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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 30강. 하나님 약속을 믿게 하는 믿음 (롬 4:17-25)

by coroa 2022. 9. 17.

 

30강. 하나님 약속을 믿게 하는 믿음 (롬 4:17-25) 롬 4: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30강. 하나님 약속을 믿게 하는 믿음 (롬 4:17-25)

롬 4:17-25=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義)로 여기셨느니라 23 저에게 의(義)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義)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은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 본문을 설교를 하는데 문자적 설교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아브라함이 마치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신다고 할 때에 척 알아듣고서 아멘! 하면서 믿은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교인들에게 여러분들도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라고 결단을 촉구하고 열심과 충성을 요구합니다.

과연 그러한가요?

과연 이 말씀이 교인들로 하여금 충성케 하고 열심을 독려하는 말씀인가 탐사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과 다른 열심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럼 유대인들의 전철을 밟게 되어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열심이 도리어 하나님 이름을 이방인에게 모독당하게 하였어요.

 

신앙은 열심과 충성이 먼저가 아니고 앎이 먼저에요.

올바른 앎으로 행할 때 올바른 신앙이 됩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먼저 앎이 없으면 인간의 상식으로 해석하게 되어요.

그럼 아브라함과 사라를 본받으라고 소리친단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보면 그렇게 이해하기가 십상입니다.

봐라!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었음에도 하나님이 아들을 준다고 하니까!

의심 없이 믿었지 않았느냐!

그래서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義)로 여겨 주셨다! 라고 해석을 해 버립니다.

 

여기서 의아해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과연 그러한가에요.

창세기를 보면 본문과는 전혀 다른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준다고 할 때 도리어 비웃었음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를 보고 갑시다.

 

창 17:17-19=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리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웃기지 마세요!

지금 내 마누라 사정이 어떤 줄이나 아십니까!

경수가 끊어진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죽은 나무와 같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아이를 낳는단 말입니까!

난 못 믿겠으니 그냥 여기 있는 이스마엘이나 데리고 살겠습니다! 라고 하였어요.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말씀에 예! 하고 믿은 구석이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께서 이삭을 준다고 할 때 믿은 것이 아니고 도리어 안 믿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말씀에 비웃었어요.

비웃었다는 것은 조롱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내용을 근거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능통한 바울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어요.

그럼에도 어째서 로마서에서는 창세기와 전혀 상반된 것처럼 이야기를 할까요.

 

바울이 진짜로 상반된 이야기를 했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상반되게 이해를 하고 있을까요?

저는 우리가 바울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본다면 창세기의 증거와 로마서의 증거는 모순처럼 들려요.

이 모순을 극복하지 않고 설교를 하게 되면 창세기에서의 설교와 로마서의 설교는 서로 모순으로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해석이 문자적으로 하면 이해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그럼 성경은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만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령은 구약과 신약을 같은 사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면 하나의 줄거리로 보여요.

문자 뒤에 숨겨진 것이 보여요.

그럼 신 구약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로마서를 통해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된 것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얻은 의(義)는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이야기 해 왔습니다.

인간의 행위와 반대를 믿음으로 이야기 해 왔어요.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행위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를 믿도록 일하시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어지게 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가 의지적으로 믿습니다 라는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행위와 상관없이 의롭게 해 주는 그 믿음을 말하는 것이에요.

 

로마서 1장 17절을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는데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 고 하지요.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어요.

복음이 뭡니까?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복음의 내용은 예수를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행동을 하여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요.

그런데 인간의 이성은 자기가 한 것을 믿음으로 내어 놓아요.

예수님이 한 것은 예수님이 한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과 나는 타인(他人)이에요.

 

그러니 육적으로는 예수를 믿어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지식으로는 이해는 하겠는데 마음으로는 믿어지지가 않아요.

이걸 믿어지게 하는 것이 믿음이에요.

믿음이 와서 예수님이 하신 일이 자기를 위한 일임이 믿어지게 해 주어요.

예수님과 자신이 하나라는 것을 믿어지게 해 준단 말입니다.

 

그럼 믿어지게 해 주는 그 믿음으로~ 우리는 예! 예수를 믿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상하게 거부감 없이 믿어져요.

예전에는 아무리 믿고 싶어도 안 믿어졌는데 믿음이 오니까 이젠 이상하리만치 의심 없이 술술 믿어진단 말입니다.

 

이걸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른다고 해요.

믿음이~ 믿음으로 이끈단 말입니다.

믿음으로~ 우리가 믿습니다! 라고 입으로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앞에 있는 믿음은 마음으로 믿어지게 하는 믿음이고, 나중에 믿음은 입으로 시인하는 믿음이에요.

 

로마서가 말하는 믿음은 앞에서 예수가 마음으로 믿어지게 해 주는 그 믿음을 말해주고 있어요.

앞에서 믿어지게 해 주는 그 믿음으로 믿는다고 하는 것을 의롭게 여겨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엄청 중요한 것이므로 오늘은 집중적으로 이 이야기만 할 것입니다.

잘 이해 하셔야 해요.

 

지난 시간 아브라함이 언제 의롭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의롭게 되었느냐!

할례시냐!

무 할례시냐!

무 할례시가 아니냐! 라고 했습니다.

 

무 할례시란? 할례라는 행위와 상관없을 때란 말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할례와 상관없이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얻은 의(義)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과 행위를 서로 대척점에 두고 말하고 있어요.

즉 행위의 반대를 믿음으로 말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걸 간과하지 마세요.

 

이걸 놓치면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들이 마치 믿어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들이 믿어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아요.

도리어 그 반대에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불신 하였음에도 그 불신을 넘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내신 그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믿음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붙잡고 하나님 약속을 이루어내시는 그 믿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로마서의 주제가 뭡니까?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말하잖아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오늘 본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은 항상 우리의 죄를 고발하면서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있음을 말하지 않고 도리어 우리의 믿음 없음을 고발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일을 할 때는 우리의 믿음 있음이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믿음 없음이 드러나게 되어요.

 

이게 아주 역설(逆說)이에요.

많은 분들이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해요.

특히 성화주의자들은 여기에 대하여 소경이에요.

 

성화주의자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자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문자적인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을 하였으니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쳐요.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건 간과하고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전형적인 육에 속한 자들이 성경을 보는 안목이에요.

 

이렇게 성경을 해석한 자들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은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근거로 예수를 죽였어요.

아니 율법으로 예수를 만나야 하는데 도리어 예수를 배척하고 죽였어요.

그것도 율법을 근거로 말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 말씀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이 나와야 하는데,

도리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예수를 안 믿어요.

하나님 말씀 앞에서 믿음이 나와야 하는데 도리어 자기 행함이 나온단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도와주소서! 라고 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주여 제가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의 무가치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도리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난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말씀을 하신 의도와는 전혀 다른 답을 내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을 주어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데,

성화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자기 의(義)를 쌓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 유대인들과 똑 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그 바탕엔 '우린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라는 불신이 깔려 있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아니~ 못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예수를 믿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하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주신 것이에요.

우리가 믿을 수 있었으면 믿음을 선물로 주실 필요가 없어요.

그냥 믿으면 되니까요.

우리가 못 믿으니까 믿게 하는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 바탕엔 우리의 믿음 없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린 예수를 안 믿습니다!

'아니~ 못 믿습니다!' 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은혜에 속한 것이 되는 것이에요.

우리 행위가 아니고 믿음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일을 하세요.

'믿음으로~' 일을 하신다 함은 우리를 부정하면서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곳에는 항상 우리의 믿음 없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이 드러나요.

 

로마서 11장을 봅니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놓고 긍휼을 베푸시는 식으로 일을 하신다고 하지요.

죄인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안 되어요.

하고 싶어도 본능적으로 안 되어요.

그래서 죄인인 겁니다.

 

만약에 우리 힘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될 것 같으면 전적인 타락을 말할 수가 없어요.

50% 죄인이고,

50%는 의인이라고 하여야 해요.

 

그러나 성경은 온 몸과 마음이 다 썩었다고 합니다.

너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합니다.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란 말은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다 썩은 것이란 말입니다.

 

이런 상태가 불 순종 가운데 가두어진 상태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배경에는 항상 우리의 불순종이 깔려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오늘 본문을 이야기 하는데 거기서는 믿음으로 사라가 늙어 단산하였음에도 아들을 낳았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라는 말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지 않았음에도 믿음이 주체가 되어서 죽은 사라의 몸에서 이삭을 낳게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 히브리서 11 장에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은 것이 아니고 안 믿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안 믿었지만 하나님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내더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믿으세요! 라고 한단 말이에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많은 분들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반대로 설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대 부분의 개혁주의 설교가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교인들의 신앙이 '무엇을 믿을 것인가!' 에 포카스가 맞추어지지 않고,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라는 자기 행위에 포카스가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는 유대교 신앙이에요.

이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사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도 히브리서 식으로 이해하여야 올바른 해석이 되어요.

그렇게 되면 문자풀이식 해석과는 역설적인 해석이 됩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대목이 하나님이 “의(義)로 여기셨다” 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여러 번역본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을 가장 잘 언약적인 관점에서 번역한 것이 “새번역”이에요.

분명하게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가장 근접하게 번역해 놓아서 인용을 합니다.

8개 대조 신약 성경 중에서 “새번역”을 참고로 인용합니다.

 

롬 4:18-22= “아브라함은 소망이 끊어진 때에도 믿고 바랐기 때문에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게 되라라 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19) 그는 나이 백 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고 있었으나 그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의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는 가운데 굳건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21)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라라고 확신했습니다. 22) 이렇게 해서 그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19절에 보면 밑줄을 친 빨간 색으로 된 부분을 잘 보세요.

자신들은 이미 죽은 몸과 같아서 이삭을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고 하지요.

여기서 “그의 믿음이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은 믿음이 아니고 그들의 불신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내는 믿음을 말해요.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내는 그 믿음이 그들이 믿든 믿지 않든 개의치 않고 약해지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약해지지 않았다는 말은 믿음이 쉬지 않고 일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었다” 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합니까?

그 믿음이지요.

이 믿음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었다는 믿음이 아니에요.

사라의 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내는 믿음이에요.

이해가 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義)로 여기신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음에도 의(義)로 여기셨어요.

무엇으로 그랬나요?

'믿음으로' 에요.

 

무슨 믿음입니까?

아브라함과 사라 속에서 일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행위가 아니고 은혜에요.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아니고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 이미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어요.

부르심 속에는 이미 행위와 상관없이 의로움이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얻은 의(義)는 행위가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다른 말로 은혜라고 해요.

 

아브라함의 의(義)가 믿음에서 주어진 은혜가 되려면 아브라함은 안 믿었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안 믿었는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고 하여야 아브라함이 얻은 의義)가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주어진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말해주고자 함이에요.

그러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이 아브라함을 의롭게 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을 간섭하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행위와 상관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믿어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어요.



“믿어서”는 행위이고!

“믿음으로”는 은혜에요.

 

만약에 아브라함이 '예! 알았습니다 믿을게요!' 라고 하여서 의롭게 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행위가 되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야~! 아브라함아 이삭을 줄게 믿어라! '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척 알아듣고 '예! 믿겠습니다!' 라는 것이 된단 말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믿는 것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되어요.

이건 아니에요.

 

그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야~! 아브라함아 이삭을 줄게 믿어라!'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 우리가 지금 어떤 처지인지 아십니까!'

사라는 이미 죽은 몸입니다!

그런데 어찌 아이를 생산 한단 말입니까!

우린 하나님 말씀을 믿고 싶어도 도무지 못 믿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비 웃어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비웃음을 뒤로 하고 믿음으로 이삭을 낳게 했어요.

이럴 때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은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낳은 것이 됩니다.

그럼 이삭의 출생 속에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순종과 오직 믿음이 일을 한 하나님의 은혜만 오롯이 담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그대로 적용해 보세요.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성경은 우리는 예수를 안 믿었는데!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믿는 믿음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로 예수를 믿게 해 주셨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요.

이걸 놓치면 안 되어요.

 

이걸 놓치게 되면 신앙생활을 우리가 뭔가 자꾸만 붙잡고 지켜야 하는 식으로 나아가요.

그러나 신앙은 우리가 붙잡고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로 붙잡아 주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믿어서”와 “믿음으로”는 천지 차이에요.

“믿어서”는 인간의 가능성이지만,

“믿음으로”는 인간의 불 가능성을 깔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25절을 보면

'예수는 우리의 범죄(불순종, 믿지 않음)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못 믿어요.

그런데 믿고 있어요.

아니~ 믿어져요.

 

믿어지기 때문에 믿고 있는 것입니다.

믿어지게 해 주시니까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누가 믿어지게 해 줍니까?

믿음이에요.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主)라 시인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케 하는 것은 성령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는 그 믿음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인 것입니다.

이걸 선물로 주신 믿음이라고 합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걸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믿음으로 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를 후사는 율법에 의(義)를 가진 자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義)를 얻은 자들을 통해서 이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안 믿었는데 믿어지는 자들이 후사라는 말입니다.

 

안 믿었는데~ 믿어진다!

무슨 뜻입니까?

난 안 믿었는데~ 믿음이 와서 믿어지게 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은 내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이 믿음에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갈 후사들이에요.

 

알다시피 오늘 본문은 그 후사이야기를 이어서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게 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의(義)로 여겨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이걸 이해 하셔야 이 시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롭게 되라고 하는 성화주의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반 복음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저는 성화주의자들이 충정은 이해를 해요.

그러나 충정이 좋다고 해서 옳음이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신앙이란? 충정의 싸움이 아니고 옳음의 싸움입니다.

의에 싸움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에 의(義)가 어디에 있는지!

그 의(義)를 믿고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믿음이 뭐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몸에서 자식을 낳게 된 것을 믿는 것이에요.

 

이 말씀을 잘 이해하셔야 해요.

언뜻 들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한 것처럼 들리는데 그게 아니에요.

이건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을 붙잡고 있는 믿음을 말해요.

즉 이삭을 낳게 하신 그 믿음을 말하는 것이에요.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준다고 할 때 분명하게 안 믿었어요.

그 증거물이 바로 이삭이에요.

 

이삭이라는 이름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안 믿었다는 증거물이에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안 믿었지만 사라는 이삭을 낳았어요.

안 믿었는데 하나님께서 약속이 이루어졌어요.

 

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내는 것이 바로 믿음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으로 이삭을 낳았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고 갑시다.

 

히 11:11-12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잘 보세요.

사라가 비록 단산하였지만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고 하지요.

이는 믿음이 이삭을 잉태케 하였다는 말이에요.

사라가 믿었다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라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그 믿음으로 늙어 단산한 사라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사라가 불신 하였음에도 하나님의 믿음이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인 이삭을 낳게 하더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붙잡고 일하시는 그 믿음을 말하는 거에요.

 

봐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불신하였음에도 하나님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음이 성취하여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것을 아브라함의 몸에 이루었는데 하나님은 이것을 저에게 의(義)로 여기셨다는 말이에요.

아브라함은 가만히 있었는데 하나님이 믿음으로 일을 다 해 놓고서는 아브라함에게 야~ 넌 어쩜 그렇게 믿음이 좋으니! 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마치 공부 못하는 아이가 시험을 쳤는데 백점을 받았어요.

어떻게 받았는가 하면 그 아이를 가르치는 과외 선생님이 대신 시험을 쳐 놓고서는 그 아이에게 넌 어쩜 그렇게 공부를 잘하니! 라고 칭찬하는 것과 같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공부 못하는 아이는 어떤 반응을 하겠습니까?

자기가 잘 했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선생님을 자랑하겠습니까?

선생님을 자랑하겠지요.

 

자기 자신은 알아요.

자기가 시험을 친 것이 아니란 것을 말이에요.

그런데 분명히 시험지는 백점을 받았어요.

 

사람들은 시험지만 보고 그 아이에게 너 공부 잘한다고 칭찬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이 아이는 자기는 공부 못하는 아이라는 것을 누가 물을 때마다 2차 3차 4차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가 물으면 난 아니라고 하는 그것을 성경에선 그 아이의 믿음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 꼴이에요.

자기들은 안 믿었어요.

그런데 자꾸만 믿었다고 한단 말입니다.

 

무얼 보고 그럽니까?

이삭이라는 아이를 보고 그런단 말이에요.

사람들 눈에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어서 이삭을 낳은 것으로 보여요.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칭찬해요.

하나님도 야~ 너희들 믿음이 좋네!

그런단 말이에요.

 

그러나 정작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삭을 볼 때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고발당하게 되어요.

그러니 누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어쩌면 당신들은 그렇게 믿음이 좋으세요! 라고 하면 우린 아닌데요! 라고 한단 말이에요.

 

이삭은 우리가 낳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믿음이 낳은 것인데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러한 자기 고백을 가지고 야! 너희들 믿음이 억수로 좋네! 라고 한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이게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지식이 아니고 마음으로 믿어져야 해요.

 

우리는 예수를 믿는 우리가 자랑되어지면 안 되어요.

우리는 예수 믿는 우리가 자랑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못난 놈으로 드러나야 해요.

그래서 우리 몸에서 예수그리스도만 존귀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우리 몸에서 행하신 일들이 증거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나야 한단 말이에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믿었습니까?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어서 믿잖아요.

 

그럼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 근본에는 여러분의 믿지 않았음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믿음은 반드시 우리의 믿지 않음을 바탕으로 일을 하신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예수를 믿게 하셨다는 말은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믿게 하신 것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 속에는 항상 나는 예수를 못 믿고 안 믿었는데!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셨어! 라는 하나님의 일하심 즉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야 한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도 그래요.

우리의 믿음이 좋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에요.

어쩌다 보니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 겁니다.

누군가의 힘에 의해서 여기 있다구요.

 

그 누군가의 힘이 바로 믿음이에요.

믿음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수 없이 도망가고!

툭하면 예수 안 믿겠다고 하고!

수 없이 반항하였음에도 지금 우리가 버젓이 이렇게 말씀을 듣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우리 실력이 아니에요.

믿음이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히브리서 11장식으로 기술을 한다면 믿음으로 정낙원이는 목사 노릇을 하고 있고!

누구는 장로 노릇을 하고 있고!

누구는 집사 노릇을 하고 있고!

누구는 교사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정낙원이는 십자가 피를 증거하고 있고!

믿음으로 여러분은 십자가 복음을 듣고 있고!

믿음으로 충성하고 있고!

믿음으로 봉사하고 있고!

믿음으로 헌금하고 있고!

 

믿음으로 우리 모두가 교회에 다니게 하고 있다고 말해 주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공로는 아무도 없어요.

모든 것이 믿음이 한 일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한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칭찬하겠어요.

아니에요.

도리어 아브라함과 사라를 붙잡고 이리 저리 끌고 다닌 믿음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인간을 자랑하고 칭찬한 적이 없어요.

비록 인간을 칭찬한 것처럼 기술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인간을 칭찬하고자 함이 아니고 그 인간을 칭찬받게 하는 그 하나님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왜? 돌립니까?

하나님이 하셨으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했으면 자기가 영광을 받아요.

아브라함과 사라가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합니까?

이건 이삭을 자기들이 낳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낳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를 움직이고 있는 그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계속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행위와 상관없는 때였다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

할례 시가 아니고 무 할례시다!

행위가 아니고 믿음이다!

율법이 아니고 은혜다! 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육에 속한 자들을 못 읽어내요.

왜냐하면! 그들은 문자적으로만 성경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는 그 하나님을 몰라요.

 

성경은 아브라함을 말하고자 아브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끌고 가시는 하나님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성도들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여도 그 속에서 일하신 분은 하나님이에요.

겉으로 아브라함이 일을 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상은 그 안에서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은 죽은 나무와 같은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낳은 것은 사라를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고 이렇게 죽은 나무와 같은 사라를 가지고도 이삭을 낳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靈)에 속한 성도들은 어떤 인물을 본 받자고 한다거나 그 인물을 자랑하거나 칭찬하지 않아요.

그 사람을 움직이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여러분이 여기까지 온 것이 여러분인가요?

아니면~ 여러분 속에서 일을 하신 하나님인가요?

하나님이잖아요.

 

여러분은 아닐지라도 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전 목사 되고 싶지 않았어요.

돈 많은 장로를 하고 싶었어요.

 

목사가 되어도 큰 교회 부흥시키고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목사를 하고 싶었지 교회 부흥도 되지 않고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십자가 피를 전하는 목사는 생각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십자가 피를 증거하고 있어요.

욕 먹어 가면서 말이에요.

일가친척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면서 왜? 이런 짓을 합니까?

모두가 내 안에서 예수님이 날 잡고 이리 저리 끌고 다니고 있기 때문이에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 사람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신 분이 누구인가요?

믿음이에요.

 

믿음으로 누구는 무얼 하고!

믿음으로 누군 이렇게 하였다고 합니다.

모두가 하나 같이 믿음이 개 목줄 매듯이 매어서 이리저리 끌고 다녔어요.

 

끌려 다니는 그 사람들 입에서 좋은 소리 나올 것 같은가요?

아니에요.

나오느니 원망이고 불평이에요.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사는 것이 이들이 원해서인가요?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단 말입니다.

 

일은 죽도록 이 사람들이 하고는 성경은 이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믿음이 이들을 이런 일을 하게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어요.

이들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 몸에 하나님이 이미 그린 그림이 있고!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이 있고!

장차 완성 될 그림이 있어요.

예수 라는 그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믿음으로 살아간 선진들이 모두 믿음으로 질질 끌려 다니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들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로마서를 쓰면서 줄 곳 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이 행위냐?

아니지 않느냐?

은혜가 아니냐!

 

그러니 아브라함을 보지 말고 그 은혜를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도 그 은혜 안에 있지 않느냐!

그러니 감사하고 살으라는 말이에요.

 

그럼에도 이 시대 행하여지고 있는 설교들을 보면 포카스가 잘못되어 있어요.

믿음을 증거하지 않고 믿음에 끌려 다닌 사람들을 증거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설교가 인간의 행함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어요.

크게 착각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유대교에요.

 

이 시대 교회들이 유대교가 되어가고 있어요.

교인들의 신앙도 자연히 유대교 신앙으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 신앙이 뭔 줄 아세요.

 

자기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건설하는가 하면 자신들의 힘으로 하겠다고 해요.

그러니 신앙의 바탕에 인간의 열심과 행함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세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 언약을 심어 놓았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도구로 사용되어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 언약을 심어 놓고 그 언약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독자적인 힘을 가지면 안 되어요.

자기들 능력으로 언약을 이루고자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드러나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아요.

이스라엘 속에서 하나님이 드러나기를 바래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힘으로 뭔가 하고자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일하심은 가려지게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이 자기들 힘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여기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충돌이 일어나서 생긴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보냈어요.

거치는 반석이란? 넘어지게 하는 돌 부리란 말입니다.

잘 달리고 있는 놈을 의도적으로 넘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달려가고 있었나요?

율법에 의(義)를 가지고 천국을 침노하려고 하였어요.

이것을 그대로 가만 두면 천국은 하나님의 의(義)가 충만한 은혜의 나라가 아니고 인간의 의(義)로 넘쳐나는 법에 나라가 되고 말아요.

 

율법을 잘 지킨 놈과 못 지킨 놈 간에 우열(優劣)이 생기고,

그 우열로 인하여 사람 간에 차별이 생기고 서열(序列)이 정해지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인간의 행함을 신앙의 근본으로 가지고 있는 유대교를 박살내는 일을 단행 하신 것입니다.

 

나타나는 모습이 반(反) 율법적으로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과 전혀 상관없는 세리와 창기들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율법적 행함을 근거로 가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걸 표면적 이스라엘 속에서 이면적 이스라엘을 불러내는 일이라고 하셨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사는 자들 속에서 하나님 말씀과는 상관없이 사는 죄인들을 상징하는 세리와 창기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유대교를 고발하기 위하여 투입된 배우들이에요.

율법지킴과 상관없는 자들을 택해서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의(義)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간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들이 유대교와 똑 같은 짓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게 아니라고 고발을 하게 하세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간의 행함을 부추기는 신앙들을 다른 복음이라고 고발을 한단 말입니다.

 

지금부터 이 시대 행하여지고 있는 잘못된 신앙을 이야기 하고자 하니 오해하지 말고 잘 새겨서 들으세요.

 

신앙은 의(義) 싸움입니다.

로마서의 주제 또한 동일합니다.

 

율법에 의(義)냐!

아니면 예수의 의(義)냐!

 

행함이냐!

믿음이냐!

 

무엇을 행할 것인가!

아니면 무엇을 믿을 것인가!

 

신앙의 싸움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하셨는지를 증거할 것인지의 싸움이에요.

 

좋은 것하고 옳은 것은 달라요.

 

하나님은 옳음을 요구하지 좋은 것을 요구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어떤 답을 들고 있는지를 보세요.

즉 어떤 의(義)를 가지고 나오느냐를 보신단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성경을 대할 때 항상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자 주어진 것일까?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존재의 목적은 무엇인가?

다른 말로 하나님이 날 왜? 이 세상에 보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해요.

 

내 존재론으로부터 성경을 보지 말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입장에서 내 존재에 의미를 탐사(探査)하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날 만드실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냐 에요.

 

성경은 예수님을 위해서 만물을 창조 하였다고 합니다.

 

골로새서 1장입니다.

 

골 1:15-17=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그로부터 창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왜? 창조 했는가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럼 만물 속에 속한 나의 존재 목적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우리는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들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도구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이걸 구원이야기로 해 봅시다.

예수님이 나를 왜? 구원했나요?

그에 영광을 찬미케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그에 영광이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자기 백성이 죄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으로 말하면 예수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피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 것을 찬미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에 목적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신앙에 모든 포카스는 예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데로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 주셨습니다.

 

요 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혜사 그가 오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며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뭐라고 했나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이지요.

일평생 죄와 사망 가운데서 종 노릇하던 자들을 자신의 죽음으로 건져 주신 것이잖아요.

 

그러니 구원을 받은 성도가 할 일은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죄사함 받은 일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미래로부터 현재라는 수순으로 역(逆)으로 보세요.

성령이 미래에 행할 일을 현재 속에서 행하게 하세요.

우리가 장차 천국에 갑니다.

 

천국에 가서 무엇을 합니까?

세세토록 어린 양을 찬양하지요.

왜? 어린 양을 세세토록 찬양을 합니까?

이는 어린 양의 피로서 천국에 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성도가 현재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무엇인가 하면 성령 안에서 천국에서의 삶을 미리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속받은 그 은혜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신앙의 행위 속에는 이 정신이 바탕으로 깔려 있어야 합니다.

 

이 정신을 로마서에서는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정신은 구약의 이스라엘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이 된 것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인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들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케 하려고 율법을 주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알아야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했어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그것을 지켜서 의로워 지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이미 의로운 자들에게 너희가 어떻게 의로워졌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어요.

은혜를 알게 하려고 율법을 주신 거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오해하였어요.

하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였어요.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백성 속에서 율법을 지킨 자와 지키지 못한 자들 간에 차별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차별이 결국에는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 율법을 지킨 자는 의로운 자라고 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죄인으로 구분하였던 것입니다.

이 놈들이 은혜로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을 행위로 둔갑(遁甲)을 시켜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하나님 백성을 삼았는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라는 행함으로 하나님 백성이냐 아니냐 라고 판단을 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이러한 신앙으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자들은 죄인으로 간주하여 이방인으로 취급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신 자들은 행함으로 구별을 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의 신앙 속에는 아브라함 언약 정신은 상실이 되었어요.

즉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상이 없었어요.

오로지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라는 행위만 있었어요.

 

거짓 종들인 종교꾼들이 은혜로 부르신 것을 행위로 바꿔놓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행위로 인하여 사람 간에 차별이 생기고 법이 난무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 초림 때처럼 교회마다 성화라는 인간의 의(義)가 난무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싸움이란? 의(義)에 싸움이에요.

의로워지려고 하는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된 것을 지키는 싸움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를 증거하는 싸움을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내 행위를 자랑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하신 일을 증거 하느냐!

믿음이냐! 행위냐! 의 싸움이어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유대인들에게 오셔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는 자들에게 세리와 창기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행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주셨어요.

예수님은 율법 신앙 안에 가두어진 자들 속에서 은혜로 빼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걸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불러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어떻게 빼내는 일을 하셨는지를 간단하게 훑어봅시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이야기가 나옵니다.

흑암이 깊음 중에 있고 혼돈과 공허한 곳에 하나님 말씀이 떨어집니다.

그러자 갑자기 창조의 일들이 나타납니다.

 

창세기에서는 창조 이야기를 갈라지는 일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빛과 어둠이 갈라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흑암이 깊음 중에 있고 혼돈과 공허한 세계에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자 빛이 어둠으로부터 빠져 나와서 갈라지기 시작을 합니다.

이렇게 갈라지는 것을 성경은 창조라고 합니다.

 

창조는 구원과 같아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빼내심을 입는 겁니다.

혼돈과 흑암 속에서 빛을 빼냈어요.

어둠 속에서 빛을 끄집어낸 겁니다.

 

성도를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롭다는 것은 옛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옛 것은 심판을 당한 것이 됩니다.

 

누가 옛 것에서 새 것으로 빼내는 심판을 합니까?

창세기에선 말씀이신 하나님이 합니다.

그런데 신약에선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셨는데 그 하나님을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합니다.

이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누구인가 보니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오셨지요.

즉 갈라내고자 오셨습니다.

 

창세기에서는 말씀이 떨어지자 빛과 어둠이 갈라지는 일들이 있어 났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오시자 예수님에게 속한 “너희와” 예수에게 속하지 아니하는 자들인 “저희로” 갈라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창세기나 요한복음은 동일한 이야기를 다른 표현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갈라지는 때를 종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을 비유하시면서 그물 속에 들어 온 고기들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갈라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종말이란? 갈라짐이란 말입니다.

왜? 갈라집니까?

갈라진다는 것은 종자(種子)가 서로 다른 것이 섞여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서로 같은 것끼리 두시려고 갈라내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 최초의 갈라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방주를 중심으로 갈라졌습니다.

방주 안에 탄 사람과 방주 바깥에 있는 사람으로 갈라졌습니다.

방주 안에 탄 사람은 지극히 작은 수였고 방주 바깥은 수 많은 무리들이었습니다.

 

홍수 이후 세월이 흘러 노아의 후손들이 또 다시 세상에 인간이 번성하고 충만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 갑니다.

그리곤 본토친척 아비 집에서 빼냅니다.

 

이건 갈라짐입니다.

이제 아브라함 편에 선 사람과 반대편에 선 사람으로 갈라집니다.

아브라함 편에 선 사람들은 복에 사람들이고,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저주의 사람들입니다.

 

세월은 또 흘러 흘러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와 저희로 갈라냅니다.

너희는 제자들이고, 저희는 유대인들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유대인 속에서 너희와 저희로 분리해 내십니다.

 

예수님이 너희라고 분리한 자들을 일컬어 교회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리한 너희들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

이름하여 재림입니다.

 

재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미래적인 사건입니다.

미래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입니다.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겐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므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내가 다시 올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다시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했습니다.

이는 믿는 자들이 엘리야 시대의 숨겨진 남은 자 칠천 명처럼 매우 적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마지막 때에 오셨고 신약의 마지막 때에 오실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항상 극심한 타락이었습니다.

노아 시대는 죄악이 관영하던 때였고!

초림 때에는 외식 신앙으로 가득하던 때입니다.

예수님은 이걸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였습니다.

 

그럼 재림 때는 어떠할까요?

초림은 재림의 표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지금이 재림의 때이니 초림의 때와 같이 외식이 관영 할 때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많은데 참 믿음에 거하는 자들은 적은 때입니다.

 

지금은 이구동성으로 종말 때라고 합니다.

기독교 내에서도 종말을 외치는 자들이 후우죽순처럼 일어나고 있습니다.

종말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회개하라고 합니다.

신부 단장을 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회개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여야 신부 단장을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여야 재림하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가 있나요?

 

종말을 외치는 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행함을 강조합니다.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목소리 높여 외칩니다.

교인들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옳은 신앙이라고 의심 없이 받아들입니다.

상식에 맞으니까요.

 

요즘 한창 인기가 있는 목사님들이 설교가 뭔가요?

개혁주의 설교들이지요.

개혁주의 설교의 특징이 성도의 성화적인 삶에 맞추어져 있어요.

 

이 시대 개혁주의 목사님들의 설교는 마치 세례요한의 설교와 같아요.

대 부분 영적 대 각성 운동을 주장해요.

한 마디로 교인들의 신앙이 개판이라는 것입니다.

세속적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세상 가치관으로 세속화 되어서 타락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다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욕 먹지 않는 좋은 교회를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모두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뭔가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요?

저는 목사님들을 평가하거나 판단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합당한 그릇으로 쓰고 계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이 분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초림 때 유대인들의 신앙을 보는 것 같아서입니다.

말씀이 예수 안에서 쉼을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뭔가 결단하고 해야 하는 것처럼 짐을 지워주는 것처럼 들려져요.

 

이러한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삶에 자세는 이분들이 주장대로 가야해요.

이런 정신으로 살아야 해요.

 

이것은 믿는 자로서 마땅한 본분이고 도리에요.

하지만 이러한 것이 옳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보기에 좋음은 될 수가 있어도 옳음은 아니에요.

옳음은 예수를 믿는 믿음이지 우리의 행실을 뜯어 고치는 것이 아니에요.

 

성도가 궁극적으로 붙잡아야 할 것은 믿음이지 행위가 아니에요.

믿었으니 행위를 내어 놓으라고 하면 안 되어요.

행위는 강요할 것이 아니에요.

포도나무이면 포도 열매는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맺히게 되어 있어요.

 

농부이신 하나님이 관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자연히 행위는 나오게 되어 있어요.

성도가 행하는 모든 행위는 그 안에 있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어야지 목사가 소리쳐서 내어 놓는 것이어서는 안 되어요.

 

성도가 뱉어낼 행위는 강요에 의한 수고가 아니라 감사에요.

감사는 깨달음에서만 나와요.

깨달음은 복음을 통해서 얻을 수가 있습니다.

어차피 복음이 증거 되면 합당한 자와 합당치 않는 자로 갈라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목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복음에 총론(總論)을 전해야지,

이렇게 살으라 저렇게 살으라고 하는 각론(各論)을 증거하면 안 되어요.

각론은 성령이 각 사람 안에서 행하게 두어야 해요.

믿음이 각 사람 안에서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인들이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나서 소리 칠 수도 있겠지요.

저도 소리를 치지만 옳음은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각론을 말하는 것은 복음을 잘못 이해하여서 자기 사욕을 쫓아가는 면죄부로 악용하기 때문에 그게 아니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에요.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세요.

 

예수님의 초림 때의 모습은 곧 예수님의 재림 때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의 초림 때 교회의 모습 속에는 예수님의 재림 때 교회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영적 상태가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초림 때에는 어디서 어디로 빼냈습니까?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빼내는 일을 하셨지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믿음 안으로 빼냈어요.

행함에서 은혜로 빼내었어요.

 

초림은 재림의 그림자라고 한다면 구약의 마지막 때 유대인들의 신앙을 보면 신약의 마지막 때의 교회들의 신앙을 엿 볼 수가 있겠지요.

신약의 마지막 때도 구약의 마지막 때처럼 외식 신앙이 난무하겠지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말이에요.

믿는다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상은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인 열심과 행함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자들이 많겠지요.

 

그런데 말이죠.

예수님의 초림 때 유대인들이 주장하던 신앙에 모습과 지금 교회들이 추구하는 신앙의 모습이 어떻게 그리 똑 같은지 몰라요.

이상하리만치 똑 같아요.

영적으로 보면 마치 쌍둥이 같아요.

 

먼저 교파적 의미로 초림 때와 지금을 오버랩을 시켜서 봅시다.

 

예수님의 초림 당시 유대교 안에는 다양한 교파가 있었어요.

크게는 바리새파를 비롯하여 사두개파와 엣세나파와 쿰란 공동체와 열심당들이 있었어요.

이건 마치 이 시대 장로교와 침례교와 감리교와 순 복음과 같이 여러 교파들이 나누어져 있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이들의 신앙에 공통점들은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모두가 율법에 특심하였다는 겁니다.

서로가 누가 더 율법을 잘 지키느냐!

누가 더 경건하냐!

누가 덜 세속적이냐!

 

그러니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누가 더 율법을 잘 준수하느냐! 라는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에 정통성이 있음을 내세우고 있었어요.

이것은 이 시대 교파마다 누가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사느냐로 자기 교단의 우월성을 자랑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이 시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는 것으로 신앙을 가늠하고 있어요.

인간의 행함으로 신앙 있음을 증명하고 있어요.

인간의 행함으로 신앙을 증명하다가 보니 자연적으로 외식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내어 놓는 것이 바리새인들이 내어 놓은 것과 같아요.

믿음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는 믿음 있는 척 한단 말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했어요.

겉으론 깨끗한 척 하지만 그 속은 온갖 추악한 것들로 가득차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 유대교는 종교적 위선으로 철철 넘쳤어요.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하면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율법으로 옥 죄고 있었어요.

초림 때 백성들은 율법 아래서 옴짝 달싹 못하고 매여 있었어요.

신앙생활이 짐이었어요.

 

이 시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보면 우리가 종말을 맞아할 준비를 단단히 하여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하는가 하면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고 기도하면서 성경 많이 읽고 착하고 경건하게 살아야 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시간 시간마다 사자후(獅子吼)를 토합니다.

그 따위로 신앙생활 할 것이냐!

그 따위로 살 것이냐!

 

이런 소리에 교인들은 기가 질립니다.

두려움에 벌벌 떱니다.

목사들의 말을 들어보니 자기 꼬라지가 형편없거든요.

 

하나에서 열까지 다 걸리는 겁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개차반이에요.

천당에는 가고 싶은데 목사들 말을 들어 보면 자기는 천당이 아니라 지옥에 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어디 신앙생활이 맘 먹은 대로 되나요.

마음이야! 천사처럼 살고 싶지요.

마음이야! 수도사처럼 성경만 보고 기도하면서 거룩하게 살고 싶지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뿐이고 몸뚱이는 세상 한 가운데 푹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한숨만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고 예수 안 믿을 수도 없어요.

교회 안가면 마음이 더 불안하고 찜찜하단 말이에요.

그러니 예수를 안 믿는다거나 교회에 안 다닐 수도 없는 형편이에요.

 

그러니 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믿어지지 않지만 믿는 척 한단 말입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말이에요.

그러니 신앙이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어요.

 

마치 초림 때 유대 백성들의 마음과 같아요.

초림 때 유대인들은 율법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어요.

안 지킬 수도 없고 지키자니 힘이 딸리고!

그러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하루 하루 한숨만 쉬고 살았어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짐이 되고 말았어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이 하나 기쁘지 않아요.

율법이 가두어져 있어서 숨 조차 쉬기 힘들었으니까요.

 

지금 이 시대 교인들도 동일해요.

신앙생활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어요.

신앙이 관념이 되어버린지 오래입니다.

믿음이라는 말만 있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이 없어요.

 

이 모두가 복음이라는 밀을 먹어야 하는데, 행함이라난 겨를 먹여서 그래요.

복음을 먹으면 배가 불러서 사단의 참소를 이겨내는데!

겨를 먹으면 헛배만 불러서 사단의 참소에 힘을 못 써요.

복음을 먹으면 믿음으로 살고, 겨를 먹으면 행함으로 살아요.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일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일이 있나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행하신 일을 증거 하세요.

 

나는 이런 은혜를 입었고!

나는 이런 사랑을 입었고!

나는 이런 긍휼을 받았다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십시오.

여러분 속에서 그리스도만 자랑되어지고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어지기를 소원하십시오.

그리하여 나의 나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감사와 찬미로 토해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아버지! 우리의 눈을 열어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어떤 은혜를 입고 사는지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가 나의 주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게 하여서 우리 몸에서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지식이 아니고 믿어지게 하여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관념이 아니라 실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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