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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 27강. 이상한 법칙 (롬 4:1-8)

by coroa 2022. 8. 24.

롬 4:1-8=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7강. 이상한 법칙 (롬 4:1-8)

롬 4:1-8=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정낙원 목사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고 합니다.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죄를 가리우심이 복이 되려면 죄에 대하여 아파함이 있어야 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서 고통과 아픔을 당하는 사람이라야 죄를 가리우심이 복이라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사람마다 복에 개념이 다릅니다.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야 의롭다 여겨주심이 복이 됩니다.

또한 죄에 대하여 아파해 본 사람이라야 죄사함이 복이 됩니다.

율법 아래서 지긋지긋하게 종 노릇을 해 본 사람이라야 율법으로부터 해방 되었다는 것이 복이 됩니다.

 

병든 자에게 있어 복은 병에서 나음 받는 것입니다.

가난 한 자에게 복은 부자 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분에게는 사업이 번창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복(福)을 소망이라고 합시다.

사람마다 바라는 소망이 있겠지요.

신자와 불신자 간에 소망이 다를 것입니다.

목사와 성도 간에도 소망이 다를 것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복음 증거하는 목사로서의 소망은 어떻게 하든지 복음을 쉽게 잘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쉬운 말을 하려고 합니다.

 

설교는 자기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는 거예요.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였지요.

이건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에 대하여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세요.

 

목사는 선생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받은 생명을 함께 나누어 주는 자에요.

생명을 나누어 준다고 하니 조금 어패가 있는데!

하지만 목사는 성도들의 눈 높이에 맞추어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대화하는 자에요.

목사는 마치 엄마가 밥 먹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에게 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아이의 장단에 맞추어서 장난을 하고 얼레리~ 까꿍! 하면서 먹이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에 선진들은 우리의 기호(旗號)입니다.

성경 속에 믿음으로 살았던 앞서간 믿음에 선진들이 무엇을 소망 삼고 어떤 가치관으로 살았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소망이 곧 우리의 소망이어야 합니다.

 

이들을 닮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지금 내가 가고 있는지 살펴보라는 의미에서 기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성경을 통해서 자신이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확인을 하여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믿음으로 살았던 그들과 같은 길을 걷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말합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동산 나무사이에 숨어버립니다.

이를 아시고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아담아! 내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으신 이 물음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물으심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무얼 하느냐?” 라고 묻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고 묻고 있어요.

 

“네가 서 있는 그곳이 어디냐?”

“네가 지금 누구 뒤에 숨어 있느냐?”

“왜? 나무 뒤에 숨어 있느냐?” 를 묻고 계십니다.

무엇이 너로 하여금 나무 사이에 숨게 하였는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이건 은혜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에덴동산에는 세 가지 나무가 있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나무와 아담이 숨은 나무들이 있습니다.

 

세 가지 나무 중에 살아있는 나무는 생명나무 뿐입니다.

나머진 다 죽은 나무에요.

죽었다 함은 생명을 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선악의 나무는 죽음의 나무입니다.

그리고 아담이 숨은 나무도 생명이 없는 나무입니다.

 

나무를 의인화(擬人化) 하여서 사람이라고 봅시다.

생명나무가 예수님을 상징하니 선악 나무는 마귀를 상징하겠지요.

그렇다면 아담이 범죄하고 숨은 나무는 인간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을 봅시다.

 

막 8:23-25=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우러러 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고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을 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고 했어요.

나무를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럼 아담은 사람들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이 됩니다.

아담이 생명이 없는 나무 사이에 숨었다는 것은 죽은 자 속에 숨었다는 말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것과 같아요.

이게 죄인의 어리석음입니다.

 

아담은 사람들 속에 숨으면 두려움이 사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은 사람들 숲에 숨는다고 사라지지 않아요.

아담의 후손들인 사람들은 착각하기를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것이 진리의 집단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흔히들 집단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라고 하면 그럼 이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는 말이냐? 라고 항변을 합니다.

집단을 힘으로 내세워요.

이건 사람의 수(數)를 힘으로 삼는 육에 속한 자들의 생각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손들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사람들은 자기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많으면 안심이 되는 줄 알아요.

자기 안에 증거가 없으면 사람의 증거를 취하게 되어 있어요.

사람 속에서 안위 받고자 해요.

그렇다고 두려움이 사라지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자기 안에서부터 엄습하는 두려움은 본능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본능은 자기 실존으로부터 나옵니다.

두려움은 죄로부터 기인되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있어 두려움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발가벗음이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담이 왜? 죽은 자들 속에 숨었을까요?

이는 아담이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산 자는 죽은 자 속에 숨지 않아요.

도리어 죽은 자 속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코로 호흡하는 자들은 수(數)에 칠 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선 산 자만 수(數)에 칩니다.

죄인은 죽은 자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나무 사이에 숨지 않았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고 난 후에 나무 사이 숨었습니다.

죽었기 때문에 자신과 동질인 죽은 자 속으로 스스로 찾아들어간 것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있습니다.

같은 종(種)끼리 모인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숨어야 할 자리는 생명나무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생명나무를 떠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너 왜? 거기에 있느냐!

왜? 그 죽은 자들 속에 숨어 있느냐! 라고 물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할 자가 왜? 나무 뒤에 숨어 있느냐고 하십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아담아 네가 지금 누구 안에 있느냐! 입니다.

야~ 정낙원이 너 지금 누구 안에 있느냐?

네가 선 그 자리가 어디이냐?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은혜의 자리이냐?

법의 자리이냐?

 

정죄의 세계이냐!

결코 정죄함이 없는 세계이냐!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의(義)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義)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義)에 필연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義)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와 예수를 믿는 믿음을 대조하면서 말합니다.

율법에 의(義)냐?

율법 외에 다른 의(義)냐?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는 율법 외에 다른 의(義)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착하게 살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義)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는 율법의 행함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즉 인간의 착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율법 외에 다른 의(義)라고 합니다.

율법 외란? 인간의 행함 말고! 란 뜻입니다.

인간의 행함 말고! 란 말은 인간을 떠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인간들 바깥 즉 다른데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인간들의 착함에서 의(義)를 찾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으로 만든 의(義) 말고! 라고 합니다.

인간 것 말고 다른 것을 달라고 합니다.

 

인간 것 말고 다른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는 율법 외에 다른 의(義)는 인간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는 인간의 의(義) 밖에 나오지 않아요.

 

그럼 어쩌란 말인가요?

하나님께 물어야지요.

도대체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의(義)를 말합니까?

물어야지요.

모르면 물어야지!

모르면서 자기 생각으로 이거다 저거다 가지고 오면 안 됩니다.

 

이에 바울이 대신 알려 줍니다.

예수에 의(義)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만든 의(義)를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아주 쉽고 간단하게 말할게요.

인간에게서는 인간의 의(義)가 나오고!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바라는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으로 오신 분에게서만 나와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님에게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결국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가지고 오라는 말은 예수 믿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으라고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믿는 대상에게 나를 던지는 것입니다.

나를 예수 안으로 숨으란 말입니다.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게 숨으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의(義)를 옷을 입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인간은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예수님만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이건 인간들을 당황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을 무력화하는 말씀입니다.

 

아니~ 바라보라고 하면 바라는 보겠는데!

바라본다고 해서 믿어지느냐 입니다.

믿어져야 믿을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예수를 믿으라고 하여도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믿고자 노력은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믿어지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믿자! 믿자!

최면을 걸 수는 있어도 믿어지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우린 우리의 마음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 마음을 지으신 분이 장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 것도 우리의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면 저절로 믿어집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믿어집니다.

믿어야지! 믿어야지 하지 않아도 그냥 팍~ 믿어집니다.

이게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데에는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가 전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몽땅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결국 율법 외에 다른 의(義)인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믿음에 의(義)는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 나옵니다.

일하지 않았는데도 일한 것으로 간주해 주는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선 일한 대가로 구원을 해주지 않고 일하지 않았는데도 공짜로 주신다고 합니다.

이건 세상에 없는 법칙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이상한 법칙”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법칙은 수고한 만큼 돌아가는 법칙입니다.

자기가 일한 만큼 찾아가는 법칙입니다.

일하지 않았는데도 월급을 주는 그런 법칙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하지 않는 자에게 월급을 주는 법칙으로 다스리십니다.

이걸 은혜(恩惠)라고 합니다.

행한 대로 받는 것은 법(法)입니다.

그러나 행하지 않았는데도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구원이나 영생이나 죄사함이나 축복과 같은 것들은 모두가 공짜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창조주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들이에요.

그래서 은혜에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공짜로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먹고 사는 것입니다.

법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이것이 안 되어요.

공짜로 얻어먹으면 자기 자존심이 상해요.

 

인간은 자존심이 상하면 못살아요.

인간에게 있어 자존심은 생명과 같아요.

인간들이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면 왜? 자살을 합니까?

자기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먹고 산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아요.

이건 법 아래서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얻어먹어도 뭔가 갖다 바치고 나서 얻어먹어야 해요.

 

그래서 인간들은 신을 섬겨도 거래하는 형식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열심과 정성을 신에게 바치고 복을 얻어내는 식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게 법이에요.

 

목사님들이 그러잖아요.

하나님은 삼십배 육십배 백배를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심으라고 합니다.

심지도 않고 달라고 하는 것은 도둑놈 심보라고 합니다.

이성적으로 들으면 그럴 듯해요.

맞아요.

 

그래서 교인들은 갖다 바치기에 급급합니다.

목사님들은 한 술 더 떠서 많이 심은 자는 많이 받고 적게 심은 자는 적게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많이 받으려고 집을 팔아서 바칩니다.

이런 장단에 춤을 추는 것은 결국 그 속에 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법에 속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라고 하여도 그 말이 귀에 안 들어와요.

하나님에게 얻어먹는 것이 신앙입니다! 라고 하면 이게 안 믿어져요.

 

안 믿어지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행함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행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살아요.

그래서 행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법의 나라에서는 은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낯설어서 용납이 안 되어요.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것은 율법 아래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법의 나라에서 은혜는 이상한 법칙입니다.

 

바울은 지금 인간들에게 없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이상한 법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율법 안에는 없는 은혜의 법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로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건 그냥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래 까짓거!

그렇게 인정해 주지! 라고 할 정도로서의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 쪽에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인간을 아예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 입장에선 엄청나게 기분 나쁜 이야기에요.

 

이런 법칙은 인간 입장에선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법칙은 인간을 완전히 쪼다 만드는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한마디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나는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가치를 두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자식들도 부모에게 무시당하면 발끈합니다.

이 모두가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항상 자아(自我)를 챙기는 식으로 역사를 해요.

그러므로 죄인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챙기고자 합니다.

율법은 자기 가치를 인정해 주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율법에 의(義)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의(義)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에 의(義)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 자기 딴에는 밥 퍼주는 사랑을 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주고!

충성하고 봉사하고 자비를 베푼 고결한 일들이 의로운 것이라 생각하고 가지고 나왔는데 하나님은 그것 말고 다른 것을 달라고 합니다.

 

이건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앙은 열심과 정성의 문제가 아니고 정답의 문제에요.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에요.

성경이 증거하는 신앙의 싸움은 인간의 행위로 의롭게 되느냐!

예수를 믿음으로 되느냐! 의 싸움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행위로 의로워진다고 하면 인간 자력으로 구원을 따 낼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것은 곧 인간이 의롭다는 것을 전제 하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고 합니다.

 

죄인이란? 무엇을 해도 다 죄라는 뜻입니다.

인간을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 함은 인간에게선 의(義)가 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합니다.

율법을 행한 자나 율법을 행하지 않는 자나 다 죄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그런즉” 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주장해 온 것을 근거로 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무슨 말을 하였는가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하였어요.

하나님 앞에선 율법을 지킨 유대인이나, 율법을 지키지 않은 이방인이나 다 똑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어째서 그러한지를 유대인들의 조상을 예를 들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을 들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조상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행위가 아니라고 합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하나님 백성이 되었는가요?

그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부르심으로 되었습니다.

원래 아브람은 하나님을 몰랐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너를 복의 조상이 되게 해 주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하십니다.

아예 복에 조상으로 삼아 버립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아브람의 조건을 보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은 약속을 하신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아브람은 가만있다가 졸지에 복에 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걸 일컬어 일을 하지도 않은 자에게 월급을 주었다고 합니다.

경건치 않는 자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합니다.

의로운 짓을 하지도 않은 자를 의롭게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복 받을 짓을 하지도 않은 자를 복에 조상으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걸 믿었어요.

여기서 잠깐!

엄청 중요한 말이니 잘 이해하세요.

 

아브라함이 믿었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었구나! 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그 반대에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어요.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은 자신의 믿음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을 이루어가시더라는 것입니다.

이걸 안 것을 믿음이라고 해요.

 

아브라함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잘 알아요.

아브라함은 자기가 복 받을 인간이 아니란 것을 너무도 잘 알아요.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어요.

그 증거물이 바로 두 자식이에요.

이스마엘이고 이삭이에요.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서 저지른 산물이에요.

그리고 이삭은 하나님이 준다고 하였음에도 지금까지 하나님에게 속았다고 생각하여서 안 믿은 증거물이에요.

두 자식 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증거물들이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복에 조상이 되었어요.

이건 자기 조건으로 된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안 것입니다.

 

난 안 믿었는데도 하나님은 내 동의와 상관없이 내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안 것을 믿음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그러니 상식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바울은 지금 이걸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한 자가 아니에요.

도리어 불순종한 자에요.

성경이 아브라함의 불순종에 역사를 기록한 것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고 도리어 반대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자신은 믿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은 당신께서 약속하신 것을 다 이루셨다는 것을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우리는 믿음 그러면 내가 믿었다고 하는데!

성경은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우리는 믿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루신 것을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하는가요.

5절을 다시 봅시다.

 

5절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잘 보세요.

일을 하지 않고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義)로 여기신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이는 하나님이 하는 일을 수용하는 것을 의(義)로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을 보고!

아~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하시는구나! 라고 박수치는 사람을 의(義)로 여겨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박수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박수치는 행위를 의(義) 즉 의로운 행위라고 한단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동의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믿는 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그 믿음을 의(義)로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헷갈리기 쉬우니 잘 이해하세요.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을 일컬어 믿음으로 난 의(義)라고 합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선 자신이 하나님 백성이 된 것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뭘 한 것이 있어야 자랑을 하지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얼떨결에 얻은 것이에요.

만약에 자랑을 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었다는 것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이런 상태를 본문에서 일도 하지 않은 자에게 일당을 주었다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은 사람이 일당을 받은 것은 삯이 아니라 주인의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이 일방적인 선택으로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저주 받을 죄인이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간과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죄를 가리우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덮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훗날 다윗 왕이 알았어요.

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구나!

다윗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행운을 받은 족속이라는 것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6-8절을 다시 봅시다.

 

6-8=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은 아브라함의 구원을 불법을 사함 받고 죄를 가리우심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지금 아브라함의 선택을 죄사함으로 보고 있어요.

다윗의 고백은 야~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은 일방적으로 죄 용서를 받았구나!

이거 엄청난 복이구나!

 

우리는 엄청난 복을 받은 조상의 후손들이란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있는가!

조상이 복을 받았으면 그 후손도 복을 받았어요.

그래서 다윗도 죄 용서 받았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아브라함이나 다윗처럼 용서 받은 자들이에요.

다윗만 놀랄 것이 아니라 우리도 놀라야 해요.

이러한 말씀을 보면 감사가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소 닭 보듯이 하지 말고 좀 감동을 하세요.

이런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벌렁 벌렁 해야 하는데!!!

 

더 감격스러운 이야기 하나 하고 갑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이 자기 행위가 아니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행실을 보고 선택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럼 아브라함의 선택이 아브라함의 행실로 인하여 취소되지 않겠지요.

 

그래요.

아브라함이 얻은 구원은 아브라함의 행위로 취소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행위 언약”이 아니고 “은혜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은 은혜 언약이에요.

 

은혜 언약이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언약이에요.

중도에 포기 되지 않아요.

막말로 우리 꼬라지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처럼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나 이러다가 짤리면 어쩌지 라는 것이 없어요.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지식이고 허구일 가능성이 많아요.

그러니 자기 행위로 구원의 여부를 가늠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믿음을 확증해 보세요.

 

아브라함을 하나님 백성 삼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 아브라함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함이지 아브람의 원함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함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조건과 상관없이 언약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자기 행위로 구원이 취소가 된다면 아브라함으로서는 전혀 손해 볼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애초 아브라함은 구원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예를 들어서 지옥에 있던 자를 천국으로 불러 놓고서는 말 안 듣는다고 다시 지옥으로 보낸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원래 있던 자기 자리로 돌아간 것이므로 손해 될 것이 없어요.

잠시 천국 구경하고 왔다고 생각하면 되어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만 창피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아요.

애당초 지키지도 못할 것을 약속을 한 꼴이 되고 말잖아요.

뻥 친 것이 되고 말잖아요.

아니 지옥에 있던 놈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천국으로 데리고 갔으면 거기서 잘 살도록 해야지 말 안 듣는다고 짤라 내면 하나님만 실없는 분이 되고 말잖아요.

괜히 능력도 안 되면서 객기를 부린 것 밖에 안 되잖아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구원이 아브라함의 행위로 인하여 취소가 된다면 하나님이 손해입니다.

무능력한 하나님이라고 치부되어요.

하나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셈이에요.

이러면 하나님만 조롱거리가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 망신 안 당하려고 아브라함의 행위와 상관없이 끝까지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행위로 짤려 나길 일은 없지만 그 대신 혹독한 간섭을 당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뜻대로 안 살아지도록 하나님이 간섭을 해 댑니다.

이게 사느니 죽는 것만 못해요.

나오느니 한숨이고 원망이에요.

감사가 아니고 도리어 원망과 불평이 나온다구요.

 

이런 인간을 계속해서 구원을 지켜주시니 이게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말 안 듣는 인간을 그냥 확~ 갔다 버리지도 못하고 끝까지 보듬고 간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인내하심이고 아픔인 줄 아세요.

죄인을 계속해서 보듬고 가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우리에게는 감사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아픔이에요.

우리가 자식을 키우면서 이걸 알잖아요.

말 안 듣는 새끼를 그냥 호적에서 확~ 파버리고 갖다 버릴 만도 한데!

그러지 못하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눕히면서 키우잖아요.

 

왜? 그럽니까?

내가 낳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낳았기 때문에 자식새끼 행동 보지 않고 끝까지 보듬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키운 부모의 마음은 전부 고목나무처럼 속이 다 썩고 텅 비어서 문드러져 있어요.

 

이게 어디 자식이야기 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키우는 이야기이지요.

하나님 속이 다 문드러졌어요.

이걸 천국에 가면 알아요.

그래서 천국에 가면 하나님 고맙습니다! 라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 하실 때에는 아브라함 속에 하나님 자존심이 담겨져 있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를 복 준다고 했으니 반드시 아브라함은 복을 받아야 하나님 체면이 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못 받으면 하나님 체면은 말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끝까지 아브라함이 복에 조상이 되도록 불순종을 해도 잘라내지 않고 계속하여서 복에 조상이라는 것을 알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불 순종하는 자가 잘려 나기지 않으니 복 받은 것이지요.

그러니 복에 조상이 맞지요.

이해되는가요.

 

만약에 아브라함의 행위로 구원이 취소가 된다고 하면 꺼꾸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읍소를 해야 할 판입니다.

야! 아브라함아! 내 체면을 봐서라도 제발 행실을 바르게 해서 내가 준 구원을 지켜다오! 라고 하여야 할 판입니다.

 

여러분이 자식들에게 그러잖아요.

야~ 이 부모 체면을 봐서라도 공부 좀 해라!

내 얼굴 좀 봐서라도 인간 좀 되라고 하잖아요.

다 부모 체면 때문에 때로는 매로 다스리고 때로는 칭찬으로 다스리잖아요.

 

우리 하나님이 그래요.

때로는 푸른 초장으로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구원을 하나님이 지켜내십니다.

 

아브라함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 때문에 하나님이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만 넙죽 넙죽 받아 챙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일하지도 않는 자에게 상을 준다고 합니다.

 

믿음이라는 말은 내가 믿는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말합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는 것이 은혜가 되려면 아브라함 속에서 불순종이 나타나야 하겠지요.

 

아브라함이 믿지 않았는데도 짤리지 말아야 은혜가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는 증거물로 이삭을 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준다고 할 때 비웃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처럼 지켜주세요.

성도의 구원은 끝까지 성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지켜집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오늘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더 깊은 구원의 맛을 느껴보도록 합시다.

말씀을 맛나게 먹어 봅시다.

 

오늘은 참으로 기분 좋은 말씀을 상고하게 되어서 마음이 설렙니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말씀 중에서도 특히 7절 8절입니다.

다시 읽어봅시다.

새 번역본으로 읽으면 더 실감이 납니다.

 

7)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복이 있다. 8) 주님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실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주신다고 하지요.

주님께서 죄가 없다고 인정을 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세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용서와!”

“죄를 덮어주심과!”

“죄가 없다고 인정해 주신다” 는 말씀입니다.

 

용서란?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무슨 잘못한 일을 하여도 그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면책특권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책잡힐 일을 하여도 면해주겠다고 합니다.

이걸 정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죄인이 면책특권을 받는다는 것은 죄인으로 취급당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죄인에게 있어 이 보다 더 놀라운 일이 어디에 있겠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정의하기를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했어요.

우린 생래적으로 눈만 뜨면 죄 짓고 사는 종자들입니다.

 

그래서 죄인입니다.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죄를 발산하는 것입니다.

죄인에게서는 무엇이 죄다 라는 것이 없고 모두가 죄입니다.

인간이 선이라 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선 죄이고 악이라 하는 것도 죄입니다.

죄인은 죄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고 합니다.

죄를 덮어 준다고 합니다.

죄 없다고 인정을 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죄인으로 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게 용서에요.

왜? 그럴까요?

무엇 때문에 이런 파격적인 대우를 해 주실까요?

믿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냥 해 주는 것이 아니고 믿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믿는 믿음입니까?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해 준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는데 그냥 용서하지 않고 죄인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갚아 주신 것으로 용서해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를 의롭다고 해 준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찬성하는 자를 의롭다 해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어떤가요?

일하지도 않은 자에게 상을 주는 방식입니다.

 

이건 인간들 입장에서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방식이라고 했어요.

인간들의 방식은 지성이면 감천하는 방식이에요.

복 받을 짓을 하면 복을 받는 방식이에요.

열심히 일한 자는 많은 것을 받고 일하지 않은 자는 국물도 없어요.

철저히 인과응보(因果應報)식 상벌(賞罰) 기준으로 다스려지는 것이 인간들 세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의 방식과 정 반대 되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일하지도 않은 자에게 상을 주는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이건 인간들이 받아 들일수가 없어요.

 

그럼 다 빈둥거리고 놀지 누가 일을 하겠어요.

빈둥거리고 놀아도 월급을 주는데 누가 출근해서 일하겠어요.

그럼 무엇 하려고 회사에 입사를 시킵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월급을 주려면 회사에 입사를 시킬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월급을 주는 식으로 회사에 입사를 시켰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경영하는 회사에 입사한 사람들은 빈둥거리고 노는데도 월급을 꼬박 꼬박 받고 있어요.

 

쉬운 말로 합니다.

한 쪽 회사에서는 뼈 빠지게 일하고 월급도 못 받고 있어요.

이게 율법이라는 회사에요.

 

그런데 그 옆에 있는 회사에서는 일하지도 않았는데 두툼한 월급을 받고 있어요.

거기다가 보너스까지 주는 겁니다.

이게 은혜라는 회사에요.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이런 플랜카드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주 싸게 판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우리 사장님이 미쳤어요!

제 정신이 아니에요!

글쎄 물건을 똥값에 판대요!

 

그런데 말이죠.

우리 하나님이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장님은 똥값이라도 받지만 우리 하나님은 똥값도 안 받아요.

일하지도 않은 자에게 월급을 주세요.

 

이건 인간적으로 정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서는 이런 정신머리로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이 정신머리 없이 회사를 경영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상식이 있어요.

그 상식으로 판단을 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식은 일한 만큼 삯을 받는 상식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자에게 상을 주고 일하지 않는 자에게는 벌을 주는 상식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상식으로 신앙생활을 했어요.

이 상식으로 믿음을 판단했어요.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면 믿음이 좋다고 판단했어요.

 

인간의 열심을 근거로 판단하는 상식입니다.

이게 율법이에요.

율법 아래서는 내 열심과 비례하여 신앙이 좋고 나쁨으로 판단 받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제시한 상식은 일하지 않는 자에게 상을 주는 상식입니다.

말 같지도 않은 상식을 내어 놓습니다.

그리고 이걸 믿으라고 합니다.

이걸 믿는 자를 의롭다고 인정을 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러한 몰상식한 것을 믿는 그 믿음을 의(義)로 여겨 주신다고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요?

믿음이란?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믿으며 의지합니까?

하나님께서 믿으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지하라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믿으라고 하신 것이 무엇인가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대속하심입니다.

 

대속(代贖)이란? 대신 죄를 속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 죄 값을 누가 대신 갚아 주었다는 말입니다.

누가 갚아 주셨는가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왜? 대신 갚아 주셨을까요?

자기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다 갚아 주신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에 한해서입니다.

 

누가 자기 백성인가요?

예수님이 자기 죄 값을 대신 갚아 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믿음을 주셔서 이것이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받은 사람은 이 믿음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믿음을 받은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그게 뭔가 하면 자기 행위를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않아요.

내 잘남도 의미를 두지 않지만 내 못남도 의미를 두지 않아요.

 

사람은 잘난 것은 자랑하고 싶어하고 못난 것은 감추고자 합니다.

자랑거리는 드러내고자 하고 수치는 가리고자 합니다.

결국 자기 자랑을 하고 싶은 겁니다.

 

인간은 선악 아래서 태어납니다.

인간 속에는 선과 악이 혼재해 있습니다.

세상은 선은 장려하고 악은 억제하게 합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인간의 행실을 기준으로 정해집니다.

 

세상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을 선이라 라고 인간을 해롭게 하는 것을 악이라 합니다.

이러한 사고가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을이나 국가나 온 인류 모든 것에서 통용이 됩니다.

조직에서도 통용 됩니다.

가정에서도 잘난 자식은 자랑하고 싶어하고 못난 자식은 감추고자 합니다.

 

잘나고 못남의 기준이 뭔가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정해 주면 선이고 잘남입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지탄하면 악이고 못남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선은 드러내고 악은 감추고자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안에 있는 악을 감추면서 자기를 위장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잘난 자가 되고 싶어 하고자 함입니다.

잘난 자가 되어야 발언권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잘난 자가 되어야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얻게 되어요.

이게 세상이에요.

 

인간에게 잘난 것은 모두가 자기 행위로부터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행위를 버릴 수가 없어요.

예수를 믿어도 이 행위로 나오고자 해요.

 

복음 복음하면서도 자기 행위를 쓰윽~ 끼워 넣어요.

나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나 이런 사람이라는 근거가 뭔가요.

행위에요.

 

교회 안에서도 뭔가 한 일이 있는 사람은 큰 소리 칩니다.

식당에서 봉사라도 해 보세요.

그게 힘이 되어서 큰 소리를 치잖아요.

반대로 일하지 않는 사람은 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식당에서 봉사한 것은 좋은 행위이고 봉사하지 않는 것은 나쁜 행위인 것입니다.

교회에 온 것은 좋은 행위이고 교회에 오지 않은 것은 나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행여 남들이 다 하는데 혼자 안 해 보세요.

남들이 다 전도지 들고 밖으로 나가서 전도 하는데 혼자 안 해보세요.

그럼 전도 안 한 것을 숨기고자 하잖아요.

이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행위는 자랑하고 나쁜 행위는 숨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수치를 왜? 가리고자 할까요?

수치가 드러나면 발언권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자기 정당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 생각이 옳고 내 말이 맞다고 하여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면 소용이 없어요.

 

오죽하면 신용을 잃은 사람이 하는 말은 네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여도 안 믿겠다고 하겠어요.

콩으로 메주를 쑤는 게 맞아요.

하지만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이 하는 말은 외면을 당합니다.

이게 인간들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일평생 자기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합니다.

남들이 부정하는 것이라면 감추어야 합니다.

수치라고 여겨지면 가려야만 합니다.

가리지 않으면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되어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제일 먼저 나타난 현상이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어떤 눈이 떠졌는가요.

선악을 알게 하는 눈이 떠진 겁니다.

이게 불행이고 저주에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수치도 모르고 두려움도 없었어요.

발가벗고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았어요.

발가벗음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어요.

수치를 모르니 두려움도 없지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서 발가벗었으나 당당했어요.

어째서 그런가요.

이는 아담과 하와 속에 발가벗음이 죄라는 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발가벗음을 나무라지 않았어요.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어요.

법으로 나오지 않으니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자식을 키워보면 알 수 있어요.

부모가 제일 싫은 것이 뭔고 하니 자식이 부모의 눈치를 살살 살피는 것입니다.

눈치를 살핀다는 것은 법으로 살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법으로 키우지 않아요.

잘하고 못하고를 가지고 자식이냐 아니냐를 판단하지 않아요.

잘 할 때도 있고 못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이 눈치를 보면 눈치 본다고 나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을 바라보는 것이 그래요.

법으로 나오지 말고 사랑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발가벗음이에요.

 

창세기 2장 25절을 보면 “아담과 그 아내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더라”고 합니다.

성경은 왜? 이걸 강조하고 있을까요?

굳이 이런 말을 왜? 할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발가벗음이 수치라고 생각했으면 옷을 해 입혔을 것입니다.

수치를 가려 주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벌거벗음 그대로 둔 것은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습이 왜? 보시기에 좋았을까요?

하나님이 만든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자아(自我)가 없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발가벗음을 수치로 보지 않은 것은 자아(自我)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보는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창조한 그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발가벗겨 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어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발가벗음이 수치라고 여기는 눈이 떠진 겁니다.

이건 하나님이 주신 눈이 아니에요.

마귀가 준 것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하신 일에 자기 것으로 덧칠을 하기 시작 한 것입니다.

발가벗음에 자기가 만든 옷으로 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이 하신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훼손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훼손하지 않으려면 자기 생각이 없어야 해요.

자기 눈이 없어야 해요.

 

내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자기 생각에 맞도록 고치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으로 만들지 않고 자기가 보기에 좋도록 만들어요.

이 모두가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에 대하여 눈을 뜨면 그 때부터 자기 자신을 고치기 시작합니다.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럼 가려야합니다.

그걸 그냥 두고서는 두려워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자아에 대한 눈이 떠진 겁니다.

자기가 보이기 시작한 겁니다.

자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발가벗음이 수치라고 여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수치라고 여겨지는 것을 감추기 시작을 했습니다.

자기 안에 선과 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악을 없애고자 선이 충돌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 악 때문에 자기 자신이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을 감추고자 합니다.

악이 고발한 수치를 감추고자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치마를 해 입고 수치를 가린 것은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자 함입니다.

 

이게 죄인의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떳떳함이란 하나님이 만드신 그대로일 때입니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아담과 하와의 생각이 반대일 때가 하나님 앞에 떳떳해 질수가 있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발가벗음 그대로일 때가 떳떳해 진단 말입니다.

 

치마를 해 입었다는 것은 이미 떳떳함이 상실 되었어요.

하나님이 만든 모습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수치를 가리고 떳떳해지고자 하자 누가 너의 벌거벗음을 수치라고 알려 주었느냐고 추궁을 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수치를 가리고 떳떳해지고자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떳떳치 못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너희들은 왜? 내가 만든 그대로 오지 않고 치장을 하고 왔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놈이 내가 만든 것을 훼손했느냐!

그 놈이 누구냐!

그 놈을 색출하여 응징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놈이 계속하여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세상을 뜯어 고친단 말입니다.

 

죄인의 특징이 뭔 줄 아세요.

자기 생각으로 자기를 치장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은 누구의 발상인가요.

 

하나님이 가르쳐 주었나요?

아니면 자기들 생각인가요?

자기들 생각이지요.

 

이렇게 하면 하나님도 괜찮다고 하실거야! 라고 자기들이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 몰래 일을 저질렀을 때 자기 딴엔 수습한다고 한 것이 일을 더 크게 그르치게 한 것과 같아요.

 

지금 아담과 하와가 그런 짓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해 입고 온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를 어떻게 했습니까?

확 뜯어내지요.

 

그리곤 하나님의 방법으로 수치를 가려주시지요.

수치는 우리가 가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려주세요.

내 방법으로 가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려주세요.

 

이게 무진장 중요해요.

이 하나의 모습 속에 모든 신앙이 담겨져 있어요.

 

자 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수치를 가린 것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자기를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까?하나님을 위한 것이지요.

 

하나님 앞에 발가벗음이 수치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가린 것이잖아요.

하나님 앞에 발가벗음 그대로 나가면 하나님이 싫어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치마를 해 입은 것이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을 위한 것이 맞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한 것을 자기들이 하고 말았어요.

자기들 생각으로 했단 말입니다.

자기들 방식으로 수치를 가렸어요.

이게 죄에요.

 

하나님 앞에 수치라고 한다면 그 수치는 하나님이 가려 주어야 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수치가 가려졌다고 생각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안 들면 아무리 아담과 하와가 자기 방식으로 수치를 가렸다고 하여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는 수치 그대로에요.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여야 수치가 가려진 것이 되어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의중은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생각으로 이러면 하나님도 괜찮다고 하실거야! 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들 생각이지 하나님 생각은 아니에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자기들의 발가벗음이 수치라고 여겨졌다고 한다면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이실직고를 하여야지요.

하나님 우리가 선악과를 먹고 나자 갑자기 우리의 벌거벗음이 수치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렇게 벌거벗고서는 하나님을 만나기가 두렵습니다.

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라고 하여야지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러지 않았어요.

자기들 식으로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게 죄에요.

 

죄가 뭐냐?자기들 생각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들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은 이렇게 하시면 기뻐하실 거야!

열심히 제사 지내면 기뻐하실 거야!

그래서 불철주야로 제사 지내기에 급급합니다.

제사란? 한 마디로 인간의 행함이에요.

 

이 시대 복음을 모르는 목사들이 이렇게 가르치고 있잖아요.

무엇이든지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가르치고 있잖아요.

그래서 교인들의 신앙이 “무엇을 믿을까” 라는 믿음에서~ “무엇을 할까” 라는 열심으로 둔갑을 하고 만 것입니다.

 

목사들이 그러잖아요.

 

열심히 충성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열심히 전도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그러니 교인들의 신앙들이 전부 치마 만들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과 정성보다 정답을 원해요.

아담과 하와처럼 땡볕에 치마를 만들어 입는다고 야! 너희들 수고 했다!

그러지 않아요.

 

칭찬이 아니라 도리어 왜? 이런 등신짓을 했느냐고 책망을 해요.

땀 뻘뻘 흘리면서 치마를 만들어 입고 온 것을 확~ 뜯어낸단 말입니다.

누가 이따위 짓을 하라고 했느냐고 화를 내신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어요.

순종은 내 생각이 없는 것이고 제사는 내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신앙을 순종으로 말하는 것은 자기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옛 사람을 죽이는 곳이에요.

 

신앙을 순종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는지 들으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고!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들으란 말입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예수님 말씀을 들으란 말입니다.

괜히 마르다처럼 예수님 대접한다고 설치지 말고!

마르다처럼 예수님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자기 열심으로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지 마세요.

먼저 알고 섬기세요.

 

그렇지 않고 자기 식으로 섬기다 보면 나중에 이를 갈면서 슬피 우는 일이 일어나요.

가인처럼 자기 제사가 가납되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성질을 낸단 말입니다.

왜? 내 정성을 무시하느냐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단 말입니다.

가인이 무엇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였나요.

자기 열심이라는 제사에요.

 

결국 가인은 제사 지냄이 자기 의(義)가 되고 만 것입니다.

제사 지냄이 힘이 되고 말았어요.

하나님 앞에 나~ 제사 지냈잖아요! 한단 말입니다.

 

이 시대 버전으로 말하면

나~ 교회 나왔잖아요!

나~ 전도 했잖아요!

나~ 헌금 했잖아요!

나~ 복음 전했잖아요!

 

이러한 것을 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의지한 것이 잘못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구원 받음에 감사하여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이러한 것은 자연스럽게 하게 되어 있어요.

은혜 아래 있는 성도는 이러한 것은 자연스럽게 해요.

했다고 생색내지도 않아요.

 

이건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하게 한 것이에요.

하나님이 공급하신 힘으로 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내가 한 것처럼 힘으로 삼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나 했잖아요!

그러면 안 된단 말입니다.

 

이건 은혜 받은 성도라면 자연히 행하게 되어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걸 의(義)로 삼아 나 했잖아요! 라고 하면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고 만단 말입니다.

이게 죄에요.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는가요?

죄를 덮어 준다고 하지요.

덮어준다는 말은 보이지 않게 한다는 말입니다.

마치 더러운 벽을 커튼으로 가려놓은 것과 같아요.

 

이게 정리가 안 되면 구원파처럼 말하게 됩니다.

구원파의 주장은 예수를 믿으면 의인이 된다고 합니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해요.

그들은 죄인 죄인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건 대속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서 그래요.

성도는 의인이면서 죄인이에요.

정확하게 말하면 의롭다 인정을 받아서 의인이라고 칭함을 입은 자에요.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정을 받는다는 말은 실상은 죄인인데 의인으로 인정을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누가 개입을 합니까?

예수님이 하세요.

죄인을 의인으로 인정을 해 주는데 어떻게 해 주시는가 하면 예수 안에 서에요.

 

예수님이 커튼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커튼을 들추면 여전히 더러움이 드러나요.

그래서 성경은 예수를 믿는 것을 예수님의 의(義)로 옷 입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으로 수치를 가려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건 조금 어려운 말이니 잘 새겨서 들으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요.

예수님이 하신 일에 관심이 있어요.

하나님이 입혀주신 가죽 옷에 관심이 있어요.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관심이 없어요.

피조물 속에 창조주의 흔적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하신 일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피조물 속에서 창조주의 흔적이 사라지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그건 쓰레기에요.

 

내 자식과 남에 자식의 차이가 뭔가요?

내 자식에겐 내 흔적이 있고 남에 자식에겐 내 흔적이 없어요.

내 자식에겐 내 흔적이 있기 때문에 잘못해도 사랑하는 거예요.

 

객관적으로 보면 남에 자식이 내 자식보다 훨씬 좋을 수가 있어요.

그러나 부모는 자기 자식을 남에 자식과 객관적으로 비교해서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은 비교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했습니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하지요.

하나님이 한 것만 있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해 놓은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홀로 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믿어져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하면 믿음이 좋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신앙생활이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해요.

글자 그대로 신앙으로 사는 것이에요.

 

신앙(信仰)이 뭔가요?

믿고 바라보는 거잖아요.

무엇을 믿고 바라보는가요?

 

하나님께서 믿고 바라보라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뭔고 하니!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에 요구를 다 이루신 것을 믿으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하여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죄를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걸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을 의(義)라고 합니다.

 

이걸 믿어지게 하시려고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자기 죄 때문이라는 것이 믿어져요.

이게 믿어지면 자신은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 안에서는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마귀가 너 죄인이지!

그러면 아니야 난 예수 안에서 의인이야! 라고 한단 말입니다.

너 죄 지었잖아!

그래 나 죄었어!

하지만 예수님이 내 죄를 다 도말해 주셨어!

내가 받을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다 받았기 때문에 내가 갚아야 할 채무가 없어!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믿음이 좋다! 나쁘다! 라는 말은 비 성경적이에요.

 

믿음은 좋고 나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있느냐 없느냐만 있어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예수가 믿어지게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차별이 없어요.

누구는 100%짜리를 주고 누구는 50%짜리를 주지 않았어요.

다 100%짜리를 주셨어요.

 

이건 남녀노소 다 동일합니다.

예수는 어른이라고 해서 많이 믿어지고 어린 아이라고 해서 적게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어른이나 어린아이나 예수를 믿는 것에는 차별이나 차등이 없어요.

목사라서 큰 믿음을 받았고 집사라서 작은 믿음을 받은 것이 아니에요.

다 동일한 믿음을 받았어요.

 

쉬운 말로 믿음은 양(量)적인 것이 아니고 질(質)적인 것에요.

어느 정도 믿어지는 것이 없어요.

오직 믿어지느냐!

안 믿어지느냐 만 있어요.

 

믿어지면 믿음이 있는 것이고!

안 믿어지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난 몇%로 믿는데!

넌 얼마나 믿느냐! 라는 것이 없어요.

 

믿음이면 믿음이에요.

좋은 믿음이 있고 나쁜 믿음이 없어요.

하나님은 차별된 믿음을 주신 적이 없어요.

 

어떤 사람에게는 고급한 것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급한 것을 주지 않았어요.

믿음은 그냥 믿음입니다.

다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차별이 없습니다.

목사의 믿음과 집사의 믿음에 다르지 않아요.

 

믿음에는 믿느냐 안 믿느냐만 있어요.

믿어지면 믿는 사람이고 안 믿어지면 안 믿는 사람입니다.

그냥 대충~ 믿으면 되지!

그런 거 없어요.

 

그래서 제가 예수가 안 믿어지는 사람은 억지로 믿고자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억지로 믿고자 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지만 믿어져요.

하나님은 믿음을 보시지 믿고자 하는 우리 정성을 보시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는 다 믿음을 주세요.

차별 없이 말이에요.

내가 달라고 하지 않아도 주세요.

하나님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다 주세요.

그래서 선물인 것입니다.

 

이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예수가 믿어지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믿어져요.

이건 주여 삼창하면서 통성기도하지 않아도 되어요.

금식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술술 믿어져요.

이상하게 믿어진단 말입니다.

믿어지니까 믿는 겁니다.

믿어지기 때문에 믿고자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을 위하여서는 노력할 필요가 없어요.

노력한다는 것은 뭔가 수상해요.

신앙생활을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하면서 이마에 띠를 띠고 으싸~ 으싸~ 하는게 아니에요.

 

그냥 믿어지는 것으로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이벤트 하듯이 하지 마세요.

무슨 특별행사 하듯이 하지 말란 말입니다.

교회에서 특별이라고 하는 행사에 속지 마세요.

 

특별 기도회니!

특별 은사 집회니!

특별 부흥 집회니!

 

좌우지간 특별이라고 하는 것에 현혹당하지 마세요.

그건 종교꾼들이 교인들을 노력 봉사장으로 이끌어 내려는 수작들이에요.

믿음이 없을수록 믿음에 관한 이벤트를 많이 해요.

안 믿어지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스스로에게 난 믿는다고 최면을 거는 겁니다.

그래야 그 안에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안심이 되거든요.

 

결국 자기 행함으로 믿음을 대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거예요.

제가 옛날에 이러한 짓을 엄청 했어요.

제 주특기였어요.

 

그런데 말이죠.

끝내 예수가 안 믿어져서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 내릴 뻔 했어요.

너무 괴로워서요.

 

억지 춘향이 노릇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수십 년간을 해 보세요.

미쳐요.

우울증이 와요.

 

그래서 저는 억지로 믿음 있는 척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 믿기 싫으면 믿지 말라고 합니다.

교회 오기 싫으면 오지 말라고 해요.

오고 싶을 때 오라고 합니다.

믿어지면 오라고 해요.

 

믿어지면 그때 와서 죽도록 충성하라고 합니다.

죽도록 충성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 하라고 합니다.

그동안 못한 것 다 토해내라고 합니다.

물론 큰 소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말이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음속에서부터 믿어지지 않는 것은 그 어떤 난리 부르스를 추어도 안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데에는 용빼는 재주가 없어요.

백약이 무효에요.

안 믿어지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믿어져요.

 

그러니 죽지 말고 사세요.

믿어지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말이에요.

혹시 압니까?

하나님이 내일이라도 믿어지게 해 주실지!

그러니 안 믿어진다고 저처럼 부엉이 바위에 올라가 뛰어 내릴 생각을 하지 마세요.

 

그리고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는 목사 눈치 보지 마세요.

목사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지 않았으니 목사 눈치 볼 이유가 없는 겁니다.

목사가 신앙을 판단하는 판관이 아니에요.

 

목사를 쫓아서 이리저리 몰려다니지 마세요.

그런다고 믿음이 생기지 않아요.

그 어떤 목사도 여러분 속에 믿음을 줄 수가 없어요.

 

그러니 유명하다는 목사를 좇아서 신앙생활 하려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왜? 그렇게 목사에게 인정을 받고자 합니까?

어느 목사에게 가면 안심이 된다는 것은 뭔가 수상해요.

 

여러분의 신앙은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이 해 주세요.

성령이 그 안에 계신 분은 누구에게 판단 받고자 하지 않아요.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요.

목사에게 신앙을 인정받고자 하지 않아요.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목사는 남에 신앙을 판단하고자 하지도 않아요.

그 사람이 나하고 함께 한다고 해서 신앙이 있고,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앙이 없다고 하지도 않아요.

나와 함께 하느냐 안 하느냐가 신앙의 시금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인 제 눈치를 보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신앙의 유무를 판단 받고자 할 필요가 없어요.

제 판단이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제 믿음을 판단하지 않아요.

다만 저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기 때문에 나는 예수를 믿는다 라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신앙의 시금석은 본인 안에 있는 믿음이에요.

믿어지는 사람은 신앙이 있는 것이고 안 믿어지는 사람은 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면 누가 막아도 예수를 믿게 되어 있고!

하나님이 안 믿어지게 하면 아무리 믿으라고 소리쳐도 못 믿어요.

 

예수가 믿어지십니까?

그럼 그 믿어지는 것으로 사세요.

불법에 사하심을 받았나요?

그럼 죄사함 받은 자로서 감사하며 사세요.

 

내 죄를 예수님의 피로 가리우심을 입었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그럼 복을 받았습니다.

복 받은 자로서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불법에 사함을 받고 죄를 가리우심을 받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믿어지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니 범사에 용서 받은 자로서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가는 눈이 떠지게 하시고 범사가 감사가 되도록 간섭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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