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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 26강. 율법을 굳게 세우는 믿음 (롬 3:28-31)

by coroa 2022. 8. 23.

롬 3:28-31=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6강. 율법을 굳게 세우는 믿음 (롬 3:28-31)

 

롬 3:28-31=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합니다.

세운다는 말은 온전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율법이 왜? 필요한 것인지를 믿음이 알려 준다는 뜻입니다.

 

믿음을 받고 보니까 율법이 왜? 인간의 행함으로는 구원이 안 되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알려주더라는 것입니다.

이를 역설적으로 말하면 믿음이 왜? 율법이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는 말입니다.

 

이걸 이야기 식으로 말하면 이래요.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우리를 예수그리스도께로 인도를 하세요.

그런데 막상 그리스도를 만나고보니 율법이 더 없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이 아니었으면 그리스도께 갈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율법이 우리를 닦달을 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 준 것입니다.

막상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세상에 야! 율법이 닦달해 주지 않았으면 어찌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율법이 너무도 고마운 겁니다.

그래서 율법아~ 고맙다~ 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이걸 본문에서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합니다.

 

율법과 믿음은 언뜻 들으면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게 아니고 서로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즉 서로의 파트너와 같아요.

짝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율법과 믿음이 어떻게 성도를 구원하는 일에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을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율법과 믿음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어째서 서로가 필요한 것인지 살펴봅시다.

 

율법은 법에 속한 것이고, 믿음은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를 성격적으로 본다면 법은 고발하는 것이고, 은혜는 덮어주는 것이에요.

법은 죽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은혜는 살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법과 은혜는 성질이 전혀 다릅니다.

마치 창과 방패와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것이 서로를 온전하게 세워줄 수가 있느냐 에요.

하나님은 이 모순처럼 보이는 것을 복음으로 두셨어요.

 

우리 생각에는 율법과 믿음은 서로가 배타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배타적이 아니라 도리어 서로 공생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믿음에 의해서 드러나고 믿음은 율법에 의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없어서는 안 되어요.

 

예를 들어서 율법과 믿음을 색으로 표현한다고 하면 상대적이에요.

편의상 율법은 검은 색이고 믿음을 흰색이라고 합시다.

다 흰색이면 흰색인줄 몰라요.

흰색을 드러내 주는 것이 검은 색이에요.

검은 색이 있음으로 흰색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빛과 어둠으로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율법과 믿음은 마치 어둠과 빛 같아요.

어둠이 없으면 빛이 없고 빛이 없으면 어둠이 없어요.

여기서 없다는 것은 상대가 아니면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빛을 빛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어둠이에요.

빛 때문에 어둠이 어둠으로 드러나고 반대로 어둠 때문에 빛이 빛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빛과 어둠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창조 속에는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있어요.

 

하나님은 전혀 다른 두 세계를 창조하였어요.

왜?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창조하셨는가 하면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죄와 구원이란 서로 다른 세계입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 이렇게 전혀 성질이 다른 구원과 저주라는 두 세계가 있습니다.

 

만물이 창세전 언약으로 말미암아 창조가 된 것이므로 이 세상 속에는 성질이 다른 두 세계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두 세계관으로 가지고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세요.

구원과 저주라는 두 세계관으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주(主)가 되려면 두 세계가 있어야 합니다.

주(主)란? 심판주란 말입니다.

갈라내는 분이란 말입니다.

심판주가 되려면 성질이 다른 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갈라내지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이 있어요.

하나님 백성과 하나님 백성 아닌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하나의 창조 속에 존재하고 있어요.

이는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는 차원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어느 하나가 없어서는 안 되어요.

천국이 있음으로 지옥이 드러나고 지옥이 있음으로 천국이 드러납니다.

천국과 지옥은 서로 다른 둘이지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이 구원되는 이야기를 하지만 반드시 둘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의 창조된 세상 속에 천지(天地)로서 존재하는 이유에요.

 

이 세상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하고는 다 철거가 될 것들입니다.

역사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는 일을 다 하고 나면 사라질 것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일부러 서로 하나 될 수가 없는 성질이 전혀 다른 두 세계를 하나의 구조 안에 배치해 두신 것입니다.

 

항상 기억할 것은 나는 어떻게 살까를 궁리하지 말고 나는 왜? 살고 있지를 궁구하여야 합니다.

성도라고 한다면 말이에요.

내 존재에서 출발하지 말고 창세전 언약에서 내 존재를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에요.

 

우리가 사는 목적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에요.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이 우리를 존재케 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는 탤런트로 이 세상에 보내어진 자들이에요.

예수님을 주(主)가 되는 것을 드러내는 일에 엑스트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믿어져야 우리의 인생이 가벼워져요.

 

그럼 천지창조(天地創造)를 가지고 창세전 언약 이야기로 접근해 봅시다.

 

천지(天地)는 서로 다른 세상입니다.

천(天)은 하늘이고, 지(地)는 땅입니다.

이걸 천국과 지옥으로 이야기 할 수가 있어요.

 

천(天)은 천국(天國)이고, 지(天)는 지옥(地獄)이에요.

천국과 지옥은 완전히 달라요.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 안에서는 천지(天地)가 하나의 창조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天)을 창조했다고 하지 않아요.

또한 하나님은 지(地)를 창조했다고도 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천지(天地)를 창조하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천지(天地)를 구분해서는 안 됩니다.

둘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인 예수님을 통한 자기 백성들의 구원 이야기로 풀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天地)를 통해서 구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 이야기를 하자면 반드시 천국과 지옥이라는 모순처럼 보이는 두 세계가 있어야 해요.

 

알다시피 만물은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습니다.

만물은 예수님에게서 나왔고,

예수님으로 말미암고,

예수님에게로 돌아갑니다.

이게 만물의 존재 목적이고 시작과 끝이에요.

 

사도 바울은 만물 속에 하나님의 신성(神性)이 담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담겨져 있다고 했어요.

만물은 만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나님을 알만한 신성을 만물 속에 담아 놓은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그럼 만물을 통하여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물의 이치 속에서 예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서 무얼 말해주고자 하십니까?

이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주(主)란? 주인이라는 말인데 그 속에 담겨진 의미로는 심판주라는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란? 구원자란 말입니다.

 

심판과 구원은 주(主)가 하시는 일이에요.

 

심판주와 구원주라는 말이 성립이 되려면 두 세계가 있어야 합니다.

심판이란? 갈라 낸다 혹은 분리한다는 말입니다.

분리란? 하나로 있다가 둘로 나누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분리가 되면 둘이 되겠지요.

 

구원이라는 말은 죄에 가두어져 있는 것을 건져 낸다는 말입니다.

그럼 죄에 가두어진 자가 있고 거기서 빼내심을 입은 자가 있겠지요.

이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으로 밝혀집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을 가지고 자신의 심판주 되심과 구원자 되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용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걸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엿 볼 수가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보면 두 종류의 인간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천국에 갔고 한 사람은 지옥에 갔습니다.

천국에 간 나사로와 지옥에 간 부자가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는 각자 이 세상에서 자기 분복(分福)대로 살다가 죽어서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려지게 됨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옥에 간 부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천국에 간 나사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부자도 하나님이 낳고 거지도 하나님이 낳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둘 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걸 창조의 논리로 말하면 한 아버지 아래 천국 자식이 있고 지옥 자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창조를 하실 때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를 만드셨어요.

그걸 예수님에게 주(主)가 되어서 이 땅에서 찾아내고 분리하는 일을 펼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 속에는 지옥에 속한 것들과 천국을 속한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이 형제로 있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보면 그래요.

가인과 아벨처럼,

이스마엘과 이삭처럼,

에서와 야곱처럼 말이에요.

한 집안에 육으로 난 자와 영으로 난 자가 형제라는 이름으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입장에서 이분법적으로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상종하지 못할 인간으로 구분을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하나님 앞에선 둘 다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에요.

 

막말로 천국과 지옥에 있는 사람들 끼리로는 죽일 놈 살림 놈 하여도 하나님은 그러지 않아요.

비록 한 형제이지만 각각 분리하여서 살게 하세요.

하나님은 마치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듯이 천국에서 살 놈은 천국으로 보내고, 지옥에서 살 놈은 지옥으로 분리하세요.

그리고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 1장에서의 창조를 분리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역사는 마치 쓰레기장과 같아요.

거기서 갈라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걸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속에 담아 놓았어요.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를 보세요.

1절에 천지(天地)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천지를 어원적으로는 하늘과 땅이지만 다른 말로 빛과 어둠이라고도 해요.

하늘은 빛의 세계이고 땅은 어둠이에요.

 

그런데 2절에 보면 이 둘이 한 군데 섞여서 혼돈된 상태로 있어요.

이 때 하나님이 말씀으로 갈라내십니다.

혼돈된 세상에 말씀이 떨어집니다.

그러자 그 말씀에 의해서 분리 작업이 일어납니다.

 

이걸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가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자 이 세상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기준으로 두 쪽으로 확 갈라집니다.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으로 갈라집니다.

창세기 1장의 빛과 어둠이 분리 되는 것이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에 의해서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으로 분리 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걸 예수님은 ‘너희’와 ‘저희’라고 했습니다.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이 되었고,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너희는 빛에 속한 하늘에 아들들이고, 저희는 어둠에 속한 땅에 아들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창조 된 세계를 분리작업 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는 곧 구원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분리가 될 때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지요..

이는 죄 아래 가두어져 있던 자기 백성이 살아나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 이야기는 성도의 구원이야기에요.

구원 이야기를 천지 창조라는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보면 안 되어요.

 

거기서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 이야기로 보아야 해요.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모든 성경은 다 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그러니까 천지창조 이야기도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로 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천국과 지옥은 달라요.

그런데 하나님은 한 셋트로 만들어 놓았어요.

이 둘이 한 셋트가 되어서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모순처럼 보이는 두 세계가 하나의 테마가 되어서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두 세계를 오늘 본문에서는 율법과 믿음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법과 은혜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는 일에는 반드시 율법과 은혜라는 상호 모순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해요.

모순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져요.

 

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이에요.

분명히 모순이에요.

그런데 그 모순이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에 반드시 필요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온전히 선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성도의 구원 이야기로 적용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전개가 되려면 반드시 자기 백성 아닌 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 자기 백성이라고 한다면 구태여 자기 백성이라고 지칭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 백성이라 할 때는 반드시 상대적으로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면 반드시 다른 백성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있는 이유도 예수님의 자기 백성 구원 이야기를 하자만 반드시 이 둘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둘은 한 만물 속에 같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궁극적으로는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옥도 하나님 나라의 한 부분이에요.

하나님 나라에서 죄인을 가두는 곳이 바로 지옥이에요.

지옥은 마치 이 세상 나라에서 죄수들을 가두는 교도소와 같아요.

죄수들을 가두어 놓아야 다른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지요.

 

이 세상에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 속에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들이 씨눈처럼 들어가 있어요.

바울은 만물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담겨져 있다고 하였어요.

만물을 일컬어 ‘자연 계시’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율법과 믿음처럼 전혀 다른 두 사상이 있어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있어요.

민주주의는 자유이고 공산주의는 억압이에요.

영적으로 말하면 민주주의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공산주의는 마귀 나라를 상징해요.

이건 하나의 예표적인 것이에요.

 

교회 안에도 두 부류가 있어요.

양과 염소가 있습니다.

영에 속한 성도와 육에 속한 교인들이 있어요.

이 둘은 항상 싸워요.

 

이걸 하나님께서 나중에 다 갈라내서 각자 있어야 할 곳으로 집어넣습니다.

양은 창세로부터 예비 된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고 염소는 캄캄한 곳으로 집어넣어요.

이렇게 될 때 천국 백성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지옥 백성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지옥에 갈 놈은 반드시 지옥으로 가 주어야 하나님이 기분이 좋아요.

반대로 천국에 갈 놈은 반드시 천국에 가 있어야 하나님이 기분이 좋습니다.

그 둘 중에 어느 한 놈이라도 자기 자리를 바꿔서 가 있으면 하나님이 불편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철저하게 지옥에 갈 놈들은 지옥으로 보내는 일을 하시고, 천국으로 갈 놈들은 천국으로 가도록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심판이라고 합니다.

세상 말로 분리수거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지요.

그런데 1장 2절을 보면 이 둘이 함께 뒤죽박죽 섞여 있지요.

이건 이 세상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 섞여 있는 세상에 떨어집니다.

 

야~ 빛 이리 나와!

그러니까 빛이 나옵니다.

그리고 야! 어둠 넌 저리가 있어!

그러니까 어둠이 저리로 갑니다.

 

드디어 빛과 어둠이 분리가 됩니다.

그동안 한군데 섞여 있던 것이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제자리로 찾아 갑니다.

정리 정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 전체의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하실 일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창세기 1장에서 말씀이 나타나서 갈라내는 것은 곧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분리수거 하실 것을 예표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율법에 속한 사람도 있고 은혜에 속한 사람도 있습니다.

한 집안에도 마찬가지에요.

이 두 다름은 어느 곳에서나 있어요.

 

다름을 한 군데 섞어 놓은 것이 하나님이세요.

다 필요해서입니다.

그러니 나와 다르다고 잘라내려고 하지 마세요.

바울은 믿지 않는 자와 사귀지 않으려면 세상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비록 함께 살지만 각자 자기 정체성으로 살면 됩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에 원리로 살고 땅에 속한 사람은 땅에 원리로 살아가요.

두 원리는 상반된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싸움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싸움이 일어나면 이긴 자와 진 자가 있습니다.

때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맞는 자가 있어요.

죽이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죽임 당하는 자가 있어요.

 

성도는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을 먹고!

좇아내면 쫓김을 당하고 말아요.

 

성도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가 심판권을 행사하지 않아요.

그러나 육에 속한 자들은 자기가 하나님처럼 심판권을 행사해요.

자기 안에 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심판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곧 그 사람의 열매인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가 있어요.

살아가는 모습이 곧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실이 자기가 누구 후손인지를 드러내주고 있는 셈입니다.

 

염소는 맨 날 들이받고 양은 맨 날 얻어 터져요.

복음 복음하면서도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염소에요.

그 안에 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입만 열면 마귀처럼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삶으로 나타나야지 주둥이로 나타나면 안 되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운명으로 사는 것이에요.

예수님이 그 안에 계신 성도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신 것처럼 당하게 되어 있어요.

원수들이 알아보고 핍박을 해요.

하지만 예수가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싸우지 않아요.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런데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복음 안다고 하면서 이와 반대로 살고 있어요.

도리어 복음으로 남을 해치는 모습으로 살고 있어요.

예수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마귀로 살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입술로는 복음 안다고 나대지만 그들이 뱉어내는 삶은 반 복음적이에요.

그러니 교회나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모두가 복음을 지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이 힘이 되어서 남을 해치는 무기로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을 양식으로 먹지 못해서 배가 고파서 그래요.

 

배 부른 사람은 싸우지 않아요.

관대해요.

싸운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하고 다름을 담아낼 관용이 없기 때문에 자기하고 다른 것을 담아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에 거하였어요.

빛에 거하였다 함은 다 아는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 안다는 것은 다 받은 자란 말입니다.

다 가진 자로서 넉넉해지라는 말입니다.

 

다 아는 자로서 관용으로 포용하라는 말이에요.

마치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듯이 나와 다름도 창조주의 마음으로 받으란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로서 풍성함을 보여 주시란 말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살았잖아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대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대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겐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대하였어요.

 

바울이 이방인의 신앙을 용납하고 율법신앙을 용납한 것이 아니에요.

그들을 다 담아 낸 것이에요.

자신도 그들과 같은 자였다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입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그들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빼내심을 입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관용으로 대한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관용이 나오지요.

이 관용은 창조주 마음이에요.

예수님이 이 마음으로 사셨어요.

예수님은 이방인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았어요.

그들도 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긍휼을 베풀었어요.

 

이방인들도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생겨난 자들이에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지옥 갈 사람이 있어야 해요.

그러니 이방인들이 그 역할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라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우리는 천국에 가고 저들은 지옥에 가요.

그러니 천국에 간 자로서 그냥 지옥에 갈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란 말입니다.

우린 천국을 유업으로 받았잖아요.

그러니 싸우지 말고 좀 너그럽게 사세요.

 

까짓거~ 천국 가는 내가 손해 보고 말지!

예수를 믿는 내가 이단이 되고 말지!

내가 너와 싸워서 이겨 본들 무엇 하겠느냐! 라는 마음을 가지란 말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의 여유를 좀 가지란 말입니다.

져 줌으로서 이기란 말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이 여유로 살았잖아요.

그토록 자기를 핍박하던 자들을 위해서 도리어 기도하잖아요.

 

스데반을 보세요.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알지 못해서 저러는데 용서해 달라고 하잖아요.

 

이 마음이 바로 창조주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곧 모든 성도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마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어떻게 살고 있나요.

이와 반대로 살고 있지요.

그러니 우리가 안다고 하는 그 복음은 지식이고 복음이 지식이니까 우리의 신앙이 관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그 앎이 한 번도 생명에게 유익을 주는데 힘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죽은 것이에요.

그러니 아는 것하고 사는 것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이단이라고 하면 그럼 이단이 되세요.

그 사람이 그렇게 본다는 데서야 어찌 말리겠어요.

그냥 이단 되고 말아야지요.

 

중요한 것은 내가 이단이 아니면 되잖아요.

내가 예수를 알고 예수가 나를 알면 되잖아요.

내가 예수를 믿으면 되잖아요.

내가 예수가 믿어지는데서야 그 누가 믿어지는 예수를 빼앗을 수가 있나요.

없어요.

 

예수님처럼 자기 안에 아버지의 증거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유대인들이 다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하여도 예수님은 자기 안에 아버지의 증거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평가에 요동하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성령의 증거를 주셨어요.

그 증거를 받았잖아요.

그래서 예수가 믿어지는 것이잖아요.

그럼 되었어요.

 

그러니 사람의 판단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면 그냥 씨~익 웃으세요.

그럼 자기가 자기 성질머리를 못 이겨서 게거품 물고 죽어요.

상대를 하지 않으면 자기가 지쳐서 죽어요.

 

빛은 어둠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빛으로 서 있으면 어둠은 그 빛을 보고 자기가 어둠이라는 것으로 탄로가 나기 때문에 자기가 지랄하다가 죽어요.

 

사무엘상 14장을 보면 요나단이 몸 종 하나 데리고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걸 무엇이라 하는가 하면 요나단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 속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할례자가 무 할례자들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할례 자는 하늘에 속한 빛에 아들이고, 무 할례자는 땅에 속한 자로 어둠에 아들들이에요.

그러니 할례자인 요나단이 무 할례자인 블레셋 속으로 들어간 것은 마치 빛이 어둠에 들어간 것과 같아요.

그러자 블레셋 군인들이 놀라서 자기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일어납니다.

 

요나단은 칼 한 번 쓰지 않았어요.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그러니 자기들끼리 야! 저 놈 이단이다! 아니다 삼단이다! 하다가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하다가 망하고 만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아저씨는 바보야!

그런다고 싸울 겁니까.

그건 진짜 바보에요.

그럼 아이가 아저씨 바보야!

그러면 그래 아저씨가 바보인가 보네! 라고 하세요.

난 아니야! 라고 하지 말고!

 

그 어린 아이를 이겨서 뭐하게요.

누가 훈장을 준 답디까?

아니에요.

욕을 먹어요.

 

이거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이야기인데 잘 알아들으세요.

 

여러분이 육에 속 한 자와 싸워서 이기면 안 되어요.

져야 되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이긴 자로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진 자로 서 있어요.

 

성도는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에요.

하나님은 이 씨를 세상이라는 밭(땅)에 뿌리고자 합니다.

씨를 죽여서 많은 열매를 맺고자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이긴 자로 두지 않고 진 자로 두신 거에요.

 

아벨이 죽어서 가인을 살려 내고!

요셉이 죽어서 형제들을 살려 내고!

요나가 죽어서 니느웨 백성들이 살아나고!

예수님이 죽어서 자기 백성들이 살아났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죽어야 할 씨로 보냈어요.

예수님도 이걸 아시고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신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살아났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 제자들을 찾아가서 성령을 주시면서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무엇 하려고 보냅니까?

죽으라고 보낸 거에요.

가서 죽은 자들에게 잡아 먹혀서 그들 속에 너희들의 생명을 주라고 하셨어요.

 

이 일을 우리가 제 정신으로 못하니까 성령을 주셔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들을 술 취한 사람처럼 겁 대가리 없이 가서 죽는 겁니다.

스데반이 성령의 새 술에 취해서 겁대가리 없이 유대인들에 대 들다가 죽자 하나님은 그 스데반의 죽음을 근거로 사울이라는 바울을 살려내잖아요.

 

그리고는 바울을 다시 스데반의 죽음에 자리로 밀어 넣잖아요.

그래서 바울도 스데반처럼 죽은 거에요.

이게 성도의 운명이에요.

성도는 이처럼 진 자로 살아가도록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모르는 자들과 싸우려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지세요.

때리면 맞고!

욕하면 욕 먹으세요.

그게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저 동네로 피하고 저 동네에서 핍박하면 이 동네로 피하라고 하셨지요.

같이 맞붙어서 싸우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당하라고 했어요.

 

그러니 복음 안다고 하면서 남하고 싸워서 이기고자 하는 놈들은 가짜일 확률이 많은 겁니다.

복음이 그 속에서 소금처럼 녹아지지 않고 굴러다니니까 복음이 삶으로 녹여져 나오지 않고 칼이 되어서 남을 해치는 무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과 싸워서 이기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에라이~ 이 등신아!

저기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으라고 해요.

 

넌 알고!

저 놈은 모르잖아!

넌 다 가졌고!

저 놈들은 못 가졌잖아!

그리니 줘 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린 천국 간다고 하면서 지옥에 가는 사람들보다 더 영악해요.

더 악질이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는다고 떠벌리고 있어요.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들은 재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기독교라고 하지 않고 개독교라고 하겠어요.

우리 때문에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개망신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뭔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다시 율법과 믿음을 성질이 다른 두 세계를 가지고 살펴봅시다.

 

천지(天地) 즉 하늘과 땅은 전혀 다른 세계에요

서로 존재하는 양식이 전혀 달라요.

그런데 한 우주 안에 있어요.

 

마치 낮과 밤처럼 말입니다.

낮과 밤은 구분하면 둘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에요.

낮과 밤이 하나가 되어서 ‘하루’ 라는 날이 있는 것입니다.

 

천지(天地)는 극과 극이에요.

모순이에요.

그런데 하나에요.

천(天)이 있음으로 지(地)가 있어요.

 

천지(天地)는 마치 선(善)과 악(惡)처럼 하나에요.

선(善)과 악(惡)은 모순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선(善)과 악(善惡)은 분리 하면 안 되어요.

그럼 둘 다 죽어요.

 

선(善)이 없으면 악(惡)도 없고, 악(惡)이 없으면 선(善)이 없어요.

악(惡)이 없는데 어찌 선(善)이라 할 수가 있으며!

선(善)이 없는데 어찌 악(惡)이라 할 수가 있나요.

 

그래서 선(善)이 없으면 악(惡)도 없고, 악(惡)이 없으면 선(善)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善)은 악(惡)으로 인하여 서고, 악(惡)은 선(善)으로 인하여 서게 되어요.

선다는 말은 존재하는 근거를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선(善)과 악(惡)은 짝이 되어서 서로를 온전케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善)이 있는 곳에 악(惡)이 있고, 악(惡)이 있는 곳에 선(善)이 있어요.

이 둘은 서로를 드러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세상에 배치해 놓은 구조에요.

믿음으로 보면 다 합력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하나님은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지었다고 합니다.

나는 환란도 창조하고, 평안도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성도에게 닥치는 모든 일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어요.

역경(逆境)도 감사이고, 순경(順境)도 감사에요.

환란(患亂)도 감사이고, 평안(平安)도 감사에요.

모두가 하나님께서 나를 하늘에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데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고난이 없으면 좋을 것 같지요.

아니에요.

인생은 고난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주 괘변이지요.

 

그런데 괘변과 같은 것 속에 복음이 담겨져 있어요.

복음은 반드시 저주 가운데서 빛을 발합니다.

복음을 복음으로 드러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저주를 가지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기 때문에 평안이 귀한 것임을 알게 되고!

슬픔이 있기 때문에 기쁨이 귀한 것임을 알게 되고!

지옥이 있기 때문에 천국이 귀한 것임을 알게 된단 말입니다.

율법이 있기 때문에 은혜가 귀한 것임을 알게 되어요.

이 둘은 서로를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어요.

 

어떤 곤충 학자가 나비를 연구했어요.

애벌레서부터 부화가 되고 나방이 되어 고치를 뚫고 하늘을 날아다니기까지 전 과정을 연구를 했습니다.

애벌레가 고치 속에서 부화가 되어 나방으로 고치를 뚫고 나오는데 좁은 구멍으로 나오는데 사투를 벌리더라는 것입니다.

 

그걸 곁에서 지켜보는데 마음이 너무도 안 쓰러워서 못 보겠다라는 거에요.

그래서 야! 하나님도 실수를 했지!

어떻게 이 작은 구멍으로 이 큰 놈이 나오게 하였단 말인가?

그래서 곤충학자가 가위로 그 구멍을 아주 크게 뚫어 주었어요.

 

그러자 나방이 단숨에 나오면서 아이구~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나오더랍니다.

그런데 이 놈들이 하늘로 날아가지 않고 전부 비실거리더니 죽더라는 겁니다.

이상하다!

왜? 그럴까?

 

조사를 해보니 애벌레에서 나방이 되어 고치 속에서 나올 때 애벌레에서 나방으로 부화하면서 먹고 살던 양분이 두 어깨에 짊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어께에 붙어 있는 양분을 작은 구멍으로 나오면서 다 떨어내야 고치에서 나오면 가벼운 몸으로 하늘을 훨훨 날아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곤충학자가 그 힘겹게 작은 구멍으로 나오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가위로 큰 구멍을 만들어주니 나오기는 잘 나왔는데 어깨에 짊어진 양분을 떨어내지 못하여서 날지 못하고 죽고 만 것입니다.

 

나방이 작은 구멍으로 나오는 것은 고난이에요.

그 고난을 통과하여서 나와야 하늘을 날아갈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나방에게 있어 작은 구멍으로 나오는 고난은 생명을 위하여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고난과 평안 두 가지로 다스리십니다.

낮과 밤처럼 역경과 순경 두 가지로 다스려요.

 

시편 23편을 보면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라고 하지요.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때로는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도 인도하시지만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를 하세요.

 

양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행하면서 생명이 더욱 건강해지고 목자의 소중함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아! 나에게는 목자가 없으면 안 되겠구나!

그래서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생명처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푸른 초장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전혀 달라요.

극과 극이에요.

그런데 목자는 양들을 그리로 인도하세요.

푸른 초장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전혀 다른 환경은 짝이 되어서 양을 살찌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생명을 다스리시는 방법이에요.

목자가 푸른 초장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짝이 되어 양떼를 다스리듯이 하나님도 율법과 믿음이라는 막대기와 지팡이로 자기 백성들을 다스려 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믿음을 드러내고 믿음으로 율법의 가치성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목자가 푸른 초장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전혀 다른 환경으로 양들을 통행케 하면서 다스려 가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뉘라서 알겠어요.

어찌 양이 목자의 심정을 알겠어요.

몰라요.

 

어찌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으신 분의 마음을 알 수가 있겠어요.

지음을 받은 자는 지으신 분을 절대로 다 알 수가 없어요.

설령 알려준다고 하여도 피조물의 수준으로만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이 필요한 것만큼만 알려주세요.

그래서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계시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알려준 것만큼만 알면 되어요.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지만 되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세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다 알아서 우리를 간섭하시고 계세요.

그러니 그냥 깨달아지는 것만큼만 감사하면서 살면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하시고 받은 은혜만큼만 살며 되어요.

 

진리를 알아가는 것도 그래요.

하나님이 필요하면 다 알려주세요.

때가 되면 다 알게 해 주세요.

알려주지 않으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럽니다.

 

그러니 억지로 성경을 다 알려고 하지 마세요.

억지로 알고자 하면 신천지 이만희처럼 되어요.

자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서 교주가 되어요.

이단이 된단 말입니다.

 

꼭 기억하세요.

항상 이단은 다 아는 척 하고 나타난다는 것을,,,

그러므로 다 아는 척 하는 자들을 항상 경계하세요.

이단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시를 자기가 독점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해요.

 

복음으로 자기 우월감을 드러내고자 해요.

자기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처럼 말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듣는 이로 하여금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만들어 버려요.

여기에 미혹당하면 그 사람을 추종하게 되어요.

 

이단들은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추종하게 만들어요.

그리하여 자신은 영원한 스승노릇을 해요.

항상 1인자가 되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말이 곧 하나님 말씀이 되게 만들어요.

 

교회사를 쭉 훑어보면 이단의 특징이 나와요.

공통된 것이 바로 특정인을 추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폐쇄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속한 자들은 우월 의식을 갖고 있어요.

 

자기들만 구원이 있다는 식으로 주입을 시켜요.

그래서 조직원들을 그 조직으로부터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거길 떠나면 재앙을 받는 것처럼 인식을 시켜요.

결국 자신의 종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집단들이 우리 주변이 무수히 깔려 있어요.

교회라는 이름으로도 있고!

선교단체라는 이름으로도 있고!

복음 전하는 마을이라는 이름으로도 있어요.

이름만 다를 뿐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특정한 사람을 추종하는 것에는 대동소이해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하여도 가지 말고 저기 있다고 하여도 가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요즘 말로 어느 목사를 따라 다니지 말란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어요.

그러니 찾아다니지 말란 말입니다.

우리가 찾아다녀서 만나질 그리스도가 아니에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골방에 있다고 하여도 가지 말고 광야에 있다고 하여도 가지 말라고 했어요.

사람을 조심하라고 하셨어요.

왜? 가지 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는 내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내 열심과 노력으로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택한 백성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거저 주세요.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백성을 찾아 내셔서 구원을 해 주세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은 자기 백성이라고 한다면 다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 저기 누가 유명하다고 하여도 싸돌아다니지 말란 말입니다.

싸돌아다니다가 이단을 만나요.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 뱀을 만나요.

이런 뱀에 독을 마시게 되면 아주 이상한 인간으로 변해요.

 

자기만 옳고 남은 다 틀렸다고 교만해요.

그래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가정도 모르고, 가족도 모르고, 친구하고도 담을 쌓고, 이웃하고도 담을 쌓고 폐쇄적인 인간이 되고 말아요.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세요.

모두가 하나같이 교만해요.

자기 주장만하고 남에 이야기는 듣고자 하지 않아요.

그리고 폐쇄적인 모습을 띠고 있어요.

 

이는 그만큼 그 안에 빛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 안에 빛이 없고 어둠이 있기 때문에 사회와 격리하고 은둔하여 현실의 삶을 부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남과 등 돌리고 사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을 안다는 것이 교회로부터 격리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은둔하는 것이 아니에요.

당당히 그들 속에서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어둠 속에서 빛으로 당당하게 말이에요.

 

빛은 가두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밖으로 터져 나오는 속성을 가졌어요.

빛은 가둘 수가 없어요.

그래서 빛을 말 아래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보이도록 말이에요.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폐쇄적일 필요가 없지요.

우리끼리만 알자! 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 하고 다른 인간은 오지마!

우리하고 다른 말 하는 자들은 다 나가! 라고 하지 마세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무엇이 그리 불안 합니까?

아니 빛에 거한다면서요.

그런데 왜? 어둠을 두려워합니까?

 

진리를 안다면서요.

그럼 비 진리도 포용하세요.

비 진리를 용납하라는 말이 아니고 내 쪽에서 밀어내지 말란 말이에요.

 

여러분이 진리에 속하였다고 한다면 비 진리가 스스로 피해요.

여러분이 빛이라고 한다면 어둠이 스스로 도망가요.

그러니 어둠을 쫓아내려고 하지 마세요.

 

모든 종교를 다 용납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가 갈수 있는 여유를 좀 가지시란 말입니다.

스님이 시주하러 오면 주를 위하여 산다고 고생이 많습니다! 라고 시원한 음료수라도 한잔 드릴 수 있는 관대함을 좀 가지세요.

 

스님도 필요해서 두셨어요.

아까 말했잖아요.

선(善)을 위해 악(惡)이 필요하다고!

그러니 스님도 계셔야 목사가 드러날 것이 아닙니까.

불자들이 있어야 성도가 드러날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그들도 하나님께서 다 필요해서 사용하고 있으니 주를 위해서 사는 것이 맞지요.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를 찍는 데에는 마귀도 필요하고 천사도 필요해요.

지옥도 필요하고 천국도 필요해요.

신자도 필요하고 불신자도 필요해요.

교회도 필요하고 절간도 필요해요.

 

드라마에 전부 착한 사람만 나오면 재미없어요.

나쁜 놈도 있어야 재미가 있어요.

악당은 악당 짓을 해 주어야 주인공이 돋보이고 살아나요.

 

자 보세요.

예수님이 이 땅에 자기백성을 구원하려고 오셨어요.

어떻게 구원을 하는가 하면 자신의 죽음으로 구원을 하세요.

자신의 죽음과 자기 백성들의 죽음을 맞 바꾼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누군가가 예수님을 죽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 내릴 순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를 죽일 마귀를 투입을 하신 겁니다.

마귀는 예수를 죽이는 배역을 맡았어요.

 

마귀와 예수님이 대표주자로 싸웠어요.

이제는 그 수하들이 싸워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신자들을 괴롭히는 종자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와 그 수하들은 예수를 죽이는 역할을 하고 지옥으로 가도록 되어 있어요.

가룟유다가 그 역할을 하고 지옥으로 갔어요.

 

지금도 가룟유다 역할을 맡은 자들이 있어요.

그러니 신자들을 괴롭히는 자들도 주님이 사용하고 있으니 주를 위해 살고 있는 것이 맞지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제발 인위적으로 자기하고 같은 색깔을 맞추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한 교회 안에도 염소와 양을 고루 풀어 놓았어요.

곡식과 가라지를 같이 심어 놓았어요.

서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집에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듯이 교회 안에도 이스마엘처럼 육적 신자가 있는가 하면 이삭처럼 약속으로 난 신자들도 있어요.

이 둘을 가지고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사용하세요.

그래서 나하고 다르다고 좇아내지 마세요.

그냥 스파링 파트너라고 생각하고 훈련을 받으세요.

 

고수(高手)들은 상대를 가리지 않아요.

바울처럼 고수가 되세요.

누구나 상대 할 수가 있는 내공을 다지란 말입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그 누가 소망에 관하여 묻는 사람이 있거들랑 그들에게 대답할 수 있는 내공을 키우세요.

 

같은 색깔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그만큼 진리 안에서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실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릇이 작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바울파다 게바파다 아볼로파다 하면서 파당이 생겨서 서로 싸우지요.

이때 뭐라고 합니까?

얘들아! 서로 싸우지 말라고 하지요.

너희는 다 한 형제라고 하잖아요.

 

어떤 사람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물을 주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밭을 가는 사람일수가 있다고 하잖아요.

 

씨 뿌리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물 주는 놈은 이단으로 보일 것이고!

반대로 물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씨 뿌리는 놈이 이단으로 보여요.

자기하고 같은 색깔 맞추기를 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농부 입장에서 보면 다 귀해요.

그러나 일꾼 입장에서 보면 자기만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게 바로 죄에요.

하나님 입장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죄에요.

 

교회 안에도 바울의 말대로 씨뿌리는 사람도 있고 물 주는 사람도 있고 밭 가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 나와 다르다고 좇아내지 말란 말이에요.

그 사람이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저주 하지 않으면 다 받으세요.

예수를 사랑하는 방법이 조금씩은 달라도 한 성령을 마신 성도는 자기 부족함을 안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로마서 12장을 봅시다.

 

롬 12:3-11=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성도들에게 각 사람에게 각양의 은사들을 주었다고 하지요.

그러므로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각 사람마다 받은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지만 각각의 지체마다 기능이 다 다르듯이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도 각 사람마다 각각의 직분을 주시고 각양의 은사들을 주셨어요.

 

어떤 사람은 권위하는 자로 세우고!

어떤 사람은 구제하는 자로 세우고!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자로 세우고!

어떤 사람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으로 세우셨어요.

 

그러니 자기가 받은 분량만큼만 생각하라는 겁니다.

각각 분수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은사를 주신 것은 자랑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섬기라고 주었어요.

은사는 내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셨어요.

 

그러므로 은사를 받게 되면 자기 유익을 구치 않고 남에 유익을 구하는 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 정신이에요.

 

사랑엔 거짓이 없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전부 사랑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은 성도는 그 은사로 성도를 사랑하게 된단 말입니다.

 

우쭐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게 된단 말입니다.

주님을 섬기듯이 섬긴단 말이에요.

그래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도를 섬기라고 해 놓고서는 이것은 주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이는 성도가 곧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이기 때문에 지체를 섬기는 것이 곧 주를 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음식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청소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환경미화를 잘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일을 못하고 돈을 잘 내는 사람이 있어요.

 

사람은 말이에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행복해요.

즉 자기가 은사로 받는 일을 할 때 가장 잘하고 행복해요.

청소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청소하는 것이 가장 즐겁고 신이 나요.

음식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음식을 할 때 가장 신이 나고 행복해요.

돈 내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돈 내는 것이 가장 쉽고 돈을 낼 때가 가장 행복해요.

 

여러분 돈 내는 것도 은사에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은사를 받지 않으면 못내요.

하나님이 교회 안에 어떤 사람에게는 구제하는 은사를 주셨다고 하잖아요.

연보도 믿음 없으면 못해요.

 

바울이 연보에 대해서 말을 할 때 뭐라고 하던가요.

마음에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고 하지요.

마음이 인색함이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아야 해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보세요.

마음이 넉넉해지잖아요.

그 땐 인색함이 없어요.

넉넉해져요.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나니 사람들이 마음에 인색함이 사라지지요.

넉넉해지지요.

그러니까 밭도 팔아서 내어놓고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고 유무상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누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우린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다른 사람의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해요.

그런데 우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꼭 나는 괜찮은데!

저 사람이 틀렸다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반대로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날 틀렸다고 해요.

나를 죄인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넌 어떻게 나에게 그렇게 용서를 받고도 그렇게 마음이 밴댕이 속아지 마냥 좁고 인색하여 남을 용서하지 못하느냐!

너 참으로 악당이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날 더러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해요.

제발 남에 눈에 티를 보지 말고 내 눈에 들보를 보세요.

 

그러니 내 마음에 안 드는 성도가 보이더라도 아이구~ 성도님! 어쩌자고 그 많고 많은 교회 다 버려두고 우리 교회에 오셨어요! 라고 보듬어주고 감사하란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판단 받을 자들이지 남을 판단 할 자들이 아니에요.

그러니 판단하지 말고 감사하세요.

그림을 크게 보세요.

그럼 다 귀해요.

 

바울은 전체를 다 보잖아요.

그러니 용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안에 철없는 교인들은 자기 입장에서만 보니 자기하고 다름을 용납을 하지 못하고 파당을 짓고 쌈박질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하고 다름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앙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그릇이 작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는 안목을 가지셔야 해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광대해요.

우리가 다 담아 낼 수가 없어요.

 

이해 할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하고 다르다고 배척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리고 혼자 다 아는 척 하지 말란 말이에요.

 

제발 마음을 넓히세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크고 넓게 보세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내 안이 가두지 마세요.

나를 하나님의 일하심 속으로 던지세요.

 

그리하여 나라는 존재는 티끌과 같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안다고 하는 것도 지극히 작은 것이란 것을 알아야 해요.

그래서 다 안다고 하는 있음의 자리에서 모르겠다고 하는 없음의 자리로 내려오셔야 해요.

 

바울처럼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도무지 측량할 수가 없다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왜? 원수를 내 곁에 주셨는지!

왜? 사단의 가시를 내게 주셨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간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러니 감사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율법과 믿음처럼 역설적인 짝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봅시다.

 

하나님은 천지(天地)를 짝으로 만들었어요.

가인과 아벨을 짝으로 만들고!

에서와 야곱을 짝으로 만들고!

이방인과 성도를 짝으로 만든 것과 같아요.

 

천지(天地) 속에는 전혀 다른 짝들이 있습니다.

어떤 짝인가 하면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 주는 짝이에요.

천국(天國)과 지옥(地獄)도 짝이에요.

천국이 천국 되려면 지옥이 계속해서 지옥으로 존재해 주어야 해요.

그래야 천국이 천국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과 죄인으로 드러나요.

예수님과 죄인이 짝이에요.

예수님과 죄인이 짝이라고 하니 이상한가요.

 

죄인은 예수를 위하여 존재하고 예수님은 죄인을 위하여 존재하세요.

죄인이 없으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어요.

죄인이 있기 때문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죄인은 짝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이걸 남자와 여자로 말해 봅시다.

원래 인간은 사람이었어요.

아담이란 그냥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 속에서 여자를 빼냈어요.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해 놓고서는 그 속에서 여자를 빼냈어요.

그러자 아담이 남자가 된 것입니다.

아담이 잠에서 깨고 보니 옆구리가 뭔가 휑한 겁니다.

가만히 보니 자기 안에 있어야 할 여자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짝을 찾아 나선 겁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데리고 오는 거에요.

그러자 대번에 어~ 저거 내 껀데! 라고 자기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비로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과 만물로 이야기 해 봅시다.

만물이 예수님 안에서 나왔지요.

예수님 속에서 만물이 나왔으니 예수님은 반쪽인 셈이에요.

마치 아담 속에서 여자가 나와서 아담이 남자라는 반쪽이 된 것처럼 말이에요.

 

원래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다 담겨져 있어요.

그래야 사람이 되에요.

온전해요.

하와가 없는 아담은 온전치 못해요.

아담 속에 하와가 들어와야 원래의 상태로서 온전해져요.

 

그런데 그 속에서 여자가 빠져 나왔어요.

여자가 빠져 나오자 충만이 부족이 된 것입니다.

부족이 충만이 되려면 자기 안에서 빠져 나온 여자를 다시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야 해요.

그래야 원래 충만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자 이걸 만물과 예수님 이야기로 합니다.

예수님 속에서 만물이 나왔지요.

여기서 만물이란? 광의적인 의미로는 만물이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짝인 성도를 말해요.

 

만물이 예수 안에서 충만해 진다고 하지요.

반대로 예수도 만물 속에서 충만하다고 하지요.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겨 하나가 되어야 충만이 되어요.

마치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어야 온전한 사람이 되듯이 예수님과 성도도 한 몸이 되어야 충만이 되어요.

 

이걸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구원을 받은 성도는 율법과 믿음이 짝이라고 하면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척 알아먹어요.

아! 이래서 율법도 복음이라고 하는구나! 라는 것을 알아들어요.

 

구원 받은 성도는 율법을 업신여기지 않아요.

난 이제 예수를 믿기 때문에 율법이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아요.

도리어 율법에게 얘~ 율법아!

너는 나를 떠나지 말고 항상 내 곁에서 믿음을 드러내 주렴!

그런다구요.

믿음에 고마움을 알려 달라고 한단 말이에요.

 

이건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예수와 죄인이 짝이라고 하던 말을 다시 하고 갑시다.

예수님과 죄인이 어째서 짝인지 살펴봅시다.

묻습니다.

 

만물이 누구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창조가 되었지요.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만물을 끄집어내셨어요.

이걸 잊지 마세요.

 

만물은 성도라고 했습니다.

그럼 성도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우린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끄집어내셨어요.

마치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서는 아담 속에서 여자를 끄집어내듯이 말이에요.

 

그럼 그 짝짓기를 누가 하겠어요?

하나님이 둘을 분리시켜 놓았으니 짝짓기를 하나님이 하시겠지요.

하나님이 남자에게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겁니다.

남자가 가만히 하나님 손에 이끌려서 오는 여자를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것입니다.

낯이 익어요.

 

가만히 보니 자기 짝인 겁니다.

그래서 남자가 어이쿠! 내 꺼!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 하고 와락 끌어안는 것입니다.

 

재미있지요.

성경을 예수님과 성도의 연애 이야기로 알면 재미가 있어요.

연애편지 읽는 것이 얼마나 재미가 있는데요.

안 읽어본 사람은 말을 하지 마세요.

 

여자는 졸지에 탁구공처럼 이리 팅기고 저리 팅기다가 결국 자기가 원래 있는 자리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우리의 구원을 누가 시키십니까?

하나님이 시키세요.

우린 가만히 있는데 괜히 하나님이 혼자 바빠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짝을 찾아주신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나요.

 

전 엄청 기분이 좋은데!

난 가만히 있고 하나님이 다 하신다고 하니 얼마나 편해요.

이 편안함을 모르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구원이 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아니 보세요.

난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다 하잖아요.

예수님하고 하나님이 다 하잖아요.

이걸 속된 말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다고 하는 겁니다.

맞아요.

 

우리는 예수님하고 하나님 둘이서 하시는 일을 보고 박수만 쳐주면 되어요.

와~ 잘한다!

짝!~ 짝!~ 짝!~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천국에 가면 뭐한다고 하던가요?

박수쳐요.

세세토록 박수만 친다니까요.

 

그럼 이 세상에서 천국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할까요?

박수치는 일을 하지요.

이걸 다른 말로 그 은혜에 감사한다고 해요.

성도가 하는 일은 감사하는 일이에요.

 

살아도 감사하고! 죽어도 감사하고!

망해도 감사하고! 흥해도 감사하고!

아파도 감사하고! 안 아파도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그런데 이 감사가 되려면 먼저 깨달음이 있어야겠지요.

뭔가 깨달아야 감사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서 깨닫게 해주세요.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공부를 하다가 천국에 가요.

그래서 천국에 가서 영원토록 박수만 쳐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걸 지금 개그콘서트에서 하고 있잖아요.

 

박수를 치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하겠지요.

율법과 믿음을 가지고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 주고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 깨닫는 일을 해 봅시다.

 

다시 본문을 봅시다.

 

롬 3:28-31=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고 하지요.

이는 인간의 조건에서 의가 나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거져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도 되지만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은 인간의 혈통을 떠나서 일을 하시기 때문에 유대인의 하나님도 되고 이방인의 하나님도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외적 조건으로 차별하지 않으세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다 죄 아래 가두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한 아담 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외적 조건으로는 되 죄인이에요.

차별이 없어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에덴동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 바깥이라는 세상이 있어요.

편의상 에덴동산을 ‘하늘나라’ 라고 하고 에덴동산 바깥을 ‘이 세상’이라고 합시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하늘나라에서 땅으로 쫓아냈지요.

땅으로 쫓겨 온 아담은 자기의 형상을 닮은 후손들을 낳기 시작합니다.

아담이 낳은 자식은 전부 죄인이에요.

땅에 죄인으로 충만해 진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보면 땅에 있는 인간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죄인이에요.

유대인의 조건에서 의가 나오지 않아요.

인간들끼리는 유대인과 이방인 간에 차별이 있을 순 있지만 하늘나라에서 보면 그 놈이 그 놈이에요.

할례 받은 놈도 죄인이고, 무 할례자도 죄인이에요.

 

그런데 할례자들이 자기 조건으로 무 할례자를 깔본단 말이에요.

유대인이 이방인을 업신여긴단 말이에요.

너희들은 죄인이고 우리는 의인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무슨 근거로 그러는가 하면 율법지킴이라는 근거로 그러는 거에요.

 

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찾아 와서 만나 주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생각했어요.

율법을 지키고 사는 유대인은 일등국민이고 율법 없이 사는 자들은 모두가 삼등국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만 천국 간다!

그랬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찾아와서 하시는 말씀이 야! 이 등신아!~ 율법은 네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준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은 구원 얻는 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아! 인간의 행함으로는 안 되고 예수를 믿음으로서만 되는구나! 를 알게 되어 있어요.

 

율법을 알면 알수록 자기 가능성을 버리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더욱 더 실감해요.

왜냐하면! 율법 앞에 서면 죄가 더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알면 알수록 나는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어요.

그러니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이 큰 복음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해서 율법이 왜? 예수를 믿음으로서 구원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증명해 준단 말입니다.

이걸 역으로 말하면 믿음 때문에 율법이 왜? 주어져야 하는지를 더욱 더 절실히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믿음으로 율법이 선다고 했잖아요.

세운다는 말은 율법이 있어야 할 이유를 더욱 더 드러나게 한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믿음이 오면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율법의 필요성을 더욱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이는 율법과 믿음은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믿음이 와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고, 믿음은 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 율법이 알려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서로 상호 보완적이란 말입니다.

 

법과 은혜는 짝이에요.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 주는 짝이란 말입니다.

어느 것 하나가 없으면 병신이에요.

 

이건 마치 빛과 어둠 같아요.

어둠이 있는 한 빛은 존재해 주어야 해요.

그래야 계속해서 어둠이 빛에 의해서 어둠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둠이 어둠으로 드러나려면 반드시 빛이 있어야 합니다.

 

율법과 은혜도 이와 같아요.

둘이 같이 동행하면서 서로를 드러내 주어요.

그래서 성경은 율법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복음을 복음으로 드러나게 해 주기 때문에 율법도 귀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모르면 죄를 몰라요.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죄가 있었지만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몰랐어요.

그래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들추어내고자 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을 땐 죄인인줄 몰랐는데 율법이 가입하고 나니까 내가 죄인으로 드러나더란 말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주어지는 구원이 은혜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믿음을 은혜로 드러나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에요.

믿음이 복음이라는 것을 율법이 드러내 주어요.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다 죽어야 하는데 믿음이 이 요구를 다 덮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은 믿음을 세우고 믿음은 율법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 안에 있는 성도는 율법이 너무도 고마운 것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성도는 율법을 폐기하지 않아요.

더 귀하게 여겨요.

믿음이 복음으로 드러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진짜 믿음 안에 있는 성도는 스스로 율법 아래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예수그리스도를 더욱 더 바라보게 하는 복음이에요.

결국 율법이 나로 하여금 믿음으로 예수 안에 서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믿음은 온전케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이 율법을 온전케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이 모순이 아니지요.

 

율법과 믿음은 두 다리와 같아요.

어느 한 쪽이 없으면 절름발이가 되어요.

그럼 신앙이 절름발이 신앙이 되어요.

온전해 질 수가 없어요.

 

절름발이 신앙이 되면 무(無) 율법주의가 되든가 반(反) 율법주의가 되어요.

그럼 신앙생활이 이원론으로 나타나요.

이걸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이 시대 영지주의는 반 율법주의와 무 율법주의로 나타나요.

율법이 사리지면 인간은 방종으로 치닫게 되어 있어요.

성경은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사는 자들을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를 봅시다.

 

엡 2:1-5=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靈)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 4:17-20=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먼저 2장을 봅시다.

허물과 죄로 죽었을 때의 모습이 어떠한가요.

육체의 욕심을 행하며 육체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았다고 하지요.

 

4장에서 이러한 삶을 뭐라고 하나요.

이방인의 삶이라고 하지요.

이방인의 삶을 죄에 대한 감각(感覺)을 상실한 것이라고 하지요.

죄에 대하여 무감각(無感覺) 하니까 자신을 방탕과 방임에 내어 놓는다고 합니다.

 

감각이 없다는 말은 자기 안에서 죄를 지적하는 법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자기 안에서 통제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방임이 되고 방임이 되니까 방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법이란? 제어장치에요.

나를 방임하지 못하게 하는 브레이크란 말입니다.

우리 몸은 율법이 제어하여도 뚫고 나가고자 해요.

하지만 율법이 우리 안에서 브레이크를 걸어주니까 우리가 우리 몸을 우리 마음대로 방임하도록 내 버려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대로 나가다가도 이게 아니지 라고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복음을 곡해한 자들이 복음을 빙자하여 색욕거리로 사용하고 있어요.

죄를 못 이기는 것하고 죄를 즐기는 것은 달라요.

복음은 우리가 죄 짓는 것을 합리화시켜주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죄를 억제하게 해요.

 

그런데 일부 몰지각한 자들이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니 이걸 곡해하여서 막 살아도 되고 맘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단 말입니다.

이 모두가 그 안에 율법이 사려졌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몸뚱이가 브레이크 터진 자동차처럼 방탕과 방종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율법주의와도 싸웠지만 영지주의 이원론 사상과도 싸웠어요.

영지주의자들은 진리를 곡해하여서 성도들의 삶을 방탕과 방종으로 치닫게 하였어요.

사도들의 서신서들을 보세요.

사도들의 서신서들이 비윤리적인 삶과 비도덕적인 삶을 책망하는 것으로 담고 있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에요.

 

베드로의 말을 한번 들어 봅시다.

 

벧전 2:10-12=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4:3-5=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하였지만!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긍휼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지요.

사도는 지금 이방인의 특징을 육체의 정욕으로 사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어요.

그래서 음란과 정욕과 방탕한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하던 것은 지나간 때가 족하다고 합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방인과 같이 육체의 정욕으로 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성도는 이방인과의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감으로서 이방인을 고발하는 형국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별성이에요.

 

이건 우리더러 이런 삶을 절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고 삶에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살라는 겁니다.

이러한 정신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우리의 연약함을 알게 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주어지는 용서와 구원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왜? 이런 지극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 것을 권고합니까?

이는 당시 거짓선지자들이 영지주의 사상을 진리처럼 교회 안에서 가르쳐서 성도들의 삶을 방탕과 방종으로 치닫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안에 영지주의 사상이 참 복음으로 둔갑이 되어서 전해졌어요.

지금도 이러한 사상이 참 복음으로 둔갑하여져서 전해지고 있어요.

 

당시 어떤 자들이 율법 아래 정욕을 억제하고 있다가 예수 믿으면 모든 죄가 용서 받는다고 하니 야호~ 하면서 그럼 이제부터 그 동안 율법 아래서 꾹꾹 참고 하지 못하던 것들을 해보자!

그래서 복음을 곡해한 자들이 극심한 방탕과 방종으로 타락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고린도 교회 안에는 복음을 곡해하여 자기 계모(繼母)와 간통을 하고도 뻔뻔스럽게 예수의 피로 용서 받았는데 뭐~ 어때!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당연하지! 라고 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이건 아파해야 할 일이지 뭐~ 어때! 라고 할 일이 아니에요.

당연한 것으로 여겨선 안 되어요.

그래서 바울은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 이런 자들을 그냥 두면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퍼지게 하듯이 온 교회를 타락케 하니까 이런 자들을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고 했어요.

 

꼭 기억하여야 하는 것은 죄는 우리 몸을 가지고 역사를 해요.

죄는 우리 몸을 가지고 죽음에 속한 것들을 토해내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역사하는 현장에서는 반드시 몸에 타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나친 경건주의로서 금욕주의로도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 부분 타락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몸에 행실을 단정하게 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이 말씀을 무겁게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소욕을 좇는 일에서 돌이키셔야 해요.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죄를 안 지을 수는 없지만 죄에 대하여 아파하여야 해요.

 

성도는 이러한 사도들의 권고가 율법처럼 다가와서 우리 자신들의 사악한 죄성들을 고발당하여야 합니다.

말씀이 수술할 때마다 아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 우리 몸은 의에 병기 보다는 불의에 병기로 사용하고자 하는 죄를 이기지 못하는 자들이구나!

그래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해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죄 짓는 일이에요.

이건 질리지도 않아요.

하면 할수록 더하고 싶어요.

죄는 중독성이 있기 때문에 한번 하고 나면 그 다음에 또 하고 싶어져요.

 

지난번에 범죄자들의 심리학을 전공하는 프로파일러 라는 표창원이라는 경찰대학 교수가 나와서 강의하는 것을 들었는데 살인자들이 처음에 살인하는 것이 어렵지 한번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전혀 어려워하지 않는다고 해요.

 

그 다음부터는 즐긴다고 해요.

그래서 또 살인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죄성이에요.

 

모든 죄가 이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이걸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나타나요.

교회도 한 번 빠지기가 어렵지!

한 두 번 빠지기 시작하면 주일이 오면 교회 안 갈 핑계거리를 찾게 되어요.

 

이처럼 나쁜 습관은 금방 들어요.

그래서 제가 예배에 빠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놀지 말고 교회에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도 섬겨보고 봉사도 하라는 겁니다.

이러한 일들을 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자기 의로 가득 차 있는 죄인들인가 확인 해보라는 거에요.

 

인간은 무엇이든지 자기 합리화를 해요.

어떻게 합리화 하는가 하면 자기 편한대로 합리화해요.

복음도 자기 몸뚱이 편한대로 합리화해서 육신의 소욕으로 사는데 이용을 해요.

마귀는 항상 우리 귀에 달콤하게 속삭여요.

 

그래서 성경은 마귀의 말을 뱀의 독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뱀의 독은 죄에 대하여 감각을 마비시켜요.

나를 합리화 시켜주는 거짓 복음에 중독이 되면 죄에 대한 감각이 마비가 되어요.

그러니 마귀의 말을 듣게 되면 죄에 대하여 아파함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고 뻔뻔스러워져요.

 

마귀는 늘 우리 몸에 육체의 정욕을 가지고 유혹을 해요.

선악과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웠듯이 죄도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와요.

우리 육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모습으로 다가온단 말입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사도들은 그러니 그러한 삶은 지나간 때가 족하니 이제는 그러한 것들과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싸우란 말은 그만큼 유혹을 한다는 말입니다.

넘어 질수가 있단 말이에요.

 

싸우다 보면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겠지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죄와 싸우면서 우리가 얼마나 죄에 약한가를 알고!

이러한 자가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인가를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사도들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말씀 앞에서 두 가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 몸은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음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마세요! 라는 말이 우리 안에서 율법 역할을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도들의 말씀이 율법이 되어서 우리의 믿음을 굳게 세워주는 것이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인가를 알게 됩니다.

반대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율법이 또한 고마운 겁니다.

 

결국 율법이 믿음을 굳게 세우고!

믿음이 율법을 굳게 세워주는 짝이 되어서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천국에 서기관처럼 옛 것과 새 것을 마음껏 사용하여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에 은혜를 더 깊이 알아 가야 합니다.

율법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속에서 헤엄치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 앞에서 믿음을 바라보게 하시고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옵소서. 천국에 서기관들처럼 율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가는 도구로 잘 사용하여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풍성하게 맛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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