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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 강해)26강. 예수님의 양식 <요 4:27-34>

by coroa 2022. 10. 3.

요 4:27-34=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26강. 예수님의 양식 <요 4:27-34>

요 4:27-34=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정낙원 목사

 

온 세계가 금융 위기로 인하여 닥친 경제 공황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TV를 틀면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말이 경제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먹고 살기 어려워졌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몸은 때와 장소와 상황을 가리지 않고 배고프면 무조건 채워 달라고 합니다.

안 채워주면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이 요구를 외면할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권력을 가져도 배를 채워야 하고 인기를 누려도 배를 채워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지혜를 가진 사람도 밥을 먹어야 살고!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밥을 먹어야 삽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육신의 본능인 먹어야 산다는 욕구를 이길 인간은 이 세상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란? 밥에 매여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밥을 신(神)이라고 하였습니다.

아주 정확하게 인간의 본질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에겐 밥이 신이고 먹고 사는 것이 존재의 의미입니다.

 

에릭 프롬이라는 사람은 소유를 위하여 사는 인간이 있고, 존재를 위하여 사는 인간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먹기 위해서 사느냐?

아니면 살기 위해서 먹느냐? 입니다.

다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경제를 단순 논리로 말하면 먹고 사는 것입니다.

옛 말에 인심은 곡간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이는 등 따습고 배부르게 해 주는 것이야 말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이란 말입니다.

 

지금 이명박 대통령이 뉘집 강아지만도 못한 언어적인 폭력을 당하는 것도 다 배부르게 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게 대통령 탓입니다.

밥만 충분하게 줘 보세요.

금새 우리 대통령 최고야!

다시 한 번 더 해 주세요! 라고 할 것입니다.

인간이란? 밥 주는 자를 왕으로 섬기고자 합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자기 배를 기준으로 조석(朝夕)으로 변하는 간사스러운 존재들입니다.

밥(돈) 앞에는 다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죽일 놈 살릴 놈 해도 밥(돈)만 주면 아무 소리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왜요?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것에 따라 인심이 왔다 갔다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들은 먹고 사는 일에 온 인생을 허비하는 신세가 되었을까요?

이는 인류의 시조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살 때는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저주로 다가오게 된 것은 모두가 범죄 이후에 일입니다.

하나님께선 범죄한 인간에게 땀을 흘려야 먹고 살도록 했습니다.

수고하고 살다가 죽으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3장을 봅시다.

 

창 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하자 인간이 살아갈 근본인 땅을 저주해 버립니다.

땅은 저주를 풀풀 품어냅니다.

그래서 땅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인간에게 내린 저주의 내용은 이마에 땀 흘리면서 종신토록 수고하는 것입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수고하지 않는 자는 밥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인생도 평생 수고하다가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점점 나아지는 삶이 아니고 점점 찌그러드는 삶이라고 합니다.

인간이란 일평생 이마에 땀 흘려서 목구멍에 밥을 넘기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면서부터 먹고 살아갈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죄는 인간에게 죽을 때까지 먹을 것을 염려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단 한 순간도 먹을거리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 이래로 인간들은 밥을 위한 전쟁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밥은 땅에서 나오기 때문에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 자체가 전쟁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 전쟁 아닌 것이 없습니다.

생존을 위하여 싸웁니다.

왜냐하면! 다 밥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경제를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가 걸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우병 걸린 소를 팔아먹는 것도 다른 놈들은 미쳐도 자기는 살아야겠다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본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중국 사람들을 보세요.

남이야 죽든 말든 개의치 않아요.

남 죽이는 것 팔아먹고 자기만 살면 되요.

그들을 욕할 것 아무도 없어요.

그런 불량 식품을 사오는 인간이 바보이지,,,

 

지난 번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을 보니 왜? 불량 식품을 만드느냐 라고 물어보니 한국 업자들이 그렇게 해 달라고 한데요.

완벽하게 하면 돈이 많이 드니 대충 대충 하라고 한데요.

아마도 한국 사람이 대충 대충 생겨 처 먹어서 그렇겠지요?

 

이념이나 사상도 먹고 사는 일보다 앞설 수가 없습니다.

공산주의의 몰락은 배부르게 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겐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중들은 배부르게 해 줄 자를 왕으로 추앙하는 것입니다.

배부르게 해줄 자가 곧 인간들이 바라는 메시야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을 보면 바다에서 올라온 적 그리스도가 666이라는 표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합니다.

떡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밥입니다.

밥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황우 장사라 할지라도 사람은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먹는 것에 사활을 거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양식을 곡간에 채우고 또 채워야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살펴볼 본문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세상에 밥 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상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정오이니 뱃속에서 밥을 달라고 몸이 천둥 번개를 동반하며 난리를 칠 때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동네에 들어가서 빵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

 

선생을 굶길 수 없으니 말입니다.

급히 빵을 사 가지고 와서 예수님에게 내어 놓으면서 잡수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미 먹었다고 합니다.

 

아니 몰래 도시락을 감추어 두었다가 잡수셨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제자들이 없는 사이에 피자를 시켜 먹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자장면을 배달시켜 먹었다는 말입니까?

 

제자들로서는 궁금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누가 예수님에게 밥을 주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뜬금없이 내게는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아무리 봐도 밥을 먹은 것 같지는 않은데 먹었다고 하니 제자들로서는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사마리아 여자입니다.

지금까지 줄 곳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둘이 이야기를 하다가 예수님이 잠간 자리를 비우고 어디 갔다 왔다고 한다면 몰래 가서 도시락을 까먹고 왔다고 이해 할 수는 일을 터인데,,,

하지만 그런 적이 없거든요.

그렇다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말에 촉새처럼 끼어 들 수는 없고 그냥 둘 사이에 하는 말이나 듣고 있을 뿐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나 제자들이나 궁금하긴 매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뭘 잡수셨다는 것인지,,,

사마리아 여자나 제자들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밥(양식)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밀가루로 만든 떡 만이 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양식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인간들은 양식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했습니다.

그리곤“아! 맛있게 잘 먹었다”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참으로 이해가 안 되지요.

그러니 인간들은 알지 못하는 양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라는 말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양식이 아니란 말입니다.

즉 먹고 배부르게 하는 양식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들은 양식 그러면 먹고 배부르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능이 양식 그러면 배부르게 하는 것으로 입력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누가 예수님에게 먹을 것을 드렸는가?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선문답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의미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왜? 사느냐? 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왜? 사는지를 알려 주는 대목입니다.

이걸 성도들에게 다른 말로 하면 그에 나라와 그에 의(義)를 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의 양식이 뭐라고요.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먹고 배부르게 하는 음식을 말하지 않고 사람이 해야 할 일이 곧 양식이라는 말입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 내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과 예수님이 살아가는 의미가 전혀 다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모두가 나를 위해서 사는데 예수님은 아버지를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살아야 하니 당연히 자기 삶은 포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고,,,,

이런 말은 자기가 바라는 일이 성취 될 때 합니다.

 

옛 말에 부모들은 자식 목구멍에 음식 넘어가는 소리와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만 들어도 배부르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자식을 키우는 것이 삶에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미운 놈이 밥 쳐 먹는 것을 보고도 배부르다고 할까요?

아닙니다.

도리어 화가 나지요.

에라이 이 식충아! 나가 죽어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선 사십일을 주리고 계신 예수님에게 마귀가 찾아와서 떡을 준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밥을 안 먹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사는 목적이 무엇이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먹고 사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냐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먹는 것은 자기라는 존재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곧 존재의 의미이며, 존재를 위해서 밥을 먹고 살아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게 있어 존재에 의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삶에 의미이며, 곧 양식을 먹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이 무엇인가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일을 성취하였을 때에는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말을 합니다.

이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룬 것이 곧 먹고사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이 말했지요.

자기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세상에 56년 동안 월드컵에 나가서 단 한 번도 1승도 하지 못한 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1승을 하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배가 불렀습니다.

2승도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밥 안 먹어도 배 불렀어요.

16강도 올라갔습니다.

이 정도면 한국 사람들은 배가 터질 지경입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은 난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하였습니다.

16강으로 만족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은 이 정도 하려고 한국팀 감독을 맡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4강에 올려놓고 세계를 경악시키고는 배고프단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삶에 의미이기 때문에 그 일을 이루고 나면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자기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찾았을 때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그 말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내 행복은 밥 먹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겠지요.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 즉 이유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 6: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아버지의 뜻은 창세전에 택정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찾아내어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예수님 보고 하나님 백성들을 찾아서 영생을 주라고 하십니다.

영생을 준다는 것은 지금 자기 백성들이 죽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빨리 가서 저 죽은 놈들을 살려 내라고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겐 밥 먹는 것보다 죽은 놈을 살려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이일을 위해서 유대인들이 저주 받은 자들이 살아가는 사마리아에 까지 찾아간 것입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레이다 망에 한 여자가 걸려들었습니다.

아주 기구한 삶을 살던 여자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상종하지도 않는 창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신분을 따지지 않고 그 불쌍한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아! 얼마나 힘이 드느냐?

이제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마음에 짐을 다 덜어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메시야 이야기를 해 주신 겁니다.

여인은 메시야가 오면 뭔가 해결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네가 기다리던 메시야 라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주시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에 물동이까지 내 동댕이치는 그 여인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너무도 기뻤습니다.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난 먹을 양식이 따로 있다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밥을 먹어서 배부른 것이 아니고,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생을 주었기 때문에 배부른 것입니다.

죽었던 여자가 살아난 것을 보니 너무도 배가 불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수시는 양식은 사마리아 여자와 같은 자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죄인에게 어떻게 영생을 주시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 힌트가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요 6:14-15=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떡을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숨어 버립니다.

그리고 나중에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이 이 사람들이 나를 왕으로 삼고자 함이 아니고 떡을 왕으로 삼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내가 만약 이 사람들 욕구를 채워 주지 않으면 죽일 것이라고 거절을 합니다.

 

그리곤 이어서 예수님은 육신의 떡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고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요 6:51-57=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오병이어의 기적은 다만 하늘에 떡을 가르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떡을 가지고 자신의 몸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떡을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 떡은 다름 아닌 자기 “피와 살” 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해괴한 말씀입니다.

 

인간이 어디 식인종도 아닌데 자기 피와 살을 먹으라고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말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일컬어 “산 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산 떡이란? 살아 있는 떡이란 말입니다.

산 떡이라고 말씀을 하실 때는 죽은 떡이 있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죽은 떡이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들은 지금까지 죽은 떡을 먹었다는 말입니다.

야! 이거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죽은 떡을 먹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좌우지간 예수님은 알아먹든 말든 개의치 않고 자신의 몸은 산 떡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산 떡을 먹으면 살고, 죽은 떡을 먹으면 죽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면 인간이 죽는 것은 그동안 죽은 떡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떡은 죽은 떡이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산 떡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엔 산 떡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간단합니다.

인간이 왜 죽는가?

죽은 떡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라면 에덴동산의 두 과실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지요.

아담과 하와가 왜? 죽었습니까?

선악과를 먹어서 죽었지요.

 

편의상 에덴동산에 있던 생명과와 선악과를 떡이라고 합시다.

그럼 선악과는 산 떡입니까? 죽은 떡 입니까?

죽은 떡이지요.

그럼 산 떡은 어디에 있습니까?

생명과에 있지요.

 

아담과 하와가 생명과를 먹었으면 죽음을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죽은 떡인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즉 산 떡을 안 먹고 죽은 떡을 먹었다는 말입니다.

바보, 머저리, 추꾸, 등신같이,,,,

 

선악과라는 죽은 떡을 먹고 난 후 죽음이라는 암 덩어리가 온 몸에 퍼져 나갑니다.

급기야 죽음이 지배합니다.

이를 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인간을 급히 산 떡으로부터 격리를 시킵니다.

혹시라도 죽은 놈이 산 떡을 먹고 영생하면 큰일이 나기 때문입니다.

 

산 떡의 특징은 누구든지 먹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니 죽은 놈이 산 떡을 먹고 영생을 하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마치 암 덩어리를 몸에 짊어지고 골골 하는 인간이 죽지 않고 영생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걸 복이라고 해야 하나요 저주라고 해야 하나요.

저주 중에도 이것만큼 큰 저주는 없을 겁니다.

죽어야 할 놈은 빨리 죽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죽을 병에 걸리면 빨리 죽어야지 살려고 하면 할수록 남은 식구들이 고생합니다.

집 팔고, 남한데 돈 빌리려서 고치지만 결국 몇년 후엔 죽어요.

남은 사람은 죽을 놈 뒷 치다꺼리 하다가 남은 인생 생고생 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니 죽을 병에 걸렸으면 빨리 죽는 것이 가족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아내나 자식에게 빨리 죽어야지 라는 말을 곧잘 해요.

그것도 비행기 타고 가다가 죽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난 일찍 예수님 품으로 가서 좋고 남은 식구들은 보상 많이 타서 좋고?

일석이조 아닙니까?

그것도 국내선 타면 안 되고 미국 놈들 비행기를 타야 보상이 많이 나와요.

그런데 비행기 탈 일이 없으니 난감합니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언중유골입니다.

 

좌우지간 선악과를 먹고 난 인간의 몸속엔 죄(암)라는 독이 퍼져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암)은 죽어야만 떨쳐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인 죄(암)에 빠진 놈을 빨리 죽도록 생명으로부터 추방시킨 것입니다.

 

그리곤 천사들에게 엄명을 내립니다.

절대로 저 놈들을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개미새끼 한 마리라도 볼 수 있도록 불 칼을 들고 보초를 서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은 다 죽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 세상을 일컬어 장망성이라고 했어요.

장망성이란? 무덤이란 말입니다.

죽은 자들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평가이지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다 살아있다고 생각해요.

참 재미있지요.

 

암튼 예수님께서 송장들이 사는 곳에 산 떡으로 방문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은 에덴동산의 생명과로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죄인에게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던 그 생명과가 사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럼 에덴동산의 생명과는 바로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남들에겐 생명과가 예수다 그러면 안 되고 생명과는 예수님을 표상하고 있다 그러세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구약에선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인간들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천사들로 하여금 생명과를 철저하게 지키라고 했잖아요.

하나님은 왜? 그때 바로 생명과를 먹이지 않고 못 먹게 했을까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내가 생명과 이니 날 먹으라고 하느냐 입니다.

아니 언제는 못 먹게 하시고 이제는 먹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속된 말로 아담이 죄를 범하자 말자 생명과를 먹여서 살려 내었으면 인간들이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때는 방치하다가 이제와서 주느냐 이 말입니다.

인간들을 그동안 생고생 고생 시켜 놓고 이제 먹으라고 하느냐 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비밀을 알아야 죄인은 마땅히 죽어야 하는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아들에 나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세상의 주(主)가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주가 되게 하겠다는 말은 주인(主人)이 되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천국을 일컬어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럼 천국에 간 사람들은 모두가 주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영광 받으세요! 라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 천국이 천국다우려면 지옥이 있어야 해요.

천국과 지옥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천국은 지옥을 통하여서 얼마나 복되고 살기 좋은 곳인가로 드러납니다.

반데로 지옥은 천국을 통하여서 얼마나 저주스러운 곳인가로 드러납니다.

 

만약 아담이 죄를 짓지 말자 용서 해주고 에덴동산으로 불러 들였으면 하나님이 하나도 고맙지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역정을 낼 것입니다.

 

배를 쫄 쫄 굶어 본 사람이라야 양식에 고마움을 알아요.

부잣집 새끼들이 부모 고마운 걸 모르고 돈 귀한 줄 모르는 것은 다 고생을 안 해봐서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 맨 날 마약하다가 잡히고,

도박하다가 잡히고,

문란한 성적 유희를 즐기다가 잡히는 겁니다.

 

이건 부모에게 책임이 있어요.

고생을 안 시켜서 그래요.

돈 달라고 하면 넙죽 넙죽 줘서 그래요.

 

보통 어미들의 그릇된 자식 사랑 때문에 그래요.

남편은 그래도 사업을 하면서 돈이 귀한 줄 알지만 집안에서 맨 날 퍼질러 노는 어미들은 그저 자식한데 점수 따려고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다가 자식을 망쳐 버리는 것입니다.

돈을 모르는 자식에게 돈 넙죽 넙죽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저주입니다.

돈에 가치를 모르는 자식에게 달라고 하는 대로 넙죽 넙죽 주는 것은 독약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죄인의 심성을 너무도 잘 아시는 하나님이기에 죄인을 무자비 할 정도로 지옥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섭고 지긋지긋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죽으라고 보낸 이유를 알겠지요.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 것은 죽이려고 보낸 것이지 살라고 보낸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리 가운데서 살라고 했으면 철갑을 두르고 사자처럼 보냈을 것입니다.

만물의 찌끼같이 돈 한 푼도 안주고 거렁뱅이로 보낸 것은 고생 좀 실컷 하라고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사는게 복이 아니라 빨리 죽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천국에서 감사 많이 하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주님께 감사를 잘 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지옥 생활을 많이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삶이 지옥 같다고 불평하지 말고 아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나를 감격시킬 일이 많아서 이렇게 고생을 시키는구나! 라고 이해를 해야 해요.

물론 실제론 이렇지 못하는 이론이지만,,,

저도 그렇게 못 삽니다.

하지만 답은 알고 있어야지요.

 

이제 생명과 되신 예수님을 세상 마지막 때에 산 떡으로 보내신 이유를 알겠지요.

죄인이 죽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러니 성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이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앞서 말했습니다.

죽어야만 사라지는 죄(암)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죄라는 암 덩어리를 없애려고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곤 죄라는 암 덩어리가 없는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내십니다.

그 일을 지금 사마리아 여인에게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섯 남편을 거쳐 가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목말라하는 한 인생을 해방시켜 주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 남편 없어도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세상 안목이 두려워서 남들이 다 자고 없는 시간에 물을 길러 왔던 여인을 이젠 사람들을 찾아가서 난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자랑하는 사람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창기 노릇하며 산 것이 수치가 아니라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산 것이 수치임을 예수님을 통하여서 알았습니다.

 

그러니 창기의 몸으로서도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나서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고 메시야 라고 증거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이 주는 물을 먹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떡 이야기를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 이야기로 풀어간다는 것입니다.

 

요 6:31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 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사십년 동안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자 하늘에서 만나를 먹였습니다.

그리곤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만나를 끊었습니다.

 

만나라는 양식은 애굽에는 없는 양식입니다.

또한 가나안 땅에도 없습니다.

만나는 오직 광야에서만 먹을 수 있는 양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을 빼낸 것은 가나안 땅으로 들이기 위함입니다.

애굽을 세상이라고 한다면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을 성도가 이 세상에서 천국 가는 여정으로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애굽과 가나안 중간에 거쳐 간 광야는 곧 교회를 뜻합니다.

 

스데반 집사가 성령에 충만하여서 이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행 7: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스데반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년 동안 헤메던 광야를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건 아주 아주 중요한 이야기이니 잘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나안을 가기까지 광야에서 먹었던 양식이 만나였습니다.

 

결국 만나는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에 들어가니 안 주었으니까요.

왜?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만나를 안 주었을까요?

그야 가나안 땅에선 가나안의 양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광야에서만 필요한 양식입니다.

 

가나안 땅을 일컬어 약속의 땅이라고 합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끝에는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지요.

 

그럼 가나안 땅은 누구를 상징 합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물론 천국을 표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가나안 땅은 천국과 예수님 안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신약적 의미로 보면 누구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까?

예수님 속이지요.

 

가나안 땅은 곧 구약 시대에 예수님을 보여주는 표상인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의 모형이면서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구약에선 가나안이 곧 예수님 안이고, 신약에선 예수님 안이 곧 천국입니다.

이해되시지요.

 

그러니 천국을 어디서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여러분 속에 예수님이 계시면 여러분은 지금 천국에 가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럼 만나가 이스라엘을 가나안까지 인도하였다고 했습니다.

잘 들으세요.

구약의 가나안 땅은 곧 신약에선 예수님 안이라고 했지요.

그럼 신약에선 누가 예수님 안으로 인도합니까?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예수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정답을 말했어요.

 

갈 3:24-25=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바울은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합니다.

몽학선생이란? 옛날 부잣집 아들들을 학교에 데리고 갔다가 데려오는 길잡이를 말합니다.

 

그럼 율법을 몽학 선생이라 했으니 길잡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그 율법이 누구에게로 인도하는 길잡이라고 합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길잡이라고 하지요.

 

어째서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잡입니까?

이는 율법이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죄인이지요.

 

자 그럼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죄인이지요.

그럼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누가 알려 줍니까?

율법이잖아요.

율법이 너희는 죄인이라고 지적해 주는 겁니다.

 

율법이 아니면 죄를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 율법도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난 죽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율법을 잘못 사용하여서 나쁜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만나를 율법으로 해석해 봅시다.

만나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 끊겼다고 했지요.

그 이유를 아까 필요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이 예수님 안이고 곧 천국이라고 했지요.

 

그럼 이미 예수 안에 들어가고 천국에 간 성도에겐 율법이 필요합니까? 안 합니까?

필요가 없지요.

왜? 그런가요?

천국에 간 성도는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의인이잖아요.

 

그럼 율법은 누구에게 준 것이라고 했습니까?

죄인에게 준 것이지요.

그러니 예수 안에 들어간 자들 곧 천국에 간 성도에겐 율법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엔 죄가 없고 죄인이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자 다시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고 뭐라고 했습니까?

1번, 하나님 감사합니다

2번, 하나님께 원망했습니까?

 

2번이 정답이지요.

 

왜? 원망합니까?

여러분은 언제 원망이 나옵니까?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하지요.

자기 뜻대로 되는데 원망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인의 뜻대로 하게 한다면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 죄가 더 충만해지겠지요.

그럼 하나님께서 죄인의 뜻을 들어주는 것이 복입니까?

안 들어 주는 것이 복입니까?

안 들어주는 것이 복이지요.

 

죄인을 기분 좋게 해 주는 것이 복입니까?

기분 나쁘게 해 주는 것이 복입니까?

기분 나쁘게 해 주는 것이 복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박한 식물이라고 했잖아요.

박한 식물이란 뭐 먹지도 못할 이런 걸 줍니까? 라는 말입니다.

이 인간들이 자기가 누구인줄도 모르고 좋은 음식을 쳐 먹으려고 하고 있어요.

교도소에 간 놈이 콩밥이라도 감사해야지 뷔폐 음식 달라고 하면 되겠어요? 안 되지요.

 

지금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살다가 나온 하나님도 모르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본인들은 자기가 죄인인줄 몰라요.

하나님을 엄청 잘 섬기고 있는 줄 알아요.

자기들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인 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함께 동행해 주시는 그 은혜를 감사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인간들이 좋아하지 않는 전혀 다른 양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입에 쩍쩍 달라붙는 뷔폐 음식이 아니라 입안에서 깔끄러운 맛대가리 없는 것을 준 것입니다.

왜? 그럽니까?

그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죄를 토해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너 이렇게 나쁜 놈들이라고 실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 만나를 먹고 원망했다는 것은 난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되지요.

맞아요.

하나님은 만나를 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잇는 죄를 끄집어내려고 주신 겁니다.

만나를 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합니까?

왜? 애굽에 고기와 정력식품을 안주느냐고 원망했지요.

애굽에 본성이 튀어 나온 겁니다.

즉 죄가 튀어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법궤 속에 만나를 증거물로 보관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 놈들은 하나님께 대든 죄인이라고,,,,

결국 만나가 율법 역할을 한 셈이지요.

죄를 알게 해 주었으니까요.

 

그럼 만나는 구약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게 하는 율법과 같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율법이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해됩니까?

이해가 되어야 하는데,,,

제가 어렵게 설명 합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이 이해하는 것이 어렵습니까?

전 최선을 다해서 쉽게 쉽게 하는데,,,,

 

제 설교가 군더더기가 많은 것은 한 가지를 여러 방면으로 설명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답을 아는 사람은 지루해요.

이미 한 소리를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하니 지겹지요.

 

단 한마디로 하면 될 것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하니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설교 시간도 길고,,,

그러나 설교는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쉬운 방법으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유치원생이든 청소년이든 장년이든 할머니든 다 알아 먹어야 하니까 가능한 쉽게 해야 해요.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성경을 자세히 풀어주셨다고 하는 대목을 이해하고 나서입니다.

저는 신학자가 아니고 목사입니다.

신학자들은 자기 학문에 깊이 있음을 내어 놓아야 하기 때문에 말을 아낍니다.

신학 책을 보세요.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목사인 내가 봐도 머리에 쥐가 나요.

너무 난해하게 써 놓았어요.

짧고 난해하게 쓰는 이유 중에 하나가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기 위함도 있어요.

누가 그 글을 가지고 태클을 걸면 난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발뺌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글을 풀어 쓰지 않고 함축적으로 글을 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그 글로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은 다 교수들이잖아요.

교수는 듣는 학생들이 있어야 자기 존재감에 무게가 더해져요.

자기가 내어 놓은 글을 가지고 자기의 존재감을 남겨 두어야 해요.

 

그래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사람들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세세하게 풀어주는 주해(註解)를 요청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쓴 책을 가지고 다시 컴퓨터의 알집을 풀어 놓듯이 책 내용을 풀어내서 밥을 벌어먹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면 하나도 틀리지 않아요.

문자 그대로 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 예수를 믿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라는 식으로 풀어 주지 않으면 듣는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그 말을 이해를 해 버립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주 예수를 믿는 것이 안 나와요.

결국 엉뚱한 신앙을 신앙이라고 붙들고 평생하게 되는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풀어 준 자들입니다.

구약 성경을 예수님의 사건으로 세세하게 풀어 준 것이 신약 성경이예요.

히브리서 같은 것을 보세요.

전부 구약이야기잖아요.

그런데 그 구약 이야기를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내잖아요.

 

그러니 목사는 성경을 대할 때마다 그 깨달음을 자기 소유화 하려고 하면 안 되어요.

너희들 나 없으면 이런 말씀을 어디 가서 들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라는 식의 여지를 남겨 두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그 목사를 추종하게 됩니다.

그 목사가 없으면 성경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되면 목사는 자연히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게 되어 버립니다.

 

목사는 지식 자랑하는 자가 아니고 복음 증거자에요.

복음은 목사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은사로 받은 것이에요.

하나님께 은사로 받은 것을 내어 놓는 자입니다.

하나님께 받았으므로 성도들에게 상세하게 알려줄 의무가 있어요.

그러므로 목사는 내가 없어도 교인들 스스로가 성경을 이해하는 안목들을 키워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을 예수 이야기로 자세하게 풀어 주어야 하는 겁니다.

 

목사는 성경을 강해하는 자입니다.

강해한다는 것은 자세히 풀어 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성경을 자세히 풀어 주셨다는 것은 그들이 아직도 알아먹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라는 식으로 상대방이 잘 이해하도록 풀어 주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밤에 뜬 달을 보고 엄마 저건 뭐야?

물으면 그냥 달이야! 하지 말고,

응! 저건 말이야 하나님이 만든 것인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니까 매일 밤마다 떠서 너희들 왜? 하나님을 잊고 사느냐?

“나 여기 있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떠 있는 것이란다! 라는 식으로 알려 주어야 해요.

그냥 달이야! 달! 그러지 말고,,,

 

여러분이 목사에게 목사님 믿음이 뭡니까? 물으면 그냥 믿는 겁니다! 라고 하면 그 사람은 막연해요.

뭐가 믿어져야 믿지요.

그러면 에라 모르겠다 자기가 아는 것으로 믿어 버려요.

인간이 아는 것은 모두가 죄에서 나온 것이니 다 가짜이지요.

엉터리 하나님이고, 엉터리 예수님이고, 엉터리 교회를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 설교를 들으면서 길다 짧다 불평하지 마세요.

또 에이! 난 다 아는데 하지 말고,

아! 목사님이 또 복습을 시키는구나! 라고 받아들이세요.

 

교회사를 보면 사도요한이 제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사도요한은 입만 열면 아이들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선생님 이젠 다른 말 좀 해 주세요 라고 데모를 하였답니다.

이에 사도요한이 그래 알았어!

그리곤 내일 보자! 라고 헤어졌어요.

 

그 다음 날 제자들은 “아 오늘은 선생님이 다른 말씀을 해 주실 거야” 라는 기대감으로 다른 날 보다 일찍 와서 기다렸어요.

평상시보다 조금 늦게 사도요한이 와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데 또 아이들아 서로 사랑하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면 불만을 노골적으로 토해 내는 겁니다.

 

그걸 보시고 사도요한은 너희들이 그렇게 듣고도 모르는데 다른 말을 더 하면 뭣하겠느냐! 라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즉 구구단을 외우게 하여야 하는데 더하기 빼기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도를 나가지 못하지요.

 

신앙생활은 교과서 진도 나가듯이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전 동일한 말씀을 수백 번 묵상해도 그때마다 다르게 느껴져요.

전 제 설교를 보고도 은혜를 받습니다.

왠 줄 아세요.

그 때 그때마다 성령께서 영감을 주셔서 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보면 아니 그땐 어떻게 이렇게 깨달았지,,,

왜? 그렇게 설교를 하였지,,

또는 야! 이런 말씀을 전했나!

그러니 말씀을 볼 때마다 신선해지는 겁니다.

식은 밥이 아니라 늘 금방지은 밥처럼 따끈따끈하게 맛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 목사님 다 아는 이야기인데요! 라고 하면 제가 그럽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강함이란? 약한 자를 강한 자로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난 다 알어! 라고 하지 말고 아는 그것으로 연약한 자를 끌어안고 자기와 같이 강함으로 만들어 갈 때 진정한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란? 어린아이를 이해하고 기다려 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어른의 강함은 어린아이의 약함을 대신 짊어지고 그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기다려 줄 수 있음입니다.

마치 군인들이 행군을 할 때 강한 자가 약한 자가 넘어질 때 앞서 혼자 가는 것이 아니고 뒤에서 군장을 대신 걸머지고 행군을 해 줄 때 비로서 강함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성경을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잘난 척하지 말고 꼴값을 떨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설교가 기네 짧네 합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알게 하기위해서 목사님 더 쉽게 하세요 라고 해야지,,,

괜히 또 군더더기가 붙었네,,,

 

다시 본론으로 갑시다.

 

암튼 만나는 율법을 상징한다고 했어요.

율법은 죽이는 것이라고 했어요.

조금 앞서서 말한 것이니 기억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에 만나를 먹은 사람들은 다 죽었다고 한 것입니다.

즉 율법을 따라가면 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죽은 떡입니다.

율법 신앙은 영생이 없어요.

다 죽어요.

 

산 떡은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예수님을 먹어야만 살아요.

예수를 믿어야 해요.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십자가에서 갈갈이 찧긴 의미를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아 나 때문에 죽으셨구나 를 알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리하면 율법 신앙은 죽이는 것이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살리는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생각하세요.

법에 반대가 뭡니까? 은혜지요.

행함에 반대는 믿음이지요.

그러니 법을 붙잡고 행함을 붙잡으면 죽고, 은혜를 붙잡고 믿음을 붙잡으면 사는 겁니다.

 

붙잡는다는 것은 오해 할 수가 있으니 붙잡혔다고 합시다.

붙잡는다 하면 내가 붙잡는 것이 되고, 붙잡혀 있다고 하면 예수님이 붙잡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붙잡고 있는 사람은 은혜를 자랑하고 믿음을 자랑하겠지요.

 

믿음을 자랑한다는 것은 나 믿음 있다 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난 예수님 때문에 산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럼 마귀가 붙잡고 있는 사람은 뭘 자랑하겠어요?

그야 당연히 법을 자랑하고 행함을 자랑하겠지요.

나 말씀 지켰다!

나 기도 했다! ]

나 전도 했다!

나 헌금했다!

나 봉사 충성했다,,,

 

오로지 나! 나 밖에 없어요.

전부 자기가 했데요.

죄인이 한 것을 붙잡고 있으니 지옥에 가는 겁니다.

의인이신 예수님이 한 것을 붙잡고 있어야 천국에 가는데 전부 자기꺼 밖에 없으니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굉장히 중요한 말을 또 하나 하는데 잘 들으세요.

내가 예수 믿으면 지옥에 갑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내가 예수를 믿게 되면 언제든지 수가 틀리면 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무슨 일이 생기면 에이 교회 안가? 예수 안 믿을래! 라고 해요.

이건 자기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원 얻는 믿음은 어떤 것이냐 하면 하나님이 믿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게 해 주는 믿음은 내가 믿음을 행사 할 수가 없어요.

쉽게 말해서 예수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고 안 믿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어요.

다른 말로 천국가고 지옥가고 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야 하나님이 주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하나님이 야! 정낙원이 너 천국 가! 그러면 난 반드시 천국에 갈 수 밖에 없어요.

하나님 난 지옥에 가고 싶거든요 하면서 지옥에 가도 끄집어내요.

그게 부활입니다.

난 죽을래 하고 죽었는데

하나님이 넌 죽으면 안 돼!

넌 영생 하여야 해! 라고 살려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어요.

죽음이 예수님을 붙잡지 못해요.

하나님이 불러냈어요.

이걸 죽음이 가둘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과 한 몸인 성도는 죽음이 가두지 못해요.

즉 지옥이 붙잡지 못해요.

 

그러니 지옥에 갔다손 치더라도 야! 너 나와! 라고 불러내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불려 나온 것도 다 죽음이 나사로를 가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단하지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온 몸에 전율이 안 돕니까?

온 몸이 찌릿찌릿 하지 않아요.

마음이 황홀해 지지 않습니까?

무덤덤합니까?

참 문제가 많네!

주여! 어찌하오리까?

기쁘지요.

기쁜지 알고 계속 진행합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선 법과 은혜가 싸우고, 믿음과 행함이 싸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엔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가라지도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과 뱀이 인간들을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에겐 율법 신앙이 좋아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이성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매력이 있어요.

 

율법신앙이 매력적인 이유는 인간을 자랑케 하기 때문입니다.

야! 너 대단하네!

어쩜 그렇게 전도를 잘하고, 봉사를 잘하고, 열심을 내느냐 라로 부추겨 세워요.

그러잖아도 자랑하고 싶어 죽겠는데 교회에서 잘한다고 자랑해 주어 보세요.

황홀해서 미칩니다.

기분이 붕 떠서 뽕 갑니다.

 

제가 아는 목사들 중에 목사가 아니고 무당이지만,,,

교인들이 전도를 하거나 많은 돈을 헌금을 하거나 봉사를 하면 예배 시간에 호명해서 일어나게 합니다.

그러면서 누구 누구는 이런 일을 했다고 칭찬을 해 줘요.

특히 돈 많이 내 보세요.

완전히 비행기 태워서 홍콩을 보냅니다.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보내자면서 붕붕 띄워 줘요.

수십명, 수백명, 수천명, 수만명 모이는 자리에서 칭찬해 줘 보세요.

속된 말로 오줌 질금 질금 쌉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그 교회 그 목사를 못 떠나요.

왜냐하면! 자기를 행복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어떻느냐? 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저 그 목사를 바라만 보아도 좋아요.

 

그래서 무당 같은 목사들은 교인들을 칭찬으로 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 무당들은 인간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훤히 알고 있어요.

사람 심리를 손 금 보듯이 다 보고 있어요.

신학교에서 다 그렇게 배워서 나와요.

그러니 교인들은 손 바닥에 올려놓고 한마디로 갖고 노는 겁니다.

울렸다 웃겼다 그네를 태워요.

 

기독교 방송의 단골손님으로 나오는 장00목사를 보세요.

완전히 코미디를 하잖아요.

그러면 교인들은 은혜 받았다고 해요.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면 은혜 받았다고 해요.

장00 뿐만 아니라 모두가 똑 같은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은혜란 내 감정이 흥분된 것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이 믿어지는 것을 말해요.

가슴 뭉클하게 하고 기분 좋게 하려면 연예인들 불러서 간증 시키면 되요.

 

목사들이 칭찬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거머리 피 빨아 먹듯이 야금 야금 빼내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회장이면 목사도 회장이 되고, 사장이면 사장이 되고, 대통령이면 목사도 대통령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는 아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와 신앙은 달라요.

종교는 인간이 주체이지만 신앙은 예수님이 주체입니다.

그래서 종교에는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고, 신앙엔 예수님의 믿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을 칭찬하는 것은 전부가 다 종교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이걸 분별하셔야 해요.

신앙엔 내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을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것만 있어요.

반대로 종교엔 모두 자기가 한 것만 있어요.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행함을 근본으로 하는 율법 신앙을 죽이는 떡이라고 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뭘 먹고 죽었습니까?

선악과이지요.

율법은 죽이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럼 선악과는 무엇입니까?

율법이지요.

 

그런데 하와가 선악과를 보는 순간 뽕 가고 말았지요.

왜? 하와가 선악과를 보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 졌을까요?

너무 너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지요.

선악과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입니다.

보는 순간 먹지 않고는 못 배겨요.

 

사람들이 율법신앙을 좋아하는 이유가 자기에게 영광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율법 신앙은 인간의 행함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잖아요.

인간은 자기 행함을 얼마나 고귀하게 여기는지 몰라요.

그래서 사람들이 잘한다고 칭찬을 하면 행복해 죽어요.

 

칭찬해 보세요.

밥도 사주고, 함께 택시를 타고 가도 차비를 자기가 내요.

인심이 펑펑 나와요.

 

여러분들 자원봉사 하시는 분들 보세요.

인터뷰 하면 보람을 느낀다고 하지요.

보람을 느낀다는 것은 곧 자기가 그렇게 자랑스럽다는 말이예요.

자기가 너무 너무 대견스러워요.

그래서 자원 봉사하는 사람들은 힘들어도 하는 겁니다.

 

가수 김장훈이라는 사람 있지요.

그 사람은 자기가 버는 것 대부분을 기부하고 살아요.

지난번 기사를 보니 50억이나 기부를 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래서 메스컴은 앞 다투어서 기부천사라고 부릅니다.

 

그 사람 엄마가 목사님이예요.

그러니 기독교 신앙으로 자랐겠지요.

전에 인터뷰하는 것을 들었는데 왜? 그렇게 기부를 많이 하느냐! 라고 물으니 처음엔 엄마가 시켜서 했데요.

한 두 번 하다가 보니까 기분이 좋더래요.

남을 돕는다는게 이렇게 좋은 것인 줄 몰랐다는 겁니다.

즉 보람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보람을 느낀다는 것은 좋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여기까지 왔다고 했어요.

 

그 사람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자기 행위를 버리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대단한 사람이에요.

범생이들은 엄두도 낼 수 없어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어요.

잘한다! 잘한다 하면 자기 죽는 줄도 모르고 설쳐 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거짓 목사들은 교인들을 칭찬하는 겁니다.

다 빼 낼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 없어 보세요.

칭찬도 안 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다고 했어요.

이는 칭찬 듣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 의식하지 말고 일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했다고 생각하면 칭찬을 바라게 되어 있어요.

아니라고 해도 인간의 본능이 그렇게 하라고 끌어 당겨요.

아니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왜? 날 안 알아주나! 라고 합니다.

교회에 화분이라도 하나 사 놓아 보세요.

오며 가며 야! 그 꽃 예쁘다!

누가 사 놓았지! 라고 하면 배시시 웃음이 묻어 나와요.

 

반면에 무관심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 인간은 눈도 없나!

눈은 액세서리로 달고 다니나! 라며 괜히 미워져요.

전에 저희 교회 다니는 권사님 한 분 이야기입니다.

강원도 도계에서 오신 분인데 그 교회에 괘종시계 커다란 것을 하나 사 놓았데요.

그러다 울산으로 이사를 왔는데 가끔씩 고향 교회에 다녀와요.

그러면 꼭 그 시계를 자랑해요.

 

그 권사님은 교회에 가는 것인 말씀 들으러 가지 않고 시계 보러 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라고 해도 안 되어요.

그 교회에 자가 행함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시간 만 나면 자기 속에 쌓인 마일리지를 꺼내서 자랑하지요.

난 옛날엔 이랬는데 저랬는데,,

과거를 회상한다는 것은 지금은 아니란 말입니다.

새로 만든 따끈따끈한 밥이 없으니 옛날에 지은 식은 밥을 꺼내서 쳐 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들은 자기 행함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법과 행함은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하면 할수록 강도가 높아져요.

어제는 기도 5분 했으니, 오늘은 10분 해야지! 자꾸만 늘려 갑니다.

어제는 성경 3장 봤으니 오늘은 5장 봐야지!

 

새벽기도 열심히 하던 사람이 어느 날 늦잠을 자서 빠지게 되면 분해서 죽을라 그래요.

일수 도장 찍는 재미로 다녔는데 빠졌으니 미칠 지경입니다.

그래서 괜히 아이들만 죽살나게 패고 신랑에게 화풀이하고 난리를 칩니다.

다 당신이 어제 찝쩍거려서 그렇잖아!

에이구 이 원수야! 속으로 아이구 저 마귀새끼! 그럽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다짐을 하지요.

다음에 절대로 빠지지 않을꺼야?

그러면서 이젠 아예 교회에 가서 자요.

서서히 자기 행함이라는 마약에 빠져서 미쳐가는 겁니다.

전 이런 현상을 영적 나르시즘이라고 합니다.

자아도취 말입니다.

여하튼 법과 행함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무슨 일을 하여도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한 것이라고 생각하라고 했어요.

 

벧전 4:8-11=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자기가 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것을 도적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에게 칭찬을 듣고자 하면 화가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힘으로 했는데 자기가 한 것처럼 하기 때문입니다.

 

참 어렵지요.

성경이 어려워요.

특히나 요한복음이 어려워요.

물론 모든 성경이 다 어렵지만,,,,

그러니 그 어떤 성경도 육에 속한 자들은 절대로 이해를 하지 못해요.

 

자 이제부터 마지막 피치를 올려 봅시다.

아직도 할 말이 많은데 조금만 참으세요.

그럼 예수님께서 산 떡을 어떻게 죄인들에게 먹이시는지를 살펴봅시다.

즉 죄인이 영생을 어떻게 얻는지를 살펴보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먹혀야 할 양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날 먹어야 산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우리를 먹은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먹은 것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먹힌 것이 되지요.

예수님이 자기를 먹어야 영생을 얻는다고 했잖아요.

맞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를 먹는 것이 아니고,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을 먹은 셈이지요.

이게 세례의 의미와 비슷한데, 예수님이 영생이라는 산 떡이지요.

그런데 그 영생이라는 산 떡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들어갔어요.

그러면 사마리아 여자는 살았지요.

 

영생이 그 속에 들어갔으니 당연히 영생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죄인 속으로 들어갔으니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죽었지요.

예수를 먹은 죄인은 살아나고 죄인에게 먹힘 당한 예수는 죽는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우리가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면 우리가 살아 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멋진 신앙고백을 하자 예수님께서 이제 난 죽으러 간다고 합니다.

이제 너희가 날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젠 죽어도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 앞을 떡하니 막아서서 아니 죽긴 왜? 죽어요.

우리가 철저하게 지켜 드리겠습니다! 라고 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그래 고맙다!

네가 그렇게 의리가 있는 줄 몰랐다.

내가 제자 하나는 잘 두었구나! 라고 하지 않았어요.

 

반대로 아주 정 떨어지는 소리를 했어요.

뭐라고 했어요.

여러분이 한번 말해 보세요.

야! 이 마귀새끼야! 그랬지요.

예! 맞아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다는 것을 막는게 마귀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안 죽으면 자기백성들이 죄에서 못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백성들이 살아나요.

그러니 예수님은 죽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죽지 못하게 막으니 마구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는 겁니다.

야! 이 놈아 내가 죽어야 너희가 죽음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영생을 얻었다 하는 것은 내 대신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이 깔려 있어요.

우리는 난 살았다만 있지 나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몰라요.

난 살았다 하지 말고 예수님 때문에 살았다고 하세요.

 

산 나를 자랑하지 말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대신 죽어 주신 예수님을 자랑하세요.

예수님 자랑하는 것이 최고의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최고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 살면서 조금 어렵다고 불평하지 말고 항상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양식이 되어 먹히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예수님이 짐승의 밥통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짐승의 밥으로 오신 겁니다.

이 짐승들아 날 먹고 사람이 되라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이던 우리가 예수님을 먹고 사람이 되었고 영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과 성도는 서로가 윈윈(도움)이 되는 겁니다.

둘 다 남는 장사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영생을 주심으로 배가 부르고, 성도는 예수님을 통하여서 영생을 얻음으로서 배가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심으로 양식을 먹는 것이고, 사마리아 여인 같은 죄인들은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 되신 예수님을 먹음으로 양식을 삼는 것입니다.

 

이러면 예수님은 죄인들을 죄에서 건져내어 영생을 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존재하는 의미였고, 죄인들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고 천국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존재에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양식을 공급받지 않고서는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양식 때문입니다.

이는 양식이 사람에게 살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하는 것도 밥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양식은 나를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고 양식이 그 사람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양식을 먹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양식이 사람을 먹은 셈입니다.

 

양식과 사람은 서로가 다르지만 몸 안에서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한 몸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서 산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알고 바울은 자기 안에 예수님이 산다고 하였어요.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런데 생명이란? 한 끼 잘 먹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먹어야 해요.

그러니 성도에겐 이미 먹은 양식이 있고, 또한 계속하여 먹어야 할 양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미 먹은 양식이란? 예수님을 믿음으로 단번에 얻어진 영생을 말하고!

 

계속하여 먹어야 할 양식이란? 얻은 영생의 삶을 위해서 받아야 할 은혜를 말합니다.

은혜를 받아야 받은 생명이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풍성해지는 것을 남자답게 강건해 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잘 자라고 건강해 지려면 잘 먹어야지요.

그러니 성도는 말씀 듣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되겠지요.

들어가며 나가며 꼴을 먹어야 해요.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들어가며 얻는 꼴은 영생을 말하고, 나오며 얻는 꼴은 구원된 자가 먹을 말씀에 양식을 말하는데 곧 은혜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양식이란? 산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입니다.

밥을 찾는 자는 산 자이고, 밥을 싫어하는 자는 죽은 자입니다.

저기 무덤에 가서 배고프십니까? 물어 보세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라고 합니다.

 

죽은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잖아요.

그런데 제사상에 차려진 음식을 하나도 멋 먹어요.

다 산 사람들이 먹어요.

옛날 먹고 살기 어려울 때는 친척집 제사가 되면 온 식구가 다 가요.

먹으러 가는 거지요.

죽은 사람 핑계로 먹는 것입니다.

이처럼 산 사람에게는 계속하여서 먹어야 할 양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가진 사람은 양식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양식을 위해 살아갈 필요가 없지만 산 자는 양식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밥 먹으라는 말은 산 자에게 필요한 말이지 죽은 자에게 필요한 말이 아닙니다.

 

구원된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은혜를 보여주려면 은혜라는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즉 은혜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은혜라는 양식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양식을 많이 먹은 자는 은혜의 사람으로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영적으로 죽은 목숨과 다름없어요.

은혜를 받아야 은혜를 토해내게 됩니다.

사람은 속에 있는 것을 겉으로 토해 내게 되어 있어요.

법이 있으면 법이 토해지고!

은혜가 있으면 은혜가 토해져요.

예수님이 있으면 예수님이 나오고, 내가 있으면 내가 나와요.

 

그래서 성경은 모이기를 힘쓰라고 한 것입니다.

윷놀이 하라고 모이라는 말이 아니고 말씀 들으라고 모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더 깊이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시시한 것으로 시험 들고 넘어지지 않아요.

 

은혜를 많이 받아 보세요.

누가 섭섭하게 해도 관대해지지요.

관대함이란? 내 속이 든든 할 때 나타납니다.

내 속이 텅텅 비어 보세요.

짜증만 나고, 신경질만 나와요.

 

그런데 은혜의 양식은 예수님이 주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우리가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은혜로운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은혜를 사모하게 되어 있어요.

은혜 못 받으면 본인이 견디지 못해요.

이런 갈급함을 은혜의 목마름이라고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은 목마르기 때문입니다.

주여 내가 목마릅니다.

물 좀 주세요 라고 하세요.

 

에스겔 성전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발목만 채워서는 안됩니다.

무릎을 지나 허리를 지나 푹 잠기도록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물의 힘으로 자유자재로 수영을 할 수가 있어요.

누가 섭섭하게 해도 웃을 수가 있어요.

자식이 대학에 떨어져도 감사 할 수가 있어져요.

그러니 배부르게 은혜의 말씀들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시편기자처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 지으신 여호와께로라"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시대 많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온통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믿음이 있고 없음을 자기의 행위를 근거하여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믿고 감사할 일이지 우리가 무엇을 만들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믿으라고 합니다.

일하고 받는 것은 삯이지만 일하지 않았는데도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영생은 공짜로 받은 것이기에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공짜로 받았기에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왜? 내 소원을 안 들어 줍니까? 라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왜? 내겐 주님의 십자가가 고마움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을 생각해도 기쁘지가 않고 천국을 생각해도 기쁘지가 않습니까?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세요? 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실컷 잡수셔서 사마리아 여자처럼 나 예수 만났다 라고 자랑하면서 사십시오.

누가 뭐라고 하면 나 이대 나온 여자야! 라고 말하지 말고!

나 예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야! 라고 하세요.

그러면 욕을 한바가지 먹을 겁니다.

그래도 그 일을 하십시오.

그것이 사마리아 여자같이 예수를 먹은 사람들의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속에 먹힘 당한 것은 예수님 자랑하라고 먹혀 준 것이지 인간 자랑하라고 먹혀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예수님을 먹은 사람인지 아니면 마귀를 먹은 사람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속에 예수를 먹었으면 예수가 나오고, 안 먹었으면 자기가 나옵니다.

 

예수를 자랑하는 그대가 예수를 먹은 하늘나라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영생의 양식인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먹은 자로서 예수님만 자랑하며 살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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