죄사함을 얻었어요.

 

복음을 믿는다는 말은 복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믿는 것이 삶으로 나타나서 실제로 누림을 얻어야 해요.

누리지 못하면 그것은 지식이고 관념이에요.

그건 복음을 아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은 앎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을 들으면 그것이 앎으로 나아가서 그 앎이 믿음으로 역사를 하여 삶 속에서 실제로 누림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복음은 지식이 아니고 생명이에요.

그러므로 복음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삶으로 살아야 해요.

 

우린 먼저 복음을 들어요.

그러면 그 들은 복음이 앎으로 나아가요.

그 앎이 믿음에 화합을 일으켜요.

그럼 복음이 삶 속에서 누림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서 살면서도 정죄함 없이 감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을 안 받은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해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법이 그 안에서 작동을 하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정죄를 당해요.

그러나 믿음을 받은 성도는 그 속에서 은혜가 작동을 하여서 죄를 짓고도 정죄당하지 않아요.

그럼 믿음 없는 사람들이 뭐 이런 뻔뻔한 놈이 다 있어!

그래요.

 

이 뻔뻔함이 믿음이에요.

믿음이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 일을 하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이 뻔뻔한 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몰상식하게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믿음이 이런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복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이에요.

새 언약을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새 언약으로 사는 것이 신앙이에요.

그래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을 삶으로 살으란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에요.

신앙으로만 가지고 있지 말고 그 믿고 바라는 신앙을 생활로 누리세요.

예수의 피로 주어지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 감사함으로서의 기쁨을 맛보시고 누리세요.

예수의 피를 구경만 하지 말고 그 피의 능력을 맛을 보세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어서 복음을 믿게 하세요.

그럼 그 복음이 믿어지는 사람은 그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아요.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복음 안에 있는 성도는 결코 정죄함이 없이 사는 것입니다.

 

이건 비단 나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에요.

남에게도 적용하여야 해요.

누가 범죄하면 법으로 난도질 하지 말고 긍휼로 감싸 안으세요.

제발 법을 내 놓지 말고 은혜를 내어 놓고 덮어주란 말입니다.

누가 잘못하면 촉새처럼 너 잘못 했지!

그러지 말고! 법으로 죽이지 말고 못 본 척, 모르는 척 하면서 은혜로 살리세요.

 

이렇게 정죄함 없이 의로운 자로 사는 것을 의에 병기로 드린다고 해요.

복음이 우리를 죄에서 의로 해방을 시켜 주었다고 하잖아요.

그럼 의로 살아야지요.

그래야 죄에서 의로 해방을 시켜주신 의미가 있어지지요.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의로 해방을 시켜 주었는데도 아직도 죄에 종으로 살면 해방을 시켜주신 분이 뭐가 됩니까?

그러므로 죄에서 해방이 되었다는 것으로만 그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예수님에 의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로서 의에 종으로 살으란 말입니다.

의롭다 함을 입은 자로서 사는 것이 죄와 법에서 해방된 모습으로서 사는 것이에요.

 

과거 우리나라가 36년 동안 일본 식민지로 있다가 해방이 되었어요.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만세를 불렀어요.

그런데 어떤 아이들이 그동안 일본 순사들에게 너무 시달리다가 보니 본능적으로 일본 순사를 보면 두려워하고 숨어 버리는 깁니다.

 

그래서 아빠가 이젠 저 놈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저 놈들 세상은 끝났어!

이젠 해방이 되었으니 저 놈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아이가 일본 순사를 보면 슬금슬금 피하고 도망가는 겁니다.

아빠 뒤에 숨는 거에요.

 

그럼 아빠는 화를 내요.

이제 저 놈들은 우리를 간섭하지 않아!

간섭 할 수가 없어!

그러니 숨지도 말고 도망치지도 말어!

 

해방이 되었으면 해방 된 자로서 살아야지요.

그게 누림이에요.

죄에게서 의에게로 해방이 되었다고 하잖아요.

 

해방(解放)이란? 풀려났다는 말입니다.

 

죄가 그동안 우리를 붙잡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어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이에요.

 

그리곤 의에 나라로 옮겨 주었어요.

이젠 의에 종이에요.

주인이 의란 말입니다.

 

이젠 의에게 붙잡혔어요.

과거엔 죄에게 붙잡혀 살았는데 이제는 의에게 붙잡혀 있어요.

그러니 이제는 죄에게 종 노릇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가 우리 몸을 가지고 주인 노릇하게 할 순 없단 말입니다.

 

죄는 항상 법을 동원하여서 일을 해요.

그러니 죄가 우리에게 법을 들이대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럼 예수님의 피를 내 보이세요.

 

야! 난 죄에서 해방이 된 몸이야!

그러니 법 가지고 날 희롱하지 마!

그러란 말입니다.

 

그래야 내 몸을 불의에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않고 의에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의가 우리를 주장하게 되는 거에요.

우린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어요.

죄와 법하고 상관이 없어요.

이걸 죄에 대하여 죽었고 법 아래서 해방이 되었다고 해요.

 

그러니 죄와 상관없는 자로 사세요.

사단의 참소에 질질 끌려 다니지 말고 죄 가운데서도 당당하게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주어진 그 의로 자유하게 사세요.

우리 안에서 은혜가 왕 노릇하게 하란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사실을 알지만 말고 누리세요.

누림이 없는 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의에 병기로 사는 것이고 이러한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믿음은 예수 피를 구경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안에서 정죄함 없이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부디 이 믿음으로 법 아래 있지 말고 은혜 아래 거하면서 의에 종으로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이 믿어지고 살아지게 하옵소서. 더 이상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니고 의에 종이라는 것이 믿어지고 살아지게 하옵소서. 불의에 병기로 살지 말고 의에 병기로 살게 하옵소서. 이 모든 것들이 지식이 아니라 실제가 되게 하옵소서. 관념이 아니라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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