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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강해)27강. 아들에 말을 흘러 듣지 말라 (히 2:1-4)

by coroa 2022. 6. 18.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7강. 아들에 말을 흘러 듣지 말라 (히 2:1-4)

-.정낙원 목사

 

2:1-4절.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 하셨느니라”

 

자식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팔불출처럼 아들 자랑을 하고 싶어 합니다.

히브리서가 시작하면서 아들이야기로 운을 떼는 것도 아들을 자랑하고 싶어서입니다.

 

부모는 자식 자랑하는 재미로 삽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부모 자식 간에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를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이 옛날에는 아들을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그러나 세상 마지막에는 아들로 말씀을 하십니다.

옛날이란 구약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구약은 아들을 보여주기 위한 예고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실상이 왔다고 합니다.

진짜가 왔다고 합니다.

진짜가 왔으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시편 2편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에 포고령을 내립니다.

 

시 2:7-12절.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이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 아들에게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라고 합니다.

만약에 입 맞추지 않으면 철창으로 질그릇을 깨트리듯이 다 부수어 버리겠다고 합니다.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으면 죽인다는 것은 인간들의 죽고 사는 생사화복의 문제를 아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일방적인 통고입니다.

인간들에게 의사를 타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들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늘 그러합니다.

일방통행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맡겼습니다.

그러므로 아들과 상대를 해야 합니다.

아들을 통해서만 아버지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들에 말을 듣는 사람은 곧 아버지 말을 듣는 것이고,

아들에 말을 듣지 않으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인간들과 상대하지 않고 아들하고만 상대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주권이 아버지 중심에서 아들 중심으로 옮겨졌습니다.

 

지난 시간 하나님께서 아들을 위해서 만물을 창조 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고전 8:6절.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만물이 예수로 말미암았다는 말은 예수님 안에 만물이 들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만물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곧 만물을 존재케 하는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화가가 그림을 그립니다.

화가 앞에 놓인 도화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림은 화가의 머릿속에 있습니다.

이제 화가는 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던 그림을 도화지에 하나 둘씩 엿새 동안 다 그려냅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쉬십니다.

 

만물의 창조가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 속에 있던 만물이 하나 둘씩 말씀하시매 생겨납니다.

해도 생기고,

달도 생기고,

땅도 생기고,

나무도 생기고,

짐승도 생기고,

바다 고기도 생겼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만들고는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형상의 본체이십니다.

예수님이 여섯째 날에 오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해 내십니다.

하늘나라에 계시던 참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 세계에 오셔서 피조에 속한 하나님의 아들들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는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아들이 없으면 집이 필요가 없습니다.

집은 아들 때문에 지은 것입니다.

집은 아들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집은 누가 사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집니다.

아들이 그 집에서 살면 그 집은 귀한 집이고,

아들이 그 집에 없으면 집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만약 아들이 죽고 없으면 아버지에게 집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없는 집은 철거를 하십니다.

장차 이 세상이 불타 없어지는 것은 아들이 천국으로 이사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은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에 불 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아들이 있으면 우리도 있고,

아들이 없으면 우리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만물 속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아들과 운명을 같이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만물이 주에게로 나오고 주로 말미암다가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롬 11: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참 재미있는 말이니 잘 들어보세요.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지요.

이건 마치 예수님이 만물을 훅하고 뱉어냈다가 훅하고 다시 빨아들이는 것과 같아요.

마치 두루마리를 펼쳤다가 다시 감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은 아들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만물 속에 있는 모든 인간들도 아들을 위해서 존재케 되는 것입니다.

 

천국도 아들을 위해서 있고,

지옥도 아들을 위해서 있고,

교회도 아들을 위해서 있고,

절간도 아들을 위해서 있어요.

목사도 아들을 위해서 있고,

스님도 아들을 위해서 있고,

귀신도 아들을 위해서 있고,

무당도 아들을 위해서 있어요

 

귀신이나, 무당이나, 절간이나 스님이나 예수님을 위해서 있다고 하니 이상하지요.

그러나 사실이에요.

만물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이 만물의 주가 되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예수를 위하여 창조가 된 자들이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아들)을 위해서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이게 죄에요.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만 것입니다.

 

죄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를 위해 살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아담은 죄인의 조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들은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이 성도를 간섭합니다.

자기가 주인인 자리에서 예수님이 주인이라고 밀고 쳐들어 왔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보좌 하나를 만들더니 예수님을 앉혀 놓은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보좌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곤 이제부터 우리를 간섭하십니다.

넌 너를 위해 살지 말고 예수를 위해서 살라고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내가 왜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반발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럽니다.

 

내가 널 샀거든!

내 살과 피를 주고 널 샀어!

그러니 이제부터 넌 내꺼! 라고 합니다.

넌 이제부터 너의 인생으로 살면 안 되고 나를 위해 살아야 된다고 하십니다.

졸지에 난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이걸 지난 시간에 십자가 안에서 나는 해체 된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자 내 인생을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나를 위한 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나로서 살게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것을 중생 또는 거듭났다고 합니다.

이젠 과거의 내가 아니에요.

내 몸 속에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 살고 있는 또 다른 나는 예수 안에서의 나 입니다.

우리는 그릇입니다.

예수를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질그릇 속에 보배를 담고 있는 자라고 합니다.

 

보배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지 않고 내 속에 담겨져 있는 예수님을 보시고 나를 대하세요.

예수님 때문에 질그릇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그럼 질그릇인 나 중심으로 살아선 안 되겠지요.

보배이신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지요.

 

예수님을 주(主)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은 다 예수님이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신다고 하시면서 그러셨지요.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겠다고 하시지요.

 

요 14: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부모처럼 간섭하겠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간섭하면 인생이 복잡해요.

자식들이 부모를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간섭 때문입니다.

 

부모의 간섭이 없으면 그 자식은 망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가만 두면 망하는 길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이걸 몰라요.

하지만 자식들은 부모가 간섭하면 망해도 내가 망하는 것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짜증을 냅니다.

 

그럼 여러분은 자식들이 이런 말을 하면 그래 알았다 니 마음대로 살아라 합니까?

안 그러지요.

몽둥이를 들고 두들겨 패지요.

이 새끼가 어디서 천지분간도 못하면서 날뛰고 있어!

그러면서 오뉴월 개 패듯이 패잖아요.

 

그래서 성경은 자식을 초달하지 않는 자는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라 했어요.

 

잠 13:24절.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자식에게 매질을 안 하는 것은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에요.

자식의 잘못된 것을 방치하는 사람은 부모가 아니란 말입니다.

진짜 부모는 근실히 징계한다고 하잖아요.

근실히 라는 말은 밤이나 낮이나 늘 잔소리 한다는 말입니다.

자나 깨나 잔소리 해 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섭하고 몽둥이를 들고 두들겨 패는 것을 “사랑”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전혀 다르지요.

우린 이런 사랑을 원치 않아요.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뜻대로 다스리지 않고 우리가 반발을 하든 개의치 않고 하나님 뜻대로 밀어붙이십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부모가 되어서 우리 안에 와 계세요.

근실히 징계하시려고,

예수님께서 너무도 근실히 징계하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에게 자식이 성공하는 길로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이 사랑이에요.

성도를 세상에서 망하게 하는 길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땅을 떠나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너의 본적지는 땅이 아니고 하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살라고 합니다.

짐을 가볍게 하고 살라고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너무 정(情)을 주지 말라고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고 망해요.

 

12제자가 그랬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고,

사도 바울이 그랬어요.

아주 처절할 정도로 망했어요.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의 인생을 만물의 찌끼와 같다고 하였어요.

 

성경에서 하나님 손에 붙잡혀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없어요.

복음 전하면 하나님께서 원수도 물리치고 편안하게 보호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건 우리 생각입니다.

 

실제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요.

원수들이 더 많이 일어나고 주변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게 되어요.

교회에서 복음 전하면 교인이 오는 게 아니고 있던 교인도 떠나고 어려워져요.

벌떼 같이 구름 떼같이 오는 게 아니고 풍선 바람 빠지듯이 다 빠져 나가요.

 

왜 이런 일들을 발생 시키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한 아픔을 체휼케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아픔을 공유해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천국 복음 전하다가 미움도 받아 보고 핍박도 받아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이런 수모와 아픔을 당했다는 것을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도록 붙잡아 주지 않으면 안 되어요.

 

하나님께서 붙잡으면 자기중심으로 살지 못하고 아들 중심으로 살도록 끌려 다닙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당하셨던 그 아픔 속으로 밀어 넣어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구조 속으로 빨려 들어가요.

세상은 예수님에게 했던 것처럼 예수쟁이를 대접합니다.

 

저는 “예수쟁이” 라는 말을 무척이나 좋아 합니다.

“쟁이”를 장인이라고 합니다.

쟁이란 전문가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예수 전문가가 되어야 해요.

누가 예수님에 대하여서 물으면 예수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주저함 없이 거침없이 나와야 해요.

 

베드로가 그랬어요.

 

벧전 3: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누구든지 예수에 대하여 묻거든 거침없이 답할 수 있도록 마음에 준비하고 살라고 하잖아요.

한마디로 예수에 관하여서는 박사가 되어야 해요.

 

누가 박사냐!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모두가 박사가 되어요.

보고 만진 것을 증거하는데 어찌 박사가 아니겠어요.

 

예수 믿는 것은 날마다 부딪치는 사건인 것입니다.

믿음은 사건이에요.

만남과 만남의 사건이라니까요.

이런 사건을 경험한 자를 증인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모두가 예수님을 사건으로 만나요.

그래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를 우리 안에서 사건화 시켜요.

삶으로 경험케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 때문에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되어요.

 

신앙 때문에 손해를 보든지,

복음 때문에 욕을 먹든지,

믿음 때문에 아픔을 겪게 되든지,,,

바울의 말을 빌리면 예수 때문에 때로는 우겨쌈을 당하고 때로는 꺼꾸러뜨림을 당하고, 때로는 매도 맞고, 때로는 욕을 먹고, 때로는 미움도 받게 되어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다양한 경험들을 하게 되어 있어요.

성도라면 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미련하고 둔해서 깨닫지 못해서 그래요.

지나고 나면 아! 그때 그래서 그랬구나!

뒤 늦게 깨달아요.

그 때 주님께서 그 사건을 일으켰구나 알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에요.

제 블로그에 “만남 그리고 복음” 이라는 글이 있지요.

이 글이 엄청나게 인터넷으로 널리 펴져 있어요.

그 내용이 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우리교회 집사님 누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간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만나게 해서 복음을 듣게 하고 천국으로 인도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그 글을 보고 저와 그 누님을 만나게 해 준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면서 그 누님이 부럽다고 했어요.

그 누님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인터넷 상으로라도 만난 것이 예수님이 간섭해서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전 우리 블로그에 들어오는 모든 분들은 하나님께서 이끌고 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 피에 복음을 들으라고 하나님께서 이끌고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아하!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간섭했구나! 를 알게 되겠지요.

이제 이런 부분이 민감해 집니다.

이런 부분이 민감해 지면 비로소 범사가 감사가 되어져요.

 

전 과거 율법 아래 있었을 때에는 범사에 감사가 안 되었어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감사임에도 삶 속에서 감사거리를 찾았어요.

그래서 주일이면 감사헌금 봉투에다 이러 저러한 감사 내용을 적어서 내곤 했어요.

 

그런데 복음을 깨닫고 난 후엔 범사가 감사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사고가 난 것도 주께서 하셨기 때문에 감사이고,

병든 것도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기 때문에 감사이고,

핍박을 당해도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것이니 감사이고,

위로를 받아도 예수님 때문에 받는 것이니 범사가 감사한 것이지요.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감사인 것입니다.

모든 게 감사에요.

 

성도는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에 모든 일이 주님께서 간섭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비록 우리가 실수를 해도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려는 일이에요.

성도는 모든 삶이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움직여지게 되어 있어요.

 

성도는 어떤 가수가 부른 노랫말처럼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가 있어!” 라고 해야 하면서 살아야 해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난 없어도 돼!” 가 되어야 해요.

이게 성도가 살아갈 삶에 원리에요.

그러나 머리로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뜻대로 안 되어요.

정답은 알겠는데 정답대로 살아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잘 안돼요.

잘 안되는 게 정상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해줘요.

우리는 늘 예수님의 피 뿌리심에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내가 참으로 배은망덕(背恩忘德)하게 살았구나를 알게 되지요.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 드러나지요.

바로 감사하며 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우리가 원수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무덤덤하게 산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들이에요.

 

왜 그런가요.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중심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가 있어! 로 살지 않잖아요.

우린 항상 날 위해서 예수님이 뭐든지 해 주길 바라잖아요.

 

그러니 우리 신앙은 엉터리인 것입니다.

입술로는 주를 존경하나 마음은 멀어져 있어요.

우리 속에 예수님이 보좌로 앉자 계셔야 하는데!

우리 속엔 내가 보좌에 앉자 예수님을 시다바리로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종으로 부리고 있어요.

 

성도는 이 사실을 아는 자에요.

이 사실이 깨달아지면 화들짝 놀랍니다.

어이쿠! 내가 원수구나!

바로 이런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구나! 를 알게 되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관념처럼 있던 것이 어느 순간 실제로 확 다가와요.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과 내가 하나라는 사실이 믿어지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예수님이 우리 속에 와 계셨지만 우리가 몰랐던 것뿐입니다.

 

이런 사실이 믿어지고 깨달아지면 남의 예수가 아니라 나의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멀리 있는 분이 아니라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 남에게 예수님을 묻지 않고 자기 안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을 말하게 되요.

비로소 “예수님은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 이라는 것이 고백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예수 믿는 것이 흔들리지 않아요.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하는가요.

“흔들리지 말고 떠내려가지 말라” 고 하지요.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처음 시간에 히브리서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신자들을 위해서 써졌다고 했지요.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율법을 안 지킨다고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주의로 흐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율법도 지키고 예수도 믿는 이상한 믿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가 이런 신앙을 다른 복음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어요.

이건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 이외에 다른 것을 섞으면 저주를 받으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지금도 있어요.

이름하여 성화주의에요.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에요.

이런 자들은 예수 믿음에다 자꾸만 뭘 보태려고 해요.

 

제가 왜 성화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기 때문이에요.

성화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을 잘 들어보세요.

그들은 예수님 피를 자랑하지 않아요.

자기의 변화된 모습을 자랑하고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해요.

 

이건 제가 과거 성화주의에 빠져 있을 때 행하여 보았기 때문에 잘 알아요.

성화주의는 율법주의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고 가르치니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신 죽으심이 날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을 나무라지 않아요.

성도라면 착하게 살아야지요.

그러나 착하게 사는 것을 신앙이라고 가르치지 말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착하게 사는 게 하나님 앞에 의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죄인이에요.

죄인의 착함 속에서 하나님이 바라는 선이나 의가 나오지 않아요.

하나님이 바라는 선이나 의는 오직 예수님의 피에서 나와요.

그러므로 교회에선 인간의 행함을 가르치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증거해야 해요.

 

인간의 행위에 포카스를 맞추지 말고 예수의 피에 맞추라는 뜻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려면 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많이 깊이 깨달을수록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복음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 항상 예수님의 대신 죽어 주심에 은혜가 왕 노릇하게 해야 해요.

예수님의 은혜를 가리지 말란 말입니다.

이런 은혜를 가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잘남이에요.

 

오늘 본문은 이런 것을 경고하고 있는 내용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기 피를 무가치하게 돌리려고 하는 자들에게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한마디로 말하면 너 어떻게 구원되었는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라는 말입니다.

누구 때문에 의롭게 되었는지 정신 바짝 차리라는 것입니다.

너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율법을 지켜야 온전해 진다고 하면 그런 소리에 넘어가지 말라는 거예요.

거짓 목사들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천사들의 말을 듣고도 경고하심을 받지 않은 자들의 멸망당한 교훈을 잊지 말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아들은 천사들보다 훨씬 강력한 분이므로 아들의 말을 흘러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사(종)의 말을 듣지 않은 자도 심판을 받았는데,

하물며 주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 말입니다.

 

천사들이 전하여 준 말이란 율법을 말합니다.

옛 언약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말하는 것은 자기 피로 세운 새 언약 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죽음을 헛되게 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얼핏 들으면 구원에서 잘려 나갈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리지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근거로 거짓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공갈을 쳐요.

똑 바로 예수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그러니 죽도록 교회에 충성하라고 강조합니다.

 

교인들은 이런 말씀을 근거로 말하면 꼼짝을 못합니다.

신명기 28장 말씀을 근거로 협박하잖아요.

봐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된다고 하잖아요.

반대로 불순종하면 들어가도 저주 받고, 나가도 저주 받고 저주가 따라 다닌다고 해요.

성경을 들이 밀면서 똑똑히 보라고 하면 교인들은 문자적으로 보면 맞으니 꼼짝을 못해요.

 

그래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여러분 거짓 목사들이 다 성경을 가지고 공갈을 치지 없는 말을 하지 않아요.

성경을 자기중심으로 자기 생각으로 해석을 해요.

그러니 성경이 다른 복음으로 변질되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강도의 소굴이라고 한 것도 제사장들이 하나님 말씀을 전부 자기중심으로 해석하여서 자기 배를 불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목사들이 그래요.

하나님 말씀을 아전인수식으로 풀이해서 목사를 신격화 만들고 있어요.

마치 목사의 말이 하나님의 말이라도 되는 냥 그렇게 가르쳐 놓았어요.

그러니 교인들이 목사에게 대들지 못해요.

저주받을까봐서!

 

이건 교인이 진리에 대하여 무지해서 그래요.

본인이 무지해서 그러는데 누가 말립니까?

무지한 사람의 특징이 뭔 줄 아세요.

고집이 세다는 것입니다.

 

제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수두룩해요.

그래서 아니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요.

제 말을 욕으로 들어요.

그러니 본인이 깨달아야지 다른 방법이 없어요.

깨달을 즈음에는 강도들에게 몽땅 다 털리고 난 뒤가 됩니다.

 

이렇게라도 해서 복음을 깨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복음 듣기는 죽기보다 싫으니 자기를 알아주는 목사를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이제는 안 속는다 하여도 또 속게 되어 있어요.

그 속에 진리의 빛이 없으면 백발백중 다 속아요.

영적으로 소경이면 눈 뻔히 뜨고 속게 되어 있어요.

 

강도들이 성경구절을 갖다 대고 피를 빨아 먹는데 이길 재간이 없어요.

육적으로 성경 말씀을 보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요.

문자적으로 보면 틀리지 않거든요.

그래서 지난 시간 긴 시간에 걸쳐서 성경 보는 법을 알려 드린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성령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한다고!

그러니 그 어떤 성경 해석을 내어 놓는다 하여도 예수님의 새 언약으로 해석되어지지 않으면 다 가짜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다가 망한 사람들이 유대인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한국교회가 유대인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경고를 귀담아 듣는 사람이 없어요.

다 흘러들어요.

마치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등한시 여긴단 말입니다.

 

히브리서 1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아들이다!

아들!

그러니 아들 중심의 신앙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와 상대하지 않고 그 아들과만 상대를 하시느냐 입니다.

우리는 왜 안 되고 그 아들이어야 하느냐 입니다.

이는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자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져 버렸어요.

 

원래 하나님께서 만든 인간은 하나님을 대리하고자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제사장이 되어서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을 보여 주어야 할 자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보여 줄 수가 없는 자가 되고 말았어요.

만물을 다스리려면 하나님 마음으로 다스려야 하는데 인간은 하나님 마음을 잃어버렸어요.

그 속에 마귀의 마음이 들어가 있어요.

 

아담의 후손 중에선 하나님을 보여줄 인간이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라 하지 않고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인간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져 있어야 하는데 범죄한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을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자(人子)”라고 하지요.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원래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도록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만유의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보여 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서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도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에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세상에 공포를 해 주었습니다.

변화 산에서도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감추어져 있어요.

아들이 아니고서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어요.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아들을 거치지 않고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은 반칙이에요.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어요.

반드시 아들을 통해서 오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이 하는 말을 우습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흘러 떠내려가지 않게 하라는 것은 귓등으로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농담으로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문자적으로 들으면 말을 안 들으면 잘라 내는 것처럼 들립니다.

 

3절.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건 잘라 내겠다는 말이 아니고 아들의 말을 들으라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마치 우리가 자식들이 말을 안 들으면 나가서 죽으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자식에게 죽인다고 하는 말은 말을 잘 들으라는 말이지 실제로 죽인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인간은 말 안 들으면 죽는다고 해도 말을 안 들어 먹어요.

왜냐하면! 속에 말을 안 들어 먹는 불순종이라는 죄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은데 자기 안에 또 다른 법이 자리 잡아서 못살게 한다고 탄식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탄식하고 있는 바울의 눈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동시켜 보여준 것입니다.

바울아! 네가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너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잖아!

하나님께서 네가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그 아들을 너 대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 값을 다 치르게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에요.

이게 깨달아지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등한시 여길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우습게 여길 수가 없어진단 말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항의를 해요.

목사님은 왜 성도들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치지 않느냐고 따지듯이 물어요.

분명이 성경에 보면 성령께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책망 한다고 했는데!

왜 죄를 책망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제 설교를 보면 회개가 약하니 회개를 좀 강조하라고 해요?

말씀대로 살도록 강조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죄가 무엇인가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그거야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그럼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게 어떤 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거야 성경에서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문자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무지한 말인가 한번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최초에 범죄하고 난 후 인간에게 명령한 것이 뭡니까?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라는 것이지요.

 

뱀의 머리란? 사단의 권세를 말합니다.

그럼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라고 한 것은 우리더러 뱀의 머리를 깨트리라는 말이 아니지요.

여자의 후손이 와서 깨트려 준다는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뱀의 머리를 깨트릴 수 있을 것 같으면 여자의 후손을 보낸다고 하지 않고 우리 더러 싸워서 깨트리라고 했을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와서 깨트려 준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뱀은 우리가 상대할 놈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린 마귀를 이길 수가 없어요.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이미 실패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 대신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떨어진 하나님 명령이 뭡니까?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라는 것이지요.

만약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뱀과 싸우겠다는 것은 주제파악을 못하는 교만이에요.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뱀과 싸워서 이길 수 있었을 것 같으면 뱀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을 알려 주셨을 것입니다.

뱀과 싸워서 이길 방법을 알려주지 않고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해결 해 주겠다는 말입니다.

 

마귀는 인간보다 한 수 위에 있어요.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 하다라고 하지요.

간교하다는 말은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중에서 뱀이 가장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뱀은 마귀를 말합니다.

가장 지혜롭다는 말은 인간들의 지혜 위에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지혜로는 마귀의 지혜를 이길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마귀는 타락한 천사입니다.

천사는 영적 피조물이에요.

이는 마귀는 피조물 중에서 신과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일컬어 이 세상 신이라고 합니다.

 

중요하니 잘 들으세요.

 

하나님께서 뱀에게 저주했지요.

어떤 저주입니까?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 라고 했습니다.

 

이걸 문자적으로 보면 안 돼요.

세상에 흙을 먹는 뱀은 없어요.

하나님께서 뱀에게 흙을 먹으라고 한 것은 흙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흙이 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하나님께서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범죄한 인간이 흙이란 말입니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그릇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생명과를 먹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 속에 아들의 생명을 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고 한 것입니다.

 

생명과를 먹고 영생 하라는 말은 지금 흙으로 빚어진 인간은 영생하는 인간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래서 생명과를 먹고 영생 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속에 생명을 담지 못하고 선악이라는 죽음을 담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을 담고 있는 인간에게 흙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뱀이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는 그 흙이란 다름 아닌 선악을 담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두 과실을 언약으로 풀어 봅시다.

 

선악과는 먹으면 죽고,

생명과는 먹으면 삽니다.

 

이걸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설명해 보면 어찌 될까요.

 

붙잡으면 죽는 언약이 있고,

붙잡으면 사는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은 율법이고.

새 언약은 믿음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고. 믿음은 살리는 것입니다.

그럼 율법은 선악과가 되고, 믿음은 생명과가 되겠지요.

율법을 붙잡으면 죽고, 믿음을 붙잡으면 사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과 맺은 약속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신명기 28장의 내용이에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아요.

반대로 불순종하면 들어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아요.

 

율법은 누가 대신 지켜 주는 게 없어요.

내가 지켜야 해요.

그러니 율법의 계약 당사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곧 우리 자신입니다.

 

율법은 항상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어제까지 말씀에 순종하고 살다가도 오늘 어기면 죽어야 해요.

율법 아래 있으면 하루하루 숨 죽여가면서 지켜야 해요.

 

갈 3:10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에 깔려 죽는다고 합니다.

“온갖” 이란 말은 모든 말씀이라는 뜻이고,

“항상” 이란 말은 쉴 새 없이란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일점일획이라도 어기지 않고 항상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지킬 인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없어요.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죄인이잖아요.

그러니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치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지금 소경이라는 말입니다.

 

옛 언약은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율법대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줄 알고 율법을 준 것은 율법으로 인간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너희는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오해한 것이에요.

자기 주제도 모르고 지키지도 못할 것을 지키겠다고 덤빈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키려면 그 속에 죄가 없어야 해요.

왜냐하면! 죄인은 지켜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죄 없는 의인이라야 지킬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그 아들을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 없는 아들을 보낸 것입니다.

아들을 보내서 창세전에 천국백성이 될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 내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의 죄 값을 아들에게 대신 치르고 끄집어내라고 보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들이 죄 값으로 대신 죽은 것입니다.

 

어떤 죄값입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값이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죽음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대신 죽어준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자기백성들도 같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죄 값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려 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이에요.

 

무덤은 죄인만 가둘 수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어요.

무덤이 죄 없는 예수님을 가두어 둘 수가 없어서 토해 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자기백성들을 대신 한 죽음이지 예수님의 죽음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죽음이 가둘 수가 없는 분입니다.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이건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가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상식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성령이 임하면 그냥 의심 없이 믿어져요.

믿어지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값을 대신 담당한다는 것을 계약을 맺었어요.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이 파기되었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과 하나님 두 분이서 계약을 맺었어요.

우린 제외 되었어요.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서 계약을 맺었어요.

피로 맺었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맺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 하에선 우리가 뭘 지켜야 할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하고 계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행위로 맺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 언약에서의 신앙은 예수님의 피로서 산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때문에 우리가 산다는 것을 믿는 것이에요.

 

이렇게 되면 아까 저에게 왜 말씀대로 살라고 강조하지 않느냐? 라고 하신 분의 항의가 뭐가 됩니까?

악(惡)이 되지요.

왜 그렇습니까?

새 언약에선 하나님은 우리 행위와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와 맺었기 때문이지요.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옛 언약과는 상관이 없어요.

옛 언약이 뭡니까?

말씀대로 사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신약에서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라고 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럼 성도는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도 되느냐 라는 의문에 쌓이게 되겠지요.

분명히 성경은 수많은 명령을 하고 있잖아요.

이는 말씀이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무슨 일을 하는지 살펴봅시다.

 

히 4:12-16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말씀이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 모든 죄를 고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발가벗기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긍휼의 자리에서 주의 은혜를 사모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명령을 합니다.

그럼 우리는 먼저 그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게 됩니다.

문자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받으면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그 말씀을 우리가 지켜내고자 합니다.

이건 법 아래 있는 자들의 본성입니다.

 

죄인은 자기 몸이 어떤 몸인지를 모르고 있어요

그런데 몸이 막상 말씀을 받고 보니 그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는 탄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성령께서 왜 우리 몸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없는지를 알게 하시고 우리의 눈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아~ 우리 몸이 죄 아래 팔려서 하나님 말씀을 담아 낼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고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케 하셨구나! 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걸 새 언약 신앙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새로운 죄관을 알려 주세요.

옛 언약에서의 죄와 새 언약에서의 죄가 달라지지요.

옛 언약에서의 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이에요.

 

그러나 새 언약에서의 죄는 예수님이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 값으로 대신 죽어 주신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 요구가 완성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죄에요.

왜 예수님의 피를 믿지 않느냐고 책망을 한단 말입니다.

 

옛 언약에서의 죄관과, 새 언약의 죄관이 전혀 다르지요.

죄관만 달라진 것이 아니고, 의관도 달라졌어요.

옛 언약에선 바리새인들처럼 내가 말씀대로 살아서 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세 언약에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의를 믿는 것이에요.

 

새 언약에선 우리가 만들 의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아들에 죽음을 우습게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중심 사상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옛 언약을 완성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구약을 사는 사람들이에요.

구약은 율법이 살아서 추궁을 해요.

이건 마치 주인이 종에게 하루 일감을 주고 저녁 때 따지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한 것입니다.

내 멍에를 매고 배우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음에 쉼을 얻는다고 했어요.

 

예수님의 멍에란?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게 믿어지면 마음에 쉼이 와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담당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쉼을 얻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 안에서 안식한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어요.

십자가는 나를 해체시키는 것이라고 했지요.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했어요.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마귀가 율법을 가지고 따지지 못해요.

왜냐하면! 율법으로 추궁 받던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이에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마귀가 율법으로 참소하지 못해요.

 

마귀가 참소하는 자는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이에요.

예수 밖에 있으면 율법이 살아서 추궁을 해요.

율법의 추궁은 예수 안으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에수 안으로 돌아가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을 볼까요.

 

마 4:17절.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회개를 촉구 할까요?

천국과 회개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에요.

 

회개란? 돌이키는 것입니다.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옛 언약 신앙에서 새 언약 믿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회개라고 해요.

 

새 언약으로 들어오려면 옛 언약으로부터 단절이 있어야 하겠지요.

내가 말씀대로 살아야겠다는 것으로부터 단절하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신 것으로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는 것은 이제 아들이 왔으니 율법 아래 있지 말고 아들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아들을 믿으라는 말이에요.

아들을 믿게 되면 율법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율법에 대하여 죽었어요.

 

갈 2: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한다고 하지요.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는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만 가능해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누구를 받아 줍니까?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만 받아 주지요.

하나님은 율법에 대하여 죽지 않은 자는 받아 줄 수가 없어요.

 

옛 사람이 살아서는 하나님을 못 만나요.

왜냐하면! 옛 사람은 율법이 참소하기 때문이에요.

율법은 저주를 몰고 다니기 때문에 옛 사람은 십자가에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새 사람으로만 만날 수가 있어요.

예수 안에서 만나려니 내 옛 사람은 죽어야지요.

 

천국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자가 가는 곳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자가 가는 곳입니다.

하나님 말씀 지키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빛과 어둠처럼 극과 극이에요.

하나 될 수가 없어요.

 

예수를 믿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의로운 일이라는 신앙을 버려야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예수 믿는 것을 버려야 해요.

 

옛 언약과 새 언약 둘 다 가지고 있을 수가 없어요.

새 언약 안에 들어오면 옛 언약과는 결별을 하고,

옛 언약 안에 있으면 새 언약하곤 상관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첫 마디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백성들을 새 언약 안으로 불러들이겠다는 말입니다.

 

옛 언약에서 새 언약 속으로 들어가려면 옛 언약으로부터의 죽음이 있어야 해요.

옛 언약은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고,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내 대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주신 것이라고 했지요.

그럼 새 언약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나로부터 탈출이 전제가 되어야 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심판을 하라는 것입니다.

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믿으란 말입니다.

난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난 없는 자이지요.

살았으나 산 자가 아니지요.

예수 안에서 산 자이지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모두가 옛 언약 아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새 언약이 생겼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분리시키는 일을 하겠지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로 세상은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인간과, 예수 밖에 있는 인간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는 새 언약 백성이 되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지 않는 자는 옛 언약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새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천국으로 들여보내세요.

 

하지만 예수 밖에 있는 자는 하나에서 열까지 다 따져요.

하나님 말씀을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켰는지 따져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손에 키를 가지고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 3: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누가 분리합니까?

예수님이 하세요.

예수의 피가 있는 자와, 예수의 피가 없는 자로 구분을 해요.

 

어제 YTN 초대석이라는 방송에서 김지하 시인과의 대담하는 것을 잠시 들었습니다.

김지하 시인 그러면 한국에선 지식층에 속한 사람이고 민주화 운동을 한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중간에 들어서 앞에선 무슨 말을 하였는지를 잘 모르겠지만 제가 보는 그 순간에 예수님의 산상 보훈을 이야기 하고 있더라구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약자를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나 여자나 노약자나 비정규직 같이 억압받고 있는 소외계층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중심 사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라고 한다면 왜 성경이 말하는 대로 정치를 하지 않느냐! 라고 욕을 합니다.

이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잘 모르겠지만 예수님을 이런 시각으로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란 뜻입니다.

 

이 사람은 주로 민주화 운동을 했기 때문에 성경도 민중 신학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중 신학이란? 글자 그대로 민중을 위하여 성경을 보는 해석법입니다.

지난 시간 뭐라고 했나요?

성경을 신학으로 보지 말라고 했지요.

신학이라고 하니 마치 목사들에게만 말하는 것 같은데!

 

신학을 일반인에게 말하면 선입견이에요.

자기 생각이에요.

여러분들의 선입견으로 보지 말란 말입니다.

자기생각으로 보지 말란 말입니다.

 

성경은 오직 성령으로만 보아야 해요.

왜냐하면! 성경을 성령이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이해하게 되어요.

 

요일 2:27절.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도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성도 안엔 성령님이 계세요.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깨닫게 해 주세요.

그러니 성경 해석에 있어서 그 어떤 세상의 선생도 필요치 않아요.

 

어떤 설교를 듣든지 어느 목사의 말을 듣더라도 성도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 말이 그리스도의 말인지 아니면 마귀의 말인지 구별해 냅니다.

그리스도의 말이면 아멘으로 듣고 한 형제로서 사귐을 갖게 되고,

그리스도의 말이 아니면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분별을 해서 멀리하게 합니다.

 

이런 상태를 제가 핏줄이 당긴다고 했어요.

예수 안에선 생면부지 처음 대하는 사람이라도 이상하게 알아봐요.

각자 안에 있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사귐을 갖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합니다.

관심사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그래서 바울도 자신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하기로 작정을 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여자의 후손으로 보낸 것은 뱀의 머리를 깨트리기 위함이에요.

즉 예수님은 죄를 없이 하려고 온 것입니다.

가난한 자 억눌린 자를 해방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려고 왔으면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 시켜 주어야 했어요.

유대인들의 소원이 로마로부터 해방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베데스다 못가에 수많은 사람들을 다 고쳐 주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가에 38년 된 병자 하나만 고쳐 주었어요.

이는 예수님의 오심이 병 고침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복음이 가난한 자 억눌린 자를 해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면 12 제자들이나 사도 바울도 사회 개혁을 외치고 노예 해방을 부르짖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종으로 부름을 받았느냐 그대로 있으라고 했어요.

종이면 어떻고 자유자면 어떻습니까?

예수 안에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구원 받았으면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종으로 살면서도 예수 안에서 구원 받았다는 것을 알면 감사하게 살 수가 있어요.

그러니 비정규직이라고 해서 불행하고 정규직이라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자라고 행복하고 가난하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죄이지 세상에서에의 환경이 아닙니다.

거지 나사로는 거지로 일평생 살아도 천국에 갔어요.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갔다는 것은 거지로 살면서 감사하게 살았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김지하 시인같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전부 자기 눈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가 어둠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성경을 보지 않는 자는 전부가 다 가짜들입니다.

아무리 좋은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사람을 홀린다 하여도 사단의 종입니다.

 

설교를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동의를 구할 필요도 없어요.

사실이 이렇다 라는 것만 선포하면 되어요.

그러면 한 성령을 마신 사람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다른 영을 받은 자는 적개심을 품어요.

그래서 천국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엔 반드시 심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마귀는 다른 복음으로 진리를 훼손하였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지 않는 것은 전부 다른 복음이에요.

복음은 우리를 잘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를 세상에서 행복하게 해 주는 것도 아니에요.

오로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해 주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에요.

우리 육신이 연약하여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이는 죄 없는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정하게 하였다는 것이에요.

 

이게 복음이에요.

이 사실을 증거하라고 성령을 보내셨어요.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려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셨어요.

 

이 사실이 믿어지고 아멘으로 와 닿으면 한 성령을 마신 형제입니다.

믿어지지 않고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형제가 아니에요.

억지로 한 형제가 되려고 할 필요도 없어요.

괜히 같은 형제도 아닌 사람 붙들고 형제 되자고 스토킹 할 이유가 없어요.

 

나와 다른 영을 마신 사람이구나 생각하면 문제 될 것이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은 억지로 믿어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핏줄은 당긴다니까요.

 

제자들을 보내면서 억지로 제자 삼으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느 동네에 가든지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의 평안을 전하라고 했어요.

이는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영접 하는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자기 고집대로 살게 되어 있어요.

자기 안에 영이 그렇게 살도록 주장하기 때문이에요.

 

여기가 영혼에 안식을 얻는 곳이라 생각되시면 마음껏 먹고 마시면 되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주는 그 풍성한 은혜에 취하여 감사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신앙생활은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하나님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가야해요.

 

앞선 시간에 뭐라고 했나요?

만물이 주를 위해서 났다고 했잖아요.

그런 나 나 내 자식도 주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기 위해서 혈과 육으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가정처럼 부모가 천국 백성으로 선택 받고 자녀가 아닐 수 있어요.

아니면 반대로 자식은 천국 백성으로 선택받고 부모가 아닐 수도 있어요.

아니면 다 천국 백성으로 선택받거나 다 아닐 수도 있어요.

 

이건 하나님 마음이에요.

우리기 이래라 저래라 할 성질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 백성으로 선택을 하였으면 그 어떤 것으로도 탈락되지 않아요.

이게 언약의 특징이에요.

이는 하나님 말씀 자체가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매 만물이 생겼지요.

하나님이 새가 있으라 하면 새가 생기고, 물고기가 있으라 그러면 물고기가 생겼잖아요.

그럼 하나님 말씀 그 자체가 곧 새가 되고 물고기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되기 때문이에요.

 

이처럼 야! 정낙원이 너 천국으로 가! 그러면 전 꼼짝 없이 천국에 가야만 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에요.

아브라함에게 너 복의 조상이 돼!

그러면 끝이에요.

아브라함은 복의 조상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들이 약속한 것을 흘러 듣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했으면 그것으로 이미 종결 되었으니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으면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너 왜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았어 따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말씀으로부터 지켜주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우습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들 눈에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허황된 이야기로 들리느냐?

그렇게 우습게 여겨질 예수님의 피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그 누가 너희들을 꾀거나 협박하고 공갈을 친다고 하여도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긴 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모두가 아들을 우습게 여기지 말라는 뜻에서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생명처럼 여기고 그 안에서 안식하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이기게 해 준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님의 피만 자랑하고 증거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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