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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 강해)13강. 성전을 헐어라 <요 2:12-25>

by coroa 2022. 8. 15.

요 2:13-2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3강. 성전을 헐어라 <요 2:12-25>

요 2:13-25=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정낙원 목사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빛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세상은 어둠이라고 합니다.

빛이 세상에 비췸으로서 이제 세상의 그 본질들이 속속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로 인하여 어그러진 것들을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道)이요, 진리(眞理)요, 생명(生命)이라 합니다.

이는 지금까지 인간들이 알고 있던 길(道)은 길(道)이 아니고, 진리(眞理)도 진리(眞理)가 아니고, 생명(生命)도 생명(生命)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인자(人子)라고 하지요.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고자 한 참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기존에 우리 인간들은 가짜 인간들이란 뜻입니다.

이게 얼마나 도발적인 말입니까?

 

예수님이 등장하심으로서 세상은 가짜로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세상은 예수님 때문에 비상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진 사람들을 속여 왔는데 이젠 속일 수가 없어진 겁니다.

 

그러니 세상 입장에선 예수님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뒀다가는 세상은 다 날아가게 생겼어요.

그래서 마귀는 세상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서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어떻게 거짓을 폭로하는지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 내용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소하시는 내용입니다.

내용을 보면 극도로 흥분한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소나 양을 채찍으로 쫓아내고 상을 뒤집어엎겠습니까?

마치 포장마차 철거반원들이 철거할 때의 모습과 같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철거하시려고 오신 철거반원입니다.

구석구석 모든 것을 들추어내서 이것을 가짜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도 새 포도주로서 헌 포도주를 공격하였고,

오늘본문에선 진짜 성전으로 가짜 성전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너희들 눈에 보이는 성전은 성전이 아니고 내가 진짜 성전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어느 인간이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제가 여러분의 신앙은 신앙이 아니고 가짜입니다 라고 하면 가만있겠습니까?

그러면 아마도 정 목사 당신이 무엇인데 가짜라고 하느냐 라고 난리를 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자긍심을 갖는 게 세 가지가 있어요.

“성전(聖殿)”과,

“율법(律法)”과.

“안식일(安息日)”이예요.

이 세 가지는 유대인들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선민의 증거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 앞에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 즉 천손(天孫)에 자식이라고 자랑하였던 것입니다.

 

보물처럼 여겨 온 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부정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조상 대대로 성전이라고 지켜 왔는데 느닷없이 예수님이 오셔서 “이건 아니야” 라고 하니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유대인들 입장에선 이건 그냥 넘어갈 성질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겐 자기 생명보다도 “성전(聖殿)”과, “율법(律法)”과. “안식일(安息日)”은 더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건드린 것은 곧 유대인들과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어요.

결국 예수님은 “성전”과, “율법”과, “안식일”이라는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한 것을 건듦으로서 하나님께 참람한 짓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죽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매사를 부정했으니 죽을 짓을 골라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금기시 하던 것들만 골라서 했으니 안 죽으면 잘못 된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일들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로부터 있어 왔던 일들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지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으로 경배하려고 들어갈 때에 성전 문 앞에 서서 여러분 이곳은 성전이 아니고 강도의 소굴이라고 했어요.

 

예레미야 7장을 봅시다.

 

렘 7:1-11=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 ~ 9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수님 오시기 전 약 500년 전에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때 이미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은 일을 하셨어요.

예레미야 선지자도 예수님처럼 바른 말 하다가 밉상을 받고 죽임 당합니다.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은 아주 부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반대로 거짓 선지자들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았고 소망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 참 선지자가 출현하였다는 말은 곧 이스라엘은 부정 당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희들은 지금 개판이라는 거예요.

참 선지자의 출현은 곧 이스라엘에 비상이 걸린 겁니다.

 

참 선지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뜻 이외에는 눈에 뵈는게 없었어요.

양보나 타협도 할 줄 모르는 아주 고지식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다가 결국 사람들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어느 시대이고 복음은 항상 세상을 부정하면서 다가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인정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죄인은 아무리 잘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 설교를 들어도 아! 오늘 또 내 죄가 무엇인지 한번 까발려 보자! 라고 해야 해요.

 

죄가 고발당하는 것은 마치 목욕탕에서 때를 벗는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숨기운 죄가 하나씩 들통이 날 때마다 기뻐하여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아! 이런 것도 죄였구나! 라는 것이 깨달아져야 해요.

그게 성도가 하나님 말씀을 듣는 자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복음의 특징을 먼저 부수고 파귀하고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렘 1:9-10=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예레미야 입에 하나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고, 건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재개발하는 지역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그것에 새로운 집을 짓는 것과 같아요.

 

지금 예수님께서 구약교회를 불도저로 밀고 철거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뒤집어엎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지 않고 배기겠어요.

죽임 당하는게 당연하지!

 

아니 모든 사람이 성전이라고 믿고 있는데!

예수님 혼자만이 이건 성전이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저 부터라도 육적으로 보면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라고 하지요.

미친놈에겐 말이 필요 없어요.

몽둥이가 약이에요.

그래서 죽인 겁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죽기를 자청하는 일입니다.

안 죽으려고 하면 성도가 아니에요.

성도는 반드시 죽임당하도록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각본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성도는 세상의 안목과 다른 안목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선하다고 하면 악하다고 하고 세상이 악하다고 하면 선하다고 해야 해요.

왜냐하면! 세상은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이 땅에 사고로 보면 악한 자의 모습으로 와 있어요.

그러니 인간들이 거부하는 겁니다.

인간 상식으로는 도무지 맞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는 아무리 믿으라고 해도 믿지를 않는 겁니다.

아니 어느 인간이 부모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전토도 버리고, 자기 목숨까지 버리고 예수를 믿겠어요.

부모도 지키고, 자식도 지키고, 전토도 지키고,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 믿는게 인간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정 반대로 말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주장은 인간 상식으로는 맞지 않아요.

믿을 수가 없어요.

 

아니 살고자 예수를 믿지 죽고자 믿는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날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는 말은 곧 너희들은 날 믿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날 따라 오지 말라”는 겁니다.

“집에 가서 네 할 일이나 해라”

“날 믿으려고 하지 말라”

“너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날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시지 않으면 그 어떤 인간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예수님이 지나가면 여기저기서 믿는 자들이 하나 둘 불쑥 불쑥 튀어 나와요.

이런 사람들이 튀어 나오면“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구나”라고 생각하세요.

 

저와 여러분이 지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랄 일인 줄 아세요.

이건 완전히“또라이”에요.

우수갯 소리로 개그맨인 노홍철이만 또라이 가 아니라 예수 믿는 우리가 바로 또라이 들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예수님께서 왜? 보이는 성전을 성전이 아니라고 말하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나님을 형상화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인간들이 종교성을 단적으로 대변해 주는 말씀입니다.

인간들은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만진바 된 것을 믿고자 하는 습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神)조차도 자기 손으로 만지고 자기 눈으로 보고 싶어서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으라고 해도 뭔가를 자꾸 붙잡으려고 해요.

 

인간들은 그냥 허공에다 빌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해요.

뭔가 보이고 붙잡혀야 믿을 수 있다고 해요,

그래서 교회도 십자가라도 걸어 놓아야 믿겨져요.

마치 절간처럼 부처님 형상이라도 만들어 놓고 빌어야 빈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겁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인간들이 사는 곳엔 반드시 빌어야 할 성황당이 있어요.

인간들이 터전을 잡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그 곳에 터줏대감 신(神)을 모시는 일부터 해요.

그게 성황당이든,

고상하게 생긴 고목이든지,

바위이든지,

좌우지간 범상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면 그곳을 신께 비는 제단(祭壇)으로 삼습니다.

 

그리곤 정한 날을 잡아서 굿을 하든지 제사를 지냅니다.

그래야 그곳을 다스리는 신의 음덕(蔭德)을 입어서 잘 살게 된다고 믿어요.

이게 하나님을 떠나온 인간들의 신관(神觀)이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형상화 된 신(神)은 신(神)이 아니란 뜻입니다.

지금 인류 사회에 지천에 널려져 있는 신(神)들은 전부가 가짜인 겁니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게 아니에요.

불교의 가르침은 스스로 도(道)를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인간은 생노병사(生老病死) 한다는 거에요.

인간은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결국엔 죽게 된다는 이치를 깨닫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고통을 찾고자 구도(求道)의 길을 나선 겁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이 생노병사(生老病死) 에요.

생노병사는 인간이 거부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불교는 교리는 철학이고 운명론 이예요.

 

부처란 말은“깨달은 자”란 뜻입니다.

그러니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깨닫는 자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절간에 부처님을 모셔 놓는 것은 깨닫지 말고 빌라는 거예요.

 

빌라는 말은 돈을 갖다 바치라는 뜻입니다.

그냥 빌기는 뭣하니 돈을 갖다 바치면서 비는 겁니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느냐 하면 석가모니를 따라 다니다가 신세를 망친 놈들이 한 거예요.

원래 석가모니는 자기 자신도 믿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어요.

 

그래서 진짜 석가모니 제자들은 절간을 만들지 않았어요.

다만 순회하면서 석가모니에게 배운 것들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석가모니를 쫓아다니던 자들 중에 본전 생각이 나는 인간들이 있었어요.

 

지금까지 모든 걸 포기하고 석가모니를 쫓아 다녔는데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자신들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잖아요.

그래서 석가모니가 깨달은 것을 가지고 먹고 살 궁리를 한 겁니다.

절간을 만들고 중이라는 하나의 직업을 만든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인생의 근본적인 도(道)인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이치” 를 가르쳐 주겠다고 절간을 세운 겁니다.

사기꾼 같은 제자들이 절간을 만들어서 중생들이 찾아오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 본연의 종교성을 접목 한 겁니다.

인간 본연의 종교성이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하는 겁니다.

즉 땅에서 열심히 빌면 하늘도 감동해서 뜻을 이루어 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올 때 그냥 오지 말고 공양할 돈을 가지고 오라는 겁니다.

즉 절간을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거기에 딸린 사람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허공에다 빌게 할 순 없으니 부처님 형상이라도 만들어 놓고 빌라고 한 겁니다.

인간들이 종교심성을 철저하게 이용해서 형상을 만들어 앉혀 놓은 겁니다.

 

그리고 비는 데는 정성이 필요하니 돈을 내라는 겁니다.

원래 석가모니가 깨달은 것은 참 좋은 것이에요.

다만 인간들이 종교화 하여서 변질시켜 놓은 것입니다.

불교나 기독교나 항상 사기꾼들이 망쳐 버렸어요.

 

불교는 인간의 도리는 깨닫게 하는 학문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종교가 아니고 철학입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를 적대시 할 필요가 없어요.

 

저도 불교 방송을 잘 봅니다.

거기서 강의하는 법사(法師)들이 있어요.

법사란? 법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은 솔직해요.

오히려 기독교의 목사들보다 나아요.

 

솔직히 기독교 TV에 나오는 목사들보다 훨씬 인간 적입니다.

기독교 TV에 나오는 목사들은 거의가 사기꾼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헐어버린 율법을 다시 고수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도말시킨 율법신앙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전이나 율법이나 안식일이나 십일조 같은 것들을 강조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몸으로 이걸 헐으셨는데 지금 목사들이 예수님이 헐었던 것을 다시 짖는 짓들을 하고 있어요.

그걸 밥 벌어 먹고 사는 자들이에요.

아주 나쁜 자들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 교회가 불교 절간과 같이 되어 버렸어요.

땡 중들이 밥 벌어 먹고 살고자 차려 놓은 절간과 같이 되어 버렸어요.

 

교인들에게 그냥 헌금 하라고 하면 안하니까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신전(神殿)을 만들어 놓고선 바치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교회가 성전이라고 생각되면 정성을 쏟아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몸도 돈도 다 바쳐서 지었기 때문에 자기 분신과 같아요.

이거 날아가면 자기도 날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붙잡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 교회 짓는데 헌금 많이 한 사람들은 절대로 거길 못 떠납니다.

자기 모든 신앙의 흔적들이 서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헌금하지 않은 사람들은 미련 없이 떠나요.

 

실제로 부흥사들이 그래요.

교인들을 교회를 못 떠나게 붙잡아 두려면 헌금하게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가 두 쪽이 나도 그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고 해요.

인간의 종교 심리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그런 말로 미혹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시대 교인들은 유대인과 다를 바가 없어요.

 

앞서 말했지만 유대인들에겐 “성전”과 “율법”과 “안식일” 이라는 세 가지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유대민족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기둥과 같은 것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과 “율법”과 “안식일” 은 신성한 것이라 여겼어요.

누구든지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만 범해도 신성을 모독한 망령된 자로 여겨 출교를 시키거나 죽였어요.

그중에서도 특히 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신명기 16장을 봅시다.

 

신 16:16절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이스라엘의 남자는 누구든지 일 년에 세 차례는 무조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율법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남자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유월절(봄)과, 칠칠절(여름)과, 초막절(가을)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나와서 제사를 드려야 해요.

 

성전에 올 때에는 각자가 제물을 가지고 와야 하는데 멀리서 오는 자들은 멀리서부터 제물을 가져 오기란 불가능하므로 이들을 위해서 성전 안에 제물을 구입 할 수 있도록 합법적으로 편의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멀리서 온 참배객들은 그곳에 있는 제물을 돈 주고 사서 바쳤어요.

 

또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반드시 성전세를 내야하는데 하나님의 성전에 이방인인 로마 황제의 화상이 새겨진 돈은 드리지 못하잖아요.

그러면 속된말로 부정을 타요.

 

그래서 성전세는 반드시 히브리 돈으로 내야 해요.

혹시라도 이방인 돈을 내는 실수를 하지 말라고 로마 돈을 유대 돈으로 바꿔주는 환전상도 성전 안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엄청난 이권(利權)이 개입되어서 처음 취지에서 벗어나 성전이 장사하는 곳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성전을 일컬어 강도의 굴혈이며, 장사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뒤집어엎으면서 밖으로 쫓아내 버린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문제 삼지 않은 것을 예수님께서 문제를 삼고 성전을 청소를 하였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성전 신앙에 정면으로 도전을 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 누구도 감히 접근 할 수 없는“성역”을 예수님이 겁도 없이 쑥대밭을 만들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펄쩍 뛴 겁니다.

야! 이거 말세야! 말세! 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이건 마치 명동 성당에 공권력이 투입 되면 성소를 침탈한 행위라고 신부들이 지랄 떠는 것과 같아요.

이 무식한 놈들이 지금도 예배당이 성소라고 해요.

얼마나 웃기는 소리입니까?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강도의 굴혈이라고 했던 성전을 지금 신부나 목사들이 성전이라고 지키고 있잖아요.

지금은 중들도 절간을 신성시해서 공권력이 투입되는 걸 결사반대를 합니다.

하여간 사이비 종교꾼들은 못 말려요.

여기에 무식한 불자들이나 교인들은 덩달아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좌우지간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을 지켜보던 유대인들은 네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렇게 참람 된 일을 행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바로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 “성전을 헐어버려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합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허파 뒤집어지는 소리예요.

아니 예수 니가 뭔데! 성전이라고 하느냐 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성전을 46년에 걸쳐 지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사흘 만에 지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맞아요.

유대인들 말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어요.

아직까지 미완성 되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하니 기가 찬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유대인의 대화가 동문서답(東問西答)임을 알 수 있지요.

유대인은 건물을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예수님은 자기 몸을 성전이라고 하고 있으니 달라도 한참 다르지요.

접점(接點)이 없어요.

 

여기서 잠깐 참고적으로 알고 갑시다.

유대인들이 성전이라고 하는 예루살렘 성전은 46년 동안 지었는데도 미 완성으로 있지요.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미완성이지요.

 

이건 율법은 완성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으로 아무리 성전을 지어도 미완성으로 남는 다는 겁니다.

미 완성이란? 온전힌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요.

율법 성전은 온전할 수가 없어요.

율법 성전은 땅에 있는 성전은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를 보여주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성전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미 완료된 성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유대인들은 미완성된 성전을 통해서 온전한 성전을 보아야 해요.

그 온전한 성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지금 예수님이 온전한 성전으로 미 완료된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을 알 턱이 없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전의 본질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성전을 주신 목적을 알 필요가 있어요.

그건 성전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면 됩니다.

 

알다시피 성전이나 안식일이나 하는 것들은 모두가 율법 속에 포함 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이스라엘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즉 율법에 속한 성전이나 안식일이나 하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생명처럼 지켜온 것입니다.

어찌 보면 문자적으로 보면 유대인들은 잘못한 것이 없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실수한 것은 율법이라는 문자만 보았지 그 뜻을 몰랐어요.

성전이라는 건물만 보았지 그 속에 담긴 정신을 모른 겁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로 주셨는데 그걸 못 본겁니다.

 

히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형상을 율법으로 모델하우스처럼 주었어요.

모델하우스는 그곳에 살라고 지은 집이 아니에요.

모델하우스는 장차 지어질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지어 놓은 겁니다.

 

실제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어 놓은 것이잖아요.

실제가 오면 모델 하우스는 철거가 되어야 해요.

모델 하우스는 실제가 오기까지 실제를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참 형상이 아니고 장차 오는 것의 그림자라고 하는 겁니다.

 

히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그림자인 율법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실상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이라 함은 완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새 언약이 필요한 겁니다.

 

왜? 옛 언약이 완전치 못합니까?

이는 새 언약을 겨낭하고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새 언약이 오면 옛 언약은 폐기 되어야 해요.

그래서 옛 언약은 새 언약이 올 때까지 개혁하라고 맡겨 둔 것이라고 합니다.

 

히 8:7-8=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다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히 8: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히 9:9-10=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델하우스 같은 성전을 보면서 장차 실제로 오실 성전을 소망하고 살았어야 해요.

만약에 실제를 소망함이 없이 성전을 지키는 것은 외식이 되는 겁니다.

 

그럼 보이는 성전은 장차 올 성전의 실제를 담고 있는데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전이란? 하나님이 거하는 집이란 말입니다.

즉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가 필요한 것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하나님 집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살았다면 성전이 필요가 없어요.

 

성전은 인간이 죄를 짓고 난 후에 필요한 것이 되고 말았어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만나기 위해서 한 장소를 만들라고 한 것입니다.

그 장소가 성전이에요.

 

그런데 알다시피 인간이 범죄하여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잖아요.

하나님께서 죄인을 쫓아냈다는 것은 죄인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죄인과 만나주시면 하나님이 손해를 보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마음을 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죄인을 면회 해 준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마음을 비운 것입니다.

그러니 죄인을 만나기 위해 성전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처럼 낮아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거룩한 분이라서 죄인과 만나면 죄인이 죽어요.

 

그래서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도 살 수 있는 길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죄인 대신 의로운 제물이 희생되는 겁니다.

죄인이 의로운 제물의 피를 앞세우고 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신 겁니다.

이런 의로운 제물이 죽는 제사가 성전에서 행하여졌어요.

 

성전이란? 죄인들이 의로운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을 일컬어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신 12:4-7절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이방인들이 아무데서나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던 것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음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장소를 택한다고 했어요.

그 장소에서 제사를 지내라고 했어요.

이곳이 바로 성전이에요.

 

그러니 성전은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곳이에요.

이름이란?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건물이 아니고 사람이란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천국을 보면 어린 양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성전을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곳이라고 한 것은 애초부터 한 인물을 겨냥하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분”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한 인물 안에서 죄인들을 만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바로 성전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한 인물이 올 때까지 한시적으로 필요하였던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보이는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실 분을 기다려야 했어요.

그래야 올바른 성전 제사가 되는 겁니다.

 

만약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실 분을 생각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게 되면 그것은 껍데기만 붙잡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실 분이 누구인가를 눈에 불을 켜고 살펴야 했어요.

 

그런데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을 소개 했어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소개 할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노라”고 고백하였어요.

 

요 5:43절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그러면 유대인들이 아이구! 하나님 이제 오셨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라고 반갑게 맞이했어야 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건물만 붙잡고 있었지 건물이 지니고 있는 여호와의 이름은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종교 지도자들은 몰라보던 예수님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입성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자기 옷을 펴고 호산나 호산나 라고 하면서 환영한 것입니다.

물론 그 때 잠깐 만이었지만 말이지요.

 

마 21:9절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리라”

 

‘호산나’라는 노래는 유대인들은 일 년에 삼차씩 성전을 순례할 때 서로가 서로에게 인사를 할 때나 아니면 멀리서 성전을 바라보고 기뻐 할 때 부르던 노래입니다.

“호산나” 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말입니다.

 

메시야가 오면 잃어버린 다윗의 왕권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올 때마다 호산나를 외쳤어요.

즉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 라고 외친 겁니다.

 

그런데 이들이 바란 구원은 로마로부터 해방되는 구원이었습니다.

육적 메시야를 기다린 겁니다.

유대인들은 죄와 사망이라는 권세로부터 해방 시켜줄 메시야를 몰랐어요.

또한 율법이라는 굴레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야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야가 되시게 하기 위해서 종교지도자들의 눈은 가리고 백성들의 눈을 열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고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 성전이 가짜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치 진짜가 가짜를 집어 사키기 위해서 들어간 것입니다.

물론 당시엔 아무도 몰랐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일단 백성들로 하여금 진짜 성전이 오셨음을 공포한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성전이 나타난 겁니다.

하나님은 신약에선 예수라는 새로운 만남의 장소를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건물 성전은 그림자이고 예수님이 참 성전이십니다.

실체가 오면 그림자는 사라져야 합니다.

 

히 10:1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

히 9:10절에선 “이런 것은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 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라”

히 10:9절에선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옛 것을 폐하시고 새 것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첫 것은 장소적 성전이고!

둘째 것은 예수님의 몸이라는 성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이 어느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라고 물을 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시대가 도래 했다고 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이란?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성전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성령이 오시면 건물 성전 시대는 끝이 납니다.

“예수”라는 새로운 성전이 성도들 안에 세워집니다.

 

성령으로 오셔서 성도의 몸을 성전으로 삼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성전이 성도들 안에 세워집니다.

이젠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날에 하나님을 만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자연히 안식일이라는 날도 예수님 안에서 다 완성이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자기 안에 성전이 이루어진 성도는 날마다 안식일이고 어느 곳이든 성전입니다.

 

이젠 예수님 이 외에 다른 성전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는 것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처럼 예수님을 힘입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만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신약에선 건물 성전에 가서 기다리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어요.

장소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건물 성전시대는 끝이 났다는 표시로 청소를 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를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그림자로 있어야 사람들이 속지를 않습니다.

그림자로 있을 때는 귀한 것이지만 그림자가 실체 행세를 하게 되면 악이 됩니다.

가짜는 가짜다워야 사람들이 속지를 않는데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니 사람들이 가짜에 속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일컬어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가짜가 진짜 행세를 했기 때문입니다.

외식이란? 실상이 아닌 허상으로 연극하는 연기를 말합니다.

율법은 허상입니다.

예수님이 실상입니다.

 

율법으로 세워진 성전도 허상이고 제사장도 허상이고 제물도 허상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실상인 예수님을 증거해 주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허상이 실상인체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있으니 예수께서 분개하여 저주를 퍼부은 것입니다.

 

지금 이시대도 이러한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건축물을 성전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참 성전 되신 예수를 만나야 하는데 만나야 할 예수는 못 만나고, 건물에게만 인사를 하고 가고 있는 겁니다.

참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데, 예수님 흉내 내는 목사만 만나고 가는 것입니다.

참 안식일인 예수님 안에서 쉼을 얻어야 하는데 가짜인 주일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시대 목사들이 예수님 행세를 하여 성도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어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할 성도가 목사를 바라보고 있어요.

그래서 이 시대 교인들은 성경은 안 믿고 목사의 말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장로의 유전으로 하나님을 헛되이 섬긴 것과 같아요.

목사들이 구약교회의 제사장같이 중보자가 되어버렸어요.

 

그러니 지금도 요한복음을 통해서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도는 교회라는 건축물에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목사라는 사람에게도 의미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참 성전 되신 예수님에게만 의미를 두어야 합니다.

목사란? 베드로와 요한처럼 우리를 쳐다보지 말고, 예수님을 쳐다보라고 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성도들의 시선을 예수님에게 돌릴 때 목사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 만약 성도들의 시선을 예배당이라는 건물에 붙잡아 매게 하고 목사에게 붙잡아 맨다면 그는 사기꾼입니다.

 

새 언약적인 안목으로 살펴보세요.

독사새끼들이 우글 우글 거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성전이라고 하는 자들은 모두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독사새끼들입니다.

 

독사새끼들은 인정을 베풀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때려잡아서 몸보신하면 됩니다.

 

여러분 1박 2일 기상송 들어 보세요.

 

“뱀이다 뱀이다

“맛도 좋고 몸에 좋은 뱀이다”

“요 놈에 뱀을 때려잡아 우리 아빠 몸보신 해드릴까” 라고 하잖아요.

 

뱀이라고 생각되면 사정없이 때려잡으세요.

그러려면 우리가 먼저 뱀을 구별할 수 있는 눈이 떠져야 합니다.

괜히 멀쩡한 목사를 뱀이라고 때려잡으면 안 되잖아요.

 

누가 뱀이냐 하면 보이는 예배당을 가지고 성전이라고 하고,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행세하는 자들입니다.

성전이나 목사에게 무슨 신령한 능력이라도 나오는 줄 가르치는 자는 모두가 뱀 들입니다.

우리가 소경이면 이런 독사들이 교회에서 광명의 천사가 되어서 우리 영혼을 사냥해요.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세요.

너희 눈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너희들을 꾀더냐고 화를 내잖아요.

그 어떤 놈이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하잖아요.

 

하늘에 천사라도 혹 자기 자신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증거하지 않으면 몽땅 저주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이 말은 자기가 과거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 엉터리 짓을 한 것이 너무나도 한스럽고 사무쳐서 그래요.

 

바울의 증거대로 라면 이 시대 성전 고수하는 목사들은 몽땅 저주의 대상들입니다.

그런 저주 받을 인간들을 왜? 두려워합니까?

이들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그 속에 빛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속에 빛이 있다면 율법은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예수님 이외는 성전은 없습니다.

보이는 교회를 교회라고 하지 마세요.

의미도 두지 마세요.

그냥 부동산일 뿐입니다.

 

성전은 바로 예수님이고,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가 성전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과 사랑의 속삭임을 나누세요.

밤이고 낮이고 월요일이고 일요일이고 아무 때나 사귐을 가지세요.

우리가 바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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