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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성경강해)26강. 예수 안에서 철거될 만물 (히 1:10-14)

by coroa 2022. 6. 1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6강. 예수 안에서 철거될 만물 (히 1:10-14)

-.정낙원 목사

 

히 1:10-14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 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지난 시간 성경을 보는 안목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보아야 정확하게 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목사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깁니다.

타 교회 교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우리 목사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던데요.

우리 목사님은 성경은 아무나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설교를 하려면 정통 신학교를 나와서 전통적인 성경 해석법을 알아야 할 수가 있다고 말하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외국 유학이라도 갖다 오고 박사 학위라도 받은 목사의 말은 무조건 신뢰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신학교가 성경해석을 하는 자격증이라도 발급하는 곳인 줄 알고 있어서 그래요.

교인들은 이게 얼마나 무지에서 나온 말인 줄을 몰라요.

 

이런 교인들의 논리라면 성령의 감동이 필요가 없어요.

그냥 신학교에서 배운 학문적 지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되니까요.

신학교에서 배워서 성경을 해석하다가 망한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에요.

이걸 간과하면 안 돼요.

 

성경 해석은 신학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들이 궁구하면 깨달을 수 있는 학문이 아니에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묵시에 속한 이을 역사 속에서 사건화 하여서 일한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계시의 책입니다.

 

바울의 증거를 들어봅시다.

 

고전 2:1-9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만 증거하겠다고 합니다.

십자가 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죄인이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인간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의 지혜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려고 하다가 빗어낸 결과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지혜는 인간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의로워지는 것이지 누구를 믿어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보면 누굴 믿어서 의로워진다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 입장에서는 예수를 믿어서 의롭게 된다는 십자가 도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자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예수를 믿어서 의롭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어야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전도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일부러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도로 구원을 하시고자 비밀로 해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난 자들이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게만 예수를 믿어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걸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란? 하나님께서 열어서 보여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담겨진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학문으로 접근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계시로만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틀에 매여서 살아가지 않잖아요.

인생살이에는 정해진 틀이 없어요.

이럴 때는 울고 저럴 때는 웃고 하는 공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울음과 웃음을 공식으로 만들어서 행하지 않습니다.

슬퍼서만 우는 것도 아니고 기뻐서 웃는 것도 아닙니다.

어떨 때는 너무 기뻐서 울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을 때도 있습니다.

 

어떨 땐 예수 때문에 울기도 하고, 어떨 땐 예수 때문에 웃기도 합니다.

예수님 안에 웃음도 있고 울음도 있습니다.

예수 믿음 안에는 희노애락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워서 아는 분이 아닙니다.

그냥 만나면 자연히 알게 됩니다.

만남이 이루어진 사람은 남에게 물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한 만남에 대한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남은 사건입니다.

만남을 학문으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경험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만났습니다.

실제 경험된 사건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만남은 실제이고 사건이고 경험입니다.

오늘 만난 사람들은 서로 간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흔히 예수님 이야기를 만남의 사건 이야기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잘하는 말이 남이 만난 예수 이야기를 백번 들어도 내가 만난 예수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는가 하면 성령이 임하면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요 14:20절.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고 하지요.

거한다는 말은 함께 산다는 말입니다.

함께 살면 자연히 알아지잖아요.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을 학문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사건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관념이 아니에요.

삶이고 실제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자 예수님이 실제로 제자들 속에서 사건을 일으켰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실제로 만난 예수를 삶으로 살아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여서 산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은 사람은 신앙을 학문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누가 가르쳐준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배운 예수는 관념이지 실제가 아닙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이 만난 예수이지 내가 만난 예수가 아니에요.

남이 만난 예수는 아무리 들어도 타인이지 나와 한 몸일 수가 없어요.

 

경험되지 않으면 예수님과 남이에요.

 

예수님과 남남이면 천국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 흘려주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 분이 죽고 사흘 만에 부활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지만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이 타자가 아니라 나와 한 몸이 되어 지고 비로소 예수님의 모든 것이 나와 연관이 있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나의 사건으로 실제화 시켜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하면 됩니다.

자기가 만들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어요.

본 그대로 들은 그대로 말하면 되어요.

 

성령이 임하면 성경 속의 예수의 이야기나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자신의 이야기로 들려져요.

그러면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자신의 구원 이야기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나의 구원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 때 여러분들은 어떤 반응이 생기던가요.

남의 나라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그 쓰나미 현장에 여러분의 아들이나 부모가 있었다고 하면 어떻겠어요.

모든 관심이 그리고 가 있겠지요.

다른 사람은 무관심해도 여러분은 무관심 할 수가 없어지겠지요.

왜 그런가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가족 내 형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야기도 이와 같아요.

예수님과 한 몸인 사람은 성경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듣지 않습니다.

내 이야기로 들려집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들이 이 세상에서 죽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아들이 죽었습니다.

자식 잃은 부모는 온통 아들 생각 뿐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온통 아들 생각뿐입니다.

하나님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내 아들이 죽었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묻고 있습니다.

너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은 의미를 아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 놓고 교인들에게 묻습니다.

성도들아 내 아들이 죽었거든!

내가 아들을 세상에 보냈더니 인간들이 죽여 버렸어!

그런데 사람들은 다 자기 볼일 때문에 관심조차 두지 않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더 급해요.

하나님의 관심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의 관심사뿐이에요.

우리는 도리어 하나님! 우리 아이가 내일 시험을 치는데 점수 좀 잘나오게 해 주세요.

가게를 오픈 했는데 장사가 잘 되게 해 주세요.

내가 병들었는데 병 좀 고쳐 주세요.

우리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교회 부흥을 좀 시켜주세요.

우리 신랑 진급 좀 시켜 주세요.

이러고 있어요.

 

이걸 어찌하여야 합니까?

남에 일처럼 들립니까?

지금 우리가 그러고 있어요.

얘들아! 정낙원 목사가 지금 내 아들이 죽은 이야기 하고 있거든!

그러니 가서 좀 들어봐라!

블로그에도 써 놓았거든!

그래도 반응이 싸늘해요.

 

하나님! 전 지금 피곤해서 자야 하거든요.

전 손님 만나러 가야 하거든요.

전 지금 스포츠 중계방송 봐야 하거든요.

전 동호회 모임이 있어 나가 봐야하거든요.

전 지금 피부 트러블이 생겨서 마사지 받으러 가야하거든요.

오늘 계모임이 있어서 거기 가야 하거든요.

 

예수님께서 천국을 왕의 아들에 혼인 잔치 비유를 하실 때 그랬잖아요.

사람들을 초청을 하니 하나같이 나는 밭을 샀으니 못 가겠고,

나는 소를 샀으니 길들여야겠으니 못 가겠고.

나는 결혼식 해서 신혼여행을 가야하기 때문에 못 가겠고,

이래서 못가고, 저래서 못 간다고 하지요.

 

누구도 왕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요.

왕의 혜택을 입고 살면서도 정작 왕의 일에는 무관심 한 것입니다.

자기 일이 왕의 일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동안 말로는 왕을 존경한다고 하고 사랑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전부 거짓말로 드러난 것입니다.

왕은 아들의 혼인 잔치를 통해서 백성들이 왕을 우습게 여긴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인간들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들 내 아들에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데 라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인잔치에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시간 나면 하는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내 볼 일 다 보고 난 후에 시간이 나면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볼 일을 제쳐놓고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울 때 같이 울고 하나님이 웃을 때 같이 웃으며 부대끼면서 살아가야 하는 삶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살아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씹다가 단물이 쏙 빠지고 나면 뱉어 버리는 껌이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이 믿는 예수가 그래요.

예수 믿는 것을 씹다가 단물 빠지면 뱉어 버리는 껌처럼 믿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도 필요하면 나가고 필요치 않으면 안 나와요.

아무리 심심해도 TV는 보아도 성경은 안보잖아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전부가 자기가 만난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힘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난 예수가 없으면 무기력해요.

힘을 쓰지 못해요.

예수가 사실이 아니고 관념이기 때문이에요.

예수가 관념이면 아무리 마음으로 하고 싶어도 마음이 몸을 이기지 못해요.

 

그런데 말이죠.

분명하게 예수님과 만난을 가진 사람은 마음이 몸을 이겨요.

육신이 피곤하고 세상 일이 있어도 복음을 우선 적으로 생각하고 살아요.

이는 예수님이 그 속에서 살아서 끌고 다니기 때문이에요.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고 복음 듣기를 회피하는 사람은 그 속에 예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가 없기 때문에 육신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은 예수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학문이 아니고 피 흘린 사건입니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면 누군가가 죽였을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죽었습니까?

지난 시간에 살펴 본대로 맏아들 되기 위해서 죽었다고 했지요.

다른 말로 형제들을 낳기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낳아진 자들은 예수를 경험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오셔서 경험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그러셨지요.

성령이 오면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고 했지요.

이는 분명한 만남의 증거를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무인도에 홀로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성경이 한권이 뚝 떨어졌다고 생각합시다.

이 사람은 성경 보는 법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성경을 어떻게 읽겠습니까?

자기 생각으로 읽겠지요.

그런데 만약 성령께서 그 사람을 감동케 하였다고 합시다.

성령께서 성경을 당연히 예수님 이야기로 보게 하겠지요.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 이야기를 하겠지요.

성령께서 깨닫게 해 준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사람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성경을 보는 해석법을 가지고 있어요.

신학교에서 배운 해석법으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그 사람이 신학교에서 배웠다고 하는 그 해석법을 따르겠습니까?

안 따르겠지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사건이라고 했지요.

사건은 자신이 경험된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하였으면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겠지요.

 

갈릴레이가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다가 이단이라고 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가 죽어 가면서 한 말이 있지요.

너희들이 아니라고 해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했잖아요.

내가 죽어도 지구는 돈다는 것은 사건이고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인다고 해서 지구가 돈다는 사실이 감추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맞아요.

지구가 도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감출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아들을 보낸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수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든 믿지 않든 하나님께서 이 사건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해 나가십니다.

사건은 인간이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본질은 변하지 않아요.

세월이 가도 변할 수가 없어요.

 

지난시간 하나님께서 맏아들을 만들기 위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셨다고 했지요.

예수님과 같은 형제는 십자가에서 생겨난다고 했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생겨난 형제라면 당연히 십자가의 사건을 소유하고 있겠지요.

 

누가 당신은 어떻게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습니까? 라고 물으면 주저함 없이,

예!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태어났습니다!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에! ~ 잘 모르겠는데 목사님에게 한 번 물어 볼게요 라고 합니다.

남에게 물어 본다는 것은 자기가 경험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사건의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선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을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요 12: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고전 15: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한 알의 밀알처럼 십자가에 죽이신 것은 많은 아들들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많은 아들들을 얻게 하여서 예수님을 맏아들로 만들었습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게 하셔서 이제 잠자는 자들을 깨우실 것입니다.

깨운다는 것은 살려 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났으니 이제 그에게 붙은 형제들도 줄줄이 다 살아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아난 형제들을 데리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를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영광에 들어갈 형제들을 만들어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만들어진 형제라고 한다면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되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목사들의 성경 해석은 십인십색입니다.

전부 다른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는 교회 부흥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고.

어떤 목사는 인류 평화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고,

어떤 목사는 문화 사명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고,

어떤 목사는 종교 통합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고,

어떤 목사는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고,

어떤 목사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고,

어떤 목사는 빈곤 퇴치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좇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설교를 하느냐 하면 전부 자기가 배운 신학을 토대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교단마다 성경해석이 다르고, 신학교마다 성경해석이 달라요.

그래서 각각 신학교 출신 목사들마다 각자의 신학을 바탕으로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동일한 본문을 가지고도 목사들마다 전혀 다른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한 성령을 마시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한 성령을 마셨으면 한 목소리가 나와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12 제자들이 한 목소리를 낸 것과 같아야 해요.

12 제자들은 모두가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한 목소리는 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살아생전에 직접 만난 적이 없어요.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12 사도들과 똑 같은 말을 하였어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만 증거하였어요.

그건 제자들과 사도 바울이 동일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고 오는 세대에도 동일해요.

12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이나, 지금 우리에게 임한 성령이나 동일해요.

그럼 사도 바울이 받은 성령을 받은 성도라고 한다면 사도 바울과 같은 말을 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성경 해석을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성경은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면 안 돼요.

오로지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만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만 증거가 되어야 해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조상의 유전으로 가르치니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고 했지요.

이는 곧 인간들에게 배워서 성경을 해석하였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가르쳐 준 대로 성경을 보았기 때문에 조상들과 같이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하지만 조상에게 배운 대로 섬긴 것이 하나님 뜻에 맞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터인데 틀렸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건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 되면 문제 삼을 것이 없어요.

다른 것이 증거가 되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지요.

똑 같은 꿈을 가지고 달리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배우게 되면 다 달라요.

똑 같은 것을 보고 똑 같은 말을 들어도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해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 사이에도 많은 교파들이 형성 되어 있었어요.

모두가 한 민족이에요.

한 율법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교파마다 성경 해석을 다르게 하였어요.

당연히 신앙생활도 달랐어요.

이게 모두가 조상들로부터 배워온 신학이라는 틀 때문에 그래요.

 

좀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신학을 버리세요.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 그 신학을 바탕으로 성경을 보게 되요.

신학에 매여 있는 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어요.

 

칼 바르트가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자기 서제에서 모든 책들을 다 버렸다고 합니다.

성경 한 권만 달랑 두었다고 해요.

이건 뭐냐 하면 다른 소리를 듣지 않고 오직 성경이 말하는 소리만 듣겠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신학이라는 것은 신학자가 깨달을 것을 학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잖아요.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 생각이에요.

참고는 할 수 있지만 절대성은 없어요.

 

어떤 목사들은 자기 설교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을 열거합니다.

이건 바보입니다.

신학자가 설교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하세요.

왜냐하면! 성령님이 성경을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는 대번에 분별을 해요.

하나님의 소리인지 인간의 소리인지 분별을 합니다.

자기 안에 성령이 계신 성도는 절대로 속지 않아요.

 

신학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신학이란? 글자 그대로 신에 대한 학문입니다.

인간들이 신을 연구하고 깨달은 것을 말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신에 대하여 논한다?

이건 어불성설입니다.

 

아니 피조물이 창조주를 논하면 어떻게 논하겠어요.

피조물의 지혜로 밖에 논할 수가 없어요.

죄인의 지혜로 하나님을 안다고 하여도 죄가 주는 정보로 깨달은 것입니다.

죄가 주는 정보로 깨달은 것이니까 죄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는 피조물 밖에 계세요.

피조물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스스로가 계시하여 주시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신학으로 설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석을 보아도 연대기나 그 시대상을 파악하는 정도로만 참고해요.

과거 율법 아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경험하지 못하였을 땐 주석을 가지고 설교를 했어요.

예수를 만난 경험이 없으니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식으로 남의 말을 인용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십자가 피를 경험하고 난 후로는 제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써 가면서 좋은 말을 조리 있게 하진 못해도 생명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생명으로 흐르는지를 말해요.

 

이제는 설교를 하는 제가 은혜를 받아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은혜를 받고, 설교를 하면서 은혜를 받아요.

지금도 이런 설교를 쓰면서 제가 은혜를 받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나가며 꼴을 얻는다고 하셨지요.

 

요 10: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설교를 준비하면서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설교를 하면서 은혜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이 깨달은 복음을 증거해 보세요.

이상하게 은혜가 임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라고 하면 목사님 전 재주가 없어서 못하겠어요! 라고 합니다.

복음은 재주나 지식으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난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케리그마’ 라고 하는데 이는 선포한다는 뜻입니다.

선포는 설득이나 상대방의 동의와 상관없이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하세요.

그러면 여러분과 동일한 성령을 마신 사람이라면 아멘! 이라고 할 것입니다.

 

경험을 각색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깨달은 그대로 전하세요.

그것 이상 훌륭한 전도가 없어요.

 

성령이 증거케 하는 복음은 다 동일하게 되어 있어요.

한 성령을 마셨으면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전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로는 모든 성경을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이게 사도 바울이 성경을 본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을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어요.

 

갈 1:11-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보세요.

바울은 사람들에게 배운 신학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계시로 깨달은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사도 바울에겐 신학이라는 게 없어요.

왜냐하면!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유대교 신학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자기가 율법 아래 있으면서 조상대대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정통 신학이라고 배운게 고작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자고 신학을 배웠는데 그 신학으로 하나님을 죽여 버렸어요.

그러니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신학을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지요.

 

알다시피 바울은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신학이 최고라고 했어요.

물론 사두개인들도 자기들 신학이 최고라고 했지요.

서로가 최고라고 했어요.

마치 이 시대 교파마다 자기들 신학이 제일이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그 유명하다던 유대인의 신학이 예수님을 죽였어요.

예수를 죽이는 데는 바리새인뿐만 아니고 사두개인도 열심당도 쿰란공동체도 엣세나파도 다 동참했어요.

모두가 그들의 신학으로 예수는 이단이라고 판단해서 죽이는데 동참했어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신학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버려야 하지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모든 것을 배설물로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배설물이란? 다시 보기 싫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시간 이후에 12제자들도 만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아리비아 광야에서 삼년동안 계시를 받았어요.

성령의 계시를 받고난 후로는 모든 성경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재해석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율법을 전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재해석을 하였어요.

바울의 이런 해석은 유대교 신학으로는 이단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과 부딪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바울이 증거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어요.

오죽 하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염병이라고 했겠어요.

 

이것은 마치 이 시대 창세전 언약이라는 십자가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몰아붙이는 것과 같아요.

이단이라고 하여도 십자가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성경을 해석하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지금 살펴보는 히브리서도 구약이야기를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다 풀어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구약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풀어내니 이상하게도 모두가 고구마 넝쿨을 하나 잡아끄니 그 속에 있는 것들이 전부 딸려 나오듯이 다 풀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는 증거하지 않겠다고 공포한 것입니다.

 

고전 2: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 6: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하지요.

내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지요.

 

이건 오직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신 것만을 이야기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성령으로 깨달은 성경이야기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로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 중심으로만 성경을 해석해요.

 

저는 복음을 깨닫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전 그 때를 예수님께서 저에게 일으킨 다메섹 사건이라고 해요.

전 그 때 율법 신앙에 푹 절어 있던 꼴통 율법주의자였어요.

철저한 성화주의자였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어요.,

그리곤 일명 재림신앙으로 무장한다고 종말론에 푹 빠져 있던 때였어요.

좋다는 세미나란 세미나는 다 참석을 하고 유명하다는 목사님들 설교는 다 들었어요.

 

당시에는 TV도 보지 않고 살았어요.

눈만 뜨면 성경보고, 기도하고, 밤이면 산기도 다니고 했어요.

책을 손에 놓지 않고 살았어요.

길에 다니면서도 책을 보았어요.

기독교 서점을 하시는 장로님이 자기 서점에서 책을 가장 많이 구입하는 목사라고 했었으니까요.

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눈이 떠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모든 성경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십자가 중심으로 성경이 보이니까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사상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내가 가짜라는 것이 보여진 것입니다.

세상에 내가 바로 거짓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내가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한 예루살렘에서 쑥물을 먹인 그 거짓 선지자였다는 것이 보여진 것입니다.

 

그때는 기쁨과 슬픔의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몰라요.

복음을 만난 기쁨의 눈물과 지금까지 거짓 선지자 노릇한 것에 대한 비통함의 눈물을 흘렸어요.

물론 지금도 과거의 율법 아래서 배워왔던 신학이라는 쓴 뿌리들이 잔챙이처럼 남아서 잔 물결을 일으킬 때가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복음의 풍성함을 더 드러내기 위하여 예화로 인용하는 수준의 미미한 것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교회 부흥에 전혀 도움이 안돼요.

이건 세상적인 유익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도리어 욕만 먹어요.

그래도 좌고우면(左顧右眄)치 않고 하는 것은 이게 진리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주께 받은 은혜가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은 지가 50년이 넘었어요.

그리고 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에요.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라고 하면 당연히 교회 부흥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나이는 들고 일정한 수입은 없고 그러면 당연히 교회에서 나오는 사례비로 살아야 하잖아요.

그러려면 교회에 성도가 많아야 할 것 아닙니까?

교회에 성도가 많아지게 하려면 교인들 듣기 좋은 말을 하여야 해요.

그러면 십자가 피를 전하면 안 되고 세상 이야기를 하고 세상 복을 말해야 해요.

교회에 충성하라고 가르쳐야 하고 열심을 내라고 가르쳐야 해요.

그래야 교회가 운영이 되요.

 

그러나 이건 교회의 본질이 아니에요.

교회는 목사가 살아갈 생계수단을 마련해 주는 곳이 아니에요.

교회는 단 한명의 성도가 있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여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지 않더라도 십자가 피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육신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도움이 된 것은 단 하나도 없어요.

당장 먹고 살아가야하는 것까지 다 잃어버렸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어디 운전할 일자리가 없나 하고 교차로를 뒤적여야 해요.

 

교단도 잃었고,

교인들도 잃었고,

친구들도 잃었고,

형제들도 잃었어요.

 

십자가 중심의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다 떠나가요.

수많은 친구들과 헤어졌어요.

호형호제(呼兄呼弟) 하면서 교제하던 목사들과도 다 헤어졌어요.

그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비웃음을 당해요.

이단소리를 들어요.

 

십자가 피를 알고 나서 노회에 가면 항상 다퉈요.

한번은 노회를 마치고 목사님 여섯 명이서 목욕탕에 갔어요.

거기서 논쟁이 붙었어요.

저 때문이지요.

노회에서 다투던 것을 목욕탕까지 끌고 온 것입니다.

 

저 혼자 성경은 십자가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라고 하고 다섯 명의 목사는 성경 속에는 다양한 것이 있다.

축복도 있고, 고난도 있다.

병 고침도 있고, 은사도 있다.

그러니 나 처럼 너무 예수님 십자가 중심으로만 보지 말아라!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십자가에만 머물러 있느냐!

이젠 십자가 너머 축복을 보아야지!

 

이들이 말하는 축복이란? 세성에서 복 받고 잘 사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세상 복도 받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 이용해서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은 끝이 안 나요.

 

그래서 더 틀어지고 헤어졌어요.

서로 영(靈)이 다른데 합일점이 없지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인데 어찌 함께 할 수가 있겠어요.

이젠 그들과 소식조차 하지 않아요.

 

이 사람들은 다 인간적으로 호형호제 하던 사이였어요.

다 제가 종말론 세미나를 인도 할 때 함께 공부하던 목사님들이에요.

어떤 교회엔 헌신예배나 부흥회도 인도하고 그랬어요.

 

십자가를 몰랐을 때 전혀 교제하는데 불편함을 못 느꼈어요.

그런데 십자가를 알고 난 후로는 서로 복음이 안 맞으니 원수가 되고 말았어요.

그래서 교단도 노회도 탈퇴하고 교제를 끊고 만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친구나 형제들이나 가족들로부터도 이단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마디로 내 육신적인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렸어요.

복음을 떠나서라면 이런 짓을 하지 않아요.

해서도 안 돼요.

 

수많은 비아냥거림과 불이익을 당하여 가면서도 이 십자가 피만 증거하여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영생을 얻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인생의 가치보다 더 귀하기 때문이에요.

주께서 제게 주신 은혜가 내 인생보다, 내 목회보다, 내 가족보다 더 크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제가 십자가 피만 증거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가면서도 이 십자가 피를 증거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이외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제 자식보다도 제 아내보다도 귀해요.

만약에 제 아내나 자식들이 십자가 피를 전한다는 이유로 좇아낸다면 쫓겨 날 수밖에 없어요.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들은 건방지다고 할지 모르지만 전 솔직히 죽는 사람이 부러워요.

빨리 죽었으면 해요.

지난번 집사님 누님의 장례를 치르면서 내가 여기에 들어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편안하게 잠자는 모습을 보면서 참 부럽더라고요.

 

이건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에요.

사도 바울이 보았던 그 삼층천을 믿음으로 보았기 때문이에요.

바울이 가 있는 삼층천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은 철거할 대상으로 보이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세상은 다 멸망 할 것이라고 합니다.

 

히 1:10-12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이 세상은 철거할 세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철거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옷과 같이 낡아지고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철거 할 것을 왜 만들었을까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이 달성 되면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마치 아파트 모델 하우스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델 하우스는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잠깐 동안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실제 아파트가 다 지어지면 모델 하우스는 철거를 합니다.

 

이 세상을 철거 한다는 말은 실상이 왔다는 말이 되지요.

이 세상을 가지고 뭔가를 보여주고자 하였는데 이제 그 보여주고자 하는 실상이 왔기 때문에 이 세상을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지요.

창조라는 말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물입니다.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창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아들이 오면 이 세상은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이제 아들이 왔으니 이 세상은 철거를 당하게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가지고 말해주고자 하였던 실상은 바로 그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여주려고 세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만물은 아들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만물 속에는 우리 인간들도 포함 되어 있어요.

 

아주 기분 나쁘지요.

인간은 뭐냐?

그럼 우린 시다바리란 말입니까?

항의하고 싶지요.

 

왜 항의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까?

나라는 존재가 해체되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게 무시당하는 거잖아요.

인간은 무슨 일을 하여도 중심에 서 있고자 하지 잊혀지는 것은 싫어해요.

 

그런데 어쩝니까?

하나님은 아들이 왔으니 이제 사라져 줄래!

이제 꺼져 줄래!

넌 이제 필요가 없어! 라고 합니다.

사용가치가 다 끝났다고 해체하라고 합니다.

 

정상적이라고 한다면 나는 원래부터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된 자이니 이제 예수님이 오셨으니 난 이제 사라져도 괜찮아! 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왜 내가 사라져야 한단 말인가? 라고 데모를 합니다.

그래서 적반하장으로 자기가 살고자 예수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귀신들이 예수님이 출현하자 왜 왔습니까?

아직 우리가 사라질 때가 아닌데 왜 왔습니까? 라고 항의하듯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지금 교화와 교인들이 하는 작태들입니다.

결국 귀신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교회와 성도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해요.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고 나를 구원해 주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 만물은 철거가 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골 1:15-18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님을 일컬어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하지요.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말은 피조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인데 보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있어도 하나님입니다.

 

16절에서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하였다고 합니다.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라고 하면서 창조 이유를 예수님을 위해서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고 합니다.

 

그 안에 섰다는 것은 그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없으면 만물도 없다는 말입니다.

만물은 예수님이 있어야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은 그를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 만물의 으뜸이 되시려고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으뜸이란? 머리란 말입니다.

으뜸을 지난 시간 살펴본 대로라면 맏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께선 이 세상을 예수님 중심으로 다스려 가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만물을 한번 살펴봅시다.

 

우리는 아들이 아니었다면 창조 되지 않았어요.

우리는 아들이 없었다면 모두가 없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위해서 만물을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보니 전부가 예수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울은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이렇게 보지 않았어요.

율법 아래선 유대인 중심으로 보았어요.

그래서 틀린 것이었어요.

 

유대인은 예수님을 보여 주기 위해서 존재하던 자들이잖아요.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 하여야 할 유대인들이잖아요.

그러나 유대인들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겼어요.

그러니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이 시대 교회들도 유대인들과 같은 행사머리를 하고 있어요.

그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교회가 있어야 하는데,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어요.

교회가 아니고 마귀 집단인 것입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하여야 하는데 실상은 자기를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나는 사라져도 됩니다! 라고 하여야 하는데, 내가 살아남아야겠으니 예수님은 죽으세요! 라고 하고 있어요.

주객이 완전히 뒤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없어도 돼! 라고 하면 사는 게 어렵지가 않아요.

반대로 난 살아남아야 돼! 라고 하면 만사가 짜증이 나고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기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자기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면 교회 오는 것도 힘들지 않아요.

교회를 섬기는 것도 기뻐요.

충성하면서도 기쁘고 헌금하면서도 기쁘고 성도를 섬기면서도 기뻐져요.

이런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해요.

기쁨과 감사로 하지 않는 것은 일하는 것이지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스스로 이 말씀 앞에서 돌아보세요.

 

지금까지 제가 주장해온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맞는다고 인정을 한다면 회개가 나와야 해요.

그래 맞아!

내가 지금까지 잘못된 성경 해석을 하였구나!

이제라도 알게 된 것만도 하나님의 은혜구나! 라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앞으로 남은 삶이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되려면 난 없는 자라 생각하고 사세요.

우린 원래 없던 자들이었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위해서 만든 거야!

그러면 인생이 가벼워져요.

 

이걸 우리의 구원으로 보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한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구원한 것이구나!

예수님을 위해서 나를 살려두고 있구나!

이젠 내 중심으로 살지 말고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겠구나! 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범사가 감사가 됩니다.

 

구원을 받고도 감사가 안 된다면 그 구원을 의심해 보아야 해요.

가짜일 확률이 높아요.

예수님 십자가 안에 들어와 있지도 않으면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어떻게 맏아들을 만든다고 했습니까?

한 알의 밀알처럼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만든다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에게 속한 하나님의 아들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만들어지는 거지요.

이렇게 되면 자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로 생겨난 성도는 자기라는 존재를 없는 자로 보겠지요.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는지 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갈 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지요.

죽었다고 하지요.

난 없는 자란 말입니다.

 

그런데 난 버젓이 살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사는 나” 라고 합니다.

이젠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를 보여주기 위해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앞에 죽음이 기다려도 개의치 않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죽는 것이라면 주저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바울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욕을 먹더라도 그 길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 명예나 자존심보다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하자 말자 곧 바로 천국으로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처럼 세상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악하다고 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듯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생겨난 성도들도 당연히 예수님처럼 세상을 악하다고 증거하다가 미움을 받고 죽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미리 하신 말씀을 들어보세요.

 

요 15:18-19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었기 때문에 미움을 당한다고 하지요.

마귀가 예수에게 택함을 입은 자들을 가만 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복음으로 인하여 미움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도를 미워하는 것은 마귀에요.

마귀는 누가 예수님에게 속한 성도인지 귀신처럼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전하면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이단이라고 하면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영적 싸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기 피 하나만을 사수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증거되지 못하도록 하고,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난 성도들은 십자가 피만 증거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아들에게 있다고 했지요.

만물은 아들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지난 시간 맏아들 만드는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맏아들로 만들기 위해서 세상에 보냈어요.

어떻게 만든다고 했습니까?

자기 목숨을 버림으로서 만든다고 했지요.

한 알의 밀알처럼 죽여서 다른 밀알들을 생산해 내는 식으로 한다고 했지요.

 

왜 십자가에서 아들들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죄를 없애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으면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자기를 소유화하고 확장하고자 하기 때문에 죄 아래 있는 자를 십자가로 죽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를 해체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날마다 해체시키는 것입니다.

난 없어도 되는 자구나!

난 나를 위한 자가 아니라 아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구나 를 알아야 해요.

 

예수를 만난 사람마다 해체가 되었어요.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해체가 되었어요.

개인의 인생에 종말을 맞이하였어요.

이걸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저승사자입니다.

우리를 죽이는 저승사자에요.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죽이려고 다가오는데 우리는 살자고 다가가고 있어요.

참으로 웃기지요.

 

바다 고기 중에 우럭이라는 고기가 있어요.

저는 어려서 바닷가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여름방학이 되면 바다에 가서 고기도 잡고 전복도 따고 성게도 따서 팔았어요.

작살을 가지고 물속에 자맥질을 하여 고기를 잡았어요.

 

우럭이라는 놈이 얼마나 멍청한가 하면 작살을 갖다가 되면 입을 쩍 벌려요.

다른 고기들은 도망을 가는데 이 놈은 작살이 먹을 것인 줄 알고 입을 벌린단 말입니다.

날 잡아 잡수세요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백발백중이지요.

그때 우럭을 참 많이 잡았어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이 꼭 우럭과 같아요.

예수님은 저승사자가 되어서 십자가에 끌고 가서 죽이려고 하는데,

인간들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입을 크게 벌리고 떡을 달라고 하고 있어요.

 

땅에 장막이 무너져야 하는데 견고하게 해 달라고 해요.

세상에 대한 미련을 거두어 가 달라고 해야 하는데 더 집착하게 하고 있어요.

육신의 소욕들을 거두어 가 달라고 하여야 하는데 채워 달라고 하고 있어요.

 

목사들은 교인들을 땅을 떠나지 못하도록 떡이라는 쇠사슬로 묶고 있어요.

육신의 소욕으로 꽁꽁 묶고 있어요.

그러니 세상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십자가는 우리 소원을 죽이는 곳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무덤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옛 사람을 죽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와서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여야 해요.

 

성도는 땅에 기운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늘에 기운으로 사는 자입니다.

하늘에 기운은 십자가 너머에서 옵니다.

십자가 너머에는 소유가 없어요.

모두 버림만 있어요.

 

우리는 눈만 뜨면 소유하려고 해요.

우리 인생을 확장 하려고 해요.

그럼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차압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을 사라질 풀이라고 합니다.

 

사 40:6-9절.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이사야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외칩니다.

뭐라고 외치는가요?

모든 육체는 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풀을 마르게 하는 것은 여호와의 기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풀을 마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풀을 마르게 한다는 것은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고 있어요.

마치 야곱을 망하게 하려고 얍복 강에서 기다리듯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이 시대 목사들은 하나님과 정 반대로 일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교회로 불러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망하는 길로 인도하는데, 목사들은 십자가를 이용해서 흥하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망하게 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영영히 서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만을 남기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으뜸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고 우리 안에 예수님만 남기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를 질그릇 속에 보화를 담아 놓았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를 남기기 위해서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살면 예수는 죽고, 내가 죽으면 예수가 살아요.

 

이렇게 망한다는 소리를 전하는 것을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소식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으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시대 교회와 목사들은 십자가를 이용해서 살라고 하지요.

 

여러분 예수 믿고 잘 사세요 라는 말은 저주에요.

목사들이 땅에서 잘되라고 하는 것은 저주의 소리란 말입니다.

도리어 땅에서 망하여야 합니다 라는 말이 축복의 소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듣지 않지요.

 

망한다는 것은 거지가 되라는 말이 아니고 땅에 소망을 두지 않게 한단 말입니다.

부자라도 땅에 소망을 두고 살지 않으면 망한 자입니다.

물질이 많고 적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야할 곳을 알고 살란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많은 교인들은 꺼꾸러 듣고 있어요.

땅에서 잘되는 저주의 소리를 축복으로 듣고,

땅에서 망하는 것을 저주로 듣고 있습니다.

 

땅에 것을 준다고 하는 교회는 인산인해를 이루어요.

그런데 하늘에 것을 준다고 하는 교회는 텅텅 비어 있어요.

 

땅을 떠나라고 하면 도리어 화를 냅니다.

하나님께선 외치라고 하는 대로 외치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망해야 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고 하면 성질을 냅니다.

 

하나님께서 풀을 마르고 꽃은 시든다는 것을 예루살렘에 말하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에다가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 다 망하여야 할 자들입니다 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에 속한 자들이 반발을 할 것입니다.

길길이 날뛰면서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더라도 너희들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가 없어요.

가족서부터 부모형제 친구들까지 이단이라고 몰아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 전하지 말고 다른 것도 섞어서 전하라고 해요.

 

축복이니 은사도 전하라는 거에요.

성화도 전하고 충성 봉사 하라고 강조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전하란 말입니다.

 

결국 적당히 타협해서 교회를 부흥시키고 유지해서 먹고 살아야 되지 않느냐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이해하시겠지요.

왜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하셨는지 알겠지요.

 

마귀는 항상 인정으로 다가옵니다.

상식으로 다가와요.

그래서 성령에 감동을 입지 않으면 십자가 피를 증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는 억지로 믿을 수가 없어요.

의지나 노력으로도 안 돼요.

 

우리가 이렇게라도 십자가 피를 증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기 때문에 이 만큼이라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십자가를 증거하다가 핍박을 받으면 이상하게 기쁨이 생겨요.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라는 것이 믿어진단 말입니다.

 

이는 성령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성령께서 주시는 위로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에게 이 성령의 위로가 끝 날까지 함께 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은 철거가 되어질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나 없음으로 살게 하시고 오직 예수 안에서만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시험이나 환란이나 칼이나 그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이미 영생 안에 들어와 있음을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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