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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 강해) 27강. 추수꾼으로 오신 예수님 <요 4:35-42>

by coroa 2022. 10. 24.

27강. 추수꾼으로 오신 예수님 <요 4:35-42>

 

 

 

 

 

 

27강. 추수꾼으로 오신 예수님 <요 4:35-42>

요 4:35-42=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39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리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들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는 것도 모두가 영생 얻기로 작정 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로선 온 산 떡이라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다고 했어요.

떡이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했다 혹은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값을 치러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나는 살았다 를 증거하지 않고 예수님 때문에 살아났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살아난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를 살려 주신 예수님을 자랑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신앙이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나로 살게 하신 분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어요.

 

이를 저는 인형극으로 표현을 합니다.

여러분 인형극을 보면 사람의 손을 인형 속에 넣고 갖가지 동작들을 표현해 냅니다.

겉으로 보기엔 인형이 움직이는 것이지만 실상은 인형 속에 손이 인형을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인형에게 야! 너 참 잘한다! 라고 하면 인형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손이 한 것입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인형극이 펼쳐 질 때는 인형 속에 손의 주인이 나서지 않습니다.

연극을 마치면 인형은 소품실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인형 속에서 연기한 인형을 움직인 주인공이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그러면 관객들은 인형극을 잘 보여주셨다고 박수를 보냅니다.

 

인형은 죽은 자입니다.

우리 역시 인형처럼 죽은 자입니다.

인형은 인형 속에 손이 들어가서 움직여질 때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우린 죽은 자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살아서 움직여 주십니다.

 

만약에 인형이 자기를 움직이는 분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연극을 자기가 한 것처럼 자기를 자랑한다고 한다면 그 인형은 불 태워질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 안에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성도라면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고 이런 말씀을 증거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 주셨기 때문에 복음을 이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이러한 사실을 늘 우리는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 모든 것에 주님의 은혜가 자랑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라면 자기를 자랑 할 텐데 새로운 피조물들은 주님을 자랑하니 다른 인간들이지요.

성도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재된 사람은 예수님의 운명과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삶으로 인도받게 되는 겁니다.

성도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인간의 지혜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도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하게 하십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자 모두가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나서게 됩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는 주와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의 능력으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자를 고칩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추종하고자 연호합니다.

베드로 당신은 대단하십니다!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 주세요! 라고 따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 앉은뱅이를 고친 것은 우리가 아니고 주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고 주 예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당신들에게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라고 이런 일들을 나와 요한을 통해서 벌리셨다고 증거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란?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 자랑하라고 성령을 주신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 운운 하면서 자기 자랑하는 사람들은 전부 도적놈들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주장하는 성령은 가짜 성령입니다.

 

누가 성령 받은 성도인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능력이란?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도 아니고, 자기 몸을 불사르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주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구별 된 자란 말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 기름부음을 행하였습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과 연관된 직임들입니다.

왕은 하나님을 대리하여 다스리는 자이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메신저입니다.

제사장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중보자입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리자 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말 속에는 기름부음을 받는 세 가지 직분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시면서, 선지자이시고, 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지만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 거부하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영접하는 자는 아버지를 영접한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고,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않고 독자적으로 나아가는 자는 예수님을 제사장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로서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곧 하나님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받아 들이수가 없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모르면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다 거짓 하나님입니다.

이를 다른 신이라고 합니다.

곧 우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하는 그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참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서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예수님의 독선으로 들었습니다.

자기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은 운운하자 하나님 참람죄로 죽여 버린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독선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

누가 이런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말을 믿겠습니까?

 

복음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통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신다는 것을 통보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는 살고 안 믿는 자는 저주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가 있습니다.

이 믿는 자들을 찾고자 복음이 독선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엔 이미 세상 임금(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도록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왕)라는 것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세상과 작별을 고하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이단 취급당하며 살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머리 둘 곳이 없고 발붙일 곳이 없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종말을 맞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감추어진 분이 되었습니다.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을 알 길이 없습니다.

알 길이 없으니 자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정보도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떠나온 에덴동산을 잊을 수가 없어요.

늘 그 곳을 그리며 살았습니다.

 

마귀는 이를 알고 아담 속에 거짓 하나님을 심어 놓았습니다.

자신을 저주하여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하나님이 아니라 좋으신 하나님일 것이라는 정보를 심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참 하나님은 인간들의 의식 속에서는 저주의 하나님이 아니라 좋으신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보았던 그 하나님이 아닙니다.

세상 신(神)인 마귀가 알려준 하나님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 신(神)인 마귀가 알려준 하나님을 다른 신(神)이고 그를 섬기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죄가 이처럼 사람들 마음속에 다른 하나님을 심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담 이래로 인간들이 알아왔던 하나님은 마귀가 심어준 가짜 하나님인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죄인이 알 수 없도록 숨어 계십니다.

진짜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가 나타나 주시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세로부터 영생 얻기로 작정 된 자들을 찾아가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들을 하십니다.

 

찾아가서 내가 참 하나님이다! 라고 알려 주십니다.

지금까지 네가 알고 있던 신(神)은 거짓 하나님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래서 거짓 하나님과 작별을 고하게 합니다.

거짓 신(神)과 작별을 고하게 하는 모습이 기존의 것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즉 격리 시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격리 되는 것을 추수라고 하는데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이 추수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를 추수하였다고 하고 제자들을 추수꾼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추수란? 갈라낸다는 말입니다.

곡식의 추수를 예로 들면 밭에서 곡간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젠 사는 동네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럼 이전에 동네와는 작별을 고하였으니 곧 그 동네에서는 종말을 맞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한 것을 추수라고 하였다면 사마리아 여자는 사는 동네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어느 동네에서 어떤 동네로 옮겼을까요?

그걸 알아야 예수님이 말씀하신 추수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러자면 먼저 하나님은 인류 역사를 통하여서 어떤 방식으로 자기백성들을 추수를 하였는가를 먼저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어디서 어디로 옮겼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럼 인류 역사를 비디오를 보듯이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합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세상으로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은 아담과 하와의 노력으로 사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곳입니다.

반면에 쫓겨난 곳에선 자기가 땀 흘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하루라도 땀 흘리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는 곳입니다.

결국 세상은 자기 노력으로 살아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아담은 선악과가 주는 정보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선악(善惡)의 법아래서 번성을 해 나갑니다.

그러다가 노아의 시대까지 옵니다.

 

여러분 노아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겼을까요? 안 섬겼을까요?

섬겼어요.

그것도 지극정성으로 섬겼습니다.

어느 시대고 인간들은 항상 하나님을 섬겼어요.

모두가 진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섬겼습니다.

단 한 번도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노아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곤 하나님의 뜻을 알려 줍니다.

이렇게 되면 노아 이외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몽땅 거짓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만 찾아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노아의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하나님과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증거하는 하나님은 기존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는 뭔가 다르겠지요.

똑 같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되니까요?

그래서인지 노아는 참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이상한 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일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을 떠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만나고 난후 뜬금없이 세상은 홍수로 멸망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에 분주하는데 노아는 홍수가 올 것이라며 방주를 짓고 있습니다.

그것도 온 식구들을 동원하여서 말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농사를 짓고 이웃들과 같이 어울리며 술잔을 기울이고 형님 동생하며 정답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갑자가 달라졌습니다.

이런 노아의 행동은 이웃사람들 눈에는 이상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묻습니다.

영감님 왜? 그러십니까?

왜? 안하던 짓을 하십니까? 라고,,,

 

그러자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찾아 오셔서 장차 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 할 테니, 방주를 만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방주를 짓고 있다고 합니다.

이웃 사람들의 입장에선 노아의 모습은 정상적이 아닙니다.

뭔가 잘못 되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나타나면 모두에게 나타나지 왜? 노아에게만 나타난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상식은 하나님이 노아에게만 나타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맞아요.

인간의 상식은 모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입니다.

혼자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허깨비를 본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사람들이 무어라 하든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섬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습이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열심히 교회를 잘 다니던 사람이 어느 날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을 받지 않고 예수님의 행함만 받는다고,,,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를 모르면 구원이 없다고,,,,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집사님 집사님 하면서 충성 충성 하던 사람이 갑자기 달라진 것입니다.

 

지금까지 안하던 말을 합니다.

입만 열면 피가 어떻고, 십자가가 어떻고, 새 언약이 어떻고, 지금까지 안하던 말들을 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집사님 왜 그러는데,,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던 예수는 가짜 예수였다고 합니다.

자기 믿음도 가짜라고 합니다.

이건 교회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곁에 있는 집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집사님 마귀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예! 맞아요.

그 사람들 눈에는 마귀가 들린 것이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참 하나님을 마귀라고 하고, 마귀를 하나님이라고 믿잖아요.

그러니 노아 이야기가 수 천 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으니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을 수가 있습니다.

도리어 안 믿는 사람들이 바보라고 하지요.

하지만 그 당시 믿음이 없는 사람 입장에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말입니다.

영락없이 망령이 난 한 노인네의 미친 말에 불과합니다.

 

누가 이런 노아의 말을 듣고 영감님 나도 방주 짓는데 동참 하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안 믿는 것이 정상이지, 믿는다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노아의 말에 동의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동의하는 그 사람이 미친 사람입니다.

아니 이 살기 좋은 세상에 심판이라니,,,

가당키나 하는 말이냐?

 

아무튼 노아는 세상에 생소한 하나님을 소개 하였습니다.

그것도 인간들을 심판한다는 하나님을,,,,

노아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세상에 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정 반대의 하나님입니다.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들을 도와주는 하나님이거든요.

 

그런데 노아가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을 도와주기는커녕 작살을 낸다고 합니다.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사람들 입장에선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농담으로 또는 공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소한 말이니 그렇게 생각 할 수밖에 없어요.

 

요즈음 말로 지금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불로 심판 하십니다! 라고 하면 정신 나간 소리를 한다고 욕을 먹습니다.

하여튼 예수쟁이들은 재수 없는 인간들이야!

무슨 놈의 심보가 좋고 잘 된다는 말은 안하고, 입만 열면 심판을 한다느니, 지옥을 간다느니 라고 재수 없는 말만 한다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니 노아의 말이나 성도들의 말은 그 시대엔 미친 소리에 불과합니다.

 

어휴! 사람 팔자는 모른다더니 저 영감이 저렇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누!

한 순간에 정신 줄을 놓아 버렸으니 불쌍해서 어쩌누!

아니 마른하늘에 날 벼락이라더니 세상에 이 쨍쨍한 하늘에 무슨 홍수가 온다고 말 같지 않은 말로 온 식구들을 저렇게 방주 짓는다고 몰아치고 있으니,,,

저 집안도 이제 기울어 가는 모양이네 그려!

그나저나 저 영감은 나이 들어 노망이 나서 그렇다고 쳐도 자식들은 아버지를 말렸어야지!

젊은 놈들이 노망든 노인네 말을 듣고 저 모양이니 아마 저 집은 터가 나빠서 그런가 봐?

온갖 소리를 다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이라면 이런 말들이 사람들 입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미쳤다고 비웃던 그 현실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미친 영감의 헛소리라고만 생각했던 그 일이 실제로 세상에 일어났단 말입니다.

노아의 식구들은 방주에 들어갔고, 방주 밖은 물난리가 나서 다 죽었습니다.

결국 노아가 만난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노아는 자기 노력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습니다.

 

노아가 홍수 속에서 살아 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것은 자기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그리고 방주 속으로 들어간 것도 하나님께서 밀어 넣어서 들어간 것입니다.

결국 방주는 노아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은혜의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자기 힘으로 살아가야하는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방주 안으로 격리 시켰습니다.

노아는 세상의 종말에서 살아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노아의 식구들은 세상 사람들과 갈라져 추수가 되어 진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책임져 주는 세상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제 홍수 속에서 살아난 노아의 후손들을 통하여 세상에 인간들이 팽창하여 전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은 홍수 속에서 살아난 노아에게 들었던 그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노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듯이 열심과 정성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엔 홍수 이전처럼 사람들이 편만하여 흩어져 마을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람이라는 사람에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일찍이 노아에게 찾아가셨던 것처럼 아브람에게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라고 하면서 찾아 간 것입니다.

아브람이 놀라서 누구세요!

나다! 니 애비다!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아브람이 깜짝 놀랍니다.

뭐요!

하나님이라고요.

그래!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 있는데요!

그 하나님은 가짜야!

마귀야!

예~ 에

아브람은 어리둥절합니다.

 

그러면서 아브람을 찾아온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예~ 에

집을 떠나라고요.

아니 지금까지 살던 집을 떠나라고요.

그래 부모도 떠나고 친척도 떠나고 고향도 떠나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근거(호적)를 뽑아내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죽으라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가심으로 다른 사람들은 자연히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이 또 증명이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들은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단 말입니다.

이제 아브람만 진짜 하나님을 알고 있고 나머지 몽땅은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아브람도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가서 아브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리곤 아브람을 복에 조상으로 삼습니다.

 

조상이란? 대표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에 새로운 종족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이름을 지어줍니다.

넌 이제부터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이라고,,,

아브람은 죽었고, 아브라함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인간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브라함이 된 것입니다.

 

이제 그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겠다고,,,

복과 저주가 인간 쪽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한 사람으로 갈라집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은 복과 저주는 자기 업보라고 생각했습니다.

착하게 살면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하게 살면 하늘이 벌을 준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한 인간을 통해서 복과 저주가 갈라진다고 하십니다.

이제부터 너희 인간들이 어떻게 살았든지 상관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다만 내가 택한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복을 받든지 저주를 받든지 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통고입니다.

 

결국 이 세상은 아브라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복과 저주로 갈라집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배웠느냐?

부자냐? 가난하냐?

남자냐? 여자냐?

어른이냐? 아이냐?

흑인이냐? 백인이냐?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오직 너 아브라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의 조건엔 일말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고 아브라함을 믿으면 복을 받고 안 믿으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상한 법칙이 세상에 던져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약에선 예수님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반발합니다.

아브라함 자기가 뭔데!

자기가 뭔데 자기를 믿으면 복을 받고 안 믿으면 저주를 받는단 말이냐!

이건 말도 안돼!

내가 잘못해서 저주를 받는다면 이해를 하겠어!

그런데 아브라함을 안 믿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이건 괴변이야!

그럼 괴변이고 말고!

 

하나님은 인간이 수긍하든 하지 않든 개의치 않고 아브라함과 한 약속대로 밀어붙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서 세상에 알리신 참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은 아브람과 하신 그 약속을 토대로 일을 해 나가십니다.

아브라함의 말을 받아들이는 자와 거부하는 자를 갈라내십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아브라함이 알고 있는 하나님 이외는 모두가 다 거짓 신(神)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으로부터 아브라함을 격리 시킨 것입니다.

인간에 행동에 의해서 복과 저주가 임한다고 믿는 세상에서 한 사람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라는 세상으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추수해 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남으로서 종말을 맞이한 것이 되고 세상으로부터 추수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세월은 흘러 흘러 430년이 지났습니다.

이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십니다.

모세를 보내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끄집어냅니다.

그리고 시내 산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곤 첫 마디가 “나 외에 다른 신(神)을 두지 말라” 고 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거짓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430년 동안 종노릇하며 살았습니다.

명분만 아브라함 후손이지 실제로는 애굽인입니다.

애굽에서 나고, 애굽에 학문을 배우고, 애굽에 방식으로 살아가는 애굽 사람과 똑 같습니다.

자연히 애굽 사람들과 같은 하나님을 알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애굽에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한 것을 기억하셔서 모세를 보내 이스라엘을 빼내 오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 나와서 비로서 애굽에서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시내 산에 강림 하신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무서운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이는 애굽에서 알던 하나님과는 정 반대의 하나님이십니다.

자신들이 애굽에서 안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좋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내 산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죽이겠다고 하는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놀랄 수 밖에 없습니다.

백성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모세에게 데모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무자비한 하나님이라면 안 따라 가겠다고 댕댕 거립니다.

백성들은 자기들을 편하게 해 주는 좋으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애굽에서 알았던 그 거짓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낯선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도 낯선 사람은 싫고, 환경도 낯선 환경이 싫습니다.

자기 몸에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 몸에 편안함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섬기던 신(神)도 늘 섬기던 방식으로 섬겨야 편합니다.

 

애굽에서처럼 늘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면 응답해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좋은 것입니다.

이것 저것 따지지 말고 그저 인간들이 열심히 빌면 복이나 주는 그런 하나님이 좋은 겁니다.

복잡하게 약속을 하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하나님은 불편하고 싫습니다.

그 하나님이 아무리 진짜라 할지라도,,,,

 

인간들은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 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날 편하게 해 주느냐? 안 해주느냐? 만 따집니다.

그리고 복잡하게 말하지 말고 단순하게 말하라고 합니다.

언약이 어떻고, 믿음이 어떻고 하지 말고 그저 빌면 되는 그런 신앙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절간에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우면 복이 온다고 가르치고,

교회에선 열심히 교회에 충성하면 복이 온다고 가르칩니다.

십자가를 몰라도 그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교회에 충성하면서 믿습니다 만 하면 됩니다.

언약을 말하면 우린 그딴거 몰라도 된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말하면 아직도 그 케케묵은 것을 말하고 있느냐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시내산에 나타난 하나님은 세세하게 간섭하십니다.

심지어 입을 것 먹을 것까지 간섭합니다.

옷을 입는 것에서부터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에 이르기까지 구석 구석 간섭을 하십니다.

누구로부터 간섭받기를 싫어하는 본성을 가진 죄인들이 좋아 할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데모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려보낼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빼내 오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값을 지불하였기 때문입니다.

흠 없는 어린양이 희생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죽이고 빼내 온 것입니다.

 

꼬라지가 그래도 이스라엘 속에는 예수님의 피가 담겨 있기 때문에 바로에게 내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들 속에 들어 있는 애굽에 사상을 뽑아내고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상을 심어 주는 일을 단행하십니다.

가짜 하나님 즉 다른 신(神)을 뽑아내고 참 하나님을 심어 주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애굽에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여지없이 징계하십니다.

그 일을 사십년 동안 해 냈습니다.

 

애굽에 사상을 가진 놈들은 전부 광야에 묻어버리고, 2세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애굽에서 태어난 인간들은 광야 사십년 동안 다 죽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엔 애굽에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광야에서 배운 참 하나님을 아는 자들만 들어갔습니다.

이론적으로 표면상 그렇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1세들은 다 죽었고 광야에서 난 2세들만 들어갔으니까요.

 

신약적인 의미에서 애굽에 1세들이 죽었다는 것은 옛 사람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2세들이 들어갔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거듭난 새 사람이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에서 난 2세들은 거듭난 새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광야에서 애굽에서 난 옛 이스라엘을 추수하신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광야를 거치면서 알았던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처음엔 그랬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광야의 2세들이 다 죽고 가나안에서 태어난 자들이 이스라엘을 이루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광야의 하나님을 모릅니다.

다만 부모로부터 들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부모가 죽자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신(神)들에게 금새 매료되고 맙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는 신(神)은 너무도 매력적입니다.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 줍니다.

광야에 하나님처럼 세세히 간섭하지도 않습니다.

너무 편합니다.

무섭지도 않습니다.

결국 그들과 동화되어 광야에서 알았던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이게 사사시대입니다.

 

하나님은 사사 시대를 끝내고 또 다시 사무엘을 통하여서 새로운 이스라엘로 만드십니다.

이름 하여 왕정시대입니다.

다윗 왕을 세워서 새로운 언약을 세웁니다.

그런데 또 타락을 합니다.

급기야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분열을 맞이합니다.

종국엔 두 나라도 다 망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이방나라에 망하게 하여 포로로 흩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남쪽 유다를 해방시켜 고토로 돌아오게 합니다.

고토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망한 것은 율법에 바로 서지 못함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온 백성들에게 율법신앙을 철저하게 가르쳤습니다.

누구든지 율법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가차 없이 유대인 세계에서 축출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예수님 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나타나셔서 도발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성전을 일컬어 강도의 굴혈이라고 합니다.

율법 신앙을 폐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합니다.

너희가 섬기는 신(神)은 다른 신(神)이라고 합니다.

 

이는 마치 구약 시대 시내 산에 나타나셔서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펄쩍 뛸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말에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한 번도 마귀를 아비라고 한 적이 없어요.

또 섬긴 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앉으나 서나 잠을 자나 깨어 있으나 오직 하나님만 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어요.

유대인들에겐 예수님이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한 것은 그들의 신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 전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즉 너희는 하나님 백성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유대인들 속에서 12제자를 선택합니다.

이젠 하나님을 율법 식으로 섬기지 말고 새롭게 섬겨야 한다고 합니다.

옛 언약을 폐하고 새 언약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제사를 지냈지만 이젠 예수님의 피로 제사를 지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이젠 율법 지킴이 아니라 예수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름하여 새 언약입니다.

이렇게 되면 12제자는 기존 유대인이라는 밭에서 뽑혀 나와 추수가 되어진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믿음이라는 동네로 옮겨진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략하게 고찰해 보았습니다.

 

그럼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왜? 인간들은 올바른 하나님을 알려주어도 시간만 지나면 거짓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가?

아브라함이 알려준 그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면 될 턴데?

왜? 자꾸만 거짓 하나님을 섬기는가요?

여러분도 의아해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우리 같으면 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 역시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을 보고 화를 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인간들이 있나!

그렇게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고 함께 해 주셨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이놈들은 인간도 아니야!

이런 놈들은 죽어도 싸다고 했습니다.

잘 뒈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보니 내가 바로 구약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도 눈만 뜨면 가짜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나도 유대인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만 구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께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고 나서 구약을 보면 주님 불쌍히 여겨 주세요!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 라는 말이 나와요.

 

신약의 성도라고 해서 다른 신(神)을 섬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다른 신(神)을 거부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세상 신(神)을 사모합니다.

세상 신(神)이야말로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세상 신(神)이란? 마귀입니다.

 

마귀가 광야에 사십일을 주리시던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주겠다고 한 것을 보세요.

전부 우리가 사모하는 것들입니다.

부자 만들어 주겠다고 하고,

세상에서 성공시켜 주겠다고 하고,

세상에서 영웅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인간들이 일평생 얻기 위해서 달음질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누구라서 이런 마귀의 제안을 거절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인간들이 다른 신(神)을 섬길 수밖에 없는 것은 다른 신(神)이야 말로 인간의 뜻을 들어주는 신(神)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신을 자연히 가까이 찾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신(神)은 인간의 육신에 소욕을 채워줍니다.

일평생 몸뚱아리에 매여 사는 인간은 이 유혹을 이겨 낼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배고픈 자에게 찾아와 떡을 주겠다고 합니다.

병든 자를 찾아와 치료해 주겠다고 합니다.

사업에 실패한 자에게 찾아와 성공을 주겠다고 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주겠다고 합니다.

몸뚱이라는 육신을 안고 있는 인간이라면 이런 마귀를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바로 믿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3장을 보면 아시아의 7 교회들에게 성령께서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모두가 책망하는 말입니다.

책망한다는 것은 틀렸다는 말입니다.

아시아의 7교회란 온 세상의 교회란 말입니다.

온 교회가 틀렸다는 말입니다.

 

처음 교회인 에베소 교회에다가 편지를 하면서 “처음 사랑을 버렸다” 고 합니다.

 

처음 사랑이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신앙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받았던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런데 처음 것을 버렸다고 합니다.

처음 것을 버렸다는 것은 처음 입력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변질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쳐준 예수가 아니란 말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경계시켰던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이 알려준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이런 일이 반복하여 일어 날 수밖에 없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은 외식으로 흐르게 됩니다.

여러분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인간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좋은 환경을 주고 가르쳐 주어도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뜻대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사는 성도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도 안 되는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 사람들은 실패를 했지만 나는 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구약 사람들의 범주를 머리털만큼도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왜 인줄 아세요?

그들과 똑 같은 죄라는 유전자(遺傳子)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도 처음엔 하나님을 진짜! 진짜 잘 섬기겠다고 하였어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땅에서 몸뚱아리 끌어안고 산다는 것이 하나님만 바라보고선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따로 삶 따로 가 되고 만 것입니다.

마음 따로 행동 따로 각각 따로 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사랑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왜? 인간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마음은 멀어 질 수 밖에 없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역시 처음에 은혜를 받고선 예수님만 섬기고 살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아골 골짝 어디라도 복음 들고 가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처음 가졌던 그 열정은 다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제 아주 잡아 잡수세요! 라고 똥배짱을 부립니다.

예수님도 내 입장 되어 보라고 합니다.

내가 뭐 예수님을 잘 섬기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줄 아시느냐?

다 먹고 사는 것이 바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이 핑계 저 핑계 핑계뿐입니다.

결국 내 몸뚱아리가 예수 보다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를 보세요.

처음 오순절 성령을 받고 모두가 은혜에 취하여 재산을 교회에다 내어 놓고 제 정신 아닌 사람처럼 살았어요.

우리도 한 때는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부흥회 다니면서 은혜를 받고 나면 나도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순교 할 것이라고 수 없이 다짐 하고 또 다짐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 열정은 다 엿 바꿔 먹었습니다.

없어요.

있는 것은 허울뿐입니다.

입만 살아서 나불나불 거립니다.

 

긴병에 효자가 없다고 하듯이 십년 이십년 예수 믿다가 보니 예수님 눈치 살피기보다 자기 살기 위해서 세상 눈치를 살피기 바빠요.

예수님이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돈을 준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눈 앞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 얼씬 거리는데 그것을 이겨낼 장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돈 냄새를 폴폴 풍기는데 어찌 마다 하겠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돈이 세상 영광이 보임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데 어찌 안 따 먹겠어요.

죽을 땐 죽더라도 일단 따 먹고 보아야지요.

나중에 산수갑산 갈 땐 가더라도 말이지요.

육신은 세상이 주는 그 달콤함을 거절할 힘이 없습니다.

 

결국 어느새 우리도 처음 사랑은 다 버린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패잔병처럼 돈에 치이고, 명예에 치이고, 권력에 치이고, 세상 쾌락에 치인 상처투성이 뿐입니다.

어느 날 문뜩 말씀 앞에 서서 자신의 이런 몰골을 보면,,,

아! 난 버림당한 자구나! 라고 탄식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마귀가 멋지게 그 성도를 이기게 된 것입니다.

마귀라는 놈은 인간의 행실에 눈을 붙잡아 두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비탄에 빠져서 자학하게 만듭니다.

그래 나 같은 놈은 지옥에 가야해!

그래서 점점 예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이게 마귀가 노리는 노림수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날 보지 않고 주 예수를 보는 겁니다.

이런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 대신 피 흘렸구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 피를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 행실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고 예수님 것으로 받는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우리 눈을 예수님에게로 돌리고 마귀는 자기를 바라보게 해요.

 

죄인이 마귀하고 싸워서 이길 장사가 없습니다.

우리는 못 이겨요.

다시 말해서 마귀가 주겠다고 하는 것들을 거절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느 인간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싫어한단 말입니까?

이건 한마디로 먹고 사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니 본능을 거부하고 산다는 것은 인간에겐 애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두가 이런 것 때문에 실패한 자들입니다.

인간은 실패 할 수밖에 없어요.

실패 안하려고 하는 그 인간이 잘못된 인간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번도 이런 것을 이기라고 한 적이 없어요.

다만 인간들이 오해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일 금식하여 마귀가 주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이긴 것을 흉내 내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예수님 흉내 내라고 하지 않았어요.

다만 주 예수님을 믿으라고 했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죄인의 세계에 합류한 것이라고 하였지요.

그러자 성령이 즉시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을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시려고 몰아냈다고 합니다.

 

마 4:1-2=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자 보세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부러 마귀에게 시험을 하라고 내 몬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을 대신하여 대표로 마귀와 한판 맞짱 뜨고 계신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실패 하였거든요.

하나님은 실패한 구약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예수님으로 선수를 교체해서 내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광야이고 그것도 인간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가지고 시험을 치느냐? 이 말입니다.

이것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한 것을 예수님께서 이기기 위함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망했어요.

실패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은 도무지 마귀를 이길 수 없으니 예수님을 자기백성들을 대신하여 내 보낸 것입니다.

가서 내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실패한 것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가 주겠다고 한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 한 것을 예수님이 이겨 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표로 싸운 겁니다.

대표 선수가 이겼으니 그 대표 선수에게 소속된 사람은 다 이긴 것이 됩니다.

인간이 꺾지 못한 마귀를 예수님이 꺾었으니 이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다 이긴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이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긴 것은 곧 성도가 이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이긴 패만 가지고 있으면 돼요.

그러니 마귀는 어찌하든지 성도를 예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합니다.

반면에 성령은 성도를 예수님에게 오공본드로 짝 붙여서 떨어지지 않게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께서 이겨낸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늘 실패하는데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긴 것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이긴 것으로 간주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 사실이 성도들에게 믿어지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였어요.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긴 것을 믿음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마세요!

그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입니다 라고 성도를 닦달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무리 소리쳐서 말려도 육신은 마치 쇠붙이가 자석에 끌려가듯이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주님 마음은 원이로되 안 됩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난 돈 없으면 못삽니다!

난 밥 먹지 않고 못 삽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괜히 하지도 못할 것을 주님의 명령이라고 예!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다 아십니다.

못 이길 것을 뻔히 아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못 지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요?

 

그건 우리의 한계를 분명하게 알게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해 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도에게 믿음이 필요한 것은 내가 싸워서 적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싸워 이긴 것을 자기 것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싸울 것 같으면 믿음이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내가 싸워 이기면 되니까요.

내가 싸우지 않고 예수님이 대신 싸워준 것을 가지고 가야 하니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은 성도에게 나 보고 싸우라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싸워서 이긴 것을 가지고 나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성경 말씀 가지고 너 이거 지켰어? 라고 물으면 우리 주님이 다 지켰는데! 라고 하라는 말입니다.

마귀가 너!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거리들의 유혹으로부터 이겨 낼 수가 있어? 라고 물으면 우리 주님이 다 이겼잖아! 라고 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단독자로 마귀에게 서면 백전백패예요.

그러나 예수님을 앞세우고 가면 백전백승입니다.

우리가 마귀가 제시하는 것들을 거절하여서 이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귀가 제시하는 것들을 거절 할 수가 없습니다.

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다 받아먹으면서 난 안되고 예수님만이 하실 수가 있어! 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앞세워야 합니다.

마귀를 이긴 예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세상을 이기는데 어떻게 이기느냐 하면 믿음으로 이긴다고 한 것입니다.

 

믿음이 뭡니까?

행함의 반대말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믿음이란? 행함의 반대말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행함은 누구 겁니까?

타인의 것입니까?

내 것입니까?

내 것이지요.

 

그럼 믿음은 누구 것입니까?

성경이 주 예수를 믿으라고 했지요.

그럼 믿음은 누구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까?

주 예수님 것이지요.

그럼 믿음 속엔 내 것이 들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당연히 없지요.

 

그렇다면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가 한 일로 인하여 희비 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믿음을 붙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행함을 붙잡고 있습니까?

행함을 붙잡고 있는 것이지요.

입술로는 믿음이라고 하지만 실제론 자기 행함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좇아갔다고 울고불고 회개 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지금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는 하나님 앞에 내가 싸운 것을 들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싸운 것을 들고 나아간다고 했지요.

그러니 여러분이 실패해도 염려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겨 주셨잖아요.

그래서 그걸 들고 나가라고 믿음도 주었잖아요.

그 믿음 안 받았습니까?

뭔 말인지 아직도 이해가 안가십니까?

 

여러분 세상을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애시당초 꿈입니다.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게 믿어지면 있으면 있는 대로 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사세요.

바울이 그랬잖아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빈궁에 처할 줄도 안다고 했잖아요.

 

요즘말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뭐든지 고생안하고 잘 살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이 지금 고생 좀 하라고 어렵게 만드는데 우린 고생 안하려고 하니 매사가 불평이 되는 것입니다.

아까 말했지요.

애굽에 신(神)은 항상 인간들에게 잘해주는 신이라고,,,

그러나 광야에 나와서 안 하나님은 우리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고생시킨다고 원망한다는 것은 애굽에 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들겨 팰 수 밖에요.

가만 두기엔 하나님께서 투자한 것이 너무 많으니까 가만 둘 수가 없어요.

 

자 그러면 에베소 교회에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는 그 책망의 의도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여러분! 내 자식을 책망 합니까?

남에 자식을 책망 합니까?

내 자식이지요.

그럼 하나님이 지금 책망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 자식이라는 말입니까?

남에 자식이란 말입니까?

하나님 자식이지요.

 

여러분이 하나님 자식 되게 해달라고 해서 하나님 자식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나님 자식을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만드셨지요.

그럼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 자식을 만들 때 우리 행동 보고 만들었습니까?

행동과 상관없이 은혜로 만들었습니까?

불쌍히 여겨서 은혜로 만들었지요.

 

그럼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하나님 자식에서 잘라내겠습니까?

안 잘라 내겠습니까?

안 잘라내야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게 되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잘못 했다고 잘라 낸다면 그건 은혜의 아버지가 아니고 법에 아버지지요.

그럼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입니까?

법에 하나님입니까?

은혜에 하나님이잖아요.

그럼 뭘 걱정하십니까?

 

은혜란 덮어주고 용서해 주는 겁니다.

은혜가 필요한 것은 안 되기 때문이에요.

잘 하면 은혜가 필요 없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은혜로 다가 오셨다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안 된다고 슬퍼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교회를 책망하는 것은 잘라 내기 위함입니까?

아니지요.

어휴! 내가 이런 인간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까?

자기 주제를 분명하게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책망하는 것은 반성하고 돌이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너희는 이렇게 틀린 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안 되는 구제불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책망 속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책망 한다고 해서 아! 나는 불효자야!

더 이상 살아서 뭣해 라고 콱 죽어 버리면 안 되어요.

자살하는 것은 엄청난 교만입니다.

자살한다는 것은 죽음으로서 자기 정당함을 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니 죄인이 정당성을 알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수치스러우면 수치스러운 데로 수치당하면서 사는 것이 자기가 죄인임을 올바로 아는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하면서 수치스럽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죄인은 수치스러워야해요.

그래야 죄인답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를 만났다고 해서 창녀라는 신분이 사라지지 않아요.

여전히 창녀입니다.

누가 창녀라고 놀려도 예! 저는 창녀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 내 죄를 다 용서 해 주셨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 겁니다.

그게 예수를 바로 만난 사람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아무리 책망을 하더라도 죽으라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아버지가 책망하면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라고 해야 해요.

자식은 부모에게 늘 빚진 자로 남아 있는 자이지, 자기가 부모 먹여 살리는 놈이 아니에요.

부모에게 늘 빚진 자라는 것을 알고 부모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는 자식이 아니에요.

 

그러니 지금 하나님이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는 것은 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담겨져 있는 놈이고 그렇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는 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실수해서 버릴 것 같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을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죄인은 아무리 가르쳐 줘도 안 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인간이 안 되기 때문에 대신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책망하는 말을 들으면서 이런 인간들을 아들이라고 붙잡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상처투성이인 탕자를 집에 두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 말씀을 잘 들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잠시 잠간은 미안하여서 아버지께 순종하는 척 하겠지만 조금만 지나 보세요.

그 본성이 또 나옵니다.

본성은 바뀌지 않아요.

 

인간이란? 반성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몸은 돌이켰다 싶다가도 금새 또 돌아가 버립니다.

죄라는 원형 복원 능력에 또 사로잡혀요.

그러니 하나님은 인간이 반성하고 회개 하였다는 것을 신앙으로 받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니 꼬라지로 나오지 말고 예수 믿음으로 나오라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처음엔 다 할 것 같아요.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것이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짐을 하지요.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좌우지간 폼 나게 끊습니다.

앞으로 절대로 예배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헌금 떼먹지 않고 제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이젠 착하게 살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물론 그 당시 각오와 다짐은 순수한 것이 맞아요.

그런데 오래 살다 보면 내가 마음먹은 대로 인생사가 살아지지 않아요.

 

만약에 백수로 있다가 삼성전자에서 일자리를 주면서 주일날 출근하라고 해 보세요.

두 말하지 않고 예! 라고 대답합니다.

거기에다가 아! 나는 성도라서 주일날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니 월요일부터 출근 하겠습니다! 라고 하지 못해요.

 

보통 백수가 되면 교회에서 살아요.

교회 모임이라면 모임은 다 참석합니다.

그 땐 엄청 믿음이 좋은 것 같지요.

하지만 취직해 보세요.

코빼기도 안보여요.

이젠 나오라고 해도 뺀돌거리면서 밍기적 거려요.

 

이걸 욕하면 안 되어요.

욕하는 그 사람은 아직 덜 당해봐서 그래요.

자기도 당해 보세요.

똑 같은 짓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이게 인간입니다.

 

마누라 도망가고 친구한데 사기당하고 집안에 차압 들어와 보세요.

그 동안 끊었던 술 이자까지 쳐서 쳐 먹어요.

그 땐 하나님도 안중에 없어요.

만약 그때 목사가 찾아가서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뜻입니다 라고 해 보세요.

귀 싸대기 올려 부칠 것입니다.

교회 오는 것 좋아하네!

아니 마누라 도망가고 친구한데 사기당하여 집구석에 전부 빨간딱지가 도배가 되었는데 쪽팔려서 교회에 오겠어요.

안 나옵니다.

그러니 처음 은혜 받아서 펄펄 뛰기 전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말짱 도루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기대를 하지 않고 인간을 믿지도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주여 내가 한국교회를 위하여 재물이 되겠습니다! 라고 하면 웃기지 말라고 합니다.

너나 잘 하세요! 라고 합니다.

여러분 어린아이가 아빠 엄마 나 나중에 커서 대통령이 되어서 엄마 아빠 잘 살게 해줄게요! 라고 하면 그 약속을 믿습니까?

그래 알았다 너나 잘해라! 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안 믿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사세요.

하나님은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헛되지 않게 하시려고 끝없는 용서만 베푸시는 것입니다.

혹여 라도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실망하실 텐데! 라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아예! 기대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지, 우리의 반듯한 행동을 보시고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제일 건방진 놈이 자기 꼬라지 때문에 교회 안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잘 말하는 내용입니다.

술 쳐 먹어도 교회에 나오라고 합니다.

술 쳐 먹어도 하나님 속상해서 한잔 했습니다! 라고 해야지요.

살기 너무 힘드네요! 하란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너 믿음 없다는 것을 들통 나게 하려고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는데,,,

하나님께 반항하라고 어려운 여건을 조성했어요.

그러면 술 쳐 먹더라도 하나님 못 살겠습니다! 땡깡 한번 부려 보란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래 뭐가 문제냐? 라고 우리한번 변론해 보자고 그럴 것이 아닙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그랬잖아요.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한번 와서 따져 보자고 그러잖아요.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신경질 나고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털어 놓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아들에 죽음을 가지고 나와서 그래 한번 말해 봐라.

내 아들의 죽음 보다 더 큰일이 있는지 한번 들어 보자고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설득하든지, 아니면 설득당하든지 할 것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예수님을 보면 아! 내가 너무 철이 없구나!

내가 이런 것 가지고 교회 오네! 안 오네! 한다는 게 얼마나 철없는 짓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런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알면 주둥이가 쑥 들어가요.

그리고 원망스럽게 여겨지던 현실도 다 배부른 투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너무도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고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는 상한 심령과 애통함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뭐가 잘 났다고 술 쳐 먹고 교회도 안 나옵니까.

나와서 말씀을 듣고 또 듣고 깨달아야 할 것 아닙니까?

왜? 예수님이 피 흘렸는지를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 행위로 구원하지 않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했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십자가 앞에서 부서지고 또 부서지고 날마다 부서져야 해요.

그래서 나는 진짜 나쁜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럼에도 꼴에 술 쳐 먹어서 미안해서 못 오겠다고 꼴값을 떨어요.

이게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가 하면 인간들이 지가 술 쳐 먹지 않으면 괜찮은 인간인줄 알아요.

술을 쳐 먹으나 안 쳐 먹으나 그 인간이 그 인간이에요.

아니 몸에 알코올 좀 들어갔다고 나쁜 놈이고, 알코올 안 들어갔다고 괜찮습니까?

그러면 천국 문에 서서 음주측정하면 되겠네요.

 

인간은 죄 덩어리에요.

마치 똥 덩어리같이 냄새 풀풀 풍기며 살아요.

똥 덩어리가 난 냄새 내지 말아야지 하면 옆에 있는 똥 덩어리가 화를 내요.

니가 뭔데 냄새 안 풍긴다고 꼴값을 떠느냐고,,,

똑 같은 똥 덩어리 주제에,,,

똥 덩어리 보고 냄새 피우지마 라고 하는 사람 없어요.

어휴! 저 냄새 나는 놈 또 왔네! 라고 합니다.

 

똥 덩어리가 냄새 안 피우려고 하는게 이상한 겁니다.

난 똥 덩어리입니다!

냄새 나니 비키세요! 라고 알려야 다른 사람이 피해를 안 봐요.

그런데 꼬깃 꼬깃 감추어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사람들이 질식해 죽어 버려요.

그러니 죄인 아닌 척 하고 살지 마세요.

그래요.

난 죄인 맞습니다.

그래서 난 예수님이 필요 합니다! 라고 하란 말입니다.

 

제발 잘난 척 좀 하지 마세요.

죄끔 헌금하고 봉사하고 충성한 것 가지고 건방떨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인간들이 꼭 있어요.

그래 난 건방떨지 않기 위해서 아무 것도 안 할거야!

괜히 해 가지고 건방떨면 예수님 공로만 가리게 되니,,,

그래서 숫제 교회에 관심 없는 인간들이 있어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애통하지 않아요.

손님처럼 주일이면 왔다가 밥 쳐 먹고 가요.

밥 값도 못해요.

 

밥 쳐 먹었으면 청소라도 하고 가야지,,,

밥 쳐 먹는 것이 뭐 큰일이라도 해 주는 냥 유세를 떨면서 음식이 맛이 있네! 없네! 타박하면서 사람들 염장을 지릅니다.

이런 인간은 더 악질이지요.

뭐하느라고 아무것도 안합니까?

등신같이!

 

뭐라고 하면 주둥이만 살아가지고 행함으로 구원 받나요 믿음으로 받지! 라고 주워들은 것은 있어가지고 꼴에 나불거려요.

그래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면서,,

예수님의 피 공로를 안다는 인간이 그래요,,

참으로 믿음이 대~단 하십니다.

경외 드립니다?

 

제가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그 십자가 피에 공로를 아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당신 돈 몇 푼만도 못하고 당신 땀 몇 방울만도 못합니까?

당신의 그 알량한 충성을 이끌어 내지도 못한단 말이냐 이 말입니다.

그게 그럴게 아깝습니까?

 

그래서 예배도 안 나오고, 헌금도 안하고, 봉사도 안하고,,,

이것도 안하고,, 저것도 안하고,,,,,온통 안하는 것 투성입니까?

그럼 당신이 하는 것이 뭡니까?

쳐 먹고 노는 것입니까?

말씀 홀라당 받아먹고 나는 다 안다! 라고 합니까?

그래 그걸 믿음이고 신앙이라고 붙잡고 있느냐? 말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둥이만 나불거리는 믿음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한다고 해요.

 

야고보서가 그랬어요.

 

약 2:17-20=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보세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잖아요.

죽은 믿음이니 말씀 받아 쳐 먹고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먹은 것도 아니지요.

귀로 들은 것이지 입으로 먹은 것이 아니에요.

행함이 도출되지 않는 믿음은 한마디로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믿음도 아닌 것은 본인은 믿음이라고 붙잡고 있는 겁니다.

 

초대교회도 이런 인간들이 교회 안에 있었어요.

입만 나불거리는 인간들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입만 나불거리는 놈들은 죽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했어요.

여러분 난로에 불을 피우면 곁에 가면 뜨끈 뜨끈 해야 정상이에요.

마찬가지로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믿음이 있으면 그 은혜가 가만있지를 않고 뭔가 토해내게 만들어요.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이란? 믿음이 토해 내는 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너 살았느냐?

그러면 손가락 한번 움직여 봐라!

니 속에 은혜가 있느냐?

그럼 한번 움직여 봐라!

 

은혜를 받았으면 뭔가 토해내는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나를 감동케 해서 너무 너무 고맙고!

너무 너무 감사해서 사무치게 하니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뭔가를 토해내게 만듭니다.

성도를 섬기고, 봉사도 하게하고, 헌금도 하게하고, 주일날 이면 일찍 일찍 나와서 교회 청소도 하게 하고, 성도님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평상에 안 하던 짓들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바울이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욕 들어가면서도 복음을 전한 것은 자기 속에 은혜가 가만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복음을 몰랐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 이 복음을 한 사람이라도 더 알려야겠다는 일념뿐이었어요.

바울은 자기가 행한 것을 행함이라 하지 않았어요.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어요.

바울은 은혜를 토해 낸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조금 합시다.

전 제 블로그의 글들이 이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줄을 몰랐어요.

알다시피 제 블로그를 개설한지가 이제 석 달 좀 지났어요.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여기저기서 연락이 와요.

 

메일로도 오고, 문자로도 오고, 전화로도 오고,,,

미국에서도 오고, 전국적으로 와요.

난 놀래서!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가 있나!

요즈음은 거의 매일 옵니다.

 

그 분들이 하는 이야기가 너무 너무 감사하다는 겁니다.

너무도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겁니다.

너무 알기 쉽게 풀어 주셔서 고맙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인 고백들이 제 설교를 읽으면서 너무 너무 많이 운다는 겁니다.

 

어떤 분은 아침에 눈 뜨면 컴퓨터 켜서 제 설교를 읽는다는 겁니다.

하루 종일 설교 읽는 것이 일이라고 해요.

이런 전화를 받으면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전 내 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잖아요.

어디 많이 배우기를 했나요.

똑 똑 하기를 하나요.

그져 소리만 지를 줄 알았지, 허물투성이잖아요.

 

그럼에도 말씀을 통하여서 은혜를 받는다고 하니 감사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반면엔 굉장한 부담감을 느껴요.

야! 더 많은 글들을 올려야 하겠구나!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되겠구나!

 

그러니 허리가 끊어지게 아파도 글을 써야 하는 겁니다.

재주가 없어서 설교 한편 쓰려면 몇 일이 걸립니다.

보고 또 보고 교정하고 하다가 보면 그렇게 걸려요.

설교를 함축적으로 축약해서 간단하게 쓰면 행여 이해하지 못할까봐서 어떻게 하든지 이해하기

 

쉽게 쓰려고 하다 보니 길기는 얼마나 긴지 몰라요.

이런 일은 수고가 아니고 은혜이고 기쁨이에요.

행복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전 이런 분들의 심정을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제가 과거 율법 아래 있다가 복음에 대하여 처음 눈을 뜨고 엄청 많이 울었거든요.

너무 행복해서 울고, 너무 기뻐서 울고, 그 행복을 잊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을 받지는 않아요.

그러나 구원받은 믿음엔 반드시 행함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믿음을 온전케 한다고 한 것입니다.

온전케 한다는 말은 증거한다는 뜻입니다.

 

아! 저 사람 저러는 걸 보니 믿음이 있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걸 보니 어쭈 저놈 믿음 있네! 라고,,,

제법인데!

저 놈 언제 저렇게 되었지!

 

하나님은 성도가 은혜를 토해내는 것을 보고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그건 행함이 아니라 은혜이고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흘렀는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갑시다.

 

그러니 지금 에베소 교회를 책망한다는 것은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책망하는 것입니다.

자식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잔소리하는 것입니다.

잔소리 한다는 것은 포기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히 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 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채찍질하고 징계한다고 하셨습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하였어요.

그러니 책망한다는 것은 아들로 대우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책망을 들어도 아들에 신분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나와 있는 불신앙적인 것들을 남의 이야기로 보면 안 됩니다.

모두가 내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께 용서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이런 못난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피 흘려주셨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잊는 순간 인간은 자기 자신을 치장하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치장하려고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은혜를 잊는 순간 맏아들처럼 자기 행함을 자랑하게 됩니다.

은혜를 잊는 순간 아버지에 대한 감사가 사라지고 용서로 살고 있다는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아버지 앞에서 자기 행위로 난 이렇게 살았고 저렇게 살았다고 내세우게 됩니다.

 

좋은 신앙이란? 내가 변하여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깊이 알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아들까지 죽여주신 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사는 모든 저변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공로가 깔려 있어야합니다.

아! 오늘도 내가 주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용서 받고 사는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그 용서가 관대함을 낳게 하여 남을 이해하게하고 배려하게 하는 겁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자는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란? 윤리 도덕적으로 완벽한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 은혜를 주변에 사람들에게 증거하며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치 않는 자는 신자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피를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피를 잘 간수하여야 합니다.

그 피에 고마움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전에 말씀 드렸지요.

좋은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다른 것을 섞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것은 아들 입니다.

“아들에 피” 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새 언약” 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믿음입니다.

 

여기에 다른 것이 섞이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것이 섞이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는 것은 인간의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여러분이 마귀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에 뭔가를 섞으려고 하지 않겠어요?

어떻게 하든지 변질시키려고 할 것이 아닙니까?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으로 변질 시키고자 하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야 인간들이 거짓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늘 인간들에게 나타나 너희들 또 다른 것을 섞어 놓았네! 라고 책망하고 갈라내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를 어디서 어디로 옮겼는지를 살펴봅시다.

 

사마리아 여자는 죄인입니다.

창녀가 죄인이라는 것은 누가 알려 줍니까?

율법이지요.

그럼 지금 사마리아 여자가 죄인으로 취급당하고 있는 세상은 법에 세상입니까?

은혜의 세상입니까?

법의 세상이지요.

 

사마리아 여자는 율법의 판단으로 보면 분명하게 저주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사마리아 여자와 같은 운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율법적 기준으로 보면 사마리아 여자는 사망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이제 꼼짝 없이 지옥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찾아 오셔서 전혀 다른 세계로 옮겨 버립니다.

인간의 행동으로 인하여 추궁당하는 곳이 아닌 용서하고 닾어주는 곳으로 옮겨 버립니다.

예수님이 옮겨 놓은 곳은 인간의 행동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무조건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어 주는 곳입니다.

 

인간의 행동을 인간에게 추궁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추궁하는 이상한 나라입니다.

인간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져 주는 나라입니다.

이름하여 은혜의 나라입니다.

은혜의 나라에선 인간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용서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잘못한 것을 예수님이 대신 다 담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 값을 받아 내야하는 하나님 입장에선 인간이 치러야 할 죄 값을 예수님에게 받았기 때문에 전혀 손해 될 일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재벌 회장이 아들이 저지를 모든 잘못을 미리 알고 이웃들에게 갚을 치러 준 것과 같습니다.

이 부실한 인사가 맨 날 사건과 사고를 칩니다.

태생이 온전치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재벌 회장은 이웃 주민들에게 우리 아이가 부실하니 혹시라도 유리창 깨거나 차에 흠집을 내거나 남에 것을 훔쳐 먹거나 좌우지간 그 어떤 일들을 하더라도 그 값은 내가 다 지불 할터이니 용서 해 달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 이 여자가 앞으로 그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내가 다 갚아드릴 것이니 용서 해 주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받아야 할 죄 값을 예수님에게 받기로 계약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약속을 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담보로 약속하셨습니다.

그 값을 십자가에서 이미 다 치렀습니다.

 

그리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일러 줍니다.

앞으로 네가 그 어떤 잘못을 하였다 하여도 내가 다 갚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말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은 그 어떤 율법적 요구가 있더라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을 내 세워야 합니다.

누가 너 그따위로 살아서 천국에 가겠느냐? 라고 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내 죄를 다 담당해 주셨기 때문에 난 당당하게 간다고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제가 잘못 했습니다.

앞으로 잘할게요.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하고 다시는 안 하겠다는 것 하고는 달라요.

 

죄는 부끄러워하여야지요.

그러나 죄를 안 짓고 살겠다고 하진 말란 말입니다.

우린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피 흘려 죽어주신 것은 우리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잘 할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그 마음대로 살지 못하는 중풍병자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도 그 짓을 기어이 하고야 마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 가능성이 단 0.00001% 라도 남아 있었다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을 보내 주셨다고 합니다.

즉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 주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망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선 자기에게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은 악이 되는 겁니다.

 

설교도 여러분도 열심히 하면 될 수 있습니다! 라는 식으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는 것은 악한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말씀이라도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신 은혜를 훼손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여자는 사람들이 창녀라고 놀려도 예! 저는 창녀가 맞습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입니다.

하지만 저 같은 이런 못난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피 흘려주셨다고 해야 합니다.

 

창녀란 직업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남정네들과 술을 마시고 몸을 팔고 살았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만 둘 수도 없습니다.

하루 하루 남자들을 상대하지 않으면 목에 밥을 넘기지를 못합니다.

부양할 가족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벌지 않으면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그 일을 합니다.

 

창녀 노릇하지 말고 다른 일을 하면 안 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일을 해서 먹고 살 수 있었으면 누가 창녀노릇을 하고 있겠습니까?

오죽하면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줄 알면서도 그 짓을 하고 있겠습니까?

법, 법 하는 사람은 사마리아 여인의 행동만 가지고 죄인으로 몰아세웁니다.

그러다 보니 사마리아 여자와 같지 아니한 자신들은 의로운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앞에 간음 중에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죽여야 된다고 참소 하였던 것입니다.

간음 안한 자신들은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인간은 간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한 것입니다.

참소하던 자들이 다 돌아갔다는 말은 자신들도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역시도 간음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신약에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간음이라고 합니다.

 

약 4: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세상에 세상과 벗된 것이 간음이라고 합니다.

아니 세상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이 세상과 벗이 안 되고서 어찌 산단 말입니까?

결국 우리는 입술로 주님 주님 하면서도 간음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죽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은 모두가 우리 대신 매를 맞아 주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똑 같이 세상을 벗 삼아 삽니다.

그럼 둘 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자와 불신자를 차별해서 대하십니다.

신자는 용서해 주고 불신자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자에겐 대신 맞아 주신 분이 계시고 불신자에겐 대신 맞아 주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대신 맞아 줄 분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야! 이제부터 내가 네가 당할 수모를 대신 당해 주겠다고,,,,

그러니 누가 너를 죄인이라고 하면 내 죄는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셨다고 하라고 합니다.

이제 성령이 부어지면 너 같이 자신이 죄인이고 예수님 때문에 살았다고 하는 자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보라! 밭이 희어져 곡식이 익었다고 하십니다.

희어졌다는 것은 잘 익었다는 말입니다.

곡식이 잘 익었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젠 추수를 할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추수꾼으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심어 놓은 것들을 추수하라고 하십니다.

이런 사실을 세상에 알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세전에 구원주기로 작정 된 자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복음으로 찾아내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복음을 전하면 성령께서 알아서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들을 불러 모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 하나가 나오는데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것만 하고 끝낼게요.

여러분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너희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주어졌잖아요.

이 이야기는 시간 시간마다 하는 이야기이니 잘 아시겠지요.

 

그러면 율법이라는 시험지의 정답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그럼 누가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 됩니까?

세리입니까?

바리새인입니까?

 

세리는 자기가 죄인임을 알았어요.

하지만 바리새인들을 자기가 죄인임을 몰랐어요.

그럼 바른 정답을 쓴 사람은 누구 입니까?

세리이지요.

지금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 사마리아 여자는 율법을 너무도 완벽하게 지킨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요?

자기는 죄인임을 알고 그리스도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따라가면 누가 나오는가 하면 예수님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자기 죄를 위하여 죽어주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자가 율법을 잘 따라 온 것이 됩니다.

잘 익은 것이 됩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사마리아 여자는 잘 익은 열매이고,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은 익지 않은 과실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를 추수하여 먹은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서 누구에게로 관심이 모아졌습니까?

그리스도라는 메시야 였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이 여자와 나눈 대화는 무슨 역할을 하였습니까?

율법 역할이지요.

즉 예수님께서 여자의 추한 과거사를 들추어 낸 것은 넌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율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사마리아 여자는 맞습니다! 난 죄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가 오셔서 내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제사를 지내는 참 성전을 알려 주실 것을 기다립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내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하셨잖아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들은 사마리아 여자가 어떻게 했어요.

물동이 다 내팽개치고 동네에 들어가 나 메시야를 만났다고 미친 여자처럼 날 뛰어 다닌 것이 아닙니까?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꼬라지가 수치스러워서 사람의 눈을 피해서 아무도 없는 시간에 물을 길러 왔는데,,,,

예수를 만나고 보니 자기 수치는 간 곳이 없고 오로지 예수님 안에서 의로워 진 것만 보이니 난 이제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것입니다.

이게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만난 사람들은 자기 꼬라지를 안 봐요.

 

그래서 예수님은 야! 이 여자가 너무도 잘 익었네! 라고 추수하여 따서 잡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추수나 종말이라는 것은 복된 소식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종말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이는 종말을 끝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론적 입장에서 종말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과거로부터 단절하는 것입니다.

 

추수를 한다는 것은 다른 세상으로 옮긴다는 말입니다.

추수하여 곡간에 들인다고 하잖아요.

그럼 밭은 세상이고 곡간은 천국이 되겠지요.

이걸 마귀 안과 예수 안으로 표현한다면 밭은 마귀 안이고 곡간은 예수 안이 되겠지요.

교회론적으로 말하면 밭은 세상이고, 곡간은 교회를 말하는 것이 되지요.

 

그럼 교회는 어떤 세상입니까?

인간의 행동으로 판단하는 곳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용서하심에 은혜로 판단하여야 하겠지요.

그럼 교회를 헤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죄다 의다 판단하는 법이겠지요.

하나님의 은혜성이 사라지면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교회는 그 어떤 사람도 정죄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피로 값 주고 산 곳이라고 한 것입니다.

용서가 필요한 것은 늘 잘못을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예수님의 피가 있다는 것은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막에 보면 뜰에 물두멍이 있습니다.

그곳엔 항상 물을 가득하게 채워 놓습니다.

그 이유는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으라는 것입니다.

항상 물이 물두멍에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은 늘 더럽다는 말입니다.

이미 더러울 줄 알고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안 더러워지려고 하지 말고 더러워도 씻을 물이 있지 라고 안심하여야 합니다.

더러워지면 안 되는데 라고 노심초사하며 살면 물두멍을 준비하게 하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공연히 물두멍을 만들게 한 것 밖에 안됩니다.

 

물두멍을 예수님의 피라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예수님의 피를 둔 것은 죄를 씻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씻고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너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고 나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를 받았습니다.

목사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고, 장로 집사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습니다.

1년 믿은 성도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고, 50년 믿은 성도도 예수님 피로 용서 받았습니다.

교회 안에는 자기 공로로 구원을 받았다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은혜를 가리는 자는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선 목사다 장로다 집사다 1년 믿었다 50년 믿었다 라는 것은 전혀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자랑되어질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뿐이어야 합니다.

예수님 피 외에 그 어떤 것도 교회 안에선 자랑되어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피를 폄훼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마귀입니다.

용서하심을 훼손하고 은혜성을 깨트리는 자는 쫓아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지만 다른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세상으로 옮겨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추수가 되었으면 세상의 판단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데 누가 정죄를 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도는 그 누구도 정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모든 정죄로부터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용서 받았습니까?

그러면 남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이 행함으로 판단 받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남도 행함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법으로 판단 받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남도 법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성도가 토해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이고 용서뿐입니다.

용서가 나오고 은혜가 나오면 당신은 추수가 되어 다른 세상에 옮겨진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고 수십 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용서가 나오지 않고 정죄가 나오고 은혜가 나오지 않고 법이 나온다면 당신은 가짜입니다.

짝퉁 성도입니다.

 

짝퉁인 당신을 하나님은 당신이 행한 그 법으로 판단하실 것입니다.

긍휼을 받은 자는 긍휼을 토해 낼 것이고 긍휼을 받지 못한 자는 법을 토해 낼 것입니다.

결국 자기 행위가 자기 신앙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긍휼 없는 자에겐 긍휼 없는 심판을 하고 긍휼 있는 자에겐 긍휼 잇는 심판을 행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약 2:12-13=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는 모두가 주의 긍휼하심으로 추수가 되어진 자들입니다.

법에 의하여 정죄 당하던 곳에서 은혜로 한없는 용서와 자비를 받는 세상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사마리아 여자처럼 동네 방네 자랑하고 다녀야 합니다.

증거하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창기 같은 저희들을 그리스도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앞으로 살아가는 날 동안 이 결코 정죄 할 수 없는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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