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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성경강해)히 29강. 죽음으로 온전케 된 형제 (히 2:10-13)

by coroa 2022. 7. 13.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9강. 죽음으로 온전케 된 형제 (히 2:10-13)

히 2:10-13절.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찌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 예수님께서 죽음을 맛보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서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예수님 대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성도라고 한다면 항상 자기 몸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짊어지고 산다 함은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살려주신 예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산다함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위해서 산다고 하니 추상적으로 들리지요.

너도 나도 입술로는 예수를 위해서 산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을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고 있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난 망해도 좋아! 라고 사는 자가 없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하고,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하고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내 모든 아픔이나 수고를 감수한다는 말입니다.

 

당신이 기쁜 일이라면 난 죽을 수 있어!

당신이 날 더러 죽으라고 하면 죽을게!

내가 살아가는 삶에 의미나 목적은 오직 당신 때문이야! 라고 할 때 사랑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삶에 모든 포카스가 맞추어져서 살아가는 것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과연 이런 사랑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죄인이 이런 사랑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제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것은 상대방이 나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내 기쁨을 주고 내 행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나니! 라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다고 합니다.

 

사랑이 뭐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죄 없는 아들을 대신 죽게 하여서 나의 죄를 담당케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지도 바라지도 생각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게 기쁜 소식인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십자가에 대신 죽은 것이 뭬가 그리 좋은 일인가?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자 이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 원수를 위해서 어떻게 대신 죽는단 말인가!

 

바울은 이 사실을 다메섹에서 깨닫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본다면 바울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입니다.

그런데 그런 원수를 살리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합니다.

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인 자였는데 그런 나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덮쳐 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요.

 

바울은 이 엄청난 놀라움으로 살았어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전하며 평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 만이 하나님 앞에 의(義)가 된다는 것을 외치며 살았어요.

하나님의 용서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이라고 증거했어요.

이런 말을 하다가 인간을 무시한다고 엄청 욕을 먹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의롭게 되느냐!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도 얼마든지 의로워 질 수가 있는데!

바울 너는 왜 예수의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고 하느냐면서 이단으로 정죄당하고 매를 맞으면서 죽을 고생하였어요.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위해서 산 사람을 바울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하며 살았어요.

 

바울은 당돌하게도 자기와 같이 십자가만 증거하며 사는 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누가 들으면 시건방지다고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바울의 말은 자기를 본받으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 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 줄 알았습니다.

바울과 같은 정신머리로 사는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나 죽으나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행한 일을 자랑하면서 사는 것을 그리스도만 존귀케 된다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기 삶에 이용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다가 자기 삶을 송두리째 빼앗겼어요.

 

이 시대 목사와 교인들과 비교하면 얼마나 다릅니까?

이 시대 목사와 교인들은 전부 예수를 이용하잖아요.

예수와 함께 세상에서 외면당하고 버림당하고자 하지 않고 예수를 이용해서 세상에 지경을 넓혀가고자 하잖아요.

 

목사들은 교회를 부흥시키고자 예수를 말하고 자기는 괜찮은 목사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십자가를 말하잖아요.

교인들은 어찌하든지 예수를 이용해서 자식들 잘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살고자 꿈꾸잖아요.

 

어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난 망하고 없어도 괜찮아! 라고 사는 자가 있습니까?

머릿속에는 온통 남보다 더 큰 교회를 만들고자 하고 남들보다 더 잘 살고자 하지!

마음속에 온통 예수의 피를 이용해서 잘 살고자 하는 도적놈들이 자리 잡고 있잖아요.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만 보지 마세요.

우리의 마음이 예루살렘 성전이고 강도의 굴혈이에요.

이 시대 교회는 강도들만 우글 우글거리는 강도의 소굴입니다.

 

자칭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자들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자기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서 예수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있어요.

예수와 함께 망하고자 하지 않아요.

 

그래 난 예수님의 십자가만 전하다가 당신들에게 미움을 받고 교회에서 쫓겨나도 괜찮다! 라는 정신으로 십자가를 전하지 않아요.

다 십자가를 전한다는 핑계로 살아남고자 전하고 있어요.

한마디로 죽고자 하지 않고 살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입술로는 얼마나 뻔지르르하게 말을 하는지 몰라요.

 

홍수 속에 생수가 없다고 하듯이 예수라는 말이 홍수처럼 쏟아지는데도 정작 예수님의 피 흘리심은 외면당하고 있어요.

예수를 말하나 예수가 없고,

십자가를 말하나 십자가 정신이 없어요.

예수를 모르고 십자가를 모르는데 어찌 올바른 예수가 증거되고 십자가 정신이 나오겠어요.

 

이 시대 한국교회의 행태를 보면 예수는 이용대상물이지 믿어야하는 구세주가 아닙니다.

마치 껌에 단물을 다 빼내 먹고 버리듯이 예수를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말하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올바른 예수가 아니고 십자가가 아닙니다.

속지 마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지요.

이는 예수라는 말과 십자가라는 말을 한다고 해서 복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복음은 예수 안에서 난 죽고, 십자가 안에서 난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 라는 존재는 더 이상 없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다가 이단이라는 말을 들어도 감사하고,

조롱을 당하여도 감사하고,

교회가 망하여도 감사하고,

가난해도 감사하고,

아파도 감사하고,

예수 있음에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동요하지 않고,

풍조에 밀려다니지 아니하고,

세상의 그 어떤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안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 대한 기대나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조차도 다 포기하고, 예수 안에서 주어진 죄사함의 은총으로 감사하며 만족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라고 성령이 오셨습니다.

세상적인 가치의 기쁨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가치의 기쁨을 주시려고 오셨어요.

예수 안에 있음이 최고의 축복임을 알게 해 주세요.

 

성령은 우리와 상의하지 않고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로 우리를 밀어 넣습니다.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자 제자들이 자기들의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저벅 저벅 걸어갔던 것처럼 지금도 동일한 성령이 성도들을 십자가 길로 걸어가도록 하십니다.

 

매를 맞아도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고,

감옥에 갇혀도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고,

우겨쌈을 당하여도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어요.

핍박이나 죽음조차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았어요.

이게 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뭐냐?

예수님과 하나 되어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셨던 그 당함을 그대로 당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럴 때 비로소 예수와 한 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맏아들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지요.

 

맏아들이란? 첫째란 말입니다.

첫째라 함은 둘째, 셋째, 넷째,,,, 줄줄이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마치 고구마 넝쿨을 잡아당기면 주르르 달려 나오듯이 줄줄이 붙어서 나온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여러 명을 일컬어 형제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낸 것은 자기 형제를 찾아오라고 보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형제라는 말이 나옵니다.

 

10절에 보면 많은 형제를 이끌고 영광에 들어가게 한다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자석처럼 이 땅에서 자기 형제들을 줄줄이 끌고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형제들을 잡아당긴다고 했어요.

 

요 12:32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구원이란? 예수님께서 땅에서 하늘로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석으로 쇠붙이를 척척 달라붙게 하듯이 자기 형제들을 잡아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지나가면 자기 형제들은 척척 달라붙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예수님께 속한 형제들이 아멘! 아멘하고 달라붙어요.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찾아냄을 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내듯이 예수님이 목자가 되셔서 자기 형제들을 찾아냅니다.

어떻게 찾아내느냐 하면! 자기의 죽음으로 찾아냅니다.

이게 비밀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한다고 합니다.

구원의 주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죄가 없는 온전한 분입니다.

이미 거룩한 분입니다.

새삼스럽게 온전해 질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예수님을 고난으로 온전케 하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온전케 되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예수님이 죽지 않으면 온전해지지 않나요?

그렇지는 않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온전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온전케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우리 대신 죽으심을 맛보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누가 온전케 되는냐! 하면 예수님의 형제들 입니다.

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형제들이 온전케 되는가요?

이는 예수님이 형제들을 대신해서 죽음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지 않아도 되어요.

그런데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이 온전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온전함 속에는 예수님의 희생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문이 남습니다.

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형제들이 온전케 되느냐! 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값으로 죽으면 될 것을 왜 예수님이 대신 죽어야 하느냐 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잖아요.

그럼 우리가 죽어서 죄의 삯을 청산 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죄와 상관없이 살려 내서 천국에 데려가면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굳이 예수님을 우리 대신 죽게 하여서 우리 죄값을 청산케 하느냐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목적으로 일하지 않아요.

예수님을 주가 되도록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도록 하신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려면 형제들이 예수님 안에서 나와야 하잖아요.

성도를 예수 안에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많은 형제들 중에 맏이가 되기 위해서 죽였다 살려 내는 방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맏이라는 말은 동등의 개념이 아니고 머리라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머리라고 하고 우리는 지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머리라는 말은 살려주는 분이라는 말이에요.

생명을 주는 분이라는 뜻이에요.

 

지체는 머리 안에서 생명을 얻어요.

그러니 지체에게 머리란? 동등의 개념이 아니고 생명의 근원이고 뿌리라는 개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조상이라고 합니다.

아담을 죄인의 조상이라고 하고,

예수님을 의에 조상이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조상이란? 하늘에서 내려준 아비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의에 조상이 되어서 우리를 예수님 안에 복속시켜서 의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복속이란? 자기 안에 감춘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예수 안에 감추어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독자적으로 두지 않고 예수 안에 두고자 하심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우리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사는 자들을 일컬어 교회라고 하고 또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몸으로 비유하면 맏아들이신 예수님은 머리가 되고 우리는 그 지체들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거룩하게 하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가 하나에서 나왔기 때문에 형제라 부르기에 부끄럽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거룩하게 하시는 자”가 있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가 있다고 하지요.

거룩하게 하시는 자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는 우리 성도들입니다.

 

그럼 성도가 거룩하게 된 것은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 때문이지요.

독자적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님이 거룩하게 해 줘서 거룩한 자가 되었어요.

우리는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 안에서만 거룩해 집니다.

 

이걸 신학적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저는 신학적 용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용어들은 전부 철학적 사고에서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설교 할 때는 잘 안 쓰려고 해요.

 

오늘은 부득불 사용합니다.

칭의(稱義)란?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실제로는 의로운 자가 아닌데 예수 안에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이걸 본문에서 거룩하게 함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룩을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함을 입었어요.

거룩은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 것이에요.

우리에게 거룩이 있으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에게 거룩이 없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룩을 우리에게 입혀 주었어요.

거룩은 의(義)에요.

의를 옳음인데 온전이라고도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입혀준 의(義)를 입고 있어요.

거룩을 입고 있어요.

온전을 입고 있어요.

예수 안에서 의롭고 거룩하고 온전한 것입니다.

 

의로워지고,

거룩해 지고,

온전해 가는 것이 아니고,

단번에 의로워졌고,

거룩해졌고,

온전해졌어요.

 

성도가 입은 의나, 거룩이나, 온전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변해서 벗겨내지 않는 한 벗어지지 않아요.

예수님이 변덕쟁이가 아니고서는 성도의 구원은 취소 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가면서 입혀준 건데 우리가 말 안 듣는다고 벗겨 내겠어요?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지신 것은 우리에게 가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망이 없어서 대신 죄값을 치러 주셨는데 새삼스럽게 말 안 듣는다고 취소하진 않아요.

이게 약속이에요.

 

새 언약이라고 해요.

새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서 했어요.

우리는 거기에 끼어들 틈이 없어요.

너희는 나가 놀라고 하고선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서 했어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로 했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 주는 걸로 했어요.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죄가 있는데도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신 것 때문에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으로서 성도들의 조상이고 머리에요.

조상이고 머리이신 예수님이 거룩하니 그 안에 있는 우리도 거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복속된 사람들은 전부가 거룩함을 입어요.

이렇게 되면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가 동일한 거룩한 자로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요.

 

예수님을 머리라 함은 생명의 근원이란 말입니다.

팔 다리 하나 잘려 나가도 살 수 있지만 머리가 잘려 나가면 살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몸은 머리 때문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자가 아니고 죄인입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예수님의 몸에 붙어 버렸어요.

예수님이 머리로서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해 줍니다.

 

그러면 자연히 몸에 지체들은 머리가 공급해 주는 생명의 기운으로 살게 됩니다.

머리가 공급해 주는 생명의 기운이 거룩입니다.

죄 없는 거룩한 분이 자기 몸에 지체들에게 거룩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의롭지 않은데 의로우신 예수님 안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이걸 법정적 용어로 칭의라고 해요.

 

예수 안에선 죄인도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아요.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예수님이지 우리 자신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신앙의 싸움은 우리를 의롭게 해 주는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지, 우리 독자적으로 의를 만들고자 하면 안 되겠지요.

스스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은 머리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 되고 말아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나요.

팔 다리가 혼자서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팔다리가 몸에 붙어 있을 땐 귀하지만 독자적으로 돌아다니면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팔 다리를 누가 지켜 줍니까?

몸이지요.

팔 다리 스스로가 지키지 않아요.

몸이 지켜 줍니다.

 

중요하니 잘 들으세요.

성도를 붙잡고 계신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고 있나요?

아니면 예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나요?

예수님이 붙잡고 계시지요.

 

예수님을 일컬어 몸에 머리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지켜 준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팔 다리가 독자적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머리가 허용할까요?

안 할까요?

당연히 안 하겠지요.

 

그럼 예수님이 선택하여서 자기 몸에 복속시킨 성도는 독자적으로 의를 만들고자 할까요?

안 할까요?

안 하겠지요.

예수님이 붙잡고 있으니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가 없지요.

 

예수님을 머리로 둔 사람이!

우리 성화합시다!

우리 온전해집시다!

우리 거룩해 집시다! 라고 말 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그럼 성화하여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혼자서 팔 다리가 돌아다니는 사람입니까?

혼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지요.

 

팔다리를 누가 관리 한다고 했습니까?

머리가 관리한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진짜 예수님이 자기 몸에 팔 다리로 붙여 놓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혼자서 성화하자고 돌아다니도록 허락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겠지요.

 

그럼 성화하자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붙여 놓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스스로 붙어 있다가 떨어져 나온 사람입니까?

스스로 붙어 있다가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지요.

자기가 붙었다 떨어졌다 하고 있어요.

이런 구원이 있습니까?

없지요.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과 한 형제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애초부터 형제가 아닌 자들이 형제인척 사기치고 다닌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가 한 형제라고 했잖아요.

그럼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라고 한다면 독자적으로 성화하자! 온전하자! 거룩하자! 라고 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그래야 거룩함을 입은 자가 되는 거지요.

 

이해가 되는가요?

잘 정리하세요.

이해가 안 되시면 다시 처음부터 보세요.

설교는 진도 나가는게 중요하지 않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요.

추상적으로 알고 있으면 안 돼요.

 

그러면 종교꾼들이 공교하게 만든 이설(異說)에 넘어 가요.

종교꾼들은 이성을 바탕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얼마나 논리적인 줄 몰라요.

지식으로 접근하면 이들을 당해 내지 못해요.

살리는 것은 영이지 육은 무익해요.

 

복음은 믿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에요.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믿음이 덮쳐오면 그냥 믿어져요.

 

이해하는 것은 우리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아니에요.

복음을 논리적으로 이해시키려고 하는데 이는 복음 자체가 허락하지 않아요.

복음을 이해해서 믿는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많이 배운 사람들이 이해력이 발달했기 때문에 더 잘 믿을 수가 있어져요.

 

그러나 세상에서 최고로 똑똑하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머리로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하다가 이해가 안 되어서 십자가에 죽였어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예수 믿어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용납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내가 지은 죄를 남이 대신 갚아 준단 말입니까?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서 우리 죄가 없어진단 말입니까?

이건 이성적으로는 말이 안 되어요.

우리의 이성은 내가 죄르 지었으면 내가 죄값을 치루어야 해요.

그래야 죄가 없어진다고 믿어요.

 

이게 유대인의 이성으로 판단되어진 합리적 사고에요.

이런 유대인들의 이성으로 판단되어진 합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자들이 바로 성화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에요.

 

그래서 저는 개혁주의나 성화주의자들을 종교 꾼으로 보지 성도로 보지 않아요.

예수에게 붙은 자는 개혁하고 성화하자고 말할 수가 없어요.

개혁하고 성화하자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머리로 두지 않고 자기가 머리로 살고 있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거룩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착한 삶이 거룩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은 예수님이 머리가 되셔서 공급해 주는 것이지 지체가 생산해 내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가 거룩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곧 예수와 상관이 없는 자란 말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거룩하게 하고 온전하게 하고 성화하고 개혁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자기 꼬라지를 늘 자기가 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비유를 한번 살펴보고 갑시다.

요한복음 15장입니다.

 

요 15:1-6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자 보세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아버지가 농부라고 합니다.

가지가 과실을 맺는 것을 깨끗케 한다고 하지요.

깨끗하다는 것은 의롭다는 말이고 거룩하다는 말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과실을 맺을 수 없다고 하지요.

과실을 깨끗함이라고 했지요.

깨끗함을 거룩이고 의라고 했어요.

 

그러면 거룩이나 의가 어디서부터 나옵니까?

나무로부터 나오지요.

나무로부터 나오는 거룩이나 의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무에 붙어 있으면 되지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스스로 거룩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나무가 시절을 좇아서 공급해 주는데 왜 가지가 거룩해지려고 설쳐 댑니까?

거룩해 지려고 설쳐 댄다는 것은 나무에 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를 모아서 불에 태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꾼들이 예수에게 붙어 있지 않는 자들을 모아다가 누가누가 잘하나 경쟁을 붙이는 것입니다.

상급이라는 사탕을 걸어 놓고 달리기를 시키는 것입니다.

잘하는 놈에게 칭찬과 상을 주니까 교인들이 죽을 둥 살 둥 성화하려고 경쟁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교인들끼리 경쟁을 붙여 놓고 그들이 쏟아내는 열심과 충성과 헌금을 받아 챙기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닭싸움 시켜 놓고 돈을 챙기는 것과 같아요.

장로도 시켜주고, 권사도 시켜주고, 구역장도 시켜주고, 남전도회장도 시켜주고, 여전도회장도 시켜주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서로 머리가 되고자 바쳐! 바쳐! 날마다 또 바쳐! 하는 것입니다.

누가 더 거룩한가! 시합을 붙여서 빼내 먹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구약에서 목자가 양털을 깎아서 자기 배를 불린다고 했어요.

이런 것을 종교 놀음이라고 해요.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장사는 항상 대박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종교 놀음 하는 곳에는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어요.

인간들은 자기 의를 쌓는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덤벼요.

이는 죄가 본능적으로 의롭게 되라고 몰아치기 때문이에요.

 

종교인들은 누가! 누가! 더 거룩하느냐! 로 싸워요.

왜냐하면! 거룩의 등급에 따라 권력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붙어 있으면 등급이 없어요.

예수에게 붙어 있는 성도는 자기가 거룩을 관리할 것이 없어요.

예수님이 알아서 관리를 해 주세요.

 

예수님이 관리하는 것을 성화주의자들처럼 나를 반듯하게 갈고 닦는 차원으로 보지 마세요.

예수님이 우리를 관리한다는 것은 우리를 반듯한 인간으로 개과천선 시켜준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용서한다는 의미에요.

 

우리는 죄를 이길 수가 없어요.

의지가 약해서도 아니고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아서도 아니에요.

우리 몸은 죄 아래 팔렸어요.

죄의 종이에요.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정욕과 탐심과 악함과 나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는 버린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들이 아니에요.

이건 마치 냄새 나는 똥 보따리와 같아요.

똥 냄새가 안 나게 하려고 보따리로 꼭꼭 감싸놓은 것과 같아요.

 

똥 냄새는 감춘다고 사라지지 않아요.

다만 냄새를 밀봉해 놓은 것뿐이에요.

밀봉해 놓았다고 해서 똥 냄새가 사라진게 아니에요.

풀어 놓으면 다시 똥냄새가 진동해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안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성경을 봅시다.

 

막 7:14-23절.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17.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한다고 더럽다고 한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행동에서 깨끗함을 찾고 있어요.

그래서 더러운 손으로 밥을 먹으면 부정한 죄인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일부러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시면서 진짜 부정하고 더러운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의 죄는 내부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지 외부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살인이라는 행동도 마음속에 미움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니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살인하지 아니한 자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살인을 하나 안하나 살인자에요.

안에 미움이 있는 한 언젠가는 살인 할 수밖에 없어요.

 

미움을 본능적인 것이라서 인간이 관리 할 수가 없어요.

그건 억제 하는 것이지 미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에요.

흔히 성화주의자들은 분내지 말고 미워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성화주의가 이단이라고 공격하면 벌떼같이 달려들어서 온갖 욕을 합니다.

 

왜 욕을 합니까?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고 틀렸다고 말하니 그 안에 공격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가 안에 악이 감추어져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숨어 있다가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이건 없앨 수가 없어요.

 

여러분! 자칭 성화하였다고 하는 목사를 성질을 돋우고 욕을 해 보세요.

그들이 자랑하는 성화가 불신앙이라고 해 보세요.

거룩한 척 하던 것은 온데 간데 없고 조폭들과 같은 성질머리가 터져 나와요.

 

우리 속에는 뱀이 앉아있어요.

언제 물지 몰라요.

목사들도 자기 말 들으면 축복하다가도 말을 안 들으면 저주가 쏟아져 나와요.

교인들도 동일해요.

자기에게 잘해주면 간이라도 빼 줄 것 같다가도 잘 안 해주면 온갖 욕을 해 대잖아요.

 

이런 상태를 제가 구정물 통이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구정물 통 속에 갖가지 음식물 쓰레기들이 들어 있잖아요.

그걸 작대기로 휘휘 저여 보세요.

눈에 보이지 않던 온갖 더러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잖아요.

 

성화한다고 설쳐 대는 놈들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 우리가 할 것이 없다고 하면 난리를 칩니다.

왜 우리의 정성을 무시하느냐! 라고 길길이 날 뜁니다.

자기 것이 부정당하면 가만있지 못해요.

 

어떤 목사는 목사가 보는 복음이 따로 있고, 교인들이 보는 복음이 따로 있다고 해요.

어떤 글들은 교인들이 보면 안 된다고 감추어 놓았어요.

왜 감추어 놓았냐고 하니까 교인들이 보면 큰일 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서는 주일도 없고, 성전도 없고, 십일조도 없다고 하니 말은 맞는데 이런 것을 교인들에게 그대로 가르치면 교회는 어떻게 되느냐 라고 해요.

정신머리가 예수님에게 가 있지 않고 교회에 가 있어요.

교회를 통해서 밥 빌어먹어야 하니 행여라도 교인들이 교회에 충성하지 못하게 하는 말이라면 감추겠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안 오고 십일조도 안하면 어찌 하느냐 에요.

 

그럼 목사 안하면 되잖아요.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목사 면허증을 따는데 얼마나 투자했는데!

목사가 되었으니 이젠 본전을 찾아야 하잖아요.

그러니 교회를 허무는 글이라면 꼭꼭 감추어야지요.

 

참 목사라고 한다면 교인들이 더 복음을 잘 알도록 해야 하잖아요.

그러나 실상은 교인들이 복음을 알기를 원치 않아요.

복음을 알면 목사 말을 안 듣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바라는 교인은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자이지 복음을 아는 자들이 아니에요.

교인이 복음을 알면 골치 아파요.

통제가 안 돼요.

그런 자는 정통교리에 어긋난다고 하여 교회에서 이단에 빠졌다고 내어 좇아야 해요.

그래야 다른 사람이 물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가 보는 글이 따로 있고 교인들이 보는 글을 따로 정해 놓는 것입니다.

이게 자칭 거룩하다고 하는 목사들 속에 숨어져 있어요.

 

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아요.

우리 안에는 온갖 죄악성들이 숨어 있어요.

이건 평상시에는 없는 듯 보여요.

 

그러나 자기에게 어떤 위기가 닥치면 그 속에 있는 온갖 악함들이 다 터져 나옵니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여 불을 토해 내듯이 분노와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악한 생각들이 쏟아져 나와요.

그런데 무슨 성화를 하고, 거룩을 하고, 온전해 져요.

그건 자기 이미지 관리하는 것이지 신앙이 아니에요.

 

신앙은 이미지 관리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를 갈고 닦아서 오늘 보다 내일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살면서 자기 안에 죄를 토해내는 거에요.

 

말씀 앞에서 야! 예전엔 이게 죄인 줄 몰랐는데! 지금 보니 죄네!

내 안에 이런 죄악이 있는 줄 몰랐네!

야! 내가 이런 악당일 줄이야!

난 죄 덩어리라는 것을 깨닫는 거에요.

 

바울의 고백처럼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거에요.

그래서 이런 죄인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알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이 감사로 남고 기쁨으로 남고 자랑으로 남아야 해요.

 

그러지 않고 난 이렇게 변했어!

난 이렇게 일을 많이 했어!

난 이렇게 성화 했어! 라고 하면 안 돼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얻은 생명이 날마다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하여야 해요.

예수님의 생명이 내 몸에서 나타나려면 난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산다는 고백이 나와야겠지요.

그럼 난 날마다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의 용서하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겠지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로서 나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해 주신 예수님을 자랑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2-13절.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찌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중요한 것을 하나 살펴보고 마칩시다.

 

우리는 누가 예수님 안에 있는 형제인줄을 몰라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다 예수 믿는다고 해요.

목사들에게 적용하면 다 십자가를 알고 복음을 전한다고 해요.

우린 서로 교회에 다니니 같은 형제 아니냐! 라고 해요.

 

그러나 주의 형제란 형제 되고 싶다고 해서 형제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형제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만들어 주세요.

형제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만들어 내요.

 

11절에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한다” 고 하지요.

 

우리가 거룩함을 입은 것은 예수님의 대신 죽어주심 때문이잖아요.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우리는 형제인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형제에요.

 

우리를 형제로 만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예수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된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피를 내어 놓아야 해요.

왜냐하면! 형제는 한 피를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보고서 아! 우린 한 편이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의 이름을 형제들에게 선포한다고 하고 교회 중에서 찬송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이란?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해 보면 형제와 형제 아닌 자로 구분이 되어요.

피가 같으면 형제이고, 피가 다르면 형제가 아니에요.

피가 같다는 말은 같은 의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서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과 한 형제인 사람은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게 된다는 고백들을 하겠지요.

인간에게선 의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알잖아요.

우린 오직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겠지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자랑하고 감사하며 삽시다! 라고 하면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생겨난 형제들은 아멘으로 화답을 해요.

 

그래도 성화하여야 하고, 거룩하여야 하고, 온전해야 한다고 하면 그는 형제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주의 이름을 던져 보면 누가 형제인지 아닌지 구분이 나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다 뭔가 보태야 된다고 하면 그는 가짜형제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생겨난 형제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만족하지 못하고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자기 행함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자기로부터 눈을 떼지 못해요.

그래도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나도 좀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도 의롭다고 인정해달라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살아난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으니 예수도 살고 자기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걸 아까 팔 다리가 혼자 돌아다닌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와 떨어져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끝까지 자기가 행한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어요.

말이 많다는 것은 죽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자기 부인이 안 돼요.

이는 육은 자기 존재를 근거로 활동을 하기 때문이에요.

 

육은 자기가 살아 있어요.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자기 치장하는 재미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쌓아가는 재미로 예수 믿는 것입니다.

마일리지 쌓듯이 쌓아야 행복해요.

 

자기 치장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은 미친 여자 널뛰듯이 종을 잡을 수가 없어요.

사람의 행함은 육신의 컨디션에 따라서 달라요.

컨디션이 좋으면 온유도 나오고 겸손도 나오고 참음도 나오는데 몸 아파 보세요.

짜증나고 화가 나요.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희노애락이 늘 자기감정에 따라서 변해요.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 받고 사는 성도는 불안함이 없어요.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 받고 사는 재미로 살아요.

자기 컨디션에 따라서 변하지도 않아요.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감사해요.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없다는 것처럼 기쁜 소식이 없어요.

저는 어린아이를 보면 제일 부러워요.

아이들은 근심 걱정이 없어요.

물론 그 아이 입장에선 불평불만이 있어요.

그러나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근심걱정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자아가 발달하면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하여서 많이 살아 있을수록 책임 질 인생이 많아져요.

어린아이 때에는 수치도 모르고 살아요.

자라가면서 점점 자기에 대하여 눈이 떠가고, 타인에 대하여 눈이 떠지면서 자기를 관리하고 치장하기 시작합니다.

 

자라가면서 스스로를 관리하여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요.

 

의식주도 신경써야하고,

외모도 신경써야하고,

타인의 눈도 신경써야하고,

온통 신경 쓸 일로 가득 차요.

 

사회생활이 힘든 이유는 타인의 눈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든 것입니다.

사람은 늙어가면서 점점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게 되어요.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린아이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늙은 사람에겐 수치가 없어요.

본능대로 살아요.

오줌이 마려우면 아무데서나 내 질러요.

 

법도 필요 없어요.

횡단보도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내가 지나가겠다는데!

차가 아무리 빵빵 거려도 씨발! 씨발 욕지거리 해 대면서 유유히 지나가요.

 

성화주의자들이 늘 피곤한 것은 자기가 책임져야할 인생이 너무도 많아요.

스스로도 관리하기 힘든데 타인의 시선도 의식하여야 하니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 우울증에 걸려요.

 

목사나 사모들이 우울증이 많이 걸린다는 것은 자기를 관리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관리하기도 힘든데 남의 시선까지 의식하고 살아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교인들을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겉으론 온화해야 하니 얼굴이 부처님 얼굴처럼 닮아 가는 것입니다.

마치 보톡스 맞은 얼굴이 되어서 감정이 없잖아요.

 

제 이야기를 좀 할게요.

전 과거 율법 아래서 성화론을 주장했어요.

율법 신앙은 성화주의가 될 수밖에 없어요.

 

복음을 모르니 늘 스스로를 관리하여야 하잖아요.

하나에서 열까지 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니 자연적으로 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 앞에선 항상 은혜 충만한 모습으로 있어야 해요.

목사가 화를 내거나 경망스러우면 덕이 되지 않으니 스스로를 절제하여야 해요.

 

처음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는 열정으로 신나고 재미있어 했어요.

그런데 몇 년 지나고 나면서 서서히 타성에 젖어서 흥미를 점점 잃게 되어요.

새벽기도가 그렇게 힘들었어요.

새벽잠이 많은 사람이라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다고 목사가 새벽기도 안하면 죄 짓는 것 같아서 의무적으로 했어요.

 

처음 교회 개척을 했을 땐 거의 교회에서 잤어요.

산 기도 갔다가 새벽에 오던가 아니면 강단에서 철야 기도하다가 자곤 했어요.

이것도 몇 년 하고 나니 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법적인 핑계거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금요일 철야 기도회를 하던 것을 저녁 기도회로 돌리고 토요일 새벽기도를 없앤 것입니다.

하루 새벽기도 안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러다가 월요일 새벽기도도 없앴어요.

주일날 수고하였다는 핑계로 없앤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처음하는 것이 어렵지 한번 물꼬가 터지면 쉬워요.

점차적으로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안 하는 날들이 더 많아지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급기야 새벽기도를 없앴습니다.

 

인간이란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늘 자신과 타협을 하면서 살아요.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여도 마치 물질을 초월한 사람처럼 해야지요.

하지만 마음속엔 오늘은 헌금이 얼마나 나올까 하는 마음이 있어요.

 

마치 늙으신 부모들이 자식들이 오면 손을 먼저 쳐다본다고 하듯이 개척 교회하는 목사도 교인들 헌금봉투에 눈이 갈 수 밖에 없어요.

누구는 언제 십일조를 하는지 다 계산을 하잖아요.

이를테면 첫째 주엔 이집사 십일조 하는 날이고,

둘째 주는 김집사 십일조 하는 날이고,

셋째 주는 최집사가 십일조 하는 날이라는 식으로 다 꿰고 있어요.

 

그런데 그 주일에 십일조를 하여야 하는데 안 하면 불안해지지요.

이 인간이 월급을 아직 안 탔나! 아니면 떼 먹었나!

십일조가 수금 되는 날까지 불안 불안해요.

 

겉으론 물질을 초월한 것 같지만 실상은 더 밝혀요.

그러잖아요.

교인들 손만 쳐다보고 사는데!

 

한번은 집사님이 백화점에서 코트를 80만원(약 15년 전이니 지금 화폐가치로 따지면 약 300만원) 주고 사 입었다고 다른 집사님들에게 자랑을 해요.

그러면서 어디에 놀러 갔다가 왔고,

어디 가서 무슨 음식을 먹었고,

자기 돈 쓴 것을 자랑을 해 댑니다.

 

헌금도 안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목사는 뚜껑이 열려요.

강단에서 설교를 위해서 묵상기도하다가도 그런 말을 들으면 울화가 치밀어요.

겉으론 화가 안 난 척 하지만 그게 어디 감추어집니까?

 

교인들이 그렇잖아요.

비싼 옷을 사 입을 돈은 있어도 헌금 할 돈은 없잖아요.

자기 쓸 돈은 있어도 헌금 할 돈은 없어요.

 

개척교회 목사가 제일 짜증 나는게 뭡니까?

헌금도 안 하면서 자기 할 것 다 하고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인간들 보면 콱 쥐어박고 싶어요.

말만 많고 일하지 않는 사람들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다른 교회로 갈까봐서 대 놓고 싫다는 내색을 할 수 없잖아요.

 

개척교회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이런 목사들의 약점을 다 아는 귀신들이에요.

천년 묵은 능구렁이들이 들어 앉아 있어요.

한마디로 목사를 갖고 놀고자 해요.

목사는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갈 수 밖에 없어요.

교회를 붙잡고 있으려면 교인들 비위를 맞추어 주어야 하니 어쩔 수 없어요.

속으론 분노가 가득하지만 겉으론 천사의 얼굴로 살아야 하니 속이 푹푹 썩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 땐 제가 예수를 안 믿고 교인들 관리하는 목회만 한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관리하여야 하니 얼마나 힘들고 지쳤겠어요.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어요.

목사 된 것을 후회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은혜를 받고 난 후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유가 되었어요.

 

지금은 교회적으로 보면 그전 상황보다 훨씬 더 어려워요.

그런데 애가 타지 않아요.

스트레스 받지 않아요.

교회적으로 나아진 것은 없는데도 그래요.

 

달라진 것이라곤 예전엔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서 목사로 살았고,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목사로 사는 것이에요.

예전엔 내가 살았고, 지금은 내가 죽었어요.

과거엔 내가 모두를 관리하고자 했고, 지금은 관리할 것이 없어요.

 

예수 안에서 목회를 하느냐!

예수 밖에서 목회를 하느냐! 차이에요.

지금은 예수 안에서 목회를 하니 거칠 것이 없어요.

 

지금은 과거에 비해 비록 육신적으로 힘이 들고 어려워도 예전처럼 열 받지 않아요.

복음이 주는 기쁨과 감사가 있어요.

행복해요.

예전에 맛보지 못한 행복이에요.

 

과거엔 마음이 지옥이었는데, 지금은 천국이에요.

십자가 안에 들어 온 것뿐인데 지옥과 천국이 바뀌어 버렸어요.

십자가 안은 천국이고,

십자가 밖은 지옥입니다.

그만큼 십자가 안과 밖은 하늘과 땅 만큼 완전히 달라요.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생겨난 자들입니다.

내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난 없는 자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있어요.

그러니 세상에서 조롱당하면 내가 당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당하는 것입니다.

욕을 먹어도 예수님이 먹어요.

핍박을 받아도 예수님이 받아요.

마귀가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공격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당하는 수모와 아픔들은 모두가 내가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뻐하세요.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에요.

예수 안에서 나에요.

 

예수님의 말씀으로 마쳐야겠네요.

예수님의 말씀 보다 더 위로가 되는 말씀이 어디 있겠어요.

 

요 15:18-19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다가 욕을 먹거들랑,

아! 내가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욕을 먹는구나! 생각하세요.

마귀가 나를 인정해 주는구나 생각하고 욕하는 그를 미워하지 마세요.

 

마귀가 그러지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넌 무슨 놈이야! 라고 어쭙잖게 예수쟁이 흉내 내다가 혼쭐이 난 스게아의 일곱 아들과 같지 않음에 감사하여야지요.

 

마귀가 귀신같이 예수님과 한 형제인지 아닌지 알아봅니다.

예수님과 한 형제라고 하면 가만두지 않고 괴롭힙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한 형제가 아니면 가만 내버려 둬요.

 

마귀가 거들떠보지 않는 그런 삶을 기뻐하지 말고,

마귀가 물고 늘어지더라도 예수님의 참 형제이기 때문에 이런 아픔이 있구나! 를 생각하고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예수님과 한 형제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맺어진 형제이므로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살게 된다고 하여도 낙심하거나 시험에 들게 마옵소서.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이 있을 때 예수님과 한 형제임으로 당하는 아픔이라 여기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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