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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요한복음강해)11강. 참 이스라엘 <요 1:43-51>

by coroa 2022. 8. 6.

11강. 참 이스라엘 <요 1:43-5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1강. 참 이스라엘 <요 1:43-51>

 

요 1:43-51=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정낙원 목사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려서 몸에 밴 습관이 평생 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습관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도 나타납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은 습관적으로 교회생활에 익숙합니다.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습관화 된 신앙은 부모님과 같이 살 때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다가도 대학을 가거나 직장으로 집을 떠나면 교회에 멀리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 동안 부모 아래라서 억눌렸던 것을 간섭에서 벗어나면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일종의 그동안 금지당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에전에 저희들 교회에 나오던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청년은 모태 신앙으로서 나면서부터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의 강요에 의하여 교회라는 문화 속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집에서 살 때는 열심히 교회 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군대 갈 나이가 되어서 현역으로 가지 않고 방위산업체에서 대체 복무를 하기 위하여 시골에서 울산에 있는 공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곤 저희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율법아래서 신앙생활을 해서인지 몸에 밴 습관 때문인지 한 동안 잘 다녔어요.

율법을 듣다가 복음을 들어서 그런지 신앙생활에 긴장감이 풀리면서 점차 흐물흐물 이완되어가는 겁니다.

 

당시 로마서를 몇 년을 걸쳐서 설교를 하였는데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만들어 낼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야 한다는 설교 내용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진짜 내 믿음이 하나님이 믿게 해주셔서 믿는 믿음인지,

아니면 내가 믿는 믿음인지 의심이 들면 이렇게 확인해 보라고 했습니다.

 

난 이제부터 교회 안다니고 예수 안 믿을래! 라고 한번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짜로 예수 믿는 것이 싫고 교회오기 싫은 사람은 자기가 믿는 믿음이고,

목사가 예수 믿지 말고 교회 오지 말라고 해도 난 믿을 꺼야! 라고 하면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를 믿을 수 밖에 없으면 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안 믿는 것 보다 예수 믿는 것이 편한 사람은 하나님께로 난 사람이고,

예수 믿는 것 보다 안 믿는 것이 편한 사람은 지금까지 관습적으로 자기가 믿어 온 사람입니다.

그러니 자유에 던져 보면 그 사람의 믿음에 실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믿게 해주셔야만 믿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신 믿음은 난 안 믿을꺼야! 라고 해도 안 믿을 수가 없어요. 

믿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고, 믿지 못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천국 갈 사람은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믿도록 역사하시지만,

지옥에 갈 사람은 예수를 못 믿도록 역사하십니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결정해 주십니다! 라는 뜻으로 설교를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시름 시름 교회 발걸음이 뜸하더니 이젠 아주 안 나와요.

 

설교를 바로 들은 것 같아요.

아니면 자기 믿음을 확인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직까지도 확인 중인 모양입니다.

십 수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안 나옵니다.

 

재미 있는 것은 교회를 안 나와도 집안에 무슨 문제가 있으면 찾아와서 의논을 해요.

몇 년 지난 후에 어느 날 찾아와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주례를 해 달라고 해서 해 주었습니다.

교회는 안 나와도 아이들 낳고 백일이나 돌이면 예배를 드려 달라고 해요.

 

저희 집 주변에 살고 있어서 지금도 가끔 만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청년의 아내가 절 찾아와서 여러 가지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청년의 아내 말이 과거에 교회에 다닐 때는 사람이 참 착하였는데 이제는 아니랍니다.

 

이젠 술도 잘 먹고 낚시도 다니고 세상 친구들과 어울려서 미치겠다고 합니다.

남편이 밖으로 도니 아내 입장에선 교회에 나가면 방종하는 생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가정적 사람을 만들려고 교회에 나가자고 했답니다.

그런데 짜증을 낸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자신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강요에 의해서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불만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결혼을 해도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과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교회를 다니면 또 다시 교회에 나가야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세상적으로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지요.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자기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목사님이 잘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냥두시라고 했어요.

 

본인 마음에 예수 믿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제가 어떻게 믿게 할 수 있느냐?

강요하면 교회는 올 수 있을지 몰라도 억지로 교회 온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예수 믿게 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잘 다독이면서 살라고 해서 보냈습니다.

 

지금도 가끔 만나면 지나가는 말로 이젠 교회 와야지! 라고 하면 머쓱해 합니다.

이 사람은 우리교회를 떠나기까지는 마음에도 없는 것을 외식으로 연기를 한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없어도 얼마든지 흉내를 내면서 살아갑니다.

피조물 중에서 겉과 속이 다른 것은 오직 인간뿐입니다.

 

남을 속이는 사기는 인간들만 치지 짐승들은 사기 치지 않아요.

짐승들은 좋으면 좋다고 표현하고 싫으면 싫다고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속으론 미움이 가득하면서도 겉으론 미소를 짓습니다.

 

이런 위선이 신앙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나요.

마음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겉으로 사랑하는 척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지도 않으면서 교회 다닐 수 있는게 인간이에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교회에 다니면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식을 둔 부모들은 자식이 교회에 나가면 예수를 믿는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 믿는 것하고 교회 다니는 것은 완전히 달라요.

 

예수를 믿는 것은 내 스스로도 어찌 할 수가 없어요.

내 자식도 내 아내도 안되요.

오로지 하나님이 간섭해 주셔야만 되요.

 

그러니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 줄 알아야 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적에 속한 일입니다.

우리 속에는 예수를 믿도록 해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 속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겉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렇게 안에서 믿게 해 주시는 분이 계시면 신앙은 겉으로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안에 계신 분이 마음에 있는 것을 몸으로 표현하라고 해요.

“마음이 내용”이라면 “몸은 그릇”과 같아요.

 

예수가 없으면 예수 안 믿는 쪽으로 몸이 드러나고,

예수가 있으면 예수 믿는 쪽으로 몸이 드러나요.

마음에 세상이 있으면 몸은 세상을 표현해 내고,

마음에 하늘이 담겨 있으면 몸은 하늘을 표현해 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억지나 강요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어져야 믿음으로 살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마 22:17-21=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18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 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21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마음속에 온통 가이사가 그려져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네 속에 가이사의 형상이 그려져 있으면 가이사에게 드리고,

네 속에 하나님이 그려져 있으면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으면 몸은 약속을 위해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속에 있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빛을 말 속에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두라고 하셨어요.

성경은 빛과 어두움을 예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빛이란?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을 말하고,  

어두움이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자는 빛에 자녀이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어둠에 자녀입니다.

 

요한복음 1:12-14절에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접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지요.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어있다고 해야 옳은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을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본문을 보면 이렇게 하나님께로 난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하나님께로 난 참 이스라엘이 누구인지를 예수님께서 알려 주셨어요.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고 “참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네가 참 이스라엘이고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참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이고,

마음에 간사가 없다는 말은 마음에 어두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네가 진짜 하나님의 자녀이고 “빛에 속한 자”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의 메시야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빛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이미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한 눈에 척 알아 봤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상징적 행위입니다. 

 

왕상 4:25=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이스라엘에게 있어 무화과 나무는 번영과 상징을 상징해요.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평안히 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근심 걱정 없이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함은 솔로몬과 같은 태평성대를 소망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번영과 축복은 솔로몬과 같은 왕이 와야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이스라엘에게 번영과 축복을 안겨줄 메시야가 오시기를 소망하는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것은 나는 이스라엘의 번영과 축복을 가져올 솔로몬과 같은 왕이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는 신앙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있어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종교적 상징성을 띄고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으로 장차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여 줄 메시야를 보았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무화과나무 아래로 초대한다고 했어요.

 

슥 3:3-10=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 ~ 8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

 

스가랴 선지자가 성령에 감동으로 보니 하나님 앞에 대 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는데 사단이 참소하는 겁니다.

더러운 옷이란 죄를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머리에 정한 관을 씌우고 깨끗한 옷을 입혀 주시면서 모든 죄과를 사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은 예표라고 하시면서 “새 순”이 나면 무화과나무 아래로 초대하겠다고 하십니다.

 

“새 순” 이란? 메시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메시야가 오면 무화과나무 아래로 평안히 초대한다고 예언 하셨어요.

즉 “새 순” 으로 오실 메시야가 오면 이스라엘을 번영케 하고 죄를 씻겨줄 것이란 뜻입니다.

“새 순”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도 구원받기로 작정된 약속의 자녀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모든 죄과를 씻어줄 “새 순”이 되실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아래서 기도를 하고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므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말은 나다니엘이 평소에 이스라엘의 임금인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과 같은 참 이스라엘을 찾으려고 오셨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아들에게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고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신앙생활은 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로 증명이 됩니다.

이는 마치 부모와 자식과 같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관계성이지 어떤 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무슨 일 하는 것으로 점검하지 말고, 예수님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느냐로 점검하여야 합니다.

범사에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그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무슨 일로서 신자 됨을 증명하려고 하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해도 무덤덤하고,

천국에 약속을 이야기해도 무덤덤하고,

죄 이야기해도 무덤덤하다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主)”라는 말은 “주인(主人)”라는 말이고,

“그리스도”라는 말은“임금”이란 말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고 임금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환경에서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해요.

왜냐하면! 내 생사여탈권을 주인이신 예수님이 가지고 행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옳은 관계 안에 있는 자라면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롬 8:34-39=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보세요.

성도의 운명을 도살당할 양 같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끊어지지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안 닥친다는 뜻이 아니고,

이런 일들이 닥치더라도 믿음은 빼앗겨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만약 이런 것으로 끊어지는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어려운 일이 당하면 자기가 잡고 있던 신앙에 손을 놓아 버리는 겁니다.

 

신앙은 내가 예수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 손을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예수님 손을 붙잡고 있다면 언제든지 놓아 버려요.  

그래서 하나님은 누가 손을 붙잡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도에게 육신적으로 어렵고 힘든 일들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놓아져 지지가 않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해서 먹고 살기 힘들어도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낙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구약의 믿음에 사람들의 특징을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히 11:36-38=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 10:33-35=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어떤 사람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어떤 사람은 톱으로 켜서 죽고,

어떤 사람들은 옥에 갇히고 하였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그들을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지키다가 불이익을 당한다 하여도 슬퍼하지 않고,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여도 원망하지 않은 겁니다.

바울이 감옥 속에서도 예수님과의 끊어질 수 없는 관계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찬송하며 기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삶을 일컬어 주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해요.

 

신앙생활이란? 자신을 보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말은 나다나엘의 관심사가 메시야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나다나엘은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보다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소망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지금식으로 말하면 천국에 약속을 소망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다나엘에게 자신의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인자란?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란? 천국백성들을 말하는 겁니다.

또한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말은 천국의 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구약시대 야곱의 모습에서 보았던 모습입니다.

과거 야곱이 집에서 쫓겨 나와 하란으로 도망 할 때 광야에서 낙심하여 두려워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사다리를 내려 주셔서 야곱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야곱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를 보고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여 그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집이란?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을 연결해 주는 사다리가 있는 곳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금 나다나엘에게 내가 바로 하나님과 성도를 연결시켜주는 사다리라고 알려 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사다리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도들이 쉴 수 있는 하나님의 집인 성전으로 와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비로서 하나님과 연결되는 통로가 생긴 것입니다.

이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는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오직 나다나엘 같은 참 이스라엘만 알아요.

 

여러분이 예수님이 천국 가는 사다리라는 것을 안다면 나다나엘처럼 참 이스라엘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곳이라고 하지요.

맞아요.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 수 있어요.

그리스도의 비밀을 아는 자가 교회예요.

이런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해요.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로 올라 갈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망할 때 성도는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 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서로 서로 위로를 하면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성도는 천국을 약속 받았기에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산다 해도 낙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거지 나사로 같은 삶을 산다고 하여도 천국에 대한 소망만 있으면 행복 할 수가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자! 보세요.

하박국 선지자가 뭐라고 했나요.

이것이 없어도 괜찮고,

저것이 없어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다고 하지요.

온통 없는 것뿐이지요.

그럼에도 낙망하지 않은 것은 구원의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역시 없어도 괜찮은 이유는 구원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비록 사업이 잘 안되어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도,

또는 직장생활이 어렵더라도,

아니면 돈벌이가 시원치 않아도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천국을 약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랬지요.

우겨쌈을 당해도 괜찮고,

욕 먹어도 괜찮고,

꺼꾸러뜨림을 당해도 괜찮다고 해요.

 

왜? 그런가요?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들은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받은 것을 생각해 봐야해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있잖아요.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에 간다는 사닥다리 비밀을 알잖아요.

그럼 됐어요.

다 받았으니,,,,

 

하나만 이야기 하고 마칠게요.

저는 구원받음을 이 비유로 잘 합니다.

구원을 도박판으로 비유해서 죄송한데 양해하고 들으세요.

 

여러분들 화투 칠 줄 알지요.

그럼 장땡이 압니까?

단풍 잎사귀 두 개 말입니다.

 

이거 두 개 손에 있으면 화투판에선 천지가 개벽을 해도 끄떡하지 않아요.

옆에서 무슨 말을 하고 공갈을 치고 협박을 해도 꿈쩍하지 않아요.

이것 손에 잡은 사람은 옆에서 지랄하면 그냥 씨익 웃어요.

 

그걸로 게임 끝입니다.

복음을 화투로 표현해서 대단히 죄송하지만 이것만큼 확실하고도 명료한 비유가 없어요.

 

단풍 잎사귀 두 개만 보이면 무릎을 탁 치면서 속으로 왔구나! 라고 해요.

그것만 보면 행복해요.

겁이 안나요.

만사를 다 얻은 것 같아요.

 

여러분 이 믿음과 약속이라는 단풍 잎사귀 두 개 받았나요.

그럼 그 어떤 일들이 닥친다 하여도 낙망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구원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혹시 유월 목단 잎사귀 하나 하고, 시월 단풍 하나 들고 있지는 않겠지요?

비슷한 것으로는 안 되어요.

그럼 얼른 들어가세요.

그것 가지곤 못 이겨요.

 

지금 내가 가진 패를 확인해 보세요.

 

 

기도합시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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