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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 29강. 아브라함의 후사 (롬 4:13-17)

by coroa 2022. 9. 9.

 

 

 

 

 

 

 

 

29강. 아브라함의 후사 (롬 4:13-17)

롬 4:13-17=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 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정낙원 목사

 

오늘은 아브라함의 후사가 어떤 자들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후사란? 기업을 이어갈 자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기업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라야 이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건 아브라함처럼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율법에 속하지 않고 믿음의 의(義)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율법과 믿음을 상대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반대를 율법으로 말하고 있어요.

그럼 믿음에 의(義)가 무엇인지를 알면 율법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즉 무엇을 믿음에 의(義)라고 하느냐 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무 할례시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와 상관이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이걸 믿음으로 된 의(義)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얻어진 의(義)를 바로 믿음으로 난 의(義)라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 행함을 의로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할례 행한 것을 자랑하고 있었어요.

바울은 이건 아니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할례를 잘못 알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할례는 무 할례시에 된 의(義)를 인(印)친 것입니다.

인(印)을 쳤다는 것은 도장을 찍었단 말입니다.

무엇에 대한 도장입니까?

넌 이미 의로운 자라는 도장이에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할례와 상관없이 이미 의롭게 되었어요.

이 사실을 할례로 표시를 하였단 말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할례관과 바울이 말하는 할례관은 하늘과 땅처럼 다른 것입니다.

이건 비단 유대인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에요.

 

유대인들이 이렇게 할례를 오해하였다는 것은 지금도 오해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들이 교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행하면 의롭게 된다는 사고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이 시대 할례를 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할례와 같은 사상을 가진 자들은 수두룩해요.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의롭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성화주의자들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과 상관없이 의롭게 되었어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단 말입니다.

의(義)는 우리의 행함과 상관이 없이 공짜로 주어졌어요.

하나님의 의(義)는 그냥 예수를 믿음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하나님 말씀을 주셨어요.

이미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주신 것이란 말입니다.

이건 마치 이미 의롭다 함을 얻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이미 의로운 자에요.

말씀을 지키든 안 지키든 의롭다 함을 얻었어요.

 

성도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이지 성도가 말씀대로 살아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롭게 되라는 말은 틀린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말이에요.

 

성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은 성도로서의 삶에 지향성이고 본분이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지향성과 본분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지 않는다는 죄성을 드러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세요.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라고 하는 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진 의(義)를 가리는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의(義)는 예수를 믿음으로서 주어지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성화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럼 의(義)가 두 개가 되어요.

예수를 믿음으로서 의롭게 되는 것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롭게 되는 것하고 둘이 되어요.

 

이건 아니지요.

성도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것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라고 하는 것은 천지 차이에요.

 

이게 구약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싸움이었어요.

예수님이 이것과 싸우다가 죽임 당하셨어요.

바울도 지금 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로마서를 통해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할례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고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할례를 행함으로서 의롭게 된다는 사상으로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이런 사상으로 하나님을 섬겼어요.

그러다가 다메석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를 알고 난 후에 이것이 예수님의 의(義)를 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싸우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사상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진리처럼 가르쳐지고 있어요.

유대인들이 헛 똑똑이라서 그런 짓을 한 것이 아니에요.

마귀가 미혹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귀가 미혹해요.

유대인들을 미혹했듯이 미혹을 한단 말입니다.

마귀가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로워진다고 미혹을 하였듯이 지금은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는 교인들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롭게 되라고 미혹을 한단 말입니다.

 

이런 설교를 하라고 하시는지 때 맞추어서 어제 어떤 성화주의 목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이 분은 성도가 성화되어 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성화의 기준이 무엇이고 몇 % 성화해야 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리고 언제까지 얼마나 성화 하여야 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그 분은 예수를 닮아야 한 대요.

그래서 제가 얼마나 닮아야 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예수님처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 짓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 더러 얼마나 변했느냐고 물어요.

자기는 변했대요.

그래서 제가 변했다는 기준이 뭐냐?

그럼 그 기준에서 얼마나 변했느냐?

50%냐!

60%냐!

90%냐!

그리고 그것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느냐?

 

또한 자기는 죄 안 짓는데요.

그래서 제가 그게 바로 예수를 죽인 유대교 사상이라고 했습니다.

왜? 자기의 변화 된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느냐!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의이지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변화 되었다는 것을 붙잡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해도 알아먹지를 못해요.

 

그래서 각자 믿어지는 데로 삽시다.

내 신앙을 누구에게 강요할 것도 아니니까 각자 받은 은혜로 감사하며 살자고 했어요.

이런 전화를 받으면 마치 2천 년 전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논쟁을 보는 것 같아요.

 

성도에게 있어 하나님 말씀은 따로 할 일이 있어요.

마치 할례나 율법처럼 할 일이 있단 말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의(義)를 드러내는 것이에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예수님의 의(義)가 드러나야지 자기 의(義)가 드러나면 안 되어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가 나와야지 “주여 내가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라는 것이 드러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주여 내가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라는 것을 신앙으로 내어 놓는 것이 바로 죄에요.

유대인들이 이러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독사 새끼라는 책망을 들었어요.

 

의(義)란? 옳음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할례 받기 전에 이미 옳다 인정함을 받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몸에다 할례를 행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넌 내 꺼! 라는 차원에서 한 것이에요.

 

이건 마치 자식을 낳고 호적에다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호적(戶籍)이란? 호적에 올려 져서 내 자식이 된 것이 아니고 이미 내 자식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으로 올리는 것입니다.

 

호적이 올리기 전에도 내 자식이에요.

또한 호적에 안 올려도 내 자식입니다.

그럼에도 호적에 올리는 것은 법적 장치를 해 두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분명히 내 아이가 맞습니다” 라고 도장을 찍어 놓는 것입니다.

 

중국에 보면 호적에 올려지지 않은 자식들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이는 한 가정에 한 자녀만 낳아야 한다는 정부 시책에 의하여서 한 자녀만 호적에 올리기 때문에 자녀가 두 세 명 씩 있는 집에서는 호적에 올리지 못하고 키운다고 합니다.

호적에 안 올렸다고 자식이 아닌 것은 아니지요.

호적에 안 올려져도 자식으로 취급해요.

 

만약에 법이 바뀌면 호적에 올리겠지요.

왜? 올립니까?이미 내 자식이기 때문에 올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할례가 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이 이와 같아요.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게 하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는 무 할례시에 의롭다 한 것을 인(印)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를 다른 말로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주신 것도 할례의 성격과 같아요.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 증표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받았다는 말은 넌 하나님 백성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계 만민 중에서도 오직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에게만 할례를 행하게 하시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 후손에게만 할례를 행하게 하고 율법을 주셨는가요?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만 선택을 하여 구원하고 아브라함에게만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할례를 받았다!

율법을 받았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식(標式)인 것입니다.

모두가 이미 하나님께 복을 받은 민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오해를 하였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이미 복을 받았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게 하시고 율법을 주신 것인데도 유대인들은 꺼꾸러 생각을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 입장에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서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자기가 지금 어떤 주제인지도 모른체 덥석 물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율법을 주었어요.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 하여 준 것이에요.

즉 죄인이기 때문에 주어졌단 말입니다.

 

이걸 역(逆)으로 말하면 죄 안 지었으면 율법을 주시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러니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넌 죄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속에는 지키면 구원 받는다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은 구원받으라고 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뭘 하여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복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구원이나 복이나 하는 것들은 다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무엇을 한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묻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이 청년의 질문이 바로 유대인의 신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질문이에요.

청년은 지금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는 수단을 알려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율법을 영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지키고 왔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어떻게 하면 서울 대학교에 입학 할 수가 있나요 라고 묻는 것과 같아요.

어떻게 하면 서울 대학교에 입학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서울 대학생이 아니란 말이지요.

서울 대학생은 이렇게 묻지 않아요.

서울 대학생으로 살지요.

 

지금 예수님에게 묻는 청년이 이와 같아요.

그런데 지금 교인들이 이런 짓들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라고 하는 것이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묻는 것이나 그 본질은 동일해요.

자기 쪽에서 의(義)를 만들고 영생을 얻어 낼 수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꾸만 자기 조건으로 믿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고 복에 조상이 된 것은 자기에게 무슨 조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과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고 부르셔서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에요.

그것이 바로 할례에요.

 

할례란 난 죽은 자입니다!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살라고 몸에다가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몸에 할례를 행하였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러한 할례의 의미를 아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몸에 할레를 행한 것만 있었지 할례가 담고 있는 그 정신은 없는 것입니다.

 

육신에 할례를 했다고 해서 할례가 아니에요.

할례는 마음에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육신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그 의미를 아는 것이 마음에 할례에요.

이걸 성령으로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자기가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요.

 

그러니 비록 몸에 할례를 하였다고 하여도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몰랐어요.

육신의 할례를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랬어요.

그래서 바울이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면적 유대인이란? 마음에 할례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은 무 조건적이에요.

아브라함 언약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이란?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이에요.

이걸 은혜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은혜로 하나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 은혜로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을 몸에 짊어지게 한 것이 율법이에요.

율법을 통해서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이런 죄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우신 복이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데도 그건 모르고 도리어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고자 하였단 말입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죄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자기가 무엇을 하여서 복을 따낸다고 생각을 해요.

죄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하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니 자꾸만 하나님과 거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착하게 살 테니 복을 달라고 합니다.

치성을 드려 줄 테니 복을 달라고 신과 거래해요.

 

이런 사고가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어요.

교인들이 이런 사고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어요.

내가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테니까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도리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복을 따 내고자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무늬만 교인이지 속은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어요.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이 이런 짓을 하고 있어요.

목사들이 이렇게 가르치고 있단 말입니다.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이 복 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고 있어요.

복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아니~ 이미 복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있잖아요.

예수를 믿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미 녹명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에게만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어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복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이란? 하늘에 신령한 복을 말해요.

땅에 것을 복이라 하지 않아요.

하늘나라는 복에 나라 에요.

하나님 자신이 복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땅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나라에 있는 복을 주셨어요.

땅에 있는 사람에게 하늘나라 복이란? 구원인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사는 영생이란 말입니다.

땅에서 빼내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모든 복을 다 받은 것이에요.

 

그런데도 우리는 하늘나라에 신령한 복은 복으로 여기지 않고 땅에 것을 달라고 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땅에 것은 복이 아니에요.

성경은 땅에 것을 복이란 한 적이 없어요.

 

아니~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하자 땅을 저주해 버렸잖아요.

그럼 땅에 속한 모든 것은 저주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인들이 땅에서 복을 찾고자 해요.

땅에 복이 있는 줄 알고 말이에요.

 

그건 마귀가 미혹해서 그래요.

마귀는 인간을 땅에 붙잡아 두려고 해요.

땅을 못 떠나게 해요.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을 숨겨요.

땅만 전부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로 미혹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복이라고 미혹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뭐라고 하던가요.

 

요한일서 2장을 봅시다.

 

요일 2:15-18=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보세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지요.

이 세상 것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다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우리가 그토록 오매불망 추구하고 눈만 뜨면 구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은 모두가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마귀로부터 온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 것은 영원하지 않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는 이 세상은 장차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은 하늘에 있어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영원한 것이지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이 아니에요.

하늘에서 영생하는 것들이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들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육에 속한 자들은 교회에 와서 땅에 복을 달라고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 테니 복을 달라고 거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잖아요.

열심히 해서 복 받으라고 가르치고 있잖아요.

 

마치 열심과 충성이 복을 따내는 수단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잖아요.

이미 복을 받았기 때문에 충성을 하여야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꺼꾸러 가르쳐지고 있어요.

그러니 교인들의 신앙이 자연히 복을 얻어 내는 수단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을 해도 복을 받기 위해서 하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과 거래(去來)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우상 숭배에요.

 

헌금(연보)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돌려 드리는 것이지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헌금은 “하나님 잘 받았습니다” 라는 차원에서 행하여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을 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얻었습니다” 라는 차원에서 행하여지는 것이 헌금이에요.

 

“하나님께서 직장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이렇게 돈 까지 주셨습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라고 하면서 헌금(연보)을 하여야 합니다.

 

연보(捐補)에 대하여 말이 나왔으니 연보에 의미가 무엇인지 잠시 알고 갑시다.

연보를 어떤 마음으로 하여야 하는지 신명기 26장에 보면 잘 나와 있어요.

이건 잠시 후에 설명 드리고 먼저 신명기의 의미부터 살펴보고 갑시다.

 

신명기는 모세가 가나안으로 들어갈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교훈을 하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어요.

물론 이스라엘은 모세의 명대로 살지 못하였어요.

그러니 모세의 말은 이들의 불신앙을 지적하는 율법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말하기를 너희들은 반드시 가나안에 들어가서 잘 살게 될 것이다!

그건 너희들이 의로워서도 아니고 잘나서도 아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너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이라고 알려 줍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무슨 약속을 했는가 하면 후손을 주고 땅을 준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 언약 속에는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이 들어 있어요.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을 하실 때에는 아브람에게는 후손도 없었고 땅도 없었을 때입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無)에서 유(有)로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창조에 속한 약속이에요.

 

아브람을 찾아가신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는 창조주세요.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창조에 속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자기 가능성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없는데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있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아브람을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서 아브라함이 되듯이 “없음에서” “있음으로” 가는 과정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담겨져 있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모든 것을 가진 갈대아 우르에서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빼내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는 모든 것이 다 있어요.

거기서 복을 주면 있음에서 있음으로 확장이 되어요.

그럼 없는데서 있게 하는 하나님을 몰라요.

창조의 하나님을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모든 것이 있는 곳에서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빼내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찾아간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에요.

창조란? 없음에서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없음에서 있음이 되려면 아브람이 있음으로 있으면 안 되어요.

 

그러니까 아브람은 모든 것이 풍족하게 다 있는 갈대아 우르에 있으면 안 되어요.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나와야 해요.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하여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의 신관이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서 알던 하나님이 있어요.

그 하나님은 조상들이 알던 하나님이에요.

조상들이 알던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는 하나님이에요.

 

이건 성경에서 다른 신이라고 합니다.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 우상을 인간들은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어요.

 

알다시피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에요.

하나님은 죄인을 박멸하시는 분이지 복 주고 번성하게 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인간들은 마귀의 미혹으로 복 주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도 그런 하나님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갑니다.

찾아가서 내가 참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지금까지 알고 섬기던 하나님은 가짜라는 것으로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을 찾아오신 하나님이 참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세요.

없는데서 있게 하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서 알았던 하나님 상(像)을 빼내 버리고 그 자리에 참 하나님을 새겨 넣어야 합니다.

이 일이 급선무에요.

그래야 우상 하나님을 섬기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갈대아 우르에서 알던 그 하나님을 섬기게 되면 아브람이라는 죄인만 확장이 되어지게 되어요.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난 아브람이라는 놈은 죄인으로서 죽어야 해요.

그런데 이 놈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자기 씨를 번성하고 자기 세계를 넓혀가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럼 죄인의 세계만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바라는 바가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난 아브람을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구원이란? 새로운 창조를 말해요.

 

이걸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다고 합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옛 사람의 죽음이 있어요.

그러니까 새로운 피조물은 옛 사람의 죽음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난 아브람은 옛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옛 사람 아브람을 죽이고 새 사람 아브라함으로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아브람이라는 옛 사람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름이 바뀌고 자식을 낳는 생식기가 잘려 나가는 할례 사건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할례는 옛 사람 아브람의 죽음을 상징해요.

아브람이라는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게 된 것도 아브람의 죽음과 아브라함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가 된 것을 상징해요.

 

할례가 의미하는 것은 죽음이에요.

죽음이란? 없음입니다.

창조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할례 받은 자에게서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창조에 속한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죽은 그 자리에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을 새로 만들었어요.

창조에 속한 일을 하셨어요.

그래서 아브람이라는 죽은 자에게서 아브라함이라는 산 자가 나온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없음에서”~ “있음으로” 창조가 되는 사건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난 아브람은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아브람에서 아브람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이라는 있음을 없음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고 할례를 받는 것이고 이름이 바뀌어지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게 나중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으로 바뀝니다.

할례 정신이 율법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요.

율법이 뭔가요?

죄를 깨닫게 하고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가두는 것이잖아요.

 

한마디로 죽이는 거에요.

율법 앞에 서면 다 죽어요.

오늘 본문에서도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지요.

이는 율법이 하는 역할이 죄인을 하나님의 진노 아래로 불러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문제에요.

하나님은 죽이려고 율법을 주었는데 이스라엘은 복 받으려고 했어요.

이런 놈은 죽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계속하서 율법 지켜서 복을 달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미 의롭게 된 아브람에게 할례를 행하고 죽이고 아브라함으로 만든 것이나, 이미 의롭게 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어서 죽음 아래 가둔 것은 동일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 지켜서 의로워지지 않았어요.

이미 의롭다 하심을 입었기 때문에 율법을 준 것입니다.

 

할례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의(義)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할례 안 받아도 율법을 안 지켜도 이미 의로워요.

그럼에도 굳이 할례를 행하게 하고 율법을 지키게 한 것은 그 할례와 율법을 통하셔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알려 주실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무 할례시에 의(義)를 인(印)친 것이라고 하였지요.

율법도 동일해요.

율법을 준 것은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믿음으로 얻어진 은혜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율법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사고를 가진 자들을 율법으로 도리어 죽이는 일을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복 받고자 하다가 율법에 의해서 죽임 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에 의하여 죽임 당하는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의로워지고 복을 받고자 하다가 도리어 죽임 당하는 사건 속으로 밀려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일하심이에요.

이건 지금도 성도들에게 일어나요.

교인들이 말씀 지켜서 복 받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건 마치 이스라엘이 율법 지켜서 복 받고자 한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가지고 도리어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지켜서 복 받고자 하는 그 놈이 바로 죄 아래 있는 놈이에요.

이 놈을 죽여야 해요.

안 죽이면 계속하여서 하나님과 흥정하고 거래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죄를 고발하고 저주 아래 가두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본능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이 있어요.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조상들에게 듣고 보고 배웠던 그 하나님입니다.

인간들에게 복 주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가지고 교회에 왔어요.

하나님이 교회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우상의 하나님을 빼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옛 사람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세상은 갈대아 우르와 같아요.

세상이 갈대아 우르라고 한다면 교회는 가나안이에요.

이걸 출애굽 식으로 말하면 세상이 애굽이라고 한다면 교회는 광야에요.

스데반은 광야를 교회라고 했어요.

 

우리들도 아브람처럼 세상이라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교회에서 이제부터 기존에 알고 있던 가짜 하나님을 빼내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간섭을 하실 때마다 아브람의 생각과 다른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생각을 비껴가는 방식으로 일을 하세요.

그러면서 참 하나님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던 자리에서 아무 것도 없는 자리로 빼내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졸지에 부모친척 아비 집을 떠나 고아가 되고 나그네가 되었어요.

이제부터 없는데서 있게 하는 하나님을 배워가게 됩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는 하나님을 삶을 통해서 학습하게 됩니다.

학습이 되어 질 때마다 부서지고 깨어지고 망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시달립니다.

 

이건 모든 성도가 겪어야 할 필수 코스에요.

아무도 이 코스를 비껴 갈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에게 찜 당한 성도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되어가는 그 과정을 인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이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상이란? 근본이고 후손들에게는 하나의 본이에요.

그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는 믿음을 받은 성도는 아브라함의 일생을 좇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믿음에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지요.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걸어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만약에 갈대아 우르에 있었으면 기득권층으로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의지 할 것이 없는 곳으로 빼내심을 입었어요.

이젠 자기 목숨 하나 장담할 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오죽 했으면 자기 살자고 자기 마누라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었겠어요.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빼내심을 입은 것도 동일해요.

이스라엘에게는 애굽이 곧 갈대아 우르와 같은 곳이에요.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배운 하나님이 있어요.

그 하나님은 금송아지처럼 자기들을 도와주는 우상 하나님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와서 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부르면서 춤을 추었다는 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바로 금송아지처럼 우상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 앞에서 신나게 춤을 출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서 빼낸 자들에게 율법이라는 십계명을 주시면서 제일 먼저 다른 신을 빼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신은 다른 신이다!

이제부터 참 신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참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없는데서 있게 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들을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인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도리어 죄인을 죽이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이건 애굽에서 알던 하나님이 아니에요.

낯선 하나님이에요.

인간들에겐 이런 하나님이 싫어요.

거북해요.

여기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애굽에서 안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주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와서 알게 된 하나님은 복은 고사하고 죄인을 죽이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맨 날 하나님이 싫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애굽으로 돌려주세요! 라고 데모를 하였어요.

 

그 때마다 하나님은 지게 작대기를 들고 이 놈에 새끼들이 헛 소리를 한다고 하면서 두들겨 패기 시작을 합니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겠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이게 하나님 백성들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란? 우상과 싸우는 자란 말이에요.

자기 안에 우상과 싸워야 하니 맨 날 죽을 지경인 겁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다른 신을 뽑아내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연보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연보 이야기를 해 봅시다.

그럼 연보에 대하여 모세가 신명기에서 가르친 것을 가지고 살펴봅시다.

신명기 26장을 봅시다.

 

신 26:1-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취하여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 이 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 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모세가 그럽니다.

너희가 얻을 땅에 들어가면 땅에 소산물을 얻을 것이다!

그럼 너희들은 그것의 맏물을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으로 가지고 와서 이렇게 고백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원래 땅이 없이 방황하고 유리하던 백성들인데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땅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이 우리에게 미쳤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렇게 농사를 지어서 소산물을 얻었습니다!

 

이 소산물은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고백으로 드리는 것이므로 받으소서!

그러니 드리면서 감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여라도 자기 것 드린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면 드리는 자기가 잘난 놈이 되어요.

그럼 감사가 사라지고 떳떳함이 남아요.

이건 저주 받을 짓이에요.

 

그러므로 너희들은 드리면서 감사하라는 겁니다.

맏물을 드리면서 모두 다 드려야 함에도 다 드리지 못하고 맏물만 드리는 것은 나머지 아홉을 얻어먹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 얻어먹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에요.

 

그래야 감사가 되어요.

이 정신을 잊으면 드렸다는 행위가 의(義)가 되어서 목을 꼿꼿이 세운단 말입니다.

마치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처럼 말이에요.

맏아들이 무얼 의지하고 모가지를 세웁니까.

아버지 명(命)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지켰다는 자기 의(義)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 시대 목사들은 헌금을 마치 복 받는 조건으로 둔갑을 시켜놓았어요.

헌금이 더 많은 돈을 얻고자 하는 수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를 심으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를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어요.

 

무슨 근거로 이런 해석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모두가 성경을 문자풀이 식으로 보니 이러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이렇게 해석을 하니 교인들은 그런가 보다 라고 그것이 진리인줄 알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도 복 받기 위해서 바치고 있는 겁니다.

가히 부창부수(夫唱婦隨)입니다.

이걸 성경에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합니다.

 

목사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느냐 하면 교인들이 복 받는다는 소리를 안 하면 안 바치니까 그러는 거예요.

교인들이 이런 설교를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자기들 상식에 맞기 때문입니다.

바치면 복을 받는다는 말이 인간들이 알고 있는 상식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하는 하나님이에요.

즉 열심히 빌고 빌면 복 주는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바쳐서 복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죄 아래서 알아진 하나님을 우상숭배 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복은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복인 겁니다.

헌금을 했더니 받았다는 것은 바친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삯이지 복이 될 수가 없어요.

 

헌금은 복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행위에요.

 

복을 받은 자만이 헌금 할 수가 있어요.

자신이 지금 얻은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헌금 하면 안 되어요.

그럼 반드시 자기가 한 것에 대하여 찾게 되어 있어요.

그건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입니다.

 

이건 헌금뿐만 아니에요.

성도가 행하는 모든 것은 받은 은혜에 감사의 행위에요.

봉사도 충성도 심지어 교회에 오는 것도 동일해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교회에 오고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든 근본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움직여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성도가 행하는 모든 일을 은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봉사하는 것도 은사이고,

충성하는 것도 은사이고,

헌금하는 것도 은사이고,

교회에 오는 것도 은사에요.

모두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걸 알아요.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 안에서 행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 자랑으로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어요.

자신이 사도가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자신이 복음을 전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심지어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한 것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복음도 전하게 하고 고난 속에서도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히브리서 11장을 보세요.

기거엔 믿음으로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이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 증인의 첫 번째를 예수님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을 이렇게 고난 속으로 끌고 다니신 것이 믿음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들의 삶을 언급하면서 이들의 삶 앞에 “믿음으로”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믿음이 기관차처럼 이들을 끌고 다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라는 말은 “믿음이” 라는 말과 같아요.

 

헌금도 믿음이 하게 하세요.

그러니까 헌금도 믿음으로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게 하는 헌금이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그 속에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은 억지가 아니에요.

감사의 행위에요.

그런데 이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으로 나타나요.

 

헌금을 왜? 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바치라고 하면 반드시 댓가를 요구하게 되어요.

그럼 하나님과 거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헌금이 아니고 뇌물입니다.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아요.

 

헌금을 안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깨달아질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왜냐하면! 성령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을 봅니다.

 

고전 2:12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있어요.

그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분이에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보내주신 분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자체가 은혜에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어요.

 

죄와 사망에서 해방을 시키셨고!

율법 아래서도 해방 시키셨고!

세상으로부터도 해방시켜주셨어요.

다른 말로 세상 가치로부터 해방 시켜 주셨어요.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로부터도 해방시켜 주셨어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이에요.

성령이 이러한 것들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 안에 계신다고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게 되어 있어요.

 

그 깨달음이 신앙생활을 감사로 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것으로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성도는 무슨 일을 하면서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믿음으로 난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후사를 맡을 자들이에요.

 

봉사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도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헌금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회 오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제를 사랑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헌금을 하여도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하면서도 자기 것 낸다는 생각이 없어요.

드리면서도 부족함을 알아요.

 

그러니 신앙생활은 강요 할 것이 아니에요.

봉사나 충성이나 헌금도 강요할 것이 아니에요.

안 하면 그냥 두어야 해요.

억지로 하게 하여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모든 신앙이 다 그래요.,

억지로 하면 반드시 사단에 생겨요.

그것을 의(義)로 삼고 그 의(義)가 힘이 되어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귀 짓을 하게 되어요.

마치 탕자 비유에서의 맏아들처럼 말입니다.

 

깨달으면 하게 되어 있어요.

마치 자식이 철들면 부모의 은혜를 알고 섬기듯이 성도들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행하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행하게 하세요.

 

그러니 목사는 복음만 전하면 되어요.

복음만 전하면 하나님 백성들은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백성 아닌 자들은 못 깨닫겠지요.

깨닫고 못 깨닫는 것은 주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 목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깨닫는 자는 감사로 행하게 되어 있고, 못 깨닫는 자는 인색함으로 안 해요.

물론 봉사와 충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을 자기 돈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헌금 하라는 소리를 하고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헌금의 정의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 깨달아지는 대로 하세요.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할 것이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깨닫는 사람은 많이 감사하게 할 것이고 적게 깨닫는 사람은 적게 감사 할 것입니다.

못 깨닫는 사람은 못하겠지요.

이런 문제로 싸울 것이 없어요.

 

헌금 문제도 할례처럼 생각해 보세요.

 

할례는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잖아요.

헌금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 얻어먹고 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십일조를 제사장(레위인)들에게 드리잖아요.

왜? 제사장에게 드립니까?이는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리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제사장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드리게 함으로서 이것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란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 남은 아홉도 하나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겠지요.

 

남은 아홉도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알겠지요.

그럼 남은 아홉으로 살면서도 어떻게 살겠습니까?

하나님께 얻어 먹고 산다고 하겠지요.

그러니 살면서 감사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헌금은 헌금을 바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감사의 행위가 봉사로 충성과 헌신과 연보하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행하는 모든 것은 이미 얻었고 받은 것이기 때문에 감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가 행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할례를 행하든지, 율법을 지키든지, 헌금을 하든지, 봉사를 하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여야 합니다.

그럼 모두가 감사가 됩니다.

 

그리도 또 하나 집고 넘어 갈 것은 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 시비 걸지 마세요.

그 사람은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여서 사는 거예요.

만약에 법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거나,

혹은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자랑으로 들고 나온다고 한다면 그것은 책망을 받아야겠지요.

 

그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자기 의(義)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자기 의(義)로 삼는 사람은 율법주의자에요.

그건 십자가의 원수에요.

 

하나님의 의(義)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만 나와요.

그러니 자기가 하나님 말씀 지킨 것을 자랑으로 삼고 의(義)라고 하면 그건 예수님의 의(義)를 가리는 것이므로 이단인 것입니다.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바로 이런 자들입니다.

 

누구라도 자기 행함을 자랑거리로 들고 나온다고 하면 그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으로 간주하세요.

설령 자기가 복음 전한다는 것을 자랑해도 똑 같아요.

또한 자기가 복음 안다는 것을 자랑해도 동일해요.

 

복음 속에는 우리의 자랑거리가 없어요.

도리어 우리의 자랑거리가 담기지 못하게 해요.

그러니 그 어떤 것이라도 자랑하면 유대인이라고 보세요.

무엇인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곧 의(義)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예수님에 의(義)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 자랑 거리가 있을 순 없어요.

예수 믿는 자기 자신도 자랑하면 안 되어요.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 자기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복음을 알고!

복음을 전하고!

연보를 하고!

봉사를 하고!

교회에 충성하는 것은 감사이어야지 자랑거리가 되면 안 되어요.

 

그렇다고 은혜로 하는 것 까지 판단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구원 받은 은혜가 너무도 황공해서 감사로 행한다고 하면 그건 귀한 것이니 귀하게 보셔야 합니다.

괜히 자기가 안 하는 것을 남이 한다고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실룩 거리면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그런 사람을 보면서 자신의 믿음 없음을 책망 받아야 해요.

 

교회 안에 보면 항상 두 부류가 있어요.

육체로 난 자와 성령으로 난 자가 있어요.

이게 헌신과 봉사로 나타날 때는 주께 받은 은혜에 감사로 하는 사람과, 자기 의(義)를 쌓기 위하여 행함으로 하는 사람이 있어요.

 

감사로 하는 사람은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개의치 않고 항상 여일(如一)하게 해요.

그러나 행함으로 자기 의(義)를 삼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意識)하고 자기 기분 따라 들쭉날쭉 기복이 심해요.

 

피조물은 창조주가 주신 것을 받고 토해내는 것이지 자기 것을 내어 놓는 자가 아니에요.

성도는 구원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자에요.

구원을 자기가 따 낸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얻었어요.

그러므로 성도에게서 나오는 그 모든 것은 다 예수님에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것을 내어 놓는 것을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讚美)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한 것은 예수를 찬양케 하기 위함이에요.

그러므로 올바른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반드시 예수님을 찬미하는 모습으로서의 행함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구원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게 찬미에요.

이렇게 사는 것이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구요.

 

교회에서든지 세상에서든지 이 정신으로 사세요.

그게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세상과 교회로 구분하지 마세요.

세상에서도 신앙으로 사시고 교회에서도 신앙으로 사세요.

그러니 직장에서도 감사하고 교회에서도 감사하세요.

 

하나님은 이 감사케 하시려고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아브라함의 구원을 들어서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뭡니까?

 

아브라함의 후사이야기지요.

후사라는 말은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가문을 물려받아서 경영할 상속자가 누구냐 라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으로 선택을 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 가문은 믿음을 보여주기 위한 가문이란 말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의 후손은 믿음으로 난 자가 후손이 됩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율법의 반대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말씀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고 믿음의 의(義)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율법에 속한 자가 아니고 믿음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율법에 속한 자란 자기행위를 의지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행위로 의롭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의롭게 된 것은 무엇이 되느냐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으로 의롭게 된 것을 믿음에 의(義)라고 합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지 자기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이라는 기업을 이을 후손도 믿음으로 만들어질 것이 아니냐 입니다.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손이 된다고 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페하여 질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갈 후사를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만들어 낼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는 시점이 언제입니까?

율법을 받기 전입니까?

율법을 받고 난 후입니까?

율법을 받기 전이지요.

 

율법은 아브라함이 죽고 난 후 430년 후에 주어졌어요.

그러니 아브라함은 율법을 구경도 못했어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살 당시에는 율법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후손도 당연히 아브라함처럼 율법과 상관없이 생산이 될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마당에선 아브라함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후사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보여주셨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으로 세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에 조상이란 말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최초의 사람이란 말입니다.

 

조상이란? 으뜸이고 근본이에요.

그 후손들은 조상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럼 조상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면 후손도 어떻게 생겨날지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생겨났나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나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이지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이지요.

 

이걸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없는데서 있게 된 자에요.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신다는 것을 이삭을 통해서 보여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이 바로 이삭이에요.

 

알다시피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 속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이삭 속에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공로가 일점도 들어가 있지 않아요.

도리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는 불신앙만 들어가 있어요.

믿지 않았는데 얻었어요.

 

이걸 믿음의 논리로 말하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안 믿었는데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믿음은 은혜가 되겠지요.

 

잘 보세요.

아브라함과 사라는 안 믿었어요.

그런데 이삭이 생겼어요.

 

그럼 이삭은 믿음의 결과물인가요?

안 믿었음에도 얻은 결과물인가요?

안 믿었음에도 얻어진 결과물이지요.

 

이걸 우리 구원으로 이야기 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주셔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주셔서 구원을 받았지요.

 

왜? 예수를 믿게 해 주어서 구원을 합니까?

그건 우리가 예수를 안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못 믿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믿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우린 안 믿었다는 불신이 깔려 있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주어서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우리는 예수를 안 믿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믿음을 주어서 예수를 믿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으면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실 필요가 없어요.

그냥 우리가 믿으면 되니까요.

그럼 믿음이 우리 행위가 되어요.

하지만 우리는 안 믿었는데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예수를 믿었다고 하면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는 반드시 “난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못 믿는 자입니다” 라는 것이 깔려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믿음이 은혜가 되려면 우리는 안 믿었다는 불신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겠지요.

우리가 만약 믿었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우리가 믿은 것이기 때문에 은혜가 아니고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은혜에요.

그럼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은혜로 남으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 속에는 우리는 예수를 안 믿었다 라는 불 신앙이 들어가 있겠지요.

그래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오늘 본문에서 율법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이야기 하나 합니다.

 

믿음이 은혜로 드러나려면 법이 있어야겠지요.

법과 은혜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법이 있어야 은혜가 드러나요.

 

이건 마치 빛과 어둠 같아요.

색깔로 말하면 흰색과 검은 색과 같아요.

빛과 어둠이나 흰색과 검은 색은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주는 상대적 색깔이에요.

 

하나님에 나라는 은혜의 나라에요.

이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은혜와 상대적인 법에 나라를 만들었어요.

이게 역사에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어요.

이걸 묵시라고 합니다.

 

이 보이지 않는 묵시의 세계를 드러내려고 보이지 않는 묵시와 상대적인 보이는 나라 즉 역사를 만든 것입니다.

성경은 보이지 않는 묵시를 실상이라고 하고, 보이는 역사를 허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묵시가 실체이고 역사는 그림자에요.

 

그럼 역사는 역사로 존재하면 안 되어요.

왜냐하면! 묵시를 보여주기 위해서 역사가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신성이 들어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만물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만물을 통해서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있게 한 근원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게 정상이에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은혜에요.

이 은혜를 드러내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 하실 때 서로 상극인 상대적인 것들을 창조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天地)를 창조하셨지요.

천지란? 천국과 지옥이에요.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은 상대적이에요.

 

그럼 천국 백성도 있고 지옥 백성도 있겠지요.

천국 백성이 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지옥 백성도 있단 말입니다.

구원 받은 자가 있다고 하면 상대적으로 구원 받지 못한 자도 있다는 말이에요.

 

은혜 받는 자가 있다고 하면 은혜 받지 못하는 자도 있다는 말이에요.

복음을 아는 자가 있다고 하면 상대적으로 복음을 모르는 자도 있다는 말이에요.

예수를 믿는 자가 있다고 하면 상대적으로 예수를 안 믿는 자도 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는 자가 있는가 하면 자기 힘으로 예수를 믿는 자도 있겠지요.

 

이렇게 되면 예수를 기준으로 둘로 쫙 갈라지겠지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갈라지겠지요.

그럼 교회 안에서도 믿는 자를 믿는 자로 들어나게 하려면 반드시 믿지 않는 자들이 있어야 하겠지요.

 

믿는 자는 반드시 믿지 않는 자들을 통하여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아까 하나님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주신 것이라고 하였지요.

 

그러니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바탕엔 항상 난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자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이 깔려 있어요.

이런 고백이 있는 자라야 예수를 믿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에요.

교회 안에 이런 고백을 하는 성도들이 있어요.

 

그럼 진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예수를 믿는 성도는 자기가 예수를 믿었다고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서 믿는다고 할까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서 믿는다고 할 것이지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할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못남을 깊이 알아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가요.

믿음이 좋다는 식으로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믿음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어요.

 

위에서 언급한 성화주의 목사처럼 나는 예수님처럼 산다가 아니라 난 예수님처럼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한단 말이에요.

난 예수님처럼 살 수 있어 라고 하는 것은 그 속에 은혜가 없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가능성으로 예수처럼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역설적으로 난 할 수 있어가 아니고, 난 할 수 없어가 되어요.

이건 안 한다는 것이 아니고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요.

자기 있음에서 자기 없음으로 나아간단 말입니다.

자기 가능성에서 자기 불가능성으로 내려간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안에서 일을 하세요.

은혜에 속한 일들을 하게 하세요.

봉사도 하게 하시고, 구제도 하게 하시고, 헌금도 하게 하시고, 복음도 전하게 하시고, 형제를 사랑하게도 하신단 말입니다.

 

그럼 자기 안에 예수님이 계신 성도는 이걸 알아요.

자기가 한 일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게 하신 일이란 것을 알아요.

그러니 일을 하고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을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요.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신앙이 좋은 것으로 드러나지 않아요.

도리어 없는 것처럼 보여요.

이런 사람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에요.

 

그런데 자기 안에 예수가 없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자기가 드러나는 식으로 일을 해요.

자기 생색나는 일을 해요.

하는 일마다 자기 자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것으로 드러내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것은 결국 스스로의 행동이 믿음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하였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법이 있으면 법이 나오고 그 속에 은혜가 있으면 은혜가 나와요.

그 속에 예수가 있으면 예수가 나오고 그 속에 예수가 없으면 자기가 드러나요.

 

진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자기 믿음 없음으로 드러나는데!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은 사람은 믿음 있는 것으로 드러내고자 해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 믿음 없는 자들이 믿음 있는 척 하면서 진짜로 믿는 자들을 핍박한단 말입니다.

성화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핍박한단 말입니다.

 

이걸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집안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어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어요.

이스마엘과 이삭이에요.

이스마엘은 육체로 났고 이삭은 성령으로 났어요.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21-3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아브라함은 두 아들을 낳았어요.

애굽 여자인 하갈이라는 종에게서는 이스마엘을 낳았고,

본 부인인 사라에게서는 이삭을 낳았어요.

 

이스마엘은 육체로 난 자라고 하고, 이삭은 성령으로 난 자라고 합니다.

육체란? 율법으로 말하고, 성령은 믿음을 말해요.

그래서 바울은 하갈과 사라를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두 언약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갈은 시내산 언약이라고 하고, 사라는 하늘 예루살렘 언약이라고 합니다.

시내산 언약은 율법이고, 하늘 예루살렘 언약은 믿음(은혜)이에요.

율법은 옛 언약이이고, 믿음은 새 언약이에요.

 

이스마엘은 율법 아래서 난 자를 상징하고, 이삭은 믿음으로 난 자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유업을 누가 잇는가 하면 이삭처럼 믿음으로 난 자가 이어가요.

율법으로 난 이스마엘은 쫓겨납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아브라함의 후사로 세웠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삭처럼 없는데서 있음으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조상인가 하면?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조상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행하셨던 방식으로 아브라함 후손도 만드세요.

아브라함과 같은 방식으로 태어나는 자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자식이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은 죽은 몸에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죽은 몸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만물을 창조하시는 것과 같은 내용이에요.

없음에서 있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신다는 것은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 방법이란 말입니다.

이삭의 출생 속에는 장차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방식으로 생겨나는지가 담겨져 있어요.

 

이걸 신약 식으로 살펴봅시다.

신약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을 후사들이 어떻게 생겨납니까?

믿음으로 생겨나지요.

 

여기서 믿음이란? 우리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란 말입니다.

성도는 자기 공로와 상관이 없이 철저히 예수님의 공로로 생겨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생겨난다 함은 예수님이 하신 일 때문에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믿음에 방법으로 후사가 되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행위만 남기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성도가 받은 구원엔 인간의 자랑거리가 없어요.

오직 예수님 자랑거리만 있어요.

예수님만 자랑하는 사람이 구원 받은 성도이고 이런 사람이 천국에 가요.

천국에 24장로가 면류관을 어린 양에게 던지는 것은 어린양의 공로 때문임을 알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엔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고 찬미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하나님 나라를 이어갈 후사들이에요.

우린 믿음으로 난 후사들이에요.

그러니 예수만 자랑하고 삽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공로 없이, 아무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부르시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게 해 주신 그 은혜를 찬미하며 감사합니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들을 더 많이 알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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