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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 강해) 25강. 신령과 진정의 예배 <요 4:20-30>

by coroa 2022. 10. 28.

 

 

25강. 신령과 진정의 예배 <요 4:20-30> //요 4:20-3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창새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25강. 신령과 진정의 예배 <요 4:20-30>

요 4:20-3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정낙원 목사

 

이번 시간엔 좀 어려운 공부를 합시다.

물론 다 알고 나면 쉬운데 이해하기까지는 조금 난해 합니다.

평상시보다 조금 더 신경 쓰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신앙을 일컬어 외식신앙이라고 하셨습니다.

외식이란? 껍데기란 말입니다.

신앙을 외식한다는 것은 마음에는 신앙이 없는데 겉으로는 있는 척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바리새인들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러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인간입니다.

겉으론 웃으면서도 속으로 칼을 가는 것이 인간이에요

이게 신을 섬기는 데에까지 드러납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 사랑하는 척 해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겉으론 사랑하는 척 할까요?

마음에도 없는 것을 왜? 할까요?

이는 그 행위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만약 얻을 것이 없다고 한다면 시간과 정성을 쏟으면서 위선을 떨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얻을 것이 시간과 정성을 쏟은 것보다 많다면 누구라도 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부류들이 정치인들입니다.

정치인들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 표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군중들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 엔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군중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일이라면 자기 마음과 상관없이 얼굴을 내밀고 관심을 함께 합니다.

이러한 일이 비단 정치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외식이란? 다른 말로 이미지 관리하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얻어야 할 것이 있으면 본심과 상관없이 이미지 관리를 하게 됩니다.

특히 목사나 장로나 속된 말로 교회 안에 중직이 되면 교인들 눈치를 살피게 됩니다.

자기 이미지 관리를 하여야 교회 안에서 신앙 있음으로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신앙 있음으로 인정을 받아야 발언권이 세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 지도자로서 군중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려면 자기 마음과 상관없이 군중들이 인정하는 행위들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그 제도 안에서 주류(主流)행세를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신앙이란? 강제이고 의무이고 삶 자체입니다.

출생과 더불어 유대교라는 토양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유대교 신앙을 강요받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삶과 신앙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이 곧 신앙이고, 신앙이 곧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삶 속에 종교적인 냄새가 풍겨 나게 되어 있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모두 신앙이었습니다.

특히나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은 서로가 경쟁하듯이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란 누가 더 많이 지켰느냐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이 지킨 것만큼 신앙 있음으로 인정받게 되고 입지가 단단해 지게 됩니다.

율법 신앙엔 자연히 우열(優劣)이 생기고 그 우열이 곧 조직에서의 서열(序列)을 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서열(序列)에서 앞서려면 마음에도 없지만 겉으론 표현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법의 잣대에서 좋은 점수를 획득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에 온 나라에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이 위선으로 상석(上席)에 앉아서 호가호위하였습니다.

 

마 23:1-7=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6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외식을 하게 되는 이유는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자기의 신앙을 드러내기 위하여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23장에서 당대의 종교 지도자라고 칭하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외식을 한다고 독사의 자식이라면서 지옥에 갈 놈들이라고 서슬 퍼렇게 저주를 끌어 부으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한마디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신앙입니다.

그러니 신앙의 모든 구석 구석에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외식 신앙이 지도자들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온 백성들에게도 편만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정의한 당시의 신앙을 들어 봅시다.

 

마 15:7-9=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지도자나 백성들 모두가 신앙생활을 외식으로 하는 이유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계명이란? 인간의 상식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조상의 유전과 유대교 전통으로 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 생각에 이렇게 하면 좋으니까 아마 하나님도 우리가 이렇게 하면 좋아 하실 것이야! 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유대교 신앙의 전반에 하나님의 뜻은 사라지고 인간의 생각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알다시피 인간들은 율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자연히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율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적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인간의 행동으로 착한 일과 악한 일로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착한 자에게 복을 주시고 악한 자에겐 벌을 주시는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게 되면 자연히 율법을 얼마나 많이 지켰느냐의 싸움으로 치닫게 됩니다.

결국 신앙에 우열이 생기고 그 우열로 인하여 사람 간에 서열이 정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은 자연히 대접을 받고 낮은 자의 선생이 되어 군림하게 됩니다.

인간들이 종교성은 이런 신앙을 버릴 수가 없는 매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으로 신앙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한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행동엔 하나님이 바라는 선(善)이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행동으로 선이다 악이다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에겐 이런 하나님은 없고 오직 법(法)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가 소경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 15: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가르침을 받는 자가 소경이기 때문에 소경 같은 지도자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소경이기 때문에 소경을 길잡이로 두고 있는 것입니다.

눈뜬 사람은 절대로 소경을 길잡이로 세우지 않습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고 외식하는 종교꾼들을 선생으로 따르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가 그들과 동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둘 다 지옥으로 가도록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이는 천부께서 심지 않은 자들을 뽑아내려고 하시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예수님 당시에만 있는 일이 아니고 지금 이 시대도 그대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인들이 외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이 이원화(二元化)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선 신앙 냄새가 나는데 밖에 나가면 안 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지적대로 소경인 목사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예배입니다.

목사들은 성도들에게 예배를 빠지지 말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서 만나주시기 때문에 빠지면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누가 예배를 빠지지 않고 주일성수를 잘 하느냐로 신앙의 등급이 매겨집니다.

 

물론 성도가 되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라 할지라도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고 강제적인 것이 되면 그것은 옳은 예배라 할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는 예배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라는 논리로 신자가 되어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죄라고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주일 성수는 기본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믿음 없음으로 치부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은 교인들은 자연히 신앙생활의 최우선에 주일성수와 예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은 예배를 빠지지 않고 잘 드리면 자신이 신앙이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음엔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없고 하나님의 약속도 믿어지지 않지만 일단 목사가 가르치는 대로 하였으니 믿음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 했으니 일단 그 교회 안에선 믿음 있음으로 통합니다.

 

그러니 혹시 예배라도 빠지면 하나님께서 대노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일날 볼일 보러 가기 전에 새벽예배라도 참석하여서 하나님께 눈도장을 찍고 볼 일을 보러 가곤 합니다.

목사들은 한술 더 떠서 이런 찝찝함을 덜어주기 위해서 아침 일찍 예배 시간을 마련해 줌으로서 교인들에게 서비스를 해주고 있습니다.

편리한 시간에 와서 예배드리고 볼일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의 신앙은 몸은 교회에 와 있어도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습니다.

그러니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과 같습니다.

목사들은 이것이 사기(詐欺)라는 것을 압니다.

본인들도 아니란 것을 다 압니다.

알면서도 예배를 강요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예배를 통하여서 얻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관례상으로는 보통 주일 낮 예배 시간에 헌금을 하기 때문입니다.

헌금을 수금하는 일은 주일 예배를 통하여서 하는데 교인이 예배를 빠지게 되면 헌금을 받아내지 못합니다.

제 때 받아 내지 못하면 이 핑계 저 핑계로 헌금을 떼어 먹기 때문입니다.

 

교인들도 집안에 돈 쓸 일이 생기면 가장 쉽게 손을 대는 것이 헌금입니다.

이런 교인들의 심사를 목사는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를 핑계로 삼아 제때 헌금을 하고 볼일이라도 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돈만 내면 교회에 오든지 말든지 별 신경을 안 씁니다.

 

노골적으로 헌금하라고 할 수 없으니 교묘히 예배를 핑계 삼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염불엔 관심이 없고 잿밥에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절간이나 교회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헌금을 뜯어내려는 인간이나 헌금을 안 하려는 인간이나 동종입니다.

헌금을 강요한다고 해서 하고 강요하지 않는다고 안한다면 그를 믿는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억지로 하는 헌금은 헌금이 아니고 강탈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헌금을 받지 않습니다.

왜? 헌금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하는 것은 사기당하는 것입니다.

 

헌금이란? 받은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서 하는 행위입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린 것이나 과부가 두 렙돈을 낸 것이나 모두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보니 그 은혜가 너무도 감사하여서 토해낸 자기 신앙고백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재물과 하나님을 두 주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헌금은 하나님이 내 주인입니다 라는 고백적 차원에서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여기지도 않으면서 헌금하는 것은 스스로가 속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 진정으로 날 주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주인이란? 날 먹여 살려 주는 분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너 진정으로 내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를 묻고 계신 겁니다.

“이 재물을 내가 준 것이라고 인정하느냐?” 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들이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 갈 텐데,,

그러면 꼭 이런 자세로 살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신 26:1-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취하여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 이 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 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소산을 얻으면 그 소산물을 가지고 와서 내 것을 드린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 땅을 주셔서 얻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린 원래 나그네이고 땅이 없는 자인데 하나님께서 이 풍요로운 땅을 주셔서 이렇게 농사를 잘 지었습니다! 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즉 헌물을 드리면서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입니다 를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드리는 헌물 속에는 반드시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셔서 얻은 것이므로 하나님께 돌려 드립니다! 라는 뜻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여라도 자기 것을 드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것을 드린다고 생각하면 아까운 생각이 들고 감사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 말을 지금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직장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돈도 벌게 해 주셨다는 고백으로 드리라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헌금을 한다면 그 헌금은 물질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신앙고백이고 마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헌금을 하지 마세요.

자기 것을 드렸다고 생각하면 생색을 내게 되고 감사함이 사라지고 하나님 앞에 교만해 집니다.

주신 하나님은 없고 드렸다는 자기 의만 남게 됩니다.

그럼에도 헌금을 하는 것은 투자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하나님께 바치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돌려받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다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고 사기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돈이라고 생각되면 차라리 그 돈으로 자기 필요한데 사용하고 도적놈으로 사십시요.

그게 훨씬 솔직한 모습입니다.

 

그러다 혹시라도 마음에 감동이 되시면 집을 팔아서라도 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마세요.

아마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죄가 여러분 보다 더 쎄기 때문입니다.

죄는 육신을 볼모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도록 역사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도 그 일을 행하고야 마는 영적인 중풍병자들입니다.

 

좌우지간 헌금 이야기는 오늘의 논점이 아니므로 여기서 각설합시다.

돈 이야기해서 좋아할 사람이 없으니,,,,

인간의 속성 상 마음에도 없는 것을 하면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헌금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의 모든 면이 그러합니다.

암튼 교인들도 이런 목사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 가는 것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배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속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는 말이지만 눈 뜬 사람은 소경을 따르지 않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느 놈이 소경을 자기 길 잡이로 잡겠습니까?

소경을 길잡이로 시킨다는 것은 그 사람도 소경이란 증거입니다.

 

교인들이 영적으로 소경이니 거짓말 하는 목사를 목사라고 따르는 것입니다.

결국 자업자득입니다.

남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경됨을 탓하여야 합니다.

 

인천에 사시는 어떤 분이 저에게 문자를 장문으로 보냈어요.

저의 블로그에 올려진 설교를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설교를 읽고 나서 자기 교회 목사가 목사가 아니라 무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당을 목사로 섬겼다고 지금이라도 눈이 떠져서 볼 수 있게 된 것을 너무너무 하나님께 감사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분이 교회 다닌지 일 년 밖에 안 되었데요,,,

세상에 이럴 수가,,

아니 수십 년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모르는 것을 알았어요.

아니 늘 설교를 들으면서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말이지요?

이런 것을 보면 참으로 하나님께서 눈 시퍼렇게 뜨고 자기 백성을 찾아내신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오늘 우리가 상고할 내용은 예배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하여서 참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기로 합시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과 물 이야기를 하다가 예수님이 자신의 과거사를 꿰뚫어 보는 것을 보고 선지자라고 합니다.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인데 평소에 궁금해 하던 것이 있었는데 하나 물어 보겠다고 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에게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조상이나 유대인들의 조상이나 다 하나인데 어쩌다가 나라가 갈라져서 살다 망해서 각각 다른 나라의 지배 아래 있다가 지금은 이렇게 상종도 하지 않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으로서 개 같이 취급하는 사마리아를 찾아 온 것도 다 선지자이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럼 어디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정통입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사마리아 인들은 그리심 산에 세운 제단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당신의 말대로 난 죄인입니다.

그래서 내 죄가 밝혀졌으니 나도 예배(속죄제사)를 드려야겠는데 어디서 드리는 예배(제사)가 진짜 예배(제사)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은 둘 다 틀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받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 두 곳에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인들은 그리심 산에서 드렸고,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드렸습니다.

 

아니 말은 바로 합시다.

그들은 분명히 가인처럼 예배(제사)를 드렸어요.

다만 하나님이 안 받으신 것입니다.

마치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줄 때 준 사람은 있는데 받은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줬잖아요!

난 안 받았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둘 다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건 유대인이다 사마리아인이다 를 따질 것 없이 양쪽 다 펄쩍 뛸 일입니다.

모두가 부정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부정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합니다.

 

너희란? 사마리아 여자와 같이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 성전처럼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때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여기엔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한다고 장소를 고집하는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란? 예수님과 같이 때와 장소와 상관없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유대인이나 사마리아 인들은 정해진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런 풍토에서 자란 사마리아 여자는 어떤 장소 어떤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와 장소를 고집하는 것은 다 옛날이야기라고 합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젠 신령(神靈)과 진정(眞正)으로 드리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자는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메시야가 와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분이 와서 알려 주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내가 바로 그 메시야 이고 그리스도라고 하십니다.

그럼 그리스도라는 메시야와 예배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구약을 통하여서 알아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스도가 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곧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서 참 예배는 그리스도라는 메시야가 와서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구약의 예언에 상당한 안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알고 있는 진리의 영으로서 드려지는 참 예배는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대목입니다. (겔 36장- 37장 참고)

에스겔은 장차 다윗과 같은 한 왕이 오면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셔서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을 하나로 통합하여 화평의 언약을 세운다고 하였습니다.

 

겔 37:15-2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6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17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18 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거든 19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20 너는 그 글 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목전에서 손에 잡고 21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간바 열국에서 취하며 그 사면에서 모아서 그 고토로 돌아가게 하고 22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찌라 23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케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되리라 24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25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 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26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또 그들을 견고하고 번성케 하며 내 성소를 그 가운데 세워서 영원히 이르게 하리니 27 내 처소가 그들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28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진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 범죄하여서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각각 망하여 쫓겨났다가 다시 고토(故土)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한 왕이 일어나 두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여서 한 목자 아래 두어서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그들을 성소로 삼아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살아날 것을 에스겔은 해골 골짜기 마른 뼈 비유로 말하였습니다.

 

겔 37장을 보면 죽은 해골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서 다 살아나게 한 후에 고토로 돌아가서 살게 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포로로 잡혀 갔던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에스겔의 예언대로 지금 이스라엘이 다 돌아와서 고토에서 살고 있습니다.

 

겔 37:1-14=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겔 36:24-31=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29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30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 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그런데 죽은 해골들을 하나님의 생기가 살아나게 하여 큰 군대를 이루어서 그들 속에 성신을 부어서 고토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신을 그들 속에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신을 받으면 새로운 규례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고 합니다.

새로운 규례란? 전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새 영(靈)을 인간들 속에 두셔서 새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새 신(靈)이 오면 무엇이 악한 길이고 불선한 행위인지를 알게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죄관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죄관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새 신(靈)이 임하면 옛날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예배가 이루어 질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방식이란? 성령이 세운 성전에서 새 언약으로 새로운 예배가 이루어진다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이 에스겔서 40장 이후로부터 언급하고 있는 성령으로 지어질 성전의 모습들입니다.

그러면 그 성전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 생기고 새로운 땅이 주어지는데 하나님은 그 땅에 거하는데 이를 일컬어 “여호와 삼마”라고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이 예언은 성령이 성도들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성전)를 지어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요 14장에서 성도를 위하여 처소(성전)를 예비하러 간다고 한 것입니다.

 

요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마련한다는 처소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보내어 주실 보혜사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을 처소라 함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 14:16-20=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성령이 임하면 성도는 그 속에 성전이 세워집니다.

그러면 이젠 여기다 저기다 하는 장소적 의미와 어느 시간에 드려야 한다는 시간적 의미도 다 사라지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교제)가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배란?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으며 자신을 날마다 부인하며 살아가는 삶을 영적예배라고 하였습니다.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러한 삶을 지금 예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합니다.

이러한 삶은 성령이 임하여야만 가능해 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생수(성령)를 주신다고 한 것입니다.

 

그 생수란 다름 아닌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하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성령)인 것입니다.

 

겔 47:1-12=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6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7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성령)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은 곧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즉 성령이 오시면 성도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거하신다 함은 곧 하늘에 성전이 성도 안에 세워진다는 뜻입니다.

하늘에 성전을 이젠 성령으로 성도들 속에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마음속에 성령으로 성전이 세워진 성도는 하나님을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찾지를 않고 성령께서 붙잡게 하시는 진리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진리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는 두 언약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의 율법이고 또 하나는 신약의 믿음 곧 은혜입니다.

법은 행함이고, 은혜는 믿음입니다.

 

율법을 일컬어 옛 언약이라고 하고, 은혜를 일컬어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은 이스라엘과 세웠고, 새 언약은 예수님과 세웠습니다.

옛 언약 하에선 인간의 행함을 요구하지만, 새 언약 하에선 예수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자기 바깥에서 일어난 것을 믿어야 합니다.

즉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남이 대신 해 준 일을 내가 한 것으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즉 내 죄값을 예수님이 대신 갚아 주셨다는 것이 안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설령 믿어진다고 하더라도 갚아야 할 빚으로 남겨 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님과 자신을 하나로 묶어 버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자기가 한 일로 믿어집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새 언약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십니다.

 

성령이 나 라는 존재를 단독자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나아가도록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임한 성도는 더 이상 자기라는 존재는 없고 예수 안에서의 다른 자기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안에서 있는 나를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 또는 새 사람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인 새 사람은 새 언약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게 됩니다.

새 언약으로 예배 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예수의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오셨고 성령이 부어 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젠 하나님을 예수 안에서만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을 성전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성전은 성령이 임한 성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교회가 정한 형식적인 예배를 예배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림자는 실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행하여지는 예배를 통해서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교회의 예배를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니에요.

형식이 내용을 갖춘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용을 위하여 형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용이 없는 형식만 남을 땐 이것이 곧 미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시대 교회가 유대교와 같아졌어요.

교회가 정한 것들은 마치 예수님 당시의 장로들의 유전과 같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을 사람의 계명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계명은 눈에 보이는 것을 붙잡도록 합니다.

즉 보이는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고, 자기 열심과 충성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합니다.

결국 사람의 계명은 옛 언약을 붙잡도록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옛 언약은 폐기하고 새 언약 안으로 성도를 밀어 넣습니다.

성령은 날과 달과 절기는 다 폐하여 졌다고 합니다.

의문에 쓴 증서는 십자가에서 다 도말 되었다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 어떤 형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세우신 새 언약으로만 하나님을 찾도록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새 언약으로 예배하는 자만 찾으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나아오는 자만 성도로 인정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지 않는 것은 모두가 가짜이고 사기인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공로로 예수님의 공로를 가리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피 대신에 자기 피와 땀과 노력으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성령이 없는 육에 속한 자들은 자기 피와 땀과 노력을 포기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없는 육에 속한 교인들은 마귀의 말에 춤을 추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말하면 시큰둥하고, 열심을 다하여서 충성하라고 하면 신이 나 합니다.

열심을 다하여 충성한 자리엔 자기 자랑이 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 목사들은 이런 인간의 종교적 심성을 이용하여 교인들을 자기가 행한 열심과 충성이라는 희생의 흔적으로 교회에 붙잡아 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붙잡히면 자기 피와 땀과 노력이 배여 있는 교회를 주장하게 됩니다.

입만 열면 교회 자랑을 하게 됩니다.

 

이로보건데 지금 이 시대 목사들이 가르치는 대로 교회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예배는 모두가 거짓이고 사기란 것으로 들통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새 언약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하지 않고 인간들이 교회에다 행한 열심과 충성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을 성수하며 예배를 빠지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벽에 드리는 예배도 가짜이고 오전에 드리는 예배도 가짜입니다.

주일을 성수하였다는 것도 가짜입니다.

주일이라는 특정한 날을 고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다시 살리는 악한 행위입니다.

 

성령 안에선 특정한 날의 의미가 없습니다.

주일이란? 주님의 날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에겐 모두가 주님의 날입니다.

월요일도 주일이고, 화요일도 주일이고, 수요일도 주일이고, 목요일도 주일이고, 금요일도 주일이고, 토요일도 주일이고, 일요일도 주일입니다.

일년도 주일이고, 이년도 주일이고, 십년도 주일이고, 오십년도 주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일이라고 지키는 것은 사회가 일요일 날 쉬기 때문입니다.

쉬는 날이니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과 함께 구원 받음에 감사하며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모든 성도가 일요일 날 일을 하고 월요일에 쉰다면 그 교회는 월요일을 주일로 지키면 됩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성도는 법에 매인 자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자유자입니다.

더 이상 법으로 어거하지 못합니다.

만약 법에 매인다면 그 사람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아직 진리 안에서 연약하거나 아니면 가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편의를 위하여서 만들어 놓은 것은 다 가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와 같이 때와 장소를 고집하여 드리는 예배를 “알지 못하는 예배”라고 하고, 예수님과 같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아는 예배” 라고 한 것입니다.

 

“안다”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은 “진짜”와 “가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예배” 가 있고, “가짜 예배” 가 있다는 말입니다.

“진짜는 예수님을 앞세우고 드리는 예배”이고,

“가짜는 교회를 앞세우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식으로 교인들이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예배를 드렸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딴에는 기껏 정성스럽게 드렸다고 하는 예배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예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난 예배 드렸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렸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의지하고 나아갔느냐 입니다.

새 언약으로 나아갔느냐?

옛 언약으로 나아갔느냐? 입니다.

즉 예수 공로 앞세우고 나아갔느냐?

아니면 자기 공로 앞세우고 나아갔느냐? 입니다.

가짜 예배를 아무리 많이 드렸다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최초에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받는 제사가 있고 거부하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예배라고 한다면 가인은 모르는 예배를 드린 것이고, 아벨은 아는 예배를 드린 것이 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의 제사를 일컬어 믿음으로 드렸다고 합니다.

즉 자기 공로로 나아간 것이 아니고 제물의 희생으로 나아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벨의 제사 속에는 자기 공로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피 흘려 죽은 제물의 희생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것이 아니고 피 흘려 죽은 제물의 희생을 받은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에 충만을 입어 구약의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의 외식적 신앙을 고발 하였습니다.

 

행 7:42-43=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오히려 너희들은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느니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수많은 제사와 제물을 드렸지만 하나님은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바라는 제사는 제사라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제사의 의미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성령으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고발해 주고 있습니다.

 

사 1:11-14=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선지자들의 말을 종합하여 보면 구약의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을 주신 분이고 그 약속을 토대로 일을 해 나가신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란? 아브라함의 후손들인데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 있던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서 복을 주겠다고 하고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일방적으로 부르시고 복에 근원이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의 동의와 상관없이 하나님 홀로 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신실하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창세기 15장에서는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 자신이 지나가심으로 내가 반드시 너를 복에 조상으로 삼아 주겠다는 것을 하나님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아브라함과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백성들을 약속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지켜주는 백성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 때문 이였습니다.

 

그래서 출애굽 마지막 날에 애굽에 장자를 죽일 때에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죽이지 않고 대신 어린 양을 죽여서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죽은 것을 대신 죽은 것을 간주하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끄집어 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잊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절기를 제정하시고 기념하도록 하셨습니다.

 

제사의 목적은 자신들이 누구 덕에 살았는지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왜?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의 의미를 모르고 드리는 제사는 우상에게 제사한 것이 됩니다.

 

사 66:1-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상하고도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아! 내가 이런 죄인이구나!

이런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희생 당하셨구나! 를 아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지어서 충성하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늘이 보좌이고 땅이 하나님의 발바닥인데 무슨 집을 지어서 성전이라고 바치려고 하느냐 입니다.

 

땅엔 성전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 할찐데 이 시대 성전을 짓겠다고 교인들로 하여금 헌금을 하라고 하는 것은 목사들이 사기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건물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 한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 안 받습니다.

 

인간은 성전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짓겠다고 할 때 하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꼴값 떨지 말라고 했지요.

에스겔 선지자가 그랬잖아요.

성전은 성령이 짓는다고,,,,

 

예수님이 지금 사마리아 여자에게 그러잖아요.

내가 그 성전을 지어 주겠다고,,,

그러니 이제부터 그리심산 이다! 예루살렘 성전이다! 라는 것은 잊으라고 합니다.

그런 것 가지고 나아오는 자는 다 시기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합니다.

제발 교회 지을 생각을 하지 말고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를 알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의미를 모르면서 교회를 짓고 백날 예배를 드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충성심이 아니라 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피 흘리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놈을 위해서 벌리신 일을 아느냐? 를 묻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을 아느냐를 묻고 계신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제사를 지내면서 자기들이 죽어야 할 그 자리에 대신 어린 양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린 양의 희생에 의미를 모르고 드려지는 모든 제사와 제물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양과 소 같은 고깃덩어리 제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 속에 담겨진 사랑을 깨닫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제사와 제물에 의미는 다 잊어버리고는 제사를 드렸다는 형식만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임과 제사라면 다시는 가지고 오지도 말고 다시는 모이지도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제사와 제물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의 제사와 제물이란 하나님 앞에서는 쓰레기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헛된 제물이라고 하였고 아모스 선지자는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한 것이 아니고 마귀에게 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에게 박하와 근채와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그보다 더 중한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 소망 사랑이 없으면서 십일조를 드리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 스데반 앞에 서 있는 유대인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또한 지금 예수님 앞에서 어디에 가서 예배드리면 될까요? 라고 묻는 사마리아 여자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제는 그런 예배를 드리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드리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드리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한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란? 성령께서 진리를 의지하고 드리는 예배라는 말입니다.

 

진리란? 참 또는 진짜라는 말인데 예수님 자신이 참이고 진짜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에 대한 참이고 진짜이냐 하면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희생당한 어린양이 바로 예수님 자신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였고 바울은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양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어린양의 희생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성도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잡은 마귀로부터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령께서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예수님의 희생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예수님을 앞세우고 나아오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지금 이 시대에 적용한다면 지금도 예수님에 의미를 모르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자들은 모두가 헛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제물과 희생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 때문에 구원을 받았고 지금 누구의 은혜로 살고 있는지를 알고 있느냐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드려지는 헌신은 예배가 되는 것이지만 모르고 하는 충성과 봉사는 종교놀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뿐입니다.

예수님의 공로가 아닌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을 왕의 아들에 혼인잔치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왕은 하나님을 의미하고 아들은 예수님을 의미하며 혼인잔치 집은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곳에는 왕이 준비해 놓은 예복을 입어야만 참석할 수가 있습니다.

그 예복이 곧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천국의 모형인데 교회는 예수에 공로를 힘입고 나와야 합니다.

자기의 행함을 조금이라도 의지한다면 그는 쫓겨남을 당하게 됩니다.

 

지금은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고 살아가는 그 자체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라 하고 이런 성도의 삶을 영적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속지 말고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성전을 지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공로만 앞세우고 자랑하며 증거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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